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정] 묵상의 산으로 떠나자

이코스타 2006년 11월


고요속의 경외감


Nancy Beach가 쓴 An Hour on Sunday라는 책에서 가슴 깊이 다가온 구절이 있습니다. 현대의 대중은 하루 종일 온갖 소음과 정보로부터 폭격을 받습니다. 핸드폰, PDA, e-mail, voice mail, 멀티미디어 게임, home theater 등 테크놀로지의 폭발은 우리 사회에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갑니다. 그들의 대다수가 일주일 내내 영혼의 고요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현대인들이 교회에 왔을 때 그들은 현대의 현란한 문화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고요속의 경외감을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Nancy Beach는 미국 중부지역 시카고에 있는 윌로우크릭교회의 program director 즉, 예배사역의 총 책임자입니다. 윌로우크릭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한국의 보수주의 교회에 비쳐진 이 교회의 모습은 세속적인 문화와 감각, 록 음악, 일반 비즈니스 마케팅 기법을 교회 안에 수용하여 성공한 모델케이스입니다. 그러나 실제 이 교회의 예배 담당 디렉터가 추구하는 예배철학은 ‘고요’이었습니다. 비록 현대적인 음악과 드라마 영상 기법을 사용하여 최첨단 멀티미디어가 동원된 예배를 디자인하고 있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예배 원리는 ‘고요속의 경외감’입니다.


한 동안 한국교회는 윌로우크릭교회가 모델이 된 구도자 예배(seeker service)에 대한 열띤 공방전이 있었습니다. 소위 ‘열린 예배’입니다. 과연 이러한 형식의 예배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비난과 수용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 형식 안에 있는 원리를 파악하는 데는 그다지 많은 노력을 들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외형만 보고 섣불리 판단하는 정죄의식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놀라운 영적인 축복을 놓치게 됩니다.


삶에서 출발


주 일 예배에서 경험할 수 있는 고요속의 경외감은 워십리더의 개인적인 삶에서 출발합니다. 워십리더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는 자는 결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면서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예배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지 않고 어떻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혼자 산으로 떠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요 6:15)


(Jesus, knowing that they intended to come and make him king by force, withdrew again to a mountain by himself)


예수님은 청중의 인기나 대중의 잘못된 의도를 의식했을 때 곧 바로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예 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세상 왕이 되는 것이 아님을 주님을 너무나 잘 아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묵상하셨습니다.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다시 한번 자신의 삶의 목적을 정리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향해 뒤도 돌아보지 않으시고 앞으로 나아가셨습니다.


능력을 위한 골방


워 십리더는 물론 모든 예배사역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의 인기와 명예를 단호하게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향한 추구를 계속하는 삶입니다. 이것은 조용한 묵상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세상의 떠들썩함에는 너무나 많은 때가 묻어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에서 일주일에 한번 온 성도가 모여 드리는 축제의 예배도 사역이 필요로 한 곳입니다. 그곳은 능력이 필요로 한 곳입니다. 그러나 그곳은 사역을 위한 영적인 재충전의 장소는 아닙니다. 능력을 발휘하기 위한 고요함과 창조적인 시간이 부족합니다.


세 상을 변화시키는 일은 골방에서 시작됩니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알면서 잘 안 되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알아도, 그것이 진리임을 인정해도 안 되는 사람은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에 자신을 쏟지 않기 때문입니다. 워십리더는 그 무엇보다 더 임금 삼으려는 세상의 가치관과 성공의 방식, 자기 나르시스적인 문화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홀로 묵상의 산으로 떠나는 단호함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삶이 있는 워십리더에 의해 디자인되고 인도되는 주일예배는 실재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살아있는 예배가 될 것이고, 성도들은 고요속의 경외감으로 충만한 예배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2006/11


세상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믿음이 중요하다는 말은 충분치 않다. 그 믿음이 어떤 것인가 하는 설명을 스스로에게 또 주위사람들에게 해야만 하는 상황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이 때 신앙인들은 성경을 기준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줌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경을 읽음으로써 하나님의 섭리를 다시 상기하였듯이. 여기서 신앙의 규준인 성경 외에 개인적인 신앙 탐구의 여정을 기록한 책들이 필요한 이유는 보편적인 말씀이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작용을 하고 있는가를 봄으로써 새로운 시각에서 신앙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 앙은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하고 변증할 수 있다. 기독교적 신앙이 세상을 이해하고 예측하는데 가장 좋은 틀이라면 그것은 모든 방식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경험, 일관성있는 생각, 세상의 모순적인 파괴성 이런 상황에 대해서 적절한 해답을 주는 책들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번 호 ekosta는 믿음을 새롭게 점검할 수 있는 몇 권의 책을 소개하고자 한다.


