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수]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의 기초 (8)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의 기초 (8)


1. 문화와 세계관
2. 세계관이란?
3. “문화화(enculturation)” 과정과 세계관의 형성
4. 세계관의 역학적 기능
5. 세계관의 충둘 : A case study – Islamic worldview
6. 세계관의 주제들 (Worldview Themes)


6.2. Swahili 사회의 세계관 주제들


이번 호에서도 계속하여 스와힐리 사람들의 세계관의 테마들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다시 반복해서 설명하자면, 세계관의 테마 혹은 주제라 함은 어떤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이(사회가) 공통적으로 소유하는 세계 이해 혹은 믿음들(assumptions)의 내용들이다.


(1) 초자연주의 (Supernaturalism) [계속]


Sub-theme 2. 알라는 인간들로 하여금 진(jinn)과 함께 살도록 작정하셨다. 그러므로 진들과 함께 사는 것은 신의 정한 이치이다.



Paradigm 1. 진은 이 세상의 어디에든지 있으며 특별히 인간에게 가까이 있다



Sub-paradigm 1. 어떤 짐승들은 사람이 못 보는 진을 볼 수 있다.
Sub-paradigm 2. 진은 대부분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때로는 뱀이나 고양이나 개나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Sub-paradigm 3. 진은 인간의 꿈에 나타나기도 한다.
Sub-paradigm 4. 진은 여러 면에서 인간과 흡사하다. 진은 태어나며 성장하며 결혼도 하고 성관계도 갖고 자식도 낳고 늙어 죽기도 한다. 따라서 진도 인간처럼 가문과 뿌리가 있다.


Paradigm 2. 진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좋은(유익한) 진”과 “나쁜(해로운) 진”이 있다.



Sub-paradigm 1. 진은 일반적으로 변덕이 심하고 예측이 불가하며 미성숙하고 이기적이고 인간에게 매우 해롭다.
Sub-paradigm 2. 사람들이 병을 앓는 것은 종종 진 때문에 그렇다. Sub-paradigm 3. 심지어 좋다고 하는 진(특별히 “루하니”라고 알려져 있음) 역시 언제 해롭게 변할지 모른다.


Paradigm 3. 사람들은 사회를 평화롭게 그리고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하여서는 진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여야 한다.



Sub-paradigm 1. 사람들은 진의 영역을 침범하여 그들의 노를 사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한다.
Sub-paradigm 2. 진이 사람들을 해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서 진들을 달래주는 의식을 행하여야 한다.
Sub-paradigm 3. 평민들은 진을 통제하는 능력이 없으나 “waganga”는[스와힐리어로 치유자를 의미하며 곧 샤만들을 가리킴] 능력을 갖고 있다.


Paradigm 4. 진은 인간의 머리에 올라탈 수 있다. [사람들을 (말하자면 귀신)들리게 할 수 있다는 뜻]


Paradigm 5. 오직 waganga들만이 진을 다룰 수 있다.



Sub-paradigm 1. waganga는 능력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Sub-paradigm 2. 진이 머리에 올라타면 waganga를 찾아가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
Sub-paradigm 3. 진을 달래주기 위해서는 진과의 의사 소통이 대단히 중요하다.
Sub-paradigm 4. 사람을 사로잡고 있는 진들의 이름들과 출신을 아는 것이 waganga들에게 필요한데, 이는 진을 효과적으로 다루는 데에 도움이 된다.


Sub-theme 3. (그러나) 공동체의 집단적인 문제들은 mizimu가 그 원인이다. [mizimu는 아프리카의 전통적인 영적 세계를 보여준다. 이슬람의 영계와 아프리카 전통적인 영계가 스와힐리 무슬림들의 세계관 안에 공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2) 조상(ancestors)에 대한 믿음


Sub-theme 1. 조상들은 사회 구성원의 일부이다.



Paradigm 1. 조상들은 육신적으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조상님들”의 영역으로 들어간 사람들을 가리킨다.
Pradigm 2. 조상이 되기 위해서는 특정한 조건이나 자격이 있어야 한다. 즉, 죽을 때의 나이와 살아 있었을 때의 명성 등이 그 기준이 된다.
Paradigm 3. 조상들은 그들이 산 자들에 의하여 기억되는 한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존재한다.
Paradigm 4. 조상들은 산자들, 특별히 그 사회 공동체의 어른들의 꿈에 나타나 자신들이 살았던 사회와 계속 교류(communication)하기를 원한다.


Sub-theme 2. 조상의 영들은[mizimu라고 하기도 함] 존중되어야 하고 전통이 가르쳐주는 대로 온당하게 그들을 대우하여야 한다.



Paradigm 1. 모든 가문은 mizimu가 있게 마련이다. [이때 mizimu는 각 가문의 중심으로서 매우 복합적인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는 설명을 생략한다.]
Paradigm 2. 조상들은 정기적으로 mizimuni에서 [이때 mizimuni는 mizimu를 모신 곳을 가리킨다] 예를 받아야 한다.
Paradigm 3. 각 사회 공동체에서 치르게 되는 대부분의 행사는 조상들의 허락이 필요하다.
Paradigm 4. mizimu는 그 사회 구성원들이 제대로 대우만 해주면 그 공동체를 보호하여 준다.
Paradigm 5. 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조상들은 산 자들에게 격노하게 될 것이며 후손들로 하여금 경각심을 갖도록 사회에 어려움을 주든지 아니면 벌을 내리게 될 것이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스와힐리 사람들은 이러한 믿음들을 갖고 사는데, 이러한 믿음들이 앞서서 이론적으로 설명한 문화적 세계관이라고 하는 개념의 구체적인 내용이 된다. 내부인으로서의 믿음의 내용들을 (즉, emic의 관점을) 문화적 테마라고 하는 연구자의 학문적인 틀로써 (즉, etic의 방법을 사용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 지금 내가 기술하고 있는 스와힐리 사람들의 세계관 내용이다. 다음 호에서는 세 번째 테마로서 “과거지향주의”와 “집단주의” 등의 주제들을 다루도록 하겠다.


