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묵]영적 지도자의 충성됨 (Faithfulness)

미켈란젤로는 유모의 젖을 빨 때부터 조각가의 끌과 망치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할 정도로 천부적인 조각가로 태어났습니다. 조각가로 전성을 구가하던 그는 30대 초반에 로마 교황청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교황의 장엄한 무덤을 조각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로마에 도착하자 일이 뒤엉켰습니다. 조각 대신 그림을 그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바티칸의 작은 교회 천장에 열 두 명의 인물을 그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처음에 그 제안을 거절하려고 했습니다. 물론 어렸을 적에 그림을 배웠지만 그의 정열은 온통 조각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그의 경쟁자들이 그를 곤란하게 하기 위하여 그런 교묘한 함정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그 일을 거절한다면 그는 교황의 총애를 잃게 될 것이고 그 일을 한다고 해도 어설피 그림에 손을 대었다가 그의 명성에 먹칠을 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그런 음모를 꾸몄던 것입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가 그 제안을 일단 수락하자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그 일에 자신의 온 정열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 처음에 열 두 명의 사도를 그리려고 했던 계획은 확장되고 확장되어 창세기에 나오는 사 백명 이상의 인물들과 아홉 개의 장면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놓은 위대한 천장화가 탄생한 것입니다. 그가 그린 시스턴 성당의 벽화는 너무 생생하고 사실적이어서 이후 화풍의 주류를 바꾸는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그 일은 사 년이 걸렸습니다. 그는 꼬박 천장에 매달려 누운 채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시력과 건강을 많이 잃었습니다. 그 위대한 작업을 끝냈을 때에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예례미아처럼 늙고 약해졌다. 37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내 친구들조차 내가 왜 그렇게 늙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이 이야기 속에서 도전을 받은 것은 현재 맡겨진 일들 속에서 혹시 그것이 꼭 내가 원하는 일은 아니라 할지라도 최선을 다하여 감당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현재 놓여진 자리가 때로는 그 이유를 내가 다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꼭 필요하셔서 나를 이끌어주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하듯 최선을 다하여 최고의 작품을 만드는 열정으로 일하고 있는가의 질문인 것입니다.


영적 지도자에게 필요한 가장 중요하고도 기본적인 자질은 바로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도 지혜로운 지도자들은 사람들에게 일을 맡길 때에 처음부터 큰일을 맡기지 않습니다. 작은 일을 시켜보고 그 일의 경중을 떠나서 충성을 할 때에 더욱 중요하고 큰 일을 맡기는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들에게 지혜를 허락하신 하나님은 더욱 그러하실 것입니다. 누가복음 16:10절을 보면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지도자들을 개발하실 때에 어느날 하루 아침에 복권에 당첨되는 것처럼 지도자들을 만들고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작은 일부터 성실하게 감당하는 사람들을 큰 일에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큰 일, 중요한 일에 욕심 내는 것보다는 일단 주어진 작은 일들에 충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풀러신학교의 클린톤 교수는 지도자들이 성숙해 가는 과정 속에서 일련의 유형들을 발견하였는데 그가 발견한 유형들 중에 사역의 기초 단계에서 잠재적인 지도자들이 경험하는 “긍정적인 시험 유형”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유형은 세 단계로 이루어지는데 첫째 단계에서 삶 속에서 주어진 사건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인격에 관한 시험을 제시하십니다. 둘째 단계에서 지도자가 그 사건을 하나님께서 자신을 특별히 다루시기를 위한 사건으로 이해하고 그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행동을 취하는 긍정적인 반응을 합니다. 셋째 단계에서 지도자의 긍정적인 반응에 대하여 지도자의 영향력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작은 일에 충성 됨을 통하여 더욱 큰 일, 중요한 일들을 맡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유형이 한 지도자의 삶 속에서 반복됨을 통하여 지도자는 그 영향력에 있어서 점점 더 증대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런 유형에 반하여 반대의 경우가 있습니다. “부정적 시험의 유형”으로 삶의 경험 속에서 주어진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인격에 관한 시험을 주시는데 지도자가 그 사건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으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행동을 취하지 못함으로 하나님께서 지도자를 동일한 혹은 유사한 이슈를 가지고 지도자들을 다시 시험하시고 그 교훈을 얻을 때까지 혹은 그 지도자를 바로 잡기까지 그 지도자의 개발을 제한하십니다. 작은 일에 불충함으로써 영향력에서의 확대를 경험하지 못하고 반복 훈련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시험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반응하여 우리가 지도자로써 빠르게 성숙해 가는 일도 있는가 하면 때로는 우리가 바르게 반응하지 못하고 수정을 받는 훈련을 반복적으로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놓여있는 현실 속에서 우리가 작은 일들에 대하여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는 태도를 가짐으로써 긍정적인 반응 유형이 우리 삶 가운데 반복되도록 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가 바르게 반응하지 못하였을 때에도 그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발견하시기를 원하시는 자질과 태도를 파악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시험을 주실 때에 바르게 반응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지도자가 있습니다. 느혜미아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자기 민족이 어려움에 처하여 있다는 소식을 듣고 깊은 실의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자기 백성을 어려움에서 구해야 하는데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외국 땅에서 왕의 잔을 나르는 사람으로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선한 부담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마도 자신의 민족이 처한 상황도 슬펐지만 자신의 처지가 더욱 한탄스러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나를 이런 곳에서 이런 일을 하도록 하셨는가? 지금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백성들을 섬겨야 하는데…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정확하고 치밀하게 준비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느혜미아에서 선한 부담감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일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가장 적절한 곳으로 느혜미아를 이끌고 계신 것입니다. 느혜미아가 자기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선한 부담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만일 그가 그냥 그 이스라엘에 남은 백성 가운데 하나였다면 그가 예루살렘을 회복할 수 있는 아무런 힘을 가지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부터 계획을 가지고 준비하신 것입니다. 당시의 최강국인 페르시아의 왕궁에서 왕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잔을 나르는 사람으로 일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당시의 왕의 잔을 나르는 사람은 왕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왕의 음식에 독이 썩여 있는가를 검사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구하는 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었지만 이 일을 성실하게 감당함을 통하여 왕의 신임을 얻었고 또한 필요할 때에 당시의 최고의 왕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할 수 있는 모든 자원과 권한을 받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느혜미아의 눈에는 그가 가진 선한 부담감을 이루기에는 가장 절망적인 상황으로 보였지만 사실상 하나님은 가장 적절하게 준비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느혜미아의 태도입니다. 비록 자기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과는 상관이 없고 멀리 떨어져있는 일이지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성실히 임함을 통하여 왕의 인정을 받게 되고 그 결과로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일도 감당할 수 있는 위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주어진 일에 충성되게 섬김을 통하여 그가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지도자로써 다른 어떤 위대한 사명과 비젼을 말하기 이전에 느혜미아와 또 미켈란젤로와 같은 성실함을 가지고 있는가? 질문해 보게 됩니다.

