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총각’ K 형제

eKOSTA 간증


‘연변총각’ K 형제


오늘 제가 어떻게 예수님을 어렵게 생각 하던 대로 부터 믿게 되었는지에 거기에 대해서 잠깐 얘기 드리도록 할께요.


저는 사실 대학 가기 전에도 저보고 뭐 하느님 있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없었고 저보고 교회에 가자는 사람도 없었어요. 주위에 극소수의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고 있었지만 전혀 나하고 관계없는 이상한 사람들이 다니는가 했어요. 그랬댔는데…


이해의 편리를 위해서 저희 학교에 대해서 잠깐 소개 하겠어요. 제가 다니는 연변 과학기술대학은요 미국에 원래 계시던 김 진경 총장님께서 중국에 있던 조선족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워진 그런 대학 이예요. 그래서 대부분은 한국이나 혹은 미국에 계시던 교수님들이고요, 학생들이 저와 같은 중국에 있는 조선족 학생들 한 80%와 한족들 20%로 그래서 한 1300명 정도의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는 곳 이예요. 그래서 저는 사실 대학가기 전까지만 해도 그런 줄 모르고 갔는데 대학가서 그런걸 알게 되었고요. 그래서 대학을 거기 지원하게 된 것은 사실 그 학교에 가면 영어 잘 배울 수 있대서 그래서 지원했습니다.(웃음)


제일처음 대학가서 학부에서 같이 모여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 옆에 교수님이 식사전에 기도를 하더라구요. 그래서 아 이 교수님 예수 믿나 보다 하고 저녁에 침실에 와서 침실에 선배에게 이런 얘기를 했댔어요. “이재용 교수님은 예수 믿나봐요.”그랬더니 선배가 막 웃더니만 “예수 안믿는 사람이 어딨어” 그러더라구요.(웃음) 그래서 너무 당연한걸 물었나 싶어서 ‘ 아 한국사람은 다 예수 믿나부다’ 그래 생각했댔어요 (웃음).


그런데 첨 지내면서 알고보니까 교수님들이 학생들한테 너무 따뜻하게 대해줘요. 다 큰 학생들이 학교와서 다니는데 어린애들처럼 돌보고 너무 극진하게, 전에 받지 못했던 그런 관심들을 주더라구요. 그리고 저희 학교는요 총장님을 비롯해서 모든 교수님들이 학생들하고 한식당에서 줄서서 함께 식사를 해요. 그게 참 너무 이상하게 느껴지더라구요. 그래서 참 너무 그분들이 전에 있었던 그런 학생과 교수관계를 뛰어 넘어서 너무 친한 사이로 그렇게 지내게 되었어요. 모든 교수님들이 다 따뜻하게 대해줬고요, 그래서 참 감사하게 생각하면서도 예수믿는 사람들은 원래 남을 위해서 봉사하기를 좋아하니까 그래서 그분들이 왔나부다 하고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학교에서 학생들 중에서 예수 믿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많더라구요. 그리고 주위에 안 믿던 사람들도 교수님한테 전도받아서 가게 되는데 참 너무 이상하게 생각했댔어요. 그분들이 미국이나 한국 혹은 더 좋은 환경 속에서 돈 잘벌고 잘 살 수 있는데, 여기와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좋은 것 다 버리고 일하시는 모습이 존경스러웠어요. 너무 우러러 보이구요. 그렇지만 그분들처럼 그렇게 예수믿고 그러고 싶지는 않았어요. 왜냐하면 저는 예수 믿으면 돈도 많이 못 버는가 했어요 그분들이 너무 소박하게 살기때문에(웃음). 돈도 많이 못벌고 뭐 나쁜짓 조금만해도 자꾸 가슴이 찔리고(웃음), 좋은 것이라고는 모르겠더라고요. 뭐 옷도 좋은거 입으면 남들 자꾸 눈치 보이고 ‘예수믿는 사람이 뭐 옷도 저래 사치하게 하고 다니는가’ 하는 것 같아서.


그런데 친구들도 가끔 교회 나가는 친구들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저하고 제일 친하게 지내는 친구도 “나도 한번 교회 가봐야 겠어” 하더라고요. “뭐 교회가 니 가는데냐. 그런델 왜가”했는데, 그 친구는 아침에 못 일어나면 저녁에도 가고 뭐 하여튼 예배는 다니더라고요. 건달처럼 그렇게 다니면서 교회 다닌다고 하더라고요. 교수님들도 차츰 지나면서 한 1년쯤 지나면서 교수님들하고 만나서 얘기도 하는 중에 자꾸 하나님 얘기가 나와요. 얘기하다 보면 마지막으로 가면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해. 사람이 믿음이 없이 얼마나 힘들게 사는데”하는 얘기를, 좀처럼 저한텐 이해되지 않는 그런 말씀을 자꾸 하시더라구요. 첨엔 왠지 그게 되게 싫었어요. 그래도 교수님 얘기하는데 딴 대꾸는 못하고 그저 듣고만 있었어요. 듣고 말끝나면 돌아오곤 했는데 그런 과정 중에 저와 친한 친구들도 교수님 그렇게 말하니까 “교회 한번 안 가볼래 한번 가보자” 하는데 딱히 가기가 싫었어요. 그런 데를 왜가나 싶었어요. 이상한 사람들이 가나 싶었어요. 뭐가 그분들이 잘못 착각하고 있지 그걸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그런 생각 하면서 있었는데 한 2학년 땐지 학교 다닌 지 한 1년쯤 되었어요. 침실 선배가 ‘대학부 모임이 있는 데 같이 한번 안 갈래?” 그러더라구요. 친한 선배가 하도 얘기 하길래 거절하기도 그렇고 해서 한번 가봤어요. 대학부 모임이었는데 뭐 찬송 부르고 그런 모임이었어요. 저는 뭐 그런것도 모르고 갔댔는데요. 근데 딱 시작했는데 막 난리가 났어요. 기도하는데 뭐 울고 불고, 학교에서 말도 조용하게 하는 그런 친구들이 정신 나간 것 처럼 막 그러더라구요. 저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한 절반 하다 나왔어요(웃음). 뭐 이상한 사람 다 버리는 곳이라고 해서. 그래서 선배도 따라 나오고, 원래 제 성격을 원래 아니까 뭐 딴 얘기는 안하고 그저 웃더라고요. 첨 이니까 혹시 그럴 수 있다고 하면서. 그러고 나서는, 그담부터는 누가 교회 가자고 해도 안 갔어요. 이상하더라구요. 저는 저는 교수님들이 너무 이상하게 생각 되었드랬어요. 성경에 대해서, 뭐 딴거는 모르지만 그래도 공부 적게 하신분은 아니잖아요. 다 박사까지 공부하시고 했는데 아니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들어서 훅 부니까 생기가 들어가서 사람이 됐대요. 아니 그걸 어떻게 믿을 수가 있어요. 너무 이상하게 생각 되었어요. 뭐 모르는 사람은 모르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교회를 따라간다고 그러지만, 그분들이 모르고 하는 것 같지는 않았어요. 그렇다보니 너무 이상한 것 같다고 생각 했댔는데…


