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훈] 백설 공주 이야기 1

이코스타 2001년 12월호

백설 공주의 계모인 왕비는 매우 아름다운 여인이었음에 틀림 없습니다. 아내를 잃은 왕이 마음을 빼앗길 정도로 아름다워서 주변의 이목이나 만류를 물리치고 맞아들인 여인이었을 겁니다. 처음 그녀가 왕실에 모습을 드러내었을 때 사람들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매혹되기도 하고 찬사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전(前) 왕비의 기품 있는 모습과 온화한 인품과 비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사람들이 수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공주를 돌보기보다는 자신에게 모든 관심과 시간을 쏟고 있는 왕비에 대해서, 그녀에게 온통 빠져있는 왕의 지나친 사랑에 대해서 사람들은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에 떠도는 계모에 대한 온갖 속설과 선입견들, 나쁜 계모들에 대한 무수한 사례들이 다 그녀의 몫이 되어 갔습니다. 왕의 잘못된 정치적 판단이나 인격적인 불찰도 그녀의 탓으로 돌려지기까지 했습니다. 악의적으로 조작된 그녀의 과거에 대한 그럴싸한 증거들과 부도덕한 루머들이 사람들의 호기심과 무료함을 충족시켜 주었습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소문과 위증의 폭력으로 그녀의 행복은 박살 나 버렸습니다. 왕은 더 이상 그녀를 사랑하지도, 신뢰하지도 않았습니다. 왕에겐 지켜야할 체면과 자존심이 한 여인의 상처를 위로하는 것보다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녀의 불행을 통해서 은밀한 즐거움을 맛보았습니다. 평범한 신분의 여인이 왕의 총애를 받는다는 건 얼마나 배 아픈 일이었는지, 그녀의 눈부신 아름다움은 얼마나 큰 질투의 대상이었는지. 타인의 행복은 결코 나의 기쁨의 원천이 아닌 것을 사람들은 깨달았겠지만, 타인의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는 자신의 가엾음을 깨닫지는 못 했나봅니다.


왕비는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밝고 쾌활하던 성격은 우울하고 의심 많은 성격으로, 긍정적이고 낙천적이던 성품은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조소하는 시각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그녀의 가장 큰 절망은 사랑 받지 못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각은 그녀에게 죽음과도 같은 어둠이었습니다. 더 이상 아름답지 않은 자신, 누구의 관심과 염려스런 눈빛도 받지 못 하는 자신, 그리고 아무도 믿지 못 하는 자신. 그런 자신의 모습이 싫어서 달팽이처럼 단단한 껍질 속에서 웅크리고 살아가는 여인의 마음에는 증오와 분노, 슬픔의 깊은 웅덩이가 패였습니다. 그녀의 유일한 대화 상대는 거울이었습니다. 거울은 또 하나의 자아, 그녀의 내면을 표출해 놓은 장치였을 겁니다. 거울조차도 이제는 그녀에게 아름답다고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녀는 이제 스스로에게도 배반 당했습니다. 스스로를 사랑할 능력조차 상실한 거지요.


어느새 아름다운 숙녀로 자란 공주의 아름다움은 그녀의 모든 증오와 질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전에 그토록 혐오하던 인간의 질투심과 사악한 마음이 바로 그녀 자신의 성품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카인이 아벨을 질투한 것처럼,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질투한 것처럼, 공주를 지켜야 할 자가 그를 치는 자로 변해 버렸습니다. 질투와 경쟁심에 눈이 멀어 버린 겁니다.


사울이 다윗을 향해 정녕 죽이리라고 다짐했듯이 그녀도 총명하고 아름다운 존재, 모든 존귀와 사랑의 대상인 공주를 향해 광적인 분노를 품었습니다. 질투는 모든 죄악의 씨앗이 됩니다. 질투는 스스로를 찢고 상대를 상처 입히는 커다란 가시와도 같은 것입니다. 왕비는 공주를 질투했습니다. 사랑 받는 존재를 질투했고 아름다움이 인정받는 것을 무엇보다 더 질투했습니다. 카인은 인정받지 못함에 분노했습니다.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는 인간의 기본 욕망의 하나일 만큼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왕도 시민들도 거울조차도 그녀의 아름다움과 순수함을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질투는 절망의 음습한 그늘에서 자라나는 독버섯과 같은 것입니다. 완전히 깨지고 절망한 그녀가 세상을 질투하고 분노하고 증오하며 결국 흉악한 마녀의 모습이 되어 버리는 것처럼, 우리 안의 죄성은 스스로 파멸의 길로 치달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상처를 스스로 치유할 능력이 그다지 충분해 보이지 않습니다. 거울을 붙잡고 아무리 수 없이 되물어도 거울은 흔한 위로의 말 한 마디도 건네주지 않습니다. “거울아 거울아 정녕 나는 나를 사랑하느냐, 정녕 나는 아름다우냐.” 이 물음은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일까요? 아무에게도 기댈 수도 없는 절대 절명의 외로움과 절망의 부르짖음에 누군가 대답해 준다면 당신의 아픔은 회복될 수 있지 않을까요? 모두가 나를 비웃고 멸시해도 누군가 나를 위해 목숨마저 바칠 정도로 사랑한다면 자괴감에 시달리던 자아는 빛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가진 것이 없어도 남들에게 인정 받을 만한 것이 많지 않아도, 무한히 쏟아지는 사랑을 받고 있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얼마나 아름답다고 말하십니까 – 내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아가2:15)라고 고백하며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합한 아름다움으로 인정해 주십니다. 우리의 육신이 완전하지 못해도 이목구비가 바르지 못해도 그분은 우리의 아름다움에 도취해 눈을 떼지 못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 나로 인해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그의 사랑으로 나를 침묵하게 하시며 나로 인해 노래 부르며 즐거워하시는(스바냐3:17) 분입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절박한지, 해산하는 여인 같이 부르짖으며 나를 찾겠다고(이사야 42:14) 하시는 하나님의 뜨거움을 느껴 보십시오.


이 세상의 나는 것들과 땅에 기는 것들과 바다의 모든 것들과 산천초목을 다 주시겠다고 누리고 정복하라고까지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 일방적이고 맹목적인 짝사랑을 받아 들인다면, 무엇에 상처받고 무엇을 질투할까요. 내가 이렇게 아름다운 존재, 사랑받는 존재라고 깨닫는 순간 부서진 자아는 더 단단한 형태로 회복될 것입니다. 나는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소중한 존재, 유일한 존재이며, 당연히 사랑 받아야 할 대상이며 넘치게 아름다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인정받고 있습니다. 사랑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눈부시게 아름답습니다. 전능자이신 하나님의 든든한 품 안에서 기쁨과 평강을 누리시길….

[팽동국] 고든 맥도날드의

eKOSTA 서평


고든 맥도날드의 <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


사용자 삽입 이미지이제 달력의 마지막 한 장만이 남게 되었다는 것을 문득 깨달으며, 세월의 빠름을 인식할 뿐 아니라 훌쩍 지나가 버린 한 해를 회상하며 이제는 지난 일년을 결산하고 마감해야 될 때임을 절감하게 된다. 한 해 중 가장 바쁘고 정신없이 보내는 달이 바로 12월인 경우가 많고 많은 모임과 행사로 분주한 삶을 살다보면 한 해를 제대로 돌아보거나 정리하지도 못하기도 하고 다음 한 해를 계획해보지도 못한 채로 이 마지막 한 달을 보내기 쉽상이다. 자칫하면 다음 해에까지 그 여파가 계속되어 새로운 출발을 하는데 있어서 타격을 받기도 하고 덕분에 허덕거리며 한 해를 시작하기도 한다.


