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 28, 2011 | 코스타 사역/KOSTA 세미나
2010 KOSTA/USA Youth Conference에서 있었던, 채영광 박사의 선교적 삶(Living out The Dream) 세미나입니다.
채영광 (youngkwang.chae@gmail.com)
우리는 우리 모두가 꿈꾸는 그런 삶이 있습니다. 그 꿈이 실현되는 그 날 우리는 행복해질 것이며 우리의 삶은 성공적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이 나의 것인지 하나님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정확히 말해, 내가 무엇을 위하여 공부하는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이 번 세미나를 통해, 학교에서, 교실에서, 지금 이 시간 내가 딛고 있는 이 곳 미국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멋진 Missionary로 살아갈 수 있는지 다 같이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꿈이 비로서 내 꿈이 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이미 땅끝의 선교사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우리의 꿈은 그리스도로부터
뒤늦게라도 어머니의 사랑을 깨달으면 효자, 효녀가 되지 않을 수 없듯이, 하나님의 놀라운 아가페 사랑을 알게 되면, 하나님 자녀의 신분에 맞게, 천국 시민답게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학교에서 좋아하고 존경하는 선생님이 있는가? 우리의 존경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을까? 그 분께 감사함을 표시하고 그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음으로 나타낼 수 있다.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그 분께 찬양과 감사와 예배, 그리고 말씀의 순종으로 드러난다. 크리스천이란 뜻이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작은 예수들이란 말이다. 그리스도와 나를 동일시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행한 일들을, 하나님의 사랑을 이 땅 가운데 흘려 보내는 그 동일한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크리스천인 것이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임과 동시에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형제 자매가 있는 분들은 부모님이 늘 하시는 말씀을 안다. 형제 간에, 자매 간에 싸우지 말고 사이 좋게 지내라는 것이다.부모님의 마음은 여유 있게 사는 첫째에게도 있지만, 어렵게 생활하는 둘째에게도 있다. 첫째가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도 좋아하시지만, 둘째의 일을 자기 일처럼 도와주고 챙겨주는 것을 더 좋아하신다. 우리 하나님의 마음도 이와 같다. 이 하나님 사랑을 이해하면 수직의 하나님 사랑이 수평의 이웃 사랑과 만나 온전한 십자가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은 나를 위함과 동시에 이 지구 상의 모든 민족과 족속을 위하여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셨다. 주님께서,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라고 이야기한 뜻이 여기에 있다. 복음은 로마서 1장16장 말씀처럼 모든 믿는 사람에게 구원에 이르게 하는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빌립보서 1장16절에 ‘확신하노니 너희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He who has begun a good work in you will perform it till the day of Jesus Christ)’는 말씀이 있다. 우리 마음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는 그리스도이시다. 내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이는 예수님이시다. 이 꿈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받아 들였을 때부터, 이미 주님께서 이루고 계시는 현재 진행형이면서 완성형인 꿈이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삶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 사랑으로 세상에서 승리하며, 그 고귀한 사랑을 우리의 이웃에게 전하는 삶,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지 않은가? 우리들의 꿈은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꿈으로 가는 길의 장애물
그리스도의 꿈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삶을 이야기 하기 전에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꿈에서 멀어지게 하는지 먼저 알아야 한다. 적을 알아야 백전백승이다. 예수 안에서 누리는 행복과 평안을 빼앗아 가는 것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방탕, 성적 타락, 미디어 중독, 마약 중독, 게으름, 무력감, 시기, 질투, 성냄, 그리고 수군거림(gossip) 등등 열거하자면 수없이 많다. 내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바로 다름 아닌 ‘비교의 영’이다. 그 파괴력과 파장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비교의 영이 우리를 사로 잡으면, 영적으로 더 이상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 할 수 없게 된다. 비교의 영을 ‘내적 비교 (Internal comparison)’와 ‘외적 비교 (external comparison)’ 두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다. 내적 비교는 ‘남과의 비교’를 통해 ‘나를 판단’하는 것이다. 나를 자꾸 남과 비교하면, 내가 위축된다. 주님이 부어 주셨던 은혜를 감사할 수 없게 되고, 앞으로 부어주실 은혜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외적 비교는 ‘나와의 비교’를 통해 ‘남을 판단’하는 것이다. 내 기준으로 남을 자꾸 판단하다 남의 단점을 지적하다 보면, 우월감에 빠지고 곧 교만해진다. 은혜를 더 이상 갈구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된다. 이제, 이 두 가지 비교의 영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내적 비교를 거부하자.
