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영운] 환경과 지대조세제

이코스타 2003년 4월호

땅과 환경문제


전 세계가 환경위기를 절감하면서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이 제시되고 시도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은 관심이 인간이 개발한 기술을 가지고 환경문제가 발생하고 난 후에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영역에 쏠려 있다. 그러나 정작 환경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어떻게 근본적으로 환경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억제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제 눈을 뜨고 있는 단계에 있다. 그리고 그러한 계획적인 시각도 정치적인 싸움에 밀려서 단편적이고 지엽적으로 되어 문제의 근본을 다루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의 환경문제는 경제와 직결되어 있고 모든 경제행위는 땅을 기초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허공 위에서 시작할 수 있는 인간의 행위는 없기 때문이다. 땅 위에 건물을 짓고, 그 건물 속에서 자연의 에너지와 자원을 가지고 물건을 만들고, 만든 물건을 일정한 건물 안에서 팔고, 팔고 산 물건은 일정한 장소에서 사용되고 폐기되고 있다. 이러한 경제 행위의 과정에 땅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성경은 이미 이 문제에 대해 예견한 듯 땅과 그 위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에 대한 주권이 창조 주 하나님께 있고 인간은 단지 관리자에 해당한다는 근본적인 관계 설정을 하고 있다 (창 1: 26-27, 창 2:14-15). 성경의 전체적인 정신에 따르면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이 바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땅과 만물의 정복자와 지배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돌볼 책임이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성경을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허락하신 역사서가 아니라 전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경제문제와 환경문제에 대해서도성경에서 보다 분명한 가르침을 얻어야 하고 얻을 수 있다.


땅에 대한 하나님의 뜻


땅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나타낸 성경 구절은 레위기 25장 23-28절로서 다음과 같다.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 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만일 그것을 무를 사람이 없고 자기가 부요 하게 되어 무를 힘이 있거든 그 판 해를 계수하여 그 남은 값을 산 자에게 주고 그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그러나 자기가 무를 힘이 없으면 그 판 것이 희년이 이르기까지 산 자의 손에 있다가 희년에 미쳐 돌아올지니 그가 곧 그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본 성경구절은 토지의 주권이 하나님 자신에게 있으므로 한 개인이 영원히 소유할 수 없고 인간은 땅을 일정 기간 동안 사용할 수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땅과 관련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50년마다 지켜야 할 희년은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려놓는 것이며,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의 의미를 희년에 비교하고 있다. 모든 것의 참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종교적인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을 넘어서 삶의 근거인 땅의 주권을 하나님께 내어놓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삶의 근거인 땅의 주권을 하나님께 드리고 인정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가난과 기근과 환경파괴의 피해자이자 가해자로서 이 세계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해 헨리 조지 (Henry George)가 성경을 토대로 제안한 지대 조세제도의 도입을 통한 문제 해결의 가능성을 살펴 보기로 한다.


지대 조세제


지대 조세제는 100여 년 전 헨리조지가 ‘진보와 빈곤 (Progress and Poverty)’이라는 책을 통해 제시한 것으로서 토지의 공공성을 토대로 사유화 된 토지의 이익이 사회로 환원되지 않아서 생겨나는 많은 정치 경제적인 문제를 세제를 통해 토지의 지대 (Rent)를 100퍼센트 환수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좀 더 개략적으로 지대조세제에 대해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건물에서 나오는 이익과 개인과 회사의 수입 등 인간의 노동의 결과에는 세금을 없애고 땅에만 매년 땅의 임대 가격에 세금을 부여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둘째, 주위의 땅을 기존의 상태에서 고려하면서 각 단위의 땅을 개선되지 않은 지가 (unimproved site value)로 평가한다.


셋째, 공지나 농지를 포함한 모든 땅에 세금이 부과되며 토지의 가치 모든 허가와 규제가 고려된 상태에서 가장 적절하게 사용되는 것을 전제로 하여 평가된다.


