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승] “반윤리적” 기독교

이코스타 2003년 12월호


해적선장 이야기


어느 해적선이 어느날 크게 약탈을 하는데 성공하였다. 수많은 보화와 진귀한 물건 뿐 아니라, 여러명의 아름다운 처녀들도 납치해 오는 큰 성과였다. 해적선상에서 이를 축하하는 잔치가 열렸다. 잔치가 한참 무르익었을 무렵, 선원 몇 명이 해적선장 앞에 아리따운 처녀 몇 명을 데리고 왔다. 재미있게 한탕 놀아보자는 것이었다. 그때 해적선장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네 이놈들, 너희들은 내가 결혼을 소중하게 여기는 크리스천임을 몰랐단 말이냐! 나는 결코 이 여자들에 손대지 않을 것이다!” 그날 밤 해적선장은 잠자리에 들기 전, 무릎을 꿇고 자신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이 이야기는 복음주의권에서 자주 회자되는 이야기이다. ‘개인적으로 신실한’ 신자들의 모습을, 해적선장이라는 비윤리적인 자리에 있으면서 개인적인 신앙생활의 신실함을 지켜내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비유한 내용이다. 과장이 되어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이 모습은 어쩌면 아주 전형적인(typical) 한국적 그리스도인의 슬픈 모습을 그려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A군의 직장생활 이야기


신실한 그리스도인인 A군은 한국의 어느 국가출연 연구소에 연구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학생으로 있으면서 캠퍼스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하기도 했었고, 지역교회에서도 성실한 일꾼으로 인정받던 A군은, 직장에 가서도 신우회 활동등을 통해 ‘직장 복음화’를 이루겠다는 꿈에 부풀어 직장에 들어갔다. 그런데 직장에서 A군이 부딪혀야했던 ‘세상’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번꼴로 있는 회식에서 여러가지 이유로 술을 거부하는 것이 마음 늘 부담이 되었다. 한약을 먹는다, 개인적으로 술이 안받는다, 운전을 해야한다는 등의 핑계도 이전 거의 떨어져 가고 있다. 주일마다 나와서 일을 하라는 압력을 받는 것도 A군에게는 심각한 도전이다. 교회에서 여러가지 일로 섬기고 있는 터에 주일은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원칙으로 세우고 있는 A군은 이 원칙을 깨지 않으려 정말 힘들게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A군을 또 힘들게 하는 것은 가끔 ‘전문가 초청’ 가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가끔 세미나를 부탁한 전문가가 세미나를 펑크내면, 그냥 그 세미나가 열린 것으로 보고서를 써 내고 거기서 나온 경비로 연구실 회식을 하는 것이었다. 거짓 보고서로 회식이 마련되면 A군은 또한 여러가지 핑계를 대고 회식에 빠지려 노력하였다. 부정에 동참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가끔 직장 상사에게 피치못할 거짓말을 하는 것도 늘 마음에 걸렸다. 어쩌다 일이 밀려 기한내에 끝내지 못하면, 일을 이미 다른 부서로 넘겼는데 그쪽에서 아직 넘어오지 않아서 그렇다고 몇번 둘러대곤 했는데 이런 사소한 거짓말에도 A군은 심하게 마음이 찔렸다. 매일의 삶에서 이렇게 끊임없이 다가오는 도전들에 정정당당하게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역시 기도 외에는 없다는 생각에 A군은 힘들지만 매일 새벽기도에 나갈 것을 결심한다. 거짓말하지 말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 지어다. 이런 성경구절들이 A군의 QT 노트에는 자주 적히게 된다.


이것은 가상의 어떤 ‘경건한’ 그리스도인 청년의 이야기이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고자 노력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담겨져 있다. 하루하루의 삶에서 작은 것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 노력하며 분투하는 모습. 그러나, 이 모습을 위의 해적선장 이야기에 대비시켜보면서 뭔가 석연치 않은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반윤리적인 기독교


많은 사람들이 한국 기독교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여러 가지 비판의 소리가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큰 비판의 소리 가운데 하나는, 한국 기독교가 ‘도덕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목회자의 개인적인 비리와 부정축재, 당회장의 권력을 투명하지 않은 절차를 통해 아들에게 물려주는 문제, 교회가 다른 ‘사업’을 벌이면서 터져나오는 각종 탈세 혹은 비리 의혹들. 그 외에도 사회적으로 크고 작은 문제들이 터질 때 마다 항상 단골로 등장하는 교회의 집사, 장로, 권사, 목사님들. 이런 우리의 자아상이 우리 스스로 부끄러워서 일까, 어떻게든 하나님의 교회를 바로 세워야한다는 사명감에서일까, 아니면 함께 싸잡아서 욕먹는 것이 못내 분해서일까, 우리 안에서도 이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쏟아내는 목소리들이 높다. 그리스도인들의 도덕성이 땅에 떨어졌노라고. 적어도 세상의 상식 수준의 도덕만이라도 우리안에서 회복하자고. 사실 우리는 얼마나 교회나 기타 기독교 관련 단체 혹은 집회 등에서 ‘종교적’ 혹은 ‘도덕적’이길 도전받는가. 주일성수, 금연, 금주, 십일조와 같은 ‘종교적 규율’들과 정직, 청렴, 사랑, 자비와 같은 ‘윤리적 규율’ 등을 나열하면서 이것들을 지키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자고. 그리고 우리 복음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적 윤리 기준은 세상의 타락한 가치기준보다 우월하다고. 그러나, 정말 그런가. 철저히 인본주의적인 기반에서 미국내의 불법 이민자들, 미혼모들을 돌보는 social worker들을 보았는가. 이들은 그들과 하나가 되기 위에 일부러 흑인 저소득층이 사는 지역에 가서 자기 자녀들을 교육시키며 박봉으로 그들의 어려움을 온 몸으로 섬기는 사람들이다. 이런 이들의 도덕기준보다 과연 기독교의 도덕기준이 얼마나 더 우월하단 말인가.


자크엘룰(Jacques Ellul)에 따르면,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반윤리적’인 종교다.


“하나님과의 만남에 방해물로 나타나는 모든 도덕을 초월하라는 것이다. 사랑은 어떤 도덕에도 굴복하지 않고 어떤 도덕도 만들지 않는다. 계시된 진리들(자유, 진리, 빛, 말씀, 거룩)은 어떤 것도 도덕과 관계하지 않으며, 또한 도덕을 탄생시킬 수 없다. 그 진리들이 일깨우는 것은 존재 양식과 삶의 모습이다. 그 삶의 모습은 지극히 자유로우며, 끊임없이 위험에 처하지만 항상 새롭게 되는 것이다. 도덕이란, 그것이 어떤 것이든간에, 하나의 금지이며 장애물이고 또한 그 안에 정죄를 내포한다. 정확히 예수께서 모든 도덕적 인물들에의해 어쩔 수 없이 정죄받은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기독교 역사상 가장 근본적인 비극들 가운데 하나는 이 자유한 말씀이 도덕으로 변형된 것이다.” (자크엘룰, 뒤틀려진 기독교, p120-121,대장간 1990)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의 차이는 윤리적이냐 그렇지 않느냐, 혹은 윤리적으로 누가 우월하고 열등하냐하는 것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을을 비그리스도인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하고도 유일한 원리는 이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나는 하나님이 아니다.


즉, 전적타자(全的他者)로서의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도무지 채울 수 없는 간극(gap)이 있어서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하나님같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절대적으로 인정할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절대적인 하나님에 대하여 모두 상대화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나는 하나님이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만들어진 윤리적 강령들 심지어는 도덕적 강령들이 절대화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복음의 근본을 흔드는 심각한 도전이다.


앞의 A군의 예를 다시 생각해 보자. 물론 A군이 성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노력하는 열정은 분명히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A군이 지키려 했던 주일성수, 금주와 같은 종교적 강령들이나 정직, 성실과 같은 윤리적 강령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을 때, A군의 노력은 매우 소모적인 것이 될수도 있다. 또한, 경건하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이 반복해서 종교적, 윤리적이되는 이유도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이 계속 점검되지 않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의 기독교, 특히 한국 기독교가 비윤리적, 비상식적인 모습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종교적 윤리적 강령들을 강조함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강조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고난 (박해 : Persecution)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종교적 윤리적 강령들이 소모적인 것이라면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으로부터 출발하는 순종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까. 성경의 예도 그렇고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그 결과는 고난 혹은 박해(persecution)였다.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외치는 세상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시다’라고 외치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심각한 갈등과 충돌을 필연적으로 갖게된다.


그런 의미에서 박해는 세계관의 충돌에서 비롯한다. ‘나를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내가 하나님이 아님’을 발견했을 때, ‘나를 하나님’이라고 여기며 쌓아왔던 모든 전제들은 더 이상 이 새로운 세계관의 사람들을 담아낼 수 없는 것이다. 로마시대의 세계관이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세계관을 도무지 담을 수 없어 그리스도인들이 사자밥이 된 것, 세속화된 중세교회에서 성경적인 메시지를 선포하려했던 초기 종교개혁자들이 받았던 박해도 이 세계관의 충돌로 이해할 수 있다. 한국 선교 초기에 선교사들과 초기 신도들이 받았던 박해 역시 구한말의 유교 봉건적 세계관이 그리스도인들의 세계관을 참아낼 수 없었던 것에 기인한다. 그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시대의 시대정신이 복음적 세계관과 충돌할 때 일어나는 것이 박해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있어서 그러한 충돌은 어디에 있는가? 이 문제는 많은 연구와 고찰이 필요할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더 이상 그러한 박해는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해의 근본적인 뿌리가 세계관의 충돌임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기꺼이 받아야만하는 박해의 내용들을 조금 자세히 볼 수 있다. 매우 치열한 충돌과 갈등이 있어야 하는데도 별로 그렇지 못한 예를 몇 개만 들어보자.


