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형] 고난의 의미

이코스타 2004년 3월호

청년사역을 할 때 가장 힘든 것은 고난 받고 있는 학생과의 만남입니다. 왜냐하면 고난 앞에서는 훌륭한 이론도 설득력있는 논리도 아무 가치가 없기 때문 입니다. 고난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마치 거룩함 앞에 서 있는 것과도 같이 엄숙하게 다가 옵니다. 이는 고난의 깊이가 거룩함의 높이와 마치 흡사하게 우리들에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1.고난의 의미와 시작


“고난”은 “고통”을 유발시키는 “상황”이라고 정의할 수 있으며 고통은 고난이 우리의 영혼에 “접수”되는 “아픔”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난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바로 왜 우리 영혼에 이 아픔이 접수되어야 하는 것과 또 그 아픔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첫 고통의 체험은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를 먹은 후 그들이 “벗었음” 을 알고 나뭇잎으로 엮어 옷을 만드는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벗었음이 하나님께 노출되는 상태 입니다. 벗었음의 의미를 여러 가지로 풀이할 수 있겠지만 본질적 관점에서는 창조와 인류의 조화의 파괴를 의미하며, 이에 따라 인류와 창조의 사이에 “겹”이 있어야만 파괴된 상태가 부분적/일시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겹을 우리는 “가죽옷”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뒤 동산을 걷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두려워 숨은 행위는 고통의 극도를 달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파괴로 구멍이 난 상태, 즉 창조의 질서 앞에서 노출되어 버린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즉 창조의 주관 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증폭된 고통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류는 그런 노출의 고통과 더불어 창조질서의 파괴 (distortion), 이에 따른 육신의 파괴로 고통에 휘어 싸임을 받게 됩니다. 땅은 가시덤굴을 낳고 해산의 고통이 있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만 이 세상에서 살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비롯되는 “모든” 결과가 우리들의 영혼을 “아프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고난은 인류의 노출된 상태에서부터 비롯되는 정신적 고통과 물질세계 질서의 distortion에서 비롯되는 육체적 고통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관계없이 결국에는 모든 고난은 한 영혼에게 느껴지는 아픔으로 집중되어 버립니다. 고난이란 어느 정도 객관성의 측도로 설명되어질 수 있지만 한 영혼에게 체험되어지는 아픔의 정도는 지극히 주관적이며 그 깊이를 타인은 헤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매우 흡사한 고난을 경험했다 할지라도 고통의 정도는 각자 다를수가 있습니다. 한 영혼에게 느껴지는 아픔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저주입니다.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대신 세상을 택했기 때문에 오는 죄의 결과입니다. 세상은 피조물이지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고난의 최종은 죽음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그 죽음이란 이 세상에서의 죽음이 아닌 영원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이 땅에 살면서 겪는 고난 가운데는 이 세상에서의 죽음보다 더 아픈 고통들이 있기 때문 입니다. 우리들의 영혼을 파괴하는 고통들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보다 더 아픈 것은 영혼의 완전 파괴를 의미하는 영원한 죽음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영원한 결별입니다. 우리는 죄의 결과로 서로에게 고난을 주고 또 파괴된 창조의 질서로 말미암아 끝없이 고난을 계속 받으며 허무함 속에 살아가고 있다가 영원한 죽음을 맛보게 되는 운명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의 해답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노예로 있을 때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기억하셨다고 출애굽기 2:23-25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담이 죄를 짖는 순간부터 이미 예비해 두셨던 구원의 길을 선포하신 것과 같이 우리에게 향하신 끝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인간이 비록 죄의 길을 선택하여 모든 것을 더럽게 타락시켜 버렸지만 하나님은 결코 포기 하지 않으시고 인간이 남기고 가는 흔적마다 다시 만지어 선으로 변화시키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바로 인간의 영혼을 죽이는 죽음과 고난도 정면 대면하여 생명과 거룩함으로 승화시켜 주심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열쇠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해답은 2가지로 표현 됩니다. 첫째는 창조질서 안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구원의 손길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지만 그 분리된 상태가 고통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고난은 바로 우리가 비정상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고난이 모든 사람들에게 성화의 도구로, 즉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오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사울 왕이 타락한 후 그 마음이 심히 괴로웠지만 그 고난이 결코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는 지식으로 승화시켜주지 못했으며 그의 마음을 더 강팍하게 하였습니다. 애굽의 바로 왕도 이와 같습니다. 그 반면 다윗과 같은 자는 고난이 그를 의의 길로 지켜주었고 요셉과 다니엘도 고난이 그들을 성화시켜 줄수 있었던 유일한 도구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둘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인류의 죽음과 고난의 핵심에 직접 파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고난과 죽음을 먼저 겪은 후 심판자의 자리에 서게 됐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 2:10). 예수님의 성육신은 자신의 영혼에 고난의 흔적을 충분히 담고 (1)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간이 거쳐야 할 모든 과정을 이수한 온전한 인간으로 죽을수 있었던 것이며 또한 (2) 부활하심으로 영혼에 있던 고난의 흔적을 승화시켜 이제는 고난이 저주가 아니라 축복으로 우리들의 영혼을 살리는 도구가 되게 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구약에 살던 의인들의 성화도 가능케 해 주었습니다. 고난 없는 그리스도는, 만약 그가 다른 쉬운 방법으로 죽음에 도달할수 있었다 할지라도, 참 성육신이 될 수 없습니다. 성육신은 바로 고난이 영혼에 주는 고통을 체험할 때 비로서 참 성육신이 이루어 지기 때문 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참 순종도 바로 고난가운데서 이루어 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히5:7). 즉 순종이 고난을 수반하지 않았다면 순종의 참 의미에 도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죽음까지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비로서 영광의 면류관이 주어졌던 것입니다 (히2:9).


그렇다면 예수님의 고난은 단순히 예수님 스스로의 온전함을 이루시기 위한 고난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창조질서와 구원의 모든 총체적인 연결성 가운데 온전함을 이루시기 위한 고난은 하나의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온전함이 불온전함 가운데 거할 때 생기는 자연 현상이었습니다. 빛을 발할 때 어두움이 이를 묵인할 수 없는 것처럼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묵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를 죽였습니다. 더 나아가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계속 증폭되는 미움과 다툼을 자신의 몸에 지니고 이를 더 이상 타인에게 전달하지 않음으로 증폭시키지 않고 자신안에 품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사53:10-11). 예수님의 고난은 구원 사를 이루시기 위하여 공중의 권세잡은자가 휘두르는 무기였습니다. 바로 그 무기를 제공해 준 자들은 우리 자신들입니다.


