[편집부] 미운오리새끼 신드롬에 걸린 그리스도인

이달의 초점


미운오리새끼 신드롬에 걸린 그리스도인


미운 오리새끼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백조인 자신의 정체성(identity)를 알지 못한채, 자신의 외모에 대해 낙망하다가 언젠가 백조가 된다는 동화이다. 어릴적, 이 동화를 읽으며 미운 오리새끼가 스스로의 실체를 알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워했던 기억들이 아마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수년간 예수님을 부인하다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을 가끔 본다. 그리고 그들이 처음 경험하는 주위의 ‘선배’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눈에 천사와 같이 보이기 십상이다. 도무지 옛 부대에 담을 수 없는 끓어오르는 거룩에의 열망을 가졌으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거룩한 것인지 잘 모르는 탓에 좌충우돌 주변의 선배 그리스도인들을 따라하면서 ‘크리스천 문화’와 ‘교회생활’에 조금씩 익숙해져 간다.


그러다가 언젠가, 주변의 ‘선배’ 그리스도인들이 가지는 성품과 삶의 기준들이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삶의 기준이나 성품의 기준과 너무나도 큰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이들은 깊은 혼란에 빠진다. 그럴 때 보통 이들이 듣게 되는 ‘충고’는 ‘사람의 불완전함으로 인해 시험받지 말라’는 것이다. 옳은 말이다. 진정으로 사람의 불완전함으로 인해 시험을 받는 것을 주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이러한 충고가 그리스도인의 거룩함에 대한 기준을 낮추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경우 각종 수뢰, 비리 사건이 터질 때 마다 연루된 것으로 나오는 집사, 장로들. 자신 부부의 포르노 테이프를 판매하다가 적발된 목사 부부. 자신의 아들에게 담임 목사직을 승계하는 제왕적 ‘당회장’들. 미국에서도 심심치 않게 들리는 목사들의 성적 부정 문제. 공개적으로 그리스도인임을 밝히면서도 전혀 비복음적인 대내외 정책을 펴는 미국의 정치인들.


지나치게 먼 곳(?)에서 예를 들어 피부와 와 닿질 않는가?


그렇다면 이런 것들은 어떤가.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면서도 포르노 사이트를 기웃거리는 어느 성경공부 조장, 매일 아침 QT를 하면서도 직장, 승진, 성공 등 개인의 이익(interest)이 걸린 일이라면 복음과 무관하게 눈을 반짝이며 달려드는 어느 집사님, 매일 아침 ‘주여, 주여’ 하면서 새벽기도를 하지만 자신 자녀의 음악대학 입학을 위해서는 입시 담당관 교수에서 돈 봉투를 내미는 한 권사님, 자기 자녀의 결혼 상대로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나 재정적 안정성을 복음적 가치보다 우선에 두며 심지어는 택일을 위해 점집에 찾아가는 장로님.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도 그저 ‘사람의 연약함’에만 탓을 할 것인가. “남들도 다 그러는데” “성경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알지만 실제로 이 세상에서 살기 위해선 어쩔수 없지” “우리교회 장로님들도 그러는데” 라며 초신자들에게 한수 가르칠 것인가.


분명 성경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나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이 이야기하는 예(example)라면 충분히 그들의 삶을 완전히 뒤집을 합당한 근거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불행히도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으로 삶의 기준을 삼는 사람들을 찾기가 의외로(!) 그리스도인 가운데에서도 쉽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와 같이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로서 우리와 같은 복음을 믿었던 사람들의 예를 찾아보자.


박해가 아주 심했던 것으로 알려진 로마시대. ‘고문을 당하며 죽음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주라 고백하며, 부서져 너덜거리는 육체가 영과 분리되려 하는 때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받는 것 보다 더 영광스럽고 축복받는 일이 어디 있으랴!’ 라며 당당하게 순교하였던 사람들은 우리와 같은 복음을 믿는 바로 우리 같은 사람들이었다.
명문 휘튼대학을 졸업한 후 젊은 나이에 에쿠아도르의 원주민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이 지킬 수 없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을 남긴 짐 엘리옷도 우리와 같은 성경을 읽었던 사람이었다.
잠깐의 타협으로 신앙의 양심을 조금만 양보하면 될 것을 꿋꿋이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가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은 우리와 같이 한국말로 하나님을 찬양했던 사람이었다.
자신을 죽인 사람들 양아들로 삼은 ‘새상이 감당하지 못할’ 사랑을 보여주신 손양원 목사님도 우리와 똑같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 사람들이었다.


이제, 우리 주변에서 다음과 같은 그리스도인의 이야기들을 편만하게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부정을 저지르는 직장의 사업 방침에 반대하다가 왕따를 당한 회사원, 자신의 연구업적을 부풀리지 않고 정직하게 이야기했다가 교수 임용에 탈락한 포스트 닥(post-doc), 미국 최고의 학교에서 입학허가(admission)을 받고도 비자 서류를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작성했다가 비자를 거부당해 유학을 포기한 학생 등등…


언제까지 우리들은 하늘의 별들과 같은 믿음의 선조들을, 그저 하늘을 나는 멋진 백조를 바라보는 미운 오리 새끼가 되어 바라보아야만 할 것인가. 언제까지 우리가 끊을 수 있는 죄의 고리들을 ‘인간의 연약함’이라는 핑계 뒤에 감추어두고 있을 것인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하라고 하신 명백한 명령을 언제까지 ‘아직은 부족합니다’는 거짓된 겸손으로 가려둘 것인가.

[무명의 형제] 정직훈련

이달의 초점


정직훈련


하나님은 ‘정직훈련’으로 나를 초대하시는데, 두 분의 신앙선배들을 사용하셨다.


그 당시 신학 대학원을 다니고 계셨던 한 전도사님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나는 이 ‘정직훈련’에 대한 첫 초청장을 받은 셈이다. 그 분이 한 대기업 회사를 다니고 있었고, 예수님을 영접한지 채 몇 년이 되지 않은 때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던 중에 정직할 것에 대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자기가 얼마나 거짓말을 자주 하고 정직하지 못한지를 생각해 본 후에 말씀에 순종해서 살기로 작정을 했다. 즉, 다음날부터 어떤 상황에서든지,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건 간에, 거짓말을 한 바로 그 순간 말을 멈추고 기도하기로 결심을 했다. 거기에는 아주 사소하고 작은 거짓말, 소위 말하는 하얀 거짓말, 그리고 필요치 않은데도 심히 과장하는 것까지도 포함하기로 했다. 여러분 같으면 하루에 얼마나 멈추어야만 할 것 같은가? 그 분은 자기가 순간적으로 거짓말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 다음날 25 번 대화를 중단하고 기도했어야만 했다고 한다. 수치감과 당혹감, 자신에 대한 실망과 좌절로 인해, 때로는 대화 중에 주저앉아 무릎을 꿇어야 했고, 때로는 북받쳐 오는 분노와 절망으로 인해 울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화장실로 도망쳐 가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그 다음날도 동일하게 하기로 했다. 여러분 같으면 그 다음날에 몇 번으로 줄일 수 있을 것 같은가? 그는 그 다음날에도 23번이나 대화를 멈추고 기도했어야만 했다고 한다. 내가 개인적으로 충격을 받은 것은 첫날의 25번의 거짓말이 아니라 바로 두 번째 날에 겨우 2번밖에 줄이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순수하게 기도하며 순종하기로 결심을 했다면, 그리고 그런 당황스러운 경험을 하면서까지 자신을 몰아붙여 거짓말을 하지 않기로 결단을 했다면, 나는 그 다음날에는 거짓말 하는 횟수를 최소한 반 이하로 줄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겨우 2번을 줄였다니 ! 지금도 그렇지만 그 얘기를 들었던 당시 나는 인간의 전적 타락한 죄성에 대해 참으로 피상적인 이해를 하고 있었으며 인간의 의지와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있었기에 2번 밖에 줄이지 못했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했으며 충격을 받았던 것 갔다. 지금은 나라도 그렇게 많이 줄이지는 못했을 것을 인정한다. 어쨌든 그 분이 자연스럽게(?) 정직할 수 있게 된 데는 한 달이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습관적으로, 상습적으로 해 오던 거짓말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고 한다. 인간의 죄성이 우리 자신 속에 얼마나 깊이 뿌리 박혀 있었는지를 여실히 드러내 주는 일례라고 생각한다.