[신선묵]영적 지도자와 기대 이론 (Expectancy Theory)

어느 국민학교에 참으로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만이 모여있는 문제아 반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그 반에 젊은 여자 선생님이 온 이후로 학생들의 성적이 불과 몇 달 만에 급성장을 이루었다. 교장 선생님이 이런 새로운 현상에 대하여 궁금하여 한번 그 여자 선생님을 불러 도대체 어떻게 하였길래 짧은 시간에 그렇게 좋은 학습의 결과를 가져올 수가 있었느냐고 알아보았다. 그러니까 그 젊은 선생님이 하는 말이 내가 학생들의 아이큐를 적어놓은 표를 보니까 학생들의 아이큐가 모두 120-150사이인 것을 보았고 그래서 그런 아이큐 수준에 맞게 학습내용을 맞추어서 수업을 진행하였더니 학생들의 성적이 부쩍 올라갔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으면 그냥 재미가 없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 젊은 선생님이 아이큐 수치인 줄 알고 학생들에게 수준을 높여서 교육시킨 바로 그 자료가 학생들의 아이큐가 아니라 학생들의 사물함 번호를 적어놓은 것이었다. 하나의 우스운 이야기거리이지만 사실은 이 이야기가 품고 있는 진리가 있다. 비록 선생님이 잘못 알고 한 것이지만 선생님이 학생들의 능력을 믿고 신뢰하면서 그들을 도전하였을 때에 학생들의 놀라운 학습 성과가 있었던 것이다.


