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준] 레드우드 나무 (redwood tree) 숲을 걸으며…


이코스타 2004년 2월호

집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남짓한 거리에 Big Basin Redwood State Park라고 하는, 그다지 크지도 않고 많이 알려지지도 않은 주립공원이 하나가 있다. 공원 자체는 그리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은 아니지만, 이곳에는 레드우드(Redwood) 나무에 관한한 작품사진들 속에 종종 주인공으로 등장하곤 하는 멋진 모델(?) 나무들이 몇 그루 서있다. “Father of the forest”와 “Mother of the forest”라고 이름 붙여진 나무들을 포함한 오래된 Coast redwood 나무들이 그들인데, 나이는 “Father” 가 2000 살, “Mother”가1800 살이라고 알려지고 있으며, 키는 “Mother”가 조금 더 커서 330 ft (100 m; 약 30층 건물 높이) 에 이른다.


나무들이 그 당당한 위용을 숲 속에 조용히 감추듯 하며 서있는 레드우드 산책로(Redwood trail)를 천천히 걷다 보면, 매우 평화로운 분위기의 숲길이건만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경외감 같은 것에 부드럽게 사로잡히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그 경외감이란 다름아닌 생명에의 경외감이요, 더 나아가서는, 이를 지으시고 기르신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을 느끼는 데서 오는 경외감이다. 지금 2000 살이라면, 이 나무는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셨을 바로 그 무렵부터 자라나기 시작했다는 말이 아닌가?


레드우드 나무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여러가지 모양의 감탄사와 더불어 많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드는 힘이 있다. “어떻게 이렇게 크게 자랄 수가 있을까?”, “어떻게 이렇게 한점 구부러짐도 없이 똑바르게 자라날까?”, “어떻게 저렇게 높은 곳까지 물과 양분을 끌어올릴 수 있을까?” 등등… 연발 탄성을 자아내며 자리를 뜨지 못한 채 한참을 쳐다보다 보면, 이 나무들은 어느새인가 친절한 친구처럼 다가와서 삶의 영적인 의미들에 대하여 소리없는 말로 이야기해 주기 시작한다. 나무들이 가져다주는 경외감에 너무 깊이 빠져버린 것일까? 이 문자 그대로의 ‘거목’들이 주는 메세지들은 마치 우리보다 먼저 살다 간 믿음의 거목들, 즉, 아브라함, 다윗, 베드로, 바울같은 이들이 여기 이 나무들을 통하여 전해 주는 충고와 당부인 것만 같이 느껴진다.


천 오백 년이 넘도록 살아온 나무들에게는 공통적인 특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하나같이 줄기 아랫부분에 불에 심하게 타다만 숯과 같은 검은 자국들이 있다는 점이다. 수백 살 정도 밖에(?) 안된 청년 나무들이 아무 상처도 없이 깨끗하게 쭉 뻗어올라간 것과는 대조적으로, 천 년의 세월을 넘겨 진정한 ‘거목’들로 자라난 나무들은 때때로 자연적으로 일어나곤 했던 산불이라는 ‘고난’으로부터 전적으로 무관했던 이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삶에서 때로 다가오는 고통과 고난은 우리를 정금과 같이 만드는 주님의 은혜의 도구라는 점을 성경은 수없이 반복하여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 이 ‘거목’들은 그 한 구체적인 증거로서 자신들을 우리에게 내보이고 있는 것이다. 레드우드 나무들을 보면서 얻는 ‘은혜로운’ 깨달음의 그 첫번째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얼마나 위로와 소망이 되고 용기를 주는 메세지인가? 고난의 자국이 없는 영적인 거목은 없으되 하나도 없으며, 그런만큼 우리의 삶 가운데에 더해진 고난의 자국들 또한 우리를 주님 뜻 안에서 또 하나의 영적 거목이 되게끔 인도해주는 그 무엇을 의미하고 있다면? 천 오백 살이 된 나무의 단면이 전시된 것을 살펴보면, 이 나무는 매우 두꺼운 외피(bark)로 둘러쌓여 있어서, 이로 인하여 불에도 견디고 수분 또한 밖으로 빼앗기지 않도록 보호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불시험 가운데서도 넘어지지 않고 견디는 일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나무들의 외피와도 같이 견고한 “전신갑주”로 무장하는 일만이 자신을 시험으로부터 방어하고 우리의 믿음을 지키는 방책이다. 그러면, 만약에 이 외피라는 방어선이 뚫리는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가? 산책로 안에는 “Chimney tree”라고 불리우는 나무가 한 그루 서있는데, 무너진 방어선 안으로 나무의 내부는 모두 타버리고 외피만이 남아서 마치 굴뚝이나 연통처럼 그 안에서 들여다 보면 하늘이 보이는 그런 나무이다. 고난당했던 지난 날의 기억들 가운데, 성령의 전신갑주로 온전히 무장하지 못하고 주님께 절대적인 신뢰를 드리며 의지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마치 이 나무와 같이 겉모양만이 초라하게 남아버리고 말았던 내 자신의 모습은 없었던가? 부끄러운 마음과 숙연한 마음이 교차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때로는 불시험을 당한 나무들이 역경을 이기고 거목으로 자라나기도 하지만, 더러는 불 가운데 쓰러지거나 썩어져 넘어지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다. 레드우드 나무의 특이한 점의 하나는, 한 뿌리에서 여러 그루의 나무가 자라난다는 것이다. 보통의 나무들의 경우 큰 가지들이 땅 위의 줄기에서 갈라져 나오는데 반해 레드우드는 줄기 자체가 땅속에서부터 갈라져 나오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따라서, 가까이 서있는 나무들이 겉에서 보면 별개의 나무인 것 같지만 실상은 한 뿌리로 연결된 한 나무인 경우가 많다. 여기에 레드우드 나무가 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이 있다. 한 뿌리에 연결되어 ‘공동체적’ 생활을 하는 이 나무들의 경우, 고난이나 시험 가운데서 한 나무가 쓰러지면 바로 옆자리에서 새로운 나무가 같은 뿌리로부터 “청출어람(靑出於藍)”하여 그 못다한 생명을 대신하듯 자라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넘어진 나무의 옆에서 새 나무가 솟아오른 모습을 보는 일은, 마치 우리가 끝끝내 불시험 가운데 넘어지거나 사명을 다 완수하지 못하여 주저앉을 때 주님의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가 부축하거나 업고서 함께 가며 또한 그 사명을 계속 이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 오버랩되었다. 우리가 사는 동안 어떤 형태와 정도로 말씀의 씨앗을 뿌리든, 영원하신 그분의 나라 안에서 우리가 뿌린 일들의 의미는 헛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영원한 ‘뿌리’가 되시는 그분이 계시기에 우리의 신앙은 넘어짐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으며, 함께 자라나고 서로 지탱해주는 동역자와 지체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신뢰 가운데 참된 희생을 이루고 사명을 다하여갈 수 있다. 한 뿌리 안에서 함께 자라나고 생명을 이어가는 레드우드의 삶의 모습을 보는 일은 그런 맥락에서 눈물이 글썽일 정도의 깊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레드우드 나무가 현재 미국의 여러 지역에서 서식하고는 있지만, 오랜 세월을 살아 거목으로 자라난 나무들은 거의 어김없이 서부 해안선과 산맥을 따라서만 볼 수 있다고 한다. 그 중요한 이유의 하나는, 이 지역이 사막의 열기와 태평양의 서늘한 바람이 부딛히는 가운데 매일같이 짙은 안개가 끼는 지역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무의 키가 100 미터에 달하게 되면, 펌프도 없이 10기압의 강한 압력차이를 극복하여 땅 속의 수분을 하루에 수 갤론이나 끌어올리는 일에는 한계가 있게 된다. 레드우드 나무의 잎을 자세히 보면 매우 촘촘하게 생긴 작은 잎들이 여러 갈래로 겹겹이 나 있어서 물과 접촉하는 표면적이 최대화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렇게 표면적이 향상된 잎으로 안개가 낄 때 한껏 물을 웅켜쥐므로써 부족한 수분을 채운다고 한다. 밑에서만 물을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부터도 공급받으며, 또 그 일이 가능한 곳에서만 거목으로 자라날 수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뿌리로부터 끌어올리는 일이 말씀에 대한 직접적인 묵상과 직접적인 기도, 직접적인 예배, 직접적인 사역 등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잎으로부터 받는 일은 매일매일의 일상생활 안에서나 크고작은 일상의 관계들 안에서 주님의 손길과 메세지를 발견하며 배우고 깨닫는 삶이 아닐까? 아래로부터 끌어올리는 일이 스승이나 목회자 또는 멘토들로부터 배우고 영향받는 일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옆으로부터 받는 일은 동역자나 동년배 그룹(peer group) 또는 우리가 돌보고 있는 영혼들로부터 배우고 영향받는 일이 아닐까? 숱한 인생들이 저 산 아래 이 세상에서 부대끼며 살아가고 명멸하는 가운데 저 언덕 위에서 말없이 이천 년 간이나 제자리를 지켰던 레드우드 거목들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세지는 결국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요약하면, 말없이 우리를 굽어보는 그들처럼, 그리고 이 나무들과 같이 천국에서 주님 옆에 서서 말없이 우리네 사는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을 영적인 거목들처럼, 우리 또한 고난과 역경을 믿음으로 이기고, 공동체 안에서 함께 자라고 함께 일하며, 매일매일의 삶 안에서 주님과 이웃들과 더불어 날마다 영적인 생명수를 공급받는 가운데 영적인 거목으로 커가도록 하는 그런 삶을 일깨우려 함이 아니었을까?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히브리서 12:1-3)