그런과정에 제가 금년 4월에 몸이 자꾸 아프던 차 병원에 가서 진단을 했는데요 대장암이라는 그런 진단을 받았어요. 지금은 제가 너무 담담하게 이야기 하지만, 사실은 되게 힘들었거든요 그때요. 제가 사는 집에 갔다가 집에서 수술 받고 북경으로 항암치료를 받으러 갔댔어요. 항암치료 받으러 북경 가서 제가 교수님한테 알렸어요. ‘결장암이라는 진단 나왔습니다. 잠시는 학교 못가게 될 것 같으니까 교수님 그렇게 알고 계십시요.’ 하고 간단하게 메일 보냈어요. 그러고 한 멏시간 지나니까 제가 집에 있는데 교수님한테 전화가 왔더라구요. 교수님께서 메일을 받아봤더라고 그러시면서 교수님도 아주 괴로워 하시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뭐 위안하는 말로 “뭐 거기 어디 교회 없냐” 이런 얘기를 하시더라구요. “교회 있으면 교회나가봐라 하시더라구요.” 남은 막 아파서 속이 불편한데 막 그런 얘기를 하니까 왠 얘기냐고 아픈데 교회가서 뭐 병이 나아요 그런 얘기 하고 싶었지마는 그런 얘기는 못하고 전화 끊었어요. 그날이 수요일인지 그랬는데요 주말에 절 보러 오시겠다고 하셨어요. 연길에 학교하고 제가 있는 북경하고 비행기로 두시간 거리예요. 그런데 교수님이 오셨어요. 전 교수님이 오기전에 대략 교수님이 왜 오시는 지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교수님하고 저하고 이틀동안 호텔에 같이 묵었덨거든요. 오시자 마자 성경책을 꺼내 드시더니만 거의 밥먹고, 잠자는 시간 빼 놓고 밤늦게까지 계속 성경 얘기만 하시는 거예요. 요한복음에는 무슨말이 있고, 하나님이 너네 아버지고, 하나님이 너한테 뜻이 있길래 너한테 병을 주고 … 그게 무슨 말인지 당체 이해가 안갔어요. “하나님이 너에 대한 귀한 뜻이 있기 때문에 너한테 병을 주는거다. 그러니까 하나님 영접하면 꼭 낫고..” 이런 얘길 하더라구요. 저는 그게 되게 싫었지만 참 너무 멀리서 오신 분한테 뭐라고 얘기는 못하고요 그래서 그냥 듣고만 있었어요. 이틀동안 꼬박 저한테 전도 했어요. 그런데 저는 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었어요. 그런데 실컷 설명하시다가 하나님이 나를 만든 아버지래요, 저보고 영접기도 하라고 하는데 저는 도저히 못하겠더라고요. 저희 아버지 성함이 김**이거든요 한참 얘기 하시다가 “너는 김**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 아들이야 하면서 저보고 승인하래요. 그래서 한참 얘기하시다가 “그래도 너 김** 아들이야?” 하면 저는 “예” 라고밖에 대답 할 수 없었어요.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는거 도저히 승인하기가 싫었어요. 무슨 얘긴지도 몰랐고요. 그래서 이틀만에 주일날 교수님이 돌아 가시게 되었어요 학교에 일도 있고 하시니까 해서 왔댔거든요. 그런데 그때까지 제가 뭐 돌아가는 교수님한테 미안하긴 했지만 하는 수 없었어요. 안믿어 지는 거 믿어진다고 거짓말 할 수도 없었고요. 그래서 가는 교수님한테 “교수님 제가 생각이 못 바뀌어서 그런지 받아 들일 수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러니까 교수님도. 그렇겠지요 기분 되게 서운해 하시고 성나신 것 같아서 “그건 의지로 하는게 아니야” 하시면서 되게 안타까워 하시면서 가시더라구요.


그런 후 한 며칠 지나서 우리 선밴데, 원래 저하고 한 침실에서 지냈고 3학년 위 선배지만 거의 친구처럼 친하게 지낸 선배가 있었어요. 그분도 학교 와서 예수믿었고 북경에서 일하고 계셨어요. 그래 제가 아프다는 소식을 어떻게 듣게 되었어요. 그래서 한번 만나자고 해서 만나게 되었어요. 그래서 뭐 그분도 제성격 아니까요 곧바로 대놓고 교회가자 그런 얘긴 안했지만 와서는 이런 얘길 하더라구요. 그때 막 제 얼굴 보니까 힘들어 하는 거 보이겠지요. 그래서 저보고 “니가 지금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 좋다면 뭔들 못하겠느냐. 너는 세상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믿는데 왜 너는 믿어 보지도 않고 그렇게 일방적으로 반대를 하느냐. 한번 믿기나 해 보고 안 믿어지면 그만둬라.” 그래서 생각한 결과 한번 나가보기로 했어요. 한번 나가보기는 나가보자. 근데 뭐 교회 가서도 뭐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목사님 앞에서 “하나님 은혜가 풍성하십니다” 하는데 그게 무슨말인지 뭐.. 그래서 형식적으로 그저.. 정말 가기가 싫었어요. 믿는사람들이 하나도 더 좋아 보이는 것이 없었어요. 뭐 친구들 절 전도 했지만 전 “넌 뭐 예수 믿어 봤자 나보다 좋은게 뭐가 있느냐”라고 얘기해 가면서 정말 쪼금 만치도 거기 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어요.


