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바리새인 테스트

post-KOSTA

바리새인
테스트

나에게는 나만의 ‘신앙상태 자가진단 테스트’가 있다. 나의 신앙상태가 침체기에
들어섰는지, 아닌지를 살펴보는 테스트가 되겠다. 뭐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무슨 준비가 필요한것도 아니다. 간단하다. 잠시
눈을 감고 예수님을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오늘 오신다고 가정한다. 이때 내 마음의 상태를 살핀다. 내가 주님께 잘못하고
있을 때, 그리고 그것을 바로 잡으려 하지않을 때, 나는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 오늘 오시지 말고요, 다음에 오세요.” 이
말은 내가 한국에 있을 때 혼자 집을 보다 각종 수금원(신문, 전기, 가스) 아저씨들에게 말하던 내용과 너무나 엽기적으로 유사하다
“지금 아무도 안 계시니까, 다음에 오세요.” 한 마디로 오시는 예수님 맞을 준비가 안 되어 있다. 이런 반응이 나올 때는,
십중 팔구 내가 이미 영적 침체국면에 들어 있거나 아니면 침체국면을 향해 달려갈 때다. 물론 나도 언제나 영적침체에서 허우적대는
것은 아니니, 내 마음의 예수님께 달리 반응할 때가 있기도 하다. “예수님, 뵙고 싶어요. 오늘 오셨으면 좋겠어요.”

내가 이렇게 예수님께 말할 수 있다면 ‘내가 영적성장 국면에 있구나’ 생각하고
안심했었다. ‘나도 이제 많이 컸구나’ 생각하고,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곤 했다. 하지만 내 마음에 이런 ‘똘똘한’ 반응이
있다 해서 다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최근에 깨달았다. 그래서 다음으로 만든 테스트가 있다. 이름하여 “바리새인 테스트”.
이번에는 준비물이 하나 필요한데 그것은 성경구절 누가복음 18장 10절-13절이다. 이 구절에는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가
등장한다. 함께 읽어 보자.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 갔다. 하나는 바리새파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세리다.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토색한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또는 이 세리와도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런데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 볼 엄두도 못내고, 가슴을 치며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표준 새번역, 눅18:10-13)

이 두 기도를 읽고 내가 누구와 더 비슷한지 비교해 본다. 많은 경우 나는
세리보다 바리새인과 비슷하다. 예를 들면,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요, 교회는 안 빠지고요, 교회에서 중등부 학생도 가르치고요,
요새는 이코스타에 글도 씁니다. 그리고 나는 다른 날나리 크리스천과는 달라요. 또 교만하지도 않구요. 예수님, 오늘 오세요.”
이 경우 나는 이 “바리새인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를 의롭다 하시기 때문이다(눅18:14).

왜 예수님은 신앙의 모범생 같은 바리새인을 의롭다고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신앙의 낙제생 같은 세리를 의롭다 하시는가? 그 차이는 은혜다. 오늘도 나는 주님의 은혜를 목말라 하는가? 아니면 주님의 은혜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가? 주님의 은혜가 내 삶에 녹아 있는지, 아니면 주체 할 수 없는 나의 의로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갈6:3).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 나는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 우리는 존재할 수 없다.

코스타가 나에게 준 선물이 있다면, 그것은 사역자 의식이다. 이 의식은 우리는
복음을 향유하는 ‘복음의 소비자’일 뿐 아니라, 주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복음의 생산자’가 되어야 한다는 깨달음이다. 하지만
주님의 일을 할 때 내 안에 있는 바리새인들을 몰아내지 못한다면, 내가 하는 그 모든 일들은 의미가 없음을 깨닫는다. 주님을
위해 하는 그 일이 오히려 주님의 의를 가린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안다. 나는 아마도 평생 내 안의 바리새인들과 싸워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무익한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에게 감사하다. 주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해야할 일을 겨우 하는
무익한 종(눅 17:10)일 따름이다.

