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동국] 유학생 사역

이코스타 2004년 8월호

<글을 시작하며>


저는 개인적으로 1995년부터 8년 동안 미국에서 유학 생활하는 동안 어쩌다 보니 미국 교회나 선교단체를 중심으로 외국 학생들을 위한 모임과 한국 교회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며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경험하고 느끼고 생각한 점들을 적어볼 생각인데, 이러한 경험에서 나온 글들이 유학생 사역 코너의 글에 얼마만큼 부합되는지 고민하면서 문득 저 자신이 먼저 유학생 사역이라는 말을 (한국) 유학생 사역으로만 한정해서 생각하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제한하지는 않았지만 저 스스로 제한해 놓은 저 자신의 사고의 경직성에 당황해 한 것을 부끄럽지만 고백하면서, 저의 개인적인 경험이 유학생 여러분들에게 조금이나마 유익한 글이 되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글이 되기를 바라면서 글을 시작합니다.


처음 미국에 도착해서 주일날 미국 교회에 참석해서 예배를 드리고 그 교회에서 주관하는 외국인을 위한 모임과 성경 공부에 참석을 하게 되었고, 차차 시간이 지나면서 새벽 기도나 특별집회 같은 때에 한국 교회를 부정기적으로 참석하다가 보니, 나중에는 아예 금요일마다 정기적으로 한국 교회 청년부에서 함께 교제하며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3년이 지난 뒤에 새로운 학교로 가게 되었는데, 그 곳에서는 주일에는 한국 교회를 다녔지만 반대로 금요일 저녁에는 외국인을 위한 크리스찬 모임을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양다리를 걸치며 두 그룹 모두에서 어찌 보면 주변인으로 생활하면서 개인적으로 경험하고 느낀 점들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때로는 주위에서 오해와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하고, 나조차도 그런 생활에 회의가 들기도 하였지만, 또한 여러 가지 좋은 점도 있었고 지나놓고 보니 나름대로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예비하심이 있는 것 같아 지금은 참 감사하고 있습니다.


<외국인 모임에 소극적인 한국 유학생 크리스찬들>


제가 외국인들을 위한 모임에 꾸준히 다니면서 느낀 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한국 유학생들이 교회를 다니는 수를 고려할 때 실제로 외국인 학생들 모임에 참석하는 한국인 크리스찬의 숫자는 적다고 느꼈습니다. 이 말은 한국 교회들이 학교 주위에 많이 있어서 외국인 모임에 참석할 필요를 못 느끼기 때문일 수 있기 때문에 어찌 보면 한국 교회들이 그만큼 한국 학생들을 잘 섬기고 있다는 말이기에 상당히 긍정적인 면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국 사회의 ‘우리 문화’ 혹은 ‘끼리 문화’ 때문일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문화와 정서가 다르고 더구나 언어 장벽이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 또 다른 시각으로 보면 대다수 한국 크리스찬들은 우리만의 문화와 정서 속에 갇혀 있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로 주님 안에서 한 형제 자매임이 확인되기만 한다면 우리말로 우리와 같은 정서로 찐하게(?) 교제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그게 그리 큰 문제는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때때로 말도 잘 안통하고 우리식대로 교제를 못해서 답답함도 느끼고 외로움도 느끼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표현방식만 다를 뿐이지 그리고 언어를 통한 후련한 소통은 못할지라도 어떨 때는 언어가 소통될 때보다도 더 큰 감동을 받을 수 있게 되기도 하고 다른 정서와 문화 차이를 뛰어넘는 교제와 감격이 생기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즉 한국 교회가 주위에 많아서 우리 한국 유학생들을 잘 섬겨주기 때문에 외국인 학생들 모임에 한국인들의 참여가 적다면 그래도 다행이지만 혹시 ‘우리끼리’ 문화 때문이라면,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될 문제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둘째는 한국 크리스찬 유학생들이 자기 교회에 대해서는 열심이고 열정적으로 헌신하는데 반해 외국인들 모임에는 관심도 별로 없고 참 소극적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첫번째 문제는 긍정적인 측면도 많기 때문에 문제랄 것도 없습니다. 많은 경우 한국 사람이 실제로 적기 보다는 소극적이거나 수동적이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이 꽤 있다고 할지라도 실제로 느끼기에는 한국 사람들이 없다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미국에 처음에 올 때는 언어를 배우기도 싶고 외국인 친구도 사귀고 싶고 청교도 나라의 신앙도 배우고 싶어서 외국인들을 위한 모임이거나 혹은 미국 백인들의 교회에 참석해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분들이 한 반년이나 일 년 이상을 계속해서 참석을 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드물었습니다. 또한 외국인 사역을 위한 모임이나 외국인들을 위한 여행 등을 참가해보면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등의 사람들과는 달리 한국 사람들 중에는 교회를 다니며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대다수의 한국 기독교인들은 초반에 잠깐 이런 외국인 모임에 참여하며 도움을 받다가는 대부분 한국 교회로 돌아가 봉사하고 활동하느라 이런 외국인들을 위한 모임에서 섬기거나 돕는 자로서의 역할들을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도움과 훈련을 받은 후에, 도움을 주는 자로 또 리더로서의 역할들을 해 나가야 될 때가 되면 한국 사람들은 거의 없어지고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그리고 유럽과 아프리카 등에서 온 사람들이 리더로서 섬기는 역할을 해 나가는 모습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물론 개인적으로 적응을 잘 못하거나 언어의 한계를 극복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한국인들의 정에 이끌리는 정서나 문화 또 때로는 교회 목회자들의 배타적 태도나 한국 교회에서의 곱지 않은 시선과 은근한 압력도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전체적인 행사에는 한국 사람들이 꽤 많을지라도 실제로 느끼기에는 한국 사람들이 적어 보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제 주관적인 생각만은 아닙니다. 실제로 외국인 사역을 하는 미국 사람이 한국 크리스찬들에 대한 이러한 사실들을 알려 주며 그 이유에 대해서 의아해 하기도 하고 약간은 섭섭해 하기도 하며 얘기해 준 적이 있습니다.


<영어 문제는 단지 불편한 이차적인 문제>


이쯤 되면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영어 실력을 이유로 ‘마음은 있지만…’ 이라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언어 문제는 물론 문화나 관습, 정서 문제와는 조금 다른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언어 문제도 핑계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이유는 제가 영어를 상당히 못함에도 줄기차게 외국인 모임에 나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언어 문제는 불편함일 뿐이지 외국인과의 교제에 있어서 근본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영어를 배우고 싶어서 나가기 시작했겠지만, 시간이 가면서 외국인들과의 교제도 좋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면 지쳐서 곧 외국인 모임에 참석하지 않게 되었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부끄럽지만 용기를 얻을 사람들을 위해 제 얘기를 하자면 미국 있은 지 3년 반이 넘었을 때에도 어찌나 영어를 못했던지 박사자격 구두시험에서 교수들이 조건부로 합격을 시켜 주었는데, 외국 학생들을 위한 영어 수업 한 과목을 듣는 조건으로 합격이 되었을 정도입니다. 그러니 그전까지의 영어가 어떠했으며 그 이후의 영어 실력이 좋아져봤자 얼마나 좋아졌겠습니까? 언어를 잘하면 참 좋습니다. 의사소통상 아무 불편없이 어느 외국인과도 깊이 교제할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성경 공부를 인도하거나 전체 그룹을 인도하거나 핵심 멤버로 리더 역할까지도 수행할 수 있으려면 언어를 잘하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만, 혹시 영어를 잘 못해서 말도 잘 못 알아듣기도 하고 자기의 생각을 표현 한 마디 못할 때가 있어도 나름대로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역할을 해 나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냥 참석만 했었는데, 한 2년쯤 되니까 미국인 사역자가 참 고맙다고 얘기를 하더군요. 의아해 하는 저에게 해준 얘기가 바로 오랫동안 계속해서 모임에 나오는 한국인 크리스찬들이 많지 않은데 꾸준히 참석하니 고맙다는 거였습니다.