[사진 출처: Big Basin State Park, Redwood National & State Parks 홈페이지]

[정도일] Urbana03을 마치고

이코스타 2004년 2월호


코스타의 모체가 되는 제 20회 Urbana집회가 지난 2003년 12월 27일부터 31일까지 미국 일리노이주에 있는 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에서 “Your Kingdom come, Your will be done” 이라는 주제로 열렸습니다. 미국 전역과 93개국(미국에 있는 각나라 유학생들)에서 온 20.000명의 크리스챤들이 모인 이번 집회에서 제가 느끼고 경험했던 하나님의 기적들을 이곳 eKOSTA에서 여러 코스탄들과 같이 나눠보고자 합니다.


1946년 부터 3년에 한번씩 열렸던 Urbana집회는 우리나라에선 IVF(대학생 선교회)로 많이 알려져있는 InterVersity Christian Fellowship에서 후원하는 Student Mission Convention입니다. 현재 미국의 거의 모든 Community College 부터 사립,주립대학까지 거미줄처럼 퍼져있는 이 크리스챤 단체는 “대학생 복음화”라는 큰 미션을 가지고 자본주의와 유물론으로 병들어 가고 있는 대학교 캠퍼스 복음화 사역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IVCF는 미국 뿐만 아니라 세계 각 지역에도 퍼져 있어 Urbana 집회를 마친 선교에 열정있는 대학생들의 단기 선교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선교대회인 만큼 대학생들에게 선교의 비젼을 강하게 심어주는 집회입니다.


코스타와 마찬가지로 Urbana03도 4박5일의 일정중에 3일째 되는 날 점심 금식을 하면서 세계를 품에 안고 기도했습니다. UIUC Assembly Hall에 모인 20,000명의 학생들과 선교사들, 사역자들은 대형 스크린에 표시된 세계 지도안에 구체적인 나라들(크리스챤들이 가장 심하게 박해를 받고 있는 나라들, 기아와 전쟁으로 어려움을 겪는 나라들, 내란으로 평화가 없는 나라들…)을 놓고 그 나라의 이름을 하나 하나 불러가며 기도했습니다. 또한 그 시간에 기도 뿐만이 아닌 실제적인 우리의 헌신을 표현하는 차원에서 선교 헌금을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다음날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1.1million이라는 엄청난 헌금이 모인것입니다. 여기에서 스토리는 끝난것이 아닙니다. 다음날 저녁, InterVersity에서 엄선하고 또 엄선한 세계 각 지역에 가장 효율적으로 Impact를 줄 수 있는 선교단체의 Director들이 집회 무대 위에 모였습니다. 어림잡아 20여개 단체 정도 되었던것 같습니다. Urbana03 Director 였던 Jim Tebbe는 그 자리에서 1.1million의 선교자금을 20,000명의 학생들 앞에서 각 선교단체 장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중에 자랑스럽게도 Mission Korea가 껴있었습니다. 다시한번 우리나라에 그 분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게 하심을 감사드렸습니다.


수련회 은혜를 더 많이 받는 비결, 또 받은 은헤를 생활과 학교에서 유지해 나가는 비결


코스타2003 찬양팀과 함께 “Roman 16:19 says” 를 부르며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주님안에서 한없이 기뻐하던 때가 어그제 같은데 벌써 몇개월 후면 코스타2004가 등록이 시작된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다시한번 시간은 화살같음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코스타 2004를 6개월 앞두고 작년 코스타에서 만났던 조원들, 조장들과 이메일이나 전화로 나누는 얘기들 중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주제가 있습니다. “다음 코스타에선 어떻게 하면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작년 코스타때 받은 은혜들을 지금 나의 삶에 적용하며 유지 할 수 있을까?” 위의 두 질문들은 아마도 모든 코스탄들이 받는 도전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아니 큰 집회 혹은 지교회 수련회를 준비하거나 그 후에 은혜를 받았던 모든 크리스챤들의 공통적인 도전과제 임에 틀림없습니다.


