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묵]지도자의 삶의 목적

한번은 해마가 돈을 벌기 위하여 길을 나섰다. 천천히 헤엄쳐서 가고 있는데 그가 많이 가지 않아서 장어를 만났다. “여봐 친구야 어디 가냐?”하고 물었다. 해마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돈을 벌려고…” 장어는 말하기를 “너 참 행운아다 나를 만났으니. 여기 지느러미같이 생긴 발이 있는데 이것을 사용하면 훨씬 빨리 갈 수 있을 거야.” “그것 참 좋은데…”하면서 해마는 돈을 지불하고 지느러미를 사서 발에 끼고 두 배나 빠른 속도로 나아가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한참을 가다가 해면을 만났다. “어이 친구야 어디를 가냐?” 라고 물었다. 해마는 대답하기를 “돈을 벌려고 가는 중이야.” 해면이 말하기를 “너는 참 행운아다.” 내가 싸게 프로펠러 달린 스쿠터를 너에게 팔게. 네가 휠씬 빨리 갈 수 있을 거야.” 해마는 남은 돈으로 스쿠터를 사고는 이제는 다섯 배나 빠르게 달릴 수가 있었다. 그는 상어를 또 만났다. 상어가 “친구야 어디를 가니?”라고 물었다. 해마는 대답하기를”돈을 벌려고 가고 있어.” “상어가 대답하기를 “너 참 행운아다. 내가 지름길을 알려 줄께” 상어는 자기의 입을 가리키며 “이곳으로 가면 시간을 훨씬 절약할 수 있지.”라고 말하자 해마는 “고마워”하면서 상어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삼켜져 버렸다. 이 우화의 교훈은 우리가 어디로 가는 지가 명확하지 않으면 엉뚱한 곳에 이르게 되고 그 사실조차 알지 못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던지 분명한 목적의식이 필요하다. 우리가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살지 않을 때에 우리가 하는 일들이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학교에서 학생들의 논문을 지도해 보면 분명한 목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된다. 논문을 쓰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논문의 목적을 정하는 일이다. 분명한 목적이 먼저 설정되어야 하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질문이 만들어지고 자료도 모아지고 연구도 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학생들은 분명한 목적을 설정하지도 않고 논문을 다 써오는 경우가 있다.아무리 좋은 말과 통찰력들이 들어있어서 하나의 목적으로 묶어지지 않은 것은 논문이라고 할 수가 없다. 분명한 목적이 없는 논문은 마치 대들보 없는 집과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집을 세울 때에는 먼저 대들보는 든든히 세우고 그 대들보를 중심으로 모든 것을 만들어가야지 대들보가 없거나 부실하면 아무리 아름답게 집을 장식하여도 위험한 건물에 불과한 것이다.


