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 1, 2003 | 찬양과 예배/조근상의 찬양을 이야기하자
이코스타 2003년 12월
최근에 예배와 찬양인도를 하면서 내 안에 자리잡은 궁금증은 ?도대체 얼마만큼 음악적인 자유를 가져야 하는 가? 이다. 94년, 처음 미국에 와서 몬타나의 국제 YWAM베이스에서 있었던 쇼크는 아직도 예배와 찬양인도를 하는 나에게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영어로 노래 부르기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하여간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락 콘서트를 하는 것 같은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저게 크리스천이 맞아? 라고 질문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나 더욱 나를 힘들게 했던 일은 놀랍게도 집회가 끝난 후에 많은 Youth아이들이 하나님을 영접했다는 사실이었다. 이럴 수가! 나는 혼란 속에 빠졌었다. 당시 부산지역에서 예배 인도자로 섬기고 있었지만, 한번도 그런 식의 예배를 드려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큰 도전이 되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한국의 경배와 찬양은 이른 바 발라드의 전성시대였기 때문에, 의례 예배에 쓰여지는 곡들은 한정되어 있고, 얌전하고 조용하게 하는 스타일이 주류였다. 결국 그 때의 경험이 후에 나의 예배인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95년도에는 이른 바, 한국의 많은 가요들이 서태지의 음악을 통한 영향력으로 랩이 절정을 이루었던 시기였다. 그 때 미국에서 가져온 앨범 중에 유명한 예배인도자인 밥 피치의 Proclaim His power라는 새로운 앨범을 듣게 되었다. 한참을 듣는데 참으로 희한한 곡이 있었다. Romans 16:19 says라는 곡이었는데, 로마서 16장의 말씀을 그대로 랩으로 담아서 만든 곡이었다. 물론, 완전한 랩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들으면서 나름대로 번역을 해서 곡을 불러 보았다. 일단 번역을 하면 같이 사역하는 뮤지션들과 같이 연습을 해 보는 것이 필요한데, 막상 노래를 하고 마지막 랩 부분을 하려 하니, 뭔가 어색하고 찬양을 한다는 느낌이 아니라 세상가요를 부르는 느낌이어서 번역을 했지만 한번도 부를 수가 없었다. 그렇게 1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한번은 로마서를 묵상하다가 찬양의 구절들을 보게 되었다. 너희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인하여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내 안에 새로운 깨달음이 있었다. 즉, 이 찬양은 단순하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그리고 우리의 원수인 사단에게 명령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 찬양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단순한 노래가 아닌 기도와 영적 전쟁이 함께 선포된다는 사실이었다. 그전에도 많은 분들이 강의해 왔던 사실이 내게 새로운 깨달음으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96년의 YWAM의 중 고등부 수련회 마지막 날 이 찬양을 처음으로 부르게 되었다. 모르는 찬양을 처음, 그것도 랩이라는 장르로 부른 그 날 집회에서 우리는 이 찬양을 12번 이상을 불러야 했다. 1500여명이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께,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원수인 사단에게 말씀으로 굳게 서 있을 것을 노래했다. 덕분에 나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랩송을 인도한 예배인도자가 되었다.
그 후 한국에서 앨범을 만들 때에도 이 곡은 메인 타이틀이 되었다. 녹음을 하면서도 사단의 방해를 느낄 수가 있었다. 다른 곡들은 정말 무리 없이 녹음이 되었는데, 이 곡을 녹음할 때에는 세 번이나 녹음을 하다가 중단이 되었다. 한번은 녹음을 했는데, 아예 녹음이 안 되었고, 두 번째는 녹음하는 테이프가 끊어져 버렸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곡을 좋아하지만, 때로는 이 곡을 통해서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도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음악스타일로 따지게 된다면 처음에 소개할 당시 래디칼하게 느껴질 수 있는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곡을 묵상하지 않는다면 이 곡이 주는 영적인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예배와 찬양곡들이 마찬가지이듯이, 원래 작곡한 사람의 의도나 혹은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회중들을 자기 중심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기 쉽다. 하지만 반대로 어떤 곡을 하더라고 그 속에 담긴 뜻을 파악하고 연구한다면 곡을 부르는 동안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명한 ?이와 같은 때엔?의 작곡자이신 데이비드 그레함은 이 곡을 자신의 아내와 자녀들이 집에 불이 나서 죽은 자리에서 불렀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직접 듣는 순간 이 곡에 대한 나의 태도를 달라지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이야기한다면 나는 음악의 모습이나 형태는 이제 더 이상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자세히 기억을 더듬어 보면 94년 당시 YWAM 몬타나 베이스의 친구들의 노래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갈망, 그리고 영혼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참으로 진실 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들이었다. 단지 복장이나 모습이 내게 익숙하지 않기에 내 마음속에 과연 저 사람들에게 얼마나 신앙이 있을까 하는 판단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진정한 모습을 찾지 못한 것이었다. 한국의 하덕규 집사님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성경에 나오는 역청이 노아의 방주에도 쓰였지만, 바벨탑에도 쓰여졌다는 사실에 대해서, 음악이란 역청과 같아서 누군가에 의해 쓰여지는 것에 따라서 완전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이야기했었던 기억이 난다. 결국 인도자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다. 회중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기도로서 준비하지 않는다면, 결과적으로 노아의 방주로 시작해서 만들다가 바벨탑을 쌓고 끝나 버리는 것이다.