먼저 내적 비교를 이야기해보자.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비교 당하는 것에 익숙해진 세대들이다. 부모님,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나 보다 공부 잘하는 친구들과 비교 당하는 것에 익숙하다. 자신보다 우월한 사람과 비교 당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꾸 비교 당하다 보면, 누구나 열등감 속에서 자신감을 상실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외부의 비교에 익숙해지다 보면, 내 자신을 스스로 남과 비교한다. 우리 집은 가난한데, 우리 집은 부모님이 이혼하셨는데, 저 친구는 집도 크고, 좋은 차도 타고 다니고, 집도 정말 화목하구나.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진다. 나는 환경도 좋지 않고 능력도 변변치 못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우울해지지 않을 사람이 없다. 이것이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효과적인 사단의 전략임을 알아야 한다.
나는 미국에 유학 오기 전에, 내 스스로 두려워했던 것이 앞으로 내가 나의 동기들과 나를 비교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지금 내가 미국에서 암을 연구하고, 또 암환자를 진료하기 위해 종양 내과 임상 트레이닝을 받으러 한국을 떠나 있는데, 10년, 20년 후 한국에서 개업하여, 경제적으로 비교적 여유 있게 살고 있을 내 친구들을 보면서, 부러워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내 안에 있었다. 나는 비교가 내 행복을 얼마나 빠르게 앗아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어른들의 후회 어린 말씀을 우리는 기억한다. 학교 다닐 때 저 친구는 나보다 훨씬 공부도 못했는데, 지금은 나보다 잘 살아. 우리 동기 중에 저 친구는 강남에 빌딩이 몇 개라더군. 제일 성공했어. 나는 왜 돈을 더 잘 벌 수 있는 과를 선택하지 않았나 모르겠어. 이런 어른들의 말씀을 들으면서, 사실 나도 세상에서 꼭 성공해야 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해답은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함
그런데, 언어 사용부터 정확하고 볼 일이다. 잘 사는 것, 성공한 것과 부자인 것과는 별 개라는 것을 명심하자. 가난하면서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다. 부자이면서도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하루하루 자살을 생각하는 극도의 불안과 우울 속에서 살아 갈 수 있다. 언어는 생각의 체계이다. 우리가 우리의 언어에서 잘 사는 것과 부자인 것을 똑같이 표현 할 때, 우리 스스로의 사고를 세상의 틀 안에 국한시키게 된다. 이 세상은 성공을 연봉이 얼마인 직장에 들어가는가, 또 의사로서 얼마의 연봉을 받고 살아가는가로 평가한다. 연봉은 액수이기 때문에, 참으로 비교하기 수월하다. 연봉 액수로, 회사 지분으로, 세상의 성공을 평가하고, 경제 잡지 Fortune은 전세계 부자 순위를 발표한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원하는 것은 우리의 행복을 비교를 통해 야금야금 앗아가려는 것임을 깨닫자. 나는 미국에 오기 전에 만났던 내 신앙의 동역자 친구들에게 내가 비교의 영을 거부하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에 감사와 기쁨으로 공부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 부탁을 했다. 목사님들께도 찾아가 동일한 기도 제목으로 기도를 부탁 드렸다. 나 역시 하나님을 아는 지식 외에 그 어떤 것도 부러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미국 볼티모어(Baltimore)에서 공부하면서, 으리으리한 집에 사시는 한 교수님 댁에 방문하면서 하나님께 참 감사하게 된 일이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나의 반응은 언제 이렇게 좋은 집에 살아보나 하는 한숨이거나 나도 열심히 돈을 벌어 꼭 이런 집에 살아야 겠다는 야망, 둘 중의 하나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집에 살아도, 만약 그리스도를 경외함이 없다면, 아무 소용 없겠구나 하는 마음이 생겼다. 하나님이 축복해주시면, 내가 막 고생하며 노력하지 않아도, 언젠가 나도 이런 집에서 살 수도 있겠구나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나는 우리 주님이 있으니까, 찬송가 가사처럼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다 하늘 나라’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나는 내 유학 전의 기도가 응답되었음을 알았다. 주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게 될 때 비교의 영을 거부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내 평생의 기도 제목이기도 하다. 내가 영적으로 무디어 질 때, 사단이 나를 이 무기로 공격할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너의 친구들이, 후배들이 그렇게 성공할 때, 너는 무얼 하고 산 거니? 왜 그런 고생을 하고 사니? 여태까지, 인생을 허비했구나, 이런 속삭임이 들린다면, 그 때가 곧 다시 주님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야 할 때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바로 이 말씀을 붙잡을 때다.