“순전한 기독교”, C. S. Lewis, 홍성사
루이스는 상당한 기간 무신론자 혹은 불가지론자로 살아가다가 기독교적 유신론으로 자신의 생각을 바꾼 사람이다. 그의 출발점 기본적으로 ‘자 우리 앉아서 잘 생각해보자’라는 것이다. 무신론이 세상을 더 잘 설명하는지, 유신론이 세상을 더 잘 설명하는지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히브리적인 유일신론이 더 설득력이 있는지 생각해보자. 그리고 기독교적인 유신론이 왜 가장 보편적인 설명인지 설명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성적인 논변을 선호하는 사람이라면 추천할 수 있는 책이다. 저자는 자신의 생각의 전개 방식을 그 내용과 최대한 분리시켜며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한다. 그런 사변의 과정을 통해서 기독교의 진실성을 이해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사고의 내적 일관성을 진지하게 추구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종교적인 질문에 대해 기독교적인 시각을 찾아보려는 사람에게 적당한 책이 되겠다.


“차마 신이 없다고 말하기 전에”, 박영덕, IVP
술과 도박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던 사람이었다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 저자는 한국의 젊은이로서 기독교에 접근할 때 흔히 접하는 어려움에 대해서 조언을 한 후, 신앙의 두 축으로 보편적인 예수님의 삶과 죽음, 부활의 역사성과 자신의 삶 속에 경험한 연속된 사건들을 설명하고 있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흔히 겪는 갑작스런 해방과 그에 따른 정신적 혼란 속에서 발견한 신앙을 재미있는 사건들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먼저 객관적 사실로서 부활을 제시한 후, 개인적인 경험은 기도의 응답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설명한다.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삶 속에서 어려워 보이는 현실문제가 해결되는 과정을 통해 신앙의 확신이 커져간 경험을 말하고 있다. 신앙에 대해 처음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글이고 이야기가 진리를 가장 잘 담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예수님이 어떤 삶을 사셨고 그분의 메시지가 어떤 것이었나 하는 의문을 충분히 자아낼 수 있는 신앙으로의 초대장이 될 수 있겠다.


“어느 무신론자의 편지”, Edward K. Boyd and Gregory Boyd, 미션월드
기독 변증학 교수인 아들 에드워드가 무신론자인 아버지 그레고리와 3년간 주고 받았던 편지를 묶은 책이다. 완고하지만 논리적인 아버지에게 예수님의 참된 복음을 전하고 싶었던 아들은, 아버지에게 편지를 통해 평소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기독교에 대한 질문을 주고 받는 기회를 갖자고 제안하고, 아버지가 흔쾌히 받아드림으로써 이야기가 시작된다. ‘너는 신학자고 나는 평범한 노인이니, 어려운 말을 사용하지 말고 설명하라’는 아버지의 요청에 의해, 쉽고 명료한 문체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왜 하나님은 네 엄마를 살려주지 않느냐?’ ‘세상에는 왜 이리 고난이 많으냐?’ ‘성경을 어떻게 진리라고 믿을 수 있다는 말이냐?’ 등의 무신론자가 기독교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여러가지 질문들에 대해 조목 조목 답변하고 있다. 저자는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무신론자들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은, 많은 경우에, 성경의 올바른 가르침에서 벗어난 선지식과 오해에서 비롯하고 있슴을 지적하고 있고, 그런 오해와 의심이 하나님을 이해하는데는 큰 문제가 아님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자신이 스스로 기독교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있으면서, 의심하고 거부하는 무신론자들의 오해를 바로 잡기에 좋은 가이드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책이다.


