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의 코스탄] 신년의 벽두에서…

이코스타 2004년 1월

주님의 제자들, 어떻게 살 것인가?


 


저물어가는 한 해를 마감하면서 우리는 지난 한 해 동안에 있었던 크고 작은 일들을 주님의 뜻과 말씀의 빛에 비추어 돌아보며 반성하였다. 이제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각기 다양한 형태로 스스로에게 던지기 시작하고 있다. 주님의 제자로서 올 한 해도 주님께 기쁨이 되어드리는 삶을 살아가리라 생각하는 동안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주님께로 향하여 가고 있음을 느낀다.


“주님, 제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우리를 ‘주를 사랑하는 자’ 부르시는 주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마태복음 22:34-40; 마가복음 12:28-34)”는 말씀으로 모든 율법을 요약하여 주셨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 ‘사랑’ 있으신 것은, 하나님이 ‘사랑’ 그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충성되고 성숙되었으며 칭찬받을 만한 면이 많은 교회였던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도, 이 한 가지, ‘사랑’ 대해서만은 질책하셨다. “네 처음 사랑이 어디 있느냐?” 주님의 제자로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 ‘주님을 사랑하는’ 일이었기에,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다시 찾아와 그를 회복시키실 때에도 주님은 이 한 질문으로 세 번을 반복하여 물으셨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를 사랑한다는 것은 구체적인 삶 가운데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베드로는 분명 주를 사랑하는 자였다. 주를 부인하는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보면서 너무도 겸손해진 그였기에 감히 주를 사랑한다고 자신있게 고하지도 못하였지만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는 말과 더불어 주님은 그의 겸손하고 간절한 ‘사랑의 고백’을 받으셨다. 이에 주님께서는, “(그래, 네가 이토록 나를 사랑하니…)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신다. ‘내 어린 양’이란 물론 아직 믿음이 견고하지 못한 주님의 백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하시는 분부는, 우리에게 친근한 표현으로 하면 “영혼들을 돌보아(care) 주거라” 하시는 말씀과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을 장식하고 있는 이 갈릴리 호수에서의 주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전의 그분의 메세지와 완전하게 같은 의미가 된다. 여기서 주님은, 주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자’의 마땅히 하여야할 바가 무엇인지를 간결하고 더 분명한 메세지로 우리에게 다시금 확인시켜주고 있다. 그렇다면, 올 한 해 주님의 제자로서 온전히 살아드리기 원하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주님을 사랑할 것’과 그 구체적인 실천으로서의 ‘영혼 사랑’을 분부하고 계시지 않을까?


내 사랑하는 제자야, 너에게 다른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오직 이 한 가지만을 묻겠다. “진실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나는 이점을 가장 중히 여긴단다. 그래, 네 마음처럼 네가 나를 그토록 사랑한다면, 내 양들을, 그 영혼들을 돌보아줄 수 있겠니? 그들을 말씀으로 먹이고 사랑으로 돌보며 권면하고 양육하여 내가 너를 세운 것과 같이 그들을 세워주거라


우리를 예배자로 부르시는 주님


우리보다 앞서 살다 간 신앙의 대선배들이 만일 오늘 우리 앞에 다시 서게 된다면 어떤 삶을 살라고 독려할까? 모세의 경우에, 이스라엘을 향한 마지막 설교에서 그가 남기고 간 메세지는, 요약하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명기 6:5)”는 것이었다. 나의 모든 것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이러한 삶을 다른 말로 하면, 순간 주님의 주인되심 아래에서 겸손히 그분과 동행하는 ‘예배자의 삶’이라고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예배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교회의 정규 예배들에 참여하는 것 이외에 더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시는 가운데 올바른 예배란 무엇인지에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이 산에서 드리는 것도 아니고 저 예루살렘에서 드리는 것도 아니라, (어느 곳에 있든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의 말대로 이 산에서 예배하여야 합니까, 아니면 유대인들의 말처럼 예루살렘의 성전에 가서 예배하여야 합니까?” 하고 묻는 사마리아 여인의 질문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었다. 열왕기상 12:25-33 보면, 북왕국 이스라엘을 세운 여로보암은, 백성들이 신앙적 전통을 따라서 남왕국의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예배할 경우 아직 견고하지 못한 그의 정치적인 입지가 위협을 받게될까봐 두려워서 각처에 산당을 짓고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두어 예루살렘에 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처럼 신앙적 동기가 아닌 정치적 동기로 말미암아 등장한 산당들의 존재는 두고두고 북왕국의 영적 타락의 한 상징으로 여겨졌다. 사마리아는 북왕국의 수도였던 만큼 이와 같이 산에서 예배하는 전통은 오래동안 뿌리깊은 관습이 되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명백하게 보이는 문제점들과 관련하여 질문을 받으셨을 때 조차도 예수님께서는 예배의 장소나 외적 요건에 관하여 대답하시기 보다는 오히려 예배자의 중심에 관한 면으로 생각의 촛점을 옮겨주고 계신다.


사마리아 여인의 질문을 현대적인 표현으로 바꾸어 보자면, “캠퍼스에서 예배하여야 합니까, 아니면 교회에서 예배하여야 합니까?” 같은 질문들로 그 예를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오늘 이와 같이 주님께 여쭙는다면 여기에 대하여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실까? 사마리아에서의 그때나 마찬가지로 “어디에서?” 관한 말씀보다는 “어떤 자세로?” 대한 답변을 주지 않으실까? 우리를 향한 주님의 관심은 언제나 신앙의 외면적인 요소들보다는 마음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에 두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배자로서의 우리의 삶의 첫 걸음은, 주님의 뜻이라면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따를 수 있는지, 그리고 주님의 말씀과 뜻을 이루는 일이 내 육신을 이롭게 하는 일보다 중요시되고 있는지에 대하여 매 순간 성령님 안에서 진실하게 자문하는 마음가짐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나의 삶 가운데서는 주님이 온전히 주인되시고 있는가? 나에게는 일 주일에 7일, 하루 24 시간이 주님께 현재진행형으로 드려지고 있는 예배라는 확신이 있는가? 예배에 관한 주님의 말씀의 마지막 대목을 음미해 보자.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우리를 거룩한 공동체로 부르시는 주님 


주님의 으뜸가는 제자였던 베드로는 그의 서신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은 권면을 남겼다.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베드로후서 3:11-12) 신약 시대의 명의 영적 거목이었던 바울은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보낸 그의 마지막 서신의 무렵에서 이렇게 당부하고 있다.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디모데후서 2:22) , 영적 거목들은 그들의 마지막 교훈들을 통하여, 우리가 순결한 주님의 사람들과 더불어 주님의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거룩과 성령의 열매를 이루어갈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거룩한 공동체’ 향한 바울과 베드로의 마지막 권면들은, 주님이 마지막으로 드리셨던 대제사장적 기도의 내용과 닮은 점이 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주님은, 먼저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셨고, 그분의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으며, 이어서 그분의 이름 아래 그분의 몸을 이룰 주님의 사람들의 ‘거룩한 공동체’ 위하여 기도하셨기 때문이다. 해를 맞으면서, 동안 지역교회 안에서, 캠퍼스 안에서, 가정에서, 우리의 각양 처한 곳에서 주님이 하셨던 기도들이 우리의 가운데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7:17-22)