올해로 나는 예배와 찬양인도를 해 온지 꼭 13년이 되어 간다. 정말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정말로 예배와 찬양인도가 어렵다는 것을 느낀다. 경험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대한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나는 울리는 꽹과리로 전락하는 것을 알기에 오늘도 두려운 마음으로 기타를 끄집어낸다.
Dec 1, 2003 | 책이야기/서재석의 추천도서
2003/12
1977년 선배들과 성경공부를 하면서 회심을 경험한 나는 그 이후 지난 25년간 수많은 사람들과 책, 모임 등을 통해 크고 작은 영향을 받아 왔다. 그 가운데는 내 정서와 기질에 맞아 따르거나 본받고 싶은 깊은 감동과 큰 영향력을 준 것도 있지만, 나와는 어째 영 맞지 않아 피하거나 멀리하고 싶게 만든 것들도 있다.
그 가운데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책으로 만난 존 스토트(John Stott) 목사이다. 존 아저씨라고도 불리우는 이 분의 책을 읽으면서 기독교 신앙이란 게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됐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눈뜨게 된 것 같다.
우연히 접하게 된 생명의말씀사에서 나온 문고판 『기독교의 기본 진리』(Basic Christianity)를 읽으면서 제목 그대로 기독교의 베이직(Basic)을 견고하게 쌓을 수 있었던 것은 차라리 행운이었다. 애매모호하기만 하고, 아무도 명쾌하게 설명해 주지 않으면서 그저 믿으라고만 하던 죄의 정의, 부활의 확신, 그리스도를 영접(초대)한다는 것의 의미 등이 쉽고 분명하게 정리돼 있는 이 책을 통해 나는 비로소 기독교인으로 입문하게 되었다. 이 책은 비단 나뿐만 아니라 수많은 내수동교회 형제자매들의 신앙고전이 되면서 소그룹 모임 등에서 널리 읽혀지고 이야기되면서 사랑 받는 책이 되었다.
존 아저씨(Uncle John)의 책들은 한 마디로 BBC 신앙을 길러 주었다. BBC는 성경적이고(Biblical) 균형잡힌(Balanced) 기독교(Christianity)의 약자로, 비성경적이거나 부분 성경적인 가르침이 편만해 있고, 아무런 균형이 잡혀 있지 않은 이상하고 왜곡된 기독교를 좋아하는 한국 교회 풍토에서 자란 우리들에게 성경적으로 생각하며 자라 가는 일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 생각해 보면 우리네 신앙이라는 게 내가 알고 영향 받은 어느 하나의 사상과 흐름에 사로잡힌 채 다양하고 폭넓은 이해와 실천에 어색해 하는 균형 잡히지 않은 신앙인지를 쉽게 알 수 있는데, 존 아저씨의 책들을 통해 이런 게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 식의 편협한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영국 성공회 목회자인 존 아저씨의 성경해석과 신학사상은 건전하기로 정평이 나있는데, 특히 그가 책임편집자로 신구약이 거의 완간된 강해설교 BST(Bible Speaks Today) 시리즈는 성경공부와 성경묵상을 훈련받는 청년 시절에 꼭 읽어볼 책들이다. 존 아저씨는 이 시리즈의 산상수훈, 사도행전,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데살로니가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주로 IVP에서 역간되었다)를 특유의 간결하고 명쾌한 문장으로 저술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귀로 듣는 설교와 함께 눈으로 읽는 설교의 전범을 꼽을 때 마틴 로이드존스의 책들과 함께 첫손가락에 꼽는 책들이다. 웬만한 주석에 비해 나으므로 관심 있는 독자들은 구입해 가까이 두고 읽어보자. 에베소서는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God’s New Society)라는 제목이 보여 주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잘 풀어 주고 있어 성경 이해는 물론 구원에 대한 이해에도 큰 도움을 받았다.
존 아저씨는 설교만 잘 하는 전형적인 목회자가 아니다. 그의 관심은 현대 사회 문제와 전도와 선교 등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고민하고 마땅히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슈들과 관련해 여러 권의 책을 썼다.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성경만이 아닌 사회로부터도 이중적인 귀기울임(dual listening)을 해야 할 필요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존 아저씨에 대한 내 관심은 그의 기독교적 지성(Christian Mind)과 간결하면서도 명쾌한 성경관찰, 해석, 탁월한 문장에서 영향 받은 바 크지만, 뜻밖에도 그는 전도만이 아닌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함께 강조해 지난 30여년간 복음주의 운동권의 이정표를 세운 로잔언약(1974)을 기초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으며, 미국의 어바나 선교대회를 비롯해 여러 나라의 학생사역을 방문해 말씀으로 돕고 격려한 전도와 선교의 대가이기도 하다.
이제는 80을 넘은 노년기를 살아가는 그의 삶의 궤적을 살펴볼 수 있는 전기도 나와 있는데, 출생에서 1960년까지 전반부 생애를 다룬 작은 글씨에 6백쪽이 넘는 티모시 더들리 스미스가 쓴 『존 스토트』 같은 전기는 큰 맘 먹고 이 가을밤 한 주간 정도 깊이 빠져 볼만한 책이다. 같은 편집자가 존 아저씨의 50여종의 책들에서 주제별로 발췌해 만든 『진정한 기독교』(Authentic Christianity) 같은 책은 존 아저씨의 신앙과 신학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괜찮은 다이제스트이므로 한 권쯤 구비해 두자.
