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호] 제 5 떡 – 광야의 축복 –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


크리스천으로서 만나의 체험이 있는가? 하늘에서 공급되는 광야의 떡, 만나…… 떡의 본질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만나를 알 필요가 있다. 만나를 알기 위해서는 광야 체험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광야 체험은 반드시 홍해 체험에 이어서 따라온다.


우리 가족이 미국과 한국에서의 삶을 접고, 중국으로 들어간 사건은 적어도 우리 부부에겐 영원히 기억되며 자손들에게 들려줄만큼 깊고 생생한 홍해바다의 체험이었다. 그러나 홍해 바다를 건넜던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했듯이 과연 우리의 믿음이 홍해를 건널만한 믿음이었는가 반문해 본다면 그렇지 않았음을 곧 깨닫는다. 10년전의 그 결단을 두고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 부부의 믿음에 탄복하며 더러는 칭찬한다. 그 당시 반대하고 이해 못하던 가족과 선후배들 조차 이제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임을 인정하고 심지어 부러워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 당시의 연약했던 믿음으로 어떻게 그 홍해를 건넜는지 기억하고 있는 우리는 그같은 칭찬을 들을만한 사람도 아니며 그런 믿음을 가진 적도 없음을 솔직히 고백해야만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히 11:29h)”다고 기록하지만, 그 사건의 경위를 자세히 미루어 살피면 결코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수시로 모세를 두고 원망하며 애굽으로 돌아갈 것?요구하던 그 믿음없는 이스라엘 백성을 강제로 등 떠밀어, 뒤에서는 바로의 군대가 무섭게 쫓아오고 앞에는 홍해바다가 가로막힌 절체절명의 순간을 연출한 후에, 어쩔 수 없이 건너게 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셨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세월이 지난 후에 오히려 슬쩍 “너희가 믿음으로 홍해를 건넜다”고 칭찬해 주시는 것이다. 자식을 세워주는 부모의 마음이다.


애굽의 노예 생활에 깊이 물든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돌려 애굽을 떠나도록 하는 것은 바로의 마음을 돌리는 일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애굽에 내려진 12가지 재앙은 비단 바로의 마음을 두렵게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떠나도록 허락하기 위한 것 뿐아니라 함께 그것을 목격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깨달아 알게 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죄와 욕심에 깊이 물든 인간들이 자기가 누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베데스다 연못가 행각 아래 들어누워 동냥으로 살아가던 삼십팔년된 병자는 죄와 죽음의 족쇄에 갇혀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전형적인 표상이다. 그들은 이미 스스로 낫고자 하는 노력도 소망도 없이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노예적 근성에 물든 채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 자리는 최소한 자신들이 먹어야할 끼니를 제공하고 비를 피할 장소가 되었다. 그곳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안전한 장소처럼 느껴졌고 오랜 습관 속에서 그들은 오히려 그곳을 즐기고 있을 수도 있다. 자신이 이미 죽을 수 밖에 없는 심각한 병에 걸린 병자라는 사실은 일상 속에서 잊혀진지 오래다. 요행히 물이 동할 때 먼저 연못에 들어감으로 병이 나을 수 있다는 속설은 그들이 베데스다를 떠나지 못하도록 하는 구실에 불과했다. 따라서 몸을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삼십팔년된 병자에게는 자신이 병을 고치지 못하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먼저 연못에 들어감으로 자신은 항상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체념이 그를 묶어두고 있었다. 오직 그의 관심은 그 자리를 고수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할 떡을 구하는 것, 그것 뿐이었다. 이 상황 속에서 그가 자신이 누웠던 자리를 들고 벌떡 일어나는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예수를 만나는 방법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예수를 만나는 체험, 그것은 바로(Pharaoh)의 통치와 바알(Baal)의 노예로 살아가던 자들에게 임하는 해방 선언이다. 떡의 노예로 살아가던 자들을 향해 외치는, 자유인으로의 부르심이다. 유월절 어린양의 흘린 피를 통해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너머선 후, 홍해 바다를 건너게 하신 은혜의 체험이다. 아직 자유인이 되기에 불충분하며 부자격하며 준비되지 않은 사람을 오직 예수의 피로 자유인으로 법적 선언을 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홍해 바다는 십자가 안에서 누리는 일회적인 구속의 사건일 뿐아니라 앞으로 지속적으로 임할 광야 생활에 대한 시작의 종소리이기도 하다. 따라서 법적인 자유를 너머서서 생활 속의 자유인이 되는 것은 지속적인 훈련을 필요로 한다. 광야 생활, 그 특별한 체험을 통해 비로소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배워간다. 떡으로부터의 자유…… 그것은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주고 싶어하는 아주 특별한 선물이기도 하다. 떡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자녀들이 누릴 권리이기 때문이다.


우상이 되어버린 떡에는 힘이 있다. 떡이 우상이 되면 스스로의 권리를 행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인간은 떡에 예속된 노예로 전락한다. 주종관계가 뒤바뀌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떡을 숭배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떡은 단순한 물질을 너머 인격적, 영적인 존재로 탈바꿈한다. 예수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라고 말했을 때 사용한 단어가 그당시 사람들이 섬기던 물신(物神) 맘몬(Mammon)이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떡은 더 이상 경제적인 문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지배하고 조정하고 또한 파멸로 인도하는 영적인 존재로 군림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 이외의 피조물에게 속박을 느끼는 순간부터 자유를 갈망하게 된다. 하나님의 형상에서 온 자유의 영을 받아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많은 종교와 철학에서 이 문제를 끊임없이 다루어 왔다. 어떻게 떡의 속박에서 벗어날 것인가? 떡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한 노력으로 불가(佛家)에서는 무소유(無所有)를, 도가(道家)에서는 무위(無爲)을 이야기한다. 떡을 외면하든지 떡을 무시함으로써 떡을 초극(超克)하고자 하는 것이다. 전자가 적극적 도피라면 후자는 소극적 도피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다르다. 떡은 경계의 대상도 경시의 대상도 아니다. 떡은 떡일 뿐이다. 떡은 떡으로서의 존재가치를 지닌 피조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홍해를 향해 떠나라 하는 것이다.



(2)


해방의 기쁨은 잠시…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 앞에는 광야가 펼쳐진다. 광야는 두려움과 불안을 가져오고 곧바로 모세를 향해 원망의 목소리를 발하게 된다. 차라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가 더 좋았다고 회상하기 시작한다. 비록 노예생활이었지만 애굽의 고기가마 옆에서 떡과 고기를 배불리 먹던 기억이 나는 것이다. 그들의 원망에 하나님은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내시며 하나님의 방법으로 응답하신다. 도저히 광야에서 기대할 수 없는 신비한 방법으로 아침마다 만나를 내리시는 것이다. 작고 둥글며 서리같이 세미한 것, 진주처럼 빛나며 꿀처럼 달콤한 그 만나를 처음 대하였을 때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어떻했을까? 만나는 단순한 일용할 양식 그 이정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돌보심을 나타내는 세미한 음성이요 속삭임이었다. 너는 내 것이라… 내 백성이라… 이제 내가 너를 먹이고 돌볼 것이다 하며 어루만지시는 임마누엘의 체험이었다.


