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호] 회복되는 하나님의 나라, 치유되는 자아.

KOSTA 성경강해


회복되는 하나님의 나라, 치유되는 자아.


복종의 사회학


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 권 준수 교수는 “뇌 중풍환자의 30%-50%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린다. 분노와 우울증이 밖으로 폭발할 때 대구 지하철 같은 참사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2002년 정신질환자가 일으킨 범죄는 1,447건에 이르며 한국에 약 16만 명의 심한 우울증환자가 방치되고 있다. “혼자 죽기 억울해..” 세상에 대한 원망이 깊어가고, 살기 점차 힘들어지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대인관계 파괴와 소외감에 절망한다. 서울대병원의 보고는 충격적이다. 20세 이상의 남자 45%가 인격이상징후가 있다고 했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범죄는 소외감이 가져온 절망과 자포자기 행동이었다.


인간관계 파괴는 영적인 삶에도 치명적이다. 고든 맥도널드 목사는 그의 저서 <영적인 열정을 회복하라(Restoring Your Spiritual Passion)>에서 “열정”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려는 열정, 믿음으로 살며, 아낌없이 주를 섬기고 봉사하려는 열정, 자신을 통제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열정,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소망하는 열망이다. 그러나 이 열정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 열정을 얻는 지름길도 쉬운 길도 없다. 신비로운 해결책도 없다. 열정을 계속 공급받는 사람들만이 꼭대기로 오를 수 있다. 한 개인을 누구보다도 뛰어나게 만드는 힘은 열정이다..” 열정은 마치 만나와 같다. 매일 아침 새로운 하루치 음식을 광야에서 거둬들여야 하듯 열정도 매일 새롭게 채워야 한다. 만나를 오래 간직하면 곰팡이가 펴서 먹을 수 없듯이 열정도 시간이 지나면 사그러들어 못쓰게 된다. 주님을 위해 열정적으로 일하던 사람들이 어느 날, 뒤에 쳐져 구경꾼으로 남겨지는 것은 열정의 비밀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3-14) 고백했다. 바울은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주를 섬겼다. 쉽게 열정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죄의식과 패배감, 지루한 종교행위를 힘겹게 치루고 있다. 열정을 유지하는 비결은 무엇인가?


고든 목사는 다시 모으기를 하라(Re-collection)고 권면한다. “나”라는 조각을 다시 모아야 한다. 영적인 열정과 에너지의 저장고가 되게 해야 한다. 흐트러진 열정을 다시 회복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하나님께 대한 목적과 헌신의 다짐, 비전과 소망의 에너지를 다시 되찾아내야 한다. 다시 모으기의 세 가지 원칙이 ?특별한 시간. 특별한 예배. 특별한 친구들?에 있다. 세 가지 원칙은 바울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특별한 예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특별한 시간/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특별한 친구들”(엡5:18-21) .


특별한 친구들. 모세가 아말렉 족속과 전쟁할 때 ‘특별한 친구’들의 관계로 승리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승리는 특별한 친구들에게 달려있었다(출17:9).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우리도 주를 섬기다 피곤에 빠질 때가 많다. 모세의 팔이 피곤할 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군대는 패배하고 있었다. 모세의 팔이 내려와서는 안 된다.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아론과 훌이 모세를 앉히고 좌우에서 그 팔을 붙들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모세가 언덕 위에서 팔을 들고 있는 동안, 여호수아는 골짜기에서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출17:13). 모세의 주소록에는 특별한 친구들이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잠재력을 증가시키거나 피곤을 막아주고, 약점을 막아주기 위해 동료의식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의 분주한 생활과 시간 속에서 특별한 친구들을 위한 시간이 할애되어야 한다. 특별한 친구들과 교제하고, 서로 양육하고,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시간을 그들에게 투자해야 한다. 특별한 친구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영적 일과 중 하나여야만 한다. 바울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이방인 전도를 위해 특별한 친구들을 양육하고 그들을 곁에 두었다. 그의 주소록에는 바나바, 마가요한, 디모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누가, 실라, 두기고..등 많은 친구들이 함께 있었다.


바울은 성령 충만한 삶의 중요한 원리로 제시한 “복종의 사회학”을 깊이 있게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5:21). 복종은 사람에 대한 비굴한 노예적 굴종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자발적 봉사를 뜻한다. 영국의 심리학자 캐럴 로스웰과 인생 상담사 피트코언은 지난 18년간 1천 여명의 남녀를 대상으로 80가지 상황에서 행복하게 만드는 5가지 상황을 선택하는 실험을 통해 행복의 공식을 발표했다. P+(5×E)+(3×H). P는 개인적 특성으로 인생관, 적응력, 탄력성을 의미하고, E는 생존조건으로 건강, 인간관계, 재정상태를, H는 더 놓은 수준의 조건으로 자존심, 기대, 야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행복공식은 “생존조건이 개인적 특성에 비해 5배, 자존심, 야망등 더 높은 수준의 조건은 개인적 특성에 비해 3배가 중요하다.”는 것으로 인간의 행복은 건강과 돈 대인관계가 훨씬 행복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러므로 새로운 흥미와 취미를 추구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현재에 몰두하고, 운동하고 휴식하는 것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조건이 된다고 지적했다.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그리스도인의 모든 인간관계는 세 가지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머리됨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부부관계(5:22-33). 부모와 자녀 관계(6:1-4). 사회생활(6:5-9). 가정과 사회적 관계에서 모든 인간관계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중심으로 관계되어 있다.

