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주희] Behind Our Sunday Smiles

  수년 전 남편의 안식년을 맞이하여 1년간 미국에서 머문 적이 있다.  그 때 기독교 서점에서 나의 눈길을 끈 책이 있는데, 그
책제목이 바로 ‘Behind Our Sunday Smiles’이다.  이 책의 내용이 강조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매주일 아침이면 많은 교인들이 좋은 옷을 입고 환한 웃음을 지으며 서로 반갑게 인사하고 안부를 묻는다.  모두들 아무 문제없이
잘 지내고 있으며 행복해 보이는 듯하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온갖 문제와 아픔으로 괴로움과 낙심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우리는 이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며, 그것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현대사회는 복잡하고
다양하기 때문에 이젠 교회도 돕는 사역을 하기 위해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사실 미국 교회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교회들도 이런 비슷한 현상들이 있다.  주일 아침이면 모두 밝은 표정으로 행복하게 인사를
나누지만, 많은 사람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갖가지 아픔과 고통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부부간의 갈등, 자녀들로 인한 문제,
재정적인 어려움, 컴퓨터 중독, 흡연이나 알코올로 인한 어려움, 시댁 혹은 친정과의 갈등, 정신질환이나 심리 및 인격 장애…

  A집사님은 교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여전도회 일, 구역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일에 관여되어 섬기고 있다.  그러나
아들로 인한 마음의 큰 짐이 늘 자신을 누르고 있다.  한참 공부해야 할 중학생의 나이에 그만 컴퓨터에 중독되어 몇 시간을
컴퓨터하며 보낸다.  뿐만 아니라, 이를 금하는 부모에게 지나칠 만큼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심지어 욕도 한다. 
하지만 이일에 대해 누구에게도 이야기 할 수 없다.  우선 자식의 일이라 소문이 날까 두렵기도 하고, 목사님께 말씀드리고 싶어도
구체적인 해결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기도나 한두 번 해 주실까…

  B할머니는 요즘 할아버지 때문에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계시다.  할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지신 후 거동이 매우 불편하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심방을 와 주시기는 했지만, 한 달에 한두 번이라도 건강한 젊은 사람들이 와서 할아버지 목욕을 도와줬으면 하는 구체적인
바람이 있다.  몇 번 전도사님께 부탁드리려고 마음먹다가도 교회에 열심히 다니지도 않았고 헌금도 많이 못했으며, 명절에
사역자들께 작은 선물조차도 사드린 적이 없기 때문에 면목이 없어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한다.

  C성도는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였다.  아이가 커 가고 경제적으로 어려워져 가면서 혼자 사는 것이 쉽지 않음을 느낀다. 
하지만 홀로 살면서 느끼는 외로움과 재혼하고 싶은 마음을 누구에게도 꺼낼 수가 없다.  괜히 오해받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종류의 어려움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아픔과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
가지고 돌보려는 마음이 우리에게 부족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 같은데, 정작 필요한 일을 하기에는
사역자도 성도들도 너무 바쁘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마음을 털어놓고 위로 받을 여유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다.  때론 우리가
주님의 일에 너무 열심(?)이므로 은사와 능력만 강조하고, 숨겨지고 가려진 아픔들을 도외시하고 있지나 않은지 생각해 볼일이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하신 일을 자세히 살펴보면 인간의 고통에 큰 관심을 가지시고 그 고통을 풀어주심을 발견한다.  즉 ‘백성의
눈물’에 마음을 두셨다는 것이다.  모세를 부르실 때에도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과 부르짖음과 우고를 보시고 그들을 구하기
위함이었고(출3:7), 예수께서 사역의 많은 부분을 고통가운데 있는 자에게 다가가 대화하시며 치유하신 것도 그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안타까워 하셨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며 고통가운데 있는 자를 주님
자신과 동일시하시기도 하셨다.(마25장)

  우리도 ‘백성의 눈물과 고통에 마음을 두신 하나님’을 닮아야겠다.  혹 나의 관심과 따뜻한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 있는지 사랑과
여유를 가지고 주변을 둘러보자.  필요하다면 나의 시간과 물질도 희생하자.  그리고 더 잘 돕기 위해 필요한 전문적인 지식도
쌓자.  그리하여 ‘Our Sunday Smiles’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감사와 기쁨의 모습이 되면 좋겠다.

[최주희]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에는…

  1977년 12월은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크리스마스였다.  대학입시를 준비하던 고3의 기간을 불안과 방황으로
보내다가 가정선생님의 전도로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 당시에는 QT가 무엇인지 몰랐음에도 나를 만나주시고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주신 주님이 얼마나 감격스러웠던지 파랗고 자그마한 신약성경을 들고 다니며 집에서 부모님 눈치, 학교에서 친구 눈치
살피며 성경말씀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버스를 타고 있을 때는 오래 기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학교 청소시간에는 친구들과
마룻바닥을 문지르며 불안과 초조가운데 있는 그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기도 하였다. 