3. 우리의 응답


우리들에게 고난은 4가지 방법으로 다가 옵니다. 첫째는 창조질서의 파고로 말미암은 불행 들입니다 (육신의 병, 자연 기후로 말미암은 인명피해등). 둘째는 인간의 죄성에서 비롯되는 제 삼자의 공격 (aggression)입니다 (누명, 험담, 살인, 구타, 강도 등). 셋째는 우리들의 창조질서의 무시에서부터 오는 결과입니다 (영: 말씀 거역으로 말미암는 결과와 육체적 세계의 질서무시로부터 말미암는 결과 등). 네 번째는 처음에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결여에서부터 오는 정신적/심리적 공포이며 모든 고난의 근원입니다. 특히 땅의 저주는 끝없이 우리들을 의식주의 문제로 한 순간도 편히 쉬게 하지 않습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무의미에 대한 공포, 시간허비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무엇보다도 inadequacy of being 등등 이 모든 것이 합쳐져서 존재를 직면할 수 있는 용기를 무력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과 죽음을 정복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고난에 대한 해결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번째의 고난은 자신들에게 의탁된 땅을 제대로 정복함으로 다스리라고 말씀하시며 두번째 종류의 고난은 용서하는 자세(개인적 차원)와 의를 이루려는 자세 (사회적 차원)로 임하시기를 원합니다. 또한 우리들에게 세번째 종류의 고난에서는 이제 성숙을 통하여 자라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무엇보다도 위의 세가지는 이 마지막 네 번째 고난의 극복 없이는 이룰 수 없습니다. 즉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존재의 의미와 존재에 대한 용기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공중의 권세잡은이가 다스리는 육체가운데 거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의 선포 자체가 우리들에게 고난을 순식간에 없애주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선포는 고난을 동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며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어두움은 빛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계시록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나라”와 “고난”의 동역자라고 스스로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계1:9).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고난을 각오하고 적극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감수할 자세를 가지라고 말하고 계십니다 (딤후1:8).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고난이 올 때 이를 담대히 묵묵히 맞이하며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와 죽음의 독이 묻은 침이 우리들을 찌를 때 바로 그 침이 십자가의 능력으로 우리들을 세우고 우리들의 성화의 거름이 되도록 바꾸어 놓으신 하나님 자신을 체험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롬5:3). 무엇보다도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는 고귀한 지식으로 인도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는 그분의 은혜의 깊이만큼 체험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은혜의 깊이는 우리들의 영혼에 새겨지는 고통의 깊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바로 고난의 깊이이며 우리 영혼의 깊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들에게 고난은 성화를 의미합니다. 고난의 이유에 관계없이 또 그 고난의 이유를 우리의 이성으로 절대 설명할수 없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이제 고난은 하나님을 아는 고귀한 지식의 깊이로 들어가게 하는 은혜의 도구 입니다. 그런데 이런 거룩함은 이 세상의 안락함이 있는 성문 안에서는 찾을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고난이 아직도 저주이기 때문 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성문 밖, 세상의 영광과 명예가 없는 지역, 외롭고 버려진 곳에 임할 때만이 얻어질수 있는 거룩함 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히브리서를 통해 우리도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박성호] 이승연 파문에서 보는 21세기 영성 관리와 찬양하는 삶

이코스타 2004년 3월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언 4:23)


이 승연과 네티앙엔터테인먼트의 기획 작품이었던 이른바 위안부 누드 파문이 기획사 본인들에 의해 원본 필름과 동영상이 불태워 지면서 일단 가라앉은 듯 하다. 네티앙엔터테인먼트 측에서 가졌던 지난 몇주 전의 기자회견에서 시작해서 지금까지 진행되어 왔던 일들을 돌이켜 보면 눈앞에서 전쟁이라도 한 판 치루어 졌던 것 같은 느낌이다. 공연히 우리 아픔 많은 할머니들 가슴에만 대못을 박을 일들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또 한편으론 네티앙 가입 탈퇴 운동으로까지 이어졌던 네티즌들의 들끓은 반란으로 인해 영문도 모르고 고생도 많이 한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있다.


갑자기 자다가 두들기는 봉창소리처럼 모두가 알고 있는 이 이야기를 찬양을 이야기하자 칼럼에 쓰는 이유는?


이 번 이승연 파문을 지켜보면서 나는 나 자신의 내면 세계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었다. 한가지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네티즌이라는 존재를 가볍게 여겼다가는 정말 큰 코 다칠 수 있다는 교훈이고, 다른 한가지는 줏대 없이 이른바 여론의 물결에 휩쓸리다가는 정말 나의 내면 세계에 더 큰 코를 다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자 본주의와 정치적으로 민감한 주제가 빚어낸 불행한 만남이었던 이번 사건에 대해 나는 조금이라도 옹호하거나 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사태가 해결되고 마무리 된 지금, 이 사건을 지켜보는 입장에 있었던 나의 삶을 돌이켜 보니, 거기에는 깊은 공허만 남고 있음을 본다. 왜일까? 한참을 생각해 보았다. 왜 공허함만 남는 것일까? 정의를 실현시키고 옳은 일을 행했다고 하는 의협심이 깃드는 것이 아니라 괜한 훔쳐보기와 엿보기를 했다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는?


나 는 클릭으로만 정의를 행하고 있었다! 웹 서핑을 즐기며 클릭하면서 보았던 모든 기사들이 나의 정의로움과 연결된다고 착각했던 것이다. 이런저런 게시판에 올라온 다양한 사람들의 분노와 질책과 야유와 독려를 보면서 나는 잠시라도 깊이 그렇다면 내가 살아가는 나의 삶에는 어떤 일들이 나타나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고 그저 웹 서핑을 즐기고만 있었던 것이다.


인 터넷 문화가 발달하면서 나의 삶에 줄어든 결과가 있다면 바로 책을 읽는 시간이었다. 나는 정보와 지식과 교양과 심지어는 영성마저도 인터넷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단단히 믿고 있었고 그 결과는 공허함이었다. 그것은 거짓이었던 것이다.


웹 서핑이 왜 책읽기를 대체할 수 없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나는 이렇게 내렸다. 웹 서핑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자기 기호에 따라 보고 싶은 것만 클릭 한다. 그리고 마음에 안 들면 단번에 Backspace를 눌러 버린다. 깊이 있는 사고와 되새김질은 없는 것이다. 반면에 책읽기에는 깊이 있는 생각과 되새김질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내가 마음에 들건 들지 않건 책을 한번 잡았으면 어느 정도는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때, 나는 웹 서핑을 하면서 오락 정도로 즐기고 있었지 삶의 깊은 공부와 생각하기는 하고 있지를 못했던 것이다.


내 마음을 관리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마음 상태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면서 생각하는 이른바 큐티일 것이다. 인터넷 시대에 우리의 영성은? 정답은 오프 라인에 있다.