넷째, 실제로 지대조세제는 현재 운용되고 있는 세금제도와 흡사하나 다만 모든 땅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과 빌딩과 다른 시설에는 세금을 적게 부과하는 것이 다르다.


다섯째, 만일 토지 임대 가의 100 퍼센트가 세금으로 부과된다면 토지는 더 이상 현금 가치가 없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토지의 매매 가는 임대 수입을 현금화할 때 생겨나기 때문이다.


헨리 조지는 토지를 인류에게 공동으로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물로 보고 그 혜택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토지의 공평성을 보장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똑같이 토지를 나누어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각 토지의 생산성과 위치에 따라 각 토지의 가치가 다를 뿐 아니라 토지에 대한 소유권이 이미 확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토지로부터 나오는 수익, 즉 지대를 공유함으로써 공평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지대란?


지대는 생산물 중 토지의 소유자에게 그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귀속되는 부분을 말한다. 즉 조지에 의하면 지대는 토지를 이용한 생산의 결과 중 일부분을 얻을 수 힘을 말한다. 따라서 일정한 토지 위에 세워진 주택, 공장, 상가를 사용한 대가 중에서 토지 사용에 해당되는 대가만이 바로 지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땅 위에 세워진 건물을 사용함으로써 지불하는 액수를 자본사용의 대가, 즉 자본 수익으로 본다. 그런데 헨리조지는 이 지대를 토지 소유자 개인이 독점하는 것을 공평하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대란 인적노력으로는 생산하거나 증가시킬 수 없는 자연요소 (특히 토지)를 개인의 소유로 할 때 생겨나는 독점가격이기 때문이다.


헨리조지의 이러한 사상은 위에서 말한 성경 구절이 주장하고 있는 ‘땅에 대한 하나님의 독점적 주권’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어느 누구도 토지를 소유할 수 없다. 설령 현실적으로 누군가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는 그 토지를 창조하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으며 단지 먼저 점령했다는 이유만으로 지대수익을 독점한다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고 한다.


지대 공유 이유


앞에서 살펴 본대로 지대는 한 사회가 가지고 있는 발전과 정비례의 관계가 있다. 즉 인구가 증가하고 기술이 발전하면 새로운 토지 수요를 일으켜서 지대소득은 더욱 커지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점점 생산성이 낮은 한계지를 이용하게 되면서 지대가 증가된다. 토지 소유자로 하여금 아무런 노력을 투입하지 않고도 높은 지대를 얻게 하는 힘이 인구증가와 기술발전 등의 사회적인 힘에 근거하는 한 사회적으로 창출된 지대가 토지 소유자 개인에게만 돌아가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느 한 지역에 도로가 뚫리고, 기차 역이 생기고, 공원과 학교와 관공서가 들어서면 자연히 그 지역의 지대는 상승한다. 이렇게 상승된 지대를 사회가 공유한다는 것은 정당하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지대 공유화의 주장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Fred Harrison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지대의 공유화를 통해 완전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Harrison, 1983). 지대를 사회 (공공)로 모두 환수하게 될 경우 생겨나는 결과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로 투기적인 목적으로 땅을 놀리지 못하고 땅을 최적의 용도에 사용하여서 그 땅에서 발생할 수 있는 지대에 해당하는 세금을 납부하게 한다. 둘째로 지대를 사회에 환수함으로써 토지의 이용률을 높이고 투기적 목적으로 보유하고 있던 땅이 토지 시장에 나오게 함으로써 토지 시장에 토지의 공급이 늘어나게 되며 그로 인해 지가의 하락을 유도할 수 있게 된다. 세째로 토지 실수요자들이 시장에 나온 값싼 토지를 최적의 용도로 사용하게 된다.