그랬댔는데 제가 북경에서 교회 두 번 가보고 셋째주에 여기 미국 오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감리교회 원 박사님(원종수 박사님)께서는 우리 학교에 한번 방문 하시고 교수님들하고 연락이 되어서, 교수님들의 도움받아서 여기서 치료 받게 되었는데요, 그래서 저는 여기 오기 전부터 아마 대략 교회 다니는 분들하고 만날 거라고 생각 했었어요. 그런데 여기 와보니까 웬걸.. 만나는 사람들이라고는 다 교회 다니는 분들이더라고요. 그러고 보 금방와서 저한테 너는 교회 다니나 뭐 그런 얘기 묻지도 않고 “주일날이니까 교회 나와, 마중갈께” 뭐 이러고 해서 교회를 가기 시작 했어요. 그렇지요 뭐, 저는 아는 사람도 한사람도 없고 그저 이런 사람 있다는 주소만 들고 왔거든요. 그래 거절하기가 딱해서 교회 나왔어요. 뭐 가고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할수없이 나왔어요. 그런데 두주째 지나도 뭐 교회가서도 들리는 말도 없었고 그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어요. 참말 가기 싫었지만 그저 겨우 따라 다녔어요.


그랬댔는데. 두주 지나서 제가 코스타를 가게 되었어요. 여러분의 도움으로 또 하나님이 인도하셨는지 등록비도 안내고 등록도 안했는데도 그저 가게 되었어요. 그래서 코스타 가서 여러 교수님들 세미나도 듣고 이러는 과정에 제가 이런말을 한마디 들었어요. 제가 예전에 교수님들이 왜 하나님을 믿게 되었는지 너무 궁금하다 했잖아요? 근데 어느목사님이 이름은 잘 기억이 안나는데 이런 얘길 하시더라구요. “게으른 사람은 자기가 안해서 그렇지 하면 아무거나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진정으로 최선을 다 해 본 사람은 인간 능력의 한계를 안다”는 그런 말씀을 들었어요. 저는 그 얘기가 정말 제 머릿속에 와 닿는 것 같았어요. 사흘날 저녁에 김동호 목사님 저녁설교에 앞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여기 아직도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온 자가 있다면 일어서라고 했어요. 일어 서면 당신께서 영접기도 해 주시겠다고 하시는데 한마디 턱 하고 나니까 드문 드문 일어서는 사람이 있더라구요. 저는 다 믿는 사람만 코스타를 가는 줄 알았는데 저같은 사람도 있더라구요. 그래서 그 목사님이 ..세번 이야기 하셨어요. 세 번 이야기 하실 때 제가 마지막에 일어 났어요. 저는 전에도 그랬다 시피 안 믿어지는 걸, 뭐 어떤 사람들은 안 믿어 지는데 친구가 가자고 해서 일단 믿어 보자고 했다는데 저는 그런게 도무지 이해가 안갔어요. 생각이 없지 않으면, 왜 남이 일단 믿어 보란다고 믿자고 가는지 몰랐어요. 안믿어 져도 억지로 영접기도 해서 믿는다 하는데 그렇게 믿기는 싫었어요. 제가 일단 교회다니는 것도 아파서 다니잖아요. 그저 바라는게 있으니까 교회 가는거잖아요. 저는 시작은 일단 그렇게 했지만 아픈것을 고치는 그런 것을 목적으로 하는 그런 신앙은 가지기가 싫었어요, 그런 신앙으로 기도해봐야 하나님이 들어줄 것 같지도 않았어요. 그렇지만 코스타가서 제가 일어 났을때 이런 결단이 생겼어요. 이제부터 좀 주인다운 그런 태도로 한번 믿어 보자구요. 그래서 일어나서 하느님 앞에 이렇게 기도 했어요. “하느님 아버지 이제부터는 하느님 믿고 따르겠습니다. 정말로 그게 사실이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저에게 믿음을 주십시요”라고 기도 했어요. 그런데 기도하고 나니까 한가지 발견되는게 있었어요. 제가 처음으로 ‘하나님 아버지’라고 불러 봤어요. 저는 뭐 하나님 아버지, 형제 자매, 그런게 되게 싫었거든요. 그리고 그게 무슨 말인지도 몰랐어요. 그리고 학교에 가면 막 등쳐주고 따뜻하게 대해주는 사람들 되게 싫어했거든요, 사람들 유혹할라고 그러는 거라고 생각 했거든요(웃음).


제가 막 전에 한번 대학부 모임을 갔었드랬는데 모 어느 선배가 와서 ‘네가 드디어 나왔구나, 내가 니를 위해 얼마나 기도 했는데’ 하는데 ‘아 난 안믿어요, 안믿는데 그저 한번 나와 봤어요’ 그러면 ‘니가 지금은 싫어 하지만 이담에는 꼭 믿게 될거라’고 모 ‘하나님이 너를 부르신다’니 뭐 이런 얘길 하시더라구요. 그게 되게 싫었댔어요 그런게요. 그런데 제가 처음으로 ‘하나님 아버지’라고 불러 봤어요 그때. 그리고 예배끝나고 나오니까 밖에서 막 뭐 ‘born again’ 했느니 ‘happy birthday’니 하면서 막 축하한다고 사람들이 막 그러더라고요, 저는 그렇게 영접기도 하고 나왔지만 별 다른게 없었어요. 우리 교수님은 뭐 예수님 영접하고 막 실컷 울고 나왔더니 풀이 파릇파릇 하고 하늘이 파랗고 막 그렇다는데 저는 그런것도 없었어요.(웃음) 그래서 이제 태도만 하나 고치고 한번 믿어보자는 그런마음으로 돌아와서 그리고 교회 다니는 과정에 성경공부도 참가하고 앤아버에 있는 한인교회의 모임이란 모임은 다 갔어요. 뭐 다 여러분들이 막 저한테 열심히 잘 알려주고 그랬어요. 그러는 과정중에 차츰 정말 뭐라고 말을 못하는 그런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뭐 성경도 가끔씩 한번 보고 싶은 마음도 생기고요.


