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희]What to do and What not to do?

이코스타 2004년 3월호

 

지난 6년간의 미국 생활을 돌아보니 많은 생각과 추억들이 지나간다. 그러나 가장 소중하게 남는 것은 익숙한 환경에서 떠나 보낸 시간이 신앙적으로 나를 좀더 정직하게 바라보고 점검할 수 있는 시간이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더욱 진지해질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으며, 몇몇 소중한 신앙의 선배들과 친구들을 통해 신앙적으로 자라남을 배울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 6년의 시간동안 나는 유학생 사역에 헌신한 선배들의 돌봄을 받던 때도 있었고, 또 내가 후배들을 섬기는 것도 직접 해보게 되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직도 계속해서 다른 분들의 돌봄을 받으며 성장하고 있고, 또 동시에 그 받은 돌봄을 나눠주는 것이 지속된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글을 쓰신 분들이 충분히 왜 청년 사역이 중요한가에 대해 이야기 하셨으므로, 나는 조금 더 실질적인 내용을 다뤄보려 한다. 사역의 방법이야 개인적인 성향마다 독특하게 다를 수 있으나, 내 개인적인 체험을 토대로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한다. 유학생 사역 – What To Do and What Not To Do.



1. What To do



(1)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가장 중시하자.



너무나도 기본적인 이야기인 것 같지만, 사역을 하다보면 자칫 무시되기 쉬운 것 같다. 자칫 캠퍼스나 교회에서 다른 영혼들을 섬기는 것에 치중하다보니 내가 하나님과 보내는 시간을 타협해야 할 때가 생길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 내가 개인적으로 보내는 시간을 타협하는 것은 사역을 하는 사람에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타협된 채 지속되는 사역은 자칫 뜻하지 않는 실수를 하게 되거나 다른 영혼들에게도 상처를 줄수도 있고 나를 곧 지치게 만들기도 한다. 한때 열성을 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힘을 내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기 쉽다. 내가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매일 만나는 것이 없이 전g해지는 말씀은 내 개똥 철학이 된다. 또, 말씀을 전하면서도 내가 직접 말씀 묵상과 기도를 통해 직접 깨달은 내용과 내 삶에 적용되는 부분을 나누지 않고, 말씀을 정해진 틀 안에서 혹은 말씀이 의미하는 것이 이런것이겠지 하는 식으로 지식을 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묵상하는 시간동안 함께 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이 없이 말씀을 전하는 것은 내 사고와 삶을 변화시키는 생명력있고 날센 검같은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이기만 하고 나의 삶과는 크게 상관없는 지식을 전하는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사역을 하면서 개인적인 지식과 경험이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말씀 묵상과 기도생활을 통한 하나님과의 열린 관계를 절대로 타협해서는 안된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면서 하나님과 가까이 대면하여 대화했다는 것이 좋은 예가 될 것 같다. 유학생 사역을 하면서 날마다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가는 것과, 하나님께서 직접 주시는 율법과 계명을 받는 것이 지속되어야 한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가 있는 산으로 올라와서, 여기에서 기다려 라. 그러면 내가 백성을 가르치려고 몸소 돌판에 기록한 율법과 계명을 너희에게 주겠다.’ 모세가 일어나서, 자기의 부관 여호수아와 함께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갔 다. (출 24:12-13).


바쁜 유학생활 가운데 캠퍼스 모임이나 교회 청년부를 통해 다른 이들을 섬기기 위해서는 그만큼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씩 시간을 양보해도 당장 표가 나지 않는 하나님과 보내는 시간을 타협하기가 쉬워진다. 공부하는 시간을 조금만 양보하면 당장 리딩이 밀리고 페이퍼가 날짜를 넘기지만, 말씀 묵상하는 시간과 기도 시간은 조금씩 양보해도 당장은 크게 내가 사는데 지장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조금씩 타협하다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져 회복하는데 고생해본 사람이라면 내 말을 잘 이해할 것이다. 그래서, 바쁜 유학 생활일수록 시간관리를 잘 하고, 덜 중요한 것을 하지 않거나 미루기 위해 삶에 우선 순위를 메기고 가지치기를 수시로 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떤 모임에 나갈것인가, 점심 시간은 얼마나 쓸 것인가, 인턴쉽에서 시간을 넘겨 일을 하게 될 때 얼마나 일을 더 할 것인가 하는등에서 선을 그어야 할 시점을 분명히 해두고 지키려고 노력한다. 일에도 욕심을 내다보면 한도 끝도 없기 때문이다.



(2) 나의 문제나 어려움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라.



위에서 이야기한 하나님과의 관계에 속하는 내용이지만 중요한 내용이라서 따로 이야기한다. 누구에게나 내면의 문제 혹은 삶의 어려움이 있기 마련인 것 같다. 또 그 문제를 다 해결하고 나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을 하려면 어쩌면 삶을 끝내고 하나님 앞으로 가기전까지 아마 아무에게고 말씀을 전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쓰신 사람들중에 내면적인 문제 혹은 생활의 어려움이 전혀 없던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고 보면 그리 많은 것 같지도 않다. 말씀은 우리에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한다. 맞는 말씀이다. 그러나, 다른이들을 섬기는 사역에 헌신한다고 해서, 내 문제를 묻어두는것만이 다는 아닌 것 같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서도 자신의 어려움과 문제에 대해서도 정직하게 직면할 것을 권고한다.