(1) 경쟁 하덕규씨가 노래했듯이, 우리 시대는 ‘함께 사는 법을 배우기보다 혼자 살아남는 것을 배우는’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정신에 정면으로 대항하여 살아간다면, 비록 그것이 정정당당한 경쟁이라 하더라도 다른 이들을 위해 스스로 패배자가 된다면, 아니 적어도 자신이 당연히 차지할 수 있는 것을 적극적으로 나누고 산다면, 그리고 그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된다면 이 사람은 이 시대가 가지고 있는 시대정신, 혹은 세상의 가치관에 대해 자신의 가치관으로 정면으로 대항하는 ‘박해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경쟁에서 낙오한 사람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인것같이 공감하며 함께 고통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 그러다가 어쩌면 자신도 치열한 경쟁에서 도태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어쩌면 진정으로 시대에 대항하여 사는 사람들이 아닐까. 우리 주변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과연 이러한 삶을 선택해서 살고 있을까.


(2) 성공주의 모두가 성공을 하고자 바둥바둥 하면서 사는 세상이다. 서점의 기독교 섹션에 가보아도 ‘성공’에 대한 수많은 베스트셀러들이 진열되어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렇게 모두가 ‘성공’을 향해 매진해 갈 때, 아내 혹은 남편의 자아실현을 위해 자신의 ‘성공’을 양보하고 스스로 한 단계 내려 앉는 삶을 선택했다면, 그 후에 주변에 자신과 함께 ‘성공’을 향해 달려갔던 사람들이 모두 어떤 성취와 성공을 과시할 때 자신의 초라한 모습과 비교하며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성공’만을 향해 달려갈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그러한 삶의 모습을 지켜나간다면 이 사람 역시 성공주의라는 거대한 시대정신에 맨몸으로 맞서도 있는 사람일 것이다.


(3) 직업선택 어떤 직업이 가지는 수입에는 두가지 결정 요소가 있다. 하나는 그 직업이 창출하는 사회적 문화적 가치이다. 즉, 그 일의 사회적 기여의 정도에 따라 그 임금 수준이 결정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일시적 혹은 장기적 사회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그 직업이 가지는 사회적 기여와 무관하게 그 임금 수준이 결정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직업이 창출하는 사회 문화적 가치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고 자신의 취향과 수입의 정도를 가지고 직업선택을 할 때, 임금 수준이 낮다 하더라도 더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을 선택을 한다면, 혹은 자신의 임금 수준이 사회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그 가치보다 더 많이 정해져 있으므로 적극적으로 그 잉여 부분을 다른 이들과 나눈다면, 이런 선택 역시 이 시대가 갖고 있는 가치관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자세일 것이다.


여기에 제시되어 있는 예들이 세상의 가치관에 대항하여 사는 가장 좋은 예들을 선별한 것은 아니다. 반드시 따라야할 지침들은 물론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각 사람에 맞게 어떤 길로 부르시고 그 부르심은 때로 세상의 시스템에 깊숙히 들어가서 사는 것일 수 있다. 이런 경우 전략적으로 겉보기에 세상의 가치관에 순응해서 사는 형태로 살아갈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매 순간이 정말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살아내고자 하는 의지와 자세가 아닐까.


고난받는 공동체, 거룩한 공동체


거대한 세상의 힘에 맞서는 일은 분명 두려운 일이다. 그리고 실제로 세상과 맞서 싸우다 낙오하고 ‘박해받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낙오하는 것은 과연 실패일까. 여기에 공동체의 중요성이 있다. 물론 세상에 맞서 비성경적 시대정신에 온몸으로 저항하다 낙오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경건의 영역에 그치게 된다. 그러나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일단의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함께 비성경적 시대정신에 저항할 때, 이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가져올 것이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그러하였다. 그들은 아주 단순히 자신들의 신앙의 양심으로 할 수 없는 일은 로마의 권력이, 시대 정신이, 사회적 통념이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던지 간에 하지 않았고, 자신들이 해야만하는 일들은 반드시 하고야 말았다. 성경말씀 그대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다시 해적선장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전체가 해적선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정면으로 대항해서 싸워야 하는 가치기준들을 외면한채 개인적인 종교적 윤리적 경건만을 추구한다면 우리의 모습이 해적선장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수도 있다. 조금 극단적인 비교가 되겠으나, 성적순결을 지키는 해적선장과 난봉꾼이지만 자신의 일에 충실한 해안경비대장 가운데 누가 더 유익한 사람이겠는가.


복음은 원천적으로 모든 권력과 모든 권세를 뒤집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 권력이 돈이건, 정치 권력이건, 사회적 통념이건간에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을 때 그것을 뒤집는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시대에, 하나님 나라 백성의 공동체가 세상의 경쟁주의, 성공주의, 배금주의, 인본주의에 대해 정면으로 대항하여 그것을 뒤집는 예를 얼마나 볼 수 있는가. 모두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에 대하여 태클을 걸며 유일한 하나님되신 그분의 뜻 이외에는 모든 것을 거부하는 당당함을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는가. 정치권력, 금전권력, 쾌락주의, 사회적 통념등과 끊임없이 타협하면서 만들어내는 구차한 변명들을 얼마나 우리 공동체 안에서 많이 접하는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당당하게 거부하고,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을 타협함없이 지키는 진성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낙오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에 맞서 나가는 모습을 우리 안에서 더 많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공동체가 함께 고난을 기꺼이 감당해 나가는 자세를 견지하며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선포하는 일들이 편만해 지길 소망한다. 그렇게 할 때 이땅의 우리 공동체들은 천박한 종교적 윤리적 강령들에 얽매여 하나님 나라 백성의 공동체를 세상에 벤치마킹하는 모습에서 벗어나, 거룩한 공동체가 될 수 있으리라.


사족


이 글은 아직 미숙한 한 유학생의 묵상 글입니다. 많은 분들의 조언, 충고, 첨언들을 기대합니다.

[이시훈] 입 속의 검은 잎

이코스타 2003년 12월호

 

화려하고 무성했던 잎새들이 다 떠난 나무들을 보면서 시간의 흐름을 느낍니다.



갈색으로 변한 잎새들이 아직 떠나지 못한 채 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는 모습은



계절의 바뀜을 무척 아쉽게 합니다.



한 때 푸르렀고 단풍 들었던 기억들을 접고 숙연하게 서 있는 나무들을 보며



삶의 한 자세를 깨닫기도 합니다.



 



옷을 다 벗어버린 나무는 겸허함과 삶에 대한 의지와 힘을 느끼게 하는



아름다움을 갖고 있습니다. 비어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담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일깨우고, 땅을 기름지게 하기 위해 잎새를 다 버리는 것은 내일의 풍성함을 약속하기



위한 헌신으로 보여집니다.



 



간신히 매달려 있는 잎새들을 보다가 한 시인의 시에 담겨 있는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저물어 가는 한 해를 돌이켜 보며 나의 혀는 어떤 모습의 나무를 그려내었는가



자문해 봅니다. 푸르고 싱싱한 잎새로 다른 이들을 축복하고 위안을 주었는지,



아름답고 진실한 잎새로 다른 이들에게 기쁨을 주었는지,



검게 시들은 잎새처럼 분노와 슬픔을 느끼게 했는지..



부끄러움과 자괴감이 들어서 혀를 감추고 싶어집니다.



 



얼마 전 모 전시회에서 본 작품들 중 관심을 끌던 조각이 있었습니다.



나무 기둥 위에 분홍색의 커다란 혀가 달려있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분의 다른 작품을 많이 접하지는 못했지만 그곳에 있는 몇 점의 작품을 통해서



그 작가는 사람들 간의 관계에 깊은 관심과 통찰력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작품을 통해 모든 관계의 교량이 되는 언어 소통에 대한 반성과 문제를 스스로에게



제기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나무에 피어있는 아름다운 꽃처럼 보이는 혀의 모습이 한편으로는



그 나무를 쪼개는 칼처럼 보여지기도 했습니다.



우리 몸의 아주 작은 부분인 혀가 몸과 영혼을 쪼개거나 두터운 관계를



순식간에 파괴하는 칼로 작용할 때가 얼마나 많은 지요.



거대한 숲을 불사르는 불씨가 되기도 하고, 배의 방향을 정하는 작은 키의 역할을



하기도 하는(야고보서 3) 혀라는 출구를 통해 천국을 경험하기도



지옥을 경험하게 되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는 미움과 시기, 그릇된 판단과 교만한 생각들이



험담과 자랑의 언어들을 통해 밖으로 나와 다툼과 분열을 일으키고



상처를 입히곤 합니다. 또한 그 칼은 그럴 수록 자신의 몸 깊이 박혀서



스스로를 상처 입히고 어둠의 세력을 불러옵니다.



내 입 속의 검은 잎이 두렵다는 시인의 고백처럼 내 몸의 작은 한 부분인 혀를



통제하지 못하는 자신에 화가 나고, 그 위력이 두렵기조차 할 때가 많습니다.



 



거짓과 위선, 그럴싸한 미사여구로 포장된 미혹의 영, 추악한 욕망,



비수와 같이 날카로운 공격들이 언어라는 매개체를 통해 밖으로 나올 때



나의 혀는 죽음과 절망의 검은 잎에 불과할 것입니다.



위로와 격려, 진실이 담긴 조언, 지혜와 평안을 주는 대화, 마음을 드러내는



소박하고 정직한 표현들이 나의 입술에서 나와 누군가에게 빛을 주고



기쁨을 줄 수 있다면 나의 혀는 아름다운 분홍빛의 꽃이 될 수도 있겠지요.



 



저희 이웃에 사는 한 미국인이 한국인 친구에게 배운 한국말을 자랑스럽게



저에게 들려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할 줄 아는 모든 한국말들은



저를 무척 당황하게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욕설에 가까운 언어나 어리석은 농담의



표현들만이 그가 아는 한국어였으니까요. 저는 그에게 새로운 단어를 몇 개 가르쳐



주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름답습니다, 멋져요, 건강하세요



무엇보다 중요하게 몇 번이나 반복시킨 표현은 “사랑해요“ 이었습니다. 



