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문희] 부활절을 앞두고: 희망의 십자가

이코스타 2003년 4월호



고통 속에 있는 우리를 버려 두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찾아 오신 하나님,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고통 당하신 주님, 너희의 고통을 이해 한다고 말씀하시며 다가 오신 주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고통의 한 복판에서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파요, 힘들어요, 그렇지만 제가 알아요. 주님이 저를 사랑하시는 걸 제가 믿어요. 저는 다시 일어나요. 일어 날 수 있어요.” (인생 레슨 : 이 동원 목사 지음)


언젠가 교회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문제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교회와 사회 생활을 하다 보면 여러 사람들을 접하게 되는데 우리들의 눈에 보기에 그 사람들이 참 행복해 보일 수 가 있습니다. 좋은 직장에 좋은 학벌, 경제적인 여유, 그러다 보니 넉넉하고 윤택한 가정 생활과 직장 생활을 한다고 생각할 것이고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다며 부러운 시선을 나타냅니다. 물론 그들이 사회적으로 그 자리에 서기까지 그들 나름대로 노력도 많이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아무런 문제와 고민 없이 세상을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그들도 나름대로 그들 만의 고통과 고민거리들이 있지만 단지 내색하지 않을 뿐 입니다.”


참으로 의미 있는 말씀 입니다. 남 보기에 늘 행복해 보이고 웃고 다니니까 아무런 걱정 근심 없이 사는 것 같지만 그 나름대로 보이건, 보이지 않건 간에 다들 문제들을 갖고 사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나는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들과 또 그렇지 못한 것들을 장애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장애인들이고 우리 모두가 그 고통을 이기는 방법 즉 문제 해결에 대한 올바른 자세를 배우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우리가 왜 고통을 당하고 사는 지 모르기 때문에 괴로워 하고 문제 해결 대책 보다는 그 고통을 피할 길을 찾아 가려고 애를 씁니다.


한 예화로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소개 하려고 합니다. 일반 학급에 있는 K 학생이 학습적인 능력이 떨어지고 행동이 거칠어 지며 정서적으로 불안해 하여 혹 장애가 있는 게 아닌가 해서 테스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학습 태도 보고서, 성적표, 행동 수정 보고서 가정 환경 및 병원 기록 등과 같은 데이터를 모았고 심리 테스트를 거쳐 그 학생이 장애가 있다는 사실이 판정 되었고 특수 교육 프로그램을 추천하기 위한 미팅을 해서 그 학생에게 맞는 교육 프로그램을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이 교육 프로그램을 IEP (individualized Educational Program)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미팅에 참석한 K의 부모님들은 무조건 자기 아이는 절대로 장애가 없고 특수 교육 프로그램을 받을 수 없다고 강력하게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부모는 또 어떻게 내 아이에게 “장애인” 이라는 label을 붙일 수 있으며, 평생 그가 성장하는 동안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따돌림 받을 거라고 불평도 늘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 부모는 학교측과 계속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은 특수 클래스에 놓겠다고 동의를 했지만 부모의 얼굴에는 만족함 보다는 그늘 진 모습뿐이었습니다. 그런 후, 그 부모는 자신들의 아이가 장애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고 자기 자신을 원망하며 또 그 아이가 겪고 있는 고통을 함께 하고 사랑으로 감싸 주기 보다는 무관심과 불평, 그리고 심지어 아이를 구박하고 학대도 했습니다. 이 부모님들은 K를 특수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 시키는 일이 너무 고통스럽고 수치 스러운 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우리에게 시련이 닥쳐 올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동원 목사님이 쓰신 인생 레슨 이라는 책 에는 첫째, 고통은 하나님의 교육적인 의도의 시험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이 시험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 생활을 평가 하시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 장 13절에서는 “시험을 찾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 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 이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K의 예화 속에서 그는 이미 그의 장애로 인해서 특수 클래스에서 수업을 받고 있습니다. K의 부모님들은 K가 장애 어린이라는 사실에 동의 하지 않았고 불만족스러운 자세로 아이를 특수 교육에 참여 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K의 학교 생활에 별로 도움을 주지는 못 했습니다. 그에게 장애가 생긴 이유는 그의 잘못도 아니고 부모님의 잘못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K를 구박하고 학대 했습니다. 그런데, 오직 K만이 세상에서 고난의 십자가-문제와 어려움-를 지고 갈까요? 다른 어린이들과 그의 부모님들 역시 그들 나름대로의 문제와 고민거리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 K라는 장애 아이를 한 가정에 주심으로 해서 분명 하나님의 어떤 숨겨진 뜻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마도 주님은 K의 부모님들로 하여금 더 많은 인내, 그리고 희생과 노력에 대해 배우기를 원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K를 위해서 전혀 희생과 노력이 없었던 K의 부모님들은 계속적으로 K의 학교와 가정 생활에 무관심을 보였고 가정에서 이어지는 학대는 그에게 더 큰 상처를 주어서 정서 장애 라는 또 다른 장애를 낳게 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고통을 현명하게 대처하고 극복하지 못할 때 그 고통은 더 큰 고통을 만들게 됩니다. 반면에 극복한 고통 뒤에는 환희와 기쁨이 있습니다. 이 동원 목사님은 그의 저서 인 “인생 래슨” 애서 고통을 축복의 통로에 비유하시며 고통은 하나님의 복이고 계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를 의지함으로써 우리의 믿음도 성숙해 지는 가운데 우리들은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갖고 더 큰 일을 해낼 수 있다고 합니다. 만약 K의 부모님들이 K를 위해서 좀 더 희생하고 노력했다면 그의 인생이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K가 갖고 있는 고통 (장애) 은 없어지지 않는 십자가라서 K의 부모님들과 K가 함께 노력했다면 그의 십자가는 절망의 십자가가 아닌 자기와 같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꿈과 용기를 주는 희망의 십자가로 바뀌었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겠지요. 지금 어느 곳에서 생활하던지 우리의 어려움에 대해 비관적이거나 낙심하지 말고 잘 대응한다면 우리들이 지닌 고난의 십자가도 희망의 십자가가 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차문희] 아이들의 눈에 비친 어른들의 모습