독자들은 우리 한국인 혹은 한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믿음들이 무엇인지 스와힐리 사람들의 내용과 비교하여 생각하여 보기를 바란다. 즉, 우리 한인들이 어려서부터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배움으로써 형성된 믿음들과 가치관들이 무엇인지 객관적으로 놓고 분석하고, 또 이것을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의 그것과 상대적으로 비교해 봄으로써 우리를 좀더 관찰자적인 시각에서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줄뿐만 아니라 우리가 변화를 필요로 하는 부분들을 좀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분석적인 틀을 제공하여 준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고 방식과 서구화된 사고 방식 사이에서 형성되는 가치의 충돌과 이러한 충돌을 조화시키고자 하는 모든 노력들을 통하여 문화적 세계관은 변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김철수]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의 기초 (7)

세계관 인간이해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의 기초 (7)


1. 문화와 세계관
2. 세계관이란?
3. “문화화(enculturation)” 과정과 세계관의 형성
4. 세계관의 역학적 기능
5. 세계관의 충둘 : A case study – Islamic worldview



6. 세계관의 주제들 (Worldview Themes)


세계관의 구조와 그 역학적인 기능에 대하여 간단히 앞에서 살펴보았다. 어떤 사회이든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세계관은 전제(혹은 믿음)들과 가치들과 충성의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러한 세계관은 그 사회의 문화의 저변에서 사회 구성원들의 생각과 삶의 모든 행동을 양식화(patterning)해주는 지도(map)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양식화한다는 말은 삶의 행동이나 사고를 거의 무의식적으로 자동적으로 하게 해준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양식화는 문화화(enculturation) 과정을 통하여 형성된다. 그리고 이렇게 양식화된 사고나 삶의 모양들은 그 문화권에서는 당연한 진리처럼 그 사회의 구성원들에게는 인식된다. 그러므로 삶의 양식이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소위 말하는 “문화충격”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문화충격은 결국 세계관이 다름으로 인하여 생기는 충돌인 것이다.


6.1. 이제 이러한 구조와 기능을 갖고 있는 세계관의 내용은 무엇이며 어떻게 표현되는가?


각 문화권에서 사람들이 공유하는 믿음들과 가치들과 충성들의 내용은 우리가 학적으로 분석하고 분류하기 쉽게, 즉 눈에 뜨이게 나타나지 않는다. “믿음”이나 “가치”나 “충성”이라고 구별하는 이 범주들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etic 분류일 뿐이다. (etic이라는 말은 문화인류학적 용어로서 관찰자 혹은 연구자가 보편적인 범주를 갖고서 현지의 문화를 들여다보는 접근 방식 혹은 연구 방법을 가리킨다.) 실제적으로 세계관은 그 문화권에 살고 있는 현지인들의 언어로써 혹은 숙어들로써 표현된다.(이러한 것들은 etic과 다른 개념으로 emic의 관점이라고 부른다. 즉, 내부인의 믿음의 내용들과 그들의 관점을 가리키는 말이다.) 세계관의 내용들은 그들의 속담이나 잠언이나 격언 혹은 수수께끼, 또 설화나 신화 속에 숨어 있게 마련이다. 또 그들의 성문화된 법이나 그들의 전통적인 과학 속에서도 발견된다. 서구 사회의 세계관은 고도로 발달된 여러 분야의 학문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


그러나 세계관의 내용이 되기 위해서는 그 내용들이 주어진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발견되는 주제이어야 한다. 이렇게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사람들이 믿고 있는 내용을 우리는 세계관의 주제(worldview theme)라고 부르기로 한다. 예를 들어보자. 한국에서 남자에 대한 선호라고 하는 내용은 사회의 전반적인 영역에서 발견되었다. 요즈음은 많이 변화되어 어떤 하위사회(sub-society)나 가정에서는 이러한 남성선호 내지는 남성우위의 모습이 보이지 않기도 하지만, 전통적으로 한국 사회 전반을 살펴보면 남성을 선호하고 우선권을 주었던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아들을 선호한다든지, 집안에서 결정할 일들이 있을 때에는 남자에게 우선권을 준다든지, 정치에는 남성들이 주도권을 갖는다든지, 주방이나 다과의 모든 심부름은 여성들이 한다든지, 여필종부를 당연하게 여긴다든지, 하는 등의 내용들은 전통적인 한국사회의 문화적 테마, 즉 세계관의 주제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남성선호 혹은 남성우위 사고는 가정이나 학교나 직장이나 음식점이나 길가에서나 어디에서든지, 한국 사회 전반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문화적 믿음(cultural belief)이기 때문이다.


20세기 중엽 문화인류학자 중 한 사람인 Morris Opler는 한 사회의 문화적인 테마는 대충 여섯 개에서 열두 개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고 하였다. 내가 현장 조사를 한 Swahili 이슬람 문화권에서 발견한 세계관 주제 역시 열두 개 이하로 요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관의 주제들은 각각 그 하위 구조를 갖음으로써 실제로는 그 내용에 있어서 복잡한 것을 볼 수 있다. 그 구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Theme은 가장 큰 범주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각 주제는 그 밑에 하위 구조로 Sub-theme을 몇 개 가질 수 있다. 또 이 Sub-theme은 Paradigm이라고 하는 하위 구조를 갖는다. 그리고 이 paradigm은 sub-paradigm이라고 하는 하위 구조를 갖는다. 이러한 구조는 Kraft의 이론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Kraft는 sub-paradigm 아래의 하위구조들을 말하고 있지만 나는 이 정도까지로 분석하게 되면 상당히 그 문화권을 깊이 이해한 것이라 보고, 여기서는 더 깊이 들어가지는 않으려 한다. 그러면 그 실제적인 예를 Swahili 사회의 것을 중심으로 하여 설명해 보기로 한다.


6.2. Swahili 사회의 세계관 주제들


동아프리카 동해안에 위치한 Swahili 이슬람 사회의 세계관은 다음 몇 가지의 주제들로 설명될 수 있다. Swahili 세계관은 Supernaturalism(초자연주의), 조상숭배, 과거지향주의, 집단주의, Baraka(축복, 혹은 능력의 개념), 사건 및 사람 중심주의 등으로 설명될 수 있다. 좀더 연구하면 몇 가지 범주가 더 나올 수도 있겠지만, 이 여섯 가지의 주제만 해도 엄청난 내용들을 내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주제들을 깊이 분석하면 스와힐리 사람들의 믿음들과 가치들, 그리고 충성의 내용들이 거의 대부분 설명된다고 보인다. 그럼, 각 주제를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1) 초자연주의


스와힐리 사람들은 하나님과 영들이 존재하는 것을 믿는다. 그리고 하나님과 영들은 인간의 삶의 모든 부분에 관여한다고 믿는다. 이 진술은 스와힐리 사람들이 믿는 세계관의 대 주제가 된다. 이 믿음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입력되어 믿어지는 내용으로서 스와힐리 사람들의 삶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이제 이 대 주제를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은 하위 주제들을 발견할 수 있다.