6년간의 미국 유학생활동안 많은 큰 집회들을 다니며 겪었던 제 경험으로 부족하지만 집회 준비와 그 후에 받았던 은혜를 유지하기 위해 제가 시도했던 여러가지 방법들과 그 비결들을 이곳에서 여러 코스탄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1999년 SDSU에서 열렸던 JAMA99’(Jesus Awakening Movement of America)를 시작으로 코스타2002, 코스타2003, 일본코스타 2003, 바로 2주전에 막을 내린 Urbana03까지 제가 참석 했던 이 큰 집회들 프로그램에 흐르고 있는 공통점들이 있습니다. 많은 공통점들이 있겠지만 3가지로 압축해본다면, 첫째, 영접의 시간(재헌신의 시간), 둘째, 선교에 대한 비젼을 심어주는 시간(선교헌신의 시간), 셋째, 세미나를 통한 전공(혹은 흥미분야)과 선교와의 접목의 시간 입니다. 이 세가지의 큰 흐름을 우리 영혼 깊은곳으로 흐르게 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몇가지에 대해 얘기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큰 집회나 수련회때 은혜를 더욱 더 많이 받기 위해 준비해야 할 3가지에 대해 나눠 보고자 합니다.


집회나 수련회 준비기간에 해야할 일 3가지


첫째는 새벽기도 제단을 쌓는 일 입니다. 새벽 기도 시간에 집회나 수련회를 통해 변화 받아야 하는 자기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놓고 기도 합니다. 새벽기도의 힘은 물론 그 시간에 받는 말씀의 도전도 중요하지만, 매일 아침 새벽에 단잠을 깨운다는 그 사실 하나 만으로도 “자기 부인” 이라는 큰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횟수나 기간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번을 가더라도 그 새벽에 자기의 모든 죄악된 마음을 주님께 쏟아놓는게 중요하죠. 주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더 없는 큰 축복을 부어 주십니다. 저는 항상 새벽에 잠을 깨우는 저만의 비결 한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크리스챤 라디오 스테이션에 알람을 맞추어 놓죠. 잠결에 들리는 워십송은 하루종일 저의 머리에서 맴돌곤 합니다. 캠퍼스에서 그 잠결에 들었던 워십송을 흥얼거리기도 하죠. 말 그대로 Walking Q.T. 인 셈이죠. 또 하나 제가 잘 사용하는 방법은 새벽에 일어나기 정말 싫을 때 제가 외우는 자기 주문이 있습니다. “30분후에 일어나도 똑같은 기분일꺼야. 그렇다면 지금 일어나자 ” 기억하세요. 새벽에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새벽 미명에 일어나 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우리 코스탄도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둘째는 집회나 수련회때 목사님이나 강사님들을 통해 선포될 말씀들을 먼저 읽어보는 것입니다. 저는 2003 코스타 조장과 Urbana03 small group leader 로 섬기면서 “집회때 선포될 말씀을 먼저 읽어 보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구나” 라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준비된 영혼을 기뻐하십니다. 집회때 말씀을 먼저 읽고 그 집회에 참석한다면 우선 말씀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집회때 더욱 풍성한 은혜와 말씀안에 숨겨진 보물을 찾게 됩니다. 사실 성경의 많은 부분들이 바로 한번 읽어서는 깊은 이해와 그 속에 숨겨진 본뜻을 이해하기 어려움을 자주 느끼곤 합니다. 특히 전도서나 로마서와 같은 파워풀한 서신들은 같은 구절을 두세번 읽어야만 그 말씀의 뜻을 이해하게 됩니다. 집회에 오셔서 그 말씀들을 예습하겠다는 생각은 미리 포기하세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코스타 스케줄이 얼마나 빡빡합니까? 안그래요?


셋째는 세미나를 고르는 일입니다. 제가 이번에 Urbana03에 가서 절실히 깨닫게 된 부분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세미나가 큰 집회들의 Core란 사실입니다. 코스탄 들은 흔히 아침, 저녁의 다같이 모이는 session에 비중을 두곤 하죠. 하지만, 집회가 끝난 이후에 받은 은혜를 일상 생활과 자기 학교 생활에 가장 잘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 세미나란 사실, 잊지 마세요. 또한 세미나의 제목만 보고 그 세미나를 선택하는것은 좋은 선택방법이 아니라는 사실도 같이 알려드립니다. 강사님들의 스타일을 보세요.(모르시면 주변에 작년에 코스타를 갔다 오셨던 분들이나 JJKOSTA에 문의 하셔두 됩니다.) 물론 모든 세미나 강사님은 미국과 한국에서 검증되고 엄선된 분들이시지만, 각기 다른 스타일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분야에서 탁월한 실력들과 Talent를 가지고 계시니깐 세미나 후에 이메일 받아 놓으시는 것두 잊지 마시길!


지금까지는 집회와 수련회때 은혜를 듬뿍 듬뿍 받기 위해 준비해야할 사항들을 같이 나눠봤구요. 이제부터는 집회후에 받은 은혜를 유지하는 비결 3가지에 대해 같이 나눠보고자 합니다.


큰 집회나 수련회 이후에 받은 은혜를 유지하는 비결 3가지


코스탄들 사이에서 오가는 속설이 있습니다. “코스타 약발은 오래 가면 6개월 간다더라 ” 하지만, 모르시는 말씀, 영원을 얘기하고, 천국을 얘기하는 우리들이 6개월이라니요? 여기 은혜를 유지하는 비결 3가지가 있습니다.이 방법들은 제가 길게는 6개월 짧게는 3개월이상 시도해본 방법들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시도해 보시길.


첫째, 세미나 테입을 정기적으로 듣는것을 추천합니다. 물론 지금 이글을 보시는 분들중(많이 찔리실 테지만), 코스타에서는 정말 앞을 다투어서 세미나와 집회 테입을 사셨던 분들, 오늘 밤, 아니 이번주 안에 책장과 서랍에 먼지 부옇게 쌓여 있는 테입을 꼭 들어보시길 권합니다. 코스타의 감동이 새록 새록 다가옵니다.


둘째는 코스탄들과 삶을 나누는 것을 적극 추천합니다. KOSTA USA는 끝남과 동시에 1달이상의 여름방학 기간이 있잖아요. 제가 작년에 갔던 일본 코스타는 8월 중순에 시작하기때문에, 끝나자 마자 학교 일에 너무 바뿝니다. 보통 조는 가까운 지역 사람들이나 같은 주에 있는 사람들로 많이 구성됩니다. (늦게 등록하신 분을 제외하고). 저는 저희 1지역 코디님과 저번 학기에 만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물론 학교 생활이 눈코뜰새 없이 바뿌긴 했지만, 주말을 이용해서 3시간이나 떨어진 그 코디님 집에 가서 같이 잠도 자고, 밥도 같이 먹고 코스타때 감동도 나누며 서로 은혜를 받았던 너무나도 축복된 시간이었습니다. 코스타의 감동, 코스탄끼리 나눌때 더욱 더 풍성해 진다는 사실, 제가 깨달았던 중요한 진리중 하나였습니다.


