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세진]코스타 학생 중보 기도팀

이코스타 2007년 4월호

2003년 처음 코스타를 참가하면서 4번 코스타에 참석했습니다. 두번째 참여하였을 때였는데 한 간사님께서 저에게 해마다 코스타에서 다른 부분을 섬겨 보라고 말씀하셨었습니다. 그래서 작년엔 무엇을 해 볼까 정탐을 하다가 덜컹 코스타 중보기도팀에서 섬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담당 간사님께 메일을 드렸었습니다.


안녕하세요? 학생 중보기도팀으로 섬기고 싶은 소망이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제가 코스타 중보 기도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어서 문의 드립니다. 코스타 기간 중에 , 중보 기도로 섬기고 싶은데요. 제가 할 수 있나요?


권유에 의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하겠다고 하면 당연히 좋아하며 반겨 주실 거라 생각했는데 위와 같은 메일을 보내고 두달을 기다렸는데 코스타에선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었는데 대답이 없자, 난 자격이 안되나 보다 하는(?) 마음에 조바심이 들어서 두 달뒤에 다시 짧게 메일을 보냈습니다.
저에게는 소위 말하는 중보기도로의 부르심이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내가 뭔가를 기여해야 하고 싶다는 생각, 아니 뭔가를 해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학생 중보 기도팀에 참여?결정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참여한 코스타 학생 중보기도팀에서 배우고 느낀 것들을 나누고 싶어서 이 글을 씁니다.


무슨 일 때문인지 저의 메일은 배달이 되지 않았던 것이고 코스타가 코 앞에 다가 왔을때 담당 간사님으로 부터 응답의 메일이 왔습니다.


중보기도로 섬기시는 지체께서는 중보기도 헌신자 조에 구성이 되십니다. 중보사역팀장님과 다른 중보자들과 조가 되어 생활하시게 되고, 골방 기도에 많은 시간을 헌신하시게 됩니다.


응답 메일을 받고 참 이상하게도 전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  중보 기도 헌신자 조 = 죽으러 가는 특수 부대
-  중보 기도 사역 팀장 = 특수 부대를 아주 강하게 훈련시키는 교관
-  골방 기도 = 전쟁


메일의 문구 하나 하나가 이렇게 다가 왔습니다.
애드만 채플 뒤 중보 기도실로 갔더니 수십명의 집사님, 권사님, 목사님들께서 찬양을 부르고 계셨습니다. 그 찬양 소리는 전쟁에 나가는 군사가 부르는 군가로 들렸고 곧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고 완전 공포에 싸여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볼 눈을 잃고야 말았지요. 지금 생각해도 너무 이상합니다. 평상시 저에겐 기도가 두려운 적은 없었고, 어찌보면 기도에 자신이 있었는데 왜 그렇게 저를 완전히 마비를 시켰는지요.


이젠 어쩐다지 이미 시작되엇으니 빠져나갈 수도 없고 …


그리고 첫날 저녁 학생 중보 기도팀을 담당하신 집사님께서 저희들에게 과제를 주셨습니다. 수요일까지 기도와 묵상을 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 코스타 참석자들을 위한 기도 제목, 한반도와 조국을 위한 기도 제목을 가져오라는 과제였습니다. 이건 또 무엇인가 … 꼭 무슨 환상이라도 봐야 하는 것 같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이 눈 감으면 보이는 그런 신비한 능력이 요구되는 것도 같으니 난 그런 것 못하는데 어쩐다지…


아주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지우고 그렇게 첫날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둘째날이 되었습니다. 말씀을 받아야 하는데 도대체 아무것도 안보이고 안들리고 중보 기도는 커녕 걱정과 부담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남들을 위해서 기도하겠다고 자원한 일인데, 남들을 위해 기도할 여력은 하나도 없었고 당장 나에게 떨어진 과제에 눌려버린 저 자신을 보는 것도 한심하고 창피하였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골방 기도실을 찾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지금 기도를 할 수가 없고, 너무 두렵습니다. 하나님 마음을 보아야 하는데 아무것도 안됩니다. 저 못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교만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기도해 주는 것이라 생각했고, 제가 너무 우쭐했습니다. 전 제가 남들을 위해 기도 할 만한 쬐끔 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전 하나도 못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하나님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 사태를 수습시켜 주세요.