그 분의 간증과 나눔을 통해서, 나 자신의 본성인 죄를 이기고 성령님께 순종하며 살기가 얼마나 힘이든지를 깨닫게 되었고 그 때부터 나도 “정직훈련”을 시작했다. 뭐 그 분처럼 할 용기도 자신도 없었고 나름대로 가능하면 정직하기로 결심을 했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첫 번째 해야 할 일은 얼마나 내가 자주 거짓말을 하는지 확인하는 일이었다. 직접 하루동안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나도 그분에 조금도 뒤지지 않게 거짓이 몸에 베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두 번째의 도전은 비슷한 시기에 한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였다. 그 목사님이 신학공부를 하면서 성품 훈련을 할 때, 거짓말을 하거나 자기의 못된 성품이 표출될 때마다 한끼씩 굶기로 했었는데, 처음에는 수도 없이 굶어야만 했었다고 설교 말씀 중에 본인의 경험을 나누며 청년들에게 도전을 하셨다. 그리고 최근의 예로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불법으로 복사해서 쓰고 있었는데, 매번 등록하라는 창을 읽다가는 요긴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삭제했다는 경험을 말씀하셨는데, 그 때 당시는 충격이었던 것이 문제 의식이나 죄책감 없이 누구나 책 복사와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복사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 두 분들을 통해서 예수님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산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이 두 분의 경험과 도전을 통해서 “정직훈련”으로 초대되어 훈련받기 시작한지가 지금은 벌써 8년이란 세월이 지나갔다. 그런데 최근에 나는 다시 한번 이 훈련을 받게 되었고 -물론 평생을 거쳐 받을 훈련이지만- 이 경험을 함께 나누려고 한다. 나는 의공학용 초음파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는데, 지난해 여름에 예상치도 기대치도 못하고 있었던 일이었음에도 좋은 초음파 장비를 빌려서 실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지도교수를 비롯해 몇 사람이 주어진 예산안에서 그보다 훨씬 못한 장비라도 빌리려고 2년 동안 시도하다가 경비와 안전규율 등의 문제로 작년 봄 이후로 포기하고 있었던 중이었는데, 갑작스럽게 지도교수를 통해 35만불이나 되는 아주 좋은 장비를 무료로 2주 동안 빌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임이 분명했다. 장학생(長學生 not 奬學生)을 졸업시키고, 부족한 나를 훈련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와 인도하심이라고 본인은 확신한다. 어쨌든 촉박하게 결정된 일이라 급하게 실험준비를 하고는 그 장비를 2주 동안 최대한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실험을 할 수 있었다. 보통은 돼지 피를 사용해서 실험을 하는데, 실험 결과가 아주 예상한 것 이상으로 좋았다. 몇 년 전에 우리 실험실 석사 학생이 관찰을 했었으나 아직 학회에 보고되지도 않았고, 그때도 역시 짧은 기간에 비교적 좋은 장비를 사용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그때 한번 관찰한 이후로 장비의 한계로 관찰할 수 없었던 아주 재미있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여러 변수를 바꿔가며 실험을 해서 그 현상을 어느정도 까지는 해석하고 그 원인까지도 분석할 수 있는 실험을 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에, 혹시나 하면서 본인의 목 부근의 동맥을 관찰을 해 보았는데, 아주 비슷한 현상이 관찰되었다. 너무나 기쁘고 감격스럽고 흥분이 되었고, 그래서 아무생각 없이 과 실험실 몇 사람들에게 부탁을 해서 같은 현상을 관찰하고 자료를 받아 두었다. 그리고 나서 한 달 동안 기초 자료 분석을 한 후에 학술 발표에 요약문을 제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뒤에 지도교수가 갑자기 사람 관련된 실험을 학회에 발표하려면 학교 쪽에 안전 허가를 받아야 될 것 같으니 알아보라는 것이다. 의공학용 초음파 장비는 이미 안전규율에 따라 제작되고 있고 일반 병원에서도 진단용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가장 안전한 방법중의 하나로 잘 알려져 있기에, 별 문제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구비서류들을 준비하여 허가를 받으려고 자료를 찾아 읽어보니, 모든 사람 관련된 실험은 심지어 설문조사까지도 “반드시” 실험 전에 학교측에서 안전 허가를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몇몇 실험실 사람들의 조언을 받아서 그냥 실험 날짜만 바꾸어 앞으로 할 실험인양 꾸며서 허가를 받고, 그 후에 학회발표를 하면 되겠다고 생각을 해서 그렇게 서류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거리낌이 조금 있기는 했지만, 워낙 안전한 방법이기에 아무 상관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나와 실험실 사람들은 상관이 없었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생각과 계획을 좋아하지 않으셨다. 어떻게 그것을 깨달았는지 그 과정을 얘기하면 다음과 같다.


그 주에 영국에서 유학온 한 크리스찬 친구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우연히 자신의 삶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 전 주 토요일 교회의 한 집회에서 도전을 받아서 운전을 할 때 속도 위반을 하지 않기로 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도 분명 안전을 생각하면 통상 많은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다른 차들을 따라서 대략 최고 속도보다 시속 5마일 정도 빨리 달려야 되는 것을 분명히 알지만, 이것은 안전 문제라기보다는 하나님과 자신과의 약속이기 때문에 비록 덜 안전하더라도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다는 얘기를 하였다. 참 하나님 보시기에 귀한 결심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의 생각이나 방법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못한다는 정도로만 생각하고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그 날 하루 종일 그 생각이 계속해서 떠오르며, 운전과는 상관 없는 내 자신의 안전허가 계획과 연관이 지어지는 것이다. 동시에 마음 한편으로는 그 연관성을 억지로 부인하며 합리화시키고 그냥 묻어두려고 했다.


그런데 더불어 과거에 경험했던 하나님의 ‘정직훈련’이 다시 생각나는 것이다. 전에 말씀드렸던 그 두 분의 도전을 받은 얼마 후에, 계속해서 말씀을 읽고 들을 때거나, 책을 읽을 때 혹은 사람을 만날 때마다 계속해서 ‘정직’이라는 단어가 집요하게 나를 파고들어 피할 수 없이 직면했어야 되었다. 그 때 당시 성경에는 온통 ‘정직’이란 말만 가득 써 있는 듯이 느꼈었는데, 최근에 한번 서치 엔진을 사용해서 세어 보았었는데, 실제로는 170여 번에 걸쳐 정직이란 단어가 반복되어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뒤이어 내가 처음으로 통과해야 했던 정직 훈련의 큰 관문은 바로 인생을 건 일이었다. 그때 다니던 대기업 회사에 사표를 내고 미국의 한 명문 사립대에서 입학허가를 받았었는데, 비자 신청을 준비하던 중에 앞에서 말한 것처럼 도무지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여러 가지 사인을 통해서 결국 하나의 결심을 하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하는 방법대로 통장에 돈을 빌려서 잔고 증명서를 준비해서 제출하는 임시방편이 거짓으로 느껴지게 되었고, 그래서 부모님과 형제들만이 최악의 경우에 보태줄 수 있는 최대한도의 약속된 액수만큼 만을 잔고 증명에 넣어서 서류준비를 했다. 그때 당시 총 마련할 수 있는 부모와 형제들의 통장에 있는 액수를 다 합쳐 보니 충분치는 않았지만 1년 학비와 생활비 정도가 되었고 그러면 될 줄 알았었는데, 여지없이 재정부족으로 비자 거부를 받았다. 그래서 결국은 1년을 기다렸어야 되었는데, 경제적으로 나아진 상황은 없고, 또 회사는 이미 그만둔 상태여서 돌아갈 수도 없고,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앞에는 홍해요 뒤에는 애굽 군대가 쫓아오던 상황처럼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해서, 다른 소망없이 유학갈 것에 대한 분명한 사인을 보내 주셨던 주님만을 기대하며 마치 홍해가 갈라졌던 것처럼 유학의 길을 열어주시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1년이 늦춰지기는 했지만 다시 비자를 받을 수 있었고 이렇게 미국에 오게 되었다. 그런데 그 기다리던 1년 동안 하나님이 참으로 많은 축복을 해 주셨다. 철저히 경제적인 부분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훈련을 할 수 있었고, 어머님이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가시게 되었고, 두 분 형님들이 가장 어려운 시기를 보내게 되었는데 함께 옆에 있어줄 수 있었고, 그리고 또 결국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국비 장학금까지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고난과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할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유익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렇게 생을 걸었던 ‘정직 훈련’을 거쳤던 기억과 그리고 그 과정이 비록 힘들고 어려웠지만 결과적으로 얼마나 큰 유익들이 있었고 그 이후에도 얼마나 많은 복들이 있었는지를 다시 아주 생생하게 기억을 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때까지 그것이 하나님의 사인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한편으로 여러 가지 핑계를 대고 있었다. 그때는 그때고 이번에는 다른 상황이며, 그리고 이것은 모르고 한 일이고 아무 해도 없고 안전한 것이라는 합리화, 나뿐만 아니라 지도교수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등의 핑계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한가지 방법이 떠 올랐다. 지도교수를 찾아가서 상황을 설명하며 동의와 허가사인을 받는다면, 내 책임을 교수한테 어느정도 떠 넘겨서 회피할 수 있고, 또 그러면 나 자신과 하나님께도 받아들여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발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모든 서류들을 날짜를 바꾸어서 준비를 해서 교수를 찾아가려고 하고 있었다. 영악하다 못해 사악하기까지 한 도무지 가능성 없고 구제불능인 내 자신의 모습임에도,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그런 나의 연약함과 무지함을 책망도 없이 또 다른 방법으로 말씀하고 권면 하셨다. 바로 교수를 찾아가려던 그 날에 사전에 예고도 없이 지도교수가 여행을 떠나셨는데, 그것도 해외로 15일씩이나 가신 것이다.


이제는 하나님의 뜻임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고 이쯤 되면 두 손들고 기쁘게 순종할 때도 된 것 같은데, 막상 정직하게 허가 신청을 할 생각을 하니 근심과 걱정이 몰려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만약 허가를 못 받으면 졸업이 늦춰지고, 학회 발표도 취소가 될 텐데, 또 만약 학교 기관에 사실대로 알렸다가 무슨 부당한 처분은 받지 않을까? 그리고 또 더불어 지도교수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을까? 등등의 염려가 몰려오기 시작해서 이번만은 그냥 계획대로 실험 날짜를 바꾸어서 하고 싶은 유혹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날짜를 바꾸어서 논문 하나를 더 내고 싶다는 욕심이 강하게 들기도 하면서,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을 피할 수 있고 간단하고 편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다는 편리함을 이유로 들며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얼마나 세상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또 얼마나 욕심에 사로잡혀 살고 있으며, 편리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세상방법을 좇고 하나님 방법을 택하지 않는지를 어찌 이보다 더 여실히 드러낼 수 있단 말인가? 정말로 몸서리 쳐지게 자기합리화와 자기 본위의 생각을 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았다.