예 배를 인터넷으로 드리면 안 되는 것일까? 정답은 오프 라인에 있다. 삶의 현장에서 회중과 함께 드리는 예배의 현장성을 경험하고 함께 교제하며 그 안에서 함께 호흡한다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예배할 장소가 없는 고립된 곳에 있다든지 하는) 예배와 찬양하는 삶에 관한 한 온라인에서 영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사역들이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니라는 뜻의 논지를 독자들께서 이해해 주시리라 믿는다.


어 쨌든 중요한 것은 이승연 파문 이 마녀사냥이었던, 공의를 행했던 네티즌들의 운동이었던 간에 이 사건을 멀리서 지켜보는 나의 내면의 삶에는 씁쓸한 오락으로 남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다음부터는 의로운 일을 행할 때는 오프 라인에서 행해야 겠다는 생각이다.

[정진호] 제 6 떡 – 천국 투자 –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흐르는 강물 앞에 서서 떡을 던지는 사람을 상상해 보라. 그것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달 두 달, 일년 이년그리고 십년 이십년을 하릴없이 떡을 떼어 강물 위로 띄어 보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일까?



(1)



예수의 인생은 한 마디로 떡의 인생이었다.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소개했던 사람예수. 그는 세상의 떡으로 와서 떡의 인생을 살았다. 자신의 살을 떡으로 떼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주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 자신의 삶을 나타내는 영적 은유였다. 영적, 육적으로 굶주려 죽어가는 무리들 앞에서 예수는 작은 떡을 하나 취하여(taken), 하늘을 우러러 그 위에 축사한 후(blessed), 그 떡을 쪼개어(broken) 제자들에게 나누어주며(given) 많은 무리들에게 다시 나누어주도록 명한다. 그 장면은 장차 걸어가게 될 자신의 인생과 제자들을 통해 다시 전개될 생명 역사를 선포하는 엄숙한 순간이었다. 오병이어는 성경 전체의 주제를 명료하게 드러내기 위하여 치밀하게 계획되고 연출된 하나의 작품이었다.



예수는 처음부터 하나님 손에 붙들려 인생을 살았던 분(taken)이다. 세례 요한 앞에 무릎 꿇어 세례 받을 때 하늘 문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여 축사함을 받았으며(blessed), 그 받은 능력으로 담대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며 자신의 몸을 찢으셨고(broken), 마침내 부활의 영광으로 나타나 생명의 떡으로 만민에게 나누어주신 분(given)이다. 오병이어는 작은 떡 하나로 수많은 무리를 먹여 살리는 예수의 인생을 표현한 한편의 모노 드라마였을 뿐 아니라, 그 기적을 체험한 제자들 마다 예수의 인생, 곧 떡의 인생을 살도록 다시 초청하는 영적 암시이기도 하다. Taken-Blessed-Broken-Given의 인생, 이 네 가지 동사로 이루어진 떡의 인생으로 부름을 받는 것이다.



떡의 존재 가치는 먹히는 데에 있다. 자신은 조각조각 찢기고 씹혀서 사라지나 그것을 먹는 사람을 배부르게 하여 살리는 것, 그것이 떡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따라서 예수의 제자된 우리들도 그 같은 떡의 인생을 살도록 요청받는다. 한 조각의 떡이라도 더 먹으려고 아귀다툼을 하는 이 세상 속에서 거꾸로 자신의 떡을 떼어 죽어가는 자들의 생명을 살리는 일에 나누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의 제자된 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떡의 인생을 산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종종 우리는 앞의 두 가지 동사 Taken-Blessed의 자리에 머물기는 좋아하나 뒤의 두 가지 동사 Broken-Given의 인생을 살기는 싫어한다. 우리는 하나님 손에 붙들려 그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이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 가운데 축복의 자리에 나아가기를 기뻐한다. 교회 안에서 말씀으로 찬양으로 기도로 예배자의 복을 누리기는 좋아하지만, 교회 밖의 삶 가운데 자신의 떡을 떼어 산제사(living sacrifice)로 나누어주는 일에는 인색하기 그지없다.



예수는 우리가 세상의 빛(the light of the world)으로 드러나기를 원한다. 변화산상에 머무르기를 좋아하는 우리들에게 산 아래 마을로 내려가라 명한다. 우리가 산 속의 수도자나 교회 안의 빛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 혼탁하고 부패한 세상 속에서 한줄기 빛으로 살아가며 예수 안에 감췬 비밀 그 기이한 빛을 선전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믿는 자들이 교회 안에 갇혀서 그 많은 은사들을 소진하며 세상을 멀리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은 소멸되어 버리고 세상은 여전히 부패한 모습으로 결코 변혁되지 않은 채 남아있게 된다. 그리고 세상의 떡, 육신의 썩어질 양식을 우상으로 삼아 살아가는 그 모습대로 똑같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세상은 비웃고 손가락질 할 뿐이다. 너희들이 말하는 그 사랑이 어디 있느냐? 너희가 우리와 다른 점이 무엇이냐? 라고 말이다.



(2)



평양과기대 건설을 위해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계획을 세우고자 20039월에 연변과기대에서 프로젝트팀을 구성하게 되었다. 프로젝트 팀의 책임을 맡아 여러 교수님들과 팀웍을 이루며 일을 하는 가운데, 인간적인 눈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이 일에 대해 조금씩 하나님이 보이시는 환상과 비전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 10여 년 전 연변과기대를 세우고자 하던 때의 추억을 회상해 보았다. 1990년 코스타에 참석하여 김진경 박사의 강의를 듣던 중 나에게 다가왔던 그 비전. 두 개의 나무 기둥 사이에 <연변조선족기술대학건설부지>라고 적힌 현수막만 보이는 텅 빈 민주벌판의 사진을 보여주며 함께 가서 일할 사람을 찾던 동키호테 같은 그 어이없는 초청이 나에게는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예수를 믿은 지 얼마 안 되었던 그 시절, 세상 가치관이 허물어지고 난 후, 과연 어떻게 앞으로 내 인생을 살아가야할지 그 문제를 끌어안고 고민하던 나에게 중국에 있는 200만 우리 조선족을 위하여 그리고 13억 중국인과 북한 동포를 위해 대학을 짓겠다는 그의 말은 마치 한줄기 전율처럼 내 영혼을 흔들었다. 그때 내가 받았던 감동은 대학이 지어지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보다도 저렇게 인생을 사는 분들도 있구나 하는 새로운 깨달음에 대한 충격이었다. 오직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전 인생을 걸고 투자하는 사람들그것이 바로 내가 만난 예수의 표상, 그리고 내가 따라가야 할 예수의 모습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연변과학기술대학…… 정말 도무지 될 것 같지 않았던 그 일을 두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던가? 그러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신 히브리서 111절의 말씀을 붙들고 그 믿음에 헌신하고 투자한 사람들이 한 사람 두 사람…… 과거의 우리 선조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모여들었던 그 땅 황량한 만주 벌판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결과 오늘, 상전벽해라는 옛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에스겔의 골짜기와 같았던 북산가 언덕 공동묘지 터 위에 연변과기대의 아름다운 캠퍼스가 어엿한 실상과 증거가 되어 나타난 것이다. 1,600명의 학생과 200여명의 전문인 사역자가 모인 기적의 공동체가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배출한 2,000여명의 졸업생들이 얼마나 놀라운 열매와 씨앗을 전 중국 대륙에 뿌리고 있는지…… 기적은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다.