이렇게 나의 적나라한 모습을 인정하고 모든 것을 내려 놓고 나자 저에게 평안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저에겐 여전히 숙제는 남아있었습니다.
수요일 아침이 되었습니다. 숙제는 제출해야 하겠기에 몇가지를 정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거룩과 자유 그리고 구원에 대한 말씀이 자꾸 머리를 채웠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누가 복음 4: 18,19)


중보 기도팀 오전 모임에서 위의 몇가지 말씀들을 숙제 제출하는 심정으로 내 놓으면서, 하나님 알아서 해결해 주십시요. 하나님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싶습니다 계속 기도를 했고, 중보 기도팀께는 솔직하게 저의 상황을 이야기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중보 기도팀 담당 간사님께서 그렇잖아도 월요일 저녁 저의 얼굴을 보고 중보 기도하러 온 사람의 얼굴이 아니어서,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저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학생 중보 기도 자원자는 모두 5명이었습니다. 그렇게 5명이 각자에게 주신 말씀과 기도 제목을 모두 적어서 내었고, 그날 하루 학생 중보기도팀 담당 집사님께선 그 기도 제목을 두고 기도를 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오후가 되었습니다. 집사님께선 어떤 것은 구체적인 기도의 제목으로 어떤 것은 주제를 가지고 저희들에게 주셨고 저희들은 저녁에 모여서 다시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다시한번 하나님께 확인을 하는 과정이었지요.


너무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5명이서 골방 기도실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1번 부터 5번까지의 기도 제목 하나 하나가 각자 각자에게 주신 것이라는 확인을 하기 시작하였고 강한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오호 이건 뭐지.. 어 신기하다..


하나님의 마음이 보이자 흥분하기 시작했고 두려움은 이제 어디로 갔는지 없고 기쁨이 저를 채웠습니다. 너무 재미있고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목요일 북한을 위한 금식 기도 시간에 저희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선포할 수가 있었습니다.


코스타의 중보 기도는 약한 자를 위해, 그들을 불쌍히 여겨서 대신 간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코스타의 중보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가는 과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아주 커다란 영적인 강을 통해 흐르고 있을때 그 마음을 읽고, 하나님 당신의 뜻이 이루워지는 것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저는 기도는 비장한 각오로 웃을 겨를 없이, 엄숙하고 눈물을 흘릴 정도의 정성은 꼭 있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순간부터 기도는 어떤 코메디 쇼 보다 저를 더 유쾌하게 만들고 웃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시고 계시는 것은 쇼가 아니고 실제였기 때문에 정말 기도는 재미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디모데 전서 2:5)


성경에서는 중보에 대해 남을 위해 대신 그들이 잘 되기를 간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 중보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게 계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 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 디모데 전서 2:4 )


바로 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시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중보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


내가 뭔가를 코스타에서 기여를 해야한다는 생각에 시작했던 중보 기도팀 참여를 통해 전 참된 중보의 의미를 알게 되었고,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제는 무릎을 꿇고 골방으로 들어가서 엎드려 하는 기도자 뿐 아니라 , 하나님의 뜻이 그토록 사랑하시는 이 세상에 이루워 지게 하는 삶 가운데의 중보자가 되고 싶습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조한상] 직선적 사고에 의한 신앙의 위험성 (물질주의)

이코스타 2007년 4월호

박사 과정 초반, Qualifying exam 때 있었던 일이다. 전자공학에서 신호처리를 전공하는 내게, 한 교수는 몇가지 시스템에 관한 정의와 예제들을 풀 것을 요구했다. 천만다행으로 그 문제들을 나름대로 잘 풀고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한가지 질문이 더 주어졌다. “이 정의들이 모든 시스템에 적용되나?”라는 문제였고, 나는 조금 생각한 후에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qualifying exam을 보기 좋게 떨어졌고, 2차 시험을 기다려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 문제에 대한 답은 ‘그 정의들은 선형 시스템 (linear system)에만 적용되는 것이지, 비선형 시스템 (nonlinear system)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라는 대단히 기본적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접하고 있는 ‘입력이 A이면 출력이 B이다.’라는 멋진 공식들은 모두 선형(linear) 시스템을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한 댓가를 톡톡히 치루어야만 했던 것이다.