어디에서보다 누구와 함께
내가 미국에서 의사생활을 하기 전에, 한국에서는 시험장이 없어서 하와이로서 미국의사고시 시험 스텝 3 시험을 봤다. 이틀 동안 하루에 8시간씩 컴퓨터 앞에 앉아서 문제를 풀어야 하는 시험이었다. 혼자 와이키키 해변 앞의 한 호텔에서 시험 전날 공부를 하면서 이틀간 시험을 봤다. 바로 한국에 가기에는 비행기 표가 아깝다는 단순한 마음으로 시험 친 후 하루 관광할 수 있는 날을 만들어 놓았다. 와이키키 비치에서 혼자 일광욕도 하고, 하나우마 베이(Hanauma Bay)에서 스노클링도 했다. 그런데, 그렇게 즐겁지가 않았다. 날씨는 좋고, 경치도 좋고, 스노클링하기에도 최적의 환경이었는데, 그렇게 기쁘지가 않았다. 좋은 것을 보고 좋다고 할 사람이 곁에 없었다. 가족끼리, 연인끼리 놀러 와서 재미있게 노는 그 곳에서 혼자 돌아다니는데, 갑자기 외로움이 엄습했다. 그 때 깨달은 것이 있다. ‘어디에 가느냐’ 보다 중요한 것이 ‘누구와 함께 가느냐’이구나.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당신과의 ‘동행의 기쁨’을 주기를 원하신다.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와 함께 하고 싶은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다. 정말 주 예수와 동행하면 그 어디나 하늘 나라가 된다. 두려움도, 외로움도, 슬픔도, 분노도, 절망도 눈 녹듯 사라진다. 지구 상 아무리 척박한 땅이라도 내 사랑하는 아내와 딸 린아와 함께 할 수 있는 곳이라면 나는 그 땅에서 살고 싶다. 날씨가 좋든 나쁘든, 경제적으로 부유하든 어렵든 상관하지 않는다. 하물며 우리 주 예수님과 동행하면,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문제가 되지 않는, 세상이 모르는 기쁨이 함께할 것을 믿는다. (다음편에 계속)
Feb 19, 2011 | 코스타 사역/KOSTA 세미나
2010 KOSTA/USA Youth Conference에서 있었던, 채영광 박사의 선교적 삶(Living out The Dream) 세미나입니다.
채영광 (youngkwang.chae@gmail.com)
우리는 우리 모두가 꿈꾸는 그런 삶이 있습니다. 그 꿈이 실현되는 그 날 우리는 행복해질 것이며 우리의 삶은 성공적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이 나의 것인지 하나님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정확히 말해, 내가 무엇을 위하여 공부하는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이 번 세미나를 통해, 학교에서, 교실에서, 지금 이 시간 내가 딛고 있는 이 곳 미국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멋진 Missionary로 살아갈 수 있는지 다 같이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꿈이 비로서 내 꿈이 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이미 땅끝의 선교사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사랑으로 공고히 해야 할 우리의 정체성
그런데, 사람의 정체성은 자신이 받은 사랑만큼 뚜렷해진다. 어릴 적에 누구의 지극한 사랑을 한 몸에 받아본 적이 있는가? 할머니, 할아버지가 나를 끔찍히 예뻐해주시고, 사랑해주셨는가? 내가 해달라는 것은 다 해주셨는가? 그렇다면, 당신의 정체성과 자존감은 받은 사랑만큼 공고하다. 나도 어렸을 때 시골에 갔을 때 항상 할머니 할아버지께 이것 저것 사달라 조르고, 늘 할머니 할아버지와 즐겁게 놀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은 나의 사랑스러운 딸 린아가 우리 부모님과 장인 장모님께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자라는 모습을 보고 있다. 부모인 나보다 할머니를 더 좋아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흐뭇하다. 가족들의 사랑 안에 흠뻑 젖는 만큼 린아의 기억 속에 ‘나는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각인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가 안에 사랑이 충만할 때, 그 사랑이 린아로부터 또 다른 이들에게 흘러갈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당신이 인생이 파국으로 치닫을 때, 옥상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 내가 죽으면 가장 슬퍼할 사람들의 얼굴들을 떠올려보자. 나의 외삼촌은 힘들 때, 우리 어머니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데, 내가 지금 이렇게 행동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실망하시고, 슬퍼하실까 하는 그 생각 하나로 험난한 인생 여정을 걸어오셨다고 말씀하셨다. 사람은 너무나 힘들면, 자살 충동이 생기게 되어 있다. 그 때, 어릴 때 우리 할머니가 나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셨는데 하는 생각이 들면, 그 할머니의 사랑이 나를 살릴 것이다. 할머니가 부어 주신 사랑만큼 내가 나의 가치를 인정한 셈이다. 자살을 통해 할머니의 사랑을 헛되게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더 나아가 할머니가 나를 믿어주고 사랑해준 것처럼, 나 역시 그 사랑을 나의 자녀, 손자, 손녀에게 전할 수 있게 된다.
거꾸로 사랑이 없다면, 정체성은 흔들린다. 나에게 가치를 부여해준 사람이 없다면, 내가 나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때, 내 삶은 송두리째 흔들리게 되어 있다. 내가 대한민국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국가로부터 받은 것보다 빼앗긴 것이, 당한 것이 많다고 느낀다면, 나도 대한민국을 사랑할 수 없다.