중국으로 가기로 모든 것이 결정되고 마침내 떠날 날을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 평소에 우리 가족을 아껴주던 한 여집사님이 집을 찾아왔다. 아이와 아내를 위해 눈물로 기도를 해주던 그녀는 일어나면서 하얀 헌금 봉투를 내놓았다. 처음 당해보는 일이라, 나는 그 봉투를 받아들고 일 순간 무척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분의 고마운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한편으론 야릇하게 마음이 상했다. 마치 내면 깊숙한 곳에 감추어두었던 남에게 보이기 싫은 치부가 들어난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누군가 건드려서는 안될 내 자존심을 건드린 것 같은 아주 묘한 느낌이 들었다. 예민한 아내 역시 그 느낌을 받았는지 집사님이 집을 떠나자마자 곧 울음을 터뜨렸다. 서럽게 엉엉 우는 아내를 안아주며 토닥거려 달래는 동안 나는 문득 깨달았다. 앞으로 우리가 걸어갈 인생이 어떤 모습으로 전개될 것인지를…… 그동안 살아오면서 나와 내 아내가 스스로의 힘으로 살 수 있다고 믿고 살아가던 그 아성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내가 벌어서 먹고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존하여 살 수 밖에 없는 그 땅으로 떠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아내의 울음 앞에서 초라해지고 상실감에 빠져 있던 나에게, 그 순간 어디에선가 은은하게 내면의 깊은 곳을 어루만지며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다.
“진호야, 많이 아프냐?”
내가 아내를 달래며 어루만지는 그 손길로 하나님이 나를 만지고 계셨다.
“그 자존심, 네가 빼앗기기 싫어하는 그 자존심도 이제 나를 위해 내려 놓아라.”
그리고 출렁이는 감동으로 위로의 성령님이 찾아오셨다.
“아무 염려하지 말아라. 이제 앞으로는 내가 너희를 책임지겠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지난 10년간 신실하게 지키셨다. 그 신실한 하나님을 체험했기에 이제는 앞으로 다가올 또 다른 10년이 두렵지 않다. 연변과기대의 모든 재정은 전 세계에 흩어진 동역자들의 후원에 의해 이루어진다. 해외에서 들어간 교직원 역시 자원봉사 시스템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연변과기대의 교직원들은 반드시 자신의 가정을 후원할 후원자들을 스스로 확보하지 않으면 안된다. 서른이 너머 늦깍이 신앙생활을 시작한 탓에, 교회 배경도 별로 없고 동역자를 구하기도 힘들었던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처음 작정하고 기도했던 만큼의 후원자를 정확히 붙여주셨다. 더러는 세월이 지나남에 따라 열정이 식은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기억속에서 잊혀져간 사람들도 있었지만 또 그만큼 새로운 단체와 개인들을 붙여주셔서 항상 우리가 필요한 만큼의 물질로 채워주셨다. 북경의 한 컨퍼런스에서 처음 만나서 사귀게된 L박사님은 우리 가정이 재정적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어떻게 알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를 도와 주었다. 초창기 연변과기대의 재정상황은 아직 체계가 잡히지 않아서 우리 가정의 후원계정을 통해 학과 살림을 운영해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 자신 역시 내 구좌에 잔고가 남아있는 한 그것을 어떤 모양이든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서 공적인 일임에도 불구하고 학교재정보다는 개인 재정을 써서 활동하는 일이 더 많았다. 그 당시는 항상 마음 속에 넘치는 은혜가 있었기에 풍성함이 있었던 것 같다. 학교일로 출장을 가도 내 구좌에 돈이 남아있는 한 으례 자비로 다녔고, 주말마다 학생들과 교직원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먹이는 것이 너무나 기뻤다. 모든 것이 너무나 당연했고 항상 감사했다.


삼년 후, 하나님의 뜻에 의해 한동대에서 연구년을 가질 때, 한국에 IMF 사태가 터졌다. 나는 마침 한국서 월급을 받게 되어 그 어려움을 무사히 통과했지만 중국에 남아있는 동역자들의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특별히 한국에서 건너간 가정들은 후원이 끊기고 대폭 삭감되었다. 그들의 어려움을 전해들은 나는 어려운 가정 한 가정을 택하여 익명으로 조금씩 돕기 시작했다. 그것은 물질적 도움 이전에 한 몸을 이룬 지체와 동역자의 어려움을 함께 느끼기 위한 내 마음의 표시였다. 그러던 중 우리 가정도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우리 가정의 재정 상태도 악화되었다. 어느 달은 마침내 (-) 밸런스를 기록하게 되었다. 그러자 먼저 떠오른 것이 우리 가정도 이렇듯 힘든데 어떻게 남을 도울 형편이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후원회에 연락을 하여 그 가정 돕는 것을 중단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더 답답하고 불편했다. 이 작은 어려움에 쉽사리 흔들리는 내 자신의 믿음없음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다. 며칠을 기도하는 가운데 다시금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믿음으로 다시 회복이 되었다. 그리고 후원회에 재차 연락하여 그 가정 돕는 것을 계속하겠다고 부탁했다. 그러자 다시 평화와 기쁨이 밀려왔다. 그것이 바로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의 마음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달부터 우리 가정의 재정은 신속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는 매년 돌아가면서 한 가정씩 돕는 일을 멈추지 않고 있다.


중국에 오기 전에는 대학 강의와 개인 렛슨으로 항상 자신이 번 돈을 충족히 가지고 살아가던 아내가 중국 생활을 시작하면서 처음 겪어야 했던 어려움 중 하나가 재정문제였다. 이제는 항상 모든 재정을 남편에게 의존적으로 타서 생활할 뿐 아니라 그나마도 항상 부담감을 가지고 물건을 사야만 한다는 사실이었다. 하기사 그 당시 연길의 백화점에서 무엇 하나 사려고 해도 살만한 물건도 없었지만, 미국과 한국서 자기가 벌어서 원하는대로 쇼핑을 하고 지내던 그녀에게는 그 생활이 여간 답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제대로 발휘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배우는 학생들이 자신이 받고 있는 렛슨이 얼마나 값비싸고 소중한 것인지조차 알지 못하고 더러는 약속 시간을 안지키고 빼먹거나 하면, 아내는 집에 돌아와 공연히 나에게 종알대곤 했다. “이 녀석들이 도대체 뭘 몰라도 한참 몰라. 미국서 한 타임 렛슨에 백불씩 받던 그 비싼 렛슨을 자기 맘대로 빼먹고…”
그러나, 기특한 것은 지난 10년간 더러는 힘들어 해 가면서도 그 공짜 렛슨을 한번도 멈추지 않고 꾸준히 제자들을 키워냈다는 것이다. 아내에게도 홍해를 건널 때 자신이 받았던 은혜가 얼마나 컸던지, 만나는 모아두어서는 않된다는 점과 거저받은 것을 거져 주어야한다는 광야생활의 원칙만은 분명히 서 있었던 것 같다. 오직 그날 먹을 양식을 그날 공급해주는 일용할 양식에 대한 훈련, 광야의 만나는 우리 부부의 물질관을 서서히 바꾸어가고 있었다.