기독교사 리포트


아이들의 눈에 비친 어른들의 모습








아 이들과 매일 생활하면서 저는 대화를 자주 나누는 편입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정상적인 가정에서 양쪽 부모님들과 생활하기 보다는 그렇지 못 한 학생들이 많기 때문에 수업 시간에도 이들은 언제나 수업 내용과 관련 되지 않는 즉, 자기들의 생활 이야기를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말다툼을 많이 하곤 합니다. 아이들의 이야기 속에는 나름대로 우습고 재미 있는 이야기들도 있고 슬프고 안타까운 이야기들도 있는데 이번 달 이코스타에서는 그런 이야기들 몇 가지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참고: 소개 되는 이야기들은 실제로 있었던 일들입니다.)


전문성이 있는 도둑 (professional thief)?


지 금은 7학년이 되어 있는 W라는 남학생이 2년 전, 그가 5학년 때 저에게 한 이야기입니다. 결손 가정에서 자란 W는 정서 장애와 학습 장애를 가진 학생으로서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고 주위가 산만하며 학교에서는 말썽만 피우고 어느 누구의 말을 듣지 않는 문제아로 소문이 나 있어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 조차도 없었습니다. 한 번은 W가 제 클래스에 와서 저는 예전과 다름 없이 수업 하기 전에 아이들에게 “Good Morning”이라고 인사를 하자 다른 아이들도 “Good morning, Ms. Cha” 라며 대답을 하는데 갑자기 W는 “Ms. Cha, I am not having a good morning”이라며 책을 집어 던졌습니다. 순간 저는 이 학생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줄 알고 묻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니?” 그러자 W 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제 아빠가 집에 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오지 못 했어요.” 저는 다시 물었습니다. “아니 왜? 아빠가 어디 가셨니? 바쁘신가 보다.” 그러자 W는 저를 처다 보며 “우리 아빠는 원래 감옥에서 살아요. 아빠의 직업은 전문성을 갖춘 도둑이에요. 그런데, 어제는 우리 아빠가 자기의 전문성을 잘 살리지 못 했었어요.” 세상에! 아무리 여러 종류의 직업들이 있고 우리는 그 직업의 전문성과 소명 의식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는 이야기 하지만 “도둑”이라는 직업에 전문성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궁금해서 다시 물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니? “도둑”이라는 직업에도 전문성이 있니?” 그러자 W는 웃으면서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일에 대해서 전문성 (professionalism)을 갖고 일을 하듯이 우리 아빠도 남의 물건을 훔칠 때 특정한 기술을 사용해요. 그것은 지문 자국을 없애기 위해서 장갑을 끼고 물건을 훔치는 거에요. 그리고 그렇게 전문성을 갖춘 도둑은 경찰 아저씨한테 잡히지 않아요. 우리 아빠는 언제나 자기의 그 전문성을 유지해서 걸리지 않았었는데, 어제는 일반 도둑 (regular thief) 이었어요. 그래서 경찰 아저씨한테 걸려서 다시 감옥으로 갔단 말이에요.” 그리고 그는 6개월 동안 얼굴 한 번 못 본 아빠가 그리운 듯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처 음에 이 이야기를 들은 저와 다른 학생들은 너무 재미있는 나머지 그만 웃고 말았습니다. 개인적으로 나중에 W에게 너무 미안했고 그런 환경에서 자라고 있는 W가 안타깝고 가여워서 좀 더 그를 따뜻한 사랑으로 잘 해 주어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끔 이 이야기들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면 웃고 지나가 버립니다. 하지만 이 예화 속에 W의 솔직하고 순수한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자기의 가정 환경이 다른 친구들에 비해 별로 좋지 않으면 창피해서라도 숨기려고 할 텐데 W는 아빠가 감옥에 있는 사실을 아무런 거리 낌 없이 솔직하게 표현했습니다.