참 좋은 하나님은 이런 나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위로하고 격려하셨다. 그런 다음날 말씀을 묵상하는데, 본문이 신명기 28장 1-14 이었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면 나갈 때나 들어올 때나 복을 주시며 심지어 자손에게까지 복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마주 대하게 되었다. 정말로 하나님은 나에게 순종을 원하시고 그것을 통해서 내가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복을 받게 되며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고 나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순종해서 받을 복이 세상방법을 포기했을 때 잃어버릴 손해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최대의 손실 이래봤자 졸업 조금 늦어지는 것, 최악의 경우 학회 발표 하나를 못하고 논문 1개를 더 쓸 수 없다는 것, 하지만 순종하지 않을 때는 하늘의 영원한 복을 잃게 된다는 간단한 산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몰려오는 염려와 두려움 없이 기도하면서 심지어는 기대하는 마음과 기쁨으로 기꺼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정직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학교 담당자를 만나서 솔직하게 상황을 얘기하였고, 상담을 하니 그래서는 안되지만 즉흥적인 실험이었고 알지 못하고 한 일이기에, 한번만은 실험 후에 허가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해서, 결국에는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올해 초에 드디어 거짓없이 정당한 방법으로 허가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10년에 가깝게 ‘정직훈련’을 해 나오면서 쉽게 빠졌었던 두 가지 오류들을 지적하며 글을 맺으려 한다. 하나님께 이렇게 정직 훈련을 하게 되면서 나보다 더 정직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너무 쉽게 교만해지고 우월해지기 쉽고, 그래서 바리새인의 모습을 갖추고 타인을 판단하기 쉽다는 것이다. 내가 잘해서 하나님께 순종하거나 정직훈련을 받은 것도 아닌데도 그리고 아직도 많은 부분들을 잘 하고 있지 못하면서도 자기 의가 생기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어쩌면 이것은 부정직한 것 이상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모습일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어짜피 완벽할 수 없으니까, 쉽게 포기하고 도전도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려고 하려는 노력조차도 하지 않으며 은혜의 하나님만을 얘기하는 모습이다. 특별히 나를 비롯한 한국 교회의 많은 기독신자들은 이런 모습이 많이 있는 것 같다. 이런 나 자신의 부끄러운 고백과 실수를 통해 이 글을 읽는 분들이 더 이상의 시행착오가 없기를 바라며, 우리 자신의 깊은 죄성과 한계에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열심에 힘입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 각자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하고 온전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영적 성장을 이루어 가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무명의 형제
96년부터 코스타에 참석해 왔으며 현재 펜실베니아 주에서 아내와 함께 쌍둥이 딸을 키우며 공부하고 있다. 원고 마감 직전, 무명으로 이 글을 편집부에 보내왔다.



[함철훈] 광야에서 새해를 바라봅니다

eKOSTA 갤러리


광야에서 새해를 바라봅니다





태평양 큰 바다를 건너 시에라 언덕을 이제 막 넘어온 바람과
더 이상 마를게 없이 메말라 버린 대서양을 건너온 바람이 만나는 곳에서는
수 천년의 숨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전설과 같은 약속이 있습니다.


이 둔덕 저 계곡을 넘어가며 빗살무늬 그려내는 그 허망한 바람소리는
세상의 하늘빛과 땅의 물을 아무리 우려내어도 그 흔한 꽃 한 송이 못 피워내고 있더니만,


어느 날 그 새벽,
하늘을 풀어내는 천둥소리와 땅 속을 뒤흔드는 한 줄기 빛이
손바닥 두께 휘장을 가른 후 그 황무지도 이제껏 꽃을 피워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예비하신 또 다른 2002년 한해를 우리에게 풀어 내시고
꼭 내게 알맞은 하루 하루를 주실 것입니다.


올 첫날 안자 보레고 광야에는 그 때의 모래 바람과 천둥 소리가 어제처럼 그 꽃들을 피어내고 있습니다.


[팽동국] 성도다운 성도의 삶의 모델

eKOSTA 서평


성도다운 성도의 삶의 모델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살 수는 없을까>


새해가 되면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며 하나님 앞에서와 자신 스스로와 때로는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여러 가지 새해 결심도 하고 다짐도 하고 계획을 하는 분이 많으리라 생각된다. 매년 1월에는 새로운 다짐과 결심을 하고 계획을 세우지만, 그것도 해가 가고 나이가 많아질수록 일상적으로 매년 반복되는 그냥 하나의 또 다른 결심이나 계획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면 새해의 계획이나 결심조차 기억하지 못하거나, 혹시 기억한다고 하더라도 그것과는 무관하게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실망했던 여러 번의 아픈 경험으로 더 이상 결심과 계획을 하지 않는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더구나 단조로운 삶을 사는 우리 유학생들에게는 학사 일정에 따라 수동적으로 계획을 세우는 외에 따로 특별한 다짐이나 계획을 갖지 않을 때도 있다. 새해 다짐과 결심, 그리고 계획을 얼마나 잘 지키는 가도 물론 굉장히 중요하지만, 때로는 새해 다짐과 결심이 어떤 것인가에 따라 결심 그 자체로도 중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상적이고 타성적인, 그리고 우리의 좁은 생각과 사고로 제한되거나 현대의 경박한 문화와 신앙으로 형성된 한계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안목과 시야로 하나님 나라와 이 세상의 역사와 문화와 정치와 경제에 영향을 미칠 위대한 결심을 할 수만 있다면 그런 결심 자체가 때로는 우리의 사고와 삶의 방향과 태도를 바꿀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위대하고 탁월한 결심이 있다면 그런 결심은 어떤 것이며,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할 수 있을 것인가 ?


이번 달에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결심들을 하고 그 결과 가장 탁월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결심문과, 일기와 자서전을 모아서 편집하고 번역한 책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살 수 없을까?”를 선정해 보았다. 이 책을 통해서 저와 우리 이코스타 독자들이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새해 다짐과 결심을 훨씬 뛰어넘어, 하나님 앞에서 위대하고 거룩한 결심을 하고 또 그렇게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위대한 일꾼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 책은 18 세기 미국의 제 1차 영적 대각성 시기에 가장 중요한 지도자 역할을 했던 조나단 에드워즈의 일기와 자서전, 그리고 70개의 결심문 등을 모아서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으로, 번역과 편집뿐만 아니라 백금산 목사의 잘 정리된 소개와 분석과 평가가 있는 귀한 책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초대교회 이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설교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안에 붙잡힌 죄인인 인간들”이라는 설교를 통해 1700년대 중반 미국의 제 1차 대부흥운동에 불을 붙였을 뿐 아니라, 미국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목사와 신학자로 알려진 동시에 개인적으로는 철학가, 역사가, 사상가, 심리학자, 심지어 과학자로서의 자질도 갖춘 사람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본서는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청교도들을 알프스 산에 비교하고, 루터와 칼빈을 히말라야 산에 비교할 수 있다면, 조나단 에드워즈는 에베레스트산에 비교하고 싶다”고 하는 마틴 로이드 존스의 글을 인용하면서, 성 어거스틴, 칼빈과 함께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3대 거성의 한 명으로 평가하고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과 사상을, 방대한 어거스틴과 간결하고 명쾌한 칼빈과 비교해서 깊고 심오하다는 특징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중 한 분인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생애와 사역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가 바로 에드워즈의 자서전과 일기와 결심문이라고 바라보고 애정어린 마음으로 소개와 분석과 평가를 하고 있다.


에드워즈의 자서전에서 “나는 모든 면에서 완벽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하는 불타는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복되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면에서 순전하고 달콤하고 복된 복음의 법칙에 따라 살려고 했습니다. 이런 일들에 있어서 진보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갈망했습니다. 그것이 나로 하여금 거룩을 추구하도록 만들었습니다….”라는 부분을 인용하면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삶을 한 마디로 이 지상에서 도달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가장 ‘완벽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열정적인 거룩을 추구’한 삶으로 보며, 그렇기에 우리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자서전과 일기와 결심문 등을 읽으며 참 성도다운 성숙한 성도, 거룩한 성도로서의 신앙성숙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과 이렇게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를 배울 수 있으며 그런 면에서 에드워즈는 삶의 모범을 통해 영적 거룩과 성숙에 먼저 도달해서 시범을 보인 조교와도 같다고 소개한다. 특별히 그는 종말의식을 가지고 시간의 중요성을 인식한 후에 매 순간을 최선을 다해서 시간관리를 하기 위해 여러 가지 구체적인 방법들을 연구하고 모색했는데, 그 결과로 현대의 시간 관리 개념 중에서도 가장 발달된 제 4 세대 시간관리 방식에서나 찾을 수 있는 ‘중요성’과 ‘긴급성’의 개념을 이미 300여년 전에 도입해서 적용했으며, 또 매일, 매주, 매달, 매해 정기적인 평가를 하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안에 있는 죄를 죽이려는 영적 싸움을 하는데, 먹고 마시고 잠자는 본능적 요구를 최소화하며 세상의 부와 편안한 삶에 대한 거부, 끊임없는 회개의 삶을 살면서, 고난과 시련을 아주 성숙한 태도로 대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에드워즈는 지성과 감정과 의지의 조화와 균형을 통해 전인적으로 신앙 성숙을 추구했으며, 성경묵상과 적용, 신학과 교리의 묵상과 탐구, 균형잡힌 독서와 기도와 찬양, 성도와의 교제 등을 통해서 철저하고 지속적인 경건의 습관 뿐 아니라 대화와 언어 생활, 그리고 부모를 포함한 다른 사람과의 관계, 심지어 자연과의 관계를 통해서까지 거룩을 추구한 삶을 살았다고 평가한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18세부터 20세에 걸쳐 하나님 앞에서 70개의 결심문을 작성하고 매일, 매주, 매달, 그리고 매해 그 결심문에 의해 자신의 삶을 점검하면서 평생을 살려고 했는데, 개인적으로 그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63번째의 결심문으로 “어떤 순간에도 모든 측면에서 인격의 어떤 부분이나 어떤 환경 하에서도 언제나 성도다운 참 빛을 비추이며, 탁월하고 사랑스럽게 행동하는 참으로 완벽한 성도가 세상에 단 한 명 있다고 가정할 때, 만일 내가 그 한 사람이 되기 위해 내 힘껏 노력한다면 그렇게 될 수도 있을 것처럼 행동하자”는 결심을 겨우 20살 때에 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나머지 여생을 그렇게 살아간 결과가 바로 개인적인 온전함뿐만 아니라 미국의 한 시대와 역사를 바꾸기까지 했으며, 300년이 지난 이 시대에도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꾸준히 많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이 조나단 에드워즈는 어린 나이부터 종말론적 삶과 시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한 순간이라도 최선을 다해서 살려고 무던히도 애쓴 흔적이 그의 일기를 통해서 역력히 느껴지고 있으며, 그 구체적 방법을 소식(小食)을 하여 식사시간을 줄이고 소화에 무리가 없게 하여 식곤증을 없애며, 또한 여행 중에 시간을 최선을 다해서 사용하기 위해 고민하며, 구체적으로 그 방법들까지 간구 했던 것도 참으로 인상적이다. 그 위대한 영의 사람 에드워즈가 했던 구체적 고민 중 하나가 바로 음식이었다는 것은, 풍요의 삶을 즐기고 누리며 탐욕과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조장하기까지 하는 이 시대에 많은 시사를 해 준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2000년 마지막 날 밤에 우연히 이 책을 접하게 되었으며, 2001년 정월 초하루에 완독하고 묵상했으며 그래서 도전받고 영감 받아서, 구체적으로 새로운 한 해를 계획하고 결심하고 다짐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안내 역할을 해 준 책이다. 지난해뿐만 아니라 올해와 앞으로 내 생애 계속해서 매년 새해마다 이 책을 통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삶에 도전받고 그 거룩한 성도를 바라보면서 내 생의 한 해 한 해를 점검하고 계획하고 결심했으면 하는 소원이 있다. 우리 이코스타 독자들도 2002년 새해 첫 달에 이 책을 읽으며 함께 도전받아,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영광스러운 성도답게 거룩하고 온전하게 살기 위해 몸부림치며,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며 그 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헌신들이 있기를 바란다.

