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영광] Living out The Dream (3) – 내적 비교를 거부하자.

2010 KOSTA/USA Youth Conference에서 있었던, 채영광 박사의 선교적 삶(Living out The Dream) 세미나입니다.


채영광 (youngkwang.chae@gmail.com)


우리는 우리 모두가 꿈꾸는 그런 삶이 있습니다. 그 꿈이 실현되는 그 날 우리는 행복해질 것이며 우리의 삶은 성공적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이 나의 것인지 하나님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정확히 말해, 내가 무엇을 위하여 공부하는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이 번 세미나를 통해, 학교에서, 교실에서, 지금 이 시간 내가 딛고 있는 이 곳 미국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멋진 Missionary로 살아갈 수 있는지 다 같이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꿈이 비로서 내 꿈이 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이미 땅끝의 선교사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우리의 꿈은 그리스도로부터
뒤늦게라도 어머니의 사랑을 깨달으면 효자, 효녀가 되지 않을 수 없듯이, 하나님의 놀라운 아가페 사랑을 알게 되면, 하나님 자녀의 신분에 맞게, 천국 시민답게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학교에서 좋아하고 존경하는 선생님이 있는가? 우리의 존경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을까? 그 분께 감사함을 표시하고 그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음으로 나타낼 수 있다.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그 분께 찬양과 감사와 예배, 그리고 말씀의 순종으로 드러난다. 크리스천이란 뜻이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작은 예수들이란 말이다. 그리스도와 나를 동일시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행한 일들을, 하나님의 사랑을 이 땅 가운데 흘려 보내는 그 동일한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크리스천인 것이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임과 동시에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형제 자매가 있는 분들은 부모님이 늘 하시는 말씀을 안다. 형제 간에, 자매 간에 싸우지 말고 사이 좋게 지내라는 것이다.부모님의 마음은 여유 있게 사는 첫째에게도 있지만, 어렵게 생활하는 둘째에게도 있다. 첫째가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도 좋아하시지만, 둘째의 일을 자기 일처럼 도와주고 챙겨주는 것을 더 좋아하신다. 우리 하나님의 마음도 이와 같다. 이 하나님 사랑을 이해하면 수직의 하나님 사랑이 수평의 이웃 사랑과 만나 온전한 십자가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은 나를 위함과 동시에 이 지구 상의 모든 민족과 족속을 위하여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셨다. 주님께서,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라고 이야기한 뜻이 여기에 있다. 복음은 로마서 1장16장 말씀처럼 모든 믿는 사람에게 구원에 이르게 하는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빌립보서 1장16절에 ‘확신하노니 너희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He who has begun a good work in you will perform it till the day of Jesus Christ)’는 말씀이 있다. 우리 마음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는 그리스도이시다. 내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이는 예수님이시다. 이 꿈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받아 들였을 때부터, 이미 주님께서 이루고 계시는 현재 진행형이면서 완성형인 꿈이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삶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 사랑으로 세상에서 승리하며, 그 고귀한 사랑을 우리의 이웃에게 전하는 삶,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지 않은가? 우리들의 꿈은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꿈으로 가는 길의 장애물
그리스도의 꿈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삶을 이야기 하기 전에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꿈에서 멀어지게 하는지 먼저 알아야 한다. 적을 알아야 백전백승이다. 예수 안에서 누리는 행복과 평안을 빼앗아 가는 것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방탕, 성적 타락, 미디어 중독, 마약 중독, 게으름, 무력감, 시기, 질투, 성냄, 그리고 수군거림(gossip) 등등 열거하자면 수없이 많다.  내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바로 다름 아닌 ‘비교의 영’이다. 그 파괴력과 파장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비교의 영이 우리를 사로 잡으면, 영적으로 더 이상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 할 수 없게 된다. 비교의 영을 ‘내적 비교 (Internal comparison)’와 ‘외적 비교 (external comparison)’ 두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다. 내적 비교는 ‘남과의 비교’를 통해 ‘나를 판단’하는 것이다. 나를 자꾸 남과 비교하면, 내가 위축된다. 주님이 부어 주셨던 은혜를 감사할 수 없게 되고, 앞으로 부어주실 은혜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외적 비교는 ‘나와의 비교’를 통해 ‘남을 판단’하는 것이다. 내 기준으로 남을 자꾸 판단하다 남의 단점을 지적하다 보면, 우월감에 빠지고 곧 교만해진다. 은혜를 더 이상 갈구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된다. 이제, 이 두 가지 비교의 영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내적 비교를 거부하자.
먼저 내적 비교를 이야기해보자.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비교 당하는 것에 익숙해진 세대들이다. 부모님,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나 보다 공부 잘하는 친구들과 비교 당하는 것에 익숙하다. 자신보다 우월한 사람과 비교 당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꾸 비교 당하다 보면, 누구나 열등감 속에서 자신감을 상실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외부의 비교에 익숙해지다 보면, 내 자신을 스스로 남과 비교한다. 우리 집은 가난한데, 우리 집은 부모님이 이혼하셨는데, 저 친구는 집도 크고, 좋은 차도 타고 다니고, 집도 정말 화목하구나.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진다. 나는 환경도 좋지 않고 능력도 변변치 못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우울해지지 않을 사람이 없다. 이것이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효과적인 사단의 전략임을 알아야 한다. 
나는 미국에 유학 오기 전에, 내 스스로 두려워했던 것이 앞으로 내가 나의 동기들과 나를 비교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지금 내가 미국에서 암을 연구하고, 또 암환자를 진료하기 위해 종양 내과 임상 트레이닝을 받으러 한국을 떠나 있는데, 10년, 20년 후 한국에서 개업하여, 경제적으로 비교적 여유 있게 살고 있을 내 친구들을 보면서, 부러워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내 안에 있었다. 나는 비교가 내 행복을 얼마나 빠르게 앗아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어른들의 후회 어린 말씀을 우리는 기억한다. 학교 다닐 때 저 친구는 나보다 훨씬 공부도 못했는데, 지금은 나보다 잘 살아. 우리 동기 중에 저 친구는 강남에 빌딩이 몇 개라더군. 제일 성공했어. 나는 왜 돈을 더 잘 벌 수 있는 과를 선택하지 않았나 모르겠어. 이런 어른들의 말씀을 들으면서, 사실 나도 세상에서 꼭 성공해야 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해답은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함
그런데, 언어 사용부터 정확하고 볼 일이다. 잘 사는 것, 성공한 것과 부자인 것과는 별 개라는 것을 명심하자. 가난하면서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다. 부자이면서도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하루하루 자살을 생각하는 극도의 불안과 우울 속에서 살아 갈 수 있다. 언어는 생각의 체계이다. 우리가 우리의 언어에서 잘 사는 것과 부자인 것을 똑같이 표현 할 때, 우리 스스로의 사고를 세상의 틀 안에 국한시키게 된다. 이 세상은 성공을 연봉이 얼마인 직장에 들어가는가, 또 의사로서 얼마의 연봉을 받고 살아가는가로 평가한다. 연봉은 액수이기 때문에, 참으로 비교하기 수월하다. 연봉 액수로, 회사 지분으로, 세상의 성공을 평가하고, 경제 잡지 Fortune은 전세계 부자 순위를 발표한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원하는 것은 우리의 행복을 비교를 통해 야금야금 앗아가려는 것임을 깨닫자. 나는 미국에 오기 전에 만났던 내 신앙의 동역자 친구들에게 내가 비교의 영을 거부하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에 감사와 기쁨으로 공부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 부탁을 했다. 목사님들께도 찾아가 동일한 기도 제목으로 기도를 부탁 드렸다. 나 역시 하나님을 아는 지식 외에 그 어떤 것도 부러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미국 볼티모어(Baltimore)에서 공부하면서, 으리으리한 집에 사시는 한 교수님 댁에 방문하면서 하나님께 참 감사하게 된 일이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나의 반응은 언제 이렇게 좋은 집에 살아보나 하는 한숨이거나 나도 열심히 돈을 벌어 꼭 이런 집에 살아야 겠다는 야망, 둘 중의 하나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집에 살아도, 만약 그리스도를 경외함이 없다면, 아무 소용 없겠구나 하는 마음이 생겼다. 하나님이 축복해주시면, 내가 막 고생하며 노력하지 않아도, 언젠가 나도 이런 집에서 살 수도 있겠구나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나는 우리 주님이 있으니까, 찬송가 가사처럼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다 하늘 나라’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나는 내 유학 전의 기도가 응답되었음을 알았다. 주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게 될 때 비교의 영을 거부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내 평생의 기도 제목이기도 하다. 내가 영적으로 무디어 질 때, 사단이 나를 이 무기로 공격할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너의 친구들이, 후배들이 그렇게 성공할 때, 너는 무얼 하고 산 거니? 왜 그런 고생을 하고 사니? 여태까지, 인생을 허비했구나, 이런 속삭임이 들린다면, 그 때가 곧 다시 주님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야 할 때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바로 이 말씀을 붙잡을 때다.