 



그가 알지도 못하고 내뱉은 언어들이 그 자신을 얼마나 천박한 인격체로



보이게 하는지, 언어는 한 사람의 인격을 담는 그릇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어린 아이처럼 저도 새롭게 언어를 익히고 싶습니다.



영혼을 더럽히고 다른 이를 상처 입히는 말들은 제 언어 창고에서 버려내고 싶습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과 살아가는 일에 대한 감사의 노래를 부르는 혀,



기도하는 혀, 사랑한다고 외치는 혀를 갖고 싶습니다.



 



새들이 찾아와 다투어 노래하고 그늘에 쉬기 위해 나그네가 찾아와 머무는



푸르고 싱싱한 잎새 무성한 나무가 될 수 있기 위해 검은 잎새의 혀를,



칼 같은 혀를 버리렵니다. 한 해가 저물기 전에

[정진호] 제 3 떡 소알에서 소돔까지 – 도시 지향적 인간형, 롯과 그의 아내

 

성경에는 정말 귀중한 것을 버리고 도시(都市)에 속한 문화와 향락을 좇아가다가 화를 당한 한 가정의 불행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성경에 나타난 인물들 가운데 롯만큼 여러 번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손길을 체험하고도 그 기회를 포착하지 못한 인물도 드물다. 롯은 우상(偶像)의 도시 하란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의 삼촌 아브라함을 따라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삶의 거처를 옮긴다. 롯이 아브라함을 따라갈 수 있었던 것은 자식이 없었던 아브라함과 일찍 아버지를 여읜 롯 사이에 부자지간과 같은 정으로 맺어져 있었던 까닭도 있었겠지만, 롯의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의 장막에 거할 수 있도록 섭리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음도 간과해선 안 된다. 아무튼 그는 그 당시로는 드물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아브라함의 집에서 살게 되는 큰 축복을 누리게 된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모태신앙의 축복을 누린 사람들과 큰 차이가 없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기근을 피해 아브라함과 롯이 애굽으로 이주했을 때, 롯은 이방의 도시문화가 가져다주는 풍요와 안락함의 단맛을 보게 된다. 어쩌면 그곳에서 롯은 청년 시기를 보내며 연애를 하고 아내를 얻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사라를 바로에게 빼앗길 뻔한 위기를 넘긴 아브라함은 오히려 바로의 궁에서 수많은 소유물, 즉 육축과 은금을 이끌고 애굽을 나오게 된다. 그러나 소유물의 넘치는 풍요로 말미암아 롯은 아브라함과 다투게 된다. 육축으로 인한 하속들의 다툼이 심해지자 마침내 아브라함은 친아들처럼 키워왔던 롯과 갈라서는 길을 택하고 만다. 행운이라 생각되었던 물질의 축복이 오히려 화근이 되고만 것이다. 지금도 재물로 인해 친밀했던 가족 사이에 금이 가고 때론 원수지간으로 변해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골육간에 헤어지는 아픔을 삼키며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조카에게 땅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먼저 주었을 때, 롯은 애굽 시절을 회상하며 약속의 땅 가나안을 버리고 요단 동편의 성읍을 선택한다. 재물에 눈이 어두워진 롯에게는 이미 삼촌에 대한 양보심은 뒷전이었고, 메마른 땅 가나안보다도 물이 넉넉히 차 있는 비옥한 땅 요단 들판이 매혹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이에 대해 성경은 롯이 요단 들을 바라보았을 때의 심정을 표현하여 ?마치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1310)고 기록하고 있다. 어쩌면 그의 내면에는 애굽의 피난 시절 누리던 도시의 안락함과 화려함에 대한 그리움이 잠재되어 있었을지 모른다. 그의 눈을 자극했던 것은 바로 도시 생활에 대한 향수였던 것이다. 하루 속히 지긋지긋한 유목민 생활을 벗어나 독립하여 도시로 가서 살자고 충동질하며 옆에서 부추긴 것은 롯의 아내였을 수도 있다. 아무튼 그들의 눈에 처음 들어왔던 것은 작은 성읍 소알이었다. 비록 작은 도시였지만 도시 생활을 시작한다는 기쁨에 젖어 그들은 아브라함의 장막을 떠났다. 더 크고 화려한 도시를 사모하던 그들은 요단 평지에 속한 여러 도시들을 전전하다가 마침내 죄악의 도시 소돔성으로 들어가고 만다.



인간적인 꾀로 당시에는 자신에게 많은 이득을 가져다 준 듯이 보이던 선택이 세월이 지나며 결국 어리석은 선택이었음이 판명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롯은 요단 동편을 택한 후 거친 유목생활에서 벗어나 도시생활로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을 바꾸게 되었다. 당시의 대도시요 화려한 문화도시 소돔으로 들어간 그 가정은 뜻하지 않은 전화(戰禍)에 휘말리게 된다. 창세기 14장은 그 당시에 벌어졌던 여러 도시간의 치열한 전쟁 상황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 당시 시날 평야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종주국 엘람의 그돌라오멜에 반기를 들고 반역 전쟁을 일으킨 다섯 도시가 있었다. 소돔,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소알 이 다섯 도시가 더 이상의 조공을 거부하며 독립 전쟁을 일으킨다. 이에 맞서 시날, 엘라살, 엘람, 고임 네 도시가 반격을 가하여 반란군과 연합군 사이의 큰 전쟁이 일어난다. 이 전쟁은 단순한 육적 전쟁이 아니라, 셈의 장자였던 엘람(10:22)을 통해 믿음의 정통성을 이어오던 종주국에 대해 맞서고자 하는 영적 반역 전쟁이었다. 그 결과는 반란군의 대 참패로 끝나고 소돔왕 베라는 재물과 사람을 모두 빼앗기고 롯은 전쟁 포로로 잡히는 신세가 된다.



그 당시 전쟁 포로에게 내려지던 풍습에 따라 죽임을 당하거나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롯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신다. 조카 롯이 당한 비운의 소식을 전해들은 아브라함은 자신을 버리고 떠난 조카를 구하기 위해 삼백 십팔 인의 훈련된 부하를 이끌고 야간 기습을 감행하여 포로와 재물을 전부 찾아온다. 이때 만일 롯이 정신을 차렸다면 죄악의 도시 소돔을 떠나 아브라함과 화해하고 재결합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롯은 여전히 소돔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임박한 죄악의 도시로 다시 돌아가고 만다.



소돔을 심판하기로 작정한 하나님의 계획을 미리 알게 된 아브라함은 자식처럼 키운 롯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중보자로서 하나님과의 끈질긴 설득 작업에 나선다. ?만일 소돔 땅에 의인이 오십 명이 있다면 그 도시를 멸하시겠습니까?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 의인들을 위해 그 도시를 구원해 주심이 마땅치 않습니까?? 라고 질문을 던졌던 아브라함은, 물론 용서하겠다는 하나님의 즉각적인 대답 앞에 자신을 잃고 의인의 수를 감소시킨다. 사십 오, 사십, 삼십, 이십, 십까지 내려가던 중 그 대화는 갑자기 끝이 난다. 많은 경우 목사님들의 설교에서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멸망당한 소돔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러나 정말 그랬을까? 소돔에 의인이 있었을까? 그렇다면 몇 명이? 아홉명? 다섯명? 아니면 한 명? 의인이 있었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무시하셨을까? 그보다 롯은 과연 의인이었는가? 그는 의인이었기에 구원을 받았는가? 그렇지 않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대화 가운데 순간 깨달았던 것이다. 소돔 안에 의인은 한 사람도 없음을. 그래서 그는 더 이상 대화를 진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롯을 구원해 주신 것은 순전히 아브라함의 중보 기도를 통해 베푸신 은혜일 뿐이다.



창세기 19장은 심판이 임박한 소돔성의 전야에 전개되는 롯의 가족을 둘러싼 삶과 죽음의 변주곡을 숨막히게 묘사하고 있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소도미스트(sodomist, 소돔사람들, 곧 동성연애자)라는 단어가 말해주듯이 온갖 음욕과 육욕이 들끓는 남색(男色)의 도시 소돔에서 롯은 최후의 전령으로 파견된 두 천사를 부지 중 나그네로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젊고 아름다운 두 청년이 롯의 집으로 들어갔다는 소문을 들은 소돔인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그의 집을 둘러싸게 된다. 이미 인간으로서의 존귀성을 찾아보기 힘든 소돔인들이 두 나그네를 자신들의 육욕의 재물로 내놓으라고 아우성치는 장면에서 우리는 소돔을 멸하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 머리 위에 머무르며 얼마나 오래 참아왔던가를 엿볼 수 있다.



도대체 롯이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를 가리켜 성경은 의인이라고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벧후 2:7-8) 롯은 아브라함의 장막에서 자란 사람이다. 물론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는 것을 어려서부터 배워 알았던 사람이다. 그의 마음에는 믿음으로 인한 선한 양심이 있었다. 그랬기에 소돔 땅에서 행해지고 있었던 온갖 음란한 행실로 인해 그의 심령이 상하였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그 같은 환경은 롯의 도덕성과 성결성을 크게 해치고 손상하였을 것이다. 두 천사를 내놓으라고 소리치는 폭도들에게 정혼한 자신의 두 딸을 대신 내어주겠다고 제의를 하는 아버지가 온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일 수가 없다. 믿는 자라 할지라도 음란의 환경에 오래 노출되면 그의 영이 심한 상처를 입게 되어 양심이 무뎌지게 마련이듯이 이미 롯의 양심과 판단력은 흐려질 대로 흐려져 있었다.