  •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5:22)

  •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5:25)

  •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6:1)

  •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6:4)

  •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6:7)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도 인간관계의 비밀을 가르쳤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전11:3) . 여자-남자-그리스도-하나님으로 이어지는 헤드십의 관계는 인간관계를 중심으로 행복한 삶이 만들어진다는 행복공식을 이해하게 된다. 헤드십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이며, 서로 섬기고 돌봐야할 섬김의 관계를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실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삶의 관계에서도 머리가 되신다. 우리의 인간관계가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해되지 않음으로 인해 관계가 파괴되고 그로 인한 피해가 가정과 사회를 무너뜨리고 있다.

미국환경과학자 데이비트 왠은 현대인의 소비 지향적이고 물질주의 적인 삶을 ‘어플루엔자’ Affluenza 유행성독감과 같은 전염성으로 비유했다. 소비적이고 쾌락적인 삶은 과중한 업무, 많은 빚, 근심과 낭비등 증상이 수반되며 퇴치할 수 있는 유일한 치료방법은 검소한 삶과 자연에 접하는 단순한 삶 그리고 공동체생활에 있다고 지적했다. 느림의 자세와 단순함의 실천이 경쟁의식에서 떠나 자신만의 장점과 가능성을 개발하는 삶이 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자연과 친해지는 삶과 사람과 사람이 함께 모여 숨쉬는 공동체의 삶을 통해 잃어버린 인간의 소중한 자아상을 회복할 수 있다. 참된 공동체를 회복하려면 먼저 모든 인간관계에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이 계심을 알고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섬기는 사랑”을 깨닫는 그리스도의 주재권이 선언되어야 한다.



두 가지 전쟁.

750여명의 호주 여인들의 누드 사진이 신문 1면에 컬러사진으로 실렸으나 선정성 시비가 없었다. 호주의 이라크 전쟁 참전 반대 시위였기 때문이다. ‘NO WAR’ 알몸으로 글자를 만들어 전쟁반대 시위를 연출하고 있었다. 전세계에서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축하행사 이후 최대 규모의 반전 시위가 지구촌에서 일어나고 있다. 프랑스는 독일, 러시아, 중국을 끌어 들여 형성한 반전전선으로 미국을 압박하고 있지만 결국 미국은 이라크를 공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라크 전쟁이 지구촌을 동맹구도로 재편하고 말았다. 미국의 이라크 전쟁은 미국의 석유독점을 위한 미국 패권주의를 그대로 드러낸 전쟁이었다. 모든 인간관계에도 비슷한 두 가지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 야망의 전쟁. The Battle of Ambition. 야망은 앞장서 가려는 충동이다. 야망은 거룩한 언어로 포장되어 나타난다. “주님이 나를 부르셔서…하나님의 뜻이면.. 문을 여시면…” 야망은 보상과 명예가 있는 자리에 유혹을 당한다. 개인적인 야망과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향하는 열정은 서로 비슷해 보인다. 둘 사이의 차이점을 발견하기 어려워 보인다. 우리는 전진하고 싶어하고, 자신과 재능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잡고 싶어한다. 우리는 기회를 노리고, 자신을 높이고 싶어한다. 주목받는 것을 열망하고, 더 높은 명성을 주는 자리라면 다른 사람을 짓밟고 올라서려 한다. 영적인 열정과 야망은 한 공간에 함께 있을 수 없다. 야망은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끊임없이 정신적 게임을 시도하고, 자신의 처지와 하는 일을 만족하지 못하게 한다. 성령의 빛이 없이 야망을 볼 수 없다.

  • 교만의 전쟁. The Battle of Pride. 야망의 친구는 성공을 다룰 능력이 없는 교만이다. 웃시야 왕은 교만의 경계가 되는 성경인물이었다.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의 사는 날에 하나님을 구하였고 저가 하나님을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대하26:5). 웃시야는 전성기를 누렸다. 그는 군대를 재조직하고 열악했던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저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대하26:16) 몰락이 이어졌다. 결국 웃시야는 문둥이로 심판 받아 죽는다. 교만이 가져온 비참한 종말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오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야망과 교만을 충족시키기 위해 살아간다. 그들에게 인간관계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그리스도는 없다. 자신의 이익을 따라 인간관계가 맺어지고, 끊어지며, 다시 비겁한 거래가 계속될 뿐이다. 야망의 세상에서 인간은 철저한 이용물일 뿐이다.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폐기될 뿐이다.