<외국 유학생 사역에 대한 비전>


이제는 기독교권 세계에서 한국의 위상은 상당히 높아졌고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같습니다. 선교사 배출도 손꼽을 정도로 많고 그 선교사들과 선교 지망생과 후원자들을 위한 선교대회도 하고,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를 비롯해서 새벽 기도나 교회 모임 등에 대한 한국 크리스찬들의 열심과 열정을 어디서건 인정해 주는 것 같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물론이고 아프리카나 일본 등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도 한국의 특정 교회와 목사님 이름을 언급할 정도로 전 세계에서의 한국 교회의 위상은 많이 알려져 있는 것 같습니다. 한 대만 크리스찬은 한국의 기독교의 성장과 민주 사회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해 주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높아진 한국 교회의 위상에 따라 미국 학교에서의 외국 학생 사역에 한국 크리스찬들의 역할을 기대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한국 유학생들 중에는 비교적 크리스찬 비율이 높기 때문에 선교적 차원에서 거의 신앙이 없는 중국 학생들이나 동남아 아시아 학생들이나 중동 지역의 학생들을 섬기는 자로, 도움을 받는 자로서만이 아니라 도움을 주며 미국인들과 함께 외국인 학생들을 위한 섬기는 자로서의 역할을 기대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제는 우리의 관심을 자국의 유학생들에게만 두는 것이 아니라 외국 유학생들에게까지 시선을 넓혀야 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처음에는 외국인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석을 하면서 도움과 양육과 훈련을 받고, 후에는 섬기는 자로서 미국 사람들을 돕거나 함께 동역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겠으나, 지금까지의 유학생 사역을 유학생 교회나 크리스찬의 수적 확대와 코스타 등의 대형 집회 등을 고려한다면 한국 교회의 유학생 사역은 어느 정도 성공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는 이러한 성공적 경험을 바탕으로 유학생으로서 받은 도움과 은혜들을 자국 유학생들에게 뿐만 아니라 외국 유학생들에게도 나누고 섬겨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이제는 우리에게로만 제한된 시각을 바꾸어 세계 곳곳에서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학생들이 미국 유학하는 동안 복음을 듣게 하는 일을 위해 기도하며 나아갈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잘 하고 있으니 미국 사람들에게 맡겨 놓자고 생각할 수도 있고 과연 돈도 없고 시간도 없는 외국인 유학생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일까 라고 회의할 수도 있겠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또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일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일단 이웃 나라인 중국과 일본 학생들은 거의 크리스찬이 없는데 생김새와 문화가 비슷해서 쉽게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동남 아시아와 중동 지역의 사람들과도 같은 아시아인들이라는 공감대와 또 같은 처지의 외국인이자 유학생이기 때문에 거부감 없이 언제라도 잘 어울릴 수 있어 친하게 될 수 있는 장점이 우리 한국인 유학생들에게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다니던 학교에는 10명 이내의 각 나라별 모임 외에 50명 이상 되는 모임으로 태국 학생들 모임과 베트남 학생들 모임, 중동 지역 학생들이 회교 사원을 중심으로 모이는 모임들이 있었는데 이 모임들에는 크리스찬이 거의 전무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 그들을 마음에 품고 섬기는 사람들도 제가 아는 한 거의 없었습니다. 그들이 미국에서 지내는 유학 기간조차도 복음을 제대로 들어볼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들이 참 안타까웠습니다. 각 나라의 지도자급이 될 사람들이 청교도 문화의 기독교 국가에서 4, 5년을 공부하는 동안에도 복음을 듣지 못한다면 그들이 언제 복음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반대로 그들이 유학하는 동안에 복음을 들어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면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가장 큰 선교지라고 할 수 있고 적은 비용으로 가장 큰 효과를 낼 수 있는 선교장일 수 있고 이러한 황금 선교 현장에서 우리는 유학 생활을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거기다가 미국 사람들이나 미국 학생들에게는 없는 한국 유학생들만이 가지고 있는 동질감 같은 것이 있으니 얼마나 좋은 환경인지 모릅니다. 물론 외국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자국의 문화나 종교에 대한 향수를 더 많이 갖고 있기 때문에 그리 쉽지 않고 오히려 더 마음이 닫힌다는 반론도 있을 수 있지만, 아무래도 자국에서보다는 훨씬 열린 시각으로 미국 문화에 담겨있는 복음에 대해 느끼게 되고 그 복음을 전하기 좋은 환경을 부인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외국인 유학생 사역에 대한 조언>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 몇 가지 조언을 하며 글을 맺으려고 합니다.


첫째로 미국인들만의 모임이건 외국인들을 위한 모임이건 영어로 하는 성경 공부에 참여하기를 권합니다. 문화적 배경이 다른 사람들과의 성경 공부를 통해서 다양한 해석과 적용법을 배움으로 보다 풍요로운 성경 공부를 할 수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미국인들만을 위한 성경 공부에서 영어를 소화할 만한 실력이 안 되어서 그런지, 그런 모임보다는 외국인들을 위한 모임에서 풍성하게 더 다양한 사람들의 삶과 생각을 듣게 되어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면 인도하는 미국 사람들을 포함한 외국인과의 깊은 교제로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5, 6년이 지난 뒤부터 2, 3명의 미국 사람들과 매주 모여서 삶을 나누고 서로 기도해 주며 외국인들을 위한 중보기도를 했었는데 그 당시에도 너무너무 좋았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서로 연락하며 소식을 전하기도 합니다. 또 하나, 어찌 보면 사소하지만 저에게는 아주 중요했던 영어에 대한 스트레스를 줄이고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 영어 성경 공부 모임을 통해서였습니다. 비교적 영어 성경은 꾸준히 읽어왔기 때문에 그리고 거의 모든 내용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몇 마디만 들어도 유추해서 알아들을 수 있었고, 한 두 마디만 해도 문법이 틀리고 발음이 엉성해도 역시 미국 사람들도 감으로 잘 알아들었기 때문에 영어가 잘 되는 듯 한 느낌을 받았기에 영어 성경 공부 모임을 가게 되면 영어에 대한 열등감도 회복되고 자신감을 얻고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처음에 미국인들만의 성경 공부 모임이 힘이 든다면, 외국인을 위한 성경 공부 모임에 참여하면 아무래도 쉬운 영어를 하기 때문에 적응하기 좋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영어 성경 공부 모임에 꾸준히 참여하는 것은 외국인 유학생 사역의 기본이 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둘째로 주위의 학생들에게 영어 성경 공부에서 얻는 유익에 대해서 나누고 자랑하기를 권합니다. 학교를 옮기고 나서부터는 주위 외국인 학생들, 특별히 제 주위에는 중국 친구들이 많았는데 개인적으로 영어 성경 공부를 하면서 얻은 유익들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랑하고 다니며 함께 외국인들 모임에 초대도 하고 권유도 하고 그랬습니다. 특별히 처음 중국에서 와서 영어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 제일 효과적인 것 같습니다. 제가 만난 중국 친구들은 대부분 성경 공부 모임과 성경에 대한 얘기를 하면 성경을 읽어보고 싶고 배우고 싶다고 호의적이었습니다. 그냥 호기심만 있고 실제로는 성경 공부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석할 만큼 진지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지만, 그래도 꽤 많은 학생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되고는 아예 우리 건물에서 성경 공부 모임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일주일 중 하루, 날을 잡아서 점심 때 간단한 식사를 하며 성경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 뒤로 한 3, 4년 동안을 꾸준히 하면서 그 모임을 통해서 중국 친구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또 인간적으로도 깊은 관계로 발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개인적으로 참 큰 축복이었습니다.


