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록] 방황하는 소명

2010 KOSTA/USA 시카고 집회에서 있었던, 소명을 주제로 한 김동록 박사의 세미나를 정리해보았습니다. 그리고 김동록 박사로부터 최근 근황과 세미나 후기를 들어 보았습니다.

제 소개부터 하죠. 이름은 김동록이구요, 시애틀에서 영상처리 소프트웨어 일을 하는 공돌이입니다. 신앙경력은 30년, 취미는 성경공부입니다. 미국 온 지는 20년 되구요. 89년에 University of Washington으로 전기공학을 공부하러 왔습니다. 코스타는 2003년부터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1. 들어가기 : 미래를 생각하다
비전과 소명은 같은가? 비전과 소명이란 말은 서로 혼동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할 때 비전이나 환상은 주로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계시들을 이야기합니다. 이 계시는 미래일 수도 있고, 현재일 수도 있고, 과거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특별한 역사적인 사건, 구속적인 사건을 보여주시며 하나님의 역사를 이야기하십니다. 소명은 비전 이후에 일어나는 구체적인 삶의 양식에 대한 초청을 자신의 삶에 겸손하게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그 환상(비전)을 보여주셨을 때 그것에 응답하는 것이죠. 비전과 소명에는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주로 미래에 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미래와 세계관의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소명이 미래에 대한 것이라면 성경에서 말하는 미래의 개념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소명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성경에서 미래에 관한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기독교 세계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인간의 죄로 인해 타락한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구속, 다시 회복시킨다)은 세상을 하나님의 것으로 돌리자는 것인데 여기에서 기독교인의 소명이 나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심을 너무 기울이다 보니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오히려, 우리가 세상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보다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어떻게 하실 것인가라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다시 하나님의 것으로 돌리자는 맥락에서 소명을 생각할 때, 과연 이 세상이 마지막에 없어질 것인가, 마지막에 없어질 세상이라면 굳이 회복시킬 이유가 있는가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함께 정리해봅시다.
‘소록도에 가고싶다’라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나병환자들이 수용되어 치료를 받는 소록도에 한 집사님이 새벽기도를 가는 길에 취재기자가 질문을 합니다. “집사님, 무엇을 위해 기도를 합니까?” 저는 당연히 그분이 당신의 건강을 위해, 그리고 떨어져 있는 가족을 위해 기도한다고 할 줄 알았는데, “기도요? 당연히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를 하지요”라는 대답이 제 관심을 끌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 장례를 치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제 죽으면 천국가서 예수님 곁에서 살아야지’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소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그 분들의 소망은 죽으면 천국가서 예수님하고 사는 것 이었습니다. 우리 기독교가 줄 수 있는 소망이 과연 이것 밖에 안되는가 하고 생각하니 답답해졌습니다. 이 이상한 천국은 과연 가는 곳인가인요?  ‘돌 아갈 내고향 하늘나라’,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 ‘죄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저 천국에서 날 기다리네’ 등 찬송가의 가사도 우리가 죽어서 가야 할 곳으로 천국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등의 말들도 천국을 죽으면 가야하는 곳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천국을 우리 삶에서 끊어지고 내세에 이루어지는 불연속적인 모습으로 생각했을 때 심각한 오류들이 생깁니다. 기독교의 주된 목적이 과연 천국행일까요? 오히려, 기독교는 이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이 세상을 위한 구원이 아니겠습니까? 죽은 후에 영혼이 천국에 도달한다라는 것은 부활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그냥 죽었다는 의미죠. 예수님의 부활을 생각해봤을 때 부활은 육체적인 부활을 포함합니다. 우리가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얘기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보다는 영지주의의 부활같은 느낌을 줍니다. 기독교가 가르치는 종말이 결국은 창조질서의 궁극적인 소멸이겠습니까?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렇게 좋아하셨던 하나님이신데, 이 세상을 소멸시키실 것일까요? 뭔가 맞지 않습니다. 이런 불연속성을 가지고 있는 천국을 상상할 때 너무 영적인 내세를 상상하게 되고, 기독교의 가치관은 영적일 따름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이원론적으로 기울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극단적인 반대도 있습니다. 부활에 반대했던 사두개인 같은 경우, 너무나 현실적이 되어버려서 현실과 타협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런 불연속성이라면 우리의 미래는 근거없는 것이 됩니다. 저는 이 강의를 통해 미래에 대한, 천국에 대한 기초를 쌓고 소명으로 넘어가려 합니다.
이 단계에서 ‘하나님 나라’, ‘하늘’, ‘땅’, ‘하늘과 땅의 겹침’ 등의 개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톰 라이트가 쓴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IVP)’를 참고해 주세요.
천국, 하나님 나라
‘천국’은 하나님 나라의 다른 표현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주로 천국(Kingdom of Heaven)으로 다른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는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천국’과 ‘하나님 나라’는 다른 것 같지만 사실상 같은 표현입니다. 1세기 유대인들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을 먼저 이해해 봅시다. 당시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풀린 지 400년이 되었고, 예루살렘도 지리적으로 회복되었지만, 그들이 갈구했던 통치권은 여전히 이방인들에게 있었습니다. 페르시아, 그리스, 이집트, 앗수르, 로마를 거쳐 계속 이방인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의 임재하심, 통치하심의 개념은 굉장히 중요한데, 성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출애굽때 구름기둥, 불기둥과 함께 성막 위에서 이스라엘이 봤던 하나님의 영광과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할 때 나타났던 하나님의 영광이 포로기 이후에는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성전에 다시 나타날 여호와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하나님 나라는 역사 속으로 메시아가 오셔서 (마치 다윗과 같은 성군이 나타나서) 이스라엘의 독립적인 왕권을 회복되고, 이방 나라가 징벌되고, 하나님의 공의와 평화가 이 땅에 충만하게 되는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날(종말)은 계속되는 역사 속에서 연속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반면, 하나님이 역사 가운데로 오셔서 직접 통치하시고, 메시야가 어느날 홀연히 나타나서 왕권을 회복하신다는 점에서는 하나님 나라에는 불연속성이 있습니다. “마지막날에는 모든 사람들이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라고 했던 마르다의 고백을 보면 마르다에게 부활의 소망이 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불연속성이 있지만, 역사가 진행되는 면에서는 연속적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역사가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동시에 가진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오는 천국’의 개념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을 보면,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그런 연속성을 어떤 방법으로 보여주셨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님이 전한 하나님 나라는 겉으로 보기엔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야 대망 사상(메시야의 도래, 하나님 백성으로 부르심, 공의와 평화가 충만함)에 입각한 하나님 나라와 비슷했지만,  사실 그 내용은 달랐습니다. 산상보훈에서처럼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성품이 어떠해야 하는지 보여주시고 하나님 백성을 다시 규정(define)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마지막으로 방문하셨을 때 벌어진 성전 청결사건은 상징적으로 예수님의 예언자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구약에서도 많은 예언자들이 행위를 통해 상징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에스겔 (1년 넘게 왼쪽, 오른쪽, 옆으로 누워서 쇠똥을 구워 먹어야 했음)과 에레미야(멍에를 메어야 했음)의 예를 통해서도 상징성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성전제사를 금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상징적으로 율법의 마침을 나타냅니다. 마지막 만찬에서 제자들과 함께 성찬을 하시며 내 피와 살을 언급하시는 모습은 새롭게 하나님의 백성을 불러 모으시는(define)것을 상징합니다. 성령을 받은 교회가 연약한 가운데 섬김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했던 하나님 나라는 분명히 무력적이고 폭력적이었지만,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는 정반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심으로 그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세상 권세에 대적해서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방식은 늘 세상의 방식과 달랐습니다. 에세네파는 은신했고, 바리새파는 스스로를 분리시키고 종교적으로 몰입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꿈꿨지만, 예수님은 적극적으로 세상에 개입하셔서(병고침, 죄인과 함께 하심)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두개인이나 헤롯당처럼 세상과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대립(예수님의 공생애를 살펴보면, 어떻게 해서든지 당국자들 (authority)의 마음을 들끓게 만드시는 모습을 볼 수가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의도하였다기 보다는,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나라를 있는그대로 표현했을 때 이 세상 권세가 견딜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하셨습니다. 하지만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한 열심당원과는 달리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이 세상 권세와 대적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심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우리 죄의 용서이며 다른 하나는 세상 권세를 파함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할 수밖에 없는 ‘악’을 해결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러나 ‘악’을 해결하는 예수님의 방법은, 그 악을 눈 앞에서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을 십자가에 매단 사람들도 사랑하셨고, 악을 악으로 대적하여 또 다른 악을 만드는 결박을 용서라는 은혜로 끊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적용해보면, 우리가 상대방을 용서하면 나와 상대방을 얽매고 있는 악으로부터 자유를 얻고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2) 부활: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기 직전에 마르다가 한 고백 (“마지막 날 부활때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처럼, 1세기 유대인들은 마지막 날 메시아가 오실 때 모든 산 자와 죽은 자들이 진정으로 하나님 백성으로 회복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활에 대해서도 연속성(육체의 부활)과 불연속성(육체의 변화)의 개념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부활이 역사의 마지막에 일어날 거라고 생각을 했고, 예수님은 역사의 중간에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은 바울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역사의 마지막 날 (소멸이 아닌 마지막날입니다)에 일어나리라고 믿었던 부활이 그 중간에 예수라는 사람에게 일어났음을 다메섹 도상에서 보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고민하며 결국 깨닫게 된 것은,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already but not yet). 앞당겨진/이미 시작된 종말이었습니다. 유대교배경을 가진 바울에게 있어서 종말은 결코 단절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날 이뤄질 하나님의 통치가 예수님의 부활로 이미 시작한 것(Here and now)을 의미했습니다. 역사의 진행은 계속되는 연속적인 것입니다. 역사의 진행은 계속되지만 (연속성), 메시아는 오셨고 (세상 권세를 이기셨고), 현재는 궁극적인 종말, 하나님 나라의 도래 (비연속성)를 향해 역사가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3) 빈무덤: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무덤이 비어 있었는데, 이것은 실제로 육체로 살아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예수님이 영으로만 부활하셨으면 죽음을 완전히 이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모인 중에 갑자기 나타나셨다가 사라지시는 장면이나, 마지막에 하늘로 올라가신 장면에서 예수님이 가지신 transphysical한 모습이 보이고,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에서는 비연속성이 보입니다. 여기에서 하늘과 땅에 대한 유대인의 개념을 알아보겠습니다. 유대교/기독교에서 얘기하는 하늘과 땅은 범신론(하늘과 땅은 처음부터 하나고 모든 물질/사물에 신이 있다)과 이신론(하늘과 땅은 별개고 창조주는 만들고 난 후 관심없이 내버려 둔다)에서 말하는 하늘과 땅과 다릅니다. 하늘과 땅이 만난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같이 존재하는 모습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나타나셔서 이야기하시는 장면이 반복됩니다. 상징적인 예 가운데 하나가 야곱의 사다리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이 땅과 접해있고 존재하는 하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성막에 나타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고, 율법을 주신 일 가운데서 우리는 하늘과 땅 모두에 존재하시며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늘과 땅은 하나가 됩니다. 구약의 모델로서 ‘성전’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그 하나됨의 상징입니다. 신약 전반에 나타나는 ‘교회와 성령의 거하심’이나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이 내려온다’는 표현은 궁극적으로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이 물리적으로 이 땅을 비우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더 이상 그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고 새로운 방식으로 제자들에게 존재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늘과 땅이 여전히 맞물려 겹쳐있고, 그분이 여전히 다스리신다는 말씀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나빠지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올라가신 예수님을 대신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한다는 오류를 범치 말아야 합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종말론적 이원론(현재의 시대와 다시올 시대의 구분)이지, 존재론적 이원론 (악한 땅과 선한 천국)이 아닙니다. 영광된 미래를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롬 8:18, 빌립보서3:21). 영광된 미래를 현재에 옮겨 사는 종말론적인 삶을 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히11장). 기독교에서의 종말은 이 세상의 페기나 소멸이 아니라 세상이 부패와 죽음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완성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미래가 이런 연속성을 이야기 하는 거라면, 우리는 현재 처한 상황에서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이 새로운 미래 세계를 앞당기는 일에 참여할 강한 동기을 부여받게 됩니다.
