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길] 어떤 포기

1997
년의 일이다. 그때 나는 오하이오대학의 교수로 있었다. 쿼터 (Quarter)제도 였기에 모든것이 빨리 돌아가 사실상 강의하기에
몹시 바빴다. 한 쿼터에 4개의 과목을 가르쳤다. 어떤 강의는 50분 강의 였기에 일주일에 세번 들어가야 하는데 그같은 강의가
두개, 또 일주일에 두번 들어가는 강의 두개. 이같은 스케쥴에 의하면 출근하고 부터는 점심식사 및 한.두개의 회의 참석을
제외하고는 강의실에서 살아야 하는 몹시 바쁜 하루 하루의 일정이었다.



조교수 였기에 테뉴어 (Tenure)도 생각해야 했고, 또 열심히 공부해서 내 분야에서 제일 좋다는 대학으로 가고 싶은 욕망도
있었다. 나는 그 당시도 또 지금도 연구활동과 글 쓰는것에 대해서는 각별한 생각과 야심이 있었다. 그같이 바쁨에도 불구하고 매년
3편의 논문을 학술지에 게제 하였으니 얼마나 열심히 공부 했는지 상상하기가 어렵지 않을것이다. 참으로 바빴고, 힘들었다.


그때 나는 귀한 목사님을 만났다. 지금도 나의 멘토이신 이근상 목사님이다. 그분은 매주 두번씩 콜럼버스로 부터 내려와 금요일은
성경공부 가르치시고, 주일에는 콜럼버스예배 마치고 얼른 내려 오셔서 설교하시고 떠나시곤 했다 (지금도 그렇게 하고 계신다).
성경공부가 얼마나 달콤했는지. 그때는 학업도 중요했지만 제자훈련 제대로 받고 싶은 생각이 컷다. 그래서인지 금요일이 기다려
졌고, 또 매번 성경공부를 통해 받는 은혜는 너무 컷다. 주의 말씀이 어찌 그렇게 달콤했던지… 어떤 질문이든 너무 명료하게
가르쳐 주신 이근상 목사님의 성경공부를 몹시 좋아 했다. 


뿐만 아니라 주일 예배 마치고 그냥 가지 않으시고 또 성경공부를 하시자고 하며 조금이라도 더 훈련시키시는 목사님의 인도함을
철저히 따랐다. 나는 그를 그래서 유격훈련장의 조교 같이 무자비하고 지독한 목사님이라고 속으로 부르곤했다. 몸이 힘들어도 죽어라
제자훈련 시키고 콜럼버스로 올라가시는 분이니까…


그렇게 1년반을 바쁘게 보내고 있을때 Indiana University로 부터 교수 포지션이 하나 났으니 혹 지원해 보지
않겠냐는 편지가 날아왔다. 내 이력서를 들여다 보아도 별로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내 분야의 교수들의 이력을 보아도
내것이 우월하게 느껴질 정도로 좋은 학술지에 제법 글을 많이 낸 편이었다. 그래서 한번 응모해 볼까 생각했다. 한 쿼터에
4과목하여 1년에 12과목을 가르치는 대학에서 떠나 1년에 4과목 (매학기 2과목) 가르쳐도 되는 대학으로 가는것 정말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인디애나 대학은 나의 전공분야에서는 제일 좋은 대학으로 여겨 졌기에 객관적으로 학자로서의 나의 성공을
나타내는 절호의 기회이지 않았나 생각해보았다. 뿐만 아니라 그곳 교수가 되는것을 몽상으로 그리며 잠시 환호에 젖기도 했다.
그리고 내심 하나님께 졸라내어 그곳으로 꼭 가야지 마음먹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마음먹고 기도하면 할 수록 내 마음에는 불편한 마음이 생겼다. 당시 새벽기도를 인도하며 은혜받고 있었는데 나의
기도는 허공을 치고 있었다. 인디애나 대학으로 보내달라고 떼를 썼는데 하나님의 응답은 그냥 그 자리에 남아 있어야 될것이라는
마음의 부담을 주시는것 같았다. 특히 당시 구약과 신약을 개관하는 성경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이제 1년만에 구약이 끝난
상태였고, 신약의 초반부분에 있었다. 기도할 수록 그 성경공부가 아직 마쳐지지 않았음을 하나님께서는 내게 상기시켜 주시는것
같았다. “너 그것을 끝까지 마칠 수 없겠니?”라고 물으시는것 같기도 했다. 너무 슬펐다. 그냥 응모 하라. 그 뒤는 내가
책임지겠다. 너는 그곳으로 반드시 가리라… 뭐 이런 메세지를 주면 눈물 콧물 흘리며 감사해 할텐데… 그리고 그렇게
보내시면 하나님 위해 열심히 봉사하겠다고 서원도 하며 용기를 낼 텐데… 하나님은 내가 오하이오 대학에 남으시기를 원하시는것
같았다.