어디에서보다 누구와 함께
내가 미국에서 의사생활을 하기 전에, 한국에서는 시험장이 없어서 하와이로서 미국의사고시 시험 스텝 3 시험을 봤다. 이틀 동안 하루에 8시간씩 컴퓨터 앞에 앉아서 문제를 풀어야 하는 시험이었다. 혼자 와이키키 해변 앞의 한 호텔에서 시험 전날 공부를 하면서 이틀간 시험을 봤다. 바로 한국에 가기에는 비행기 표가 아깝다는 단순한 마음으로 시험 친 후 하루 관광할 수 있는 날을 만들어 놓았다. 와이키키 비치에서 혼자 일광욕도 하고, 하나우마 베이(Hanauma Bay)에서 스노클링도 했다. 그런데, 그렇게 즐겁지가 않았다. 날씨는 좋고, 경치도 좋고, 스노클링하기에도 최적의 환경이었는데, 그렇게 기쁘지가 않았다. 좋은 것을 보고 좋다고 할 사람이 곁에 없었다. 가족끼리, 연인끼리 놀러 와서 재미있게 노는 그 곳에서 혼자 돌아다니는데, 갑자기 외로움이 엄습했다. 그 때 깨달은 것이 있다. ‘어디에 가느냐’ 보다 중요한 것이 ‘누구와 함께 가느냐’이구나.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당신과의 ‘동행의 기쁨’을 주기를 원하신다.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와 함께 하고 싶은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다. 정말 주 예수와 동행하면 그 어디나 하늘 나라가 된다. 두려움도, 외로움도, 슬픔도, 분노도, 절망도 눈 녹듯 사라진다. 지구 상 아무리 척박한 땅이라도 내 사랑하는 아내와 딸 린아와 함께 할 수 있는 곳이라면 나는 그 땅에서 살고 싶다. 날씨가 좋든 나쁘든, 경제적으로 부유하든 어렵든 상관하지 않는다. 하물며 우리 주 예수님과 동행하면,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문제가 되지 않는, 세상이 모르는 기쁨이 함께할 것을 믿는다.  (다음편에 계속)