셋째로 기회가 되면 성경 공부를 모임을 시작하되 미국인들과 동역하는 것도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주위의 외국인 학생들에게 성경 공부 모임에 대해서 자랑을 하며 혹시 일주일 중 하루, 점심 시간을 이용한 성경 공부 모임이 있다면 참석하고 싶은지 물어본 후 그러한 친구들의 숫자가 3, 4명 되었을 때 영어 성경 공부 모임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성경공부 인도는 미국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특별히 중국이나 대만 등 비교적 영어를 잘 하지 못하는 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대개 원어민이 성경공부를 하면서 영어도 가르쳐 준다는 것을 참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역할 분담을 해서 미국사람은 성경공부에만 집중하게 하고, 나머지 제반 사항, 즉 모이는 장소와 시간과 내용 등을 알려주는 이메일을 매주 발송하고 장소 등을 확인하는 업무는 제가 감당했습니다.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하던 안하던 관심 있다고 한 친구들 모두에게 매주 이메일 보내는 것도 하나의 사역으로 생각하고 꾸준히 보내게 되었는데, 성경 공부에는 나오지 않는 한 대만 친구가 어떤 계기로 졸업 직전에 예수님 믿고 세례까지 받는 일도 있었습니다. 물론 제 이메일이 그러한 일들에 실제로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작은 일도 들어 쓰신 줄 믿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필요한 경우 유학생 입장에서 어려운 영어 단어의 설명과 약간의 발음 교정 등도 부탁하거나 혹은 진도가 너무 빠르다거나 등의 피드백을 줄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좋은 점은 동역하면서 함께 기도도 하고 토론도 하면서 미국인 친구와 아주 깊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경 공부 이외의 좋은 점도 참 많았습니다. 실험실 분위기가 좋아져서 서로 토론하고 묻고 개인 사생활까지도 얘기할 정도로 친해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질문이 있거나 도움이 필요할 때 역시 쉽게 찾아가 도움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한 가지 부연하자면 아내의 도움으로 학기에 한 번 정도씩 집으로 초대해서 피자 같은 간단한 식사도 하며 성경 공부 모임에 대한 생각을 듣기도 하고 또 관심자들도 함께 초청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는데 그것도 참 좋았던 것 같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아내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넷째로 중동지역이나 인도 태국 베트남 같은 지역에서 온 학생들과는 그룹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개인 관계를 먼저 돈독히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사실 이쪽 친구들과는 많은 접촉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학위가 끝나갈 무렵에 알게 된 한 두 명의 중동 친구들과는 많은 얘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중동 지역에 대한 개인적인 무지와 편견도 많이 들어나기도 했지만 그러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유학 초기부터 이들을 마음에 품으며 구체적으로 그 지역의 문화와 정서와 종교에 대한 정보도 수집해서 접근한다면 개인적인 친분 관계를 쌓을 때도 좋고 그러다 보면 좋은 기회도 올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싱글이라면 운동이나 취미 등을 함께 하면서 접근해도 좋을 듯 하고, 가족이 있다면 한 가족별로 초대해서 식사도 하면서 관심을 갖게 된다면 좋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의 제한된 경험과 한계를 바탕으로 한국 유학생 크리스찬들의 사역과 시야가 자국을 넘어 극동 아시아와 중앙 아시아 지역 그리고 중동 지역에 까지 뻗쳐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후기>


저는 작년에 한국으로 오게 되면서 이러한 외국인들과의 교제와 사역이 더 이상 없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막상 제주대학에 와 보니 약 50명 정도의 중국과 동남 아시아 지역의 유학생들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8년 동안 외국인들을 위한 모임에 참석하며 보고 배웠던 경험들을 잘 활용하여 쉽게 외국인 유학생들과 친하게 되었으며 지금 이곳에서도 외국 유학생들과 영어 성경 공부를 하고 있고 미국에서 도움을 받은 대로 개인적으로 혹은 교회에서 학생들을 초대해서 식사 대접을 하기도 하고 여행을 가기도 하면서 어떤 면에서는 미국에서보다 더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외국인 학생들과 생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예비하심과 섭리하심이 어찌나 놀라운지요!

[장이규]비전 캐스팅(Vision Casting)

1단계 비전을 만들기(vision making) 위해서는 그룹 가운데서 지난해 행했던 많은 행사들에 대한 평가, 오늘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에 대한 분석, 공동체가 이루어야 하는 목표, 멤버들이 그 공동체에 거는 기대, 리더 개인이 가지고 있는 개인적 비전 등등의 분석, 그리고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한 여러 가지 여건들 — 사람, 재정, 건물, 장소, 등등–을 고려하여 공동체가 되어지길 원하는 모습을 정하는 것이다.


 2단계 설득의 과정(vision casting)은 그룹의 비전을 만든(vision making) 후, 공동체와 함께 그 비전을 나누고, 그 비전을 향해 함께 나아갈 수 있도록 그룹 원들을 설득(Persuading) 하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리더는 비전을 공동체에 제시하여 공동체 내의 다양한 사람들이 같은 꿈을 꾸고, 일치된 마음을 가지고, 그 비전을 향해 함께 나아가도록 설득 시키는 것 (vision casting)이다. 그런면에서 공동체를 설득하는 비전의 설득 단계는 바로 비전을 실행(vision implementation) 시킬 수 있는 길을 만드는 과정인 것이다.


 하지만 많은 리더들이 2단계 설득의 과정은 비전만 만들어지면, 그 실행에 있어서 매우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으로 쉽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기중심적이기에 매우 이기적이다. 그러기에 어떠한 공동체이든 개인의 이득 문제와 매우 밀접하게 관계된다. 신앙 공동체라고 예외일 수 없다. 신앙 공동체 구성원 역시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개인적 이득 목적을 가지고 모인다. 구원의 은혜, 도덕성의 회복, 고난의 극복, 개인의 명예, 이웃과의 친교, 자녀 교육, 사회성의 개발, 사업의 번영, 가정의 회복, 육신과 마음의 병 치유, 사회사업, 등등 각자 개인의 참여 목적과 이익이 각기 다르다. 그러기에 공동체내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같은 꿈을 꾸고 자신의 이익을 낮추며, 일치된 마음을 가지고 공동체의 비전을 위해서 함께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게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가족들이나 형제들, 친척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일치하기가 쉽지 않은데 하물며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모인 공동체에서 의견이 하나가 되는 것은 쉽지 않음이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리더들은 비전의 첫 번째 단계인 공동체가 나아가야 하는 방향의 설정을 하면 당연히 공동체가 리더의 비전에 모두 동의하고, 따라오며, 그리고 헌신까지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리더의 비전에 공동체가 쉽게 동의 하지 않는다. 이 문제로 때때로 리더와 공동체가 마찰을 빗는다. 마찰이 심한 경우는 공동체와의 관계성마저 상처로 남아 결국 리더가 공동체를 떠나는 경우도 있다.


 왜 그런가? 그것은 리더가 효과적인 비전의 전달과 실행을 위한 설득의 과정을 너무 쉽게 생각해, 그 전달과 설득에 있어서 실패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자. 오늘날 우리의 생활 문화를 주로 이끌어가고 있는 방송, 신문, 그리고 책이 무엇인가? 모든 것이 다 설득을 위한 것이다. 그들 나름대로 사실 이라고 생각되어지는 것에 대해 방송사는 이론과 영상이라는 매체를 통하여 체계적으로 시청자들에게 전달하고 그들을 설득하는 것이다. 신문도 기자가 사실이라고 여겨지는 어떤 것에 대해 논리적인 언어와 사진을 통해 독자들에게 그것이 사실임을 전달하고 그들을 설득하는 것이다. 책 역시 저자 자신이 확신하는 어떠한 세계를 언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독자들을 체계적으로 설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설교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하는 것을 청중들에게 알리는 설득의 도구이다. 그런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 할 때도 그냥 하나님의 말씀 한 줄 읽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예배의 도입부터, 고백의 기도, 그리고 찬송에 이르기까지 그날 예배에서 목표하고 있는 선포되어질 메시지에 초점을 맞추어서 체계적으로 구성되어진다. 메시지가 선포되어지고 난 후, 이어지는 찬송과 축도 역시 그 메시지에 대한 강력한 결단과 깊이 잇대어져 있음을 본다. 결국 오늘 우리들이 드리는 예배 역시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인 동시에, 청중들이 그 메시지를 진리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설득의 과정인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의 삶 자체가 다양한 설득의 체계 속에 싸여 설득 당하고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리더는 다른 사람을 설득하려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실행하려는 아이러니 속에 빠져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그동안 리더들에게 있어서, 특별히 신앙 공동체 리더들에게 있어서 비전의 전달, 그리고 실행을 위한 설득의 과정이 리더쉽을 위한 훈련 과정에서 오랫동안 사각지대가 되어왔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어느 신학교 혹은 교회 리더 훈련 커리 큘럼에서도 비전의 전달이나 설득을 위한 훈련 과정이 있음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훈련 되어야 한다.