그같은 불편한 마음이 지속되자 내 마음에는 포기의 마음이 생겼다. 내가 갈길이 아니구나. 나는 이곳 오하이오 대학을 잘 지키고 있어야 되나 보다. 뭐 이렇게 생각하며 포기했다.  


응모 마감이 훨씬 지나 몇달후 매해 열리는 내분야의 학회를 참석했다. 참석해서 바로 들은 이야기가 옛날 오레건대학에서 박사 할때
그곳에서 석사를 했고, 또 조지야대학에서 포닥할때 박사과정학생이었던 어떤 여자아이가 내가 가고싶었던 대학의 교수로 새로
부임했다는 것이다. 그아이는 연구 실적으로 보면 나와 비교도 안될 만치 뒤지는 아이였다. 또 나는 오하이오대학에서 학생들의 강의
평가가 가장 줗은 교수중 하나였기에 강의능력 면에서도 그 아이이에게 뒤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떠올랐다. 또 우리분야에서 좋은
저널의 Associate Editor뿐 아니라 다른 서어비스도 제법 하여 여러가기 면에서 뒤질것이 없던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날
호텔방에 들어가 혼자 눈물흘리며 궁상맞게 밤을 새우며 슬퍼했다. 많이 울었던것 같았다. 


이제 인디애나 대학의 교수로 가려면 기존의 교수들이 은퇴하기전에는 자리가 없을것이고, 그들이 은퇴를 하려면 최소한 10년이
걸리지 않을까 생각했다. 당시 뛰어난 다른 대학의 우리 프로그램에서도 교수채용 공고가 없었던 터이라 나는 참으로 암담했다.
차라리 하나님께 묻지 말고 그냥 응모할것을… 하나님께서 찬성하지 않으셔도 그곳 가서도 신앙생활 잘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실까??? 뭐 이런 저런 생각을하며 식사도 제끼고 슬픔으로 그 학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 왔다. 


어짜피 오하이오에 있는 몸이니 그냥 성경공부 열심히 하며, 그곳의 학생들 죽어라 섬기고, 부지런히 전도하며 보내자 마음을 고쳐
먹었다. 그러니 시간이 빨리 갔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분야에서 주는 최고의 연구상도 그 다음해에 받았다. 내가 학술대회를 가지
않았기에 학회의 학회장이 직접 오하이오대학으로 방문하여 상을 전해 주었다. 부족한 사람에게 그같은 상을 주는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권적인 일하심이 있지 않았나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나의 포기는 적었는데 너무나도 큰 상을 받아서
어쩔줄 몰랐었다. 