사람들 보다 친절한 동물들


어 려서 부 터 할머니가 읽어 주는 성경이야기를 듣고 자란 K라는 정신 지체 남자 아이는 기억력이 아주 좋고 한 번 들은 내용은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능이 낮은 관계로 자기 또래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고 사회성 (social skill)도 부족하다 보니 심지어 특수 학급에서도 이 아이는 놀림의 대상입니다. 다른 아이들은 K에게 장난치고 괴롭히는 일을 즐겨 하고 그럴 때 마다 K는 그들과 맞서 보다가 결국 지고 맙니다. 어느 날 K가 동물들이 그려진 잡지를 저에게 가져와서 이야기 하기 시작했습니다. “Ms. Cha, 동물, 특히 강아지 좋아해요? 우리집에는 내가 기르는 강아지 한 마리가 있는데 나의 영원한 친구에요. 집에 가면 강아지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요.” 별로 강아지를 좋아하지 않는 저는 그냥 계속 듣고만 있었습니다. K는 계속 이야기 했습니다. “강아지가 왜 내 친구인 줄 알아요? 강아지는 사람들 보다 나쁘지 않기 때문이에요. (Dogs are not meaner than people). 내가 아무리 바보같이 행동하고 별로 잘 해 주지 않아도 그들은 나에게 대하는 모습이 똑같아요.”


저는 그 아이를 다시 한 번 물끄러미 처다 보았습니다. 지능이 낮은 그에게서 그런 말이 나온 것은 너무 뜻밖이었고 우리 인간의 본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매 순간순간 환경과 자신의 이익 추구에 따라 변하는 우리들의 모습,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는 자들과 어울리고 도와 주기 보다는 따돌리는 우리들의 모습을 K는 설명해 주고 있었습니다.


인상 쓰지 마세요.


초 등학교 2학년인 남자 아이 W는 주위가 산만해서 집중하는데 어려움이 많으며 그렇다 보니 가만히 앉아서 학습을 하는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리고 아직 7살 밖에 안 된 W는 장난기도 많이 있어서 농담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러다가 그 정도가 지나쳐서 문제가 된 적도 여러 번 있습니다. 처음에 W와 행동 수정을 하는데 잘 따라주지 않았고 반항적일 때도 많았으며 심지어 저에게 “You don’t like me”라고 이야기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그가 제 클래스에 오자마자 밖에 서 있고 들어오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눈과 저의 눈이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교실 밖에 서 있었고 저는 그가 언제 문을 열고 들어오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 참 후에 문을 열고 들어온 W에게 저는 물었습니다. “아니, 클래스에 왔으면 문을 열고 들어와야지. 왜 밖에 서 있었니?” 그러자 그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선생님이 저하고 눈만 마주 치면 내가 오늘도 말을 안 들을 것 같아서 그런지 인상 쓰고 있었잖아요. (When I look at you, you are making bad faces at me because you think that I would be a bad boy today)” 그러자 저는 “아니 그게 무슨 소리니? 인상을 썼다니? 네가 들어오기 전에 다른 아이들과 이야기하면서 너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다시 W는 말을 이으며,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나하고 눈만 마주 치면 내가 오늘 또 무슨 이상한 행동을 하나 하고 생각해서 그런지 인상부터 쓰셨잖아요.” 처음에 그 얘기를 듣는 순간 기가 막혔고 어떡해 대답해야 할지 몰랐었습니다. 아마도 저는 그 아이만을 빤히 처다 봤을 뿐인데 그 아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거나 무의식적으로 그 아이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정말로 인상을 썼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처음에는 그 아이가 건방지고 버릇없다고 느꼈었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정말 저의 모습이 어떤 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해 주었던 고마운 사건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에 저는 집에 와서 그 아이를 비롯해서 다른 아이들에게 좀 더 많은 미소 (extra smile)를 주기 위해서 거울을 보며 연습을 하던 기억이 납니다.