 비전의 나눔과 설득의 과정(vision casting)은 비전을 만드는 과정(vision making) 만큼이나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비전을 만드는 만큼 설득을 위한 과정 역시 시간과 정열을 드려야 한다. 설득을 위한 전략(strategy)들을 연구 해야만 한다. 설득의 과정은 바로 비전을 실행시키는 결정적인 다리(bridge)이기 때문이다.     리더가 비전을 만들어 공동체에서 실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동체의 동의와 설득이라는 이 다리를 밟고 건너야 하는 것이다. 강 건너편 이족에 있는 사람이 강 건너편 저쪽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다리를 건너가야 하듯 리더의 비전은 실행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설득의 다리를 밟고 건너야 한다. 혹자는 생각하기를 그러면 독재자는 국민의 동이나, 국민을 위한 설득 없이 자신이 계획해서 마음대로 하지 않냐 라고 할 지 모른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독재자도 불안을 주는 방법이었든, 반공 이데올로기 이었든 간에 어떠한 모양으로든 국민을 나름대로 설득한 것이다. 그러했기에 그 공동체가 설득되어 나름대로의 평화 번영 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그 리더를 따라 갈 수 있는 것이다. 외부에서는 이해할 수 없을는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 내부는 그 리더를 따라가고 있는 이유가 거기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리더가 비전을 실행하기 위해 건너야 하는 이 설득의 다리는 무엇보다도 비전의 실행을 위해 설득 과정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또한 암시한다. 다리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는데에 빠르든 느리든 다리를 건너는데 시간이 필요하다. 이와 같이 비전이 공동체에 전달되고 공동체가 한 꿈을 꾸기 시작하고, 같은 마음을 품고 한 비전을 향해 헌신하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time)이 걸리는 것이다. 언젠가 한번은 윌로우 크릭 컴뮤니티 교회에서 교회에 처음 나와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 12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 한 적이 있었다. 질문의 내용은 ‘당신이 교회에 처음 나오기 시작한 이후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여 세례를 받기로 결단하기까지 그 기간이 얼마나 되었습니까?’ 였다. 놀랍게도 그 질문의 답변은 약 8-14개월 이라는 시간이었다. 초 신자(seeker)들에게 복음의 능력을 경험시키고자 만들어진 타켓 예배라 할지라도,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들의 개인적인 생각이 바뀌는 것, 믿음에 대한 개인적 편견이 바뀌는 것, 교회 문화에 새로이 익숙해지는 것이 무려 1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는 설문조사 결과는 리더들에게 설득 과정에 시간이 걸린다는 중요한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면에서 이 기간 리더에게 필요한 지혜는 설득을 위해 인내이다.


 그런면에서 비전을 만들어 실행하기 위해서는 효과적인 전달을 위한 적절한 전략(strategy)들이 필요하다. 어떠한 전략이 비전을 실행할 수 있도록 만드는 효과적인 다리(bridge)일까?


 첫째: 비전에 대한 설득력있는 분명한 명분과 그 근거 제시 이다.


실리와 명분에서 사람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명분이다. 명분은 다른 말로 이야기 하면 가치(value)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의 참여도와 헌신의 판단 기준은 되어져야 하는 그 일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에 달려 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 해도 가치있는 일은 어려움 속에서도 기쁨과 쓰임의 감사를 느끼게 한다. 희생이라는 느낌이 아니라 쓰임 받았다는 기쁨과 감격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쉬운 일이라 해도 가치 없다고 생각되는 일은, 참여자로 하여금 책임감을 느끼지 않게 한다. 그러한 일은 해도 쉽게 실증을 느끼게 되고, 시간 조차도 아까워 한다. 이런 일이 자주 있을 경우는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다고 까지 생각한다.


 왜 그럴까?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가치있는 인생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삶에서 가치를 추구한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삶을 사는 방법이기에 매우 자연스럽다. 양심을 자세하게 관찰해 보라. 이득 보다는 가치 중심적임을 보게 된다. 오늘 정치와 도덕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의 사회와 개인의 삶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시키고 극대화 시키는 것 아닌가?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나? 바로 인간의 가치를 회복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이 가치(value) 그 자체(being itself)이기 때문이다.


 이득은 삶의 한 방편이지 존재 자체가 아니다. 그러기에 가치를 추구하는 삶은 가난해도 불편한 것 뿐 이지 참을 만 하다. 동시에 삶에 떳떳하고, 매사에 자신이 있다. 정의를 위한 힘이 솟아난다. 하지만 이득을 추구하는 삶은 가난해 지면 비참함과 외로움, 외소함만을 느끼게 만든다. 심지어는 가난함이 삶을 비굴해 지게까지도 만든다. 가치를 위해서 사람들은 자신을 생명을 희생하는 순교를 한다. 하지만 이득을 위해서는 남을 죽이는 살인을 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왜냐하면 가치는 인간의 본질적 요소요, 삶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가치 중심으로 삶을 찾아가게 되어있다. 그러기에 가치(value)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과 헌신으로 이끈다. 움직임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면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과 헌신으로 이끄는 가치(value) 는 어디서 오는가? 


-  분명한 성서적 근거
-  생생한 하나님의 말씀
-  구체적인 하나님의 소원


바로 분명한 성서적 근거에서 온다. 생생한 하나님의 말씀에서 온다. 우리들을 향하신 구체적인 하나님의 소원에서 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오늘 우리 신앙 공동체가 나아가야 하는 하나님의 명령이요 구체적인 방향이요,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가 생명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 순종하고 이루어야 하는 하나님의 소원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성령의 감화 감동이 역사하여서 참여자의 마음을 감동과 헌신으로 이끌게 된다.


어떻게 효과적으로 설득력 있는 분명한 명분과 그 가치를 전달할 수 있는가?


1. 설교 이다.


설교는 비전과 그 비전의 가치를 전달하는데 있어서는 가장 효과적인 설득 방법이다. 성서에 나타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소원을 나누라.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이루어야 할 주님의 가르침을 알게 하라. 우리 공동체를 향하신 하나님의 세우신 뜻을 선포하라. 역사 속에서 계시하신 하나님의 소원을 구약에서의 본문들을 발견하라.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소원을 신약에서 발견하라. 그리고 그 본문의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선포되어진 하나님의 명령과 소원을 선포하라. 더 나아가 그 명령을 순종하였을 때 이루어진 결과들에 대해서 선포하라. 더불어 오늘 교회의 역사 속에서 그 말씀에 순종하였을 때 나타난 결과들에 대해서 선포하라. 그리고 그 말씀을 순종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소들이 무엇인지, 그 장애물들을 어떻게극복했는지 성서에 계시된 말씀을 통하여 분명하게 선포하라.


2. 개인 성경 공부 이다. 성경공부 역시 분명한 하나님의 소원을 알게 하는데 공동체에 대한 강력한 설득의 영향력을 미친다. 성경 공부는 우리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하나님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구체적으로 고민하게 만든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과 응답을 주관적으로 응답하게 한다. 성경공부는 하나님의 말씀과 소원을 제 3자의 입장에서, 혹은 외에 다른 대중에게 하는 것으로 들을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설교와는 달리 구체적으로 그 비전에 대한 하나님의 소원을 명확하게 보게 한다.