특별히 기말고사가 있고 한 학기를 마감하는 이 달은 우리 유학생들에게 가장 바쁘고 중요한 달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기말고사가 끝나고 지친 몸과 마음에 허탈함이 더해 또 새로운 한해를 어떻게 맞아야 될지 암담해 하기도 하여, 오랜만에 주어지는 크리스마스와 연말의 비교적 한가한 시간들을 제대로 활용도 못하여 재충전의 기회로 활용하지 못하고 그냥 의미 없이 보내었던 기억이 있다. 이번 달 추천 양서를 선정하는데 있어서, 한 해를 마감하고 새로운 일년을 맞는데 도움이 될 만한 책인 고든 맥도날드(Gordon MacDonald)의 <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Ordering Your Private World)을 선택해 보았다. 어떻게 보면 새 해에 읽기에 적합한 책일 것 같기도 한데, 그 보다는 이 달에 미리 읽어야 새 해가 되기 전에 자신의 내면 깊숙한 삶의 동기를 재점검하고 주님께 ‘부름 받은 사람으로서의 삶’의 기반과 질서를 정립하고, 새해에 새로운 기대와 소원과 결심으로 시작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 이 책은 더 이상의 추천이 필요치 않을 정도로 너무나 많이 알려져 있어서 추천도서나 양서 목록에 항상 빼 놓지 않고 올라오는 기독 스테디셀러 중 하나로 현 시대의 기독교 신자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책이다. 고든 맥도날드는 한때 미국 IVF 총재로 섬긴 바 있으며, 현재는 미국 보스턴 근교의 Grace Chapel 교회의 담임 목사이자 많은 신앙 양서를 써낸 저술가이기도 하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저서가 바로 이 책 <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 이며 ‘IVP 장기 베스트 셀러’라는 표제를 달고 있다. Insights for Living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설교자인 척 스윈돌(Chuck Swindol)은 이 책의 머리말에서 저자를 ‘심오한 인격, 해박한 성경지식, 실제적인 통찰력이 풍부하게 조화된 보기 드문 사람’이라고 소개하며 ‘이 책은 그 세 가지의 조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면서 고든 맥도날드 목사님과 이 책을 추천하고 있다.


저자는 ‘함몰 웅덩이 증상’이라는 표현으로 외부 지향적인 사람들이 겪을 수 있는 갑작스런 자아 붕괴를 언급하면서, 신자들에게 있어서 삶의 ‘조종실’인 내면 세계의 질서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아주 적절한 예화를 들어가면서 글을 시작한다. 그러면서 ‘쫓겨다니는 사람’과 주님께 ‘부름받은 사람’들의 차이점과 특성들을 아주 구체적으로 소개하면서 심지어 자기 자신을 진단하는 법까지 알려준다. 계속해서 그는 ‘부름받은 사람’으로서 살아가기 위하여 구체적인 삶의 부분들을 시간 사용, 지혜와 지식, 영적인 힘, 그리고 회복과 안식으로 세분하고 그 항목들을 각 단원별로 자세히 다루는데, 각 장마다 성경말씀과 적합한 예화, 그리고 다른 책들을 인용해 가면서 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에 대한 필요성과 중요성을 알려줌과 동시에 아주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방법들까지 제시해 준다. 대부분의 방법들이 저자가 고민하면서 실제로 터득하고 실행해 왔던 경험적인 방법들이라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도움이 될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효과적인 방법 중에 ‘일기 쓰기’가 있다는 것을 여러 전기를 읽으면서 깨달은 저자 자신이 어떻게 일기 쓰기를 시작했는지, 어떤 유익이 있으며 그 의미와 중요성은 무엇인지, 그리고 심지어 자신의 일기 쓰는 법을 아주 구체적으로 공개해 가면서까지, 즉 어떤 공책을 사용하고 있으며 어떤 방법으로 그 공책을 써 나가고 얼마나 자주 그 공책을 바꾸는지 등을 솔직하게 고백하며 우리를 강권하고 있기에 아주 실제적인 도움이 된다. 비록 습관으로 만들기까지 성공은 못했지만 이 책을 두 번째 읽었을 때 나도 강한 도전을 받고 조그만 스프링이 달려있는 공책을 사서 일기 쓰기를 시도한 경험이 있다.


그 외에 이 책의 몇 가지 좋은 점들을 더 소개하자면 저자가 많은 독서, 그 중에서도 특별히 많은 신앙 위인들의 전기를 읽으면서 인용해 놓은 많은 글들과 그 분들의 삶을 접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각 장 끝에 연구과제를 두어 개인적으로 또는 그룹으로 토의하면서 우리에게 머리로 알고 이해할 뿐 아니라 훈련을 통한 습관으로까지 정착하는데까지 도움을 주려고 한다. 거기에 세 아이의 엄마이며 아프리카 케냐의 선교사의 아내로서 글을 번역하고 쓴 역자의 후기까지도 짧지만 감명을 주기도 한다. 저자가 목회자로서의 경험들을 다루기에 이 책은 영적 지도자들에게 아주 적합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동시에 영적 성장을 바라고 그 영적 훈련의 방법들을 알기를 원하는 모든 신자들에게도 너무나 적절한 책인 것 같다. 특별히 우리 유학생들에게는 시간 사용의 원리나 원칙들, 지성의 계발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 제시, 방어적인 공부와 공격적인 공부, 그리고 ‘일 중독증’에 대한 위험과 더불어 휴식의 참 의미와 그 중요성 등은 우리의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뿐만 아니라, 현재의 학문을 하는 현실적인 문제와 더불어 미래의 직업 현장을 준비하는데 있어서 크나큰 도움이 될 것이다.


개인적인 얘기를 하자면 90년대 초반 그러니까 이 책이 번역되어 나온지 얼마 안 된 시기에 친구 한 명이 이 책을 나에게 선물해 주었는데, 제목을 보고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었다. 꼭 나를 보고 ‘내면세계의 질서가 잡히지 않았으니 이 책을 읽고 정돈된 삶을 살라’는 말을 이 책을 선물하면서 대신하는 듯 했다. 물론 선물을 해 주는 친구의 마음이 고마웠고 그 친구를 신뢰했기에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책을 읽기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서 그 친구에게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나름대로 잘 살고 있다는 내 자신의 자부심이 산산이 깨어지면서 나에게 너무나 필요한 부분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부끄러운 기억이 난다. 책을 읽은지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에 다시 생각해 보니 내 삶의 습관들이 이 책으로 인해 많이 바뀌지 않은 것과 여전히 바뀌어야 될 수많은 부분이 있기에 부끄럽기만 하다. 그러나 이 책을 읽음으로써 최소한 나의 사고방식과 관점에 전환이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 다시 나의 삶의 습관들도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삶의 청지기로서 바뀌고 영적으로 꾸준히 자라 나갔으면 하는 바램이 있고, 기회가 되면 누군가와 함께 이 책의 각 장 뒤에 있는 연구과제들을 함께 토의해 가며 서로 도전 받고 격려하며 때로는 채찍질해 가면서 영적 성장에 필요한 훈련을 해 나갔으면 한다. 아무쪼록 우리 이코스타 독자들도 한 해를 마감하며 각자의 삶을 점검하고 새로운 계획과 결심을 하는데 이 책이 도움이 되기를 기도한다. 고든 맥도날드의 또 다른 저서들은 <마음과 마음이 이어질 때>, <격려와 책망>, <영적인 열정을 회복하라>, 그리고 <탓> 등이 있다.