예수전도단 홍성건 목사

eKOSTA 인터뷰


예수전도단 홍성건 목사


eKOSTA 제가 알기로는 홍성건 목사님은 처음으로 코스타에 참석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떤 경위로 코스타를 참석하게 되었는지 말씀해 주세요.


홍성건 목사 코스타에 관계하는 사람들 중에 잘 아는 사람이 많이 있고, 여러번 초청을 받았었는데 그 때 마다 시간이 안 맞았어요. 코스타와 같은 기간에 늘 한국에서 예수전도단 대학생 수련회가 있었어요. 지금 이 시간도 사실은 전체 대학생 수련회가 열리고 있는 기간이라구요. 그래서 안된다라고 말했는데, 곽수광 목사가 국제본부를 코디네이트 하면서 작년말에 또 다시 부탁하더라구요. 그래서 그럼 이번에는 가자 하고 왔어요.


eKOSTA 그럼 한국에 예수 전도단 수련회가 있는데도 예수전도단 대표임에도 불구하고 그 집회를 포기하고 이렇게 코스타에 참석하셨단 말씀인가요? 코스타로서는 너무너무 귀하고 고마운 일이군요. 그럼 목사님께서 전해들었던 코스타에 대한 이미지와 직접 와서 보신 후 그 느낌은 어떻게 다른가요?


홍성건 목사 사실 코스타 얘기 들을 때마다 그냥 그런 모임이 있나보다 했었지요. 유학생들을 위한 수련회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막상 와 보니까 훨씬 더 헌신되어 있고, 훨씬 더 소망이 있고, 사회 각 분야의 중요한 사람들이 될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전체가 자원봉사(volunteer)로 움직인다는 것이 참 인상적이었고 그것이 코스타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는 비결이 아닌가 싶습니다. 참 인상이 좋았어요.


예수 전도단 이야기


eKOSTA 코스타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아직 예수 전도단과 홍 목사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아서 예수전도단과 목사님 소개를 좀 해 주시지요.


홍성건 목사 예,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더라구요. 예수전도단 그러면, 사실은 단체의 시작은 한국 안에서, 어떻게 보면 자생적으로 시작되었지요. 그렇지만 예수전도단을 시작하신 분은 미국 선교사였고, 60년대 초에 한국으로 선교를 오신 오대원 선교사님이었어요. 그분이 한국에 와서 사역하시다가 사역의 실패감을 맛보고 상당히 좌절 속에 있다가 안식년으로 미국 땅에 돌아갔지요. 그 당시 미국에서는 Jesus People Movement가 있었어요. 그래서 상당히 많은 히피들, 즉 마약하고 하던 사람들이 돌아온 것이 60년대 말이었지요. 그런 가운데서 성령의 체험을 많이 한 대학생들의 조그만 모임이 있었는데 그분이 그 모임에 참석하게되었어요. 마음이 실패감으로 좌절되어 있다가 성령의 체험을 하고 그런 다음에 한국에 돌아와서는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사역을 하겠다 하면서 시작한 사역이 예수전도단이죠. 이분은 비록 선교사이지만 한국말에 능통하시고 사역하시는 대상들이 한국사람이고 다른 외국 선교사랑은 좀 다른 면이 있었죠. 그 중심에 있는 사람은 청년들이었으며 교파를 초월해서 모였어요. 단순하게 우리의 모임의 중심이 예수를 전하는 단체가 되자고 해서 예수전도단이라고 했죠. 마침 미국 내에서 일어나는 큰 영적 각성운동이 있었고, 그래서 젊은이들 사이에서 불리는 복음성가(Gospel song)가 한국에 들어왔죠. 예수전도단의 모임의 특징이 있다면, 성령, 또 하나는 예배 즉 그 당시 말하는 복음성가를 통한 예배, 그리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고 증거하는 삶, 또 기도 많이 하는 특성이 있지요. 처음에 이런 모임을 하는 것은 한쪽으로는 좋은 반응이 있었어요. 왜냐하면 한국의 청년들이 많이 모이고 새로운 스타일의 예배가 있어서 흥미가 있었고 신선했으니까요.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한국교회에서 아주 어색하고 생소했어요. 그래서 그 당시 화요모임을 가졌었는데 찬양과 기도를 통해서 많은 청년들이 오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한국 교회에서 그 뒤부터 경계하기 시작했지요. 그 모임에 가면 손들고 찬양도 하고 방언도 하고 하니까, 이것이 이단이 아닌가 했었지요. 그렇지만 교회는 못 막았어요. 청년들은 계속 그 모임에 갔기 때문이지요. 근데 감사한 것은, 예수전도단이 원래 멤버쉽이 없으니까 이 청년들이 모였다가 흩어지고, 교회에서 와서 은혜 받고 바로 교회로 들어갔지요. 화요모임이 끝나면 바로 주일에 교회에 돌아갔어요. 초반에는 한국 교회 안에서 아주 작은 예배의 모임이었지만, 알다시피 지금은 많이 바뀌었잖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예수전도단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은 한국 교회를 새롭게 하시는데 도구로 사용하신 것 같아요. 그리고 또 중보기도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을 때 그 당시에 한국 교회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용어였고, 그렇지만 지금은 온 교회가 중보기도 사역을 하고 있고, 예배도 그 당시에는 예수전도단만 하는 예배였지만 지금은 예수전도단보다 더 잘하더라구요.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 다음에 전도, 그때까지만 해도 명동이나 종로나 서울역 등 길가에서 하는 전도는 생소했었어요. 그렇지만 그것도 하나의 흐름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 다음에 성령의 역사로 인해서 점점 반응이 좋아지고 있지요. 예수전도단은 목적 자체가 국내에서 복음을 전하고 해외에 선교하는 목적이지만, 우리가 해야 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한국 교회가 해야 되겠다고 생각해요. 하나님은 우리 단체에게 좋은 선물들을 많이 주셨어요. 교회 입장에서 볼 때 너무 좋은 선물들을 먼저 주셨는데, 그 이유는 교회에 흘러가라고 그렇게 하신 것 같아요. 이러한 것들이 저희 단체의 특징들 이예요. 교회를 섬기고 교회를 힘있게 하는데 저희 단체를 사용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금쯤에는 처음부터 우리를 부르신대로 이제 세계 선교를 감당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해서, 전도에 더 힘쓰고 있습니다. 국내에서 대학생들을 위한 사역이 활발하고 중고등학생들의 청소년 사역 또한 활성화 되고 있어요. 예수전도단의 가장 큰 특징은 제자훈련이고 그것이 한국교회에 큰 영향을 주었죠. 단순한 제자훈련이기 보다는 독특한 훈련이며, 지적 중심의 제자훈련 이라기 보다는 성품훈련과 내적 치유에 중점을 두었던 일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셔서 그러한 흐름으로 흘러가게 하신 것 같아요. 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 그것도 아주 생소하고 뭐 이단 소리도 들었지요. 지금은 또 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으며, 또 다음에 묵상, 그것도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 사람들은 아마도 예수전도단에서 그런 영향을 주었는지를 잘 몰라요. 옛날사람들은 알지요.


저 같은 경우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장로교에서 자라났는데, 여섯 살 때 예수님을 영접하고 또 십대 초반에 헌신했고, 헌신에 대한 표시로 전공과목을 택하고 평생살기 위해서 서강대의 독문과를 들어갔어요. 그 이유는 독일로 유학가서 독일에서 신학을 공부하려고 했어요. 나중에 깨달은 것은 독일 유학 안 가길 참 잘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대학 다니는 동안에 성령 체험을 했어요. 그리고 나서 하나님이 저를 예수전도단에 연결시켜 주었는데, 저는 대학졸업하자마자 지금까지 쭉 예수전도단에서 일하고 있어요. 우리단체가 예수전도단이란 이름으로 쭉 가고 있는데, 그런 중간에 국제 YWAM(Youth with a Mission)에 연결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국제 YWAM의 지도자들인 도이 조우슨, 로렌 커닝햄 그런 성경지도자들이 우리가 초청해서 여러번 와서 강의를 했지요. 그러다 보니까 YM의 예배나 성격이 예수전도단 하고 똑 같아요. 결국은 우리가 하나로 연결되어버렸지요. 그래서 1980년에 국제적으로는 우리가 YWAM으로 쓰고 그래서 국제적으로 YWAM의 한 지부로 알려져 있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YWAM과 예수전도단이 다른 단체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는 않죠. 예수전도단이란 이름을 우리가 많이 써왔고 또 좋은 이름이라서 한국 이름으로는 그 이름 그대로 쓰고 영어로는 YWAM으로 쓰자 해서 한 단체에 두 개의 전혀 다른 의미의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죠.


열방대학


eKOSTA 이번 2001년 코스타의 강사로 하와이 열방대학에서 크리스티 김 교수님이 오셔서 명 강의를 해 주셨는데, 제가 듣기로는 열방대학이 우리나라 제주도에도 생겼다고 들었습니다. 열방대학에 대해서도 소개를 좀 해 주시지요.