지도자란 분명한 목적과 방향의식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어 이끌어 가는 사람이다 조직체를 위한 목적을 바로 인식하고 그 목적의 방향으로 집중하여 사람들을 이끌어 갈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지도자는 남들을 이끌기 이전에 자신의 삶에서부터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살아갈 필요가 있다. 자기의 인생을 살아 가는데 있어서 분명한 목적과 방향이 설정되어 있지 않으면 이 우화에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가 원하는 것과는 다른 엉뚱한 방향으로 인생을 살게 되고 그렇게 살고있는 것 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지도자에게 있어서 인격도 중요하고 또 기술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자기 삶의 분명한 목적과 방향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집중하여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기독교 지도자들은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되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의 관점에서 목적의식을 갖는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라고 이름 한다. 기독교인의 삶의 목적에는 모든 기독인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해야 할 삶의 목적이 있고 우리 각 개인에게 독특하게 부여된 삶의 목적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들을 독특하게 지으셨고 독특한 사명을 부여하신 것이다. 지도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한 삶의 목적을 바로 파악하고 그것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런 면에서 모범이 되신다. 우리 주님께서도 세상에 거하실 때에 많은 선한 일들을 하셨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사명에 충실하셨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다. 예수님이 모든 병자를 다 고치셨는가? 우리 주님에서 가난한 자를 다 먹이셨는가? 유대인들을 정치적으로 해방시키셨는가? 아니다. 그는 당시의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문제를 다 해결했다는 의미로는 다 이루지 못하셨다. 그러나 주님은 그에게 부여된 사명을 다 이루셨다. 즉 세상 죄를 담당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는 일을 이루셨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있고 또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많이 있지만 그것을 다하려고 덤벼드는 것보다는 자신의 사명을 인식하고 충실한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목격하는 모든 삶의 문제를 다 해결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부여하신 삶의 목적을 다 이루어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주신 사명을 다 이루었습니다”라고 고백할 수가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한 눈 팔지 말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삶의 목적에 집중해야 한다. 삶의 목적에 있어서 남의 것을 부러워 할 필요도 없고 나의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할 필요도 없고 그저 나에게 주어진 사명 즉 삶의 목적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자신의 집에 손님이 오면 자랑하는 세가지 물품이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집의 현관에 있는 은으로 만든 풍향계이고 둘째는 집안에 거실에 있는 금으로 만든 온도계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그의 책상에 놓여있는 구리로 만든 나침반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그는 구리로 만들었지만 이 나침반을 가장 소중히 다루고 자랑하였다. 그래서 손님들이 왜 이 나침반을 소중히 여기는가 묻고는 하였는데 대답하기를 풍향계는 은으로 만들어졌지만 바람이 불면 이리 저리로 움직이고 온도계는 금으로 만들어졌지만 주면 환경에 따라 오르락 내리락 한다. 그러나 나침반은 비록 구리로 만들어졌지만 어디에 어떻게 놓던지 한 방향을 향하여 바늘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다른 사람을 이끄는데 있어서 나침판과 같은 지도자를 필요로 하고있다. 어디에 서있던지 주님을 향하고 또 주님이 주신 삶의 목적을 위하여 집중하여 나아가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분명한 삶의 목적을 붙잡고 살아가는 지도자는 아름답다.

[신선묵]지도자와 시간

시간관리에 관하여 나에게 패러다임의 변화를 주었던 이야기를 두 가지 소개하겠습니다. 한 시간관리 전문가가 경영학과 학생들에게 시간관리에 관하여 강의를 하도록 초대 받았습니다. 그는 강의를 시작하면서 커다란 항아리를 하나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주먹만한 돌을 꺼내 항아리 속에 하나씩 넣기 시작했습니다. 항아리에 돌이 가득 차자 그는 물었습니다. “이 항아리가 가득 찼습니까?” 학생들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습니다. “네” 그러자 그는 “정말일까요?”라고 되묻고는 조그만 자갈들을 꺼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항아리에 집어 넣고 깊숙히 들어갈 수 있도록 항아리를 흔들었습니다. 주먹만한 돌 사이에 자갈이 가득 차자 그는 다시 물었습니다. “이제 항아리가 가득 찾습니까?” 눈이 동그래진 학생들은 “글쎄요”라고 대답했고 그는 “좋습니다”하더니 다시 테이블 밑에서 모래주머니를 꺼냈습니다. 모래를 항아리에 넣어 주먹만한 돌과 자갈사이의 빈틈을 가득 채운 후에 다시 물었습니다. “이 항아리가 가득 찼습니까?” 학생들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아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그렇습니다” 라고 하면서 물을 한 주전자 꺼내 항아리에 부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이 실험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한 학생이 손을 들더니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바빠 스케쥴이 가득 찼더라도 정말 노력하면 새로운 일을 그 사이에 추가하여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시간관리 전문가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것도 좋은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요점이 아닙니다. 내가 이 실험을 통하여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만약 당신이 큰 돌을 먼저 넣지 않는다면 영원히 큰 돌을 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시간관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시간을 얼마나 꼭꼭 채워 바쁘게 사느냐가 아니라 중요한 것을 먼저 하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당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인생의 사소한 문제들로 인하여 그 중요한 일을 뒤로 미루고 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중요한 일을 하는 것에도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스티븐 코비는 그의 저서 “성공하는 자의 7가지 법칙”에서 다음의 네 가지 종류의 일들 중에서 어떤 일을 제일 먼저 해야 할지 묻고 있습니다. 첫째, 중요하고도 급한 일, 둘째, 중요하지만 급하지 않은 일, 셋째, 중요하지 않지만 급한 일, 넷째, 중요하지 않고 급하지도 않은 일…