[궁금이] 때로는, 목사나 선교사가 되고 싶다

세계관 단상


때로는, 목사나 선교사가 되고 싶다


목사나 선교사가 “되고 싶다”는 말은 얼마나 불경(?)스러운 일인가…. 이런 말을 듣는 목사님이나 신학생들은 아마도 크게 분개할 것이다. 목사가 된다는 것이 과연 그렇게 단순한 일이냐며, 자기가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며 나를 크게 꾸짖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때로 목사나 선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이고, 목사나 선교사가 되는 일은 부르심(Calling)이 없이는 절대로 안되는 일이기 때문에 더더욱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다른 모든 일도 그렇지만.)


미국에 유학오기 전 약 1년 반 동안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할 기회가 있었다. 스스로 생각할 때, 대학교 3학년 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후 약 3년 여의 ‘훈련’기간을 통해 습득한 지식과 학교생활과(대학원에서의 실험실생활은 반쯤 직장생활이었다) 교회생활에서 체득한 경험이 내 자신에게 있어 보였다. 이를 바탕으로 나는 분명히 훌륭한 직장인이 되어 직장 내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는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에 차 있었다. 그리스도인의 직업, 직장생활에 관한 세미나에도 참석하고 책도 읽고 기도도 하고 묵상도 하면서 멋진 직장인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부딪혀야했던 직장생활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열심히 일해서 직장에서 좋은 결과를 내고 주위의 비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직장 내 신우회에(직장 내에서의 그리스도인 교제모임을 보통 한국에서는 신우회라고 부른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고 생각했던 내 계획과 생각들은 여지없이 무너져갔다.


1. 직장상사와의 갈등


내 직속상사는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보기에 그는 그리스도인은 아니었다. 술, 담배를 몹시 즐기는 것은 복음의 핵심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므로 용납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가치관은 가장 세속적인 출세주의였다. 그리고 그의 삶에서 복음의 능력과 빛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같이 식사를 할 경우 내가 식사기도를 하면 자신도 그렇게 식사기도를 하지 ‘못 하는’ 것에 대하여 약간 쑥스러운 표정을 짓는다는 것이 완전한 비그리스도인들과의 유일한 차이인 것처럼 보였다. ‘출세’라는 목표의식을 가지고 엄청난 추진력으로 일을 하다보니 직장 내에서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일반적으로는 유능한 연구자로서 인정을 받는 터였다. 그는 내게 그러한 자신의 ‘개똥철학’을 매일같이 강요하는 것 같았다. 나는 도저히 그 상사를 용납하기가 어려웠다. 사실 당시 유학을 준비하고 있던 터라 내가 개인적으로 시간을 보내며 공부할 기회를 많이 갖고 싶었는데, 내게 엄청나게 던져지는 일을 감당하면서 마치 내가 그 사람의 성공을 위하여 이용 당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또 내가 속한 연구부의 부장은 매우 권위적인 ‘비그리스도인’이었다. 내게 주일에도 일할 것을 계속해서 요구하였고,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그렇게 할 수 없음을 밝히자 나를 경멸의 눈초리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계속해서 회식이 있을 때마다 내게 술을 권하였다. 내가 정중하게 거부하자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생각했는지 거의 강압적으로 술을 권하였다. 나는 직장상사의 권위에 앞선 하나님의 권위를 우선으로 두려고 노력하였다. (술 마시면 천국 못 간다는 식의 율법주의로 이 글을 이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결국 그 대가로 나는 매우 어렵고 힘든 직장생활을 감내해야만했다. 이러한 갈등의 관계 속에서 나 자신에 대한 좌절이 나를 힘들게 했고, 온유한 마음을 유지하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영적침체로 빠져들 수 밖에 없었다.


2. 시간의 문제


나는 한달 평균 300시간 이상 일할 것을 요구받았다. 평일에는 평균 12시간 이상 직장에 있어야 했고, 조금 바쁜 일이라도 있으면 자정이 넘어서야 집에 들어오기 일쑤였다. 연구실과 연구실 사이를 다닐 때에는 걷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항상 뛰어야 할 만큼 바빴다. 아침 일찍 일어나 겨우 연구실에 가고, ‘죽어라’ 뛰어 다니며 일을 하고, 저녁엔 녹초가 되어서 들어오는 생활의 반복이었다. 개인여가를 즐기는 것은 전혀 불가능했다. 성경공부 인도하는 일, 다른 지체들을 돌보고(care) 훈련하는 일 등이 불가능한 것은 물론이고 QT와 기도 등 개인 경건생활을 유지하는 것조차 버거웠다. 개인적으로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GRE, TOEFL 등을 준비해야 했으므로 그러한 압박은 더욱 심했다. 하루에 4시간 여 밖에 잠 잘 시간을 확보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다 보니 직장에서의 일도 효율적이지 못 했고, 유학관련 시험준비도, 개인생활도 모두 다 엉망이 되었다.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성장”(Ordering your private world)에서 언급되는 것처럼, 그러한 상황에서 “강요 당하는 자”(driven person)가 아닌 “부르심 받은 자”(called person)로 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고, 역시 이로부터도 나는 심한 영적침체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3. 동역자의 문제, 교제(fellowship)의 문제


학교에 있으면서 학원(campus)에서 성경공부를 조직해서 인도한 경험이 있던 터라 직장에 가서도 그러한 일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으리라 자신했었다. 마음에 맞는 사람을 두세 사람만 모을 수 있다면 QT를 나누는(sharing) 모임 같은 작은 모임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시작할 수 있으리라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나만 그렇게 바쁜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그렇게 바쁜 생활을 하고 있는 터였고, 거기서 더 헌신하여 어떤 형태의 모임을 하자고 제안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당시 독신이었던 나도 그토록 버거웠는데 가정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오죽했을까! 그나마 약간의 열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도 많은 경우 수 년간의 직장 생활을 통해 그러한 소망과 열정을 다 잃어버린 상태였다. 자연히 나도 내가 막 시작한 직장생활에서의 어려움을 그리스도인 선배들과 효과적으로 나눌 통로를 찾지 못하고 방황해야 했다. 교제는 여전히 학교에 남아있던 친구들하고나 가능했지만 그나마 적당한 시간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한가지 나를 더욱 힘들게 했던 것은 신우회 활동에 적극적인 사람들은 대부분 직장생활에서는 무능하거나 무기력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나의 고민과 비전과 생각과 삶을 나누며 함께 성장하고 사역할 동역자를 만나지 못한 채 결국 미국으로 오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말았다.