“특종 믿음 사건”, Lee Strobel, 두란노
전 시카고 트리뷴 기자 출신으로써의 특유의 논리와 필체로 ‘예수는 역사다’ ‘창조설계의 비밀’의 책으로 우리들에게 널리 알려진 리 스트로벨의 기독 변증에 관한 책이다. ‘The case for the faith’가 원제인 이 책은, 한 때 빌리 그래함의 동역자였다가, 불가지론자로 돌아선 찰스 템플턴과의 만남으로 시작한다. 찰스 템플턴은, 지독한 가뭄 가운데서 죽은 아이를 안고 하늘을 올려다 보며 비를 기다리는 한 아프리카 여인의 사진을 계기로 강한 회의를 지니게 된 사람이다. 그 여인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비 뿐이었는데,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그런 일’을 하실 수 있다는 것일까라는 ‘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으로 부터 회의를 가지게 된다. 저자는 이렇게 회의론자, 불가지론자가 가질 수 있는 기독교에 대한 8가지 질문들을 다룬다. ‘사랑의 하나님이 악과 고난을 허용할 수 있는가’, ‘비과학적 기적, 믿을 수 있는가’, ‘ 영원한 지옥이 무슨 필요인가’ 등의 보편적인 의문들을,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만나 인터뷰을 진행하면서 해답을 모색한다. 짧은 인터뷰를 통한 접근인 만큼, 깊은 신학적 접근을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전반적으로 타당한 논리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Fransic Shaffer, 생명의 말씀사
프란시스 쉐퍼의 접근은 두 책과는 반대이다. 다른 전제로 출발한 사회의 여러 가지 모습이 과연 인간의 존엄성을 제대로 구현했느냐 하는 것이다. 성경적 세계관으로 뒷받침받지 않는 다양한 문화적 형태가 인간의 가치를 격상시켰는가 하는 점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되었다는 성경적 가치관이 함몰되면서 현대 사회의 많은 정신적 혼란이 발생하였고 그것이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온 것을 기술하면서 세속화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다. 지금 현재의 모습이 과연 옳은 것이며 자연스러운 것인가 독자들에게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궁극적인 해결책은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세상을 보고 그것을 교정하는 것이다. 그 내용은 자세히 서술하고 있지 않으나 절대적 표준의 중요성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고 저자의 다른 책과 강연들을 통해 저자가 생각하는 기독교의 핵심을 이야기 하고 있다. 기독교적인 세계관으로 문화 전반을 검토하려는 시도로 사회문제에 대해 책임있는 답변을 제시해야하는 기독 지성인에게는 가장 기초적인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인 각각의 내용에 동의할 수는 없으나 그 문제 제기의 틀 자체는 합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의 기독교 정치 운동에 깊은 영향을 준 저서로 알려져 있으며 책에 제기된 이슈 설정과 그 이슈의 논의는 깊이 있는 사고를 자극한다.


“목마른 내 영혼”, Alister McGrath, 복있는 사람
사람은 누구나 삶의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에 목말라 한다. 우리는 그 자체로 현재 존재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에, 원래의 본향을 향한 영적 목마름이 있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복음주의자인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그런 인간의 본성을 기초로, 우리의 갈망하는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 한다. 저자는 동굴과 같은 여러 이미지를 사용하여, 인간의 본성적인 갈망에 대해 아름답게 이야기 하고 있다. 동굴 안에서 바같의 다른 세상에 대해 동경하고 있는 우리들이지만, 바깥 세상이 감추어져 있는 것만은 아님을 이야기 한다. 쉽고 수려한 문체를 통해, 우리의 본성이 가지고 있는 초월자에 대한 갈망을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김한준] “하나님과 더불어 struggle하는 자” (“나는 누구인가?”- 본회퍼)

