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영] 귀납적 성경 공부 그리고 나눔

저는 6년 전에 캘리포니아로 유학을 나왔고, 졸업 후에도 같은 동네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캠퍼스 성경 공부 모임에서 계속해서 양육 받으며, 섬기며 지냅니다. KCF (Korean Christian
Fellowship) 라 불리는 저희 모임은 유학 나온 지 1년째 되던 여름, 제가 다니는 교회 NCBC (New
Community Baptist Church) 목사님의 인도와, 말씀에 갈급했던 여러 유학생 지체들의 뜻이 모여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초신자도 많았고, 호기심에 찾아오는 형제 자매들도 많았던 우리 모임 안에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많은 사랑을 보여주셨고,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이들은 주님께서 인도해주시는 기도의 삶, 말씀의 삶, 예배의 삶을 통해 신선한 경험들을 즐기며 지금까지 오게 됩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변화하는 형제 자매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중보해 시간은 너무나 값진 보물과도 같습니다.

eKosta를 통해 나누고 싶은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저희 공동체가 처음으로 귀납적 성경 연구 방식을 접하고 함께 공부해나가며 경험한 주님의 인도 하심과 말씀의 열매를 나누고자 합니다. 

2007년 겨울이 끝나갈 무렵, KOSTA 순회 간사님으로 섬기시는 이재천 목사님께서 저희 모임에 오셔서 귀납적 성경 연구에 관한 세미나를 이틀간 해주십니다. 세미나 중에 우리는 각자의 학습 유형을 알고 이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는 귀한 시간을 가졌고, 여러 유형의 지체들이 모여서 함께 귀납적 성경 연구를 나눌 더욱 풍성해지는, 그룹 성경 공부에서의 역동을 경험할 있었습니다. 늘 연역적으로 정리되어있는 교재를 중심으로 공부하던 것과 달리 스스로 구문을 관찰, 분석하며,
의문점들을 갖고 이를 해결하며, 그리고 삶에 적용해나가는 일련의 과정은 무척 새로웠습니다. 그리고 과정 속에서 스스로 말씀의 단맛을 찾아내고, 나와 다른 형제 자매들과 그것을 공유하며 깊이가 또한 배가 되는 경험이 우리 모두에게 너무 귀했습니다.

세미나 이후로 KCF의 많은 형제 자매들이 귀납적 개인 성경 공부, 그리고 이어지는 그룹 토의를 통해, 각자가 지속적으로 깊게 말씀을 있도록 돕고, 또한 그것을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갖기 원했습니다. 같은 마음을 가진 십여 명의 형제 자매들이 주일 저녁마다 모여서 성경 공부 나눔의 시간을 갖기 시작했고, 우리의 걸음은 ‘요나서’였습니다. 우리 모두 귀납적 성경 공부에는 신입생이었지만 모두 열정이 넘쳤고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풍성한 나눔, 그리고 깨달음으로 응답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요나가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이야기할 때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서로 생각을 나눴고, 물고기 뱃속에서의 기도를 각자의 속에서의 기도로 읊으며 우리 속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봤습니다. 결국 니느웨로 가야 했던 요나, 그리고 그렇게 인도하신 하나님을 함께 묵상했고, 니느웨를 멸망치 않게 하신 하나님과 이에 크게 노했던 요나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속에서 정말로 중요시 생각하시는 무엇인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서로 이미 매우 가까운 사이였던 우리는 서로의 학습 유형이란 것을 통해서, 그리고 각자 조금씩 다르게 말씀에 접근하고 색다른 보석을 발견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서로를 새롭게 이해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명을 너무나 귀하고 특별하게 만드셨음을 있었습니다. 우리 공동체가 참으로 주님의 말씀 안의 진리를 발견함을 통해서 하나가 되어가는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또한, 개인적인 말씀 연구를 통해서 성경을 더욱 깊이 있는 계기가 되었고, 말씀을 예전보다 사모하는 마음마저 이를 통해 허락하셨습니다. 그 이후로도 귀납적 성경 공부와 토론 모임은 누가복음과 룻기로 이어졌고 많은 형제 자매님들이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유학 생활, 직장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으로 인도하신 것은 공부나 자체를 위함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더 가까운 친구가 되어가길 원하시는 과정이라고 깨닫게 됩니다. 그 시간 속에서 이렇게 귀한 영적 동지들을 만나게 해주셨다는 거, 그들과 어떤 다른 나눔보다 값진 주님 말씀의 빛을 공유할 있다는 거, 어떤 다른 학문의 연구보다 깊고 영원한 말씀을 소중하게 여길 있게 하셨다는 거… 그리고 시간이 나에게 기쁨이 됨이, 그러한 주님의 뜻의 증거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유정] 다음 세대의 리더십을 준비할 때…

최근 7년 만에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14일간 수도권, 부산, 대구 등 빡빡한 일정을 뒤로하고 지독한 목감기를 휘감고
돌아 왔습니다. 너무나도 달라진 고국의 모습에 거대한 도시 속의 서투른 이방인처럼 모든 것에 어리둥절했지요. 인천공항에 1시간 일찍 입국해서
공중전화를 이용하기 위해 거의 30분을 허비했습니다. 컴퓨터 모니터 같은 화면에 전화 이외에도 각종 정보를 이용할 수 있는 새로운 모델의
전화기인 모양인데, 나 같은 이방인들이 그 사용방법을 익히기 위해 머리 싸매고 공부를 해야 하는 한국의 공공문화가 무척 낯설었습니다.

