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근상] 성경안에 나타난 찬양의 다양한 모습과 방법

이코스타 2004년 11월


예배안에 나타나는 찬양의 모습에는 여러가지의 종류가 있다. 아직도 어떤 분들은 찬양을 단순하게 노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겠지만 사실 찬양은 노래를 하는 것 이상의 표현이다. 예배라는 단어에는 사실 찬양이라는 단어와 동일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예배라는 단어의 원어인 “프로스케네오”라는 단어는 “경배”와 “찬양”을 모두 다 포함하고 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다양한 모습으로 찬양할수 있는지,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방법을 살펴 보도록 하자.


많은 모습들이 특별히 시편에 많이 나왔있지만, 시편 149편에는 찬양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4가지 방법으로 나와 있다. 첫번 째는 ‘주님을 찬양하라’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단순하게 목소리로만 찬양하는 방법을 이야기 한다. 함성이나, 우리의 입으로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을 이야기 한다.우리가 입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그것을 인정하고 시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주님을 찬양하라’는 의미는 고백하는 것 이상을 이야기한다. 즉, 선포하고 외치는 것을 말하고 있다. ‘고백’이라는 것은 한 대상에게 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선포’라는 것은 여러 대상에게 자기의 뜻을 밝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포’하는 것은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공중권세 잡은 자 위에 계신 분이 하나님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선포 할 때는 절대적인 믿음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 할수록 우리의 믿음은 더욱 자라날 수 있게 된다.


두번 째의 방법은 노래하며 찬양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우리가 많이 아는 것처럼 현대 교회에서 가장 많이 쓰여지는 방법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아는 것이기에 굳이 이야기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아쉬운 부분은 노래로 찬양하는 것에 수반되어지는 것은 ‘새로운 노래’라는 사실이다. 새로운 노래에 대한 여러가지 견해가 있을수 있지만 개인적으로 ‘새로운 노래’는 성도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노래를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 에베소서에는 ‘신령한 노래’라고 표현되어 있는 때로는 예언적인 의미를 포함하기도 한다.


세번 째는 춤추며 찬양하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빼앗긴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바로 지난 주에 이스라엘분으로 예수님을 믿는 한 목사님의 설교중에 말씀하신 부분이기도 하다. 춤은 이스라엘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경건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현대 교회에서는 춤이라는 것이 어느 사이에 불경건한 모습으로 인식되어 진 것이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부분들이 어쩌면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있어서 방해의 요소가 될지도 모른다. 한번은 내가 섬기고 있는 교회에 발레선교단이 방문한 적이 있었다. 사실 예배인도자인 나 역시 춤이라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좋은 선입관이 없었기에(내가 전에 만났던 춤을 추는 사람들에 대해 좋지 않은 선입관) 많은 기대를 하지 않았다. 순서가 진행되면서 선교발레단의 몸으로 드리는 찬양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제한하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만약에 춤을 통해서 여러분이 하나님과 가깝게 될 수 있다고 믿어지면 그렇게 행하라. 그것이 여러분의 믿음안에서 수반되어 진다면 하나님앞에 올바른 행위가 될것이다


네 번째는 소고와 수금으로 찬양하도록 되어 있다. 즉, 악기와 기구를 동원하여서 찬양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성서적인 방법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때 격려가 되는 것이다. 사실상 성경안에서는 악시 사용에 대한 제한이 되어 있지 않다. 다만 악기를 사용할 때 우리가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연주하는 가에 대해서 관심이 있다. 다윗이 악기를 연주할 때 악신이 떠났다고 말하는 구절배경에는 다윗이 공교하게 악기를 다루었다는 말이 숨어 있다. 연주를 시끄럽게 하면 사람들의 마음이 어려워질 수 있다. 오히려 연주를 준비된 마음으로 절제해서 연주한다면 악기 연주를 통해 예배를 드리기 어려운 사람들이라도 하나님앞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한다. 일전에 중, 고등부 아이들과 예배를 같이 드린 적이 있었다. 드럼치는 아이가 드럼을 치는데, 이것은 연주도 아니고 찬양을 드리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가진 모든 스트레스를 드럼에 퍼붇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조용히 그 형제에게 볼륨을 줄이라고 말했지만, 듣지 않았기에 그 날 그 형제를 세울 수가 없었다. 물론 그 형제가 어려움을 가졌겠지만, 예배안에서 악기 연주가 예배 전체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러한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악기를 사용하는 것은 참으로 예배에 되지만, 도움이 되지 않는 악기 연주는 하나님안에 있는 성도들을 시험거리로 만들 수 있다. 조용하게 치고 크게 치는 것은 차 후의 문제이다. 얼만큼 준비된 마음을 갖는냐 하는 것이다. 준비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마음의 준비뿐 아니라, 악기 연주를 위해서 준비하는 것이다.