2. 방황하는 소명
우리가 들어온 소명에 관한 이야기는 유감스럽게도 현재에 뿌리박고 연속성이 결여된 것들이 많았습니다. 많은 청년집회에서 “비전/소명을 가지라”고 강조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소명을 가지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큰 꿈을 꾸라”고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공부 잘 해서 교수, 의사, 판사, 부자가 되야 한다는 목표주도형(goal-driven) 인생이 우리 삶의 표준이 되었고 그렇게 사는 것이 정상적이고 성경적으로 장려된 삶이라고 배워왔습니다. 탁월하거나 튀어야 하고, 탁월함을 추구하는 삶이 우리의 목적이며 성경적인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열심히 하라, 충성하라는 이야기는 성경에 있지만, 탁월함은 내가 삶에 충성을 할 때 나타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부산물일 뿐입니다. 세상 가치관에 물든 우리는 탁월하지 않을때 우리 자신을 실패한 인생이라고 간주합니다. 마냥 성실한 삶이 성경적인가?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을 바로잡으려고 하시는가 하는 관점에서 나 자신을 드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성실함을 성경은 원합니다. 또, 비전으로 포장한 무기력함도 연속성이 결여된 모습입니다. “저는 아직 비전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함부로 비전을 가지면 야망이 될 것 같아서, 하나님이 저에게 비전을 주실 때까지 저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지요. 그래서 저는 교회 청년부나 교회 community에 참여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무기력하고 이기적인 모습을 비전으로 포장한 변명입니다.
다른 하나는 좀 민감한 주제인데, 학문, 직업이 소명인가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보통 학문, 직업을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직업은 소명이다’라고 말한 캘빈 이후로 이 생각이 우리에게 주입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직업이 소명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직업이든지 우리가 열심히 하면 소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상적으로 생각하지만, 어그러진 세상은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직업에 대한 관점은 원래 창조질서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신성한 축복이었습니다. 작은 일을 축복과 은혜로 여기고 충성히 해야하는 근거와 의미를 제공해주기도 했지만, 죄로 왜곡된 세상에서 노동과 일이 필연적으로 세상권세와 접촉하게 될 때 더 이상 낭만적으로 해석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직업이 선택적인 취향의 문제가 아닌데다 우리의 생존문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직업과 진로를 선택할 때 취향, 성품, 적성을 따지게 될 선택의 여유가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그럴 수 있다면 그리고 그렇게 하신다면 큰 축복을 받은 거지요). 제 생각에는, 직업이 주는 세상권세와의 struggle이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 가운데서 하나님나라의 가치관을 살아가는 가에 소명이 있습니다. 이런 관점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두 가지 질문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내가 벌을 받아 마땅한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님께서 나 대신 벌을 받으셨기 때문 (대속설)이라는 관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온 세상을 구출하시고 획복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의 반항으로 생긴 타락과 부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반항하는 인간을 노예로 삼아 계속 타락된 상태로 있게 하는 악의 세력을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정복하셨기 때문이라는 관점이 있습니다. 직업이 소명이라는 관점도 마찬가지로, 성실하게 일하는 소명이라는 개념을 넘어서, 어그러진 창조세계를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권세를 이기신 예수님의 방법으로, 이 세상권세를 길들이는 현장으로 직업을 삼았을 때 직업이 소명이 됩니다.
3. 현재적 소명
절망적인 상황들이 있습니다. 쳇바퀴 같이 돌아가는 일상, 경제적 육체적인 어려움, 실연,어려운 학업,실업의 문제 등 절망적인 상황이 우리 주위에 많습니다. 성경에 해결의 실마리가 있습니다. 하루만 지나면 없어지는 만나가 있죠.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늘에서 내려준 만나가 왜 하루면 없어질까요? 하나님께서 저장하지 말라고 하셨는데요. 예수님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고, 주기도문에도 “일용할 양식을 주시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는 분명 미래에 대한 걱정입니다. 반면 주기도문의 기도는, 하나님의 백성이 그날그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서 secure 해주시기를 간구하라는 현재의 삶에 대한 기도입니다. 현재의 삶에 대해 예수님께서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제 1 계명입니다. “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고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 계명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이 이미 있다는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보통 이미 주어진 계명을 소명으로 생각하지 않고, 무언가 특별한(specific) 한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specific 한 것이 미래에 관한 것이라 우리는 미래에 대한 소명을 생각하지만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계명을 현재적 소명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연속성 상에서 보면 왜 현재가 중요한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현재 내가 처한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해(나의 최선이 아닌 하나님의 최선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고 온 맘과 뜻을 다해 충성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의적으로 이 사실을 외면하면서 우리 소명을 다른 곳에서 앞으로 다가올 무언가를 찾으려고 애를 씁니다. 현재적 소명을 놔 두고, 미래적인 것을 그릇되게 찾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해왔던 소명이 미래에 관한 것이었지만 그것이 위에서 말씀드렸던 하나님나라의 현재성, 연속성을 무시한 뭔가 왜곡된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원래 성경이 견지하는 미래적 소명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우리 인생의 방향이나 진로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우리는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미래적 소명을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이라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대신 성경은 우리가 바라는 미래는 ‘소망’이란 단어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대신에 현재적 소명에 충성을 다하고 있는 우리에게 축복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계획으로의 초청’이 미래적 소명입니다. 저와 성경공부를 하셨던 분이 잘 지적해 주셨해 주셨던 바울의 예를 들겠습니다. 바울의 ‘로마도 보아야 하니라’는 비전이 언제 생겨났겠습니까? 1차 전도여행 전부터 생겼겠습니까?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을 충성되게 수행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자연스럽게 바울의 눈을 열어 그런 비전을 주시지 않았겠습니까? 성경에서는 미래에 대해 믿음으로 걸어가라(walk by faith)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묵시가 없는 백성은 방자하거니와’라는 잠언의 구절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비전, 소명이 있어야지”라고 이해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방자한 이유는 현재적 소명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요엘서에는 ‘너의 자녀들이 장래일을 말할 것이며 늙은이는 꿈을 꾸며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꿈을 꾸라고 이야기 하지 않고, 요엘 2:15의 ‘회개하라’는 명령에 순종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저는 현재적 소명이 바로 역사적 연속성을 가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가져야 할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종말론적인 현재성을 가진 것이라면 우리의 소명도 결코 현재를 떠날 수 없습니다. 그냥 공허하게 미래를 생각하기 보다는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우리에게 주어진 현재적 소명이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봅시다.
‘새 피조물’입 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피조물을 만드시고 백성으로 부르셨을 때,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현재에 살도록 초청을 받은 것입니다. 죄사함을 누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그리고 이미 다가온 종말을 현재에 앞당겨주신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 말은 불연속성을 예견하는 연속성을 가진다라고 표현될 수 있습니다. 이 현재적 소명은 연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다’ (출 3:5)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모세가 양을 치고 있을 때 불이 붙었지만 타지않는 떨기나무를 보고 가까이 다가올 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수시로 옮겨다니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 시절에는 한 곳에 4-5년 이상 머무르기가 힘듭니다. 우리가 이동이 많은 삶을 살아나갈 때 나그네의 삶을 사는 양 스스로를 비견합니다. 나그네의 삶이 성경적인 용어라서 그 표현이 멋있을지 몰라도, 대부분 우리는 헌신하지 못하는 나의 삶을 변명하기 위해 나그네의 삶이라고 하지 않는지요? 직장에서 임시고용인들은 헌신도가 떨어집니다 (요즘이야 직장 잡기가 힘드니까 제 비유가 맞지 않을 수 있겠습니다만). 우리는 그런 임시 고용인의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선 땅에서 거룩함을 찾아야 합니다. 나그네라는 표현은 헌신하지 못하는 모습에 대한 변명의 용도가 아니라 소유하지 않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그 안전을 의탁한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현재를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로 여기고 현재에 충실하며 미루지 않는 것이 현재적 소명의 요소입니다.
또 현재적 소명에서 ‘창조적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선행을 하거나 남을 보살피는 행위는 우리로 하여금 보람을 느끼게 하고 그것은 우리 삶에 중요한 활력소이기도 합니다. 내가 어떤 행위를 함으로써, 즉 남을 도와준다든지 성경공부를 열심히 한다든지 하는 어떤 보람을 느낌으로써 내 삶의 의미를 갖는 방식입니다. 그것은 마치 내 행위 자체가 어떤 의미를 가진다는 식입니다. 아무 행위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어떻겠습니까? 예를 들어 내가 유대인 포로캠프에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어떤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요? 내가 소록도에 있는 사람 중 하나라면 어떻게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할 수가 있는데요. 이때 시를 짓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노래를 부른다거나, 악기를 연주하거나, 아주 소박한 행위를 통해서라도 피조세계에 담긴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피조세계에 담긴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는 것 자체로 내 삶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다’(출 3:5)를 다시 생각해 보면, 창조성을 가진 현재적 소명은 내가 선 곳에서 거룩함을 찾는 것입니다. 아침에 반복하는 행위들(세수, 어항의 물고기에게 밥을 주는 것, 화분에 물을 주는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삶이 피조세계에 담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면서 현재의 삶에 있는 거룩함을 찾는 삶이 아닐까요?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의 삶에 이런 모습이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어항의 물고기에게 밥을 주며 피조세계를 다스리라 하신 주님의 뜻을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아침에 세수를 하면서 그 깨끗한 물을 써서 세수할 수 있음이 감사하고, 또 그 투명한 물이 제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때 느끼는 그 신선함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축복을 느낍니다 (뭐 매일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굉장히 자주 그렇답니다). 가령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는 경우, 아이들처럼 동심으로 돌아갈 수 있어서 좋고, 가르칠 때 교사로서 더 배우는 것이 있어서 좋다고 흔히들 말씀하시지만, 어떻게 하면 주일학교를 더 좋게 만들 수 있을까 이런 궁리를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거룩한 행위 안에 우리가 같이 들어간다면 놀라운 창조력을 가질 수 있겠습니다. 이런 모습 속에서 우리가 현재적 소명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적 제자의 삶’. 제자의 삶은 곧 성품을 연습하고, 용서를 선포하며 사는 삶, 세상 권세를 대적하는 삶입니다. 성품의 연습에 대해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은사로서의 성품이 계발되지 않은 우리가 이 세상의 가치관에 밀리고 밀려서 직장, 소명을 얘기할 때마다 좋은 자리를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하고 얘기하곤 하는데, 무엇이 된다는 것이 꼭 소명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소명은 어떤 사람이 된다는 것에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새포도주 비유에서 가죽부대가 견디지 못하고 터지듯이, 우리가 복음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상권세가 견디지 못해야 합니다. 하나 덧붙이고 싶은 것은, 우리가 보통 개인적인 소명으로 접근을 하는데, 공동체적인 (현재적)소명을 지향하며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소명공동체가 없으신 분은 소명공동체를 꿈꾸시고, 속한 공동체가 공유하는 소명이 없다면 공동체가 공유하는 (현재적)소명을 기대하시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성품을 연습하고, 또 용서의 선포로 이 세상권세를 대적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일들이 공동체적으로 이루어져 나가는 것이 예수님의 교회를 향한 비전이었습니다.
4. 맺음
음유시인인 T.S. Elliot은 ‘The Rock’에서  “Where is the Life we have lost in living(우리가 사느라고 읽어버린 우리의 삶은 어디 있을까)?”라고 묻습니다. 우리가 goal-driven 인생을 살고 탁월성을 추구해가면서 바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연 이제 우리가 높고, 강한 것을 추구하는 세상의 가치관에 휩쓸려 같이 따라가야 하는지 우리 인생을 다시 한 번 점검해야 겠습니다.
“네가 선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 에서 물론 여러가지 해석을 할 수 있겠지만, 불 붙어 타지 않는 떨기나무가 모세 자신의 모습은 아니었을까요? 모세의 마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사랑과 desire를 여전히 품고 있는 모습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불러 내셨습니다. 신을 벗고 (상전에게 표하는 극도의 순종을 보여줌) 순종하는 모습으로 가도록 하나님께서 모세를 인도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이 현재적 소명에 충성하는 가운데 기초가 다지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소명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KOSTA에서 김동록 박사를 만나보았습니다.  