물질주의를 진리로 여기고, 과학 만능 주의가 지배하는 현 시대의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는 구조의 한가지 특징이 바로 ‘직선적 사고’이고, ‘수량화’이다. A라는 입력이 있으면, 반드시 B라는 출력을 기대하는 ‘직선적 사고’는 과학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구석 구석에 배어있다. 또한 어떤 상황이라도 수량화하고 분석하려는 경향이 자신도 모르게 우리에게 있음을 보게된다. 예를 들어 보자. 한 고등학교 선생님이 3학년 담임을 맡게 되었다고 하자. 학생들 한사람 한사람이 소중하므로, 각각을 인격적으로 대우해 주겠다고 마음먹고 새로운 학기를 맞이한다. 하지만, 수십명의 학생 각자의 처지를 돌아보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선생님은, 곧 몇가지 기준으로 학생들을 평가하기 시작한다. ‘공부는 잘하는지, 지각은 하지 않는지, 말썽을 부리지는 않는지…’ 등등. 그리고는, 그 학생이 ‘왜 공부를 열심히 하는지, 아니면 왜 공부를 못하는지. 혹은 어떤 특별한 사정에 의해 지각을 하는지, 아니면 관심을 끌기위해 말썽을 부리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공부 잘하고 지각 않하고 말썽부리지 않으면(A), 좋은 학생이다(B) 라는 직선적 사고를 가지고 학생들을 ‘수량’으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좋은 학생’을 어떻게 정의하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단지 공부 잘하고 지각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좋은 학생’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선생님이지만 어쩔 수 없다. 또한, 공부 못하고 지각하고 말썽 부리는 학생을 대하는 선생님은 그 해결책으로 몇 가지 프로그램을 구성한다. 보충수업을 진행하면서, 성적이 올라갈 것을 기대하고, 체벌을 통해 지각하지 않게 독려하며, 반성문을 쓰게 하여 말썽이 줄어들 것을 기대한다. 물론, 이 선생님도 그런 프로그램들이 눈에 띠는 결과는 내겠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물질주의가 팽배한 세상을 살아가는 크리스찬들이 빠질 수 있는 위험성들 중의 대표적인 것은 ‘기복주의’일 것이다. 물질적 복과 성경적 복을 구분해 내지 못함으로써, 돈을 많이 벌고 외모가 출중하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복으로 착각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물질주의의 위험성을 한가지 더 생각해 본다면 직선적 사고에 의한 ‘프로그램화’와 ‘수량화’가 아닐까 싶다.


현대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학자 중의 한명인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기독교의 미래’라는 저서에서 이런 직선적 사고를 경고한 바 있다. 그는 한 예로, 최근 10년 이상 영국과 미국 교회를 강타했던 Alpha를 예로 들었고, Alpha 코스의 문제점으로 ‘어느 시점에서는 어떠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 이후에 미국교회에서 진행하는 Alpha 코스를 수강했는데, 그 과정의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맥그래스의 지적처럼 직선적 결과를 기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매주 한 과정을 들을 때마다 그에 상응하는 반응을 예측하고 있는 듯 했다.


각 지역교회들 역시, 몇가지 프로그램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직선적 경향을 보인다. 예를 들어, 지역교회 성도들이 전도를 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그들이 ‘왜 전도를 하지 않는가’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기 보다는 ‘새생명 축제’같은 프로그램으로 문제를 쉽게 해결하려고 한다. 또, 성도들의 가정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아버지 학교’ ‘자녀 교육 과정’이니 하는 프로그램으로 문제 해결을 시도한다. 나는 그런 프로그램이 가치가 없다던가 어떤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특정 문제에 대한 근본적 고민없이 프로그램으로 해결하려는 태도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프로그램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그 문제의 근본에 접근하여 차근히 해결해 나가는 것에 비해 보다 수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쉽게 선택한 길은 결국, 물질주의의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도구화’ 혹은 ‘비인간화’의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한다. 즉, 몇가지 프로그램으로 당장은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무릎 꿇고 해결 해야만 하는 ‘다소 복잡하지만 근본적인 과정’을 무시하게 한다. 인격적인 관계는 선형(linear)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질주의에 의한 ‘직선적 사고’의 또 다른 문제점은, 한 개인의 신앙조차 ‘수량화’하려는 경향이다. 내 자신만 살펴보아도 잘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는 나의 믿음은 몇가지 단순한 현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아무리 성경공부를 열심히하고 기도 시간이 길어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본다. 반면, 짧은 기도 속에 하나님께 나 자신을 의지하는 깊은 신뢰의 시간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한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의 신앙을 평가하려는 우리 자신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 사람이 교회를 얼마나 열심히 출석하는지, 봉사를 얼마나 하고 있는지, 십일조는 하고 있는지, 새벽기도를 참석하는지에 대해 나름대로의 점수를 부과하여 그 사람의 신앙을 평가하려고 한다. 지역교회에서는 그런 경향이 더 강하게 나타나곤 한다. 한 지역교회를 참석하여 몇주만 지나면, 그 교회에서 신앙을 평가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지역교회의 경우, 새로온 멤버가 주일예배와 수요예배를 지속적으로 참석하고, 십일조를 내며, 선교기도 모임에 참석하여 선교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면 ‘정말 신앙이 좋다’라고 평가한다. 그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과 어떤 관계 속에 놓여 있는지는 크게 관심을 갖지 못한채 말이다. QT를 하는지,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지, 십일조를 하고 봉사를 하는지의 여부로 신앙을 평가하려는 경향은 분명 근,현대의 물질주의의 결과만은 아닌 것은 확실하다. 인간이 가진 종교성 자체가 어떤 행실로 그 가치를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자신이 율법을 얼마나 잘 지키고 있느냐에 따라 신앙을 평가하고 있었고, 그런 경향은 기독교 역사에 늘 있어왔다. 하지만, 그런 율법주의적 종교성이 현대의 물질주의를 만나 그 이론적 기반을 확립하고 더욱 심화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의 신앙은 몇가지 현상만으로 수량화될 수는 없다. 또한 우리가 지닌 문제들이 몇몇 프로그램으로 해결되지도 않는다. 우리의 신앙은 선형(linear)가 아니라, 인격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런 직선적 사고를 진리로 여기고 있고, 그런 흐름에 역행하면 뒤떨진 사람으로 취급한다. 그래서 이런 흐름에서 돌이켜 진리를 향해 나가는 것은 쉽지 않은 가시밭 길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힘으로는 결코 될 수 없는 일, 그래서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쉽지 않은 좁은 길을 가는 것이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는 것이기에, 그 길을 함께 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