어느 곳을 가도 원색의 색감과 엄청난 양의 광고와 표지판으로 쏟아지는 정보들, 공간이란 공간은 온갖 고층 빌딩으로
채워버린 서울의 비 환경 친화적인 발전상, 서울을 중심으로 위성도시를 잇는 모든 곳마다 가득한 수 십층의 고층 아파트들, KTX 고속열차로
서울-부산을 3시간 반 만에 잇는 전국의 일일생활권화, 거미줄처럼 서울과 외곽도시들을 잊는 지하철의 위용과 그 안에서 하루 종일 쏟아내는
TV화면의 뉴스와 프로그램들, 빨강, 파랑, 초록으로 새롭게 규정된 도시 내, 도시 간 버스들의 일사불란한 움직임들, 어느 곳을 가도 도로를
가득 메운 차들, 그 속에서 어디론가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는 시민들의 모습들 모두가 생소했습니다. 중산층이 무너지고 빈부의 격차가
확연히 벌어진 작금에 서민 계급의 탈출을 위한 몸부림은 신성한 공교육 현장을 무너뜨리고 무리한 사교육을 부추기는 부모들의 열기로 전국이 들끓는
현상을 보면서, 이곳이 불과 9년 전에 내가 숨 쉬고, 익숙하게 살던 바로 그 나라였나 싶었습니다.

짧은 기간 동안 개척교회로부터 대형교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교회들을 방문했습니다. 그 가운데 위성도시인 평촌, 산본을
중심으로 엄청난 성장을 하고 있고 한때 제가 음악전도사로 섬겼던 새중앙교회(박중식 목사), 부산 해운대 신도시로 이전하면서 강남 이남에서는 가장
큰 교회로 성장한 수영로교회(정필도 목사), 분당과 수지에서 수평이동을 최대한 억제하고 불신자를 중심으로 고속 성장하고 있는 지구촌교회(이동원
목사)를 섬길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편으론 살아있는 교회성장의 생동감을 느끼면서, 다른 한 편 한국교회가 위성도시 초대형교회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는 듯한 착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신음하는 한국 사회에 미치는 교회의 영향력에까지 생각이 미쳤습니다.

불과 3년 안팎으로 한국교회 영적 거인들인 1세대 목회자들이 대거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 말은 세계적인
교회성장이란 영적 유산이 다음 바톤인 386세대에게로 넘어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훌륭한 선배들이 본보인 희생과 공로를 인정하고, 후세를 위한
역사적 평가를 남기며, 감사함으로 받아야 하지만, 더불어 풀어야할 숙제도 만만치 않습니다. 교회성장이라는 게토에 갇혀 세상과의 접촉점을 잃고
땅에 떨어진 기독교 리더십을 회복하는 일, 바로 다음세대의 역할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전망해 봅니다. 즉 우리 세대의 영적 리더십은 몇 명의 영적
거인을 재편하는 형태를 지양하고, 기독교의 선한 영향력을 세상에 미치는 가교역할을 감당할 각계각층의 다양한 전문 사역자들이 건강하게 세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목회자와 평신도를 구분할 일이 아니지요. 이것이 하나님 나라 회복의 진정한 모델이라고 봅니다. 이를 위해
한국교회는 거대 기독교 유산의 기득권 세력다툼에 휘말리지 않도록 겸허함으로 미래를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비록 2주라는 짧은 일정이었지만 그래도 7년의 간격을 일순간 없애버린 고밀도 농축된 만남의 시간들이 있었기에
감사했습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사랑하는 일가친족들, 찬양사역계의 선후배들, 디지털 컨텐츠로의 재편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크리스천 음반
비즈니스계와 일반 출판사에서 기독 출판물을 기획하는 후배들, 갑작스런 연락으로 만난 대학동창들, 중소형 교회에서 경험한 따스한 사랑과 예배의
깊이들, 그 무엇보다 이제는 고인이 되어 고이 잠든 어머니의 묘소 방문과 그분께서 평소에 좋아하셨다던 음식점 방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만남들이
아직도 가슴 가득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남이란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인가 봅니다. 한국교회가 세상을 향한 아름다운 만남의 영향력을
회복함으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그날이 뼈에 사무치게 기다려집니다.

좌담회 – “하나님 나라의 속성과 적용” – 김동록, 윤여재, 최인석

eKOSTA: 이렇게 좌담회에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간략히 자신의 소개를 해 주시겠습니까?


김동록: 저는 김동록입니다. 코스타와 관계를 맺게 된 지는 약 6년째인데 코스타에서 서북미지역 멘토로 섬기고 있습니다. 지금 씨애틀 근교에 살면서 조그만한 영상처리 소프트웨어 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윤여재: 안녕하세요. 저는 윤여재라고 합니다. 코스타는 2003년에서부터 참석하고 있습니다. 현재 데이튼, 오하이오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최인석: 안녕하세요, 저는 최인석 입니다. 코스타는 2006년부터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동부 DC부근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반갑습니다.


eKOSTA: 일단 하나님 나라에 대한 우리의 인식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습니다. 본인이나 혹은 함께 교제하시는 분들이, ‘하나님 나라’, ‘하늘 나라’ 혹은 ‘천국’이라는 단어를 접할 때 보통 어떤 모습으로 연결하시나요?