지대 공유개념은 토지의 사적 소유권 중 처분권과 이용권은 인정하되 수익권은 부정하고 있다. 즉 토지로부터 나오는 지대를 가질 수 있는 권리를 사회가 가질 것을 천명하고 있다. 지대 공유 개념이 기초하고 있는 재화의 소유권은 노동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즉 인간은 반드시 자신의 인격을 발현하기 위해 노동을 할 수 있어야 하며 그 노동을 통해 생산과 소비와 교환과 보유의 권리를 갖게 된다. 이처럼 인간의 소유는 반드시 노동을 통해서만 그 정당성을 부여 받게 된다는 면에서 토지는 인간 노동의 산물이 아니므로 어떤 특정인이 독점적으로 소유할 수 없다. 지대 공유의 개념은 바로 토지에 대한 공평하지 못한 소유에서 비롯되는 사회문제 즉, 토지투기, 빈부격차 심화, 경제위기, 환경파괴 등을 해결하는 열쇠를 제공할 수 있다.


지대 조세제를 통해 본 개발과 환경문제


제임스 쿤슬러 (James Howard Kunstler)는Geography of Nowhere에서 현재의 재산세제가 야기시키는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Our system of property taxes punishes anyone who puts up a decent building made of durable materials. It rewards those who let existing buildings go to hell. It favors speculators who sit on vacant or underutilized land in the hearts of our cities and towns. In doing so it creates an artificial scarcity of land on the free market, which drives up the price of land in general and encourages even more scattered development, i.e., suburban sprawl…”

현재의 재산세제는 실제로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세금을 부여하고 오히려 땅을 소유하고 땅을 놀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이익을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연유로 땅을 투기의 목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건재하게 되고 도회지의 많은 땅들이 사용되지 않고 땅값은 치솟게 된다. 따라서 실제 땅이 필요한 사람들은 값싸고 적당한 땅을 찾아서 교외로 교외로 나가게 된다. 결과적으로 불균형적인 개발이 이루어지고 자연이 파괴되며 교외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이처럼 무분별한 개발을 동반한 환경파괴는 토지 소유제도와 아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만일 이러한 문제가 해결되면 사람들과 산업은 정상적인 속도로 적당한 준비 과정을 거치면서 조금씩 도심 밖으로 나가게 될 것이고 결과적으로 쓰레기 문제나 자연을 준비 없이 파괴하는 일이 없게 될 것이다. 지대조세제를 통하면 현재 교외화에서 빚어지고 있는 도시 인구과밀 또는 도시와의 단절과 같은 문제와는 달리 도시 사람들은 시내 가까운 곳에 있는 땅을 보다 싼 값에 얻게 되면서 도시 문화의 이점과 자연과의 친숙함을 동시에 누리게 될 수 있다.


브라질의 열대림이 파괴되어 가는 것의 원인 중의 하나가 바로 토지가 일부 계층에 의해 독점적으로 소유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문제는 바로 농업에 이용돼야 할 절대 농지를 개인이 소유하고 있음으로 인해서 도회지로 몰려 들었던 사람들이 농지를 찾아 열대림으로 들어가서 농지로 쓸 수 없는 열대림에 불을 놓고 땅을 개간하면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대 조세제를 도입하면 쓸 수 있는 양질의 많은 땅이 시장에 나오게 되고 필요한 사람들이 싼 값에 이용할 수 있게 됨으로 인해 열대림의 파괴도 급속히 감소될 수 있을 것이다. 인도네시아나 아프리카에서도 토지의 독점으로 인해 비롯되는 동일한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종종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각 나라에서는 개인의 자유를 구속하면서 많은 규제와 법을 만들고 있지만 모니터링의 어려움을 실상 환경문제의 근본을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임을 실감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규제를 실행하려면 지속적인 감시와 규제가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대 조세제를 통하게 되면 정부에 의해 만들어진 많은 규제 대신에 시장경제의 시스템에 의해 형성된 공동체 의식과 자발적인 규제 준수를 통해 양질의 환경기준을 설정할 수도 있고 설정된 기준을 지켜갈 수도 있을 것이다.