풀러신학교의 지도자학 교수인 클링톤 박사가 말하는 지도력의 이론 중에 “지도자 기대론”이라는 것이 있다. 이 이론이 말하는 것은 “추종자들은 자기가 존경하는 지도자의 진지한 기대에 부응하는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지도자가 사람들을 훈련시키며 또 이끌면서 그들에게 정말로 기대를 가지고 하는가가 추종자들의 역량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역을 하면서 교육시키면서 정말로 사람들에게 진지하고도 마음 속에서부터 우러 나오는 기대를 가지고 하는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이점에 있어서 탁월한 지도자이셨다.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 비록 당시의 기준으로 지도자 층에 속한 사람들을 아니었지만 그들 가운데 가능성을 보시고 그들에게 진지한 기대를 가지셨다.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불리는 사도 베드로를 보면 그가 당시의 사회 속에서 무시를 받던 어부였다. 그리고 그는 성격이 불 같아서 불안정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 “시몬”은 바로 이러한 그의 성격과 불안정성을 보여주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그런 이름과 성격을 가진 시몬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바위”를 본 것이다. 강하고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바위와 같은 기초가 될 수 있는 인물을 보았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울 수 있는 기초로써의 바위와 같은 인물을 본 것이다. 물론 시몬이 하루 아침에 베드로 가 되지는 않았다. 이름은 바뀌었지만 그의 삶은 여전히 감정에 휩싸이고 서두르고 실수투성이의 인간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속에서 지속적으로 바위와 같은 견고한 사람을 기대하셨고 결국 베드로는 그 기대에 부응하여 초대교회의 사도가 되어 교회를 이끌었다. 우리는 우리를 진정으로 믿어주고 기대를 가져주는 지도자들의 기대에 부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지도자가 된 사람들은 사역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관점보다는 긍정적인 관점에서 보고 기대하고 믿어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지도자들의 기대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지도자가 자신을 믿어주면 그를 존경하고 자신을 믿어주는 지도자의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지도자가 자기를 믿어주지 않고 의심하고 비판하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또한 그 기대에 부응하여 지도자를 힘들게 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사역의 대상들이 혹시 좀 부족함이 있어도 지속적으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믿어주고 기대하면 결국은 “시몬”이 변하여 “베드로”가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역하는 사람들 속에서 무엇을 보는가? 비론 현재의 모습은 실망스럽고 때로는 우리를 좌절 시키는 그런 불완전한 사람들이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갈 가능성과 잠재력을 가진 사람으로 기대를 하고 사역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런 진지한 기대가 없이 현재의 실망스런 모습에 좌절하고 절망하고 있는가? 성도들의 향한 진지한 기대는 지도자의 중요한 역할 중에 하나이다. 몰론 우리의 욕심을 상대방에게 투여하여 사람들을 강압적으로 나의 욕심에 맞추어 버리려는 기대나 사람들을 이용하기 위하여 기술적으로 좋은 말을 해주는 유치한 차원의 처세술이 아니라 모든 실망스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진지하게 믿음의 눈으로 기대하는 것을 말한다. 그럴 때에 사람들은 지도자의 진지한 기대대로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실망스런 현재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사람들에게 대하여 진지하게 아름다운 기대를 가질 수가 있을까? 첫째, 믿음이 필요하다. 믿음의 눈으로 그 사람 속에 있는 가능성을 바라보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지금은 비록 나약하고 부족하고 허물 많은 존재라고 할찌라도 그 속에 하나님의 아름다운 형상이 맺어지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기대를 하는 것이다. 현실에는 아무런 가능성의 흔적 조차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형상이 넘치는 모습을 마음 속에 그리는 것이다. 둘째로 이런 믿음의 눈으로 사람을 보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위해서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것은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것은 없다. 하나님께서 하시면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일을 이루셔서 결국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맺어질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바른 기대를 갖는 것이다. 세째로 믿음의 눈으로 또 기도로 사람들에게 선한 기대를 갖는 사람은 그것을 향하여 사람들을 강제로 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있는 그대로의 부족한 모습을 받아들이면서도 기대와 소망을 잃지않는 비젼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사도 바울의 성도를 위한 기도를 좋아한다. 그리고 나의 사역 가운데 그 기도를 모범으로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한다. 왜냐하면 이 기도 속에서 사도 바울의 성도들을 향한 바르고 진지한 기대가 나타나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든 사역자가 성도들을 향하여 이런 기대를 가지고 사역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겅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시기를 구하노라. (에배소서 3:14-19)

[신선묵]영적 지도자의 비전

우리는 오늘날 비전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그러면 과연 비전이란 그 정의가 무엇일까? 비전이란 보는 것이다. 특히 미리 보는 힘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미리 보는 힘이다. 그리고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이것이 이루어질 것이라 확신하면서 나아가는 것이 비전의 지도력인 것이다.


웨인 코디로의 “팀으로 이끄는 교회”를 읽던 중 비전 지도력을 잘 보여주는 좋은 예화를 발견하였다. 올랜드에 위치한 디즈니랜드가 개장 되었을 때에 그 위대한 회사 설립자의 미망인은 화려하며 아름다운 디즈니랜드를 바라보던 기술자들 중 한 사람과 서 있었다. 디즈니를 존경하는 기술자가 디즈니 여사를 바라보며 이야기하였다. “여사님, 저는 월트 디즈니가 이 장면을 보았다면 참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아름다운 놀이동산을 바라보던 그 미망인은 자신 있게 대답하였다. “그는 이 모습을 이미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디즈니랜드가 건립된 것이지요.” 월트 디즈니 그 사람은 이미 죽었지만 그의 마음속에 이미 디즈니가 하나의 그림으로 이미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아름다운 것이 이루어질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비전이다. 비록 현재는 없지만 마음속에 분명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웨인 코디로는 “모든 것은 두 번 창조 되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한번은 오직 당신만이 볼 수 있는 상상 속에서 만들어 내는 것이며 또 한 번은 그 상상 속의 것이 실제적인 것이 되어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실체로 드러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뒤의 것은 앞의 것의 결과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앞의 것 즉 미리 바라 봄이다.