4. 부정한 체제(system)의 문제


가장 신참이었던 내게 가끔 주어지는 일은 ‘허위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학교에 있을 때부터 자주 했던 ‘가짜 영수증 만들기’는 이제 이력이 나 있었다. 분야의 ‘전문가’를 초청했다며 그 전문가의 체제비, 강의비, 식비 등을 신청해서는 같은 팀의 사람들끼리 회식을 하는 일이 두어 달에 한 번 꼴로 있었다. 같은 자료(data)로 여러 학술잡지에 짜임새(plot)만 약간 바꾸어서 논문을 내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팀의 업적을 과대포장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들과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하라’고 하신 에베소서의 말씀을 함께 생각하며 나는 몹시 고통스러워했다. 과연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러한 상황에서 그런 일을 해서는 안되는 당위를 어떻게 설명하여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인가. 게다가 제일 신참이고 나이도 어린 내가… 내가 자주 선택한 길은 도망하여 숨는 것이었다. 화장실이고, 자료실이고 실험실이고… 이 ‘바람’이 지나갈 때까지 숨어서 그저 내가 그 일을 맡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얼마나 소극적이고 비겁한 일인가! 게다가 그렇게 얻어진 회식비로 나도 함께 가서 12만원 짜리 광어회를 맛있게 먹고는 하였던 것을 생각해 보면 말이다. 한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큰 체제(system)와 싸워서 공의와 정의를 지키는 일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아 보였다. ‘타협’, ‘회피’, ‘대립’ 등 바람직하지 못한 반응 등을 보이던 나는 조금도 그들을 ‘변혁’시키지 못한 채 얼마 되지 않는 퇴직금을 챙겨들고 연구소를 나왔다.


나의 이러한 경험들은 매우 제한적인 것이지만, 내가 가졌던 교만한 ‘비전’들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인정사정없이 깨어지고 말았다. 역시 많은 부분 문제는 직장인이 된다는 것에 대해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던 나의 태만과 직장의 상황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나의 무지에 있다. 그러나 한가지 뼈저리게 깨달은 것은 그리스도인이 한국의 반도체 관련 직장에서 일한다는 것은 엄청나게 힘든 일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곳에도 누군가는 가서 함께 살며 복음을 전하고, 한국의 반도체 업계가 하나님의 통치권 아래 있도록 해야 하지 않는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 나는 다시 한국에 가서 직장생활을 할 것이 두렵다. 몸서리가 쳐진다. 사자굴로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이런 식의 갈등을 겪지 않아도 되는 목사님들이 부러워진다. 그 좋은 성경을 깊이 연구하며 묵상하는 일이 ‘주업’이 아닌가! (아마도 목사님이나 선교사님의 어려움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리라) 게다가 선교사가 된다는 것은 왠지 더 거룩한 싸움을 싸우는 용사가 되는 것과 같은 (이원론적인!) 생각에 나도 그런 소명(calling)을 받고 나갈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평신도로 부르신 것에 감사한다. 목사님이나 선교사들이 가지는 ‘영광스러움’에도 불구하고 그분들이 감당할 수 없는… 인생의 전 영역에서 (직장생활을 포함한 불신세계에서)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선포하게 하는 거룩한 평신도에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고 많은 ‘훌륭한 목사님’들이 있지만 ‘훌륭한 평신도’ 하나 찾아보기 어려운 세상에서, 하나님에게 ‘더운 여름날의 시원한 냉수 한 사발’같은 사람이 될 기대 때문이다. 대부분의 평신도들이 ‘병신도’로 전락해버린 상황에서 평신도였던 집사 스데반, 빌립과 같은 기준을 되찾는 평신도 사역에의 부르심이 나를 몹시 흥분시키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 때로는, 목사나 선교사가 되고 싶다. 그러나 그보다 더 나는 멋진 평신도가 되고 싶다. 그것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며,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내게 주실 기쁨과 감격이 몸서리치게 기대되기 때문이다.


(이 글이 목사님, 선교사님, 혹은 그 지망/헌신자들의 기운을 빼는 글이 아니길 바랍니다.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고 저는 그 모든 분들을 참으로 존경합니다.)

[주명수] 사형제도와 기독교인

복음과 법


사형제도와 기독교인


여야의원 155명이 사형폐지 특별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이를 계기로 사형제 존폐 논쟁이 다시 가열되기 시작하였다. 존폐론자들이 주장하는 논거가 모두 일리가 있어 법조계 만이 아니라 국민들 사이에도 그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의견이 팽팽하게 맞선다. 사형폐지운동을 벌이는 사람들 중에는 특히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모두 사형폐지에 찬성하는 것처럼 보여질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심지어 기독교인들 사이에도 사형폐지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법학자 중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사형제도의 모순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형제도 존폐론에 관한 논쟁은 이미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학자들이 주장하는 사형존폐에 관한 이유들은 무엇인가. 이에 가세하여 기독교인들을 포함하여 다수의 종교인들도 저마다의 종교적 교리를 내세우며 사형제도의 존폐에 관하여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기독교인들은 사형제도에 관한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가. 그들의 논거를 살펴보고 사형제도 존폐에 관한 결론은 독자의 몫으로 돌리고자 한다.


사형제도는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형벌이다. 현재 각국은 사형제도를 폐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아직도 사형제도를 두고 있는 나라가 더 많다. 각국의 현황을 살펴 보도록 하자. 유럽은 35개국 중 27개국 정도가 사형제도를 폐지하였다. 이에는 영국, 독일, 오스르리아등이 포함되어 있다. 미국의 경우는 사형제도를 폐지한 주는 약 14개 주에 이르고 있다. 아시아 태평양 국가들의 경우는 호주, 뉴질랜드 등을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사형제도를 두고 있다. 이스라엘은 사형제도가 있기는 하나 실질적으로 사형이 집행되는 예는 거의 없다. 사형집행 방법으로는 총살, 참살, 전기살, 교살 등의 방법이 있으나 우리나라의 경우 일반인에 대해서는 교살의 방법을 택하고 있다.


18세기에 접어 들면서, 사형집행 방법의 잔혹성, 오판 가능성 등을 이유로 사형폐지론이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이를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이 바로 이탈리아의 베까리아인데 그는 ‘범죄와 형벌’이라는 저서를 통해서 사형제도는 법률적으로나 효과적으로도 불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그후 이에 동조하는 학자들이 많이 나오게 되었는데, 사형폐지론자들의 중요한 논거는 다음과 같다. 사형은 야만적이고 잔혹하므로 인도주의의 견지에서 허용할 수 없다. 인간의 생명은 신성하므로 사형제도로 사람을 살해하는 것은 악이다.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여 그 생명을 박탈할 권리가 없다. 인간에게 생명을 부여할 수 없는 국가가 이러한 생명을 박탈할 권리가 없다. 사형집행이 오판의 결과로 기인한다면 영구히 구제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온다. 사형은 일반사회인이 기대하는 것처럼 위협적인 효과를 가지지 못한다. 사형은 형벌의 주된 기능인 교육 및 개선기능을 전혀 갖지 못한다. 이에 반하여 사형 존치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논거를 보면, 대개 사형제도가 가지는 위하력, 즉 범죄예방 효과로서의 범죄억제력을 강조한다. 사람을 살해한 자는 그 자신의 생명도 박탈 당할 수 있다는 것은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법적 확신이다. “흉악범 등 중대범죄에 대해서 사형으로 위하하지 않으면 흉악범을 예방할 수 없다” 등이 사형존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논거들이다.