그런 과정에 9월달에 제가 여기와서 처음으로 CT scan했거든요. 그래서 첨에는 병 증세가 되게 안 좋았댔어요. 그런데 9월달에 scan해 보고 난 결과가 아주 좋아서 원래 퍼져 있던 암세포도 하나도 안보이고, 원 박사님도 아주 기적이라면 기적이라는 그런 현상이라면서 ‘하나님이 정말로 너를 사랑해서 그러신다’고 그러시더라구요. 저는 그러면서 참 딱 믿어지지는 않았지만 참 감사했어요 하나님한테요. 저는 교수님들이 전한테 하나님이 널 써주시려고 너에게 병을 주신다 하는 얘기가 너무 이해 안갔어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어요. 쓰면 고이 쓰지 병은 왜 줘요. 병도 주면 왜 암 같은거 줘요. 그랬댔는데 제가 여기 와서 얼마 안되서 한국에 있던 같은과 친구한테 이런 메일을 받았어요. ‘…전에도 교수님들이 너무 존경스럽고 우러러 보였지만 너(김 *)를 통해서 정말 그렇게 따뜻한 사랑으로 대해주는 그 교수님들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어. 도대체 무슨힘이 그분들로 하여금 그렇게 열심히 살 수 있게 하는지, 성경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알고 싶어서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저는 그 메일을 보고 참 많은 걸 느꼈어요. ‘아 하나님이 정말 나를 통해서 많은 일을 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리고 참 저는 전에도 그랬다시피 내 머리속에 기적이 안 일어나고 난 절대로 그걸 믿을 수 없다고 생각 했었어요. 그걸 어떻게 믿을수가 있어요? 그랬댔는데 차츰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그러던 데로부터 설마 그럴까, 아 정말 그럴수가 있을까, 설마 그럴수도 있겠다 하는 데로 부터. (웃음) 지금은 아.. 맞아 딱 맞았어. 내가 승인해 이렇게 되었어요. 저는 결코 그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하고 싶어요. 정말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자에게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어요. 그래서 그 가운데 많은 치료 받는 가운데서 정말 진전도 너무 빨리 됐고요, 병치료도 너무 빨리 회복 되었어요. 그래서 치료해주신 의사님도 아주 기뻐 하셨고요, 하나님의 뜻이 여기 있도다 하시면서 참 기뻐 해 주셨어요. 그럴때마다 저는 하나님께 참 감사했어요. 아직 뭐 채 믿어지지 않았지만 정말 확실히 하나님이 제게 뭐가 보여주신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리고 그래서 그때부터 한 몇 달 지나서 이제 원래 계획했던대로 치료 곧 끝나가게 되거든요.


참 그동안… 너무… 저는 원래 참 예수믿는 사람들이 너무 힘들어 보였어요. 왜냐면 아 한번 사는 인생에 왜 그렇게 힘들게 사는지 도대체 몰랐어요. 있는걸 다 즐기고 살아야지 저는 항상 사람은 즐겁게 살아야지 하면서 학교 다닐때 술담배 적지 않게 하고 다녔어요. 공부도 별로 열심히 안했고요. 저는 예수믿는 것이 금욕주의라고 생각했어요. 예수 믿으면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고 그런게 너무 싫었거든요. 그랬댔는데, 저는 기도 하면서 저한테 있는 병치료 해줄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깨끗하게 씻음받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제가 지금 확실하게 말할 순 없지만 정말 마음속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어요. 정말 전에 그런 유혹을 가졌던…제가 그렇게 완고하게 고집하던 것으로부터, 정말 마치 기도하다가 눈물흘려 본적있고요, 찬송가 부르다가 기뻐서 웃어본 적도 있어요. 아까전에 우리 불렀지만 ‘형제의 모습속에’ 라는 노래 제가 되게 좋아 하거든요. 왜냐면 제가 언제 8월달인지 언제 한번 성경공부 하는데 그 찬송가를 보게 되었어요. 찬송가 가사가 이렇잖아요.



‘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와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저는 그 찬송가 가사를 볼 때 우리 학교 교수님들의 얼굴이 떠올랐어요. 참 그분들 속에 보이는 하나님이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요. 그래서 몇 달 6개월째 지나는 가운데 이제는 그렇게 가기 싫던 교회가 습관이 된 것 같아요. 이젠 주일 되면 ‘아 주일날 원래 교회 가는 가보다’ 그렇게 생각되고 가끔은 주중에 주일이 기다려 지기도 해요. 가서사람들도 만나보고 싶고, 예배도 보고 싶고, 찬송가도 같이 부르고 싶고 그런 마음도 생기곤 해요. 그래서 그동안 하나님 믿는 가운데서 치료받으면서 참 마음속에 많은 평안함도 얻었고요, 하나님이 꼭 고쳐 주실 거라는 그런 확신도 가졌어요. 참 요즘은요 ‘내가 왜 암에 걸렸지’하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요 이유가 딱 하나라고 생각되요. 암이 아니고서는 저하고 하나님하고 붙여놓을 건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었다는 확신이 들어요. 이제는 여기서 단련도 받고, 제가 중국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니까 하나님께서 미국에 이런 환경속에 하나님 믿는 사람만 만나게 해주시고 이런 환경속에서 억지로라도 끌어 주시는 그런 환경을 만들어 주신 것 같아요. 그래서 원래는 가기 싫던 교회도 이제는 습관이 된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서 그 6개월이라는 시간이 하나님 절 단련시켜서 돌아가서 영적으로도 굶지 않게끔 하시는 거 같아요.


제가 원래 간증을 해 달라고 했을때 되게 주저 했댔거든요. 왜냐면 저는 간증을 안해본것도 있지만 예전에 누가 저한테 와서 하나님 얘기를 하면 되게 싫어 했댔어요. 그런데 내가 그런 얘길 한다니까 감이 안왔어요. 그래서 주저 했댔는데요, 집에가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하느님 자랑해야 될 것 같아요, 돌아다니면서. 하나님 자랑해야 기도도 잘 들어 주실 것 같고, 기뻐 하실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 어떻게 자랑 잘 했는지 모르지만 들어 주셔서 감사하고요, 여기 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감사 합니다.