사역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문제와 어려움에 관심을 갖다보면, 또 그들의 필요만을 생각하다보면, 나의 문제는 잊게 되는 경우가 있다. 아니, 사실은 잊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방치해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내 내면의 문제 혹은 삶의 어려움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보고 먼저 가지고 나가는 것은 중요하다. 혼자 문제를 가지고 있을때는 그 문제가 나의 개인의 것이지만, 그 문제를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소위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때에는 나의 문제가 다른 사람에게도 어려움을 주거나 상처가 되어 결국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역에도 지장을 주게된다. 내 상처가 남에게도 상처가 되는 경우가 종종 생길수 있다. 똑같은 어려움과 문제가 있더라도 그 사람이 자신의 문제에 대해 정직하게 직면하고 있는 사람과, 어려움을 방치해두거나 자신의 문제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간에는 그 문제로 인한 부작용이 표현되는데 큰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쉽게 볼수 있는 예를 들어보자. 유학생 사역을 하다보면 학력, 성격, 가정 환경, 라이프 스타일등에서 매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때로는 내 열등감을 자극하는 사람을 섬겨야 할 때도 있고, 때로는 내 상처를 애써 바득바득 건드리는 사람을 만나게도 된다. 그런때 해결되지 않는 내 안의 상처나 열등감은 사역에 큰 장애물이 된다.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일로 나타나거나 내 열등감이나 상처 때문에 비롯된 나의 차가운 태도나 교만함이 뜻하지 않게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실제로 캠퍼스나 교회에서 유학생을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이 막상 자신의 내적인 문제로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를 종종 보아왔다. 또 내 문제가 굳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식으로 나타나지 않더라도, 내면의 문제를 없는 셈치고 방치할 경우 내 안에서 그것이 썩게 되고, 악취를 풍기게 된다.



결론적으로, 학생들을 돌보는 사역을 하는 사람으로서 내면이 건강한 사람이 되기 위해 정직하게 자신의 상태를 하나님 앞에서 점검하고 그분의 치유를 간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아는 한 사람은 하나님을 매우 사랑하는 신실한 사람이기도 하고, 또, 매우 지적이고 날카로워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가정 환경이 어렵다는 일종의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해 자신보다 편안한 환경에서 공부하는 다른 사람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혹은 적당히 어울려 지내더라도 늘 마음속에 벽을 쌓아두고 지내는 경우를 보았다. 이런 부분은 유학생 사역을 하는 사람으로서 특히 깨어 조심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또 한 사람은 계속해서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것을 극복하지 못해 어느새 사역이 다른 이들의 인정을 받아내는 통로가 되어가는 것을 본적도 있다. 이런 경우에도 본인은 모르는 사이에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두분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니 하나님께서 각자의 어려움을 만지실 것이다. 그런데도, 먼저, 그분들이 자기의 모습을 하나님앞에서 정직하게 볼수 있었다면 얼마나 더 본인의 영적 건강에나 사역에 도움이 되었을까 생각해 본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출애굽을 명령하였을 때 모세는 자신의 부족한 점을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나왔고,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도움을 주신다는 약속을 받고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사역을 시작한다. 모세의 경우처럼 때론 우리의 약점이 당장 치유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어떤 대안을 주시든지, 해결을 주시든지, 나의 어떤 어려움이 더 이상 irrelevant한 것이 되도록 주실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하나하나 아뢰고 그분의 치유나 해결을 직접 구하는 것이다. 있는 문제를 없는척하고 묻어 두어서 썩히는 대신 말이다. 모세는 말주변이 없는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 안의 상처, 욕심, 열등감, 증오감등을 먼저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나가는 것이 아닌가 한다. 특히 사역을 하기에 앞서 말이다.




모세가 주님께 아뢰었다. ‘주님, 죄송합니다. 저는 본래 말재주가 없는 사람입니다. 전에도 그랬고, 주님께서 이 종에게 말씀을 하고 계시는 지금도 그러합니다. 저는 입이 둔하고 혀가 무딘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누가 사람의 입 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하는 이를 만들며, 누가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 거나 앞 못보는 사람이 되게 하느냐? 바로 나 주가 아니더냐? 그러니 가거라. 네가 말하는 것을 내가 돕겠다. 네가 할말을 할 수 있도록 내가 너에게 가르쳐주겠다.’ 모세가 머뭇거리며 ?주님, 죄송합니다. 제발 보낼만한 사람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하고 말씀드리니, 주님께서 모세에게 크게 노하시어 말씀하셨다. ‘레위 사람인 너의 형 아론이 있지 않느냐? … 네가 할말을 그에게 일러주어라. 네가 말을 할 때나 그 나 말을 할 때에, 내가 너희를 둘 다 돕겠다. 너희가 하여야 할 말을 가르쳐 주겠 다…’ (출 4:10-15)


(3) 목적 의식을 분명히 가지라.



나는 흔히 “A Type”이라고 하는 편에 속한다. 말하자면, 적극적이고 일에 열심이고 모든 일에 관심도 욕심도 많은 편이다. 일의 과정도 과정이지만 결과도 중시하는 편이고, 말하자면 어설픈 완벽주의자 같은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다보니, 일을 하면 남들보다 빨리 하고 보통 이상은 하는 편이다. 그런 나의 성향이 사역에서도 드러난다. 일이 착착 진행되지 않거나, 느린 사람을 보면 이해가 안되고, 당연히 나의 그런 시선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조금 다른 관점이지만, 아무리 상대방이 선배라고 해도, 그 사람의 인격적인 약점을 보게되면 은연중에 상대방에게 거리를 두게 되는 모습도 사실은 비슷한 이유, 즉, 내 기준에 다른 사람이 따라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좌절-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가 남을 좌절시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남이 나를 절망시키는 것만 생각하다보니 그렇다. 그런데, 사역을 하면서 내가 왜 이 일을 하는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때로는 여러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될수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여러분이 사랑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아서, 모든 성도와 함께 여러분이 그리스도 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 (엡 3: 18)



그분이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예언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도자로, 또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을 준비시켜서 봉사의 일 을 하게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 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엡4: 11-14)



우리는 여러분을 경고하고 권면합니다마는, 그것은 여러분을 부르셔서 당신의 나라 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하게 살아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내 기대대로 사람들이 착착 따라주지 않을 때, 혹은,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을 때, 그래서 본의 아니게 절망할 때마다 사역의 목적을 생각하고 그에 맞게 나를 다스리는 것이 필요하다. 열심이고 능력있는 찬양 인도자가 찬양팀 멤버의 목소리나 악기 소리가 자기 기대에 조금 못 미칠 때 좌절할수 있다. 그러나, 찬양팀이 얼마나 훌륭한 악기 소리의 조화로 찬양을 드리는 것보다도 결국 이 모든 것의 목적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것, 함께 준비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 하나님께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조금은 다른 태도를 가질수 있을 것이다. 