[이정희, 김진태] 몇 권의 책으로 살펴 본 물질주의의 위협

이코스타 2007년 4월호

로날드 사이더의 책들 (김진태)


예레미야 35장에는 성경 전체를 통털어 딱 한번 등장하기 때문에 성경을 여러번 통독했어도 무심코 지나칠 수 있을 만한 족속인 레갑 족속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약간은 특이하게 전개되는 예레미야 35장의 이야기 가운데에서, 결론적으로 레갑 족속은 하나님의 칭찬을 듣고, 불순종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순종의 모델과 같은 존재로 세움받는다. 레갑 족속이 그렇게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술을 마시지 말라는 요나답의 명령을 순종한 데에 있었다. 당대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권하는 포도주를 거절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텐데도 그들은 자기 조상이었던 요나답의 명령에 신실했다. 성경 어디에도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술을 마시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구절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레갑 족속이나 혹은 세례 요한과 같이 술을 평생 마시지 않으며 더 높은 기준을 세운 사람들은 성경에 종종 등장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사용하셨다. 이것은 비단 술만으로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거룩한 기준을 세우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주님께서 귀하게 보시고 높이신다는 사실은 수많은 믿음의 조상을 통해 확인된 사실이다.


로날드 사이더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심이 많은 저자이다. 진정한 신앙은 삶의 변화를 필연적으로 동반한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그는 야고보서의 신앙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비교적 최근인 2005년에 쓰여진 ‘그리스도인의 양심선언 (The Scandal of the Evangelical Conscience)‘에서 그는 소위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삶과 통계학적으로 유의미한 차이가 없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비록 미국의 통계자료이기는 하지만, 이혼, 인종차별의 문제를 넘어서 가정폭력마저도 차이가 없다는 사실은 한국 그리스도인의 상황이 그리 나을 것 같지 않다는 점에서 더욱 충격적이다. 그는 이와 같은 현상이 교회가 복음을 전적으로 강조하지 않은 채 값싼 은혜만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생겼다고 진단하면서, 그리스도인이 상대주의, 물질주의, 개인주의와 같은 대중문화의 흐름에 동화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교회의 회복, 보다 구체적으로는 예수님의 중심되심을 강조하는 반대중문화적인 공동체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보다 10년 정도 전에 쓰여진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다 (Genuine Christianity)‘에서도 로날드 사이더의 어조는 그다지 다르지 않다. 현대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너져 있음을 드러내고 그에 대한 성경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려는 의도가 강한 ‘그리스도인의 양심선언’에 비해서,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다’는 보다 구체적인 원칙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 책에서 그는 11가지 원칙을 통해 개인, 가정, 교회, 사회 등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 영역에서 어떻게 균형잡힌 신앙을 가질 수 있으며, 그 신앙이 또한 어떻게 드러나야 할지를 고민하며 제시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달라야 함을 강조한 저자는 사실 로날드 사이더 이외에도 많이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비슷한 점을 강조한 또다른 저자들과 로날드 사이더를 다시금 구분지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사회정의를 향한 그의 관심이다.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다’에서도 드러났듯이, 그는 균형잡힌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연스럽게 사회정의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회정의의 여러 가지 측면 중에서 로날드 사이더가 특별히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는 경제적인 정의, 즉 가난의 문제이다.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던 1977년의 저작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 (Rich Christians in an Age of Hunger)‘에서 그는 전세계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훨씬 부유한 서구사회와 그 안의 그리스도인, 가난에 대한 성경적 관점, 그리고 현대 사회에 만연한 경제적 불평등의 구조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물질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거의 하지 않고 있다. 물질주의 세계관에 대한 그의 견해는 ‘그리스도인의 양심선언’에 오히려 더 명확히 드러나 있다.