비전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Stan David라는 사람은 “Future Perfect”라는 표현을 사용 하였다. 즉 다시 말하여 영어의 시제 가운데에서 미래 완료라고 하는 시제가 있는데 그것은 과거와 오늘과 미래의 모든 것이 연결되어 미래의 한 시점에 어떤 모습으로 완결하게 되는 시제를 말한다. 즉 미래의 한 시점에서의 완료될 그림을 미리 마음속에 그리고 그것이 완결되게 하기 위하여 오늘을 방향성 있게 채워나가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할 때에 주로 현재완료 시제의 패러다임을 가지고 살아간다. 과거에 어떤 일들이 있었으니까 오늘 그 결과로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패러다임도 중요하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오늘의 일들을 충실히 마무리 짓는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미래에 대하여 그림을 가지고 확신 있게 전진하는 비전이 필요한 것이다. 앞으로 5년 뒤 혹은10년 뒤 에 어떤 일이 발생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오늘을 도전 적으로 사는 자세가 비전의 지도력인 것이다. 훌륭한 운동 선수들은 연습을 할 때에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모습을 마음 속에 그리면서 처절한 연습을 이겨낸다고 한다. 미래에 연습의 결과로 금메달을 따는 것을 마음속에 그리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 마음 속에 그림 때문에 어려움도 참고 자신을 채찍질하고 이겨내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그 그림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가 비전을 마음속에 품을 때에 비전의 내용이 구체적이어야 한다. 막연한 그림이 아니라 구체적인 그림을 가져야 한다. Dr. Phil로 유명한 Phillip C. McGraw는 그의 책 Life Strategies에서 말하기를 무엇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기에 앞서서 그것을 먼저 이름 지어야 한다고 하였다(You have to name it before you can claim it)” 많은 경우 우리가 꿈꾸고 바라는 것에 대한 그림이 막연하다. 그래서는 그것을 소유할 수가 없다. 분명한 마음의 비전을 가질수록 그것을 성취할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풀러신학교의 클링톤 교수는 영적인 지도자들이 비전을 가지고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목도 하는 삶을 사는 비전의 지도력은 일반적으로 몇 가지 단계를 거친다고 하였다. 첫째 단계에서는 꿈과 비전을 갖는다. 꿈을 꾸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앞일에 대한 큰 그림을 가지게 된다.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꿈을 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둘째 단계에서는 그것이 개인의 욕심이나 허망한 망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자신의 꿈과 비전에 대하여 그것이 참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인지를 검증하는 단계이다. 셋째 단계에서는 내적인 마음에 있어서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진다. 다 시 말해서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내면으로부터 확신하는 것이다. 우리의 꿈에 대하여 많은 경우 우리 스스로 확신과 믿음이 없다. 그래서 그 믿음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기도 한다. 넷째 단계에서는 패러독스의 삶을 살게 된다. 내면의 확신으로는 이루어진 것이지만 외적인 현실로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단계이다. 사실상 이 단계가 가장 어려운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지도자의 태도가 중요하다. 과거가 아닌 미래의 관점에서 일들을 결정해야 하고 많은 경우에 반대와 비난에 당면하게 되거나 현실이 꿈의 성취의 방향과는 너무 반대인 것을 직면하게 된다. 하나님께 나아가서 갱신의 시간과 하나님으로부터의 반복되는 확인해 주심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조금씩 확신을 가지고 진척해 가는 태도가 필요하다. 비전만 있고 실천이 없는 지도자는 가장 위험한 지도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비전과 꿈이 성취되는 단계가 온다.


한국의 순복음 교회의 조용기 목사님은 그의 책 ” 사차원의 영성”이라는 책에서 비전에 대하여 네 가지 원리를 강조하고 있다. 첫째, 바라봄의 믿음의 법칙을 사용하라. 목표를 바라보되 있는 것처럼 바라보라. 실체를 바라보고 마음속에 소원을 품은 후, 이미 이루어진 현실로 믿고 기도하라. 둘째, 부정적으로 유혹하는 환경과 싸우라. 믿음을 포기하도록 하는 수많은 유혹들이 있다. 싸워 이겨라. 평안이 올 때까지 기도하고 뜨겁게 부르짖어라. 셋째, 인생의 짐을 주께 맡기라. 불안한 시대, 절망할 수밖에 없는 시대이지만 염려를 내려놓으라. 당신의 부정적인 생각과 두려움의 짐을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라. 넷째, 항상 믿음으로 사는 법을 익히라. 일상 속에서 믿음으로 사는 법,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을 익히라. 성령님의 만나고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믿음의 사람들과 가까이 하라.


당신은 꿈과 비전이 있는가? 바른 비전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이 성취된 것으로 확신하고 그 관점에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사람들에게 5년 뒤의 모습을 그려보라고 한다. 가능 불가능을 먼저 생각하지 말고 자신이 원할 수 있는 최고의 모습을 상상해 보고 구체적으로 서술해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모습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일까의 관점에서 평가하고 수정하도록 하게한다. 그리고 비록 오늘 내가 어떤 현실 속에서 살던지 간에 그것이 5년 뒤에는 그 소원대로 이루어진다는 관점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다.