[채영광] Living out The Dream (2) –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

2010 KOSTA/USA Youth Conference에서 있었던, 채영광 박사의 선교적 삶(Living out The Dream) 세미나입니다.

채영광 (youngkwang.chae@gmail.com)

우리는 우리 모두가 꿈꾸는 그런 삶이 있습니다. 그 꿈이 실현되는 그 날 우리는 행복해질 것이며 우리의 삶은 성공적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이 나의 것인지 하나님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정확히 말해, 내가 무엇을 위하여 공부하는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이 번 세미나를 통해, 학교에서, 교실에서, 지금 이 시간 내가 딛고 있는 이 곳 미국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멋진 Missionary로 살아갈 수 있는지 다 같이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꿈이 비로서 내 꿈이 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이미 땅끝의 선교사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사랑으로 공고히 해야 할 우리의 정체성

그런데, 사람의 정체성은 자신이 받은 사랑만큼 뚜렷해진다. 어릴 적에 누구의 지극한 사랑을 한 몸에 받아본 적이 있는가?  할머니, 할아버지가 나를 끔찍히 예뻐해주시고, 사랑해주셨는가? 내가 해달라는 것은 다 해주셨는가? 그렇다면, 당신의 정체성과 자존감은 받은 사랑만큼 공고하다. 나도 어렸을 때 시골에 갔을 때 항상 할머니 할아버지께 이것 저것 사달라 조르고, 늘 할머니 할아버지와 즐겁게 놀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은 나의 사랑스러운 딸 린아가 우리 부모님과 장인 장모님께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자라는 모습을 보고 있다. 부모인 나보다 할머니를 더 좋아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흐뭇하다. 가족들의 사랑 안에 흠뻑 젖는 만큼 린아의 기억 속에  ‘나는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각인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가 안에 사랑이 충만할 때, 그 사랑이 린아로부터 또 다른 이들에게 흘러갈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당신이 인생이 파국으로 치닫을 때, 옥상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 내가 죽으면 가장 슬퍼할 사람들의 얼굴들을 떠올려보자. 나의 외삼촌은 힘들 때, 우리 어머니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데, 내가 지금 이렇게 행동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실망하시고, 슬퍼하실까 하는 그 생각 하나로 험난한 인생 여정을 걸어오셨다고 말씀하셨다. 사람은 너무나 힘들면, 자살 충동이 생기게 되어 있다. 그 때, 어릴 때 우리 할머니가 나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셨는데 하는 생각이 들면, 그 할머니의 사랑이 나를 살릴 것이다.  할머니가 부어 주신 사랑만큼 내가 나의 가치를 인정한 셈이다. 자살을 통해 할머니의 사랑을 헛되게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더 나아가 할머니가 나를 믿어주고 사랑해준 것처럼, 나 역시 그 사랑을 나의 자녀, 손자, 손녀에게 전할 수 있게 된다.
거꾸로 사랑이 없다면, 정체성은 흔들린다. 나에게 가치를 부여해준 사람이 없다면, 내가 나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때, 내 삶은 송두리째 흔들리게 되어 있다. 내가 대한민국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국가로부터 받은 것보다 빼앗긴 것이, 당한 것이 많다고 느낀다면, 나도 대한민국을 사랑할 수 없다. 

정체성에서 꿈으로

내 안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민, 내가 가장 존경하는 우리 부모님의 귀한 아들과 딸이라는 정체성이 자리 잡고 있다면, 우리의 관심은 자연히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또 부모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로 귀결된다. 그런데 조국을 사랑하면 현재 무엇을 가장 필요로 하는지 고민하게 되고, 현재 자신의 위치에서 조국을 위해 조그마한 것이라도 할 일이 없는지 찾아 보게 된다. 마찬가지로, 부모님을 사랑하면, 지금 부모님이 무엇을 가장 기뻐하실지 생각하고, 또 여쭈어보게 되어 있다. 그리고 자연적으로 그 일을 하게 된다. 
아내와 내가 우리 딸 린아를 기르면서 가지게 된 것이 ‘부모’라는 정체성이다. 내가 부모가 되어 보니, 린아를 위해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아이가 아프면, 내 맘이 찢어지고, 아이가 아빠 하고 내 품에 앉기면, 아무리 피곤한 날이어도 모든 피로가 다 한 순간에 사라진다.  부모의 입장에서, 나는 내 딸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이 필요한지에 가장 관심이 가고, 그 것들을 해주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이 것은 지극 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또, 나를 똑같이 고생하시면서 키우셨을 나의 부모님을 생각하니, 부모님께 앞으로 더 잘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이렇듯, 우리의 정체성이 자연스럽게 우리가 해야 할 일들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성경에서 발견하는 우리의 정체성

