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타 파생사역

코스타 파생사역




































gpKOSTA (Gideon Project KOSTA)



지역 지도자 훈련 프로그램 (Regional Leadership Training Conference)
지역교회 / 캠퍼스 성경공부 리더 훈련 프로그램
성경적 세계관, 소그룹 인도, 개인 성경공부, 캠퍼스 성경공부 등에 대한 구체적인 도움을 제공
2008 년 3 월 현재까지 21 개 지역에서 개최



– 1998 년 Boston,
– 2001 년 San Francisco / LA
– 2002 년 NY-NJ / Midwest
– 2003 년 TX
– 2004 년 Mideast / North Carolina / Utah / Oklahoma
– 2005 년 Atlanta / Las Vegas / Northwest / Seattle
– 2006 년 Arizona / Florida / Missouri
– 2007 년 Tennessee / Illinois
– 2008 년 Colorado / San Francisco


website : http://gp.kostausa.org



eKOSTA (KOSTA/USA blog)

 


미주 한인 복음주의 학생운동의 소통의 장, 이코스타 블로그!
한인 청년, 학생, 목회자, 선교단체 간사, 평신도 지도자, 코스타 alumni 등 다양한 필진
이론적인 강의로부터 현장의 목소리 까지 : 미국 내 한국 학생의 현실에 초점 맞춘 글들
신앙과 삶에 대한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건강한 토론
코스타의 감격과 결단을 삶과 현장으로!


website : http://www.ekosta.org



tmKOSTA (Task-Major KOSTA)

 


학문과 신앙의 통합을 위한 모임
현재 웹보드를 통해 전공별, 관심별 나눔들이 이루어짐
코스타 기간 중 tmKOSTA 소그룹 모임
         – 실제적인 도움
         – 전공별 / 관심별 network 형성


website : http://tm.kostausa.org



missionKOSTA

 


선교 헌신자 모임
What is next conference
          – 선교 헌신자 follow-up conference (2000 년 부터 시작 )
          – 선교 헌신자들에게 정보제공 등 계속적인 follow-up
일대일 개인 상담 진행 중
GMF-NA 와 협력

website : http://mission.kostausa.org



jjKOSTA (JoJang KOSTA)



KOSTA 조장 훈련
KOSTA 에 참석하는 조장들을 훈련 (1 박 2 일간 조장 수양회 )
KOSTA 후에 제자되고 제자 삼는 삶을 사는 것을 실제적으로 도움
미국을 12 개 지역으로 나누어 지역별 코디네이터가 각 지역의 조장들을 중심으로 network 형성


website : http://jj.kostausa.org



OB KOSTA (Old Boys KOSTA)

 


한국으로 돌아온 코스탄 Alumni 모임
         – 20 회에 이르는 미주 코스타 집회를 통해 세상으로 나간 코스탄들의 현주소 점검.    
         – 한국으로 돌아온 미주 코스탄들의 교제
         – 코스타에서 받은 도전과 결단을 삶으로 연결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
         – 평신도 사역의 전진 기지로서의 역할 수행
Alumni Network
         – 매월 정기 모임 외 소그룹 모임
사역의 장
         – 코스탄들의 Spiritual Follow Up
         – 평신도 사역자 교육 및 양육
         – 멘토링 관계 구축 ( 강사, 선배 코스탄등의  멘토 발굴 , 멘토링 관계 정착 )
         – 전문 운동 영역 ( 전문 분야 Grouping 및 Network) : 기독 전문운동 연결
         – 사회 환원 활동: 봉사와 사역, 사회 봉사, 한국 내 타국 유학생 사역.
미주 코스타 지원
Returnee Ministry
         – 한국으로 돌아와 재 적응하는 코스탄 혹은 비코스탄들의 생활, 문화, 직업상의 어려움을 나누고 준비하는 사역
         – 문화적 적응, 교회 / 공동체 연결, 교제와 나눔, 영적 지원, 한국 생활의 적응 지원, F2 사역 등.


website : http://cafe.godpeople.com/KOSTAusaOB/

[이유정] 부흥의 전조, 어두움의 도전

은혜의 자리에는 항상 어두움의 도전이 있습니다. 지난 2007년 가을 LA지역 침례교회협의회 주최로 진행된 좋은씨앗, 조재옥
찬양 간증집회 때 있었던 그 도전의 현장을 나누고 싶습니다. 이 집회는 남침례교단 소속 LA지역 중소형 교회 중심으로 한 달에 1회씩
함께 모여 서로 교제도 하고, 집회도 갖는 작은 교회 연합행사입니다.