Dec 1, 2003 | 이달의 초점
유학생활 첫 한해 동안 거듭되는 실수를 통해 배운 교훈들이 이후의 삶에서 귀한 지침이 되어주고 있다.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유지되는 ‘아너 시스템(honor system)’이 지금은 편하지만 처음엔 생소했다. 대학원생을 동료 학자로 인정해주는 분위기도 내게는 어색했고, 자발적인 참여가 아니고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막막한 자유도 낯설었다. 그러나,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려 애쓰면서, 좌충우돌 허점투성이의 말도 잘 못하는 이방인이 되어보고 나니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당신의 방법으로 사는 법을 조금씩 가르쳐주셨다. 생각할수록 참 감사한 일이다.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끊임없이 선택하고 계획하고 진행하고 책임져야 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일상사에서도 학업에서도 그런 일들의 연속이다. 그 안에서 오는 유혹도 만만치 않다. 이메일로 시험 문제를 받거나 문제지를 받으면 각자의 연구실에서 답안을 작성하고, 약속 시간 안에 담당교수의 이메일 계정으로 화일을 보낸다. 우편함이나 교수연구실 문 밑으로 답안을 넣어도 된다. 내 발로 먼저 찾아가 이야기하지 않으면 기말이 될 때까지 어느 누구도 무얼하고 있는지 간섭하지 않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될 것 같은 좌절감도 맛보고, 그때마다 쉽게 가는 길이 자꾸만 눈에 보여 갈등도 한다. 시간관리에 소홀하다가 황급히 헤치우듯 써낸 페이퍼에는 본의 아닌 실수도 한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너무 한심해보여 낙망도 한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어 버린 상황에서 갈급한 마음에 눈물 뚝뚝 흘려가며 “큰 바위에 숨기시고 주 손으로 덮으시네” 찬송을 부른다. 그렇게 긴 시간 배워온 영어인데 말하는 것도 글쓰는 것도 왜 이리 더디고 어색한가. 한국어가 세계공용어가 아니라는 사실이 분하기까지 하다. 시간이 흘러 자기 연구분야에서 실력이 쌓이다보면 언어의 불편함에서 오는 의기소침한 마음이 극복 된다고 하지만, 당장은 큰 위로가 되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꿈만 같다. 다른 나라 언어로 승부해야 하는 사회과학도들의 비애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낙망스런 현실에서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러지는 경험을 거듭거듭하며 나의 유학 첫해도 그렇게 훌쩍 지났다. 하지만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그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보화를 발견했던 것이다. 갑자기 이듬해에 우수한 학생이 된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이 나와 함께하고 계시다는 사실때문에 마음이 평안해진 것이다. 먼 나라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특유의 한계 상황이야말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이었다.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12:1)”셨을까? 주님 말고는 부빌 언덕이 없는 외로운 광야의 삶을 살아 보아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분량에 가까와 질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 때에 하나님은 당신만을 전심으로 신뢰하는 법을 알게 하신다. 어디에서나 형통하는 완전하신 하나님의 기준으로 사는 법도 배우게 하신다.
시험 답안이나 페이퍼를 쓸 때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성실성(authenticity)을 지키는 것이다. 학문적 정직성(academic honesty)에 대해 철저히 교육하지 않는 학문적 풍토에 길들여져 온 유학생들은 서구사회의 아카데미아에서 요구하는 기준을 종종 어기게 된다. 처음 주로 하는 실수는 자신의 문장으로 완전히 소화시키지도 못하고 다른 학자들의 아이디어를 여기저기 서툰 영어로 짜집기 하다가 끝나는 것이다. 그 다음엔, 읽을 때마다 인용할만한 아이디어들을 미리 꼼꼼하게 챙겨 놓지 않아서, 혹은 이 정도쯤이야 괜찮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에서 대충 마무리한 글들을 제출하게 된다. 이런 기억들은 상당히 오래 동안 부끄러움으로 남는다. 실제로, 글의 전거를 의심 받고 나서 마음의 상처가 남아 이후의 학업에 자신감을 잃는 이들도 보았다. 심한 경우, 적절한 인용 없이 표절한 답안때문에 학업을 중단하거나 학교를 옮기게 된 사례들도 있었다.
새로운 사회에서 살아 남기 위해 본능적으로 인간은 그 곳에서 통용되는 규칙을 습득한다. 내가 가진 생각과 주류의 생각이 달라보일 때 내가 바꿔야 한다는 것도 배운다. 그런데 그 규칙이란 것이 나라마다 사회마다 많이 다르다. 다른 나라 학생들과 이야기해보면 부정행위의 기준조차도 퍽 상이하다. 가는 곳마다 시대마다 달라지는 상대적인 가치관과 기준들을 묵상해보면 마치 움직이는 표적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의 삶은 혼란스럽게 moving target 을 따라다니며 살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무어라 말씀하시는가 성경 안에서 찾아보면 되기 때문이다.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롬13:1).” 사회의 법이 지적재산권을 존중하자고 한다면 철저히 따르는 것이 옳다. 또 이렇게 말씀하신다.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빌2:14-15).” 당신의 자녀가 세상의 빛이 되길 원하시는 하나님은 그 어떤 원칙보다 뛰어난 기준을 우리에게 주셨다. 혼란 속에 있다면,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흔들림 없는 기준점(fixed point)을 말씀 안에서 찾아보자.