윤여재: 지난 성경공부의 도입부분에서 세가지 하늘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첫째 하늘은 우리가 땅의 딛고 있는 이 세상이며, 셋째 하늘은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이야기하면서 마치 첫째 하늘과 셋째 하늘이 서로 분리되어 있는 곳처럼 묘사하면서, 물론 교재가 직접적으로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고 있지만, 함께 공부했던 사람들은 그렇게 물리적으로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세상과는 분리되어 있는 마치 먼 하늘나라 저 편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쉬운 것 같고, 저 또한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기 보다는 눈과 귀로 쉽게 접하게 되는 세상의 삶을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김동록: 사실 하나님 나라의 개념이 땅이 아니라 통치권이라는 말을 하게 된 이유는 하나님 나라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삶의 현장에 함께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의도였지만, 오히려 통치권이라는 말 자체가 추상적이다 보니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개인적인 신앙생활의 영적인 영역으로만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을 봅니다. 예를 들면 내 하루 생활에서의 하나님과의 교제 (QT), 기도, 또 직장이나 가정에서의 내가  결정해야할 것들 등에서 하나님의 뜻을 물어본다는 것들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사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라고 말씀하실때, 이런 개인적인 신앙생활의 영역을 넘어선 어떤 것을 이야기하시는 것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나라”라는 말 자체가 집단이라는 성격이 들어가 있는 단어이니까요. 어떻게 보자면 통치권이라는 단어로만 표현하기보다는 “통치하시는 집단적 영역”이라는 말이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 봅니다.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심각하게 생각해 보자고 했을때 같은 그룹에서 당황해 하시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아기자기한 기도는 드리지 말아야하는 것인가 하는 질문도 있었구요.


최인석: 저는 요즘에 마태복음을 가지고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데,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할 기회가 많이 있었습니다. 저희 지역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권에 초점을 맞추는 세미나가 여러번 있어서 대부분 현재적 의미의 천국도 많이 고려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제가 변화되면서 느꼈던 사소한 일에서의 충만함, 그리고 왠지모를 자유감 등이 지상에서 조금이나마 경험할 수 있는 천국의 속성 혹은 맛이라면, 그러한 경험을 통해 천국에 대한 모습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떠오르게 되고 또 그것을 사모하게 된다고 자주 나눕니다. 그리고 그런 경험이 현실에서 가능하다면, 확장되어 나갈 천국에 대한 모습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해 봤습니다.


eKOSTA: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는 숨겨져 있다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 즉 하나님 나라의 은닉성이 성경에 많이 등장하는데요, 생각나시는 비유라든지, 혹은 성경 내용이 있으시면 나누어 주시겠습니까? 개인적으로 더 와 닿았던 내용이 있으신가요?


윤여재: 오늘 아침 저의 큐티 본문이 요한복음 18장 후반부분이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통해서 빌라도의 관정까지 끌여오게 되고,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이 저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의 한 면을 잘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계속해서 예수님께서는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 있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권 아래 즉 하나님의 뜻, 계획하심 아래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다시 한번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빌라도는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라는 질문에 분명하게 “내가 왕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아침 말씀에서 저는 다시 한번 내가 섬기는 왕은 예수 그리스도요, 그분의 나라 즉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가슴에 새기게 되었습니다.


김동록: 비유는 아니지만, 최근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에 대해 의문을 가졌습니다. 왜 광야에서 사단이 돌더러 떡이 되게하라고 유혹한 그 기적을 예수님이 행하셨을까 하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보니 예수님께서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면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인해 기대되는 정치적 인기를 완전히 묵사발로 만드시더군요. 이로 인해 오히려 많은 제자들이 떠나가 버렸다고 나오고요. 또 이 일 이후로 단호하게 십자가의 길로 향하시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 나라가 사회경제적 정치적 성공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단호하게 보이시면서 오히려 십자가의 길을 택하시는 것을 보면서 제 인생의 방향성이 다시한번 크게 틀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고 봅니다. 실패한 듯 보이는 십자가는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중심이라고 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스스로 선택하심으로 인해 그분이 그렇게 원하고 가르치셨던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열어주셨습니다. 또 하나 있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만드신 제자공동체입니다. 인간적인 욕심으로 인해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모임이었지만 이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나가실 씨를 뿌리신 것입니다.


최인석: 저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보물이 숨겨진 밭에 대한 비유가 와 닿았습니다. 밭에 숨겨진 보물은 그것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 귀함을 알 수 없기에, 더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eKOSTA: 하나님 나라가 부분적으로 이미 드러나 있지만, 또한 숨겨져 있다는 이러한 속성이 본인의 삶의 방식이나 사역에 어떤 영향을 주시나요? 예가 있으시면 함께 이야기 해 주시겠습니까?