이보다 더 큰 기쁨은 이제 구약과 신약을 살펴보는 그 성경공부가 마쳐진 것이다. 성경의 전체 그림이 머리속에 구체적으로
그려지고, 나의 믿음도 더 확고해 지며, 주님의 음성에 더 민감한 삶을 살게 된것이 내게는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바로 그때 인디애나 대학으로 부터 편지가 왔다. 그전 해에 오기로 했던 교수가 오지 않아서 다시 교수를 뽑아야 하는데 혹
응모하지 않겠냐는 내용이었다. 이번에도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여쭈었다. 하나님, 이곳도 좋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면 그리고
가겠습니다. 그러나 원치 아니 하시면 이곳에서 학생들 섬기며 감사히 지내겠습니다… 뭐 이렇게 기도했던것 같다. 하나님의
응답은 분명치 않았다. 그래서 계속 기도해 보았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내 마음에 불편함 보다는 하나님의 숨은 사역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궁금해 하며 응모해 보는것이 어떨까 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물론 응모 하였다. 그리고 인터뷰에 초대 받았다. 인터뷰하면서 내가 꼭 오기를 바라는 사람들 같이 모두 내가 이미 그 대학의
교수인양 대접해 주었다. 그리고 청빙위원회의 위원장이었던 데이브는 “월급 흥정할때 담대하게 가격을 불러도 되니까 흥정에
shy하지 말라!”고 조언도 해주었다. 보통 반응이 이렇게 되면 인터뷰가 잘되었다는 사인이 된다. 그날 저녁 내가 지냈던
Indiana Memorial Union안의 호텔에서 밤을 꼬박 세웠다. 너무 신이나서였다. 


집에 돌아온 이후 약 1주가 지났던것 같았다. 학교에서 Offer가 왔다. 내가 제시한 연봉에 아주 가깝게 응해 주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학교에서는 1주일 이내로 답을 달라고 하는데 나는 아직 하나님께서 가라는 음성을 듣지 못해 그것을 듣고
계약서에 사인하고 싶었다. 문제는 1주가 다 되는 데도 하나님의 침묵 깨어지지가 않았다. 그냥 사인해서 보내버려하지! 하며 마음
먹었다가도 곧 그럴 수 없다고 여겨서 금식하며 마지막날의 기도를 드렸다. 그날 오후 아내와 아이들이 집을 비운뒤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여쭈었다. 하나님의 침묵이 깨어졌다. 여호수아 1장를 열어서 읽어 보라고 하시는것 같았다. 나는 쭉 읽어 가며
하나님께서 떠나라고 허락하시는 음성을 들었다. 


이후 나는 그곳에서 9년을 교수생활 했다. 그곳에서 2004년도에 테뉴어를 받았다. 학과의 50년 역사에 모든 교수가 강의
(teaching)으로 테뉴어를 받았을뿐 연구로 받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데, 학과 역사상 처음으로 연구업적으로 테뉴어를
받았다. 모든 커미티로 부터 만장일치의 찬성을 받기가 쉽지 않은데 나는 만장일치로 테뉴어를 얻었다.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
였다. 포기로 얻어진 직장이었고, 포기로 얻어진 은혜였다. 


반드시 좋은 학교로 가는것만이 하나님의 축복은 아니라고 지금은 생각한다.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께 순종하는것 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그 마음을 받으시고, 그 마음 때문에 기뻐 하신다. 나는 지금 칼빈대학에 와 있다. 연봉은 몇만불이 더 적다. 강의는
전 인대애나 대학보다 훨씬 더 많이 한다. 그러나 인디애나대학을 포기하라고 했을때 그 순중 자체가 내게는 축복이었다. 주안에서의
포기는 하나님의 전적인 인도하심과 임재하심을 동반하는 귀한 축복이 따른다. 할렐루야! 

[최주희] 아들 이야기

나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다. 침례신학대학에서 선교학을 가르치는 남편(이현모 교수)과의
사이에 있는 유일한 자녀이다. 남편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나라도 가난했고 우리들의 가정도 불우했으며 더욱이 신앙도 없는
가정이었기에 ‘행복한 가정’에 대한 느낌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우리 아들은 달랐다. 신앙적으로나 세상적으로 많은 것이 갖추어진
‘행복한 가정’에서 마음껏 즐기고 누리며 큰 아쉬움 없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이었다. 우리는 이 아들에게 굳이 험난한 환경을
일부러 제공해주지는 않았으나 양육하면서 한 가지 강조한 것이 있다. 그것은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섬기는 삶’이었다. 즉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거나 무시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사는 삶이었다. 지금 기억하면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고 부지런히 삶 가운데 사람들을 사랑하는 연습을 하였던 것 같다. 아들이 초등학교 2학년 때 학교
문집에 실렸던 내용이다. 제목은 ‘고아원’이다.