정체성에서 꿈으로
내 안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민, 내가 가장 존경하는 우리 부모님의 귀한 아들과 딸이라는 정체성이 자리 잡고 있다면, 우리의 관심은 자연히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또 부모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로 귀결된다. 그런데 조국을 사랑하면 현재 무엇을 가장 필요로 하는지 고민하게 되고, 현재 자신의 위치에서 조국을 위해 조그마한 것이라도 할 일이 없는지 찾아 보게 된다. 마찬가지로, 부모님을 사랑하면, 지금 부모님이 무엇을 가장 기뻐하실지 생각하고, 또 여쭈어보게 되어 있다. 그리고 자연적으로 그 일을 하게 된다.
아내와 내가 우리 딸 린아를 기르면서 가지게 된 것이 ‘부모’라는 정체성이다. 내가 부모가 되어 보니, 린아를 위해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아이가 아프면, 내 맘이 찢어지고, 아이가 아빠 하고 내 품에 앉기면, 아무리 피곤한 날이어도 모든 피로가 다 한 순간에 사라진다. 부모의 입장에서, 나는 내 딸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이 필요한지에 가장 관심이 가고, 그 것들을 해주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이 것은 지극 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또, 나를 똑같이 고생하시면서 키우셨을 나의 부모님을 생각하니, 부모님께 앞으로 더 잘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이렇듯, 우리의 정체성이 자연스럽게 우리가 해야 할 일들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성경에서 발견하는 우리의 정체성
그런데, 성경에 놀라운 말씀이 쓰여져 있다는 것을 아는가?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 삼아주셨다고 말씀하신다. 창조주 하나님 당신을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부르라고 허락해주셨다. 우리의 친구 되겠다고 하셨다. 우리가 어머니 뱃 속에서 잉태되기 이전부터, 아니 세상을 창조하시기 이전부터 우리를 알고 계셨다고 말씀하신다. 믿겨지는가? 우리의 이름을 아시며, 머리카락 수까지 아신단다. 그 뿐 만이 아니다. 우리와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하신다. 깜짝 놀랄 말이다. 가장 신기한 일은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에서 증거하듯이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화목 제물로 내어주셨다는 것이다. 그로써 우리를 사망으로 이끄는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셨다. 잘 믿겨지지 않는 말씀이다. 그런데, 단순히 믿기만 하면, 이 복음을 내 삶의 진리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영원한 생명과 죄의 용서,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질 것이라 하신다. 이 복음은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값을 지불할 것은 하나도 없다. 예수님께서 대신 모든 대가를 지불하셨기에 우리는 공짜로 받는 선물이다. 우리는 받기만 하면 되는, 말 그대로 free gift이다. 무언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 당연시되는 세상의 이치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 복음은 하나님의 놀라운 작품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
자, 이제 정체성 이야기로 돌아가자. 우리들은 누구인가?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 것이 가장 중요한 우리들의 정체성(Identity)이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 분은 우리의 모든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주신다. 그 분은 우리를 창조하셨으며, 아무 조건 없이 우리를 위해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돌아가게 하셨다. 그것도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가치 없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만큼의 가치를 부여해주신 분이다.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 부모님은 아무리 우리를 사랑해주신다고 해도, 나와 평생 매 순간 함께 하실 수 없다. 그리고 인간이기에 실수가 있고,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도 있다. 또한 사랑이 잘못된 방향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들 마음에 상처를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기에 실수가 없으시고, 약속을 식언치 않으시며, 우리에게 조건 없이 사랑해주시는 분이시다. 항상 좋으신 하나님이시다 (God is good all the time). 무엇보다, 우리 하나님은 공간과 시간의 제약이 없으신 분이다. 우리와 늘 동행해주시며, 보호해주시는 분이시다. 그 우리가 그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이 실감이 가는가? 하나님 나라, 천국을 우리가 유업으로 물려 받을 것을 믿는가?
내 딸 린아가 아빠를 부르면, 나는 내 방에서 아무리 바쁜 일을 하고 있더라도 린아에게 달려간다. 또 우리 집과 집안의 물건 모두 다 린아 것이 된다. 교회에서 우리 가정을 부를 때, ‘린아 엄마 아빠네 ‘라고 하지 않는다. ‘린아네 가정’라고 한다. 그렇다. 우리는 자녀된 권세로 언제든지 아버지 하나님과 친밀히 소통할 수 있으며, 천국을 기업으로 물려 받을 정당한 법적 상속자들이다. 가슴으로 느껴지는가? 하나님 자녀됨의 권세, 이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지만 모두 다 가진 자이다. 이 조건 없는 사랑 안에 온전히 거하는 것, 그것이 우리에 주어진 최고의 선물이다.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에 거하자.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히 샘솟는 샘물과 같다. 그 생명수가 나를 적시고 흘러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녀들에게 부어 주시는 그 사랑 안에 거하고 있는가? 이 사랑이 우리를 살리는 힘이고 우리를 움직이는 동력이다. 하나님의 귀한 자녀로서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깨닫고 온전히 누려야 한다. 먼저 진정한 자녀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꿈을, 사명을 생각하기 이전에, 우리의 하나님 자녀됨을 묵상하자. To do보다 to be가 먼저 이다.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무조건적 사랑 안에 흠뻑 젖어야 한다. 그 사랑에 배추가 소금에 절여지듯이 ‘사랑 절임’을 당해야 한다. 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하나님 자녀라는 우리의 정체성을 더욱 공고히 해준다.