현대의 환경위기를 에너지 위기라고 할 만큼 에너지 문제가 심각하다. 즉 석유나 석탄 등의 탄화 에너지의 지나친 사용으로 인해 많은 환경 문제가 생겨나고 있다. 이러한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대체 에너지 개발에 한창이다. 지대조세제는 이러한 움직임에도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현재의 세금 제도에서는 땅 (지하)에서 나오는 자원인 석탄과 석유를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것이 자본 집약적인 기술 개발에서 나오는 대체 에너지 산업인 태양열을 이용하는 것 보다 훨씬 더 경제적인 우위를 점하게 된다. 그러나 땅에서 나오는 에너지에 Ground Tax를 부여하고 자본과 노동 집약적인 에너지인 태양열, 조력, 풍력 등의 산업에는 세금을 면제해 주는 세금제도를 도입하면 좀 더 대체 에너지 산업의 입지를 견고하게 함으로써 환경 파괴적인 에너지 산업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대체 에너지의 기술이 더 개발되고 경쟁력이 높아지게 되면 에너지로 인한 환경문제는 조금씩 개선되게 될 것이다.


지대조세제는 산지나 보존지역의 보존 효과를 높일 수 있다. 100퍼센트의 세율을 적용할 경우 지대를 통한 땅의 경제적인 가치를 잃기 때문에 세금 부담 없이 보존지역을 쉽게 구입할 수 있게 된다. 지금까지 많은 보존 단체들이 몇몇 보존지역을 구입하느라 수많은 돈을 모금해 왔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질 뿐만 아니라, 모금된 돈들로 전보다 더 넓은 지역을 보존하게 되거나 오염된 곳을 복구하거나 관리하는 데에 쓸 수 있게 될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투자는 오염산업 보다는 오염복구산업이나 연구 및 관리를 활성화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지대조세제 하에서는 쓰지 않고 놀려 두는 땅이 낮은 가치로 평가를 받게 된다. 그러나 땅의 소유주는 정부와 관리계약을 통해 땅에 식재를 한다든지 하는 대체 이용을 하게 될 경우 경제적으로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지대조세제는 토지의 효과적인 이용을 장려하고 결과적으로 자연을 보호해 갈 수 있는 길을 제공할 수 있다.


글을 맺으면서


하나님이 주인인 땅을 개인이 독점적으로 소유하여 모든 이익을 독점하는 것은 하나님과 공동체에 대한 죄악의 행위이다. 중세 시대를 비롯하여 현대에 이르기까지 종교 공동체가 소유하고 누려온 많은 토지의 소유와 그로 인한 부의 축적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중심의 사상과 정면으로 배치되고 있다는 것은 심각한 회개의 제목이 될 만하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 우리 세대뿐만 아니라 우리의 후세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이 병들게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현대의 교회는 어떠한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퍼부으신 그 통렬한 꾸짖음의 죄목들이 고스란히 적용되고 있지 않은가? 회칠한 무덤같이 이제는 자신의 부패함 마저 어찌할 수 없는 막다른 상황에 다다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크리스챤이라고 하는 우리의 현재 모습은 어떠한가?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의 정책에 대해 깨어서 파수꾼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을 솔직하게 자신에게 던지면서 환경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의 하나로 지대조세제의 실현을 그려본다. 자신을 포함한 이웃과 나라의 현재와 미래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의가 우리 삶의 예배를 드리는 현장에 실현되는 꿈을…

[이시훈] 봄의 찬가

이코스타 2003년 4월호

지루하고 길게만 느껴지던 겨울도 시간의 흐름처럼 슬며시 사라져갑니다. 이른 아침에도 환하게 창을 밝히는 햇빛과 부드럽게 살에 부딪치는 바람, 먼 풍경 위로 번져 오르는 아지랑이가 봄을 알리고 있습니다. 겨우내 땅 속에서 얼어죽은 줄만 알았던 알뿌리들은 여리고 푸른 잎새들을 힘껏 내밀고, 여윈 나뭇가지들에서는 새 눈 터지는 소리들이 들리는 것만 같아 슬며시 다가가 귀를 기울여 봅니다.