At the same time, a new kind of materialism has taken root. Historic Christianity had been profoundly materialistic. The created world is good. God wants us to create wealth and delight in the bounty of the material world. But historic Christianity also placed firm boundaries on this materialism. Nothing, not even the whole material world, matters as much as one’s relationship with God. The Sabbath reminded people that once every seven days we should forget productive work and focus especially on worship of God. Happiness comes first of all not from material things, but from tight relationships with God and neighbor, and then thirdly from a generous sufficiency of material things. (From p. 88 of ‘The Scandal of the Evangelical Conscience’)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에서 로날드 사이더가 제안하고 있는 서구사회의 그리스도인의 책임 및 실천사항은 이 세계의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중요할 뿐만 아니라 물질주의에 맞서기 위한 좋은 대안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첫번째로 누진 십일조를 제안한다. 소득의 10%를 내는 십일조와는 달리, 소득이 많아질 수록 더욱 많은 부분을 후하게 나누자는 원리이다. 안타깝게도, 서구사회가 더 부유해진 지난 30여년동안 그리스도인이 나눈 소득의 평균은 3%에서 2.5% 정도로 줄어든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안타까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재정적인 나눔은 실천의 첫걸음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로날드 사이더는 개인적인 소위 ‘주머니의 회심’으로부터 더 나아가서, 공동체적으로도 가난한 자들을 향한 재정적 나눔과 자원봉사의 시간을 점차적으로 늘려나가는 동시에 정부 차원에서의 비슷한 프로그램을 늘려나가기 위한 청원을 할 것을 제안한다. 한 단계 더 나아가, 그는 그리스도인이 개인적인 차원과 교회공동체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이 세계를 보다 공평하게 만들 수 있는 사회적인 해결책에도 관심을 갖고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사회적인 관심의 일부는 최근에 그가 함께 편집한 ‘Toward an Evangelical Public Policy‘와 같은 책에 반영되기도 하였다.


다른 세계관에 비해서 물질주의는 한국교회를 이미 더욱 강하게 침투한 것으로 보인다. 70-80년대의 기복주의 신앙은 그 시작에 불과한 듯 하다. 현재에도 사회적/경제적으로 성공한 그리스도인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교회 안에서 더욱 주목받고 심지어 신앙의 모델로서 추켜세워지는 모습을 너무나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 결과로 세상의 성공을 통해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젊은 그리스도인의 모습 역시도 빈번하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성공을 추구하기 이전에 주님을 위해 거룩한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젊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그만큼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면에서 로날드 사이더의 메시지는 우리 각자와 공동체에게 큰 도전을 던져준다. 당신의 삶은 비그리스도인의 삶과 비교하여 어떤 거룩한 차이점이 있는가? 하나님께서 이미 허락하신 부유함을 당신은 얼마나 거룩하게 사용하고 있는가?


Jacque Ellul, “뒤틀려진 기독교, The Subversion of Christianity”, 1986 (이정희)


기독교의 왜곡은 나쁜 의도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그것은 더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모으고 성경에 노출시키고 기독교 종교 의식에 참여하도록 의도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옳은 것이며 바람직한 것인가? 자크 엘룰의 설명에 따르면 그것은 오히려 교회에 해로운 것이었다. 3세기에서부터 시작되어 현재에까지 계속되고 있는 복음의 메시지의 왜곡은 교회 지도자들의 권력, 도덕적 우위, 혼합주의 등에 대한 유혹에 철저하지 못한 태도로 제도 교회에서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것은 신약 성서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었으며 교회에 성공을 위해 그 자신의 중심 메시지를 포기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항상 나쁜 의도로 시작된 것은 아니었지만 성경의 메시지의 뒤틀림은 그 자체로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변화된 복음은 기본적으로 세상 속에 우리 자신을 그대로 두는 것과 똑 같은 것이었다.


교회가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공동체로서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는데서 벗어나 원래의 복음의 메시지에 충실해야한다. 세상의 질서에 거스르는 것은 사람들의 기대에 어긋나는 것이겠지만 그것이 복음이 능력을 갖기 위한 기본적인 전제조건인 것이다.


Tom Wright, “Simply Christian”, 2006 (이정희)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이 자유주의 진영이나 복음주의 진영를 막론하고 기독교 공동체 전체에 커져가고 있다. 한편 하나의 산업이 된 예수를 둘러싼 이야기가 그럴듯한 상품으로 미디어를 타고 진실을 호도하고 있어 신자와 비신자에게 혼란을 야기하고 있고 다른 한편 굳어져 가고 있는 현대의 교회의 갱신은 역시 교회의 기초인 역사적 예수, 나사렛 예수가 제공하기 때문이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복음주의권의 학문적 선봉에 서있는 Tom Wright의 신앙 입문서 Simply Christian은 저자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 성과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다른 책과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2부에서 제시되고 있는 God, Israel, Jesus and the coming of God’s kingdom 등의 주제가 역사적 사실이 최대로 복원된 상태에서 그를 둘러싼 다양한 견해들이 충돌하고 그 의미가 확인되는 상황을 잘 설명하고 있다. 예수가 이스라엘의 역사에 계시된 하나님의 약속을 현재화하여 자신의 삶 자체로 보여주고 있다는 해석을 광범위한 증거로 제시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나라의 기본전제는 자기 부인과 좁은 길로 감이다. 세상의 질서로서 강함과 부유함과 명예로움은 멀리해야하는 가치이다.

