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이규]역동적인 소그룹을 운영하는 4 가지 시스템과 영성

공동체라는 말은 라틴어의 communitas 또는 communis라는 단어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이는 두 가지의 뜻을 가지고 있다. 영어의 fellowship(친교)과 common(공통의)이라는 단어가 그것이다. 이것을 해석하면, ‘공동체는 함께(common) 친교(fellowship)를 나누는 모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함께 나누어 친교를 한다는 의미인가? 공동체라는 단어로 쓰인 이 라틴어들은 특별히 1. 소유(possession) 2. 즐김(enjoyment) 3. 참여(participation), 이 세 가지 의미와 함께 쓰이고 있다.
언어의 의미들을 연결해서 이야기해 보면, ‘공동체란 구성원들이 함께 소유하고, 함께 즐기며, 함께 한 목적을 향해 참여하는 모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말이 쉽지 그러한 공동체가 되도록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면, 주일 예배 후 공동체 식사를 뷔페식으로 할 때, 앞사람들이 뒷사람들을 생각하지 않고 많이 가져가 욕심을 내는 경우, 뒷사람들은 음식이 부족해 울상이 되기 쉽다. 이렇듯 예배를 은혜롭게 잘 드리고 나서 음식 때문에 마음이 상하기도 한다. 예배 후 사랑의 애찬을 나누고 친교를 하기 위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절제하지 못해서 생기는 어려움이다.
또 교회 행사에 있어서 선물의 분배와 처리의 경우를 보자. 찬양 경연대회이든, 윷놀이 대회이든, 때가 되면 여러 가지 행사가 교회에 있게 된다. 그러면 서로를 격려하는 의미에서 교회나 주최 부서가 자그마한 선물이라도 준비하게 된다. 행사는 은혜 가운데 잘 마무리되고 선물들도 골고루 잘 나누어 가진다. 그런데 그 후 남은 상품이나 선물에 대해 처리가 잘 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냥 남았으니 몇 개 더 가지고 가려는 사람, 혹은 한 개 더 받아 가족을 위해 챙기는 사람 등등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다보니 공동체 소유인 것을 알면서도, 그러한 사람들을 보면 못 가져가는 내가 아쉽고, 나도 몇 개 더 가져가고 싶고, 그리고 상대적으로 더 가져간 사람을 주책이라고 뒤에서 이야기하면서 험담을 하거나 미워하기도 한다.



또 어떤 경우, 교회 행사를 위해 전날에 미리 음식을 장만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음식을 챙겨서 자기 집으로 가져가는 사람의 예도 있다. 서로가 말은 잘 못하고 있지만, 서로의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경우이다.
소유하고 싶어하는 우리 죄의 속성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더 나아가, 이런 소유에 대한 인간의 연약성과 더불어, 물리치기 어려운 죄의 속성 중 하나는 공동체 내의 소외 문제이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나를 기분 좋게 해주는 상대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만나면 편안하거나,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거나, 아니면 우스운 이야기를 많이 해서 가지고 있던 스트레스가 풀리도록 하는 사람이나,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거나, 사람들 사이에서 인정받는 사람 등등과 함께 있기를 선호한다.
반면에 성격이 소극적이거나 차가워서, 옆에 있으면 할 말이 없어지는 사람, 자기가 잘났다고 혼자 이야기만 하는 사람, 그리고 만나기만 하면 불평을 해서 스트레스 쌓이게 하는 사람, 혹은 만나면 자신은 밥도 안사고, 커피조차도 안사면서 늘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뒤집어씌워 돈을 내게 하는 사람 등, 이기적인 사람이나 교만한 사람과 함께 있는 자리를 자연스럽게 피하게 된다.
그런 사람은 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신앙 공동체에서도 똑같이 행동한다. 그러다보니 신앙 공동체에서조차 사랑을 받지 못하고 늘 사람들의 입에 오르거나, 공동체에서 소외된다. 마음의 상처까지도 가지게 된다. 신앙 공동체 구성원도 역시 연약한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공동체에서 나타나는 사람들의 다양한 욕심, 소외의 문제들은 결국 그 공동체에 대한 의미, 이해, 가치를 무참하게 깨뜨려 놓는다. 차라리 이것이 신앙 공동체라면 참여 안하고 말겠다, 옮기고 말겠다 등의 상처를 불러일으키면서 개인의 마음 가운데 그렸던 신앙 공동체에 대한 의미와 가치들을 산산조각 낸다. 교회는 사랑의 신앙 공동체이기에 더욱 깊은 회의와 상처, 그리고 강한 반감이 사람들 가운데 남게 된다. ‘어떻게 교회가 그럴 수 있어?’, ‘그것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이야?’ 하며 실망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다시는 신앙의 공동체로 돌아오지 않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된다.

그런 면에서 신앙 공동체 리더의 역할은 더 없이 중요하다. 리더는 공동체에 속해 있는 구성원들로 하여금 공동체 안에 있는 모든 소유들이 골고루 잘 배분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바로 도우미(helper)인 것이다. 그리고 리더는 누구도 공동체에서 소외되지 않고 잘 참여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자(guider)다. 더 나아가 리더는 환경을 균형 있게 만들어 주어서 어느 한 쪽에도 편중됨이 없이 구성원들 모두가 함께 즐기도록 하는 다리(bridge)인 것이다. 물론 다양한 이해, 다양한 습관, 다양한 성격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체를 함께 소유하고, 즐기고, 참여시키는 일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쉽지 않다고 해서 리더가 이러한 면을 간과한다면, 그와 같은 작은 병균 바이러스들이 신앙 공동체 영성에 많은 병과 장애물들을 일으키게 된다. 심하면 그룹 영성이 침체(down)되며, 급기야는 공동체가 깨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인간의 죄의 속성으로 인해 생기는 이러한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소그룹에서 치유한다면, 구성원들은 더욱 영적으로 성숙하는 새로운 계기가 열려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리더에게 중요한 것은 ‘사람에 대한 민감성’이다. 세상 공동체에서 리더십의 목적이 어떠한 결과물(out-come)에 있다고 한다면, 믿음의 영적 공동체에서 리더십의 목적은 바로 ‘사람을 살리는 것’에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믿음의 영적 공동체인 소그룹을 인도하는 데는 사람에 민감해야 한다. 그리고 그 민감성은 바로 그룹의 역동적 운영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는 것이다.



따라서 리더는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죄의 속성을 치유하고, 그룹 구성원들에 대한 민감함을 통해, 그룹을 역동적(dynamic)으로 인도하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개발해야 한다. 그룹의 역동적 운영의 묘(skill)는 소그룹에 속해 있는 구성원 한 명 한 명과 그룹 전체의 영성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역동적인 소그룹을 인도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기본적인 시스템 4가지는?


첫째 시스템: 아이스 브레이킹 둘째 시스템: 그룹토의의 안정성과 비밀 보장 셋째 시스템: 균형있는 시간 운영 넷째 시스템: 책임성의 분담


좀 더 구체적으로 그 시스템을 살펴보자


첫째, 소그룹 운영의 기초 시스템은 아이스 브레이킹, 일명 ‘얼음 부수기’이다.


아이스 브레이킹은 소그룹 모임에 있어서 구성원들 개개인이 영적 경험의 자리에 나오도록 하는 역동적 연결고리(joint)로서 소그룹 운영에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인간은 ‘나’외의 다른 무엇을 접하였을 때 본능적으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안전장치가 정신적 차원과 심리적 차원, 그리고 육체적 차원에서 자동적으로 작동하게 되어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마음의 경계와 생각의 경계이다. 즉 마음과 생각에 친숙해 지거나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일단 모든 새로운 것에 마음과 생각 모두를 닫는다. 이러한 현상은 소그룹의 기존 구성원들조차도 마찬가지이다. 매주의 만남이 새롭다. 만일 2번만 모임에 빠졌다가 다시 참여해도 처음은 매우 어색함을 느낀다. 그러니 새로 참여하게 된 멤버는 더더욱 그렇지 않겠는가.



