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준] “어른들 말씀 틀린 것 하나 없어”

한경준 
 “그땐 그랬지”

      군대에서  일병 계급장을 달고 있었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밤이 되어 자려고 누워  있는데 방의 한쪽 구석에서 고참  두 명이 밤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대학교 학과 동기로 같이 입대하여 같은 부대에 배치까지 받아서 서로가 무척 친했던 그 두 고참은 그날 따라 꽤 진지한 이야기를 낮은 목소리로 나누고 있었습니다. 전후 사정을 몰라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잘 듣지 못했지만, 유독 한 마디가 귀에 들어왔고 아직까지 그 고참의 말투 그대로 생생하게 기억에 납니다. 그 말은 “어른들 말씀 틀린 것 하나 없어” 였습니다.

      그  말이 왜 지금까지 기억에서 떠나지  않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당시에 같은  세대에 비해서도 상당히 ‘신세대’적인 문화 코드를 가지셨던 그 고참들 입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온 것이 신기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저와 한 살 밖에 차이 안나는 그 분들이었지만, 개인적으로 많은 일들을 겪으며 살아오셨던 그 분들이었기 때문에 그 말이 당시의 저에게는 ‘철이 들은’ 말처럼 느껴져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0대  중반에 들었던 그 말이 왜 30대 후반을  향해 가는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해를 거듭해 갈수록,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게 되고, 그 아이가 이제 학교를  들어갈 나이가 되어가기 시작하는 삶의  ‘전환기’들을 겪으면서 그 말의 무게는 점점 더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때로는 의지적으로 부정하려고 하였던 그 말에, 이제는 조금씩 동감을 하게 되고, 더 나아가 가끔씩 동의하게도 되는 저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이를  낳기 전, 결혼을 하기 전에는 (한국 사회의) ‘어른들’의 모습들 중 이해가 안 되는 것들이 참 많았습니다. 자식 교육을 위해 학군에 목숨을 거는 모습, 자식의 결혼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 드라마에서나 볼 듯한 – 백태만상들, 가정이라는 핵심적 가치의 물질적 표현이 되어야 할 ‘집’을 투자와 투기의 대상으로 전락시킨 모습들, 대학 졸업과 함께 대학에서 외쳤던 자유와 평등과 정의도 그대로 졸업시키는 모습들… 사람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꺼내면 항상 선배들로부터 돌아오는 교과서 대답은 “너도 결혼해봐 (혹은 애 낳아봐)” 였습니다. 선배도 옜날에는 다르게 생각하지 않았냐고 물어보면 자동판매기처럼 찍혀내오던 대답은 “그땐 그랬지”라는, 어느 가요 제목과 같은 말이었습니다. 어떻게 과거와 현재가 그렇게 단절될 수 있는지 궁금했었습니다. 아마 저만 가졌던 의문은 아니였을 것입니다.

      물론  결혼 이후에는, 또 아이를 가진 이후의  삶에는 제가 모르는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은 했지만, 특히 이러한 이슈들에 있어서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어떠한 유의미한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에 실망도 하고 분노도 하며 때로는 (하지 말았어야 할) ‘판단’도 하였습니다. 
      
이상한  나라 속의 나

      시간이  흘러 저도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 아이가 자라서 내년이면 미국에서 kinder에 들어갈 나이가 되었습니다. 군대에서  고참들의 말을 어깨넘어 들은지 15년이 지나서 그 말의 의미와 무게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먼저 결혼하고 애를 낳았던 선배들의 이야기를 기억해 봅니다. 나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으니 전에는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 ‘어른들’의 모습들이 저에게도 보이게 되었을까요? 옛날에 그렇게도 이상하게만 보였던 ‘결혼 이후의 삶’으로 들어섰는데, 나에게는 그 ‘이상한 나라’가 여전히 이상하게 보일까요, 아니면 나 자신도 이상해져서 그 ‘이상한 나라’가 더 이상 이상하지 않게 보이게 되었을까요?

      지금  저의 모습이 어떠한지, 어느만큼 그  ‘어른들’ 중 한 명처럼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20대 때 제가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 비판했던 그 부분들에 대해 이제는 점점 “그렇다면 나와 우리 가정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결정을 해야할 일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제가 하나님 앞에서 갖고 있는 이상과 이 땅에서의 현실 사이에서의 갈등을 점점 더 많이 겪게 된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과거에는 비판했던 그 모습들에 동의까지는 못하겠지만, 왜 그런 모습을 갖고 사는지 ‘이해는 된다’며 한 발 물러서게 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제가 이제 철이 들어 세상과 현실을 알아가게 된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포기하고 세속화 및 (개인주의적) 가족주의화 되어가고 있는 것인지 도저히 알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결혼과  육아라는 인생의 새로운 단계들을 새롭게  밟으면서 신앙과 현실 사이에 더  많은 고민과 혼란, 그리고 가치관의 충돌이 생기게 됩니다. 머리로는 한국적 가족주의를 반대하면서도 몸 속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지라 나의 가족을 챙기고 보호하는 데에는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저 자신을 발견합니다. 한국 사회의 주요한 고질적 문제들은 대부분 과도하고 빗나간 자식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자기 자식 챙기는 데에는 웬만한 고슴도치 부모와 같은 저의 모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제자도를 이야기하시면서 가족 이야기를 꺼내셨구나 생각이 들다가도, 예수님도 돌아가시기 직전에 그 앞에 있었던 어머니를 제자에게 맡기신 것은 피의 진함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게도 됩니다.