한국사회는 ‘사오정’의 시대를 맞았다. ‘45세 정년을 맞는 시대’라는 뜻이다. 한국인의 평균수명이 60년이었을 때, 20년 공부하고, 30년 일하고 10년쯤 죽음을 기다렸다. 평균수명이 80년인 지금, 30년 공부하고, 10년 일하다가 퇴출 당하고, 40년을 막막하게 살아야 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정년 이후 살아가야 할 시간이 20-30년으로 우리 사회의 중간허리 부분인 40대가 불안한 시대가 되고 말았다. 40대가 불안한 시대는 오래가지 못한다. 40대를 불안에서 해방해야 한다고 정 진홍 교수는 지적한다. 한국정부가 40대를 살려내는 정책을 펴야한다고 강조한다. 불안한 40대로 인해 가정도 깨어지고, 남자들의 존엄성이 가정과 사회에서 크게 약화되고 있다. 야망도 교만도 상실한 시대가 계속되고 있다. 아내와 자녀들에게 존경받지 못하는 사오정 남자들은 이 시대에서 패배자로 남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남편과 아버지의 위치와 권위가 인정되지 못하는 현실에서 주님은 어디에 계신 것일까? 주님을 섬긴다는 말이 공허한 말로 남을 뿐이다.


회복되는 하나님 나라, 치유되는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교회와 가정과 사회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인간관계가 회복되어야 한다. “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 바울의 선언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따뜻한 인간관계 회복으로 성취되어야 한다. 중국 선교사로 평생을 바친 허드슨 테일러 부부는 따뜻한 부부애와 동료의식으로 온 힘을 다해 주를 섬길 수 있었다. J.C. 폴록은 테일러 부부를 묘사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 허드슨은 자기 아내를 모질게 대하는 경향이 많았다. 그러나 그녀는 영적인 성숙함과 고요함. 확고한 신앙과 애정으로 활력을 끄집어내었다. 그녀는 남편에게, 그리고 남편이 하는 모든 일에, 그녀에게 있는 힘을 모두, 그녀의 총명한 머리 속을 스쳐 가는 생각을 모조리, 그녀가 가진 사랑과 힘도 모두 쏟아 부었다. 그녀는 남편 허드슨으로 하여금, 자신을 고갈시키도록 허락해주었고, 때로 그의 욕구가 무의식적으로 이기적으로 흐를 때도 그녀는 그것조차 의식하지 않았다.” 오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섬긴다고 말하는 우리에게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지, 우리의 허상이 무엇인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글이다. 우리가 어디서 허드슨 테일러 부부에게 보여진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을 경험할 수 있을까? 부부사이에서도 서로 마음을 줄 곳 없어 외로워하는 사람들에게서 주님 안에 산다는 말은 거짓일 뿐이다. 황폐한 땅 중국에서 평생을 허비하면서, 그렇게 소중한 사랑으로 한사람 곁에 특별한 친구로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이 “그리스도”이셨다. “주여 우리의 눈을 열어주셔서 모든 인간관계에 주님이 계심을 보게 해 주옵소서” 그리스도의 주재권을 인정한 겸손한 종들에 의해 무너진 하나님나라는 다시 재건될 수 있을 것이다.


작가 최인호씨와 김수환 추기경께서 대담을 나누셨다. ”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긴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이네. 나 역시 평생 이 짧은 여행을 떠났지만, 아직도 도착하질 못했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자기반성과 회개를 통해 조금씩 마음 한가운데 계시는 하나님께 나아가고 예수님을 닮아가야지…” 자신의 머리와 가슴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씀하셨다. 마음 한가운데 계신 하나님… 우리의 모든 인간관계 한가운데 계신 주님이셨다. 평생 주님께 한 걸음씩 더 가까이 나아가길 원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정진호] 윗물이 맑아져야 아랫물이 맑아진다

치유와 회복의 신학 – 내 아버지의 뜻


윗물이 맑아져야 아랫물이 맑아진다


(1)