여러분들도 한번 대답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하여 당연히 “중요하고도 급한 일”을 제일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코비는 예상외로 “중요하지만 급하지 않은 일”을 제일 먼저 하라고 제안합니다. 물론 우리가 중요한 일을 먼저 해야 한다는 것에는 다 동의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왜 급한 일 보다 급하지 않은 일을 먼저 해야 합니까? 그가 설명하는 이유는 “둘 다 중요하지만 급한 일을 먼저 하면 사람이 그 일을 하면서 지쳐 버리게 되나 급하지 않은 일을 하면 중요한 일을 하면서도 지치지 않고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경험적으로 이 주장에 상당히 동감을 합니다. 나에게 있어서 학교에서 강의를 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주로 하루의 시간을 보내면서 그 주에 강의할 내용을 준비하는데 시간을 쏟고 하루 하루를 채워가다가 다음 학기가 되면 또 그때 강의 준비를 하루하루 해 나아가는 것으로 급급해 하였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바쁘게 그러나 간신히 강의를 감당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코비의 법칙을 내 삶 가운데 적용해 보았습니다. 중요하지만 급하지 않은 일을 먼저 하는 법칙을 사용하여 하루의 시간을 보낼 때에 우선 다음 학기 강의할 내용을 연구하고 공부하는데 일정 시간을 항상 배분하였습니다. 오늘의 강의도 중요하지만 다음 학기 강의도 동일하게 중요한 것입니다. 물론 오늘 준비하지 않는다고 당장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므로 급한 일은 아닙니다. 즉 중요하지만 급하지 않은 일을 먼저 한 것입니다.


이렇게 다음학기 강의 준비에 우선적으로 일정 시간을 배분함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유익을 경험하였습니다. 첫째, 다음 학기 강의를 미리 준비할 때에 이번 주 강의 준비를 하는 것처럼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습니다. 둘째, 오늘 준비한 다음 학기 강의 준비가 쌓여서 다음 학기가 되었을 때에 강의 부담을 많이 줄여 나의 삶에 지속적으로 여유를 가져다 준다는 것입니다 셋째, 더욱 중요한 것은 다음 학기 강의를 미리 준비할 때에 당장 강의를 위하여 준비하는 것보다 보다 더 연구하고 깊이 생각해서 나에게 먼저 적용할 수가 있는 여유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남에게 가르치기 위한 수준의 공부를 넘어 나의 진정한 발전을 위한 연구도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대는 어느 때보다도 바쁜 세대입니다. 마치 시간 전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세대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세대 속에서 시간을 지혜롭게 사용하는 우리가 되어야 겠습니다. 삶 가운데 중요한 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또 그 중에서도 급하지 않은 일을 먼저 할 수 있는 시간 관리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중요하지만 급하지 않은 일은 어떤 것들입니까?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신선묵]당신은 하나님의 성스러운 도구, 당신 자신에게 적절한 관심을 주고 있는가?

옛날 어느 마을에 황금 알을 낳는 거위를 가진 농부가 살고 있었다. 하루 하루 낳아주는 황금알로 그 농부와 가족들은 비교적 잘 살 수 있었다. 하지만 하루는 그 농부의 마음에 욕심과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저 거위를 잡아 그 속에 든 황금 알들을 팔아 사업을 시작하면 한꺼번에 큰 돈을 벌 수가 있을 꺼야!” 하고는 그 거위의 목을 비틀고 배를 갈랐다. 하지만 거위의 배속에 황금 알은 없었다. 이제는 황금 알을 낳아주던 거위가 없어져 그 농부는 전보다도 가난하게 살아야 했다.