윤여재: 하나님 나라의 일원으로 성경에서는 권속이라고 이야기하지요,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은 많은 도전을 감당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가 저와 제 주위에 있고 임하였다는 사실은 저에게 큰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됩니다. 기도와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믿는 이들과의 교제를 통해서 서로 격려를 주고받으며, 함께 영원한 진리를 향해 나아간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러니 공동체가 중요한 것 같고 교회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의 공동체와 교회가 완전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속에서 때론 상처를 받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영원하신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끊어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현재적 삶 속에 영향을 주는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러한 것처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오심을 저도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김동록: 제가 언급한 현재적 소명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강의를 하고 나서도 너무 현재적인 면만 강조를 했나 싶은 의아심과 함께 신앙의 열린 미래성과 어떻게 연결이 될까 하는 궁금증이 제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계속 히브리서를 공부하다가 우리가 안식에 들어간다는 표현이 있더군요. 우리가 이미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있고, 또 아직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나가고 있다는 관점은 저 자신의 궁금점을 많이 해소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나가는 삶이라는 의미도 깨닫고 나니 더욱 심각해지더군요. 제자들의 공동체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에 대한 의미도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최인석: 드러나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 때문에 전도를 할 때에 천국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고, 때론 공격적인 입장을 취하곤 해서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이해하도록 돕는 것도 쉽지가 않습니다.


eKOSTA: 예수님께서는 왜 하나님 나라를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으시고 비밀스럽게, 다른 표현으로는 신비롭게 (mysteriously)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을까요? 그 의도는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윤여재: 원죄 이후에 이 땅에서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것이 예수 이전에는 아주 제한되었고, 예수님이 오심을 통하여 이제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고 임하고 있으며 오실 하나님 나라의 연속성을 나타내지만, 그 경험하지 못하였던 하나님 나라를 표현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시지 않았나 싶습니다. 겨자씨 비유가 그렇고 밭에 숨겨진 보물이 그러한 예인 것 같습니다.


김동록: 사람들이 쓰는 언어가 표현할 수 있는 한계가 있기에, 또 하나님 나라의 개념이 어느 한 두 문장으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직접 하나님나라에 대한 설명을 하실 경우 오히려 명문화된 하나님 나라의 설명은 하나님 나라를 설명해 주기보다는 제한해 버리고, 또한 사람들이 율법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하신 것 같습니다.


최인석: 김동록 멘토님과 윤여재 형제님께서 잘 말씀해주신 것과 같이 우리의 인식의 한계와 언어의 한계도 이유가 될 것 같구요. 또한 비유를 통해서 오히려 그 속성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부분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청중에게 익숙한 삶의 특정 부분에서 얻을 수 있는 직관력과 연결시켜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고수의 방법 아닌가 합니다.


eKOSTA: 이제 하나님 나라가 현재에 이미 임하였다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대한 이야기로 주제를 조금 옮겨가보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셨던 말씀, 특히 산상수훈과 같은 가르침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윤리가 발견되는데요. 그런 가르침 실제 삶에 적용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음을 또한 보게 됩니다. 이러한 어려움은 어떻게 극복하는 것이 좋을까요?


윤여재: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산위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하나 하나 따라가기가 역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론 그것에 따라 가려고 하면 때론 억울한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즉, 내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속옷까지 주라, 십리까지 가라, 육체가 죄를 지으면 그것을 절단해 버리는 것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보다 더 유익하다는 말씀이 절망이 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고 그것이 진리임을 알고 계속 노력하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러한 길을 먼저 걸어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은 심령이 가난하게 될 것이고 박해를 받을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모습이 복있다고 말씀하시며 천국이 그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청량제와 같이 제 마음을 확 씻겨 내립니다.


김동록: 예수님의 가르침이 너무 고차원적인 것이라서 (왼뺨까지 내어준다든지, 겉옷까지 준다든지, 원수를 용서한다든지) 실천하기가 힘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기 보다는 실천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라고 봅니다. 이런 것은 혼자서 하기는 힘이 드는데, 같이하면 좀 나을 것 같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철저한 이해와 믿음이 있을때 적용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을 많이 봅니다. 공동체에서 같이 성경을 통해 하나님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공감하면 성령님께서 아주 큰 능력으로 그 공동체에 역사하실 것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인석: 이런 어려움이 있는 데에는 지금 죄가 들어오고 왜곡된 상황에서 우리의 죄성으로 인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천국에서의 모습이 목표라고 한다면, 우리가 삶 속에서 변화를 받아서 회복되어져 가는 경험을 하는 것도 천국에 가까워지는 것이고, 다시 말하면 천국의 확장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것 자체가 천국에 대한 경험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걸림돌이 되는 부분들을 쳐서 훈련시키는 과정이 필요할 것 같고, 또 그와 함께 내 의가 높아지고 자아가 더 커지지 않도록 체화해나가는 과정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런 과정등을 통해서 또한 더 많이 변화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eKOSTA: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이 강조되면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킨다’ 혹은 ‘하나님 나라가 확장된다’라는 표현을 주위에서 많이 들을 수 있는데, 이 표현을 사용하실 때 혹은 들으실 때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떠올리시나요?


최인석: 복음이 더 많이 전해져서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또한 천국을 알게 되는 것을 떠올리게 됩니다. 또한 천국에서 이루어질 것들이 이 지상에서도 부분이나마 이루어지도록 만들어가는 것이 확장이 아닐까요?


윤여재: 저는 마태복음에 예수님께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는 부분과 사도행전에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저희들에게 명령하신 것이지요. “가라”, “이르러”, ‘제자를 삼고 증인이 되라’하신 말씀에 힘입어 예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며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의 가장 기본적인 단계가 아닐까 합니다. 여기에 눌리고 억눌린 자의 고난에 함께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겠구요 무엇보다 우리 스스로가 성령 안에서 온전하게 거듭남이 있어야 겠지요. 한 밤 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 말씀하신 것처럼 중생함이 없이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니깐요.