3. 가족 성경 공부 이다.


가족 성경 공부의 경우는 나 뿐 아니라 온 가족들과도 함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소원을 공부하고, 함께 생각하며, 나 개인만이 아닌 온 가족이 헌신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한다. 가족이 함께 하나님의 소원의 비전을 보게 한다. 가족이 함께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험하게 만들고, 함께 고민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온 가족이 마음을 열고 함께 의논하며 우리 가족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을 고민하는 가운데 개인 만 헌신하고 가족이 협조해 주지 않아 섬김 가운데 생길 수 있는 여러 장애물들을 극복하게 만든다. 그리고는 가족이 함께 결단하게 만들에 더욱 성숙한 차원에서 온 가족이 헌신에 참여하게 한다. 이를 위해 리더는 가족을 위한 성경 공부, 배우자와 함께 하는 성경공부, 그리고 자녀들과 함께 하는 성경 공부 교제를 준비해야 한다


가정 성경 공부를 위한 책을 만드는 방법은
1) 성경 구약과 신약에 제시된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과 소원을 찾으라
2) 성경에 나타난 말씀을 상황(context)별로 구분(sort)을 하라.
어느 상황에서 어떻게 하나님은 말씀하셨고, 말씀의 청중들은 어떻게 응답하였으며, 그 응답에 대해 어떠한 결과가 나왔는지를 분류하는 것이다.
3) 분류 되어진 말씀에 맞추어 가정 성경공부 스케줄을 정하라.
전체적으로 약 4주 정도면 좋다.
너무 오랜 기간동안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지치게 만들기 때문이다.
가정 성경 공부 시간은 약 20분 정도로 하라.
일주일에 3번 정도 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
가족과 의논하여 시간을 약속하여 헌신(commit) 하도록 하라. 가족 성경공부 순서는 간단한 경건의 기도, 그리고 말씀, 나눔,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위한 축복 기도로 마치는 것이 좋다.
마지막 날은 가족 애찬식을 하라


둘째: 비전을 마음과 생각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만드는 경험 이다.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경험(experience)이라는 도구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어떠한 과일이 맛이 있다 하여도 안 먹어 본 사람은 그 과일을 사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 번 조금이라도 그 과일의 맛을 본 사람은 그 과일을 사는데 주저하지 않게 된다. 마찬가지고 어느 새로운 일을 계획하고 상대방의 동참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분명한 명분과 그 가치의 제시와 더불어 생생한 경험이 매우 중요하다. 경험(experience) 은 속도(speed)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된다. 밤에 운전을 할 때 초행길은 매우 어렵다. 하지만 그 길을 다녀본 운전자는 그 길을 어둠 속에서도 필요에 다라 속도를 내서 달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 경험은 바로 새로운 비전에의 추진에 대해 속도를 내도록 하는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언젠가 한번은 윌로우크릭 교회에서 경험했던 좋은 전도 프로그램을 어느 목사님에게 알려 드린 적이 있었다. 전화로 자세하게 설명하고, 문서로 그 방법을 만들어 드렸다. 그리고 후에 물어 보았다. 시도해 보셨냐고? 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유는 그 설명이 이해(understanding)는 되지만, 그 행사를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될지 몰라 못했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다시 조언을 덧 붙였다. “그러면 부 목사님들에게 이 방법을 주어서 하게 하시죠. 젊은 분들이기에 아마 잘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랬더니 그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그렇지 않아도 부 목사님들에게 주었는데도 — 잘 이해하지 못해요. 그래서 그냥 시간도 없고—”


맞다. 경험이 없으면 그 상황에 대한 그림이 잘 그려지지가 않는 것이다. 지도가 그려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에 어디로 가야할지 어디서 출발해야 할지 감(feeling)이 잡히지도 않는 것이다.


경험이 없으면 상상(imagination)이 많아지는데 문제는 부정적인 상상이 많아진다는 점이다. 자신에게서 주어진 새로운 제안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의해서 주어진 새로운 일에 대한 제안은 긍정적 상상 보다는 부정적 상상이 더 많이 제기 된다. 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는 많은 일들이 우리의 선입관(assumption)이라는 채(filter)를 거치다 보니 우리의 마음에 새로움에 대한 두려움과 더불어 그 제안을 한 사람에 대한 이해가 겹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편견(prejudice)이 작용하게 되고, 이는 부정적인 생각과 태도를 형성하게 한다.


그러면 어떻게 비전을 마음과 생각으로 그림 그릴 수 있도록 경험 시킬 수 있는가?


-  첫째 단계는, 일대일로 경험을 시키는 것이다.


1) 공동체 내에서 함께 비전을 향해 나아가야 할 대상을 먼저 분류하라. 이들은 비전을 이루는데 있어서 함께 공동체를 설득할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되는 이들이다. 이들은 공동체의 비전을 이루는데 있어서 꼭 동참해야 이 비전이 이루어질 수 있는 지원자(supporter)들이라 생각되는 이들이다. 


2) 이들을 일대일로 만나라. 좋은 장소를 선택하여, 좋은 식사를 하라. 그리고 침착하게 공동체 비전을 나누라. 그리고 이에 있어서 당신의 참여가 절대적으로 필요함과 중요함을 알게 하라. 믿음 생활에 얼마나 소중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를 알게 하라.


3)리더의 비전을 어느 정도 경험할 수 있는 외부에 있는 모델 그룹이나 행사에 파견하여 참여 경험 시키라. 우리 속담에 ‘한번 보는 것이 백번 듣는 것보다 낫다’ 라는 말이 있듯이, 경험은 비전의 가치와 방향을 그려내게 한다. 이 경우 그 경험을 위해서 재정적으로 공동체에서 50-100 % 지원이 바람직하다. 그만큼 가치가 있음을 알게 한다.


4) 다시 평가하고 비전을 나누라. 경험은 잠시 뿐이다. 따라서 이 모델 경험이 생생할 때 리더는 비전이 잘 그려지도록 그리고 개발 되도록 도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리더는 경험자와 오늘의 현실에서 어떻게 이 비전을 가꾸어 나가야 할지 의견을 나누면서 구체적으로 그 분야의 참피언으로 세워가라.


5)그리고 비전 그룹들과 함께 큐티(QT) 모임을 가지라. 함께 신앙이 공유될 때 같은 비전을 향해 갈 수 있게 된다. 이때 큐티는 그 시간 운영에 있어서 50%가 나눔이 시간이 되게 하라.


-  둘째 단계는, 공동체를 경험시키는 것이다.


1) 강사초빙 방법
공동체를 경험시키는 방법은 말씀을 통해 경험 시키는 것이다. 이 경우는 그 비전의 모델을 경험하고 있는 강사를 초빙하는 것이 좋다. 강사의 좋은 경험과 방향성은 공동체로 하여금 그림을 그려 낼 수 있도록 간접 경험을 생산한다. 1회성 보다는 2박 3일(3회) 정도 가 좋다.


2) 간증 방법
간증을 통해 공동체를 경험 시키라. 간증은 외부 모델그룹 혹은 행사에 참여하였던 회원 중에서 2-3명이 소수 핵심멤버에게 먼저 하는 것이 좋다. 물론 간증의 방향성은 리더와 먼저 의논하여 겹치지 않도록 하라.
그 후 영향력 있는 회원으로 하여금 다수 가운데 그룹의 비전을 나누도록 하는 것이 좋다. 리더가 해도 좋다. 그렇지만 회원들 가운데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비전을 나눌 때 공동체가 하나라는 느낌을 더 많이 주게 된다. 그리고 리더의 이야기에 더 많은 무게를 실어 주게 된다. 더 나아가 그 비전을 나눈 사람 개인이 이에 더 강하게 헌신하는 참피언 하나를 얻게 된다.
그 이후, 리더는 비전을 더욱 세밀하게 나누는 것이 좋다.