마침내 천사들에 의해 심판의 메시지가 선포되고 성읍을 곧 떠나라는 권고와 함께 그에 속한 모든 식구들에게도 그 소식이 전해진다. 소돔성을 떠나라는 구원의 메시지는 롯의 사위들에게는 어처구니없는 농담으로 받아들여진다. 정작 롯 조차도 재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결단을 못 내리며 머뭇머뭇 지체하다가 마침내 새벽 동이 틀 시간이 되고 말았다. 곧 시작될 유황불의 심판을 앞두고 하나님은 은총을 더하셔서 천사들이 강제로 롯과 아내 그리고 두 딸의 손목을 잡아 인도하여 성밖에 두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 순간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거나 하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는 황급한 명령 앞에서 롯이 보인 태도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목숨이 경각(頃刻)에 달린 그 순간에 있어서도 롯은 머뭇거리며 작은 성읍 소알로 자신들의 피신처를 삼게 해 달라고 안간힘을 쓰는 어리석음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19:17-22) 작은 성읍 소알은 과연 어떤 도시인가?



롯은 산으로 피하라는 명령을 두려워하여 작은 성읍 소알로 자신의 가족이 피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간절히 구하였다. 소돔을 창졸지간에 떠나야했던 롯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신뢰보다는 최소한 소알 정도의 도시가 되어야만 자신들의 가족이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어리석은 생각이 앞서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시어 그의 소원을 들어주신다. 어리석은 자의 기도이지만 간청하는 기도를 뿌리치지 않고 들어주시는 하나님의 자비가 극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는 마치 창세기 4장에서 살인자 카인의 간청을 들으사 그에게 표를 주시고 생명을 구원토록 하시는 장면을 생각나게 한다.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를 기억하셨음은 물론이다. 죽음으로부터의 도피, 그 질주의 순간에도 롯의 아내는 두고 온 재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아 비극적인 소금기둥이 되고 만다. 롯이 두 딸과 함께 소알에 들어서는 순간 해가 솟았고 유황불이 비같이 하늘에서 쏟아져 소돔과 고모라는 마침내 멸망당하고 만다. 멀리서 바라보니 마치 옹기점 연기처럼 치밀어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원자폭탄이 투하된 이후에 피어올랐던 버섯구름의 모습이 아니었을지….



창세기 19장을 통해 보면, 이 날 멸망당한 도시가 소돔과 고모라 뿐인 듯이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신명기 2923절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멸망당한 성은 아드마와 스보임을 포함한 네 개 성읍이었다. 이 도시들은 창세기 14장에서 종주국 엘람 왕에게 영적 반란을 일으켰던 다섯 도시 중 네 도시였고, 오직 소알 만이 그 심판에서 제외되었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소알 역시 이날 멸망당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도시였으나 롯의 간청으로 말미암아 한 도시가 구원을 받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더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천사들이 산으로 피신하라고 권할 때는 절대 못 가겠다고 버텼던 롯이 가까스로 얻은 새 삶의 거쳐 소알을 버리고 스스로 다시 산으로 도망가고 만다.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받아 멸망당하는 것을 체험한 롯은 비슷한 죄 속에서 살아가는 소알 역시 언제 멸망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다.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성을 쌓아야만 했던 카인의 심리 상태……. 이미 롯에게는 은혜를 받고도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지 못하는 카인의 불신앙이 뼛속까지 스며들어 있었던 것이다. 롯이 과연 구원을 받았을까?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상기해 본다면 롯에게는 더 이상 믿음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여진다. 두 딸과 함께 산 속으로 숨어 들어가 도시 사람들과의 접촉을 끊고 굴혈인(掘穴人) 되어 폐인과 같은 생활을 해야만 했던 그는 자신이 이미 음욕의 제물로 내어주었던 두 딸로 하여금 근친상간의 불륜을 저지르게 하여 인류 역사상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기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만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결국 처절한 멸망의 인생으로 끝을 맺고만 롯……, 도대체 그의 문제는 어디에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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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KBS 인간극장의 책임 PD로 이름이 알려진 김우현 PD가 자신이 운영하는 버드나무(www.birdtree.net)의 촬영 제작진을 이끌고 취재차 연변과기대를 방문하였다. 그 일행 중 하나로 김동호 목사님의 둘째 아들 지열이가 함께 와서 우리 집을 찾아온 일이 있었다. 다니던 한동대학을 그만 두고 영화 제작에 꿈을 품고 한국종합예술대학 영화과에 다시 입학한 독특한 친구다. 그래서 그런지 예술적인 끼가 있어서 아내와 금새 잘 통하게 되었다. 그가 우리 집에 들어와서는 아내가 꾸며놓은 집안 분위기를 둘러보고는 대뜸 한다는 소리가 ?사모님은 파리에서 사는 것이 어울릴 분인데, 연길에 사시는군요.? 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말이 아내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는지 퇴근 후에 보니 얼굴이 시무룩해 있었다.



중국 생활을 시작한 이후 아내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그녀의 예술적 감수성을 채워 주지 못하는 연길의 열악한 문화 환경이었다. 간혹 자기는 뉴욕 맨하탄에서 살아야 할 시티 걸(city girl)인데, 남편을 잘못 만나서 이곳까지 왔노라고 투정을 하곤 했다. 유일한 문화 생활이라고 해야 고작 틈을 내어 영화를 빌려 보는 것인데, 미국 영화는 왜 그리 보스톤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가 많은 지. 영화를 보다가 보스톤 중심가와 찰스 강변의 아름다운 풍경이 나오면 다시금 옛 향수에 젖어서 눈물을 글썽일 때가 많았다.



보스톤의 아름다운 추억 중 하나는 금요일 저녁의 부부 성경공부 모임이었다. 말씀으로 한창 깨우치던 때라 그 시간이 꿀처럼 달고 기다려졌다. 더욱 좋았던 것은 성경공부가 끝나고 다과를 나누며 밤늦게까지 모여 앉아 담소하며 주말을 만끽하던 그 여유로운 분위기였던 것 같다. 그 시간이 되면 자연스레 남자들은 남자들끼리 학업이나 스포츠, 세상 정치 이야기로, 또 아내들은 자기들만의 가정 화제로 모여 앉아 수다(?)들을 떨곤 했다. 유학생 아내들의 그 당시 가장 큰 관심사와 화제거리는 남편의 학위가 끝난 후 어디로 직장이 구해지는가 하는 것과 돌아가기 전에 미국서 어떤 살림살이를 장만할 것인가에 대해 서로 정보를 교환하는 것들이었다. 대부분의 부인들은 어떻게든 남편이 서울에 직장을 구하기를 원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자매가 힘주어 하는 이야기가 우연히 귀에 들려왔다. ?나는 대전까지는 참을 수 있어도 그 이하는 절대로 안돼.?라고 했던 것 같다. 아마 농담으로 한 것이었겠지만, 그 한 마디 말속에 크고 화려한 도시에서 살고 싶어하는 여자들의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던 것 같다. 다름 아닌 롯의 아내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나와 아내의 지난 삶을 돌아보면, 우리 부부야말로 롯과 롯의 아내의 삶을 살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그런 사람을 어찌하여 하나님이 이곳까지 끌고 오셔서 강제로(?) 아브라함과 사라의 인생을 살게 하셨는지은혜일 뿐이다. 롯의 아내만큼이나 화려한 것을 좋아하던 여자. 온갖 세간으로 우아하게 집안을 꾸미며 살아가고 싶어했던 여자. 그리고 고급 백화점에서 자기 맘에 드는 의상으로 마음껏 쇼핑을 하며 살고 싶었던 그녀가 연길이라는 새장에 갇혀버린 것이다. 백화점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생일 선물을 사줄 것이 없어서 중국식 주방용 식칼을 살 수 밖에 없었던 그 시절. 먼지 바람과 연기에 휩싸인 추운 겨울 거리에 겹겹이 입은 내복과 파카 이외에는 아무런 옷이 필요 없는 도시. 그 새장 안에 갇혀서 아내는 보스톤을 꿈꾸며 눈물 흘렸다. 그토록 화려한 도시의 문화 생활을 그리워하던 아내도 십년이라는 세월 앞에서 나이가 들어가고 점차 체념의 세월을 살기 시작했다. 처음에 가지고 왔던 살림살이와 옷가지들을 지난 10년 간 계속 줄이고 버리고 남을 주는 바람에 이제는 단촐한 세간과 여기 저기 고장난 전자제품들 밖에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우리 집에 오면 이상하게 까페 분위기가 난다고 한다. 그것은 안타까움으로 배어있는 아내의 문화적 체취일 뿐이다.



화려한 연주자로 대형 교회의 파이프 오르가니스트로 살아가는 것이 꿈이었던 아내. 독주회와 청중의 박수갈채에 익숙하고 바하와 오르간이 우상이었던 아내에게 연길 생활은 그녀가 원하던 음악과 문화를 빼앗아 갔다. 피아노 앞에서 딩동거리는 반주자 양성, 유행가를 가르쳐야 하는 수업시간, 초라한 키보드로 반주를 하는 예배 시간, 그 모든 것이 괴로웠다. 그런 그녀에게 이상하게 학생들은 감동을 받는다. 예배가 끝나면 속도 모르는 분들이 그녀에게 찾아와 반주에 은혜 받았다고 진심으로 인사를 한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아내는 속으로 눈물을 삼킨다. 그 세월이 이제 10년이 흘렀다. 어느 날 저녁, 아내를 위하여 이웃에서 피아니스트라는 영화를 빌려와 함께 보았다. 홀러코스트의 잔혹한 장면에 눈쌀을 찌푸리던 그녀는 간간이 흘러나오는 쇼팽의 녹턴 피아노 선율 때문에 자리를 뜨지 못하고 끝까지 영화를 보았다. 클라이막스에서 자신이 학생 시절 가장 잘 치고 좋아했던 곡을 주인공이 치기 시작했다. 쇼팽의 피아노 연주곡을 무엇에 홀린 듯이 듣고 있던 그녀는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마치 석고상처럼 굳어져서 앉아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양 손가락을 펴서 내려다보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기 시작했다. 이제 자신은 더 이상 피아니스트도 오르가니스트도 아니라며 펑펑 울기 시작했다. 어느새 변해버린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자각하고 울음이 터진 것이다.