[김연종] 따뜻한 그리스도인을 위하여

따뜻한
그리스도인을 위하여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떠올릴 때 빠지지 않는 이미지가 있다. 부정적인 것 중의
하나가 말이 많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결벽주의자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결벽증세는 세상의 것에 대한 구별짓기를 넘어서
그것을 정죄하거나 거부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는 사람에 대해 못마땅해 하다 못해 그를 불결히
여기는 것이다. 은연중 죄인취급하는 까닭에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괜스레 자신이 큰 죄를 짓는 것 같아 기분이 언짢고 오히려
그런 그리스도인에 대해 거부감을 보이곤 한다. 세상 것에 대한 거리두기의 근거로 흔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는 말씀이 거론되곤
한다. 그래서인지 술을 마시지 말라는 것을 강조하다 못해 누가 술을 먹으면 사탄의 자식이라고 윽박지르는 사람도 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가 악한 정도를 지나쳐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기 어려운 경우가 많기에 그리스도인의 마음이나 행위가짐이 더욱 구별되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별짓기는 자칫 기독신앙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스스로도 경직된 사고를 갖는 작용을 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성결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그들의 특정행위를 근거로 삼거나 나아가서는 그러한 구분법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재화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누가 담배를 피우는 것만으로도 ‘그는 안된다’고 선뜻 고개를 흔드는 것이 그 예이다. 사회에서는
얼마든지 보편화되어 있는 행위가 기독인들 사이에서 지나치리만치 엄격하게 규제될 때, 믿지 않는 사람들 간에는 뭐 별일 아닌 것
가지고 유난을 떤다는 볼멘 소리도 들려 온다.

이렇듯 엄격한 교회의 관행에 익숙한 사람들은 세상 근처에만 가도 오염될까봐
두려워 한다. 그러다 보니 좋은(?) 그리스도인일수록 세상과는 절연하고 교회 안에서만 거룩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 삶의 목적도
다르고 인생관도 다르고 사는 방식도 다르니 자연 같은 세상에는 살지만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예수를 믿고 나서 보니 나
자신도 그러한 사고와 문화에 참으로 익숙해져 있었다. 문제많은 세상문화에 가까이 가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덧 ‘예수쟁이’
10여년을 지내면서 그동안 세상에 대해 너무 많은 담을 쌓고 있는 것이 아닌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원칙은 옳았는지 모르지만
방법이 서툴러 잃어버린 것이 많음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술이 싫어서 술자리를 피하다보니 사람을 피하게 되어 버렸고 나아가서는
그러한 모임이나 사람들을 은연중 백안시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화두로 삼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서이다. 우리의 교회문화를
이야기 할 때 해답을 선뜻 찾지 못하는 가장 큰 까닭은 교회가 인식하는 세상과 실제 우리네 삶의 간격이 너무 큰 데서 찾을 수
있다. 지금의 교회문화로는 수용이 어려운 일들을 겪고 사는 사람들에게 교회는 언제나 먼 종교적인 세계로 남아있다. 술을 마실
수 밖에 없는 영업사원, 술자리에 동석해야 하는 신입사원, 술로 통과의례를 치루는 대학 신입생환영회 등. 술 하나만 예를 들더라도
교회가 용납하지 않는 현실은 우리 주위에 널려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그리스도인의 선택은 피하거나 얼버무리는 등 그 행위가 옹색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인지 세상문화와 교회문화와의 갈등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기독교학교나 기독교회사를 선택함으로 고민에서 벗어나려
한다.

이러한 현상의 밑바탕에는 세상의 보편문화를 허용하지 않는 교회의 원칙과 율법이
깔려 있다. 덧붙여 ‘교역자들의 제한된 경험’이 세상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를 편협하게 구속한 탓도 있을 것이다. 때문에
성도들의 경우 자신의 생활에 대한 죄책감이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나 고민에 대해 입을 다물게 하는 경향이 있다. 결국 세상문화에
대한 담쌓기는 우리의 생활을 단속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세상적인 것에 대한 거부감으로 나타나거나 급기야는 사회생활과 신앙생활을
적당히 병행하는 이중의 사고와 생활을 내면화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언젠가 음악을 전공하는 자매가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녀는 음악을 통해 세상에서
인정을 받는 것이 자신의 오랜 소원이라고 했다. 그런데 마침 기회가 왔지만 포기해야 할 것 같다는 것이었다. 모 방송사 드라마의
음악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공교롭게도 교회성가대의 반주를 맡고 있어서 시간적으로 도저히 두가지 일을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아르바이트로 잠깐 일해 본 방송사의 분위기는 크리스천으로서 도저히 적응이 어려울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마음에 갈등이 커서 금식기도를 하고 있지만 분명한 확신도 없고 아무리 생각해도 세속적인 일보다는
성가대 일에 봉사하기를 하나님께서 좋아하실 것 같고 무엇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희생해야 그분이 기뻐하실 것 같아 방송사 일을
포기해야 한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물론 마음 한구석에 감출 수 없는 욕심은 방송 일이었지만 애써 그녀는 그 속내를 누르고
있었다. 난 그녀에게 방송일을 단지 세상일이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좋은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도전해보는 것이 어떠냐고
말해주었다. 성가대 일도 중요하지만 크리스천으로서 방송음악을 통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한번 도전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건넨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나의 이야기에 그녀는 대뜸 커다란 눈물을 주루룩 흘렸다. 아무도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내가 처음으로 자신의 소망에 긍정적인 답변을 주었다는 것이다.