[무명의 코스탄] 무명의 선지자: 우리를 직접 만나기 원하시는 주님

이코스타 2003년 12월

열왕기상 13장에 나오는 한 이름없는 유대 선지자의 이야기는 솔로몬의 우상숭배에 대한 심판으로 인하여 통일 이스라엘 왕국이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열된 직후에 있은 일이다. 북왕국의 첫 왕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길을 따르지 않으므로써, 이후의 모든 이스라엘 왕들이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였다고 일컬어지게 되는 악한 행실의 한 전형을 세워놓았다. 북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안에서가 아니라 멀리 유대 땅으로부터 한 선지자를 보내시는데, 여기에는 북이스라엘의 왕과 관리는 물론 제사장과 선지자들도 인정하지 않으시겠다는 엄격한 뜻이 있었다. 당시의 관습에서 누군가와 함께 먹는 일은 연합과 승인을 상징하곤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 유대 선지자에게는 북왕국의 그 누구와도 더불어 먹거나 마시지 말라는 명령이 덧붙여졌다. 그는 여로보암 앞에서는 이러한 주님의 메세지를 온전히 전달하였지만, 돌아오는 길에 북왕국의 다른 한 선지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머물기를 청하였을 때는 그 말을 받아들여 더불어 먹고 마시므로써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게 되어 징계를 받아 길가에서 사자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   


북이스라엘의 선지자는 왜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유대 선지자를 만나기 원하였을까? 한 주석서의 해설처럼, 하나님의 사람과 함께하는 행위를 통해서 북이스라엘의 길도 하나님이 인정하신다는 모양새를 얻고 싶었던 것일까? [Westminster Bible Companion: 열왕기] 아니면, 하나님의 영이 떠난 곳에서 오래동안 지내다 보니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왔다는 소리에 단순히 무리해서라도 만나고 싶었던 것일까? 북왕국 선지자의 동기가 어디에 있었건, 유대 선지자에게 내려진 판정은 불순종이었고 그 결과는 죽음이었다. 이 선지자에게 내려진 처분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다른 나쁜 의도나 불순한 동기가 없었더라도 하나님께 그런 징계를 받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내가 그 유대 선지자였다면, 다른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길래 따른 것 뿐이었는데 하며 황망해하고 억울해하지 않았을까?  


하나님의 사람 유대 선지자는 스스로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음성을 들었던 사람이었다. 여로보암에게 가서 전하여야할 말도 하나님께로부터 들어서 알 수 있았다. 그가 만일, 하나님은 스스로 하신 말씀에 대하여 신실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조금만 더 신뢰하고 기억하였더라면 사태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아마도 최소한 한 번 이상은 주님께 이것이 정말로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입니까? 하고 직접 여쭈어보게 되지 않았을까? 그가 만일 그렇게 질문하고 주를 간절히 찾았더라면 (잠언 8:17), 그에게 친히 말씀하셔서 보내기까지 하신 주님이 그를 만나주시고 그분의 뜻을 다시 확인시켜 주지 않으셨을까? 그렇다면, 노상에서 사자에게 죽는 비극은 혹 발생하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이런 측면에서, 이 이야기는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일에 대한 중요성을 간접적인 방식으로 강조하고 있다. 어쩌면 주님께서는, 꼭 징계의 의미로서만이 아니라 주님과 직접 만나는 삶을 가까이에서 영원히 배우게 하시고자 당신의 사람을 그분 곁으로 급히 불러올리신 것이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주님을 직접 만나는 일. 아마도 이것만큼 우리 믿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일도 달리 없을 것이다. 구원받는 일도, 은혜 안에서 변화되고 성화의 골짜기를 걸어가는 일도 다 여기에 열쇠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큰 선물도,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직접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이었다. [예수께서 운명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마가복음 15:37-38)] 욥 은 온갖 이해되지 않는 고난을 겪으면서 하나님께 대하여 수많은 질문을 품었지만, 하나님을 만나뵌 그 자체로 그의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다. 하나님께서는 한 마디도 그의 질문들에 대하여 직접적인 답을 주지 않으셨는데도 말이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라는 측면에서 뛰어났던 우리의 신앙적 선배들은, 우리의 신앙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우리가 일단 주님을 만나고 나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변화와 영적 성장은 주님께서 친히 인도하시는 가운데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 마틴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 모든 성도들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는 일은 그들의 개혁을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사상이었고 이유였다. 그들은 면죄부나 공로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주님 앞에 직접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하였으며,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교회 찬양음악을 정리, 보급함으로써 일반 성도들이 말씀과 찬양 가운데 스스로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왔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제의 한 이름없는 유대 선지자의 이야기가 뜻밖에 전해주는 교훈의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주님의 백성이 그분 앞에 직접 나와서 진리의 말씀을 듣고 아버지와 교제하며 주인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사는 일의 중요성은 어제와 오늘에 차이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 주님을 만나야 한다. 그래야만 여로보암에게 전달할 메세지를 받아서 전한 후에도 북왕국 선지자의 거짓말에 속지 않을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을 고려할 때, 북왕국 선지자의 교훈을 떠올리는 일도 중요하기는 매한가지이다. 내 스스로 북이스라엘의 선지자와 같이 되지 않으려면, 혹시라도 다른 영혼들에게 잘못된 주님의 뜻을 전달하여 실족하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살펴야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다른 영혼들이 각자 스스로 주님 앞에 나아가 그분을 만나고 개인적으로 교제할 수 있도록 인내 가운데 구체적으로 도와주고 권면할 수 있다면 더욱 귀한 일이 될 것이다. 그들 모두가 결국에는 다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려야할 하나님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주님을 뵙기 원합니다. 오늘도 만나 주소서. 그리고, 내 주변의 다른 영혼들도 주님 앞에 스스로 나아가 주를 뵙는 이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4. 아말렉 족속: 천 년 동안 기다리시고 천 년 동안 이루시는 하나님


많은 사람들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말고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라 명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이해하기 어려운 성경의 사례로 꼽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했던 당사자들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 조상의 자손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진멸의 대상이 되는 후손들을 생각할 때 이를 사랑이신 하나님의 속성과 어떻게 연결하여 이해하여야 하는가 하는 점이 의문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창세기 36장을 보면, 아말렉은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의 아들이라고 나와있다. 아말렉 족속의 조상 아말렉은 원래 야곱의 아들들, 즉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조상들에게 조카 뻘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다. 창세기 이후에 성경에는 아말렉 족속이 크게 세 번 등장하는데, 모두 이스라엘 민족과는 더불어 살아남을 수 없는 원수의 모습으로 나온다. 일가 친척이 원수가 되어버리는 데에는, 모세 영도하의 출애굽 시절에 아말렉 족속이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고 그들의 피곤함을 타서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치므로써 (신명기 25:17-18) 하나님을 대적했던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모세가 손을 내리면 적군이 이겼던 유명한 전투가 바로 아말렉 족속과의 싸움이었는데, 출애굽기 17장과 신명기 25장에는 각각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너는 아말렉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할찌니라 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진노의 음성이 기록되어 있다.  