코스타 이후의 강사님의 근황이 궁금합니다.
씨애틀 근처의 몇 군데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동지들이 있습니다. 이들과 코스타 전후로 잠시 쉬었던 만남과 교제를 다시 하면서 서로 돕고 좋은 아이디어를 내고 하는 일을 지원하고 있지요. 제가 직접하는 일은 별로 없어요. 또 최근에 달라스(시카고 코스타 4지역)에서 새로 시작하시는 성경공부가 있는데 그분들과 함께 교제할 수 있어서 제게도 무척 격려가 됩니다. 또 그동안 읽지 못했던 책을 읽으려고 하는데 욕심만 많아서 그런지 진도가 나가질 않네요. 그동안 모르고 지냈던 성경의 진리를 하나라도 더 알고 (뭐 전하기까지 해야하겠지만) 싶은 욕심이 끝이 없어요.
강의에서 (시간상의 이유로, 혹은 다른 이유로) 다루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이곳에 나눠주세요.
복음이 정치적, 사회적으로 가지는 폭발적인 능력을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게 힘들어요. 저희는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신 말씀이 저희 잠재의식속에 내재되어 있어서 항상 기독교가 이세상 권력에 정면 대결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왔던 것이지요. 근데 만약 그 말씀이 헬라어 용법에 맞게  “내 나라는 이 세상으로부터 나온 것 아니라”고 해석이 되면 전혀 다른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이 왜 그토록 자신과 하나님 나라가 너무 일찍 드러나는 것을 말렸을까요? 그저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으로만 포장되어 와전되기를 우려하셨다고 보기에는 미흡합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가 드러났을 때 정치적 세력의 핍박이 너무 일찍 닥쳐오기를 우려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만약 그 말씀을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해석한다면 그런 우려가 필요없지 않았겠습니까?  제가 믿기로는,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의 짓누르는 권력과 가치관에 온 몸으로 정면 대적하면서도 오히려  그 안에 속한 사람들의 핍박을 받아내시고 용서하심으로 그들의 속박을 끊어 버리시고 승리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루어졌습니다. 오늘날 “내가” 어디로 갈까, “내가” 무엇을 할까라고 고민하는 젊은이들의 앞길에 하나님나라의 도래와 그 왕되신 예수님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면 좋겠습니다. 이 새로운 가치관이 젊은 분들의 장래를 설계하는 기본 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소명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하시게 된 동기와 강의제목을 ‘방황하는 소명’이라고 정하게 되신 동기가 궁금합니다. 제목이 굉장히 attractive 합니다. 
사실은 저 자신이 방황했었거든요. 강의에서 이야기한 비전을 핑계한 무기력함은 제 모습이었습니다. 유학 온 동기나, 유학와서 실험실에만 틀어박혀 지역사회, 교회, 이웃섬김에 대한 모든 일에 눈과 귀를 막고 있으면서도 언젠가는 떠날 사람, 언젠가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것이라는 핑계로 10년을 보내었지요. 전혀 현재적이지 않았고 왜곡된 미래상을 가지고 있었어요. 한국으로 교수직을 받아서 금의환향하고 학교 캠퍼스에서 기독교 동아리 지도교수가 되어서 학생들 지도하는 그런 꿈을 꾸었지요. 꿈이 순진한 만큼 제 삶도 순진하리라 만큼 이기적이었지요. 연구실에 처박혀 정신없이 일하다가 어느날 번뜩 제 삶이 성경적인 소명에 근거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주변 선배들과 후배들에게 조심스럽게 확인을 해보니 과연 제 생각이 비전이 아니었던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런데 헤맨 것이 저뿐만이 아니라, 많은 (거의 대부분)  유학생이나 청년기독교인들이 같은 오류 안에서 인생을 고민하고 있더군요. 이런 강의를 하도록 해주신 것을 제가 허비한 것을 갚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학생들에게 한 말씀 해주세요. 특히 소명에 대해 고민하는 분들에게요
소명이 전 생애를 통해 지속되어야 하는 엄청난 것이란 부담감을 내려놓으시면 좋겠습니다. 변할 수 있고 또 변해야하는 것일테니까요. 굳이 예를 들자면 마치 소명을 3-4년 전심을 다해 노력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그 무엇으로 생각하시는 정도로 봐도 되겠어요. 그 이후에 어떻게 되는지는 또 그때 가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고. 저는 그 하나님나라의 가치와 예언자적인 상징을 통해 이 세상의 권세와 가치관(사단의 세력에 잡힌 권세)을 향하여 “너희 나라가 아니란다. 하나님나라가 이런 특질과 능력을 가지고 있단다”라고 하면서 세상권세를 길들여 가는 비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의 영역을 하나하나 선포해 나가면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작업들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정직함, 아무도 노래하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해 나가는 작업들인데, 매주하는 작은 성경공부, 그리고 그 구성원에 대한 아무도 모르는 속타는 기도와 돌봄 등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고 듣지 않지만 이를 행하는 나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고통과 어려움과 불편이 늘 함께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권세와 가치관을 거스리기 떄문입니다. 우리의 앞길에 대한 고민이 이런 길을 걸어나가기 위함이라면 숨겨진 영광된 가치와 비밀스러운 기쁨이  있지 않겠습니까 (밭에 숨겨진 보화)?