이 때 아이스 브레이킹은 마음과 생각을 꼭 닫게 한, 그 차가운 얼음들을 부순다. 자신의 마음을 바깥으로 열게 하고, 밖에서 주어지는 영향을 자신의 마음과 생각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inside out / outside in) 연결한다. 자신을 외부와 구분시켰던 마음의 경계선과 생각의 경계선을 조금씩 무너트리고 녹이게 한다. 수줍음, 낮 설음, 혹은 잘못된 인상의 선입관의 껍질을 조금씩 벗기도록 한다.
특별히 아이스 브레이킹의 강점 중 하나는 본인이 직접 참여하는 데 있다. 남들의 모습을 단지 제 3자의 입장에서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인격과 다른 사람의 인격이 구체적으로 만나는 자리를 창조해 낸다. 그럼으로써 서로를 포장하고 있는 외관적인 껍질들을 벗겨 낸다. 그 가운데 신앙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영적 분위기(spirituality)가 자연스럽게 서서히 나누어지고 전달되기 시작한다. 영적인 교류(spiritual communication: inside out/ outside in)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준비한 것은 리더이지만 그 일은 성령이 이루신다. 그런 면에서 아이스 브레이킹(ice breaking: 얼음 부수기)은 영적 대문 열기 (spiritual opening)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떠한 도구들이 영적 대문열기 (spiritual opening)라 할 수 있는, 아이스 브레이킹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소그룹 내에서의 간단한 아이스 브레이킹 5가지 예



1. 파워 런치 (Power Lunch)
이 용어는 직장에서 서로 잘 알지 못하는 사람과 친숙해지기 위해서는, ‘함께 점심을 먹는 것’이 가장 효과적임을 의미하는 용어다. 함께 먹는 것이 사람의 마음을 여는 얼음 부스기(ice breaking)에 효과적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 경우 먹는 것에는 식사뿐 아니라 간식 모두를 적용시킬 수 있다. 언젠가 어느 잡지에 바이어(buyer)를 잡는 방법으로 3 ‘ㅁ’ 의 원리를 제시했다. 만나서, 먹고, 말하는 것이었다. 아마 서로를 알고 관계성을 맺는 데는 먹는 것이 뭐니 뭐니 해도 큰 힘이라는 것에 대한 동일한 경험을 말하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소그룹에서도 마찬가지다. 소그룹 신앙 공동체에서 제공된 간식이나 식사에 대해 어느 누구도 음식점처럼 원하는 만큼 양껏 먹고 배를 두드리기 위해 모임에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도 쳐다보지 않고 계속 먹기만 하는 사람은 없다. 간소하지만, 제공된 다과나 식사 가운데에서 사람들은 인사하게 되고, 대화하게 되면서 서로를 알게 된다. 그리고 옆 사람과 친숙해지게 된다. 서먹한 환경에서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 있는 인간관계가 형성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가운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 서로를 알고 이해하는 영성이 흐르게 되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생각과 마음의 경계심이라는 벽이 녹아진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실 공간이 생기게 된다.

2. 잘못된 첫인상 맞추기
이 게임은 서로를 이해하는 게임이기도 하고, 서로의 이름을 기억하도록 돕는 게임 중 하나이다. 방법은 사각형 1/4 종이쪽지 위에 사람들이 자신을 처음 만났을 때 가졌던 잘못된 인상을 한 가지 적는 것이다(예: 무서움/ 혹은 차가움/ 새침이 등등). 물론 자신의 이름은 적지 않는다. 그리고는 쪽지를 두 번 접은 후 모두 모은다. 그 후 한 장씩 뽑아서 읽으라. 그리고는 그 대상이 누구인지 맞추라.



나는 이 사람인 것 같다. 이러 저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이야기 한다. 다수가 지목하는 대상이 나타나면 본인인지 당사자에게 물어보라. 만일 맞추었으면, 왜 사람들이 그렇게 잘못된 첫인상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당사자에게 잠깐 나누게 하라. 틀리면 다시 다른 사람을 찾으라. 물론 그 쪽지의 장본인은 다수가 지목해서 걸리기 전 까지는 초점을 흐트러트리기 위해 방해공작을 해야 한다. 이를테면 ‘내 생각에는 이러 저러한 이유 때문에 이 사람 같다.’고 다른 사람을 주목시키면서 말이다. 맞추면 다음 사람이 다른 쪽지 한 장을 뽑아 이와 같은 게임을 계속하면 된다. 이 때 준비할 것은 백지, 종이, 그리고 이름표 스티커이다. 이름 스티커가 준비되지 않았을 경우는 자기 이름을 백지에 써서 책상위에 세워 놓는 방법도 된다. 약 6-10명 정도의 그룹에서 하면 좋다. 만일 40-50명의 그룹에서 이 게임을 이용할 때는 6-10명씩 그룹별로 나누어서 하는 것도 좋다. 가능하면 한명을 찾는 데 1분-2분 정도 할애하면 좋다.

3. 드러나지 않은 자신의 장점 맞추기
이 게임도 앞에서 이야기한 ‘잘못된 첫인상 맞추기’ 게임과 동일한 방법으로 진행된다. 이번에는 자신의 잘못된 첫인상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대신 남이 알지 못하는 자신의 장점을 종이쪽지에 적어 그 대상을 찾아 가는 것이다. 언젠가 한 번은,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이 자신의 장점을 ‘애교’라고 적었다. 아무도 맞추지를 못했는데 그 분이 내가 얼마나 ‘애교’가 많은데 하면서 ‘애교의 진수를 보여줄 거야’해서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또 어떤 분은 찢어진 눈을 가지고 있는데 ‘눈이 예쁨’이라고 자기 숨은 장점을 썼다. 물론 아무도 맞추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이 결혼할 배우자 될 분이 ‘눈이 예쁘다’고 했다나!!! 물론 모두가 그 분이 기록한 그 장점을 비웃으면서 받아주며 웃음을 나누기도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구를 지목할 때 서로의 이름을 보면서 부르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이름을 기억하자는 의도였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 게임은 돌아가면서 한 사람이 한 쪽지를 뽑는 것이 아이스 브레이킹에 도움이 된다. 이것은 내가 이 공동체의 능동적인 참여자로 공동체의 한 지체임을 경험하게 하며 공동체에서 소외됨을 방지시켜준다. 준비물은 역시 펜, 종이, 그리고 이름표 스티커 이다. 약 6-10명 정도의 그룹에서 하면 좋다. 만일 10명이 넘는 공동체일 경우는 절반 정도만 해도 좋다. 시간은 한 명 당 1-2분 정도가 좋다.

4. 바이블 트위스트
이 게임은 짧은 이야기 속에 숨어있는 성경책 제목을 찾아내는 일종의 숨은 단어 찾기 게임이다. 마치 숨은 그림 찾듯이 숨은 단어를 찾아내는 게임이다. 이 게임을 응용해서 퍼즐 게임이나 단어 맞추기 게임 등으로 바꾸어도 무방하다. 이와 같이 제한된 시간 내의 맞추기 게임은 그룹별 활동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개인 차이가 많이 날 수 있기에 오히려 못하는 사람을 더 얼어붙게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공동으로 하면 서로가 공동체임을 느낄 수 있고 공동체와 매우 쉽게 가까워질 수 있게 된다.


5. 찬양
신앙 공동체 소그룹에 있어서 찬양은 그 공동체의 정체성(identity)을 발견하게 하는 강력한 도구이다. 찬양은 경건함과 은혜를 사모하는 모양으로 마음과 생각을 변화시키는 매우 강력한 도구이다. 성령이 찬양 가운데 임하시기 때문이다. 이 때 찬양은 많이 아는 곡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잘 모르는 곡은 전체 진행 중간에 배워도 된다. 그러나 아이스 브레이킹의 시간에 선곡된 곡들은 구성원들이 주로 잘 알고 있는 경배와 찬양이나 임재의 기원, 혹은 사랑의 신앙 고백 찬양이 좋다.



또 하나는 축복을 기원하는 찬양의 선곡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축복의 통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등의 축복송은 그들의 삶을 하나님 앞으로 세우는 좋은 곡들이다. 다른 하나로 몸동작이 크지는 않지만 함께 움직일 수 있는 곡들도 좋겠다. 이 경우에는 간단한 것이 좋다. 그리고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반드시 설명과 연습을 한 번 하면서 웃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면 율동을 잘 못해도 덜 쑥스러워 하고, 그 몸동작을 함께 할 수 있게 된다.

조심해야 할 경우는 다음의 6가지가 있다.


1. 회원 가운데 찬양을 잘 모르는 새로 참여한 사람도 있다는 생각을 잊지 않아야 한다.
2. 쳐지지 않는 곡으로 선정하라. 쳐지는 곡은 분위기 전체를 쳐지게 한다.
3. 찬양 리더 혼자의 감정에 빠지지 마라.
4. 리더 혼자 눈을 감지 마라. 함께 얼굴을 처다 보면서 환하게 웃으며 찬양하는 것이 좋다. 찬양의 교감을 나누는 것이다.
5. 상황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가능하면 한 곡을 2번 이상 하지 마라. 리더의 마음을 따라가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음을 기억하라.
6. 아이스 브레이킹 시간의 찬양 선곡과 말씀공부 후 찬양 선곡을 다르게 하라. 찬양 선곡에 있어 리더의 지혜로운 선택이 필요하다.



그러면 어떻게 아이스 브레이킹 (Ice Breaking) 시간을 운영할까?

7가지의 운영 전략이 있다.


1. 뭐니 뭐니해도 아이스 브레이킹은 재미(fun)가 있어야 한다. 심각한 것은 오히려 마음을 무겁고, 닫게 만들 뿐 아니라 그룹 전체의 운영에 지루함과 분위기 침체를 가져오게 한다.
2. 만일 2부 프로그램으로 운영되지 않고 단지 모임의 도입 차원이나 전체 진행의 활력소 차원에서 아이스 브레이킹(ice breaking) 프로그램이 계획되어질 때는 20분 안에 운영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너무 길어지면 전체 운영의 역동성을 잃게 되거나 늦어져 중요한 본론 시간을 충분하게 활용하지 못하게 된다.
3. 아이스 브레이킹은 매 주 운영되도록 한다.
4. 모임이 시작할 때 첫 시간으로 꼭 넣지 않아도 무방하다. 융통성 있게 운영하라.
5. 경험해 본 아이스 브레이킹도 다시 한 번 미리 연습해 보고 준비해서 운영하라.
6. 반드시 처음 시도하는 아이스 브레이킹은 적어도 1시간 정도의 연구 준비 후(준비는 운영되는 시간의 3배) 20분을 운영하도록 하라.
7. 매 주 아이스 브레이킹의 패턴을 바꾸어 주라.