[신선묵]하나님과의 교제 시간 (Fellowship with God)

우리 학교 계간지에 변명혜 교수님께서 “서두르지 맙시다”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실으셨다. 우리 신앙 생활에서 바쁘게 열심히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적하게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우리가 시간을 쓰는데 너무나 실용적으로, 효과적으로 사용하려고 하다 보니까 우리의 시간 스케쥴에 당장의 결과와는 상관이 없는 한가한 시간을 넣지 못하고 살아간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만남과 교제의 시간을 갖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 삶가운데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한 고독(solitude)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과의 교제의 시간에 관하여 평소에 느낀 것들을 몇 자 적어본다.


첫째, 하나님께 시간을 드리는데 있어서 가장 힘든 점 중에 하나가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바쁘고 할 일이 태산같이 많은데 하나님께 시간을 드린다고 멍청히(?) 앉아서 귀한 시간을 보내기에 시간을 낭비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탈벗 신학교의 클라우스 이슬러교수는 “하나님과의 시간이 마치 시간의 낭비인 것처럼 생각되지만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물론 그 시간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깊이 체험하게 되는 때는 보람을 느끼지만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과 시간을 갖으려고 할 때에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고 상당히 건조하게 보내게 되게 되는데 그럴 때에 시간을 낭비했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이 삶의 제일 순위인줄 알지만 이렇게 효과적이지 않게 보내느니 다른 일들을 하면 어떨까 유혹이 다가온다. 그러나 사실은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과정들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향하여 발전해 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깨닿게 된다. 하루하루를 보면 쌓이는 것이 없는 것 같지만 이런 낭비된 것과 같은 시간들이 축척되어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해 지는 것이다. 친밀감은 어쩌면 낭비된 것과 같이 느껴지는 시간을 통하여 성장해 가는 것이다.


요사이 아내와의 친밀감을 위하여 함께 데이트하는 시간을 갖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우리가 할 일이 많지만 그래도 부부가 친밀한 관계를 갖는 것이 중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사실 할일이 태산 같이 밀려있는데 이 귀한 시간에 둘이 한가하게 논다(?)는 것이 잘 받아 들여지지가 않는다.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그 동안 밀린 일들을 하고 싶은 유혹이 많다. 한번은 내가 아내에게 “이 데이트 시간에는 물건 샤핑하는 데 시간을 보내서는 안된다”고 말하였다. 그랬더니 아내가 웃으면서 데이트하는데 왜 이렇게 율법적이냐고 반문하였다. 우리가 친밀감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율법적인 틀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한번은 그냥 커피솝에 앉아서 두 시간 동안 대화를 하였다. 한가하게 이야기하다보니 요사이 걱정하는 문제 앞으로 우리 가정, 또 자녀를 어떻게 키워가는가의 문제 등등 비교적 심각한 대화의 시간을 가지고 함께 기도하였다. 상당히 보람이 있는 시간이었다. 한가하게 시간을 함께 보내다보니 좋은 이야기도 하게되는 것 같다. 앞으로 시간을 지속적으로 갖기 위해서는 아마도 상당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때로 다른 일들이 발생할 때도 있을 것이고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따로 한가히 데이트하는 시간을 갖기가 힘들 때도 있을 것이다. 시간을 낭비한다는 느낌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또 어떤 때는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도 더 친밀해 지지 않고 거리감을 도리어 더 느낄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간이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된다. 하루 하루를 생각해 보면 필요없고 낭비처럼 느껴질 수가 있을 테지만 결국은 그런 시간을 통하여 부부간의 친밀감이 개발되고 발전해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위해서도 당장의 결과에 상관없이 구별된 시간이 필요하다.


둘째, 하나님께 시간을 드리는 것을 통하여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삶을 배운다. 헨리 나우엔은 “고독의 훈련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게 한다”고 하였다.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고 하면서 사실은 맡기지 못하고 우리가 걱정하고 문제를 다 해결하려고 든다. 그래서 바쁘게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배우고 실행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우리의 삶을 맡기는 것이다. 그것의 구체적인 표현이 하나님께 헌신된 시간을 드리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알짜와 같은 귀한 시간을 드림으로써 우리는 우리 삶을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 당신이 나의 삶의 주관자이십니다. 당신이 제 삶을 책임지십니다. 내가 열심히 뛰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중요합니다. 그래서 나의 시간을 당신께 드립니다.” 이럴 때에 그 곳에서 안식과 지혜가 발견된다. 그리고 그 안식을 가지고 우리의 인생을 아름답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안식과 열매맺는 삶의 비결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시간을 드리는 것이다.