난 지금도 그 광경을 떠올려 본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세상일과
교회일을 나누어 놓고 고민하고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 그리고 세상일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이가 판단을 그르치고
있는지 걱정도 된다. 창세기 1장을 굳이 근거로 내세우지 않더라도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 세상 가운데 어떤 일도 그가
주관치 않는 것이 없다. 교회일만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방송사 일도 그분이 간섭하신다는 것이다. 때문에 어떤 일을 하든 그 일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라고 나는 믿는다. 덧붙여 사람사는 일에 대해서 미리부터 거부감을 갖고 피하는 것은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세상의 것에 대해 배우고 스스로 평가하기 전에 먼저 판단과 경멸을
배우는 것 같다. 사람에 대해서도 그의 성품과 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보다는 기독교인이냐 아니냐로 먼저 그들의 능력이나 성품을
판단하곤 한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성실하고 뛰어나도 그가 기독인이 아닌 이상, 기독인의 서클에는 들어설 수가 없다. 반대로
아무리 무능하고 불성실해도 기독교인이면 괜찮다는 주장도 쉽게 볼 수 있다. 우리끼리 나누고 우리끼리만 보듬는 배타적 분위기가
교회를 지배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예수님의 사람사랑을 보면 그는 행동으로 사람을 판단치 않으셨다. 그는 사람의
중심을 보셨다. 그에게 비기독교인은 ‘전도의 대상’이었지 회피나 경멸의 대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바울에게도 이방인은 판단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에게 다른 사람은 오히려 소망을 이루게 하는 기도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고린도전서 9장 22절-23절은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 쓰고 있다.

우리의 사람사랑도 그들의 행위에 기준이 있어서는 안된다. 예수를 안 믿기에
그들의 가치관이나 행동가짐이 뒤틀려 있고 거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결코 이들의 가치관이나 행동을 판단하여
정죄의 수단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사람의 중심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행위를 두고 판단할 때, 우리는 쉽게 정죄의 관행에
익숙해진다. 성경은 원칙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그 원칙은 행동과 가치의 기준을 말하지 그것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율법으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또한 원칙은 ‘나’의 행위규범이지 타인을 판단하는 근거가 되어서도 안된다. 원칙을 나를 돌보는데
두지않고 타인의 행위나 가치의 판단척도로 사용할 때 그것은 율법이 된다.

때로 나는 내가 율법적이 아닌가 반성해 본다. 기독교적 윤리관에 익숙해 있어
사람들의 행위를 판단하는 내 모습을 종종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나의 가치관으로 인해 나 자신 스스로도 힘들고 타인에게도
다가서기 어려운 사람은 아닌지 불안해지기도 한다. 어쩌면 인간적인 매력보다 거리감이나 두려움, 나아가 차가운 느낌을 주는 그리스도인이
아닌지 생각해 보는 것이다. 지나치게 윤리기준이 높거나 정죄의 칼날을 숨기고 있는 사람은 따뜻할 수 없다. 그런 사람에게 속내를
열고 마음을 나누기는 더욱 어려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요즘 청소년문제를 보면서 우리의 아이들은 과연 그들의 고민을 교회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 그들은 누구에게 도움을 구하고 누구에게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하고 있을까. 자신의 고민이나 문제를 터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면 그것은 이미 건강한 공동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지나치게 성결하거나 완벽해 보이는 사람에게 선뜻 자신의
치부와 죄를 이야기 할 수 없듯, 우리의 공동체도 그렇게 닫힌 분위기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교회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이
수평적으로는 닫혀있고 열린 커뮤니케이션은 모두 하늘로만 향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각자의 기도를 챙기시느라 바쁘실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너희가 서로 짐을 덜어주면 좋으련만…” 그것이 그분의 안타까움일 것만 같다.

[은지영] Cookie 할머니의 유산 (Cookie’s Fortune)

영화 속의
숨은 그림 찾기

Cookie
할머니의 유산 (Cookie’s Fortune)

그렇다면, 나의 양심은 선(善)합니까?

 

감독 Robert Altman
개봉연도 1999년
MPAA 등급 PG-13
주요 등장 인물

Camille Dixon
Cora Duvall
Emma Duvall
Jason Brown
Willis Richland
Jewel Mae “Cookie” Orcutt
검사 Otis Tucker
보안관 대리 Lester Boyle
변호사 Jack Palmer
Manny Hood

Glenn Close
Julianne Moore
Liv Tyler
Chris O’Donnell
Charles S. Dutton
Patricia Neal
Courtney B. Vance
Ned Beatty
Donald Moffat
Lyle Lovett