(4) 마땅히 해도 되는 일도 복음을 위해 두 번 생각하라.



비교적 덜 유교적이고 덜 가부장적인 환경에서 자라서인지,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능력이 모자라는 경우가 아니고 다른 이유로는 내 활동이자 사고 영역에 큰 제한을 받아본 적이 없는 내게 이 부분이 가장 도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내가 사회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일이나 문제가 될만한 일을 벌이고 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내게 어느 정도 자유 분방한 면이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할 것 같다. 그런 내게 신앙적으로 진지해지면서, 특히 성경공부 인도하게 되면서 때로는 숨막히고 답답한 것으로 다가왔던 점들이 있었던 것 같다. 이런 것은 신앙의 공동체내에서 나타나기도 했지만, 직장 생활이나 학교생활 등 나의 다른 삶의 영역에서도 나타난 점 같다. 예를 들면, 단순히 누군가 연장자라고 해서 특별히 어려워하는 것이 없는 나의 태도가 대화중에 무례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에 대해 이전에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면 성경공부를 인도하게 되면서는 조금씩 그런것에도 신경을 쓰게 된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잘 모르고 나를 오해하게 되는 것이 내가 전하는 말씀에 권위를 잃어버리게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한마디로 ‘너나 잘해’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설령 그것이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더라도. 또 다른 한 예를 들자면, 관심을 끌만한 형제가 나타났을 때 예전같으면 조금씩 간접적으로라도 찔러보거나 나도 모르게 더 친절하게 대하는 등 관심을 표현했을텐데, 사역을 직접 하게 되면서는 훨씬 달라져서 형제들에게는 꼭 필요한 내용이 아니면 대화와 접촉을 줄이는 극단적인 경우로까지 치닫기도 했다. 같은 이유에서다. 내가 아는 신앙의 선배중에는 말씀을 전하기 때문에 형편으로 따지면 더 큰 차를 탈수 있는데도 절제하는 것을 본적이 있고, 한 후배의 경우에는 원래 매우 매너가 좋고 자매들에게 잘 대해주는 편인데 그것을 절제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본적도 있다. 이 후배의 경우에는 말씀을 위해 자기의 인기를 포기했다고 할 수 있다.



순수한 열정으로 사역을 할 때는 이런 것들이 별 희생같이 느껴지지 않는데, 조금씩 지나면서 열정이 식고, 머리는 커지면서 때로는 이런 것들이 가식으로 느껴지거나 답답한 굴레로 느껴진 때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말씀에 비춰볼 때, 우리 신앙의 선배님 사도 바울도 당연하게 할 수 있는 일도 복음이 공격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뿐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도 흠잡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맡아서 봉사하고 있는 이 많은 헌금을 두고, 아무도 우리를 비난하지 못하 게 하려고, 우리는 조심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뿐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도 좋 은 일을 바르게 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또 형제 한 사람을 보냈습니다. (고후 8: 20-22).



아무도 우리가 섬기는 이 일에 흠을 잡지 못하게 하려고,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아 무에게도 거리낌거리를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하나님의 일꾼답게 처신합니다. (고후 6: 3-4)



모든 것이 다 허용된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다 허용된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모든 것이 다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도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추구하십시오. (고전 10: 23)


(5) 섬김의 대상을 전적으로 존중하라.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자라게 하는 것은 전인격적인 관심과 돌봄을 의미한다.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고 말씀안에서 자라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상대방의 학교 생활과 진로문제, 이성 교제 가족 관계에도 관심을 가지고 대화하다보면 상대방의 영적/정서적 필요를 파악할수 있게 된다. 이때 상대방의 속도에 나를 맞춰야 한다. 때론 사역자들이 상대방이 빨리 빨리 자라고 빨리 빨리 열매를 맺는 것을 보고 싶어서 서두르다가 실수를 하거나 상처를 남긴다. 대화하다보면 상대방이 나에게 어느 정도의 권위를 인정하는지, 또 어느 정도 내가 open up 해도 상처를 받지 않을지, 부담이 되지 않을지 알게 된다. 상대방이 받아들일수 있는 만큼씩 나를 열고 상대방이 나를 인정하는 만큼의 권위를 행사해야만 상대방이 상처를 받지 않는다. 분명한 잘못을 해서 상대방에게 상처가 되더라도 지적해야 할 때를 빼놓고는 대부분 상대방의 속도와 거리를 존중해주길 바란다. 나의 경우에는 상대방이 너무 큰 잘못을 해서 내가 반드시 당장 지적하고 넘어가야 하는 경우는 거의 경험하지 못했다. 물론 상대방이 나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고, 내가 그사람을 신뢰하고 있을때야 다른 이야기지만 말이다.



때론 사역을 하면서 사랑과 열정이 앞서서 상대방이 준비되지 않았는데도 상대방의 인생 전반에 관여해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경우가 있다. 아니, 그렇게 극단적이 경우가 아니더라도 자연스럽게 사역자가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만큼 상대방에게서 당연히 기대하는 사소한 것들이 있게 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성경 공부 멤버가 당연히 내 전화에 리턴콜을 해야한다고 기대한다든지 하는 경우 말이다.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사람이 기대에 따라주지 못했을 때, 막무가내로 실망한 모습을 직접 표현하는 것도 어쩌면 자연스럽다. 그만큼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생각하다보니 더 실망될수 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 상대방을 인내로 기다리고 존중하라고 권고하고 싶다.



물론 사역자의 동기가 순수한 경우 받아들이는 사람은 조금 상처가 있더라고 대부분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이 반복되면 상대방은 사역자에게 신뢰를 잃거나 두려움을 갖게 되고 앞으로는 자신을 열어보이지 못하게 되고 만다. 유학생 사역을 하면서 한가지 꺠달은 것은 우리의 죄성 때문에 모든 사람이 상처를 매우 잘 받는다는 점이다. 성경공부 리더가 생각없이 한 한마디 때문에, 눈초리 때문에, 목소리 톤 때문에 영혼들은 상처를 받는다. 사역자 입장이란 영향력을 행사하는 입장이다. 우리가 섬기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그 섬김을 통해 영향력이 행사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섬김의 도구는 오직 말씀이다. 나의 기대치나 나의 기준이 절대로 섬김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된다. 아이들이 장난으로 던진 돌멩이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고 리더가 별 생각없이 던진 한마디나 부정적인 말투가 영혼들에게는 큰 상처를 준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2. What Not To Do



(1) 소유하려 하지 말라.