김동록: 질적 양적 팽창을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제가 성경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질적인 변화를 통해 양적인 확장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우리 개인의 이해가 깊어지고 삶이 깊어질 때, 즉 우리가 변화될 때, 우리 주위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마치 누룩의 비유가 그렇다고 할까요. 질적 변화가 있을 때 전염성이 생기는 것을 봅니다.


eKOSTA: 이제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과 현재성의 관계로 이야기를 계속 진행해 보겠습니다. 결국 우리들이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삶은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품고 현재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의 삶을 살려고 하는 모습일텐데요. 지난해 주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아) 와 연결시켜볼 때에, 이러한 모습은 세상의 삶과 어떤 점에서 차이가 날까요?


최인석: 저는 공부하는 학생이다 보니, 다른 문화와 믿음 등을 가지고 살아가는 또래 학생들과 그 동기에서 다른 부분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자신의 성공과 다시 말해 부와 명예를 위해서 제가 보기에는 맹목적으로 보일 정도로 치닫는 학생들을 보게 되면 저와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물론 저도 그런 부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갈수록 생각이 변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갈수록 제게 주어진 상황에서 부끄럽지 않게 성실히 해야 하고, 이 일들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윤여재: 뚜렷한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기독인과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비기독인의 삶의 차이는 비기독인이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차이가 나야한다고 말씀에서 이야기하고 있으니깐요. 세상이 나를 기이히 여기지 않고 잘 섞여 살아간다면 그것을 이상히 여기라고 성경에서는 말하고 있기 때문에, 저는 제 자신의 삶이 세상과 아무런 마찰없이 잘 지낼 때에 더욱 두렵습니다.


김동록: 우리가 전공이나 직장을 정할때나  자신이 관심있는 분야를 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순수한 학문적인 또는 인문적인 관심만으로 정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심지어 그런 경우에도 “위대한 학자”, 성실하고 성공적인 사회인이 되기를 꿈꾸지요. 그렇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궁극적인 뜻이었다면 자신의 삶과  미래를 꿈꿀때 생각하는 내용이 많이 달라질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결국 “내가 보기에 좋은 것”을 허용해 주실 수도 있겠지만, 우리 마음이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려는 태도라면 성공적인 사회인을 목표로 하지는 않겠지요. 또 실패하거나 어려움을 겪는분들도 많은데 설사 실패해 보이는 것처럼 보이는 현재의 삶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을 믿고 나갈 소망 안에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소위 신앙생활을 잘해야 한다는 것으로만 이해해서는 낮은 자리로 가신 예수님을 이해하고 닮아가는 것이 힘이 듭니다.


eKOSTA: 현재적 하나님 나라와 미래적 하나님 나라의 균형이 깨어질 때에 어떤 결과들을 가져오게 되나요? 혹시 생각나시는 예가 있으시면 함께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김동록: 미래적으로 극단인 예인 것 같은데, 밀양이란 영화를 보면서 다들 느끼셨겠지만, 교인들이 너무 착실하다는 것입니다. 착실하다 못해 전혀 현실적이지 않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너무 미래적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는 모습으로 보여집니다. 또는 전혀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볼 수도 있겠구요. 섬뜩한 것은 교인들과 제 모습에서 별 차이를 못느끼고 답답해 하던 저의 모습입니다.


또 현재적으로의 극단이라면 마치 고지론이라고 알려져 왔던 그런 신앙의 태도가 생각이 나는군요.


윤여재: 하나님 나라는 정말 특이한 것 같아요. 예수님도 처음에 말씀하실 때, 천국이 가까와 왔다고 말씀하시면서 꼭 미래에 올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 같지만 실상은 예수님을 통해 이미 와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한 긴장감은 좋은, 유익한 긴장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긴장감이 깨어질 때는 좀 극단적인 성향이 드러나지 않는가 싶습니다. 예를 드러, 현재적 하나님 나라를 강조하게 되면 예수님 시대의 열심당원들과 초기의 제자들의 모습에서 보는 봐와 같이 이 땅에서 물리적인 무엇을 하려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 같구요. 지금 우리에게도 현재적 하나님 나라를 강조함으로써 우리 안에 기복적인 성향을 강화시키지 않는가 싶습니다. 그리고 미래적 하나님 나라를 강조하여 그쪽으로 치달으면 우리가 많은 들어 왔던 극단적인 이단의 형태가 나타나지 않는 가 싶습니다. 즉 어느 한 쪽을 강조하는 것은 본질적인 하나님 나라의 속성을 벗어나기 쉬움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 이 둘의 긴장이 중요하지 않는 가 생각합니다.


최인석: 균형이 깨어졌다는 것이 하나님나라에 대한 묘사나 속성에 대한 설명 혹은 상상등이 치우쳤다고 발전시키신 형제님들의 말씀에 덧붙이겠습니다.


제가 처음 입교식을 할 때였습니다. 전도사님께 솔직히 천국에 대해서 너무 막연하기 때문에 믿는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고 이야기를 꺼냈을 때, 전도사님께서는 온화하게 웃으시면서 “천국은 너~~~무 좋은 곳이예요”라는 말씀만 반복했던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오히려 현실적인 의미로서의 천국보다 다가올 천국에 대한 것만 너무 강조하게 되면, 이렇게 공감하기 힘든 천국의 이미지를 강요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eKOSTA: 2008년 코스타의 주제가 ‘이 시대에 바른 길로 – 주의 나라가 임하시오며’입니다. 이번 코스타의 주제를 통해 기대하시는 바를 나누어 주시겠습니까?