그런데, 성경에 놀라운 말씀이 쓰여져 있다는 것을 아는가?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 삼아주셨다고 말씀하신다. 창조주 하나님 당신을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부르라고 허락해주셨다.  우리의 친구 되겠다고 하셨다. 우리가 어머니 뱃 속에서 잉태되기 이전부터, 아니 세상을 창조하시기 이전부터 우리를 알고 계셨다고 말씀하신다. 믿겨지는가? 우리의 이름을 아시며, 머리카락 수까지 아신단다. 그 뿐 만이 아니다. 우리와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하신다. 깜짝 놀랄 말이다. 가장 신기한 일은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에서 증거하듯이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화목 제물로 내어주셨다는 것이다. 그로써 우리를 사망으로 이끄는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셨다. 잘 믿겨지지 않는 말씀이다. 그런데, 단순히 믿기만 하면, 이 복음을 내 삶의 진리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영원한 생명과 죄의 용서,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질 것이라 하신다. 이 복음은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값을 지불할 것은 하나도 없다. 예수님께서 대신 모든 대가를 지불하셨기에 우리는 공짜로 받는 선물이다. 우리는 받기만 하면 되는, 말 그대로 free gift이다. 무언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 당연시되는 세상의 이치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 복음은 하나님의 놀라운 작품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