말씀은 우리 마음을 일분 일초도 쉼 없이 감찰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을 생각하라 하신다. 우리가 의식해야 할 것은 교수님들의 눈도, 교수님이 돌리는 소프트 웨어의 감시도, 경쟁하는 동료 학생들의 눈도 아니다. 내가 열심을 다하여 수고하고 있는 그 일이 하나님 앞에 모두 무익한 것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 내면의 자아가 온갖 사회적 상과 벌들에 마음을 빼앗긴 채 노예처럼 길들여져 오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자. 불타는 시기 질투로 동생을 죽여 놓고 딴전을 피우고 있던 인류 최초의 살인자 가인을 그분의 눈이 보고 계셨던 것 처럼, 여주인 사라의 학대로부터 도망하여 광야에 이르러 낙망하고 서있던 하갈을 그 눈이 보고 계셨던 것 처럼, 오늘 나의 모습을 그 눈이 보고 계신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 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 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찌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시139:7-10).” 다윗도 이렇게 하나님의 눈이 언제 어디서나 우릴 향하고 계시다고 고백하고 있지 않은가. 그분의 눈은 우리가 저지르는 잘못 때문에 우리를 떠나지도 않으신다. 이토록 끈질기게 우리를 찾으시는 것은 하나뿐인 아들을 대신 내어 줄 만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보디발의 아내로부터의 유혹을 물리친 요셉의 이야기에서 보다 실천적 지혜를 얻어보자. “나의 주인이 가중 제반 소유를 간섭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임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 하리이까 (8-9절).” ‘꿈꾸는 사람’ 요셉이었지만, 현재의 삶 속에서 보여주는 그의 현명함과 순결함은 더욱 돋보인다. 사실 이런 결단은 굳이 하나님을 모른다 해도 도덕성이 투철하거나 자존심 강한 젊은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할 이도 있을 것이다. 자기의 의(self-righteousness)에 금이 가는 것이 정말 싫은 그 어떤 사람이라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드러난 결과는 같아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근본 동기가 어디에 있었는지 놓치지 말고 따져보자. 누구보다 강한 책임감으로 자신의 본분을 다했던 성실한 젊은이 요셉. 그가 궁극적으로 지키고 싶었던 것은 자기 의가 아니었다. 사람들의 평가를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요셉의 시선은 그 어떤 공평한 저울보다 더 정확하신 하나님을 향하고 있었다. “요셉이 시무하러 들어갔더니 그 집 사람은 하나도 거기 없었더라 (11절)” 보는 이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도 그는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고 사는 자였기에 거듭되는 시험에도 넘어지지 않았다. 은밀히 다가온 유혹 앞에서 요셉은 옷을 버려두고 헐레벌떡 달음질쳐 나갔다. 겉옷을 버려둔 채 가식없는 양심을 가지고 환난 날의 피할 바위이신 하나님께로 도망했기에 그는 더욱 안전하였다.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내 공간 안에서 글을 쓸 때 시험을 치를 때, 이 요셉의 모습을 기억하자. 우리가 속한 아카데미아에서 기존의 축적된 연구 결과들을 우리는 재량껏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 받았다. 그러나, 우리에게 양심을 눈감는 표절이나 부정직한 행위들은 분명 금지되어 있다. 학문을 하고 있다면, 학문적 정직성(academic honesty)을 순결한 혼인의 언약과 같이 여기자. 그리고 세상의 평가가 두려워 이 약속을 지키자는 것보다는 그 약속을 깨뜨리는 악한 행위로 “하나님께 득죄” 할 수 없다고 말했던 요셉의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순결하자.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나 거룩하기 원해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나 정결하기 원해
나 오직 내 주님 앞에서 순결하기 원해
나 오직 내 주님 앞에서 아름답기 원해
“내가 어떻게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범죄하리까?”
그 아무도 보는 이 없어도 결코 죄와 타협하지 않고
자기를 지킨 젊은 요셉처럼 나 정결하게 살기 원해
그 아무도 보는 이 없어도 나 거룩하게 살기 원해
하나님의 뜻 이것이니 우리의 거룩함이라
음란함 버리고 존귀함으로 주의 얼굴 보기 원해
하나님의 뜻 바로 이것이니 나 그 뜻대로 살기 원해
부정함 버리고 거룩함으로 나 주의 얼굴 보기 원해
–강명식,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예수 믿는 학생으로서 지금 나의 삶은 어떠한가? 떨리는 마음으로 찬찬히 돌이켜 본다. 내 노력보다 큰 것을 탐하고 있었는지.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인 양 말하고 있었는지. 누구도 보아주지 않을 때 그 과정을 허수이 흘려 보내진 않았는지. 사회의 통제적 기준에 따라 급급한 노예의 삶을 살고 있진 않은지. 세상 윤리보다도 더욱 저급한 기준으로 살면서 작은 이익 앞에서 비굴해지지 말자. 눈에 보이는 여러 가지 상과 벌에 골몰할수록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희미해져 버릴 것이다. 빛의 자녀된 삶에도 이런 유혹의 그림자는 끊임없이 다가올 것이며, 이 땅을 떠나지 않는 한 그 사투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 때마다 세상의 모든 윤리보다 탁월하신 주의 말씀에 매여 살아보자.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다 (시119:9).”