“두마안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 사~공~ ” 돌아가신 김정구 선생의 구성진 이 노래를 지난 반세기 줄기차게 부르며 술타령을 하던 한국 사람들… 그들이 중국 연길을 방문하면 손쉽게 찾는 곳이 가까운 도문시다. 두만강과 북한을 넘겨다보기 가장 쉬운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두만강을 처음 보고 느끼는 감정에는 약간의 짜증과 실망감이 섞이게 마련이다. 민족 분단 아픔의 현장을 미처 느끼기도 전에, 관광객들의 호주머니를 노리며 호객행위를 하는 조선족 아줌마들이 달라붙는다. 더러는 자칭 북에서 건너왔다는 탈북자들이 구걸을 하기도 한다.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려 하면 장소비를 내라며 가로막는 어이없는 텃세에 기분을 잡치기도 한다. 그 같은 난관을 뿌리치고 두만강 가에 서서 건너갈 수 없는 산하를 바라본다. 눈길에 처음 잡히는 것은 북한의 민둥산에 새겨진 <속도전>이라는 선전문구다. 그 사이를 가로질러 흐르는 샛강이 바로 말로만 듣고 노래만 부르던 두만강인 것이다. 그러나, 그 강은 결코 우리가 머릿속에서 상상하던 푸른 물이 넘실대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이 아니다. 실망스러우리 만큼 협소하고 그나마 오염되어 온갖 오물이 함께 떠가는 더러운 탁류가 한줄기 힘없이 역사의 어두운 자락을 흘려보내고 있을 뿐이다.


두만강과 압록강의 물 근원이 백두산 천지에서 갈라져 내려온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 산천어가 서식할 만큼 두만강 물은 맑아진다. 평상시에도 숭선이라 부르는 두만강 상류 지역의 마을로 들어서면 오묘한 산세와 맑은 강물이 굽이굽이 부딪혀 만나며 한 폭의 산수화와 같은 절경을 이루고 있다. 더욱이 가을철에 오색 단풍마저 들게 되면 아~ 이곳이 바로 금수강산 우리 땅이었구나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오리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장백산을 뒤로 돌아 압록강 쪽으로 넘어가면 북한의 혜산시와 마주하고 있는 중국의 변경 마을이 있다. 조선족 자치현인 장백현이다. 그 곳에서 맑은 압록강 줄기을 타고 올라가는 길 역시 10월 단풍은 미국 메인 주의 가을을 떠올리듯 절경을 이룬다. 더욱이 두만강 쪽에서 볼 수 없는 대 협곡이 압록강 건너 북한 쪽에 나타나 마치 그랜드캐년(?)을 연상케 한다. 어느 모로 올라가 보아도 백두산에서 내려오는 계곡의 물은 태고의 순수를 머금은 듯 맑고 차갑기가 이를 데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 물이 하류에서는 저렇듯 부패하고 썩은 물로 변할 수 있었을까?


두만강 변경을 구경하기에 제일 좋은 코스는 도문에서 강변을 타고 따라 상류로 올라가는 길이다. 변경을 한번 보고 싶어하는 외부 손님들을 모시고 가끔 다니곤 하는 코스이다. 철을 따라 여름철에는 시원한 드라이브 코스가 되어 더러는 강 건너 민둥산조차 정겹게 느껴지기도 한다. 언젠가 97년경 북한이 한창 기아에 허덕이던 무렵 강을 따라 올라가던 나는 두만강 물이 이전과는 달리 갑자기 맑아진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예전에 보던 거무죽죽한 물이 아니라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웬일일까? 의아해 하며 강변을 달려가던 나는 마침내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연길서 승용차로 세 시간 쯤 가는 거리에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내려다보이는 접경도시 북한의 무산시가 있다. 무산은 자철광 마그네타이트가 13억톤 가량이나 매장되어 있는 아시아 최대의 철광 도시이다. 중국 측 언덕바지에서 내려다보면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올 만큼 가까이 있다. 도시 전체가 온통 노천의 철광석을 캐내는 공장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언뜻 첫 인상이 검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처음 그곳을 방문했을 때 다닥다닥 따개비처럼 붙어 있는 낡고 허름한 단층집들마다 가느다란 굴뚝에서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밥을 짓는 모습이 너무나 인상이 깊었었다. 그 속에서 살고 있을 가난하지만 정겨운 가족들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런데 그 해에는 그 적막한 도시가 마치 죽음의 기운에 휩싸인 듯이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고, 그나마 살아 있는 증거로 보이던 굴뚝 연기마저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무산시가 움직이고 있을 때에는 공장에서 내보내는 시커먼 폐수가 두만강으로 유입되어 온통 강 하류를 오염시키는 근원이었다. 그런데 그 해에는… 극심한 기아 상황에서 공장을 움직일 전기마저 끊기고 일할 사람들이 먹을 것을 찾아 공장의 부품들을 뜯어 식량으로 바꾸어먹는 사태가 발생하자 공장의 가동이 멈추어 서며 온 도시가 죽어버리고 만 것이다. 오히려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사람이 멈추어 서자 강물은 제 모습을 되찾았다. 굶주림에 죽어가는 북한 주민들을 생각하며 울어야 할지, 맑아진 두만강 물을 바라보며 웃어야 할지… 죄에 깊이 물든 인간들이 만들어낸 한 폭의 희화적인 코메디처럼 느껴졌다.