KBS 인간극장의 PD로 잘 알려진 김우현 감독이 연변과기대에 취재차 와서 학생과 교직원 여러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한 내용을 비디오에 담아 보내왔다. 장차 다큐멘타리로 방송작품을 제작하고자 준비하는 가운데 시험적으로 만든 소품을 보내온 것이다. 그 안에는 연길 시내의 택시 운전사가 바라본 과기대 교수들의 모습, 아침 일찍 새벽 교정에서 QT를 하다가 맞닥뜨린 세 한족(漢族) 여학생의 유창한 조선말 인터뷰, 북한 사역에 헌신하여 일하다가 돌아온 졸업생 부부의 감동적인 간증, 결장암 말기의 진단으로 중국과 한국의 병원에서 포기했던 학생을 미국 디트로이트의 원종수 박사님께 보내어 기적적으로 살려온 이야기, 기독교에 배타적이던 공산당원 여학생이 교수님들의 부모와 같은 사랑에 감동하여 마음 문을 열게 된 간증, 마치 사울처럼 예수 믿는 후배들을 핍박하던 청화대학 출신의 엘리트 부부가 연변과기대에서 예수를 영접한 후 서울대학에서 유학하고 다시 돌아와 교수로 함께 일하는 모습, 졸업을 앞둔 여학생이 교수님들에 대한 감사와 학교를 떠나는 아쉬움을 눈물로 고백하는 이야기, 찬양 사역 하는 학생들이 하덕규 집사님과 모임을 가지며 꿈과 비전을 나누는 모습들…… 코스타 초창기의 찬양 사역자였던 조현직 교수님이 YUST 학생 까페 <낮은음자리>에서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의 노래를 부르는 그런 감동의 장면들이 소복이 담겨 있었다. 그것을 보면서 지난 10년간의 눈물어린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감을 느꼈다. 그리고 전도서 11장의 말씀이 떠올랐다.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다시 찾으리라.(전도서 111)



(Cast your bread upon the waters. You’ll find it after many days.)



 



어쩌면 우리 모든 인간은 자기 앞을 스쳐 흐르는 존재의 강물, 역사와 시간의 강물 앞에 서 있는 그런 인생들인지 모른다. 그 강물을 타고 수많은 사람들, 그들의 영혼들이 내게 다가왔다가 더러는 스쳐 지나간다. 그 존재의 강물 위로 내가 가진 떡을 떼어서 던지라고 하나님은 명령하고 계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 행동, 나와 내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자녀들이 먹어야할 그 떡을 떼어서 흐르는 강물 위에 던지는 그 어리석은 일을 하라는 것이다. 그리할 때, 언젠가는 반드시 내가 투자한 그 떡의 몇 배로 아니 육십 배 백배로 도로 찾을 그 날이 온다는 것이다. 그것이 약속이다.



1학년 처음 입학할 때 딱딱하게 굳어진 경계의 눈빛으로 교수를 바라보던 그 투박한 학생들의 마음이 4년이란 강물을 흘러 지나가면서 과기대 교직원들이 던진 그 사랑의 떡을 받아먹고 변화되어 따뜻한 가슴과 생명의 눈빛을 지닌 아름다운 모습으로 졸업을 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볼 때, 우린 그 약속의 성취를 맛본다. 작년 졸업생들을 내보낼 때, 사은회에서 받았던 감격을 반추해 본다. 졸업을 앞둔 학부 학생들이 사은회를 하겠다고 교수님들 가족을 모두 초대했다. 며칠 전부터 학교 강당을 빌려 무슨 준비를 하는지 끙끙대더니만, 마침내 그날이 왔다. 강당으로 들어가 보니 교수들을 위해 정성스런 테이블이 마련되고 다과와 함께 아기자기한 풍선 장식으로 꾸며놓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 조선족 학생들의 순박한 마음이 느껴졌다. 졸업생들은 보이지 않고 무대 앞의 휘장이 가려져 있더니 잠시 후에 불이 꺼진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의 노래 선율이 흐르며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학생들과 신사복을 입은 남학생들이 손에 촛불을 들고 두 줄로 갈라져서 무대 앞으로 나온다. 그 모습이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놀라고 있는데… 한 여학생이 감사의 글을 낭독하고 모두 앞에 나와 큰절까지 한다. 뭉클  그리고 눈물



 




사랑하는 교수님들께:



과기대에서 저희가 보낸 지난 4년의 시간은, 정말 너무너무 행복한 순간들이였습니 . 하나하나 방황하는 우리의 심령에 눈물과 피땀으로 새로운 꿈을 심어주신 교수 님들, 감사의 언어로는 너무도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해 한해 지나면서, 커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교수님들한테는 얼마나 큰 기쁨인지 이제 이해할 것 같 습니다.



한알의 씨앗은 떨어져, 썩은 후에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교수님이 우리를 위 한 그 아낌없는 배려는 언젠가 그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걸 믿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아닐지라도, 또 혹시 지금은 너무 실망스러울지라도 우리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꿈, 아니 비전이 있기에 그 밝은 곳으로 열심히 달리겠습니다. 비록 어둠속에 서 가끔 슬피 울고 있던 우리의 모습이 있었고, 인생의 지루함 속에서 방황하는 우 리의 영혼이 있었고, 길을 찾지 못해 갈팡질팡하던 우리의 발길이 있었습니다. 지만, 그때마다 따뜻이 잡아주시던 교수님들의 손을 기억합니다, 그때마다 같이 울 면서 위로해 주시던 교수님들의 얼굴을 기억합니다. 때론 잘못한 우리에게서 너무 실망한 나머지 화내시던 교수님들의 모습도 기억합니다. 그때는 더러 불평과 원망 을 품었었지만 지금은 알 것 같습니다. 교수님들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이젠 우리의 마음을 합하여, 교수님들께 말하고 싶습니다. 사랑합니다. 그동안 정말 고마웠습니다.



교수님들의 꿈은 꼭 이루어질 것이며, 우리는 우리의 꿈을 안은 채, 사회로 발걸음 을 디디게 될 것입니다. 비록 시작은 미미하지만 신실한 꿈과 진실한 마음, 참된 자세로써 작은 일을 큰 일로 만들 것이며 큰 일을 기적으로 만들겠습니다. 우리의 학교가 세워진 것은 기적입니다. 교수님들께서 여기에 오신 것도 기적입니다. 우리 가 여기에 하나로 모일 수 있는 것도 기적입니다. 하지만 가장 가장 놀라운 기적은 바로 교수님들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젠 교수님들께서 우리에게 남겨준 그 과제를 우리가 스스로 메고 가야할 시간이 되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의 뼈가 세월속에서 한줌의 흙이 되고 우리의 이름이 사람들속에 묻혀서 아주 사라진다 하여도 우리의 목소리, 우리의 외 침은 하늘의 저편 끝까지 남아있을 것입니다. 교수님들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이 땅에 진리, 평화, 사랑 이 세 마디가 영원히 메아리치게 될 것입니다.