그러던 아내를 지난여름 아주 오랜만에 보스톤에 데려갔다. 고색창연한 아치형 교회 건물과 현대식 빌딩이 조화를 이룬 보스톤의 아름다운 시가지는 여전히 청명한 하늘 햇살 아래서 신비한 빛을 내고 있었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보스톤이었기에 아내가 오랜만에 마음껏 만끽하기를 내심 기대하였는데이상하게도 아내의 반응이 신통치가 않았다. 보스톤 이야기만 나와도 가슴이 설레던 그녀가 정작 보스톤 땅을 밟고서도 심드렁하여 별로 웃지도 않았다. 자기도 왜 그런지 모르겠다며 이제 하나님이 자기 마음속에 있던 보스톤에 대한 그리움마저도 거두어 가신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좋은 징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옛날에 그녀가 다니던 학교는 한번 데리고 가야할 것 같아서 후배의 라이드를 받아 찰스 강변을 따라 보스톤 대학의 붉은 깃발이 나부끼는 건물들을 찾아갔다. 어린 다니엘을 뒤에 태우고 차를 몰며 바삐 다니던 거리의 옛 추억이 새록새록 피어났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녀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피곤한 듯 그냥 돌아가자고 했다. 그녀가 오르간 독주회를 했던 마쉬(Marshy) 채플 앞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그곳은 한번쯤 들려보아야 할 것 같아서 강제로 손목을 이끌고 차에서 내렸다.



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서니 엄숙한 채플 안은 십여 년 전의 그 모습 그대로 여전히 고풍스런 분위기 속에 남아 있었다. 크고 아름다운 파이프 오르간이 전면을 감싸고 우리를 맞이했다. 중앙 복도를 가로질러 앞자리에 앉아 잠시 기도를 하였다. 옛날 아내가 이곳에서 연주하던 시절이 생각났다. 어린 다니엘을 데리고 뒤에서 기다리며 나도 모르게 웅장한 오르간 음악에 심취하곤 했던 시절. 그녀도 그때가 생각나는지 조심스레 단위에 올라가 오르간을 기웃거린다. 아마 다시 한번 쳐보고 싶겠지그러고 있는데, 사찰 집사인 듯한 분이 다가와 아내에게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묻는다. 아내가 자신이 이 학교 학생이었다고 이야기하며 오르간을 잠시 만져보아도 되겠냐고 양해를 구하였다. 흔쾌히 허락하는 너그러움그녀는 미끄러지듯 오르간 의자에 앉았다. 잠시의 침묵중국에 처음 이삿짐을 풀던 날 가지고 간 연습용 전자 오르간으로 정신없이 바하를 쳐대던 아내의 뜨거운 열정이 떠오른다. 그녀의 절반 인생과도 같았던 바하. 또 다시 바하를 치려나? 그러나 그녀의 손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은 의외로 조용한 찬송가 반주였다. 잔잔하면서도 힘있는 찬송가를 메들리로 치고 있는 그녀의 성숙한 모습에서 십 년의 세월 속에 감추어진 눈물이 느껴졌다. 오르간 선율 속에 담긴 그녀의 아픔이 파도처럼 밀려와 내 가슴에 안기기 시작했다. 저러다가 또 울지어떡하나걱정하고 있는데갑자기 뚝 그치며 그녀가 일어섰다. 울음이 터지기 직전에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고 꺽어버린 것이다. 안심안도눈시울이 붉어진 아내의 어깨를 감싸고 나오는데 그녀가 정말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



걸어가며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아내가 그동안 가르친 제자들이 인근 도시마다 교회의 반주자로 활동하고 있고, 그 중에는 오르간을 배우고 유학을 다녀와서 중국에서 최초의 전문적인 오르간 반주자를 꿈꾸는 제자도 있다. 언젠가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아내의 눈물이 씨앗이 되어 자란 그 제자들에 의해 중국의 교회가 부흥하고 곳곳에서 찬송이 차고 넘치는 그날이 왔을 때, 후세 사람들이 아내가 중국 교회 음악의 어머니였다고 기억할 날이 있지 않을까? 그런 엉뚱한 상상을 하며 그녀의 거칠어진 손가락 마디를 꼭 잡아 주었다.



*



아브라함과 롯,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으며 하나님을 아는 믿음이 있었던 두 사람. 소유의 문제에 자유롭지 못하여 가는 곳마다 전 재산을 이끌고 다녔으며 재물로 인해 다투어 갈라지기까지 했던 그들. 창세기 18장과 19장에서 부지중 나그네를 대접하여 천사를 맞이하는 모습조차 두 사람은 비슷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아브라함은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묵상 중에 천사를 맞이했다면, 롯은 사람들이 바삐 드나드는 성문 앞에 앉았다가 천사들을 영접한다. 그리고 그들은 천사들을 집으로 안내하여 떡을 대접한다. 아브라함의 명령에 순종하여 사라가 고운 가루를 반죽하여 떡을 굽는데 비해, 롯은 직접 급히 무교병을 굽는다. 아마도 그의 아내는 다른 사업(부동산 투기와 주식투자?)에 바빴던지 갑작스레 남편이 데리고 들어온 불청객이 불편하여 눈쌀을 찌푸리며 자리를 피했던 모양이다. 두 가정의 식탁과 떡. 그러나 그들이 베풀었던 식탁은 그 의미가 전혀 달랐다. 천사를 대접한 그 떡의 식사를 기점으로 두 가정의 운명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 식사 후에 아브라함과 사라는 믿음의 아들 이삭의 잉태에 대한 축복의 예언을 받게 되지만, 롯과 그의 아내는 소돔 땅을 속히 떠나라는 심판의 메시지를 듣게 된다. 아브라함의 식탁은 풍요와 평화와 웃음이 넘치는 식탁이었지만, 롯의 식탁은 멸망을 앞둔 자가 지닌 불안과 조급함과 메마름의 식탁이었다.



롯과 롯의 아내…… 이들은 무엇이 문제였을까?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 가운데 보인 롯의 태도, 결국은 소금기둥이 되고만 롯의 아내의 행동을 통해 그들의 마음을 묶고 있었던 것은 재물과 도시에 대한 우상 숭배였음이 분명하다. 아울러 그들이 소돔으로 이사가게 된 배경 속에는 처음부터 화려한 도시 생활을 사모하며 남편을 부추기어 소돔으로 옮겨가자고 졸라대었을 롯의 아내의 역할이 있었을 가능성 또한 농후하다. 사라와 롯의 아내도 표면적으로 보면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가장 큰 차이는, 아브라함의 가정은 남자가 그 가정을 이끌고 다녔다면 롯의 아내는 그 아내가 주도권을 쥐고 이사를 다닌 것은 아니었는지? ?무릇 지혜로운 여인은 그 집을 세우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잠언 141)?는 말씀처럼 한 집안이 사치와 화려함을 좋아하는 여인의 어리석음 때문에 멸망의 길로 간 것이다. 그저 편안한 도시의 삶에 이끌리며 도시가 아니면 살기를 꺼려했던 롯과 그의 가족의 도시에 대한 우상 숭배가 그 가정의 멸망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자신의 직장을 구하는 젊은이들이 직장 자체의 질과 삶의 가치를 따지기 전에 직장의 소재지가 어디인가에 따라 판단기준을 두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때로는 목회지나 사역지를 정하는 경우에도 이와 같은 도시 혹은 대도시 지향적 사고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경우도 종종 있다. 롯과 롯의 아내, 그들은 다름 아닌 도시로 도시로 불나방처럼 몰려드는 현대의 도시 지향적 인간들의 전형(典型)이다. 복의 근원 아브라함의 장막을 마다하고 멸망의 도시 소돔으로 나아간 롯. 시편 4920절에서 이르기를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자는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은 도시의 삶 자체가 특별히 악하다든지 벽지(僻地)의 삶을 권하든지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소돔성의 롯이 그러했듯이 향락적이고 부패한 도시문화에 무방비적으로 노출되어 오염된다면, 혹은 도시가 가져다주는 여러가지 안락함과 문화적 편이(便易)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가리는 우상이 된다면, 그곳은 이미 중립지대에서 벗어난 곳임에 틀림없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인정되고 선포되는 곳이라면 그곳이 산촌 벽지이건 니느웨 성이건 우리는 마다하지 않고 그분의 부르심에 응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오직 영원히 사모하는 하나의 도시가 있을 뿐이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21:2)>


[반영운] 가정에서 할 수 있는 환경보호 IV – 다시 만들어 쓰기 (Recycle)



이코스타 2003년 12월

글을 시작하며

 

지난 호까지 우리는 가정에서 할 수 있는 환경보호를 위한 방안으로서 줄이기 (reduce)와 다시 쓰기 (reuse) 살펴보았다. 그런데 사실 우리의 귀에 익숙한 환경보호의 용어는 앞의 두 가지 용어가 아니라 ‘다시 만들어 쓰기-재활용 (recycle)’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는 방송과 교육의 효과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다시 만들어 쓰기를 잘 하면 환경보호에 충실한 생활을 하는 것처럼 사람들의 인식을 형성해 간다.  이러한 대중교육은 아마도 필요한 물건에 대한 욕구는 그대로 두되, 다 쓰거나 흥미를 잃게 된 물건은 다시 만들어 쓰면 된다는 편의주의적 사고를 부추길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앞의 호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사실 환경오염의 방지라는 측면에서 볼 때 ‘다시 만들어 쓰기’가 단연 앞의 두 가지 방안에 비해 그 효과가 뒤처지기 때문이다. 즉, 더러워진 것을 씻고 가공하여 쓸 수 있는 상태가 되도록 하는 과정에서 천연의 재료를 쓸 때와 비교하여 결코 적지 않은 양의 에너지가 소비되고 부수적으로 환경오염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다시 만들어 쓰기는 차선의 환경보호 방안

 

다음은 영국의 맨체스터 메트로폴리탄 대학교의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옮겨온 글로서 다시 만들어 쓰기에 대해 일반적으로 우리가 들어온 내용이다. 

 

The definition of recycling is to pass a substance through a system that enables that substance to be reused. Waste recycling involves the collection of waste materials and the separation and clean-up of those materials. Recycling waste means that fewer new products and consumables need to be produced, saving raw materials and reducing energy consumption.