이렇게 시편을 통해서 우리는 찬양의 방법을 알아보았다. 이제 마지막 한 가지가 남았는데, 그것은 바로 조화(Harmony)이다. 사실 우리의 찬양은 하나님께 향하는 하나의 마음이 되어야 하는데, 때로 우리의 찬양은 연주자들이나 회중의 기호에 맞게 낮추어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신령한 찬양은 결코 싫증나지 않으며, 하나님을 향해 더 가까이 갈수록 우리를 인도한다. 이 모든 방법들이 설령 옳다하더라도 때와 장소를 구별해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을 생각하면서 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들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억지로 실행한다면 오히려 역 효과가 날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사도 바울이 훌륭한 ‘예배인도자’ 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울이 감옥에서 ‘설교’를 하지 않고 ‘찬양’을 했을 때 옥문이 열렸던 것은 찬양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가끔 젊은 예배인도자들의 불평소리를 듣는다. 성도들이 그들의 마음대로 따라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에 대한 나의 가르침은 항상 동일하다.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되 다 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대상이 누군가 하는 것이다. 여러분의 개인예배를 회중 예배에서 착각한다면 그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올바로 받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위의 모든 것들이 진리이지만 진리를 올바르게 진리되게 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지혜이다.

[우종학] 짧게 살펴가는 책 산책: 기독교세계관 서적을 중심으로

2004/ 11

창 밖으로 물감들인 나뭇잎들이 서서히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책이 고프다고 느낄 때 그때 볼만한 책 좀 없을까요? 글쎄요… 그보다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꼭 읽어야 할 내용을 다룬 책들을 몇 권 짚어볼까 합니다. 딱딱하게 말해 소위 기독교세계관 관련 서적이랄 수 있겠습니다만 세계관이란 말이 하도 딱딱해서 이런 책들은 잘 팔리지도 않고 읽히지도 않는 듯합니다. 그래도 굳이 세계관 책 들을 소개하겠다는 건 단순한 아집만은 아닙니다. 그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중심에 이 ‘세계관’이란 것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만큼 중요한 내용이란 얘깁니다.


아 주 쉽게, 개인적인 차원으로 말해서 기독교세계관이라는 것은 예수라는 분의 삶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충격을 받은, 그래서 그분처럼 살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의라고 할 수도 있겠죠? 이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 하나의 생각의 틀, 행동의 틀이랄 수 있겠습니다. 갑자기 끼어들어오는 차를 향해 욕을 하려다가 ‘나의 큰 죄도 용서를 받았는데 이 정도는 참아주자. 저 사람도 죄인, 나도 죄인 아닌가.’ 뭐 이런 생각이 들어서 웃어넘긴다면 그건 바로 기독교세계관이 바탕이 된 반응이랄 수 있습니다. 굳이 세계관을 통해 복잡하게 분석해서 결정한 행동이 아니라도 말입니다. 유학이나 직장을 결정하는 대사에서부터 하루하루의 작은 의사결정의 순간까지 ‘예수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실까’와 같은 틀을 갖고 임하는 것이 바로 기독 교세계관에 따르는 삶입니다.