두터운 눈 더미 아래 어둡고 차가운 땅 속에서 그 작은 뿌리가 어떻게 생명을 지키고 있었던 것인지 자연의 위대함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얼마 후면 제가 사는 동네에는 화사한 벚꽃으로 온 천지가 물들 것입니다. 벚꽃이 가득한 마당이나 거리에 서 있으면 내가 꽃나무의 한 부분이 되어 가는 것 같이 느껴져서 조용히 팔을 들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메마른 가지들의 어느 한곳에 그리 화려한 꽃이 숨어 있던 것이고, 작은 씨앗들 속엔 봄날의 훈풍이 숨어 있던 것인지. 마술사가 빈 보자기에서 비둘기와 꽃을 꺼내어 내듯이 문득 다가온 봄의 모든 징조들이 놀라운 선물로 느껴집니다.


어느 봄날 밤에 무심히 집 앞에 들어서다가 마주친 목련 꽃이 어둠 속에서 환하게 빛나고 서 있는 것을 보며 가슴이 두근거리고 아득해지는 경험이 누구에게나 한번쯤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비어있는 줄 알았던 뜰에 어느 날 갑자기 여러 색의 작은 꽃들이나 튜울립이 가득 피어 있어서 혹시 조화가 아닐까 의심하며 만져본 경험도 봄에 대한 작은 추억을 만들어 줍니다.


생명이 있다는 것, 살아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라고 느끼게 되는 것이 봄날의 특권이자 축복인 것 같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들뜨고 무언가 발산하고 싶어지는 힘을 느끼게 되는 순간 경쾌한 봄의 왈츠가 가슴에서 연주되곤 합니다. 얼음이 녹아내려 풍만해진 강물도 그 왈츠 리듬에 합세하여 박자를 맞추고 있는 동안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고 싶어집니다. 이런 날에는 그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특정한 대상 없이 사랑의 예감이 벅차 오르는 신비한 힘이 봄의 기운 속에 숨어 있기 때문이지요.


캄캄한 어둠 속에 비추는 한줄기 빛이 일순간 어둠을 지워 버리고 얼었던 대지를 촉촉하게 녹여 버리는 것을 보며 결코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곤 합니다. 숨어 있던 작은 동물들이 활개치며 분주하게 양식을 찾아 뛰어 다니는 것을 보며 생명의 힘은 무엇보다 강하다는 것에 감격 하게 됩니다. 겨울의 어둠과 추위가 없었다면 봄의 화려함이 그다지 빛나고 감격스러운 것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삶의 역경과 고난 뒤에 찾아오는 성취가 더욱 감사하고 소중한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실 때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참담하고 어둡고 절망적이었을까 상상해 봅니다. 그가 웃으며 십자가를 부수고 내려와 세상을 놀라게 하는 기적이 일어나길 마음 속으로 무척이나 바라고 기대한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슈퍼맨처럼 지구의 회전을 되 돌이켜 시간을 뒤집어 주길 바랬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나약하게도 피를 흘렸고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우리 인간들처럼 말입니다. 누군가는 배신감에 몸을 떨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조롱하며 등을 돌렸을 것입니다. 아무도 그가 약속한 일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아무도 그의 말속에 숨어 있던 의미를 이해하거나 진심으로 믿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분이 다시 나타나 손의 못 자국을 보여 주었을 때의 광경을 상상해 봅니다. 놀라움과 의심과 두려움이 엄습했겠지요. 그리고 진정으로 사실을 이해하고 믿었을 때 비로소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기쁨과 경이에 젖어 뛰어 오르며 춤추고 노래했을 것입니다. 감격과 환희에 젖어 그들이 외쳤을 함성이 귀에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 그가 다시 사셨다. 죽음도 물리치고”. 아무도 생각할 수 없었던, 믿을 수 없었던 일을 목격한 자들이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 부활의 축제에 우리도 초대 받았다는 약속을 생각하면 내 자신이 어느 날 문득 피어난 목련 꽃이 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겨울의 지루함과 추위, 모든 것이 잠들어 버린 막막함, 그러나 그 뒤에 찾아오는 봄날에 대한 기다림이 있기에 눈송이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듯이, 삶의 고난과 상처들,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길을 향해 걸어가면서도 그의 약속이 있기에 기쁨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겠지요. 그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믿음은 희망이 없는 공허하고 헛된 것이 될 수밖에 없었겠지요. 주님이 보여주신 고난과 순종의 길이 진정한 승리의 길이였음을 확신할 수도 없었겠지요. 세상의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의 기준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새로운 길을 바라보는 밝은 눈을 얻을 수도 없었겠지요.