홍성건 목사 우리단체가 갖고 있는 가장 큰 특징이 있다면, 복음 전파하는 데에 있어서 효과적이고도 체계적인 훈련을 거쳐서 복음전파 하는 것이예요. 복음전파하는 것이 단지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고 말로 전하는 방법이거나 교회개척 하는 그 정도가 아니라 성경에 말씀하신 대로 그 나라의 성경적 경제의 영역이나, 성경적 교육 분야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total mission을 말하는 거라고 봅니다. 성경에서 total mision을 명하시고 본격적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으므로, 당연히 그 나라를 변화시킬수 있는 각 영역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지, 어떻게 성경적으로 제자를 삼으며 복음전파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것에 대한 연구를 하며 전략을 가지고 그 안으로 들어갈 필요를 느끼게 되었지요. 그러다보니까 각각 그런 분야에 필요한 훈련과정들이 생기게 되었지요. 그래서 이런 훈련과정들을 하나로 묶어서 체계적인 교육과정으로 묶은 것이 열방대학이예요. 어떻게 보면 기독교 대학이라고 말할 수 있겠고, 어떻게 보면 선교를 위한 훈련기관이라고 말할 수 있겠고,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total mission으로서의 선교훈련 기관, 교육훈련, 그것이 열방대학이지요. 처음에 이것이 미국 하와이 주에서 76년인가 78년부터 열방대학이 시작되었어요. 89년도에 한국 YWAM에서도 그런 열방대학 같은 선교훈련 교육기관을 한국 내에서 세우자 결정하고 기도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나서 96년도에 제주도로 그러한 캠퍼스를 선정하고 우리가족이 먼저 내려갔죠. 지난 5년동안 열방대학이 제주 캠퍼스에 계속해서 세워지고 있는(build up) 과정에 있어요.


eKOSTA 그럼 아직도 세워져 가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홍성건 목사 왜냐하면 대학은 건물이 세워졌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열방대학의 statement 가 있는데, “University is not the building, University is a people.” 한국의 어떤 사람들은 대학 세운다 하니까 건물 세운다고 생각해요. 그건 순서가 바뀌는 거예요. 건물은 없어도 사람이 서면 그것이 대학이예요. 제가 대학 한다고 내려간다니까 제게 자꾸 묻는 것이 건물을 생각하고 ‘건물 섰습니까?’ 하는데, 예수님은 건물을 세운 것이 아니라 사람을 세웠지요. 물론 사람을 잘 세우기 위해 필요한 것이 건물인데 그것은 그 다음에 따라와야 하는 거지요. 그래서 건물을 건축하는 것과 사람을 세우는 것을 병행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예수전도단이 돈을 많이 donation 하는 단체도 아니고 또 어떤 돈을 융자받아서 건물 지을 마음도 없어서 사람들이 헌금해 주는 것을 모았다가 건물짖고 하다 보니까, 아직까지 원래 계획(Master plan)에서 하려던 것의 10분의 1 밖에 안되요. 요즘 매일 기도하고 있어요. 열방대학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니까, 하나님께서 건물을 세워 주시도록. 나는 건물을 세우기 위해 fund raising을 못하는 사람이고 기도만 하고 있어요.


성령사역과 사회참여


eKOSTA 사실 성령에 대해서는 총체적이고 균형있는 시각을 갖기가 쉽지 않고 그래서 은사위주이거나, 혹은 능력위주나 열매 위주로만 강조해서 치우치거나 아니면 아예 무시하기 쉬운데 예수전도단은 참 잘 균형을 이루면서도 성령의 역사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은데, 이 성령님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주시지요.


홍성건 목사 사실 크리스찬들의 삶과 교회의 생활가운데서 성령을 빼는 것은 불가능하죠. 그것은 마치 호흡을 하지 않는 사람과 똑 같으니까 말이지요. 예를 들어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리고 나서 거기서 마침표를 찍으셨다면, 그것은 조각품에 지나지 않죠. 흙으로 만든 하나님의 조각작품, 그 다음에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생명이 된지라. 성령께서 사람의 생령을 불어 넣어주신 것 그것과 똑같은 원리이지요. 신약에 가면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120명이 기도하기 시작했잖아요. 그러다가 오순절 날에 성령께서 임하셔서 큰 역사가 시작되었고 교회의 출발을 거기에 보고 있지요. 사도행전 2장 말씀에 말이지요. 그것은 마치 창세기 2장 말씀과의 대칭관계에 있다고 보고 비교할 수 있어요. 처음 2장에서 사람을 흙으로 만드신 후에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생명이 되었다. 그것처럼 120명이 모여 있을 때에 그 자체로는 파워가 없고 그 자체로는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지만, 성령이 임하신 뒤로부터 세상을 바꾸는 교회로 변형된 것이예요. 그 다음부터 사도행전의 전체 역사는 이 교회가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지에 대한 이야기예요.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와 땅 끝이라고 말하는 것은, 복음의 파워가 세속사의 교회와 도시와 나라를 바꿔나가는 것이고, 이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성령의 역사예요. 이 말씀을 사도 바울은 힘으로도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도 되지 아니하며 오직 나의 신으로 된다는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우리가 증인된 삶을 사는 것이예요. 성령님이 없으면 불가능한 거예요. 세상을 바꾸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전략으로는 교회를 세우시고 성령과 교회가 함께 역사해 나가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 성령을 제한한다 하는 것은 교회가 스스로 이 세상에 대한 아무런 영향력을 주지 못한다는 말과 똑같다고 봐요. 박물관에 소장된 교회처럼 모이기만 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만 모여있는 교회 말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세상 밖으로 나가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거기에 성령의 능력이 들어가야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한다면 성령에 대해서 지나치게 오해하지 않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의 은사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까, 잘못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증인된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은사를 주실 수도 있고 파워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또 하나의 방법은 성품이 바뀌어서 삶으로 증거하는 것이지요. 능력은 나타나는데 삶이 엉망이다 하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라고 할 수 없어요. 균형있는 성령의 역사는 성령의 은사가 있고, 성령의 열매가 있고, 은사로 파워가 나오고, 성령의 능력으로 사람의 삶이 바뀌어서 예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성령의 역사는 이렇게 초자연적인 은사를 주시고 또 동시에 우리의 성품이 바뀌어서 이 두 가지가 균형있게 전개되는 것이 일반적인 성령의 역사예요. 옛날에 어떤 사람들은 성령이 충만하면 말씀이 약하고, 말씀이 충만하면 성령에 약하다 했는데, 이것은 이해가 안 되는 말이지요. 왜냐하면 말씀도 성령이 없이는 이해할 수가 없고 따라서 말씀 충만한 것이 성령 충만한 것이지요. 어떤 사람은 성령 받아라 하면 능력 받으라 하는 소리로만 이해하는데, 성령 받으란 말은 인격적인 하나님을 내 삶 가운데 주인으로 모시는 일인 셈입니다.


eKOSTA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은사를 많이 강조하는 오순절파 중에 일부분이 사실 바람직하지 않은 신앙생활을 해 왔다는 것을 거부할 수 없고 또 그런 사람들이 미친 나쁜 영향력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홍성건 목사 사실 오순절 계통에 있는 교회들 중에도 성숙하고 균형있는 신자들이 훨씬 더 많아요. 그런데 영적으로 너무 어린 사람들이 은사에 대해서 너무 강조하고, 그러다보니 은사가 없는 사람들은 마치 2등급 신자처럼 취급하며, 은사는 갖고 있어 그 은사를 강조하다보니 성령께서 삶을 바꿔 나가고 성숙한 성품으로 바꿔 나가는 것을 등한시한 나머지, 은사는 드러나는데 성품이 바뀌지 않아서 관계를 깨뜨려 나가고 다른 사람들을 우습게 평가하는 이런 사람들이 자꾸 나쁜 영향을 미치다 보니까, 결국 성령의 은사운동 자체에까지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것은 아니지요. 정말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이라면 은사를 강조하면서도 삶이 바뀌는 것도 함께 강조해서 균형있게 잘 움직였더라면 충분히 좋은 반응를 받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사실 있어요. 지금은 오순절 안에서도 바뀌고 있어요. 또 장로교도 바뀌구요. 옛날에는 무슨무슨파 해서 오순절이면 오순절, 장로교면 장로교 확실 했었는데, 요즘에는 구분이 별로 없어요. 이제는 성령께 순종하느냐 안 하느냐 이것으로 나뉘어 집니다.


eKOSTA 기독 지성인들 사이에는 성령운동 혹은 성령사역을 많이 하시는 분들이, 물론 개인적인 성품이나 은사들을 강조하시다보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사회 참여를 하지 않거나 등을 돌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꽤 있는 것 같습니다. 사회의 불의나 부정과 부패를 보고도 무관심하거나 대책도 없을뿐더러 반응도 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하기도 하는데, 이런 부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홍성건 목사 성령을 강조하는 사람들만이 사회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은 아닌 것 같고, 보수적인 교파나 정통적인 장로교도 똑 같다고 생각합니다. 이원론적인 생각, 즉 하나님과의 관계는 영적이고 세상과의 관계는 속된 것이다 하는 사고방식에서 비롯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모든 활동들은 다 거룩한 것이고 세상에서의 삶은 속된 것이다 하는 이 개념은 오순절 계통이다 아니다를 떠나서 한국 교회에 상당히 만연되어 있는 잘못된 이해이지요. 저는 이 분야가 제일 관심 있는 분야이고 많이 강조하고 있는 분야인데, 성경에는 처음부터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는 것도 영적인 것이고 세상을 바꿔나가고 참여하는 것도 영적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창세기 1장 말씀부터 땅을 다스리라, 2장에 땅을 경작하라, 12장에 땅을 축복하라, 땅의 모든 것을 축복하라, 마태복음 28장에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등등 이 말씀들은 무엇을 의미하냐 하면, 이 세상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사회에 참여하고, 그러나 사회에 참여하되 성령의 능력으로 참여하며 성경적 원리를 가진 전문가로서 참여해서 하나님이 세상을 바꿔 나가는 대리자로서 하나님이 그 지역을 바꾸었다 라고 말하도록 맡기셨어요. 이원론은 기독교 안에 아주 교묘하게 자리잡은 사상인데 그런 이원론 사상은 당연히 깨뜨려야 하고 하나님과의 거룩한 관계를 발전시켜 나아가야 하며, 또 동시에 세상에 참여해서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것이죠. 이렇게 한다면 이것 또한 거룩한 것이죠. 저는 사회참여의 입장에서 socialism 입장에 있지는 않지만, 성경은 처음부터 세상을 바꾸라고 말하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저는 옛날에 주기도문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어요. 십대 때에 세상사는 것이 힘들고 민감하던 사춘기 때에, ‘이 세상은 너무 살기 힘들고 고통도 많고 슬픔도 많고 또 그리고 공평치 못한 것이 너무 많아서 이 세상은 너무 살기 힘들다’고만 생각했어요. 그래서 주기도문을 읽을 때 주의 나라가 임하소서 ! 왜냐하면 거기에는 그런 것이 없으니까 말이지요. 나는 지금 고통 많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데 빨리 저쪽에 있는 다른 공간에 주의 나라가 임하시면 그리로 들어가야 되겠다는 개념으로 살고 있었지요. 그래서 그런 고백을 했었고, 나중에 주기도문을 묵상하고 연구하면서 성경이 그렇게 얘기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 말씀은 원래 이런 의미이죠. ‘주님, 주님의 나라가 나를 통해서 임하소서, 주님의 뜻이 나를 통하여 이루어 주옵소서’. 그리고서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의탁하고 헌신하면서 자기를 통해서 가는 곳마다 거기에 주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하는 것, 성 프란시스코의 고백처럼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절망이 있는 곳에 소망을, 그런 것이 바로 크리스찬의 사명이에요. 하나님의 나라는 공간적으로 따로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있는 곳이 하나님 나라다. 그것을 다르게 말하면 우리로 말미암아 세상을 바꿔나가라는 이야기예요. 그것은 적극적으로 세상에 참여하는 것을 얘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 주의해야 될 것은 인본주의자들 과는 다른 것이 있는데, 인본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socialist) 들은 내 힘으로, 내 지혜로, 내 열심으로 세상을 바꾸겠다고 얘기하지만,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도우심으로 세상을 바꾸어 나가겠다고 하는 것이 다른 점이지요.