유학생 사역, 즉 성경공부를 하고 영혼을 돌보는 것은 나와는 다른 한 영혼을 깊이 사랑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다 보면, 영적으로뿐 아니라 그 영혼의 생활면에서도 깊이 애착을 느끼게되고, 때론 그것이 지나쳐 소유하려는 성향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무엇인가를 소유하려고 해서 내가 섬기려고 하는 영혼을 마치 내 것으로 착각하고자 하는 경향 말이다. 하나님 것인데 내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 바로 죄가 아닌가 싶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내가 말하는 ‘소유하려는 성향’이란 ‘내가 이 영혼을 돌봐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른 누구도 나보다는 이 사람을 잘 이해할수 없고 돌볼수 없다’고 은연중에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한 영혼이 진정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사역을 하면서 ‘나’의 자리는 무색한 것이어야한다. 그럼에도 때로 누가 교회를 옮긴다거나, 성경 공부 모임을 바꾼다거나, 또는 내가 아닌 다른 리더를 더 존중하고 따른다거나 할 때 괜한 질투심이 생기거나 경쟁심을 느끼는 경우, 혹은 위기의식까지도 느끼는 경우를 본다. 세상에서 경쟁하고 앞다투고 실적을 올려 인정받아야 하는 문화에 이미 익숙한 우리들은 사역을 하면서도 그 문화 속에서 때론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 것을 보게된다.



물론 내가 한 영혼을 끝까지 돌보고 싶은 마음이 매우 귀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 영혼이 나에게 느끼는 부담이 되거나, 함께 동역하는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서 불편함을 초래한다면 아마도 다시 내 모습을 점검해 봐야 할 것이다. 사역의 포커스는 위에서 목적의식을 분명히 하자고 하면서 이야기했듯이, 한 영혼이 그리스도 사랑 안에서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지, 한 영혼이 ‘내가’ 전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안에서만 자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역자가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또 내가 없이는 공동체가 지속될수 없다고 은연중에 생각하게 된다면, 이것은 바로 내가 한 공동체나 그곳의 영혼들을 소유하려 하고 있다는 신호일지 모른다. 그때쯤이면 이미 포커스는 예수 그리스도와 내가 섬기는 영혼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로 돌아간 것이다. 물론, 내가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그룹에서 갑자기 한 자매가 다른 그룹으로 옮기겠다고 하거나 성경공부를 나오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때로는 참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나도 내가 열심히 공들여 일대일로 성경공부를 한 자매가 더 이상 성경 공부에 나오지 않고 다른 모임으로 나가겠다고 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남자 친구가 헤어지자고 선언하는 것처럼 아프게 느껴졌었다.



그만큼 그것이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은 그만큼 한 영혼을 깊이 사랑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내가 힘들어하는 동기를 적나라하게 점검해보면서 다른 리더 혹은 모임에 대한 질투심이나 경쟁심, 거절을 두려워하는 우리들의 속성, 잘해서 인정받고 싶은 인간적인 욕심이 때로는 작용하기도 하는 것 같다. 우리가 섬기는 영혼들은 우리것이 아니라 하나님것임을 늘 기억하고 스스로에게 상기시켜야한다. 모세와 하나님과의 대화에서도 모세는 자기를 따라 출애굽에 나선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 백성이 아니였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하나님도 이스라엘 백성을 그의 백성으로 칭하고 있다는 사실을 엿볼수 있다. 우리가 섬기는 영혼은 우리것, 내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늘 기억하자.




모세가 주님께 …호소하였다. ‘주님,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이 백성에게 이렇게 괴로 움을 겪게 하십니까? 정말 왜 저를 이곳에 보내셨습니까? 제가 바로에게 가서 주 님의 이름으로 말한 뒤로는, 그가 이 백성을 더욱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주 님께서는 주님의 백성을 구하실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계십니다.’ (출 5:22-23).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바로가 너희말을 듣지 않을 때에, 나는 손을 들어 큰 재앙으로 이집트를 치고, 나의 군대요 나의 백성인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 땅 에서 인도하여 내겠다. (출 7:4-5)


(2) 사람에게서 영광을 구하지 말라.



위에서 잠시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칭찬받고 인정받는 것에 매우 익숙한 사람들이다. 사실, 신앙의 공동체에서 신앙의 선배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후배들로부터 존중을 받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또, 나를 신앙의 선후배들에게 열어놓고 공개해 그들의 충고와 격려를 받아들이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경계해야 할 일은, 때론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을 기대하기 보다는 주변 사람들에게서 인정받는 것에 더 신경을 쓰게 될 때가 있었다는 것을 고백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때로는 성경 말씀을 전하거나 소모임을 인도하는 사람은 ‘위험한 안전지대- dangerous safety zone’에 속하게 되는 것 같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어쩌면 내가 그런 위험한 안전지대에서 허덕여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일까? 신앙 생활을 막 시작하는 사람들에 비해 성경공부 모임까지 인도할 정도가 되면, 기본적으로 기도도 하고, 하나님도 두려워하고, 또 말씀을 보는 생활도 어느정도 익숙해 있을 것이다. 주변 사람들도 나를 어느정도 존중해주고, 인정해주고, 어느새 나는 내 영혼의 상태보다는 다른 영혼들과 그들의 신앙 생활에 더 관심을 갖게 되어 버린다.