셋째는 자기 삶에 변화를 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회나 수련회 이후에도 이전의 삶과 별반 차이가 없다면 그건 분명 그 집회나 수련회는 자기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2003년 일본 코스타때 이찬수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코스타가 끝나고 은혜 받았다는 얘기는 절대로 하지말라. 그 은혜 받음은 주변사람들과 가족들이 평가해줄 것이다.” 저는 이말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은혜를 받고 안받고는 자기가 평가하는 것보다 주변 사람들의 평가에 달려 있습니다. 자기는 자기 자신에 너무나도 많이 익숙해져있기때문에 말로는 은혜를 받았다고 하지만, 실제로 자기 생활은 집회 이전이나 이후 별반 달라진것이 없음을 느끼곤 합니다. 저두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었구요. Blessing=Life Changing 이라는 사실,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주일에 저는 저희 교회 목사님으로 부터 조금은 특별한 설교을 들었습니다. 기도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너무나도 귀가 닳도록 듯는 기도, 기도, 기도… 하지만, 오늘은 그 기도가 단지 기도의 의미만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기도는 활에 비교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그 활을 의미하고, 화살은 그 기도를 응답하신다는 약속, 활을 당기는 힘은 믿음이라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기도는 코스타의 은혜를 유지하는 가장 큰 비결이 됩니다. 금년 코스타에선 더욱 더 많은 유학생들이 주님께 재헌신하며 세계를 향한 큰 비젼을 품길 기도합니다.


작년 코스타가 끝난 직후 한 형제가 쓴 글이 생각이 납니다. 제목은 “고민… 기도…”였습니다.


영적 Power가 현실의 삶 가운데 잘 드러날때 비로서 순결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하나님의 기대에 부합한 삶일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 또다른고민이 생겼습니다. 과연 이러한 하나님의 기대들이 나의 주어진 현실의삶 속으로 얼마나 영향력 있게 적용이 될수 있을까에 대한 문제입니다. 일주일의 꿈과도 같았던 시간을 뒤로한 채 현실로 돌아와보니, 역시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적어도 나는 변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눈앞에 펼쳐진 현장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기도해 봅니다. 바로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이 부흥이 필요한 곳이라고, 그리고 땀을 흘리지 않으면 아무런 열매도 얻을 수 없다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보내시고 세우시는 목적은 나로 수고하기를 원하신다고..

[이시훈] 지키지 못한 약속

이코스타 2004년 2월호


해마다 새해가 되면 지난 일들을 돌아보며 한 해의 소망이나 계획을 나름대로 열심히 세우고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리라 다짐을 하곤 합니다. 해마다 비슷한 결심을 하였건만 얼마나 성실히 계획을 실천했는지 반성하는 일도 언제나 비슷한 것 같습니다.


작년 이맘때쯤 가족들, 친구들과 서로의 계획을 나누었던 일들을 기억하면서 마음 아픈 일 한 가지가 떠오릅니다. 제게 엄격한 스승이면서 따뜻한 친구로서의 역할을 함께 해주시던 선생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시인으로서는 대 선배이시고, 신앙적으로는 멘토의 역을 기꺼이 감당해 주시던 그 선생님으로부터 작년 설날에 긴 편지를 받았었습니다. 여러 가지 개인적인 계획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과 후배에게 거는 기대와 지침, 한국 문학에 대한 본인의 소명, 개인의 비전과 세계관등… 그동안 늘 나누었던 가치관을 느낄 수 있는 참으로 가치 있는 글이었고 선생님의 자상한 인품을 느낄 수 있는 글이었습니다. 저는 그 긴 글 속에서 제가 지킬 수 있는 몇 가지를 흔쾌히 약속하였습니다! 성실한 습작생활과 독서 생활, 신앙의 훈련 글을 쓰는 자세와 소명 등… 선생님도 여러 가지 약속을 제게 하셨습니다. 가령 맛있고 멋진 식당을 발견했으니 귀국하면 점심이라도 나누자는 등의 사소하고 재미있는 약속도 포함되어 있었지요.


그런 글을 보내신 이후 두어 달 만에 선생님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평소에 워낙 건강하시던 분이라 본인이나 주변 누구도 병이 그리 깊은 줄 모르고 지냈던 것이었지요. 한동안 저는 우울하고 믿어지지 않는 마음에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지냈습니다. 다음에 귀국하면 다시 뵙고 인사를 나눌 것도 같고 편지를 드리면 답장을 주실 것도 같은 착각을 아직도 하곤 합니다. 그리고 다시 새해를 맞아 여러 분들께 카드를 보내면서 선생님께도 카드를 써보았습니다. 그렇게 다양하고 확신에 차있던 모든 계획들과 소망과 약속들을 하나도 지키지 못하고 지나간 한 해에 대해서, 부치지도 못하는 긴 편지를 써 보았습니다.


지난 늦여름 어떤 자매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말기 암으로 투병 중이던 그녀의 모습이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습니다. 항암 치료로 이미 머리칼을 다 잃었고 창백한 피부는 심한 부종으로 혈관이 다 비칠 정도로 얇아져 있었습니다. 무척이나 성실하고 적극적인 삶을 살아온 그녀이기에 그 모습은 더욱 안쓰럽게 보였습니다. 앉아있기도 힘든 상태에 있던 그녀가 힘겨운 식사를 마치고 나서 산책을 하고 싶다고 여러 번 부탁을 하였기에 무리가 되는 줄 알면서도 부축을 하여 집을 나섰습니다. 산책이라고 해야 기껏 집 주변을 간신히 서성거리는 정도였지만 그 짧은 시간이 무척이나 긴 여행길처럼 느껴졌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에 온 힘을 실어야하는 힘든 상태에서도 그녀의 얼굴에 번져나가던 미소가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집 앞의 뜰을 처음 바라보는 것처럼 경이에 가득 차 오르던 눈빛과 탄성도…


옆 집 뜰에 핀 봉숭아꽃을 보다가 내년 봄 자신의 뜰에도 심고 싶다며 씨를 받던 손길과 자두 만한 배 열매를 바라보며 과연 저 배를 먹을 수 있을까하고 묻던 일들이 영상처럼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다음 여름에 봉숭아 꽃 물을 제 손톱에 들여 주겠다는 약속과 다음 주에 만나면 조금 더 멀리 산책을 나가보자는 약속조차 우리는 지키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집 주변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다며, 사진을 찍듯이 눈에 보이는 모든 것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고 바라보던 눈길과 아직 다하지 못한 일들,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말하던 떨리던 목소리가 뚜렷하게 기억나는데도 그 사소한 약속을 지킬 만큼의 시간은 허락되지 못했습니다.