K 형제
연변 과학 기술대학 3학년 K모군이 직장암 판정을 받은 후 미국에 치료차 체류하면서 그 기간중에 하나님을 만나게 된 이야기를 치료 후 중국으로 돌아 가기 전(12/16/01)에 나눈 간증문 입니다. 인터뷰의 생생함을 살리기 위해 거의 수정 없이 녹음 내용을 글로 옮겼습니다. 본인의 간곡한 요청에의해 본명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최영기] 교회 밖에서 교회 안으로 들어온 이유

행복한 교회생활


교회 밖에서 교회 안으로 들어온 이유


교회 생활을 하는 데에 도움이 될 글들을 연재해달라는 요청이 eKOSTA에서 들어왔습니다. 처음에는 주저했지만 응낙을 했습니다. 해줄 말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저를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30세에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길에서 미국 전도 대원이 나누어주는 손바닥만한 신약 성경책을 받아서 읽다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오하이오 주립 대학에서 전자 공학 박사 학위 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자마자 하나님께서 사역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수양회에서 간증을 했는데 그 후에 한미 가정 자매 두 분이 찾아왔습니다. “교회 안 다니는 친구들이 있는데 한인 교회는 거북하다고 안 나오고 미국 교회에는 알아듣기 힘들다고 안 나갑니다. 이분들을 위하여 성경 공부를 인도해줄 수 있습니까?” 나는 당시에 성경을 잘 몰랐기 때문에 평신도로서 엠마오 성경 통신 학교를 운영하던 홍 문공 형제라는 분을 모시고 모임을 시작하였습니다. 5명으로 시작하였는데 20명까지도 모이는 모임이 되었습니다. 이 때에, 교회에 오는 것은 꺼리지만 집으로 초대하면 오는 불신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대학원생들을 위한 기도 모임도 시작하였습니다. 토요일 저녁에 모여 식사를 같이 하고 간단히 성경 공부를 한 후에 서로의 기도 제목을 내어놓고 기도하는 모임이었습니다. 자정이 넘어야 끝나곤 했지만 많은 분들이 참석하였습니다. 빤질빤질했던 많은 대학원생들이 이 모임에 와서 ‘깨어지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 경험을 통하여 서로의 삶을 나누는 작은 모임이 전도에 얼마나 효과적인가를 체험하였습니다.


1976년에 학위를 마치고 실리콘 밸리에 있는 Varian이라는 회사 중앙 연구실에 취직이 되어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 지역에 현재 교회 숫자가 약 300개라고 하는데 당시에는 딱 4 개뿐이었습니다. 교회마다 개척 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고등 학생이나 젊은이들을 돌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청년과 더불어 아파트에서 고등학생, 대학생 6명을 데리고 성경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이 모임이 성장하여서 수년 후에는 약 50명이 모이는 모임이 되었습니다.


이 시점까지 제 사역은 다 교회 밖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교회 밖 사역에는 한계가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주님이 교회를 세워주신 데에는 이유가 있구나. 전인적인 제자를 키우기 위하여서는 역시 교회가 필요하구나.” 모든 사역을 정리하고 교회 안에서만 사역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당시 섬기던 교회 담임 목사님이 마침 권면해 주셔서 장년 주일 학교를 시작하였습니다. 10년 가까이 교장직을 맡아서 섬겼는데 열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한계를 느꼈습니다. 교인들이 성경 지식은 느는데 생활은 그만치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이 원하시는 성도를 키워서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를 만들어 볼까? 고민 가운데에 신약적인 ‘가정 교회’가 답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1992년 서울 침례 교회에서 담임 목사로 초청이 왔을 때에 가정 교회를 하겠다는 것을 조건으로 부임하였습니다.


30세에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했고, 41세에 신학교에 입학했고, 44세에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평신도 때에는 집사, 장로로 섬겼습니다. 신학교 입학 후에는 전도사, 교육목사, 담임 목사로 섬겼습니다. 평신도와 목회자 양쪽 생활을 다 경험했습니다. 그러기에 여러분들의 교회 생활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이 칼럼을 통하여 교회 생활과 관련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겠습니다.



[함철훈] 빛과 소리

eKOSTA 갤러리


빛과 소리











나의 생각은 너희와 달라…” (사 55: 8)


내 속 깊은 곳으로부터 저 하늘 끝까지 온 세상을 아주 후련하게 해 주는 하나님의 힘을 느낄 수 있는 말씀이다.


며칠 전 난 그런 멋진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파도가 밀려 들어오고 , 나가는 물소리와 바람소리에 수많은 돌들이 부딪치고 깨지고 갈아지는세상의 소리였다.







이 절기에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낮아지신 주님을 빛의 소리로 그려본다.










저 태평양 건너 우리가 사는 땅의 어른들은 소리를 음(音)과 성(聲)으로 나누셨다.
그래서 그 어른들의 소리는 폭포를 뚫고 거친 바람도 뚫을 수 있었나 보다.


그 맑고 거친 모든 소리로 하나님을 노래하는 우리들을 꿈꾼다.


파도와 수 많은 돌들이 바람으로 노래하듯.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의 흔적들을 이번 절기에는
우리에게 허락하신 많은 소리로 나누고 싶다.


[팽동국] 마틴 로이드-존스의

eKOSTA 서평


마틴 로이드-존스의 <십자가>


우리 민족의 명절인 설날이나 추석처럼 이스라엘의 절기도 월력(月歷)을 따르기 때문에 매년 약간의 변동이 있기는 하지만 3월은 우리 기독교 신자들에게 있어서 보통 사순절 기간이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던 마지막 주간을 기념하는 고난주간과, 사흘 뒤에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부활절이 있는 달이다. 부활절을 기준으로 해서 일요일을 제외한 40일, 즉 4 순(旬)을 역으로 계산하면 수요일인데, 이 수요일을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라 하며 올해는 양력으로 2월 13일이 바로 재의 수요일이었다. 재의 수요일에서 시작되는 사순절과 사순절의 마지막 주간인 고난주간과 부활절은 크리스마스나 추수감사절과는 달리 오직 주님의 십자가의 구속과 부활하심을 믿는 신자들만이 지키는 절기라는 점에서 어쩌면 우리 기독신자들에게 가장 의미 있는 절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사순절과 고난주간, 부활절이 있는 이 3월의 양서로 마틴 로이드 존스의 <십자가>를 정했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설교자로 알려져 있는 이 분이 갈라디아서 6:14절 말씀인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라는 한 구절을 가지고 9번에 걸쳐 강해 설교한 것을 한 권의 책으로 묶은 것으로, 강해 설교의 진미를 맛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이해를 통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게 해 준다. 또 다른 십자가에 대해 잘 알려진 책인 존 스타트 목사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체계적이고 학술적이며 그래서 사색하게 되는 반면에, 마틴로이드 존스 목사의 <십자가>는 설교를 옮긴 글이기에 간결하면서도 아주 힘있고 감동적이며 깊이가 있는 책이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책들을 읽다보면 늘 나 자신의 경박함과 천박함이 여실히 드러나는 동시에, 말씀의 깊이와 능력으로 마음이 뜨거워지고 하나님에 대한 열정들이 되살아나며, 완벽한 복음의 위대함에 감복하게 되는데, 이 <십자가>를 통해서도 역시 내 자신이 얼마나 피상적으로 예수님과 십자가에 대해서 알고 있는지 깨닫게 되었으며 십자가가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며 성부 성자 성령의 완벽한 지혜의 작품이었는지를 조금이나마 더 알게 되었다. 십자가를 통해 기독교와 복음의 진수를 아주 깊이 있게 각 장마다 말씀하시는데, 세상과 자기 진단,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평강, 구속과 자유, 새로운 피조물, 그리고 심지어 사탄의 존재와 능력과 십자가와의 관계까지도 다룬다. 또 한가지 좋은 점은 거의 매 장마다 여러 적절한 찬송시를 싣는데 때로는 우리가 늘 부르던 찬송가의 가사를 다시 한번 깊이 묵상하는 계기도 갖게 될 되었다.