[양승혜] 크리스천 직장인의 삶

크리스천 직장인의 삶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5년하고 한국을 떠난 뒤 일반 직장에 다니지 않은지 8년 정도 된 것 같다. 그런데 1년 전 대도시로 이사하면서 다시 직장에서 일할 기회가 생겼다. 8년이라는 시간 동안 시대가 변한만큼 나의 삶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할 때 나는 선데이 크리스천이었고, 아무도 내가 크리스천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 말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나는 직장생활을 하는데 크리스천으로서 걸림돌이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그 때는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나 자신 조차도 굳이 크리스천이라고 밝히지 않는데, 어려움이 있을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지금 다니는 직장은 젊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여름 내내 인턴들이 있어서 코스타에 모인 젊은이들에게서 느껴지는 열기가 가득찼었다. 여기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나는, 또 여기에서 유일한 크리스천이다. 사실 이민 사회에 살다보면 어찌어찌한 기회로 열심히는 아니더라도 교회에 한 번 정도는 발을 디뎠을 법도 한데 이곳에 있는 젊은 청년들은 단 한명도 교회를 가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기독교를 싫어하기까지 한다. 나는 여기서 아직까지 내가 크리스천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8년 전하고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이다.

그들이 기독교인을 싫어하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일단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만 최고라고 인정하며 다른 것은 무시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교만함이 싫단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교회에 가라고 지나치게 푸쉬하면서 정작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더 사람들을 잘 속이고 나쁜 짓도 많이 하더란다. 이 부분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느 부분은 사실이기 때문에…그러면서 생각하게 되었다. 말로만 교회를 다닌다고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것은 이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드러낼 수 있을까?

예수님을 진정한 나의 주인으로 모시게 된 나는 8년전과 다른 모습으로 다시 일반인들이 다니는 직장이라는 공간에 던져졌다. 단지 식기도를 하고, 술을 마시지 않는 것으로 이들에게 크리스천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까? 그것만 가지고는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여전히 고민중이다. 회사에서 가끔 회식을 할 때가 되면 더욱 난감해진다. 술을 안마실 수 있지만 음주가무가 있는 이 분위기에 전혀 동화되지 못하고, 오히려 분위기를 깨는 역할만을 하게 된다. 왜 술을 안먹느냐는 질문에는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그냥 웃기만 한다. 크리스천이라서 마시지 않는다는 말은 전혀 이유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술을 먹는 것을 이미 보았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술을 안먹는 것이 꼭 크리스천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단편적인 모습일 뿐 그 사람의 신앙을 대변해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 좋은 공동체를 만나고 교제하며 그 안에서 관계를 형성해나가는 것은 너무도 중요하다. 좋은 교회는 말씀 뿐 아니라 얼마나 건강한 공동체(소그룹)이 형성되어있느냐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만큼 사회 속의 공동체도 중요한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모두 각자의 영역에서 말씀을 전하는 제자로, 선교사로 부르셨다. 내가 속한 이 사회 공동체 안에 하나님께서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젊은 영혼들이 잘못된 시각으로 크리스천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오는 것에는 관심없어 한다. 나의 무엇이, 어떤 말과 행동이, 그리고 작은 선한 실천의 모습들을 통해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게 할 수 있을까? 내가 크리스천이라는 부담감이 밀려오는 하루하루,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나 자신에 묻고 또 묻는다. 나는 오늘 어떻게 이들에게 크리스천의 모습을 보여주었을까? 


[이유정] 칙필레 신화의 비밀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요 일곱째 날은 쉴 안식일이니 성회라 너희는 무슨 일이든지 하지 말라.
  이는 너희 거하는 각처에서 지킬 여호와의 안식일이니라.” (레위기 23:3 )
 
얼마 전 미 동남부 최고 일간지 AJC가 조지아주의 대표적인 체인레스토랑 칙필레(Chic-Fil-A)의 창업주인 트루엣 캐시 명예회장을 인터뷰했다. 캐시 회장은 창업 이후 지난 16년 동안 해마다 두 자리 수 매출 신장을 이끈 장본인이다. 칙필레는 현재 전국 1400개 매장을 보유한 동종업계 전국 2위의 레스토랑이다.
 