출애굽 시대를 지나 다시 아말렉의 이름이 이야기의 전면에 등장하는 때는 사울과 다윗의 시대이다. 사울 왕은 선지자 사무엘을 통하여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압도적으로 우세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적을 무찌르지만, 노획한 가축과 재물이 아까와서 진멸하지 않고 아말렉의 왕 아각을 살려두는 등 제한적인 순종을 하다가 하나님이 세우신 자리로부터 버림받는 직접적인 계기를 만든다. 한편, 다윗에게 등장하는 아말렉 족속의 모습은 출애굽 시대에 이스라엘에게 다가왔던 그 조상들의 모습과 더 유사하다. 그들은 사울왕의 위협을 피하여 블레셋의 영토인 시글락에 머물고 있던 다윗의 진지를 습격하여 그와 그의 부하들의 가족과 재산을 약탈하여 간 것이다. 결국, 다윗과 그의 용사들은 주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그들을 무찌르고 잃어버린 가족과 재산을 다시 찾아오는데,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것은, 사울왕이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미해결 상태로 남아있던 남아있던 아말렉과의 싸움을 다윗이 본의로 (사무엘상 27장), 그리고 본의 아닌 사건을 통하여 (사무엘상 30장) 계승하여 수행하고 있는 점이다. 다윗은 아마도 하나님께서 아말렉 족속에게 두고 계신 진노의 말씀과 뜻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말렉 민족이 성경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장면은 에스더서에 나오는 페르시아 통치 시대를 무대로 하고 있다. 사울왕과 싸웠던 아각 왕의 후예라는 뜻의 아각 족속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한번 등장하는 아말렉 족속은 여기서 이스라엘을 진멸하고자 일을 꾸미는 자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아각 족속인 대신 하만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진멸하도록 왕의 조서를 꾸몄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구를 들이신 하나님께서는 모르드개의 영적 분별력과 에스더의 헌신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구하고 오히려 아각 족속을 진멸하시어 출애굽기 17장과 신명기 25장에서 하셨던 말씀을 이루신다. 인터넷 성경이나 성경 CD-ROM으로 검색해 보면, 이 이후로 다시는 아말렉 족속의 이야기가 성경에 등장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모세가 출애굽하던 시기는 기원전 약 1500 년 전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사울 및 다윗 왕의 통치는 대략 기원전 1000 년 전, 그리고 페르시아 통치 아래에 있던 에스더의 시대는 그로부터 약 500 년이 흐른 뒤의 이야기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하겠다고 말씀하신지 천 년 후에야 그 말씀하신 바를 이루신 것이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 중요한 하나님의 속성을 유추하여 이해할 수 있다. 


첫째, 비록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고 그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하겠다 하셨지만 실제로 그 말씀을 이루기까지는 천 년이라는 세월을 돌아온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기다리셨던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을 들 수 있다. 창세기 15:16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들이 이집트에서 사백 년간 종살이를 한 후에야 가나안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귀뜸해 주고 계신데, 그 이유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사울-다윗의 왕국이 성립한 때로부터 북이스라엘과 남유대 왕국이 멸망한 때까지의 시간도 역시 마찬가지로 약 오백 년 정도였음을 고려하면, 죄악 앞에서는 자기 백성(원가지)도 아끼지 않으셨던 (로마서 11:21)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아모리 족속이나 아말렉 족속에 대해서도 비슷한 기간 동안 기다려 주셨음을 알 수 있다. 아직 죄악이 다 차지 않았다는 말씀은 그들이 아직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의미하기도 한다. 아말렉 족속의 경우에는, 약 오백 년이 지나고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이르렀음에도 사울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오히려 그만큼의 시간이 더 연장된 경우라고 볼 수도 있지만 말이다. 만일 그들이 돌아왔다면 하나님은 용서하셨을까? 악의 화신처럼 기억되고 있는 아합이나 므낫세 왕같은 사람들조차도 그들이 겸손하게 회개했을 때 자비를 베풀기를 기뻐하셨던 하나님이셨음을 기억하면, 그가 얼마나 악인이었든 돌아오기만 하면 주님은 다시금 용서와 자비를 베푸셨을 것임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확신할 수 있다.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아직 하나님의 원수로 남아있었을 것임을 생각할 때 (골로새서 1:21), 아말렉을 기다리신 주님의 마음은 바로 지금 나를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의 마음과 다름아닌 것이다. 우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고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불러서 (이사야 55:6)” 우리를 기다리시는 분께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기 (디모데전서 2:4) 때문이다.  


둘째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가 공의로 말씀하신 일에 대해서는 천 년이 걸리더라도 말씀하신 대로 신실하게 이루고야 마는 분이시라는 점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불의가 선의를 이기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면서 근심하고 낙담하게 되기도 하는데, 그러한 때에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우리가 수고하며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나서 그 일의 결국과 열매를 보지 못하는 경우에도 신실하신 주님은 그분의 때에 그분의 방법으로 다른 사람을 일으키셔서 일을 성취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반드시 일을 지어 성취하실 것이라고 신뢰하는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섬김의 현장에서 지쳐 쓰러지지 않도록 우리를 붙잡아준다. 아말렉과 싸우는 일을 모세 때에 여호수아가 시작하여 다윗이 계승하고 그것을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완수하였듯이, 내가 지금 주님의 뜻에 따라 행하고 있는 하나하나의 사역들 역시도 지금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들을 너머선 하나님의 경륜과 시간대 안에서 계승되고 성취되어 그분의 신실하심을 증거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인내와 기다리심을 깨닫고 늘 주님께로 돌아오는 자 되게 하여 주소서. 나의 때에 주님의 일 이루어짐을 보지 못할지라도 주의 신실하심을 믿는 믿음이 늘 견고하게 하옵소서.