아무쪼록 이 번 한 달 사순절을 맞아서 십자가를 더 깊이 묵상하며, 묵상 중에 강권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십자가를 지식적으로 뿐만 아니라 동시에 경험적으로도 깊이 알게 되어, 자랑할 것은 십자가밖에 없다는 귀한 고백들이 나와 이 글을 읽는 우리 이코스타 독자들에게 있기를 기도하며 이 책,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십자가>를 추천한다. 더불어 기회가 되면 존 스타트 목사의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함께 읽기를 권한다.


[정진호] 시온의 대로(Pilgrimage)

코스탄 현장 이야기


시온의 대로(Pilgrimage)


얼마 전 우리는 학교 내에 새로 지어진 교직원 숙사로 이사를 했다. 중국에서 벌써 세 번째 집을 옮긴 셈이다. 아직 건물 주변이 정리가 되지 않아 흙길이고 어수선한 가운데 있지만 집안만은 아내의 억척스런 손 맵시로 단장되어 깔끔하고 아담하게 꾸며졌다. 우리 학교 건축과 교수님들의 설계와 시공으로 직접 지어진 아파트이기에 연길시에서는 보기 드문 세련된 구조가 마음에 든다. 큰 아이 다니엘은 이사 온 날 자기 방을 둘러보며, “아빠, 이 집은 한국 아파트랑 비슷하다. 그지?” 하며 좋아했다. 중국에서 아주 눌러앉게 될까봐 그것이 두려워 이사가는 것을 반대했던 아내도 막상 이사를 하고 보니 새집이 무척 좋은가 보다. 프로판 가스로 온수기를 연결하여 부엌에서 따뜻한 물이 나오게 하였더니, 설거지하는 것이 마냥 신나고 즐거워 보인다. 그 동안 한기가 뼛속으로 스며드는 찬물에 손을 담그게 하여 거칠어진 손등을 때때로 펴 보이며 “오르간만 치던 손을 당신이 이렇게 만들었어…” 라며 눈을 흘기던 것이 생각난다. 새로 마련한 소파가 너무나 좋은지 하루에도 몇 번씩 일부러 앉아보며, “야, 참 좋다. 여보 나 소파 잘 바꾸었지?” 하며 눈치를 보며 내 동의를 구한다.


출장을 다녀오던 날, 연길 공항에 마중 나온 아내가 집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자기가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이 전전긍긍하더니, 내게 상의도 없이 소파를 바꾸었다고 마침내 실토를 하는 것이었다. 근 10년간 포항서 가지고온 세간사리를 그대로 지니고 살다보니, 여기저기 낡고 고장난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었다. 냉장고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TV 화면도 찌그러지기 시작하고, 소파는 여기저기 다 떨어져서 보기 싫은 속살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소파를 바꾸자고 그녀가 몇 번 운을 띄웠지만, 아직 앉는데 지장없는 걸 왜 바꾸냐고 일축했었다. 깔끔하기로 유명했던 아내의 눈에 그 소파가 얼마나 보기 힘이 들었을까? 그 동안 참아준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었다. 집안 정리가 끝난 후, 아내가 아끼는 오디오 세트와 CD들을 마저 정리하고 새로 단장된 거실에서 아내가 틀어주는 헨델의 오라토리오를 스트레오로 듣고 있으니 정말 여기가 천국이구나 싶을 정도로 아늑한 분위기가 되었다. 그러다가 문득 10년 전 생각이 떠올랐다.


중국으로 떠나기로 결정한 후, 나는 힘들어하는 아내를 데리고 서둘러 여기저기 중국에 관련된 단기 훈련을 받으러 다녔었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강사로 등장한 중국 사역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중국은 언제 추방당할지 모르는 나라이니 짐을 많이 가지고 갈 생각을 말고 양손에 가방 두 개만 들고 가면 된다는 것이었다. 아내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자기가 아끼던 살림들을 모두 버리고 가야한다는 생각에 억장이 무너지는 듯 한숨만 쉬고 있었다. 자기의 손때 묻은 가구며 주방기구 오디오 세트 피아노 오르간을 모두 두고 가야 한다니… 그녀로서는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 시절 저녁때만 되면 그녀는 가장 센티멘탈한 음악을 골라 틀어놓고 앞으로는 더 이상 이런 생활과 음악들을 즐길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잠기다가 마침내 엉엉 울음을 터뜨리곤 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중국서 사역을 한다는 어떤 분이 우리가 중국으로 간다는 것을 어떻게 소문으로 듣고 우리 집을 갑자기 찾아왔다. 아내의 고민을 듣더니, 무슨 말이냐? 가방 두 개만 가지고 가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도망갈 준비가 된 사람들이니 중국을 사랑할 수 없다. 중국을 모르고 그저 허튼 소리들을 하는 사람들이니 신경 쓰지 말고 이 집에 있는 물건은 모두 싸들고 가라. 쓰레기통 하나도 중국에서는 다 쓸모가 있으니 버리지 말고 전부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그 날 이후로 아내는 힘을 얻어 열심히 이삿짐을 싸게 되었는데, 나중에 중국에 도착해 보니 바쁘게 짐을 싸다가 정말 쓰레기통 안의 쓰레기까지 몽땅 가져왔던 것이 생각난다. 지금 생각하면 아내의 약한 믿음을 보신 하나님께서 그녀를 위로하시려고 친히 보내신 사람이었다고 생각된다. 오랜만에 그 시절을 회상해 본다.