이 인터뷰에서 필자의 가슴을 뛰게 한 것은 칙필레 경영인으로서 가장 뿌듯한 것이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캐시 회장이 답변한 내용이다. 그는 서슴없이 “주일에 쉬기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아흔을 바라보는 캐시는 지난 51년 동안 쉬는 주일마다 주일학교 교사로서 13세 소년들에게 성경을 가르쳐 왔다.

통상 패스트 푸드점 업계에서 일요일 매출은 전체 매출의 최소 20% 이상을 차지한다. 그러나 캐시는 하나님을 위해 그 20%를 포기했다. 캐시 회장은 1주일에 하루는 성경의 원리대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쉬는 날이므로, 칙필레의 전국 모든 매장은 주일마다 직원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도록 문을 닫는다고 했다.

그것은 탁월한 결정이었다. 경제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외식업계에서는 일명 ‘칙필레 신화’라는 용어까지 생겨날 정도로 경이적인 매출 신장을 해마다 이어 나갔다. 이것이 하나님의 시간법칙이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신 분이다. 그분은 양적 시간보다 질적 시간을 중요하게 여기신다. 하나님의 시간 법칙은 인간의 법칙과 달라서 물리적 1시간이 하나님께는 1초도, 1000시간도 될 수 있다. 주일은 일주일의 7분의 1이 아니다. 그 하루가 한 달 휴가로도 회복되지 않는 몸과 마음의 안식을 준다. 예배 한 시간은 24분의 1이 아니다. 그 한 시간이 이십 년 학교교육으로도 줄 수 없는 신적 가치관과 지혜를 깨우치게 한다.


일주일의 하루를 온전히 쉬는 것은 창조의 질서이다.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요 일곱째 날은 쉴 안식일이니 성회라 너희는 무슨 일이든지 하지 말라 이는 너희 거하는 각처에서 지킬 여호와의 안식일이니라” (레위기 23:3 )

한국교회는 그 어느 나라보다 주일성수의 전통이 강하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살았다. 그러나 이 전통이 사라지고 있다. 요즘 한국교회 중고등부 담당 교역자들이 울상이다. 청소년들이 공부 때문에 시간이 아까워서 교회에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슬픈 사실은 신앙 있는 부모들이 주일에 자녀들이 교회에 오래 있는 것을 못마땅해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학생들이 이른 아침 예배 마치고 학원으로 과외로 도서관으로 직행한다. 공부하는 시간 외에 남는 자투리 시간을 하나님께 드린다. 청소년들을 잡으려고 튀는 프로그램, 청소년의 눈을 사로잡는 예배에 목숨 걸고 투자하지 않으면 중고등부 사역자체가 불가능하다.

한국교회가 왜 이렇게 변질되었는가? 복음을 위해, 선교를 위해, 교회 봉사를 위해, 그 무엇보다 예배를 위해 시간을 내는 일을 아까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그만큼 싸구려 취급하는 것 아닌가! 우리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쓰다 남은 싸구려 빗자루 정도로 물려준다면 한국교회의 미래는 재앙으로 돌아올 것이 불 보듯 뻔하다.

한국교회를 향해 비장한 마음으로 제안한다. 우리 부모 세대가 솔선수범해서 다음 세대 자녀들에게 일주일의 하루를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신앙습관을 물려주자. 안식일 엄수주의로 귀화하자는 것도 아니요, 율법주의적 의식으로 돌아가자는 것도 아니다. 주일의 본질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창조질서를 회복하자는 것이다. 하나님의 시간을 하나님께 돌려드리자는 운동이다. 이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존폐가 달린 필사적인 과제이다.

이유정(한빛지구촌교회 예배목사)

2010 KOSTA Chicago conference 참석자 좌담회


이번 시카고 코스타 집회에 참석한 코스탄들과 시카고 코스타 집회를 평가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평가회는 8월 9일에 90분 동안 컨퍼런스콜로 진행이 되었고, 장지훈 형제, 문세진 형제, 강지연 자매, 하희임 자매가 참여하였습니다. 

eKOSTA: 자기 소개 부탁드립니다

장지훈 형제님 (이하 지훈): University of Colorado 마케팅 박사과정에 있는 장지훈입니다. 2008년 처음 코스타에 참석했었고요, 올해는 3지역 코디, 조장으로 섬겼습니다.

문세진 형제님 (이하 세진): 이번에 처음 참석해서 조장으로 섬겼고, Western Michigan University 정치학 박사과정에 있습니다.

강지연 자매님 (이하 지연): University of Iowa에서 Communication 교수로 이번에 시작했습니다. 코스타는 네 번째 참석했고, 올해는 중보기도 팀으로, 또 처음으로 조장으로 섬겼습니다.

하희임 자매님 (이하 희임): San Francisco에서 코오롱에서 일하고 있고요, 이번에 처음으로 코스타에 참석하고 조장으로 섬겼습니다.

eKOSTA: 이번 코스타 집회에서 전체적으로 좋았던 점, 그리고 아쉬웠던 점으로 남는 부분이 있었나요? 이번에 처음 참석이 아니셨던 분들께서는 예년과 비교해서 말씀해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희임: 이번 집회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북한을 위해서 금식하는 시간이 있어 한 민족으로서 북한을 마음에 두고 간절히 기도할 수 있었던 점입니다. 집회 이후에도 계속 중보할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더욱 좋습니다. 뿐만 아니라 행정 처리 하시는 분들이 잘 조직화 되어있고, 자원봉사 하시는 분들이 헌신적으로 섬기셔서 순조롭게 진행되었던 것 같습니다. 코스타보이스를 통해 뉴스를 접하는 것도 효율적이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바탕으로 이야기 해주셨던 개인 상담도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아쉬웠던 점은, 화요일 저녁 집회 시간에 조 전체가 영아부 자봉으로 섬기게 되었는데요, 저희 조에 구원의 확신이 없었던 조원이 있었는데 구원 초청 시간을 놓쳤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집회 내용을 미리 알고 조정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지연: 예전 참석 때도 그랬듯이,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좋았습니다. 또한 조모임이 좋았습니다. 중보기도 참가자들의 조는 세미나 시간에도 별도로 훈련이나 기도 시간을 갖는데, 많은 은혜가 있었습니다. 특히 정말 훌륭한 찬양과 말씀이 있었던 새벽 기도가 좋았는데, 많은 분들이 참여하지 않으셔서 아쉬웠습니다. 광고가 잘 안되기도 했고, 또 밤에 조모임이 늦게 끝나면 새벽 6시에 기도회에 참석하기가 힘들었을 거라 생각이 들지만, 그 점이 아쉬웠습니다.

지훈: 저는 우연히 중보기도 팀의 새벽 기도회에 가게 되었었는데 지연 자매님 나눠주신대로 큰 은혜를 받은 시간이었습니다. 저도 새벽 기도회가 광고가 더 많이 되었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코스타 진행 면에서 전체적으로 시간 엄수가 잘 되었던 것, 코스타보이스가 새로운 정보들을 전해준 것, 그리고 김동민 간사님의 광고가 적절히 짜여졌던 점 등을 통해 볼 때, 진행이 아주 훌륭했다고 생각합니다. 한가지 아쉬웠던 점은 이동원 목사님께서 세 번의 설교 중 두 번이나 설교 본문을 바꾸셨다는 것, 그래서인지 아침 큐티 내용과 전체 집회 말씀과의 유기적인 관계가 약했던 부분을 꼽고 싶습니다.

세진: 저는 처음 참석했는데 전체적으로 굉장히 잘 준비된 집회였다고 생각됩니다. 여러 섬기시는 분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특히 자녀가 있는 기혼조들은 어떻게 보면 많은 핸디캡을 가지고 있는데, 싱글 자봉 여러분들의 도움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또한 조장으로 섬기면서, 개인적으로 모태신앙을 가지고 지내면서 경험하기 힘들었던 긴급성을 체험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아쉬웠던 점은, 저녁 집회 찬양 시간에 사람들의 이동이 많아서 집중하는데 방해가 되었습니다. 또 홍정길, 이동원 목사님의 설교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는데, 아쉬움이 많이 남았습니다. 특히 복음, 민족, 땅끝을 이야기 할 때는 과거에 대한 평가가 있어야 될 것 같은데요, 조장 코스타 중에는 교회의 역할, 역사에 대한 강조가 있었지만 본 집회 중에는 이런 부분이 다뤄지지 않아서 전체적으로 균형을 잡는데 무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eKOSTA: 코스타 전 온라인 훈련 및 조장 수양회 관련해서 좋았던 부분과 개선되었으면 하는 부분을 나눠주십시오.