하루 분량의 삶만 고스란히 내놓고 말씀 앞에 비추어 보아도 입술의 고백과 실제 삶과의 간격은 너무나 크다. 다시 고쳐 살아볼 수도 없는 지나가버린 시간들이다. 그래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오늘의 어려움을 내일의 영광으로 바꾸실 수 있는 능력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님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진정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갈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에 있음을 기억하자. 우리 대신 아들 예수를 죽이기까지 하신 분인데, 그가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그 일을 하며 우리 삶을 살아보자. 말씀의 준거가 우리의 삶 가운데로 통합되어 빛으로 드러나길 소망한다. 그 정직한 순간 순간이 모여 사회적 윤리와 도덕의 기준을 뛰어 넘고 하나님의 거룩으로 향해 나아가는 삶을 만들어 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잠2:7)”는 하나님께서 결과는 책임지신다. 우리가 할 일은 매 분 초마다 우리의 흔들리는 마음과 생각을 요동치 않는 십자가 위에 못 박고 우리 삶을 예배로 드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Dec 1, 2003 | 이달의 초점
이코스타 2003년 12월호
해적선장 이야기
어느 해적선이 어느날 크게 약탈을 하는데 성공하였다. 수많은 보화와 진귀한 물건 뿐 아니라, 여러명의 아름다운 처녀들도 납치해 오는 큰 성과였다. 해적선상에서 이를 축하하는 잔치가 열렸다. 잔치가 한참 무르익었을 무렵, 선원 몇 명이 해적선장 앞에 아리따운 처녀 몇 명을 데리고 왔다. 재미있게 한탕 놀아보자는 것이었다. 그때 해적선장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네 이놈들, 너희들은 내가 결혼을 소중하게 여기는 크리스천임을 몰랐단 말이냐! 나는 결코 이 여자들에 손대지 않을 것이다!” 그날 밤 해적선장은 잠자리에 들기 전, 무릎을 꿇고 자신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이 이야기는 복음주의권에서 자주 회자되는 이야기이다. ‘개인적으로 신실한’ 신자들의 모습을, 해적선장이라는 비윤리적인 자리에 있으면서 개인적인 신앙생활의 신실함을 지켜내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비유한 내용이다. 과장이 되어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이 모습은 어쩌면 아주 전형적인(typical) 한국적 그리스도인의 슬픈 모습을 그려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A군의 직장생활 이야기
신실한 그리스도인인 A군은 한국의 어느 국가출연 연구소에 연구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학생으로 있으면서 캠퍼스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하기도 했었고, 지역교회에서도 성실한 일꾼으로 인정받던 A군은, 직장에 가서도 신우회 활동등을 통해 ‘직장 복음화’를 이루겠다는 꿈에 부풀어 직장에 들어갔다. 그런데 직장에서 A군이 부딪혀야했던 ‘세상’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번꼴로 있는 회식에서 여러가지 이유로 술을 거부하는 것이 마음 늘 부담이 되었다. 한약을 먹는다, 개인적으로 술이 안받는다, 운전을 해야한다는 등의 핑계도 이전 거의 떨어져 가고 있다. 주일마다 나와서 일을 하라는 압력을 받는 것도 A군에게는 심각한 도전이다. 교회에서 여러가지 일로 섬기고 있는 터에 주일은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원칙으로 세우고 있는 A군은 이 원칙을 깨지 않으려 정말 힘들게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A군을 또 힘들게 하는 것은 가끔 ‘전문가 초청’ 가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가끔 세미나를 부탁한 전문가가 세미나를 펑크내면, 그냥 그 세미나가 열린 것으로 보고서를 써 내고 거기서 나온 경비로 연구실 회식을 하는 것이었다. 거짓 보고서로 회식이 마련되면 A군은 또한 여러가지 핑계를 대고 회식에 빠지려 노력하였다. 부정에 동참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가끔 직장 상사에게 피치못할 거짓말을 하는 것도 늘 마음에 걸렸다. 어쩌다 일이 밀려 기한내에 끝내지 못하면, 일을 이미 다른 부서로 넘겼는데 그쪽에서 아직 넘어오지 않아서 그렇다고 몇번 둘러대곤 했는데 이런 사소한 거짓말에도 A군은 심하게 마음이 찔렸다. 매일의 삶에서 이렇게 끊임없이 다가오는 도전들에 정정당당하게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역시 기도 외에는 없다는 생각에 A군은 힘들지만 매일 새벽기도에 나갈 것을 결심한다. 거짓말하지 말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 지어다. 이런 성경구절들이 A군의 QT 노트에는 자주 적히게 된다.
이것은 가상의 어떤 ‘경건한’ 그리스도인 청년의 이야기이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고자 노력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담겨져 있다. 하루하루의 삶에서 작은 것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 노력하며 분투하는 모습. 그러나, 이 모습을 위의 해적선장 이야기에 대비시켜보면서 뭔가 석연치 않은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반윤리적인 기독교
많은 사람들이 한국 기독교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여러 가지 비판의 소리가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큰 비판의 소리 가운데 하나는, 한국 기독교가 ‘도덕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목회자의 개인적인 비리와 부정축재, 당회장의 권력을 투명하지 않은 절차를 통해 아들에게 물려주는 문제, 교회가 다른 ‘사업’을 벌이면서 터져나오는 각종 탈세 혹은 비리 의혹들. 그 외에도 사회적으로 크고 작은 문제들이 터질 때 마다 항상 단골로 등장하는 교회의 집사, 장로, 권사, 목사님들. 이런 우리의 자아상이 우리 스스로 부끄러워서 일까, 어떻게든 하나님의 교회를 바로 세워야한다는 사명감에서일까, 아니면 함께 싸잡아서 욕먹는 것이 못내 분해서일까, 우리 안에서도 이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쏟아내는 목소리들이 높다. 그리스도인들의 도덕성이 땅에 떨어졌노라고. 적어도 세상의 상식 수준의 도덕만이라도 우리안에서 회복하자고. 사실 우리는 얼마나 교회나 기타 기독교 관련 단체 혹은 집회 등에서 ‘종교적’ 혹은 ‘도덕적’이길 도전받는가. 주일성수, 금연, 금주, 십일조와 같은 ‘종교적 규율’들과 정직, 청렴, 사랑, 자비와 같은 ‘윤리적 규율’ 등을 나열하면서 이것들을 지키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자고. 그리고 우리 복음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적 윤리 기준은 세상의 타락한 가치기준보다 우월하다고. 그러나, 정말 그런가. 철저히 인본주의적인 기반에서 미국내의 불법 이민자들, 미혼모들을 돌보는 social worker들을 보았는가. 이들은 그들과 하나가 되기 위에 일부러 흑인 저소득층이 사는 지역에 가서 자기 자녀들을 교육시키며 박봉으로 그들의 어려움을 온 몸으로 섬기는 사람들이다. 이런 이들의 도덕기준보다 과연 기독교의 도덕기준이 얼마나 더 우월하단 말인가.