이 런 생각의 틀, 행동의 틀이 저절로 갖춰지는 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우선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 가장 좋은 책은 바로 예수평전입니다. 유명한 예수평전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마가나 누가가 쓴 예수평전이 아주 좋습니다. (흔히 마가복음, 누가복음이라고 하죠) 전기를 읽듯, 길지도 않은 마가의 예수평전을 죽 읽어가면서 예수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았고 제자들은 예수를 어떻게 이해했으며 저자는 예수를 어떻게 그리고 있는가를 물어가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한두 문단에 대한 집중적인 성경공부도 필요하지만 이렇게 예수평전을 독서하는 것이 바로 세계관 공부의 기본이 됩니다. 한글개역성경의 표현들이 익숙해서 식상하다면 영어판 예수평전을 읽는 것도 적극 추천합니다.


인 간은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세계관은 개인적인 삶의 영역을 넘어서는 좀 더 복잡한 얼굴을 갖습니다. 미국 대선에서 누구를 지지해야 하는지, 낙태와 여성의 권리, 혹은 통일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등등, 우리의 삶에는 다양하고 간단하지 않은 문제들이 산재합니다. 그리고 분명 이런 이슈들에 대해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문제는 성경이 이런 문제들 하나하나에 대해 속 시원히 가르쳐 주지는 않는다는 데 있는 거지요.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원리들에 기초해서 생각하는 틀, 행동하는 틀을 길러야 합니다. 이렇게 기독교 세계관을 훈련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과제이기도 하지만, 훈련된 기독교세계관이 없이는 우리의 신앙이 제대로 살아남기 어렵기 때문에 그것은 필수불가결한 것입니다.


기 독교인의 가정에서 태어나 교회 잘 다니던 홍길동이라는 학생이 대학에 갑니다. 그리고 첫 학기부터 쏟아지는 무신론과 상대주의의 공격에 그리고 자기와는 다른 다양한 믿음들을 갖고 살아가는 친구들과 교수들에게 충격을 받으며 점점 신앙을 잃어갑니다. 남 얘기가 아니지요. 저도 대학에서 이런 혼란을 겪었고 지금도 겪는 중입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며 세상에 눈감아버리는 것도 하나의방법이겠지만 그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따를 규범은 아닙니다. 우리는 다원주의적이고 상대주의적인 사회 속에서 여전히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홍길동, 대학에 가다’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제임스 사이어의 책은 여러 명의 대학신입생들이 겪는 혼란을 소설처럼 다루면서 중간 중간 다양한 세계관들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200페이지를 넘지 않는 얇은 책에 스토리를 따라 쉽게 읽히는데다가 캠퍼스를 무대로 유학생들이 겪는 문제랑 유사성이 있기 때문에 흥미가 더합니다. 원서에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이나 대학의 명칭까지도 의미를 담고 쓰여 져 숨은 재미가 있는데 번역서도 나름대로의 노력을 했습니다. 대학시절의 방황과 낭만을 생각하면서 기독교세계관을 점검해 볼 일독을 권합니다. 제임스 사이어의 세계관 책으로는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이 잘 알려져 있는데요, 다양한 세계관을 하나하나 소개하는 방식의 카탈로그라 하겠습니다. 70년대에 출판되었고 80년대에 개정되어서 조금 해묵은 감이 있지만 사전식 정리를 해보기에는 좋을 겁니다. 그 책의 원서 제목, ‘the Universe Next Door’도 의미심장합니다.


그 런데 기독교세계관이 정말 필요한 걸까요? 그것을 잘 역설한 책으로 송인규의 ‘죄 많은 이 세상으로 충분한 가’라는 소책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에 입각해 이 세계와 인생과 문화 전체를 인식하고, 이해하고, 그에 따라 삶의 자세 (구원과 직접 관련된 것이든 일반적인 영역에 속한 것이든)를 확립 하는 기독교적 안목의 부재”, 그러니까 기독교세계관의 부재를 강조하면서 세계관 정립을 위한 지침들을 제안합니다. 세계관에 관련된 문제의식을 갖는데 좋을 것이고 소그룹모임에서 함께 읽고 나누기에도 부담이 없습니다. 물론 책값도 저렴하고요.