Sub-theme 1. 뭉구(하나님의 스와힐리 말)는 전능하시다. 그러나 그분은 엄격하시고 사람들이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멀리 계시다.


이것은 분명히 이슬람의 영향을 받은 내용이다. 전통적으로 스와힐리 사람들이 이슬람이 들어오기 전에 어떠한 신관을 갖고 있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다른 아프리카 반투족의 신관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이슬람의 영향으로 신에 대한 친근감은 훨씬 약해진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이러한 믿음은 다음 하위 주제들 즉, Paradigm들로써 설명된다.


Paradigm 1. 하나님은 인간 마음의 모든 것들을 아시고 모든 행위들을 아신다.


Paradigm 2. 하나님은 모든 일을 작정하시고 인간들이 따라야 하는 규칙을 정해 놓으셨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의 규율을 어김으로써 하나님을 화내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Sub-paradigm 1. 하나님은 악행하는 자들을 벌하실 준비가 되어 있다.


Sub-paradigm 2. 하나님은 매우 엄격하셔서 사람들은 반드시 그의 규칙을 지켜야 한다.


Paradigm 3. 하나님은 인간의 삶에 다른 영들이나 조상들보다 덜 관여하신다.


Paradigm 4. 보통사람들이 하나님께 부탁을 할 일들이 있으면, 사람들은 이슬람 성인들이나 조상들에게 중보를 부탁해야 한다.


이 첫 번째 Sub-theme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스와힐리 사람들의 신관이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거리감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설사 늘 의식적으로 신에 대한 두려움이나 거리감을 갖고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그들의 무의식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믿음은 신에 대한 두려움과 거리감인 것이다. 이것은 현지 스와힐리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알 수 있었는데, 나는 이러한 내용을 확인하기 위하여 다른 스와힐리 사람들에게 재차 물어보았다. 그리고 모든 이들이 동일한 내용과 느낌으로 대답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처럼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믿음 혹은 지식은 그 사회의 세계관의 주제로 설정될 수 있는 것이다.


다음 호에도 계속 이어서 이 스와힐리 사람들의 주제들과 하위 주제들의 내용들을 다루도록 하겠다. 바라기는 나의 이 글을 읽을 수 있는 독자들 역시 스스로 자신의 문화권의 세계관 주제들을 한번 찾아보았으면 하는 것이다. 나의 글을 읽을 수 있는 이들이라면 분명 대부분이 한국 사회 내지는 한인 사회에서 성장한 사람들일 것이다. 자신이 enculturation된 사회를 객관적인 분석의 대상으로 놓고 세계관의 주제들을 찾아보기를 바란다.


[김철수]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의 기초 (6)

세계관 인간이해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의 기초 (6)


1. 문화와 세계관
2. 세계관이란?
3. “문화화(enculturation)” 과정과 세계관의 형성
4. 세계관의 역학적 기능
5. 세계관의 충둘 : A case study – Islamic worldview


5.2.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과 이슬람 세계관의 핵심 비교 (계속)


지난 호에서 이슬람에서도 기독교에서처럼 유일신을 고백하며,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충성하는 것처럼, 무슬림 들도 그의 마지막 선지자 무함마드에 대한 사랑과 신앙을 고백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것은 마치 요한 사도가, 영생이란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아들 예수를 아는 것이라고 말한(요 17: 3) 구원 조건의 구조와 매우 흡사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슬람은 기독교 후에 나타난 종교 가운데 가장 기독교를 닮은 종교이다. 특별히 신앙고백의 구조에 있어서 이슬람은 기독교와 같은 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 진위를 떠나서) 신앙고백이라고 하는 것은 집단적으로 표현되는 종교적 신념이다. 무슬림 지도자들은 이슬람의 신앙고백 내용인 tauhid(알라의 유일성)와 risalah(무함마드의 선지자됨)를 무슬림들로 하여금 종교의식들을 통하여 계속 반복하게 함으로써 이 공유된 지식과 신념이 모든 무슬림들의 의식 세계뿐만 아니라 잠재의식 속에도 자리잡도록 한다. 이 지식은 자연히 무슬림들의 세계관의 깊은 곳에 자리잡게 된다. 이 신념은 세월이 흘러가면서 더욱 굳어지게 되고 이러한 사고의 패턴은 웬만한 충격이 아니면 변하기가 어렵게 된다.


그러므로 세계관을 바꾸어야 하는 전도의 사역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세계관의 충돌이며 곧 확신의 싸움인 것이다. 나는 무슬림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이해시키는 것이 다른 비기독교인들에게 전도하는 것과 비교해볼 때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절감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러나 나의 끊임없는 사명은 그들의 신앙고백 구조 안에서 그들이 믿는 무함마드의 역할이 예수에게 원래 있었음을 상기시켜주는 것이다. 앞에서 지적한대로 무함마드에 대한 그들의 충정과 사랑은 지극한 것이기에 무함마드를 손상시키는 언급은 금물이다. 그리고 그러한 접근은 바람직하지도, 건설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무슬림들 자신들이 결정해야 할 내용이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새로운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고, 그들이 나름대로 알고 있던 예수에 대하여 새로운 시각이 생기게 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언젠가 예수에 관한 그들의 paradigm에 변화(shift)가 일어날 것을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이슬람의 세계관을 염두에 두고, 무슬림들을 접하게 될 때에 복음의 전달자가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은 이것이다. 무함마드가 선지자가 아니라는 것을 변론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일이다. 복음을 듣는 상대방의 세계관에 변화가 일어나기 위하여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자세는 상대방의 세계관의 내용(즉, 믿음의 내용)의 진위를 거론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증거하는 것이다. 이때에 우리가 예상하는 것은 세계관의 충돌이다. 즉, 상대방이 확신하고 있는 내용과 다르거나 정반대의 내용을 자신도 확신하며 이야기하게 될 때에, 이러한 내용은 상대방의 세계관을 건드리게 되어 있기 때문에 감정의 문제로 확산될 확률이 높다. 그러므로 세계관의 충돌은 예상하면서도 이러한 충돌이 인간 관계에 끼칠 수 있는 부정적인 영향을 최소한도로 줄이기 위하여 소위 “코뮤니케이션”의 기술이 필요하다. (본고에서는 이 부분은 다루지 않겠다.)