      이렇게  고민과 혼란은 쌓여져 가는데, 이러한  고민과 질문들을 나눌 사람들은 더  적어져 갑니다. 아마 개인적으로는 결혼과 함께 유학생활을 하게되어 많은 친구와 선후배들로부터 멀어진 것도 이유이겠지만, 그러한 고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기도 하고, 설사 있더라도 그러한 이야기들을 함께 나눌 기회가 부족한 것이 더 큰 이유인 것 같습니다. 또한 공부를 하고 있든지 직장을 다니고 있든지, 그래도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경우에는 좀 나을 수 있지만, 많은 경우에는 이러한 고민을 나누기는 커녕 예배, 말씀, 기도, 독서 등의 기본적인 영성의 삶을 살기에도 벅차도록 바쁜 것이 많은 30-40대 기혼자들의 현실입니다.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일요일에 교회가는 것이 사치에 가까운 분위기입니다. 얼마전 인터넷에 올라온 초등학생의 시처럼 “냉장고는 자기에게 먹을 것을 주고 강아지는 자기와 놀아줘서 좋은데 아빠라는 존재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라는 말을 듣는 것이 오늘날 한국 아빠들의 현주소입니다.  

 KOSTA – 기혼자들의 새로운 기회?

      KOSTA 연차 수양회 참여자 중에 기혼자와 비청년층(‘청년’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모호하지만)의 비율이 높아짐에 따라 운동으로서의 KOSTA의 정체성과 방향에 있어서나 집회로서의 KOSTA 연차 수양회의 운영과 구성에 있어 많은 도전과 질문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KOSTA의 연차 수양회에 이들의 참여 비중이 높아졌는데, 그렇기 때문에 KOSTA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점점 깊어지고 진지해지는 것 같습니다. 과연 KOSTA가 이러한 새로운 부류의 사람들을 KOSTA의 운동의 흐름에 있어서나 수양회의 운영에 있어 적극적으로 품어야 하는가, 그렇게 하는 것이 지금 KOSTA가 품고 있는 KOSTA의 핵심 가치에 부합하는가 조심스러우면서도 결단력 있게 고민하고 실행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이야기는 제가 이 자리에서 할 입장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단지  만약 KOSTA가 이 계층을 적극적으로 품고  나아간다면, KOSTA가 앞에서 짧고 무작위하게  언급했던 것과 같은 고민들이 함께  나누어지고, 이러한 이슈들에 대해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의 모습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도록  도전이 주어지는 자리가 되면 좋겠다라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현재의 KOSTA 수양회에도 기혼자들을 위한 프로그램들이  있습니다. 세미나 중에 기혼자들을 위한  세미나들도 있고, 또 몇 년 전부터 기혼자 강사와의 만남을 통해 조금 더 자유롭게 고민을 나눌 수 있는 기회도 제공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주제들은 대부분 부부관계와 자녀양육, 그리고 소위 ‘F2 이슈’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정체성 문제에 제한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절대 아니고, 또한 저와 저희 가정을 포함해서 KOSTA에 오시는 가정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이 이슈들이 갖는 무게감이 얼마나 큰가 공감하게 됩니다. 하지만 내가 기혼자이기 때문에 ‘가정 안에 임하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만 고민할 것이 아니라, 기혼자이기 때문에 잊혀져 가고 있을 수 있는 ‘이 땅 가운데에 임하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기혼자의 특별한 상황과 입장에서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실험하고 섬길 수 있는 도전과 용기를 얻을 수 있는 KOSTA가 되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져 봅니다.

      KOSTA는  ‘흩어진 나그네’로서 외국 땅에서 다른 민족을 말씀과 사랑으로 섬기며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한(Korean)민족의 삶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소수 민족’이라는 특성상 경제·사회적 불안정성이 강하고, 따라서 자기 보호의식이 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웃을 돌아보기보다는 나와 내 가정의 안정에 더 집착하게 되기 쉬운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는 미혼자, 기혼자 관계없이 나타날 수 있지만, 이러한 괴리는 ‘가정’이라는 변수에 의해 더 증폭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KOSTA가  기혼자들을 적극적으로 품는다면, 수많은  이 땅의 결혼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삶에서 위와 같은 괴리가 좁혀져가도록  때로는 힘과 용기를, 떄로는 자극과  도전을 던져주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를 위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잘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 속의 답답함과 삶에서의 괴리를 느끼는 분들이 있다면, 그 답답함과 실망, 혹은 무력감을 함께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격려와 위로를 심어주는 좋은 시작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최주희] 자녀는 하나님의 것