윤여재: 저는 개인적으로 올해의 코스타 주제를 너무 좋아합니다. “이 시대에 바른 길로” – 이 시대, 이 세대의 가치관을 휘어잡고 있는 물질주의적, 자기 중심적, 이기적 세계관에서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 화평의 세계관으로 우리의 삶의 방향을 푯대를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주의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소원하는 주기도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주셨던 예수님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그러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코스탄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며 찬양하는 모습이, 사도바울이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라고 이야기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도 그러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합니다.


김동록: 2007년도 주제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아”였었는데, 어느정도 부정에 의한 진리찾기라면, 올해는 더 발전해서, 이 시대에 가야할 진리의 길이 저희들에게 보여지기를 기대합니다. 처음에는 주의 나라에 대한 개념이 너무 광범위해서 약간 걱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핵심개념이 참석자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어서 좋은 신앙갖기를 넘어선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경험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최인석: 저도 개인적으로 이번 코스타의 주제문구가 참 마음에 듭니다. 작년에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변화를 받아” 라는 주제로 이 세대의 가치과 세계관 등과 성경적인 가치와 세계관에 대한 구분과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말씀과 생각등을 남겼다면, 올해는 그렇다면 “바른 길”은 무엇인지 조금더 나아간 적용을 하는 것 같다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2008년 코스타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생각을 하니 마음이 설레입니다.


eKOSTA: 오랜 시간 좌담회에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선묵] “영적 지도자의 배움의 자세”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고 있는 분들을 관찰하여 보면 나이나 지위에 상관없이 끊임없이 배우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배움의 자세는 자신의 현재 상태에 안주하거나 과거의 것을 가지고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연구하는 자세이다. 우리 월드미션대학교의 임동선 총장님도 연세가 많으시고 그 동안의 연륜이 풍부하셔서 그저 옛날에 공부하신 것과 본인께서 경험하신 것을 나누는 것 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지금도 한번 설교를 위하여 또 한번 세미나를 위하여 늘 연구하시는 모습을 보게 된다. 또 내가 존경하는 어느 목사님은 늘 메모하시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일상의 대화 중에서도 배움의 가치가 있는 것은 곧 메모지를 꺼내어 적으시는 모습을 보게 된다. 한 두번은 이렇게 하기가 쉽지만 꾸준히 배우는 자세로 메모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다. 효과적인 지도자는 늘 배우는 자세를 갖는다.

 

우리는 배움이라고 하면 꼭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과 학위를 위하여 공부하는 것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배움의 전당인 학교에서 학위를 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최선의 배움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학교에 가지 않더라도 독서를 통하여, 주위에 여러 선배들과 동료들을 통하여, 혹은 후배와 제자들을 통하여, 또 우리의 삶을 관찰하고 살펴봄을 통하여 늘 배우고 성장할 수 있다. 어떤 의미로는 학교에서 배우는 것보다 중요한 것들을 많이 배울 수가 있다. 중요한 것은 학교를 다니고 있는가 보다는 배우고 성장하고자 하는 열정과 열려진 마음이 있는가이다.

 

최근에 한 목사님의 온유함에 대한 설교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 목사님은 온유함을 여러 가지로 설명하면서 배움에 열려 있는 자세가 온유함의 중요한 측면이라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대화를 할 때에 Selective Listening을 한다.  말하는 사람의 의도와는 다르게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을 듣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에 많은 문제가 생긴다. 부부간에 대화를 할 때나 설교나 강의를 들을 때 우리가 듣고 싶은 것을 걸러 듣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온유한 사람은 열려진 자세로 남의 이야기를 경청한다. 온유해야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게 되는데, 첫째로는 나도 모르는 것이 있다는 의식을 갖고, 둘째로는 나도 틀릴 수 있다는 열려진 자세를 가져야 진정으로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Selective Listening의 반대는 Teachability이다. 배움에 열려 있는 자세인 것이다.

 

최근에 다산 정약용에 관한 책을 읽다가 좋은 도전을 받았다. 신유한이 사신을 수행해 일본에 갔다가 견문한 일을 적은 해사견문록 이라는 책을 읽고 다산 정약용은 매우 안타까워 했다. 일본에 사신으로 갔으면 일본인들이 원나라 세조의 10만대군을 물리칠 있었던 군사 제도나 한옥보다 밝고 따뜻한 주거제도 등을 살펴서 것이지 그러지는 않고 일본 사람의 복식이 얼마나 야만스럽고 그들의 문화가 어찌나 해괴하며 조선 사신의 행차에 굽신대며 그림과 글씨를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극성스러운지에 대한 것이나 적어와서 무슨 가치가 있는가 하는 안타까움이었다. 정약용은 그의 글에서 공연히 일본 사람을 얕잡아 보고 그들을 야만이라 헐뜯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자랑이 되고 보탬이 되겠는가? 하고 질문하였다. 그는 또한 말하기를 우리 나라 사람이 표류하여 일본에 이르면 저들은 모두 새 배를 건조하여 돌려 보내 주었다. 그 배의 제도가 절묘하였는데 배가 이 곳에 도착하면 우리는 왜놈이 만든 배는 재수없다고 모두 부쉬버려 그 방법을 옮겨 오려하지 않았다.”고 안타까워 하였다. 기회를 갖고도 배움의 자세를 갖지 못하여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지적한 것이다. 한나라의 발전을 위해서도 개인의 발전을 위해서도 배움의 자세는 중요하다. 배움의 자세에 대하여 몇가지 생각을 정리해 보면,

 

첫째, 우리는 주위에 탁월한 사람이 있으면 겸손하게 훌륭한 점을 인정하고 배우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남의 장점을 보고 그것을 배우기 보다는 남의 단점에 집중하여 그를 무시하고 우리 자신은 그저 나태하게 있으려 한다. 장점보다는 단점에 집중하여 무시함으로써 우리가 배우고 성장해야 하는 의무를 태만히 하면서도 자기 자신의 게으름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스스로 속이고 있는 것이다.

