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 유학생의 엘리트 주의

이달의 초점


기독 유학생의 엘리트 주의


유학을 한다는 것, 전혀 다른 문화와 환경 속에 자신을 던져 더 나은 학업환경을 찾아 나선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모험을 감수하는(risk-taking)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학을 나온 유학생들 가운데에서 그러한 모험 감수(risk-taking)를 하고서도 자신이 원하고자 하는 바를 찾아나선, 적극적, 진취적, 모험적 엘리트들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그러한 허들을 뛰어 넘어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성향을 가진 유학생들이기에 그들이 보이는 삶의 방식과 태도도 그들만의 독특한 특징이 있다. – 그것은 그들이 매우 목표 지향적이고 성공 지향적이며 행동 지향적이라는 것이다. ‘학위’로 상징되어 질 수 있는 어떤 ‘성공’을 바라보지 않고서 대부분의 유학생들에게 이러한 모험 감수는 그 자체로 절대로 매력적인 것일 수 없다.


이러한 이들의 삶의 방식은 매우 자주 그리스도인 유학생들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힘든 유학 생활 도중에 만난 사람이건, 이미 유학을 오기 전에 그리스도인이었건 간에 이들의 신앙 행태는 매우 진취적이고 적극적이며 목표 지향적이고 성공지향적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회심 이전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기질이나 성품 등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나, 그러한 기질과 성품도 분명히 ‘거듭나야’함을 생각해 볼 때 유학생들의 일반적인 신앙의 모습들은 한번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 목표 지향적 자세의 문제


긍정적인 목표 지향적 자세의 모델은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사도 바울은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빌립보서 3:14)을 그리스도인의 모델로 제시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목표 지향적인 자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그 목표가 어디에서 기인했느냐, 그리고 그 목표의 내용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거의 모든 기독 유학생들의 ‘목표’는 비기독 유학생들의 목표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저 ‘공부 잘 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허울 좋은 합리화를 한다는 것을 굳이 차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이러한 목표 지향적 자세는 또 다른 문제를 가지고 있다. 목표를 학문적/직업적 성취로 설정해 놓고 있는 유학생들에게 신앙 훈련/신앙 교육의 필요를 인식시키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유학생들에게는 아주 기본적인 신앙 훈련이나 성경공부도 자신의 목표를이루는 장애물로 여기지기 십상이다.


2. 성공 지향적 자세의 문제


이 역시 소위 ‘성공’에의 기준과 동기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그 자세의 건강함 여부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이 경우에도 세속적 가치관에 근거한 성공주의와 전혀 다르지 않은 성공 지향적 자세들이 유학생들과 같은 소위 ‘엘리트’ 그리스도인 사이에 편만한 듯 보인다.


대부분 이러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있어, 노력(성실함)과 성공(성취) 사이에 하나님의 자리는 없다. 모든 노력을 기울여 성실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은 분명 하지만, 모든 성실함이 언제나 성공으로 이끌어 지는 것은 아니다. 그 사이에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인도하심이 분명히 있다. 그래서 신실하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노력을 했음에도 성공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도 선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나 세속적 성공주의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 그러한 사람들은 실패자이자 낙오자일 뿐이다.


또한 이러한 세속적 성공주의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은 소위 ‘고지론’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 자신의 성공을 하나님의 뜻으로 합리화하는데 사용한다. 그리고 자신의 성공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들을 “기도와 믿음으로 담대히” 물리치기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3. 행동 지향적 자세의 문제


“40일 금식기도 3회” 어느 ‘부흥사’의 명함에 이런 ‘경력’이 써 있었다고 한다. 40일 금식기도를 몇번 했다는 것이 신앙의 이력에 들어가는 것도 우습거니와, 어떤 신앙인의 모습이 어떤 일을 행했는지로 판단되는 모습은 더욱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은 소위 ‘엘리트’ 기독 유학생들 사이에 너무나도 많이 발견되는 모습들이다. ‘예수를 믿으면 이런 것들은 해야지’ 하면서 여러 가지 신앙의 행동들을 시도해 보는 모습들. 그래서 흔히 ‘헌신’의 핵심을 ‘행함’에 두는 모습을 흔히 발견한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어떤 일을 할 것인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어떤 그리스도인이 될 것인가에는 별 관심을 갖지 않는 안타까운 모습들이 너무나도 자주 눈에 뜨인다. 지역교회에서도 당장 이처럼 눈에 띄는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을 ‘일꾼’으로 여기기 마련이고 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분량에 진정으로 이르는 길은 점점 더 멀어지게 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면 쉽게 지치게 되고, 고갈이 되고, 상처를 받게 된다.