99학번 졸업생 일동


(3)



한자어로 사랑이라는 말을 나타내기란 쉽지 않다. 남녀간의 사랑, 부모의 사랑, 국가를 향한 사랑 등 이 모든 의미를 애()라는 한 글자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그 앞에 다른 수식어를 붙여 사랑의 종류를 구분한다. 자기애(自己愛), 부부애(夫婦愛), 민족애(民族愛), 인류애(人類愛), 등등……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아가페 사랑, 즉 무조건적인 사랑을 표현할 말을 찾기는 더욱 어렵다.



살신성인(殺身成仁)이란 말이 있다. 자기 몸을 죽여서 인()을 이룬다는 말이다. 이 말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을 잘 표현하고 있는 말이 있을까? 흔히 지하철역에서 자신의 몸을 던져 타인의 생명을 구하고 죽은 사람을 가리켜 살신성인을 이룬 의인이라고 칭찬한다. 물론 아름다운 귀감임에는 분명하지만 그의 행동은 사랑이라기보다는 즉흥적인 용기에 가깝다. 그러나 십자가의 사랑은 즉흥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 계획된 것이며, 많은 고민과 피와 땀과 눈물의 소산이다. 도무지 사랑할 만한 구석이 없는 죄인들을 향해, 아니 자신을 욕하며 조롱하고 채찍질하는 그 원수의 무리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기로 결단한 그 너그러움의 극치…… 그래서 그 사랑을 가리켜 인애(仁愛)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그 사랑을 이룬 예수를 향해 인애하신 구세주라고 부르는 것이다. 온 몸으로 인애를 이룬 그 사랑, 자신의 몸을 산산이 찢어 생명을 살린 그 사랑, 그것이야말로 살신성인이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그 사랑, 아가페 사랑은 절대 추상적인 개념이 될 수 없다. 철학적 자아성취를 위한 플라토닉 러브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 사랑은 몸으로 부딪히는 사랑이다. 아니 피를 흘리며 내 살점을 떼어 죽어가는 그 사람을 먹여 살리는 사랑이다. 아니 내가 정녕 죽지는 못할지언정 반드시 손해는 보아야하는 그런 사랑이다. 희생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인 것이다.



평양과기대를 짓겠다고 미국과 캐나다 한국의 여러 교회와 단체를 방문하며 호소하는 가운데, 최근의 북핵 문제를 둘러싼 미행정부의 민감한 분위기 그리고 한국의 지난정권의 퍼주기식의 대북정책을 비판하는 보수진영의 거센 목소리와 그에 따른 경색된 정국과 민생 경제의 불안감등이 가중되어 북한을 돕기 위한 마음들이 굳게 닫혀있음을 느끼게 된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크리스천도 예외는 아니다. 그들을 바라볼 때 답답함을 느낀다. 우리 크리스천의 사랑이 언제부터 계산적인 주고받는 사랑이 되었는가?



세상 사람들은 시류를 좇아 행동한다. 어쩌면 당연하다. 그것을 가리켜 전도서 기자는 풍세를 살펴보는 자, 구름을 바라보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다(전도서 114). 그들은 항상 바람과 구름의 향방을 따라 자신의 인생을 투자한다. 주식과 부동산 동향, 정치권의 세력판도와 경제 지수를 살펴보며 자신의 떡을 불리기에 골몰한다. 외풍이 불어오고 먹장구름이 끼면 지금은 씨를 뿌릴 때가 아니야 하며 파종치 아니하고 거두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그들은 바람과 구름은 항상 방향이 바뀌고 또 잠시 있다가 사라짐을 모른다. 그들을 향해 하나님은 이렇게 질책하신다. ‘너희가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 것을 아느냐? 그것도 모르면서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어찌 안다고 하느냐?(전도서 115)’ 그리고 다시 명령하신다.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전도서 116)



크리스천의 사랑은 조건부 사랑이 아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싶을 때, 우리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을 골라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할만한 학생들을 사랑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아무리 말썽꾸러기고 반항적인 학생일지라도 그의 영혼을 향해 말없이 묵묵히 떡을 던지다 보면 그것이 씨앗이 되어 언젠가 열매로 돌아온다. 졸업할 때까지 교수들의 사랑은 받아들이지 못했던 학생이 오히려 사회 속에 나아가 그 큰 사랑을 깨닫고 자신의 변한 모습을 담아 편지를 보내올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런 제자가 더 헌신적으로 일하고 모교를 사랑할 수도 있다. 오직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흐르는 강물에 떡을 던지는 그것뿐이다. 떡을 던지는 사랑은 은사가 아니라 주의 명령이다. 하나님이 여러 가지 성령의 은사 가운데 사랑의 은사를 주시지 않은 까닭은 우리의 희생을 통해 사랑을 이루어가기를 바라시기 때문일 것이다. 그 가운데 비로소 아버지의 사랑, 십자가에서 아들을 희생시킨 그 큰 사랑을 깨달아 배워갈 수 있기 때문이다. 희생 없는 사랑은 허사에 불과하다.



아내가 가끔 넋두리를 하듯, 자신이 독립운동가 남편을 만나는 바람에 고생을 하게 되었다는 말을 할 때가 있다. 그 말을 들으며 속으로 어느 정도 수긍하게 된다. 과연 그렇다는 생각을 해 본다. 우리가 지금 중국과 북한에서 일하고 있는 것이 바로 영적인 독립운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싸우는 이 싸움에 우리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과거 일제시대 때 자신의 일신의 안락을 포기하고 재산을 털어 이 만주벌판으로 달려와 독립운동을 하였다. 대성중학교와 신흥무관학교 같은 학교를 세우고 많은 인재들을 양성해내었다. 그 당시 크리스천의 비율이 전체 국민의 1%정도 밖에 안 되었던 것에 비해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 중에 크리스천이 얼마나 많았던가를 헤아려보면 금방 알 수가 있다. 3.1운동 발기인 33인 중 절반이 크리스천이었다. 유관순이 크리스천이었고 저항시인 윤동주가 크리스천이었다. 상해 임시정부의 여러 주역들과 조만식, 김구, 이승훈, 안창호 같은 분들이 모두 크리스천이었다. 그리하였기에 그 당시 기독교인들은 불신자들에게도 인정을 받았으며, 수많은 민족 지도자들을 배출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떡을 던져 희생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북한의 형제들을 향한 사랑도 같은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북한에 대학을 지어서 그 청년들을 가르침으로 장차 통일 시대를 준비하고 동북아의 큰 역사를 이룰 인재들을 양성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비전이다. 그 비전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 가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북한의 청년들을 위해 그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기도하며 작은 떡을 떼어 자신을 희생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가장 확실한 투자는 영원 속에 약속된 천국 투자이다. 평양과기대라는 또 하나의 역사적인 물줄기를 만드는 그 일을 앞에 두고, 크리스천으로서 우리 민족 공동체의 장래를 생각하며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강물 위에 우리들의 떡을 과감히 던져야할 시기임을 느낀다.