  하나님을 만난 5월부터 가슴 설레며 기다리던 날이 있었는데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셨기에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일, 바로 크리스마스였다. 12월에 들어서자 어떻게 하면 크리스마스를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지 고민하며 기도하다가, 밤
새워 성경을 읽으며 주님을 사랑하기로 결정하였다.  잠이 많기로 유명한 내가 밤을 새운다는 것은 보통 큰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나의 사랑과 헌신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셨다. 아니, 그 이상을 표현해도 지나침이 없으실 만한 분이셨다. 
드디어 12월 24일 밤, 성경을 두 손에 들고 마태복음부터 읽었는데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 눈을 떠보니 아침이었다.  그때
느꼈던 죄송함과 부끄러움은 차라리 그분을 향한 사랑이었으리라.

  1990년 12월은 후회 없는 사랑을 이웃과 나눈 특별한 기억이 있다.  미국에서 유학 중일 때 한인교회를 다녔는데 거기서 만난 김
자매와의 교제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분은 미국인 남자와 결혼하여 테이지라는 우리 아들 진호와 동갑내기 아들이 있었다. 
남편이 마약과 방탕한 생활로 참으로 힘든 상황이었지만 신앙으로 굳건히 이겨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 아들은 가정환경으로 인해
정서적으로 산만하여 때론 교인들의 눈총까지 받아 김 자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심지어는 교회에서까지
마음이 편치 못했던 것이다.  다행히 나와는 마음을 터놓고 서로 의지하며 지냈는데 참으로 귀한 우정이었다. 

  그러다가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다.  우리 가족은 김 자매의 집을 방문하기로 하고 테이지의 선물을 사기 위해 쇼핑을 했다. 겨울에도
허름하고 얇은 옷을 입고 나오는 세 살배기 아이를 위해 ‘털 잠바’를 사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때 우리의 생활이 넉넉지 못했기
때문에(유학 간 후 3년 정도 까지는 우리 돈으로 햄버거를 사 먹은 기억이 없다.) 부담이 되었지만 실용적이고 좋은 털 잠바를
열심히 골랐다.  그런데 갈등이 생겼다. 모자가 없는 털 잠바와 모자가 달린 것과는 돈의 액수가 많이 차이 났던 것이다.
망설이다가 모자가 달린 것으로 구입한 후, 김 자매 집을 향해 지도를 찾으며 한 시간 넘게 고속도로를 달려갔다.  반갑게
맞이하는 김 자매는 우리가 오기를 아침부터 들뜬 마음으로 기다렸다고 울먹였다.

  그
후 다음 크리스마스가 되기 전 가을, 테이지는 뜻하지 않은 사고로 주님 곁으로 가버렸다.  아이 하나 바라보고 힘든 생활을
견뎌낸 김 자매는 미친 듯이 테이지를 불러댔다.  나는 예쁜 관속에 평화롭게 누워있는 그를 바라보며 “테이지! 넌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였어!”하고 마지막 인사를 하였다. ‘모자 달린 털 잠바’는 테이지를 향한 계산하지 않은 우리의 사랑이었다.

  1999년은 남편의 첫 안식년으로 미국에서 생활하였다.  유학했던 학교에 교환 교수로 일 년간 일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느 날 뜻하지
않게 김 자매로부터 연락이 왔다.  소문을 듣고 우리의 연락처를 수소문 했다는 것이다.  너무나 반가운 마음으로 함께 만났다. 
그간의 일들을 함께 나누었는데 얼마나 감사한 일들이 많았는지 모른다.  테이지가 떠난 몇 년 후 하나님이 아들을 주셨는데
테이지와 너무 닮았다.  남편도 성실하게 아내와 함께 교회에 다니며, 친정 식구들도 모두 미국에 와서 잘 정착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러면서 김 자매는 봉투 하나를 꺼내어 식탁에 올려놓았다.  “사모님, 제가 미국에서 얼마나 고생하며 살았는지
아시지요?  이거 백화점 상품권이에요.  100$은 저에게 참 큰 돈 이랍니다.  하지만 진호에게 꼭 선물해 주고 싶었어요. 
이 돈으로 진호에게 꼭 옷 한 벌 사 주세요.  물리치지 마시고 제 진심을 받아주세요…”  김 자매도 나도 손을 맞잡고 함께
울었다.  그동안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선하심이 너무 감사했고, 김 자매의 거친 손을 통해 느낀 그녀의 긴 고통의 세월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조금 있으면 예수님이 친히 이 땅에 오신 크리스마스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성경을 읽으며 밤을 새워 보고 싶다.  뿐만 아니라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빵과 불고기를 한 아름 안고 고아원을 방문 해야겠다.  그리고 순간의 잘못으로 20여 년간 함께 살아온
장애를 가진 아내를 살해한 후, 지금은 하나님을 만나 철저한 회개의 증거로 교도소에서 전도와 섬김에 열중인 아저씨를 만나러
여주에 가야겠다.  하늘에서 먼 이 땅에 오신 그분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느껴보며…