세진: 온라인 훈련을 통해 미리 기도와 말씀으로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이 유익했습니다. 그리고 컨콜을 통해 지역 멘토, 조장님들과 같이 기도했던 것이 초보 조장에게는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습니다. 조장 수양회 또한 굉장히 좋았는데, 세 분의 주제 강의는 코스타의 정신과 주제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조장의 맥을 잡아라’와 같은 세션 또한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다른 지역의 조장, 멘토님들을 알 기회가 별로 없었던 것이 아쉬운 점으로 남습니다.

지훈: 저도 조장 수양회를 통해 코스타 주제와 관련된 것을 풍성히 묵상할 수 있어 유익했고, 사전 온라인 훈련 및 교제를 통해 묵상 뿐만 아니라 친밀한 나눔이 이뤄진 것이 좋았습니다. 한 가지 아쉬웠던 부분은, QT 내용 및 질문을 여러 강사님들께서 준비하셔서 그런지 난이도가 일정하지 않았고, 나중에 가서는 조금 힘들어지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지연: 저는 조장 수양회에 참석하지 못해서 많이 아쉽습니다. 온라인 훈련이 도움이 많이 되었는데, 주제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중보기도팀은 조원들이 모두 훈련에 참가했기 때문에 집회 중에 QT 나눔이 훨씬 풍성했습니다. 일반조에서도 조원들도 마찬가지로 사전에 QT를 하고 올 수 있도록 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희임: 온라인 훈련이 굉장히 좋았는데, 막상 집회 중에는 QT를 조원들과 함께 할 수 없는 날도 있고, 나누는 시간이 조금 적어서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조장 코스타 중에 다른 조장님들께서는 강사와 조원들과의 만남을 미리 준비하신 것 같았는데, 처음 섬기는 조장들에게도 그런 팁이 있었으면 좋았을 거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eKOSTA: 2010년 주제인 ‘복음 민족 땅끝’이 (1) 조장 코스타를 통해, 그리고 (2) 전체 프로그램을 통해 얼마나 잘 전달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또한 이것이 연속적으로 조원들과 주제 관련 토론을 나누는데 (예를 들면 북한, 통일 관련) 어떻게 도움이 되었습니까?

희임: 저는 처음에는 주제가 광범위하다고 생각했지만, 조장 수양회 말씀을 통한 이해와 은혜를 가지고 집회 말씀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 좋았습니다. 특히 북한을 향한 마음을 품을 수 있는 것이 감사했습니다.

지연: 복음, 민족, 땅끝을 하루 하루의 주제로 삼아서 진행된 것이 효율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민족과 땅끝에 관한 전체 집회 말씀 중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보편적인 관점 보다는 다소 특수한 관점이 전달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쩌면 코스타 25주년을 맞아서 코스타가 얼마나 의미있는 시간을 가져왔는지를 되돌아보는 의미를 담은 관점이었을 수도 있고, 그런 면에서 이번에는 ‘코스타’라는 것이 많이 드러난 집회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민족, 땅끝에 관한 전체 집회 말씀에 동의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지만, 조모임 중에는 또 다양한 의견들이 있었고 서로 배울 수 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지훈: 저도 지연 자매님과 같이 전체 집회를 통한 주제 전달 내용이 조금 불편했던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특히 민족, 땅끝의 개념에 있어 조장 코스타에서의 말씀과 관점이 많이 다른 것 같았습니다. 조원들의 경우, 전체 집회 말씀과 QT를 연결시키기 조금 힘들어했던 것 같고, 그래서인지 QT 나눔 시간에 생각이 모아지기 보다는 조금 겉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전체 집회 말씀에 대한 조원들의 평가도 다소 부정적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세진: 개인적으로는 조장 수양회의 말씀이 주제에 대해 고민하고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QT 본문도 주제와 연결이 잘 되어서 좋았습니다. 아쉬웠던 부분은, 저희는 자녀가 있는 기혼 분들의 조를 맡았는데요, 복음에 대해서는 공감대가 이루어진 반면, 민족, 땅끝에 대해서는 조원들이 조금 혼란스러워 했습니다. 당장 가정, 학교, 직장에서 크고 작은 갈등을 이겨내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그들의 삶 가운데, 민족과 땅끝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반문했습니다. 사실 민족, 땅끝의 개념을 조금 더 일반화 해서 우리 가족, 이웃이 민족, 땅끝이 될 수 있음을 이해시키고, 융통성 있게 주제가 전달되었다면 기혼조들의 반응도 더 좋았을 거라 생각됩니다. 수련회 이후에 김두식 교수님의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를 읽으며 그러한 의문에 도움이 되는 예화들을 찾았는데, 미리 읽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eKOSTA: 처음 참석이 아니셨던 분들께서는 예년의 주제와 관련해서 이번 주제가 어떠했는지 나눠주십시오.

지훈: 25주년이라 back to basics의 취지가 담긴 주제였던 것 같습니다. 기독교의 중요한 가치인 복음, 민족, 땅끝을 스스로 돌아보고 정리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주제 자체만으로는 굉장히 좋았습니다.

지영: 예년의 코스타 주제에도 민족, 공동체 등의 가치가 담겨있었지만 이번에는 더욱 직접적으로 그 가치를 내세운 것 같습니다. 코스타의 핵심 가치가 무엇인지 전달되었던 것은 좋았습니다. 그러나 세진 형제님께서 지적하신 것 처럼, 민족, 땅끝의 다면적인 부분, 의미들을 짚어보기 보다는 말 그대로의 의미만에 초점을 맞춰 전달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eKOSTA: 선택식 세미나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세션을 나눠주세요. 또한 세미나 프로그램에 대해 일반적으로 좋았던 부분과 개선되었으면 하는 부분이 있으신가요?

세진: 기혼조의 강사와의 만남 시간에 이재천 목사님의 세션에 들어갔는데 굉장히 좋았고, 조원들도 각각 들어가셨던 세션에서 많은 유익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선택식 세미나 중에는 정민 목사님의 “하나님 나라”를 듣고 하나님 나라의 관점을 넓힐 수 있었습니다. 특히 “아내 사랑을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듯 하라”고 하신 말씀이 결혼 생활에 있어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세미나 내용이 다양해서 처음 참석하시는 분들께는 좋지만, 두 세 번씩 오시는 분들은 들을 것이 많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과 함께, 세미나가 매년 반복된다는 느낌이 좀 아쉬웠습니다. 또 하나는 TM 세미나를 하실 분들이 더 많이 발굴되고, TM이 더 잘 장려되어 개발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이번에는 개설된 강의가 많지 않아서 아쉬웠습니다

지훈: 저도 역시 기혼조와 강사와의 만남 시간 굉장히 좋았습니다. 유남호 강사님의 캠퍼스 사역 세션에 들어갔습니다. 선택식 세미나 중에는 백은실 강사님의 “사람을 낚는 리더”가 기억에 남습니다. 제자를 삼는 가운데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화를 하는가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어떻게 대화를 이끌 때 더 많은 열매가 있을 수 있는지 배울 수 있었습니다. 강사님의 전달 방식, 사례, 말씀의 인용 등이 정말 훌륭했던 세션이었습니다. 반면에 저도 매년 세미나가 반복되는 점이 아쉬웠습니다. 물론 중요한 내용이라 반복되지만, 매년 주제와 맞추어 연관성을 더 강화시키면 좋을 것 같습니다. 또한 강사님들께서 너무 방대한 자료들을 준비하시다 보니 시간 엄수가 힘들어지고, 내용이 다 전달되지 못한 채 황급히 마무리 하시는 경우도 있었는데요, 그런 세션들의 경우 좀 더 짜임새 있는 진행을 위해 더 노력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희임: 저는 임현수 목사님의 북한 선교 세미나를 통해 평소에 접하기 힘든 북한에 대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코스타 이후에도 목사님께서 follow-up을 해주시며 계속적으로 북한 소식을 전해주셔서 저희 지역 교회의 지체들과 나눌 수 있는 것이 도움이 많이 됩니다. 이재천 목사님의 에니어그램 세션도 유익했습니다. 전도할 때 상대의 유형을 미리 파악하고 더 잘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짧아서 많은 내용이 다뤄질 수 없었던 부분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eKOSTA: 조활동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를 해주십시오. 특별히 불편했던 점, 또는 제안하고 싶으셨던 부분은 없으셨나요?