이코스타 2006년 11월호

OO 자매님께,


자매님이 가지고 계셨던 의문과 고민들에 관하여 지난 번에 나누어주신 이야기들이 그후로도 참 많이 생각이 났었습니다. 어려운 여건들 가운데서도 헌신과 봉사로 섬김의 수고를 다하는 삶의 모습이 애처로우리만큼 감동적이었고, 일면 부끄러운 마음으로 제 자신을 돌아보며 채찍질하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잘못아닌 잘못과 나아지지 않는 상황들로 인하여 힘들어하고 계신 점에는 참 많이 안타까왔습니다. 이토록 주님 앞에서 충성되고 신실하게 살아가고자 애쓰는 자매님인데, 하나님의 뜻은 과연 어디에 계신 것인지 모르겠다는 물음만 스스로 되뇌어보기도 했었습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무력함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고백하는 겸손한 마음이 아름다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혹 주님 앞에서마저도 마음이 계속 상하기만 하는 건 아닐까 공연한 걱정이 앞서기도 했답니다. 자매님이 치열하게 struggle하며 살아가는 것과 병행하여 주님 주시는 평화와 기쁨 또한 그 마음 안에서 나날이 더욱 커져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자매님의 이야기들을 떠올리던 중 문득 본회퍼의 고뇌와 어딘가 모르게 닮아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나치의 유대인 말살정책에 항거하다 체포된 본회퍼는 감옥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예수님을 연상시키듯 따뜻하고 의연한 모습으로 오히려 간수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처형되어 순교하기 얼마 전에 자신을 돌아보는 시를 한 편 지은 것이 사후에 널리 알려졌는데, 그가 주위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격적으로 비추어지고 있었는지, 자신의 내면에 흐르는 연약함과 두려움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고 있었는지, 그리고 전능자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겸허함과 신뢰를 가지고 있었는지가 잘 나타나 있는 글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이 글을 읽을 때마다, 여기까지 믿음으로 달려와 이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주님 앞에 자신을 내어드리고 있는 그의 감회와 눈물을 보는 것같은 느낌을 받곤 합니다. 그의 마음을 헤아려보고픈 마음에 제 나름대로 한 번 번역해본 것으로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  디트리히 본회퍼


나는 누구인가? 그들은 때로 말하기를,
나는 감옥의 갇힌 공간을 나설 때에
침착하고, 활기차며, 담대하다고 한다.
마치 자기 집 문을 나서는 유력자처럼…


나는 누구인가? 그들은 또한 말하기를,
나는 간수들과 이야기할 때에
자유롭고, 친절하며, 분명하다고 한다.
마치 내 자신 지시를 내리는 사람인 것처럼…


나는 누구인가? 그들은 또한 말하기를,
나는 어려운 시간들을 견뎌내는 가운데에도
한결같고, 웃음을 잃지 않으며, 기품이 있다고 한다.
마치 늘 승리하는 자의 모습처럼…


그럼 나는 정말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그런 사람인가?
아니면 단지 내가 알고 있는 나 자신일 뿐인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피곤하고 갈망하며 병들어있는,
마치 누군가가 목을 조르는 듯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아름다운 색들과 꽃들과 새들의 지저귐을 그리워하고 있는,
친절한 말 한마디와 이웃과의 정다운 삶에 목말라하고 있는,
가혹함과 사소한 모멸감에 대한 분노에 어쩔줄 몰라하고 있는,
기적같은 일은 더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체념하고 있는,
머나먼 곳에 떨어져있는 동료들 걱정에 힘없이 떨고 있는,
기도하기에, 생각하기에, 무언가 만들어내기에 지쳐 공허해져 있는,
기진맥진하여 이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버릴 준비가 되어있는, 그런…


나는 누구인가? 이편인가 저편인가?
오늘은 이편이었다 내일이면 저편인 것인가?
동시에 둘 다인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위선자요,
내 스스로는 비겁하고 수심에 찬 나약한 사람인가?
아니면, 아직도 내 안에는 패잔병의 모습이 남아있어서
다 얻은 승리 앞에서조차 뿔뿔이 도망치고 있는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 외로운 질문들이 나를 비웃고 있구나…


내가 누구이든, 그분은 아시리라. 오, 하나님,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1944년 6월, 나치의 수용소 감방 안에서)


“WHO AM I?” (from “The Cost of Discipleship,” pp.19-20)
by Dietrich Bonhoeffer


Who am I? They often tell me
I would step from my cell’s confinement
calmly, cheerfully, firmly,
like a squire from his country-house.


Who am I? They also tell me
I would talk to my warders
freely and friendly and clearly,
as though it were mine to command.


Who am I? They also tell me
I would bear the days of misfortune
equably, smilingly, proudly,
like one accustomed to win.


Am I then really all that which other men tell of?


Or am I only what I myself know of myself,
restless and longing and sick, like a bird in a cage,
struggling for breath, as though hands were compressing my throat,
yearning for colors, for flowers, for the voices of birds,
thirsting for words of kindness, for neighborliness,
trembling with anger at despotisms and petty humiliation,
tossing in expectation of great events,
powerlessly trembling for friends at an infinite distance,
weary and empty at praying, at thinking, at making,
faint, and ready to say farewell to it all?