그러면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사형제도 존폐에 관한 논거들은 무엇인가. 물론 기독교인들 모두 성경을 인용하여 어떤 사람들은 사형제도를 폐지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하고, 어떤 사람들은 사형제도를 유지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한다. 사형존치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생명은 생명으로 이에는 이로 갚으라”는 것이 성경의 정신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형벌권을 국가에 위임하였으므로 사형제도는 성경적이라고 주장한다. 또 실제도 성경 어느 곳을 보더라도 사형제도를 폐지하라는 말씀은 없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사형제도는 비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에 의하면 구약성경에 생명에는 생명으로 갚으라고 하였지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악을 제하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지 법을 어긴 자들을 반드시 죽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사형폐지가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존치론자들을 향해 구약성경에 따른다면 안식일을 어긴 자, 부모을 공경하지 않는 자, 간음한 자를 죽이라고 하였는데 지금 그런 사람들을 죽이지는 않지 않는 가라고 반문한다. 이에 반해 사형폐지론자들은 구약의 율법에서 그 논거를 찾는 대신 예수님의 정신에서 찾는다. 율법이 법을 어긴 자들을 엄격하게 처벌하는 이유는 악을 없이 하고자 함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인류의 죄악에 대한 형벌을 대신 받으시고 십자가 상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죄악을 제하는 길을 여셨다. 이제는 인간의 죄악이 그에 대한 응보형으로 제하여 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제하여 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형존치론자들이 주장하는 성경적 근거는 그 근거를 잃었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인들이건 비기독교인들이건 우리나라에서 사형제도를 폐지하여야 하는 가에 대하여 그들 간에 논쟁이 어느 때보다 뜨거워질 전망이다. 여러분은 사형 존치론자편에 서 있는가, 아니면 사형 폐지론자들 편에 서 있는가?


[안종혁] 유학생활 중 스스로 성결케하라

한국은 좁고 미국은 두렵다


유학생활 중 스스로 성결케하라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수3:5).


이제 요단을 건너서 가나안을 점령하기 위한 준비와 정탐을 마친 여호수아는, 온 백성에게 스스로 성결케 하라고 부탁하고 있다. 즉 내일이면 여호와께서 요단을 가르시는 기사를 이스라엘 백성 중에 행하실 텐데, 성결하게 하여서 이 기적을 체험하기에 합당한 백성으로 준비하라는 명령이요 부탁인 것이다. “성결”이라는 말은 “거룩하고 깨끗함”이라는 의미인데, 즉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이 말씀과 기도로 더욱 거룩해지며, 말씀에 따라 사는 행실로 말미암아 깨끗한 성도의 삶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실제적인 유학생활 중의 영성훈련에 관련된 성결한 삶에 대하여는 지난 몇회에 걸쳐 쓴 “유학생의 경건의 연습과 약속”이라는 연재 칼럼에 이미 썼으므로 참조하기 바란다. 유학생활 중의 성결한 삶은 유학생활 동안에 열심히 예배드리고, 주야로 말씀을 배우고 묵상하며, 부르짖어 기도하고, 세상 가운데에서 예배와 삶이 일치하는 자로 살며, 또 주님 이 주신 것으로 만족하는 부단없는 경건의 훈련을 통하여서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본 칼럼에서는 크리스천 유학생의 영성훈련에 관한 성결보다는, 미국이라는 이질 문화 속에서 어떻게 실제적인 크리스천 유학생의 삶을 성결하게 살 것인가에 관하여 생각하여 보기로 하겠다. 특별히 미국은 하나님을 더욱 잘 섬겨보겠다고 신앙의 박해를 피해온 청교도들에 의해서, “In God we trust”라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 위에 세워진 세계 속에 유일한 국가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의 기초위에 세워진 미국이, 케네디 대통령 당시인 1962-63년에 공립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일과 기도하는 것을 금지한 이래, 이 나라는 1962년 이전에 비하여 몇십 배로 증가된 청소년 범죄, 이혼율, 마약중독, 동성연애 및 낙태의 합법화 등으로 타락의 길로 달려가고 있다. 그러나 비록 현재 미국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추방하며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고 하더라도, 거의 모든 미국 문화와 관습이 성경에서 말하는 원리에 깊은 뿌리를 두고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이미 한국문화에 깊은 뿌리를 둔 (나같은) 유학생 출신들은 이미 한국문화, 관습과 전통에 길들여진 눈으로 미국의 문화를 바라보려하기 때문에, 때론 당혹스런 문화적 충격을 경험하게 되고, 또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하게도 된다. 최근 “The Korean Christian Journal”(2001년 11월 25일자)에서 일리노이주 인권국의 이윤모 박사가 조사 보고한 “한인교인들의 신앙관, 참여, 교회의 안정성”이라는 소수인종 신앙생활 조사-비교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한인들은 교회와 의례중심의 신앙생활을 추구하며 개인 윤리관에는 더욱 투철하지만, 신앙의 생활화와 실천면에 타인종들(특히 흑인과 히스패닉 신도)에게 뒤떨어진다”고 보고하고 있다. 또 동보고서는 “교회출석이 신자생활에서 필수적이라는 데는 한인들이 단연 타민족 그룹보다 압도적이며, 또한 성경 읽기와 연구의 필수성에서도 한인들이 단연 앞선다. 신앙관을 가정, 학교, 일터에서 실천하거나, 사회정의 추구와 사회봉사의 필수성을 강조하는 면에서는 흑인, 히스패닉 신도들보다 한인들이 뒤떨어진다”고 결론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한국 이민자나 유학생들이 바른 신앙관을 가정, 학교나 일터에서 실천하거나 또 사회정의 추구와 사회봉사에 참여하며, 성결한 크리스천의 실제적인 삶을 사는 데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요단을 건너기 전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삶 속에서의 성결함을 유지하는 훈련을 유학생활 동안에 잘 해두어야 본격적인 이민생활을 시작할 즈음에, 요단강이 다시 갈라지는 하나님의 기사를 보는 인도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한국 크리스천 유학생들이 장래 미국의 이민을 고려하며, 유학생활 속에서 이루어야 할 성결한 삶의 각 부분들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성결한 학업성적 관리


미국에서 들을 수 있는 제일 “모욕적인 말”은 아마도 “거짓말쟁이”라는 표현일 것이다. 미국문화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진실을 감추고 위장하며 거짓말하는 것이다. 사실 미국의 전임 닉슨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하게 된 것은, 워터게이트에서 상대의 정보를 몰래 수집했다는 범죄보다는, 그 범죄를 감추려고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었다. 좀 우습기는 하지만, 지난 클린턴 대통령의 성추문 사건도, 성추문 자체보다는 성추문 사건을 감추려고 대통령이 거짓말을 했느냐 안했느냐에 모든 조사와 논리의 핵심을 집중했다고 보면 옳다. 미국에서는 언제든지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 잘못을 시인하면 상응하는 가벼운 처벌을 받거나 또는 용서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저지른 잘못을 은폐하고 위장하기 위하여 하는 거짓말은 용서가 안 된다고 보면 틀림없다. 정직을 생명처럼 여기며, 정직한 자만이 인정받을 수 있는 나라이다.


한국에서도 수많은 격언이 “정직하게 살라”고 말하고 있지만, 정직하게 살면 바보로 취급하는 사회도 있다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 아닌가? 그러나, 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언젠가 꼭 그 대가를 치루어야만 하는 나라가 미국임을 잘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다. 크리스천의 성결의 덕목에 거짓 없는 정직함이 가장 중요한 덕목 중에 하나임을 누가 부인할 것인가?