자 신과 여러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기독교세계관을 잘 다룬 책으로 폴 마샬의 ‘천국만이 내 집은 아닙니다’라는 책이 있지요. 이 책의 원제목은 사실 ‘천국은 내 집이 아닙니다(Heaven is Not My Home)’인데 한국에 번역되면서 천국을 좋아하는 한국기독교에 맞게(?) 책제목이 약간 부드러워진 것 같습니다. 토론토의 기독교학문연구소에서 가르치고 있는 폴 마샬은 정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유명한 저술가, 강연가로 정치에 관련된 기독교세계관 책들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야기중심으로 전개되는 책들을 통해 자극이 되었다면 좀 더 체계적인 세계관 책들을 읽어봅시다. 기독교세계관은 예수의 공생애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기독교 안에 다양한 신앙의 칼라가 있듯 신학적 배경에 따라 세계관의 깊이와 내용에도 조금씩 차이가 납니다. 80년대 중반에 한국에 소개되어 세계관 운동을 불러일으킨 기독교세계관은 칼빈주의 계열 화란학파의 세계관이랄 수 있는데 이와 관련된 고전을 꼽자면 라챠드 미들톤과 브라이완 왈쉬의 ‘그리스도인의 비전’을 들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성경의 세계관을 채택하는 신앙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는 성경의 세계관을 창조-타락-구속의 세 가지 틀로 정리하면서 타락한 세상을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시켜갈 것인가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비전을 제시합니다.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도 같은 맥락의 기독교 세계관의 틀을 잘 제시한 책으로 많이 읽히는 고전입니다. 이 두 책은 입문서로 소그룹에서 네댓 번에 걸쳐 스터디 하기에 좋은 교재이지요.


이 렇게 큰 틀을 제시하는 총론을 다루는 책들로 우리 삶의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해 답을 얻기는 물론 어렵습니다. 다시 말해, 다양한 삶의 영역에서 기독교세계관이 구체적으로 세워지는 각론들이 읽히고 쓰여 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영화라든지 컴퓨터게임이라든지 복제연구라든지 공교육이라든지 사회의 구석구석 문제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성경의 원리에 맞게 답을 제시할 것인가 하는 것은 결국 현장에서 씨름할 그리스도인들이 써가야 할 몫입니다. 물론 그것을 위해서 기본적인 세계관의 훈련을 지금부터 쌓아가야 하는 것이지요. 생각의 틀이 명확히 확립되었다고 해서 행동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쉽게 경험하듯이 보통 옳다고 믿는 대로 살아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렇지만 무엇이 옳은지 모른다면 아예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기회조차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집은 천국이 아니라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어떻게 하나님나라의 시민으로 세상을 섬겨야할지 공부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네 인생에 가을이 오면 성숙한 잎들로 물든 저 나무들처럼 아름다운 자태를 선보일 수 있을까요?


-  홍길동 대학에 가다, 제임스 사이어, 김성현 옮김, IVP


-  천국만이 내 집은 아닙니다, 폴 마샬, 김재영 옮김, IVP


-  죄많은 이 세상으로 충분한가, 송인규, IVP


-  그리스도인의 비젼, 리차드 미들톤 & 브라이언 왈쉬, 황영철 옮김, IVP


-  창조 타락 구속, 알버트 월터스, 양성만 옮김, IVP


-  기독교세계관과 현대사상, 제임스 사이어, 김헌수 옮김, IVP

[김한준] 헨리 나우웬의 “아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 를 읽으며…

이코스타 2004년 11월호

동양 속담 중에 나 이외의 모든 사람은 다 나의 스승이다라는 말이 있다. 어떤 사람은 본받을 만한 모델로서, 또 어떤 사람은 본받지 말아야 할 반면교사(反面敎師)로서, 다 나름대로 배울 만한 점들을 제공한다는 의미로 이 말이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보면, “모든 사람으로부터 최소한 한 가지씩의 장점을 발견할 줄 아는눈을 가지도록 하는 권유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살아가면서 인격적으로, 또는 책 등을 통하여 직간접적으로 만나게 되는 만남이 믿는 이들에게 주는 의미는 각별하다.  각 사람들에게서 부분적으로만 드러났던 하나님의 형상이 만남과 나눔들 가운데서 더욱 온전한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헨리 나우웬(Henry Nouwen)간접적으로만나는 만남도 우리의 묵상과 깨달음에 풍성함을 더하여 주는 한 좋은 예인데, 다른 사람들의 삶을 통하여 주님을 만나는 일에 탁월하였던 그를 통하여 우리 역시 주님을 만나기를 소망한다.