(3)


모든 종교에서 출가(出家)는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소명(召命)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에서의 출가와 성경에 나타난 출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불교의 출가가 세상의 모든 명예와 소유와 욕심을 버리고 속세를 떠나는 것이라면, 성경에서 출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소유를 지닌 채 떠난다. 어디 그 뿐이랴? 싯달타는 왕자의 지위와 처자를 모두 버리고 속칭 속세의 인연을 모두 끊고 집을 나섰지만, 아브라함은 자신의 모든 소유뿐 아니라 아내와 조카까지 데리고 집을 나선다. 불교의 출가가 속(俗)을 버리고 성(聖)을 취하는 것이라면, 성경에 나타난 기독교적 출가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삶의 방식과 거처를 옮길 수는 있어도 성속(聖俗)의 구분이 있을 수는 없다. 베드로가 예수를 만나 그물과 배를 버려두고 떠나는 장면은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시는 소명 앞에서 자신의 삶의 방식을 전환한 것이지 세상을 등지고 산으로 들어가기 위한 불교적 출가와 동일시 할 수 없는 것이다. 베드로를 비롯한 여러 사도들도 사역 현장에 아내를 데리고 다녔음을 기억하라.(고전 9:5) 또한 예수가 제자도를 가르칠 때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 19:29)”고 하신 말씀이나, 누가복음 14장에서 부모, 처자, 형제, 자매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며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하신 말씀도 의미를 바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모든 소유를 버려야만 제자가 된다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그 모든 것 보다 복음이 우선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 어떤 것도 복음보다 더 소중하게 여길 수 없다는 말이다. 복음은 곧 생명을 의미한다. 따라서 어떤 소유 가치도 생명가치 보다 앞설 수 없다는 예수님 특유의 강조적 어법이다. 예수의 가르침 속에는 가족과 소유를 버리고 산 속으로 들어가라는 불교적 출가의 개념을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소유를 인정하되 그 소유를 언제든지 포기할 수 있도록 생명 가치 앞에서 상대화 시키는 것이다.


떡을 의식적으로 물리적으로 멀리하는 불교식 출가라면 오히려 문제는 쉬워진다. 그러나 기독교의 출가는 떡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치열한 삶의 현장으로의 부르심이기에 더 어려운 것이다. 그곳에는 내가 스스로 취하는 떡으로 살아가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께 의존하여 살 수 밖에 없는 광야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비로소 떡으로부터의 자유케 되는 방법을 체험적으로 배워가게 된다. 그것도 한 두해가 아니라 사십년 간을 말이다.


떠나는 연습은 우리 인생에 항상 유익을 준다. 이사를 가건 이민을 가든 혹은 유학을 위해 새로운 소망을 품고 떠나든지 살아가던 거처를 한번씩 정리해 보는 것은 정말 필요하다. 묵은 삶의 찌꺼기와 먼지들을 털어내고 내가 진실로 가진 것들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는 중간 점검이 되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얼마나 불필요한 혹은 있으나마나한 것들을 껴안고 살아왔는지를 알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이시는 비전을 따라 안락한 삶을 뒤로하고 미지의 세계를 향해 발을 내딛는 것은 그 이상의 의미를 던져준다. 그것은 마치 영원을 향해 장막을 옮기는 순간을 미리 약간 체험해 보는 것과도 같다. 세상적 물질 가치의 덧없음을 조금씩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소유를 초월한 존재의 세계로 발길을 돌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10년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둘 때, 사람들이 가장 많이 던졌던 질문들이 있다. “노후 대책은 어떻게 할거냐?”, “앞으로 자녀 교육은 어떻게 책임질거냐?” 그 질문들 앞에서 당황하며 두려움에 싸인 아내와 아이를 안쓰럽게 돌아보던 생각이 난다. 성령께서 담대한 용기를 주셔서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미 사후대책이 다 마련된 사람인데 왜 자꾸 노후대책 노후대책 합니까?”라고 반문했었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 마음 속에도 막연한 두려움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타고 다니던 차를 처분했다. 중국으로 이삿짐을 부치고 난 후 이튿날 아침, 텅빈 아파트에 기대어 앉아 세 가족이 서로의 얼굴을 물끄럼이 쳐다보던 때, 갑자기 밀어닥쳤던 상실감과 두려움을 잊을 수 없다. 마치 내 것인양 붙들고 살아오던 모든 것들을 청산하고 마침내 하나님의 손에 우리 가족의 전 존재를 의탁한 그런 기분이 드는 순간이었다. 사실 그 순간 우리가 떡의 문제를 초월한 사람들이었다면 마땅히 평온과 기쁨으로 충만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했다. 그러나 그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부부를 개인적으로 친히 찾아오셔서 세미한 음성으로 위로 하셨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내 속에서 낙망하며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 42:5)”
그 말씀이 우리 부부를 여러 가지 어려움과 폭풍우 속에서도 지난 10년간의 광야 생활에서 흔들림없이 지켜주었다. 자기 소유의 차 없이 집 없이 살아가는 연길의 삶 속에서 나그네의 자유함과 천국의 소망을 배웠다. 큰 아들 다니엘은 반듯하게 잘 자라 주었고, 보석 같은 둘째 아들 데이빗을 얻었다. 비록 세상적인 건강보험(health insuarance)은 없었어도 10년을 건강하게 지낼 수 있었다. 물론 아직도 노후대책이 세워진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은 더욱 투터워졌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리실 때, 약속하신 40년 광야생활에서 뿐아니라 요단강을 건너가서 첫 유월절을 지킨후 그 땅의 소산을 먹기까지 닷새간 더 만나로 먹이셨던 그 세밀하신 하나님을 묵상하며 끝까지 책임지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알아간다.(수 5:12)


광야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만나는 축복의 통로이다. 하나님만 바라는 삶… 그 속에서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떡에 대한 우리의 주권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조근상] 무제

이코스타 2004년 2월


찬 양이 찬양되게 하는 것은 찬양 안에 있는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전에 나누었던 것처럼 물론 예배를 준비하는 찬양인도자의 준비가 중요하지만 예배에 참석하는 회중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을 찬양으로 표현하며 살아가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찬양에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을 다른 이유로 말하기도 한다. 즉 전통적으로 예배와 찬양을 드리거나 드리지 않거나 하는 문제와 또한 그것이 익숙하지 않다고 할 때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부분들이다. 하지만 그것은 방법의 문제가 아니다 예배와 찬양을 드리는 사람이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사실 요즘 우리가 드리고 있는 찬양 대 부분은 몇 년 전만 해도 사실 교회에서 불려지기 어려운 곡들이 많다. 장르 역시 다양해져서 이전에는 발라드와 칼립소의 빠른 비트(찬송가의 빠른 곡들)를 가진 것이 전부였었지만, 이제는 세상음악과 경쟁이 가능하게 된 것이 현대 찬양이다. 모두가 아는 것처럼 지금 우리가 많이 부르는 찬송가 역시 과거에는 그러한 대접들을 받아 왔다.


과 연 이렇게 뭔가가 느껴지지 않는 것이 찬양을 하는 사람들의 문제 만일까? 솔직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음악적인 사고방식에 길들여졌기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겸손한 마음, 갈급한 마음을 갖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찬양인도자로서 그리고 예배자로서 하나님 앞에 있었던 사람 다윗의 고백들은 우리로 하여금 예배의 마음이 어떤가에 대해서 잘 나타내고 있다. 고라자손의 그 유명한 시편 42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함같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인 것이다.


오 래 전에 부산에서 찬양인도를 하고 있었을 때의 일은 나에게 아직도 예배인도자로서 가져야 할 태도를 기억나게 한다. 한 번은 일주일 내내 찬양인도를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같이 찬양인도를 담당한 형제가 갑자기 불평 아닌 불평처럼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일주일 내내 첫 찬양이 목마른 사슴인데 이제는 너무 지겨워서 하기가 싫다고 말이다. 그 말을 하기까지 나 역시 몰랐었지만 일주일 내내 첫 찬양을 아니면 중간에라도 목마른 사슴이라는 찬양을 했었던 것이다. 그 때 후배에게 해 주었던 말은 이것이었다. 목마른 사슴이라는 노래를 부르지 말고, 네가 목마른 사슴이 되도록 노력해 봐라. 그러면 찬양의 지겨움이 없어질 것이라고. 사실 그렇다. 우리가 부르는 찬양은 노래로 표현한다면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 계속해서 새로 나오는 찬양들이 어떨 때에는 은혜 받기가 어려울 수 있다. 요즘의 찬양을 듣고 있으면 음악적인 센스는 뛰어나지만 오히려 뭔가가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면서 무엇인가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이전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찬양에 대한 편협 적인 생각들 역시 고쳐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찬양이 단순히 노래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하고 있기에 단순한 노래하는 것으로 묶어 버린다면 아쉬운 일이다. 우리는 찬양하면서 기도할 수 있고, 또한 찬양하면서 영적인 전쟁을 할 수도 있다. 모르는 노래가 나오기 때문에 찬양하지 못한다고 하지말고, 오히려 그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나 역시 요즘 영어권 Youth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으면 시험거리이다. 하지만, 그들의 입장에서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고 사랑한다면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따라 부를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찬양은 하나님이 대상이지만 그 대상을 향하는 우리 역시 중요한 것이다.