내가 이런 상태를 ‘위험한 안전지대’라고 부르는 이유는, 어느정도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이 때로는 우리들에게 위험한 독이 될수 있다는 것이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을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 대신 받아들이고, 어느순간부턴가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 큰 관심이 없어질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에까지 갈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내가 어떤 최소 기준- 큐티, 말씀, 전도, 도덕적인 생활-을 만족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하나님 앞에서 나를 교만하게 하는 위험한 사태로 이어질수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는 내가 그런 위험한 안전지대에 놓여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나의 죄된 모습은 작고 단단한 검은 차돌의 모습이었다. 누가 봐도 죄라고 알수 있는 커다란 바위도 아니었고 아주 자그마한 돌맹이였는데, 너무 작아서 깰수가 없는 그런 모습이었다.



어느정도는 내 “선의식
-  self righteousness”와 또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습관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새까맣게 되어버린, 너무 단단하고 크기도 작아서 오히려 레이저를 사용하지 않고는 깰수도 없는 그런 모습이었다
.



작년 언젠가 선물 받은 책중에 ‘영적인 가면을 벗어라- inside out’였는데, 어쩌면 우리는 의도하지 않게 가면을 쓰게 되는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봐주는 모습이 마치 하나님 앞에서 내 진짜 모습인양 착각하게 되는 것 말이다. 사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딱딱한 돌멩이일 뿐인데, 사역을 한다는 이유로 주변의 나에 대한 시선이 달라지고, 기대가 달라지고, 어느새 나도 모르게 그들의 시선이 진짜 내모습인 것처럼 오해하게 되는 것 말이다. 그래서,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하나님께 오는 영광을 구하라는 것이, 위에서 내 모습을 하나님앞에서 정직하게 직면하라고 한 내용과도 연결될수 있을 것 같다. 순수하게 그리스도에 대한 열정으로 시작한 사역이 어느 순간 일이 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동기가 내 안에 혹시나 있는지 점검하자.




우리는 하나님께 검정을 받아서 맡은 그래도 복음을 전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우리는 언제든지 아첨하는 말을 한일이 없고, 구실을 꾸며서 탐욕을 부린 일도 없습니다. 이일은 하나님께서 증언하여 주십니다. 우리는 또한, 여러분에게서든 다른 사람에게서든,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한일이 없 습니다. (살 2:5-6) 


(3) 율법(나의 기준, 다른 사람의 시선, 혹은 self- righteousness)에 대하여 죽으라.



사역이 지속되다 보면, 어느 정도 타성에 젖게 되거나 더 이상의 내 믿음의 성장이 없어 힘들어지는 시기가 종종 어떤 이들에게 찾아오는 것 같다. 나에게도 그런 때가 물론 있었다. 그 원인에는 개인차가 있을 수 있겠지만, 어떤 경우에는, 어느새 말씀을 전하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수준으로 전락해버린 것을 들 수 있다. 계속 말씀을 보고 전하는데도 이상하게도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 이상 깊어지는 것 같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말씀만 전하게 되는 경우이다. 그러다보면, 죄책감에 시달리게도 되고, 나만 잘못 하고 있는 것 같아 하나님의 눈치를 보게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이제는 더욱 깊이 있는 묵상과 기도 생활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 고비를 넘지 못해 나타나는 것일수도 있을테고, 어쩌면 바쁜 유학 생활 가운데 허둥대면서 일주일에 한번씩 전해야하는 말씀을 준비하다 보니, 내가 먼저 하나님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고 날마다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에 둔해져 있기 때문일수도 있다. 그러다가 마치 모임에 나와야 할 사람이 나오지 않거나, 내가 말씀을 전하면서 좀 버벅대기라도 했다치면 스스로에게 드는 죄책감은 더욱 커진다. 게다가 옆에서 다른 사람은 열정적으로 지치는 것 없이 사역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나는 더욱 형편없는 사람이 되는 것 같고, 때로는 나는 이렇게 지쳐있는데 후배들이 열심을 내는 것을 보면 미안하기까지 하다.



바로 이런 것이 율법에 얽매이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내가 사역을 하면서 반드시 해야할 리스트를 만들어 놓고 (e.g. 일주일에 한번씩 전화 돌리기, 일주일에 한번씩 이메일 돌리기, 일주일에 열시간 말씀묵상하기, 등등) 최선을 다해 사역을 하지만 깊은 하나님과의 교제와는 거리가 멀어지는 경우가 있을수 있다. 이런때, 나의 신앙 생활, 또 나의 사역의 모습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의 경우에는, 어느 순간에 율법에 사로잡혀 있는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스스로가 스스로의 삶에 대해 설정한 기대치 (말씀을 전하는 삶을 살겠다는 헌신), 주변의 다른 신앙의 선배들이나 혹은 후배들을 의식하게 되는 것, 또한 말씀을 전하면서 갖게 되는 나 스스로의 의(self-righteousness)등이 어느새 나에게 율법이 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율법은 나를 죽이고 있었다. 율법에 얽매여 사역을 하다보니 내가 반드시 해야 한다고 설정한 리스트를 지켜가면서 생명을 얻지 못하고, 그 율법아래서 허덕이며, 내 영혼이 지쳐가던 것을 경험한 적이 있다. 물론, 그 리스트를 마음속에 두고 최선을 다해 사역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순수함과 열성으로 작성한 리스트가 어느새 나를 죽이는 율법이 되어버렸다면, 그 율법에 대하여 죽어야 할 것이다. 이런 율법에 대하여 죽고, 오직 그리스도에 대하여 살라고 권유하고 싶다. 이 길만이 우리가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나는 율법과의 관계에서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어버렸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 과의 관계에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갈2:19)



나는 율법에서 생기는 나 스스로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 아 오는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서 오는 의를 얻으려고 합니다. 내가 바 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 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 르고 싶습니다…그러므로 누구든지 성숙한 사람은 이와 같이 생각하십시오. 여러분 이 무엇인가를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도 여러분에게 드러내실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가 어느 단계에 도달했든지 그 단계에 맞추어 행합시다. (빌 3:9-16)


3. 결론



나는 늘 헌신된 사역자 (제자) 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 열명보다 더 소중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잃은양 한 마리가 더 중요하니까, 그렇다면 나랑 하나님이랑 생각이 다른걸까? 어쨌든,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한 사람의 건강하고 (영적으로), 헌신된 제자가 잃은양 열마리를 살릴 수 있다는 산수적 계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보다는, 한명의 헌신된 제자는 그 자체만으로도 소중한 것 같다. 때로는 당장 양 한 마리도 못건지기도 하고, 양 살리러 갔다가 이리한테 얻어터지기도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헌신되어 사역하는 제자는 하나님을 향해 자라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그래서, 나는 나와 여러분에게 힘을 내자고 ‘화이팅’을 외친다.