당시 저희 교회에서 진행되던 90일 작정 새벽기도회가
체질화되었는지 이날 새벽부터 눈이 떠졌습니다. 한빛지구촌교회를 위해, 그리고 이날 저녁집회를 위해 기도를 하는데 ‘습관적인 근심과 염려에 대한
짐’을 내려놓으라는 메시지가 자꾸 떠올라 이 부분을 놓고 묵상하며, 중보 했습니다.

이날 스케줄은 제 의도와 상관없이
빡빡했습니다. 아침부터 시작하여 오후 4시에나 끝난 방송국 인터뷰, LA중앙일보 인터뷰, 식사 교제 등으로 사알짝 지쳐 있었는데, 집회 장소인
예닯교회까지 이동하는데 우여곡절을 겪으며 차 속에서 3시간 가까이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마음도 육체도 지칠 대로 지쳐있는 상태로
도착하자마자 음향 셋업과 찬양팀 연습을 시작했는데, 잇따른 음향 시스템 문제로 시간을 낭비하며, 식사도 못한 채로 집회 시작 시간에 가까스로
연습을 마쳤습니다.

이날 저녁 집회를 실패케 하려는 영적인 싸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이 상태에서
2시간짜리 집회를 한다는 것이 불가능해보였습니다. 찬양팀과 함께 밖으로 나와서 기도했습니다. 모든 환경과 상황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기도를 짧지만 뜨겁게 올려 드렸습니다.

집회가 시작되었습니다. 8개의 지역 교회에서 오신 담임 목회자들과 성도들
150여명이 모였습니다. “이날 집회가 시작되기까지 여러분이 어떠한 마음으로 이곳에 도착했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특별하신 계획이 있다고
믿습니다. 오늘 밤 모임을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으로 기쁘게 시작합시다.” 말을 던진 순간 나도 모르는 힘이 솟구쳤습니다.

뜨거운 찬양과 간증이 이어졌고, 와이프의 간증과 찬양 “아침안개 눈앞 가리듯”에 이어 제가 예수님 만난 간증을 하면서 찬송가
455장을 함께 부르는데, 갑자기 오열이 터졌습니다. 성령님께서 회중의 마음을 만지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왠지 마음이 너무 무겁고
아팠습니다. 찬양을 마치면서 예정에 없었던 통성기도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새벽부터 하나님께서 기도시키셨던 바로 그 부분을
회중에게 토해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마음에 있는 모든 짐을 십자가 아래 내려놓으십시오. 한 치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우리
인생에서 관계의 짐, 미움의 짐, 미래에 대한 두려움의 짐, 습관적인 근심, 부정적인 생각들, 비교의식, 남을 비교하고, 비판하는 생각들을
예수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성령의 강력한 임재 가운데 회중은 눈물 바다가 되었습니다. 뜨거운 기도의 열기 속에 이곳에
모인 심령들의 아픔, 고통, 죄로 인한 탄식들이 마치 제 고통처럼 느껴졌습니다. 눈물 콧물 쏟으며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께서 치유하시고,
회복하시는 은혜가 가득했습니다.

이후 주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고, 서로 축복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날 모인 회중을 확인해보니
Junior high school부터 노년층까지 1세와 1.5세, 2세가 모두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말에 익숙치 않은 2세들도
있었습니다. 세대와 언어를 초원해서 1세가 1.5, 2세가 서로를 향해 축복하고, 사랑을 고백하는 시간에 이어 이날 오신 목회자들을 축복하는
시간을 통해 8개의 교회가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감격스런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지칠 대로 지쳐있던 저와 아내를 통해 하나님께서 은혜를 쏟아
부으셨습니다. 어떻게 집회를 마쳤는지 신기하기만 합니다. 100% 하나님께서 일하신 것입니다.

집회를 마치고 2세 여학생 한 명이
다가왔습니다. 자신은 솔직히 무슨 말인지 100%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성령께서 마음을 touch하셔서 큰 은혜를 경험했다고 했습니다. 언어를
초월해서 역사하신 성령님께 감사했습니다. 이후 이날 일어났던 간증들을 계속 듣게 되었습니다. 큰 기대감 없이 참석했다가 강력한 하나님의 음성과
함께 회개, 치유, 회복을 경험했다는 이야기도 듣습니다. 목회자들 간에 껄끄러운 부분도 있었지만 이날 성령께서 touch하셔서 회복된 일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으시는 부흥의 전조에는 항상 공중 권세 잡은 영(엡 2:2)과의 싸움이 있습니다. 내 삶에 짙은 어두움이
있을수록 하나님은 바로 그곳에 부흥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약한 자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2008년 코스타 주제 – 이 시대에 바른길로 주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이 시대에 바른길로 주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The Way to Live Thy Kingdom Come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태복음 6:10, 개역개정판)