수영을 하면서 하나의 깨달음이 있었다. 수영을 배우면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수영 코치한테서 팔을 젖는 법, 다리를 움직이는법, 숨쉬기 위하여 머리를 돌리는 법 등을 배웠다. 그렇지만 수영 하면서 더욱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결국 중요한 것은 숨쉬기이고 그 숨쉬기를 하기 위해서 내 몸을 물에 맡기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인생도 결국은 같은 법칙이라고 생각이 된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볼려고 발버둥친다. 노력도 하고 최선을 다해서 살아간다. 결국 이런 것들을 통하여 안식을 얻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이런 노력으로는 안식을 얻을 수가 없다. 그것보다 우선 되어야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힘은 하나님께 나의 삶을 맡기는 것이다. 내가 걱정하지 않고 내가 힘쓰지 않으면 망할 것 같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마치 수영해서 나의 어떤 움직임의 노력보다 물에 내 몸을 맡길 때에 내 몸이 뜨고 쉼쉬기를 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께 시간을 드릴 때 숨쉬기와 같은 인생의 안식이 발견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나의 삶을 맡기는 구체적인 표현이 시간을 드리는 것이다. 내 인생을 내가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시간을 드릴 때에 그곳에서 안식이 발견되고 그 힘으로 우리의 인생에서 열매 맺고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여러분들도 하나님과 친밀감을 쌓아 나가고 그 속에서 안식과 평안을 발견하여 열매맺는 삶을 사시기를 바란다.

“교회” – 김두화 목사

이 세미나는 2002 KOSTA/USA에서 뉴저지 지구촌교회 김두화 목사의 ‘기독입문 – 교회’를 eKOSTA 편집부에서 녹취한 것입니다.