성경 속에도 보면 많은 비전의 지도자들이 있다. 아브라함의 경우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자기의 고향을 떠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으며 그의 삶 가운데 지속적인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사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요셉의 경우에도 그가 어렸을 적에 하나님이 주신 꿈을 마음속에 생각하면서 많은 어려움과 위기를 이겨내고 그것의 성취의 방향으로 움직여 나아가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모세와 여호수아도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그들의 삶을 살았다. 비록 현실 속에서는 소유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의 성취들을 향하여 믿음의 발걸음을 내디딘 비전의 지도자들인 것이다. 약속하나 믿고 움직인 비전의 지도자들인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1절을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말하고 있다. 아직 성취된 것이 아니지만 성취될 것으로 확신하고 살아가며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확실히 존재하는 것으로 믿고 살아가는 비전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사실상 우리 성도들은 모두 다 비전의 사람들이다. 우리 주님의 재림을 미리 바라보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고 모든 것을 심판 하실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보면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비전의 사람들인 것이다. 주님의 재림을 확신하면서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요한일서 3 장 2-3절을 보면 예수님의 재림과 우리가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될 것을 미리 바라보면서 이 비전을 가진 사람이 오늘을 살아가야 하는 모습을 제시해 주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신선묵]지도자와 고난

모든 사람은 고난을 겪는다. 그리고 그 고난 가운데서 아파하고 힘들어 한다. 특히 지도자들은 더 많은 고난을 겪는다. 인간관계에서의 갈등으로, 생명의 위기를 통하여, 사역의 현장에서 떠나게 되는 것, 섬기는 자들의 깊은 반발로 인한 어려움 등을 겪는다. 그런데 우리가 많은 지도자의 삶을 살펴보면 그 고난이 바로 하나님께서 지도자들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의 중요한 방법 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또 현재 지도자인 사람은 고난에 대한 바른 자세가 요구된다.


깊은 고난을 겪게 되면 두 가지 종류의 반응을 보게 된다. 한 가지 반응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저주하고 돌아서는 욥의 아내와 같은 사람이 있다. 왜 나에게 불공평하게 이런 일이 발생하는가 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이런 일을 허락하시는가?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 계시다면 나에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을까? 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는 사람이다. 또 다른 종류의 사람은 그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사람이다. 이제까지 피상적으로 신앙생활을 했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서 모든 것이 하나님?주권 아래 있음을 믿고 그런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초점을 맞추고 그 고난 가운데 하나님께 바르게 반응하는 사람이다. 이런 고난을 겪을 때에 이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이 주권자이심을 믿는지 안 믿는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지도자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난을 거친 많은 훌륭한 지도자들의 고백을 통하여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조금 헤아려 볼 수가 있다. 이런 관점으로 우리가 겪는 깊은 고난을 바라본다면 하나님께서 다른 지도자들의 삶 속에서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도 고난이라는 용광로를 통하여 우리를 성숙한 지도자로 만들어 가시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첫째,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더 나아가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는 것을 배우게 하신다. 신앙이란 궁극적으로 하나님 그분으로 인하여 만족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사실상 신앙 의 부산물로 우리에게 많은 것들이 주어진다. 명예와 지위, 인기와 명성, 내적인 만족과 사람들의 인정, 물질적인 축복과 번영,� 그러나 우리가 늘 기억할 것은 이런 것들은 결국은 본질적인 것의 부산물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때로 우리가 이런 부산물을 본질적인 하나님 그 분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될 때가 있다. 그러나 고난을 통과할 때에 사람들은 결국 중요한 것은 하나님 그분이라는 것을 깨닫고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만으로 만족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둘째, 고난을 통하여서 신앙의 역설을 배우게 된다. 기독교 신앙은 역설의 진리이다. 약한 것이 진정으로 강한 것이고, 죽는 것이 사는 것이고, 낮아지는 것이 높아지는 것이 기독교의 역설적인 진리이다. 그런데 깊은 고난을 통하여 이런 역설적인 진리를 체험케 된다. 우리가 강하고, 살아 있고, 높기만 하다면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고난을 겪을 때에 즉, 우리가 약해질 때, 우리가 낮아질 때, 우리가 죽을 때에 우리는 그것이 바로 참 강함과 참 높음과 참 생명임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에게 개인적인 고난이 있었다. 그것을 없애달라고 그가 간절히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응답하시기 보다는 ”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셨다. 그리하여 이를 통하여 바울은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나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라고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다. 신앙의 역설은 고난의 깊은 골짜기를 통하면서 경험되어진다.