이 세대는 세계화, 포스트 모더니즘, 뉴에이지 등의 영향 아래서 절대적인 기준점을 잃어버린 채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있다. 삶의 가치와 의미를 극단적으로 상대화시킨 이 세상은 개인의 욕망을 무한대로 추구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였지만, 우리는 오히려 불안과 욕망의 노예로 우리 자신들을 전락시키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물신주의는 돈으로 모든 가치를 집결시켜 마치 바벨탑을 쌓았던 시대처럼 모든 사람들을 그 영향 아래로 강하게 끌어당기고 있다. 이제 돈과 물질은 삶의 안정을 약속하는 신앙이 되어버렸다. 돈의 영향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여져서 그 자체가 선한 것이 되어버렸으며, 그것을 얻기 위한 과정은 쉽게 정당화되었다. 조국의 현실도, 디아스포라의 삶의 현장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교육은 안정된 직장을 갖으려는 방편으로 전락해 버렸다.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 속에서 피교육자의 인격도, 인간, 사회, 자연, 역사에 대한 책임도, 서로 함께 살아가는 삶도, 그에 따른 삶의 의미도, 또한 영원한 것에 대한 가치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오직 돈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물질적인 안정과 풍요로운 삶을 쟁취하고 지키는 것이 ‘그 길(The Way to Live)’이 되어버렸다. 성공과 생존을 위한 모든 노력이 정당화되고 칭송되었고, 현실을 극복해내는 이상과 물질 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숭고한 가치, 그리고 그것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은 조롱거리가 되어 버리고 있다. 어느 때보다 풍요롭다고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두려움에 사로잡혀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참된 길을 가지 못하는 세대가 지금 이 세대가 아닐까?


이러한 세속화와는 반대로, 이원론(dualism)적인 사고방식에 빠져 기독교를 생명력을 잃어버린 종교로 변질시켜 버리는 일들도 우리는 자주 목격한다. 종교활동을 제외한 세상 속에서의 모든 활동을 ‘속된 것’으로 규정하며 세상과 분리된 종교활동을 더 고상한 것으로 여기며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사명을 망각하며 사는 모습은 우리 안에 발견되는 또 다른 극단의 모습이다. 어떤 이들은 잘못된 종교적 가르침을 따라 이러한 이원론적인 삶을 살기도 하고, 다른 이들은 현실의 도전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이러한 삶의 자세를 이용하기도 한다. 경건함과 거룩함을 내세우며 종교생활에 매달리지만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이 목말라 하는 ‘그 길’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하는 일에 실패하고 그저 격리와 회피의 삶을 사는 비복음적 삶의 자세를 그리스도인이라 칭하는 사람들로부터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 세대는 목말라 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 세대의 흐름에 무기력하게 끌려가면 갈수록 진정한 ‘그 길’을 갈망하고 있다. 초자연적인 영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세계적인 추세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영혼 내부의 외침이다. 기독교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는 현실은 목말라 하는 이 세대가 자신들의 목마름을 채워주고 그들이 살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기를 기대했던 기독교로부터 받은 ‘배신감’의 표현이다. 목마른 이 세대의 갈증을 채워주기에 대부분 기독교인은 너무나 무기력해 보인다. 이원론적 사고에 빠져 현실을 등지고 예배당 안에서 자신들만의 천국을 구축하느라 바쁜 나머지 예배당 밖에서의 능력을 상실했거나, 세상의 모습을 본받아 신앙을 정서적인 영역에만 제한시킨 채 성공과 정복의 이념으로 삶 대부분을 채우고 있다. 세속화와 이원론, 이 두 가지 극단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바람직한 모습으로서의 삶의 양식을 보여주는 일에 실패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세상보다 더 효과적으로 세상의 길을 추구하는 교회에 실망한 사람들이 기독교에 돌을 던지는 것이 오히려 당연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치열하게 살면서도 이 땅의 가치를 초월해서 영원을 갈망하며 살고, 한편 초월적인 가치를 가지고 살면서도 이 땅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삶의 균형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비복음적 세상의 흐름 속에서 삶의 방식에 대한 ‘그 길’을 찾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줄 해답을 누구에게서 찾을 수 있을까?


이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둠 가운데서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그 길’을 보여 주시고 또 ‘그 길’을 살아내고자 이 땅에 오셨다. ‘그 길’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이었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서 드러나는 삶이었다. 그 안에서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통합이 있었고 그의 삶에는 이 세상과 앞으로 올 세상의 통합이 있었다. 오직 순간순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이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 나라’의 삶이었다. ‘하나님 나라 (Kingdom of God)’는 생명 없이 살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해주는 새로움 패러다임이었다. 세속화나 세상과의 분리가 아닌, 초월적 가치와 치열한 삶을 통합시키는 가치였다. 예수의 삶은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보여 주었고, 또 그런 삶을 살도록 초대하고 있다.