Who am I? This or the other?
Am I one person today, and tomorrow another?
Am I both at once? A hypocrite before others,
and before myself a contemptibly woebegone weakling?
Or is something within me still like a beaten army,
fleeing in disorder from victory already achieved?


Who am I? They mock me, these lonely questions of mine.
Whoever I am, thou knowest, O God, I am thine.


(June 1944, in the prison cell of Nazis camp)


저에게도 어려움과 고민으로 채워졌던 시간이 있었는데, 그런 가운데 큰 힘이 되어주었던 한 가지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속이는 자”를 뜻하던 야곱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직접 “이스라엘”이라고 바꾸어 주신 그 드라마틱한 장면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이름들이 종종 한 사람의 일생을 종합적으로 간추려 상징하는 경우가 많은데, 제가 주목한 점은 나중에 하나님의 백성 전체의 이름이 되는 그 이름이 “거룩한 자”나 “복받은 자”와 같은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씨름(struggle)하는 자”의 의미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분과 더불어 씨름(struggle)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정직한 의미에서 우리가 주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연약하고 게으름과 죄에 미혹되기 쉬운 나이기에 그분께서 맡기신 소명을 어떻게든 감당하고자 한다면 그 과정에서 struggle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하여 그 모든 일을 능히 감당하고 이루실 주님이건만, 그분의 도우심 앞에 내 자신을 내어드리기까지는 나의 본성을 거스르는 struggle이 있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랑 없는 마음에 그분의 사랑을 담아 이웃을 사랑하는 자리에 나아가는 과정에서도 감당해야할struggle은 늘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struggle이 그러하였고 본회퍼의 struggle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매님께서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하며” 통과하고 있는 지금의 이 시간들 또한 어쩌면 자매님이 드릴 수 있는 가장 순전한 영광을 그분께 드리고 있는 순간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나님께서는 감당하지 못할 어려움을 허락지 않으신다 하셨으니, 아마도 주님께서는 그 정도의 난관을 감내할 만한 삶의 실력과 성숙함이 자매님에게 이미 있다고 인정하고 계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피할 길을 또한 마련하셔서 능히 감당하도록 도우신다 하셨으니, 말과 경주하여도 능히 이기고 요단강의 창일한 가운데서도 안전할 수 있게 하시는 그분의 손길을 혹 조만간 고백하게 되실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 최선을 다했지만 더 이상 붙잡고 있기가 어렵다고 느껴지는 일이 혹시 있으시다면 때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분 품 안에서 존재 자체의 안식을 경험할 수도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가장 이루고 얻기 원하시는 것은 자매님을 통한 그 어떤 것이기 이전에 자매님 자신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한 찬양곡의 가사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Savior on a hill, dying for my shame, could this be true? … For you so loved the world, you gave your only Son to say “I love you so. Oh, how I love you so…” (Hillsong, “Saviour”)


그 사랑이 자매님을 어디든 쫓아가서 위로하시고 힘주시고 놀라게 하시며 만족케 하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자매님은 귀중한 “하나님의 소유”이시고, 그 사랑이야말로 자매님이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그분 품안에 머물도록 하시는 진정한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
OO 드림

[김고운] “폭풍” 속의 “평안”

이코스타 2006년 11월호


2006년 8월 25일. 일기.


아침에 눈을 뜨며…
부지불식간에, 꿈 속에서도 찬양을 계속 흥얼거리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찬양.




  •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내앞에 어려운 일 보네
    주님앞에 이 몸을 맡길 때 슬픔없네 두려움없네
    주님의 자비하신 손길 항상 좋은 것 주시도다
    사랑스레 아픔과 기쁨을 수고와 평화와 안식을
  • 날마다 주님 내 곁에 계셔 자비로 날 감싸주시네
    주님앞에 이 몸을 맡길 때 힘 주시네 위로함주네
    어린 나를 품에 안으시사 항상 평안함 주시도다
    내가 살아 숨쉬는 동안 살피신다 약속하셨네
  • 인생의 어려운 순간마다 주의 약속 생각해보네
    내맘속에 믿음 잃지 않고 말씀 속에 위로를 얻네
    주님의 도우심 바라보며 모든 어려움 이기도다
    흘러가는 순간 순간마다 주님 약속 새겨봅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폭풍 가운데도… 제가 탄 배에 주님이 타고 계시니
내가 참 평안합니다.