1994년 7 월 11일, 이삿짐 컨테이너가 중국을 향해 떠나갔다. 그 안에는 지난 결혼 10년간 아끼며 가꾸고 쌓아 왔던 우리 가족의 애틋한 살림살이들이 전부 실리어 있었다. 밤 열시나 되어서 끝난 작업 후 차가 막 떠나려고 할 때, 빈집을 한바퀴 둘러보던 우리는 발코니 한구석에 큰 더미로 쌓여진 빈 상자들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언젠가 이사갈 때 쓰려고 보관하여 오던 미국서 가져온 온갖 가전 제품들의 오리지널 박스들이었다. 시간에 쫓긴 일꾼들이 미처 그것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모든 이삿짐을 새로 포장하여 실어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그 상자들을 보는 순간 아내는 갑자기 그것들을 모두 싣고 가야 한다고 고집을 피우기 시작했다. 나중에 중국서 돌아오려면 그 상자들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미 이삿짐을 가득 실은 차에는 더 이상 짐을 실을 공간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아내는 곧 울음이 터질 듯한 표정으로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직감했다. 이 빈 상자들이 그녀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 . 떠나려던 차의 문을 도로 열고 나는 이미 실린 물건들 중 몇 박스를 끄집어내리고 빈 상자들을 싣게 하였다. 일꾼들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들은 빈 상자 안에 담긴 아내의 울음 섞인 소망을 알 수도 느낄 수도 없었다.


다음날 아침, 눈부신 아침 햇살 속에서 우리는 깨어났다. 넓고 환한 사각의 빈 공간 안에 갑자기 남겨진 우리 세 식구는 망연히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다니엘이 배가 고프다고 칭얼대더니 갑자기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것이 배고픔의 울음이 아니라 아이에게 밀어닥친 어떤 불안감의 표출이라는 것을 느꼈다. 아이를 달랜 후, 주스 한잔을 먹여 학교에 보냈다. 사방을 둘러보던 아내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우린 이제 몸뚱이 셋과 가방 세 개만 남았군요.”


그날은 다니엘의 마지막 등교일이라 우리는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사서 들고 아이의 학교로 향했다. 포항제철 서 초등학교의 교정은 한 여름의 무더위 속에서 꾸벅꾸벅 졸며 평화로운 자태로 우리들을 맞이했다. 아름다운 교정과 깨끗한 편의 시설들이 시야로 파고들며 내 가슴을 사정없이 찔러왔다. 천진 무구한 어린이들이 법석대는 책상 사이를 누비며 과자를 나누어 준 후 작별 인사를 하고 아이를 데리고 교정을 나섰다. 담임 선생이 귀띔하길 다니엘이 줄곧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자기가 4학년이 되면, 서 초등학교로 다시 전학 올 것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다녔다는 것이었다.


자동차로 아이와 아내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사무실로 향하려 하자, 참고 있던 눈물이 사정없이 쏟아지며 운전대의 핸들을 가리우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에게 너무나 무거운 짐을 안겨다 준 내 자신이 하염없이 미워졌다.


하루종일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아 우두커니 책상에 앉아 있는데 아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내의 목소리가 의외로 평화스러웠다. 아내는, 오후 내내 심한 상실감에 시달리던 그녀에게 성령께서 찾아오셔서 강하게 역사하시며 위로하셨다는 사실을 내게 알리고 싶어 전화를 한 것이었다. 마음의 고통 가운데도 입 속에서 “목마른 사슴”의 찬송이 이상하게 끊이지 않아 그 가사의 귀절이 담긴 성경을 찾아보던 중 시편 42편 5절의 말씀을 주시면서 말할 수 없는 평강으로 채우시더라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듣고 나도 그 구절을 찾아보고 싶어서 옆에 놓여 있던 성경을 무심코 펼치는 순간, 할렐루야! 어쩌면 이럴 수가—, 바로 시편 42편이 단번에 펼쳐지면서 과거에 줄쳐 놓았던 5절이 내 눈에 튀어 오르듯 다가서는 것이 아닌가?



< 내 영혼아 어찌하여 네가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


나는 눈물이 쏟아지며 하나님의 강한 손길에 휩싸이고 말았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강하고 깊은 위로가 파도처럼 출렁이며 내 영혼 깊숙이 밀어닥쳤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다 아시기에 한 순간도 우리를 놓치시지 않으시고 돌보시며 이렇듯 등뒤에서 함께 동행하고 계시지 아니한가? 이런 생각과 함께 그분의 임재하심이 피부 가까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나는 바로 이 구절이 이제 중국을 향해 떠나가는 우리 가족에게 주님께서 친히 주신 위로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확연히 깨달았다. 앞으로 어떤 고통과 실망의 순간들이 닥쳐오더라도 오직 이 말씀 하나를 붙들고 다시 일어서라는 주님의 애정 어린 당부가 그 속에 담겨져 있는 것만 같았다. 그 날… 포항에서의 마지막 밤… 우리 부부는 빈집에서 평화로 가득한 밤을 맞이할 수 있었다.


우리의 이삿짐 콘테이너가 학교에 도착하던 날,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세간에 그것을 지켜보던 다른 동역자들이 “아니 M으로 온 사람들이 무슨 짐을 이렇게 많이 가지고 왔느냐?” 며 나무라듯 말하던 일이 생각난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아내는 자기는 필경 이런 곳에 올 사람이 못 되는데 잘못 왔다며 금새 자격지심에 사로잡혀 힘들어하곤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창세기 12장 5절의 말씀을 읽던 중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나안 땅으로 떠날 때,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났다는 대목을 읽으며 크게 위로를 받게 되었다. 그 당시 아브라함과 사라가 처했던 어려운 상황과 고민들이 마치 우리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면서, 그들도 우리와 같은 마음을 가진 보통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에게 이삿짐이 많다고 반문하던 사람들은 어느새 대부분 이곳을 떠나고 말았지만 아내와 나는 아직 중국에 남아있다. 아내는 자신이 아끼던 그 살림들이 볼모가 되어 이곳을 떠나지도 못하고, 지난 세월을 힘들게 그러나 기특하게(?) 살아내었던 것이다.