[차문희] 하나님의 인격을 가르치는 주일 학교

잘 알고 지내는 미국 친구 부부와 그들의 아이들과 함께 예배 후 점심을 먹으려 한 restaurant 에 가게 되었다.  그 때 그 엄마는  초등학생들인 두 자녀들에게 이렇게 질문 했다. 



Mom: How was your Sunday school class? What did you learn?Anything special? 



Child 1: No, not really, I don’t know.  It was so boring. 



Mom: What do you mean? You didn’t do or learn anything?



Child 1:Well, you know Mom? I don’t know I was just bored…



하면서 말의 뒤끝을 흐리기 시작했다.  그 때,



Child 2:Well, I learned that Jesus fed the 5000people.



Mom: Oh! What else, did you learn? 



Child 2: I don’t remember the rest of the lesson, but I heard the Bible story.



Mom: Listen Kids, when you go to the Sunday school class, you do not expect to play or do nothing.  I want you to learn the word of God.  You should be able to tell me the key point of the lesson. 



그렇게 아이들에게 훈계를 하는 그녀는 아이들은 교회 학교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하나의 놀이 공간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신앙의 기초를 어려서 부터 심어 주기 위해서는 주일 학교 교육 역시 일반 학교만큼 중요하다면서 주일 학교 학습 과정 내용을 자주 복습하면서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는 신앙적 대화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교회 안에 소속되어 있는 주일 학교가 우리의 아이들에게 갖는 성경적, 인격적 의미에 관하여 생각을 해 보게 되었는데, 교회 안에 소속 되어 있는 주일 학교는 아이들이 다니는 일반 학교와 매우 다른 특색을 가졌다는 것은 기정사실이고 정식으로 자기가 가르치는 분야에서 오랜 기간 동안 훈련을 받고 그 분야에 대한 자격증을 갖고 임금을 받아가면서 일하는 일반 학교 교사와는 달리 주일 학교 교사는 어떤 특별한 훈련과 보수 없이 단지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는 그 사명감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니 일반 학교 교사에 비해 quality가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부모님들은 아이들이 무슨 내용을 배웠는지 관심도 없고 그냥 어른들이 예배드리는 동안 babysitting 시간으로 인식하고 있다.  교회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인격 교육, 즉 예수님을 닮는 인격 교육은 그 중요성을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그렇게 많은 이들로부터 호응을 받지 못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언젠가 아이들을 위한 큐티 자료가 있으니 필요하신 분들은 알아서 가져가라는 광고가 나간 적이 있다. 이 때 한 학부형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아니 물론 큐티 자료 우리 아이가 할 수 있으면 좋지.  근데, 워낙 다른 공부하기가 바빠서… 매일 숙제도 많고 SAT 공부도 해야 하는데 큐티 할 시간이 어디 있어?  나중에 시간이 남을 때 시키지 뭐. ” 하면서 투덜거리는 모습을 발견하면서 학교 교육에 더 많은 비중을 두는 부모님들의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학교 교육은 무시하고 교회 학교만 중요시 하라는 뜻은 절대로 아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학교 공부가 중요하듯이 우리의 인생의 길잡이가 되는 하나님의 인격을 닮는 공부 역시 Ep어 놓기 어려운 부분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자녀를 키우는 사람들은 자기의 아이들이 건전한 도덕(moral)관과 가치 (value)관을 갖고 성장해 주기를 원한다.  그래서 공립학교 보다는 기독교나 가톨릭 이념이 바탕이 되어 있는 사립학교를 선호하여 비싼 돈을 투자하면서 아이들의 교육에 열성을 쏟는 모습들을 볼 수 있다. 예전에 이코스타를 통해서 공립학교와 사립학교의 실태를 보고 한 바 있는데, 과연 기독교적인 도덕관과 가치관을 심어 주기 위해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는 사립학교에 보낼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또 그런 교육을 받았다고 해서 한 인간에게 올바른 기독교 사상이 확립될 수 있는지도 의문가는 점이다. 기독교적인 도덕관이나 가치관을 심어 주는 사립학교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예배를 드리고 정규 교육과정에 포함되어 있는 성경을 배울 수 있으며 종교에 대한 이야기들을 자유롭게 나눌 수 있다는 장점들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교육 과정에 들어 있는 성경만을 배우고 예배를 드리고 정교 분리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해서 아이들에게 성경적 도덕관이나 가치관이 제대로 만들어 지지는 않는다.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한 사립학교에 다닌다고 해서 그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 말씀을 바탕으로 한 가치관의 형성이 이루어진다고는 가정 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극소수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사실만을 전제로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 흔히 모태 신앙 혹은 어려서부터 신앙 좋은 부모로부터 양육 받고 성장한다고 해도 그들이 과연 올바른 성경적 가치관을 갖고 살아간다고는 볼 수 없듯이 올바른 기독교 가치관의 확립을 위해서는 효과적인 주일 학교 교육이 이루어 져야 하고 일반 교육 만큼 주일 학교의 중요성을 인식할 필요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주일 학교 교사 역시 일반 학교 교사만큼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비록 일반 학교 교사처럼 가르치는 분야에 대한 훈련을 받아서 자격증이 있지는 않지만 주일 학교 교사를 임명할 때 어느 정도 선발 기준을 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매 주일 마다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의 주일 학교 교육 시간, 이 시간은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을 통해서 배우는 시간이다.  학년별로 나누어서 하는 주일 학교 시간을 아이들은 학교 공부만큼 진지한 자세를 참여할 필요가 있고 교사들은 자신이 가르칠 분야를 미리 준비해 와야 한다.  그리고 부모님들은 학교 공부만큼 주일 학교 공부 시간이 단지 어른들이 예배드리는 동안 babysitting의 장소로만 생각하지 말고 아이들이 성경의 어떤 이야기를 학습했는지 나누고 그 이야기가 아이들에게 주는 신앙적 교훈에 대해 각자 갖고 있는 생각들을 나누어야 한다. 그러는 동안 부모님들은 아이들에게 신앙적 대화를 할 수 있는 문을 열어 주고 이렇게 어려서 부터 나눔의 시간(sharing)을 갖는 습관을 길러 주는 것이야 말로 신앙에 대해 서로가 갖고 있는 다른 생각들을 이해 할 수 있게 되는 좋은 훈련 과정이 될 수 있다. 이 곳 조지아 출신이면서 한 때 미국의 대통령 이였던 Jimmy Carter는 지금도 자신이 출석하고 있는 교회의 주일 학교 교사로 섬기고 있다. “미국 대통령은 한 때의 직업이었지만 주일 학교 교사는 평생 직업이 될 수 있다” 고 말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고 그의 교회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주일 학교의 중요성을 강조 한다고 한다. 학교 교육이 학부모, 교사, 학생 이렇게 모두 협력해서 효과적인 학습 능률을 올리듯이 올바른 신앙적 가치관 성립 역시 학부모, 학생, 그리고 주일 학교 교사의 끊임없는 협조가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최영기]’공동체성은 교회의 본질입니다’