그때 깨닫게 된 단순한 사실이 있다. 창조주의 손길이 닿아있는 곳, 그 아름다운 상류에서 내려오던 맑은 물이 중간지점 무산에서 시커먼 폐수를 방출하기 시작하자 하류는 몽땅 탁류로 바뀌고 만다. 하류의 물을 다시 맑게 하려면 폐수를 방출하는 상류의 물 근원을 새롭게 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폐수가 사라지면 물은 맑아진다. 아랫물을 맑히기 위해서는 윗물을 변화시켜야 한다.


(2)


1966년, 린 화이트(Lynn White Jr.)는 ‘우리의 생태적 위기의 역사적 근원(The Historical Root of Our Ecological Crisis)’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학계에 큰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유명세를 탄다. 그는 지구 환경 파괴의 주범으로 자연을 마음대로 착취한 서구 문명의 책임을 논하면서 그 사상적 배경에는 기독교가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주장한다. 창세기 1장 28절의 문화 명령을 근거로 한 성서적 자연관이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하는 과정에서 무분별한 환경 훼손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 논쟁을 계기로 고대의 유기체적 세계관의 복고 현상이 나타났다. 기독교 이외의 다른 문명권 특히 동양적 유기체적 범신론적 자연관이 환경 문제에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최근의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과 같은 생태주의 과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가이아 가설1)이 나 어머니 지구 이론으로 이어진다. 또 하나의 현대적 유기체 이론을 탄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자연 만물에 영혼이 숨어 있다는, 그러니 함부로 다쳐서는 안 된다는 고대의 정령 숭배 사상과 범신론적 물활론이 생태주의의 포장을 하고 새롭게 부활한 것이다.(이 같은 생각들이 지구환경보호를 위해 일부분 기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서구 문명이 동양을 제치고 세계 역사의 주축으로 올라선 계기를 마련한 것은 16세기 과학 혁명 이후 근대 세계에 이르러서였다. 과학 혁명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견지해 오던 중세 이전의 유기체적 세계관으로부터 성서적 기계적 세계관으로의 천이를 가져다주었다. 그 일은 서구인들의 사고를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자연을 숭배하고 두려워하던 과거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자연을 이해하고 탐구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리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 시기 서양의 기독교 국가들이 타민족에게 자행한 제국주의적 환경 파괴에 대하여 역사적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린 화이트의 지적은 일견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역사의 한 단면만을 부각하여 전체의 책임을 전가하는 환원주의적 오류를 품고 있다. 과학혁명을 일으킨 당시의 기계적 세계관은 철저히 유신론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이, 뉴턴 등 과학혁명을 일으킨 장본인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 안에 감춰진 오묘한 설계와 목적성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없이 확신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충돌을 야기했던 중세적 세계관은 오히려 헬레니즘의 유기체적 세계관에 뿌리를 둔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이었다. 성경은 철저하게 모든 자연 세계가 하나님의 지혜로 만들어진(formed, fabricated)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기계적 세계관은 광대한 우주를 구성하며 규칙적으로 운행하는 행성과 은하들에서부터 시작하여, 지구 생태계의 모든 동식물, 그리고 흙으로 만드신 사람의 몸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지으신 물질을 재료로 하여, 만물이 목적과 설계에 의해 기계적 2)으로 형성된 것이라고 알려주고 있다. 복잡하고 신비하기 이를 데 없는 자연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지 자연 스스로가 자기조직화 하여 나타난 유기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생명현상의 특징인 유기체가 발현된 것은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간 이후에 나타난 것이라는 관점이다. 사람의 생명 또한 하나님이 만드신 몸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탄생한 것이기에 자연과는 구별된다. 우리의 몸은 죽어서 다시 흙으로 돌아갈 지라도 영혼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대한 유신론적 기계론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계몽주의 철학자들에 의해 이신론(理神論)으로 탈바꿈하고, 마침내 무신론적 기계론으로 귀착되고 만다. 다스리고 정복하되 선한 청지기가 주인의 재물을 정성스레 관리하듯 해야 할 자연을 인간이 스스로 주인이 되어 마음대로 탈취하고 빼앗고 남용하게 된 것이다. 타락한 인간에 의해 끝없이 유린당할 그 자연의 모습을 미리 내다보셨던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이제는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예언적 저주를 하고 계신다. 하나님이 사라지고 난 이후의 기계적 세계관은 오직 인간의 이성만을 신봉하는 과학주의와 물질주의로 빠지게 된다. 그 이성의 시대가 만들어낸 사생아가 전 지구적 환경 파괴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오히려 자연을 살아있는 유기체로 보고 숭배하던 시절보다 더 못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만일 기독교 자체가 환경파괴의 주범이라는 논리를 받아들인다면, 현재 기독교 국가마다 환경 파괴 현상이 더 심하게 나타나야만 한다. 그러나 현실은 정 반대다. 기독교 문명이 한번 휩쓸고 지나간 국가는 비교적 환경 보존이 양호한 반면에 유물론, 즉 무신론적 기계론 사상에 입각해 세워졌던 공산주의 국가마다 더 심한 환경 파괴와 훼손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환경 파괴는 기독교의 자연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는 이기적으로 타락한 인간에 의해 야기된 문제인 것이다.