우리 크리스찬 지도자들은 성공적인 사역을 원한다. 그러나 때로는 어리석은 농부처럼 사역의 결과에만 집중하는 마음이 앞서 사역에 비정상적으로 매달리게 되어 사역의 주체가 되는 자신을 바로 돌보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사역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신을 바로 잘 관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역은 우리의 존재(Being)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역의 열매가 마치 거위가 난 황금알과 같다면 우리는 마치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사역의 열매를 맺는 것이 중요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즉각적인 결과만을 위하여 자신을 바로 돌보는데 소흘히 한다면 이 우화 속의 농부와 같은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사역의 주체가 되는 지도자인 자신을 바로 건강하게 보존하는 일에 우선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살면서 사역의 성취를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좋은 결과(열매)는 나무, 즉 지도자 자신이 건강하지 않으면 가져올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도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존재를 잘 가꾸는 것이다. 나는 성경 구절 가운데 특별히 좋아하는 구절이 하나 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잠 4:23)” 우리 자신을 얼마나 잘 관리하는가가 좋은 지도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열쇠인 것이다. 때로는 우리가 생각하는 열매가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아서 조급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지도자 자신이 건강하고 늘 발전하면서 성장해간다면 그 열매는 반드시 맺혀지는 것이다.


그러면 지도자 자신을 건강하게 보존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할까? 한 지도자의 존재(BEING)는 네 가지 측면에서 이해하고 관리해야 한다.


첫째, 지도자는 자신의 인격(Character)을 계속하여 다듬고 성숙시켜야 한다. 성령의 열매들을 우리의 인격 속에 맺어갈 때 하나님의 선한 일들이 우리 가운데 맺어질 수가 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도자 자신이 성령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생활을 함으로써 우리의 인격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피우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의 첫걸음缺?종착역이다. 사도 바울의 간절한 기도, “남에게 전하고 나는 멸망에 이르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게 해주소서”라는 간구가 우리 크리스찬 지도자들 모두의 간절한 기도가 되어야 한다.


둘째, 지도자는 자신의 개성/기질(Personality)을 건강하게 보존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독특하게 지으셨다. 우리는 각 사람이 지닌 개성을 크레 분류할 때 어떤 타입들이 있으며 또 어떻게 그 개성들을 조화하면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의 사역을 보면 때로는 좋은 의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개성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여 오는 많은 스트레스가 있다. 사람마다 얼마나 다른지 모른다. 개성은 타고난 성격으로서 어떤 Type이 더 좋고 나쁘고 문제라기 보다는 각각의 장단점이 있을 뿐이다. 지도자는 자신의 개성을 잘 이해하고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셋째, 지도자는 가치관(Value)을 정립해 가야 한다. 소위 말해서 철학이 있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왜 하는지를 정립하고 제시할 줄 알아야 한다. 사역에 있어서 “나는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왜 이런 일들을 하는 것인가” 등등의 문제들을 확실히 철학적으로 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참된 지도력이란 남을 다루는 기술 이전에 가치관의 문제인 것이다.


넷째,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 혹은 은사를 바로 이해하고 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슨 은사를 주셨는지를 헤아리는 지혜로 하나님께서 주신 다양한 은사들을 우리가 이해하고 또 적극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또한 사역에 있어서 우리가 일에서 우리의 은사를 사용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의 은사를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일이 중요하다. “사역은 지도자의 존재로부터 나온다(Leadership flows out of being.)” 하나님께서는 사역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성스러운 일들을 이루신다. 다시 말해서 사역자는 하나님의 성스러운 도구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성스러운 도구, 당신 자신에게 적절한 관심을 주고 있는가? 지도자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신선묵]지도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 2