자녀는 하나님의 것
웬만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자녀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정도는 머리로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 삶 가운데 “하나님, 이 아이는 당신의 것입니다!”라고 인정하는 경우는 몇몇 상황일 뿐이다. 자녀가 심각한 병에 걸려 많이 아파할 때 “이 아이는 당신의 것이오니 고쳐 당신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한다. 수능을 앞두고 새벽기도하며 “이 아이는 당신의 것이오니 머리가 되게 할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게 하옵시고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당신의 귀한 종 되게 하옵소서.” 외친다.
그런데 우리들의 자녀가 하나님의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때에만 부르짖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자녀가 나의 소유가 아니며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귀한 손님이라는 것을 인정하며 동시에 그분이 아이를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두기를 원하시든 그대로 내어드림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부모 된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권을 분명히 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 맡겨주신 자녀를 향한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법도대로 양육하겠다는 결단과 순종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그렇게 결단한다고 해도 저절로 순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자녀의 소유권에 대한 인식과 자녀를 향한 욕심으로 인한 끊임없는 갈등을 경험하면서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 필요하다(고후10장5절).
나의 경우 이런 결단을 연습하는데 도움을 준 몇 가지 사건이 있었다. 아들 진호를 출산할 때의 일이다. 분만실에서 사투를 벌이는 듯한 통증과 의사선생님의 수고에도 아이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의사선생님과 간호사님들도 숨 가쁘게 움직이다 결국 과장 선생님을 부르게 되었다. 다행이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아이는 출산하였으나 도무지 울지 않는 것이다. 산소 호흡기를 낀 채 여러 생각이 오갔다. 한참 만에 아이가 겨우 숨을 쉬기는 했다. 그러나 동생이 중증 뇌성마비였고 특수교육을 전공했고 특수학교 교사를 하고 있던 나는 이렇게 오랜 시간 아이의 뇌에 산소공급이 되지 않았을 때 어떤 결과가 생길지 가늠할 정도는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낙심이나 절망감이 아닌 이상한 소명감이 생기는 것이다. ‘주님,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저에게는 동생을 돌보며 겪었던 경험과 특수교육을 전공한 지식이 있습니다. 또 특수학교 교사로서의 경력도 있습니다. 열심히 키우겠습니다! 그리고 몸이 불편한 아이들과 그 부모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하겠습니다. 다만 또다시 아픔을 겪게 되는 불쌍한 저의 친정 부모님은 당신이 위로하셔야 합니다…’ 그 당시 내 판단과는 달리 아이는 다행히도 건강하게 자랐다.
이런 적도 있었다. 아이가 5살 쯤 되었을 때다. 그 당시 우리는 Southwestern 침례신학교에 유학중이었는데 학교 기숙사에 아들 또래가 많이 있었다. 한번은 최 목사님 딸 효영이가 나에게 다가와 “사모님, 저는 고린도전서 13장을 암송할 수 있어요. 사랑은 오래참고…” 너무나 기특하고 부러웠다. 그날 밤 성경책을 들고 진호에게 말했다. “고린도 전서 13장은 사랑에 대한 너무너무 좋은 구절들이 있는데 우리 한번 읽어볼까?” “싫어싫어 너무 어려워, 그냥 그림 성경 읽을래~” 그런데 그 순간 그림이 하나 떠올랐다. 아들이 기술고등학교 제복을 입고 씩씩한 얼굴로 땀을 흘리며 기계를 만지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마 속으로 ‘이 녀석은 그리 똑똑한 것 같지도 않은데 책도 잘 안 읽고… 게다가 친구와 놀 때도 남자로서의 리더십도 없이 그저 친구들이 원하는 대로 따라하는 편이고 욕심도 없으니, 어디 대학이라도 가겠어?’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그림의 모습이 싫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경우, 공부 못하면 아무리 좋은 성격 착한 마음이어도 사람 취급 받지 못하고 눌려 지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 아들이 착하고 선한 마음으로 같은 기술고등학교 다니는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의 가치를 일깨워 주며 새로운 소망과 의욕을 불러일으키게 한다면 너무나 의미 있고 귀한 일이었다. 물론 좋은 대학 나와 남들 부러워하는 사회적 지위에 있으면서 영향 미치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한국과 같은 지독히 경쟁적이고 사람을 학벌로 판단하는 사회에서는 이 또한 너무나 중요한 사역이었다. 하나님께 기도했다. ‘주님, 그것 참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용하시기 원하신다면 마음껏 진호를 사용하시옵소서. 그러면 저는 진호를 어떻게 양육해야 하나요?’ 그때부터 성경적인 자녀교육에 대해 구체적으로 관심 가지게 되었고 그대로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결혼 문제, 직장 및 장래 문제, 자녀의 문제, 경제 및 건강 문제 등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여러 문제들을 들고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가 기도하며 그 응답을 체험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이라고 은연중에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기에 신앙 좋은 사람하면 먼저 떠오르는 특징이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다. 물론 기도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기도가 우리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신앙의 핵심은 바로 ‘하나님의 눈으로 모든 것들을 인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으로 자녀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가치로 돈을 평가하며, 하나님의 눈으로 장래와 직장을 생각하는 것이다.
가치관의 변화, 관점의 변화, 그리고 변화된 가치관과 관점이 실생활에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중에서 가장 어렵지만 기본적인 것이 바로 ‘자녀가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김현회] 성령님과 그리스도인의 삶 (3) 우리가 성령의 지배를 받고 살아갈 때 장차 올 세상을 미리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2010 KOSTA/USA 스크랜튼 집회에서 있었던, 김현회 목사님의 ‘성령님과 그리스도인의 삶” 세미나를 정리해보았습니다. 