자, 이제 정체성 이야기로 돌아가자. 우리들은 누구인가?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 것이 가장 중요한 우리들의 정체성(Identity)이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 분은 우리의 모든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주신다. 그 분은 우리를 창조하셨으며, 아무 조건 없이 우리를 위해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돌아가게 하셨다. 그것도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가치 없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만큼의 가치를 부여해주신 분이다.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 부모님은 아무리 우리를 사랑해주신다고 해도, 나와 평생 매 순간 함께 하실 수 없다. 그리고 인간이기에 실수가 있고,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도 있다. 또한 사랑이 잘못된 방향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들 마음에 상처를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기에 실수가 없으시고, 약속을 식언치 않으시며, 우리에게 조건 없이 사랑해주시는 분이시다. 항상 좋으신 하나님이시다 (God is good all the time). 무엇보다, 우리 하나님은 공간과 시간의 제약이 없으신 분이다. 우리와 늘 동행해주시며, 보호해주시는 분이시다. 그 우리가 그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이 실감이 가는가? 하나님 나라, 천국을 우리가 유업으로 물려 받을 것을 믿는가? 
내 딸 린아가 아빠를 부르면, 나는 내 방에서 아무리 바쁜 일을 하고 있더라도 린아에게 달려간다. 또 우리 집과 집안의 물건 모두 다 린아 것이 된다. 교회에서 우리 가정을 부를 때, ‘린아 엄마 아빠네 ‘라고 하지 않는다. ‘린아네 가정’라고 한다. 그렇다. 우리는 자녀된 권세로 언제든지 아버지 하나님과 친밀히 소통할 수 있으며, 천국을 기업으로 물려 받을 정당한 법적 상속자들이다. 가슴으로 느껴지는가? 하나님 자녀됨의 권세, 이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지만 모두 다 가진 자이다. 이 조건 없는 사랑 안에 온전히 거하는 것, 그것이 우리에 주어진 최고의 선물이다.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에 거하자.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히 샘솟는 샘물과 같다. 그 생명수가 나를 적시고 흘러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녀들에게 부어 주시는 그 사랑 안에 거하고 있는가? 이 사랑이 우리를 살리는 힘이고 우리를 움직이는 동력이다. 하나님의 귀한 자녀로서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깨닫고 온전히 누려야 한다. 먼저 진정한 자녀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꿈을, 사명을 생각하기 이전에, 우리의 하나님 자녀됨을 묵상하자. To do보다 to be가 먼저 이다.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무조건적 사랑 안에 흠뻑 젖어야 한다. 그 사랑에 배추가 소금에 절여지듯이 ‘사랑 절임’을 당해야 한다.  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하나님 자녀라는 우리의 정체성을 더욱 공고히 해준다.
얼굴에 큰 화상을 입은 어머니가 있었다. 아들은 괴물처럼 꺼멓고 흉측하게 생긴 자기 어머니가 참 부끄러웠다. 되도록이면 그런 어머니가 학교에 찾아오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싫었다. 어머니가 시키는 것은 다 하기 싫었고, 엄마를 무시하면서 반항적인 아이로 커갔다. 그런데 어느 날 아들은 어머니 얼굴의 비밀을 이웃 사람들에게서 듣게 되었다.  어릴 때 자신이 몰래 부엌에 들어가 이것 저것 만지다 끊는 물이 들어있는 주전자가 어린 아들에게 쏟아지는 것을 보고 엄마가 달려들어 그 뜨거운 물을 주전자째 받아서 얼굴이 그렇게 된 것이라고.  아들은 그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엄마 얼굴만 보면 눈물이 났다. 아들은 엄마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스러워했다.  엄마가 심부름 시켜주시길 기다리는 아이로 변하게 되었다. 먼저 어머니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 어머니의 얼굴을 보는 눈이 바뀐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마음이 달라진다. 위 이야기 속 어머니 얼굴의 화상이 우리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요, 그 분 손과 발의 못자국이다.  그 당시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인 십자가, 그 고통과 수치, 모욕을 나의 죄 때문에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사랑을 묵상하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 안에 거하자.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너를 죽기까지 사랑하여 구원하신 너의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건강, 물질, 직업은 우리의 정체성과 무관하다.
내가 부모가 되고 보니, 내 딸 린아를 보면서, 아프지 않고 잘 크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린아가 자기가 즐거워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잘 하게 되길 바라는 마음이고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린아가 가난하게 살던지, 부자로 살든지 그 마음에 기쁨이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부모로서 가장 기쁠 때는 그냥 아빠, 엄마를 아빠, 엄마로 불러주는 것뿐이다. 그러고 보니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린아가 태어나기 전부터 뱃 속의 아기와 이야기하며, 기도해주고, 아기 옷을, 장난감을, 우유 병을 사며 기다리다, 드디어 분만실에서 응애 소리를 들으며, 감격의 눈물을 흘릴 때, 우리 하나님이 그러셨구나. 세상을 열심히 창조하시고 마지막 날, 아담에게, 너를 위해 이렇게 준비했다라고 하시며 기쁨과 감격으로 아담과 교통하셨을 우리 하나님이 떠올랐다. 린아가 나를 아빠라 불러주며 내 품에 앉길 때, 그렇구나, 우리 하나님도 내가 하나님을 찾을 때, 주님의 품 안으로 나아갈 때 가장 기뻐하시겠구나 생각했다. 린아가 다른 아이보다 걷는 것을, 말하는 것을, 한글책과 영어책을 늦게 읽게 되더라도, 내가 린아를 사랑하는 정도와는 아무 상관이 없겠다는 생각 가운데, 내가 이 세상에서 물질적으로, 학문적으로 얼마나 성공하든지에 무관하게 우리 주님은 나를 변함 없이 사랑하시겠구나 하는 확신이 생겼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은 우리가 건강하든지 장애가 있든지, 돈이 있든지 없든지, 화려한 직업을 가졌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내 가치는 내 소유에 있지 않고, 내가 온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 딸이라는 신분에서 나온다. 내 가치는 내 능력과 배경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직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게서 나온다. 내 가치는 현재 내 상황이 어렵다고, 힘들다고 바뀌지 않는다. 만 원짜리 지폐를 발로 밟아 더럽게 한다고 해서, 만 원 지폐의 가치가 사라지지 않는 것과 같다.  자, 이제 자유하자. 내가 만든 기준, 주변의 기대가 충족될 때, 내 가치가 더 높아질 것이라는 생각에서 자유하자. 더 많은 이들이 나의 가치를 인정해줄 때, 내게 인기가 더 생길 때, 더 좋은 성적을 얻을 때, 더 전도유망한 직업을 가지게 될 때, 내 가치가 올라갈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자. 나의 가치는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나를 지금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는 나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에게서부터 나온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와 미국 시민이 된 사람이 있다. 신체 장애자라고, 세금을 더 많이 낸다고, 특정 직업을 가졌다고 미국 시민이라는 그의 신분은 바뀌지 않는다. 그는 시민권을 받기 위해, 여러 가지 사전 절차를 거친 후 미국 시민권 선서를 하면 된다. 복음은 사실 더 간단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믿기만 하면, 우리는 천국 시민권을 받게 된다. 이 땅에서 우리의 지위의 높고 낮음이 천국 시민이라는 우리의 신분에 결코 영향을 줄 수 없다. 항상 찬송을 부르고 기쁘게 살아가는 한 파출부 아줌마에게는 그녀가 일하는 저택에 사는 재벌가 가족이 부럽지 않다. 자신이 파출부라는 자격지심도 없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직도 모르고, 가족 경영권 다툼으로 마음이 피폐해진 가족들을 불쌍히 여길 뿐이다. 김우현 감독의 ‘팔복: 최춘선 할아버지’ 동영상을 보면, 할아버지께서 이 세상 최고의 권세는 ‘부러운 자가 없는 것’이라고 하셨다. 내가 하나님 자녀인데, 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다는 이 배짱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가질 수 없다. 시편 23편의 고백이 우리들의 고백이 되기를 바란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음편에 계속)


[신자은] 회심

<회심>  짐 월리스, IVP

<The Call to Conversion: Why Faith is Always Personal But Never Private> Jim Wallis

 
이 책은 IVP에서 2008년에 한국어로 번역 출간했고, 영문판은 2005년에 출간되었지만, 원래는 1981년에 쓰여진 책이다. 1981년이면 필자가 초등학교 1학년일 때이니, 30년의 세월을 견뎌낸 ‘고전’의 재발견이다.   