[Piafotostory] 야간비행


석양이 흐르고..

모두들 집으로 갈 길을 찾아 가건만


나는 아직 길이 남아 있기에….


 저 하늘을 벗삼아…


 야간 비행…


 길을 떠난다.

[Piafotostory by Eunah Oh with Canon 400D, Sigma 18-200mm]

[신선묵] 영적 지도자와 개인적인 사역

국민학교 때부터 대학원에 졸업하기까지 수많은 선생님들을 거쳤다. 교회에서도 많은 목사님 그리고 전도사님을 거치면서 신앙 생활을 해왔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생각나는 선생님이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다. 학교 선생님 중에서 특히 생각나는 분은 중학교 일학년 때 선생님이 하시는 일을 무엇인가 도와 드리고 우리 학생 두 서너명에게 선생님이 빵 집에 가셔서 수고 했다고 빵을 사주셨던 생각이 난다. 중학교 2학년때 선생님 사모님이 돌아가셔서 우리 학생들을 대표하여 집에 방문했던 기억이 난다. 대학교 때에도 많은 교수님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 기억에 남는 분은 년초에 세배하고 집에 가서 밤을 새우고 놀고 온 우리 학교 선배 교수님이 생각난다. 미국에 와서도 한국에 다니러 가면 그 교수님 댁을 찾아 뵙고는 하였다. 미국에 와서 신학교에서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많은 교수님을 만났지만 집에 초대해주시고 개인적으로 식사를 함께 하고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져주신 클린톤 교수님이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이다. 클린톤 교수님은 많은 지도자들을 연구하시고 내린 결론 중에 하나가 효과적인 지도자들은 사람들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사역의 수단이자 목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가르침에 있어서 비공식적인 관계와 만남이 교육의 중요한 통로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가르침도 그러하였고 사도바울의 가르침도 그러하였고 오늘날에도 많은 훌륭한 교사들이 그러하다.

내가 학교에서 학교의 사역을 평가하는 연구를 담당하면서 학생들에게 질문하는 것 중에 하나가 학생들이 교수님들에 대하여 얼마나 가깝게 느끼는가 얼마나 개인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고 느끼는가를 연구한다. 그리고 학생들이 교수님들과 친밀하게 느끼게 하기 위한 노력을 한다. 교수와 학생간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을 때에 교육의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수님들에게 학생들의 기도 제목을 받아서 기도해주도록 권면하기도 하고 식대를 대주어서 학생들과 만남의 시간을 갖도록 권장하기도 한다. 개인적인 관계는 효과적인 사역의 수단이기도 하고 그 자체가 아주 중요한 사역이기 때문이다.

그 전에 학생부 전도사로 사역할 때에 나는 작은 교회에서 사역을 하였기 때문에 늘상 아이들에게 라이드를 주고는 하였다. 토요 성경 공부 시간이던 주일 예배 시간이던 아이들에게 전화를 하고 집으로 데리러 가는 것이다. 그러면 차 안에서 교회를 오 가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신학적이거나 신앙적인 중요한 애기들만 한 것은 아니지만 그 시간을 통하여 아이들과 친밀하여 지고 아마도 아이들에게는 주일날 내가 열심히 준비하였던 설교들보다 차안에서 나와 함께 한 시간들이 더욱 기억에 남을 지도 모른다. 지금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사역을 하면서 어떻게 우리 학생들과 비공식적인 개인적인 관계들을 맺어 갈 수가 있을까를 다시 한번 고민하면서 어쩌면 나의 가르침의 사역이 교실 안에서의 강의보다도 그런 관계들을 통하여 더욱 지속적인 영향을 남기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러면 어떻게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것인가 몇 가지만 살펴본다.