미국 미시시피주의 한갓진 한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Cookie
할머니의 유산>은 코메디라는 형식을 취하고는 있으나, 부활절을 앞두고 일어난 Cookie 할머니의 자살사건을 통해 일곱가지의
큰 죄 가운데 으뜸인 ‘교만/자만’과 ‘율법주의’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보여줍니다. Altman 감독은 미국 남부특유의
순진하고 소박한 정서와 Holly Springs 마을의 정경만큼이나 나른한 휴머(humor)로써 이 영화를 수준높은 코메디작품으로
완성시키고 있는데, Liv Tyler나 Chris O’Donnell같은 배우의 이름에 속아(?) 영화를 고르신 젊은 관객들은,
특히 영화의 첫부분을 넘기기가 매우 고통스러울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일단 고비를 넘기고 나면, 시종일관 마음 깊은 곳을
간질거리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야속하게 먼저 가버린 남편을 그리워하던 Cookie 할머니는 결국
권총자살로 인생을 마감하고 마는데 유감스럽게도 그 시신(屍身)은 평소 사이가 좋지 않던 조카 Camille에게 처음으로
발견됩니다. Camille은 ‘가문의 명예’니 ‘자존심’이니 하는 것에 강박적으로 연연하며, 파이프담배를
피우는 할머니를 늘 못마땅해 하던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급기야 그 죽음을 강도살인으로 위장하기에 이릅니다. 그는
“우리 가문에서 자살이란 있을 수 없다. 미친 사람만 자살한다”는 말을 주문과 같이 되뇌이며 자신이 언제나 제멋대로 휘둘러
오던 동생 Cora까지 그 위장극에 끌어 들입니다. 그런데 살인사건이라면 응당 범인이 있어야지 않겠습니까. 한집에 기거하며
사랑으로 할머니를 보살펴오던 흑인 아저씨 Willis가 -너무나 당연히, 온 집안에 널려있는 아저씨의 지문 덕분에- 용의자로
지목됩니다. 증거를 은폐하기 위해, Willis를 유산 상속자로 지명한 할머니의 자살편지(suicide note)까지
씹어삼킨 Camille은 뻔뻔스럽게도,
억울한 누명을 쓴 Willis에게서 이제 재산까지 가로챌 궁리까지 합니다. 할머니의 유일한 피붙이인 자신(과 Cora)이
유산을 물려받는 게 당연하다는 논리지요. 그런데 마을을 떠나있다 때마침 돌아온 Cora의 열여덟살 난 딸 Emma가 Willis의
결백을 주장하며 모든 정황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게다가
평소 Willis의 사람 됨됨이를 잘 알고 있는 마을 사람들이 한결같이 그를 변호하며 나서고, 동네 보안관들과 변호사가
그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 다니게 되면서 Camille의 음모가, 그리고 그간 베일에 가려있던 가문의 ‘그다지
명예롭지 못한’ 비밀들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살인사건에는 응당 범인이 있어야 하므로’, Camille은
자기가 꾸민 위장극의 결과를 뒤집어 쓰고 감옥살이 신세가 돼 버립니다. 재미있는 것은 변호사가 쿠키(cookie)단지
안에서 찾아낸 또 다른 유서에 따라 할머니 유산이 제자리를 찾아가게 되는 결말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인과응보'(因果應報)요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고 할까요.
<Cookie 할머니의 유산>에는 크고 작은 비중의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여 영화에 맛을 더해주고 있지만, 그 핵심을 이루는 축(軸)은 Camille과 나머지 주요 등장인물들로
대립되는 두 종류의 인간 군상(群像)입니다. (파이프) 담배를 피우는 Cookie 할머니는 기독교에서 금기시하는 자살이란
죄를 저지릅니다. ‘Tom
Brokaw
‘ 이전에는 -우리나라로 따지면 MBC 뉴스데스크가 시작되는 밤 9시 이전에는- 비록 안 마신다고 해도,
Willis는 실수로 깨뜨린 술병 생각에 하루밤을 못 참고 술집에서 슬그머니 또다른 한 병을 들고 나올 정도로 술이라면
사족을 못 씁니다. 주차위반 딱지를 수없이 떼고 벌금 한번 안 내고도 태평한 Emma는 미성년임에도 Willis와 맞술을
하고 남자친구인 Jason과도 육체적으로 벌써 깊은 관계입니다. 그렇다면성경에서 하지 말라고 금하는 것만 골라서 다하는
것 같은 이들은 진정 못된 무리입니까?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들이 성경에서 “하라”고 명하는 일 또한 ‘한다’
사실입니다. 이들은 자기 이외의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있으며, 자기 이외의 사람을 사랑으로 돌보고 너그러움으로 용납합니다.
사람을 다르다고 깔보고 자기보다 더 낮게 여기는 일도 없습니다. 이들에게서는 훈훈하고 정겨운 ‘사람 냄새’가 납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友愛)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롬12:10)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엡5: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 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4:7-8)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 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4:2-3)
서로 인자(仁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 같이 하라 (엡4:32)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 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약4:6)