 


맺음말


주님의 섭리하심과 다스리심이 없는 인생은 하나도 없다. 그런 면에서, 성경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은 각자의 역할들 가운데서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속성과 뜻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위의 몇몇 예에서 보았듯이, 조연들이나 단역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삶의 이야기에 주목할 때 우리가 얻는 교훈은 유명한 주연급 인물들의 경우에 비하여 작지 않은 때가 종종 있다. 이 점은 우리로 하여금 깊은 말씀 묵상에 대한 풍성함으로 우리를 안내하며 우리에게 성경을 보게 하는 새로운 동기부여를 선사한다. (주관적이거나 감상적인 해석에 관한 우려는, 성경의 다른 부분에 있는 말씀들과의 상호 균형 및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맡기고 여기서는 염려치 않기로 한다.)


이렇게 깨달은 이야기들은 다음과 같은 유익들을 우리에게 선물로 줄 것이다. 첫째로, 깨달은 성경 말씀을 더욱 큰 기쁨과 열정으로 증거하도록 도울 것이며, 둘째로, 우리 주변에 이름도 빛도 없이 묻혀있는 사람들의 삶의 의미를 발굴하는 시야를 키워줄 것이며, 셋째로, 나 자신 주님 뜻 안에서 이름도 빛도 없이 이 시대의 조역과 단역을 맡는 일을 더 의미있게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과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히브리서 12:1-2)

[무명의 코스탄] 성경에 나오는 조연과 엑스트라들 (I)

이코스타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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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에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이야기 가운데서 우리는, 어떤 사람들에게 주어진 특수한 환경과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부르심을 접하게 되며, 거기에 대하여 그들이 어떻게 반응하였고 그것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구체적으로 보게 된다. 이야기에 나오는 한 시대와 인물의 특수한 상황 안에 나 자신을 투영해 보는 일은 결코 놓칠 수 없는 묵상 포인트의 하나이기도 한데, 그것은 이러한 과정들 가운데서 성경은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도 동일한 생명력을 지닌 입체적인 말씀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 야기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므로 우리는 어느 특정 인물의 입장에 선택적으로 서보게 된다. 이야기의 흐름이나 주제와 가장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사람이 주인공이니 만큼 아무래도 그들의 입장에 서는 경우가 많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러다가 시각의 폭을 넓혀서 조연들이나 단역들의 입장이 되어보기도 하는데, 이때에는 상대적으로 그 의미나 교훈을 건져내기가 쉽지 않거나, 아니면 반대로, 뜻밖의 깨달음을 선물처럼 얻게 되기도 한다.


성 경에 나오는 조연과 단역들에 대하여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 시작한 것은 열왕기 시대의 이야기들을 묵상하면서 부터였다. 왕 한 사람이 정직한지 악한지에 따라 그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삶이 좌우되는 것을 보면서, 그렇다면 일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의미는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궁금함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성경에는 이와 같은 “이름도 빛도 없는” 이들이 많이 나오지만, 대개 본문은 그들의 생각과 판단에 대하여 많은 언급을 하고 있지 않으므로 이러한 인생들의 구체적인 모습이나 의미를 헤아리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관찰과 묵상이 요구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성경의 다른 곳을 살펴보기도 하고,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일들의 인과관계를 성경적 원리라는 보편성의 빛 아래에서 음미하면서 시공을 초월한 두 시대의 상황들을 오버랩해보기도 한다. 오늘의 삶을 관찰하는 일은 성경의 이야기 안에서 스치듯 지나가는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하도록 도와주고, 그들의 삶을 묵상하는 일은 오늘의 삶을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런 경우에, 이 시대의 한 부분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이야기는 더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 된다.


그 래서, 때때로 묵상 가운데 건져올린 작은 깨달음 하나가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깨닫게 하는 신선한 시각을 주기도 하는데, 이렇게 얻는 깨달음은 그 대상 인물들이 이야기 속에서 스쳐 지나갔던 것처럼 스쳐 보내기에는 아까운 것인 경우도 종종 있다. 성경에 잠시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서 개인적으로 특별한 묵상의 의미를 주었던 이름들에는 아벨, 에서, 이름 모를 선지자들, 그리고 아말렉 족속도 포함되어 있었다.


1. 아벨: 이 생을 넘어선 영원으로의 시각


아 벨은 하나님 앞에서 제사 한 번 잘 드린 죄 아닌 죄로 인류 첫 살인 희생자가 되었으며, 가해자 가인은 모든 범죄자의 조상이 되었다. 가인은 결국 자기 죄에 상응하는 징계를 받았고, 또한 하나님의 긍휼의 손길도 경험하였다. 다만 아벨의 입장에 섰을 때 의문을 감추기 어려웠던 것은, 가인이 자기 죄에 합당한 형벌을 받았다고 해서 이미 죽임을 당한 그의 억울함이 온전한 위로를 받을 수 있었겠는가 하는 점이었다. 내가 아벨의 입장이었다면 어떠했을까? 나는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흠 없는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마땅히 받았어야 할 기본적인 보호조차 받지 못한 채 끔찍한 일 가운데에 그대로 내버려졌다고 혹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아 벨에 관하여 그의 입장에서 곰곰히 생각해보면, 비록 죽임을 당하는 그 순간에는 몹시 억울하고 고통스러웠겠지만, 사실 그는 그 모든 일들 가운데서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믿게 된다. 아벨이 자기에게 닥친 일로 인하여 기뻐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아벨이 죽었을 때는 인류 최초의 인간이었던 그 아버지 아담조차 아직 생존해 있었다. 따라서, 아벨이 천국에 들어갔을 때, 그곳은 아직 텅 비어서 하나님과 천사들 이외에 사람의 영혼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천국 역사상(?) 처음으로 입성한 유일한 인간이었으며, 오히려 천국의 ‘설립자 스탭 (founding staff)’의 일원으로서 늘 주님 가장 가까이에서 동행하고 동역하면서 이후에 올 모든 영혼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먼저 된 자로서 섬김어린 주인의식을 가지고 다른 영혼들의 처소를 주님과 함께 마련하고 있었을 그의 마음은 지극한 영광스러움과 보람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더구나, 계시록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 순교자들이 먼저 살아나서 주님의 다스리심에 참예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니, 인류 최초의 순교자인 아벨은 천국의 맨 처음에 함께했던 사람이자 세상 끝날에 맨 먼저 예수님을 보좌하는 사람이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아벨은 가엽고 안타깝게 생각되어야 할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부러워해야 할 대상이 아닐런지…


우 리는 종종 선인이 고통받고 악인이 형통하며 이 땅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언제나 공평하게 이루어지지만은 않음을 목격한다. 죄에 의하여 왜곡된 세상이 되므로써,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반하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세상의 참 주인이심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이 일들 또한 하나님께서 그리 되도록 허락하신 것이 아닐 수 없음을 기억하게 된다. 이 생각은 더 큰 깨달음으로 우리를 인도하는데, 즉 조금의 불완전함이나 부당함도 용납하실 수 없는 주님께서 이 모든 일을 허락하셨다면 그것은 이 땅에서의 일이 결코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무언으로 역설하시는 그분의 메세지일 수 있는 것이다. 이 땅에서 그 어떤 것으로도 위로받을 수 없었을 아벨이 천국에서 얻는 더 큰 행복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일과 결과에만 집착하곤 하는 우리의 시선이 얼마나 현세적인 것이었는지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다스림의 영역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이 땅으로부터 영원으로까지 확장될 때, 이 세상의 일들 가운데서 우리가 가지게 되는 수 많은 의문들 역시도 비로소 많은 부분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아벨은 그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영원의 삶이라는 시각을 일깨워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생을 넘어선 저 생의 소망을 가지고 경주하도록 큰 위로와 격려를 주고 있는 것이다.