금년 코스타의 주제를 “회복되는 하나님의 나라, 치유되는 자아”로 잡은 것은 어찌보면 매우 일반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유학생들의 성향에 매우 반대되는 것처럼 보인다. 앞에서 언급한 비정상적이고 비성경적인 (기독) 유학생들의 흐름이 이번 코스타 한번으로 완전히 바뀔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다소 비상식적인 낙관적 기대이겠으나, 적어도 소수의 사람들이 이번 코스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유학생 문화의 “회복”에 대한 소망을 품게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언급한 유학생들의 문화 속에서 상처를 받고 고갈된 많은 영혼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풍성한 “치유”를 경험하는 일들이 있었으면 한다.


하나님께서 또 다시 크게 일하실 코스타를 기대해 본다.

[함철훈] Easter 2002

eKOSTA 갤러리


Easter 2002







이제 봄기운이 세상에 가득합니다.
얼었던 하늘이 땅을 녹이고
그 땅에 물이 고였습니다.


이젠. 내게 주신 모든것을 통해
선하고 아름다운것을 찾게 됩니다.


고인 물에 피어 나는 생명의 싹으로,
죽음의 권세와 모든 악을 깨뜨리시고
다시 사신 주님을 바라 봅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세상을 이기신 주님을 온세상은 노래합니다.


[팽동국] 백금산 목사의

eKOSTA 서평


백금산 목사의
<신앙 전기를 읽으면 하나님의 일하심이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 생활에 있어서 신앙전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고 그에 대해 동의하고 있음에도 어떤 유익이 있으며 왜 그렇게 중요한지, 그리고 방법적인 면에서 어떤 전기를 읽으며 또 어떻게 읽어야 될지 모르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부제 ‘신앙 전기 읽기의 체계적 길잡이’에 걸맞게 백금산 목사의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아주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신앙전기를 읽는 유익들 뿐 아니라 전기를 읽으며 빠지기 쉬운 함정들을 알려주기도 한다. 또한 전기 읽기를 시작하는 이들을 위해 3단계로 나누어 각 단계별로 여러 권의 좋은 신앙 전기 책들을 소개하기까지 한다. 저자의 저서와 역서인 <맥체인식 성경읽기 방법> 에 대한 책과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살 수는 없을까?>를 출판하고 난 후 목회자들을 비롯한 많은 기독 신자들이 보인 반응 중에서 ‘맥체인’과 ‘조나단 에드워즈’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는, 한국 교회의 현재의 심각한 증상을 ‘교회사 기억 상실증’이라 진단하며, 이 교회사 기억 상실증을 치료하는 가장 좋은 해결책이 바로 신앙의 위대한 선배들의 전기를 읽는 것이라고 처방한다. 그리고 저자 자신의 전기 읽기 3단계의 경험을 통해 전기 읽기의 중요성을 마치 광맥을 발견하는 것으로 비유하고, 5천 권의 전기를 소장한 목사와 125회 연속 전기 설교를 했던 목사를 통해 받은 감동을 바탕으로, 전기 도서관 설립에 대한 꿈을 갖게 되었다는 자기 경험을 나눈다. 그러면서 현재 한국 교회의 책 읽지 않는 성도와 목회자들에게 도전을 하고 있으며, 더불어 자녀 신앙 교육의 보물창고가 바로 전기임을 구체적 예를 들어 설명해 간다.