반면 독실한 기독교신자로 행세하는 Camille은 Cookie, Willis, Emma뿐 아니라
자기가 종처럼 부리는 동생 Cora, 그리고 다른 이웃들을 깔보고 무시합니다. 부활절
기념 교회성극으로 자기가 연출 중인 ‘살로메'(Salome)를 연습시키는 그의 모습은 거만하기 짝이 없습니다. 교회 광고판에
“Oscar Wilde와 Camille Dixon의 살로메”(Salome by Oscar Wilde and Camille Dixon)라고
해서, 극의 원작자 옆에 자신의 이름을 달아야만 만족할 정도로 허황된 명예욕이 넘칩니다.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자살한 가족의
죽음을 대하고도 애통해하기는커녕 동네망신이라며 거짓을 꾸미는데 혈안이 됩니다. 아니, 애통해 할 양심이 있었다면 단 하나뿐인
친척 아주머니를 처음부터 버려두지도 않았겠지요. 자기 때문에 억울하게 살인범으로 몰린 Willis에게도 미안한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습니다. 게다가 한술 더 떠 자신의 마음 속에서 어느새 살인범으로 둔갑해 버린 그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까지 드리는 장면에는
보는 관객도 기가 딱 막혀버립니다. 살인사건(?)현장의 증거보존을 위해 경찰이 둘러놓은 접근금지 테이프도 그녀의 ‘막가’파(派)적인
위세 앞에는 무력할 따름입니다. Cookie 할머니의 저택을 태연자약하게 차지하고 앉아 어느새 귀족흉내를 내며 사교활동에 여념이
없는 Camille은 한마디로 ‘진실치 못한’, ‘양심불량'(良心不良)의 인간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先鋒)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16:18)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虛榮)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 을 낫게 여기고 (빌2:3)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마6: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無禮)히 행치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전13:1,
4-6)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요일4:20)
너희가 사람의 과실(過失)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6:14-15)

그런데 교만하고 무례하며 용서에 인색하고 악한 것을 꾸며내는데 능란한
인물 Camille은 평소 그가 한심한 인간들이라며 정죄하고 경멸했던 죄인들보다 더욱 심각한 죄인이었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동생의
남편과 불륜을 저질러
딸을 낳고 그 딸을 동생의 딸로 위장한 과거가 밝혀진 것입니다. 평생 고개를 못 들 상대인
동생에 대해 가책은 커녕 업신여기기 일쑤고 낳자마자 저버린 친딸에 대해 연민은 커녕 눈에 가시처럼 대할 뿐입니다. 성경은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5:8-9)고 명령하는데, 외양(外樣)은 빛의 자녀로 가장한 채로 온갖 어두움을 행한 것입니다. 그러고도
자신을 착하고 의롭고 진실하다고 착각하며 행동으로 드러나는 다른 사람들의 죄를 정죄하다니, 알고보니 양심불량이 아니라
‘양심불감증'(良心不感症)입니다. “중심(中心)에 진실함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시51:6)고 했듯이 그분의 자녀된 자는
중심이, 그 마음이 성결해야 할 것이며 남의 눈에 든 티끌보다 자기 눈에 든 들보를 더욱 부지런히 돌아보아야 할 텐데
말입니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약4:8)
비판(批判)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든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외식(外飾)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 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마7:1-5)

한편,
Camille의 동생으로 등장하는 Cora는 미국의 몇몇 평론가들에게 “왜 나왔는지 모르겠다”는 평까지 들을 정도로 분석이 다소
까다로운 인물이지만 영화 속의 극중 극인 ‘살로메’의 전개과정과 비례하여 그 성격이 변화해 가는, 알고보면 가장 재미있는 인물입니다.
언니에게 주눅이 들어, 보는 사람이 답답할 정도로 말과 행동과 사리에 굼뜬 Cora는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언니가 꾸며낸 위장극에
말려들고 맙니다. 처음 연극연습을 시작했을 때도 자신의 배역인 살로메의 성격을 소화해내지 못하고 어설픈 연기만을 거듭하던 그는,
그러나 살로메란 인물이 점차 자신에게 녹아들면서 점점 말이 많아지기 시작하여, 부활절 성극무대에서는 온 몸과 마음으로 철저히
살로메가 되어 버립니다.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언니가 경찰에 끌려가는 장면을 본 그는 곧 모든 정황을 판단하게 됩니다. 자신의 증언 한 마디에 언니의 운명이
달렸음을. 자기 남편과 언니가 낳은 딸을 자식으로 떠맡았면서도 평생을 무시당한 지난 세월을 거짓증언으로 보상받을 것이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말함으로 언니를 용서할 것이냐. Cora는
살로메 무대의상을 벗지 않습니다
.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공범이 되어버린 처음 위장극 때와는 달리 아주 적극적인 주역이
되어 언니에게 살인죄를 뒤집어 씌웁니다. 멋지게 복수하는 쪽을 택한 것입니다. 이런 결정은 ‘권선징악’의 결말을 이끌어 내는데
필수적인 역할을 하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되고 악한 선택입니다. 아무리 자의(自意)가 아니었다고는 해도 언니와 공모하여
남의 재산을 탐하고, 악을 악으로써, 죄를 죄로써 갚는 Cora라는 인물은, 그때 그때 내어놓지 못하고 쌓아놓은 분(忿)과 한(恨)으로
인해 뒤틀리고 비뚤어진, 왜곡된 자화상을 대표합니다.