옛날에 중국의 황제가 한 아름다운 새를 보고 그것을 그려서 갖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수 많은 화가들을 시켜서 그림을 그리게 하였으나 그 어떤 화가도 그 아름다운 새를 그림으로 옮겨 놓지를 못하였다. 그러던 중에 어떤 위대한 화가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그를 불러서 그 새를 그리도록 하였다. 그 화가는 황제에게 일년의 시간을 달라고 하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일년이 다 되어 가는 어느 날 황제는 기대를 가지고 그 새의 그림을 보러 갔다. 그런데 황제가 가보니 그 화가는 아직 그림을 시작도 하지 않은 것이었다. 황제가 분노하여 어찌된 일이냐고 호통을 치니까 그 화가는 잠시 기다리라고 하면서 황제 앞에서 그림을 그리는데 10분 만에 그 새의 그림을 그렸다. 그 그림은 정말로 위대한 것이었다. 황제는 더욱 화가 났다. 그렇게 쉽게 그릴 수 있으면서 왜 1년이나 나를 기다리게 했느냐고 하였다.


그 때에 그 화가는 황제에게 “잠시 저를 따라오시죠”하면서 황제를 모시고 한 창고로 갔다. 그 문을 열자 그 창고 안에서는 수많은 그림 종이조각이 나왔다. “이것이 제가 일년동안 한 일입니다” 라면서 종이 조각들을 보여주는데 그것들은 화가가 그 한 새의 그림을 완성하기 위하여 새의 부분 부분들을 습작한 종이들이었다. 새의 발톱, 새의 날개, 새의 부리, 새의 눈 하나 하나를 철저히 일 년 동안 연습한 것이다. 그런 오랜 시간의 준비를 걸쳐서 그는 황제 앞에서 그 새의 그림을 10분만에 아름답게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어떤 분야의 대가들을 보면 그 결과만을 부러워하지 그들이 대가가 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한 땀들과 훈련을 보지 못하는 때가 있다. 그러나 어떤 분야이던지 자기의 분야에서 탁월한 실력과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피눈물 나는 노력을 기울인 것이다.


우리가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 살기 위해서 첫째는 인격이 필요하지만 그와 동시에 실력이 필요하다. 만일 우리가 몸이 아파서 생명을 좌우하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면 인격이 좋지만 실력은 없는 의사와 인격은 훌륭하지 않지만 실력이 있는 의사 중에 어떤 의사에게 치료를 받겠는가? 인격이 물론 중요하지만 우리는 의사에게서 전문적인 의술에 있어서의 실력을 기대한다. 그래야 우리의 몸을 맡길 수가 있는 것이다. 어느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이던지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분야에서 장인 정신을 가지고 기술을 닦고 연마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기독교 사역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세상의 일을 논할 때는 실력을 강조하면서도 영적인 일들을 말할 때에는 실력을 상대적으로 과소 평가하는 것 같다. 어쩌면 인격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실력을 덜 중요하게 여기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영적인 분야에서도 우리는 실력이 필요하다. 목회자는 목회자로서 선교사는 선교사로서 교육가는 교육가로서 행정가는 행정가로서 철저한 전문성과 실력이 필요한 것이다.


세상 속에서 활동하는 기독교인들도 자기 분야에서 실력자가 되어야 한다.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바른 인격을 먼저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 인격이 실력으로 뒷받침되지 못하면 사회 속에서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 인정 받기 보다 아직 미성숙한 세상을 모르는 단순한 이상주의자로만 여기지고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가 일하는 분야에서 필요한 실력과 기술들을 갖추기 위하여 남 다른 노력을 해야 한다.


나는 교육가로서 기독교 지도자들을 양육하는 일을 하고 있다. 다른 분야에서는 모르지만 사람을 가르치는 분야에서는 철저한 실력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내가 학위 공부를 할 때에 지도 교수님께서 개인적으로 교수법에 관하여 멘터를 해주셨다. 자신이 끊임없이 효과적인 교수법을 위하여 노력을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효과적인 교수법을 전수해 주시는 분이셨다. 그러면서 우리 제자들에게 늘 “가르침의 장인(Master Teacher)이 되라”고 도전하셨다. 물론 지금의 나는 가르침의 장인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마치 앞의 이야기 속의 화가가 새의 부분 부분을 그리는 습작을 하듯이 나도 가르침의 사역에 임하고 있다.