3) 외부 모델 참여
그 다음, 공동체 회원들 가운데 함께 팀을 이루어 비전을 이끌어갈 협력자 그룹을 외부 모델에 참가시켜 직접 경험시키라. 외부 모델을 이미 경험한 사람을 팀장으로 그 비전을 함께 이루어 나갈 수 있는 다른 회원들과 함께 다시 외부 모델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전을 위한 실행을 이루기 전에 그 비전을 이루어나갈 수 있는 경험있는 팀이 자연그럽게 구성이 되도록 만든다.


셋째: 비전 성취를 위한 분명한 구체적인 실행 계획과 TIME LINE 제시이다.   비전의 전달과 설득은 구체적인 실행 계획의 그림을 통해서 보다 설득력을 주게 된다. 구체적인 단계별 실행 계획은 멤버들로 하여금 리더의 계획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가능성과 성공에 대한 확신을 가져다 준다.
리더가 비전의 실행에 대한 마음이 앞서고 전체적인 흐름과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지 못하면 비전을 실행으로 옮기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반드시 리더는 비전의 실행을 위한 전체적인 실행 계획을 준비해야 한다. 클라우스 비치가 전쟁이 원칙에서 이야기 하듯, 목표물을 선정했으면 화력을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그 화력을 지속적으로 쏠 수 있도록 조직(system)을 만들어 주어야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것이다.


1) 구체적 실행 계획과 시간 계획
 마찮가지다. 리더는 비전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행해 나갈 것인지 그 구체 계획과 일정(time line)을 제시해야 한다. 이를 위해 리더는 어떻게 비전을 이루도록 실행해 나갈 수 있도록 먼저 구체적 실천 계획을 제시하라. 그리고 인적 자원 공급 방법을 제시하라. 그 후 물적 자원 충당 계획을 제시하라. 동시에 이러한 비전 운영 흐름에 있어서 어떻게 공동체가 어떠한 영적 그림 가운데 거하게 될지, 공동체를 어떻게 영적으로 채워나갈지 그 그림을 그려주라.
 사실 이렇게 해도 계획대로 진행되기가 쉽지 않다. 하물며 이러한 구체적 인적, 물적, 영적 환경의 그림을 가지지 않고서 어떻게 비전을 이루어 나가도록 그룹 멤버들을 설득하여 함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할 수 있을 것인가. 리더는 실행에 들어가기 이전에 아무리 자그만 한 계획이라 할지라도 이를 구체적으로 준비하기 위한 시간과 정열을 투자해야 한다.


2) 비전 실행 후 그림
리더는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 비전 실행이 이루어져가는 과정과 더불어 ?이후, 우리 공동체의 모양에 대한 그림을 그려 주어야 한다. 비전이 이루어지면서 그 다음 우리 공동체가 어디로 어떻게 나아가게 될지 까지 그림을 보여 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 보자. 교회의 행사 중 빠지지 않는 것이 구도자(seeker)를 초청하는 전도 행사 이다. 이행사의 이름이 총동원 주일이 되었건, 초청주일이 되었건, 파티가 되었건 교회는 구도자의 초청을 위해 다양한 행사를 진행한다. 그리고는 모든 홍보와 예산, 인력, 그리고 예배와 설교, 찬양 등 모두 초청된 대상들을 위해 집중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정작 교회에 온 이후 이들을 위한 예배 부터, 인력, 조직까지 그 후속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런면에서 리더는 비전의 실행 계획을 그 비전을 이루는 범위까지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 어떻게 이어질 지(follow-up)에 대해서 계획하고 이를 제시해야 한다.


이를 통해 공동체 구성원들은 리더의 비전이 보다 실현 가능한 계획(project) 임을 느끼게 되고, 그 꿈에 함께 참여하기를 원하게 된다. 더 나아가 내가 어느부분에 있어서 함께 헌신 할 수 있는지 그 자리를 찾게 되고, 동참하는 과정속에서도 지금 전체 그림 중 어느 시간대에 어느 위치에 와 있는지를 파악하게 횐다. 그러면서 공동체는 방향을 잃지 않고 지속적 헌신과 동시에 영적으로도 성장하게 된다.


넷째: 지속적인 설득이다.


마지막으로 설득의 과정 중 리더에게 중요한 것은 지속적인 설득 방법이다. 전쟁에서 이기는 방법은 화력을 지속적으로 지원해 줄 수 있는 조직이다. 마찮가지로 비전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비전을 한번 제시하고 마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측면에서 그 비전의 중요성과 가치를 지속적으로 나누어야 한다. 지속적인 설득은 상대방에 리더의 소명에 대한 확실성을 더하여 주기 때문이다.


언젠가 한번은 교회에서 많은 사역 부분을 감당하고 있던 한 자매가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이웃을 전도하여 소그룹을 하고자 하는 열정이 가득하게 되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 자매가 현재 교회의 사역을 뒤로 놓고 전도와 구도자 성경공부를 인도하게 되면 교회에서 그동안 해 왔던 이 자매의 사역을 대신할 사람이 없어 만류하였다. 하지만 자매는 몇 주가 지나 다시 자신에게 주시는 구도자를 향한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해 사역자에게 이야기 하였다. 사역자가 다시 사람을 구할 때 까지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요청하였다. 다시 몇 주후 자매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열정을 이야기하며 전도를 통한 소그룹 사역을 밀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 후 사역자는 그녀의 열정과 확신을 보면서 구도자(seeker)를 위한 소그룹 사역을 맡겨 주었을 뿐 아니라 교회의 목회 한 파트로 삼고 그녀의 소그룹 사역에 대해 지속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비록 시간이 조금은 걸렸지만 이와 같이 자매의 지속적인 설득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 비전에 대한 그녀의 신뢰를 증가 시켰을 뿐 아니라 그 비전에 대한 동역자까지 얻게 한 것이다.


그러면 이처럼 비전을 실행으로 옮기기에 쉽지 않은 현실적 여건 속에서도 비전을 향한 지속적 설득의 리더쉽은 어디서 나오는가?


-  1) 묵상과 기도를 통한 소명의 지속적 확인
이를 위해 리더가 해야 할 중요한 자리 중 하나는 지속적으로 말씀 묵상과 기도속에서 재차 하나님의 소원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흔들림 없이 일관성 있게 설득해 나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가 생긴다. 그렇지 않으면 때때로 상황이 어려울 때마다 리더의 마음이 흔들리게 된다. 그리고 비전의 방향을 잃게 되고, 급기야는 없었던 일로 돌아가게 되기도 한다. 이유가 어디 있는가? 리더의 분명한 소명의 부족이 그 한 원임이 됨이 분명하다. 어려움 상황에서 흔들리지 않고 지속적인 비전을 향한 리더의 간절함과 지속적인 설득은 바로 분명한 리더의 소명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  2) 낙심치 않는 지혜
다른 하나는 리더의 낙심치 않는 지혜이다. 성경에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지니 하신 말씀대로 반대 속에서도 낙담하지 않는 여유 있는 믿음의 지혜이다. 반대를 두려워하지 마라. 모든 사람이 처음 시도하려는 모든 것에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기억하면서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응답할 수 있음을 기억하라. 비전은 새로운 모습으로 나아가는 길이기에 변화에 대한 두려움들과 부딪히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러한 마찰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따라 그 결과가 완전히 달라진다. 반대자를 미워하지 마라. 그 비전의 가치와 중요성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리더에게 그 비전의 중요성가 가치에 대해 설득을 위한 시간이 좀더 필요함을 알려주는 신호임을 기억하라. 일관성 있게 지속적으로 이 비전에 대한 소명과 중요성, 그 가지를 알게 하라. 그리고 우리 공동체에서 그 비전을 이루어 가기에 그들의 도움과 기도가 절실히 필요함을 지속적으로 알게 하라. 그리고 함께 주님의 나라를 위해 나아야가할 동역자로 지혜롭게 양육하라. 간절함은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가져온다.