연길에 처음 왔을 때, 우리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 중의 하나는 온 도시를 휘감고 있는 먼지와 악취와 쓰레기들이었다. 우리가 처음 아파트를 얻었던 뻬이따라는 동네와 학교 사이를 오가는 길에는 진흙과 쓰레기가 뒤범벅이 되어 있었고, 각종 오물과 하수가 길 가에 그대로 버려지고 있었다. 여름에는 시뻘건 흙탕물과 싸워야 했고, 물이 안 나와서 항상 욕조에 물을 받아서 살았다. 그 물을 다 쓰고 나면 욕조 바닥에 마치 갯벌처럼 진흙이 남았다. 겨울에는 온 도시를 휘감는 석탄 매연으로 아이들은 폐렴에 시달렸으며, 어른들도 늘 기관지에 새까만 가래가 끓었다. 사람들이 마구 버린 플라스틱 비닐 종이가 바람에 날려 온 도시의 나무 가지마다 빨간 파란 열매처럼 매달린 진풍경을 낳았다. 노상에서 방뇨하는 모습은 다반사요 재래식 화장실에 얽힌 놀란 경험담이 너무 많아 (창피한 일이지만)늘 식탁의 이야기 거리가 되곤 했다. 사실은 그것이 바로 복음이 들어오기 전 한국 사회의 옛 모습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우리들의 모습이었다. 복도에서 기숙사에서 교실에서 아무 곳이나 침을 뱉고 담배꽁초를 버리는 아이들을 붙들고 씨름하기 10년…


중국 전역에, 그리고 연변 지역에 10여년 전부터 조용히 불기 시작한 복음의 바람들… 수많은 발걸음들이 오고가며 씨앗을 뿌렸다. 과기대 교정의 아름답게 다듬어진 조경… 화사한 꽃들과 푸른 잔디밭 사이를 오간 많은 시민과 학부형들… 방문자마다 놀라고 감탄하던 깨끗한 기숙사… 그 생활에 물들어 오히려 방학 때 집에 돌아가기를 싫어하던 학생들… 함께 교정에서 생활하는 외국 선생님들의 깨끗한 옷차림과 예절들… 이런 모습을 보고자란 우리 학생들이 10년만에 어떻게 변했을까? 학생들이 변했다. 학교가 완전히 변했다. 연길 시 전체가 변하고 있다. 해가 다르게 연길이 깨끗해지고 있다. 아니 중국 전체가 깨끗해지고 있다. 이제는 2008년 북경 올림픽을 그린 올림픽으로 만들겠다고 나서고 있는 것이다.


복음은 치유의 능력이 있다. 그리고 그 복음은 물과 같이 스며들며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3)


성경에서는 모든 죄의 근원을 불순종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스스로의 길로 나섰던 인간들… 선악과를 따먹은 그들의 원죄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분리되고 모든 피조계마저도 분리되어 큰 상처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불순종의 죄를 일으킨 그 사건의 배후를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탐심과 교만 그리고 불신앙이 도사리고 있다.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고 속삭였던 사단의 교만과 선악과에 손을 대는 순간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느꼈던 아담과 하와의 탐심이 숨어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상류의 오염원을 먼저 치유하지 않고는 결단코 우리의 행동을 순종으로 바꿀 수 없다.
























◆ 죄 (Sin):불신앙교만탐심불순종
◆ 치유(Healing):믿음회개자유함순종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참 믿음은 반드시 회개를 수반한다. 그 속에서 떡(물질, 명예, 권력…)에 대한 자유함과 순종의 행위들이 흘러나오게 되는 것이다.


믿는다고 하면서 회개하지 않는 크리스천들… 이들은 이웃과 자연 속에 불신자들보다 더 큰 상처를 남긴다. 마치 하나님을 떠난 기계론이 하나님 없는 유기체론 보다 더 큰 환경 파괴를 일으킨 것처럼…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과 정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던 우리의 인생 방향을 완전히 180도로 전환시킨다. 비로소 하나님을 향한 순종의 삶으로 만드는 것이다. 회심의 순간 우리는 드러난 자신의 죄악을 내버리고 전 존재를 예수 앞에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게네사렛 호수가의 베드로와 같이… 만일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의 삶이 45도 혹은 90도 정도 방향을 전환했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을 향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그의 인생 방향은 세상의 또 다른 어떤 곳을 향해 나가고 있을 뿐이다.


자신은 하나님 편에 서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웃과 피조계에 서슴치 않고 파괴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다. 마피아 크리스천이라고 해야 할까?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수많은 십자군 전쟁의 참상, 그 이면에는 위정자들의 정치 경제적 통치 논리가 있었다.