 

둘째, 우리가 어떤 사람을 극복하고 보다 앞서 나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으면 사람을 진정으로 존경하고 훌륭한 점을 따라서 배울 때에 진정한 의미로 극복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겸손히 배우려기보다는 일단 비평을 먼저함으로써 배워도 이유를 먼저 찾는 같다. 사람의 훌룽한 점을 깍아내림으로써 혹은 사람의 훌륭하지 못한 점에 집중함으로써 사람을 이기고 극복하려고 한다. 그러나 사람을 무시하고 깎아내림으로써는 피해갈 있을 절대로 사람을 진정한 의미로 극복할 수가 없다. 우리가 누구를 극복하고 보다 앞서 나아가기를 원한다면 사람의 좋은 점과 훌륭한 점을 찾아서 인정해주고 겸손하게 배워야 하는 것이다. 오직 배움을 통해서 성장을 통해서만 남을 극복할수 있다.

 

세째, 우리는 과거의 학업적 성취와 능력에 집착하고 현재에 새로운 배움에 대하여 열려있지 않는 경우가 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의 나이와 지위와 성취가 아니라 배움에 대한 열려진 자세이다. 우리의 쓸데없는 자존심, 비교 의식, 그래서 배움의 자세를 갖지 않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현재 자신의 위치에 대하여 진정한 의미의 만족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에 대한 진정한 감사가 있을 때에 다른 사람에 대한 건강한 존중을 있다. 내가 오늘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에 배우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생각하고 그들에게서 훌륭한 점을 찾아 존경하고 배움의 자세를 가져하겠다.

 

풀러 신학교의 Robert Clinton교수는 성공적인 삶을 산 지도자들을 연구하여 일곱 가지 특징을 발견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효과적인 지도자들은 전 삶을 통하여 배우는 자세를 견지한다 (Effective leaders maintain a learning attitude throughout life)”는 것이다. 70노인이라도 배움에 온유하게 열려있는 사람은 30대 청년이고 30대 청년이라도 배움에 열려있지 않고 귀를 막아버리는 사람은 70노인이다. 우리가 일생을 늘 살면서 배움에 열려진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것 같다.

[세미나] “하나님의 나라란”, 한철호 목사 2007

다음은 2007 KOSTA/USA Chicago conference에서 선교한국 상임총무인 한철호 목사의 ‘하나님 나라란?’이란 세미나를 eKOSTA 편집부에서 녹취하여 정리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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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한국의 상임총무로 일하고 있는 철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듯이 가장 중요한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확한 정의와 의미가 무엇인가 잘 이해하고 있으면 강의를 들을 때 정확한 이해와 적용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주에 디즈니랜드에 다녀왔습니다. 각 나라가 모형으로 되어 있는 곳에 갔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런 세상에서 살 수 있을까, 그런 세상이 있을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역사는 그런 세상을 추구해온 역사입니다. 철학, 문화, 이런 것들도 가장 이상적인 세상을 달성하려고 한 것이겠죠. 플라톤이 좋은 요소를 모아서 이상적인 나라를 만들고 이름을 유토피아로 붙였습니다. 그런 나라는 없다라는 뜻입니다. 헤로도토스는 미래를 위해 걱정해야하는 현재가 지속되는 한 희망은 없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래학자들의 고민의 결론, 결국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불확실성이 그들이 가장 많이 쓴 단어입니다. 그런데 성경도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하는 고민이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기도합주를 설명하면서 성경을 종말에 관한 약속과 기록이라 설명했습니다. 성경도 하나님이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얘기하는 핵심입니다. 이 세상을 만든 분도 하나님이고 종말도 하나님이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챤의 주제도 이런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선지자들이 관심을 가진 것은 마지막에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천국이 오면 칼을 녹여 보습을 만드는 모든 나라가 평화롭고, 자연도 평화로운 그런 나라가 올 거라는 것입니다. 자연도 더 이상 악이 존재하지 않고 행복과 안녕과 화평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도 보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가 첫마디입니다. 예수님의 메시지의 핵심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적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느니라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증거입니다. 천국의 비유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주기도문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해주십시오 라는 기원입니다. 승천을 하시면서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의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성취해가는 과정이 성경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후 항상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셨죠. ‘This is good’ ‘와 너무 좋다하나님이 만드신 자연만물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내적인 속성을 따라서 인간을 거룩하게 아름답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양심있는 이런 형용사는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 인간이 자연만물과 조화롭게 살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세상,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아이를 낳으면서 제가 그런 것을 느꼈는데요, 자연분만이 뭔지 아십니까? 그냥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입니다.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뭐 하는지 아십니까? 그냥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입니다. 진통이 있는데, 아이가 안 나오는 것입니다. 갑자기 혈압이 떨어지면서 순식간에 위험해진 것입니다. 죽느니 사니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아내가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아이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겨우 나오면서 제 품에 안겼습니다. 20초간 너무 감동스러웠습니다. 나중에 저와 똑 같은 아이를 보면서 감동했던 일을 회고하면서, 하나님이 인간을 자기 형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으로 인간을 만들었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이 죄에 빠져서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사건이지요. 이후 원래 창조 질서로 회복하는 과정이 인간의 역사인 것입니다.