성령님과 그리스도인의 삶 (3) – 김현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을 좇아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맛보는 것입니다. 즉  성령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지배를 받고 살아갈 때 우리 안에 모신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장차 올 세상을 미리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
첫째로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성령을 모신 사람들이 예수를 알지 모르는 사람들과 같은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시기, 질투, 짜증, 불평도 많은 나약한 모습을 보고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생긴것 같습니다. 이것은 성령세례가 아닌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데 있습니다. 
(엡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성령세례는 명령된 적이 없지만 성령 충만은 명령되고 있습니다. 성령충만은 우리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령충만을 받아야 하며 성령충만하지 않은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엔 죄인 것입니다. 
성령충만이란 무엇인가? “술 취하지 말고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고 하지요, 어떤 사람들은 술 취한 모습과 성령충만한 모습과 비슷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술 취하면 어떻습니까? 술 취한 모습은 ugly하지만, 성령충만은 질서있고, 조화롭고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단 한가지 공통점이 무엇이냐면, control입니다. 술취함은 술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지만, 성령충만은 성령이 나를 지배하시는 모습, 즉 성령님께서 내 마음을 장악하시고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충만입니다. 마치 물 위에 떠있는 배를 내가 노저어 가는 것이 아니라 돛에 바람이 불어 바람의 힘으로 배가 가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 배는 바람이 control하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우리 힘으로 가려고 합니다. 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내가 한 사람을 미워한다고 합시다. 그 사람을 향한 미움을 내가 아무리 억제하고 내 힘으로 사랑하려 하지만 그것은 힘든 일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내  안에 그 사람을 향한 사랑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미운 마음이 불쌍한 마음이 되고, 사랑하게 됩니다. 성령의 충만이 가장 중요합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지 못한다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지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령충만을 받을 수 있는가, 거기엔 어떤 공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에서 공식을 말하는 것은 조심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인격적인 분이기에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인격적인 관계이지 기계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약속의 말씀을 들이대면 하나님도 꼼짝 못하고 응답해야 되는 것처럼 기도를 가르치는데 그것 또한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하나님과 나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내가 성령님께 주도권을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내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 결과가 되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님이 내 마음을 지배하시는 것을 실제적인 것이고 구체적으로 알 수있습니다.  
첫 번째는, 정말로 이를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충만해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렇게 기도를 시작한다면 그 자체가 성령충만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모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모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 속이 세상으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코스타에 오면 좋은 점이 무엇이냐면, 이곳에 있는 동안 세상을 좀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다 보니,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집중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이 우리의 삶 속에 많지 않습니다.  평소 삶을 살 때는 우리의 관심이 너무 흩어집니다. 우리 속에 세상과 자아로 꽉 차 있으면서 성령충만하게 해달라고 기도는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가 진정으로 원한다면 얼마나 주시고 싶지 않으시겠습니까?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가르쳐주시길 ‘하나님이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으시겠는냐’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모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에게 사모함이 없을 때는 믿음으로 구해야 합니다. 이제 감정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위기감을 느끼게 됩니다. 강팍하고 메마른 마음과 육신으로 가득 찬 내 모습을 보며 믿음으로 구해야 하는데, 첫 번째 단계는 이것입니다.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이 내 안에 있다면 자백하고 토해내야 합니다. 
앞서 제가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을 주 앞에서 애통해 하며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 기도 자체가 강팍해서는 안됩니다. 사실, 그럴 때는 여러분이 금식도 해야 합니다. 강팍하고 broken되지 못한 내 마음, 낮아지지 못한 내 자신을 볼 때, 한끼나 하루를 금식하면 좋습니다. 
또 각자 자신이 은혜를 받는 방법을 알면 좋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분들에게는 그것이 찬양입니다. 아주 간절한 마음으로 반복하여 은혜의 찬양을 부르면, 마음이 무너진다고 합니다. 그 안에 움켜지고 있던 욕심, 고집, 강팍함을 다 내려놓고 빈 마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모하는 마음, 빈 마음을 품을때, 그리고 죄를 버리고 회개할 때, 주님 뜻대로 살겠다고 기도로 나아갈때 하나님이 성령의 충만함을 주십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나아갈 때 성령충만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기계적인가요,  인격적인가요? 인격적입니다. 왜냐면 ‘사모함 –회개함-믿음으로 구함’ 은 기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이 실제로 움직이는지, 변화되는지를 내가 알아야 합니다. 나의 강팍함이 깨어지지 않아서 하루종일 근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가슴을 치면서 내 강팍함에 관하여 가슴을 치며 애통할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모하고 주님을 간구하면 주님이 우리의 심령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두 번째로, 성령충만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롬 8:13-14)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이 말씀은 우리가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써 내 안에 육신의 생각을 죽이면 내 영이 살아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이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입니다. 