eKOSTA 원론적인 부분은 잘 이해가 되는데요, 가령 예를 들자면, 한국 교회의 세습문제 같은 일이 있을 때, 이성적인 지성인들은 가서 데모도 하고 포럼도 열면서 물리적인 방법까지 사용해서 막으려고 하기도 하면서 교회의 불의나 사회의 불의에 대해서 항거하는 것 같은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예수전도단은 다를 것 같습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홍성건 목사 예수전도단에서는 사회가 불의 하다고 할 때, 첫 번째로 하는 것이 중보기도를 시작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중보기도는 나라를 바꾸는 파워가 있어요.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계와, 산들을 쳐서 부수리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주님 앞에 나가서 이 사회의 불의를 바꿔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이 첫 번째로 해야하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 이시니까요. 그리고 역사를 바꾸는 능력도 하나님 이시니까요. 그리고 두 번째로 이 사회의 공평치 못하고 올바르지 못한 체제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올바르게 접근해서 영향을 줄 것인가 하면서, 주님 말씀하시기를 기다리고 그 가운데 평화적인 방법으로, 올바르게 호소하는 방법으로 항의(appeal)해야 한다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지요. 이 두 가지 방법이 어느 하나 필요치 않은 것이 아니라 둘 다 해야 되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먼저 중보기도 하는 사역을 하면서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하라고 하면 해야 되죠. 예수님께서도 책망하신 적이 있고, 세례요한도 책망한 적이 있으니까, 말씀하시면 우리가 소리(voice)를 높여서 얘기해야 되지요.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해야될 때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 용서하고 사랑하고 민망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면서, 동시에 죄를 미워하면서 불의에 대해서는 용납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면서 해야되는 것이지요. 폭력이나 무력을 사용하면서 세상을 바꾸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고 비폭력적인 평화적인 방법으로 소리를 높이고, 또 한가지는 중보기도하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에 참여하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사실 보면은 해방이후에 역대 대통령의 반 이상이 크리스찬 이었어요. 그리고 국무총리 반 이상이 크리스찬이고, 국무위원 반 이상이 늘 크리스찬이었고, 지난번 국회의원들 중에서도 299 명중에서 자기 입으로 크리스찬이라고 말한 사람이 154 명이었어요. 또 보니까 그때 당시 육해공군 4성 장군이 9명 이었는데, 그 때 8명이 크리스찬이었어요. 기업가, 교육가, 매스컴, 각계 각 층 안에 크리스찬들이 많이 있다구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오히려 데모 성토 대상이 되고 있거든요. 왜 그러냐 하면 이원론 사고가 있으니까 그래요. 비즈니스는 비즈니스이고 믿는 것은 믿는 것이다 뭐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을 적용하는 하는 거지요. 하나님이 우리 스스로에게 길을 주었는데 데모도 좋고 소리를 높이는 것도 좋지만 실제로 참여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권위와 영향력으로 나라를 바꿔야 되는데 그것을 안 하고 있는 거예요. 그것은 우리 책임이지, 정권이나 그 누구의 책임이 아닌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중보기도 하는 일도 있고 목소리를 높이는 일도 있지만, 우리 크리스찬들에게 권위를 주고 능력을 주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역량과 기회를 줄 때에, 정말로 우리가 성경적 방법에 따라 성령의 능력에 의지해 가면서 나라를 변혁시키는 일에 우리가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코스탄들이나 대학생들에게 말하는 것이, 데모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각 방면에 뛰어난 전문가가 되고 그 방면의 독보적인 존재가 되어서, 실제로 각 사회의 전문분야에 들어가서 성령께 의지하면서 자기 힘으로 제도를 고쳐 나가고 자기 힘으로 사회 제도를 바꿔 나가야 된다고 강조하는 거예요.


eKOSTA 이원론 때문에 고지를 점령한 사람들이 있음에도 사회가 바뀌지 않았다는 시각도 있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상부구조의 변화가 하부 구조에 변화를 주는데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는 시각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방법은 하부구조를 변화시키셔서 상부구조까지 바꾸셨던 것 같은데, 이 부분은 어떻게 생각을 하시는지요.


홍성건 목사 저는 양방향에서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성경 말씀에서 보면 풀뿌리 운동에서 시작된 것도 있었지만, 분명 또한 요셉을 세우시고 다윗을 세우시고, 모르드개를 세우시고, 다니엘을 세우시는 것을 보게 되면 하나님은 상류층에도 하나님의 사람들을 두셔서 상부에서 하부로, 또 동시에 거룩하고 경건한 기독교 사상에 의해서 하부에서도 변화가 일어나는 이 두 가지가 함께 병행해서 이루어져야 되는 것이지, 어느 하나를 주장할 수 없다고 봅니다.


eKOSTA 그렇지만 예수님은 가난하고 무식한 어부출신들을 제자로 택하셨고, 또 가난하고 지혜없는 자들을 택하셔서 부자와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겠다고 말씀에도 나와있고,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씀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은 가난한자들과 연약한 자들과 핍박받는 자들을 편애하신다고 까지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더불어 초기 교회사도 보면 로마가 정복된 것은, 몇몇 지도급 계층의 사람들도 신자들이 되었긴 했지만 실제로 그들이 고지를 점령해서 그 영향력으로 로마가 정복되었다기 보다는 그 당시 그야말로 풀뿌리 같은 민중들에게 복음이 편만하게 전해지고 그 복음의 능력으로 사자굴에 던지우면서 까지도 신앙의 절개를 지켰던 수많은 민중들의 힘에 못 이겨서 결국은 지도층과 로마 전체가 바뀐 예를 들면서, 코스타나 혹은 대학생 운동, 혹은 고지론 자체의 원론적이고 태생적인 한계를 지적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홍성건 목사 그 말씀은 단지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보다 복음을 받아들이기 쉽고, 고학력자 보다는 저학력자가 복음을 받기 쉽다는 말씀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교만하고 자만심이 있고 마음에 가난함이 없으니까 복음을 받기 어렵다는 것일 뿐이지, 예수님은 절대로 부자를 무시하고 가난한 사람을 택한 것은 아니잖아요. 사실은 부자도 헌신된 부자라면 얼마나 귀하겠어요. 가난한 사람이지만 가난한 사람이 헌신해서 쓰이면 얼마나 귀하겠어요. 그런데 잘못 되어서 마치 주님께서는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 중심으로만 사셨다고 한다면 말씀을 오해하는 거예요. 주님은 모든 계층을 다 사랑하시고 또 성경 안에도, 사도행전 말씀 가운데 복음이 전파될 때에 높은 위치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에게도 복음이 들어가서 영향을 실제로 주었지요. 이디오피아의 내시 한 사람이 바뀜으로 이디오피아 전체에 영향을 주었던 것처럼 말이지요. 부르조아냐, 프롤레타리아냐 하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예요. 기독교는 계급투쟁 사상도 아니구요. 기독교는 모든 계층을 사랑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을 택해서 사용하시기도 하지만 또한 부자와 지도층의 사람들도 택해서 사용하시기에 우리는 양방향에서 접근을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국악찬양과 문화운동


eKOSTA 계속해서 찬양 사역에 대해서 여쭙고 싶은데요, 특별히 한국의 국악찬양 하면 편견과 오해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국악 찬양은 사탄에게 드려진 음악이기에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합당하지 않다라고 말하는 사역자도 만난 적이 있는데, 그 뿌리는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이원론 사상인 것 같기도 하구요, 일제시대 때 선교사들의 문화 우월주의나 중미 사상의 영향력에서 비롯되어서 국악찬양이 장려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억압 내지는 눌려져 있었던 결과라고 봅니다. 최근 예수전도단에서 부흥 콘서트 팀과 함께 국악찬양에 관심을 갖고 계셔서 새로운 시도들을 하고 계신 것 같은데, 그 이유와 배경을 말씀해 주시지요.