둘째, 소그룹 운영의 기초 시스템은 그룹토의의 안전성과 비밀 보장이다.

소그룹 활동에 있어서 가장 큰 장점은 설교식이 아닌 토론식이라는 것과 자신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나눔으로 인한 영적 자기발견이다. 이것은 주일 예배와 같은 공적인 큰 모임에서 얻을 수 없는 개인 믿음의 성장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주일 예배 시간에 믿음의 고민이 있어도 손을 들고 질문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소그룹은 설교와 같은 일방적 전달식이 아니라 토론을 통해 자신의 영적 문제에 대한, 혹은 믿음의 현실 적용에 관한 물음들을 해결할 수 있는 자리로 영적 자기발견을 하는 자리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룹토의의 역동성은 그룹의 역동성과 직결된다.
여기서 그룹토의는 무엇인가? 이해되지 않는 영적인 의문, 예를 들면: 신앙과 삶과의 조화의 문제, 신앙과 과학의 문제, 그리스도인의 이성교제 문제, 술, 담배 문제, 제사 및 제사 음식의 문제, 동거의 문제, 교리의 문제, 성경 해석의 문제, 이혼의 문제, 사업 부도의 문제, 실직의 문제, 질병의 문제 등등 수없이 많이 우리 삶의 한 가운데서 제기되어지는 질문들이다.
소그룹은 바로 신앙의 구체적 삶의 적용 가운데 제기되는, 이러한 제한 없는 질문들에 대해 그룹 구성원들이 함께 고민하며 함께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공동체인 것이다. 그래서 소그룹 안에서 함께 즐거워하고, 마음 아파하기도 하며, 울기도 하고, 때로는 물질적으로 서로를 돕기로 하며, 함께 기도한다. 더 나아가 각 개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응답을 서로 나누면서 하나님의 영적 의미를 찾고 믿음 위에 서로를 바로 서게 하는 공동체인 것이다. 그렇기에 살아있는 소그룹의 나눔은, 역동적인 소그룹을 세워 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것이다. 이것이 소그룹이 존재하는 근본적 이유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역으로 본다면, 구성원들의 삶이 소그룹 안에서 구체적으로 나누어지지 못한다면, 그것은 역동적인 소그룹 운영에 가장 큰 장애물이 된다는 사실이다. 한 번 확인해 보라. 소그룹에서 나누어지는 토론의 내용이, 개인의 구체적인 삶에서 나오고 있는가? 나누어지는 경험 자체가 마치 물의 수면 위를 겉돌고 있지는 않은가? 혹은 그저 추상적인 이야기 수준에 머물러 토론되어지고 끝나지는 않는가? 내 삶의 구체적 문제를 이야기하기가 꺼려지지 않는가? 만약 그러한 느낌을 가지고 있다면, 이런 경우 소그룹 모임은 점점 영적으로 침체기에 들어가고, 말씀의 역동성과 살아계심을 잃게 된다. 그저 성경 지식의 전달에 그치고 말면서, 결국 소그룹 모임은 역동성을 잃게 된다.
주로 소그룹에서 이루어지는 성경공부 운영을 보면, 주제에 관한 문제 제기와 함께, 성경의 내용에 관해 먼저 관찰과 해석 연구를 한다. 그 후 함께 관찰, 해석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내 삶의 적용을 나누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 나눔 시간 후 함께 기도하기를 원하는 제목을 나누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관찰, 해석된 성경 말씀의 실제적 적용이 잘 안되고, 이야기를 해도 지극히 객관적인 전혀 자신의 삶에 적용이 안 되거나 피상적인, 혹은 남의 이야기들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기도 제목을 나누는 시간도 마찬가지이다. 기도제목을 나누어 함께 기도하자고 하면 단지 ” 저희 가정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 “건강한 믿음을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저의 학업/진로/직장을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등등 자신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은 감추어져 있고 그저 할 수 없어 혹은 자신의 속은 드러내지 않은 표면적인 애매모호한 기도제목만 나누고 있다.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그들이 함께 나누는 기도 제목은 주로 이야기를 해도 소문나면 창피하지 않을 정도까지이다. 혹은 자신에 대해 잘못된 이해가 생기지 않도록 자신의 이미지를 잘 관리하면서 겉도는 이야기까지만 이다.



왜 그런가?

첫째는, 그것은 우리 그룹이 서로의 다름(difference)을 잘 인정해주지 못한다는 느낌 때문이다. 내가 무엇인가 교회에 대해, 믿음에 대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이해할 수 없어 질문을 하거나 이야기를 하면, 마치 믿음이 적다는 듯이 쳐다보는 것 같은 분위기나 눈초리, 혹은 불평분자로 쳐다볼 수 있다는 인상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무슨 의문이나 다른 의견을 이야기하기가 꺼려지는 것이다. 엉뚱하면 엉뚱한 데로,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들의 삶 그대로를 받아주고 이해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분위기인 것이다. 늘 정답만 이야기해야 하는 분위기인 것이다. 누군가와 다른 의견을 이야기하면 인격 대 인격이 부딪혀 깨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이다. 다른 의견(different opinion)으로 받아지는 분위기가 아니라 오히려 서로가 잘못했다는(wrong) 의도로 전달되는 분위기인 것이다.
둘째는, 내가 견딜 수 없는 고민이나, 문제, 혹은 아픈 현실의 이야기를 했을 때, 우리 그룹 외의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다는 불신감, 즉 비밀 보장이 안 된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그러한 불안의 원인 중 하나는, 실제로 나 자신도 지금까지 남이 나누었던 기도 제목을 들었을 때, 내가 몰랐던 정보를 하나 더 알게 되어 그 사람을 마음으로 다르게 생각하거나 판단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일 수 있다. 혹은 그의 비밀을 지켜주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의 이야기를 전해왔던 나의 경험이, 결국 나의 어떤 고민도 다른 구성원들에게 이야기하지 않도록 막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실제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기를 원하는 폭발할 지경에 처한 문제가 내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기도의 도움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정작 기도 공동체인 소그룹에서 이야기 하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소그룹의 분위기는 구성원들로 하여금 신앙 공동체 소그룹에 와도 늘 겉돌게 만든다. 문제 있으면 소그룹에 기도하기위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혼자 있는 곳으로만 자꾸 피하려 한다. 그러다 보니 소그룹 신앙 공동체는 편안하거나 좋을 때만 나오고 바쁘거나 문제가 있을 때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대상으로 전락해 버린다.



어떤가? 우리의 소그룹은? 무슨 이야기를 해도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주고 받아주는 안전한 지대인가? 서로의 상처와 고통, 아픔을 이야기할 수 있고, 그 아픔을 비밀로 지켜주고 구체적으로 상처받은 삶, 고통 가운데 있는 삶을 인도해주실 주님께 함께 기도하는 공동체인가? 바로 우리의 소그룹이 진정 서로의 고민과 아픔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되고 함께 기도하는 공동체가 되었을 때, 비로소 그룹 모임에 역동성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서로의 삶을 이해하게 되며 서로 깊이 사랑하게 된다. 또한 서로 함께 기도하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인도하시고 치유하시는 주님을 함께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신앙 공동체에 나오는 주된 목적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에 있다. 그렇기에 아무리 소그룹 모임이 재미있어도, 식사를 잘 준비해도 하나님을 경험하는 알맹이 없는 모임은 공허함을 가져다주게 되어 있다. 신앙 공동체의 핵(core value)은 바로 영성에 있기 때문이다. 영적인 은혜가 구체적으로 공동체 안에서 경험되어질 때, 그 그룹은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역동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소그룹에서 경험되어질 수 있는가? 우리들이 함께 나누고 기도한 그 구체적 문제들을 만지시고(touch) 인도하시며(guide), 해결하시는(solve) 우리 주님의 역사하심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인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영적 은혜의 체험, 바로 소그룹에서 나누어지는 토론의 안정성(safety)과 비밀 보장(confidentiality)을 통해서인 것이다.



어떻게 그룹 내에서 안정성과 비밀 보장을 실행될 수 있을까?

1. 해마다 연초(new year)에 그룹이 시작할 때, 그룹 운영방안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우리 소그룹이 소중히 여기는 중요한 약속(core value)들을 기록하여 나누어 주라. 그리고 그 약속들 안에 우리 그룹은 서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사랑하며, 서로의 대화 내용을 비밀로 지켜주는 모습을 소중히 여긴다고 쓰라. 그리고 이것을 말하여 공동체 구성원들로 하여금 알게 하라.
2. 일 년에 4번은 우리 그룹이 소중히 여기는 약속들(core values)이 어떻게 우리 소그룹 안에서 실천되고 있는지 나누라. 리더에게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계획과 실행뿐 아니라 확인이다. 확인을 통하여 그룹 가치에 대한 구성원들의 실행 능력이 80% -90%까지 상승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분기별로 소그룹 안에서 우리 그룹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들에 대해 다시 한 번씩 이루어지는 확인과 재교육은 매우 중요하다.
3. 처음 그룹에 참여하는 회원이 있을 경우, 처음 그룹 모임에 나오기 시작한 후 4주 안에 우리들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 즉 안전성과 비밀 보장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라. 제일 처음에 왔을 경우보다는 2-3주 후에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처음에는 마치 입회 계약서에 동의해야만 참여할 수 있는 것 같은, 의도하지 않은 부정적 느낌이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4. 분기별로 이행되는 그룹 약속(group core value)의 실천을 위한 기도의 시간을 가지라.
5. 안전성과 비밀 보장의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리더는 무엇보다도 민감하게 반응하라. 지혜롭게 이 문제를 처리하라. 필요에 따라서는 개인을 만나는 경우도 필요하다.