겸손(謙遜)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奪取物)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16:19)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와 함께 악을 행하지 말게 하시며 저희 진수 (珍羞)를 먹지 말게 하소서 (시141:4)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엡4:26)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 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和睦)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5:23-24)

영화 전편을 통해 대립하고 있는 두 개의 주류세력을 바라보며 성경이 비교하는 두 종류의 사람을 떠올립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며 가슴을 치던 세리와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하며 자기 의(義)에 가득찼던
바리새인(눅18:9-14).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와 그 여자를 예수 앞에 끌고 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요8:3-11).
남녀 간의 자유분방한 육체관계가 어느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살면서, 여자/남자친구와 동거를 하고
있는 크리스천들이 주변의 동성애자 친구들을 가리키며 지옥에 갈 거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상대적인 의로움을 내세우는
데 발빠른 인간의 모순된 모습을 봅니다. 오늘이라도 예수님이 오셔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실 것만 같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안 세월이 길어질수록 왜 이렇게 눈에 거슬리고 마음에 안 드는 일은 늘어만 가는지. 분노하고 성낼 일들은 왜 자꾸만
많아지는지. 온유와 인자와 사랑과 인내의 모습보다는 내가 정한 율법의 수준으로 남을 정죄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사두개인과 같은
모습이 바로 지금의 내 모습임이 느껴질 때, “하나님이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며 가슴을 치던 나는 어디로 갔는지 낙망스럽기만
합니다.

성경은 ‘우리 행동의 죄를 놓고 죄’라고 단언하기도 하지만 또한 “판단하지 말라, 정죄하지 말라”고도
명령합니다. 남을 징계하게 되더라도 자기 의를 자랑하기 위한, 징계를 위한 징계는 말 것이며 오직 죄인들을 회개로 이끌 징계를
하라고 명령하며(딤후2:24-25), 남을 징계할 때는 온유로 말하고 자신을 바로 세우기에 먼저 힘쓰라고 명령합니다(갈6:1-2).
그러나 오래 믿었다는 사람일수록 왠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모습을 갖는게 다반사니,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출21:24)라는 말씀은 스스로에게 적용할 것이며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할지니라”(마18:22)는 말씀은 타인에게 적용하라는 김동호 목사님의 글을 읽으며 수년전 혼자했던 다짐이
새삼 서먹하게 다가옵니다.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拒逆)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懲戒)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 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딤후2:24-25)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갈6:1-2)


모습은 누구에 가깝습니까? 내 모습이 영화 속의 Camille에 가깝든지, 다른 인물들에 가깝든지, 아니면 성경 속의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과 비슷하든지, 세리나 간음한 여인과 비슷하든지, 우리가 따라야 할 양심은, “의인을 부르려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눅5:32) 이 세상에 오셔서, 정죄받아 마땅한 수가성의 여인에게 위로의 생수를 주신(요4:1-42)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선한 양심을 가지라 (벧전3:15-16)

‘유학생 교회’의 새로운 장을 연다- Campus Mission Church

‘유학생
교회’의 새로운 장을 연다- Campus Mission Church

물질주의의 금자탑인 뉴욕 맨하탄 한복판에 한인 교회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여는 작은 한걸음이 내딛어
졌다. 지난 12월 16일 뉴욕 콜롬비아대학교 캠퍼스 내에 있는 세인트 폴 채플에서 있었던 “Campus Mission Church”
창립 예배는 몇 가지 점에서 주목할 만한 ‘유학생 교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었다. 우선 교회의 창립을 위해 기도하면서 준비하고
이를 이끌어 냈던 사람들 모두가 그저 평범한 몇몇의 ‘평신도’ 유학생들이라는 점에서 그렇고, 교회를 치리하는 보드멤버들 역시
모두 평신도들로 구성됐다는 점에서 그렇다. 현재 이 교회를 돕고 있는 몇몇의 지역 교회 목사님들 역시 ‘앞으로 이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도 바로 이 정신을 그대로 계승하는 것’임을 공통적으로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 역시 매우 고무적인 일로 받아들여진다.