셋째, 고난을 통하면서 지도자는 인격을 다듬게 된다. 고난을 겪을 때에 우리는 철저히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 자신 특히 우리의 인격을 평가하게 된다. 평소에는 우리는 철저하지 않은 기준을 가지고 우리 자신의 인격에 대하여 풍부한 점수를 주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고난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회개하게 된다. 그런 것을 통하여 진정한 의미의 겸손과 인격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겸손하여 진다. 고난이 없을 때에는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이룬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고난을 겪으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무 보잘 것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고 모든 것이 은혜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도 있다. 고난의 깊이가 깊을수록 그것이 극복된다면 그만큼 인격의 깊이가 깊어지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넷째, 고난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 특히 깊은 고난가운데 있는 이들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한다. 사역을 할 때에 우리가 고난의 경험이 없다면 다른 사람의 고난에 대해 진정으로 함께 해 줄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고난을 겪는 것을 통하여 다른 사람의 아픔을 진정한 의미로 이해하고 목자의 심정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많은 경우에 우리가 겪은 고난을 통하여 사명을 발견하기도 한다. 우리가 겪은 고난의 아픔을 진정 이해하고 그 아픔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발견했을 때에 같은 고난을 겪는 이들을 위로해주고 그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들 속에 이루시고자 하시는 목적을 인식하고 발견하도록 돕는 것을 사명으로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다.


많은 지도자들의 삶을 연구해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 할 수가 있다. 그들이 겪은 고난과 그들의 사역에는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 많은 고난을 겪은 지도자는 많은 사역을 감당하게 되고 지도자들이 깊은 고난을 통과 한 이후에 그 이전보다도 훨씬 영향력 있는 사역을 감당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 삶에 고난이 있는가 아닌가가 아니라 그 고난 속에서 어떤 태도를 갖는가 즉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이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어떤 곳으로 인도하시기를 원하시는 가에 초점을 맞출 수가 있다면 고난은 놀라운 지도자 훈련 학교이다.

[신선묵]하나님과의 친밀함(Intimacy with God)

유치원에 다니는 어느 소년이 하나 있었다. 엄마가 그 애를 자세히 보니 유치원에 나가기 시작한 이후 하나의 이상한 습관이 생겼다. 집에 들어와서 잠 잘 시 간이 되면 신발을 한 짝 벗어서 침대 밑에 던지는 것이었다.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엄마가 하루는 그 애에게 물었다. “애야! 왜 너는 저녁마다 신발을 한 짝 침대 밑에다가 던지고 자니?” 그 애는 대답했다. “엄마! 우리 유치원 선생님이 이렇게 하라고 하셨어요. 저녁 마다 신발을 한 짝 침 대 밑에 던지고 그것을 꺼낼 때마다 무릎을 꿇어야 하니까 기도를 하라고요. 그래서 이것을 꺼낼 때마다 무릎을 꿇으니까 기도를 해요.” 참 지혜가 있는 선생님이라고 생각이 된다. 이 이 야기를 보면서 몇 가지 생각해 본다.


지도력의 핵심은 지도자의 “자기 존재 관리”이다. 건강한 사람만이 건강한 사역을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지도자 자신이 건강과 진정한 의미의 행복을 가지고 있을 때에 건강하고 행복한 사역이 나올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다른 사람에게 사역을 실행하기에 앞서서 자기 자신의 존재를 잘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살아있는 영성, 온전한 양심, 성령의 열매로써의 인격과 자신맛?독특한 성격과 개성, 다양한 은사와 고유한 가치관과 삶의 목적 등과 같은 것들이 우리 지도자들의 존재를 구성하고 있다. 이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우리의 존재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이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역을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사역에 앞서서 가장 추구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이다. 겸손하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편안하지만 무례하지 않은 하나님과의 관계, 그 관계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회복되고 하나님의 도구로 쓰일 수가 있는 것이다.


모든 관계에서 친밀함을 가지기 위하여 가장 필요한 것은 “온전한 시간(Quality Time)”을 주는 것이다. 부부관계에서도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 가기 위하여 서로에게 온전히 집중되고 헌신된 시간이 필요하다. 서로를 향한 시간을 규칙적으로 정규적으로 가질 때에 친밀함이 싹이 터간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친밀함의 핵심도 하나님께 온전한 시간을 드리는 것이다. 다른 목적으로 인하여 나눠지지 않은 시간, 나는 하나님께만 집중하고 하나님도 나에게만 집중하시는 시간이다. 하나님께 시간을 온전히 내어드리고 그 안에서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위한 시간 드리기를 위하여 우리가 “형식이 나 도구”를 만들면 도움이 된다. 물론 하나님과 일대일로 보내는 시간을 위하여 어떤 특정 형식을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한다고 획일적으로 강요할 수는 없다. 사람마다 다른 환경 속에 놓여있고 사람마다 다른 성격과 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친밀함 개발을 위한 특정 형식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형식은 어디까지나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반드시 필요하고 또 그것을 위하여 위의 이야기에서 보았듯이 어떤 자기만의 구체적인 형식을 가지는 것은 모두에게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과의 친밀함의 생활을 위하여 지혜가 필요하다. 내가 어떻게 매일 기도하는 생활을 할 수가 있을까? 어떻게 내가 잊지 않고 무릎 꿇는 시간을 늘 규칙적으로 가질 수가 있을까? 일들이 닥칠 때마다 하나님께 나아가서 그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구하기보다 늘 나서는 우리 자신을 어떻게 하나님께로 묶어둘 수가 있을까? 어떤 사람은 기도서를 가지고 매일 일기를 적듯이 적는다. 어떤 이들은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를 한다. 어떤 이들은 다른 친구들과 약속하여 서로를 점검해준다. 이 모든 것이 안 되면 이 유치원 어린아이처럼 침대 밑에다가 신발이라도 한 짝 집어 던져야 되지 않을까?