(http://www.doc.mmu.ac.uk/aric/eae/Sustainability/Older/Waste_Recycling.html)

 

 

위 글은 다시 만들어 쓰기의 정의를 한 다음, 그 과정과 장점들을 설명하고 있다.  즉 다시 쓰기를 하려면 쓰레기를 모아서 분리하고 깨끗하게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과, 새로운 제품을 적게 만들고 천연원료를 절약하고 에너지 소비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글의 어디에서도 쓰레기를 모으고 분리하고 깨끗하게 하고 다시 만드는 과정에서 필요한 에너지의 양과 그 에너지를 사용함으로써 생겨나는 부수적인 환경오염의 우려를 하고 있지 않다. 

 

앞 에서 다시 만들어 쓰기에 대한 조금은 부정적인 설명을 먼저 한 이유는 다시 만들어 쓰기가 줄이기와 다시 쓰기를 동반하지 않는다면 환경보호를 위한 최선의 대안이 되지 못한다는 것과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근본적인 생활의 변화까지 유도하지 못한다는 것 때문이다.  즉 현대 도시사회는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익숙해져 있는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방식은 그대로 유지한 채, 그러한 삶의 방식의 부산물인 오염물질을 화학적으로 또는 생물학적으로 처리하거나 버려지는 쓰레기들 중에서 쓸만한 것을 골라서 다시 만들어 쓰는 방법으로 환경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환경오염의 속도를 조금 늦출 수는 있어도 궁극적으로 맞게될 오염의 결과를 피하게 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만들어 쓰기의 필요성

 

필자가 유학 시절에 살던 필라델피아와 지금 살고 있는 배튼루지의 가정용 쓰레기 처리 시스템을 보면서 미국이 아직은 한국이나 유럽처럼 쓰레기문제에 대한 심각성을 그렇게 많이 느끼지 않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예를 들면 한국과는 달리 규격 쓰레기 봉투를 사용하지 않는다든지, 쓰레기 종량제를 실시하지 않는다든지, 개인 집이나 아파트 단지 내에 쓰레기 분리 수거를 위한 통은 없고 집에서 나오는 쓰레기들을 버릴 때, 특별히 선별하지 않고 쓰레기 처리회사에서 운영하는 쓰레기 통이나 트럭에 그냥 한꺼번에 넣어서 버린다. 이렇게 한꺼번에 모아서 회사에서 직접 쓸만한 것들만 선별하고 나머지는 쓰레기 매립지에서 매립하거나 소각로에서 불에 태운다. 몇몇 조사에 의하면 매립을 시작한 지 30년 이상이 된 매립지에서 썩지 않은 음식물이나 기타 다시 만들어 쓸 수 있는 물품들이 발견되고 있다고 한다 (미국 환경청).  이렇게 다시 만들어 쓸 수 있는 제품이 그냥 쓰레기로 매립되고 있는 것과 매립된 것들 중에서 썩을 수 있는 것들이 썩지 못하는 문제들 때문에 다시 한 번 다시 만들어 쓰기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켜야할 필요를 느낀다.

 

 

다시 만들어 쓰기의 방안

 

다시 만들어 쓰기는 천연의 재료를 써서 물건을 만들어 내거나, 생겨난 쓰레기를 무작정 버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환경보호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삶의 방식을 급격하게 바꿀 수 없다면 다시 만들어 쓰기 정도는 실천할 수 있어야 환경보호에 최소한의 참여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따라서 다음에서는 이러한 다시 만들어 쓰기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가정에서 할 수 있는 다시 만들어 쓰기의 방안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가정에서 다시 만들어 쓰기를 실천할 수 있는 방안으로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 째는 다시 만들어 쓸 수 있는 제품을 골라서 다시 만들어 쓰는 것이며, 둘째는 다시 만든 제품을 골라서 사는 것이며, 세째는 개인 집의 뒷마당이나 마을 공동 장소에서 음식물 찌꺼기나 기타 정원 손질한 것들을 썪혀서 퇴비로 만드는 것이다. 

 

첫째로 지역적으로 다시 만들어 쓸 수 있는 물품으로 지정되어 수집되는 물품이 어떤 것인지 확인한 후 그러한 제품을 중심으로 구매를 하는 것이다. 

 

많은 마을에서는 유리, 알루미늄, 철, 신문지를 비롯한 종이와 카드보드와 특정한 종류의 플라스틱 종류 등을 수집한다. 미국의 경우에는 각 community 관리나 자원봉사 단체나 실제로 다시 만들어 쓰기를 담당하고 있는 회사에 연락을 해서 해당 물품의 목록을 확인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한국의 경우에는 아파트 관리 사무소나 시청이나 구청이나 동사무소를 통해 이러한 목록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이러한 시스템이 없으면 사실상 특정한 물품들에 한해서만 다시 만들어 쓰기를 할 수 있을 뿐 대부분의 물품들은 대책없이 매립장으로 향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혹시 지역 공동체에서 다시 만들어 쓰는 시스템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즉, 길 옆에서 분리한 물건을 가져가는 프로그램이거나 주민이 직접 일정한 장소까지 가져가는 프로그램들을 말하는 것으로 각 지역 공동체에서는 어떤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어떤 물품들을 분리 수거하는지 확인한 후 그에 따라 대처한다.  예를 들어 어떤 지역 공동체에서는 신문지에 끼어 온 광고지는 수거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캔 종류도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캔과 기타 철로 만들어진 캔을 분리하여 수거하곤 한다. 한국에 있을 동안 아파트에서 살았는데 각 아파트 단지마다 수거하는 물품과 수거하는 날짜가 정해져 있어서 아파트에 사는 주민이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일반 단독주택이나 연립주택지역에서는 이러한 분리수거가 효과적으로 시행되는 것 같지 않았다.  미 국의 경우 작은 지역 공동체별로 나름대로의 원칙을 가지고 이러한 쓰레기 분리 수거를 시행하는 관계로 집 옆에서 물건을 가져가는 경우에는 정해진 날짜에 맞춰서 지정된 물품을 내어 놓으면 되고, 분리한 물건을 가져다 놓은 경우에는 장소를 알아놓고 그곳까지 가져다 놓아야 한다. 만일 지금 살고 있는 지역 공동체에 이러한 프로그램이 없으면 그냥 있지말고 적극적으로 관련단체나 주민들을 만나서 다시 만들어 쓰기의 필요성을 알리고 적절한 시스템을 도입하도록 요청하는 일도 중요하다. 

 

그렇다면 어떤 물품들을 다시 만들어 쓸 수 있을까?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다시 만들어 쓸 수 있는 제품 목록

 

 






























제품 목록

다시 만들어지는 내용

오래된 신문 및 잡지류

오래된 신문은 수거되어서 다음과 같은 용도로 다시 만들어 진다. 신문, 동물을 위한 침대, 섬유단열재, 섬유판, 펄프 제품, 전화번호부 등의 종이 제품 등.

종이 상자류

주름잡힌 판지나 종이 상자용 판지 (피자 박스, 선물용 상자, 기타 상품 상자) 등은 수거되어서 시멘트 부대에 쓰이는 종이, 지붕을 잇는 펠트재, 새로운 상자를 만드는 판지, 종이 티슈와 종이 타월 등으로 다시 만들어진다.

플라스틱 병

수거된 플라스틱 병은 카페트, 플라스틱 덮개, 섬유로된 단열재, 보우트의 선체,  사무실용 바인더 등의 여러 종류의 플라스틱 제품으로 다시 만들어진다.

플라스틱 용기

수거된 플라스틱 용기 (보통 플라스틱 우유통, 쥬스 통)는 플라스틱 판재, 농업용 울타리, 플라스틱으로 된 얇은 판, 해양 말뚝, 그리고 플라스틱 벽돌 등으로 다시 만들어진다.

알루미늄 깡통

알루미늄 깡통은 녹여져서 다른 알루미늄 제품 즉 알루니늄 호일, 새로운 알루미늄 깡통, 알루미늄으로 된 차 부속품 등으로 다시 만들어진다.

철로 만들어진 깡통

철로 만들어진 깡통은 녹여져서 새로운 다른 철 제품, 둥근 쇠막대, 보강 막대, 그리고 차의 부속품 등으로 다시 만들어진다. 

유리병

수거된 유리병은 새로운 유리병, 고속도로에서 쓰이는 페인트, 유리섬유, 그리고 기계절삭용 모래 등으로 다시 만들어 진다. 

건전지

재충전 건전지의 일종인 니켈-카드뮴 건전지는 일단 수거되면 니켈, 크롬, 주철등으로 분리된다. 재생된 니켈은 스텐레스 강 합금을 만드는 데 쓰인다. 그리고 재생된 카드뮴은 새로운 니켈-카드뮴 재충전 건전지를 만드는데 쓰인다. 

 

그 외 가정용 위험 쓰레기 중에서 다시 만들어 쓸 수 있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페 인트, 살충제, 제초제, 각종 독극물, 휘발유와 각종 연료, 자동차 엔진 오일 및 필터, 방향제, 부동액, 브레이크와 트랜스미션 오일, 차 건전지, 수은 함유제품 (온도계 및 자동온도 조절기 등) 등의 제품들은 특별히 지정된 곳에 가져다 주거나 허가를 받은 회사에게 넘겨서 처리하도록 한다. 일단 넘겨진 제품들은 전문회사에 맡겨져서 독성을 제거하는 과정을 거쳐 새로운 제품을 만드는데 쓰여지거나 매립된다.  참고로 차와 관련된 것들 즉 자동차 오일이나 트랜스미션 오일, 차 건전지들은 일정액의 처리비용을 지불하면 자동차 수리공장에서 일괄적으로 처리한다.  만일 본인이 부품을 교체하는 일을 직접할 경우나 위험 쓰레기가 발견될 경우에는 위험물을 어린 아이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옮겨 놓고 빠른 시간 내에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좋다. 