[이시훈] 연극 무대에 서서

이코스타 2004년 3월호

연극에서 배우가 자신이 맡은 인물에 대해서 분석하고 연구하는 일은 대부분 상상력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사람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어떤 감정을 가졌을까, 그가 성장한 배경, 현재의 환경은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심지어 그 인물의 외모, 성격, 가족, 친구 관계, 신앙, 특이한 버릇… 모든 것을 세밀하게 생각하고 그 연극에서 요구되는 인물과 가장 적합한 한 인물의 인격을 창조해내는 것이 배우의 몫입니다.

현실에서 연극의 한 부분을 이용하다 보면 실제적인 도움을 얻을 때가 많습니다. 연극을 통해서 인간관계로 인한 갈등을 해결하거나 경미한 정신, 심리 질환에도 치료효과가 상당히 있는 것을 봅니다. 연극 속의 인물에게 감정 이입을 하고 자신과 동일화하려고 노력하듯이, 일상 속에서도 타인에 대해 내가 그의 역할이 되어보는 것은 원만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지름길이 될 것 같습니다. 내가 바로 그 입장이 되어보는 것이 타인을 이해하는데 가장 적합한 방법이기 때문이지요.

그룹 성경 공부를 할 때 저는 가끔 연극적인 방법을 이용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건을 극화해서 각 사람에게 역을 맡기거나, 대화하는 장면을 대사 읽듯이 감정을 살려 읽어보라고 권하곤 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아무 준비 없이 즉흥적으로 시키는데, 가장 솔직하고 미화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어떤 설명이나 간증, 지식적인 주석 보다 가끔은 기대 이상의 효과를 보고 참 감사를 드리게 될 때가 있습니다.

얼마전 청소년들과 이성간의 교제와 결혼에 대한 공부를 하다가 창세기를 읽게 된 경험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창세기 2장18-25절까지를 즉흥적으로 연기해보라고 했을 때 학생들은 아무 어려움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임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풍족한 자연을 즐기는 아담이 종일 아름다운 벌판을 거닐며 시간을 보낸다. 아담이 지나치는 곳마다 새로운 식물과 동물을 만난다.


아담 : 내가 너를 장미라고 부르겠다. 너는 장미가 되어 향기와 예쁜 꽃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라. 내가 너를 사슴이라 부르겠다. 너를 호랑이라 부르겠다. …..

이것을 말하고 난 학생은 자신감에 넘쳤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말 커다란 권위를 주셨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종일 먹고 즐기고 다니던 아담이 어두워지자 주변을 둘러본다)


아담 : 하나님, 다 좋은데요, 무지 심심하거든요. 누가 같이 지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혼자 많은 일들을 하려니 힘들어요. 생각도 잘 안 떠올라서 누가 도와 주었으면 좋겠어요.

(아담이 잠든 사이에 하나님의 그의 갈비뼈를 가지고 이브를 만드시고, 아침에 일어난 아담은 아름다운 이브를 발견한다)

아담 : 앗 ! 당신은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 너무나 귀하고 소중한 존재요 !

내게 와주어서 너무나 고맙소 (몹시 기쁘고 감격하여 펄쩍 뛰면서 춤을 춘다)

이브 : 나는 당신을 돕고 함께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해 지어졌습니다.

우리는 두 몸이지만 하나가 되어 가정을 이루고 번성하라는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아담 : 우리는 한 몸이기 때문에 숨기는 것이 없어야하고 서로 부끄러운 일이 없어야 해요.

그 날의 공부는 스스로 깨닫는 것으로 충분했던 것 같습니다. 서로의 존재를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며, 기쁘고 감사한 대상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과, 서로 돕고 의지하는 관계를 맺고 서로 존중해야한다는 것을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한 가정에서 가장의 권위, 세상을 향한 우리의 사명, 남녀의 역할에 대해 어렴풋이 정리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더 나아가서 학습과 토론을 통해 분명한 가치관을 정립하기까지 확실한 기초 작업을 한 셈이지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짧은 삶도 어쩌면 하나님이 기획하신 커다란 연극 무대에서 한 배역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결코 우연함이 없는 완벽한 대본과 연출에 따라 자신이 맡은 인물을 최선을 다해서 표현하는 것 말입니다. 언제 등장해서 무대 어느 쪽에 서야하고 언제 퇴장해야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연출가의 몫일 뿐입니다. 무대 위에서 주인공이 되어 각광을 받거나 조연이나 단역을 맡거나, 영웅이 되거나 악당이 되거나 상관없이 그 연극이 완성되고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필요하지 않은 역은 없습니다. 아름다운 인물도 추한 인물도, 완벽한 성품과 지혜를 가진 인물도 어리석은 인물도, 부자도 걸인도 우리의 커다란 드라마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만 합니다. 훌륭한 배우는 더 근사하고 멋진 역할을 하게 해달라고 청하는 사람이 아니라, 남들! 이 기피하는 역할을 완벽하게 표현한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주셨건 하나님의 무대에 초대받았다는 것이 가장 감사한 일이 아닐까요?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자신을 통해서 연출가의 의도와 목표가 잘 표현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배우야말로 트로피를 손에 쥐고 웃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겠지요. 연출가의 마음과 배우의 마음이 일치할 때의 기쁨은 서로가 늘 가까이 있으면서 많은 대화를 나눌 때, 가능한 것 같습니다. 어떤 역을 맡았는가 보다는 얼마나 아름답고 진지하게 나의 역을 감당했는지를 연출가는 눈여겨보실 것입니다.