오늘날 리더에게 가장 중요하게 요청되는 것은 비전이다. 그래서 어디를 가도 인터뷰에서 가장 중요하게 묻는 질문중 하나는 ‘당신의 비전이 뭐요?’라는 질문이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서 비전만큼 중요시 여기는 것은 그 비전을 공동체 내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해 나아갈 지에 대한 설득의 과정에대한 물음이다: ‘어떻게 그 비전을 이루어 가실 거죠?’ 


이처럼 비전의 나눔과 설득의 과정(vision casting)은 비전을 만드는 과정(vision making) 만큼이나 중요하게 되었다. 사실 그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설득의 과정은 바로 비전을 실행시키는 결정적인 다리(bridge)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전을 만드는 만큼 설득을 위한 과정 역시 시간과 정열을 드려야 한다. 설득을 위한 전략(strategy)들을 연구 해야만 한다.


그런 면에서 리더는 그 비전의 실행을 위한 설득을 위해서 1) 그 비전의 분명한 성서적 근거와 우리 공동체에 대한 그 비전의 분명한 가치를 제시하고, 이에 2) 대한 모델을 경험 시켜야 한다. 그리고 3)구체적인 실천 방법과 일정 (time line)을 제시를 통해 설득하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4) 이러한 설득은 한번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반복되어져야 한다. 한번 두 번 반대를 하여도 지속적인 설득이 변화를 일으키는 중요 요인임을 기억하라. 특별히 변화는 시간을 요구한다. 아무리 지도자의 마음은 급하다 할지라도 공동체는 경험과 설득의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인내를 가지고 침착하게 설득을 통해 공동체가 한 꿈을 꾸고, 한 마음으로 비전을 실행 시키는 방향으로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설득의 과정을 융통성 있게 적용하라. 순서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상황과 대상에 따라서 융통성 있게 적용할 때 더 효과적이 될 것이다.

[오창희] 다니엘 콤플렉스

이코스타 2004년 8월호

내가 알던 어떤 후배 가운데 신앙이 좋은 약사 자매가 한 명 있었다. 그 자매는 대학을 졸업하고 이제 새로이 약국 일을 시작하기 위해 기존의 다른 약국을 그대로 인수하기로 하고 대금을 치렀다. 마침 그 약국의 전 소유주도 크리스천이었기 때문에 모든 매매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마지막 인수인계를 하던 중, 약국과 관련된 업무를 하던 관공서에서 어떤 공무원이 조사를 나왔다. 그런데 이 사람이 업무가 끝났는데도 가지 않고 계속 서성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자매는 처음 이런 일을 경험하는지라 ‘왜 그럴까’ 하고 의아해 하고 있는데, 전 소유주가 저것은 이른바 떡값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라고 귀띔해 주었다. 이 자매는 ‘내가 왜 뇌물을 주어야 하냐!’ 하면서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러자 전 소유주가 ‘만일 다니엘처럼 완벽하게 할 수 없다면, 꼬투리 잡히지 않기 위해서 적당히 돈을 주어야 한다.’고 조언해 주었다. 그러면서 아직도 세상 물정 잘 모르는(?) 이 자매를 위해 대신 돈을 집어 주었다고 한다.


이런 일은 비단 이 자매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 속에 살고 있는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겪고 있는 일일 것이다. 뇌물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지만 막상 세상 속에 들어가 살다보면 그것이 너무나도 힘들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처음에는 고민하던 사람들도 점차 순수성을 포기하고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게 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뭐니 뭐니 해도 손해 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금전상이나 혹은 다른 불이익이 가장 두려운 것이다. 두 번째는 나 하나 잘한다고 세상이 달라지느냐 하는 패배의식이다. 세 번째는 오늘 예에서 나온 것과 같은 ‘완벽하지 못할 바에야 적당하게 살자’는 자포자기 의식이다. 나는 특별히 이것을 ‘다니엘 콤플렉스’ 라고 부르고 싶다. 그리고 이 글에서는 이것에 대해 좀 말해보고 싶다.


구약성경 다니엘서에 보면, 다니엘이 얼마나 정직하고 성실하고 능력 있는 인물이었던가 하는 것이 잘 소개되어 있다.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여 총리들과 방백들 위해 뛰어나므로 왕이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한지라. 이에 총리들과 방백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얻고자 하였으나 능히 아무 틈, 아무 허물을 얻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단 6:3-4)


탁월한 업무 능력에 성실성, 그리고 순수성을 겸비한다면 이보다 더 바람직한 직장인의 모습이 어디 있겠는가? 자신의 일에 능력이 있으면서도 아무런 흠잡을 일이 없이 정직하고 완벽하게 모든 일을 행하는 이러한 다니엘의 모습이야 말로 모든 세상속의 그리스도인들의 모범이 될 만하다. 이 다니엘은 세상 속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잘 제시해 주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다니엘의 훌륭한 모범이 때로는 반대의 효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다니엘은 너무나 완벽하기 때문에 보통의 사람으로서는 감히 접근할 수 없는 별종의 사람처럼 인식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성경을 읽으면서, ‘나도 다니엘처럼 살아야겠구나!’ 하는 것을 느끼기 보다는 ‘다니엘이니까 그렇지, 나 같은 사람이야 뭘’ 하는 의식으로 대하게 된다. 그렇다 보니, 이 다니엘의 모범은 나의 삶의 모델이 아니라 거꾸로 나의 현실을 정당화시키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하는 것이다.


앞에서 제시된 자매의 사례는 그것을 단적으로 잘 보여 준다. 그 그리스도인의 경우에 있어서, 다니엘의 모범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어떤 표준이 아니라 거꾸로 그 모든 노력을 포기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다니엘처럼 완벽하게 모든 법과 규범을 지킬 수 없다면, 아예 포기하고 적당히 뇌물을 주면서 살자. 이것이 바로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세상과 타협하게 만드는 전형적인 의식, 즉 ‘다니엘 콤플렉스’이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흔히 경험하는 심리의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비가 와서 질퍽한 길을 신발이 젖지 않도록 애쓰면서 걷는 사람이 있다. 조심스럽게 걸어왔지만 그러나 곧 한쪽 신발이 진흙 속에 들어가 버린다. 그러면 그는 나머지 한쪽이라도 지키려고 하기 보다는, ‘에라 모르겠다.’ 싶어서 일부러 두발을 다 진흙 속에 넣어 버린다. 그러면서 점차 진흙 속에 걸어가는 것을 즐기게 된다. 그와 더불어 조심스럽게 걷고 있는 다른 사람에게도 흙탕물을 뿌려 억지로 자기처럼 되도록 만들고자 한다.


이것은 많은 세상속의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점차 세상과 타협하게 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처음 대학을 졸업하고 세상 속에 들어갔을 때는 신자로서 깨끗하게 살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곧 일부의 순수성이 무너지면서 자책감에 빠지게 된다. 그와 더불어 ‘에라 모르겠다, 나는 어차피 다니엘처럼 될 수 없다’는 심정으로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게 된다. 그러다가 그 속에 오래 있으면서 이제는 그것을 즐기게 되고, 좀 더 심한 경우는 다른 노력하는 그리스도인을 보면 억지로라도 자기처럼 만들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점점 세속화되는 과정이다.


우리가 이러한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다니엘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보다도 완벽하지 못함에 대한 절망이 다른 극단으로 흘러버리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 가운데는 다니엘처럼 완벽하게 법을 지키면서도 일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 대다수의 보통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설 수 있는가?


먼저 우리는 모든 면에서 완벽할 수 없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 가운데 과연 모든 면에서 완벽할 수 있다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까? 영역을 좀 더 좁혀서 세상의 법과 규범에 한정한다 하더라도 그것들을 완벽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드물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다니엘처럼 완벽할 수 없음을 처음부터 인정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다.