찬 양의 다른 표현은 묵상이다. 하나님을 묵상하고 그 분이 하신 일을 생각하는 것이 찬양의 또 다른 방법이다. 때로는 침묵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조용히 듣는 것 역시 찬양의 한 방법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자연 묵상이다. 석양의 지는 해를 보고 있을 때에는 이 세상 최고의 아티스트이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바다에 출렁이는 소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어떤 오케스트라도 표현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하늘을 나는 새들 역시 지저귀며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높이고 있다. 우리가 소리치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번에 텍사스에서 캘리포니아로 사역지를 옮기면서 24시간이라는 거리를 운전하면서 가는 동안 지나면서 각양 각색의 바위들과 돌을 보면서 하나님의 섬세하심, 그리고 광대하심을 경험하는 좋은 시간이었다. 그 오랜 거리를 지나는 동안(물론 하나님께는 짧지만) 하나도 똑같지 않는 모양의 바위들, 풍경들이 나로 하여금 절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들었다.


그 러나 역시 하나님은 우리의 직접적인 찬양을 원하신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 라고 말한 이사야서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사랑의 고백, 갈급함을 원하신다. 그렇기에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야하는 마땅한 이유가 있다. 혹시 여러분은 오늘 찬양을 대할 때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앞에서 인도하는 사람들을 따라서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필요성이 있다. 왜냐하면 그 분이 우리를 지으시고 만드셨기 때문이다.

‘공동체성은 교회의 본질입니다.’ – 최영기 목사

이코스타 2004년 2월호

1. 목사님의 소개와, 하시고 계신 사역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원래 목사였던 사람은 아니고, Ohio State University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Silicon Valley에 있는 회사에서 1977 85년까지 근무하다가, 41살에 신학교에 가서, 44살에 늦은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93년에 지금의 휴스턴 서울 침례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되었고요. 저는 예수님을 대학원 때 영접했는데, 그 때 성경을 읽어가면서 갖게 된 갈등 중의 하나는 현재의 교회와 성경에 나타난 교회가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약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은 가정 같았는데, 현재의 교회는 왜 그렇지 못할까 하는 고민을 하던 중에, 그 이유가 초대교회는 가정에서 모이는 가정교회라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브루스길라와 아굴라와 같은 사람들의 집에서 모이는 가정 교회였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휴스턴 서울침례교회에 부임하여 23 개의 목장(개별 가정 교회의 명칭)으로 가정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지금은 목장 숫자가 약 130개 됩니다. 분가가 자주 있어서 정확한 숫자는 잘 기억을 못하겠습니다. 자랑스럽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증가가 기신자의 수평 이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불신자 전도에 의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작년도 저희 교회에서 새롭게 예수님을 영접하고 침례를 받은 사람이 영어 장년부와 중고등부를 합쳐서 약 280명입니다. 한 주에 약 5명 꼴로 침례를 받게 되었다는 말이지요. 2000년도 인구 조사 통계에 의하면, 이곳 휴스턴의 한인 인구가 10,300명이라는 데 한국 사람이 가주나 뉴욕처럼 많이 않은 곳에서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은 놀랄만한 일이라고 주위 목회자님들이 말씀해 주십니다.



가정교회에 관해서 배우고 싶으신 목회자들을 위해서, 화요일부터 주일까지 5박 6일 간의 세미나를 열고 있습니다. 사실, 성경적인 교회의 모습은 공부를 가르쳐서 제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삶을 보여주고 나눔으로써 제자를 만들어 가는 겁니다. 성경공부를 통해 제자를 만드는 일이 2 3년간은 효과적일 수 있지만, 그 이후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죠. 그래서 가정교회에서는, 부부 싸움했던 얘기, 화났던 얘기들을 솔직히 나누고, 그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갔는지는 함께 나누면서 제자가 되어가도록 하고 있습니다. 세미나에서도 보고 배우는 원칙이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세미나에 참석한 사람들은 목자의 집에서 민박을 하면서 보고 배울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또한 처음 예수님을 믿는 분들을 위한 성경 공부인 ‘생명의 삶’을 속성으로 가르쳐 드리고요, 목자들의 간증을 들려드림으로써 이론이 아닌, 살아 있는 현장을 소개하려 하고 있습니다. 가정 교회 사역에 있어서, 예배가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세미나에 참석하시 분들이 주일 예배에 꼭 참석하고 가시도록 하고 있습니다.



2. 가정교회에서 성경공부를 통한 제자 양육이 아닌, 삶을 통한 양육을 지향하신다면, 성경공부 교육은 따로 진행이 되는지요?



그렇습니다. 매주 화요일에 “삶 공부”라고 이름을 붙여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은 분들을 위한 ‘생명의 삶, 다음 과정인 13주‘새로운 삶’, 다음 과정 13주‘경건의 삶’이 같은 날 동시에 제공됩니다. 이 밖에도, ‘부부의 삶’, ‘부모의 삶’, ‘교사의 삶’등 실제적인 삶에 도움이 되는 코스가 제공됩니다. 이 모든 과정들은 가르침의 은사가 있는 평신도에 의해 진행되고 있고요. 그리고 ‘쎌 교회 지침서’를 저술하신 랄프 네이버 목사님이 쓰신 6주 짜리 “매일 영적 성장 가이드’를 우리가 번역해서 사용했었는데 최근에 정식으로 NCD에서 출판했습니다. 이것과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교재로 해서 가정 교회 차원에서 1대 1로 교육시킵니다.



매주 금요일에는 가정 교회 모임인 목장모임이 있고요, 주일에는 목장의 리더인 목자들의 모임인 ‘초원모임’이 있습니다. 초원모임도 원칙적으로는 목장모임과 동일하게 진행되지만, 목장모임이 나눔과 교제가 주제라면, 초원모임은 목양이 주제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삶을 나누고 보이면서 제자를 만들어가는 것이 목장모임의 목표이기 때문에, 12명이 넘으면 반드시 분가하도록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규모가 너무 커져서 진정한 삶을 나눈다는 것이 어려워집니다.