“주님, 나로 하여금 땅만 보고 사는 자 되지 않게 하사, 눈을 들어 하늘을 보게 하여주소서…”


2. 에서: 물질을 구하는 자 물질로, 영혼을 구하는 자 영혼으로


야 곱의 꾀에 넘어가서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의 입장에 섰을 때 이해하기 어려웠던 점은 차별에 관한 문제였다. 약삭빠른 야곱은 이십 여년 간이나 인생의 쓴 맛을 경험하였지만 마침내 그 소원대로 영적 장자가 되어 그 자신이 하나님 백성인 이스라엘이 되었다. 그러나, 에서의 경우에는, 겨우 어릴 때의 작은 실수로 여겨질 수도 있었을, 소위 ‘팥죽 사건’에 대하여, 그는 끝까지 회개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였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이에 더하여, 그는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입지 못하였고, 친아버지에게서 조차도 축복을 얻지 못하였다고 성경에는 나와 있다. 그렇다면, 야곱과 비교할 때 에서에게 주어진 이 모든 처사는 과연 공평한 일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지?


에 서는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받지 못했을 때 무척이나 서러워 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영적인 의미에서였는지 현세적인 의미에서였는지는 해당 본문만으로는 판단하기가 다소 불분명하다. 다만 그가 하나님의 주 되심 앞에 인격적으로 나아가길 소원했다는 이야기가 성경의 다른 곳에 더 언급되고 있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그가 진정 원했던 것은 ‘하나님’이었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선물’ 이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그랬다면, 그는 애초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받지 못하게 된 줄로 알고 슬퍼하였지만, 사실은 그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을 다 얻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창세기에 에서의 소유가 풍부하였다고 언급된 것이나, 훗날 야곱과 재회할 때 그가 사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이끌고 나타날 수 있었던 모습으로부터, 우리는 에서가 약 사천 년 전 부족국가 시대 당시에 권세있고 풍족한 왕과 같은 지위에 있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현세적인 부귀와 복을 원했던 에서의 경우에 하나님은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셨고, 그리하여 그는 이 땅에 머무는 동안 오히려 야곱을 능가하는 가진자와 지배자의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너의 형제니라… 그들의 삼대 후 자손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느니라.” (신명기 23:7-8)


성 경을 보면, 하나님은 에서를 미워하실 것이라는 우리의 막연한 생각과는 다른 말씀들이 눈에 띈다. 위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에서의 후손은 형제라는 점을 강조하고 계신다. 모압이나 암몬 족속과는 달리, 그들은 여호와의 총회에도 들어올 수 있었다. 즉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되는 일에 있어서 에서의 후손들은 이스라엘 후손들과 삼대의 차이만이 있었을 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과 지위를 누릴 수 있는 길은 온전히 열려있었던 것이다.


다 만, 영원한 것을 구하지 않았던 에서에게는, 야곱과는 달리 이 세상의 울타리 너머에까지 면면히 이어질만한 삶의 영적인 의미는 없었다.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삶을 살지 않았던 에서였기에 하나님은 삼대의 간격을 두셔야 하셨을 것이다. 오히려 여기에서 우리는, 에서가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근본적인 애정을 버리지 못하여 후손들에게나마 하나님 백성으로 살 수 있는 길을 열어두고 계시는 ‘하나님의 기다리심’을 발견하게 된다. 에서의 삶을 통하여 우리는 인격적이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의 참다운 면모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이에 비추어 곱씹어볼 때,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이 그를 싫어하셨다는 말은, 실상은 그의 미래의 모습을 현재처럼 볼 수 있으셨던 하나님께서 그의 잘못된 중심을 미리 보아 아시고 그 중심을 기쁘게 여기지 않으셨던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 그가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는 말씀도, 결국은 팥죽 사건으로 표면화된 그의 내면의 중심이 그의 평생을 사는 동안 변화되지 않고 지속되고 있었다는 의미와 다름아닌 것이다. 따라서, 어쩌면 에서야말로, 잘못된 인생의 선택과 죄된 삶의 모습들 가운데서 더욱 충만하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는 인생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하 나님의 은혜가 넘쳤기 때문에, 그의 삶에는 더욱 안타까운 그늘이 드리워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가 자신의 소원에 따라서 현세적인 부귀를 누렸지는 모르지만, 그러는 동안 그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눈길을 깨닫지 못했고 결국 그분께로 돌아갈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혹 마음의 문만이라도 열었더라면 언제고 그의 안에 들어와서 그와 더불어 잡수셨을 주님이, 그의 평생이 다가도록 문 밖에서 기다리기만 하시다가 결국 들어오지는 못하셨다면 주님의 마음은 또 어떠하셨을까?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을 구하고 그분을 소원하였을 때 닥쳐오는 고난이 실은 그분의 섭리 안에서 우리를 향한 큰 복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야곱의 인생의 경우와 강렬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에서의 삶이 주는 가장 큰 교훈의 하나는, 내일 일 조차 알지 못하는 나의 소견에 옳은대로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의 삶 가운데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함을 아는 일이다. 우리는 때로, 잘못된 기도제목이었지만 강청하며 기도하였더니 그 소원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일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오히려 영적 위기를 뜻할 수 있음을 우리는 에서의 인생이라는 구체적인 사례를 통하여 배우고 있다. 그리고, 혹 세상에 한눈 팔다가 주님 아닌 다른 것을 붙잡은 경우라 하더라도, 우리를 향한 지극한 은혜와 사랑을 거두지 않으신 채 주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함을 에서의 삶은 우리에게 역설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주님, 어리석은 나의 소원대로 이루지 마시고, 오직 완전하신 주님의 뜻에 따라 나를 이끌어 주소서…”


(다음 호에 계속…)

[무명의 코스탄] 사람이 사람을 버리지 않는 세상을…

이코스타 2003년 10월

1.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하였다. (사사기 21:25)


사 람이 사람으로부터 존 귀히 여겨지지 않고 오히려 버려지는 모습은 어느덧 우리 주변에서 드물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더욱이,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장소는 이미 삶의 전 영역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는 느낌이다. 가정이라고 해서 더 이상 예외가 아니며, 교회라고 예외가 아니다.