자크엘룰(Jacques Ellul)에 따르면,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반윤리적’인 종교다.
“하나님과의 만남에 방해물로 나타나는 모든 도덕을 초월하라는 것이다. 사랑은 어떤 도덕에도 굴복하지 않고 어떤 도덕도 만들지 않는다. 계시된 진리들(자유, 진리, 빛, 말씀, 거룩)은 어떤 것도 도덕과 관계하지 않으며, 또한 도덕을 탄생시킬 수 없다. 그 진리들이 일깨우는 것은 존재 양식과 삶의 모습이다. 그 삶의 모습은 지극히 자유로우며, 끊임없이 위험에 처하지만 항상 새롭게 되는 것이다. 도덕이란, 그것이 어떤 것이든간에, 하나의 금지이며 장애물이고 또한 그 안에 정죄를 내포한다. 정확히 예수께서 모든 도덕적 인물들에의해 어쩔 수 없이 정죄받은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기독교 역사상 가장 근본적인 비극들 가운데 하나는 이 자유한 말씀이 도덕으로 변형된 것이다.” (자크엘룰, 뒤틀려진 기독교, p120-121,대장간 1990)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의 차이는 윤리적이냐 그렇지 않느냐, 혹은 윤리적으로 누가 우월하고 열등하냐하는 것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을을 비그리스도인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하고도 유일한 원리는 이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나는 하나님이 아니다.
즉, 전적타자(全的他者)로서의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도무지 채울 수 없는 간극(gap)이 있어서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하나님같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절대적으로 인정할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절대적인 하나님에 대하여 모두 상대화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나는 하나님이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만들어진 윤리적 강령들 심지어는 도덕적 강령들이 절대화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복음의 근본을 흔드는 심각한 도전이다.
앞의 A군의 예를 다시 생각해 보자. 물론 A군이 성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노력하는 열정은 분명히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A군이 지키려 했던 주일성수, 금주와 같은 종교적 강령들이나 정직, 성실과 같은 윤리적 강령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을 때, A군의 노력은 매우 소모적인 것이 될수도 있다. 또한, 경건하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이 반복해서 종교적, 윤리적이되는 이유도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이 계속 점검되지 않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의 기독교, 특히 한국 기독교가 비윤리적, 비상식적인 모습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종교적 윤리적 강령들을 강조함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강조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고난 (박해 : Persecution)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종교적 윤리적 강령들이 소모적인 것이라면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으로부터 출발하는 순종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까. 성경의 예도 그렇고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그 결과는 고난 혹은 박해(persecution)였다.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외치는 세상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시다’라고 외치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심각한 갈등과 충돌을 필연적으로 갖게된다.
그런 의미에서 박해는 세계관의 충돌에서 비롯한다. ‘나를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내가 하나님이 아님’을 발견했을 때, ‘나를 하나님’이라고 여기며 쌓아왔던 모든 전제들은 더 이상 이 새로운 세계관의 사람들을 담아낼 수 없는 것이다. 로마시대의 세계관이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세계관을 도무지 담을 수 없어 그리스도인들이 사자밥이 된 것, 세속화된 중세교회에서 성경적인 메시지를 선포하려했던 초기 종교개혁자들이 받았던 박해도 이 세계관의 충돌로 이해할 수 있다. 한국 선교 초기에 선교사들과 초기 신도들이 받았던 박해 역시 구한말의 유교 봉건적 세계관이 그리스도인들의 세계관을 참아낼 수 없었던 것에 기인한다. 그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시대의 시대정신이 복음적 세계관과 충돌할 때 일어나는 것이 박해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있어서 그러한 충돌은 어디에 있는가? 이 문제는 많은 연구와 고찰이 필요할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더 이상 그러한 박해는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해의 근본적인 뿌리가 세계관의 충돌임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기꺼이 받아야만하는 박해의 내용들을 조금 자세히 볼 수 있다. 매우 치열한 충돌과 갈등이 있어야 하는데도 별로 그렇지 못한 예를 몇 개만 들어보자.