5.3. 이슬람의 세계관과 무슬림들의 세계관


무슬림과 기독교인이 만나게 될 때에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은 단순히 종교적인 충돌이나 Samuel Huntington이 말하는 문명의 충돌이라고 하는 비인격적인 이념의 충돌만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내면의 확신 곧 세계관의 충돌을 포함한다. 이러한 이해를 갖게 될 때에, 복음전달자는 무슬림들이 갖고 있는 “이슬람의 이데올로기”보다는 그것을 신봉하고 있는 “무슬림들의 세계관”에 더 관심을 갖게 된다. 다시 말하면 이상적이고 이념적인 이슬람 자체보다도 무슬림들의 생각들을 더 다루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무슬림들의 생각과 그 구조에 더 초점을 맞추며, 그들의 사고방식, 인식방식, 또 인식한 내용들과 그 내용들에 대한 그들의 반응 등이 이제 더 큰 관심의 대상이 된다.


지금까지 이슬람 연구에 있어서 세속 학자들이나 기독교 학자들이나 심지어 무슬림 학자들조차도 이슬람의 종교적 내지 철학적 이데올로기에 더 관심을 쏟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이슬람에 대한 역사와 교리와 정치적 이념 등에 대하여 나름대로 공부하면서 무엇인가 한 가지가 빠진 것을 많이 느꼈다. 그것은 내가 문화인류학적 현장조사를 수행하면서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인데, 무슬림들, 곧 “사람들에 대한 연구”이다.


즉, 무슬림들은 자신들이 믿는 이슬람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며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그리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하여 (즉, 앞에서 언급한 환경들) 어떠한 해석과 대처를 하고 있는가? 무슬림들은 자신들 주변의 환경들을 이슬람의 이념에 기초하여 해석하고 이해하고 있는가? 이슬람의 이념들이 무슬림들의 삶의 문제들을 어디까지 풀어주고 있는가? 만일 이슬람의 이데올로기가 자신들의 삶의 문제들을 다 해결해 주지 못한다면 무슬림들은 어디에 호소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후자의 경우 이슬람의 이데올로기에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이슬람 지도자들은 그렇지 못한 무슬림 평민들에 대하여 어떠한 시각을 갖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무슬림들의 세계관을 다루는 이슈들이다. 이렇게 무슬림들을 이해함으로써 접근하는 이슬람 연구는 이슬람 세계의 구체적인 사회적 정신적 현상들을 규명해 줄 수 있다.


그러므로 무슬림 사회와 무슬림들의 삶들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서 내가 자각하게 된 점은 이슬람의 내용만이 아니라 그것을 신봉하는 무슬림들의 삶을 이슬람학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고서는 이슬람 연구라고 하는 것은 너무 추상적이며 관념적인 사변만으로 끝나기가 쉽다. 특별히 선교를 수행할 때에 무슬림들을 깊이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오직 이슬람의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만 잘 아는 것은 사랑을 기초로 한다고 하는 선교에 오히려 위배될 수도 있다.


무슬림들이 이슬람의 이념을 다 신봉하기는 하지만, 그 정도가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무슬림 사회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이슬람의 이데올로기만이 무슬림들의 세계관을 다 형성해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세계관을 구성해주는 세계관의 전제(assumption)와 가치(value)와 충성(allegiance) 등의 내용이 무슬림 사회에서는 이슬람의 이데올로기만으로 되어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수많은 토속적인 전통적 세계관이 함께 어우러져 있으며, 어떤 삶의 영역에 있어서는 오히려 이슬람 이전의 전통적인 세계관이 더 지배적인 것을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무슬림 사회 역시 여느 다른 비무슬림 사회처럼 그 세계관이 복잡하며 인간 사고의 심연과 그 창의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무슬림들의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하여서 우리는 잠시 여기서 이슬람에 대한 내용을 접어두고 다시 세계관의 주제로 돌아가서 “세계관의 주제(worldview themes)”와 “세계관의 보편요소들(worldview universals)”을 다루어야 하겠다. 이 부분을 다룬 뒤 무슬림들의 세계관의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 때에는 내가 사역하고 리서치한 동아프리카 해안의 스와힐리 무슬림들의 세계관을 실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계속)

[김철수]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의 기초 (5)

세계관 인간이해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의 기초 (5)


1. 문화와 세계관
2. 세계관이란?
3. “문화화(enculturation)” 과정과 세계관의 형성
4. 세계관의 역학적 기능
5. 세계관의 충둘 : A case study – Islamic worldview


5.1. 이슬람의 기본 믿음에 반영된 세계관의 내용들


(3) 선지자 무함마드


이슬람의 기본 신앙의 교리나 모든 행사를 살펴보면 무함마드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런데 무함마드가 어떤 신성을 갖고 있다고 하는 교리를 이슬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물론, 일반적으로 무슬림들은 무함마드에게 어떤 신격을 부여하는 것을 중죄로 여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그들의 신앙이나 삶 속에서 무함마드는 알라에 버금가는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모든 무슬림들의 사고의 중심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꾸란 24장 52절과 54절과 56절에 보면 알라에게 복종하는 것과 그의 선지자(무함마드)에게 복종하는 것이 같은 수준으로 기록되어 있다. (꾸란에는 “알라와 그의 선지자(곧 무함마드)에게 복종하라”는 구절이 많이 나온다.) 다시 말하면 알라의 뜻이 가장 완벽하게 계시된 것이 바로 무함마드 선지자를 통하여서라고 꾸란은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슬림들은 알라의 뜻에 순종하는 길은 무함마드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배우고 익히는 것이라고 어려서부터 배우게 된다. 그러므로 무함마드는 완전한 인간상으로 무슬림들의 정신 속에 어린 시절 때부터 각인이 된다. 그들은 무함마드가 옴으로 인하여 참 종교인 아브라함의 종교가 완성되었다고 믿는다. 또한 그들에게 있어 유대교와 기독교는 완성을 향한 과정에 불과하므로 이러한 불완전한 것을 완성시킨 무함마드야말로 영웅 중의 영웅이며, 참 개혁가요 참 신앙인이라고 그들은 믿는다.