얼굴에 큰 화상을 입은 어머니가 있었다. 아들은 괴물처럼 꺼멓고 흉측하게 생긴 자기 어머니가 참 부끄러웠다. 되도록이면 그런 어머니가 학교에 찾아오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싫었다. 어머니가 시키는 것은 다 하기 싫었고, 엄마를 무시하면서 반항적인 아이로 커갔다. 그런데 어느 날 아들은 어머니 얼굴의 비밀을 이웃 사람들에게서 듣게 되었다. 어릴 때 자신이 몰래 부엌에 들어가 이것 저것 만지다 끊는 물이 들어있는 주전자가 어린 아들에게 쏟아지는 것을 보고 엄마가 달려들어 그 뜨거운 물을 주전자째 받아서 얼굴이 그렇게 된 것이라고. 아들은 그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엄마 얼굴만 보면 눈물이 났다. 아들은 엄마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스러워했다. 엄마가 심부름 시켜주시길 기다리는 아이로 변하게 되었다. 먼저 어머니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 어머니의 얼굴을 보는 눈이 바뀐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마음이 달라진다. 위 이야기 속 어머니 얼굴의 화상이 우리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요, 그 분 손과 발의 못자국이다. 그 당시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인 십자가, 그 고통과 수치, 모욕을 나의 죄 때문에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사랑을 묵상하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 안에 거하자.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너를 죽기까지 사랑하여 구원하신 너의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건강, 물질, 직업은 우리의 정체성과 무관하다.
내가 부모가 되고 보니, 내 딸 린아를 보면서, 아프지 않고 잘 크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린아가 자기가 즐거워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잘 하게 되길 바라는 마음이고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린아가 가난하게 살던지, 부자로 살든지 그 마음에 기쁨이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부모로서 가장 기쁠 때는 그냥 아빠, 엄마를 아빠, 엄마로 불러주는 것뿐이다. 그러고 보니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린아가 태어나기 전부터 뱃 속의 아기와 이야기하며, 기도해주고, 아기 옷을, 장난감을, 우유 병을 사며 기다리다, 드디어 분만실에서 응애 소리를 들으며, 감격의 눈물을 흘릴 때, 우리 하나님이 그러셨구나. 세상을 열심히 창조하시고 마지막 날, 아담에게, 너를 위해 이렇게 준비했다라고 하시며 기쁨과 감격으로 아담과 교통하셨을 우리 하나님이 떠올랐다. 린아가 나를 아빠라 불러주며 내 품에 앉길 때, 그렇구나, 우리 하나님도 내가 하나님을 찾을 때, 주님의 품 안으로 나아갈 때 가장 기뻐하시겠구나 생각했다. 린아가 다른 아이보다 걷는 것을, 말하는 것을, 한글책과 영어책을 늦게 읽게 되더라도, 내가 린아를 사랑하는 정도와는 아무 상관이 없겠다는 생각 가운데, 내가 이 세상에서 물질적으로, 학문적으로 얼마나 성공하든지에 무관하게 우리 주님은 나를 변함 없이 사랑하시겠구나 하는 확신이 생겼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은 우리가 건강하든지 장애가 있든지, 돈이 있든지 없든지, 화려한 직업을 가졌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내 가치는 내 소유에 있지 않고, 내가 온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 딸이라는 신분에서 나온다. 내 가치는 내 능력과 배경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직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게서 나온다. 내 가치는 현재 내 상황이 어렵다고, 힘들다고 바뀌지 않는다. 만 원짜리 지폐를 발로 밟아 더럽게 한다고 해서, 만 원 지폐의 가치가 사라지지 않는 것과 같다. 자, 이제 자유하자. 내가 만든 기준, 주변의 기대가 충족될 때, 내 가치가 더 높아질 것이라는 생각에서 자유하자. 더 많은 이들이 나의 가치를 인정해줄 때, 내게 인기가 더 생길 때, 더 좋은 성적을 얻을 때, 더 전도유망한 직업을 가지게 될 때, 내 가치가 올라갈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자. 나의 가치는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나를 지금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는 나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에게서부터 나온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와 미국 시민이 된 사람이 있다. 신체 장애자라고, 세금을 더 많이 낸다고, 특정 직업을 가졌다고 미국 시민이라는 그의 신분은 바뀌지 않는다. 그는 시민권을 받기 위해, 여러 가지 사전 절차를 거친 후 미국 시민권 선서를 하면 된다. 