우리는 KOSTA 2008을 통하여 바르게 삶을 살아갈 능력이 우리 자신에게 없음을 절실히 깨닫게 되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했음을 선언하셨던 예수님의 말씀과 삶, 그리고 그분이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이 아니고는 ‘그 길’을 추구할 기초가 우리에게 없음을 알게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성령의 일하심으로 이미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그 성령의 은혜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길로 인도함을 보게 되기를 원한다. 또한, 소망을 잃어버린 시대 속에서 이 땅에 살면서도 영원을 추구하고, 초월성을 추구하는 동시에 이 땅의 삶에 충실한,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삶의 자세가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그리고 세상이 목말라 하는 ‘그 길’임을 깨닫기 원한다. 이 세상과 대적하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보는 눈이 열리고, 그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고자 이 세상을 거슬러 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구름과 같이 일어나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이들로 말미암아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 세대의 사람들에게 ‘그 길’이 전해지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하나님의 영광을 함께 보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주여, 우리의 눈을 열어 ‘그 길’을 보게 하시고, ‘그 길’을 살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허락하시며, ‘그 길’을 살아가도록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소서.

[김진태] 하나님 나라란?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은 신앙생활을 어느 정도 해온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표현이지만, 막상 하나님 나라 대하여 설명하고자 하면 그다지 쉽지 않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마도 하나님 나라라는 짧은 표현 안에 담겨져 있는 의미가 너무 커서, 오히려 짧은 글로써 표현하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역시도 같은 어려움을 가지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만, eKOSTA에서 앞으로 보다 구체적으로 다루게 하나님 나라 내용 기초라고 있는 부분을 겸손한 마음으로 함께 나누어 보고 싶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어원과 개념

하나님 나라는 신약성경에서 100 이상 언급되었을 뿐만 아니라, 개념을 알지 못하고는 복음서를 이해할 없다고 이야기될 정도로 예수의 사역과 가르침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 다른 유대교 문학에 하나님 나라라는 문구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할 , 예수께서 제시한 개념은 당시의 선지자나 교사들이 강조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이었던 같습니다. 복음서를 제외한 신약성경의 다른 책에서는 하나님 나라라는 문구가 비교적 적게 나타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그들의 가르침의 중심에는 하나님 나라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 나라라고 번역되는 그리스어는 Βασιλεία το Θεο – Basileia tou Theou 입니다. 중에서 나라에 해당하는 Basileia라는 단어는 당시 유대인에게 어떻게 이해되고 있었을까요? 많은 성경학자는 단어가 영역, 영토와 같은 공간적인 개념이 아니라 통치, 왕권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이라는 데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성경에서도 비슷합니다. 바실레이아의 어원인 히브리어 단어 말쿠트 (malkuth) 구약성경에서 200 이상 등장하는데, 역시 다윗이나 솔로몬과 같은 왕과 관련하여 단어가 사용될 때에는 통치권, 왕권, 지배 등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발견할 있습니다. 따라서 당시 예수의 가르침의 일차적 대상이었던 유대인은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의 통치권, 하나님의 왕권 등으로 이해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 특히 한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를 생각할 죽음 이후에 가게 되는 공간으로 생각하고 있을까요? 아마 그것은 마태복음에서 하나님 나라가 하늘 나라로 완곡하게 표현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국어에서 나라라는 단어가 주는 영역적 개념이 하늘이라는 공간과 결합되어서 원어와는 다른 개념이 형성된 같습니다. 하지만 마태가 하늘 나라라는 표현을 선호했던 이유는 마태복음의 주된 독자층이었던 유대인이 하나님을 직접 호칭하는 것을 꺼리고 하늘이라는 표현으로 대체했던 데에 있습니다. 하늘 나라라는 표현으로써 마태가 하나님 나라를 의도했다는 사실은 공관복음서를 대조해 보면 쉽게 있습니다. (아래에 예를 하나 첨부합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을 생각할 때에 공간적인 개념이 아닌 추상적인 개념으로서 하나님의 통치 혹은 왕권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은 매우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19:14 –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늘 나라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

마가복음 10:14 –그러나 이것을 보시고, 예수께서 노하셔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의 나라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

누가복음 18:16 –그러자 예수께서 아기들을 가까이에 부르시고, 말씀하셨다. “어린이들이 내게로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의 나라 이런 사람의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 그리고 긴장관계