저희 교회에서 목자가 수료해야 할 삶 공부 5 과목을 다 수료하지 못한 사람을 대행 목자라고 불러서 목장을 책임지도록 하는데 이들 중에는, 빠른 경우엔, 예수를 영접한지 7개월 만에 대행목자가 된 경우도 있습니다. 좀 빠르겠다고 생각하시겠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목자는 가르치는 리더가 아니라 섬기는 리더이기 때문에 가능하고요, 또 삶을 보여주면서 양육하는 것이기에, ‘전에 본 대로만 하라’로 권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하지요. 그러다가 힘든 일이 생기면, ‘초원모임’을 통해 묻고 함께 기도할 수 있기에, 7개월이라는 신앙경력이 별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귀납법적인 성경공부는, 주일 예배 설교를 통해 이루어 집니다. 많은 교회들이 교인 전체에게 성경을 가르칠 수 있는 이 시간을 놓치고 있는 것 같아 참으로 아쉽습니다. 주일 예배에서도 새로 믿은 분들이 적응하기 쉽게 배려하려고 하는데, 예를 들면, 성경은 표준 새번역을 사용함으로써 개역성경의 어려움으로 인해 오는 거리감을 없애려고 하고있고요, 찬송도 같은 것을 반복해서 부르려고 하고 있습니다. 또한 새로 오신 분들을 일으켜 세우려고 하지 않고요, 설교도 가능한대로 교회용어가 아닌 평상어를 사용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미 믿는 분이 우리 교회를 방문하면 다른 교회에 가서 섬기시라고 하고 등록을 허락지 않는데요, 이것 또한 새로 오시는 분들이 더 쉽게 적응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3. 왜 현대교회가 이토록 공동체성이 상실되게 되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사실, 교회에 공동체성이 상실되었다고 하기보다는, 교회의 본질이 흐려졌다고 하는 편이 나을 듯 싶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3위 하나님께서 공동체셨고, 그 하나님께서 하나님-아담-하와의 셋이서 하나되는 가정을 공동체로 세우셨고, 그리고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라는 공동체를 세우셨지요.



현대 교회는 너무도 개인 신앙을 강조한 나머지 공동체성에 대한 의식이 상실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문제를 ‘기독교가 불교화 한다’고 하곤 하지요.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가 너무도 중요합니다만, 그것만을 강조함으로써 함께 하는 신앙을 무시하면 문제가 됩니다. 전통적인 교회의 경우에 프로그램이 너무 많아서 공동체성의 상실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현재 가정교회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분들 중에서도, 가정교회를 또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생각해서 실패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기존 교회에서의 구역은 교회 내의 하나의 조직이요, 또 하나의 프로그램일 뿐이지만, 가정교회는 그 자체가 local church이고, 그 가정교회가 모인 것이 휴스턴 서울 침례교회인데 말입니다.



다시 말해, 공동체성이 상실된 교회는 원론적으로 볼 때, 예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은 아닌 것 같습니다.



4. 공동체성이 회복된 ideal한 교회의 모습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세상에 ideal한 교회는 없는 것 같습니다. 신약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도 벌써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어떤 형태의 모습이 이상적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다는 말이지요. 교회의 바른 모습의 기준은 형태라기 보다는 spirit입니다.



첫째는, ‘영혼을 구원해서 제자를 만든다’는 생각을 가지고, 영혼 구원에 집중하여 삶을 통해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만들어 가겠다는 마음가짐입니다. 마태복음 28장의 Great commission이라고 할 수 있는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에서, 실제로 명령형은 ‘제자를 삼아라’뿐 입니다. 다시 말해, 영혼 구원해서 제자를 삼는다는 것이 교회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지요.



둘째는, ‘기쁨’에 대한 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 일이 기쁨이 되어야 하고, 교회에 가는 것이 기쁨이 되어야 한다는 거죠. 저희 교회라고 불만이 있는 사람들이 없겠습니까 만은, 많은 경우에 ‘이 교회에 있어서 참 행복합니다’라는 고백을 들을 수 있어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5. 그렇다면, 그런 spirit을 가진 교회가 되기 위해, 현재 애쓰시고 계신 일들이 있으시면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저희 교회가 지난 10년간 가정교회를 중심으로 지역의 영혼 구원을 위하여 일해왔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10년간은 세계선교를 향해가고, 그 다음 10년은 지역사회 봉사를 위해 가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듭니다. 느낌이라고 말씀 드린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늘 Vision과 leadership이라는 두 가지 문제에 대해 컴플렉스가 있어 왔습니다. 교회의 미래 계획이라던가, 비젼이 뭐냐고 물어오면, 별로 할 말이 없었고, 리더십에 관해서도 내게 특별한 리더십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었거든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목회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비전이 아니라, ‘순종’뿐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들은 음성에 순종하다 보니 가정 교회가 성공적으로 정착이 되었고, 가정 교회를 통하여 지역 사회 영혼 구원에 집중하다보니, 타지역의 구원받지 못한 영혼에도 신경이 쓰여서, 작년에는 12팀이  단기 선교를 다녀왔습니다. 사실 저희 교회에는 장기 기획위원회같은 모임도 없습니다.



6. 공동체를 이루어 가기 위해, 정말 힘든 문제 혹은 장애물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또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것인가요?



(1) 목회자의 의식구조가 문제입니다. 가정교회 세미나를 들으러 오시는 목사님들을 보면, 가정교회를 교회를 부흥시키는 테크닉정도로 생각하거나, 조직의 일부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대부분 가정교회 사역이 실패하게 됩니다. 가정교회를 도입해서 성공하시는 분들의 경우는 두 가지인데, 첫째는, ‘나도 예전부터 같은 생각을 가져왔는데, 어떻게 해야 할 지 잘 몰라서, 혹은 기회가 없어서 못했다’고 하시는 분들이고, 둘째는, ‘이것 밖에는 길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하고 하시는 분들입니다. 이렇게 의식 구조가, 기존 교회가 가진 틀을 깨야만 진정한 공동체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사실, 진정한 공동체를 향해 가다 보면, 목회자들 스스로가 포기해야 할 부분이 참 많거든요.



(2) 교회 지도자들의 저항입니다. 장로나 안수집사님 같은 분들이, 가정교회를 받아들이다 보면, 다스리는 위치에서 섬기는 자리로 옮겨가야 하는 것이, 받아들이기에 힘드신 경우가 꽤 있습니다.



(3) 성도들 스스로가 변화하는 것을 꺼려 하는 경우입니다. 가정교회를 하다 보면, 삶을 서로 오픈하고 나누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서 자신의 삶이 노출 되는 것을 꺼리는 경우가 있고요, 또 기존의 교회 전통이 편해서 변화하는 것을 원치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4) 기존의 프로그램을 그대로 두고, 가정교회 같은 공동체를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진행하려는 하는 경우입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공동체성은 본질의 문제이지, 프로그램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7. 성경적인 공동체를 가꾸어 가고픈, 유학생을 비롯한 젊은이들에게 꼭 당부하시고 싶은 말씀을 해 주시겠습니까?


소속된 교회에서 목사님만 이해해 주신다면, 청년부는 가정교회로 전환하기에 참 좋은 모임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시는데 주의하실 부분은, 청년들이 지적인 것을 추구하는 성향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지적인 성향때문에 모임이 자꾸만 지성화만 추구하게 되기 쉬운데, 이런 성향을 극복해서, 섬김의 공동체로 전환되어야 하고, 가르쳐서가 아니라 삶으로 보여줌으로써 제자를 만드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젊은이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듣는 것보다는 말하고 싶어하는 성향이 있고, 사고보다는 느낌 중심으로 살며, dogma보다는 관계성 중심으로 산다고 들 하는데, 이것이 나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 성향으로 인해서 젊은이들이 가정교회에 더 잘 맞을 수도 있다는 말이죠. 어른들은 젊은 세대가 commitment가 없다고들 생각하지만, 사실 어른들 기준의 그런 헌신의 모습이 없을 뿐, ‘이거다’싶으면 더 없는 commitment가 나오기 마련이죠. 기존 교회 내에 가정교회의 모임이 없다고 하더라도, 교회의 양해만 있다면, 청년부 내에서 그런 공동체를 시도해 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함께 걷는 순례자 – 이훈 목사

이코스타 2004년 2월호

캐나다 위니펙에서 공동체 사역을 하시고 계신 이훈 목사를 통해, 공동체성이 회복된 진정한 교회에 대해 들어보자. 이훈 목사의 공동체에 관한 다른 글들은 www.christiantimes.ca의 ‘함께 걷는 순례자’라는 칼럼을 통해 볼 수 있다.