둘째로 다시 만든 제품을 사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다시 만들어 쓰기가 성공적으로 운영되려면 위에서 살펴본 다시 만들어질 수 있는 물품이 반드시 새로운 제품이 되는 과정을 거쳐야 하며, 다시 만들어진 제품은 소비자에 의해 구매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다음 네 가지의 원칙을 지키면 좋겠다.




  1. 물건을 구매할 때 제품이 다시 만들어진 재료로 만들어졌는지 확인한다. 많 은 병, 캔, 종이 상자, 포장지, 과자 상자들이 다시 만들어진 재료로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에 물건을 구매할 때 꼼꼼하게 살펴서 다시 만들어진 재료로 만들어진 제품을 구매하도록 한다. 
  2. 할 수 있는 한 다시 만들어진 내용물을 가진 제품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많은 종류의 종이, 유리, 철, 플라스틱 제품들, 즉 문구류, 포장지, 컴퓨터 인쇄종이, 많은 종류의 유리, 철, 플라스틱 용기들이다시 만들어진 재료로 만들어진다. 이러한 제품들은 식료품점이나 약국이나 여러 상점들에서 구할 수 있다. 문구류 가게나 인쇄소나 우편주문을 통해서도 이러한 제품을 구매할 수 있다.
  3. 다시 만들어진 재료를 사용하고 있는 지를 확인할 때는 반드시 다시 만들어진 재료를 사용했는지를 밝혀주는 문구를 찾고, 가능하면 다시 만들어진 재료의 함량이 가장 많은 제품을 선택한다.  그리고 좀 더 시간과 열의가 있다면 해당 제품의 회사에 수신자 부담 전화를 걸어 그 함량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한 후 구매해도 좋을 것이다.
  4. 각자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개인적으로나, 지역의 국회의원을 통해서나, 지역단위의 조직을 통해서 각 지방정부와 지역 산업체와 기타 관련 업체에서 다시 만들어진 재료로 만들어진 제품을 사용하도록 하는 규정을 제정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한다.  예를 들어, 각 지방 정부에서는 각종 사무용품이나 차량관련 제품이나 건축관련 제품 등을 구매할 때 정해진 규정에 맞게 구매하도록 한다.  미국의 경우 연방정부에서는 대부분 이러한 다시 만들어진 제품을 사용하도록 하는 지침을 가지고 있다.

셋째로 개인 집의 뒷마당이나 마을 공동 장소에서 음식물 찌꺼기나 기타 정원 손질한 것들 (개인 집이 있는 경우)을 썩혀서 퇴비로 만드는 것이다. 



퇴비를 만드는 것의 장점과 방안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만일 음식물 찌꺼기와 정원이나 뜰을 정리하면서 생긴 나뭇가지, 풀 등을 퇴비로 만들면 상당한 양의 쓰레기가 줄어들어서 결국 매립을 덜하게 되는 장점이 있다. 퇴비를 만드는 과정에서 땅이 기름지게 되어 잡초가 잘 자라지 못하게 되고 토양의 손실을 막게되고 화학비료를 적게 사용하게 되는 장점이 있다. 
  2. 적절하게 퇴비가 만들어지면 다시 정원이나 잔디에 뿌려서 토양을 기름지게 하는 거름으로 사용할 수 있다.  혹 화분을 키우면 화분의 흙갈이에 쓰이는 좋은 퇴비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아파트에 살 경우에는 아파트 공동 정원이나 화단에 가져다가 퇴비로 뿌려줄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이 아주 많이 모여 사는 곳에서는 썩히는 일을 삼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퇴비를 만드는 중에 쥐나 다른 해충들이 모여들기 때문이다. 
  3. 만일 퇴비를 만들 공간이 없으면 퇴비를 만들 수 있는 재료를 수거해 가는 프로그램을 찾아서 참여하거나 실제로 퇴비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는 가까운 지역 공동체에게 재료를 제공한다. 만일 그러한 프로그램이 속한 지역공동체에 없으면 해당 공공기관에 연락을 하거나 주민 대표를 통하여 퇴비재료 수거 프로그램을 만들거나 해당 지역공동체에서 퇴비만드는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글을 맺으면서

 

간혹 기독교인들 중에 이세상은 죄악으로 가득차서 곧 멸망할 것이며 더 이상 미련을 가질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곤 한다.  이런 이들은 현세를 등진 채 미래에 다가올 천국을 준비하는데 여념이 없어 한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정말로 현실을 부정하는 것인가?

 

필자의 이해로는 기독교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한 죄를 사함받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과 예수께서 다시 사셨듯이 우리도 다시 살 것이라는 사실을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으로 아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복음의 내용이 자신의 양심 깊은 곳에서부터 더욱 깊어지면서 우리의 삶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현세에서 부활의 삶과 천국의 삶을경험하게 된다. 따라서 예수께서도 그러셨듯이 기독교는 철저히 현실에 기반을 두고 현실 속에서 구원을 경험하며, 고난을 통한 천국의 소망과 기쁨을 이땅에서 경험하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신앙의 내용을 현실 속에서 구체화시켜가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이름을 인정하는) , 예배가 우리에게 숙제로 남아있다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생활을 내용으로 채워갈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 중에 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하라 명령이 명제가 되리라 믿는다.  여기서 말하는 이웃사랑의 범주는 단지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포함한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자연 만물을 포함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지금까지 몇 차례에 걸쳐 살펴보고 있는 환경보호의 노력은 아주 구체적인 이웃사랑의 방법이자 만물의 관리자로서 사람에게 부여된 중요한 책임을 다하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중에서도다시 만들어 쓰기’는 환경보호의 방안 중에서 최선은 아니라 할지라도줄이기다시 쓰기 실천한다는 전제하에 우리가 있는 하나의 환경보호 방안이다.  조금은 귀찮고 힘든 과정이 있긴 하지만 좀 더 적극적으로 ‘다시 만들어 쓰기’ 실천함으로써 한 걸음 더 가까이 주께서 명령하신 이웃 사랑의 편린이라도 경험해 보길 소원해 본다.


[무명의 코스탄] 무명의 선지자: 우리를 직접 만나기 원하시는 주님

이코스타 2003년 12월

열왕기상 13장에 나오는 한 이름없는 유대 선지자의 이야기는 솔로몬의 우상숭배에 대한 심판으로 인하여 통일 이스라엘 왕국이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열된 직후에 있은 일이다. 북왕국의 첫 왕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길을 따르지 않으므로써, 이후의 모든 이스라엘 왕들이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였다고 일컬어지게 되는 악한 행실의 한 전형을 세워놓았다. 북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안에서가 아니라 멀리 유대 땅으로부터 한 선지자를 보내시는데, 여기에는 북이스라엘의 왕과 관리는 물론 제사장과 선지자들도 인정하지 않으시겠다는 엄격한 뜻이 있었다. 당시의 관습에서 누군가와 함께 먹는 일은 연합과 승인을 상징하곤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 유대 선지자에게는 북왕국의 그 누구와도 더불어 먹거나 마시지 말라는 명령이 덧붙여졌다. 그는 여로보암 앞에서는 이러한 주님의 메세지를 온전히 전달하였지만, 돌아오는 길에 북왕국의 다른 한 선지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머물기를 청하였을 때는 그 말을 받아들여 더불어 먹고 마시므로써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게 되어 징계를 받아 길가에서 사자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   


북이스라엘의 선지자는 왜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유대 선지자를 만나기 원하였을까? 한 주석서의 해설처럼, 하나님의 사람과 함께하는 행위를 통해서 북이스라엘의 길도 하나님이 인정하신다는 모양새를 얻고 싶었던 것일까? [Westminster Bible Companion: 열왕기] 아니면, 하나님의 영이 떠난 곳에서 오래동안 지내다 보니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왔다는 소리에 단순히 무리해서라도 만나고 싶었던 것일까? 북왕국 선지자의 동기가 어디에 있었건, 유대 선지자에게 내려진 판정은 불순종이었고 그 결과는 죽음이었다. 이 선지자에게 내려진 처분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다른 나쁜 의도나 불순한 동기가 없었더라도 하나님께 그런 징계를 받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내가 그 유대 선지자였다면, 다른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길래 따른 것 뿐이었는데 하며 황망해하고 억울해하지 않았을까?  


하나님의 사람 유대 선지자는 스스로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음성을 들었던 사람이었다. 여로보암에게 가서 전하여야할 말도 하나님께로부터 들어서 알 수 있았다. 그가 만일, 하나님은 스스로 하신 말씀에 대하여 신실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조금만 더 신뢰하고 기억하였더라면 사태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아마도 최소한 한 번 이상은 주님께 이것이 정말로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입니까? 하고 직접 여쭈어보게 되지 않았을까? 그가 만일 그렇게 질문하고 주를 간절히 찾았더라면 (잠언 8:17), 그에게 친히 말씀하셔서 보내기까지 하신 주님이 그를 만나주시고 그분의 뜻을 다시 확인시켜 주지 않으셨을까? 그렇다면, 노상에서 사자에게 죽는 비극은 혹 발생하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이런 측면에서, 이 이야기는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일에 대한 중요성을 간접적인 방식으로 강조하고 있다. 어쩌면 주님께서는, 꼭 징계의 의미로서만이 아니라 주님과 직접 만나는 삶을 가까이에서 영원히 배우게 하시고자 당신의 사람을 그분 곁으로 급히 불러올리신 것이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주님을 직접 만나는 일. 아마도 이것만큼 우리 믿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일도 달리 없을 것이다. 구원받는 일도, 은혜 안에서 변화되고 성화의 골짜기를 걸어가는 일도 다 여기에 열쇠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큰 선물도,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직접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이었다. [예수께서 운명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마가복음 15:37-38)] 욥 은 온갖 이해되지 않는 고난을 겪으면서 하나님께 대하여 수많은 질문을 품었지만, 하나님을 만나뵌 그 자체로 그의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다. 하나님께서는 한 마디도 그의 질문들에 대하여 직접적인 답을 주지 않으셨는데도 말이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라는 측면에서 뛰어났던 우리의 신앙적 선배들은, 우리의 신앙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우리가 일단 주님을 만나고 나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변화와 영적 성장은 주님께서 친히 인도하시는 가운데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 마틴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 모든 성도들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는 일은 그들의 개혁을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사상이었고 이유였다. 그들은 면죄부나 공로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주님 앞에 직접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하였으며,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교회 찬양음악을 정리, 보급함으로써 일반 성도들이 말씀과 찬양 가운데 스스로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왔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제의 한 이름없는 유대 선지자의 이야기가 뜻밖에 전해주는 교훈의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주님의 백성이 그분 앞에 직접 나와서 진리의 말씀을 듣고 아버지와 교제하며 주인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사는 일의 중요성은 어제와 오늘에 차이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 주님을 만나야 한다. 그래야만 여로보암에게 전달할 메세지를 받아서 전한 후에도 북왕국 선지자의 거짓말에 속지 않을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을 고려할 때, 북왕국 선지자의 교훈을 떠올리는 일도 중요하기는 매한가지이다. 내 스스로 북이스라엘의 선지자와 같이 되지 않으려면, 혹시라도 다른 영혼들에게 잘못된 주님의 뜻을 전달하여 실족하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살펴야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다른 영혼들이 각자 스스로 주님 앞에 나아가 그분을 만나고 개인적으로 교제할 수 있도록 인내 가운데 구체적으로 도와주고 권면할 수 있다면 더욱 귀한 일이 될 것이다. 그들 모두가 결국에는 다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려야할 하나님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주님을 뵙기 원합니다. 오늘도 만나 주소서. 그리고, 내 주변의 다른 영혼들도 주님 앞에 스스로 나아가 주를 뵙는 이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4. 아말렉 족속: 천 년 동안 기다리시고 천 년 동안 이루시는 하나님