바울의 고백을 바꾸어 봅니다. 나는 매일 매순간 죽노라. 그리하여 나는 매일 매순간 다시 태어나노라. 그와 함께 죽은 나를 버리고 그와 함께 다시 태어난 나로 사노라. 꽃잎이 땅에 떨어져 썩지만 이듬해가 되면 더 아름다운 꽃으로 다시 태어나 향기를 가득 품는 것을 벚꽃 나무 아래 서서 깨닫곤 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순간 나의 그릇됨과 죄로 가득 찬 옛사람을 함께 죽이며, 그가 부활하실 때 새롭게 그를 닮은 나로 다시 태어나게 하소서.

[차문희] 부활절을 앞두고: 희망의 십자가

이코스타 2003년 4월호



고통 속에 있는 우리를 버려 두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찾아 오신 하나님,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고통 당하신 주님, 너희의 고통을 이해 한다고 말씀하시며 다가 오신 주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고통의 한 복판에서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파요, 힘들어요, 그렇지만 제가 알아요. 주님이 저를 사랑하시는 걸 제가 믿어요. 저는 다시 일어나요. 일어 날 수 있어요.” (인생 레슨 : 이 동원 목사 지음)


언젠가 교회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문제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교회와 사회 생활을 하다 보면 여러 사람들을 접하게 되는데 우리들의 눈에 보기에 그 사람들이 참 행복해 보일 수 가 있습니다. 좋은 직장에 좋은 학벌, 경제적인 여유, 그러다 보니 넉넉하고 윤택한 가정 생활과 직장 생활을 한다고 생각할 것이고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다며 부러운 시선을 나타냅니다. 물론 그들이 사회적으로 그 자리에 서기까지 그들 나름대로 노력도 많이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아무런 문제와 고민 없이 세상을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그들도 나름대로 그들 만의 고통과 고민거리들이 있지만 단지 내색하지 않을 뿐 입니다.”


참으로 의미 있는 말씀 입니다. 남 보기에 늘 행복해 보이고 웃고 다니니까 아무런 걱정 근심 없이 사는 것 같지만 그 나름대로 보이건, 보이지 않건 간에 다들 문제들을 갖고 사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나는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들과 또 그렇지 못한 것들을 장애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장애인들이고 우리 모두가 그 고통을 이기는 방법 즉 문제 해결에 대한 올바른 자세를 배우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우리가 왜 고통을 당하고 사는 지 모르기 때문에 괴로워 하고 문제 해결 대책 보다는 그 고통을 피할 길을 찾아 가려고 애를 씁니다.