몇 해전 강도를 만나 짧은 순간 동안에 죽음과 삶의 경계를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아무 준비도 없이, 예고도 없이 우연한 길에서 우연하게 죽음을 맞을 수도 있다는 것, 단 몇 초안에 삶과 죽음이 결정된다는 경험은 제게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닫게 하였습니다. 제가 세운 인생의 계획이나 목표라는 것이 물위에 쓴 글자나 바람에 세운 집처럼 허망한 것임을 느꼈을 때 무척 참담하고 외로웠습니다. 그 이후 저는 항상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순간은 단 한번뿐이라는 것, 바람에 실려온 꽃향기처럼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나는 순간을 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영원’이라는 것은 시간의 구속과 한계를 벗어난, 이해의 범주를 넘어선 개념이며 연! 속되는 순간, 연속되는 현재가 영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순간을 살고 있기에 영원을 살수 있다는 역설적인 생각으로 범위를 넓혀도 봅니다.


게으름이나 고의적으로 지키지 못한 약속만이 아니라 불가피하게 지킬 수 없었던 약속들을 기억하면 사람의 신념이나 맹세는 그다지 믿을만한 것이 못되는 것 같습니다. 태초로부터 지금까지 한번의 오류도 없이 신실하게 지켜지는 약속은 하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긴 인류의 역사를 관통하는 구원의 약속은 어제도 오늘 이 순간에 지켜지고 있고, 내일에도 영원토록 지켜질 가장 확실한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무슨 일들을 해야 할 지 생각하다가 그만 하루를 보내버릴 것 같습니다. 아직 갚지 못한 청구서와 누군가에게 진 빚을 기억하려 할 것이고,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여러 곳을 찾으며 정다운 얼굴들을 한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 애쓰겠지요. 지난 일기들을 정리하며 용서해야 할 일들과 용서 받아야할 일들을 떠올리고 이 세상에 용서하지 못할 일이 없다는 너그러운 마음을 갖게 될 것 같습니다. 만약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이라는 상상은 마음을 한없이 초조하게 만들기도 하고 한없이 너그럽게 만들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만약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아직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 모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가족과 이웃들을 향해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값지고 향기로운 말들이 넘쳐나는지, 지켜야할 귀한 것들과 무한한 축복을 마음껏 누리고 즐기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아직도 무거운 삶의 짐들을 벗어버리고 가볍고 자유롭게 한 순간 순간을 호흡하고 싶습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확실하게 지켜질 약속을 기다리며 생의 슬픔을 지우고 싶습니다.


오늘을 마지막처럼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보다 가치 있고 진지한 의미를 갖게 되고, 신실하고 사랑이 넘치는 인격을 갖게 되며 진정한 소망의 빛을 기다리게 될 것 같습니다.

[정진호] 제 5 떡 – 광야의 축복 –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


크리스천으로서 만나의 체험이 있는가? 하늘에서 공급되는 광야의 떡, 만나…… 떡의 본질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만나를 알 필요가 있다. 만나를 알기 위해서는 광야 체험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광야 체험은 반드시 홍해 체험에 이어서 따라온다.


우리 가족이 미국과 한국에서의 삶을 접고, 중국으로 들어간 사건은 적어도 우리 부부에겐 영원히 기억되며 자손들에게 들려줄만큼 깊고 생생한 홍해바다의 체험이었다. 그러나 홍해 바다를 건넜던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했듯이 과연 우리의 믿음이 홍해를 건널만한 믿음이었는가 반문해 본다면 그렇지 않았음을 곧 깨닫는다. 10년전의 그 결단을 두고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 부부의 믿음에 탄복하며 더러는 칭찬한다. 그 당시 반대하고 이해 못하던 가족과 선후배들 조차 이제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임을 인정하고 심지어 부러워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 당시의 연약했던 믿음으로 어떻게 그 홍해를 건넜는지 기억하고 있는 우리는 그같은 칭찬을 들을만한 사람도 아니며 그런 믿음을 가진 적도 없음을 솔직히 고백해야만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히 11:29h)”다고 기록하지만, 그 사건의 경위를 자세히 미루어 살피면 결코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수시로 모세를 두고 원망하며 애굽으로 돌아갈 것?요구하던 그 믿음없는 이스라엘 백성을 강제로 등 떠밀어, 뒤에서는 바로의 군대가 무섭게 쫓아오고 앞에는 홍해바다가 가로막힌 절체절명의 순간을 연출한 후에, 어쩔 수 없이 건너게 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셨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세월이 지난 후에 오히려 슬쩍 “너희가 믿음으로 홍해를 건넜다”고 칭찬해 주시는 것이다. 자식을 세워주는 부모의 마음이다.


애굽의 노예 생활에 깊이 물든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돌려 애굽을 떠나도록 하는 것은 바로의 마음을 돌리는 일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애굽에 내려진 12가지 재앙은 비단 바로의 마음을 두렵게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떠나도록 허락하기 위한 것 뿐아니라 함께 그것을 목격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깨달아 알게 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죄와 욕심에 깊이 물든 인간들이 자기가 누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베데스다 연못가 행각 아래 들어누워 동냥으로 살아가던 삼십팔년된 병자는 죄와 죽음의 족쇄에 갇혀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전형적인 표상이다. 그들은 이미 스스로 낫고자 하는 노력도 소망도 없이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노예적 근성에 물든 채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 자리는 최소한 자신들이 먹어야할 끼니를 제공하고 비를 피할 장소가 되었다. 그곳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안전한 장소처럼 느껴졌고 오랜 습관 속에서 그들은 오히려 그곳을 즐기고 있을 수도 있다. 자신이 이미 죽을 수 밖에 없는 심각한 병에 걸린 병자라는 사실은 일상 속에서 잊혀진지 오래다. 요행히 물이 동할 때 먼저 연못에 들어감으로 병이 나을 수 있다는 속설은 그들이 베데스다를 떠나지 못하도록 하는 구실에 불과했다. 따라서 몸을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삼십팔년된 병자에게는 자신이 병을 고치지 못하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먼저 연못에 들어감으로 자신은 항상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체념이 그를 묶어두고 있었다. 오직 그의 관심은 그 자리를 고수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할 떡을 구하는 것, 그것 뿐이었다. 이 상황 속에서 그가 자신이 누웠던 자리를 들고 벌떡 일어나는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예수를 만나는 방법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예수를 만나는 체험, 그것은 바로(Pharaoh)의 통치와 바알(Baal)의 노예로 살아가던 자들에게 임하는 해방 선언이다. 떡의 노예로 살아가던 자들을 향해 외치는, 자유인으로의 부르심이다. 유월절 어린양의 흘린 피를 통해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너머선 후, 홍해 바다를 건너게 하신 은혜의 체험이다. 아직 자유인이 되기에 불충분하며 부자격하며 준비되지 않은 사람을 오직 예수의 피로 자유인으로 법적 선언을 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홍해 바다는 십자가 안에서 누리는 일회적인 구속의 사건일 뿐아니라 앞으로 지속적으로 임할 광야 생활에 대한 시작의 종소리이기도 하다. 따라서 법적인 자유를 너머서서 생활 속의 자유인이 되는 것은 지속적인 훈련을 필요로 한다. 광야 생활, 그 특별한 체험을 통해 비로소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배워간다. 떡으로부터의 자유…… 그것은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주고 싶어하는 아주 특별한 선물이기도 하다. 떡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자녀들이 누릴 권리이기 때문이다.