우리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면 무엇보다 신앙의 공동체인 교회생활에서 실질적인 삶에 부딪칩니다. 왜 교회생활이 그처럼 중요한 것인지 생각하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거듭난 크리스챤은 하나의 공동체가 되었으며 그것은 교회이며 한 가족이고 더 이상 손이 아니고 외인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가 이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교회관이 정립되어 있어야 합니다. 교회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생활이 왜 중요한가, 어떻게 하면 건강한 교회생활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교회생활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먼저 교회는 헬라어로 에클레시아라고 합니다. 에는 out of 클레아는 called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복음을 듣고 믿어 새로운 공동체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에 속하게 된 공동체를 교회라고 합니다. 이 교회는 세상을 향해서 증거하러 나가는 공동체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고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아 그리스도에 속한 백성들의 공동체를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러냄을 받았고 속하였습니다.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고 천국의 시민으로 성도라고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칼빈이 “교회를 어머니로 받들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자격이 없다”라고 했죠. 이 세상은 바벨론 문화, 바벨론 정신입니다. 이 세상에 있을 때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살아갑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과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전에 구원받기 전에 우리는 사탄의 자녀였습니다. 이 세상을 요람으로, 이것이 모든 것인 것처럼, 세상의 끝인 것처럼 살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어머니이고 사탄이 아버지입니다. 이에 비해 구원을 얻으면 교회는 어머니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교회에 대해서 바른 시각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교회 건물이 교회는 아닙니다. 예배당, 장소이죠. 저희 교회는 강당을 빌려서 예배를 드리는데, 이것은 학교 건물이죠, 이 자체가 교회가 아니에요. 초대교회는 주로 내 집에 있는 교회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둘째 교파가 아닙니다. 성경은 교파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저는 침례교 목사인데, 우리가 폐교파주의로 나갈 필요는 없습니다. 각 교파가 기여하고 있는 것을 인정해야합니다. 본질적인 것은 공통적인 것이지만 비본질적인 분야는 다양성을 인정해야할 것같습니다. 예를 들어 침례가 더 성경적이라고 저는 생각하지만 그것이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장로교,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지요, 그것이 우리의 신앙에 도움을 주는 점이 있습니다. 한편 웨슬리안처럼 인간에게도 자유의지를 주셨다, 인격적인 책임을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함께 균형을 이룰 때 신앙이 균형을 이루겠습니다. 서로 기여하는 것입니다. 서로 배워서 주님의 몸을 이루어나가야 합니다. 여기서 포인트는 교파자체가 교회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교회는 의식은 아닙니다. 세례, 꼭 교회에서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찬을 꼭 교회에서만 해야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은 믿는 자들의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두 유형을 생각해보면, 우주적 교회와 지역교회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구원받은 자들인데, 이 모든 구원받은 성도들,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은 모든 사람들의 공동체, 비가시적인 공동체, 무형교회입니다. 지역교회는 불완전하지요.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누구나 올 수 있습니다.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불완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민교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 갈등, 불완전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잘 보면 그렇죠. 우주적 교회는 승리한 교회입니다. 지역교회는 전투하는 교회에요. 영적 전쟁을 하고 있는 교회입니다. 상처받고 상처 입히고 넘어지고 그런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지역교회를 통해서 우주적 교회를 확장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교회의 기초, 마태복음 16장1 3절입니다. 예수께서 마지막 교훈을 주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합니다. 이 믿음의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이 반석을 베드로를 가르킨다고 주장하는데, 헬라어 원어를 보면 다른 단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작은 돌, 남성을 표현하는 단어가 쓰이고 반석은 큰 돌, 중성을 표현하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다른 것이죠. 내용에서도 다음 사건에 베드로를 책망하는 표현이 나오죠. 이 전후 맥락을 볼 때도 반석을 베드로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신앙의 고백으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후서에서 비슷한 표현을 쓰는데요, 베드로전서2장 4절,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와, 머릿돌이 되고, 반석이 되었다,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반석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반석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이 주님께서 직접 세운, 그 반석이라는 것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주님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 하에서 교회가 어떻게 세워지는가 하는 내용입니다. 로마서 등등은 지역교회에 보낸 편지죠. 일반서신이 있고 목회서신이 있습니다. 이 성경을 집으로 그려보면 가장 아래 반석이 사복음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위에 교회가 서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중요성입니다. 첫째 성경이 지역교회를 중요시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일꾼 된 것을 중요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가 세례를 받고, 교회의 멤버쉽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많은 미국교회는 신앙고백하고 세례나 침례를 받은 후에 교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로컬의 이름을 갖고 많은 서신이 로컬 교회에 보내진 것이며, 교회의 일꾼이라는 표현 등, 성경은 교회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둘째 교회는 성도들의 인격 형성에 중요한 장입니다. 혼자 신앙생활하면 성도의 인격이 향상될 수 없습니다. 삶의 변화, 인격의 변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이 12명의 제자를 부르시고 함께 지내시며 교제하면서 제자들을 빚으신 것이죠. 서로 맞지 않은 사람들을 묶어서 같이 지내면서 고쳐져 가는 것이지요. 교회 안에서 우리의 인격을 빚고 계신 것입니다. 교회는 다른 배경을 갖고 모이는 것입니다. 십자가만 있고 서로 용납해야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가기 위해서 입니다. 히브리서 10장 24절, 서로 돌아보아라,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사역의 중심기관입니다.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선교, 복음전파와 사랑의 실천입니다. 복음전파는 다른 기관이 대신할 수 없지요. 교회에 있어서 선교는 가장 중요한 미션입니다. 교회의 생명이 선교입니다. 주님이 성육신의 연장을 교회에 맡기셨습니다. 교회가 이제 그 역할을 해야합니다. 교회를 통해서 선교나 구제를 해야 좋습니다. 개인적으로 하면 자신이 드러나고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파라처치는 지역교회를 지원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삶에 중심은 지역교회에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가정과 불가분의 관계인 유기체 조직이기 때문입니다. 삶에 가정과 교회에 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처럼 가정과 교회가 떨어지지 않습니다.


교회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첫째로 지역교회는 교제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교제하였다라고 나오죠,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교제하였습니다. 에베소서 3장, 성령의 하나되게 함을 힘써 지켜라, 말씀과 성령의 사역에 중심을 두어야 합니다. 교회에 분파, 갈등을 만드는 일은 그 자체가 죄입니다. 자기 사람 만들고 끼리끼리 지내려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죄입니다. 화평과 일치가 교회의 핵심입니다. 다양성 속에 unity, 연합 일치입니다. uniformity가 아니고 다양성 속에 연합입니다. 사람마다 갖고 있는 개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두번째 지역교회는 가족입니다. 교회는 사업체가 아닙니다. 비즈니스가 아닙니다. 모이는 분들 하나하나 구령하고 캐어하고 평신도 목자들로서 셀 사역하고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0절, 믿음의 가족이라고 표현합니다. 히브리서 2장 10절, 형제로 서로 부르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3장 33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서로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몸된 교회, 골로새서는 주님의 머리되심을 강조합니다. 영적 은사는 교회를 세우는데 써야 합니다. 교회는 유기적인 구조를 가져야 합니다. 사역 중심입니다. 교회 성도들이 모두 사역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영적 은사에 근거하여 기능하는 유기적 구조이며 서로가 상관된 지체입니다. 마지막으로 지역교회는 양무리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아침에 제자들을 불렀습니다. 함께 식사하며 교제하셨습니다. 이제는 자신을 발견하고 예수님께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때 주님은 양을 먹이라라고 부탁합니다.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평신도, 목사 모두 목자입니다. 교회는 양무리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양, 우리 밖에 있는 양 모두 쳐야 합니다. 교회는 목자들에 의해서 전도되고 양육되고 성숙되어 간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