1. 목사님의 소개와 하시고 계신 사역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10년간 한국 온누리교회에서 사역하다가, 96년에 공동체를 배우기 위해 캐나다로 왔습니다. 현재 캐나다 메노나이트 교회에 소속되어 위니펙과 런던과 밴쿠버에 있는 다민족 공동체 교회가 잘 세워져 가도록 돕고 있고, Multicultural Leadership Education 프로그램을 돕고 있습니다.


2. 교회의 공동체성 회복에 많은 관심을 가지시고 일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특별히 공동체성에 관심을 가지시게 된 이유가 있으신지요?


한국에 있을 때, 소외층을 돕는 사역을 할 때 함께 더불어 살면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편 대형교회에서 사역하며 공동체 회복에 대한 특별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3. 왜 현대교회에 이토록 공동체성이 상실되어 가게 되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무엇보다 비교와 경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 즉 어느 누구 하나도 특별하지도 않으며 초라하지도 않고 모두가 동일하게 소중하다는 것, 그리고 그 나라는 경쟁이 아니라 조화에 의해서 세워지는 것인데, 그것을 모르고 있거나 소홀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4. 공동체성이 회복된 ideal한 교회의 모습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수평적 관계: 그리스도 외에 모든 사람은 서로 형제와 자매로서 수평적인 관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어떤 수직적인 구조를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만이 머리이며 나머지는 모두 그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  작은 것의 가치: 작은 것의 소중함을 깊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역보다 관계가 소중하며, 숫적인 성장을 추구하고 만족하기 보다는 상처와 소외와 분열을 피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 시대의 비극은 성공과 발전이라는 그럴듯한 목표 때문에 ‘생명’과 ‘사람’과 ‘관계’라는 더 중요한 가치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  나눔의 정신: 물질을 포함하여 가능한 한 많은 것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 정신이 필요합니다. 삶의 기쁨과 아픔을 함께 나누지 못하는 교회는 성경적인 교회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계획과 결정의 모든 과정도 충분한 의견 수렴과 대화라는 나눔의 가치를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  섬김의 정신: 그리스도의 몸은 서로 섬기며 또한 세상을 섬길 때, 가장 그리스도를 닮습니다.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이기적이 되기 쉽고 배타적이 되기 쉬움을 기억하고, 스스로를 깨워서 servant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5. 그렇다면, 그런 교회를 위해 현실적으로 어떤 일들이 “우선”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우선 교회의 수직적인 구조와 관계를 수평적으로 바꾸자고 권하고 싶습니다. 더불어 대화와 나눔을 모든 모임에서 장려해야 합니다. 건강한 공동체는 타율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율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자발성을 격려하고 싶습니다.


6. 현재 하시고 계신 사역이, 그런 ideal한 공동체적 교회의 모습에 얼마나 가까이 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또 현재 한걸음 더 나가기 위해, 애쓰시고 계신 일들이 있으시면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보다 이상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실제로 메노나이트 형제 자매들은 위의 가치들을 충분히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는 우리 한인 크리스천들이 그런 정신을 갖도록 격려하고 실험하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목회자직에서 벗어나 한 형제로서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서로 수평적인 관계를 세우기 위해 서로를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을 직분이나 직위가 아니라 형제와 자매로 부르는 선택을 했습니다. 목회자로 사역할 때도 사람들은 저를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그런 작은 선택이 공동체를 향한 작은 한 걸음의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7. 바른 공동체를 이루어 가기 위해, 정말 힘든 문제 혹은 장애물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또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것인가요?


많은 다른 민족들도 그렇지만 단일 민족, 단일 문화권의 사람들이 갖는 약점이 있습니다. 인연이 특별하다는 것과 집단적인 정서가 있다는 것, 그리고 대개 수직적인 문화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각 문화를 형성해 오는 데 도움도 되었지만, 하나님 나라의 문화와 상치되는 것이 많습니다. 그것이 지속적으로 장애물이 됩니다. 혈연, 지연, 학연이라는 인연의 끈을 교회라는 공동체는 반드시 끊어야 합니다. “누가 내 어머니며 누가 내 형제와 자매냐?”말씀하신 예수님의 뜻을 깊이 헤아려야 합니다. 공동체에 어떤 특권도 없습니다. 그리고 각 지체는 개인적으로 홀로 하나님 앞에 머물러야 합니다. 결코 자기 편을 만들려고 하거나 집단적인 파워나 영향력을 가지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홀로 그리고 더불어 살아가려는 마음, 정직하면서도 배려하는 마음, 세상을 본받지 않으면서도 세상을 살리려는 마음이 각 사람에게 있다면, 그리고 희망을 가지고 기도하며 인내한다면, 어떤 장애물이라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8. 성경적인 공동체를 가꾸어 가고픈, 유학생을 비롯한 젊은이들에게 꼭 당부하시고 싶은 말씀을 해 주시겠습니까?


어메리칸 드림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꿈을 가지십시오. 그것은 남보다 앞서는 성공하는 삶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살아가며 기꺼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음식이 되는 열매맺는 삶입니다. 빠른 속도와 수많은 선택의 기회가 있는 시대에 인내를 배우기란 어렵습니다. 서두르지 마십시오. 한적한 곳으로 향하는 삶, 반성과 고민과 기도가 있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수용력을 키우십시오. 그리스도를 따르는 영성의 가장 기초는 수용력입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 받아 이기 어려운 사람을 적극적으로 품고 지속적으로 헌신하는 마음을 배웁시다. 무엇보다도 비교하지 말고 자신이 되십시오. 그리고 제한하지 말고 열린 마음과 실험정신으로 사십시오. 한가지 덧붙인다면 지구촌의 아픔을 알고 살리는 인생을 살아갑시다.

[조한상] 역사의 공동체, 우리의 공동체

이코스타 2004년 2월호

들어가며


이것은 누구나 경험이 있는 일이 아닐까. 이를테면, 뭔가 새롭게 깨닫고, 그 일을 시작하고 애쓰다가, 문득 멈추어 살펴보니, 사람들이 나를 비웃는 것만 같고, 뭔가 잘못 되 있는 것도 같고, 또 너무도 외로울 때가 있을 때 말이다. 하지만, 조금만 돌아보면, 그 일이 결코 나만의 깨달음도 아니요, 나 혼자 가고 있는 길도 아닐 뿐만 아니라, 수 많은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이 끊임없이 이루기 위해 그토록 애써오던 바로 그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얼마나 위안이 되었었던가. ‘초대교회의 공동체로 돌아가자’는 일은 더욱 그러하다.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님이 임재하신 후 시작되었던 성령 공동체는, 초대교회를 거쳐 속사도 시대에도, 또 기독교가 국교화된 중세에도, 종교개혁 시대에도, 근세에도, 그리고 지금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대에 이르기까지 단 한번도 중단된 일이 없이 이어져 오고 있다.


이번에는, 성령 하나님께서 어떻게 교회의 역사 속에서 자신의 공동체를 위해 일하셨는지를 살펴보고, 그 역사를 통해 지금의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점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하지만, 이 글의 목적이 공동체의 역사를 공부한다기 보다는, 그 역사를 통한 우리에게로의 적용을 생각해 보는 것이기에, 순서를 다소 바꾸어 보고자 한다.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점들을 우선적으로 언급하고, 그 역사의 사건들을 간단하게 짚어 보았으면 한다.