현대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나라를 미래에 가게 공간적 개념으로 잘못 이해한다는 사실은 조금 전에 언급하였습니다. 이러한 오해가 빚어진 또다른 이유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에 실제로 미래적인 개념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 적잖은 수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겨자씨 비유 ( 13:31-33) 에서는 미래에 더욱 강력하게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또한 추수 관련 비유 ( 13:24-30, 36-43) 에서는 현재의 모습과 미래에 벌어질 심판이 대조되어 있습니다. 비슷하게 처녀의 비유 ( 25:1-13) 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날이 미래의 알지 못하는 시점임을 보여주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삶은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미래의 때를 준비하는 삶이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미래적인 개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께서 땅에 첫번째로 오심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는 현재적인 개념 역시 존재합니다. 예수 자신의 가르침 다수가 이러한 개념을 직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 17:20, 12:28). 또한 현재 과거 시제로 각각 표현된 보화와 진주의 비유 ( 13:44-46)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얻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잔치 비유 ( 14:15-24) 잔치로 비유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펼쳐졌음을 암시합니다. 예수께서 펼치신 기적 역시도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함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사탄의 통치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심을 선포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은 때로는 모순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랜 시간동안 많은 신학자들이 가지 중에 하나만을 인정하였습니다. Albert Schweitzer, Johannes Weiss, Rudolph Bultmann, Norman Perrin 등과 같은 사람은 하나님 나라가 비록 매우 임박했다고는 하지만 전적으로 미래적인 관점에서 쓰여졌다고 주장하였고, 반대로 C. H. Dodd 등의 신학자는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의 가르침과 사역 가운데에서 완전히 드러났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 가지의 개념이 서로 모순되지 않고 통합될 있다는 견해를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간단하게는 ‘already, but not yet’이라는 문구로서 가지의 긴장을 표현하려는 노력이 바로 그것인데, 이러한 진영에는 Joachim Jeremias, Oscar Cullmann, H. N. Ridderbos, G. E. Ladd 등의 학자들이 있습니다. 특히 Cullmann 경우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예로 들면서, 예수의 초림을 D-Day, 재림을 V-Day 비유합니다. 예수의 초림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그러했듯이 결과적으로 이미 전쟁에서 승리를 가져온 사건이고, 예수의 재림은 전쟁을 비로소 결정짓는 종전 선포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하게 도래하는 사건이라고 비교적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예수의 초림이 승리 자체가 아닌 가능성 정도로 남는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고, 그러한 이유로 Ridderbos Ladd 같은 학자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의 관계가 아주 체계적으로 설명될 수는 없고 역동적으로 발견되어야 함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 사이의 긴장관계는 가지를 이원론적으로 접근하려는 노력이 한계를 갖는다는 점에서 아직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은 모호한 상태로 남아있는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의 가지 성격을 돌아보고 관계를 묵상해보는 것은 아주 중요한 같습니다. 이유는 우리 각자가 알게 모르게 가지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견해가 결국은 우리의 삶의 방식과 가치관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삶의 터전 가운데 임하게 하는 삶을 것인지, 미래의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면서 살아갈 것인지, 사이의 조화를 어떻게 찾아나갈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우리의 삶의 태도를 결정짓는 중요한 질문들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비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가지는 하나님 나라가 직접적으로 정의된 적이 전혀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진리는 관념적이거나 논리적인 접근이 아니라, 일상의 단어와 현상을 이용하여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도 이해할 있도록 선포되었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의 대부분은 비유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마태복음 전체의 ¼ 정도가 비유였고, 마태복음 안에 무려 50개가 넘는 비유가 등장한다는 사실은 그러한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의도를 따라서 비유를 이해하는 것은 그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과정이라고 있습니다. 실제로 비유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은 앞으로 쓰여질 또다른 글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알아보도록 합시다.

다만 가지 질문을 던진다면, 예수는 논리적인 접근이 아닌 비유를 통하여 가르치신 것일까요? 아마도  예수께서는 특정한 의도를 갖고 그렇게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마태복음 13:10-17 – 제자들이 다가와서 예수께 여쭈었다. “어찌하여, 그들에게는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을 허락해 주셨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해주지 않으셨다. 가진 사람은 받아서 차고 남을 것이며,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한다. 그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다.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백성의 마음은 무디어지고, 귀는 듣지 못하고, 눈은 감겼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그들이 다시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염려된다.’ 그러나 너희의 눈은 지금 보고 있으니 복이 있으며, 너희의 귀는 지금 듣고 있으니 복이 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보고 싶어하였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지금 듣고 있는 것을 듣고 싶어하였으나 듣지 못하였다.” 

말씀을 통하여 보면 하나님 나라는 어떠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져 있으며, 반대로 다른 부류의 사람들에게만은 공개되어 있음을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하나님 나라의 은닉성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비밀이 공개되어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다음 단락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다루어보도록 합시다.