우리가 좋은 실력과 기술을 갖추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가 정말로 필요한 기술이 그러면서도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기술을 찾아야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과 삶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또 자신의 은사에 맞는 기술을 찾아야 하며 그 필요한 기술을 개발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배우는 자세가 필요하다. 한 분야에서 장인의 경지에 이르는 것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다. 일생에 걸쳐서 배우는 삶의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또한 효과적인 배움을 위하여 좋은 자료와 책을 만나야 하고 동시에 좋은 모델이 되는 스승을 찾아야 한다. 좋은 스승과 책은 우리의 배움의 시간을 훨씬 줄여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는 어떤 실패와 좌절을 겪으면서도 전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실패를 과정으로 여기고 전진해 나아갈 때에 남이 아직 이루지 못한 경지에까지 실력과 전문성을 개발해 갈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칼을 안전하게 가지고 다니기 위하여 칼집이 필요하다. 그러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그 칼집에 담겨진 칼의 날이 날카로워야 한다. 마찬가지로 효과적인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인격이라는 칼집이 필요하지만 그 칼집에 넣어진 칼의 날이 날카롭게 다듬어져야 즉 실력과 기술이 있어야 우리에게 맡겨진 과업들을 잘 수행할 수 있지 않을까? 여러분의 칼은 무엇인가? 그 칼이 얼마나 날카롭게 다듬어져 있는가?

[신선묵]성장하는 지도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제 일의 관심

여성들은 다이아반지를 참 좋아하는 것 같다. 남성들이 이해할 수 없는 여성의 신비 중의 하나가 여성이 다이아반지를 좋아하는 것이다. 별로 필요도 없어 보이는 그것을 가지고 싶어하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하다. 나도 결혼을 할 때에 아내에게 다이아반지를 해주었지만 사실은 너무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을 해주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여성들이 다이아반지를 좋아하는 것을 보니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도 든다.


다이아반지를 보면 사람들의 관심은 주로 다이아몬드 자체에 있는 것 같다. 다이아몬드가 얼마나 큰 것인지 또 품질이 얼마나 좋은 것이지 따라서 가격이 결정되고 사람들이 감탄을 한다. 그런데 사실은 다이아반지는 다이아몬드와 그것을 받히고 있는 반지, 즉 세팅으로 이루어진다. 사람들은 다이아반지를 보면서 감탄을 하고 사실 세팅에는 별로 관심을 주지않지만 그 다이아반지가 지속적인 가치를 가질 수 있도록 손가락에 묶어주고 또 다이아 자체를 잘 받혀주는 세팅이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팀으로 이끄는 교회”의 저자 웨인 코디로는 지도자의 인격을 다이아몬드 반지의 세팅에 비유하였다. 사람들이 놀라운 은사와 기술을 가지고 여러 가지 일들을 이루어 내지만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칭송을 하지만 사실은 그 은사가 인격이라는 기초 위에 서있지 않으면 마치 모래 위의 집과 같이 하루 아침에 무너져버릴 수가 있는 것이다. 인격은 그 자체가 사역에서 드러나거나 직접적으로 힘을 발하지는 않는다. 사역을 효과적이고 능력있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실력과 기술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아니 그것이 없이 좋은 지도자가 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바로 인격이다.


얼마 전에 한 홍 목사님의 “칼과 칼집”이라는 책을 보았다. 그 책에서 한 홍 목사님은 지도자의 실력을 칼에 비유하고 인격을 칼집에 비유하며 지도자가 실력과 인격을 함께 갖추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정말로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이 되었다. 실력은 칼과 같이 날카롭게 다듬어야 한다. 그러나 그 칼이 칼집에 잘 담겨져 있어서 정말로 필요할 때에 적절하게 사용되어지지 않는다면 칼은 위험한 것이다. 지도자의 실력도 마찬가지이다. 지도자로써 실력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바른 인격 속에 담겨져 있어서 정말로 필요할 때에 그 실력이 바로 사용되어져야 놀라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지 실력이 좋지만 인격의 기초가 없으면 도리어 상처와 파괴를 가져올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한 지도자를 만들어 가실 때에 인격의 문제를 철저히 다루신다.