복음은 사실 더 간단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믿기만 하면, 우리는 천국 시민권을 받게 된다. 이 땅에서 우리의 지위의 높고 낮음이 천국 시민이라는 우리의 신분에 결코 영향을 줄 수 없다. 항상 찬송을 부르고 기쁘게 살아가는 한 파출부 아줌마에게는 그녀가 일하는 저택에 사는 재벌가 가족이 부럽지 않다. 자신이 파출부라는 자격지심도 없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직도 모르고, 가족 경영권 다툼으로 마음이 피폐해진 가족들을 불쌍히 여길 뿐이다. 김우현 감독의 ‘팔복: 최춘선 할아버지’ 동영상을 보면, 할아버지께서 이 세상 최고의 권세는 ‘부러운 자가 없는 것’이라고 하셨다. 내가 하나님 자녀인데, 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다는 이 배짱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가질 수 없다. 시편 23편의 고백이 우리들의 고백이 되기를 바란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음편에 계속)
Dec 15, 2010 | 코스타 사역/KOSTA 세미나
2010 KOSTA/USA Youth Conference에서 있었던, 채영광 박사의 선교적 삶(Living out The Dream) 세미나입니다.
채영광 (youngkwang.chae@gmail.com)
우리는 우리 모두가 꿈꾸는 그런 삶이 있습니다. 그 꿈이 실현되는 그 날 우리는 행복해질 것이며 우리의 삶은 성공적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이 나의 것인지 하나님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정확히 말해, 내가 무엇을 위하여 공부하는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이 번 세미나를 통해, 학교에서, 교실에서, 지금 이 시간 내가 딛고 있는 이 곳 미국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멋진 Missionary로 살아갈 수 있는지 다 같이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꿈이 비로서 내 꿈이 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이미 땅끝의 선교사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서론
Living out My Dream
2010년 시카고 의대 MD PhD 통합 과정을 20세의 나이로 졸업한 쇼 야노군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나는 지금 서른이 넘은 나이로 병원에서 전공의로 일하고 있지만, 그는 이제 갓 이십대 초반의 나이로 전공의로 일하고 있다. 시카고에서 자란 그는 한국인 어머니와 일본인 아버지 밑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모두 홈스쿨링을 하고 9세에 로욜라 대학에 입학하고 12세에 시카고 의대에 입학해서 이미 한국과 미국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2세에 쇼팽을 연주하고 3세부터 작곡을 했다는 믿기지 않는 신동이라고 했다. 그의 인터뷰를 보면서 그가 인격적으로도 참 성숙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남들보다 일찍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으니 뇌 연구를 통해 인류에 공헌하고 싶다고 하면서, 앞으로 어떤 꿈이 있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I am living out my dream now.” 이 말이 상당히 오랫동안 나의 뇌리에 남았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자기 꿈을 살아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남들이 성취하지 못한 것들을 가지고, 남들보다 빠른 속도로 인생을 살아가는 그 청년이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부담스러운 주변의 관심은 차지하고서라도 그를 극성 아시아계 부모의 희생양으로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각과 그를 외계인 취급하며 인터뷰 때마다 노벨상이 목표가 아니냐고 다짜고짜 묻는 미디어의 냉소적인 태도 때문에도 참 힘들었겠구나 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래서일까? 오프라 윈프리 쇼나 제이 레노 쇼의 거듭된 출연 요청도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그 모든 세간의 관심 속에서 그 청년은 자신이 꿈꾸는 삶을 살고 있기에 행복하다고 했다. 행복이란 과연 무엇일까? 꿈이 실현되면 행복할까? 과연 나에게는 그런 꿈이 있는가? 만약 없다면 나에게 행복이 어떻게 찾아올까? 꿈이 있다면, 그 꿈은 어떻게 생겼는가? 여러 가지 질문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청년은 지금도 매 주 고전을 몇 권씩 읽으며, 고전 중의 고전, 성경은 어려서부터 이미 여러 번 완독했다고 한다. 나는 그가 크리스천인지는 모른다. 그가 말하는 그의 꿈, “my dream”은 과연 무엇일까? 꿈을 단순히 ‘자기가 하고 싶은 일’로 정의해도 좋은 것일까? 꿈을 살아내긴 하되 ‘어떤 꿈’을 살아내야 하는가가 더 중요할 지 모른다. 또 ‘누구의 꿈’을 살아내야 하는 것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본론
행복의 조건은 무엇인가?