뒤이어 2장에서는 전기를 읽을 때의 유익들을 다루는데,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계기를 부여하고 신앙 성숙의 목표를 설정하는데 도움을 주며, 신앙 성숙의 과정과 방법을 배우게 되며, 자기 점검과 자기 반성의 기준을 얻을 수 있으며 전기 읽기는, 교회사 이해의 창문이며 하나님의 섭리 이해의 열쇠가 된다는 점들이 바로 유익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3장에서는 전기를 읽을 때 빠지기 쉬운 함정을 다루는데, 사람을 영웅화하거나 우상화할 위험성, 자신의 왜소함으로 인해 절망하거나 자포자기하기 쉬운 점, 그리고 앵무새와 원숭이가 되거나 혹은 구경꾼이나 관객, 혹은 대리만족에 머무를 위험성을 경고한다. 그리고 4장에서는 누구의 전기를 읽을 것이지를 3단계로 나누어서 첫째, 전기 읽기를 맛들이는데 필요한 전기 소개서, 둘째, 중요 인물에 대한 분석적 전기 읽기의 예로 영적 거인 6명을 소개하며 권위있는 전기, 증언된 전기, 일반 전기를 비교 분석해 가며 전기 읽기를 하는 방법과 책들을 소개하고, 셋째, 시대별, 주제별 종합적 전기 읽기에 대한 단계와 각 단계에 맞춰 주요 신앙 전기들을 소개하는데, 우리에게 매우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유익을 준다.


나 개인적으로 전기를 읽으며 얻는 유익들을 들자면, 우리는 누구나 이 시대와 문화에 의해 갇혀서 한정적이고 제한되게 하나님을 알고, 교회와 성도의 영광스러움을 희미하게 이해하거나, 성경 말씀을 피상적으로 깨닫게 되기 쉬운데, 그러한 한계와 제한점을 신앙의 위인들을 만나며 본래의 영광스러움에 가깝게 회복할 수 있는 것이 최대의 유익이라고 생각한다. 신앙 전기를 읽으면서 그들의 삶을 통해 나타나신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과 위대함을 보면서 가끔 드는 생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분들을 위해서도 나 자신을 위해서도 동일하게 돌아가셨는데, 왜 그분들은 그렇게 큰 감동과 능력으로 살아가는데 나는 왜 이렇게 늘 경박하고 천박하게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으며 이세상의 법과 가치관에 휩쓸려서 살아가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되는 것 같다. 나 자신과 이 시대와 세대를 보면 절망할 수밖에 없지만, 그렇게 과거에 위인들을 통해 세상과 역사를 바꾸신 하나님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에, 이 캄캄한 암흑의 시대에 다시 한번 그러한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일들을 허락하시기를 기대함으로 기도하면서 기다릴 수 있게 된다.


더불어 자녀들의 신앙 전기 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은데, 실제로 내가 잘 아는 어느 중학생 한 명이 최근 약 6개월 정도 신앙전기를 꾸준히 읽으면서 그의 가치관이 변하고 비전이 변화되어서 돈을 많이 버는 사업가가 되고 싶다는 아이가 선교사가 되고 싶다는 새로운 비전을 발견하는 것을 목격했다. 신앙 전기를 읽으며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허드슨 테일러 같은 선교사가 되고, 조나단 에드워드나 마틴로이드 존스 같은 목사가 되고, 윌리암 윌버포스 같은 세상을 바꿀 하나님의 정치가가 되고, 존 뉴턴 같은 과학자가 되고, 조선을 성서위에 세우려던 김교신 같은 선생이 될 꿈들을 꾸며 자란다면 그보다 더 귀한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인식 하에 우리 부부는 앞으로 신앙전기 전집만은 반드시 집에 사서 보관하여 아이들과 함께 읽어가며 아이들이 신앙 위인들의 삶을 모델로 삼아 자신들의 비전을 발견하고 꿈을 꾸며 자랄 수 있도록 하자는 약속을 한 바 있다. 우리 이코스타 독자들도 이 백금산 목사의 책을 함께 읽으며 전기 읽기에 도전과 안내를 받아, 회복되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대와 자신들의 비전을 새롭게 발견하며, 더불어 자녀나 주위 사람들에게도 이러한 꿈들을 심어주는 일들이 있기를 기대해본다.