오후에 어머니와 함께 고아원에 갔다. 그 곳의
아이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어렵게 지내고 음식도 나빴다. 그래서 우리가 저녁 식사에 불고기를 만들어 주었더니 모두들 맛있게
먹었다. ‘고아원 아이들은 너무 불쌍하다. 나는 먹고 싶은 것은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데…, 여기서는 반찬이 두세 개 밖에
없다니 얼마나 먹고 싶은 것이 많을까? 그들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보고 싶지 않을까?’ 나는 이제야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깊이
깨달았다. 이제부터는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음식도 주시는 대로 골고루 맛있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어야겠다. 다음에도 맛있는
음식을 가지고 어머니와 이곳에 오고 싶다.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 여름 방학 때, 출석하고 있는 교회(대전 대흥침례교회)에서
장애우들을 모시고 바다로 캠프를 갔다. 그 당시 근육병을 앓고 있는 어느 형제가 평생 바다에 한 번도 가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장애인 위원회 위원장과 사역자들이 그를 위해 바다 구경을 계획하였던 것이다. 그 때 3박4일을 강원도 옥계에서 보냈었고 아들은
섬기는 사람으로 동행하였다. 여름 방학을 마칠 무렵, 아들이 방학 숙제로 글을 썼다고 가져왔다. 제목은 ‘사람의
아름다움’이었다. 내용을 보니 장애우들을 모시고 캠프 갔던 내용이었다.

이번 여름방학 때 어머니와
함께 장애인 선교 캠프를 갔다. 그저 봉사하자는 마음으로 갔었는데 중요한 것 한 가지를 깨달았다. 그것은 누구나 한 가지 이상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첫째 날 버스를 타고 갈 때에 내 앞자리에 심**이라는 뇌성마비에 걸린 형을 보게 되었다. 그
형의 눈은 누구도 이길 자 없을 정도로 맑고 아름다웠다…(중략) 이튿날 아침에 새벽예배를 드렸다. 나는 아침 식사 때에
장애인 분들이 식사를 하시도록 음식을 날라다 드렸다. 모두 음식을 받으시는 얼굴에 가벼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중략) 그
중에서도 캠프 시작부터 끝까지 웃음과 미소를 띤 송** 형이 너무나도 귀하고 아름다웠다…(중략) 마지막 날까지 생활하며 나는
많은 이익을 얻었다. 사람이 정말로 귀하고 아름다운 것을 하나씩 이상은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지금은 이 아들이 군대에 갔다. 훈련병 4주째이다. 그가 군대에서 보내 온 몇 통의 편지를 읽으면서 하나님께 참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얼 차례 받고 혼날 때에도 살 빠지고 몸 건강해지겠단 생각으로 기분 좋게 받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 의지하면서 긍정적으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두번째 편지)

살이 쭉쭉 빠지고 얼굴은 시꺼메지고 완전군인
되어가고 있엉ㅋㅋ 근데 여기서 사람들이랑 친해지고 또 말씀 암송 카드 보면서 하루하루 감사히 많은 것을 배우고 있어요. 항상
남들보다 조금 잘났다고 생각하던 나의 오만함과 자만함이 여기선 아빠 말대로 nobody가 되어 더욱 더 낮아지고 깨어지는 내
모습에 감사하고 있어요. 또 하나님이 헌신하는 마음을 계속 주셔서 빨래나 이불정리나 뭐 해야 될 것을 좀 더 빨리 끝내고 미비
된 사람들 도와주고 있어요. 대신 빨래도 해주고 구두도 닦아주고 청소도 해 주고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 나를 위하기보다 남을 위해
사용할 수 있어서 정말 너무 감사하고 그럴 때 마다 마음도 기쁘고 평안해져. 그래서 너무 기쁘고 좋아(3번째 편지)