청소년들에게 세 가지 질문을 하면 그들을 고민을 어느 정도 다 알 수 있다고 한다. “공부 잘해?”, “여자친구, 남자 친구는 있어?”, 그리고 “앞으로 뭐 할거니?” 가 그 질문들이다. 설명할 필요도 없는 공부로 인한 스트레스, 한창 이성에 대한 관심이 넘치는 시기이니만큼 좋아하는 이성에 대한 고민, 그리고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진로에 대한 걱정이 이 세 질문에 대한 대답 속에 고스란히 담긴다. 돈이 곧 힘이 되는 미국 이민사회에서 또 한가지 질문을 추가해본다. “너희 집 잘 살아?” 자신의 교육을 위해 아낌없이 외제차 몇 대 정도되는 어마어마한 사교육비를 투자하는 기러기 부모님도 계신 반면, local business를 하시며 어렵게 자녀들을 뒷바라지하시는 이민자 부모들도 있다. 두 경우 모두 그들이 ‘부모님의 우상’이라는 것도 청소년들은 안다. 미국 땅에서 자식 농사 잘 지어 남 부럽지 않은 멋진 가문을 만들어 보고자 하는 보모님의 부담스러운 기대를 모르는 청소년들이 있다면, 그들은 아직도 한참 더 철이 들어야 한다. 청소년들에게 부러워할 모든 것을 가진 청년 쇼군의 이야기는 신선한 자극제가 되기보다 어느 별나라 이야기로, 아니면 잘못하면 부모님이 인용할 ‘짜증나는’ 예화 소재거리로 인식되기 쉬울지 모른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내가 공부를 잘하게 되고, 맘에 드는 이성친구가 생기고, 넉넉한 부모님의 후원 아래 보장된 미래가 있는 진로가 결정되면 나는 과연 행복해질까?
고민의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
먼저 위의 질문들에서 드러나는 현재 내 고민들의 근본 뿌리가 무엇인지 생각 보자. 계속되는 고민은 결국 우리를 우울의 숲으로 인도한다. 고민을 더 한다고 해결책이 보일 것 같지 않다. 단언하건대, 우리 고민의 원인은 ‘자기 사랑’에 있다. 내 자신에 대해 많은 기대를 하고 있는 만큼 더 큰 상처가 생길 수 있다. 컷트라인이 있을 때 합격과 불합격이 있기 마련이다. 목표가 없다면 좌절도 없다. 그런데 목표, 기준치, 컷트라인이라는 것이 내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가치가 있기에 생긴다. 내 안에 내가 정해놓은 목표가 무엇인가? 내 성적은 이 정도는 되어야지, 내 여자친구는, 내 남자친구는 이 정도는 되어야지, 내가 성공하려면 적어도 이 정도 집안 배경은 있어야 하는데, 내가 좋은 대학 가려면, 이 정도 스펙을 쌓아야 하는데, 내가 나중에 성공하게 되면 적어도 이 정도 차를 사고, 이 정도 집에서 살아야 하는데, 등등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자신이 정해놓은 목표를 향해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또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의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무엇인가를 추구한다. 고생을 많이 하면, 내 손해이다. 누구나 고생을 최소화하여 가장 많은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직업을 선망하게 된다. 꼭 내가 만든 목표가 아니더라도, 주변에서, 부모님이 우리에게 심어준 목표일 수도 있다. 우리 아들, 우리 딸은 적어도 미국에서 이 정도 대학은 들어가주어야 한다. 부모님의 기대치가 내 기대치로 나도 모르게 바뀌었는지도 생각해 볼 일이다. 많은 경
우, 내가 무엇인가를 성취함으로써 나의 가치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한다.
내 꿈은 어디서 생긴 것일까?
이제 가만히 생각해보자. 내 꿈은 어디서 온 것인가? 내 꿈이 세상이 불어 넣은 것인지, 주님이 주신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부지불식간에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부모님과의 대화에서, 또는 미디어의 영향 속에서 생겨난 꿈이 있을 수 있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보자. 나에게는 없는 것을 친구는 가졌을 수 있다. 내게 없는 미국 시민권이 친구에게 있다. 나보다 영어를 훨씬 잘 한다. 나보다 학교에서 인기가 있고, 나보다 학교 성적이 좋다. 나에게 없는 무언가를 부러워하면서, 우리의 꿈이 자라났었을 수 있다. 내가 없는 것을 가지기 위해,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형성된 방어기제적 꿈도 있다. 연예인이 되고 싶은가? 억대 연봉을 받고 싶은가? 이렇다 할 꿈이 없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자라서 막연하게 하고 싶은 일이 있는가? 좋은 집에서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면서 마음껏 세계 여행을 하고 싶은가? 좋은 옷을 입고 멋진 스타일의 머리를 하고, 예쁜 핸드백을 유행에 맞게 구입해서 들고 다니고 싶은가? 좋은 독일차를 몰고 다니며, 고급 레스토랑에서 품격 있는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고 싶은가? 그런데, 현실을 보니 부자들이 자기 하고 싶은 것들은 마음대로 다 하면서 편하게 사는 것 같은가? 그래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면, 내 적성에 크게 어긋나지만 않는다면, 어떤 직업이든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지금 하고 싶어하는 것들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가 생각해보자. 물론 이 답은 각자 한 사람 한 사람마다 다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을 먼저 던지고 싶다. 우리 인생 가운데, 하고 싶은 모든 일들 가운데, 그 중심에 하나님이 계신지를 묻고 싶다.