두 번째, 주님도 우리가 완벽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신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시기에 죄를 전혀 짓지 말라고 말씀하시기 보다는 지은 죄를 고백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족하다 하더라도 주님이 그것을 이해하고 계신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세 번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가 올바로 살도록 노력하기를 원하시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연약함에 대한 인식이 자포자기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올바른 삶에의 노력으로 이어지려면, 주님은 우리가 연약한 가운데서도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고 계신다는 것을 언제나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주님은 우리의 완벽함을 기대하시기 보다는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올바로 살도록 노력하는 것을 기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약함 가운데서도 최선을 다해 올바로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네 번째,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그것을 숨기려 하거나 혹은 자신의 무능력에 대해 절망하지 말고 그것을 회개하고 곧바로 올바른 길로 들어서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나의 죄를 짓고 그것을 숨기려고 하면, 그보다 더 큰 죄를 계속 지을 수밖에 없다. 다윗은 밧세바와의 불륜을 숨기려다 결국 충성스러운 부하를 죽게 하는 더 큰 죄를 짓고야 말았다. 만일 자신의 약점을 숨기려고 뇌물을 준다거나 다른 부정한 일을 한다면, 그는 그것이 또 다른 올무가 되어 점점 더 개미지옥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는 영원히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더 큰 죄로 이어지기 전에 그 죄를 회개하고, 때로는 법적인 처벌을 달게 받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볼 때 그 사람을 비판하고 비난하기 보다는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깨닫고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를 하면 그를 다시 받아들이려는 수용적 자세를 취해야 한다. 우리가 한 가지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것을 솔직히 고백하기 보다는 그것을 숨기려고 계속 다른 죄를 저지르게 되는 이유가운데 하나는, 그것을 고백했을 때 오게 될 비난이 너무나 두렵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사회의 분위기에서는 간혹 언론에 어떤 사람의 과실이나 범법사실이 알려지면, 지나칠 정도로 그 사람에 대한 극심한 돌팔매질이 이어지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어떤 사람은 과실이 언론에 공개된 후 거의 사회적으로 매장되다 시피 하는 경우도 있다. 이 때문에 그것이 두려워 잘못을 숨기려고 제 2, 제 3의 범죄를 계속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의 잘못을 보았을 때, 정말 습관적이고도 악의적인 범죄가 아니라 실수에 의한 것일 때는 그 죄는 미워하고 분별하되, 나도 그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사람들 가운데는 100가지 일 가운데서 99가지 일을 다 잘 하다가 한 가지를 잘못해서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있는 반면, 100가지 가운데서 10가지의 잘못을 저지르고도 알려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10가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1가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비판할 자격이 있을까? 그러므로 내가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을 안다면 다른 사람의 완벽하지 못함에 대해서도 다소 이해심을 가지고 접근할 필요가 있다.


나는 기독교세계관을 비교적 오랫동안 공부하면서 나름대로 성경말씀대로 올바로 살려고 노력해 왔지만, 노력하면 할수록 내가 그것을 완벽하게 다 지킬 수 없음을 느낀다. 그것은 마치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도리어 그것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로마서의 말씀과 마찬가지이다. 아마도 ‘성자’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일수록 ‘고백록’이니 ‘참회록’이니 하는 책들을 쓰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이러한 연약함 가운데서도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길은, ‘all or nothing’식의 다니엘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나서 연약함 가운데서도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일 것이다.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연약함이 나타날 때에는, 그 부족함과 연약함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서, 그 죄를 반복하지 않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그리고 자신 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이런 자세로 임한다면, 좀 더 이해심 있으면서도 함께 밝아지는 사회가 되지 않겠는가?

[성인경] 종교 다원주의를 조심하자

얼마 전에 라브리에 찾아온 한 학생은 종교다원주의에 심하게 노출된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교회를 다니면서도 법당에도 들랑거리고 도교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종교를 마치 ‘자동차 보험’처럼 ‘영혼보험’을 드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될 수 있으면 여러 개의 종교를 믿어두는 것이 내세에 대한 확실한 투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오늘날 기독교의 위기는 현대인들이 너도 나도 다원주의의 독주에 취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종교다원주의’의 술통에 빠지는 것입니다. 아침에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던 사람들이 오후에는 법당에도 기웃거리고 조상 제사에도 참여합니다. 그리고 아침에는 향교에서 제를 올리던 사람들이 오후에는 성찬식에도 참석하고, 아침에는 요가 수련을 정진하던 사람들이 오후에는 교회에 와서 예배도 드리고 갑니다. “종교는 다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세계적인 종교 지도자나 석학들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앞 다투어 종교 간의 대화를 한다며,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약 2년 전쯤에, 세계적인 종교 지도자로 알려진 달라이라마와 특별 면담을 가진 한국인이 있었습니다. 철학자이며 한의사이기도 하고, 현재는 교수로 일하고 있는 석학 도올 김용옥 박사였습니다. 그 두 사람이 만나서 의기투합한 것은 “기독교가 종교 간의 대화에 가장 비협조적인 종교다.”고 한 것입니다.


달라이라마는 기독교와 대화하기 힘든 이유를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문제는 신(神)에 대한 해석입니다. 불교처럼 신(神)을 추상적인 진리체계로 말하면 대화가 쉬워지는데 기독교는 하나님을 인격적 존재로 주장하기 때문에 내가 건드릴 수 없는 영역으로 건너가 버립니다.” 김용옥은 기독교의 역사성이 불편하다는 것을 감추지 않았으며, 하물며 불교에서도 구원을 기대하지 않는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인류의 모든 고전을 탐색하고, 모든 종교의 성전을 이해하려는 뜻은, 바로 경전의 진정한 이해를 통하여 인간이 경전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신념에 있는 것입니다.”


그 두 사람은 “종교 간의 대화를 하려면 신의 인격성이나 역사성을 논하기보다는 진리체계나 영성훈련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논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이야기까지 나누었습니다. “불교는 창조주도 구세주도 초월자도 없습니다. 무신론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신이 없어도 인간에게 무한한 영성을 줍니다. 그러기에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신앙을 유지하면서 단지 영성의 개발이나 제고를 위하여 불교를 수용할 수가 있습니다. 불도(佛徒)들도 자신들의 신앙을 버리지 않고도 기독교의 영성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날 종교다원주의는 겉으로는 “자기 종교의 고유한 신앙을 지키면서도 서로 배울 수 있다.”고 말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어디에도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진리는 상대적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절대가 있다고 말하면 배타적이라고 몰아붙입니다.


둘째, 구원에 이르는 길은 다양하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종교마다 구원에 이르는 각기 다른 길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구원의 유일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며 기독교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셋째, 종교는 단지 과학이거나 철학이라는 것입니다. 불교는 ‘마음의 과학’, 즉 심리학이며, 기독교는 ‘서양 철학의 산물’ 즉 그리스 신화와 같은 것이며 예수는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종교다원주의는 두 가지로 나누어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일부 지식인들 중에 종교의 배타성을 극복해 보고자 하는 뜻에서 주장하는 단원적 다원주의(monistic pluralism)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종교는 달라도 결국 신은 같은 것이라고 하는 ‘산에 오르는 길은 달라도 정상은 하나뿐이다.’는 생각입니다. 대부분의 종교다원주의자는 여기에 속합니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서는 개인성, 다원성을 자랑으로 여기는 현대인들이 주장하는 다원적 다원주의(pluralistic pluralism)가 번창하고 있는데, 종교마다 신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산에 오르는 길도 여러 가지이고 정상도 여러 가지이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속합니까? 성경을 성경대로 믿는 사람이라면 앞의 두 입장과는 다르게 길도 하나이고 정상도 하나뿐이라고 하는 절대주의, 즉 예수님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구원의 유일성과 절대성을 믿습니까?


그러면 절대주의를 믿으면서도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먼저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면 무엇이든 사랑으로 양보하고 넓은 마음으로 대화하고 관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안별로 정책 연합도 하고 사회 활동도 같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진리를 양보하거나 타협하면서까지 타 종교와의 대화를 시도하거나 연합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바울사도가 에베소서 4장 15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는” 지혜가 필요한 때입니다. 어느 때보다도 진리를 지키되 사랑으로 지켜나가는 지혜, 즉 바른 기독교 세계관이 필요한 때입니다.


여러분은 다원주의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