셋째, 소그룹 운영의 기초 시스템은 균형있는 시간운영이다.

균형있는 시간의 운영은 구성원들에 대한 약속의 이행이다. 더 실제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구성원들에 대한 세밀한 리더의 배려이다. 구성원들이 소그룹 모임에 참여할 때의 약속 조건은, 기본적으로 일정한 어느 시간 스케줄이다. 그 소그룹의 중요성을 떠나, 일단 소그룹의 한 구성원으로 참여하기를 결정할 때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평상시 시간 계획에서, 시간을 구분하여, 그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시간 약속의 이행은 그 시간을 헌신한 사람과의 약속의 지킴이요, 하나의 예절이다. 더 나아가, 시간의 지킴은 약속의 이행 차원을 넘어, 참여한 구성원들에 대한 세밀한 돌봄이요, 배려이다. 오늘날 현대인의 삶이 얼마나 바쁜지 모른다. 특별한 것을 하는 것이 아니어도 시간에 쫓겨 산다. 시간 스케줄이 빡빡하다. 시간을 메모해 놓지 않으면 잊기 십상일 정도다. 이렇게 시간 계획이 빡빡하여 여유가 없다보니, 약속의 지킴이 오늘날은 그 사람의 신용이 된다. 그러기에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때는, 자연스럽게 사람의 신용도 평가 절하로 이어지는 것이다. 결국 소그룹에서의 시간 지킴은, 그 구성원에 대한 신용을 지켜주고 보여주는 세밀한 배려인 것이다.
이렇게 현대인이 시간에 좆기다 보니, 모임 시간이 예정보다 늦어지게 되면, 사람들의 마음이 불안해진다. 모임 이후에 다른 계획이나 약속이 있는 사람은 더더욱 마음이 조급해 진다. 하지만 그룹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되어가고 있는 시점에, 시간이 되었다고 조금 일찍 일어나 나가는 것은 매우 미안한 일이고 편안하지 않다. 그러다보니 마음은 급하고, 모임은 끝나지 않고, 다음 시간 계획은 다가오고 안절부절 한다.



소그룹 모임이 조금 늦게까지 연장될 때, (이 경우 결과론적으로 본다면) 뒷부분의 시간은 영양가 있는 그룹 참여가 실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의 조바심을 가진 회원은 다른 생각(noise)으로 감염되게 된다. 그러다가 어느 약속에 늦어 자동차를 빠르게 몰다가 단속에 걸리거나, 약속시간이 늦어 신용이나 이미지에 문제가 생기게 되면, 매우 불쾌한 기분으로 그날의 소그룹 모임을 기억하게 된다. 그리고는 소그룹 모임 이후에 중요한 약속이 있을 경우, 그 날은 아예 그룹 모임의 참석을 안 하게 된다. 한 번 두 번 빠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모임의 중요성을 잃어가게 된다. 결국, 리더의 소그룹 운영에 있어서 시간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간간의 일들이 장기적으로 볼 때 구성원들로 하여금 그 소그룹의 모임을 중요시여기지 않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게 한다.

그러면 소그룹 모임이 늦게 끝나게 되는 원인이 어디 있는가?


첫째는 시작이 늦어지기 때문이다. 특별히 시작이 늦어지는 이유 중 하나는 구성원들이 많이 모일 때까지 리더가 기다리는 경우로 인한 결과다. 한 두 사람이 와도 약속된 시간이 되면 시작을 해야 한다. 그런데 막상 몇 사람이 모이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하려니 무엇인가 허전하여 리더가 시작을 하지 못하게 된다. 특히, 다과나 식사를 먼저하고 모임을 시작하려고 계획한 날, 그래서 누군가 특별히 다과나 음식을 준비한 경우, 회원들이 시간에 맞추어 오지 않을 때, 리더는 준비한 당사자에게 더더욱 미안함을 가지게 된다. 몇 명 참여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준비한 다과나 음식을 먼저 먹기 어색해 한다. 조금이라도 몇 명이 더 온 다음에 준비한 음식을 나누려 한다. 그러다 보니 시작 시간도 자연스럽게 늦어지게 된다.



둘째는 시간 배분의 실패 때문이다. 아이스 브레이킹과 성경공부 그리고 나눔의 시간, 혹은 2부까지의 시간 배분에 실패한 경우이다. 아이스 브레이킹이 늦어져 정작 성경 공부나 혹은 그날 계획했던 내용들이 늦어지는 경우이다. 혹은 성경공부의 내용연구가 길어져, 나눔의 시간이 짧아지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나눔의 시간에 나누는 대화의 길이를 조절하지 못해서 시간이 뒤로 밀리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여러 원인들이 소그룹 모임이 예정 되었던 시간에 끝나는 것을 어렵게 한다.
셋째는 리더의 집착 때문이다. 소그룹이 늦게 끝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리더의 융통성 없는 시간운영 때문이다. 소그룹 모임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늦어졌을 경우는 경우에 따라 줄이거나 생략할 수 있는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바로 핵심적인 순서로 넘어갈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예배와 달리 소그룹이 가지고 있는 장점 중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직된 리더는 자신이 그날 준비한 모든 것을 하려한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늦어져도 할 수 없이 그대로 끝까지 밀고 나간다.
이렇게 스몰 그룹의 시간이 지켜지지 않게 됨은 자연스럽게 구성원들로 하여금 그룹의 중요성을 상실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무엇보다도 일찍 온 사람들이 허탈하다. 그리고 심지어 일찍 온 사람들은 늦게 오는 사람들을 기다리면서 그들의 시간 지키지 않음으로 인해 늦어지는 것에 화까지도 내게 된다. 그리고 이후에는 어차피 늦게 오는 구성원들로 인해 정시에 시작하지 않을 것을 기대하면서 이후에는 자신도 일찍 오지 않는다. 그러면서 그 소그룹에 대한 중요성도 소그룹의 부정확한 시간의 운영과 더불어 상실되게 된다. 그 만큼 그 모임의 가치가 시간의 우선순위에서 떨어지게 된다.



리더의 융통성 없는 인도로 인해 모임이 늦게 끝나는 경우, 리더는 그 자신이 준비한 모든 것을 진행했기 때문에 그 순간에는 그날 모임의 목적을 모두 달성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장기적인 차원으로 볼 때, 이것은 구성원들의 참여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소그룹 모임이 끝난 후 해야 할 일이 있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과의 약속이 있는 경우, 결국 그 날은 쉽게 소그룹 모임을 포기하게 된다. 모임이 언제 끝날지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소그룹 모임에서의 시간의 지혜로운 운영은 역동적 소그룹을 만드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러면 어떻게 시간을 지혜롭게 운영할 것인가?


역동적 소그룹 운영을 위한 시간의 지혜로운 운영 9가지 전략


1. 정시에 시작하라.
비록 한 사람도 안 왔어도 리더만이라도 기도하면서 그 시간을 지켜 시작하라.
2. 시간 운영 스케줄을 기본적으로 확립해 놓으라. 그리고 구성원들로 하여금 기본적인 틀을 알게 하라. 그럼으로 그 시간 계획에 맞추어서 소그룹 운영이 되도록 체계화 하라.
3. 리더는 그 날 모임의 핵심 목적과 이를 위한 모든 활동들의 흐름을 3분 안에 요약할 수 있도록 정리, 이야기 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
4. 그룹 내에 시간을 책임져주는 운영위원을 두라 (time keeper) 그래서 시간이 되어갈 때에 미리 15분 전, 5분 전에 알려줄 수 있도록 하라.
5. 소그룹 모임의 시간은 2시간 정도를 추천한다. 너무 짧아도 충분히 나누어지지 않고, 너무 길면 모임의 핵심에서 주변으로 흐를 수 있게 된다.
6. 성경공부 시간에서 공부와 나눔의 시간을 50 대 50의 비율로 운영하라. 만일 성경 공부에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경우는 성경 말씀이 지식차원에서 멈출 수 있는 경우가 많다. 말씀은 실제로 나눔을 통하여서 내재화 된다.



7. 리더는 주어진 모든 내용을 끝내려 준비된 내용에 집착하지 마라.
8. 상황에 따라 앞이 길어졌을 경우 바로 그 날 모임의 핵심 내용으로 들어가라. 모임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준비된 모든 것을 다 진행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라.
9. 약속된 시간에 끝나라.

넷째, 소그룹 운영의 기초 시스템은 책임성의 분담이다.