꿈인가? 본성인가?
이제 ‘꿈’을 막연히 하고 싶은 일 정도로 정의해도 좋을지 생각해보자. 적어도 ‘꿈’이라고 한다면, 내 본성이 하고 싶은 대로 내 맡기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마음껏 먹고, 놀러 다니고 싶은 곳을 거침 없이 다는 것을 꿈이라고 하기엔 미안하지 않은가? 예쁜 사람, 잘 생긴 사람을 만나 사귀고 결혼하는 것을 꿈이라고 하지 않는다. 꿈이라면, 적어도 꿈을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그런 것이 아닐까? 이제 꿈과 본성을 구별해보자. 꿈은 나의 본성에 역행하는 것이다. 공부가 자연스럽게 삶의 일부로 느껴지는가? 너무 쉽게 느껴지는가? 아니면, 공부를 하기 위해, 마음을 굳게 먹고, 계획을 짜고, 의지를 가지고, 늘 열심히 하려 노력을 하고 있는가? 누가 나에게 불쾌한 일을 하면, 그 사람 험담을 하고 싶어지는가 아니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며 기도하게 되는가? 크리스천인 우리들은 꿈을 이야기할 때, 적어도 우리의 본능에 우리의 몸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을 걸, 그 이상의 가치를 말해야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러한 꿈을 어떻게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정체성에서 꿈이 생긴다.
온전한 꿈은 내 정체성이 분명해질 때 생긴다. 정체성이 먼저이고 꿈은 나중이다. 대한민국에 대한 자긍심이 없으면 애국자가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독립운동가들은 모두 대한민국에 대한 통렬한 역사의식과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불과 50년 전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배고픔과 가난 속에서 허덕이던 변방 국가였던 한국이 이제는 G20 세계 정상 회의의 의장국이 되었다. 세계에 유래 없는 기적의 주인공 대한민국, 전 WHO 사무총장(Secretary General)도, 현 UN 사무총장도 한국인이다. 인터넷 인프라와 모바일 통신 기술에서 대한 민국을 따라올 국가가 없다. 한번도 본선 진출, 아니 1승을 올려본 적이 없는 한국 축구가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4강의 신화를 이룩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울렁인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정체성이 있다면, 대한민국을 사랑하게 되고, 걱정하게 되고, 나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게 되어 있다.
모국을 떠나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고 한다. 내가 10살 때 델라웨어의 한 초등학교를 다녔다. 그 때 한국을 아는 미국 친구들은 한국에서 입양된 친구 빼고 아무도 없었다. 한국에서 올림픽을 개최하게 되었는데도, 아무도 몰랐다. 그 때는 그 사실이 참 안타까웠다. 쇼핑몰에 가면, 나를 보고 중국인이라고 놀리는 아이들도 심심치 않게 보던 때였다. 내가 아는 친구는 벽에 큰 태극기를 걸어놓고 공부했다고 한다. 미국 친구들의 유창한 영어에 주눅이 들었을 때는 속으로 ‘너희들 한국말로 하면 다 죽었어.’라고 되뇌이며, 스스로 자신감을 북돋우며 공부했다고 한다. 미국에서 혼자 고생하면서 공부할 때, 내가 잘 못하면 대한민국이 욕먹는다는 생각 때문에 더 열심히 공부했다고 한다. 나와 대한민국을 동일시 할 때, 대한민국이 나의 자랑이 될 때, 나 역시 대한민국의 자랑이 되길 원하게 되다. 적어도 미국 땅에서 대한민국의 망신이 되길 원치 않게 된다. 마찬가지이다. 나에게 부모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다면, 부모님의 기대가 나에게는 무거운 짐이 되기 보다, ‘행복한 부담’이 될 수 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내 어버지의 아들, 내 어머니의 딸이 나의 정체성이 된다면, 그 부모님을 실망시켜드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최선을 다하게 된다. 누가 내 욕을 하고 다니면 참을 수 있어도 아버지 욕을 하고 다닌다면, 그것만은 참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드는가?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 내가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하고 싶다는 의지가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아버지와 당신을 동일시 하고 있다. 아버지 아들, 딸이라는 당신의 정체성은 당신을 움직이는 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정체성 속에서 꿈이 태동한다. (다음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