나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온전한 시간을 위하여 몇 가지 노력을 한다. 첫째는 하루의 오전 시간 중에서 일정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려고 노력을 한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학교에 출근하기 전에 나만의 시간을 갖되 성경을 연구하고 동시에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둘째는 하나님과의 대화를 글로 적는다. 적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께 같은 시간에 보다 효과적으로 집중할 수가 있다. 적어 두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더욱 깊이가 깊어지고 때로는 내가 적어 놓은 글들을 다시 읽어보면서 하나님과의 소원해진 관계를 회복하기도 한다. 셋째, 사역을 준비하기 위한 시간과 하나님과 나 자신의 일대일로 보내는 시간을 철저히 구별한다. 사역자로써 사역을 준비하기 위하여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준비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 시간을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까에 관점에서 접근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리는 나의 시간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위하여 보내는 시간은 하나님과 나만의 시간이다. 하나님께 나 자신의 시간을 먼저 드릴 때에 사역을 위한 준비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된다. 넷째, 많은 일을 하려고 욕심내어 스케줄을 잡지 않는 것이다. 일이 많으면 아무래도 마음이 바쁘고 그럼으로써 하나님께 시간을 드리지 못하고 일들을 처리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은 결코 후회함이 없다. 이런 귀한 진리를 알면서도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을 아까워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늘 몸소 체험되는 진리이다. 하나님께 온전한 시간을 드리면 반드시 회복이 있고 평안이 있고 올바른 관점이 회복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인도가운데 살아갈 힘을 주신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된다. 월로우크맄 교회의 빌하이벨스 목사님은 “너무 바빠서 기도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쁜 것은 잘못된 바쁨”이라고 하셨다. 우리교회의 전병철 목사님이 설교제목을 참 의미 있게 적으셨다. ” 바쁜 사람, 나쁜 사람” 하나님께 시간을 드리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바빠지고 그러다 보면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다. 좋은 지도자가 되는 것은 조용한 가운데 하나님께 나아가는 시간이 없이 불가능하다.

[신선묵]“지도자와 휴식”

요사이 수영을 배우면서 느낀 것이 있다. 수영을 하는데 있어서 숨쉬기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다른 것을 잘하여도 숨쉬기를 잘 할 수가 없다면 우리가 멀리 수영하여 나갈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수영을 하러 가면 다른 사람들이 수영하는 것을 관심 있게 본다. 한 건장하게 생긴 청년이 몸에는 많은 문신을 새기고 수영을 한다. 너무 힘이 좋아서 무척 잘 할 것 같다. 그러나 막상 그는 멀리 수영하지 못한다. 근육질의 좋은 몸매를 가지고 있지만 그는 멀리 나갈 수가 없다. 곧 지쳐버린다. 그런데 연약하게 생긴 아주머니 한 분이 수영을 하는데 힘이 없어 보이는 분이다. 그러나 그 분은 지속적으로 수영을 잘한다. 그 차이는 한 사람은 숨쉬기를 잘하고 다른 사람은 숨쉬기를 잘 못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음악을 하는데 있어서도 좋은 음악을 만들기 위하여서는 쉼표에서 잘 쉴 줄 알아야 하고 아름다운 동양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여백을 남길 줄 알아야 한다. 위대한 연설가가 되기 위해서 침묵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리어 침묵의 시간 말이 없는 순간을 통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깊이 있는 곳으로 생각을 이끌 수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진정으로 暈遠岵隔?창조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삶 가운데 휴식을 가질 줄 알아야 한다.


사실상 신앙적으로도 휴식은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후 안식의 시간을 가졌고 그의 백성들에게 삶의 지침으로써 율법을 주실 때 안식을 명하셨다.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과 식물까지도 안식을 갖도록 명하셨다. 신약의 예수님께서도 그의 삶과 사역가운데 수시로 안식의 시간을 가졌고 우리를 그의 안식으로 초대해 주셨고 그가 주시는 안식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씀 하셨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의 나라를 약속해 주셨다.


그러면 바쁜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삶 가운데 어떻게 휴식을 가질 수가 있을까?