정치적, 경제적 메시아를 갈망하며 예수를 붙잡아 왕으로 삼으려 했던 군중들의 손을 피해 스스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갔던 갈릴리 사람을 생각하며, 피 흘림의 현장에서 고통당하는 그의 신음 소리를 듣는다.


전쟁의 포화 속에 함께 유린당할 생태계를 슬퍼한다. 하루 속히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 피조계가 회복되고 온 인류의 상류 물 근원이 맑아지기를 희망한다. 완악한 종교인들을 향해 광야에서 외치던 세례 요한의 목소리가 이 시대에도 필요하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

[최영기] “부부는 같이 잡시다”

행복한 교회생활


“부부는 같이 잡시다”


이 컬럼의 주제는 교회 생활이지만 이번에 결혼한 젊은 학생 부부들에게 한 마디 해주고 싶습니다.


젊은 부부들 가운데에 각 방을 쓰는 사람들이 꽤 있다는 말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부부 사이가 나빠서가 아니라 서로 편하기 때문이랍니다. 아빠가 공부에 몰두하느라고 각 방을 쓰기도 하지만 보통은 엄마가 아기를 떼어 놓지 못하기 때문에 아빠가 다른 방에 가서 잔다고 합니다.


이것은 안될 일입니다. 비성서적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에게 쓴 편지에서도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 남편은 아내에게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와 같이 남편에게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하십시오. 아내는 자기 몸을 마음대로 주장하지 못하고, 남편이 주장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남편도 자기 몸을 마음대로 주장하지 못하고, 아내가 주장합니다. 서로 물리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기도에 전념하려고 하여, 얼마동안 떨어져 있기로 합의한 경우에는 예외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다시 합하십시오. 여러분이 절제하지 못하는 틈을 타서, 사탄이 여러분을 유혹할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7:3∼5).”


요점은 부부는 성 관계를 요구해 올 때에 서로가 거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부는 각 방을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일정한 기간동안 기도하기 위하여 잠시 각 방을 쓸 수는 있지만 그 기간이 끝나면 다시 잠자리를 합치라는 것입니다.


젊은 부부 가운데에 아기를 같이 데리고 자는 부부도 꽤 있는 모양입니다. 이것도 건강한 부부 생활을 유지하는 데에 도움이 안 됩니다. 환경이 절대적으로 허락하지 않으면 할 수 없지만 부부가 한 몸이 되기 위하여서는 둘만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합니다. 엄마가 남편보다 자녀에게 더 관심을 쏟는 것은 건강한 부부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도움이 안 됩니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아기들을 데리고 자지 않느냐고 의문을 제기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기는 많고 주거 환경을 좁기 때문에 부득이 했습니다. 그러나 한편 한국 남성들이 외도를 쉽게 했던 것은 아내가 자녀들과 같이 자면서 남편의 성적인 욕구를 외면했기 때문이 아닌가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성경 말씀이 분방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분방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부부들은 같은 침대를 써야 하겠습니다. 자녀들은 가능하면 딴 방에서 재우고 부부끼리 자유로울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야 하겠습니다.


같은 침대를 쓴다는 사실이 부부간의 친밀감을 보장해 주고 다투었을 때에 화해를 쉽게 만들어 줍니다.


[함철훈] 유대광야 바람소리

eKOSTA gallery


유대광야 바람소리






버림받은 사람들이 무딘 손톱으로 맨 땅을 파헤치던 곳.
하늘의 뜨거운 모래 바람과 생명의 한숨이 어그러져 만나는 곳.
뿌리까지 흔들리는 두려움으로 온몸이 떨리는 얘기들을 전해 주는 곳.
아무도 찾지 않아 수백년 씩 비어 있는 곳.
그렇지만,
이 천년 묵은 바람 소리 하나 갈라 내어도 하늘과 온 땅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곳…






[유영진] 부활을 생각하며

유학생의 삶 (7)


부활을 생각하며



“More than that, I count all things to be loss in view of the surpassing value of knowing Christ Jesus my Lord, for who I have suffered the loss of all things, and count them but rubbish so that I may gain Christ … that I may know Him, and the power of His resurrection and the fellowship of His sufferings, being confirmed to His death; in order that I may attain the resurrection from the dead.” (빌립보서 3:8, 10-11)


오랜만에 파란 하늘을 바라보면서, 학교로 출근을 하였다. 광현과 동현을 학교에 내려놓았다. 동현이는 언제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신없이 학교로 뛰어 들어갔다. 어제 새로 산 운동화를 신고서, 자랑을 하기 위해서 바지를 두 번 접어 입고는 학교로 갔다. 그 뒤를 광현이는 천천히 따라 걸어 들어간다. 나를 쳐다보고는 씩- 웃는다. 창문너머로 “I love you”라고 말해주고는 학교를 향해서 떠났다. 학교에 오니 봄방학이라 6층이 조용하다. 이번 방학에는 밀린 paper를 반드시 끝낼 결심을 하고는 office로 들어섰다. 얼마 전 새로 산 Power Book을 켜고, 커피를 옆에 놓고서, 브라암스의 음악을 켜놓고 부탁 받은 글을 쓰기 시작한다. 글을 쓰는데, 선배교수 Fred가 들어와서 다음주에 같이 점심을 먹자고 약속한다.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오늘따라 유난히 눈이 부시도록 파랗다.