통 계청의 발표에 의하면, 2002년 한 해 동안 한국에서 남녀 30만 6573 쌍이 결혼하고 14만 5324 쌍이 이혼 해 결혼대비 이혼 건수는 47%에 달하였다고 한다. 유명인사들의 무분별하고 잦은 만남과 헤어짐 같은 일들을 굳이 거론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보통 남녀 두 쌍이 결혼하는 동안에 한 쌍은 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오늘날의 많은 자녀들은 안정된 가정의 울타리를 잃은 채 정서적으로 불안하고 상처받기 쉬운 환경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사회는 어떠한가? 친구가 근무했던 비교적 잘 알려진 한 회사에서는 호황을 맞아 투자가 늘어나는 가운데 고용 인원을 크게 늘렸다가 불경기를 맞아 다시 인원을 감축했는데, 그 부서의 근로자 수가 처음의 100 명에서 200 명의 단계를 지나 다시 100 명으로 되돌아온 데 걸린 시간은 고작 2 년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사회 안에서 한 개인은 필요에 따라 언제라도 취해지기도 하고 버려지기도 하는 소모품과 거의 다를 바가 없다. 과거에는 가정 다음으로 인격적인 만남의 장이 되어주곤 하였던 학교에서도, 이제는 스승과 제자 및 동료 간의 사이가 치열한 경쟁 가운데 언제든지 이익을 좇아 떠나거나 버릴 수 있는 모습으로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사랑 가운데 주님의 각 지체를 형성하여야 할 교회 공동체에 있어서 조차도, 때로 서로 미워하며 분열하는 모습은 어지러운 세상의 축소판에 다름 아닌 것으로 비추어지기도 한다.


2. 우리는 모두 한 아버지를 모시고 있지 않느냐? 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지 않았느냐?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가 서로 배신하느냐? … (말라기 2:10)


신 실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기 원하는 우리들의 삶은 아마도 이러한 안타까운 모습들과는 무언가 다른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비록 외면적인 모습이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았다손 치더라도 본질적인 측면에 있어서라면 우리라고 과연 얼마나 안심할 수 있을까?


예 를 들어, 혹 미래의 배우자를 놓고 진지하게 기도하며 준비는 하고 있지만, 그 사람의 영혼 자체보다 더 중요한 현실적인 가치를 양보할 수 없는 마음이 또한 내 마음 안에 함께 존재하고 있다면… 만일 외모, 돈, 명예 등의 어떤 현실적인 가치가 그 사람의 존재를 존귀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면, 그 가치가 사라지는 때에는 그 사람 자체의 가치 또한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또, 외형적으로 안정적인 결혼생활의 모양새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더 이상 서로에게 순종하지도 않고 희생하지도 않으면서 사랑 없이 살아가고 있다면… 그 경우에, ‘네가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로다’ 하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질책을 우리의 가정은 피해갈 수 있을까? 교회 공동체 안에서 생활은 하고 있지만, 목회자나 리더가 단지 내 뜻대로 나를 기쁘게 해주지 않고 있다고 해서 마음 속으로 끊임없이 그를 버리고 떠날 기회만을 찾고 있다면… 반대로, 목자로서 주님의 양을 돌보는 일을 하고는 있지만, 그가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만큼 나의 제자가 되지는 않고 있다는 이유로 마음 속으로 그 사람의 존재 의미 자체를 부인해 버리고 있다면… 이런 가운데에서라면, 나 스스로의 영광 받음을 위하여 사역하고 있다는 생각으로부터 어찌 자유로울 수 있을까? 또, 지금 이 순간 누군가와 동역 자로서 함께 일은 하고 있지만, 그 만남 자체에 긷든 주님의 섭리와 그 영혼의 존귀함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기보다는 그가 수고하고 성취한 정도에 따라서 마음 속으로 끊임없이 상대방을 재평가하고 있다면… 나의 유익과 목적을 위하여 다른 사람들을 취하고 버리는 세상 사람들보다 우리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어 떤 사람이 나의 뜻과 달리하는 때에, 나의 감정상 어떤 이를 용납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때에, 또는 어떤 사람과 함께 하는 일이 나의 유익과 목표를 실현하는 일에 상충한다고 느껴질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나의 뜻과 감정과 유익 때문에 이번만은 상황 상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을 버리고 갈 수밖에 없다 는 생각이 우리 마음 안에서 때때로 정당화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이 모든 안타까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근본 원인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이유 있는 사유들이 하나하나 모아져서, 때로 우리 자신들은 희생자가 되기도 하고 가해자가 되기도 하는 가운데 오늘 우리가 보고있는 것과 같은 세상의 거시적인 모습들을 함께 만들어 오고 있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3. “너희 중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요 8:7) /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 5:7)


인 간은 다 죄인이다. 나도 죄인이다. 우리 중 그 누구 하나 예외 없이 우리 모두는 다 죄인이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통하여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구원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다. 그러므로, 누가 사람에게 이르기를 너는 틀렸고, 용납될 수 없으며, 가망이 없다 고 말할 수 있을까? 다윗의 범죄 함과 베드로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와 “교회의 반석”으로 세워주신 주님이시기에, 연약하여 넘어지기 쉽고 어리석어 그르치기 쉬운 나 같은 사람과 객관적인 실패와 실수를 입증 받은 저 사람에 있어서도 우리는 그분 안에서의 한 가능성을 보게 된다. 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지으셨고 우리 모두를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생각할 때, 이러한 회복과 역전의 소망은 나의 것이며 동시에 우리 모두가 공유해야 하는 것임을 믿게 된다.