‘종으로서의 목회자’가 아니라 ‘왕으로서의 목회자’를 대하는 것이 일상적인 모습인 한국 교회의 현실
속에 과연 목회자의 리더십을 중심으로 하지 않고 평신도들 스스로 리더십을 가지고 치리해 나가는 교회가 건강하게 자라갈 수 있을
것인가. 목회자 한 사람의 비전과 리더십을 따라가기에 익숙해진 우리의 병든 모습이 만들어 내는 기대 섞인 우려이지만, 이러한
질문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Campus Mission Church’가 가지고 있는 큰 고민이기도 하다. 교회의 개척을
위해 2년 전부터 기도하면서 함께 고민해 왔던 멤버 중의 한 사람인 김영생 형제는 “그냥 전임자 한 분을 모셔서 그분이 목회하시도록
맡겨 드리는 게 편하지 않느냐는 내부의 질문을 접할 때가 많다”며 이러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아직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야하는
개척자의 심정을 이해할 것도 같았다.

Campus Mission Church는 맨하탄 내에서 차도 없이 주변에 있는 한인 교회에 참석하던
몇몇 콜롬비아대학교 유학생들의 고민에서 출발되었다. 이같은 고민이 내포하는 문제는 이들의 심령을 매만져 줄 ‘복음이 선포되는’
교회를 찾지 못했던 갈증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대개는 맨하탄 외부에 있는 교회로 빠져나가거나 아니면 그냥 참석하던 주변
교회를 맴도는 일들이 반복되던 중에, 캠퍼스 내 성경 공부 모임이 활성화되면서 결국에는 이 모임이 교회의 개척을 일구어 내는
산파 역할을 하게 되었다. 성경공부 모임을 처음부터 이끌어 주었던 소명교회 정진홍목사님을 만난 일도, Campus Mission
Church가 학교에 등록하고 채플을 빌릴 수 있게 지원해 준 미국인 Advisor 목사님을 만난 일도, 또 지난 9월부터 계속해서
주일 예배 설교말씀을 전해주고 있는 뉴저지 초대교회 조영진목사님을 만난 일도 모두가 그저 남들이 보기엔 ‘우연’같은 일이었다.
때문에 교회의 개척을 일구어 낸 멤버들은 이 교회를 시작하게 하시는 이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확신 속에서 ‘처음 가는 길을 걸어가는
기대와 즐거움’ 속에 젖어 있다. 그래서인지 이날의 창립 예배는 유학생들을 그저 지나가는 손님 정도로 여기는 기존 교회에 지친
이들이 바로 주인되는 새로움과 기대가 한층 돋보이는 모습이었다.

이제는 교회를 창립하는 세대가 1세대가 아니라 바로 젊은 2세대일 수도 있다는 자신감으로 넘쳐 흘렀던
Campus Mission Church의 이날 창립 예배는 한 사람의 외국인이 예배의 한 순서를 담당해 주목할만 했다. 이 흑인
여성은 바로 이 교회가 위치하고 있는 할렘의 Public School 36 교장이었는데 그는 이날 예배에서 Campus Mission
Church가 이 학교에 기증하는 프린터 6대를 선물로 받으면서 “지금까지 오랫동안 이 지역에서 공립학교 교장으로 있었지만 교회가
먼저 찾아와서 뭐 필요한 것이 없냐고 물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Campus Mission Church의 이러한
비전은 아직 걸음마에 불과한 유학생 교회의 작은 모습이지만 멤버들의 헌금 대부분이 현재 이같은 구제 사업과 지역 선교에 쓰여지고
있다는 점에서 ‘큰 교회’들을 부끄럽게 하는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큰 교회’가 가지고 있지 못하는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는,
‘시작이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이 물질주의와 성장주의로 찌든 맨하탄의 한복판에 큰 도전으로 계속되기를 기도해 본다.

[김은영] 남들도 다 그러는데 뭐

살며
생각하며

남들도
다 그러는데 뭐

크리스천으로서 바르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 문제를 생각하면 유학시절
코스타 96에 참가했을 때 세미나강사 중 한분이셨던 엄기영 목사님께서 하신 “그리스도인의 자유함”이라는 강의에서 인상깊게 들은
부분이 떠오른다. 엄목사님은 교회가 금연, 금주운동이나 하고 바른생활 책에 나오는 삶을 가르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면 타종교와
다를 바가 없다면서 크리스천의 다른 점은 내 안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여 그 분이 원하시는 삶을 찾아가고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고자 하는 것
이라고 하셨다. 한 마디로 세상적인 기준이 어떻든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크리스천의 삶”이라는 것이다. 새봄을 맞이하여 다시 한 번 나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과연 하나님이
명령하신 삶을 살고 있는지 부끄러움만 가득하다.