이 책이 한 세대 전에 쓰여졌음을 감안할 때, 현 시대의 세상과 교회를 조명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제자들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최초의 부르심”으로 이끌어내는데 이보다 더 명료하고 시의적절할 수는 없다는 점은 경이롭기만 하다. 동시에, 이미 한 세대 전에 제시되었고 예견되었던 도전과 경고에 대해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무심하였고 무지하셨고 또 무방비상태로 지난 30년을 지나왔고, 그래서 이 책의 엄중한 지적앞에서 변명할 여지가 없는 초라한 모습으로 서있는가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기에, 좋은 책을 만난 기쁨이 철저한 고통으로 다가오는 독서였다.

이 책의 영문 원제목은 저자가 ‘그리스도인의 회심(conversion)’에 대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매우 분명하게 담아낸다. 즉, 그리스도인의 회심은 ‘개인적personal이고 인격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한 개인에게 일어났을 때 필연적으로  ‘사적인private’ 영역을 넘어서는 역사적인 현실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회심의 본질을 저자는 ‘역사 속의 회심 conversion-in-history’라고 명명한다. 저자는 ‘공적인 생활과 개인적 신앙’간의 유리 혹은 이원화의 결과, ‘신앙이 역사로부터 갈라져 나옴’으로 인해 오늘날의 교회가 어려움에 처해있다고 진단한다.

회심은, ‘어디인가로부터 돌아서는 회개’에서 ‘어디인가를 향해 나아가는 신앙’으로 나아간다. ‘어디인가로부터’의 영적 특징은 죄이며, ‘어디로’의 본질은 구원이며 하나님 나라이다. 회심이 하나님없는 세상으로부터 하나님 나라를 향하는 것이라면, 회심을 통해 ‘그리스도인’, 즉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새로운 identity를 부여받은 사람은, 그가 속한 역사의 현실을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질서에 따라 새롭게 정의하고 그 질서에 따라 살게 된다. 결국, ‘회심’은 존재의 새로와짐과 삶의 새로와짐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이기에, 반드시 역사적인 현상으로서 관찰되지 않을 수 없다. 한 사람이 죄와 우상과 자기 중심성이라는 구조에서 ‘회심하여’ 구원과 하나님 그리고 이웃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면, 가난과 불의, 불평등과 부조리, 분쟁과 환경파괴의 문제에 대하여 이전과 동일한 방식으로 반응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초기 교회와 초기 그리스도인에게, ‘회심’은 이렇게 역사적인 사안이었다. 세상은 그들을 ‘특정한 삶의 형태, 분별 가능한 생활방식을 따르는 사람들’, 즉 그들이 믿고 전파하는 복음을 “실제로 사는” 사람들로 인식했다. ‘회심’이 갖는 이러한 역사성은, ‘(회심을 통해 떠나온) 세상의 가치관과 방식이 (회심을 통해서 속하게 된) 하나님 나라의 그것과 결코 양립할 수 없다’는 무형의 진리가 ‘새로운 방식의 삶’이라는 모습으로 incarnation된다는 관점에서 역사의 일부이지만, 시공간에 제한을 받지 않고 동일하게 작용하는 복음의 능력이기에 역사를 뛰어넘어 영원으로 향한다.

저자는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하여 세상이 알고 있는 바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세상의 관찰사이의 불일치, 결여된 연관성으로 인해서 복음 전도의 능력이 상실되었다고 지적하고, 이것을 “배반” (2장의 title)이라고 부른다. ‘예수가 구원자시다, 예수가 주인이시다’라는 구호와 고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가시적인 사례가 개인과 역사속에서 실종되었을 때, 우리는 더이상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도 보지도 못하는 세대가 되었고, 우리의 질문은 ‘예수께서 나에게 무엇을 해주실까?’로 천착되었다.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 나라로부터 임하는 새로운 질서가 아니라, 세상의 질서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을 ‘등에 업는’ 방식으로 우상화되었다.

저자는, 1장과 2장에서 회심의 역사성, 하나님 나라와의 연관성 그리고 회심의 사회적 의미,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난 이 세대의 배반에 대한 일반론을 토대로, 가난, 전쟁, 교회, 예배에 대한 3장에서 6장까지의 각론을 통해 ‘회심’의 구체적인 영역을 제시한다.  

‘회심’을 통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의 부르심은 개인적이고 철저히 수동적이며 따라서 ‘생명을 얻는 사건’이지만(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므로), 그 부르심의 결과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된 한 개인에게 주어진 역사적 소명은 생명을 건 전투가 아닐 수 없다. ‘회심’이 세상의 불의와 불완전을 드러내기 때문에 세상은 ‘회심’을 싫어한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을 마무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으로 이 회심을 살아내라고 권면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이미 성취되었고 또한 성취될 승리에 대한 확신없이, 우리의 삶을 통째로 건 ‘회심’의 길을 세상을 거슬러 걸어가기는 어렵다. 