많은 사람들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말고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라 명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이해하기 어려운 성경의 사례로 꼽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했던 당사자들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 조상의 자손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진멸의 대상이 되는 후손들을 생각할 때 이를 사랑이신 하나님의 속성과 어떻게 연결하여 이해하여야 하는가 하는 점이 의문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창세기 36장을 보면, 아말렉은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의 아들이라고 나와있다. 아말렉 족속의 조상 아말렉은 원래 야곱의 아들들, 즉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조상들에게 조카 뻘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다. 창세기 이후에 성경에는 아말렉 족속이 크게 세 번 등장하는데, 모두 이스라엘 민족과는 더불어 살아남을 수 없는 원수의 모습으로 나온다. 일가 친척이 원수가 되어버리는 데에는, 모세 영도하의 출애굽 시절에 아말렉 족속이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고 그들의 피곤함을 타서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치므로써 (신명기 25:17-18) 하나님을 대적했던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모세가 손을 내리면 적군이 이겼던 유명한 전투가 바로 아말렉 족속과의 싸움이었는데, 출애굽기 17장과 신명기 25장에는 각각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너는 아말렉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할찌니라 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진노의 음성이 기록되어 있다.  


출애굽 시대를 지나 다시 아말렉의 이름이 이야기의 전면에 등장하는 때는 사울과 다윗의 시대이다. 사울 왕은 선지자 사무엘을 통하여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압도적으로 우세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적을 무찌르지만, 노획한 가축과 재물이 아까와서 진멸하지 않고 아말렉의 왕 아각을 살려두는 등 제한적인 순종을 하다가 하나님이 세우신 자리로부터 버림받는 직접적인 계기를 만든다. 한편, 다윗에게 등장하는 아말렉 족속의 모습은 출애굽 시대에 이스라엘에게 다가왔던 그 조상들의 모습과 더 유사하다. 그들은 사울왕의 위협을 피하여 블레셋의 영토인 시글락에 머물고 있던 다윗의 진지를 습격하여 그와 그의 부하들의 가족과 재산을 약탈하여 간 것이다. 결국, 다윗과 그의 용사들은 주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그들을 무찌르고 잃어버린 가족과 재산을 다시 찾아오는데,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것은, 사울왕이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미해결 상태로 남아있던 남아있던 아말렉과의 싸움을 다윗이 본의로 (사무엘상 27장), 그리고 본의 아닌 사건을 통하여 (사무엘상 30장) 계승하여 수행하고 있는 점이다. 다윗은 아마도 하나님께서 아말렉 족속에게 두고 계신 진노의 말씀과 뜻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말렉 민족이 성경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장면은 에스더서에 나오는 페르시아 통치 시대를 무대로 하고 있다. 사울왕과 싸웠던 아각 왕의 후예라는 뜻의 아각 족속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한번 등장하는 아말렉 족속은 여기서 이스라엘을 진멸하고자 일을 꾸미는 자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아각 족속인 대신 하만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진멸하도록 왕의 조서를 꾸몄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구를 들이신 하나님께서는 모르드개의 영적 분별력과 에스더의 헌신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구하고 오히려 아각 족속을 진멸하시어 출애굽기 17장과 신명기 25장에서 하셨던 말씀을 이루신다. 인터넷 성경이나 성경 CD-ROM으로 검색해 보면, 이 이후로 다시는 아말렉 족속의 이야기가 성경에 등장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모세가 출애굽하던 시기는 기원전 약 1500 년 전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사울 및 다윗 왕의 통치는 대략 기원전 1000 년 전, 그리고 페르시아 통치 아래에 있던 에스더의 시대는 그로부터 약 500 년이 흐른 뒤의 이야기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하겠다고 말씀하신지 천 년 후에야 그 말씀하신 바를 이루신 것이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 중요한 하나님의 속성을 유추하여 이해할 수 있다. 


첫째, 비록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고 그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하겠다 하셨지만 실제로 그 말씀을 이루기까지는 천 년이라는 세월을 돌아온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기다리셨던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을 들 수 있다. 창세기 15:16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들이 이집트에서 사백 년간 종살이를 한 후에야 가나안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귀뜸해 주고 계신데, 그 이유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사울-다윗의 왕국이 성립한 때로부터 북이스라엘과 남유대 왕국이 멸망한 때까지의 시간도 역시 마찬가지로 약 오백 년 정도였음을 고려하면, 죄악 앞에서는 자기 백성(원가지)도 아끼지 않으셨던 (로마서 11:21)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아모리 족속이나 아말렉 족속에 대해서도 비슷한 기간 동안 기다려 주셨음을 알 수 있다. 아직 죄악이 다 차지 않았다는 말씀은 그들이 아직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의미하기도 한다. 아말렉 족속의 경우에는, 약 오백 년이 지나고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이르렀음에도 사울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오히려 그만큼의 시간이 더 연장된 경우라고 볼 수도 있지만 말이다. 만일 그들이 돌아왔다면 하나님은 용서하셨을까? 악의 화신처럼 기억되고 있는 아합이나 므낫세 왕같은 사람들조차도 그들이 겸손하게 회개했을 때 자비를 베풀기를 기뻐하셨던 하나님이셨음을 기억하면, 그가 얼마나 악인이었든 돌아오기만 하면 주님은 다시금 용서와 자비를 베푸셨을 것임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확신할 수 있다.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아직 하나님의 원수로 남아있었을 것임을 생각할 때 (골로새서 1:21), 아말렉을 기다리신 주님의 마음은 바로 지금 나를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의 마음과 다름아닌 것이다. 우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고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불러서 (이사야 55:6)” 우리를 기다리시는 분께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기 (디모데전서 2:4) 때문이다.  


둘째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가 공의로 말씀하신 일에 대해서는 천 년이 걸리더라도 말씀하신 대로 신실하게 이루고야 마는 분이시라는 점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불의가 선의를 이기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면서 근심하고 낙담하게 되기도 하는데, 그러한 때에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우리가 수고하며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나서 그 일의 결국과 열매를 보지 못하는 경우에도 신실하신 주님은 그분의 때에 그분의 방법으로 다른 사람을 일으키셔서 일을 성취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반드시 일을 지어 성취하실 것이라고 신뢰하는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섬김의 현장에서 지쳐 쓰러지지 않도록 우리를 붙잡아준다. 아말렉과 싸우는 일을 모세 때에 여호수아가 시작하여 다윗이 계승하고 그것을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완수하였듯이, 내가 지금 주님의 뜻에 따라 행하고 있는 하나하나의 사역들 역시도 지금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들을 너머선 하나님의 경륜과 시간대 안에서 계승되고 성취되어 그분의 신실하심을 증거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인내와 기다리심을 깨닫고 늘 주님께로 돌아오는 자 되게 하여 주소서. 나의 때에 주님의 일 이루어짐을 보지 못할지라도 주의 신실하심을 믿는 믿음이 늘 견고하게 하옵소서.


 


맺음말


주님의 섭리하심과 다스리심이 없는 인생은 하나도 없다. 그런 면에서, 성경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은 각자의 역할들 가운데서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속성과 뜻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위의 몇몇 예에서 보았듯이, 조연들이나 단역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삶의 이야기에 주목할 때 우리가 얻는 교훈은 유명한 주연급 인물들의 경우에 비하여 작지 않은 때가 종종 있다. 이 점은 우리로 하여금 깊은 말씀 묵상에 대한 풍성함으로 우리를 안내하며 우리에게 성경을 보게 하는 새로운 동기부여를 선사한다. (주관적이거나 감상적인 해석에 관한 우려는, 성경의 다른 부분에 있는 말씀들과의 상호 균형 및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맡기고 여기서는 염려치 않기로 한다.)


이렇게 깨달은 이야기들은 다음과 같은 유익들을 우리에게 선물로 줄 것이다. 첫째로, 깨달은 성경 말씀을 더욱 큰 기쁨과 열정으로 증거하도록 도울 것이며, 둘째로, 우리 주변에 이름도 빛도 없이 묻혀있는 사람들의 삶의 의미를 발굴하는 시야를 키워줄 것이며, 셋째로, 나 자신 주님 뜻 안에서 이름도 빛도 없이 이 시대의 조역과 단역을 맡는 일을 더 의미있게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과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히브리서 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