우상이 되어버린 떡에는 힘이 있다. 떡이 우상이 되면 스스로의 권리를 행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인간은 떡에 예속된 노예로 전락한다. 주종관계가 뒤바뀌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떡을 숭배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떡은 단순한 물질을 너머 인격적, 영적인 존재로 탈바꿈한다. 예수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라고 말했을 때 사용한 단어가 그당시 사람들이 섬기던 물신(物神) 맘몬(Mammon)이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떡은 더 이상 경제적인 문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지배하고 조정하고 또한 파멸로 인도하는 영적인 존재로 군림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 이외의 피조물에게 속박을 느끼는 순간부터 자유를 갈망하게 된다. 하나님의 형상에서 온 자유의 영을 받아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많은 종교와 철학에서 이 문제를 끊임없이 다루어 왔다. 어떻게 떡의 속박에서 벗어날 것인가? 떡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한 노력으로 불가(佛家)에서는 무소유(無所有)를, 도가(道家)에서는 무위(無爲)을 이야기한다. 떡을 외면하든지 떡을 무시함으로써 떡을 초극(超克)하고자 하는 것이다. 전자가 적극적 도피라면 후자는 소극적 도피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다르다. 떡은 경계의 대상도 경시의 대상도 아니다. 떡은 떡일 뿐이다. 떡은 떡으로서의 존재가치를 지닌 피조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홍해를 향해 떠나라 하는 것이다.



(2)


해방의 기쁨은 잠시…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 앞에는 광야가 펼쳐진다. 광야는 두려움과 불안을 가져오고 곧바로 모세를 향해 원망의 목소리를 발하게 된다. 차라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가 더 좋았다고 회상하기 시작한다. 비록 노예생활이었지만 애굽의 고기가마 옆에서 떡과 고기를 배불리 먹던 기억이 나는 것이다. 그들의 원망에 하나님은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내시며 하나님의 방법으로 응답하신다. 도저히 광야에서 기대할 수 없는 신비한 방법으로 아침마다 만나를 내리시는 것이다. 작고 둥글며 서리같이 세미한 것, 진주처럼 빛나며 꿀처럼 달콤한 그 만나를 처음 대하였을 때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어떻했을까? 만나는 단순한 일용할 양식 그 이정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돌보심을 나타내는 세미한 음성이요 속삭임이었다. 너는 내 것이라… 내 백성이라… 이제 내가 너를 먹이고 돌볼 것이다 하며 어루만지시는 임마누엘의 체험이었다.


중국으로 가기로 모든 것이 결정되고 마침내 떠날 날을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 평소에 우리 가족을 아껴주던 한 여집사님이 집을 찾아왔다. 아이와 아내를 위해 눈물로 기도를 해주던 그녀는 일어나면서 하얀 헌금 봉투를 내놓았다. 처음 당해보는 일이라, 나는 그 봉투를 받아들고 일 순간 무척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분의 고마운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한편으론 야릇하게 마음이 상했다. 마치 내면 깊숙한 곳에 감추어두었던 남에게 보이기 싫은 치부가 들어난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누군가 건드려서는 안될 내 자존심을 건드린 것 같은 아주 묘한 느낌이 들었다. 예민한 아내 역시 그 느낌을 받았는지 집사님이 집을 떠나자마자 곧 울음을 터뜨렸다. 서럽게 엉엉 우는 아내를 안아주며 토닥거려 달래는 동안 나는 문득 깨달았다. 앞으로 우리가 걸어갈 인생이 어떤 모습으로 전개될 것인지를…… 그동안 살아오면서 나와 내 아내가 스스로의 힘으로 살 수 있다고 믿고 살아가던 그 아성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내가 벌어서 먹고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존하여 살 수 밖에 없는 그 땅으로 떠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아내의 울음 앞에서 초라해지고 상실감에 빠져 있던 나에게, 그 순간 어디에선가 은은하게 내면의 깊은 곳을 어루만지며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다.
“진호야, 많이 아프냐?”
내가 아내를 달래며 어루만지는 그 손길로 하나님이 나를 만지고 계셨다.
“그 자존심, 네가 빼앗기기 싫어하는 그 자존심도 이제 나를 위해 내려 놓아라.”
그리고 출렁이는 감동으로 위로의 성령님이 찾아오셨다.
“아무 염려하지 말아라. 이제 앞으로는 내가 너희를 책임지겠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지난 10년간 신실하게 지키셨다. 그 신실한 하나님을 체험했기에 이제는 앞으로 다가올 또 다른 10년이 두렵지 않다. 연변과기대의 모든 재정은 전 세계에 흩어진 동역자들의 후원에 의해 이루어진다. 해외에서 들어간 교직원 역시 자원봉사 시스템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연변과기대의 교직원들은 반드시 자신의 가정을 후원할 후원자들을 스스로 확보하지 않으면 안된다. 서른이 너머 늦깍이 신앙생활을 시작한 탓에, 교회 배경도 별로 없고 동역자를 구하기도 힘들었던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처음 작정하고 기도했던 만큼의 후원자를 정확히 붙여주셨다. 더러는 세월이 지나남에 따라 열정이 식은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기억속에서 잊혀져간 사람들도 있었지만 또 그만큼 새로운 단체와 개인들을 붙여주셔서 항상 우리가 필요한 만큼의 물질로 채워주셨다. 북경의 한 컨퍼런스에서 처음 만나서 사귀게된 L박사님은 우리 가정이 재정적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어떻게 알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를 도와 주었다. 초창기 연변과기대의 재정상황은 아직 체계가 잡히지 않아서 우리 가정의 후원계정을 통해 학과 살림을 운영해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 자신 역시 내 구좌에 잔고가 남아있는 한 그것을 어떤 모양이든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서 공적인 일임에도 불구하고 학교재정보다는 개인 재정을 써서 활동하는 일이 더 많았다. 그 당시는 항상 마음 속에 넘치는 은혜가 있었기에 풍성함이 있었던 것 같다. 학교일로 출장을 가도 내 구좌에 돈이 남아있는 한 으례 자비로 다녔고, 주말마다 학생들과 교직원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먹이는 것이 너무나 기뻤다. 모든 것이 너무나 당연했고 항상 감사했다.