(1) 경쟁 하덕규씨가 노래했듯이, 우리 시대는 ‘함께 사는 법을 배우기보다 혼자 살아남는 것을 배우는’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정신에 정면으로 대항하여 살아간다면, 비록 그것이 정정당당한 경쟁이라 하더라도 다른 이들을 위해 스스로 패배자가 된다면, 아니 적어도 자신이 당연히 차지할 수 있는 것을 적극적으로 나누고 산다면, 그리고 그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된다면 이 사람은 이 시대가 가지고 있는 시대정신, 혹은 세상의 가치관에 대해 자신의 가치관으로 정면으로 대항하는 ‘박해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경쟁에서 낙오한 사람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인것같이 공감하며 함께 고통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 그러다가 어쩌면 자신도 치열한 경쟁에서 도태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어쩌면 진정으로 시대에 대항하여 사는 사람들이 아닐까. 우리 주변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과연 이러한 삶을 선택해서 살고 있을까.
(2) 성공주의 모두가 성공을 하고자 바둥바둥 하면서 사는 세상이다. 서점의 기독교 섹션에 가보아도 ‘성공’에 대한 수많은 베스트셀러들이 진열되어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렇게 모두가 ‘성공’을 향해 매진해 갈 때, 아내 혹은 남편의 자아실현을 위해 자신의 ‘성공’을 양보하고 스스로 한 단계 내려 앉는 삶을 선택했다면, 그 후에 주변에 자신과 함께 ‘성공’을 향해 달려갔던 사람들이 모두 어떤 성취와 성공을 과시할 때 자신의 초라한 모습과 비교하며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성공’만을 향해 달려갈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그러한 삶의 모습을 지켜나간다면 이 사람 역시 성공주의라는 거대한 시대정신에 맨몸으로 맞서도 있는 사람일 것이다.
(3) 직업선택 어떤 직업이 가지는 수입에는 두가지 결정 요소가 있다. 하나는 그 직업이 창출하는 사회적 문화적 가치이다. 즉, 그 일의 사회적 기여의 정도에 따라 그 임금 수준이 결정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일시적 혹은 장기적 사회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그 직업이 가지는 사회적 기여와 무관하게 그 임금 수준이 결정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직업이 창출하는 사회 문화적 가치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고 자신의 취향과 수입의 정도를 가지고 직업선택을 할 때, 임금 수준이 낮다 하더라도 더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을 선택을 한다면, 혹은 자신의 임금 수준이 사회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그 가치보다 더 많이 정해져 있으므로 적극적으로 그 잉여 부분을 다른 이들과 나눈다면, 이런 선택 역시 이 시대가 갖고 있는 가치관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자세일 것이다.
여기에 제시되어 있는 예들이 세상의 가치관에 대항하여 사는 가장 좋은 예들을 선별한 것은 아니다. 반드시 따라야할 지침들은 물론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각 사람에 맞게 어떤 길로 부르시고 그 부르심은 때로 세상의 시스템에 깊숙히 들어가서 사는 것일 수 있다. 이런 경우 전략적으로 겉보기에 세상의 가치관에 순응해서 사는 형태로 살아갈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매 순간이 정말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살아내고자 하는 의지와 자세가 아닐까.
고난받는 공동체, 거룩한 공동체
거대한 세상의 힘에 맞서는 일은 분명 두려운 일이다. 그리고 실제로 세상과 맞서 싸우다 낙오하고 ‘박해받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낙오하는 것은 과연 실패일까. 여기에 공동체의 중요성이 있다. 물론 세상에 맞서 비성경적 시대정신에 온몸으로 저항하다 낙오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경건의 영역에 그치게 된다. 그러나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일단의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함께 비성경적 시대정신에 저항할 때, 이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가져올 것이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그러하였다. 그들은 아주 단순히 자신들의 신앙의 양심으로 할 수 없는 일은 로마의 권력이, 시대 정신이, 사회적 통념이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던지 간에 하지 않았고, 자신들이 해야만하는 일들은 반드시 하고야 말았다. 성경말씀 그대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다시 해적선장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전체가 해적선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정면으로 대항해서 싸워야 하는 가치기준들을 외면한채 개인적인 종교적 윤리적 경건만을 추구한다면 우리의 모습이 해적선장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수도 있다. 조금 극단적인 비교가 되겠으나, 성적순결을 지키는 해적선장과 난봉꾼이지만 자신의 일에 충실한 해안경비대장 가운데 누가 더 유익한 사람이겠는가.
복음은 원천적으로 모든 권력과 모든 권세를 뒤집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 권력이 돈이건, 정치 권력이건, 사회적 통념이건간에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을 때 그것을 뒤집는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시대에, 하나님 나라 백성의 공동체가 세상의 경쟁주의, 성공주의, 배금주의, 인본주의에 대해 정면으로 대항하여 그것을 뒤집는 예를 얼마나 볼 수 있는가. 모두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에 대하여 태클을 걸며 유일한 하나님되신 그분의 뜻 이외에는 모든 것을 거부하는 당당함을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는가. 정치권력, 금전권력, 쾌락주의, 사회적 통념등과 끊임없이 타협하면서 만들어내는 구차한 변명들을 얼마나 우리 공동체 안에서 많이 접하는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당당하게 거부하고,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을 타협함없이 지키는 진성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낙오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에 맞서 나가는 모습을 우리 안에서 더 많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공동체가 함께 고난을 기꺼이 감당해 나가는 자세를 견지하며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선포하는 일들이 편만해 지길 소망한다. 그렇게 할 때 이땅의 우리 공동체들은 천박한 종교적 윤리적 강령들에 얽매여 하나님 나라 백성의 공동체를 세상에 벤치마킹하는 모습에서 벗어나, 거룩한 공동체가 될 수 있으리라.