이 평안이 너무 좋은걸요.


세상이 알 수 없는 평안… 주님 주신 평안에 참 감사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




제게 있어서 2006년 8월은…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아니 기억하고 감사해야하는 한 달이 되었습니다. 박사자격시험(Qualifying Examination)에서 실패한 후, 하루에도 수도없이 마음이 부서졌다 모아졌다… 약해졌다 강해졌다를 반복했지만, 그래도 웃을 수 있고, 그래도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유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변화무쌍한 상황과, 연약하여 흔들리기 쉬운 나자신을 본다면 결코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언제나 신실하신 하나님… 그 분을 신뢰함이 폭풍 가운데 평안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였습니다.


8월 3일, 구술고사를 보던 날 아침에 묵상했던 말씀은 누가복음 6장 37절 – 42절, 용서와 베품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 비판치 말라.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 정죄하지 말라.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 용서하라. 용서를 받을 것이요.
  • 주라. 줄 것이니.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안겨 주리라.)
  •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그 날 아침, 주님께서 나에게 왜 이런 말씀을 주시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 때에는 시험을 자연스레 패스할 것이라고 여겼기에, 이 말씀이 제 생활에 어떻게 살아나게 될 지, 어떤 예상도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시험결과를 듣고 나서, 눈 앞이 깜깜했습니다.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눈물부터 왈칵 쏟아지는데, 그 순간 공교롭게도 제 마음 속에 떠오른 것은 아침에 묵상했던 말씀이었습니다. 이 결과에 대해 어떤 누구도 비판치 말고, 정죄하지 말고, 용서하고, 주고, 내 눈 속의 들보를 먼저 빼는 것이 그 때의 제가 해야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쉽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박사과정에 들어와서 치르게 된 첫 퀄리시험이니, 그렇다면 두번째 기회는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했는데… 엄격한 학과 룰은 “두번째 기회는 없다” 라는 것이었고, 지금까지 어느 학생에게도 예외없이 한번의 기회만 주었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는 정말이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유학 3년차.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하는지, 아니면 다른 학교로 옮겨 공부를 계속 해야하는지, 혹은 다른 길을 찾아보아야하는 것인지 예상치 못한 상황 앞에서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갈바를 알지 못했지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던 것처럼…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상황 가운데 믿음의 발걸음을 떼라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무얼 어떻게 해야하는건지도 잘 몰랐지만, 그 와중에 제가 붙잡을 수 있었던 것은 딱 한 가지, “하나님”의 “신실하심” 이었고, 주님은 어떠한 순간에도 나를 집중력있게 붙들고 계신다는 믿음이 그 때의 저를 지탱할 수 있게 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어려운 마음 가운데도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시험을 준비하면서 제가 하나님께 드렸던 “고백”들이 시험결과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것은 분명 아님을 발견했고, 어쩌면 그 상황 안에서 주님을 향한 나의 믿음을, 또 사랑을 좀 더 분명하게 보여드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난하고 가난해진 마음으로 고백했습니다.


“그리 아니하셨지만 감사합니다.”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합니다.”


“이 일을 통해 새 일을 행하실 하나님을 기대합니다.”


그 때, 그렇게 쉼 없이 쏟아낼 수 있었던 고백과 기도.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 날 후로 참 귀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새벽마다 함께 기도무릎을 꿇어준 캠퍼스 동역자들과의 “말씀묵상과 기도” 시간은 날마다 간증의 연속! 함께 묵상했던 말씀이 매일의 삶으로 생생하게 나타나는 것을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도 익히 알던 말씀들이, 새벽마다 하나님께서 갓 써주셔서 내려주신 것처럼, 생생하게 마음판에 아로 새겨지고, 삶 가운데 살아나는데 어찌나 신기하고 감사하던지요.


말씀은 실로 살아 움직였습니다!