불침번 말고 경계근무라고 야간에 실제 야외에 있는
초소에 가서 총 들고 망보면서 한 시간 씩 서는 것이 있는데 한 형이 감기몸살로 힘들어 하기에 내가 대신 섰어용. 그런 생각나게
해 주셔서 너무 감사하고 기분도 좋았어요. 날 이해 못하는 애들도 있지만 사람들을 위해 섬기고 헌신할 수 있는 시간 허락해
주셔서 너무 감사해. 그동안 너무 나 중심적이고 나만을 위해 살았던 것 같은데 군대란 시간을 통해 그런 모습을 깰 수 있어서
너무 기뻐요.(4번째 편지) 

어느 누구도 자식의 일에 대해 큰 소리 칠 수 없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자식에 대해서만큼은 늘 조심스럽고
두렵다. 하지만 군대 간 아들의 편지를 읽으면서 ‘So far so good!(지금까지는 좋아!)’이란 마음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면 좋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시고 기대하시는 ‘사랑의 삶’은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고 그리 멀리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있는 곳에서 고개를 한번 들고 주변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곁에 있게 하신 귀한
사람들에게 겸손하게 마음을 여는 것이다. 신기한 것은 그런 마음은 반드시 선한 행동으로 저절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신선묵] 영적 지도자와 하나님과의 친밀함

나는 영적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강의를 하면서 가장 먼저 질문을 하곤 한다. 여러분이 가정에서 배우자와 맺고 있는 관계의 친밀함에 1점에서 10점 사이에 점수를 준다면 몇 점을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두번째는 당신이 신앙인으로써 주님과 당신의 친밀함에 점수를 준다면 몇 점을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왜 그렇게 점수를 줍니까?  하나님과의 친밀함이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영적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과의 친밀함 즉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그와 동행하는 것은 모든 삶과 사역을 가능케 하는 능력의 근원이자 그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이기 때문이다.

 

첫째, 주님과의 친밀함은 우리 삶과 사역의 출발점이자 능력의 근원이다. 지도력이란 영향력인데 일반 지도력과 영적 지도력의 근본적인 차이는 세상 지도력과는 달리 영적 지도력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기반을 지도력이라는 점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하여 이루어지고 하나님께 모든 것이 귀속되는 것이 영적 지도력이다. 그래서 클린톤 교수는 영적 지도자로써 집중된 삶을 살아가는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하나님 자신께 집중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님과 친밀함에 깊이 나갈 때에 영적 지도력을 발휘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은 예수님의 속에서도 수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의 가운데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시간을 갖는 것을 수가 있다.

  

둘째, 주님과의 친밀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가능케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듣고 싶어한다. 그런데 음성을 듣기 위해서 선행되어져야 하는 것이 있는데 관계이다. 우리가 가운데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사람이 말하는 것의 의미를 이해할 있는 것은 서로 친밀한 관계 속에 있을 때이다. 관계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신뢰할 있고 음성을 들을 뿐만 아니라 음성의 내용을 따르기도 하고 때로는 나의 삶을 거는 모험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관계가 두터울 때에 우리는 굳이 입으로 말로하지 않다라도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어서 말이 필요없이 의사소통이 가능할 때도 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는 때로 하나님께 말씀을 하시라고 절박하게 간구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견고하게 있지 않을 때에 하나님은 말씀하실 수도 우리는 들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다는 것은 단지 순간의 일이 아니다. 끊임없이 사소한 일부터 꾸준히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작은 위기와 오해를 거쳐가면서 점차적으로 깊어져 가는 관계이며 그런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더욱 확실하게 들을 있는 것이다. 달라스 월라드는 그의 하나님의 음성에서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말씀을 우리 가운데서의 그분의 임재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 분의 생명의 한 부분으로 보지 않는 한,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은 이해 할 만하고 믿을 만한 인생의 현실이 될 수 없다. 하나님과의 교제만이 하나님과 의사 소통을 할 수 있는 올바른 장을 제공한다.” 