엄마를 선물로 줄 수 있나요?


아 이들에게 협동 심을 길러 주기 위해서 행동 수정 방법 중에 하나로 어떤 목표를 달성하게 되면 아이들로 하여금 영화 감상, 피자, 아이스크림 파티 등등 다양한 reward를 정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정신 지체를 가지고 있는 B라는 학생이 손을 들고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런 것들은 별로 안 좋아해요. 내가 정말 필요한 보상은 엄마에요. 우리 엄마는 알코올 중독자라서 우리 사 남매를 버리고 집을 나갔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엄마를 비롯해서 나도 이렇게 문제가 많은 것 같아요. 우리 아빠가 다시 재혼 하면 나에게도 엄마가 생기는데, 그건 아직 잘 모르는 일이고…” 하고 말을 멈추었다. 저는 그 아이가 그런 이야기를 할 정도로 생각이 있는 아이였는지 몰랐고 얼마나 엄마가 그리울까 하는 마음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맺으며


이 밖에도 재미 있는 에피소드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냥 무심코 지나갈 수는 있지만 이런 에피소드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가르치시는 교훈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첫 째, 하나님 앞에서 순수함을 잃지 말아야 겠다는 도전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비록 아빠가 도둑이었지만 아무런 거리 낌 없이 이야기 한 W, 자기가 갖고 있는 생각들을 솔직히 표현한 K 와 W (세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 그리고 엄마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한 B라는 아이들 모두 거짓과 꾸밈이 없이 순수한 마음들을 지녔습니다. 신앙을 갖고 산다는 것은 비록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이미 알고 계실 지라고 우리의 솔직한 생각들을 꾸밈 없이 말씀과 기도로 이야기 하고 우리들의 아픔까지도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둘 째, 두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인 K 어린이의 강아지에 대한 비유를 통해, 저는 무조건 적인 사랑을 소외되어 있는 이웃들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도전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K가 부족하고 어리 석게 보이며 가끔 강아지에게 관심을 덜 보일 지라도 그의 영원한 친구인 강아지는 그에게 무조건 적인 사랑 (unconditional love)을 보여 주며 끝까지 그의 벗이 되어 주는 것처럼 우리의 하나님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가끔 우리들이 지치고 그를 외면하더라도 그가 우리들을 향한 사랑이 변함 없는 것처럼 우리들 역시 다른 이들에게, 나와 별로 친하지 않는 이웃들에까지도 변함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해야 겠습니다.









”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 하리라 하시고 그 어린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 하시고 축복 하시니라.” (마가복음 10:14-16)

[차문희] 아이들의 눈에 비친 어른들의 모습

이코스타 2003년 3월호







아이들과 매일 생활하면서 저는 대화를 자주 나누는 편입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정상적인 가정에서 양쪽 부모님들과 생활하기 보다는 그렇지 못 한 학생들이 많기 때문에 수업 시간에도 이들은 언제나 수업 내용과 관련 되지 않는 즉, 자기들의 생활 이야기를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말다툼을 많이 하곤 합니다. 아이들의 이야기 속에는 나름대로 우습고 재미 있는 이야기들도 있고 슬프고 안타까운 이야기들도 있는데 이번 달 이코스타에서는 그런 이야기들 몇 가지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참고: 소개 되는 이야기들은 실제로 있었던 일들입니다.)


전문성이 있는 도둑 (professional thief)?