첫째, 휴식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휴식의 시간을 가지겠다는 결단이 필요하다. 우리가 할일 없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일들은 우리 앞에 수없이 많이 놓여있고 다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일을 다하고 쉬겠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쉴 수가 없을 것이다. 쉼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우리 삶의 스케줄에서 휴식을 위한 시간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둘째, 우리 삶 가운데 틈틈히 휴식의 시간을 갖는 지혜가 필요하다. 나는 학교에서 행정을 하면서 교수를 하고 있다. 그런데 행정을 하면서 교수를 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일을 함께 하다가 보니까 행정 일을 꽉 채워서 하고 강의시간이 되면 허겁지겁 강의실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런데 한번 세미나에 참석하였는데 노 교수님이 행정가이시면서 교수인 사람들에게 조언을 해 주셨다. “여러분! 강의 전에는 반드시 10분-15분 정도 휴식을 반드시 취하십시오. 행정 일을 하다가 강의 시간이 되어서 달려가면 효과적인 강의를 할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10분 가량은 쉬면서 강의를 위하여 숨을 조절해야 합니다.” 참으로 나에게 도움이 되는 조언이었다. 또 어떤 사람이 조언하기를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집에 돌아갈 때는 꼭 10분 가량 휴식을 취하고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지쳐서 집에 돌아가면 배우자에게 짐이 되기가 쉽다. 그러면 서로에게 지쳐서 도움을 바라게 되고 둘 사이가 좋지 않게 될 수 있다. 그러지 말고 10분 가량 숨을 고르고 들어가라는 것이다.


셋째, 우리 삶 가운데 가끔은 절대 휴식이 필요하다. 자주는 할 수 없지만 가끔은 우리의 몸과 영혼과 정신을 푹 휴식가운데 잠기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이것을 “절대 휴식”이라고 부른다. 마치 무덤 속에 누워있는 죽은 자처럼 모든 생각과 걱정과 근심과 창조성까지도 모두 포기하고 푹 쉬는 것이다. 내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은 삶에 스트레스로 피곤할 때에 가끔 묘지를 찾아가서 미리 사둔 묘자리에 누워본다고 한다. 그러면서 생각한다고 한다. “곧 이렇게 누울텐데 내가 왜 이렇게 욕심을 내고 바쁘고 힘들게 사는가” 생각하면서 삶을 바로 잡는다고 한다. 우리는 가끔 삶의 속도를 줄이고 이렇게 깊이 자신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사람마다 휴식을 취하는 방식과 패턴이 다양하다. 방법에 있어서 율법적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만은 절대적인 사실이다. 나는 그까짓 휴식이 없는 사람이라는 잘못된 초인 의식은 버려야 한다. 네째, 우리는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휴식과 안식의 차원을 넘어서 영적인 차원에서의 안식이 필요하다. 우리 속에 있는 죄의 무거운 짐, 욕망이라는 짐, 그리고 걱정이라는 짐이 있다. 우리가 아무리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안식을 취하여도 영적인 차원에서의 안식이 없다면 우리는 피곤하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이 깊은 영적인 안식으로 초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1:28-30) 오직 예수 앞에 나아갈 때에 우리는 깊은 안식을 누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써 승리롭게 살아갈 힘이 있다.


앞에 수영이야기를 하였었는데 수영을 배우면서 어떻게 하면 숨쉬기를 잘 할 수가 있을까 연구를 하였다. 팔을 잘 휘젓고 다리를 열심히 구르는 등 열심히 배워서 최선을 다해도 숨쉬기가 힘이 들고 곧 지쳐 버렸다. 근본적으로 나는 내가 물위에 떠있어야 숨쉬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열심히 수영을 연습하다가 한가지 진리를 깨달았다. 숨쉬기를 잘하려면 물로부터 열심히 도망쳐서 숨쉬기를 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물에다가 내 몸을 맡겨야 한다. 물에서 내 힘으로 뜨려고 하지말고 물에 내 몸을 맡겨 물이 나를 뜨게 해야 되겠다 생각하였다. 힘을 빼고 물에 내 몸을 맡겼다. 그리고 머리까지 푹 물에 담갔다. 그랬더니 내 몸이 물에 뜨는 것이었다. 그럴 뿐만 아니라 속력도 붙고 물의 띄워주는 힘 때문에 숨쉬기도 쉬워지고 많이 수영을 할 수가 있었다. 아무리 힘이 좋아도 자기의 힘으로 물에 떠 있으려고 하면 사람은 물위에 오랫동안 떠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아무리 힘이 없고 연약하여도 물에다가 내 몸을 맡기고 머리를 넣으면 물이 나를 띄워 주는 것이었다. 우리가 인생을 사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생각을 한다. 우리의 힘으로 인생을 살아가려고 하면 머리가 좋고 힘이 좋아도 곧 지친다. 인생은 아무리 강한 자라도 결코 이길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나의 힘이 아니라 주님께 나아가서 겸손히 머리를 숙이고 그에게 나의 삶을 맡기면 평안과 안식이 있고 우리가 성공적으로 지속적으로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생활이 아닐까? 주님께 나아가서 그에게 나의 죄의 짐과 욕심과 염려를 다 맡기고 힘을 얻어서 하루하루를 승리롭게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