헨리 나우웬의 삶은 사역적인 면에서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예일대에서 신학적 심리학을 가르쳤던 70 년대, 하버드에서의 파트타임 강의와 남미 선교를 병행하였던 80 년대, 그리고 캐나다의 라르쉬 공동체 데이브레이크에 들어가서 장애인들, 특별히 아담이라고 하는 한 중증 장애인과 함께 남은 생애를 보낸 90년대가 그것이다. 그가 유명 작가와 일류 대학의 교수라는 영향력을 뒤로 하고 (사실은 그의 모든 존재를 집약해서!) 한 영혼을 섬기는 삶을 사는 데에 생의 마지막 10년을 보낸 사실은 잘 알려진 대로이므로, 그런 면에서 아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라는 책에는 그의 인생의 무게가 실려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담과의 만남



아담 아네트(Adam Arnett) 1996 2월에 34 년의 생을 마감하였으며, 헨리 나우웬도 이 책을 쓰고 난 직후인 같은 해 9 , 마치 자신도 할 일을 다 하였다는 듯 아담의 뒤를 따라갔다. 그는 아담의 삶을 통하여 본 예수님과 그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자 이 책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나는 관에 누워있는 아담의 시신을 본 순간부터, 그의 삶과 죽음의 신비에 사로잡혔다. 그때 섬광처럼 내 가슴에 와닿은 사실은, 바로 이 장애인이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며 독특한 사명을 띄고 이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이제 그 사명을 완수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그런 시선으로만 아담을 보았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를 아끼던 많은 친구들은,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한 도움, 더 체계적인 인도함, 더 큰 섬김의 기회들을 마다하고 이런 곳에 와 있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헨리, 자네가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데가 여기인가?” 그는 혼란스러워했을 뿐만 아니라 화를 내고 있었다. “아담에게 자네의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던 대학을 떠났단 말인가?”…”



생각의 변화



사명감과 의욕으로 시작하였던 새로운 섬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의문과 방황과 영적 침체의 모습으로 그에게 다가오게 된다. 그러던 그의 마음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변화되어 갔다.  



“…한 주 두 주, 한 달 두 달이 지나면서 나는 아담과 함께하는 한두 시간을 사모하게 되었다형세가 역전되고 있었다. 아담은 나의 선생이 되어가고 있었고, 내 삶의 광야를 혼란 가운데 헤메고 있는 나와 함께 걷고 있었으며, 나를 이끌어주었다. 아니,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와 함께있는 동안 나는 그를 돌보는 모든 활동을 넘어, 내면에서 들려오는 사랑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 시간은 순수한 선물이요, 묵상의 시간이었다. 우리는 함께 하나님의 어떤 부분과 만나고 있었다. 아담과 함께 나는 거룩한 존재의 현존을 알았고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



모두의 눈에 선생이었고 돕는 자였던 그가, 실제로 주님 안에서 배우고 도움을 받은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의 섬김과 양육의 대상이 되어주므로써, 그러한 일들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하였을 배움과 자라남을 가능케 했던 아담이야말로, 그 자신을 위하여 세워주신 영적 스승이요 영적 은인이었다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아담을 통하여 만나는 예수님, 그를 통하여 만나는 우리 자신



“…예수님은 권세와 힘을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연약함의 옷을 입고 오셨다. 나는 아담이 제 2의 예수님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예수님의 연약함 때문에 아담의 극도로 연약한 삶을 최고의 영적 의미가 있는 삶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아담에게는 내면의 공간을 채우려는, 마음의 산란함이나 집착 그리고 야망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아담은 하나님을 위해 마음을 비우는 영적 훈련을 할 필요가 없었다. 소위 그의 장애가 그에게 이러한 선물을 준 것이다대부분은 아담을 불구자로 보았다. 우리에게 줄 것이 거의 없고, 가족과 공동체와 사회에 짐만 되는 사람으로 말이다. 그가 그런 식으로 여겨지는 한, 그의 진리는 숨겨진 채로 있을 것이다…”  