특별히 이슬람의 신비주의인 수피즘(Sufism)에서 무함마드는 그 시조로 여겨진다. 수피즘에 의하면 무함마드는 우주의 신비한 운행의 중심 축에 놓여 있는 이로 묘사되기도 한다. 꾸란에는 그를 완전하다고 말한 적이 없지만, 알라의 모든 칭찬과 전권을 받아 알라의 뜻을 계시하는 데에 마지막으로 사용된 위대한 선지자이기 때문에, 무슬림들에게 무함마드는 완전한 인간(perfect man)으로 다가 온다. 그렇기 때문에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순나”(Sunnah)(혹은 하디쓰(Hadith))는 이슬람의 역사 속에서 항상, 꾸란 만큼 중요하게 여겨져 왔다. 많은 경우, 실제로 꾸란보다도 더 많이 연구되고 가르쳐지기도 한다. 중세기 이슬람의 신비주의(Sufism)를 정통 이슬람의 경지로 승화시킨 대학자 가잘리(Ghazali)에 의하면 무함마드의 생애는 무슬림들에게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참 행복의 열쇠는 순나를 따르며 하나님의 사도[무함마드를 가리킴]를 모방하는 데에 있다. 그의 모든 출입과 움직임 그리고 조용한 시간들, 심지어 그의 식사하는 자세, 잠자는 일, 말하는 법까지 모두 그를 모방하는 것이다…. “[알라의] 사도가 너희에게 가져다 준 것들을 받으라. 그리고 그가 금지하는 것을 하지 말라”(꾸란 54:7). 그러므로 그대는 바지를 입을 때는 앉아야 하며 터번을 쓸 때에는 서야 한다. 그대는 신발을 신을 때는 오른 발부터 신어야 하며 먹을 때는 오른 손을 사용해야 한다…. 무함마드 아슬람은 멜론을 안 먹었는데 그 이유는 알라의 사도가 그것을 어떻게 먹었는지에 대한 내용이 그에게 전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Cragg의 책에서 인용, The Call of the Minaret. Maryknoll, NY: Orbis Books, 1985:92.)


무함마드의 일거수일투족은 이처럼 진짜 무슬림이라면 따라야 하는 삶의 모든 행동 규범이 되며, 따라서 모든 무슬림들의 무의식 속에 가장 중요한 세계관의 전제요 가치요 충성의 대상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꾸란의 가르침에 따른다면 무함마드는 결코 무죄한 인생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의 역사 속에서 무함마드는 무죄하고 완벽한 상태에 살고 있었던 것으로 대다수의 모든 무슬림들에게 여겨져 왔다. 무함마드의 삶은 결국 알라의 뜻에 완전히 부합된 그러한 삶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제에 있어서 이슬람의 핵심은 무함마드에게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따라서 무함마드를 욕하는 것은 무슬림 개인을 모욕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슬람 전체를 그리고 알라를 모욕하는 일이다. 중세기에 서구 교회가 무함마드를 모욕하였고 종교개혁시에 역시 무함마드와 이슬람을 이단으로 단죄하고 무시하여 버림으로써 이슬람 세계는 기독교를 대표하는 서방을 영원한 원수로 여기게 된 것이다. 선교 현장에서도 기독교 선교사들이 이슬람의 세계관의 내용을 잘 알지 못 하고 또 세계관이 얼마 만한 힘이 있는 것이며 중요한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 한 상태에서, 무함마드를 거짓 선지자라고 나름대로 폭로하며 복음을 전한 경우가 많이 있었다. 모든 경우 무슬림들의 분노를 샀고 목숨을 부지하지 못 한 경우도 꽤 있었다. 무함마드가 하나님의 선지자인가 아닌가를 무슬림들과 따지기 전에, 선교사와 같은 외부인들은 먼저 무함마드가 무슬림 문화의 핵심이며 이슬람 정신 세계의 축이라는 현실과 그 정신적 역동성을 좀더 신중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는 정작 전해야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지도 못 하고 그들의 세계관과 충돌만 함으로써 불필요한 소모전만 치른 경우가 상당히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슬림들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실제로 역사적인 무함마드의 생애에 대한 탐구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물론 이슬람의 학자들과 지성인들에게 있어서 역사적 탐구는 매우 중요하지만, 그 학문의 방향성 역시 무함마드에 대한 절대적인 존경과 사랑을 전제하기 때문에 기독교 진영에서 자유주의 학자들이 나름대로 발견한 다양한 예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갖는다. 무슬림들에게 있어서 더욱 중요한 것은 무함마드의 생애의 진위가 아니다. 모든 무슬림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함마드의 순나의 의미가 무엇이며 이것을 어떻게 삶 속에 적용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무함마드는 그 절대적인 위치를 이미 지난 14세기 동안 확보한 것이다.


그러므로 무함마드는 역사적인 과거의 인물로 끝나지 않는다. 특별히 수피 신비주의에 오게 되면, 무함마드는 사랑의 대상이 되고, 또 심지어 중보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물론 기독교에서처럼 대속의 의미를 갖지는 않지만 무슬림들의 구원을 도와줄 수 있으며 무슬림들을 위하여 변호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성인으로 모든 수피들은 믿는다. 앞에서 언급한 중세 수피즘의 대학자인 가잘리는 무함마드의 사후의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무함마드는 죽어서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내가 바로 알라가 원하는 자들을 위하여 중보할 수 있는 자이다.” 그때 알라는 다음과 같이 그에게 말하였다고 한다. “오 무함마드여, 네 머리를 들고 말하라. 너의 기도를 들어줄 것이다. 중보를 하여라. 그리하면 응답 받을 것이니라.”(Andrew Rippin의 책에서 인용. Muslims: Their Religious Beliefs and Practices. New York: Routedge, 2001:52-53.)


이렇듯이 이슬람에서 무함마드는 꾸란의 계시를 받고 그 메시지를 전달한 선지자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무함마드에 대한 무슬림들의 신앙과 존경과 사랑은 그들의 세계관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아주 토속적인 이슬람의 현상을 관찰하면 (소위 민속 이슬람(folk Islam)이라고 하는 이슬람의 현상) 무함마드나 알라의 개념은 많이 약화되고 주로 정령숭배와 샤마니즘이 강하게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함마드에 대한 그들의 기본적인 충정은 모든 무슬림들의 세계관의 자리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선교사나 비무슬림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 무함마드에 대하여 과학적이고도 역사학적인 방법으로 접근을 시도할 때에 알아야 할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바로 무슬림 사회의 타부를 건드리고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무함마드는 단순히 그들의 역사 속에 나오는 위대한 선지자만이 아니며, 또 신앙과 충성의 대상으로 부각된 것만이 아니라, 무슬림들이 자신들의 존재 의미를 투사(projection)한 그들의 자존심이며 궁극적인 자기 정체(identity)인 것이기 때문이다.