1. 목사님의 소개와, 하시고 계신 사역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원래 목사였던 사람은 아니고, Ohio State University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Silicon Valley에 있는 회사에서 1977 85년까지 근무하다가, 41살에 신학교에 가서, 44살에 늦은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93년에 지금의 휴스턴 서울 침례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되었고요. 저는 예수님을 대학원 때 영접했는데, 그 때 성경을 읽어가면서 갖게 된 갈등 중의 하나는 현재의 교회와 성경에 나타난 교회가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약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은 가정 같았는데, 현재의 교회는 왜 그렇지 못할까 하는 고민을 하던 중에, 그 이유가 초대교회는 가정에서 모이는 가정교회라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브루스길라와 아굴라와 같은 사람들의 집에서 모이는 가정 냠맙눼募? 겁니다. 그렇게 해서, 휴스턴 서울침례교회에 부임하여 23 개의 목장(개별 가정 교회의 명칭)으로 가정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지금은 목장 숫자가 약 130개 됩니다. 분가가 자주 있어서 정확한 숫자는 잘 기억을 못하겠습니다. 자랑스럽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증가가 기신자의 수평 이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불신자 전도에 의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작년도 저희 교회에서 새롭게 예수님을 영접하고 침례를 받은 사람이 영어 장년부와 중고등부를 합쳐서 약 280명입니다. 한 주에 약 5명 꼴로 침례를 받게 되었다는 말이지요. 2000년도 인구 조사 통계에 의하면, 이곳 휴스턴의 한인 인구가 10,300명이라는 데 한국 사람이 가주나 뉴욕처럼 많이 않은 곳에서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은 놀랄만한 일이라고 주위 목회자님들이 말씀해 주십니다.



가정교회에 관해서 배우고 싶으신 목회자들을 위해서, 화요일부터 주일까지 5박 6일 간의 세미나를 열고 있습니다. 사실, 성경적인 교회의 모습은 공부를 가르쳐서 제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삶을 보여주고 나눔으로써 제자를 만들어 가는 겁니다. 성경공부를 통해 제자를 만드는 일이 2 3년간은 효과적일 수 있지만, 그 이후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죠. 그래서 가정교회에서는, 부부 싸움했던 얘기, 화났던 얘기들을 솔직히 나누고, 그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갔는지는 함께 나누면서 제자가 되어가도록 하고 있습니다. 세미나에서도 보고 배우는 원칙이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세미나에 참석한 사람들은 목자의 집에서 민박을 하면서 보고 배울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또한 처음 예수님을 믿는 분들을 위한 성경 공부인 ‘생명의 삶’을 속성으로 가르쳐 드리고요, 목자들의 간증을 들려드림으로써 이론이 아닌, 살아 있는 현장을 소개하려 하고 있습니다. 가정 교회 사역에 있어서, 예배가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세미나에 참석하시 분들이 주일 예배에 꼭 참석하고 가시도록 하고 있습니다.



2. 가정교회에서 성경공부를 통한 제자 양육이 아닌, 삶을 통한 양육을 지향하신다면, 성경공부 교육은 따로 진행이 되는지요?



그렇습니다. 매주 화요일에 “삶 공부”라고 이름을 붙여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은 분들을 위한 ‘생명의 삶, 다음 과정인 13주‘새로운 삶’, 다음 과정 13주‘경건의 삶’이 같은 날 동시에 제공됩니다. 이 밖에도, ‘부부의 삶’, ‘부모의 삶’, ‘교사의 삶’등 실제적인 삶에 도움이 되는 코스가 제공됩니다. 이 모든 과정들은 가르침의 은사가 있는 평신도에 의해 진행되고 있고요. 그리고 ‘쎌 교회 지침서’를 저술하신 랄프 네이버 목사님이 쓰신 6주 짜리 “매일 영적 성장 가이드’를 우리가 번역해서 사용했었는데 최근에 정식으로 NCD에서 출판했습니다. 이것과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교재로 해서 가정 교회 차원에서 1대 1로 교육시킵니다.



매주 금요일에는 가정 교회 모임인 목장모임이 있고요, 주일에는 목장의 리더인 목자들의 모임인 ‘초원모임’이 있습니다. 초원모임도 원칙적으로는 목장모임과 동일하게 진행되지만, 목장모임이 나눔과 교제가 주제라면, 초원모임은 목양이 주제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삶을 나누고 보이면서 제자를 만들어가는 것이 목장모임의 목표이기 때문에, 12명이 넘으면 반드시 분가하도록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규모가 너무 커져서 진정한 삶을 나눈다는 것이 어려워집니다.



저희 교회에서 목자가 수료해야 할 삶 공부 5 과목을 다 수료하지 못한 사람을 대행 목자라고 불러서 목장을 책임지도록 하는데 이들 중에는, 빠른 경우엔, 예수를 영접한지 7개월 만에 대행목자가 된 경우도 있습니다. 좀 빠르겠다고 생각하시겠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목자는 가르치는 리더가 아니라 섬기는 리더이기 때문에 가능하고요, 또 삶을 보여주면서 양육하는 것이기에, ‘전에 본 대로만 하라’로 권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하지요. 그러다가 힘든 일이 생기면, ‘초원모임’을 통해 묻고 함께 기도할 수 있기에, 7개월이라는 신앙경력이 별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귀납법적인 성경공부는, 주일 예배 설교를 통해 이루어 집니다. 많은 교회들이 교인 전체에게 성경을 가르칠 수 있는 이 시간을 놓치고 있는 것 같아 참으로 아쉽습니다. 주일 예배에서도 새로 믿은 분들이 적응하기 쉽게 배려하려고 하는데, 예를 들면, 성경은 표준 새번역을 사용함으로써 개역성경의 어려움으로 인해 오는 거리감을 없애려고 하고있고요, 찬송도 같은 것을 반복해서 부르려고 하고 있습니다. 또한 새로 오신 분들을 일으켜 세우려고 하지 않고요, 설교도 가능한대로 교회용어가 아닌 평상어를 사용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미 믿는 분이 우리 교회를 방문하면 다른 교회에 가서 섬기시라고 하고 등록을 허락지 않는데요, 이것 또한 새로 오시는 분들이 더 쉽게 적응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3. 왜 현대교회가 이토록 공동체성이 상실되게 되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사실, 교회에 공동체성이 상실되었다고 하기보다는, 교회의 본질이 흐려졌다고 하는 편이 나을 듯 싶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3위 하나님께서 공동체셨고, 그 하나님께서 하나님-아담-하와의 셋이서 하나되는 가정을 공동체로 세우셨고, 그리고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라는 공동체를 세우셨지요.