성령의 인도에는 외적인 인도와 내적인 인도가 있습니다. 외적 인도는 전공, 학교, 결혼과 같은 문제의 선택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외적 인도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내적 인도입니다. 내적 인도를 받는 상태는  내 마음을 하나님이 성령으로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상태입니다. 내적 인도를 받고 있을 때 외적 인도가 가능합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의 뜻대로 살 마음이 없으면서 입술로만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다고 합니다. 이것은 대부분 자기 뜻이 이미 결정되어 있는데 그것을 하나님이 인정해주셨으면 좋겠다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예를 들어 누구를 미워하고 시기하는 것은 육적인 몸의 행실입니다. 내 속에 있는 sinful nature (육신이 아닌 우리 안에 있는 육신적인 성품과 생각)가 온갖 죄를 짓게 합니다. 내 속에 있는 죄성이 발동하여 죄를 짓도록 부추기는데 내가 여기서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은 우리가 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님은 내 안에서, 이 죄송이 잘못되었고 ‘시기하지 말고 미워하지 말라’고 계속 말씀해주십니다. 그러면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하는데, 이제까지 여러분이 그렇게 몸의 행실을 죽여보신 일이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성령님의 뜻과 성령 충만을 구하면서 죄를 회개하고 죄를 내 속에서 뿌리채 뽑아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 안되지요? 그런데 성령의 도우심을 좇아서 정말 간절히 기도하고 내 마음을 움직여 달라고 될 때까지 기도하십시오. 이것이 훈련입니다. 그렇게 한 두 시간 간절히 기도할 때 갑자기 미워하던 사람이 밉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미워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품는 순간 내 마음이 자유로워지고 마음에 기쁨이 가득하며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때 그 친구에게 전화를 합니다. 그런데 전화를 하는 동시 하나님께 순종했다는 생각과 그 친구가 전화를 받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듭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육신에 지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결심한다고 해서 바로 쉽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갈등과 싸움을 겪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내 뜻대로 살고 죄를 지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한 번 꾹 참고 다시 용기를 내어 승리을 보십시오. 진정으로 용서하고 내 자아를 깨뜨려 보십시오. 이것이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 충만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일이 너무 많지만, 그때마다 주님께 순종하면 우리의 신앙은 놀라울 정도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고난이 좋습니다. 고난을 당한 사람은 짧은 시간에 자아가 깨짐을 경험합니다. 내 강팍함과 고집이 한꺼번에 무너져서 “하나님 살려주세요, 내가 잘못했습니다”라는 기도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이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사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진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성경공부, 새벽기도, 봉사를 많이 한다고 해도 이것이 육신의 행사, 즉 바리새인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영적으로 교만해져서 남을 비교하고 판단하는 하는 사람이 됩니다. 목사로서 그런 사람들이 가장 무섭습니다. 이런 사람은 교회를 어지럽힙니다. 자기 혼자 잘 믿어서 다른 신자와 교인에게 상처를 주면 참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지 말고 자랑하지 말고 겸손해지시면 좋겠습니다. 자랑하려면 차라리 봉사 덜하는 것이 낫습니다. 
세 번째로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내면입니다. 내면이 바뀌고 성령님이 나를 다스리실 때 맺어지는 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열매와 장식의 차이를 아십니까? Christmas Tree위에 온갖 장식을 붙이지요? 이 나무와 장식은 ‘생명 관계’가 전혀 없습니다. 이건 그야말로 장식일 뿐입니다. 떼어놓아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신앙 생활에서 장식을 더덕 더덕 달고 있을때가 많습니다. 교회 직분이 장식이 될 때가 많습니다. 이민 교회를 볼 때 권사나 장로가 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남과 직분을 비교하고 불평하며 그렇게 장로, 권사가 되려고 합니다. 그리 중요한 가요? 그게 장식일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적어도 장로다’,  ‘회장이다…’하며 잘 믿는 척하는 것은 모두 장식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장식인지 열매인지 기가막히게 압니다. 열매는 내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내 안에서 솟아 나며, 내 속에서부터 나와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성령님이 나를 지배하고 다스리심으로써, 성령의 충만을 받음으로써 내 안에 예수님의 성품이 맺어지는것입니다. 즉 내가 점점 예수님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연적으로 부드러운 성격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성내지 않고 유한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성령의 열매가 아닙니다. 이것은 타고난 성품입니다. 어떤 사람의 타고난 성품이 괄괄하고 화도 잘 내는 급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란 타고난 성품이 아니고 성령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심으로써 내가 주님을 닮는 것입니다. 언제 알 수 있습니까? 성격이 유한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 사람이 화낼 때 보면 절대 유하지 않습니다. 단지 남보다 화를 덜 낼 뿐입니다. 다시 말해 그 사람의 자아가 건드려져 화를 낼 때 더 무섭습니다. 성격이 유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화도 잘내고 성격도 급하지만, 옛날과 비해서 정말 잘 참고 온유해졌다고 주변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성령이 그 안에서 성령이 다스리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믿음으로 살려고 할 때 그 안에 맺혀지는 예수님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맺히는데 오랜시간이 걸립니다. 기도원 같은 곳에 다녀와 은혜받았다고 하루아침에 변화되는 것 아닙니다. 그것은 일주일도 가지 않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영적싸움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내 속에 있는 육신을 쳐서 멸할 수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기꺼이 희생을 할 수 있어야 하며 사랑을 실천하고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주님이 나의 내면을 바꿔주시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너를 보면 하나님이 살아 계신게 맞아’, ‘예수 믿고 나서 정말 많이 바뀌었어’라고 주변에서 증거가 나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은사에 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은사에 관해서는 성경에서 네 곳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고린도전서 12장, 에베소서 4장, 베드러전서 4장입니다. 이 본문들에 언급된 은사는 총 20여 가지 정도 됩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이 20여 가지가 은사의 전부가 아니라 대표적인 은사라고 생각합니다. 은사를 좁게 보면 이 정도가 전부라고 볼 수 있지만, 저는 은사를 넓게 보는 편입니다. 