정상적인 미국 학생들에게 학과의 시험 중에 컨닝을 한다는 것은 용납하기 어려운 잘못된 행위이다. 자기 자신들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남이 하는 것도 결코 눈 감아 주지 않고, 컨닝하는 학생을 윤리위원회에 즉각 보고하는 정의감을 대부분이 가지고 있다. 최근 수많은 동양계 유학생들의 시험 중 컨닝 노력은 미국교수들의 마음을 심란케 하고 있는데, 크리스천 한국유학생들은 컨닝으로 주님의 영광을 가리고, 또 학교에서 퇴교 당하는 불명예를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또한 많은 동양계 학생들은 서로의 숙제(homework)를 보여주고, 또 심지어 답을 그대로 베껴서 내는 학생들이 종종 있어서 곤혹을 치르기도 한다. 담당교수가 서로 토론하라고 허락하면 토론을 할 수 있으나, 토론조차 하지 말라 하면, 서로 토론하는 것도 불법이다. 심지어 어떤 학생은 친한 친구가 “take-home exam”(집에 가지고 가서 치르는 시험)의 답을 보여 달라고 하여 답을 보여주고 (사실 부끄럽게도 나도 그럴 뻔한 경험이 있다), 또 답을 본 친구는 take-home exam의 답을 그대로 베껴서 제출하여 퇴교를 당하기도 한다. 이는 미국학교의 성적관리 원칙을 잘 모르기 때문에 저지르는 실수이다. 따라서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숙제나, take-home exam의 답을 보여 달라는 불법적인 요구를 결코 해서는 안될 것이며, 또한 잠시 마음이 상할지라도 자기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는 실수를 방지하기 위하여, 결코 답안을 보여 주어서는 안되는 것이 미국 학점관리의 기본 정의이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정직함이 바로 크리스천의 성결이 아니겠는가? 결코 불의한 방법으로 취득한 학점으로는 요단을 가르는 하나님의 기적을 보기 어렵다.


정직한 연구결과 보고


학문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수행하는 연구가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 바라며, 관련된 학계를 깜짝 놀랄게 할 만한 결과를 발표하고 싶어한다. 따라서 연구조사한 자료의 분석이나 또는 실험한 연구 결과를 조작하고 싶은 충동을 갖는다는 것은 일상적인 유혹이다. 또한 직장을 잡기 위하여, 빨리 학위를 취득하고 싶은 욕망에 실험결과를 확대해석하고 싶은 욕망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전문가는 자신의 연구결과에 부끄러움 없이 솔직해야만이, 세대를 넘어서 그 업적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최근 동양의 모나라로부터 유학오는 유학생들이 입학허가를 얻기 위하여 부정직한 방법으로 GRE나 GMAT, 또는 TOFLE 점수를 취득하며, 또 빨리 학위를 취득하고 취업을 하기 위하여 연구결과를 조작하고 있다는 소문은, 미국 대학교수들을 염려케 하며 촉각을 곤두세우게 하고 있다.


일본의 유명한 모고고학자가 일본의 고고학사를 뒤집는 획기적인 연구결과를 수 십년 동안 발표하여 자신의 학파를 구성하고, 국제 고고학계를 주름 잡았지만, 연구결과를 조작하여 발표하였다는 덜미가 잡히면서, 또 한 번 그의 부도덕성과 사기성에 세상이 놀란 사건이 최근에 있었다. 부끄럽고 망신스러운 일이며, 처벌받아 마땅한 처사이다. 또한 최근 한국 모대학의 연구팀이 국제전문잡지에 외국연구자의 논문을 그대로 표절하여 게제된 사건이 발각되어서, 한국대학이 국제적인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이에 더불어 최근에 한국에서는 목회자들의 타목회자 설교표절로 논란이 한창인데, 성구 하나 또 문자 하나 바꿈 없이 다른 목회자의 설교집을 베껴서 자기가 영감을 얻은 설교처럼(다른 목회자의 설교집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말하지 않고) 설교하는 것도 부정직한 것이라고 나는 본다.


자신의 연구결과를 해석하고 얻은 결과를 바로 해석하고 또 적극 방어할 수 있는 논쟁훈련은 전문가로서 꼭 필요한 것이지만, 연구결과는 절대로 사실대로 보고하여야만 한다. 크리스천이든 아니든 또 동서고금을 넘어서, 학문을 하는 사람의 학자적인 양심과 정직성을 생명과 같이 귀히 여겨야 될 덕목이며, 이에 관한한 단 한번의 실수도 용납될 수 없는 처절함이 바로 학문의 세계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가끔 남의 연구논문 결과를 표절하여서 말썽이 되는 학위취득자들도 있다고 들었는데, 표절한 논문결과로는 결코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축복을 누리기 어려우며, 언젠가 성결치 못한 행동 때문에 큰 댓가를 치를 날이 꼭 있게 된다. 연구결과의 보고에 부끄러움이 없이 정직하고 또 신실해야 할 것이다.


미국법 바로 지키기


미국 사람들의 준법정신은 참 놀랄 만큼 높다. 교통법규 준수, 줄서기의 습관화 및 기다림의 인내심은 우리 모두가 부러워하는 미국민성이다. 금년 9월 11일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저질러진 테러는 미국 역사상 미국 본토에서 벌어진 최대의 참상이다. 이미 미국은 9월 11일 이전의 미국이 아니며, 세계 각국에서 온 유학생들과 이민자들에게 관대했던 나라가 더 이상 아님을 알기 바란다. 내 앞마당에서, 외국의 테러분자들에 의하여 수천명의 가족과 동료가 죽는 테러의 참사가 벌어지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수백만명의 실업자가 생겨나고, 또 지금도 테러의 불안에 온 미국민이 떨고 있는 마당에, 법을 지키지 않는 유학생과 불법이민자들에게 자비를 보일 여력이 없다는 미국의 절박함을 모든 유학생이 피부로 이미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미국내의 급변한 상황을 고려할 때, 추후 이민을 고려하는 유학생과 그 동반가족들은 미국의 이민법과 세법을 꼭 지켜야 될 줄로 안다. 실수로 이것들 중에 하나만 어겨도, 미국이민을 고려할 시에 바로 실격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특별히 취득한 유학 Visa의 종료일과 갱신여부를 바로 이해하고, 또 필요하면 종료전에 바로 갱신하여서 어떤 기간이라도 미국의 불법체류의 기록을 갖지 않아야 할 것이다. 최근 이민법이 재정비되고 있는 중이니, 모든 유학생들은 각 학교의 외국유학생 담당자로부터 바뀌는 이민법의 바른 정보를 얻기 바란다. 또한 이민을 고려하는 경우에는 이민전문 변호사와 꼭 상의하면서 적법한 절차를 밟아야지, 결코 본인의 상식과 경험에만 의존하므로 자주 바뀌고 있는 이민 절차를 잘못 이해하여,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기 바란다. 또 학위 취득 후에, 전문 분야에 따라 미국의 이민국에서는 외국 유학생들에게 약 1년 정도의 practical training을 허용하고 있는데, 학위취득 날짜에 맞추어서, 미리 practical training을 신청하여서, H-1 Visa를 얻고, 이어서 Green Card를 신청하는데 차질이 없도록 지혜롭게 계획하고 또 적법한 절차를 따라야 된다고 생각한다.


미국에 살면서 가장 인상적인 것 중에 하나는, 모든 미국인의 자발적이며 성실한 세금납부의무의 이행이다. 한국에서는 어떻게든 세금을 적게 내는 것이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듯하며, 또 그 방법을 교묘히 하여 속일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지혜로운 행동이라고 자랑하기도 한다. 불행히도 납세청에 탈세로 걸리면 재수없이 망하게 되는 경우이고, 안 걸리면 수지 맞는 경우이다. 그러나 미국국민은 탈세를 죄악이요 수치로 여길 뿐더러, 또 탈세가 발각되면 형벌은 감당키 어려울 만큼 무겁다. 이곳에서 탈세는 사랑하는 국가의 재정을 도둑질하는 비열한 도둑질이요,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줄 부의 재분배를 빨아먹는 더러운 사기행위요, 양심을 팔아먹는 부도덕한 행위로 분류해 놓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미국에 이민하여 사는 한인 이민자들 중에서 상당수가 탈세함으로 돈을 벌었다고 회자되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이라면 걱정스럽고 부끄러운 일이다. 특히 지방자치제가 철저히 시행되고 있는 이곳에서, 탈세를 하거나 또 세금을 실제보다 줄여서 보고하여 이득을 취하는 경우는, 소속한 사회에 기여없는 기생충같은 인생으로 간주되고 있다.