헨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아담의 참된 가치를 보았으며, 아담을 통하여 세상이라는 거품을 걷어낸 예수님의 참 모습을 그의 마음에 되새길 수 있었다. 내게 다가오는 예수님의 이미지는 정직한 의미에서 어떤 모습일까? 나는 혹 내가 보기 원하는 주님의 모습만 보고 있으면서도 그런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눈을 덮고있는 비늘을 벗겨주기 위하여 때때로 삶의 한복판으로 찾아오는 장애고난의 의미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그들은 그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자로, 곧 철저한 연약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축복의 도구가 되도록 하기 위해 보내신 자로 환영했다. 그를 이렇게 바라보면 근본적으로 모든 것이 바뀐다. 그때부터 아담은 특별하고, 경이롭고, 타고난 재능이 있는 약속의 사람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그의 경이로운 존재 자체와 믿어지지 않는 가치는 우리에게, 우리도 그처럼 하나님께 귀히 여김을 받고 은혜를 입었으며 사랑받는 자녀임 자신을 부자라고 생각하건 가난하다고 생각하건, 지성인으로 보든 불구자로 보든, 잘생겼다고 생각하든 매력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든 상관없이 을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해줄 것이다…” 



우리는 존귀한 존재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존재 자체를 그토록 귀히 여겨주시며 사랑하고 계시는 그 단 한 가지의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실을 너무도 자주 잊어버리곤 한다. 그렇기에, 나의 수고와 지식, 성취에 기대어 존귀함을 획득하고자 애쓰기도 하고, 같은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네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네가 진실로 아느냐? 네가 이토록 귀하기 때문에 네 죄 값으로 인하여 네가 죽는 것 보다는 내가 대신 죽는 편이 낫겠다고 여긴 것이란다…”  



존재에 관하여 



“…인생은 선물이다. 우리 각 사람은 독특하며, 우리 이름이 아신 바 되었으며, 우리를 만드신 그분의 사랑을 받는다. 불행히도 우리 사회로부터 우리에게 다가오는 너무 크고 끈질기며 강력한 메세지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가진 것 그리고 성취할 수 있는 것으로 사랑받는 존재임을 증명해야 한다고 믿도록 한다. 우리는 이생에서 무언가 해내는 일에 몰두해 있으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진리 곧 우리의 기원과 종말에 대한 진리를 이해하는 데 너무나 느리다 그들은 아담의 장애만을 보게 하는 시험을 이겨냈다. 그들은 그가 돌을 떡으로 바꾸거나, 높은 탑에서 안전하게 뛰어내리거나, 큰 부를 획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받아들였다. 아담은 이런 세상적인 일들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 그가 사랑받는 자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로서만은 귀히 여겨질 수 없다는 생각에 불안하고 두려워질 때가 있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심지어는 가정에서조차, 우리가 귀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무엇 때문에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들이 필요하다.  용모가 아름답거나 능력이 있기 때문에, 열심히 하고 있으며 좋은 결과를 내고 있기 때문에, 학벌이나 지위가 주는 신분적인 잇점들 때문에 믿는 이들의 모임은 대개 이런 점들에서 다소나마 위로와 소망을 주곤 한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서도 이보다 낫다고 늘 자신할 수 있을까? 출석과 봉사를 잘 하고 있기 때문에, 책임과 섬김을 다하고 있기 때문에, 믿음이 좋기 때문에, 말씀이 좋기 때문에 귀할 뿐, 그러한 이유들을 상실할 때에는 더이상 귀중한 존재가 아닐 수도 있다면 말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존재 하나만으로도 귀중히 여김을 받을 수는 없는걸까? 잘못했던 일까지 칭찬하고 내버려둘 수는 없겠지만, 어느 경우에도 존재 그 자체만은 남겨져서 최소한 계속 더불어 살아갈 수는 없는걸까? 모든 수고와 섬김과 업적들은, 이미 귀중한 존재 위에 더하여진 감사 제목일 수는 없는걸까?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오히려 나 자신이야말로 그러한 세상과 공동체와 만남을 만들어가고 있는 당사자라는 점일 것이다. 사람들로부터 끊임없이 평가받고 때로는 버려지기도 하는 우리가 동시에 우리의 옆사람들을 평가하고 때로는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밀어내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들이 있기 때문에너희는 그저할 것은하고아니오할 것은아니오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말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 5:37)”