비록 우리가 자연적으로 가진 재능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성령님께서 쓰셔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고 교회의 유익에 쓰인다면 그것이 은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연적인 재능 자체가 은사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가진 어떤 것으로도 몸을 세우려고 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은사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로마서 12장에서는 가르치는 것, 구제하는 것, 자비, 섬김, 위로 등이 은사라고 합니다. 초자연적인 것이 아닙니다. 또 에베소서에 나오는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자, 목사, 교사는 은사이기도 있지만 직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은 간단하게 두 가지로 나눕니다. 말하는 것과 봉사하는 것인데 여기서 말하는 것은 가르치는 것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가르치는 자가 있고 가르침을 받아서 섬기는 자가 있습니다. 이것이 모두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은사는 초자연적인 은사가 많습니다. 그러나 은사는 그보다 훨씬 넓고 다양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12장에 나오는 은사의 예를 들면 방언, 통변,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병 고침, 능력의 행함, 예언, 영의 분별이 있습니다. 이러한 은사에 대해 3가지 입장이 있습니다.  첫째 입장은 이 은사들이  사도시대에서 끝났고 더 이상은 없다는 것이고, 두번째 입장은 오늘날에도 이 은사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입장은 이 은사들 뿐 아니라 초대교회에 있었던 모든 일들이 오늘날 다 가능하다는 입장입니다.  저는 이 중간 입장입니다.
은사들이 사도시대에서 끝났다는 첫째 입장의 주장은 성경적인 근거가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모든 현상을 부인할 수 있냐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첫 번째 입장이 틀렸다고 봅니다. 세 번째 입장은 사도바울이나 베드로와 같은 분들이 행했던 모든 능력이 오늘날도 일어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사도들이 행했던 능력들은 표적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의 전권대사로 그리스도의 사도를 세우셨기에 초대교회 시대에는 사도의 말은 곧 그리스도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도들에게만 주신 특별한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에 반복되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는 사도와 선지자들의 증거가 신학성경으로 완성되었기 때문에 사도와 선지자가 더 이상 없습니다. 그래서 ‘sign and wonder’라고 말할 수 있는 표적이 ‘말과 언어’를 통해서 오늘날 다 나타난다고 하는 것은 또 다른 극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사도들은 말로 죽은 자를 살렸습니다. 베드로가 ‘다비다야 일어나라’하니 다비다가 일어났습니다. 바울도 유두보라는 청년이 졸다가 떨어져서 죽었는데 살렸습니다. 오늘날 그런 일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매우 드물게 일어납니다. 또 병을 고치는 신유의 은사는 대부분 단계적으로 일어납니다. 한 번 안수해서 되지 않고 경우에 따라 두 번 세 번 반복적인 안수가 수반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초대교회에서 사도들이 행한 능력은 즉각 그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사도들이 행한 능력과 초대교회때의 은사 자체가 다른 것입니다. 병을 고치는 은사가 실제로 있습니다.  병을 고치는 은사는 누구를 위해 기도해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 기도할 때 고침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사도들이 행한 것처럼 즉각적으로 그리고 원할 때 아무때나 나타나는 능력은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은사를 생각하실 때 양쪽 극단을 배제하고 오늘날에도 은사가 다 있지만 이것이 사도적인 능력과는 다르다고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초대교회때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도 옳지 않다는 점을 염두에 두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또 생각해야 할 것은 은사의 목적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며, 은사에 귀천은 없지만 순서가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 12장을 보면 첫 번째는 사도요, 두 번째는 선지자요, 세 번째는 교사요 하는 식으로  순서가 나옵니다.  그래서 교회에 덕을 세우는 순서로 은사의 중요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은사는 절대로 우리의 신령함의 표지가 아닙니다.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고린도교회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은사가 제일 많았던 교회입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을 보면 바울이 ‘너희가 육신에 속한자로다.’ 라고 책망합니다. 즉 은사는 많은데 성령충만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입니다. 육신충만하면서 은사가 많았던 것입니다. 은사가 신령함 혹은 성령을 좇는다는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은사가 주어진 후에 그 사람이 타락을 하더라도 그 은사는 계속 주어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신유의 은사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많이 타락하여 그 은사를 가지고 돈을 벌거나 또는 이단적인 발언을 합니다. 그래서 교계에서 그를 위험시하는데 여전히 그 사람이 안수를 하면 병자는 낫습니다. 그런 일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 ‘나보고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지 않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자라야 들어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로 와서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고 하지 않았나이까 하리니 내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를 떠나거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여기서 ‘너희가 언제 선지자 노릇했느냐? 거짓말 하지마라’라고 부인하신 것이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행한 일은 다 인정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었고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충만함, 성령을 좇아 행하는 증거는 열매입니다. 그렇다고 은사를 가볍게 여기고 소홀이 여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은사는 하나님이 우리의 유익을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잘못 사용하면 은사가 유익이 아니라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은사에 대한 나의 청지기적인 자세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은사는 감사히 받고 그것으로 교회를 섬기는 일에 사용하며 절대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은사는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똑같은 은사를 주시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주십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성령충만입니다. 그리고 이 충만은 인격적인 것입니다. 성령님이 나를 지배하고 다스림으로써 내가 매일 매일 죄와 싸워 이기고 거룩함에 이르고 사랑과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 강의를 들으신 모든 분들이 성령이 충만한,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사는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끝)
 