현대의 시대를 감성의 시대라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한다. 왜 그런가? 그 이유 중 하나는 이전 시대와는 다르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개인의 경험을 매우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대인의 경향은 교회 공동체에서도 똑같이 나타나고 있다. 구성원 개개인들은 공동체 내에서 자신의 가치를 경험하기를 원한다. 남들이 인도하는 것에 이끌리는 소극적이거나 수동적인 모습을 더 이상 원치 않는다. 오히려 내가 주체자가 되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고 자신의 소중한 그 가치를 공동체에 공헌하길 원한다. 공동체에서 쓰임 받고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것을 경험하기 원한다. 그러기에 이러한 현대인의 경향들은 많은 소그룹 공동체들이 영적 은사에 따른 소그룹 운영 방법을 도입해 운영하고 있는 점에서도 잘 나타나게 된다.
결국 소그룹에서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역할을 나눔으로써, 소그룹 운영은 자발적인 참여를 통한 역동적인 소그룹 운영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책임성을 분담할 것인가? 그 8가지 전략은 다음과 같다.

1. 은사에 맞게 책임성을 나누라.
이를 위해 리더는 구성원의 영적 은사가 무엇인지 발견하라. 그리고 그에게 적절한 사역(ministry)을 찾아 함께 섬기도록 도와주라.
2. 반드시 개인의 동의를 구하라. 일방적으로 맡기지 마라.
3. 개인이 사양 시 그 사역에 대한 중요성과 가치를 알게 하라.
4. 처음에는 약 10%정도의 가벼운 책임성을 분담하라.
5. 그의 섬김 과정 가운데 임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나누고 그의 사역의 소중함을 격려하라.
6. 사역의 열매를 인정하고 기쁘게 공동체와 나누라.
7. 10%의 책임성을 잘 감당할 경우, 조금씩 그 책임성의 범위를 30% , 50%, 80% 등으로 늘려가라.
8.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서 집중 양육 교육 체계를 세워 장기적인 리더로 키우라


소그룹 활동에 있어서 기본적인 구성요소인, 아이스 브레이킹, 그룹토의의 안정성과 비밀보장, 균형있는 시간 운영, 책임성의 분담 이 4가지 시스템은 소그룹을 역동적으로 운영하는데 있어 대단히 중요한 요소이다. 이 시스템들은 인간의 죄의 속성을 치유하고, 구성원들에 대한 민감함을 통해 그룹을 역동적(dynamic)으로 인도하는 그룹 전체의 영성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4가지 기본요소 시스템은 그룹 운영의 외형적 측면이라 할 수 있는 회원들에게 연락하기, 모임 사회보기, 기도하기, 성경 공부하기, 헌금하기, 그리고 공동 봉사 프로그램 계획짜기, 광고하기 등 소그룹 모임의 외적 운영순서에 가리워 리더의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소홀히 하기가 쉽다.



하지만 소그룹 운영의 이러한 외형적 뼈대 측면을 보다 원활하게 연결하고 기름지게 연결하는 물렁뼈(joint) 역할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4가지 기초 시스템 바로 이들인 것이다. 결국 리더가 이 소그룹 운영의 4가지 기초 시스템 부분을 어떻게 잘 다루는 가에 따라서 역동적인 소그룹 운영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시훈] 찬양의 의미

이코스타 2004년 5월호

바이올린 경연대회를 하루 앞둔 딸아이가 열심히 연습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기특한 마음에 음료수를 들고 방에 들어가니 딸아이는 찬송가를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딸아이가 고등부 찬양팀에 가입한 이후로 우리 집에는 늘 그 애가 연주하는 찬양이 흐르고 있어서 무척 감사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피아노나 바이올린 선율에 노래를 따라 부르다 보면 긴장했거나 예민했던 신경이 부드러워지고 마음이 따듯해지는 경험을 자주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 날은 바로 대회 전날이라서 저는 어느 부모나 그렇듯이 잔소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대회 출전곡을 더 열심히 연습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지적을 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딸아이는 주일날 연주할 찬양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펼쳤습니다.


저는 그날 딸아이와 모처럼 긴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우리가 흔히 범하는 오류와 편협한 사고에 대하여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상을 수여하는 시상식에서 수상 소감을 말할 때 많은 크리스쳔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표현을 합니다. 자신이 이룩한 성과라고 자만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에 대한 감사로 받아들이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우리가 자랑스러운 무언가를 이루었을 때, 좋은 것, 귀한 것을 구했을 때, 남들 보다 앞서게 되었을 때 그 모든 소중함과 기쁨을 하나님께 돌린다는 귀한 의미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나 가끔 저는 선뜻 동감할 수 없는,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듯한 느낌에 빠지곤 합니다. 과연 우리가 빛나는 자리에서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불쑥 밀려오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재능도 없고 그다지 뛰어난 점도 없어서 남의 주목을 받기는커녕 어느 자리에서나, 있는지 없는지 구별되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 모든 것이 평균적인 기준에 못 미쳐서 열등감을 느끼거나 소외 당하는 사람들, 병들거나 장애를 가진 사람들, 가난과 무지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일이 없는 것일까요? 세상에서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어둠의 존재들인 걸까요? 하나님의 전존재가 영광 그 자체임이 확실하다면, 아름답고 뛰어난 존재만이 그 영광의 한 부분을 반사하고 있는 걸까요?

주변의 모든 부모님들이나 제 자신을 살펴보면, 아이들이 좋은 성적을 받아 오거나 무언가 재능을 발휘해서 상을 받거나 남들에게 칭찬 받을 때 기쁨과 보람을 느낍니다. 자랑스러움과 기대감으로 벅차기도 하지요. 그러나 제 경우 가장 행복하고 오래가는 기쁨은 아이들의 사랑을 확신하고 교감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비록 아이가 조금 부족할지라도, 말썽을 부릴지라도, 남들에게 칭찬 받지 못할지라도 자식을 미워하거나 부끄러워하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아프거나 장애가 있어서 생활을 힘들게 할지라도 다만 같은 공기를 마시며 함께 있다는 것 만으로도 감사하고 그 존재가 귀한 것이 모든 부모의 사랑일 것입니다. 자식 앞에서 모든 부모는 어떤 어려움도 극복하는 강함과 한없이 양보하고 용서하는 약함을 동시에 보여 줍니다. 그 모든 힘은 ‘나의 피와 살을 나눈 나의 존재의 일부!’에 대한 끝없는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할 때,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께 완전히 의존할 때 더욱 깊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바로 그 순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하나 자랑할 것도 칭찬받을 것도 없는 존재이지만, 그 얼굴을 바라볼 때 내게 반사되는 빛이야말로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지금 있는 이대로의 모습, 내 삶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의 오묘함과 살아가는 일들의 질서와 모든 관계와 모든 느낌들의 총체적인 주권이 내게도 있다는 것, 하나님의 형상과 속성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느낄 때, 어느 한 순간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의 찬양은 하나님의 공평하신 사랑에 대한 감사와 살아있음에 대한 기쁨, 그 영광을 나누는 감격의 표현인 것입니다. 어떤 형태로든 주어진 상황과 시간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값진 선물이기에 어느 한 순간도 헛되이 보내려하지 않고, 매 순간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주어진 순간을 진심으로 즐기고 충만하려는 것이 은혜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살아있음의 모든 행위와 느낌들이 우리의 찬양이고, 모든 순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딸아이와 이야기하면서 찬송가를 연주하는 것 만이 찬양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곡을 연주하던, 그 연주 실력의 깊이와 상관없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연주는 모두 찬양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크고 아름다운 나무에 활짝 핀 꽃들 만이 아니라 발에 밟히는 잡초들도 바람이 불면 소리를 내며 자기 몫의 찬양을 올려 드립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에게 주어진 길에 최선을 다하는 것을 기뻐하시지만 그 성과의 크고 작음을 견주어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 아니라 무조건의 사랑을 주시는 신실하신 분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는 목소리에 영광의 빛을 비추어 주시는 공평하심과 자비하심을 찬양합니다.

[오창희] 남의 잘못을 지적하고 싶다면?

[오창희] 남의 잘못을 지적하고 싶다면?

이코스타 2004년 5월호


사회이론 가운데는 유기적 조화를 중시하는 이론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대립과 투쟁을 중시하는 이론이 있다.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이 전자의 전형적인 예라면, 마르크스의 계급투쟁론이 후자의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조화는 사회적 안정과 효율성을 가져다 주는 장점이 있지만, 때로는 사회의 문제가 있어도 그냥 덮어주게 되어 발전의 가능성이 약해진다. 반대로 대립과 투쟁은 사회의 문제를 인식하고 그것을 개혁하는데는 강점이 있지만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서로를 불신하게 만든다. 이것은 개인간에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과의 인화성과 관계성을 중시하면 그의 잘못에 대해서도 그냥 덮어두고 지나치기 쉽다. 반대로 어떤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하다 보면 그의 문제를 고치게 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와의 관계는 나빠지기 쉽다. 혹은 심한 경우에는 문제를 고치기는커녕 분쟁과 감정다툼만을 일으켜 상태가 더 악화되는 수도 있다. 이러한 딜레마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관계를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어떤 사람이나 교회의 잘못을 지적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덕을 세우는 비판이 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 성경은 어떤 가르침을 주고 있는가?