하 나님의 능력과 사랑 안에서 회복과 역전의 소망을 가지고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은 그들의 아픔을 내 것처럼 이해하고자 하는 긍휼어린 마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이 늘 그렇듯 말처럼 쉬운 일일 수 있었다면, 그 누구도 관계와 인간성의 파국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다른 한편으로는, 놓아서는 안 되는 것을 놓지 않는 과정에서 감당해야만 하는 만만치 않은 고뇌와 눈물을 의미하기도 한다. 결혼 생활에서 파경을 겪은 부부의 대부분은, 많이 인내하였고 관계와 상황을 개선해 보고자 최선을 다하였지만 결국 소용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이혼하게 되었노라고 고백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교회가 분열될 때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대방이 주는 모진 언사와 불합리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힘겨워하는 가운데 갈등하며 기도하고 신음하다가 그 지경에까지 갔겠는가? 따라서, 나에게 주어진 상황적인 한계와 감정상의 한계를 껴안은 가운데 놓치지 말아야할 것들을 놓치지 않고 붙잡는다는 일은, 끝이 안 보이는 듯한 막연한 느낌을 안고 기도하는 가운데 눈물로써 몸부림(struggle)쳐야 함을 의미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하 나님은 야곱을 불러 하나님 백성의 조상으로 삼으시는 언약을 세우시면서 야곱에게 새 이름, 즉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셨다. 그런데, 하나님 스스로가 칭하신 하나님의 백성의 이름이 축복 받은 자도 아니고 권능 있는 자나 거룩한 자도 아닌 씨름하는 자 (이스라엘: 하나님과 더불어 씨름/struggle하는 자) 이었음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되어져야 할 우리의 모습과 현재의 우리의 모습 사이에서 메울 수 없는 간격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몸부림치는 과정을 겪게 되는데, 바로 이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의 정체성으로 여겨주고 있으신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맥 안에서 바라볼 때, 각양각색의 어려움 가운데서 주님의 뜻과 말씀대로 살고자 씨름하는 우리의 삶의 모습들은 어쩌면 불완전한 우리가 진실한 의미에서 주님 앞에 드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삶의 제사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다른 사람을 버릴 수밖에 없을 것만 같은 삶의 위기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순간들 역시 우리에게는, 우리 앞에 예비되어 있는 고뇌와 눈물 가운데에서 영적인 이스라엘로서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우리 스스로의 영적 진보를 이루는 기회이기도 한 셈이다.


4.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한1서 4:11)


때 때로 세상 가운데서 버려지기도 하는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주님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서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신다고 말하곤 하는데, 과연 정말로 그러한가? 만약 이 땅 위의 다른 모든 사람들은 다 구원을 받았는데 나만 홀로 죄 가운데서 구원받지 못하고 있었다면 예수님께서는 그 때에도 마찬가지로 나 하나를 위해서 그 희생과 고난의 길을 스스로 감당하러 오셨을까? 성경에는 이와 관련하여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대답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마 18:12) 그렇다! 주님은 설혹 나 하나만이 구원받지 못하고 남겨졌다 하더라도, 말씀하신 것처럼 다른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뒤로 두신 채 이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으러 오셨을 것이 분명하다. 이 세상을 직접 지으신, 그러므로 지어진 이 세상 그 자체보다 더 귀하신 예수님께서, 단지 내 한 영혼을 건지시고자 자신을 죽음 가운데로 내몰아 가셔야 할 이곳으로 말이다. 이렇듯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의 마음은, 때로 버림받은 모습이 되어 눈물짓고 있는 나를 향하여 말할 수 없는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고 계시는 마음이고, 사람을 버리는 자가 되지 않고자 눈물 가운데 고뇌하고 있는 나에게 오셔서 힘과 용기를 주시는 그 마음이며, 때로는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임에도 다른 이를 더는 사랑하지 못하고 이제 버릴 수밖에 없는 나를 향하여 안타까움으로 눈물 흘리고 계시는 마음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우리의 존재로써만은 충분히 환영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쓸모 있음을 인정받는 일에 사활을 걸어왔다. 너무도 치열하고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는 현실이었기 때문에, 영혼 이전에 유익과 성과를 구하였고, 내가 바라보고 이해하는 방식으로의 일이나 사역에 상대방도 동참하기를 구하였으며, 경제성이나 기여도, 수고함 등의 외면적이고 가시적인 가치에 시선을 두었다. 그리고, 나 또한 세상에서 같은 모양으로 다가오는 냉정한 시선들에 그대로 노출된 채, 무리를 해서라도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를 원하고, 때로는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먼저 다른 사람을 짓밟고 올라서라는 현실의 유혹에 나도 모르게 따라가고 있기도 하였다. 이토록 이 세상의 가치 체계에 익숙해져 버린 우리이기에, 이제는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 앞에서조차도 우리가 하고 있는 일 자체의 의미나 내 입장의 당위성으로 승부하려 하며, 신앙 인으로서의 섬김의 순간들 가운데에서조차도 나를 중심으로 하려들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 러나, 이제는 우리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시선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다시금 되새기는 가운데, 같은 시선으로써 또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기 원한다. 그리고,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듯, 사람이 또한 사람을 버리지 않는 세상을 꿈꾸어본다. 천국은 아마도 이미 그러하리라.


부모가 ‘내 뜻대로 가지 않는다’ 하여 그 자식을 버리지 않는…


자식이 ‘부담이 되고 힘이 든다’ 하여 그 부모를 버리지 않는…


친구가 ‘나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다’ 하여 친구를 버리지 않는…


남녀가 ‘이젠 내 감정이 다하였다’ 하여 서로를 버리지 않는…


동역자가 ‘실수하였다, 잘못하였다’ 하여 동역자를 버리지 않는…


목양자가 ‘나를 높여주지 않는다’ 하여 주님의 양을 버리지 않는…


성도가 ‘인간적인 부족함이 많다’ 하여 목양자를 버리지 않는…


스승이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여 제자를 버리지 않는…


제자가 ‘더 이상 필요치 않다’ 하여 스승을 버리지 않는…


사람이 업적이 적다, 재주가 적다, 가진 것이 적다, 성품이 부족하다 하여 그 사람의 “존재의 가치”를 마음에서 끊어버리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사람 앞에서 “의리”를 목숨처럼 중히 여길 수 있는…


배신의 쓴 기억 때문에 사람을 믿어주기에 인색하기보다는, 주님 안에서의 모든 가능성을 보면서 실망되어도 또 믿어주고 배신해도 또 속아주어 마침내는 하나님 앞에서 정금처럼 “함께” 서는…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일들 가운데서, 내 마음 안에 한 번 모신 주님께의 관계 또한 영원히 끊어지지 않는…


“예수께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1)



[무명의 코스탄] 분주함에 관하여…

이코스타 2003년 9월


얼 마 전 교회 중등부에 있는 12 살 난 아이에게 요즈음 학교 생활이 어떠하냐고 물어 보았더니 한 마디로 짧고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Busy! 또 어떤 잡지에서 보니, 현대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도와 생활 능력이 이전보다 매우 향상되었는데도 평균 건강은 오히려 나빠져 버렸는데, 그 이유인즉 밥 먹을 돈은 있어도 제 때에 제대로 된 밥을 먹을 시간이 없기 때문이란다.


현 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늘 분주하다. 학생은 학생대로, 직장인은 직장인대로, 주부는 주부대로 각자 자기 위치에서 나름대로 다 바쁘다. 그렇다 보니, 중요하면서도 당장 급하지 않았던 일들이 상황에 밀려 희생되는 경향들이 생긴다. 가족과 함께 하는 일, 이웃과 함께 하는 일, 매일 아침 말씀 읽고 주님과 교제하는 일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곰곰이 살펴보니, 이러한 일들은 대개 관계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분주한 삶이 첫 번째로 주는 위기는 바로 우리의 가족 관계, 이웃 관계,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훼손되는 일이다.