[최영기] 담임 목사님을 좋아해야 합니다

행복한 교회생활


담임 목사님을 좋아해야 합니다


담임 목사님을 좋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좋아하는 사람으로부터 배우도록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청소년들이 옷차림이나 매너를 누구에게서 배웁니까? 자기가 좋아하는 배우나 가수로부터입니다. 학생들은 어떤 과목에서 성적이 잘 나옵니까? 좋아하는 선생님이 가르치는 과목입니다.


담임 목사님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믿음이 자라지 못합니다. 설교를 들어도 비판적으로 되고 도움이 안 됩니다. 사역을 해도 마지못해 하게 되고 기쁨과 보람을 맛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선택할 때에 신중을 기해야합니다. 결혼 배우자를 선택할 때만큼 신중하게 선택하여야합니다. 교회를 선택할 때에는 교회 프로그램보다는 담임 목사님을 보고 선택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프로그램이 좋아서 선택하는 경우에도 담임 목사님에 관하여 최소한 불편함은 없어야합니다. 영적 성장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프로그램보다는 담임 목사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취향에 맞느냐 안 맞느냐 보다는 하나님이 쓰시는 분이냐 아니냐를 보아서 선택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분이라는 나름대로의 확신이 있어야만 그의 영적 권위를 인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영적 권위를 인정할 때에 순종할 수 있고 좋아할 수 있습니다.


일단 교회를 정했으면 담임 목사님을 있는 모습 그대로 수용해야합니다. 담임 목사와 교인이 사랑의 관계 속에 머물려면 부부들이 사랑의 관계 속에 머물기 위하여 하는 것을 똑같은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행복한 부부는 서로를 수용합니다. 담임 목사님도 있는 모습 그대로 수용하여야합니다. 행복한 부부는 장점을 보고 단점은 넘어갑니다. 담임 목사님의 단점도 대범하게 넘어가는 관용을 보여야합니다. 행복한 부부는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담임 목사님의 자랑도 아끼지 말아야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을 고백하기도 하지만 사랑을 고백함으로 사랑스러워지기도 합니다. 담임 목사님을 자랑하다 보면 목사님이 점점 더 좋아집니다.


부부가 이혼의 가능성을 배제했을 때에 행복할 수 있습니다. 문제가 생겨도 최선을 다하여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교인들도 일단 교회를 정한 후에는 목사님이나 자신이 교회를 떠날 가능성을 배제해야합니다. 담임 목사님이 싫어질 때도 있고 껄끄러운 관계가 될 수도 있지만, 헤어질 수 없다는 결의만 있으면 어떤 문제든 해결하고 목사님을 다시 좋아하게 될 수 있습니다.


목사님을 좋아해서도 이지만 목사님을 좋아하려는 노력 가운데에서 교인은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오화영] Joy, 또 일 저지르다!

Joy의 편지


Joy, 또 일 저지르다!


제가 부러워하는 두 가지 체질이 있습니다.


하나는 바로 “무대체질”


평소엔 뭐 별 볼일 없는 거 같은데 무대에만 올라가면 갑자기 말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고, 연주도 잘해서 그야말로 폼나는 체질. 그러나 저는 애석하게도 “하던 짓도 멍석 깔아주면 못한다”는 속담에 딱 어울리는 전형적 인물이죠. 이야기도 중얼중얼 거리기는 하는데 여러사람 앞에 나가서 하라면 덜덜 떨고, 대학 때는 성악을 전공 하면서도 남들 앞에서 노래하는 것이 영~~ 어색해서 늘 “성악과 반주 전공” 이라고 우기면서 남들 노래할 때 반주하기를 즐겼다면 이해가 되실지…


또 다른 부러움의 대상은 바로 “공부체질”입니다


저는 자칭 “살림체질” 내지는 “백조체질” 이거든요. 정말 살림을 잘할지는 결혼을 해봐야 알게될 일이지만 어쨌거나 공부 보다는 살림이나 엉뚱한 것에 취미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일단 학교 가는 것 보다는 수퍼마켓 가는 걸 좋아하고, 리서치 하는 것 보다는 시장조사 하고 책구경, 음반구경 하기를 좋아하고, 도서관에 앉아있는 것 보다는 부엌에서 뭘 만들어 먹거나, 벤치에 앉아서 먼 산 바라보기를 좋아하죠. 물론 매일 그걸 해야만 하는 입장이 되면 어찌될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현재로서는 그렇다는 겁니다.