5.2. 기독교의 세계관의 핵심과 이슬람의 세계관의 핵심 비교


그러나 무슬림들의 세계관에 어느 한 인물이 그토록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 결코 이상한 일만은 아니다. 이러한 현상은 기독교에서 예수라고 하는 역사적 인물이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세계관의 중심에 깊이 자리 잡아 온 것과 비견될 수 있다. 복음적이며 정상적인 기독교의 입장에서 참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을 세계관의 핵심인 믿음(assumption)과 가치(value)와 충성(allegiance)의 대상으로 모신 사람이다. 즉, 참 하나님과 참 중보자 예수가 세계관의 핵심에 있는 이가 그리스도인이다. (참고로 요한복음 17장 3절에 나오는 “영생”의 의미를 보라. 영생은 참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이, 곧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이슬람의 경우, 참 무슬림이란 shahadah, 즉 그들의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이다. 이 이슬람의 신앙고백 역시 기독교에서처럼 두 가지 신앙의 대상을 고백하고 있다. 이슬람에서 구원을 얻기 위하여, 혹은 진정한 무슬림이 되기 위하여서는, 하나님(알라)과 그분이 보낸 마지막 선지자에 대한 신앙고백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이 신앙고백이 갖는 세계관에 관련된 의미들과 적용은 다음 호로 미루도록 한다.


[김철수]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의 기초 (4)

세계관 인간이해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의 기초 (4)


1. 문화와 세계관
2. 세계관이란?
3. “문화화(enculturation)” 과정과 세계관의 형성
4. 세계관의 역학적 기능


5. 세계관의 충돌: A Case Study — Islamic Worldview


세계관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보는 관점 혹은 그 세계에 대한 이해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이러한 세계관은 어느 한 공동체가 주위의 환경에 적응하며 혹은 싸워나가면서 형성된 세계 이해이다. 따라서 세계관은 단번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거쳐 형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사회든지 그 사회의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가 처해진 환경을 이해해야 하며 또 그 환경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 사회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본 장에서는 오늘날 국제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이슬람의 세계관을 예로 들어보고자 한다.


이슬람의 세계는 지난 2세기 동안 무함마드의 이슬람 정신, 즉 이슬람의 원리로 돌아가자는 부흥운동이 한창 일어나고 있다. 이 운동은 이슬람의 가장 원형적인 세계관으로 복귀하자고 하는 신앙운동이자 세계관 정립의 운동이다. 이러한 운동은 자연히 이슬람 선교(jihad)의 성격으로 나타나게 되며, 그 결과 선교적인 기독교와 기독교의 세계관에 기초하여 발전한 서구 사회의 사상과의 또 한번의 대결이 예상된다. (이미 역사 속에서 기독교적인 서구 사회와 무슬림들과의 갈등은 십자군 전쟁에서 보여주듯이 항상 계속되어 왔다.) 이렇게 이슬람 사상이 현대주의를 이룩한 서구 사회에 큰 도전과 위협으로 부상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이슬람을 세계관의 이론에 입각하여 이해하여 보지 않을 수 없다. 본고에서는 이슬람의 역사적 발전이나 교리의 세부적인 내용은 다루지 않고, 모든 무슬림들이 고수하고 있는 이슬람의 보편적인 세계관 전제들(worldview assumptions)만을 소개하고자 한다.


5.1. 이슬람의 기본 믿음에 반영된 세계관의 내용들


이슬람에는 기본적인 6가지 믿음의 내용이 있다. 무슬림은 알라를 믿으며, 알라의 천사들과, 알라의 책들과, 알라의 선지자들을 믿는다. 그리고 알라의 절대 작정을 믿으며 마지막 날에 심판이 있을 것을 믿는다. 본고에서는 이 가운데 이슬람의 세계관의 가장 기본이 되는 신관과 알라의 작정, 그리고 선지자 무함마드에 대한 그들의 신앙만을 다루기로 한다.


(1) 알라


이슬람의 가장 기본은 신앙고백이다. “알라 외에는 다른 신이 없으며 무함마드는 그의 (마지막) 선지자이다(la ilaha illa allah, muhammad rasul allah)”라는 그들의 신앙을 모든 무슬림들은 거의 모든 삶의 상황 속에서 반복하여 고백한다.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무슬림들이 교육받는(enculturation) 내용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바로 이 알라의 유일성(tauHid)과 무함마드의 마지막 선지자됨(risalah)이다.


알라는 전지전능한 신이며 만물의 창조주로서 그 어떤 존재도 알라에게 비견할 수 없다. 무슬림들의 신관(view of God)은 매우 엄격한 유일신관이다. 알라는 숫자적으로도 한 하나님이다. 고로 삼위일체의 교리는 이슬람의 신관에 위배된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슬람의 신관은 인간의 매우 합리적인 사고에 근거하고 있다. 무슬림들은 알라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신의 유일성을 인간의 합리적인 사고의 틀에 가장 잘 맞게 설명하고 있다. 즉 알라는 숫자적으로 단일신이라는 신 개념 이상을 생각하지 못한다. 성경의 오묘한 삼위 하나님의 개념은 이슬람에서는 가장 큰 신성모독의 죄(shirk)가 된다.


또 알라는 인간이 이해할 수도 없으며 알 수도 없다. 단지 꾸란을 통하여 그의 뜻이 계시될 뿐이다. 그러므로 알라를 인격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신이 아들이 있으며 자신을 인격적으로 계시하기 위하여 그 아들을 인간으로 보냈다고 하는 기독교의 신 이해는 무슬림들에게는 오직 신성모독일 뿐이다. 꾸란 112번째 수라(章)는 이슬람의 신관을 잘 요약하여 준다.


1절: 알라는 오직 유일하고 하나뿐인 신이시다. 2절: 알라는 영원하시며 절대자이시다.
3절: 그는 자녀를 낳지도 않으시며 자녀로 태어나지도 않으신다.
4절: 그와 같은 이가 없다.


이슬람이 무함마드에 의하여 아라비아 반도에서 처음 형성될 때에 이 유일신 사상(tauHid)은 가장 중요한 무함마드의 메시지였고 오늘날도 이 사상은 이슬람의 모든 문화의 기저에서 가장 중요한 세계관으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슬람의 메시지의 근본은 바로 이 알라의 유일성과 절대성의 선포에 있는 것이다. 무함마드의 초기 메시지 역시 우상을 타파하고 유일하신 신 앞으로 사람들이 돌아올 것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무함마드의 메시지는 새로운 종교의 창시를 위한 것이었다기보다는 당시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한 아랍 사회가 그들의 육적 조상인 아브라함의 종교로 돌아가자고 하는 종교 개혁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따라서 “알라에게 순복”이라는 의미에서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이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무슬림들의 종교와 세계관은 거의 일치하는 것 같이 보인다. 편의상 우리는 이슬람의 세계관은 무슬림들의 종교, 즉 이슬람의 기저에 있는 믿음의 내용들이라고 구별하면 될 것이다.)