상황이 다급하기도 했지만, 우선은 제 마음이 주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으니 어느 말씀하나 가벼히 듣지 않게 되었고, 중심을 계속 체크하며, 순간순간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었던 것이 말씀을 삶으로 경험하는 토대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더불어, 동역자들과 멘토님들이 해주시던 진심어린 기도와 다독임은 힘겹던 시간을 참 따뜻하게 견딜 수 있게해준 힘이 되었습니다.


폭풍 속에서 항해하는 것 같던 그 시간.


한 달여의 기간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크고 작은 소소한 사건들을 모두 다 나열할 순 없지만… 하나님께서 문을 하나, 둘, 셋… 다 닫으시는걸 보며, 처음에는 마음이 참 힘겹기도 했으나 점차 두번째, 세번째쯤 되어서는 순종의 속도가 빨라지고, 즉각 순종하게 되고, 나중에는 닫으시는 문 너머에 열어주실 문까지도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주님께 기도드렸습니다.


“때를 따라 돕는 하나님의 은혜” 를 경험하게 해 달라고. 그리고, 주님께서 뜻하신 바가 있으셔서 이렇게 상황을 몰아가시는 거라면, 제가 바라고 원하는 것이 있을 지라도, 주님 원하시는 곳에 제가 설 수 있도록… 문을 계속 닫아주시라고 기도했습니다.


주일 설교 때 목사님께서 주신 말씀을 또한 마음에 새겼습니다.



아무리 아픈 시간도 다 지나가기 마련이며
아무리 즐거운 시간도 다 지나가기 마련이다.
“이것도 지나가리라.”

8월이 끝나가던 마지막 주, 저는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끊어놓고 서둘러 이사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감사히도, 그 때의 마음은 속상하거나 아쉬운 마음이기 보다는, 한 달여 하나님의 깊고도 큰 은혜를 체험하고 나서, 감사와 평안으로, 또 기대함으로 떠남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국행을 일주일도 채 남겨놓지않은 8월 30일. 전 해에 어드미션을 받았던 학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원한다면, 바로 다음주에 개강인 가을학기부터 트렌스퍼해서 공부하라고 말입니다.


그 순간, 전에 드렸던 기도가 생각났습니다. 주님이 뜻하신 바가 있어서 어떤 곳으로 인도하시는 것이라면 그 길을 즐거이 따라가겠다는 고백과 함께, 혹 주님께서 무얼하고 싶냐고 물어보시면… “제 소망이 주님 뜻안에 있는 것이라면, 공부하고 싶어요.” 하고 기도한 것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아, 어찌나 놀랐던지요….


폭풍 속에 있었다 할 지라도, “하나님이 나의 상급” 되심이… 모든 것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제 마음의 소망까지도 세세히 감찰하고 계셨으니 말입니다.


그 다음 날 아침, 새벽기도를 드리러 나갔는데 마침 말씀 본문은 욥기 마지막 장이었습니다. 욥의 고난이 끝난 후, 그가 할 수 있었던 고백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니다” 를 저도 고백하며, 또 회개하며, 관계가 어려웠던 지도교수님을 위해 중보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교수님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게 되시길 간절히 간구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강력한 인도하심을 따라 뉴저지에 와서 하고 싶었던 공부를 계속 하고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전에는 하나님께서 문을 하나, 둘, 셋… 닫으시더니, 이 곳으로 옮겨오고는 문을 하나, 둘, 셋… 열기 시작하시는데, 지켜보던 주위 분들까지도 놀랄만큼 앞 길을 예비하시고 인도하셨다는 것이 보이고 있습니다.


폭풍 가운데도 평안할 수 있게 해주셨던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이해할 수 없을 때에도 믿고, 순종하고, 감사하는 법을 배울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억하라 하셨던 “은혜의 때” 를 마음 깊이 새기며, 항상 기도하며 깨어있어야 겠다고 다짐합니다.


한창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저를 위해 기도해주던 선배가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고난 받을 때 낙망하지 말고,
축복 받을 때 교만해서는 안된다.”


참… 힘이 되는 말이었습니다.


부족한 저의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리며, 지금 어떤 상황 가운데 계시는 지는 알 수 없으나, 고난 가운데 계시다면 낙망하지 마시고, 축복 속에 계시다면 교만하지 마시기를 기도합니다. 저 또한 이 말을 마음 속에 계속 새기려 합니다. “고난 받을 때 낙망하지 말고, 축복 받을 때 교만해서는 안된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만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