지훈: 저는 혼자 오신 기혼, 형제님들의 조를 섬겼습니다. 조원들 간에 나이차가 열 살 씩 났지만 모두들 성숙하신 형제님들이었고, 첫 날부터 쉽게 자신들의 삶을 오픈해주셨습니다. 아직까지도 온라인으로 기도 제목을 나누고 있고요, 정말 너무 좋은 조였습니다.

희임: 저희 조의 지체들은 처음 만났을 때는 별로 말 수가 없으셨는데요, 제가 먼저 제 삶을 솔직히 나누었고, 조원들도 따라서 쉽게 마음을 열었고 첫 날부터 많이 가까워질 수 있었습니다. 저는 외부 숙소에 묵었기 때문에, 이동 시간 동안에 조원과 한 명 한 명씩 얘기하며 깊은 기도 제목을 나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지금도 온라인으로 교제를 나누고 있습니다.

지연: 저도 조활동 너무 좋았습니다. 저희 조는 집회 전에 온라인으로 15문 15답과 같은 것을 통해 모두가 소개를 나누었기 때문에, 코스타에서 만났을 때는 금방 서로에게 오픈할 수 있었습니다. 중보기도로 섬기다 보니, 서로 개인적인 기도 제목은 많이 나누지 못했지만, 같은 마음으로 같이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았습니다. 코스타 이후로는 오히려 개인적인 기도제목들을 나누고 있습니다. 조모임이 코스타의 중요한 일부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고 있습니다.

세진: 저희 조모임도 대체로 좋았습니다. 조원들이 쉽게 삶을 나눠주셨습니다. 아침 QT는 하루씩 번갈아서 자매들만, 또는 형제들만 모여서 했는데, 굉장히 깊은 나눔이 이뤄졌습니다. 그러나 힘들었던 점 하나는, 저희 조 다섯 가정에 자녀들까지 포함해서 18명이나 되어서 모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밤에 조모임 할 때는 옆에서 몇 몇 조의 자녀들이 함께 뛰어놀았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분위기였습니다.

eKOSTA: 찬양, 전체 기도회, 조별 기도회, 상담에 대해 의견 부탁드립니다. 긍정적인, 또는 부정적인 의견이 있으신 항목을 고르셔서 자세히 나눠주세요.

지연: 저는 찬양이 너무 좋았습니다. 많은 은혜가 되었고, 찬양이 설교, 간증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설교 이후에도 찬양시간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제안을 해봅니다. 전체 기도회 시간에는 많은 분들이 기도에 참여하지 않으시고 나가셨는데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특히 자녀들 데리러 가야하기 때문에 기도회에 참석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분들이 계셨을 것 같은데, 이런 부분은 좀 더 배려를 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희임: 저도 찬양 시간이 좋았습니다. 또 유익이 되었던 것이 개인, 그룹 상담이었습니다. 개인 상담은 정말 좋았는데 시간이 짧아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룹 상담 시간에는 참석자 30명 정도, 강사 네 분이 계셨는데, 전반적으로 좋았지만, 질문 하나 하나에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서 많은 질문이 다뤄지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한 질문에 강사님들이 서로 다른 의견을 주셔서 조금 혼란스러웠던 부분도 있었습니다. 또 저희는 외부숙소에 있어서 조별 기도회를 갖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외북 숙소의 기도실에 조원들과 함께 갔을 때는 조용히 개인 기도를 하시는 분들이 계셔서 중보 기도회를 오래 할 수 없었습니다. 외부 숙소에 기도실을 적어도 두 군데 정도 마련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세진: 목요일 금식 기도회 때, 기도를 많이 하고 싶었는데 이동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집중하기가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같은 시간에 다른 장소로 이동하셔야 하는 분들이 계셨던 것 같은데, 기도회 시간에는 모두가 기도에 참여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이 짜여졌다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목요일 저녁 집회 후 기도회 때는 선교 헌신하신 조원들과 함께 계속 기도하고 싶었는데, 다른 방으로 옮겨가서 그럴 수 없었던 점이 아쉬웠습니다. 선교 헌신하신 조원들과 더 기도할 수 있었으면 더욱 풍성했을텐데요.

지훈: 목요일 금식기도 시간에 북한을 위해 함께 기도하는 것은 좋았지만, 평소에 배경 지식이 많이 없었던 사람들을 위해서 좀 더 정보를 주고 소개를 해주었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동영상으로 소개를 해줄 수도 있고요. 그랬다면 좀 더 북한의 실상에 대해 잘 알고 마음으로 느끼며 기도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eKOSTA: 다음 번에 코스타가 이런 주제 또는 내용도 다루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 부분이 있으신지요?

지연: 코스타에서 민족이라는 주제를 다룰 때, 한민족이란 걸 강조하는 것이 매우 당연시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에는 다문화 가정, 유학생, 코시안 (한국 남자와 동남아시아 여자 간에 태어난 자녀) 들이 점점 더 늘어나면서 다인종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한국에는 인종 차별적인 관점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이런 것이 더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코스타에서도 민족이라는 주제에서 조금 더 나아가서 생각할 때, 이렇게 변화하는 한국의 모습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실정에 더 잘 어울리는 메세지를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세진: 이번 코스타에서는 교회에 관한 언급이 적었던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신앙이 중요하지만 그것도 교회 공동체와 동떨어져서는 안되는 것인데, 요즘 한국의 교회들이 바른 신앙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공동체로서 우리 교회가 어떤 모습을 지향해야 하는지가 코스타에서 다뤄질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희임: 저는 San Francisco에 살면서 여런 민족의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타민족 사람들을 대하고 전도할 때 실질적으로 어떻게 접근하면 되는지를 배울 수 있는 주제, 또는 선택식 세미나가 준비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eKOSTA: 올해의 주제, 큐티, 또는 선포된 말씀으로 인해 디아스포라로 살아가는 여러분의 삶에 생긴 변화가 있으시다면 나눠주십시오.

지연: 저는 이번에 네 번째로 코스타에 참석했는데요, 코스타가 유학 생활 중 신앙의 터닝포인트 되기도 하였고, 하나님을 새로 만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올해도 아주 좋기는 했지만, 제가 앞서 말씀 드렸던 약간 불편했던 부분들이 있었다는 것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런 부분들이 부담이 되어서 좌담회에 초대하셨을 때 고민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번 코스타를 볼 때는, 어떤 코스타에서와 마찬가지로 많은 메세지를 받았습니다. 예전에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가운데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많이 고민했었다면, 이번 코스타를 통해서는 역사의 흐름 가운데 내가 어디에 서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코스타를 처음 시작하셨던 목사님들과, 지금 참석하시는 80년대 생 참석자들을 보면 그 사이 세대가 많이 바뀌었음을 봅니다. 또 그 가운데, 코스타의 역사 가운데 나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라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늘 최선을 다해도 부족함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완벽하시기에, 코스타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참석하신 모든 분들께 100%의 은혜를 주셨다고 믿습니다.

희임: 저는 직장인으로 미국에 왔기 때문에 코스타에 대해 알지 못하다가, 미국에서 생활한지 몇 년 째 되어서야 알게 되었는데요, 이번 처음 참석을 통해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다녀와서 직장 동료들에게도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었는데요, 불교 신자인 직장 상사에게도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모였었는지, 어떤 것을 배우고 왔는지 나눌 수 있었습니다. 직장 상사가 뜻밖의 관심을 보여서 저희 교회에 모시고 갈 수 있는 기회도 생겼습니다. 앞에서 나눴듯이, 북한 선교사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동안 북한 실정에 대해 무지했는데, 코스타에서 만큼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저희 부모님도 믿지 않으시지만, 그런 얘기들을 아버지께 나누면서 또 기도 부탁도 할 수 있었고, 그런 기회를 준 코스타에 감사합니다. 코스타에 다녀와서 큐티도 더 잘 하고, 귀납적 성경 공부도 하게 되었습니다. 바쁜 가운데 코스타 참석을 많이 고민했었는데요, 다녀와서 직장 생활도 오히려 더 잘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세진: 코스타에 다녀온 저의 삶 속에는 여전히 갈등과 좌절이 있지만, 코스타를 통해 경험한 은혜가 많은 힘이 됩니다. 저는 코스타에 대해서 한국에서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고, 유학 나온 후 꼭 와보고 싶어서, 연애하는 기분으로 코스타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지금 느끼는 것은, 코스타 참석 보다는, 돌아온 현실에서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코스타를 통해서 중보기도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고, 선한 부담감을 많이 갖고 돌아왔습니다.