[이유정] 예배의 정점은 항복이다

예배의 정점은 항복이다
‘오직 주 만이’ 작곡 배경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저에게서 나는도다.” 시 62:1
 
1987년 6월은 나의 대학생활 중 가장 시끄러운 달이었다. 같은 캠퍼스에서 공부하던 이한열 학우가 전경 측에서 쏜 최루탄에 맞아 병원에 이송되었으나 결국 생명을 잃었다. 이 사건으로 도화선에 불붙듯 전국의 대학생들이 들고 일어났고 더욱 거세진 데모로 나라전체가 술렁였다. 당시 한국교회 안에도 좌우의 대립양상이 극에 달했다. 경배와 찬양 모임들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그치지 않았다. 한 쪽에서는 침묵하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해 ‘말 못하는 하나님’, ‘입 없는 하나님’이라는 독설적인 표현까지 터져 나왔다.
복음주의 진영의 공식입장은 데모 참여를 금했지만, 내가 속했던 IVF 학생선교단체에서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참여할 수 있도록 선을 그어주었다. 나는 젊은 혈기에 못 이겨 그 데모 대열에 뛰어 들었다.
데모 이후 내 마음은 항상 불편했다. 군중 속에 섞여 뛰고, 돌도 던지고, 도망하는 폭력적 태도를 내 이성은 합리화했지만 마음은 허무하기 이를 데 없었다. 대학 졸업반이었던 나는 학업 이성, 졸업 후 진로에 시국문제까지 맞물려 심적으로 가장 복잡한 시기를 겪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 나는 크리스천으로서 한 번 즈음은 통과해야 할 내면의 전쟁, 즉 바울 사도가 로마서 7:19,24에서 고백했듯이,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는 내적 갈등을 치열하게 경험하고 있었으니 당시 나의 내면세계는 한마디로 전시상황이었다. 어느 날 아침 말씀을 묵상하려고 그날 본문을 폈다. 다윗이 쓴 시편 62편이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시 62:1 상반절)
1절에서부터 마치 케이오 펀치를 맞은 것처럼 눈앞이 아찔했다.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그랬다. 내 영혼은 잠잠하기는커녕 폭풍 속에 요동하고 있었다. 하나님만 바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환영을 기대하고 있었다.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 영은 무너져 내렸다. 문득 하나님 외의 너무 많은 곳에 마음이 분산되어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너무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군요.’ 말씀 앞에 무릎 꿇었다. 이 시편 62편은 그저 평화로운 안식을 누리며 고요한 마음의 평정 속에서 흘러나온 고백이 아니었다. 숱한 고민과 두려움은 물론 죽음의 위협까지 받고 있던 청년 다윗이 자기 자신을 향한 선언이었다.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지 수년이 지났다. 그를 향한 백성의 인기도 하늘높이 치솟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현재의 왕은 자신을 죽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하나님마저 인정한 왕권, 그 고지가 손에 잡힐 듯 눈앞에 아른 한데, 승기는 사울 왕의 손에 아직도 굳게 쥐어져 있다. 그 갑갑한 현실을 다윗은 묵묵히 참아내야만 했다. 험난한 엔디게 사막에서의 끝 모를 도피생활은 다윗을 무너뜨렸다. 그래서 시편 62편은 처절하게 무너진 삶의 돌무덤을 뚫고 피어난 한 송이 백합화이다.
“기울어 가는 담과도 같고 무너지는 돌담과도 같은 사람을, 너희가 죽이려고 다 함께 추격하니, 너희가 언제까지 그리하겠느냐? 너희가 그를 그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릴 궁리만 하고, 거짓말만 즐겨 하니, 입으로 해주는 축복이 속으로는 저주로구나.(셀라)” (시 62:3,4) 코앞에 다가오는 죽음의 위협 속에서 터져 나온 영혼을 향한 절대 선언이었다. 극한 상황에서 오히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명령하는 다윗의 고백이 그 어떤 해답보다 강력하게 내 영혼을 뒤 흔들었다. 그 말씀 앞에 무릎으로 항복했다. 순간 영감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불과 10여분 만에 ‘오직 주 만이’라는 곡이 탄생했다. 
당시 송정미, 김지현과 종종 모여 자신이 창작한 곡을 나누곤 했다. 어느 날 아침, 정미에게 전화가 왔다. 시편 62편을 묵상하는데 이 말씀을 세상에 선포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곡으로 극동방송 복음성가 경연대회에 나가려고 하니 허락해달라는 것이었다. 허락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고, 결국 정미는 본선에 올라 대상과 함께 작곡상까지 받게 되었다. 그 이후 정미는 전국방방곡곡을 다니며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는 믿음의 능력’을 담대히 선포하는 여 전사가 되었다.
2009년 한국 방문 시 만난 송정미 사모가 당시 상황에 대해 처음 말문을 열었다. 복잡한 시국상황을 수년 경험하면서 고민이 많았단다. 그러던 어느 날, 바로 시편 62편이 해답으로 다가왔단다.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는 것이 결코 무능력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단지 ‘말 못하는 하나님’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나의 구원 나의 영광’이 내 의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으며, 그래서 현실을 극복하고 치유하는 힘이 나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감사한 것은 말씀 앞에 항복하고 작곡한 ‘오직 주 만이’가 지난 20여 년 동안 예배 현장에서도 변함없이 불리고 있는 예배곡이 되었다는 점이다. 항복은 순종의 최고 단계요, 예배의 심장 heart of worship이다. 자아의 끝에서 하나님이 시작한다. 구세군 창시자인 윌리엄 부스는 말했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능력은 그의 항복의 크기이다.” 그래서 항복은 예배의 정점이다. 