[김하나] 광야에서 만들어지는 하나님의 사람들

이코스타 2004년 3월호


코스타와 인연을 맺은지도 어느덧 7년이 되었습니다. 12년의 유학생활동안 신앙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코스타가 제겐 얼마나 감사함으로 늘 고백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열심으로 코스타를 쫒아다니는 제 모습을 보며 이유를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제 대답은 코스타 현장에 직접가면 알수 있다는 대답밖에 할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코스타를 통해 확실한건 새로운 삶의 목적과 방향성을 계속 찾아가고 있고 지금까지도 변화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전히 코스타를 통해 변해가고 있는 저의 작은 삶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자아회복


첫번째로 코스타를 통해 저는 제 자신의 자아와 자존감을 회복 했습니다. 십이년전 중학교때 ‘조기 유학’의 섭인관이라는 부담감을 안고 잘못된 길로 가지 않을려고 제 자신과 싸우며 제 자신을 지키는 훈련을 해야만 했습니다. 미국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며 대학에 입학할때쯤 제 자신이 어디에 속한지 몰라 고민이 되어 늘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달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이민 사회와 교회에 섞여 제 자신의 정체와 유학의 목표를 잊고 살가갈때쯤 하나님께서 1998년 코스타로 불러주셨습니다. 코스타에서 새롭게 만난 하나님께 다시한번 구원의 확신을 고백하며 내 자신조차도 몰랐던 유학생활의 아픔과 상처들이 발견되고 그 고통을 치유해주시며 새로운 자아상과 내가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깨달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축복으로 유학이 특권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 특권이 사명감으로 새롭게 다가오고 제가 할 공부와 신앙을 어떻게 연결 시켜야 하는지 가치관을 확실하게 정할수 있었습니다.


비전


두번째로 코스타를 통해 저의 시야가 넓어져 세계를 바라보고 제 가슴에 품을수 있는 도전을 받았습니다. 선교의 비전을 주셨습니다. 처음엔 선교는 저 같은 사람은 할수 없다며 늘 고개만 절레 흔들며 멀게도 어렵게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사망의 골짜기 속에서 죽어가는 영혼들에 대한 관심과 아픔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게 되었고 지역을 생각하게 되었고 나라와 세계를 바라 볼줄 아는 눈을 뜨게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제 삶에 선교의 비전과 소망들이 자리잡아 가게 되었습니다. 3년을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불러주시는 그 때에 저의 삶을 다 바치겠다고 결단하고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유다 백성의 죄악으로 인하여 그들의 국가가 멸망하고 포로된 자들이 되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회복하시겠다는 언약을 잊지 않으심을 기억합니다. 복음이 들어가지 못한 나라를 보며 그 나라를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내가 과연 무엇을 준비해야하며 나의 역활은 무엇이고 무엇을 해야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코스타가 아니였더라면 우물안의 개구리처럼 제 자신밖에 바라보지 못할뻔 한 삶인데, 코스타 덕분에 많은 세계구경을 하고 간접적인 체험들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제자의 삶


마지막으로 코스타에서 조장으로써 섬김을 통해 제자의 삶에 대한 이해와 실천에 들어갈수 있었습니다. 코스타의 또 다른 매력 JJkosta 수양회로 영혼을 사랑하며 주님의 마음으로 섬길수 있도록 성령님의 힘을 얻는 방법을 깨닫고 경험하게 해주었습니다. 제가 속한 6지역의 코디님과 환경을 극복하며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시작했던 원투원으로 말씀과 씨름하며 말씀에 인도되어지는 삶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제가 작년부터 원투원을 인도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고 싶어도 어떻게 무엇부터 시작할지 몰랐고, 때로는 부끄러워서 생각처럼 행하지 못할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능력으로는 부족하지만, 시간이 흘르수록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은 마음들이 기쁨으로 자리잡아가게 되었습니다.


지금 제가 서 있는 이 곳은 영적으로 훈련받고 성장하기 어려운 환경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제 맘속엔 하나님의 사람들은 광야에서 만들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광야에서의 외로움도 제게는 홀로있는 훈련이자 하나님을 가장 많이 만날수 있었음을 경험했고, 하나님께서 언제나 내 말에 귀 기울이시고 함께하시는 시간들이 외로움이 아닌 하나님과 교제의 시간과장소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고국을 떠나 미국에서의 유학생활이 우리 코스탄들의 믿음이 연단되어 지는 값진 시간들임을 확신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많은 시험을 받았듯이, 많은 유혹과 영적 위기에 빠지기 쉽지만 동시에 영적인 축복의 기회임을 확신합니다.


“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삼림으로 여기게 되리라.” (사32:15)


아픔도 많고 시련과 좌절도 많은 광야같은 우리 삶의 현장들이 아름다운 동산이 되길 소망합니다. 광야를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코스타를 통해 광야가 고난의 모습을 가장한 축복의 장소임을 저에 부족하고 모자란 삶가운데 깨닫게 해준 최대의 선물이자 은혜임을 마지막으로 고백드립니다.

[김한준] 노자(老子)가 말하는 ‘성경적인’ 리더상(像)

이코스타 2004년 3월호


동양의 사상이나 철학은 뛰어난 관찰과 직관으로 대변되는 그들의 특징적 장점들로 인하여 삶이나 인간 자체에 대한 깊은 이해에 도움을 주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성경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고전의 문구들 가운데에서 오히려 신선한 어법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잘 표현해주는 듯한 말이나 내용들을 종종 발견하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만물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 의 구체적인 사례들을 보는 것만 같아 흥미롭다. 개인적인 소견으로, “어떤 리더가 참된 리더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노자가 제시하고 있는 ‘리더의 네 가지 유형’은 그 한 좋은 예가 된다고 사료된다.


노자의 도덕경은 약 5천 자 내외로 구성된 비교적 짧은 책으로, 그 첫 사분의 일 지점을 보면 ‘다스리는 자’에 관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太上下知有之 其次親之譽之其次畏之 其次侮之


다소 의역하여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백성들이 그의 존재를 알며, 차선(second best)의 지도자는 백성들이 그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백성들이 두려워하여 따르는 지도자는 그보다 못한 지도자이며,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지도자는 백성들에게 경멸 당하는 자이다.”