사족
이 글은 아직 미숙한 한 유학생의 묵상 글입니다. 많은 분들의 조언, 충고, 첨언들을 기대합니다.
Dec 1, 2003 | 삶과 신앙/이시훈의 살며 생각하며
이코스타 2003년 12월호
화려하고 무성했던 잎새들이 다 떠난 나무들을 보면서 시간의 흐름을 느낍니다.
갈색으로 변한 잎새들이 아직 떠나지 못한 채 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는 모습은
계절의 바뀜을 무척 아쉽게 합니다
.
한 때 푸르렀고 단풍 들었던 기억들을 접고 숙연하게 서 있는 나무들을 보며
삶의 한 자세를 깨닫기도 합니다
.
옷을 다 벗어버린 나무는 겸허함과 삶에 대한 의지와 힘을 느끼게 하는
아름다움을 갖고 있습니다
. 비어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담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일깨우고
, 땅을 기름지게 하기 위해 잎새를 다 버리는 것은 내일의 풍성함을 약속하기
위한 헌신으로 보여집니다
.
간신히 매달려 있는 잎새들을 보다가 한 시인의 시에 담겨 있는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
“…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저물어 가는 한 해를 돌이켜 보며 나의 혀는 어떤 모습의 나무를 그려내었는가
자문해 봅니다
. 푸르고 싱싱한 잎새로 다른 이들을 축복하고 위안을 주었는지,
아름답고 진실한 잎새로 다른 이들에게 기쁨을 주었는지
,
검게 시들은 잎새처럼 분노와 슬픔을 느끼게 했는지
..
부끄러움과 자괴감이 들어서 혀를 감추고 싶어집니다
.
얼마 전 모 전시회에서 본 작품들 중 관심을 끌던 조각이 있었습니다
.
나무 기둥 위에 분홍색의 커다란 혀가 달려있는 작품이었습니다
.
그분의 다른 작품을 많이 접하지는 못했지만 그곳에 있는 몇 점의 작품을 통해서
그 작가는 사람들 간의 관계에 깊은 관심과 통찰력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그 작품을 통해 모든 관계의 교량이 되는 언어 소통에 대한 반성과 문제를 스스로에게
제기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
나무에 피어있는 아름다운 꽃처럼 보이는 혀의 모습이 한편으로는
그 나무를 쪼개는 칼처럼 보여지기도 했습니다
.
우리 몸의 아주 작은 부분인 혀가 몸과 영혼을 쪼개거나 두터운 관계를
순식간에 파괴하는 칼로 작용할 때가 얼마나 많은 지요
.
거대한 숲을 불사르는 불씨가 되기도 하고
, 배의 방향을 정하는 작은 키의 역할을
하기도 하는
(야고보서 3장) 혀라는 출구를 통해 천국을 경험하기도
지옥을 경험하게 되기도 합니다
.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는 미움과 시기
, 그릇된 판단과 교만한 생각들이
험담과 자랑의 언어들을 통해 밖으로 나와 다툼과 분열을 일으키고
상처를 입히곤 합니다
. 또한 그 칼은 그럴 수록 자신의 몸 깊이 박혀서
스스로를 상처 입히고 어둠의 세력을 불러옵니다
.
내 입 속의 검은 잎이 두렵다는 시인의 고백처럼 내 몸의 작은 한 부분인 혀를
통제하지 못하는 자신에 화가 나고
, 그 위력이 두렵기조차 할 때가 많습니다.
거짓과 위선
, 그럴싸한 미사여구로 포장된 미혹의 영, 추악한 욕망,
비수와 같이 날카로운 공격들이 언어라는 매개체를 통해 밖으로 나올 때
나의 혀는 죽음과 절망의 검은 잎에 불과할 것입니다
.
위로와 격려
, 진실이 담긴 조언, 지혜와 평안을 주는 대화, 마음을 드러내는
소박하고 정직한 표현들이 나의 입술에서 나와 누군가에게 빛을 주고
기쁨을 줄 수 있다면 나의 혀는 아름다운 분홍빛의 꽃이 될 수도 있겠지요
.
저희 이웃에 사는 한 미국인이 한국인 친구에게 배운 한국말을 자랑스럽게
저에게 들려준 적이 있었습니다
. 그가 할 줄 아는 모든 한국말들은
저를 무척 당황하게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 욕설에 가까운 언어나 어리석은 농담의
표현들만이 그가 아는 한국어였으니까요
. 저는 그에게 새로운 단어를 몇 개 가르쳐
주었습니다
. 감사합니다, 아름답습니다, 멋져요, 건강하세요…
무엇보다 중요하게 몇 번이나 반복시킨 표현은 “사랑해요“ 이었습니다
.
그가 알지도 못하고 내뱉은 언어들이 그 자신을 얼마나 천박한 인격체로
보이게 하는지
, 언어는 한 사람의 인격을 담는 그릇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어린 아이처럼 저도 새롭게 언어를 익히고 싶습니다
.
영혼을 더럽히고 다른 이를 상처 입히는 말들은 제 언어 창고에서 버려내고 싶습니다
.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과 살아가는 일에 대한 감사의 노래를 부르는 혀
,
기도하는 혀
, 사랑한다고 외치는 혀를 갖고 싶습니다.
새들이 찾아와 다투어 노래하고 그늘에 쉬기 위해 나그네가 찾아와 머무는
푸르고 싱싱한 잎새 무성한 나무가 될 수 있기 위해 검은 잎새의 혀를
,
칼 같은 혀를 버리렵니다
. 한 해가 저물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