 

하나님 나라와 공동체

예수 그의 제자들의 사역의 일차적인 대상은 유대인이었던 같습니다. 10:5-6에는 열두 제자를 파송하면서 이방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팽배해 있던 유대인의 분파주의적 운동과 다른 점이 있다면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차별없이 부르고 있으시다는 사실입니다. 산상수훈의 도입부를 형성하는 4:23-25 살펴보면 이스라엘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따랐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당시의 다른 운동과는 달리 지역적 차별 없이 모든 유대인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초청하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사역대상이 이스라엘만이라고 결론짓는 것은 조금 성급하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에는 이방인을 향한 사역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고 ( 28:19, 8:10-12), 또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결국 예수의 가르침을 거부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에 대한 특권을 스스로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는 자기를 거부하는 유대인 대신에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백성을 부르시는데, 백성들은 열두 제자를 비롯한 예수의 제자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로의 초대가 너무나 은혜임을 깨닫고, 자기의 소유 목숨을 포함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름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열두 제자가 특별히 세워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열두 지파로 구성된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기초가 열두 지파였듯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기초는 열두 제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 명이었던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6:18-19 – 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반석 위에다가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세력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여기서 반석은 물론 베드로를 의미하지만, 많은 성경학자들은 베드로가 했던 예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을 의미한다고 해석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앙고백은 베드로 뿐만이 아닌 다른 제자들에게도 공유되는 것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는 베드로로 대표되는 열두 제자를 기반으로 하여 자신의 교회를 세우고자 했던 것이고, 이것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공동체로서 사용하고자 하셨다는 결론을 내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개인적인 영역에서 적용해보려는 시도는 매우 바람직하고 필요한 과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개인적인 영역으로만 제한하는 것은 예수의 원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비슷하게 하나님 나라를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영역에서 적용해보려는 시도 역시도 매우 바람직하고 필요한 과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자신이 속한 공동체 정도만으로 제한하는 역시도 예수의 원래 의도는 아니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관심은 개인 혹은 분파주의를 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공동체 전체에 맞추어져 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 참고도서
양용의, <하나님 나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성서유니온선교회, 2005

[조한상] 2008년 1월에 읽은 책들


2008년 첫번째 달. 내공없는 풋내기의 책읽기는 계속된다. 이번 달에도 생각의 지평의 넓혀주는 귀한 책들을 접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 단지, 꼭 읽고 싶었던 책들을 그 두께에 지레 겁먹고 뒤로 미루어 놓은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하나님의 나라, 교회 그리고 세상’, Howard Snyder (박민희), IVP, 2007

사용자 삽입 이미지한사람 한사람이 변하기만 하면 정말 세상도 변할까?

아직 최루탄 냄새가 가시지 않았던 캠퍼스. 나도 대학 새내기 시절에는 선교단체라는 곳에 몸을 담았었다. 그 때에도 지금처럼 리더들에게 이것 저것 따지기 일쑤였는데, 그 당시 내가 따지며 대든 내용 중의 하나는 크리스천의 사회참여였다. 입학 초기 신입생을 위한 한 강의에서, 모 간사님께서는 ‘사람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 데모한다고 세상이 변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고, 난 그분께 ‘탈세를 할 수 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사람이 바뀌었다고 어떻게 탈세를 하지 않을 수 있냐’고 반발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냥 그것이 아닌 것 같아서 마구 질문했었는데, 그리고 그 이후 이 문제는 많이 해결했다고 믿었었는데… 하지만, 크리스천의 사회참여의 정당성 여부는 아직까지도 내겐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있다.

1983년도에 저자의 강연을 정리했다고 하는 이 책을 통해 나는, 하워드 스나이더의 다른 책 – 참으로 해방된 교회, 교회 DNA 등 – 에서의 주장을 조금이나마 더 이해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하워드 스나이더의 키워드 중의 하나인 ‘생태계적 하나님나라’의 개념이 좀 더 명확해졌다던가 하는…

책의 전반부에서 저자는, 하나님나라의 특징들은 이미 구약에서 약속되고 계시되었으며, 그 특징들이 신약에 와서 재해석되고 완성된 것임을 ‘샬롬’, ‘도시’, ‘가난한 자들과 함께함’, ‘안식’, ‘희년’ 등의 분야로 나누어 살핀다. 그리고는 이런 하나님나라가 현재에는 어떻게 구체적으로 성취되야 하는가를 다루고 있다. 책 후반부에서는 그런 하나님나라가 개인을 넘어 교회와 세상까지 영향을 끼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가하는 제안을 한다. 예를 들어 국가의 정책 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던가, 국제 평화를 위해 압력을 행사하는 것 등도 해야한다는 것이다. 즉 개인 복음 전도 뿐 아니라, 사회 정의에 참여하는 것도 하나님나라를 위해 동일하게 귀한 일임을 강조한다.