현대 교회는 너무도 개인 신앙을 강조한 나머지 공동체성에 대한 의식이 상실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문제를 ‘기독교가 불교화 한다’고 하곤 하지요.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가 너무도 중요합니다만, 그것만을 강조함으로써 함께 하는 신앙을 무시하면 문제가 됩니다. 전통적인 교회의 경우에 프로그램이 너무 많아서 공동체성의 상실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현재 가정교회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분들 중에서도, 가정교회를 또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생각해서 실패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기존 교회에서의 구역은 교회 내의 하나의 조직이요, 또 하나의 프로그램일 뿐이지만, 가정교회는 그 자체가 local church이고, 그 가정교회가 모인 것이 휴스턴 서울 침례교회인데 말입니다.



다시 말해, 공동체성이 상실된 교회는 원론적으로 볼 때, 예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은 아닌 것 같습니다.



4. 공동체성이 회복된 ideal한 교회의 모습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세상에 ideal한 교회는 없는 것 같습니다. 신약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도 벌써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어떤 형태의 모습이 이상적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다는 말이지요. 교회의 바른 모습의 기준은 형태라기 보다는 spirit입니다.



첫째는, ‘영혼을 구원해서 제자를 만든다’는 생각을 가지고, 영혼 구원에 집중하여 삶을 통해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만들어 가겠다는 마음가짐입니다. 마태복음 28장의 Great commission이라고 할 수 있는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에서, 실제로 명령형은 ‘제자를 삼아라’뿐 입니다. 다시 말해, 영혼 구원해서 제자를 삼는다는 것이 교회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지요.



둘째는, ‘기쁨’에 대한 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 일이 기쁨이 되어야 하고, 교회에 가는 것이 기쁨이 되어야 한다는 거죠. 저희 교회라고 불만이 있는 사람들이 없겠습니까 만은, 많은 경우에 ‘이 교회에 있어서 참 행복합니다’라는 고백을 들을 수 있어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5. 그렇다면, 그런 spirit을 가진 교회가 되기 위해, 현재 애쓰시고 계신 일들이 있으시면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저희 교회가 지난 10년간 가정교회를 중심으로 지역의 영혼 구원을 위하여 일해왔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10년간은 세계선교를 향해가고, 그 다음 10년은 지역사회 봉사를 위해 가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듭니다. 느낌이라고 말씀 드린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늘 Vision과 leadership이라는 두 가지 문제에 대해 컴플렉스가 있어 왔습니다. 교회의 미래 계획이라던가, 비젼이 뭐냐고 물어오면, 별로 할 말이 없었고, 리더십에 관해서도 내게 특별한 리더십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었거든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목회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비전이 아니라, ‘순종’뿐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들은 음성에 순종하다 보니 가정 교회가 성공적으로 정착이 되었고, 가정 교회를 통하여 지역 사회 영혼 구원에 집중하다보니, 타지역의 구원받지 못한 영혼에도 신경이 쓰여서, 작년에는 12팀이  단기 선교를 다녀왔습니다. 사실 저희 교회에는 장기 기획위원회같은 모임도 없습니다.



6. 공동체를 이루어 가기 위해, 정말 힘든 문제 혹은 장애물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또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것인가요?



(1) 목회자의 의식구조가 문제입니다. 가정교회 세미나를 들으러 오시는 목사님들을 보면, 가정교회를 교회를 부흥시키는 테크닉정도로 생각하거나, 조직의 일부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대부분 가정교회 사역이 실패하게 됩니다. 가정교회를 도입해서 성공하시는 분들의 경우는 두 가지인데, 첫째는, ‘나도 예전부터 같은 생각을 가져왔는데, 어떻게 해야 할 지 잘 몰라서, 혹은 기회가 없어서 못했다’고 하시는 분들이고, 둘째는, ‘이것 밖에는 길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하고 하시는 분들입니다. 이렇게 의식 구조가, 기존 교회가 가진 틀을 깨야만 진정한 공동체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사실, 진정한 공동체를 향해 가다 보면, 목회자들 스스로가 포기해야 할 부분이 참 많거든요.



(2) 교회 지도자들의 저항입니다. 장로나 안수집사님 같은 분들이, 가정교회를 받아들이다 보면, 다스리는 위치에서 섬기는 자리로 옮겨가야 하는 것이, 받아들이기에 힘드신 경우가 꽤 있습니다.



(3) 성도들 스스로가 변화하는 것을 꺼려 하는 경우입니다. 가정교회를 하다 보면, 삶을 서로 오픈하고 나누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서 자신의 삶이 노출 되는 것을 꺼리는 경우가 있고요, 또 기존의 교회 전통이 편해서 변화하는 것을 원치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4) 기존의 프로그램을 그대로 두고, 가정교회 같은 공동체를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진행하려는 하는 경우입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공동체성은 본질의 문제이지, 프로그램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7. 성경적인 공동체를 가꾸어 가고픈, 유학생을 비롯한 젊은이들에게 꼭 당부하시고 싶은 말씀을 해 주시겠습니까?


소속된 교회에서 목사님만 이해해 주신다면, 청년부는 가정교회로 전환하기에 참 좋은 모임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시는데 주의하실 부분은, 청년들이 지적인 것을 추구하는 성향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지적인 성향때문에 모임이 자꾸만 지성화만 추구하게 되기 쉬운데, 이런 성향을 극복해서, 섬김의 공동체로 전환되어야 하고, 가르쳐서가 아니라 삶으로 보여줌으로써 제자를 만드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젊은이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듣는 것보다는 말하고 싶어하는 성향이 있고, 사고보다는 느낌 중심으로 살며, dogma보다는 관계성 중심으로 산다고 들 하는데, 이것이 나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 성향으로 인해서 젊은이들이 가정교회에 더 잘 맞을 수도 있다는 말이죠. 어른들은 젊은 세대가 commitment가 없다고들 생각하지만, 사실 어른들 기준의 그런 헌신의 모습이 없을 뿐, ‘이거다’싶으면 더 없는 commitment가 나오기 마련이죠. 기존 교회 내에 가정교회의 모임이 없다고 하더라도, 교회의 양해만 있다면, 청년부 내에서 그런 공동체를 시도해 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