사역에 관하여 



아담이 기도를 할 수 있었을까? 하나님이 누구시며 예수님의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을까?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신비를 이해했을까?” 나는 오랫동안 이런 질문들에 대해 생각하였다. 나는 오랫동안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얼마나 아담이 알 수 있는지 그리고 내가 이해하고 있는 바를 얼마나 아담이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들이 아래로부터 오는질문들임을 알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보다는 나의 걱정과 불안이 반영된 질문이었다. 하나님의 질문, 위로부터 오는질문들은 아담이 너를 기도로 이끌도록 맡길 수 있느냐? 너는 내가 아담과 깊은 교제 가운데 있다는 사실과 그의 삶이 기도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느냐? 아담이 너의 식탁에서 살아있는 기도가 되도록 할 수 있느냐? 너는 아담의 얼굴에서 내 얼굴을 볼 수 있느냐?” 였다…” 



너는 그의 얼굴에서 나의 얼굴을 볼 수 있느냐?” 사역하느라 정신이 없고 씌임받느라 지금 분주한 나에게, 주님께서 내 옆의 한 사람 한 사람을 가리키시면서 이렇게 물으신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대답하게 될까  



“…나는 내가 한 일과 얼마나 많이 이루어낼 수 있을지에 대해 염려하는 동안, 아담은 내게 행위보다는 존재가 더 중요합니다라고 선포하고 있었다. 내가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어떤 말을 하는지에 몰두해 있을 때, 아담은 내게 조용히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의 칭찬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이 더 중요합니다내가 나의 개인적인 성취에 관심을 쏟고 있었을 때, 아담은 내게 혼자서 하는 것보다는 함께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라고 나를 일깨워주었다. 그는 바로 삶 그 자체로, 내가 접한 인생의 진리를 가장 철저하게 증거해 주었다…” 


[김재석] 유학시절: 물매질(전공실력) 단련기간

이코스타 2004년 11월호

나는 다윗이 골리앗을 대항하여 승리한 사무엘상 17장의 이야기를 읽을 때 마다, 가슴이 뭉클해지곤 한다. 전쟁에도 나갈 수 없었던 청소년 나이의 다윗이 불레셋의 대장군을 물매질 솜씨로 무찌르는 장면은 늘 감동적이다. 특히 어린 나이에도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다윗의 믿음은 우리 모두의 귀감이 된다고 하겠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다윗이 골리앗을 무찌르는데 사용한 실제적 방법이 물매질솜씨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가 평소 사용하지 않던 솜씨였는데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주여! 믿습니다” 하면서 물매를 던져 골리앗을 물리쳤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시편과 다른 구약성경에 보면, 다윗은 자신이 돌보던 양떼를 사자나 곰 같은 동물들로부터 잘 보호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고, 그 방편으로 물매질 솜씨를 익힌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힘센 동물들이 공격하여 양떼를 잡아가면, 모든 사람들에게 excuse가 될 수 있는 상황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스스로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즉 그의 물매질 솜씨는 자신에게 맡겨진 일(업무)를 최고의 수준으로 수행하기 위한 전공적인 기술이였다.
다윗은 이 물매질 솜씨를 연마하기 위해 따분한 들판의 시간들을 허비하지 않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고, 하나님은 이러한 그의 전공적인 기술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안겨주신 것이다.