(2) 알라의 절대 주권과 작정(qadr)


무슬림들의 문화는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바로 이 신관에 기초한다. 그러므로, 이슬람이 전래되기 전의 토속적인 세계관의 다름으로 인한 차이들이 각 이슬람 사회마다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슬람권 내의 사회들이 대체적으로 비슷한 사상을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 신관에 대한 투철한 그들의 충성 혹은 헌신(allegiance) 때문이다. 따라서 이슬람의 신관은 자연히 그 사회의 정신 세계(혹은 문화의 정신적 측면)에 영향을 주었고, 역으로 이슬람권 사회의 보편적 성격을 알기 위하여서는 이슬람의 신관을 먼저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무슬림들이 어려서부터 배우고 이해하게 되는 알라의 속성은 어떠한가 알아보자. 꾸란과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쓰의 전통에 의할 때에 알라는 엄격하고 장차 모든 죄를 다 심판할 신이시다. 비록 알라의 이름이 꾸란에는 항상 자비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이(ar-rahmani, ar-rahim)로 등장하지만 이슬람의 신관은 알라의 엄중함과 그의 두려움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는 절대주관자이다. 중세기 수피 신학의 초석을 놓은 가잘리(al-Ghazzali)에 의하면 알라에게는 사랑이라고 하는 개념이 필요 없다. 사랑은 사람이 필요를 느낄 때에 생기는 감정 중 하나이다. 그러나 알라는 어떠한 필요를 느낄 필요가 없는 완전한 신이시다. 그러므로 신을 사랑이라고 묘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다. 실제로 알라를 자비하신 분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름뿐이지 알라가 자비하신지에 대하여 무슬림들조차도 확신하지 못한다. 자비의 개념은 알라가 용서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근거한 것이지, 기독교에서처럼 이미 자기 아들을 희생시켜 용서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알라의 용서와 자비는 조건적이지 무조건적인 용서가 아니다.


오히려 이슬람에서 강조하는 신의 속성은 그의 절대적인 주권이다. 어느 정도 주권적인가 하면, 그는 모든 선과 악을 다 작정하였다. 가잘리와 같은 학자들의 신 개념에 의하면, 알라는 자기가 원하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또 어떤 사람들로는 죄를 짓도록 하는 것이다. (꾸란 5:20, 7:178-179, 14:4, 11:118-119, 32:13 참조) 결국 죄도 알라의 피조물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알라의 작정에 반론을 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절대 주권자이며 인간은 오직 순종을 요하는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비록 수라 50:16에 의하면 알라는 인간의 대정맥보다도 더 가까이 계신 신으로 묘사되지만, 이 구절은 알라가 창조자로서 그만큼 인간의 모든 깊은 곳을 다 안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 구절이 알라가 인간에게 친밀하다는 것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이러한 이슬람의 신 개념은 인격적인 계시이기보다는 어떤 힘(Power)의 계시인 듯하다. 그는 자비한 신이라기보다는 자비할 수도 있는 전능의 신이다. 꾸란에 나타난 알라의 계시는 결국 그의 힘의 계시이다. 인간의 고뇌 속에서 만나지는 그러한 신이 아니라 인간의 죄를 드러내고 인간의 불순종을 심판하며 거역하는 자들에게 승리자로 다가오는 그러한 능력의 계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슬람에서 중요한 이슈는 어떻게 하면 이러한 전능자에게 순복할 것인가 하는 내용이 된다. 그 결과 정통 이슬람에서는 율법학이 발달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이슬람의 역사를 보면 이슬람이 추구하는 것은 승리이다. 알라는 근본적으로 승리의 신이시다. 그에게 실패나 패배는 있을 수가 없다. 설사 하나님의 아들이 있어서 인간 세상에 왔었다고 하더라도, 죄인들에게 어이없이 당하고 십자가에서 치욕적으로 죽었다는 것은 이슬람의 세계관에서는 용납되기 어려운 내용이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기본적인 가치관은 승리이다. 그리고 이 승리는 매우 현실적이고 인간적이다. 따라서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승리이며 영적인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의 말은 매우 교묘하고 기만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합리적이고도 현실적인 이슬람은 기실 그 처음 발흥 때부터 매우 현세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이러한 현실성은 이슬람이 지금까지 실제로 역사 속에서 정치와 분리될 수 없는 특징으로 항상 나타났던 것이다.


이러한 이슬람의 기본 세계관이 절대 주권자의 개념, 힘, 불가지론적인 신관이라는 아이러니 등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이슬람의 사회 역시 이러한 개념들이 사회의 구조 속에 곳곳에 나타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날 많은 이슬람 국가들이 왕국의 전통을 고수하거나 독재를 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신관에 어려서부터 익숙해져 있는 무슬림들의 심리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제 무함마드에 대한 무슬림들의 이해와 사랑과 존경을 알아보도록 하자. 무함마드 선지자에 대한 그들의 충성은 오늘날까지 이슬람 사회의 세계관의 중요한 중추 역할을 해 왔다. 다음 호에 계속하여 이 부분을 다루도록 한다.


[김철수]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의 기초 (3)

세계관과 인간이해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의 기초 (3)


1. 문화와 세계관
2. 세계관이란?
3. “문화화(enculturation)” 과정과 세계관의 형성


4. 세계관의 역학적 기능


이번 호에서는 이제 “문화화” 과정을 통하여 형성된 세계관이 구체적으로 사람들의 사고 속에서 어떻게 역학적으로 기능을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용어들과 개념들이 중요한 것은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분석하는 데에 필요한 도구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기본적인 용어들을 독자들이 잘 익혀 두었으면 한다.