[안상현] 유학생 사역: 첫걸음이 중요하다

유학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졌던 계획은 빨리 학위를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석사과정도 M.Div가 아닌 MA를 먼저 시작했다.

기독교 교육학으로 석사를 하기에 아무래도 사역 경험들이 필요할 것 같아 지역의 이민교회에서
파트타임 사역자로 사역을 시작했는데 정말이지 좌충우돌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따라와준 교사들이나 아이들, 그리고 배려해 준 교회에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러던 중 한 지역교회에서 중고등부 전도사로 섬기기 시작하면서 한 영혼을 바라보는 나의 영적 시각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어린 한 영혼, 한 영혼을 말씀으로, 인내로 섬긴다고 하는 것의 소중함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나는 M.Div를 고려하고 현장에서의 사역을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런 내 마음은 자연히 대학생들을 품기 시작했다. 내가 가장 힘든 시절을 겪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 당시만 해도 “캠퍼스”에 있는 대학생들에게는 당시 이민 교회들의 관심이 그리 많지 않던 때였다. 모든 사역이 그렇겠지만 캠퍼스 사역 역시 자신의 은사나 적성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일단은 자신의 은사나 적성을 바탕으로 그에 적절한 교회/단체등에서 사역하면서 자신의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배웠다.

개인적으로는 열정적이기 보다는 좀 차분하고 사색적이기를 바라는 성향이 많기에 그런 색깔(?)을 가지고 사역하는 단체에 마음이 끌렸고 그래서 직접적으로 접하게 된 학생선교단체가 바로 IVF였다. 당시에 남가주에는 한국기독학생회의 남가주 지방회라는 이름으로 UCI, El Camino collge, Cal State in Long Beach, 그리고 UCLA에서 KIVF가 활동하고 있었다.

S 목사님으로 부터 접하게 된 존 스토트의 많은 책들이 내 신학적인 밭을 일구는데 일조했다면, 그 존 스토트가 활동했던 IVF와의 만남은 어찌보면 당연한 귀결이요, 만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생각하면 참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생각하는데 당시 같은 대학원을 다니던 1.5세 가운데 T 형제와의 만남은 본격적으로 캠퍼스 사역에 연결된 계기였다. 그러나 캠퍼스 사역에 관심이 있다는 나의 말에 보인 T 형제의 첫 반응이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데(단 한 마디였다. “쉽지 않아요!”) 지금 돌아보면 어떤 의미를 담은 것이었는지 충분히 수긍이 간다.

캠퍼스 사역은 쉽사리 덤빌 수(?)있는 현장은 아니다. 너무 겁을 내고 두려워 뒤로 물러설 필요도 없지만 그러나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덥석 발을 담글 수 있는 곳도 아니라는 뜻이다. 특히나 ‘지속성’의 주제와 관련하여는 더욱 그렇다.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에 승부를 볼 수 있는 곳이 아니기에 오랜 인내와 겸손이 필요한 사역이라고 말하고 싶다.

처음 T 형제의 소개로 만난 지역대표간사님이었던 H 간사님과의 만남은 그 후로도 내가 캠퍼스 사역이 무엇인지를 배워 나가는데 있어서 좋은 토대를 놓기에 충분했다. 베테랑 간사님이었던 그 분의 경험과 간사 회의때마나 나누어 주던, 그리고 지금도 잊지 못하는 아주 오래된, 직접 수리하시면서 타시던 빨간 니산 센트라 안에서 나눠 주시던 귀한 말씀들이 생생하다.

지금 돌아보면 바로 그 세사람, S 목사님, T 형제, 그리고 H 간사님과의 만남은 큰 축복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캠퍼스를 마음에 품으며 기도하는 수많은 미래의 동역자들, 혹은 캠퍼스를 붙잡고 씨름하고 있는 동역자들, 특히나 한국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속에서 캠퍼스를 마음에 두고 있는 동역자들에게는 먼저 자신의 부족함과 훈련받아야 할 부분을 정확히 직시하고 그것을 채워주고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눈을 부릅뜨고 찾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서 배울 수 있기를 간청하고 도움을 요청해 보기를 바란다. 

그것이 맨땅에 헤딩하지 않고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부탁한 것처럼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등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첫걸음이 됨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