장학금을 수혜하는 유학생들은 합법적인 세금납부 혹은 면제신청을 꼭 해야 할 것이며, 또 연말 세금보고 시에도 합당한 세금보고서식을 사용하여 보고해야 할 것이다. 몇백불의 세금을 돌려 받겠다는 욕심과 유혹 때문에 미국 이민법과 세법을 어겨서, 결정적인 시기에 낭패를 당하지 않도록 주의하기 바란다. 지금은 미국 이민법이 바뀌고 있음을 주지해야 한다. 미국에 세금을 내는 자만이 미국에 살 권리가 있으며, 또 불이익이 있을 시에 바르게 보호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바란다. 국가를 운영하는 세금을 바르게 또 자발적으로 낼 줄아는 일등 국민만이 그 나라를 일등국가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정직하게 세금을 내고, 또 미국의 법을 바로 지키자.


부당한 뇌물은 죄악


교통법규의 위반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때론 부득이 경찰에게 교통법규 위반 티켓(ticket)을 받는 경우가 있다. 나는 많은 한인 유학생들이 교통법규 위반 티켓을 받은 경우, 경찰을 속이거나 또 어긴 사정을 왜곡 주장하여 벌금을 면제 받았다는 무용담을 수없이 들었다. 거기에 또 하나님의 선한 도우심까지 덧붙여서 간증까지 하는 경우도 있다. 만일 자신의 과속으로 교통법규 위반 티켓을 받게 되는 경우, 경찰의 교통위반 단속이 특별히 부당하다고 생각되지 않은 한, 과속은 자신의 잘못이다. 하나님께서 법을 어겨가며 과속하여 달려도, 경찰의 감시로부터 지켜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은 성경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유학생들의 부족한 주머니 사정이야 이해되긴 하지만, 과속해서 교통위반 티켓을 받았다면, 빨리 달리면 죽을 수도 있다는 하나님의 경고로 알고 감사하게 벌금 내면 그만이요, 끝내 억울하면 법정에 가서 싸우면 된다. 교통위반 티켓 발급시, 동양계 학생들의 이상한 억지변명에 이미 신물나며 이골이 났다는, 경찰관의 농담에도 귀를 기울일 때가 되었다고 본다. 이에 더하여, 한국에서 옛날에 있었던 관행처럼(지금은 결코 그렇지 않으리라고 믿지만) 교통법규를 위반한 후에, 교통경찰에게 거래하자고 뇌물을 건넸다가, 도리어 혹을 붙이고 감옥에 간 경우도 있다는 이야기도 귀담아 들어야 될 것이다. 교통법규를 어기고서, 교통경찰관에게 거짓말로 어필하고, 우기거나 간청하는 크리스천이 되지 말자. 많은 유학생들이 한국에서 뇌물의 효용을 익히 배우고 자란 탓에 뇌물의 효용을 미국에 쓰려하는 학생들이 있는데, 미국에서 뇌물은 금물이요, 위법임을 알기 바란다. 물론 성경말씀에도 뇌물을 금하고 있다.


지난 수 년동안에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에 미 연방정부의 한 연구기관의 프로그램으로부터 수백만불의 연구비를 지원 받아 연구를 수행해오고 있는 한국계 미국교수를 알고 있는데, 그분의 말씀에 따르면 매년 한두번씩 연방공무원인 담당 프로그램 매니저가 그의 연구실을 방문하여 연구실적을 평가하곤 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이 방문시에 함께 먹게 되는 단 몇 불의 점심값 조차도 연방공무원들이 꼭 지불하고 간다니 모두가 놀랄 일이다. 물론 그렇게 큰 연구비를 받거나 또 연구수행 중에도 뇌물로 단 1센트도 쓴 적이 없으며, 또 써서도 안 된다는 것은 여러 유학생들이 실로 믿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철저한 준법정신과 정직성은 미국 문화가 크리스천 문화에 근거를 둔 때문이며, 이것이 미국을 움직이는 참 원동력이라고 나는 믿는다.


어떤 뇌물이든 주고 받는 것이 크리스천의 성결함을 더럽히는 죄악임을 알고, 요단을 건너는 기적을 보기 전에 넘어 질 수 있는 거침돌이 된다는 것을 알자. 물론 서로에게 이권이 관련되지 않는 상황에서, 서로 사랑으로 주고 받는 선물은 너무도 아름다운 것이며, 또 적절한 값의 선물은 서로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니 권장할 만한 일이다. 미국 사람들은 감사절이나 성탄절에 작은 감사의 선물을 나누기를 진정으로 즐긴다.


성적으로 순결하기


십여년 전만해도 미국에서 싱글 유학생을 보기가 드물었는데, 이제는 유학생의 주류가 싱글들이 되어가고 있다. 유학생 중심의 도시마다 결혼 적령기의 남녀 싱글들이 넘쳐나고 있다. 따라서 이 젊은 싱글들을 신앙적으로 잘 양육하고, 또 신앙 안에서 짝을 맺어주는 일은 이제 아주 시급한 과제가 되고 있으며, 매 KOSTA 년차 대회 때마다, 크리스천 남녀 싱글들 짝 지어주기 프로그램(예를 들면 “박수웅과 함께”)이 아주 인기 프로그램이 되었고, 퍽 고무적인 프로그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할 수만 있다면, eKOSTA의 Webzine에 크리스천 싱글들의 만남의 장을 마련하여서, 서로 예수 안에서 장래의 배후자들을 만날 수 있도록 시도해 보면 참 좋을 것이라고 생각되며, 이 칼럼을 통하여 과감히 제안하여 본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영광을 위하여 크리스천 새가정의 탄생은 가장 축복할 만한 일이며, 권장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공부에 바빠서 교제의 시간조차 충분치 않는 크리스천 남녀 싱글들이, 지역과 학교와 교회의 제한된 공간과 시간을 넘어, 만남의 장을 eKOSTA Webzine에 마련할 수 있다면, 일년에 한 번 뿐인 KOSTA 년차 대회시의 “박수웅과 함께” 프로그램을 연중무휴로 진행하는 셈이 될 것이다. 물론 다소의 부작용도 예견될 것이나, 싱글들이 섬기는 교회의 목사님 및 담당유학생 지도자와 잘 협력하여 운영한다면, 도처에서 적절한 크리스천 배후자를 만나지 못하여 고민하는 수많은 결혼 적령기를 넘기며 안타까와하는 싱글 형제-자매들의 고민을 풀어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점에 관하여 독자광장을 통하여 논의가 진행되었으면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최근에, 싱글들 중에서 결혼도 하기 전에 서로 혼전 동거하는 사례가 늘어간다는 충격적인 보고는 극히 염려되는 일이다. 크리스천 유학생 중에서도 이런 사례가 늘고 있다고 하니 아연할 따름이다. 물론 부모의 통제를 벗어나 살면서, 결혼 적령기의 싱글 남녀가 서로 결혼하고픈 정도로 사랑하기에, 아예 돈도 절약할 겸 혼전 동거하고픈 유혹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것은 짐작이 간다. 하지만 최근 미국과 유럽의 특정지역에서 싱글 유학생들의 혼전 동거 생활은 이미 큰 사회문제가 되고 있으며, 지역 목회자들의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는 것은 심히 걱정스러운 일이다. 시편 119편 9절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하리요,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말씀을 보면, 젊은이들을 어떻게 행실의 타락으로부터 지킬 수 있을까에 관한 시편기자의 고뇌를 엿볼 수 있다. 즉, 주의 말씀에 따라 사는 것만이, 그 행실을 깨끗게 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따라서 성경공부하면서 이루어지는 싱글 남녀의 교제는, 이 시편 말씀에 따라 삼가며 진행하는 최고의 싱글 남녀의 교제의 장이 될 법도하다.