1. 공동체성 회복의 움직임이 시작했던 때의 특징


(1) 조직교회의 부패에 대한 개혁이었다
교회사에서 볼 때, 공동체성의 회복을 위한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예외 없이 볼 수 있는 현상은 당시 조직교회가 부패했다는 것이었다. 정치적인 다툼이 있거나, 도덕적인 타락이 있어, 개혁에 대한 요구가 팽배해 있을 때였다. 모든 개혁이 공동체성을 띠고 이루어 진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많은 부분 공동체성을 포함했었다.


(2) 영성 회복에 대한 움직임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공동체성 회복에 대한 운동은 조직 구성에 관한 문제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그 내면의 동기들을 살펴보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영성에 관한 관심이었슴을 알 수 있다. 급진적으로 세상을 변혁시키려는 사람들이 간혹 있기는 했지만, 주로 공동체성을 추구한 무리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가 되려는 몸부림으로부터 시작했었다.


(3) 기존 질서로부터 배척 받았었다:
초대교회와 같은 공동체성을 찾고자 하는 노력들은, 늘 기존의 세력들로부터 배척을 받았다. 보수세력에게는 너무 진보라고 배척 받았고, 또 자칭 진보라는 세력에게는 보수 세력이라고 외면당했다. 어떤 움직임은 기존의 교회 질서 내에서 공동체성의 회복을 위해 힘썼고, 또 어떤 운동은 조직 교회 밖에서 이루어 졌으나, 양쪽 모두 초기에는 상당한 반대에 직면했던 경우가 허다했다.


(4) 철저했고, 가시적이었다.
공동체성 회복을 위한 움직임의 초기 단계에 나타나는 특징의 또 한가지는, 그들 모두가 철저한 순종과 헌신이 있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공동체로 세상에 드러났다는 점이다. 입으로만 회복과 갱신을 논하는 공허한 외침이 아니라, 삶으로써 그리스도인됨을 보이는 생활 공동체로 드러났었다. 각자의 소유를 공용하고, 시간과 노동으로 서로를 섬기는 가시적인 모임이었다.


2. 각 공동체 모임이 쇠퇴하게 될 때의 특징


(1) 교만해 진다.
공동체성이 강한 모임으로 세상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고, 알려지게 된 모임들이 쇠퇴하게 되는 첫번 째 이유는, ‘우리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라는 교만이다. 하나님 앞에 철저히 낮아지겠다고, 또 완전한 제자의 삶을 살겠다고 시작한 공동체이었지만, 서서히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존경을 받게 되고, 또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열매가 다른 사람들과는 사뭇 다른 상황이 장기화됨에 따라, ‘나는 다르다’라는 영적 교만함을 가지기 쉽다. 이 교만이 다른 모든 문제의 원인이 되기 십상임에도 불구하고, 눈에는 잘 드러나지 않기에 더 무서운 문제가 되곤 한다.


(2) 동기가 율법화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지키고자, 말씀을 연구하고 세분화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그토록 애썼던 바리새인들이, 그 말씀의 본질을 상실한 채, 얼마나 자신이 만든 원칙을 율법화하고 고착화시켰는지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똑같은 현상이, 공동체 운동에도 발생하여, 예수님의 철저한 제자가 되고자 했던 원칙들이 자꾸만 율법화되어 그들을 얽매고, 또 서로를 정죄하는 잣대가 되곤 했다. 물론 그 원칙조차 지키지 않아 문제가 된 경우도 허다하지만 말이다.


(3) 조직화하고 세력화한다.
공동체 회복의 움직임이 어느 정도 정착을 하게 될 때, 그 모임의 규모는 이미 상당히 커져 있기 마련이었다. 그 규모의 모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처음의 의도와 상관없는 조직이 생기게 되었다. 또한, 세상의 존경과 관심을 받으면서, 세상에 대한 영향력이 커지게 되고, 많은 경우엔 세력화해서 스스로 붕괴하고, 또 다른 갱신을 불러 일으키는 경우가 많았다.


(4) 물질이 문제를 일으킨다.
공동체성이 강했던 모임의 쇠락에는 늘 물질이라는 복병이 존재했다. 세상에 몸을 담고 사는 우리들에게 물질은 꼭 필요한 것이지만, 그 물질이 지나치면 패망을 불러오게 마련이다. 무소유 원칙을 세우고 시작했던 수 많은 공동체들이, 이후 자발적인 기증과 유산에 의해 재산문제가 발생하고, 또 그로 인해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죄성을 잘 드러내는 장면이라 하겠다.


3. 공동체 역사를 통해 우리가 배울 점.


(1) 공동체의 형태는 다양했다
때로는 교회의 조직 내에서, 때로는 조직교회 밖에서 이루어 지기도 했다. 혹은 수도원 공동체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고, 또는 가난한 자와 함께하는 도시공동체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기혼자들 중심의 모임이 있는가 하면, 미혼자들만 모이는 공동체도 있었다. 현재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공동체에도 여러가지 모습이 존재한다. 교회 내의 소그룹을 통한 작은 공동체의 실현부터,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고 삶을 나누는 생활 공동체, 더 나아가 형제 자매가 함께 하며 소유까지 나누는 수도원적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어떤 형태를 취하던, 우리는 반드시 내 생명과 같은 공동체 안에 있어야만 한다.


(2) 때로는 비난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공동체성 회복을 위한 운동은 진보, 보수 양쪽으로부터 비난을 받기 일쑤였다. 만일 우리가 건강한 공동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애쓰다 보면, 때로는 오해도 받고 비난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공동체성의 상실이 심각한 현대 조직 교회 내에서 아무런 갈등없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그것이 더 문제가 아닐런지 모르겠다.


(3) 물질까지 나누는 가시적인 형태여야 한다.
공동체는 이론이 아니라, 생활이다. 내 집, 내 가정, 내 지갑을 열 각오없는 공동체는 존재할 수 없다. 선조들이 그러했듯이, 철저한 순종과 눈으로 볼 수 있는 공동체만이 건강하다고 하겠다. 초대교회 사람들에게 개인 소유가 있었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확실한 것은 그들이 자신의 소유를 자기의 것이라 하지않았고, 그들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4) 공동체 모임의 쇠퇴기를 기억해야 한다.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고 애쓰고 나서, 우리는 늘 바리새인을 기억해야 한다. 나만 특별하다는 교만한 마음을 조심해야 하고,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모임이 조직화 되는 것을 우려해야 한다. 역사에서 보듯이, 한 개혁은 시간이 흘러 또 다른 개혁을 불러오곤 했다. 우리 스스로가 늘 개혁의 자세로 산다면, 건강한 공동체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5) 바로 지금 이곳에서 시작해야 한다.
역사를 보면, 공동체성을 이룩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머뭇거리지 않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순종, 하지만 철저한 순종을 시작한 것이 커다란 결과를 이루게 되었다. 특히 유학생들이 빠지기 쉬운 오류 중의 하나는, 졸업한 이후로 모든 일을 미루는 버릇이다. 하지만, 적어도 공동체를 이루는 일은 졸업 후로 미룰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아직 학생이므로, 예수님에 대한 순종을 미룰 수는 없다는 말이다. 지금 내가 있는 바로 이곳에서 시작해야 한다. 철저하고 가시적이며, 또 갱신 지향적인 공동체가 이곳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4. 역사에서 살펴본 공동체들


(1)고대사에 나타난 공동체들
기독교는 국교화되면서, 상당 부분 세속화하게 되었다. 이에 대항하여 대대적으로 수도원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국교화로 인해 대중은 교회로 들어오는데, 수사들(Monks)은 자신의 영성을 지키기 위해 광야로 빠져나가는 아이러니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수도원 주의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안토니우스와 파울 등은 은둔 생활을 하는 은수자였던 반면, 파코미우스같은 수사에 의해 공동생활을 하는 수도원이 생겨나게 되었다. 4세기경에는 이집트에 활발하게 진행되던 수도원 운동도 눈에 띤다.