소위 “바르게” 혹은 “떳떳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가장 걸리적거리는
종목이 “남들도 다 하는” 부분이다. 항상 지적되는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불의와 뒷거래가 너무나 당연시되어 깨끗하고
정직하게 사는 사람이 바보취급 당하고 손해를 본다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순간에 정직하지 않고 떳떳하지 못한 방법의 유혹을 받게
되는지 모른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수를 써서” 조금이라도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것에 대한, 속칭 잔머리는
누구나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살다보면 몸에 배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사실 이런 근성은 유학시절에 더 많이 나타나는데,
유학생들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생활하면서 그곳을 만끽하고 일종의 혜택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사회에 대해 이상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한국보다 앞선 경제와 문화에 대한 컴플렉스일까? 아니면 비싼 등록금을 내는 데 대한 분풀이일까? 그것도 아니면
남의 나라이니 나와는 상관없다는 단순한 무감각일까? 게다가 유학시절에는 한푼이 아까운 때이니 돈과 관계된 것이라면 서슴지 않고
거짓말과 불법을 저지른다.

유학시절 나는 학교에서 조교로 일하는 대학원생들이 어떠 어떠한 편법을 사용하면
세금면제를 받을 수 있다고 서로 가르쳐 주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유학생들이 자동차보험료를 적게 내기 위해
심지어 미국에서 혼인신고를 하여 기혼자의 보험료를 적용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렇게 명백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사소하게는 금지되어
있는 지역에 들어가 나물을 캔다든가, 어찌 보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일들을, 실제로 큰 이득을 얻는 것도 아닌 불법들을 아무
감각없이 행한다. 실은 이런 일은 미국에서만 있는 일은 아니다. 한국인이 가는 곳엔 어디나 있다. 내가 아는 사람이 독일유학을
마치고 왔는데, 자기가 살던 지역은 야생동물들을 위해 베리(berry) 종류의 열매를 따지 못하게 되어 있어 그것들이 강가에
잔뜩 열려 있었는데 그걸 따다가 과일주를 담곤 했다고 말했다. 따지 못하게 되어 있는 걸 따면 어떻게 하냐고 물었더니 그는 다들
그렇게 한다고 대답했다. 나는 “그 다들이란 게 전부 한국사람들이죠?”하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여 주었다. 마치 나는 매우 정직하고
똑바르게 산다는 듯이.

미국유학 마지막 무렵 어느날 나는 Kinko’s에서 복사를 하다가 누군가가
복사기 옆에 내려두고 간 counting machine을 발견하였다-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미국에서 내가 유학할 때만 해도
복사 체인점인 Kinko’s에서는 이 counting machine을 복사기에 꽂고 원하는 만큼 직접 복사를 한 후 그것을 계산대(cashier)에
들고 가면 거기 나온 숫자대로 복사비를 계산하여 지불하게 되어 있었다. 그 counting machine엔 숫자가 ‘4’로 나와있었다.
그걸 보면서, ‘어떤 양심없는 인간이 치사하게 넉 장 복사하고 돈도 안 내고 저걸 여기 내려두고 갔나’ 하는 멸시의 마음이 생겼다.
다음 순간, 거의 책 한 권은 될 법한 많은 분량을 복사하러 간 내 머리에 번개같이 스친 부끄러운 생각이 있었다. 이거 다 복사하고
계산할 때 저거 가져가면 넉 장 값만 내겠네? 아, 나도 내가 비웃던 사람 중 하나에 불과하였다. 아니, 그는 넉 장 값을 떼어
먹었지만 나는 약 백장 값을 떼어 먹을 아이디어가 떠올랐으니 더 가증스럽다.

하나님의 기준이 무엇이냐는 것은 언뜻 명확하지 않아 보일 지도 모른다. 성경책에
인생살이의 모든 경우가 미주알 고주알 적혀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지표가 되는 거대한 원칙들을 성경을
통해 이미 가르쳐 주셨고 또 그의 속성을 아는 우리들은 순간 순간 냉정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기준에서의 선(善)과 그렇지 않은
것을 그리 어렵지 않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은 분명 타지(他地)이고 미국의 법이나 상식에 우리는 민감하지도 못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네 나라에서만 착실하고 정직하게 살고 남의 나라에선 조금 맘대로 해도 된다”라고는 결코 말씀하시지
않으실 거라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큰 이득이 아닌 것들, 설사 큰 이득이라고 하더라도 워낙 내 몫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손해보는
듯한 느낌이 좀 감소되어 줄까? 율법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나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그리고 나
자신도 밝아지는 마음을 갖기 위해 조그만 일에도 하나님의 기준을 생각하고 자제하여 산뜻한 봄을 맞이해 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