한마디로 어떠한 구실과 변명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싱글 유학생 남녀의 혼전동거는 결코 성결치 못한 행동이요, 더욱 크리스천 유학생들에게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누구든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사는 것은 본인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들 자신이나 그들이 속한 단체가 받아야 할 하나님의 경고와 징벌은 언젠가 눈물 없인 받을 수 없는 쓴잔이 될 것이기에, 모든 싱글 크리스천 유학생들은 이점에 더욱 유의하여 성적으로 성결하게 살라고 권하고 싶다. 정히 자신의 믿음으로 통제할 수 없다면,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속히 결혼한 후에 계속 학업을 진행할 것을 권면하고 싶다. 또한 여러분의 주위에 그러한 동료와 친구들을 보거든, 사랑으로 권면하고 기도해 주어서,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따라 사는 성결한 생활로 되돌아 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 바란다.


물질의 성결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에서 물질과 돈을 합법적으로 벌어서 마음껏 쓰는 것은 누구도 탓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인 줄 믿는 크리스천은 돈과 물질의 취득과 관리에 성결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본래 하나님의 것을 잠시 위임받아 누리며 쓰고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하는 원리에 따라 취득하고 또 사용해야 함이 합당하다고 본다.


하나님의 성결의 부탁을 저버리고 물질의 탐욕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산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아간”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요단을 건너기 전 이스라엘에게 성결을 부탁하고 또 요단을 건넌 후에도 할례를 행하여 성결을 부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간이라는 사람의 물질에 대한 탐욕으로 인한 성결치 못한 행동으로 인한 범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샀고, 온 이스라엘 백성이 아이성에서 패배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뿐만 아니라, 본인과 온 가족이 멸망받는 심판을 받았음을 여호수아서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수년전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미국의 소도시의 가난한 타운에서 조그만 가게를 운영하는 한국이민자 한 분이 있었다. 어느날 이분은 재정적으로 무리를 하면서, 꿈에도 갖고 싶던 고급 벤츠 승용차 하나를 사게 되었다. 문화와 언어의 장벽과 인종차별의 편견의 벽을 뚫고 넘어온 고달픈 이민 생활을 뒤돌아 보며, 한국에서는 타기 어려운 고급 벤츠 승용차를 타는 맛이란 마치 신분상승이라도 된 듯이, 그간에 당한 모든 수고와 고생을 다 보상해 주는 듯 싶었다. 알아 주는 이 없는 이민생활의 열등감도 다소 극복이 되는 듯 싶었다. 그러던 중 어느날 그 고급 벤츠 승용차를 타고 가서 자신의 가게에서 일을 할 때에, 고객들 중에서 밖에 세워둔 벤츠 승용차가 당신의 차냐고 묻은 사람이 많았다. 좀 조심스럽기는 하였지만, 그들의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그후부터, 알아듣기 힘든 악센트를 고맙게도 잘 들어주며 친절하게 물건을 사주던 저들이, 이모 저모로 불평하기 시작하더니, 종내는 가게 앞에 세워 놓은 생명처럼 애지중지 여기던 고급 벤츠 승용차를 북북 긁어서 못 쓰게 해 놓고 말았다. 좀 과장이 섞인 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무조건 돈이 있으면 미국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한 분수를 모르는 한인이민자의 안타까운 이야기이며, 무엇이 미국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요, “미국적인 분수”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한국 이민자의 현주소를 담은 아픈 허상의 이야기이다.


특별히 미국 대도시에 거주하며 유학하는 유학생 중에 미국의 부호들도 나이가 들어서야 탈 수 있는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며, 많은 돈을 향락과 소비에 쓰는 귀공자 유학생들이 많다고 하니, 이또한 분수를 모르는 한국 유학생의 희극적인 허상의 이야기이다. 사우디 아라비아 왕가의 왕자도 아닌 주제에, 분에 넘치는 고급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한국 유학생에게 미국사람이 경멸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는 것을 저들은 모르고 있을 것이다. “미국의 분수”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탓이다. 한국의 부모가 부자이든 아니든 간에, 유학생 신분에 맞는 값싸고 실용적이며 튼튼한 승용차를 구입해서 타는 것이 바른 이치이다. 물론 대부분의 한국 유학생들이 힘써 공부하여 장학금을 받으면서, 또 밤낮으로 일하여서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는 건실한 유학생들이 많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들에게 마음껏 격려와 갈채를 보내주고 싶다.


물질에서 성결한 생활이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돈을 벌고, 소비하는 것이며, 가난한 자와 함께 가진 것을 나누며, 자신의 물질의 근원적인 소유주가 누구인지를 알고 건실하게 생활하는 것이다. 오늘도 유학은 꿈에도 못 꾸고 열심히 일하며 수고하는 고국의 동갑내기 동료들을 생각할 때에, 옷은 검소하게, 아파트는 안전하고 가급적 싼 곳에, 자동차는 분수에 맞는 실용적인 것으로 타도록 해야 할 것이다. 빚더미 위에 앉아 있는 한국의 경제상황의 근본이유를 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미국의 고등학생들조차, 분수에 넘치는 고급승용차를 타는 한국유학생에게 고개를 갸우뚱거린다는 것을 장래의 지도자들이 될 유학생들이 몰라서야 될 것인가? 여러분이 미국에 전문 직장을 얻게되어도, 결코 유학생 때의 생활수준보다 별반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미리미리 미국의 재정관리 방법과 “미국적 분수”를 배워둠이 좋을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성결하게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궤를 맨 제사장들의 발이 물에 잠기자 요단이 마른 땅으로 열려지는 기적을 보게 된다. 이와같이 모든 크리스천 유학생들이 영적생활에 성결되고, 또 생활과 삶 속에서 성결을 이루어서, 학위취득 후에 고국에서나 또는 미국에서 전문직장에 종사할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행로에서 열게 될 요단강이 갈라지는 축복을 누리게 될 줄로 믿는다.


본 컬럼에서는 미국이라는 이질 문화 속에서 유학생활을 하는 한국 유학생들이 어떻게 실제적인 삶을 성결하게 살 것인가에 관하여 썼으나, 거의 대부분의 크리스천 유학생들은 본 컬럼에서 지적한 성결치 못한 행위와는 관련이 없음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또한 나의 짧은 이민 생활과 경험으로부터 나온 견해가 다 온전하다고 할 수 없음을 인정하며, 또 특정한 그룹이나 개인을 향하여 편향된 공박이 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다음 회에서는 “요단에 들어서라”라는 제목으로 실제적인 미국 취업의 정보취득법, CV(이력서) 작성법, 강의 및 연구계획서 작성법 및 인터뷰 준비에 대하여 소개하고, 또 미국 취업의 문을 적극적으로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적극적이며 용기있는 크리스천 유학생의 취업 준비에 관하여 나누어 보기로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