유학의 목적이 두말할 나위도 없이 전공분야에서의 실력 향상과 이를 통한 학위 취득임은 자명하다. 그러므로, 유학기간이 우리의 전공 실력, 즉 물매질 솜씨를 향상시키기 위한 최고의 기간일 것이다. 하나님은 훗날 이러한 우리들의 기술과 은사를 사용하여 그의 나라와 이웃을 위해 귀하게 사용하실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물매질 단련기간을 다음과 같은 몇가지 관점에서 새로이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무엇을 위한 실력 향상이고, 유학인지 재고해 보아야 한다.
세상의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의 만족과 인정 받음, 그리고 결국에는 자신이 드러나서 남에게 섬김받고 최고가 되고 싶은 마음에서 유학의 길을 택하고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인생관을 나의 인생관으로 갖고 사는 사람들이다. 주님은 자신의 인생의 목적을 “섬기러 왔다”고 하셨다(막10:45).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꿈과 유학의 목적도 하나님과 이웃을 더 크게 섬기기 위함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이웃을 더 잘 섬기기위해 실력 향상을 도모하는 새로운 종족이여야 할 것이다.


나는 교수로써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교수라는 위치가 사회적으로 어느정도 인정과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으로 인해 내 일에 만족감을 느끼지 않는다. 나는 학생들을 잘 가르쳐서 그들이 미래 사회를 올바르고 멋있게 이끌어 나가도록 돕는 일을 위해 섬기는 자로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나의 기쁨이요, 만족의 근원이다.


둘째, 섬김은 최고의 실력으로 할 때 훨씬 기쁘다.
우리가 비싼 레스토랑을 가는 큰 이유중 하나는 최상의 서비스를 받는 기쁨 때문이다. 우리가 어느 상점에 가든, 어느 사무실에 가든, 어떤 음악을 듣든, 또는 어떤 제품을 사든, 그곳에서 최상의 서비스와 최고의 품질을 만날 때에는 정말 마음이 기쁘고 흐믓하다. 적당히 만들어진 제품이나 적당히 행하는 서비스에는 감동이 전혀 없다. 우리가 물매질 솜씨를 향상시킬 때에는 최고와 최상의 수준을 목표로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윗은 죽음을 각오하듯 최선의 노력으로 양떼를 지켰고, 이로 인해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셨다(시78:70-72).


물론 최고가 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나는 학생들에게 더 쉽게 설명할 방도를 찾고, 더 잘 가르치기 위해 외국의 교수법도 공부하면서 다양한 노력들을 하고 있다. 나는 이것을 통해, 내 강의를 들은 학생들이 기쁨으로 돌아가길 늘 소원한다.


셋째, 우리가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지혜를 늘 간구하며 살아가야 한다.
유학을 성공리에 마치는 것은 50%의 자기 노력과 50%의 운이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50%의 운이라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바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이다. 나도 유학시절, 장학금만으로 생활비를 겨우 마련하고 있었는데,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보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얼마나 적절하였는지 모른다. 또한 중요한 어떤 실험 결과를 도출하는 것이 나의 논문에서 필수적인 요소였는데, 실험기기가 계속 고장나고 실험용으로 만든 wafer는 거의 닳아 없어지는 것으로 인해 얼마나 초초하였는지 모른다. 그런 순간순간마다 실험기기에 손을 얻고 기도를 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요청하였고, 결국 원했던 실험 결과치를 막 얻고 나서는 실험기기가 더 이상 손 댈 수 없게 고장이 나버렸다. 또한 논문 최종심에서도 까다로운 교수로 인한 어려움을 하나님이 적절히 인도해 주심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졸업을 앞두고 미국의 불황으로 인해 취업의 문이 막히고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내 분야의 논문 저자들에게 직접 편지를 띄우는 좋은 아이디어를 주셨다. 이 방법을 통해 내 관련분야의 논문 저자들에게 20여통의 편지를 보낸 중에서 5-6군데서 인터뷰 요청을 받았고, 첫 인터뷰를 했던 Bell Lab. 에서 곧바로 job offer를 받을 수 있었다. 이것은 당시 우리 학교와 유학생 사회에서 그리스도를 충실히(?) 섬겼던 사람이 받는 축복이라고들 말해주곤 하였다.


우리 삶의 매 순간순간 하나님의 인도하심와 도우심을 간구하고, 또 이것을 실제로 체험하는 것이 축적될 때 우리의 신앙도 성숙되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주신 은사를 따라 우리를 사용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이를 단련하고 준비해 놓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실 수 없다. 하나님께 쓰임받기를 원한다면, 이제 당신의 물매질 솜씨 연마를 위해 이 유학기간을 잘 활용하기를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