 

세째, 주님과 맺고 있는 친밀감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뿐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이해하게 되는 통로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일을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감 속에서 그의 마음을 알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사명이란 어디서 뚝 떨어지는 명령이 아니라 친밀한 하나님의 마음을 함께 느끼고 그의 목적과 관심사를 이해하게 될때 생기는 자연스러운 반응인 것이다. 하나님과 친밀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함께 느끼지 않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사명을 받는다는 것은 모순이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는 비전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과의 친밀함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비젼을 이해하지 않고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비젼을 받을 수가 없다. 나 홀로 나의 비젼을 세울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진정한 하나님의 비전은 하나님과의 친밀함 속에서만 주워지는 것이다.      

 

네째, 주님과의 친밀함은 그 자체가 다른 것을 위한 수단인 것이 아니라 우리 삶과 사역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별세 신학으로 알려진 이중표 목사님은 그의 골방 기도에 관한 다음의 글에서 이 점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주님의 골방의 깊은 기도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원하기 때문에 골방을 찾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부흥의 위해, 능력받기 위해 기도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다만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도하는 시간이 필요하고 주님과의 대화가 행복하기에 골방의 기도하는 시간이 필요하고 주님과의 대화가 행복하기에 골방의 기도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헨리 블랙커비는 그의 책 영적 리더십에서 하나님은 리더들에게 당신 대신 큰 꿈을 꾸라거나 당면한 문제를 알아서 해결하라고 하시지 않는다. 다만 당신과 친밀하게 동행할 것을 요구하신다라고 이 점을 강조하였다. 요한복음에 보면 주님께서 자기를 부인하였던 베드로를 찾아와서 회복시키시는 모습이 나온다. 주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주님이 십자가를 지으실 때에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기에 그가 스스로 많이 괴로워하였을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씩이나 (베드로가 부인했던 숫자 만큼) 물으시고 베드로의 긍정적인 대답에 내 양을 치고 먹이라고 사명을 주셨다. 이 성경 구절에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시는데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단 한 가지를 물으시고 사명을 주신다는 것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가?” 우리는 우리 삶 속에서 사명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 사명의 짐으로 인하여 힘들어하고 괴로워 할 때가 있다.  어떻게 이 사명을 감당할 것인가 불안할 때도 있다. 그러나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주님을 정말로 사랑하는 가이다. 내가 주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가 궁극적인 질문이다. 주님과의 친밀함은 사역을 위한 근원이자 수단인 것을 넘어서 그것 자체가 우리의 모든 삶과 사역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풀러신학교의 로버트 클린톤 박사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둘만의 사적이고 개인적인 관계를 말한다. 이 관계 속에서 서로의 애정을 느끼고 관심을 나누고 하나님과의 경험의 축척으로 하나님과 점증하는 친밀한 느낌을 갖게 된다. 이런 관계는 다음과 같은 친밀하게 느껴지는 순간들을 통하여 생겨난다: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는 순간, 진리가 계시되는 순간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보여주시거나 나누실 때, 하나님으로부터의 확인의 시간,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데스티니가 실현되는 순간, 믿음의 순간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에, 위기 가운데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때, 헌신의 시간들, 회개, 갱신 등의 모습들로 나타난다.” 구약에서는 다윗이 그의 시편들을 통하여 볼 때에 하나님과 깊은 친밀감을 누리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으며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물론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누려야할 친밀함의 모습을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또 그 관계 속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신다.

 

친밀함이란 관계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그 끝이라는 것이 없다. 우리가 삶 가운데에서 주님과 동행함으로 더욱 깊은 친밀감으로 나아가기를 소망하고 나아갈 뿐이다. 이런 관점 속에 있을 때에 우리의 삶의 모든 경험들은 우리를 하나님께 더욱 다가서게 만든다.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 갈수록 더욱 깊은 친밀함을 사모하는 것이 영적 친밀함의 모습이다. 마지막으로 짐 파이커의 말이 우리를 도전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여정에서 많은 장애가 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대표적인 장애는 우리 자신의 성장에 안주하고 더 이상 열심히 주님을 구하지 않는 것이다.” 당신은 주님과의 맺고있는 관계의 친밀함에 몇 점을 주겠는가? (lead2serve.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