재미있는 것은, 백성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는 지도자는 차선의 리더일 뿐 가장 훌륭한 리더는 아니라고 언급하고 있는 점이다. 그리고 말하기를, 최고의 지도자는 백성들이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다른 말로 하면, 뭇 사람들에게 적극적인 사랑과 존경을 받고있다고 해서 최고의 리더인 것은 아닌데, 그것은 가장 훌륭한 형태의 리더십이 발휘되고 있다면 사람들은 자기의 삶과 소명에 더욱 충실하게 될 뿐 특별히 그 리더 자체에게 집중하거나 연연해 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자가 말하는 가장 훌륭한 리더십은, 앞에서 강압적으로 끌고 가거나 소위 카리스마를 내세우는 스타일이 아니라, 뒤에서 말없이 따라오면서 혹 엇나갈 때마다 “막대기와 지팡이”로 툭툭 쳐주며 인도하는 가운데 스스로 바른 길을 깨달아 가게끔 이끌어주는 형태이다. 이런 경우, 스스로의 자발성이 위축되거나 손상을 입지 않으므로 자신의 능력과 의지를 다하여 일에 임하게 되는 장점은 있지만, 일이 되어진 결과 자체에 대해서 대개는 스스로의 덕택에 그렇게 된 줄로 생각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은 리더에게 어떤 특별한 감사나 존경을 줄 필요조차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공기나 물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 존재에 대해 매순간 특별한 경외심이나 감사한 마음을 품지 않는 것과 같다.


이러한 형태의 리더십은 언뜻 보기에는 수동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적극적인 관찰과 기다림, 그리고 신뢰가 요구되는 것이다. 그것은 전체를 조망하는 안목과 확신이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며, 그 대상자들 한 영혼 영혼에 대한 지속적이고 애정어린 관심이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혹 일의 진전이 더디거나 뜻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는 답답함 속에서 기다려줄 줄 아는 인내가 요구되기도 하며, 이를 위해서는 근거도 보장도 없는 상황 가운데서 거의 속아주는 것에 가까운 신뢰가 수반되어야 하기도 한다. 붙잡아야 할 것을 끝까지 붙잡으면서도 스스로 지치지 않을 수 있으려면, 끊임없는 자기연마와 더불어 그 일을 둘러싼 소명 (또는 언약) 자체가 지속적으로 갱신되는 내면적인 과정 또한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런 모든 과정들을 다 거치고 난 뒤에, 그 공로에 대한 사람들의 인정이나 칭찬조차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비워진 마음이 있어야만 한다. 즉, 자기 분량의 수고를 애정어린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여 하고 난 후에 댓가도 없이 이름도 없이 자신의 존재를 감출 수 있는 사람만이 이러한 리더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리더십이 가능한가? 사상가나 철학자의 이야기들에는 “되어져야 할 삶의 모습” 은 있지만 “어떻게 그러한 모습으로 되어갈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주어져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아마도 어떤 특정한 방법에 따라서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 가기에는 너무나도 난제들인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만큼, 그 내용을 생각하고 말할 수 있었다고 해서 이러한 리더십의 실제적인 구현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현실적으로는 아직도 요원한 일일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러나, 하나님만이 나의 삶의 주인이시며, 내 자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고 오직 내 안에 그분만이 사신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는 누구보다도 이러한 리더십을 실천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사람일 것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부인이 있는 사람일 것이며,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되는 일을 주 안에서의 생의 소명이요 영광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사람일 것이므로, 주님의 부르심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나보다 남을 귀히 여기며 복음 앞에서는 내 생명조차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살아가는 그의 삶 가운데서 이런 리더십의 모습 또한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자가 말로써 표현한,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삶으로 본을 보여주셨던 이러한 리더의 모습에 비추었을 때, 나 자신의 지난날의 모습은 과연 어떠하였던가? 믿음과 사랑 안에 온전히 서있지 못하거나 성실하지 못하여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는” 인도자가 되었던 것은 혹 아니었는지? 주님의 영혼들을 일의 목적으로 삼지 않고 일의 성취를 위한 도구로 삼거나, 그들로 하여금 의무감 때문에 “마지못해 따르게 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더러는 시의적절한 관심과 사랑과 가르침을 주어 그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리더가 혹 될 수 있었을런 지는 몰라도, 칭찬과 인정을 받기 원하는 유혹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주님이 아닌 나 자신을 바라보게 하거나 아니면 주님과 더불어 나 자신도 늘 함께 바라보게 만드는 ‘영혼의 걸림돌’이 되고 말았던 것은 아니었는지?


언젠가 신앙의 멘토 한 분으로부터, 그분이 “보이지 않는 격려자 (hidden encourager)” 라는 모토(motto)를 일관되게 지니고 살아왔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지난 시간들 가운데서 개인적으로 도움을 받아왔던 영적 멘토들 몇 분을 떠올려보면, 그분들은 참으로 “보이지 않는 격려자” 의 면모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된다. 몇 년간이나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살펴주어 오신 분들이었고, 올바른 신앙의 길로 스스로 들어설 수 있도록 지대한 영향을 주어 오신 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겸손하고 친근한 자세 때문에 오래동안 멘토링을 받고 있는 줄 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게 했던 분들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뒤늦게나마, 눈에 보이지는 않았으나 말없이 할 일을 이루어갔던 그분들의 리더십이야말로 노자가 말하는 리더십이며, 예수님께서 스스로 모범을 보이셨고 말씀 안에서 오늘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시는 성경적인 리더십이었음을 깨닫고 있다. 


나 자신 또한 그러한 온전한 리더쉽이 실천되는 삶을 살 수는 없을런지…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랑과 은혜로써 불꽃같은 시선을 내게 두고서 매순간 인도해 주고 계시는 “가장 훌륭한 리더” 이신 주님께서 내 안에 함께 하시기에 소망을 가져본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주님의 선하고 온전하신 리더쉽이 나의 삶 가운데에도 조금이나마 묻어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 (고린도전서 3: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