홍성건 목사 제가 아주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주제인데, 요한 계시록 성경말씀에 보면은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시고 믿는 사람들이 주님나라 갈 때에, 각 나라와 족속과 각 백성과 각 방언에 대해서 말했지, 그냥 믿는 무리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물론 믿음 안에서 한국인 미국인이 없겠지만 하나님께서 한국인 되고 미국인 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 안에서 갖는 하나의 아름다움이지요. 마치 스테인레스 글래스를 보면은 각종 다른 색깔과 모양으로 빛을 발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듯이, 또 꽃도 보면 똑같은 꽃이 어디에 있어요? 하나님의 다양성과 일치 속에서 아름다움이 충만한데 나는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이 자랑스럽고, 또 미국 사람은 미국 사람이라는 존중함이 있어야 하고, 아프리카 사람도 다 하나님 사람입니다. 또 말씀에서처럼 하나님이 거주의 한계를 정하시고 에베소서 3장 말씀에는 ‘모든 족속에게 이름주신 하나님 아버지’라고 말씀하셨는데, 각 족속에게 주신 아름다움이 있어요. 그걸 우리는 문화라고 부르죠. 각 족속에게 주신 문화의 아름다움은 서로 다른 색깔도 있고 춤도 있고 노래도 있고, 악기도 있어요. 그런데 그 목적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영광을 드러내게 하는 것이 원래 그 목적이예요. 그러기에 하나님은 각 민족에게 문화의 아름다움을 주신 것이지요. 그런데 원수마귀는 그것을 전부 우상에게로 나아가도록 이끌었어요. 그러다보니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이 있는 춤과 색깔과 노래와 가락이나 악기까지도 너무 많이 우상을 숭배하는데 쓰이다 보니까 결국 우리 민족의 문화 = 우상이라는 식으로 완전히 잘못 이해 된 것이지요. 그 잘못 쓰인 것에 대한 인식과, 그것이 우리 속에 깊이 뿌리 박혀있는 것은 인정하더라도,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이 원래의 목적대로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고 봐요. 저는 마치 사사기에 보면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으로 법궤가 블레셋에게 빼앗겼는데, 빼앗긴 법궤는 회복해야 된다고 봅니다. 법궤가 빼앗긴 것은 영광이 사라진 것인데 하나님의 영광이 법궤를 회복시키는 것처럼 각 나라안에 주신 문화의 아름다움으로 주님을 찬양하게 회복시켜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단지 우리 문화를 바꿔보자 라는 것이 아닌 원래를 회복하자는 거예요. 그래서 사실 주님나라에 우리가 들어갈 때에는 서양 음악과 서양악기로만 들어가지 않아요. 왜냐하면 계시록에 보면 각 민족의 아름다움과 영광으로 들어간다고 했거든요. 그것은 주님께서 각 민족에게 주신 아름다운 문화예요. 그래서 그것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거예요. 옛날에는 기독교화 = 서구화, 기독교의 모든 음악 = 서구 음악 그랬는데, 그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지요. 나는 서구음악과 문화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예요. 그건 그것 자체의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고, 우리음악과 문화의 아름다움으로 찬양하는 것은 당연히 우리가 해야할 일이죠. 그래서 열방대학 내에다가 문화 센터(Cultural center)를 먼저 세웠어요. 중보기도 센타와 함께 두 개를 먼저 세웠는데 그 두 가지가 너무나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거기에 있는 형제들에게 이런 부분들을 도전을 주어서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을 회복해서 주님을 찬송하는 것으로 바꿔야 되겠다 해서 시도를 했습니다. 여전히 반발이 많이 있어요. 그것은 옛날에 무당 푸닥거리 하던 것인데 하면서요. 원래는 그것이 아니었지요. 그것이 회복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제 테잎도 만들었어요. 나는 반응이 꽤 클 줄 알았는데, 아직 크지 않더라구요. 그런데 사실 커야만 됩니다. 그리고 커질 겁니다. 사실 우리 예배의 99%가 서구문화인데, 나는 그것을 무시하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없어요. 나는 국수주의자가(nationalist) 아니고, 크리스찬들은 한국인인 것을 자랑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한국인임을 초월하기도 하죠. 미국을 동경하는 것도 아니구요. 그래서 우리 안에서 이미 자리잡은 서구 음악으로도 찬양을 하면서도 우리에게 이미 주신 고유의 아름다움으로 함께 예배하고 찬양해야겠다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eKOSTA 저도 개인적으로 이쪽 분야에 관심을 조금 가지고 있었는데, 가장 가슴아픈 것은 지금은 한국 가락의 대표적인 아름다운 찬양곡으로 알려진 나운영 선생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그 아름다운 찬양이 곡으로 처음 나왔던 50년대였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것이 그때 과연 찬양으로 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논쟁이 있었던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 편견과 오해에 대해서 얼마나 한심해하며 분개했었는지 모릅니다. 또한 우리가 잘 아는 주기철 목사님이 순교자로만 알려져 있었는데, 사실은 그 분이 우리 가락의 찬양들을 모집하고 잘 정리하고 모았었지만 그 후에 그것이 다 소각되고 상실되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참 마음 아픈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런 편견과 오해가 문화 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최근에까지 없어지지 않고 있기도 하구요, 또 목사님 이전에도 이러한 국악찬양에 대한 시도와 관심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닌데, 워낙 한국 기독교인들의 호응과 인식 부족, 그리고 경제적 어려움과 기독인 전문가가 부족함으로 인해 지금까지는 성공적으로 기독교 음악과 문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목사님은 이것을 어떻게 극복하실 생각이신지요.


홍성건 목사 제가 아주 강조하는 것이 창세기 14장에서 아브라함이 자기 조카 롯을 전쟁 가운데서 회복시켰던 기록이 있잖아요? 돌아오는 길에 아브라함을 두 명의 왕이 마중을 나갔지요. 한 왕은 멜기세덱이고 다른 왕은 소돔 왕이었어요. 그러니 아브라함과 멜기세덱과 소돔왕이 서로 만났는데, 여기서 오늘의 문화 작업의 중요한 문제를 유추할 수 있다고 봐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계시를 받은자, 멜기세덱은 이미 거기 있지만 아브라함이 아는 하나님과 멜기세덱이 아는 하나님은 똑같은 하나님이었거든요. 그리고 소돔 왕은 진리를 왜곡시키는 그런 왕이었죠. 따라서 우리나라에 있는 문화를 100% 다 좋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에요. 우리나라의 문화 속에 둘을 구별해야 되요. 하나는 멜기세덱적 요소와 소돔적 요소를 구별해서 멜기세덱적 요소는 취하고 소돔적 요소는 버려야 되요. 그러면서 강화시키는 것은 아브라함적 요소를 강화시키는 것이예요. 그것이 문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것을 구별해 나가기는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닌데, 그것을 구별해 나가는 것은 성경에 다 있거든요. 아브라함이 기준인 거예요. 한국 문화는 다 좋다고 할 수 없어요. 원래 문화에 소돔적 요소가 들어갔고 그 소돔적 요소는 분리시켜 나가면서 우리 문화의 아름다운 멜기세덱 요소는 일으키고 세워서 드러내야 합니다. 아브라함적 요소가 들어가게 하는 것이 제가 보는 문화 사역인 것이죠. 이것은 문화 작업만 아니라 크리스찬들이 세상을 바꿔나가는데 동일하게 적용 될수 있는 원리이죠. 그래서 아주 강조를 많이 합니다.


부흥과 부흥 콘서트


eKOSTA 예수전도단 하면 부흥 콘서트 팀과 연결을 안 지을 수가 없는데요. 한국에 부흥의 개념을 보편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부흥이 아직 어떤 것인지 정의도 되어 있지 않고 그 개념이 올바로 전달되지도 않기에, 또 부흥주의로 흐를 수 있는 위험 요소도 이러한 흐름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홍 목사님이 생각하는 참된 부흥이란 어떤 것이며, 동시에 이런 위험요소들을 배제하면서 어떻게 하면 참된 부흥을 준비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홍성건 목사 부흥이라고 말할 때 단순히 교인들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과는 관계가 없어요. 그러면 한국에 부흥이 일어났다 하는 시점을 언제로 잡을 수 있을까 하면 저는 그것을 한국의 사회가 바뀌었다하는 시점으로 잡고 있어요. 그래서 부흥(revival)이라고 말할 때 저는 네 개의 단계로 나누는데, 첫 번째는 renewal, 크리스찬 개개인의 회복의 단계이지요, 두 번째는 evangelization, 이것은 교회 공동체의 회복이 일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예요. 세 번째, reformation, 이것은 사회 공동체가 바뀌어 가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그리고 네 번째 mission, 이것은 다른 국가 공동체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러한 것이 원래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부흥의 형태(pattern)였습니다. 개인의 삶이 바뀌고, 개인이 모여있는 교회 공동체가 바뀌고, 그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부흥의 힘(power)이 영향을 주어서 사회와 국가공동체를 바꿔나가고 그래서 범죄 숫자가 줄어든다든지 불의와 부정직이 점점 줄어든다든지 그래서 정직한 사회나 신뢰할 수 있는 사회로 바뀌어 나갈 수 있다든지, 그리고 빛이 있는 밝은 사회로 바뀌어 나가면 한 사회가 바뀌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reformation이지요. 그리고 참다운 부흥이 일어나서 결국에는 다른 족속과 나라에까지 영향을 주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저는 이런 부흥이 늘 일어났었다고 믿어오고 있습니다. 지금은 마지막 때에 이런 부흥이 일어날 것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부흥이 일어나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되지 않겠느냐? 또 한가지 다른 차원으로 보자면 이러한 네 가지 형태(pattern)의 부흥이 일어나기 전에 어떤 준비가 있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데, 세 가지가 있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부흥이 일어나게 해 달라는 기도, 또 하나는 계시가 있었어요. 부흥에 대한 성경적 말씀의 선포가 있었지요. 그리고 세 번째는 노래가 있었어요. 부흥에 대한 간절한 찬양이 있었어요. 기도와 말씀과 노래, 이 세 가지가 부흥이 일어나기 전에 준비작업 이었거든요. 그러다보니까 부흥 컨서트를 일으키게 되었는데, 부흥컨서트는 이 세 가지가 다 있어요. 처음에 이것을 시작하니까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컨서트라고 생각하고 왔지요. 왔다가 충격을 받게 된 것입니다. 자기들은 앉아서 노래를 들을려고만 했는데, 함께 노래도 부르게 하고 함께 기도도 하게 하고 그 다음에 말씀도 선포되어서 주님 앞에 반응도 하게 하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지금까지 본 콘서트하고 전혀 다른 차원인 것이었죠. 이 세 가지의 준비 작업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부흥을 준비할 것인가 하면서 컨서트를 준비했고, 그 컨서트가 진행되어가면서 노래해야 되는데, 그냥 가수들이 부르는 것이 아니고 전체가 함께 주 앞에 간절한 마음으로 노래부르고, 또 간절히 기도하고, 말씀이 선포되어서 계시와 비전의 선포가 있고 그래서 사람들이 부흥에 대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주고 비전을 발견하고 자신의 삶을 헌신하게 하려고 시작한 것이 바로 부흥 컨서트를 여는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였기도 했지요. 그래서 부흥이 일어나게 하는 세력이 있었어요. 두 개의 세력이 있었는데, 하나는 영적 지도자들이었고, 또 하나는 젊은 청년들이었어요. 영적 지도자들은 부흥에 대한 장을 열어주고 도전을 주고 그 다음에 부흥을 주도하는 주체는 청년들이었어요. 마치 큰 파도가 올 때에 서핑(surfing)하는 것과 같이, 부흥을 하나의 파도로 보고 젊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큰 파도가 올 때에 뛰어들어가 서핑을 하는 것처럼 말이죠. 저는 지도자의 한 사람의 입장으로서 청년들에게 큰 파도가 올 때에 서핑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준비시켜주는 작업을 해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면에서 부흥 컨서트를 준비했어요. 단순한 부흥회가 아닌, 정말로 부흥을 준비해야 될 때임을 인식하고, 이러한 역사적(historical)인 연구(research)를 통해서 나온 것이 부흥 컨서트입니다. 하나님이 큰 축복을 하셨지요. 아무리 봐도 우리단체가 잘나서도 아니고 하나님의 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신 것이예요. 그리고 2007년이면 1907년 한국의 대 부흥이 있은지 100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에, 꼭 무슨 100년을 맞는 기념회가 아니지만 또 다른 부흥을 기대하며 기도로 준비하자 하는 것이지요.