크리스천이 세상의 일에 무관심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세상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하려는 여러 시도들이 정말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길인지는 의문이 든다. 어쩌면,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기에, 또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바보같아 보이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교회다운 교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더 옳지 않을까? 우리의 싸울 것은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에 대한 것이니까…

“십계명 (The truth about God)”, Stanley Hawerwas, 복있는사람, 2007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람들은 누군가를 평가하기 위해 문장 하나를 사용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은 참 순진해’ 혹은 ‘그 사람은 너무 정치적이야’ 등의 한 문장으로 표현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평가가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고는 하지만, 누군가에 대한 한사람의 평가가 동시에 상반된 두가지 방향으로 나오는 건 아무래도 좀 자연스럽지 못하다.

한권의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성향에 대한 서로 다른 두가지 평가가 나오는 경우 또한 흔치 않다. 그런데, 이번에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십계명’을 보면서 이런 종류의 혼란을 겪었다. 하우어워스는 존 하워드 요더의 이론을 지지하는 윤리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에 이어 한국말로 소개된 그의 두번째 책이다.  이 책에서 그는 “십계명은 세상을 위한 윤리적 지침이나 세상을 향해 선포할 기독교 선언문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이며 누구의 소유인지를 알게 된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이 땅의 세속문화와 그 가치에 대항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하는 삶의 방식이다”라 단언한다. 계명 열가지를 하나씩 짚어가며 그 원래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그 계명들이 단순한 윤리로 취급될 가능성에 대해 경고한다.

“그리스도인이 결혼해야 하는 단 하나의 바람직한 이유라면, 독신일 때보다는 기혼일 때 세례에 따른 소명의 삶을 보다 훌륭하게 살아낼 수 있다는 확신때문이다”라며 결혼을 공동체적인 삶과 연결시키는 다소 급진적인 성향을 보인다. 반면 십일조의 당위성을 지지한다던가 조직교회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부분에서는 지나치게 보수적인 면모 또한 엿볼 수 있다. 도대체 하우어워스는 정확히 어떤 성향의 사람일까? 아직은 공부해야 알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있기는 하지만, 김기현 목사가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의 해설에서 이야기했던 하우어워스에 대한 평가는 조금 도움을 주는 것 같다: ‘나 개인의 판단으로는, 그의 신학이 자유주의 신학의 심장부에서 자라나 재세례파인 존 요더 (John, H. Yoder)의 영향을 받아 평화주의자(pacifist)인 점, 그에 더하여 미국과 자유주의 양자에 대해 전투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 실천적 성향, 거기다 자연신학을 강하게 반발하는 것이 칼 바르트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 보수주의를 닮은 데가 있는지라, 진보/보수 양 진영 모두에게 두루두루 통하는 것이 도리어 약점이 됨으로써 딱히 절대 지지층이라 할 만한 이들이 없는 것이 한 요인이 아닐까 싶다. 모두에게 더 없이 절실하지만, 동시에 삼키기에는 쓰디 쓴 부분이 한 두 군데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도 이미 많이 진보화한 걸까. 그의 보수적인 성향이 적잖이 거슬리는 걸 보면서 나도 놀라고 말았다.  

“주와 함께 달려가리이다”, Eugene Peterson (홍병룡), IVP, 2003

사용자 삽입 이미지우리는 때로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면서도 서로 다른 뜻을 염두에 두고 있어 이해하기 힘든 상황을 겪곤 한다.

몇 주전 토요일 아침 성경공부 모임에서 요한복음 3장을 공부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서 말씀하시면서 사용하신 ‘아노텐’라는 단어가 ‘위로부터’ 혹은 ‘다시’의 두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고, ‘프뉴마’라는 단어도 ‘바람’ 혹은 ‘성령’을 모두 나타낼 수 있다는 내용을 함께 공부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물과 성령’이란 단어를 왜 사용하셨을까를 이야기하면서, 나는 ‘새로운 창조’의 의미를 강조하신 것 같다고 이야기한 반면 다른 몇 멤버는 ‘세례’를 염두에 두신 것 같다고 하면서 토론이 계속되었다. 정말이지 한참을 이야기한 후에 알게 되었는데, 나는 ‘세례’를 ‘성례로서의 세례’로 이해하면서 동의하지 못하고 있었고, 한 자매는 ‘거듭남으로써의 세례’를 이야기하면서 내 주장에 계속 이의를 제기하고 있었다. 같은 이야기를 왜 이렇게 힘들게 했는지, 그건 단어의 정의를 일치시키지 못했었기 때문이었다.