‘회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승리를 그 원동력으로 삼는다면, 그리스도인이 사는 회심의 삶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적대적이고 극단적이고 급진적이고 기존의 질서와 체계를 어지럽히며 또한 어리석은 것으로 드러나게 될 것인가.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 분의 가르침과 삶에 대한 당대의 반응이었고, 그 분을 따랐던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에 대한 세상의 태도였다. 21세기라는 역사를 소명으로 부여받은 오늘날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회심’를 다시 배우고 ‘회심’을 살기 위해 모든 위험과 비용을 감수하기를 각오해야 하는 이유다.  

책을 덮으며, 이 ‘회심’의 길을, 삶으로 실재하는 믿음의 삶을 사는 누군가를 만나고픈 그리움과 나는 이 분명한 부르심앞에서 얼마나 생명을 쏟아붓고 있는지, 어떤 비용을 치르고 있는지에 대한 부끄러움이 교차했다. ‘역사 속의 회심’이 겨우 이제 내 안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성경적 회심의 목표는 역사와 별개로 영혼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그 폭발적인 힘과 함께 세상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회심은 개인에게서 시작하지만 세상을 위한 것이다” (1장 부르심, p41)

[이유정] 예전예배의 첨단을 경험하다

지난 주말은 미시간의 그랜드 레피드에서 개최되는 칼빈 워십심포지엄에 참석했다. 하루 전날 갑작스럽게 쏟아진 폭설로 동부지역 대부분의 비행기가 발이 묶이는 바람에 목요일 프로그램은 하나도 참석하지 못했지만, 다행히 금요일 오전부터 토요일 낮까지 진행된 빡빡한 심포지엄 일정 속에서 예상치 못한 진주를 건졌다. 아울러 CRC(기독교 개혁교회) 소속 칼빈신학교의 숨은 저력을 발견한 좋은 기회였다.

이 행사는 칼빈신학교의 존 윗트릿(John D. Witvliet)이 책임자로 있는 칼빈 워십 인스티튜트에서 해마다 개최하는 예배 심포지엄이다. 총 1500여명이 참석한 올해의 행사에는 개 교회 예배지도자와 목회자, 강사 외에도 35개의 기독교 고등학교 학생 180여명, 새 찬송가(Lift Up Your Hearts) 자문위원 80명, 200여명의 대학생, 대표적인 예배 기관의 출판 관계자 50명 등이 참석하는 등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행사로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그뿐이 아니다. 한국, 일본, 홍콩, 중국, 베트남, 싱가폴, 네팔,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권, 가나, 콩고, 이집트, 케냐, 앙골라, 카메룬, 리베리아, 나이지리아 등 아프리카권, 스코트랜드, 네덜란드, 영국, 이탈리아 등 유럽권, 코스타리코, 구아나, 자마이카 등 중미권, 그리고 미국, 캐나다, 러시아 등 전 세계 40여 개국에서 온 100여명이 넘는 외국 참석자들을 보며 모든 종족을 포용하는 행사로 자리 잡은 것이 보였다.

이 심포지엄의 특징이 있다. 첫째는 유명한 워십리더와 인기 강사를 앞세워 사람을 모으지 않는다. 말 그대로 심포지엄이기에 최근 예배에 관한 다양한 주요 이슈들을 발표하고 나누는 것이 그 취지이다. 둘째는 칼빈신학교의 학풍처럼 개혁교단이 오랜 전통으로 지켜오던 예전을 중심으로 최근의 문화적 현상을 성경적으로 접목하는데 상당한 관심을 보인다. 3박 4일간 총 5번의 공식 예배와 7종류의 시범예배가 있다. 공식 예배는 예전예배에 기초하지만 현대적 요소를 무조건 배재하진 않는다. 그에 비해 시범예배는 파격적인 시도들이 선보였다. 멀티미디어 예배, 시편음악의 현대적 재해석, 악기 예배, 드럼과 일랙 기타를 전통예전과 접목한 시도 등 예전예배의 첨단을 보는 듯 했다.

셋째는 심포지엄답게 각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강사진들이 최근의 다양한 예배 이슈들을 100여개 가까운 선택강좌로 폭넓게 다룬다. 사뭇 딱딱할 수 있는 강의임에도 불구하고 세션 등록자들의 열정과 진지함에 놀랐다. 강사 가운데 한국교회에 최근 “아트 오브 워십”이라는 책으로 소개된 저자 그렉 쉬어(Greg Scheer)도 눈에 띄었다. 잠시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한국교회를 향한 그의 뜨거운 관심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올해는 종족 예배에 대한 관심이 지대해서 목요일 하루 전체를 이 주제에 할애했다. 텍사스 달라스에 있는 킹스리전 단체의 대표인 김재우 음악선교사와 그 팀이 목요일 세션에 큰 기여를 했다. 그는 최근 음악과 예배사역자들을 선교사로 인정하고 세워주는 ACT(Artist in Christian Testimony International) 선교단체에서 선교사 안수를 받고 활발하게 사역을 하고 있다. 그는 이미 ‘글로벌 워십’과 ‘종족예배음악’으로 미국 현지의 예배사역자들과 활발한 네트워킹을 해오고 있었다. 이번 칼빈심포지엄에서는 “한국 디아스포라의 예배음악”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했고 그때 한국을 대표하는 2곡의 예배찬양으로 고형원 선교사의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와 필자의 곡 “오직 주 만이”를 소개하기도 했다.