일반적으로 우리는 어떠한 잘못을 지적할 때 그 내용만 고려하기 쉽다. 나는 진리를 선포했으니 당신은 알아서 들으라는 식이다. 그러나 성경적인 관점에서, 어떤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려는 이유는 그 사람의 잘못에 대한 정확한 지적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잘못을 고치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서는 그 내용의 잘잘못 이외에도 몇가지 다른 요소들을 동시에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누가(who), 언제(when), 어디서(where), 무엇(what)을, 어떻게(how), 왜(why) 지적하느냐 하는 점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동일한 내용도 이러한 요소들에 따라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1. 어떤 잘못을 지적할 때 ‘누가’ 그것을 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영적으로 권위가 있고 그 삶이 성경적으로 인정되는 사람이 그러한 잘못을 지적하는 것과 그 자신의 삶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이 남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그것을 받아 들이는 입장에서 보면 엄청난 차이가 있다. 간혹 목사님들 가운데는 교회의 잘못에 대한 지적에 대해 마음을 닫아 버리는 분들이 있는데(물론 이러한 태도가 바람직하지 않지만), 그 이유 가운데는 그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들의 상태를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경우가 있다. 교회 내에서 별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교회에 별로 기여하는 바도 없는 사람들이 뒤에서 교회가 하고자 하는 방향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은 그 분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 비판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 비판이 얄밉게 보일 것이다.


또 간혹 교회가 썩었다고 떠드는 사람가운데는 그 자신이 바로 교회를 썩게 한 장본인인 경우도 있다. 이런 사람들이 남의 잘못을 지적한답시고 뭐라고 떠들 때 주님이나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5)


그러므로 단순한 선포를 위한 비판이 아니라 진정으로 어떤 사람이나 교회의 잘못을 고치고자 하는 사람은 그것을 지적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의 잘못된 점을 고칠 필요가 있다. 자신의 영적 자질 향상은 물론이고 교회를 위해 먼저 봉사와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런 연후에 사랑 어린 지적과 조언을 할 때 그들의 지적은 더 의미있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2. 덕을 세우는 지적이 되기 위해서 고려해야 할 또 다른 요소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 그 잘못을 지적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동일한 내용도 언제 그것을 말하느냐에 따라 분명 그 결과가 다르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상대방이 한창 화가 나 있다거나 다른 문제로 한창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때는 아무리 그 내용이 옳고 진실한 마음으로 말했더라도 그 지적은 좋은 결과를 얻기가 힘들 것이다. 오히려 그 좋은 충고가 역효과만 낳게 될 수도 있다.


예수님도 한창 흥분된 마음으로 간음한 여자를 끌고 와 ‘이 여자를 돌로 치리이까’ 하고 물어 온 군중들에 대해 한동안 아무런 대답없이 땅바닥에 글만 쓰셨다. 아마도 그 상황에서 말한 대답은 그들에게 아무런 효과가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흥분이 다소 가라앉았을 때, 주님은 말씀하셨고, 그 말씀은 큰 효과를 나타내었다. 그러므로 어떤 잘못을 지적하고자 할 때는 언제 그 말을 해야 할 것인가를 잘 분별해야 한다. 주식을 사고 팔 때에도 타이밍이 중요하다 하지 않는가!


3. 어떤 ‘장소’에서 그 잘못을 지적할 것인가 하는 점도 때로 대단히 중요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개인적 잘못을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비판한다면, 그것은 결코 지혜로운 행동이라 할 수 없다. 반대로 공동체의 문제점을 공동체 내에서는 지적하지 않다가 다른 모임에 가서 수근수근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또 남편이나 아내의 잘못을 자녀들이 보는 앞에서 크게 꾸짖는 것도 남편이나 아내의 권위, 그리고 자녀의 교육을 위해서는 결코 바람직한 일이라 할 수 없다.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아니면 개인적으로 조용히 만나 말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것은 그 문제의 성격과 상황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갈 2장 11절에 따르면, 바울은 대사도인 베드로가 외식하는 것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책망하였다. 이것은 베드로의 외식으로 인해 이방인 기독교인들이 심한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이들을 위해 공개적으로 행해질 필요가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는 개인적인 문제를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책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다. 특히 부부간의 잘못에 대해서는 밤에 잠자리에 들어 부드럽게 대화를 나누는 중에 서로간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이의 시정을 구한다면 가장 효과가 크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므로 그 시간과 장소를 잘 선택하는 것도 덕을 세우는 지적이 되기 위해서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들이다.


4. ‘무엇’을 지적할 것인가 하는 점도 신중하게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선 그 지적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올바른 것인지를 여러 가지로 객관적으로 검증해 보아야 한다. 사람마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 어떤 일에 대한 평가나 해석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공적인 문제제기를 할 때에는 반드시 여러 사람들의 객관적 검증이 필요하다. 자칫하면 한쪽의 관점만을 고수한다든가 혹은 소수의견에 의한 마녀사냥을 하게 되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또 어떤 것이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을 때는 그 경중과 또 당시 상황을 다 고려하여 종합적으로 판단할 필요가 있다. 그 부정적인 측면이 그리 심각하지 않은 경우에도 그것 때문에 전체를 비판한다면 어떤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수가 있다. 또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발견될 경우에는 지엽적인 것은 버려두고 가장 본질적인 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이것저것 다 건드리다 보면 가장 중요한 것이 희석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5. 어떤 잘못의 지적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도 반드시 고려해야 할 요소이다. 말로 할 것인가 아니면 글로 할 것인가? 언론매체를 동원해 공개적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교계 내에서만 알 수 있도록 교계의 채널을 이용할 것인가? 팻말이나 플랭카드를 사용하는 시위적 방법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기도를 통한 영적 방법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이 모든 방법들을 동시에 사용할 것인가? 이 역시 문제의 성격과 상황에 따라 다소 차이가 날 것이다.


일반적으로 글보다는 말이 더 직접적이기 때문에 그 상대방에 전달되는 효과가 더 클 수 있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글로 문서화되는 것이 더 장기적으로 더 큰 효과를 나타낼 수도 있다. 또 부모님이나 선생님과 같은 가까운 분들의 문제점을 직접 말로 표현하기 힘들 때는 편지를 씀으로써 큰 효과를 얻은 경우들도 있다. 그러므로 사안에 따라서 적절한 방법을 잘 선택해야 한다.


또 말이나 글로 표현할 때, 표현의 방식이나 표현의 강도도 상황에 따라 지혜롭게 잘 선택해야 한다. 어떤 내용을 농담조나 냉소적으로 표현한다면 아무리 중요한 내용이라도 좋은 결과를 내기 힘들 것이다. 반대로 상대방의 잘못을 지나치게 일방적이고도 높은 강도로 정죄하거나 혹은 상대방의 완전한 굴복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도, 그 의도와는 반대로, 좋은 결과를 얻기 힘들다. 그럴 경우, 그 사람의 성격에 따라 오히려 반발을 불러일으키거나(강한 성격의 소유자) 아니면 그 사람을 극심한 스트레스와 절망속(여린 성격의 소유자)으로 집어 넣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표현의 강도와 방식도 적절히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기도가 수반되지 않으면 안 된다. 성경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한다는 것은 일반인들이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거기에는 사랑과 기도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된다. 잘못을 지적하고자 하는 그 대상들을 위한 기도가 없다면 이는 성경적인 방식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사회와 교회의 개혁을 목표로 하고 있는 개인이나 단체에서는 더욱 기도가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6. 성경적 지적을 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왜’ 라는 요소이다. 왜냐하면 어떤 잘못을 지적하는 동기와 태도야 말로 그것이 성경적이냐 아니냐를 결정짓는 핵심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사랑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더구나 타인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만일 사랑으로 하지 않는다면 분명 그들을 공격하는 형태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공격형 비판은 비판하는 사람에게 자기만족과 스트레스 해소를 가져다 줄지는 모르나 결코 비판받는 사람에게 유익이 될 수 없다. 설령 그 내용이 진리라 하더라도 그 사랑이 없는 진리는 형제를 죽이는 결과를 가져온다! 많은 비판들이 이러한 사랑의 동기가 없음으로 인해 덕을 세우기 보다는 결과적으로 분쟁과 반발만 불러일으키는 것은 우리가 흔히 목도하는 일이다. 특히 스스로 입바른 사람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무엇이 옳으냐 하는 것에만 치중함으로써 도리어 덕을 세우기 보다는 다툼과 분쟁만 일으키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것은 특히 한국교회를 개혁하려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중요한 일이다. 교회의 부패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일은 진정으로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교회의 죄가 자신의 죄인 것처럼 아파하면서 자기의 살을 도려내는 심정으로 그러한 비판을 해야 한다. 교회의 부패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은 마치 그 부패한 교회의 밖에 있는 의로운 선지자인양 자처한다면 이는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예레미야나 다니엘과 같은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면서도 그 민족의 죄를 바로 자신의 죄로 알고 금식하면서 회개하였다. 그들은 진정으로 민족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정직한 자신을 부패한 이스라엘 민족과 동화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어떤 잘못의 지적이 성경적인 것이 되도록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이 글을 쓰는 나 자신도 과거 여러 교회들에서 기독교세계관을 강의하면서 교회나 사람들의 잘못들을 많이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그 후 주님께서는 그러한 나의 지적에 사랑이 결여되어 있었음을 깨닫게 해 주셨다. 그 때 깨달은 말씀은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괭과리가 되고”(고전13:1) 라는 말씀이었다. 사랑으로 하지 않는다면 진리를 외치는 천사의 말일찌라도 아무런 의미없는 소음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만일 그것이 진정 사랑의 동기에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면, 함부로 남의 잘못을 지적하지 말자. 우리가 남의 잘못을 지적하는 이유는 진리를 선포하는 것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잘못을 고치게 하는데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잘못을 지적받는 사람들의 태도를 생각해 보자. 자신의 잘못을 지적받았을 때 이를 수용하고 고칠 수 있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다. 더구나 상대방이 위에서 말한 6가지 요소들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비판해 올 때도 겸허히 그것을 수용하고 자신을 고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 위대한 사람이다. 만일 별로 훌륭하지 않은 사람이 대중 앞에서 아무렇게나 내뱉은 비판 속에서도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고 그 자신을 고칠 수 있다면, 이런 사람은 정말 위대한 사람이다. 이런 점에서 공개석상에서 새까만 후배인 바울에게 책망을 받고도 그것을 겸허히 수용했던 베드로야말로 진정한 위대한 신앙인이라 생각된다.