세계관은 문화의 심층 구조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다분히 무의식적인 정신 세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철학적이나 역사학적 세계관과 달리,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세계관은 어느 사회든지 나름대로 공유하고 있는 “집단 지식”이라 말할 수 있다. 이미 앞에서 말한 대로 이러한 지식들은 구태여 증명할 필요 없이 당연히 믿고 있는 지식들이며, 모든 종류의 사회적 삶은 이러한 지식이 전제된 상태에서 영위되는 것이다. 곧, 지난 호에서 언급한 바 있는 세 가지 주요 내용들, 즉 믿음/전제(前提)들(beliefs/assumptions), 가치들(values), 그리고 충성/헌신(allegiance /commitment) 등이 세계관의 내용이 된다. 이 구분은 Fuller 대학의 Kraft 교수의 것인데 이러한 세 가지의 구분은 인간 “지, 정, 의”의 인격 부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전제들이 주로 문화적인 지식 부분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가치들의 부분은 사람의 감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충성 내지 헌신은 인간의 의지를 필요로 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 가지 세계관의 요소들은 따로 독립적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인간의 한 인격 속에서 서로 섞여서 동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 이것을 좀 더 설명해 보자.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배운 대로, 즉 “문화화”된 대로 믿는데, 이러한 믿음들을 우리는 “전제(assumption)”라고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전제들을 기초로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전제들에는 이성적인 앎과 감성적인 느낌이 함께 포함된다. 문화화 과정을 통하여 사람들이 얻게 되는 지식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뿐만 아니라 어떻게 느낄 것인가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어떤 것이 바람직하고 어떤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가를 배우게 되는데, 이때 바람직한 것들에 대하여서는 좋은 감정을 갖게 되고 바람직하지 않은 것들에 대하여서는 좋지 않은 감정들을 갖게 되는 것까지도 배움, 즉 문화화의 결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물들 혹은 사건들에 대한 이해는 그 인식의 대상에 대한 감정을 동시에 수반하게 된다. 이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그들의 가치 기준에 근거하여 그 나름대로 선과 악을 분류하고 대부분 선이라고 믿는 바들을 추구한다. 이렇게 자신들이 믿는 중요한 가치들 혹은 선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살고자 하는 “의지”를 동원하게 되어 있는데, 이러한 인간의 사고 역시 세계관 전제의 한 부분이다. 이것을 Kraft 교수는 “충성” 혹은 “헌신”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즉, 충성의 대상이 무엇인지 역시 문화화 과정을 통하여 배우게 되며, 그 대상들을 사람들은 은연 중에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식과 감정과 의지가 인간의 내면 속에서 함께 가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동안 우리는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분리하여 생각해 온 경향이 크다. 특별히 지성과 감성은 서로 대립되는 것처럼 여겨졌는데, 이러한 경향은 지난 약 이 백년 동안 서구 사회에 편만하였던 서구의 세계관의 영향에 기인한다. 18세기 말부터 시작하여 19세기에 한창 꽃을 피우고 20세기의 서구 정신의 기초가 되었던 실증주의 내지 과학 지상주의는 인간의 이성을 지나치게 우상화시켜 버렸다. 심지어 기독교인들조차도 인간의 이성을 절대화시키는 듯한 경향을 보였는데,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감성과 직관의 부분들을 소홀히 하고 인간의 이성을 현실 검증의 유일한 도구처럼 여기게 되었다. 그 결과 서구, 특별히 유럽의 여러 교회 전통들은 성경을 인간의 이성이라는 권위 아래로 전락시키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19-20세기 서구인들의 생각을 지배하였던 “이성주의”의 세계관은 사람들로 하여금 은근히 감정을 무시하거나 감성을 외면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감정의 영역은 무시하거나 외면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감정은 지식의 동반자라고 나는 주장한다. 이성으로 판단한 지식 곁에는 그 지식에 대한 느낌이, 자신이 알든지 모르든지 간에 함께 있는 것을 우리는 눈치채야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갑돌이라는 사람이 어떤 개를 바라보면서 이 짐승이 개라는 사실만을 알거나 그 개에 대한 실존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갑돌이는 개를 바라보면서 어떤 애정을 갖게 되는데, 그 특정한 개를 기억함과 동시에 그 개에 대한 감정도 갖게 되고, 그 개에 대한 객체 인식과 함께 감정도 기억하게 된다. 반면, 무슬림들이나 아프리카의 유목인들에게 개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어 보라. 그들에게 개란 동물은 그리 애정을 줄 만한 존재가 아니다. 개는 매우 천한 존재이다. 그래서 이방인이나 다른 사람들을 욕할 때에 그들은 개를 들먹인다. 이것은 개에 대한 그들의 이해가 다른 것을 보여 준다. 똑같은 대상이지만 갑돌이라는 사람의 문화권과 무슬림들의 문화권의 해석이 전혀 다른 것이다. 이러한 사물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다름으로 해서 그 사물에 대한 감정도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사회의 세계관을 이야기할 때에 그 사회 구성원들이 주변 환경(자연 환경, 사회적 환경, 영적 환경)들에 대하여 어떤 감정을 갖는가하는 것을 조사하는 것 역시 그 사회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이러한 감정은 문화화 과정을 통하여 후세에게 전수된다. 즉, 어떻게 감정을 가져야 하는가 까지도 배우게 되며, 이것은 습관이 되어 자신의 감정의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면, 각 문화권의 유머를 말할 수 있다. 아무리 미국에서 오래 살고 영어를 잘 하는 한국인이라 하더라도, 미국의 백인들과 같이 어려서부터 성장하지 (즉 문화화되지) 않았다면, 미국 백인들이 박장대소하는 그들의 유머의 감정을 느낄 수 없다. 무슨 뜻인지 알기는 알지만, 느낌은 전달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관이라고 하는 것은 한 공동체가 – 이 공동체는 거의 항상 혈연 공동체가 기본인데 – 공유하는 지식들과 느낌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회에서 좋다고 믿어지는 것들,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것들에 대해서 사람들이 헌신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획득하였을 때에 사람들은 기뻐한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지식들과 가치들, 그리고 헌신의 대상들을 늘 전제하며 살아 가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전제들의 내용에 도전이 오게 되면, 사람들은 혼돈에 빠지거나 화를 내게 된다. 만일 외부인이 들어와서 그 동안 전통적으로 믿어온 전제들과 가치들과 충성의 대상들이 틀렸다고 한다면, 그 외부인은 그 지역에서 추방 당하거나 형벌을 받을 지도 모른다. 다른 이들의 세계관을 무시하거나 도전하는 것은 결국 그들의 “감정”을 건드리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타문화권에 들어갔을 때에 외부인들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문화권의 사람들의 세계관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의 문화관 중심으로 행하고 말함으로써,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좀더 다른 차원이므로 “세계관의 변화”를 다룰 때에 자세히 언급하려 한다.)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이슬람 급진주의자들과 서구 세계와의 충돌은 전혀 다른 세계관들의 충돌이며 이것은 굉장히 복잡한 인간 관계의 충돌로 나타나고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상대방의 세계관을 이해하거나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 없이 상대방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서로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선한 입장을 주입시키려는 행위는 평화를 가져오기가 매우 어렵다. 오늘날 일어나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과 테러리스트들(사실은 이슬람 급진주의자들)과의 싸움은 그 동안 누적된 세계관의 충돌이다. 이에 대하여 다음 호에서 좀더 다루어 보고자 한다. 다음 호에서는 이슬람의 세계관과 서구의 세계관이 얼마나 다른지, 그리고 이들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입장을 갖는 것이 바람직한 지에 대하여, 이번 호에서 언급한 내용들을 기초로 하여 살펴 보고자 한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