하나님께서 인격에 가장 큰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특히 떠오르는 젊은 지도자들이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다. 우리가 영향력 있는 지도자가 되기 위하여 여러 면에 있어서 실력을 쌓아나가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인격이라는 것이다. 많은 지도자들의 삶을 살펴보면 사역의 초기 단계에서는 하나님의 주된 관심은 그 사람을 통하여 열매를 맺는데 있지 않고 그 사람을 만들어가는데 관심이 있다. 젊은 사역자들이 사역의 열매를 맺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은 그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인격을 먼저 테스트하시고 만들어 가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역의 초기 단계에 작은 외적인 성취에 교만하거나 또는 열매가 없는 것에 실망하여 포기하는 것보다는 하나님께서 먼저 나 자신이 바로 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지도자의 인격에 대하여 가지는 관심은 사역의 초기단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끼치게 되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을 때에 지속적으로 이 문제를 점검하신다. 남에게 영향을 끼치기 이전에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인가를 늘 점검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일꾼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격체로 서있기를 원하시며 하나님에게 있어서 그것이 가장 중요한 관심이신 것이다.


우리가 지도자의 위치에 서서 다른 사람을 선택하여 지도자로 세워 나갈 때도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지도자로 서기 위하여서는 실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실력을 갖춘 사람들을 보고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인격이 준비된 사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실력은 교육과 훈련을 통하여 점차적으로 개선해 나갈 수가 있다. 그러나 인격을 고친다는 것은 힘이 든다. 그래서 둘 다 소유한 사람을 찾아야 하지만 둘 중에 하나에 우선순위를 둔다면 인격이 갖추어진 사람을 고르는 것이 중요하다.


지도자들은 항상 다른 사람에게 지도자로서 영향력을 끼치기 이전에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점검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런 면에서 사도 바울의 기도는 우리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귀감이 되지않을까?.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고전 9:27)

[신선묵]현재를 삶의 전체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사는 사람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정답게 놀고 있었다. 어느덧 해가 지는 저녁 때가 되었다. 메뚜기는 하루살이에게 “얘, 하루살이야. 오늘은 이만 놀고 내일 또 놀자!”고 제안을 했다. 하루살이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얘, 메뚜기야. 내일이라는 것이 뭐니?”하고 물었다. 메뚜기는 열심히 내일에 대해 하루살이에게 설명을 했다. “내일이라는 것은 캄캄한 밤이 지나면 동녘으로부터 밝은 빛이 나오고 그 밝은 빛이 나오면 찬란한 아침이 있는 그 때가 내일이지.” 그러나 아무리 설명을 해도 하루살이는 하루만이 그의 생명이지, 그 다음 날을 살아본 일이 없기 때문에 메꾸기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너하고 다시는 안논다.”하며 가버렸다. 메뚜기는 “내일이란 틀림없이 있는데….”하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 메뚜기가 이번에는 개구리와 친구가 되었다. 며칠을 신나게 놀았다. 그러자 어느날 개구리가 말했다. “메뚜기야, 이제 차차 날씨가 추워오는구나. 우리 이제 그만 놀고 내년에 만나자.” 이번에는 메뚜기가 놀랬다. “개구리야, 내년이라는 것이 뭐니?” 메뚜기는 일년생이라 한번도 그 다음 해를 경험하지 못했던 것이다. 개구리는 열심히 내년에 대하여 설명을 했다. “내년이라는 것은 눈이 오고, 얼음이 어는 겨울이 지나면 산과 들에 꽃이 피고 새들이 노래를 할 때, 저 산 넘어서 아지랑이가 올 때를 말한단다. 그 때를 우리는 봄이라고 하고 그것이 바로 내년이야.” 아무리 열심히 설명을 해도 메뚜기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개구리가 자기를 업신여겨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여 토라져 “다시는 너하고 안 놀아” 하고 가버렸다. “내년이란 틀림없이 있는데…” 개구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중얼거렸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모든 일을 대할 때에 어떤 관점에서 사건과 사물을 보는가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혹자는 말하기를 “지도자와 추종자의 차이는 관점(perspective)을 살아가는가의 차이이고, 평범한 지도자와 위대한 지도자의 차이는 좋은 관점(better perspective)을 가졌는가의 차이다”라고 하였다. 지도자들은 바른 관점, 크고 넓은 관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뿐만 아니라 지도자는 삶을 전체의 관점(Life-long Perspective)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현재(here and now)를 그것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 삶의 일부로 과정으로 볼 수 있는 관점(perspective)이 필요하다. 그러면 삶을 전체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첫째, “삶을 전체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은 끝을 마음 속에 두고 시작한다. 신학교 다닐 때 교수님께서 수업시간에 실행하게 했던 하나의 프로젝트가 있다. 하얀 종이에 묘비를 그리고 자신의 묘비에 무엇이 쓰여지기를 원하는지를 작성하도록 하게 했다. 그리고는 하시는 말씀이 “우리 인생에 대한 궁극적인 평가는 오늘 하루 하루의 삶이 모여서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을 마지막 평가를 의식하고 오늘을 충실히 살아가야 합니다”라고 하셨다.