좌담회: ‘고난과 공동체’

이코스타 2004년 5월호


이렇게 이코스타 좌담회에 참여해 주신 여러분께 먼저 감사드립니다. 우선 각자 자신에 대해 소개를 해주시겠습니까?


차문희: 저는 차문희이고요 현재 살고 있는 곳은 조지아 아틀랜타입니다. 처음에는 공부하러 미국에 왔다가 졸업하고 교사로 일하면서 계속 공부하고 있습니다. 직장생활하면서 학생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조한상: 저는 조한상이고 시애틀에 살고 있고 전자공학을 전공하는 박사과정 유학생입니다.


권오승: 보스턴에 있는 권오승입니다. 반도체 제조학을 공부하고 있고 보스턴에서 유학생 성경공부를 섬기면서 그레이스 채플이라는 미국 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이코스타에서는 1월부터 고난과 공동체라는 주제로 기획기사를 준비하였습니다. 이번 코스타의 주제인 고난받는 공동체, 거룩한 공동체에 대한 일종의 사전준비형식이었는데요, 이 주제가 2004년을 살고 있는 우리 유학생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한번 짚어볼까요?


조한상: 사실 저는 주제가 나온 것을 처음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 사실 흔하게 듣는 말 중에 하나가 미국이 편한 곳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위해서 고난을 받을 일을 없다 고난을 받으려면 미전도 종족에게 가보면 잘 알 수 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어디에 살던지 고난을 받는 것이고 공동체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요, 그런 말을 한 다는 것 자체가 고난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잘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고 기독교인이 고난에 대하 나름대로 정의를 내리고 삶 속에 적용될 수 있는 기회가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차문희: 저같은 경우 이번 기사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고 느꼈습니다. 보통 유학생들을 보면 경제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비교적 안정된 사람들이고 처음 미국에 올 때 꿈이나 비젼, 야망을 갖고 오기 때문에 성공 지향적인 삶을 살기 위해 이기적인 마음이 많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고난이 닥쳐오면 내가 왜 이런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 내가 성공의 길을 가고 싶은데 하는 사고로 좌절감에 빠지기도 하고 그런 것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피해가려는 경향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저도 유학생활을 해보았지만 유학생들은 고난에 부딪쳐도 도전받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것을 피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같습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코스탄들이 고난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고난을 하나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기회가 됐으면 합니다.


권오승: 저도 차문희 자매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다만, 유학생들이 받는 고난에는 제가 생각하기에 두 가지 종류의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유학생으로 살아가면서 겪는 문화적 충격, 경제적 어려움, 학업에서 받는 스트레스 등 일상 생활에서 겪는 어려움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나름대로 성령의 열매를 맺고 사는 것이고요, 두번째는 세상의 가치관에 싸워 살아가기 때문에 예수님의 삶을 살면서 받는 고난이 아닐까 싶습니다. 첫번째 고난은 우리 유학생들의 삶에 많이 발견되는 것이고 성경공부 시간등에서 많이 나눠지는 것인긴 한데 사실 이번 좌담회와 코스타의 주제는 두번째의 고난의 것에 더 강조가 되어있는 것같습니다.


고난이라는 가치를 별로 생각하지 않는 현대 교회에서 고난의 이슈를 머리 속에 담으려고조차 하지 않는 태도가 팽배해 있는 시대에 이번 주제가 아주 가치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활절의 절기에 맞게 고난이라는 주제와 파편화되어가는 사회에서 기독 공동체에 대해 여러가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인 것같습니다. 먼저 기독공동체의 여러 경험을 조한상 형제님께서 정리해주셨는데요 그 글을 준비하시면서 어떤 마음이 들으셨는지요?


조한상: 기독 공동체에 대한 정의를 글을 쓰면서 좀 보았는데, 역사적으로 왜 공동체성이 점차 결여되어가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현대에 역사에 나타나는 공동체성이 왜 없어졌는가하는 의문에는 공동체에 대한 개념이 중요한 것같습니다.


공동체에 2개의 극단이 존재하는 것같애요. 성경적인 공동체가 어떤 것인가 고민없어서 없거나 우리 공동체가 제일이다는 자부심을 고조하는 공동체게 존재하는 것같습니다. 그래서 나타나는 현상들은 완전히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없거나 공동체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친 나머지 교만에 빠지는 두 유형이 있는 것같습니다.


공동체로서 받을 고난을 고민하기 이전에 어떤 공동체를 형성해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바른 공동체를 형성해 가는 과정 자체가 고난을 수반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생각의 변화가 많이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권오승: 저도 그 글을 아주 잘 읽었습니다. 한가지 사족을 단다면 예수님의 몸(Body of Christ)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추가하고 싶습니다. 특별히 유학생 집단 같은 엘리트 집단에 던져지는 메세지 중에 하나는 유학생 리더 같은, 훈련된, 잘 나가는 크리스챤은 수퍼 크리스챤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를들면 성경공부 리더가 된다면 학교에서 공부도 잘해야하고 직장에서도 잘해야 하고 기도도 잘하고 성경공부도 잘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심지어는 교회 봉사도 못하는 거 없이 다 잘해야 하고, 상담도 잘하고, 노래도 잘 부르고… 그러나 성경적인 관점에서는 개개인이 수퍼스타가 되기 보다는 각자가 장점과 단점을 서로 맞춰가면서 예수님의 몸을 만들어가고 세상이 상상하지 못하는 하모니를 만들어내는 것에 강조가 더 있는 것같습니다.


고난의 이슈에 이런 원리를 적용하면요, 개인이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닌, 공동체가 고난을 받을 때 각 지체가 감당해야할 고난의 영역이 있고 함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고난을 감당해 낼때 진정한 기독공동체의 하모니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실질적으로 그런 하모니를 가진 공동체를 별로 보지 못한 점이 중요한 이슈인 것같습니다.


조한상: 역사적으로 보면 한사람의 뛰어난 수퍼 스타같은 지도자에 의해서 세워지고 유지되는 공동체, 그러나 그 사람이 사라지면 철저하게 타락되는 공동체의 모습이 많았습니다. 좋은 지적이신 것같습니다.




예, 공동체가 능력있는 개인보다 중요하다는 말씀이신데요, 예수님에 대한 신앙과 공동체 생활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있음은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도 많이 느끼는 부분입니다. 각자 기독 공동체를 경험하시면서 어떤 모습이 진정한 조화를 추구하는 기독공동체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차문희: 기독 공동체의 바른 모습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선교 단체를 섬긴 경험에 비춰보면서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사실 실망스러운 부분도 많이 있었던 것같습니다.


기독 공동체에서도 직책에 너무 의존하는 경우가 있는 것같애요. 섬기는 사역자와 봉사하러 오시는 분들 사이에 조직 사회가 유지되는 것같거든요. 지위가 높으신 분은 권위를 내세우는 경우도 있고 서로 못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었어요.


두번째로는 기독 공동체는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해줘야하는데 다양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자신의 것을 강요하는 것이 많았던 것같아요.


세번째로는 말씀 위주의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같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권오승 형제님께서 말씀해주셨는데, 기독 공동체의 기초가 말씀을 바탕으로 성립 되는 것이 옳지 않나 봅니다. 물론 친교가 중요하긴 합니다. 먹는게 없으면 안오니까요.(웃음) 교회 안의 공동체도 너무 사회 클럽같은 것을 느끼곤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느 조직이건 갈등이 있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인데 갈등을 부인하고 없는 것처럼 가정하고 피하려고 하는 것은 문제를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놓는 것같애요. 교회에서도 갈등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어떻게 이것을 잘 해결할 것인가를 고민하는게 좋을 것같아요.




그런 다양성을 어떻게 담아내야할까요? 보이지 않는 분위기로 다양성을 억압하는 경우도 많이 있는데요.