그동안 현대적 회중예배 관련 예배컨퍼런스는 많이 참석해보았지만 전통예전을 중심으로 예배사역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행사는 처음 이다. 개인적으로 이번 행사의 가장 큰 수확은 60년대에 시작된 전통예배 갱신 운동의 최신 현주소를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쉬움이 하나 있다면 전통을 중시하고 최근에는 예전에로의 회기를 목소리 높이는 한국교회에서 이렇게 창의적이고 국제적인 예전예배 행사에 극소수만 참여했다는 점이다. 

기독교는 나라와 민족, 나이와 성별, 인종을 초월하여 예수의 사랑을 나누는 우주적 종교이다. 1세기 만에 놀라운 부흥을 이루어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한국교회이지만 이런 국제적 예배 행사에 아무런 네트워킹이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한국교회 유산이 전 세계 교회와 자연스럽게 통용, 아니 보다 적극적으로 나누는 그날을 꿈꾸어본다.

– 이유정(한빛지구촌교회 예배목사)

[이유정]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열방을 향한 노래)

작년 10월, 찬양과 경배의 밤 집회를 준비하면서 하나님께서 곡을 하나 주셨다. 시편 67편 1~7절 말씀에서 영감을 받았다. 본래 이 말씀은 김진호 목사의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우리에게 큰 복을 부으시네. 그 얼굴빛으로 우리에 비추사 주님의 구원을 온 세계에 알리소서”라는 곡으로 잘 알려져 있다. 나에게는 긍휼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복을 내려주시는 하나님, 그래서 온 세상에 그 복을 알리게 된다는 그런 이미지가 강했다. 어느 날 이 구절을 끝까지 묵상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날에 모든 열방과 민족들과 모든 땅들의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하게 될 강력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열방을 향한 찬송시가 눈에 들어왔다.
이 찬양을 작년 10월 23일 찬양과 경배의 밤 주제곡으로 정하고 예배 때마다 불렀다. 필자가 본 교회에 온지 8년이나 되었는데 공연도, 집회도 아닌 순수하게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자체 찬양모임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동안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보다 예배하는 ‘일’에 더 열심이었음을 회개했다.
 
많은 이민교회들이 마찬가지이겠지만 우리 교회도 지금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필요한 때이다. 금융위기의 타격으로 휘청한 이후 오랜 동안 어려움을 겪어왔다. 이웃교회 아니 한인교회들 가운데 우리교회가 겪은 길에 들어선 교회가 한 둘이 아니다. 안타까운 일이다. 왜 영광스러운 교회가 재정적 어려움에 힘을 잃어야 하는가? 어느 날 기도하면서 이것이 재정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운 때일수록 전 교우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고, 그 얼굴빛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재정의 불편을 불평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우들이 서로를 긍휼이 여기고 인애를 회복(호 6:6)하는 것이 우선이다. 
 
우리는 어느 덧 사랑이 동기가 아니라, 내가 맡은 봉사의 일과 책임감으로 그 자리를 채우는데 익숙해져있다. 아무런 일이 없어도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이기 때문에 사모하는 마음으로 달려 나오는 순수함이 그립다. 내가 맡은 담당 순서, 봉사의 자리가 없어도 그저 하나님을 예배하고 내 마음을 쏟아놓고, 겸손히 회개하고 나를 드리는 그 자리를 사모하자.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지고 성문이 불에 타고 있을 때 누구도 탓하지 않고 내 죄로 여기고 눈물로 기도했던 느헤미야의 마음을 품자. 그럴 때 그 얼굴빛을 비추사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얼굴빛이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누릴 수 있는가?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라. 1절에서 왜 그냥 ‘하나님의 빛으로’가 아닌 ‘그 얼굴빛으로’ 우리에게 비추신다고 했겠는가? 바로 그 얼굴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얼굴빛이 우리에게 반사되어 만방에 주의 구원을 알리게 되는 것이다. 빛을 비추는 주체는 내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다. 그래서 주의 구원을 ‘만방에 알게 하겠습니다’가 아니라 ‘만방 중에 알리소서’(v2)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할 때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한다. 그럴 때 열방을 통치하시는 주께서 황무한 이 땅을 다스리신다. 그 결과 ‘모든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v5)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v6)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v7)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제 나 자신은 물론 우리 교회가 열방을 향한 복음의 빛을 높이 드러내고, 생명을 구하는 열정이 다시 한 번 뜨거워져야 할 때이다. 예배가 살면 모든 것이 살아난다. 그럴 때 교회가 살아나고, 교회가 살면 개인과 가정과 사회도 살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