둘째, “삶을 전체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은 현재를 일생에 걸친 삶의 개발의 과정으로 이해한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근시안적인 관점에서 보면 부정적으로 보이는 것들도 장기적인 안목에서 보면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옴을 경험하게 된다. 예를 들면, 오늘 경험한 실패가 처한 그 상황에서는 좌절의 이유이지만 긴 안목으로 삶을 보는 관점에서 발전의 기회요 성공의 예비 단계일 수 있다. 이처럼 우리의 시야를 넓힐 때, 문제는 전혀 새롭게 다가옴을 체험한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을 가진 사람은 작은 성공에 교만하지않고 작은 실패에 좌절하여 넘어지기보다는 도리어 그 실패를 성장의 기회로 삼는 자세를 가진다. 나는 십 여년 전에 공부를 하려는 목적으로 미국에 왔었다. 그런데 소위 말해서 실패를 경험하고, 1년 뒤에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한 채로 한국에 귀국하게 되었다. 그때 얼마나 부끄러웠던지 집에서 나가지도 않고 방에 꼭 쳐들어 박혀 지내고 있을 때, 아버님께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내 방에 들어오셔서 나에게 조용히 위로의 말씀을 해 주셨다. 그때 아버님께서 주신 “애야! 인생은 긴 것이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차근차근히 다시 준비해라. 오늘의 아픔이 앞으로 너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이 두고두고 나의 삶에 큰 힘이 되었다. 결국 아버님의 말씀이 옳았음이 나의 삶을 통해 입증되어, 그때는 실패요 좌절이었지만 그런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사명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내가 목적하였던 것보다도 더 귀한 일들을 감당하며 살 수 있게 되었다.


셋째, “삶을 전체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더욱 깊은 교제 속으로 인도하실 것을 기대하며 충성, 순종, 인격 형성을 추구한다. 다시 말해서 정말로 귀중한 것, 영원히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하게 된다. 결국 가치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이고 그로 인하여 맺어지는 인격의 성숙이요 성령의 열매인 것이다.


넷째, “삶을 전체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은 우선 순위 없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분명한 목적을 인식하고 자신의 은사에 맞는 역할을 고르고 그 일에 집중한다. 인생의 제한성을 인정하고 그 제한성 속에서 가장 효과적인 삶을 살기 위하여 집중하는 지혜를 갖는다.


당신은 오늘 당신에게 주어진 삶을 어떤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눈앞에 펼쳐지는 일을 전부로 생각하는 근시안적인 관점인가 아니면 삶을 전체적인 관점(Life-long Perspective)에서 바라보며 살아가는가? 관점이 변하면 삶의 자세가 바뀐다.


* 예화는 이용삼 목사님의 “가나안의 명상”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