지훈: 코스타를 평가할 때,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제가 너무 비판적이지 않았다 하는 생각이 들지만, 좌담회를 통해서 잘 정리가 된 것 같습니다. 제가 2년 전에 코스타에 참석했을 때는 참석하는 거 자체에 의의를 두었다면, 이번 코스타는 제게 매우 특별했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주의 학생 운동인 코스타는 일회성 집회가 아니라 돌아온 후의 삶이 더 중요하다고 말해주는 집회인 것 같습니다. 코스타가 끝나고 집에 와보니, 땅끝에 와보니, 땅끝의 실정이 말이 아니지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영혼, 조그만 땅 덩어리를 생각하며 중보기도 하려고 합니다. 장평훈 멘토님께서 조장 수양회 중 해주셨던 말씀 중에,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와 기독교인들이 많은 비난을 받고 있지만, 그런 비난을 잠재울 수 있는 선한 예가 우리 기독교 가운데 너무나 부족하다는 말씀이 기억이 납니다. 제가 그 선한 예가 되도록 노력해야겠다 생각이 듭니다. 수 십년 동안 노력해야하는 과정이겠지만요.

eKOSTA: 참여해주시고 좋은 의견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최주희] 결혼 그리고 가정의 기초

그리스도인의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됨”을 의미한다(마19:4-6; 고후6:14-16). 그런데 너무나 쉽고 당연하게 여겨지는 이 정의를 마음먹고 깊이 묵상해 보면 결코 그냥 단순하게 언급할 내용이 아님을 발견하게 된다.

먼저 “하나님 안에서”라는 의미는 교회에 다니거나 거듭난 그리스도인 이상의 의미이다.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면서”라는 의미이다. 가정에 대한 구체적인 축복이나 교훈을 언급하는 성경구절을 보면 그 앞에 반드시 조건이 있는데 “경외”라는 단어이다(시128:1, 4; 엡5:21). 사실 이 “경외”라는 단어는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강조되는, 하나님의 그의 백성에 대한 중요한 기대이자 명령이기도 하다. 그리고 “하나 됨”이라는 것은 결혼과 동시에 부부가 저절로 완벽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 되게 하셨으니 부부가 전 인격적으로 100% 하나 됨을 만들어 가는데 헌신하겠다는 의미임을 이해해야 한다. 가정생활 전문가들은 부부가 서로 깊이 있게 하나 됨을 느끼며 친밀해지는데 약 27년이 걸린다고 한다. 즉 이 긴 시간이 걸리더라도 하나님이 하나 되게 하심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데 헌신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결국 결혼이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남자와 여자가 만나, 하나 됨을 만들어 가기 위해 헌신하기로 결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하나 됨을 위한 헌신”은 바로 가정의 기초이기도 하다. 기초가 든든하면 비바람이 몰아쳐도 너끈히 견딘다. 하지만 기초가 든든하지 않으면 겉보기에 아무리 모양이 멋있고 화려하며 비싸게 보여도 비바람이 몰아치면 쉽게 무너질 뿐이다. 이제 결혼의 의미이자 가정의 중요한 기초가 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하나 됨을 위한 헌신”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그분을 두려워하고(fear) 공경한다는(respect) 뜻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만을 의식하며 그분 앞에서 바르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그것이 자신에게 쓰던 달던 상관없이 말씀대로 순종하려 애쓴다. 또한 말씀을 읽는 목적은 은혜 받고 응답 받고 위로 받기 위함이 아니라, 오로지 순종하기 위함이다.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취사선택적인 태도가 아니다. 이런 취사선택적인 태도는 아무리 입술로 하나님의 이름을 자주 언급한다할지라도 결코 신앙인이 아니다. 오히려 본인은 믿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사실은 믿음으로 착각할 뿐 제멋대로 종교생활 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을 귀하게 여기며 그것에 자신의 삶을 비추어 본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세상적인 가치관을 교정하며, 숨겨져 있는 내면의 욕심을 드러내 회개한다. 또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교훈과 명령은 자기 몸을 쳐서라고 복종코자 노력한다. 물론 하루아침에 이런 삶이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삶이 그들에게 분명한 목표로 자리 잡고 있으며 그 목표를 향해 가는데 필요한 대가를 기꺼이 지불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남편과 아내는 서로에게 정직하고 진실하게 대한다. 이들은 서로에게 숨기는 것이 없다. 재정적으로 다른 통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비밀리에 물건을 사지 않는다. 하루의 일과나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 거짓말 하지 않는다. 더욱이 남편이나 아내가 아닌 이성과의 만남을 개인적으로 가지지 않는다. 다른 이성과 유혹이 될 수도 있는 회색지대 조차 가지지 않는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남편과 아내는 자신의 책임을 다한다.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가정에 대한 재정적 책임과 가사 일에 대한 책임을 기쁨으로 감당한다. 반려자의 욕구 충족에도 성실하다. 크고 작은 모든 일을 주님께 의지하며 그리스도께서 가정의 주인이 되시도록 늘 힘쓴다. 또한 그분을 경외함으로 서로에게 복종하고 사랑한다.

가정의 기초가 되는 두 번째 요소는 하나 됨을 위해 헌신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반려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에게 적응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를 기쁘게 해주려 노력하며 그를 위해 구체적으로 희생한다는 의미이다. 사람들은 결혼하면 반려자가 자신을 위해 정성껏 맛있게 만든 요리를 식탁위에 올려놓기 때문에, 자신은 그저 그 요리를 즐기면서 맛있게 먹게 되리라 예상한다. 결코 그렇지 않다. 남편과 아내가 오늘 저녁 무엇을 먹을지 함께 상의하여 결정하고, 어느 마트에 가서 장을 볼지 또한 어떤 재료들을 구입할지 정하여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와 함께 다듬고 씻으며 양념을 적당하게 넣고 요리를 마친 후, 멋있는 그릇에 담아 식탁에 올려 두고 함께 즐기며 맛있게 먹는 이 전 과정이 결혼 생활이다.

이 과정에서 양보와 의견의 조율과 상대방에게 나를 맞추는 노력들이 이루어진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성격 때문에 어렵기도 하다. 남편의 권위적인 태도, 말이 없음, 냉정함, 자기중심적인 태도… 아내의 예민함, 좁은 마음, 오해… 이런 것들은 왜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느냐며 시시비비를 따지고 논쟁할 때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일단 있는 그대로 반려자를 용납하고 받아줄 때 해결의 실마리가 생긴다. 죄가 아니라면 반려자에게 나 자신을 맞추고 무조건 적응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런 노력을 할 때 세월이 흘러 어느 새 긍정적으로 변해 있는 반려자와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 됨을 만들어 가는데 반려자의 좋은 점을 의도적으로 찾아 칭찬해 주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칭찬을 받는다는 것은 큰 기쁨이 되기도 하지만, 자신이 좀 더 성숙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데 큰 자극제가 되기도 한다. 성숙한 관계는 성숙한 사람들만이 만들 수 있다. 반려자를 위해 희생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하나로 만들어져 갈 때 깎이고 부러지고 다듬어지는 부분이 반드시 있다. 이것은 자신의 인격적 결함 때문에 생기기도 하지만 반려자를 위해 희생할 때 생기기도 한다. 때로 사람들은 ‘내가 이 사람과 결혼하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훌륭한 전문가가 되었을 텐데…’, ‘내가 이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어려움은 겪지 않았을 텐데…’라며 억울해 한다. 하지만 억울해 할 일이 아니다. 결혼한 사람들이 당연히 감당해야 할 몫이다.

이런 하나 됨의 과정을 겸손하고 즐겁게 거치는 사람들은 가정의 행복이 무엇인지 알고 마음껏 누린다. 서로에게서 누리는 편안한 쉼, 재미있고 즐거운 웃음, 사랑받고 있고 보호받고 있다고 느끼는 든든한 울타리, 넘치는 에너지와 활력, 교회와 이웃에게로 흘러 나가는 사랑과 섬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결혼한 부부에게 주시고 싶어 하시는 축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