(2) 중세사에 나타난 공동체들

-  480년에 태어난 성 베네딕투스는 서방에서 수도원을 개혁한 인물로 꼽힌다. 처음에 은수자였던 그는 수도원 규율집을 만들어 더 유명해 졌는데, 그 규율은 ‘영구거주’와 ‘철저한 순종’을 기초로 하였다.


-  그 후, 8세기 초 교황청은 추문으로 얼룩지고 있었고, 수도원 생활 역시 지상 최고의 이상으로 예찬되며 세속화하고 있던 시기가 있었다. 그 무렵, 한 수도원에서 대대적인 개혁 운동이 시작되고 있었는데, 그것이 끌루니(Cluny)회였다. 베네딕트의 규율을 준수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시작했던 이 수도회는, 후에는 기독교 이상을 사회로 스며들게 하여 변화를 추구하기까지 이르렀다. 베네틱트 수도원과는 달리, 토지에 토지 경작자들까지 함께 증여받은 그들은, 노동의 시간이 줄어들고 남은 시간을 끊임없이 중보기도에 할애했다. 하지만, 후에 수많은 선물과 유산으로 수도원이 많은 재물을 소유하게 되었고, 이 개혁운동은 실패하게 된다.


-  12세기에는, 끌루니회가 너무 세속적 관습을 좇아 생활하며, 자신의 영성을 위한 기도에는 힘쓰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고 있었다. 그런 수도원의 세속화를 개혁하기 위해, 시토회(Cistercians)가 생겨났다. 그들은 노동을 다시 강조하였고, 후에는 교황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까지 이르렀다.


-  수도원들의 수사들이 귀족 출신으로 구성되어, 더 이상 수도원들이 시대의 물결을 막을 수 없게 되자, 프란체스코와 도미니쿠스 같은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흐름이 전개되게 되었다. 물질 소유를 하나님과의 일치의 장애물로 보고, 자발적으로 가난해 지는 것을 택했던 그들은, 후에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희망이요, 선교 기구였다. 하지만, 프란체스코의 탁발공동체 역시, 조직화와 물질의 문제에 연루되면서, 대체로 기존의 수도회들이 걸었던 길을 걷게 되었다.


-  프란체스코와 동시대를 살았던 발도(Waldo)에 의해 생겨난 발도파는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직자, 수도사들을 넘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청빈과 순종의 도전을 제공하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성프란시스코가 교회의 울타리 내에서 교회를 갱신하려고 했다면, 발도파의 경우는 비제도권의 평신도 갱신 공동체였다. 비록 이로 인해, 지금도 많은 교회사에서는 이들을 ‘이단’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말이다.


(3)종교개혁 시대의 공동체
공동생활로 대표되는 수도원이 개혁의 주 대상이었던 종교개혁은, 공동체라는 관점을 강조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당시 로마 카톨릭과 종교개혁자들 양쪽으로부터 박해를 받았던 재세례파에 대해서는 재조명을 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시 재세례파는 종교개혁의 내용에 대해서는 대부분 동의하였으나, 기존 정치권을 안고 개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려는 의도에 대해서는 반대하였다. 그들은 형식적인 세례를 받음으로써 구원을 보장 받는다는 당시의 관행을 반대하고, 진정한 의미의 세례를 다시 받을 것을 요구하였다.


-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했다.
-  산상수훈이 삶의 기초가 되었다.
-  유아세례를 거부했다.
-  성직자, 공직자에게 높은 도덕성을 요구했다.
-  비폭력이어야 했다.


당시 재세례파는 철저한 공동체적인 삶, 즉 서로 물질을 나누며 그리스도의 형제애적인 사랑을 실제 그들의 삶 속에 실천하는 삶으로 기존의 교회에게 많은 영향도 주었고, 또 박해도 받았다. 이런 원칙을 기초로 살았던 그들의 삶은, 지금도 후터파와 메노파의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입으로만 고백하는 믿음이 아닌, 삶으로 드러나는 믿음을 추구했던 그들의 삶은 우리에게 많은 도전을 준다.


(3) 근세사에 나타난 공동체

-  지역 교회 내에서, 진정으로 헌신된 자들에 의한 작은 모임인 ‘경건한 모임’을 통해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이루어 보려 애썼던 야곱 스페너
-  교육체제의 철저한 변화로 독일 사회를 변화 시키고자 했던 프랑케의 교육공동체
-  진센도르프에 의해 ‘조’ 혹은 ‘속회’의 작은 모임으로 진정한 하나님의 가족의 모습을 이루기 위해 힘썼던 헤르후트 공동체.
-  준 수도회의 성격을 띠었던 존 웨슬리의 순회 평신도 설교단.
-  18 19세기의 공동체인 필거휘트 공동체, 에프라타 공동체, 처치 아미, 구세군 등에 의해 영성을 회복하고, 세상의 빛으로의 삶을 살고자 하는 공동체적 움직임은 계속되었다.


(4) 현대의 공동체들
지금도 세계의 각 곳에서는, 조직교회가 가지고 있는 한계성을 극복하고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진정한 공동체성의 회복을 위한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다.


-   브루더호프(Bruderhof) 공동체: 재세례파의 후예로 초대교회의 원형대로 살고 있는 영국의 공동체


-   떼제공동체(Ecumenical Community of Taize): 20세기 초 전쟁으로 갈라지고 상처 입은 유럽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설립되어 하나됨의 참 의미를 보여주고 있는 프랑스의 공동체


-   베다니 공동체(Bethany Fellowship): 초대교회의 모델대로 공동체를 이루고 살면서, 그런 공동체가 세계선교를 위해 얼마나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미국의 공동체.


-   코이노니아 동역회(Koinonia Partners): 농촌에서 이루어져, 소외 받고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사역하는 공동체의 본을 보여주는 모임.


-   라브리공동체(L’Abri Fellowship): 성경의 진리를 추구하는 공동체로, 지식을 통한 복음주의 전통과 삶의 조화를 보여주는 프란시스 쉐퍼에 의해 설립된 공동체


-   레바 플레이스 교회(Reba Place Church): 기성교회 내에서 부분적인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도시공동체의 지역사회에 대한 역할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는 공동체.


-   구세주의 교회(The Church of the Savior): 규모가 다소 커지면, 바로 분교회를 하면서 도시 내에서 소외된 자들을 위해 일하는 일반 교회의 공동체성의 본을 보여주는 교회.


이와 같이 현재 세계 도처에서 성경적인 공동체성 회복을 위한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다. 물론 형태는 초대교회 형태의 공동생활로부터 작은 소교회 형태의 도시공동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존재한다. 이외에도,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소그룹의 형태로 진정한 의미의 ‘교회’ 갱신을 위해 애쓰고 있는 수많은 형제 자매들이 우리에게 희망의 소식을 전하고 있다.


맺는말


계속 언급하지만, 예수님께 철저하게 순종하고, 또 가시적인 나눔을 동반한 성령공동체는,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의 사항이 아니다. 비록 형태는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지만, 성도간의 죄의 고백과 나눔, 그리고 삶의 섬김이 있는 공동체는, 성령님께서 예수님의 몸 된 교회를 이끌어 오시는 방법이요,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헌신의 순간 결코 주저하지 않았고, 또 어려움이 있어도 그 일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믿기에 좌절하지 않았던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처럼, 지금 우리가 있는 바로 이곳에 작은 공동체를 위해 무릎 꿇고, 내 자신의 시간과 물질까지 내어놓을 순종의 자세로 작은 헌신을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역사를 이끌어 오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내게도 변함없이 역사하시는 모습을 보아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