이 바쁜 현대인의 삶 가운데에 예수님이 계셨다면 어떻게 하셨을까? 아마도 예수님 역시도 바쁘게 사역하셨을 것이다. 천국 복음을 전하시고, 가난한 자를 위로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제자를 키우시고… 어쩌면 평신도로서 목수 일도 계속 겸직하셔야 했을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예수님이셨다면 사역을 감당하느라 가정 안에서의 관계가 깨어지고 이웃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도록 방치하거나 택하여 가지는 않으셨을 것 같다.


성 경을 보니, 가버나움의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고,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쫓으시고,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전도하시는 등 (막 1:21-39), 예수님도 공생애 기간 동안 실제로 바쁘게 사역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모든 일들이 행하여지고 있는 한 가운데에 새벽 오히려 미명에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셨다고 하는 대목이 평화롭게 자리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분주한 사역의 현장 한 가운데에서 홀로 조용히 기도하시는 주님… 그렇다면, 상황이 바쁘게 돌아가는 중에 계셨더라도 주님 자신은 그리 바빠 하지만은 않으셨을 것이라고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아 마도 주님이 안 계시는 동안에, 아직도 많이 남은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 그리고 말씀을 듣고자 하는 자들이 아침부터 주님을 만나고자 몰려와 아우성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리저리 당황해하며 주님을 찾고 있었을 제자들 앞에 다시 나타나신 예수님은 정작 이 모든 이들을 뒤로 두고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고 말씀하고 계신다. 주님께서는, 선한 일과 옳은 일 자체에 몰두하시기 이전에, 지금 아버지께서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라고 말씀하고 계시는지를 분별하며 순종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즉,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질 수 있을 법한 일을 행하는 것 그 자체보다, 매 순간 아버지께 귀 기울이고 순종하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기셨다고도 볼 수 있다.


오 늘 하루의 일을 손에서 놓고 잠들기 어려워하는 사람은 죽을 때에도 이 땅에서의 일을 놓고 가기 힘들어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동양의 옛 선인들이 말했던 盡人社 待天命 (진인사 대천명), 즉 사람이 할 바를 다하고 나면 결과는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말이야말로 어쩌면 모든 일의 주재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겸손히 품어야 하는 마음가짐이 아닐까? 그러나 살다 보면, 예수님이 그리하셨던 것처럼 할 일을 다한 후에 모든 뒷일을 주님께 맡겨드리고 겸손히 물러나는 일이 늘 그다지 쉬운 것만은 아님을 우리는 종종 경험하게 된다. 우선은, 시급히 결과를 요구하거나 사회경제적 생존을 위협하는 환경적 요인들 탓이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자신의 집착이나 완벽 추구 심리, 조금만 더! 하는 욕심, 그리고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에 이르기까지, 다름 아닌 우리 스스로의 마음에 기인하는 이유들이 다양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오천 명이 먹기 위하여 우리가 가진 전부인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드리는 일과 우리 스스로가 오천 명을 먹이는 일을 혼동하기 때문인 경우도 없지 않은 것 같다. 나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시각을 회복하기 전까지는, 자기중심적인 판단과 동기부여에서 벗어나 주님이 중심 되시고 그분께 온전히 맡겨드린 삶을 살기란 쉽지 않은 일인데, 주님께 온전히 맡겨지지 않는 한은 주어진 삶을 잘 감당하는 것 자체도 어렵지만 그 가운데 평안하기란 더더욱 어렵다.


아 버지께 맡기는 삶과 사역의 표본은 역시 예수님이시다. 헨리 나우웬이 지적한 것처럼, 예수님의 사역이 특별하였던 한 가지 면모는 그분의 최후의 사역인 십자가 구원을 이루시는 과정이 전적으로 수동적이었다는 점에 있었다. 주님은, 사람들이 심문할 때 심문 당하셨고 매를 때릴 때 매 맞으셨으며 십자가에 못박을 때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죽였을 때에 죽으셨다. 그리고는 성부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 올리실 때 부활하셔서 그분이 앉히시는 보좌에 앉으셨다.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사역을 완전하게 이루셨지만, 그 과정 자체는 외면적인 노력이나 분주함과 무관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은 내면적으로 치열한 고뇌 가운데 순종과 헌신으로 완전하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지만, 외면적으로는 아무 일도 안 하셨다.


이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의 수고함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최선을 다하는 것도 귀하고 잠잠히 따라가는 것도 귀하되, 이 모든 일은 나를 향하신 그분의 뜻을 그분 스스로가 이루어가고 계신다는 보다 큰 컨텍스트 안에서만 의미가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에만, 내가 한다고 해서 꼭 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하지 못했다고 해서 꼭 안 되는 것이 아닌 현상들을 우리는 보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일과 분주함에 관련하여,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일하심이라는 관점 아래에 우리의 기회와 우리의 능력과 우리의 수고와 우리의 기여라는 측면들을 겸손히 내려놓을 때에만 비로소 이 문제들로부터 진정으로 자유할 수 있다.


우 리에게 열심히 감당할 일이 있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어디에선가 꼭 필요한 존재가 되도록 부르셔서, 그분의 사랑에 대한 진실한 응답의 표현으로서 주신 바에 대하여 열심히 일하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혹 지나치게 바쁘다면, 예수님처럼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마음 속의 한적한 곳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독대하는 가운데 주님의 시각을 회복하여 스스로를 재점검해야 한다. 나의 영적 상태는 건강한지, 나를 둘러싼 관계들은 온전한지, 다른 영혼들이 알게 모르게 나의 목표를 위하여 이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은 나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나 아가야 할 때와 멈추어 서야할 때를 온전히 분별하여 조화된 모습으로 실천하며 사는 삶은, 분명 단순한 결심이나 노력으로 당장에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이 일이야말로 지금 이 순간에 나를 부르고 계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 영적인 집중력과 분별력, 매 순간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순종함, 인생의 거시적인 계획들이 세워지고 실행되는 자리에서 온전히 회복되는 하나님의 주권, 그리고 필요에 따라서는 내가 지금 가진 모든 것을 즉각적으로 내려놓고 그분께 기대어 맡길 수 있는 전폭적인 믿음과 헌신 가운데에서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이 모든 일은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고 드렸던 기도를 매일매일의 생활 가운데에서 지속적으로 드리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삶의 분주함이라는 영성생활의 위기를 다루고 있는 우리의 앞에는 보다 성숙한 신앙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회가 동시에 주어져 있기도 하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과하는 열쇠가 진정한 의미에서 겸손히 주님과 동행하며 따르는 일에 있음은 물론이다.


여 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 도다. (시 127:1-2)


(본 글의 예수님 사역 부분에 관련하여 헨리 나우웬의 Out of solitude 및 Adam: Gods beloved에 있는 내용 일부를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