때로는 똑같은 단어가 사용된 하나의 표현이 그 정의가 다를 경우, 정반대의 개념을 나타내기도 한다. 유진피터슨의 ‘주와 함께 달려가리이다’에서 사용된 ‘탁월함’이란 단어가 그 좋은 예가 아닐까 싶다. 흔히들 ‘크리스천은 탁월함을 추구해야 한다’라고 이야기할 때의 ‘탁월함’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의 삶을 추구하며 살아감으로써 가지게 되는 탁월함을 이야기하곤 한다. 반면 유진 피터슨이 말하는 ‘탁월함’은 하나님께 철저하게 순종함으로써 “단조로운 도덕적 습관에서 깨어나고, 그저 하잘것없는 일로 바쁜 일과를 툭툭 털고 과감하게 최상의 삶을 살도록 도전받”는 삶이다. 피터슨은 그런 대표적인 인물로 예례미야를 이야기한다. 예레미야의 삶 가운데 세상에서 흔히들 이야기하는 탁월함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는데도 말이다. 요시야 개혁의 시기에 참 개혁을 외쳤던 선지자, 그리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며 아스돗에 다시 땅을 구입하며 하나님의 회복의 메세지를 전했던 선지자,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과 지도자들에게 늘 미움을 받았던 선지자, 그 예레미야의 탁월함을 우리는 추구해야 한다. 일상속에 묻혀있는 삶을 딛고 일어나는 하나님의 탁월함을 말이다.

유진 피터슨의 초창기 작품 중의 하나인 ‘주와 함께 달려가리이다’는 이런 예레미야에 관한 이야기이다. 많지 않은 예레미야에 대한 기록이지만, 역사적 정황과 문맥에 대한 피터슨의 탁월한 묵상이 우리로 하여금 예레미야의 탁월함을 엿보게 한다.

유진피터슨의 책을 읽을 때마다 ‘나도 이런 묵상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이미 여러 책들에서 주장했듯이 시와 소설을 즐길 줄 알아야 할텐데, 나에게 있어 시와 소설은 여전히 멀기만 하니 어찌하겠나…

“바울과 예수”, F.F. Bruce (이길상), 아가페출판사, 1992

fk3.bmp그냥 그렇다고 덮고 넘어가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될 때가 있다. 음…

바울은 왜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많이 언급하지 않았을까? 20세기의 많은 신학자들이 주장하듯이, 바울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토대로 예수를 새롭게 구성했을까? – 그냥 넘어갈 수 있을 주제같기는 한데 말이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주제를 묵상하고 공부하면서 의아한 것 중의 하나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자료가 상당부분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가 하나님나라를 향하고 있고, 예수님의 설명 또한 그렇다. 그렇다면 바울의 서신들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주제가 별로 등장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바울의 가르침 속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상이 깊숙히 녹아 있는 것일까?

이런 궁금증을 안고 보수적 신학자로 알려진 F.F. Bruce의 “바울과 예수”를 손에 들었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전문적인 책은 아니기에 나의 초기 궁금증에 대한 직접적인 답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바울과 예수의 일치점에 대한 보수 진영의 주장을 어렴풋이는 알 수 있었다.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바울과 예수의 차이점의 원인을 하나님 나라의 용어로 풀자면 이렇다. 하나님 나라의 시간적인 긴장성을 잘 나타내는 표현이 ‘Already, but not yet’으로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두 봉우리 사이의 긴장으로 표현하곤 하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명은 이 두 봉우리가 모두 도래하지 않은 상황에서 하신 것이다. 반면, 바울은 그 중에서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의 봉우리는 넘어서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와의 중간에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바울과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는 어느정도의 차이가 존재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이런 설명을 위해 바울이 받은 전승과 계시의 차이점, 예수와 바울의 칭의에 대한 공통적 가르침, 그리고 윤리적인 가르침에 있어서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성경의 증거를 들어가며 차분히 설명한다.

아직 내가 가진 의문에 확답을 찾지는 못했다. 막연한 방향만 알았을 뿐… 이제 관련된 책들로 좀 더 여행해야만 할 것 같다.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Leslie Newbigin (홍병룡), IVP, 2007

사용자 삽입 이미지레슬리 뉴비긴의 책을 읽을 때마다 깜짝 놀라곤 한다. 이해하기 쉽지 않을만큼의 논리로 이야기를 전개해 가지만, 결론은 놀라우리만치 보수적이기 때문이다.

IVP에서 모던클래식 시리즈로 소개한 네번째 책인 레슬리 뉴비긴의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은 이미 다원주의 분야에서는 널리 알려진 그야말로 클래식이다. 이곳에서 더 이상의 요약을 적일 필요가 없을만큼 많이 알려진 다원주의에 대한 변증법적 논리를 담고 있다. 이전의 매끄럽지 못했던 번역도 좋아지고, 편집마저 수려해져서 책을 읽는 재미를 더 해 주었다고 할까. 다원주의에 대한 대항논리로 우리에게 익숙한 ‘사실’과 ‘가치’를 통한 설명 등 전형적이지만 명쾌한 설명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런 다원주의 사회의 대안으로써 진정한 공동체성의 회복을 내세우는 담대함이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