삶이 아름답다. 순간 순간 지나칠 적마다, 다시 보지 못할 찰라가 아쉽다. 사진에도 담아보고, 비디오도 찍어보고, 일기로도 적어보고, 마음속에 소중히 담아보기도 하지만, 너무나 빨리 달려만 가는 시간이 안타깝다. 요즘은 평균수명이 늘어서 80세까지 산다고 가정하고 계산을 해보면 평생에 가질 수 있는 주말의 숫자가 4160이다. 그 중에 이미 1800여 번을 사용하고 이제 약 2300여 번이 남았다. 아쉽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 아쉬움은 더욱 커가겠지 하고 생각해 본다.


삶과 그 속의 만남과 경험이 소중한 만큼, 그리고 인생의 끝과 그로 인한 헤어짐이 아쉬운 만큼, 부활에 대한 소망과 기대가 커짐을 느낀다. 얼마 전 읽은 C. S. Lewis의 글이 생각난다. 죽음에 대한 철저한 경험과 인식이 없이는 부활의 감격과 감사를 느낄 수 없다고 했던 말.


2000년 전, 목숨을 걸고, 가족과 온 재산을 버리고 따르던 예수가 죽은 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난 사실을 본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부활의 사건은 현실이었다. 귀신들렸던 막달라 마리아, 그녀에게 부활한 예수는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오직 단 하나뿐인 희망이었다. 자신의 모든 credential을 버리고 예수를 전하기 위해서 평생을 투자한 바울에게, 예수의 부활에 동참하는 것이 오직 단 하나뿐인 유일한 삶의 목표였다. 자신들의 삶 가운데서 기대하고 의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빼앗기고, 목숨마저 위협받으며 신앙생활을 하던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사도 요한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였다. 그들의 눈앞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예수, 그분의 부활은 그들에게 있어서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 부활의 현실이 그들의 삶을 붙잡았다. 그 부활의 현실이 그들을 흥분케 했다. 그 부활의 현실이 이 땅 위에서의 기쁨과 고통을 극복할 수 있게 했다. 그 부활의 소망만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유일하고 가치 있는 투자의 대상이었다.


오랫동안 예수님을 믿는다고 생활을 해왔으나, 부활은 나에게서 관념적인 대상에 불과했다. 삶의 소중함을 깨닫지도 못했고, 죽음의 현실성을 피부로 느끼지도 못했으며, 그로 인한 나의 한계성을 철저히 인식하지 못했다. 그래서, 부활의 약속은 그저 하나의 신학적인 관념에 불과했다. 부활은 나의 삶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부활은 그저 부활절 설교와 성경공부의 주제에 불과했다. 천국과 영생의 소망보다는, 이 땅에서의 죄 사함과 축복 받고 능력 있는 삶의 약속이 나에게는 더 매력적인 약속으로 들렸다. 그러나, 이제는 부활이 부활절뿐만 아니라 365일의 나의 생활 속에서 소망이 되고, 그 부활이 단지 신학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신학적인 관념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구체적인 삶에 활력과 의미를 주는 현실이 되었다. 삶의 기쁨과 고통, 아름다움과 잊어버리고 싶은 모든 구석들이 부활이라고 하는 렌즈를 통해서 바라볼 때, 나의 이 땅위에서의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된다. 붙잡고만 싶었던 것들을 이제는 지나가는 흐름 안에서 아름답게 볼 수 있고, 피하고 싶었던 것들을 담담하게 하나의 과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이전에는 생각 없이 스치던 대상들이 부활의 렌즈를 통해서 볼 때, 새롭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단장을 하고 나에게 다가온다. 이제 어렴풋이 나마, 사도바울이 그토록 알기 원하고 동참하기를 원했던 예수님의 삶과 부활, 고통과 죽음의 의미를 알 것 같다.


유학생활, 무척 바쁘다. 힘들고 정신이 없다. 당장 눈앞에 와 있는 시험과 논문, 세미나 발표와 교수와의 만남이 삶의 모든 것인 양 다가오기 쉽다. 내가 현재 하고있는 일이 나의 삶을 사로잡기 쉽다. 그럴 때, 부활의 예수그리스도를 새롭게 만나보기 바란다. 전쟁의 소문이 사방에서 들려오는 이 때에 부활절을 맞이하여 그 어느 때보다 주님이 주시는 소망의 메시지가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