한 예화로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소개 하려고 합니다. 일반 학급에 있는 K 학생이 학습적인 능력이 떨어지고 행동이 거칠어 지며 정서적으로 불안해 하여 혹 장애가 있는 게 아닌가 해서 테스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학습 태도 보고서, 성적표, 행동 수정 보고서 가정 환경 및 병원 기록 등과 같은 데이터를 모았고 심리 테스트를 거쳐 그 학생이 장애가 있다는 사실이 판정 되었고 특수 교육 프로그램을 추천하기 위한 미팅을 해서 그 학생에게 맞는 교육 프로그램을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이 교육 프로그램을 IEP (individualized Educational Program)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미팅에 참석한 K의 부모님들은 무조건 자기 아이는 절대로 장애가 없고 특수 교육 프로그램을 받을 수 없다고 강력하게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부모는 또 어떻게 내 아이에게 “장애인” 이라는 label을 붙일 수 있으며, 평생 그가 성장하는 동안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따돌림 받을 거라고 불평도 늘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 부모는 학교측과 계속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은 특수 클래스에 놓겠다고 동의를 했지만 부모의 얼굴에는 만족함 보다는 그늘 진 모습뿐이었습니다. 그런 후, 그 부모는 자신들의 아이가 장애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고 자기 자신을 원망하며 또 그 아이가 겪고 있는 고통을 함께 하고 사랑으로 감싸 주기 보다는 무관심과 불평, 그리고 심지어 아이를 구박하고 학대도 했습니다. 이 부모님들은 K를 특수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 시키는 일이 너무 고통스럽고 수치 스러운 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우리에게 시련이 닥쳐 올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동원 목사님이 쓰신 인생 레슨 이라는 책 에는 첫째, 고통은 하나님의 교육적인 의도의 시험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이 시험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 생활을 평가 하시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 장 13절에서는 “시험을 찾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 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 이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K의 예화 속에서 그는 이미 그의 장애로 인해서 특수 클래스에서 수업을 받고 있습니다. K의 부모님들은 K가 장애 어린이라는 사실에 동의 하지 않았고 불만족스러운 자세로 아이를 특수 교육에 참여 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K의 학교 생활에 별로 도움을 주지는 못 했습니다. 그에게 장애가 생긴 이유는 그의 잘못도 아니고 부모님의 잘못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K를 구박하고 학대 했습니다. 그런데, 오직 K만이 세상에서 고난의 십자가-문제와 어려움-를 지고 갈까요? 다른 어린이들과 그의 부모님들 역시 그들 나름대로의 문제와 고민거리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 K라는 장애 아이를 한 가정에 주심으로 해서 분명 하나님의 어떤 숨겨진 뜻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마도 주님은 K의 부모님들로 하여금 더 많은 인내, 그리고 희생과 노력에 대해 배우기를 원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K를 위해서 전혀 희생과 노력이 없었던 K의 부모님들은 계속적으로 K의 학교와 가정 생활에 무관심을 보였고 가정에서 이어지는 학대는 그에게 더 큰 상처를 주어서 정서 장애 라는 또 다른 장애를 낳게 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고통을 현명하게 대처하고 극복하지 못할 때 그 고통은 더 큰 고통을 만들게 됩니다. 반면에 극복한 고통 뒤에는 환희와 기쁨이 있습니다. 이 동원 목사님은 그의 저서 인 “인생 래슨” 애서 고통을 축복의 통로에 비유하시며 고통은 하나님의 복이고 계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를 의지함으로써 우리의 믿음도 성숙해 지는 가운데 우리들은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갖고 더 큰 일을 해낼 수 있다고 합니다. 만약 K의 부모님들이 K를 위해서 좀 더 희생하고 노력했다면 그의 인생이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K가 갖고 있는 고통 (장애) 은 없어지지 않는 십자가라서 K의 부모님들과 K가 함께 노력했다면 그의 십자가는 절망의 십자가가 아닌 자기와 같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꿈과 용기를 주는 희망의 십자가로 바뀌었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겠지요. 지금 어느 곳에서 생활하던지 우리의 어려움에 대해 비관적이거나 낙심하지 말고 잘 대응한다면 우리들이 지닌 고난의 십자가도 희망의 십자가가 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