삼년 후, 하나님의 뜻에 의해 한동대에서 연구년을 가질 때, 한국에 IMF 사태가 터졌다. 나는 마침 한국서 월급을 받게 되어 그 어려움을 무사히 통과했지만 중국에 남아있는 동역자들의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특별히 한국에서 건너간 가정들은 후원이 끊기고 대폭 삭감되었다. 그들의 어려움을 전해들은 나는 어려운 가정 한 가정을 택하여 익명으로 조금씩 돕기 시작했다. 그것은 물질적 도움 이전에 한 몸을 이룬 지체와 동역자의 어려움을 함께 느끼기 위한 내 마음의 표시였다. 그러던 중 우리 가정도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우리 가정의 재정 상태도 악화되었다. 어느 달은 마침내 (-) 밸런스를 기록하게 되었다. 그러자 먼저 떠오른 것이 우리 가정도 이렇듯 힘든데 어떻게 남을 도울 형편이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후원회에 연락을 하여 그 가정 돕는 것을 중단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더 답답하고 불편했다. 이 작은 어려움에 쉽사리 흔들리는 내 자신의 믿음없음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다. 며칠을 기도하는 가운데 다시금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믿음으로 다시 회복이 되었다. 그리고 후원회에 재차 연락하여 그 가정 돕는 것을 계속하겠다고 부탁했다. 그러자 다시 평화와 기쁨이 밀려왔다. 그것이 바로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의 마음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달부터 우리 가정의 재정은 신속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는 매년 돌아가면서 한 가정씩 돕는 일을 멈추지 않고 있다.


중국에 오기 전에는 대학 강의와 개인 렛슨으로 항상 자신이 번 돈을 충족히 가지고 살아가던 아내가 중국 생활을 시작하면서 처음 겪어야 했던 어려움 중 하나가 재정문제였다. 이제는 항상 모든 재정을 남편에게 의존적으로 타서 생활할 뿐 아니라 그나마도 항상 부담감을 가지고 물건을 사야만 한다는 사실이었다. 하기사 그 당시 연길의 백화점에서 무엇 하나 사려고 해도 살만한 물건도 없었지만, 미국과 한국서 자기가 벌어서 원하는대로 쇼핑을 하고 지내던 그녀에게는 그 생활이 여간 답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제대로 발휘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배우는 학생들이 자신이 받고 있는 렛슨이 얼마나 값비싸고 소중한 것인지조차 알지 못하고 더러는 약속 시간을 안지키고 빼먹거나 하면, 아내는 집에 돌아와 공연히 나에게 종알대곤 했다. “이 녀석들이 도대체 뭘 몰라도 한참 몰라. 미국서 한 타임 렛슨에 백불씩 받던 그 비싼 렛슨을 자기 맘대로 빼먹고…”
그러나, 기특한 것은 지난 10년간 더러는 힘들어 해 가면서도 그 공짜 렛슨을 한번도 멈추지 않고 꾸준히 제자들을 키워냈다는 것이다. 아내에게도 홍해를 건널 때 자신이 받았던 은혜가 얼마나 컸던지, 만나는 모아두어서는 않된다는 점과 거저받은 것을 거져 주어야한다는 광야생활의 원칙만은 분명히 서 있었던 것 같다. 오직 그날 먹을 양식을 그날 공급해주는 일용할 양식에 대한 훈련, 광야의 만나는 우리 부부의 물질관을 서서히 바꾸어가고 있었다.



(3)


모든 종교에서 출가(出家)는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소명(召命)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에서의 출가와 성경에 나타난 출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불교의 출가가 세상의 모든 명예와 소유와 욕심을 버리고 속세를 떠나는 것이라면, 성경에서 출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소유를 지닌 채 떠난다. 어디 그 뿐이랴? 싯달타는 왕자의 지위와 처자를 모두 버리고 속칭 속세의 인연을 모두 끊고 집을 나섰지만, 아브라함은 자신의 모든 소유뿐 아니라 아내와 조카까지 데리고 집을 나선다. 불교의 출가가 속(俗)을 버리고 성(聖)을 취하는 것이라면, 성경에 나타난 기독교적 출가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삶의 방식과 거처를 옮길 수는 있어도 성속(聖俗)의 구분이 있을 수는 없다. 베드로가 예수를 만나 그물과 배를 버려두고 떠나는 장면은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시는 소명 앞에서 자신의 삶의 방식을 전환한 것이지 세상을 등지고 산으로 들어가기 위한 불교적 출가와 동일시 할 수 없는 것이다. 베드로를 비롯한 여러 사도들도 사역 현장에 아내를 데리고 다녔음을 기억하라.(고전 9:5) 또한 예수가 제자도를 가르칠 때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 19:29)”고 하신 말씀이나, 누가복음 14장에서 부모, 처자, 형제, 자매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며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하신 말씀도 의미를 바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모든 소유를 버려야만 제자가 된다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그 모든 것 보다 복음이 우선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 어떤 것도 복음보다 더 소중하게 여길 수 없다는 말이다. 복음은 곧 생명을 의미한다. 따라서 어떤 소유 가치도 생명가치 보다 앞설 수 없다는 예수님 특유의 강조적 어법이다. 예수의 가르침 속에는 가족과 소유를 버리고 산 속으로 들어가라는 불교적 출가의 개념을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소유를 인정하되 그 소유를 언제든지 포기할 수 있도록 생명 가치 앞에서 상대화 시키는 것이다.


떡을 의식적으로 물리적으로 멀리하는 불교식 출가라면 오히려 문제는 쉬워진다. 그러나 기독교의 출가는 떡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치열한 삶의 현장으로의 부르심이기에 더 어려운 것이다. 그곳에는 내가 스스로 취하는 떡으로 살아가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께 의존하여 살 수 밖에 없는 광야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비로소 떡으로부터의 자유케 되는 방법을 체험적으로 배워가게 된다. 그것도 한 두해가 아니라 사십년 간을 말이다.