처음 정착 당시, 그 동안 살았던 쾌적한 환경을 버리고 조금이나마 열악한 환경 속으로 들어가 살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부부에게는 행운이었고 좋은 훈련기간이었다.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사로잡히기 쉬운 우리의 연약한 마음을 주님께서 강제로 다스리시며 참 영원한 것을 사모할 수 있는 마음으로 조금씩 변화시켜 주셨던 것이다. 그 시절의 뜨겁고 순수했던 마음이 오히려 그리울 때도 있다. 어떻게 그 시절의 아픔과 어려움을 통과했는지…. 모든 것이 그분의 은혜일 뿐이다. 중국에서 처음 살던 집과… 94년 겨울을 회상한다.



우리는 학교에서 걸어 내려오면 약 30분쯤 걸리는 ‘뻬이따’라는 곳에 아파트를 얻었다. 연길 시내에서도 가끔 택시 값을 더 달라고 하는 변두리지만, 아파트들이 비교적 새로 지은 곳이 많고 시장도 새로 생기고 집 앞에 버스 종점도 있어서 주거지역으로는 오히려 적당한 곳이다. 저희 학교는 인적이 드문 언덕바지에 우뚝 세워져 있기 때문에 학교 버스로 학생과 교직원들을 수송하는데, 교통편이 여의치 않을 경우는 걸어서 내려오곤 한다. 저녁 무렵 학교에서 시가지를 내려다보면, 짙은 안개에 싸인 연길시 전체가 푸르스름한 빛을 발하고 있다. 연길 시는 맑은 날은 먼지와 바람이 많아 호흡을 곤란케 하고, 비만 오면 온통 진창으로 변하여 보행을 어렵게 한다. 가장 힘든 것은 수도만 틀면 뻘건 흙탕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인데, 그나마도 자주 끊어져서 아내를 낙담케 한다. 아내는 지난여름 내내 물과의 전쟁을 치렀다.


이곳의 겨울은 한국에 비하여 한달 가량 빨리 찾아와서 한달 늦게 끝이 난다. 매운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가운데 단층 벽돌집들마다 달린 굴뚝에서는 매캐한 연기가 꾸역꾸역 밀려나오고 있다. 겨울만 되면 몇 미터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이 연기가 가득 차서 연길시가 ‘연기시’로 바뀌고 만다. 집 근처에 다다르면 길가를 따라가며 시장 바닥의 온갖 노점상들이 늘어서 있다. 양고기 꿰어서 꼬치를 굽는 사람들과 모락모락 향긋한 연기를 뿜는 만두집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조선말을 모르는 한족에게 손짓으로 겨우 의사소통을 하여 만두를 한 봉지 산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퇴근길에 군것질거리를 사 가지고 들어오시던 생각이 난다. 한국서 차를 몰고 다니다 보니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옛 기억들이다. 습관적으로 혹시 따라오는 사람이 없는지 뒤를 살핀 후에 아파트 입구로 들어선다. 이곳은 한국서 온 사람들을 전문으로 터는 강도들이 많아서 외출했다가 돌아올 때에는 늘 조심해야만 한다. 현관 앞에 늘어선 자전거 숲을 헤치고 5층까지 칠흑같이 캄캄한 계단을 더듬어 올라간다. 초인종을 누르고 기다리면 반가운 두 얼굴이 나타난다. 아파트 문이 뒤에서 철컹 닫힐 때 비로소 바깥 세상과는 전혀 다른 빛의 세계로 들어선 것을 깨닫고 안도하게 되는 것이다.


개화초기 한국에 왔던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문화 공간을 그대로 유지하며 편한 생활을 하였던 기록을 읽으며 비판하였던 것이 생각난다. 그러나 이제야 비로소 그들을 이해할 것 같다.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먼저 오신 어떤 분이 이곳에서의 생활은 이론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며, 이곳에서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은 자기 집뿐이니 최대한 편안하게 꾸미라고 충고하신 뜻도 이제 어렴풋이 이해가 간다. 맡겨진 직분 때문에 더러는 편안한 생활 공간조차도 가슴속의 찔림이 되어야하는 심령을 우리의 연약함을 내려다보시는 주님만이 아실 것이다.


새 집에서 첫 날 밤을 지내고자 침대에 누우니, 집이 너무 좋아서 그런지 아내가 잠을 이루지 못한다. 마치 집안에 갇혀 지내다가 10년만에 외출을 한 여자의 기분인 듯 싶다. 새 집으로 이사만 와도 이렇게 좋은데 나중에 천국에 가서 우리가 느끼게 될 기분이 어떨지 궁금하다. 뒤척이던 아내가 불안한 듯 입을 연다. “여보, 우리 너무 좋은 집에서 사는 것 아니에요?” 아내에게는 사도 바울의 말씀으로 안심을 시키며, 비천에 처하든 풍부에 처하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환경 속이든 일체의 비결을 배워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해주었지만, 내심 어쩌면 아내의 말이 옳을 수 있다고 생각이 든다.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해 안락함 속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가 더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본질적으로 믿는 자들의 인생을 나그네길이라고 말한다. 크리스천은 이생의 장막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영원히 거할 주의 장막을 사모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 9:58).” 하신 것이 생각난다. 오직 아버지의 마음에 초점을 맞추고 사셨던 분… 그분에게는 이 세상에는 마음둘 집이 없었다. 어디로 가든 그를 따르겠다고 나서는 제자들마저도 그분의 마음을 위로하여 빼앗지는 못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나그네길에는 항상 눈물 골짜기가 기다리고 있으며, 그곳을 통과할 때에는 모든 사람들이 떠나가고 오직 성령만이 함께 하실 것이라는 것을…… 그러나, 그 이후에는 반드시 천국의 영광이 따라온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주님, 이 밤에 오직 주의 궁정에 거하기를 사모하시던 예수님의 마음을 저에게도 주시옵소서.(2002.2.24)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pilgrimage)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시편 84: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