 


나라를 쓸 때, 통치자, 영토, 사람이 있어야겠죠.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영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나라를 말할 때 보통 통치권, 신약에서도 통치권, 영역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어떤 땅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통치권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미국에 있지만 한국의 법의 지배를 받습니다. 영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리가 미치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왕권, 하나님의 통치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왕위, 다니엘의 환상 중에 영원한 나라를 말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통치를 말합니다. 통치권에 들어가느냐 안 들어가느냐는 사람의 선택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겠다는 우리의 결정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야하는 이유가 이 세상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를 자의적으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날, 이 통치권에 들어가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구원하기 원한다는 것입니다. 아직 우리가 죄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벗어나는 때도 있겠죠.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하겠다고 하면서 십자가의 도를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갖고 하나님 나라를 설명합니다. 비밀 mystery는 감춰야 하는 것이 아니고 이해하기 어렵지만 드러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를 바울 사도도 사용했습니다. 구약에서는 다니엘이 꿈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합니다. 왕 중의 왕이 이 땅을 다스리겠다는 말이죠. 뜨인 돌이 여기서 나오죠. 영원한 나라가 세워질 것입니다. 모든 나라가 다 무너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면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여기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할 것이라는 이야기 입니다. 


 


마태복음을 중심으로 보죠. 세례 요한이 천국이 가까웠다고 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할 사람이 예수님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아주 흥분한 것이죠. 마지막 때가 되니 겁먹고 회개하려고 요한에게 몰려든 것입니다. 요한은 하나님 나라가 오면 심판이라는 톤입니다. 예수님이 나타나면서 시험 당하십니다. 사람들이 기대한 것과 다른 것입니다. 사람들은 군사력을 동원해서 로마를 쳐들어가야 하는데, 하나님이 병자들을 고치십니다. 그리고 제자 12명을 부르시죠. 사람을 수 만명을 모아야 하는데, 겨우 12명의 부르는 것입니다. 요한이 감옥에서 예수님에게 사람을 보내죠. 당신이 메시아입니까? 이런 질문인데, 왜 이런 질문을 하게 되냐면, 요한은 예수님이 힘을 갖고 군사력을 동원해서 로마를 쳐부숴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새로운 윤리를 알려주고 이런 일을 하는거에요. 그래서 요한은 혹시 당신이 메시아가 아닌 것 아닌가요? 이렇게 물어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사야서를 인용하며 눈먼 사람이 보고,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이런 말을 전해줍니다. 바로 자신이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13장부터 비유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해줍니다. 천국은 메시아가 칼을 들고 오는 것이 아니라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처럼 온다라고 말하시는 것입니다. 겨자씨와 같은 것이고, 누룩과 같은 것입니다. 천국은 아주 작은 것으로 시작하지만 아주 커지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새로운 국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아주 작은 것으로 아무 것도 아닌 것같지만 나중에 큰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삶 속에 말씀 하나가 떨어졌는데, 내 삶이 바뀌고, 내 가정이 바뀌고, 동료가 바뀌고 부모님이 바뀌는, 그런 형태로 천국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또 마지막 날에 가르침도 밭에 감춘 보화와 같습니다. 모든 것을 바쳐 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만났을 때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이것을 사죠. 가장 좋은 보화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날에는 어떻게 되는가를 마태복음 24장 이후에 설명합니다. 환란이 있겠지만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되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오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이땅에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와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통치를 받는다고 결정하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입니다. 마치 겨자씨처럼.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언제 완성되냐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으로 복음이 이땅에 오게 되었고, 예수님의 재림으로 하나님이 완성됩니다. 초림으로 예수님이 사망을 이겼기 때문에 초림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땅에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이 극복 못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이기셨다는 것입니다. 이 왜곡된 나라에서 사탄이 통제하는 방법이 죄를 짓게 하고 그 결과 죽게하는 것이죠.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 죽으시고 다시 사시므로 사탄을 물리침으로 하나님 나라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죄의 노예로 사는 사람들이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이 완전히 괴멸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아직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파괴하는 요소를 제거했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 나라가 오게 되었고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게 됩니다. 우리에게 영생을 허락하셨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 나라가 완전히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때까지 하나님 나라를 넓혀가면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됩니다. 예수님의 통치에서 벗어나려면 벗어날 수도 있는 그런 세상이죠.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면 심판이 오십니다. 구원받는 자와 심판받는 자가 구별됩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권 안에서 사탄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나려면 벗어날 수도 있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를 받을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삶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 나라의 법대로 살도록 스스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의 책임입니다. 아이를 키울 때도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키울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그러나 본질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 나라는 이미 와있는 것입니다. 결혼문제, 직장문제, 가정 문제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것, 하나님 나라의 성격에 대해서 성경에서 봐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는 언제 완성되냐면, 이 복음이 온 땅에 퍼져야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교, 전도에 힘써야 합니다. 선교와 천국은 밀접히 연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교와 전도에 힘써야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