차문희: 다양성에 대한 훈련 자체도 기독 공동체에 많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기숙사 RA를 하면서 학교나 세미나에서 다양성에 대한 훈련을 많이 받았는데요, 교회에서도 그런 훈련이 많이 필요하지 않나 싶어요.


조한상: 다양성이 중요하긴 한데 열려 있지만 닫혀 있는 공동체로서의 기독 공동체의 특징으로서 정체성이 중요한 것니까요, 기독 공동체의 보편성과 다양성을 조화하는 기초가 말씀이 될 것같은데요, 삶의 나눔이 필요하지만 말씀 중심으로 공동체의 기반이 분명히 설 때 공동체가 지속적으로 유지될 것같습니다.


교회는 한편 보편성을 가지면서 다양성을 유지하는 균형을 갖기가 어려운 문제이긴 한데요.


권오승: 제가 보기에는 신앙 공동체에는 제자 공동체와 회중공동체의 형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자 공동체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공동체에서 회중 공동체는 바울 서신 등에 나타난 교회에서 볼 수 있는데요. 제자 공동체는 선택과 배제(selection & exclusion), 회중 공동체는 포용이라는 원칙이 보여지는 것같거든요. 예를 들면 교회에서 문맹인 사람과 철학 박사와 같이 성경공부를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몸이라는 이유로 같아져야 한다고 강압할 수는 없거든요. 지혜롭게 동심원적 구조를 세우면 선택과 배제라는 원칙과 하모니를 가져야 한다는 균형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조한상: 밑에서부터의 공동체, 한 사람에 의해 주도되지 않는 공동체가 세워지고 말씀이 소그룹에 기초가 되고 조직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닌 위로 올라가는 공동체가 되면 힘이 생기는 것같애요. 공동체가 조직이지만 조직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공동체로서 실패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밑으로부터의 공동체 조직이 되면 굉장히 어려워지는 것같아요.




한편 기독공동체가 세상의 공동체 혹은 조직과 근본적으로 다른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면 어떤 것이 필요할까요? 많은 한국 교회가 한국 사람들이 교회에 오니까 오는 사람을 이민에 정착시키고 교회를 통해서 미국 사회에서 적응하고 성공하는게 좋다는 것이 기조인데요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긴한데 문제가 있는 것같습니다. 기독 공동체가 다른 타자를 위한 기독공동체의 정체성을 세우지 않으면 쉽게 교회가 흔들리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조한상: 기독 공동체가 근본적으로 다른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 정답이긴 한데요. 나를 포기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기독교인, 기독 공동체가 중요한 것인데요, 몇몇의 헌신된 제자가 작은 공동체가 점차 우리가 갖고 있는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이 될 원동력이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차문희: 타자를 위한 공동체라는 표어는 매우 중요한 것같습니다. 교회 공동체 구성원의 역량이 중요한 것같은데요. 제 경우도 교회를 생각해보면 교회 신도수는 어느 정도 되고 재정도 튼튼한데 왜 섬기는 사람이 없는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몇몇의 헌신된 제자, 구성원인 제자의 역량이 중요한 것같습니다.


권오승: 때로는 교회에 뭔가를 원하고 찾아오는 사람에게 그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 가끔은 필요한 것같습니다. 금과 은을 찾는 거지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분명히 말해주는 것이 필요한 것같거든요. 최근 교회에서 섬김이 없는 것보다는 선포(케리그마)가 적은 것이 공동체의 문제가 아닐까요.


신앙의 원론적인 메세지가 없는 상태에서 잘해주는 섬김만으로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데 어려움이 따를 것같습니다. 메세지가 좀더 중요하지 않나 싶어요. 물론 이것은 상황에 따라 강조점이 달라질 수 있겠습니다만, 적어도 제가 경험한 유학생의 사회속에서는 그렇습니다.




고난이라는 주제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각자 생활에서 어려움과 시련이 많았을 것같은데 생활의 어려움이나 유학 생활 중의 어려운 점이 있으면 나누어주시겠습니까?


차문희: 저 같은 경우는 고난이 좀 많았던 것같은데요(웃음) 언어의 문제로 힘들었고 남부라서 인종 갈등도 있었고 직장 생활에 적응하기까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미국 어린이를 다루는데 어려운 일이 많이 있었고 오해도 많이 있었습니다. 요즘은 처음 오는 한국 유학생들이 이런 얘기를 하면 다 겪어봐야 하는 일이다라고 말을 해주죠.(웃음)


그러면서 내 자신을 알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는 것 같습니다.


권오승: 다른 문화에 적응하느라고 겪는 어려움은 저도 참 많았는데요, 제가 나름대로 생각했던 것은 세상의 가치관에 적극적으로 대항했던 그리스도께서 능욕을 지고 십자가를 지셨던 고난은 아니었던 것같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할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받으셨던 고난이었거든요. 앞으로 직장생활을 하면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가치있지 않은 일을 붙들고 오랫동안 씨름해야하는 경우가 있을 것같고 성공보다 다른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 앞으로의 고난이겠죠.


기획 기사가 기독공동체의 고난을 연결시켜보려고 노력했는데요, 원론적으로 생각해서 기독인이 또 기독공동체가 고난을 수반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죄때문이라 하겠는데요, 고난이 창조질서의 붕괴에서 나왔다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치유책이 나와야 할 것같습니다. 각자 신앙이 고난을 극복하는데 어떤 의미가 있으신지요?


차문희: 저는 유학생 생활을 시작하면서 인터내셔날 미니스트리에서 다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는데요, 행동으로 보여준 좋은 친구의 전도가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바탕이 되서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삶을 시작하니까 먼저 평안해지고 그분을 의지하게 됩니다. 예전처럼 내가 왜 이래야되지 하고 불평을 늘어놓기 보다는 고난을 통해서 뭔가 또 배우고 있구나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성장하고 있구나 하고 느낍니다. 고난의 결과보다는 과정을 통해 성숙하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나름대로 큐티도 더 열심히 하고 성경공부도 더 열심히하고 있습니다.


권오승: 제가 앞에서 말씀드린 두가지의 고난 가운데에서요, 첫번째 카테고리의 고난은 세상과 싸우면서 생기는 고난은 아니지만 그 나름대로 제 스스로를 돌아보고 예수님 닮은 사람으로 만들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느껴졌고, 두번째 종류의 고난은 그것을 경험할 때 표면적으로 힘들지만 보이지 않는 기쁨이 있었던 것같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신앙이 그런 고난 속에서 아주 자랑스럽더라구요. 사소한 얘기지만 제가 직장생활할 때, 제 신앙의 양심에 비추어 하기 어려운 일을 요구받았을 때, 그러면서 갈등할 때 금방은 아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기쁘고 평안한 마음이 생기더라구요. 이런 일들을 통해서 스스로 어디에 서야할 것을 확실히 발견하게 됬던 것같습니다. 제 삶에서의 전선(battle line)도 더 명확해지는 것 같고요.


기독인과 기독 공동체의 정체성이 우리의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데요, 이번 코스타의 주제가 세상에 대해 대항하는 기독공동체가 고난과 더불어 거룩함을 유지해야 할 필요에 의해 정해진 것같습니다. 이번 코스타 주제가 어떤 배경에서 정해지게 되었는지 한번 생각해볼까요?




권오승: 고난을 받음으로써 공동체가 거룩해진다라기 보다는 거룩한 공동체는 고난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요? 이번 코스타 취지문에 잘 나와있듯이 실질적으로 초대 공동체나 모델 공동체들이 가지고 있었던 공통점, 독특성이 있는데 그런 아이덴티티가 고난을 견딜 수 있는 큰 힘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크리스챤 공동체만이 지니고 있는 힘이 닥쳐왔던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는 점이지요. 예수님이라는 궁극적인 목표가 우리안에 약해졌기 때문에 우리안에 당연히 있어야할 영광스러운 모습이 약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에서 주제가 잡혔던 것같습니다.


차문희: 유학생들에게 이번 주제가 시의적절한 것같습니다. 이런 주제를 통해서 기독 공동체의 바른 모습에 대해서 올바른 지식과 시각을 심어주길 기대합니다. 대부분 공동체에 대해서 생각을 안하지만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코스타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요, 올해 코스타 컨퍼런스를 준비하면서 주제와 관련되어서 어떤 기대를 갖고 계신지 나누면서 오랜 시간의 말씀을 줄였으면 좋겠습니다.


권오승: 제가 코스타에 참여한 지가 벌써 8번이나 되었네요. 매년 다른 기대를 갖는데요, 저도 이제 박사과정을 마치면서 좀더 세상과 직접 맞부닺치는 단계에 들어갔는데 이번 수련회를 통해서 세상에서 어떻게 지혜롭게 살아가야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배우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함께 공동체의 약해짐을 가슴아파하고 고민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차문희: 저같은 경우는 여러 강사님의 말씀을 통해 많을 것을 배웠으면 좋겠고 그것을 공동체에 적용하는 전략을 배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컨퍼런스를 참여함으로써 알게된 지식을 공동체에 최선을 다해서 적용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긴 시간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리고 컨퍼런스 기간까지 코스탄들의 삶에도 고난과 공동체라는 주제가 준비되고 내면화되기를 기도해봅니다.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