떠나는 연습은 우리 인생에 항상 유익을 준다. 이사를 가건 이민을 가든 혹은 유학을 위해 새로운 소망을 품고 떠나든지 살아가던 거처를 한번씩 정리해 보는 것은 정말 필요하다. 묵은 삶의 찌꺼기와 먼지들을 털어내고 내가 진실로 가진 것들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는 중간 점검이 되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얼마나 불필요한 혹은 있으나마나한 것들을 껴안고 살아왔는지를 알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이시는 비전을 따라 안락한 삶을 뒤로하고 미지의 세계를 향해 발을 내딛는 것은 그 이상의 의미를 던져준다. 그것은 마치 영원을 향해 장막을 옮기는 순간을 미리 약간 체험해 보는 것과도 같다. 세상적 물질 가치의 덧없음을 조금씩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소유를 초월한 존재의 세계로 발길을 돌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10년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둘 때, 사람들이 가장 많이 던졌던 질문들이 있다. “노후 대책은 어떻게 할거냐?”, “앞으로 자녀 교육은 어떻게 책임질거냐?” 그 질문들 앞에서 당황하며 두려움에 싸인 아내와 아이를 안쓰럽게 돌아보던 생각이 난다. 성령께서 담대한 용기를 주셔서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미 사후대책이 다 마련된 사람인데 왜 자꾸 노후대책 노후대책 합니까?”라고 반문했었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 마음 속에도 막연한 두려움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타고 다니던 차를 처분했다. 중국으로 이삿짐을 부치고 난 후 이튿날 아침, 텅빈 아파트에 기대어 앉아 세 가족이 서로의 얼굴을 물끄럼이 쳐다보던 때, 갑자기 밀어닥쳤던 상실감과 두려움을 잊을 수 없다. 마치 내 것인양 붙들고 살아오던 모든 것들을 청산하고 마침내 하나님의 손에 우리 가족의 전 존재를 의탁한 그런 기분이 드는 순간이었다. 사실 그 순간 우리가 떡의 문제를 초월한 사람들이었다면 마땅히 평온과 기쁨으로 충만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했다. 그러나 그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부부를 개인적으로 친히 찾아오셔서 세미한 음성으로 위로 하셨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내 속에서 낙망하며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 42:5)”
그 말씀이 우리 부부를 여러 가지 어려움과 폭풍우 속에서도 지난 10년간의 광야 생활에서 흔들림없이 지켜주었다. 자기 소유의 차 없이 집 없이 살아가는 연길의 삶 속에서 나그네의 자유함과 천국의 소망을 배웠다. 큰 아들 다니엘은 반듯하게 잘 자라 주었고, 보석 같은 둘째 아들 데이빗을 얻었다. 비록 세상적인 건강보험(health insuarance)은 없었어도 10년을 건강하게 지낼 수 있었다. 물론 아직도 노후대책이 세워진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은 더욱 투터워졌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리실 때, 약속하신 40년 광야생활에서 뿐아니라 요단강을 건너가서 첫 유월절을 지킨후 그 땅의 소산을 먹기까지 닷새간 더 만나로 먹이셨던 그 세밀하신 하나님을 묵상하며 끝까지 책임지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알아간다.(수 5:12)


광야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만나는 축복의 통로이다. 하나님만 바라는 삶… 그 속에서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떡에 대한 우리의 주권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조근상] 무제

이코스타 2004년 2월


찬 양이 찬양되게 하는 것은 찬양 안에 있는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전에 나누었던 것처럼 물론 예배를 준비하는 찬양인도자의 준비가 중요하지만 예배에 참석하는 회중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을 찬양으로 표현하며 살아가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찬양에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을 다른 이유로 말하기도 한다. 즉 전통적으로 예배와 찬양을 드리거나 드리지 않거나 하는 문제와 또한 그것이 익숙하지 않다고 할 때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부분들이다. 하지만 그것은 방법의 문제가 아니다 예배와 찬양을 드리는 사람이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사실 요즘 우리가 드리고 있는 찬양 대 부분은 몇 년 전만 해도 사실 교회에서 불려지기 어려운 곡들이 많다. 장르 역시 다양해져서 이전에는 발라드와 칼립소의 빠른 비트(찬송가의 빠른 곡들)를 가진 것이 전부였었지만, 이제는 세상음악과 경쟁이 가능하게 된 것이 현대 찬양이다. 모두가 아는 것처럼 지금 우리가 많이 부르는 찬송가 역시 과거에는 그러한 대접들을 받아 왔다.


과 연 이렇게 뭔가가 느껴지지 않는 것이 찬양을 하는 사람들의 문제 만일까? 솔직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음악적인 사고방식에 길들여졌기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겸손한 마음, 갈급한 마음을 갖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찬양인도자로서 그리고 예배자로서 하나님 앞에 있었던 사람 다윗의 고백들은 우리로 하여금 예배의 마음이 어떤가에 대해서 잘 나타내고 있다. 고라자손의 그 유명한 시편 42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함같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인 것이다.


오 래 전에 부산에서 찬양인도를 하고 있었을 때의 일은 나에게 아직도 예배인도자로서 가져야 할 태도를 기억나게 한다. 한 번은 일주일 내내 찬양인도를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같이 찬양인도를 담당한 형제가 갑자기 불평 아닌 불평처럼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일주일 내내 첫 찬양이 목마른 사슴인데 이제는 너무 지겨워서 하기가 싫다고 말이다. 그 말을 하기까지 나 역시 몰랐었지만 일주일 내내 첫 찬양을 아니면 중간에라도 목마른 사슴이라는 찬양을 했었던 것이다. 그 때 후배에게 해 주었던 말은 이것이었다. 목마른 사슴이라는 노래를 부르지 말고, 네가 목마른 사슴이 되도록 노력해 봐라. 그러면 찬양의 지겨움이 없어질 것이라고. 사실 그렇다. 우리가 부르는 찬양은 노래로 표현한다면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 계속해서 새로 나오는 찬양들이 어떨 때에는 은혜 받기가 어려울 수 있다. 요즘의 찬양을 듣고 있으면 음악적인 센스는 뛰어나지만 오히려 뭔가가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면서 무엇인가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이전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찬양에 대한 편협 적인 생각들 역시 고쳐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찬양이 단순히 노래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하고 있기에 단순한 노래하는 것으로 묶어 버린다면 아쉬운 일이다. 우리는 찬양하면서 기도할 수 있고, 또한 찬양하면서 영적인 전쟁을 할 수도 있다. 모르는 노래가 나오기 때문에 찬양하지 못한다고 하지말고, 오히려 그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나 역시 요즘 영어권 Youth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으면 시험거리이다. 하지만, 그들의 입장에서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고 사랑한다면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따라 부를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찬양은 하나님이 대상이지만 그 대상을 향하는 우리 역시 중요한 것이다.


찬 양의 다른 표현은 묵상이다. 하나님을 묵상하고 그 분이 하신 일을 생각하는 것이 찬양의 또 다른 방법이다. 때로는 침묵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조용히 듣는 것 역시 찬양의 한 방법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자연 묵상이다. 석양의 지는 해를 보고 있을 때에는 이 세상 최고의 아티스트이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바다에 출렁이는 소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어떤 오케스트라도 표현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하늘을 나는 새들 역시 지저귀며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높이고 있다. 우리가 소리치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번에 텍사스에서 캘리포니아로 사역지를 옮기면서 24시간이라는 거리를 운전하면서 가는 동안 지나면서 각양 각색의 바위들과 돌을 보면서 하나님의 섬세하심, 그리고 광대하심을 경험하는 좋은 시간이었다. 그 오랜 거리를 지나는 동안(물론 하나님께는 짧지만) 하나도 똑같지 않는 모양의 바위들, 풍경들이 나로 하여금 절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들었다.


그 러나 역시 하나님은 우리의 직접적인 찬양을 원하신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 라고 말한 이사야서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사랑의 고백, 갈급함을 원하신다. 그렇기에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야하는 마땅한 이유가 있다. 혹시 여러분은 오늘 찬양을 대할 때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앞에서 인도하는 사람들을 따라서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필요성이 있다. 왜냐하면 그 분이 우리를 지으시고 만드셨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