이런 저에게 갈등생기는 일이 생겼으니 바로 “유학


사실 오래 전부터 바라던 일이었지만 이렇게 늦게(?) 기회가 오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것 같습니다. 친구들은 아들래미가 유치원엘 들어간다는 둥, 어버이 날 카네이숀을 달아주더라는 둥, 알수없는 딴 나라 이야기를 해대는 판국에 저는 다시 학교를 가야 하다니… 사람들의 시선이 등뒤에 꼽혔습니다. “쯧쯧 시집이나 갈 것이지… 이제 유학을 가면 언제 시집을 가누” 그러면 저는 이렇게 얼버무려 넘겼습니다. “공부는 혼자서두 할 수 있지만 결혼은 혼자서 못하니깐, 일단 혼자서 할 수 있는 거 하려구요.” ^^;;


그리고는 결국, 2000년 1월에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고 말았죠.


부모님의 기억에 따르면 저는 5살 때부터 시집가는게 꿈 이었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달랐던 모양입니다. 결국 저를 이 나이에 공부하라고 미국 땅에 떨어뜨려 놓으신 걸 보면 말입니다.


음…저는 압니다.
결혼하면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음악, 하나님 모두 뒤로하고 살림만 하며 “결혼생활”을 신처럼 받들며 살 사람 이라는 걸 말이죠. 하나님도 그 사실을 아셨겠죠. ^^ 그래도 아직까지는 하나님 앞에서 제가 꼼짝 못한다는 것을 아시기에 저를 이곳에 두고 달래는 중이신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얼떨결에 시작된 듯한, 그러나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 속에 시작된 Joy의 유학생활. 그것이 만만치 않다는 것은 구구절절이 설명드리지 않아도 모두들 미루어 짐작하실 겁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무대체질도 아니고 공부체질도 아닌 제가 졸업을 앞두고 또 다른 모험을 감행하게 되는군요. 미국에 온 이후, 선배, 후배, 친구 등 세계 각 곳에 흩어져 있는 지인들에게 제 소식을 알리고, 유학생활의 기록을 남기자는 차원에서 Joy’s email~*을 보내곤 했는데요. 이제 그 비슷한 것을 오픈된 웹 공간에 실어야 할 운명에 처했지 뭡니까~?


한 편으로는 두려움이 마구 몰려오기도 합니다.


이젠 더 이상 내가 보내고 싶으면 보내고 말고 싶으면 말 수 있는 “내맘대로 식”의 이메일이 아닌 것이죠. 책임을 가지고 써야하는 “일”이 될지도 모르는 것. 때로는 감사보다 불평으로, 때로는 잘한 일 보다는 엎어지고 코깨져서 빨간약 바르고 부끄러워할 순간이 더 많을텐데 그런 걸 천하에 공개를 해야하나…싶은 갈등이 있습니다.


이미 세상이 만만치 않다는 것도 조금은 알고, 다른 사람들 마음이 내 맘 같지 않다는 것도 압니다. 어쩌면 괜한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도, 도마위의 생선이 될 수도, 그리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을 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온갖 위험부담을 안은채 이 일을 결단합니다. 저는 새로운 깨달음을 전할 지혜나 지식도 없고, 매끄러운 글 솜씨도 없고, 남의 인생을 바꿀만한 설득력은 더 더욱 없습니다. 다만 그저 제가 공부하면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길을 걸으면서, 피아노를 치면서, 음식을 만들면서, 언제 어디서든 늘 기억하며 살려고 애쓰는 그 분, 저와 함께 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과 성품, 그리고 함께하심을 나누고 싶습니다. 저의 약함 속에 드러나게 될 하나님의 강함을 기대합니다. 그 분이 드러나길 기도해 주세요.


주 안에서 행복~*


sAN frANcIsCO,
Jo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