eKOSTA 부흥의 단계들에 대해서 얘기해 주셨는데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서는 찰스 피니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어떤 공식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고 하셨고, 그러한 공식화 내지는 인위적인 요소들이 거룩한 부흥을 부흥회 수준으로 타락하게 한 가장 큰 원인이다라고 진단 하셨는데, 그래서 부흥은 전권적인 하나님의 은혜이자 주권이지 사람들이 일으키거나 어떤 운동으로 유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하셨는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홍성건 목사 잘 아시듯이 역사적으로 늘 논쟁이 붙은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의지였어요. 늘 논쟁이 되어 왔음에도 아무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하나 있어요. 하나님의 주권은 아무도 항거할 수 없고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을 당연히 늘 강조해야 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주권을 너무 강조하고 인간의 자발적인 응답에 대해서 너무 무시하고 간과하게 되면 그러면 운명론으로 빠지게 되어 있어요. 예정론은 운명론이랑은 다르거든요. 그런 점에서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면 종교 개혁자들이 실패했어요. 종교개혁자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너무 강조하다가 선교를 안 했다고요. 하나님이 예정하셨다면 구원받을 사람들은 구원하실 것이다 하면서 말이죠. 그건 말이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계획을 세운 주권 안에는 언제든지 자발적인 헌신이 있었던 것이지요. 임의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자발적 헌신 속에, 예를 들어서 호세아 10장 11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 비를 구하라 말씀하시면서 묵은 땅을 기경하라, 자기를 깨뜨리면서 나아가라 라고 말씀하시거든요. 거기 보면 땅을 기경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것이고 거기에 비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이지요. 하나님이 비를 줄테니까 땅을 기경하라고 말씀하셨다면, 그 다음에 비를 내려주시기를 구하면서 땅을 기경하는 일은 우리가 하는 일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두 가지가 함께 협력하기를 원하셨어요. 그렇기 때문에 부흥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부흥이 임할 것을 계시하시기 시작하시고, 그러면 우리는 부흥이 임하기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시작해야하고, 부흥이 임하도록 준비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지요. 그리고 역사하시는 분은 주님이시고요. 그래서 찰스 피니에 대해서 극단적으로 너무 많이 비판하는 것도 위험한 일이예요. 한 쪽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너무 이쪽을 무시하지만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도 모르면서 무조건 그렇게 해 달라고 하며, 인간적이고 인위적인 방법을 쓰는 것도 문제이지요. 그래서 언제든지 전제는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듣고 그 다음엔 순종하는 거지요. 그 때에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이지요. 모세가 홍해를 건널 때에 앞에는 홍해요 뒤에는 애굽 군대가 있을 때에 모세가 막 부르짖고 있었다구요. 그런데 주께서 모세에게 왜 부르짖고만 있는 것이냐? 부르짖지 말고 지팡이로 때려라 하셨는데 그것은 행동(action)이거든요. 말씀하시는 것에 대해 행동을 한 거예요. 말씀하시지 않았는데, 달라고 하면서 행동을 취하면 그것은 억지고 인위적이지만 말씀하신 것에 반응해서 때렸다고 하는 것은 순종이고 믿음입니다. 그것은 차이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부흥에 대해서 인위적이라고만 보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고 준비하게 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며 우리가 할 일을 하는 거예요. 그 패턴은 똑같고 바로 처음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사회 참여도 마찬가지예요. 어떤 사람은 그것을 이원론으로 만들어 버렸지요. 이 세상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만 잘 믿으면 된다. 그것은 위험한 일이지요. 그것은 주권에 대해서 오해한 거예요. 하나님을 잘 믿으면서 세상을 우리가 바꿔야 되요. 누구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고 싶진 않지만 늘 우리는 조심해야 되요.


eKOSTA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를 생각해 보았는데, 부흥에 대한 개념과 이해가 잘못되면 지금보다 조금 좋아진 상태를 그냥 부흥으로 생각하게 되기 쉽고, 그러면 궁극적으로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참된 부흥, 그것이 개인의 부흥이건 교회나 사회 혹은 국가와 세계적인 부흥이건 간에 참된 부흥에 대한 소망이 왜곡되거나 혹은 그러한 영광스럽고 위대한 부흥에 도달하기 전에 거기서 그냥 만족하고 더 이상 기대하지 않고 멈출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한 경고라고 생각하거든요. 사실은 한국 교회에도 현재 ‘부흥’하면 한 세대의 유행이나 바람 혹은 하나의 모토처럼 여겨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냥 그 수준에서 끝나거나, 그냥 그것을 부흥으로 착각할 우려와 조짐들이 있고, 그렇다면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견해와 경고를 주의 깊게 들어야 할 필요도 있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홍성건 목사 인위적인 것이 있으면 그것은 위험하죠. 인위적인 것과 믿음은 차이가 큰 것이지요.


eKOSTA 덧붙여서 여쭙고 싶은 것은 토론토의 blessing 이라던가 플로리다 펜사콜라의 현상 혹은 부흥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신지요.


홍성건 목사 쉬운 문제는 아닌데, 우선 그 결과로 평가해 볼 수가 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토론토 blessing 하면 울부짖는 소리라든지, 거룩한 웃음이라든지 이런 현상으로만 본다면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상당히 있는데, 열매로 본다면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첫사랑이 회복되고 삶이 바뀌기 시작하고 하는 것을 보면 참 감사하게 생각하죠. 그런데 한국에서는 외면적으로 보이는 것만을 따 와서 흉내내려고 하니까 바로 그것이 인위적인 것이지요. 그것에 오는 부작용은 크다고 생각해요. 생명은 없고 껍데기만 가져오다 보니까 비판론이 많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토론토에서 그런 역사가 있었다면, 그것은 그 지역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역사하시고 축복하신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감사한 것이지만 한국에서는 똑 같은 방법으로 역사하실 거라고 볼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곳의 원칙과 원리인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삶이 바뀐 것, 즉 하나님의 권능이 임하시고 주권이 임하신 것, 그것만 옮겨오고 한국은 한국에 맞게 역사하실 기회를 드려야 되는데 자꾸만 눈에 보이는 것만이 원칙이고 방법인 것처럼 알게 되면서 우리에게 어려움이 있는 것 같아요. 펜사콜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역사도 참으로 감사한 일이지요. 요즈음 미국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마약과 알콜이나 성에 대한 범죄가 많이 발생하는데, 거기서는 성령의 강한 능력(power)으로 인해서 바뀌어가고 있거든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거예요. 하나님의 능력이 사망을 파괴하고 생명을 건설하게 하고 사망의 어두움 가운데 빛을 비추는 곳에는 어디든지 가야 되죠. 저는 긍정적으로 보는데, 단지 그것을 외형적으로만 흉내내거나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유학생과 eKOSTA에 하는 당부


eKOSTA 이제 정말 마지막으로 이코스타 독자들, 주로 유학생들을 위해 권하고 싶으신 당부의 말씀을 해 주시지요.


홍성건 목사 날마다 주님앞에 전심으로 나아가는 것을 잊지말고, 그러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부르심이 무엇인지를 각자가 알아서 준비한 후에, 부르심을 따라서 선교사와 똑같은 각오와 소명으로 세상속으로 들어가길 바랍니다. 과학자로 가더라도 선교사가 아프리카로 가는 것과 똑같이 명성과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선교사로서 그 영역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 사업가나 business man 으로서가 아니라 선교사로서 사업계로 들어가서 거기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일, 그런 일에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면서도, 방법은 늘 섬기면서, 겸손하고 희생하면서, 드러나기 보다는 숨어서 하기를 바래요. 그러면서도 중요한 것은 늘 무릎꿇는 삶, 항상 주님을 의지하면서 하시기 바랍니다. 유학생활이니까 당장 수업과 논문이 중요하고 먹고사는 것이 급하기 때문에, 이것이 다 끝나고 먹고사는 것도 안정되고 직업도 정해지면, 그 때부터 열심히 기도하겠습니다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니까, 급할수록 그리고 위기상황에 있을수록 먼저 순서를 잘 정해서 기도를 우선하고 말씀 묵상하고 주님을 간절하게 의지하는 것이 늘 첫째의 중요성(priority), 그리고 두 번째 중요한 것으로 자기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서 하되 그 순서를 바꾸지 말기를 당부합니다.


eKOSTA 장시간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