 

첫째, 학생들의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  한번은 클린톤 교수님의 강의를 통역하고 일부는 내가 직접 강의를 하였다. 85 가량의 학생들이 수강하였고 학생들을 다섯 그룹으로 나누어 나는 중에 구룹 (박사과정학생들 18 가량) 지도하였다. 강의 마지막날 그룹 지도자들과 식사하는 도중에 갑자기 클린톤 교수님께서 자기 그룹 학생들의 이름을 다섯명씩 대보라고 도전하셨다. 어떤 사람은 다섯명의 이름을 대고 어떤 사람은 대지 못하였는데 나도 4명까지 밖에 대지 못하였다. 여러가지 핑계가 있지만 결국 많큼 학생 한사람 사람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는 이야기다. 한편으로 부끄럽고 교수생활에 익숙해 지면서 초심을 잃어가는 나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다.

 

둘째로, 학생들의 숙제에 정성이 들어있는 피드백을 주어야 한다. 학교에서 강의하면서 학생들에게 페이퍼를 자주 내도록 숙제를 내고 있다. 숙제를 내면 받아서 피드백을 주어야하는데 시간에 쫒겨서 일을 감당하지 못하면서 마음에 깊은 부담감이 늘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학생들의 입장에서 숙제를 정성껏 내면 피드백을 기대하기 마련인데 알면서도 많은 일들에 쫒겨서 일을 감당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요사이 우리 아들 정민이가 학원에 다니면서 매일 일기를 적어서 내는 숙제를 해야한다. 매일 저녁에 일기를 쓰도록 도와주는 일도 쉽지않다. 그런데 학교 선생님이 어떤 분은 정민이의 일기 숙제를 정성껏 고쳐주는 분이 있는가 하면 어떤 선생님은 그냥 했다고 스마일만 표시해주는 선생님이 있다. 정민이 엄마가 선생님의 반응을 보면서 정성껏 해주는 분을 좋아하는 같다. 나도 물론 그렇고 교사가 사람으로써 반드시 가져야할 태도라고 생각된다. 말로만 학생들을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는다고 것이 아니라 숙제 하나하나를 정성껏 읽어주는 실제적인 도움의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세째, 학생들의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교사는 여러명의 학생들을 대하기때문에 일률적으로 대하기가 쉽지만 학생 한사람 한사람은 다르다. 학생들의 차이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교육을 해야한다. 오늘날 교육학계에서 배움의 스타일 이론이 많이 부각되고있다. 사람마다 배우는 스타일이 다르다는 것이다. 정민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에 교생실습을 하던 대학생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하나씩 맏아서 한학기동안 관찰하고 학생의 배움의 스타일에 관하여 리퍼트를 하였다. 그래서 정민이에 대한 리포트를 받아보았는데 나의 아들이지만 객관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학생듸 독특성을 고려한 교육이 되어야하지 일률적인 방법과 기준에 따른 교육은 때로 학생들을 발전시키기 보다는 좌절시킬 있기때문이다.

 

네째, 학생들을 사랑해야 한다. 특별히 기독교 교육에서는 학생이 교회의 성도님이건 학교에서 학생이건 하나님께서 우리 사역자에게 맡겨주신 양들인 것이다. 우리 사역자의 첫번째 그리고 마지막 궁극적인 의무는 그들을 주님께서 사랑하셨듯이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의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들 한사람 한사람이 목적으로 대해지고 사랑해야 한다. 그 학생들을 사랑하는 것이 궁극적인 교육사역인 것이다. 최근에 이중표 목사님의 책을 읽었는데 말씀하시기를 영적 지도자는 무엇보다도 성도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성도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마치 부모가 자녀에게 젖을 먹일 때에 자신을 먹이는 것이 듯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부가 골방에서 사랑을 나누고 유방으로 아이들을 먹이듯이 영적 지도자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속에서 사랑으로 충만하여 영적 자녀들인 성도들에게 자신을 주는 사랑으로 양육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적 지도자가 성도들을 정말로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그가 지적하기를 목회자들이 성도들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정말로 사랑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는 이 문제를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목사의 행복이란 교인들에게 자기 존재 전부를 내어줄 때 맛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목사는 목회를 하면서 끊임없이 자기가 양들에게 지금 무엇을 주고 있는가에 대해 스스로 진단해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 목회 현장에 가보면 진짜 어머니의 심정으로 목양하는 곳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자신이 나름대로 교인들을 충분히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양무리를 맏은 자에게 주어지는 진지한 도전이 아닐수없다.

 

다섯째, 학생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사랑의 시작이자 궁극적인 표현이다. 우리의 사랑이 부족하기에 우리는 그들을 온전히 사랑하시고 또 그들에게 최선을 허락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 나아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할 때에 또한 우리는 학생들의 이름도 기억할수있게되고 학생들을 이해하게 되고 관심을 가지게 되고 학생들을 사랑하게 될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무엘은 맏겨진 양무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않게 해달라고 간구하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