지금은 7학년이 되어 있는 W라는 남학생이 2년 전, 그가 5학년 때 저에게 한 이야기입니다. 결손 가정에서 자란 W는 정서 장애와 학습 장애를 가진 학생으로서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고 주위가 산만하며 학교에서는 말썽만 피우고 어느 누구의 말을 듣지 않는 문제아로 소문이 나 있어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 조차도 없었습니다. 한 번은 W가 제 클래스에 와서 저는 예전과 다름 없이 수업 하기 전에 아이들에게 “Good Morning”이라고 인사를 하자 다른 아이들도 “Good morning, Ms. Cha” 라며 대답을 하는데 갑자기 W는 “Ms. Cha, I am not having a good morning”이라며 책을 집어 던졌습니다. 순간 저는 이 학생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줄 알고 묻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니?” 그러자 W 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제 아빠가 집에 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오지 못 했어요.” 저는 다시 물었습니다. “아니 왜? 아빠가 어디 가셨니? 바쁘신가 보다.” 그러자 W는 저를 처다 보며 “우리 아빠는 원래 감옥에서 살아요. 아빠의 직업은 전문성을 갖춘 도둑이에요. 그런데, 어제는 우리 아빠가 자기의 전문성을 잘 살리지 못 했었어요.” 세상에! 아무리 여러 종류의 직업들이 있고 우리는 그 직업의 전문성과 소명 의식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는 이야기 하지만 “도둑”이라는 직업에 전문성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궁금해서 다시 물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니? “도둑”이라는 직업에도 전문성이 있니?” 그러자 W는 웃으면서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일에 대해서 전문성 (professionalism)을 갖고 일을 하듯이 우리 아빠도 남의 물건을 훔칠 때 특정한 기술을 사용해요. 그것은 지문 자국을 없애기 위해서 장갑을 끼고 물건을 훔치는 거에요. 그리고 그렇게 전문성을 갖춘 도둑은 경찰 아저씨한테 잡히지 않아요. 우리 아빠는 언제나 자기의 그 전문성을 유지해서 걸리지 않았었는데, 어제는 일반 도둑 (regular thief) 이었어요. 그래서 경찰 아저씨한테 걸려서 다시 감옥으로 갔단 말이에요.” 그리고 그는 6개월 동안 얼굴 한 번 못 본 아빠가 그리운 듯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이 이야기를 들은 저와 다른 학생들은 너무 재미있는 나머지 그만 웃고 말았습니다. 개인적으로 나중에 W에게 너무 미안했고 그런 환경에서 자라고 있는 W가 안타깝고 가여워서 좀 더 그를 따뜻한 사랑으로 잘 해 주어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끔 이 이야기들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면 웃고 지나가 버립니다. 하지만 이 예화 속에 W의 솔직하고 순수한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자기의 가정 환경이 다른 친구들에 비해 별로 좋지 않으면 창피해서라도 숨기려고 할 텐데 W는 아빠가 감옥에 있는 사실을 아무런 거리 낌 없이 솔직하게 표현했습니다.


사람들 보다 친절한 동물들


어려서 부 터 할머니가 읽어 주는 성경이야기를 듣고 자란 K라는 정신 지체 남자 아이는 기억력이 아주 좋고 한 번 들은 내용은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능이 낮은 관계로 자기 또래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고 사회성 (social skill)도 부족하다 보니 심지어 특수 학급에서도 이 아이는 놀림의 대상입니다. 다른 아이들은 K에게 장난치고 괴롭히는 일을 즐겨 하고 그럴 때 마다 K는 그들과 맞서 보다가 결국 지고 맙니다. 어느 날 K가 동물들이 그려진 잡지를 저에게 가져와서 이야기 하기 시작했습니다. “Ms. Cha, 동물, 특히 강아지 좋아해요? 우리집에는 내가 기르는 강아지 한 마리가 있는데 나의 영원한 친구에요. 집에 가면 강아지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요.” 별로 강아지를 좋아하지 않는 저는 그냥 계속 듣고만 있었습니다. K는 계속 이야기 했습니다. “강아지가 왜 내 친구인 줄 알아요? 강아지는 사람들 보다 나쁘지 않기 때문이에요. (Dogs are not meaner than people). 내가 아무리 바보같이 행동하고 별로 잘 해 주지 않아도 그들은 나에게 대하는 모습이 똑같아요.”


저는 그 아이를 다시 한 번 물끄러미 처다 보았습니다. 지능이 낮은 그에게서 그런 말이 나온 것은 너무 뜻밖이었고 우리 인간의 본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매 순간순간 환경과 자신의 이익 추구에 따라 변하는 우리들의 모습,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는 자들과 어울리고 도와 주기 보다는 따돌리는 우리들의 모습을 K는 설명해 주고 있었습니다.


인상 쓰지 마세요.


초등학교 2학년인 남자 아이 W는 주위가 산만해서 집중하는데 어려움이 많으며 그렇다 보니 가만히 앉아서 학습을 하는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리고 아직 7살 밖에 안 된 W는 장난기도 많이 있어서 농담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러다가 그 정도가 지나쳐서 문제가 된 적도 여러 번 있습니다. 처음에 W와 행동 수정을 하는데 잘 따라주지 않았고 반항적일 때도 많았으며 심지어 저에게 “You don’t like me”라고 이야기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그가 제 클래스에 오자마자 밖에 서 있고 들어오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눈과 저의 눈이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교실 밖에 서 있었고 저는 그가 언제 문을 열고 들어오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 참 후에 문을 열고 들어온 W에게 저는 물었습니다. “아니, 클래스에 왔으면 문을 열고 들어와야지. 왜 밖에 서 있었니?” 그러자 그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선생님이 저하고 눈만 마주 치면 내가 오늘도 말을 안 들을 것 같아서 그런지 인상 쓰고 있었잖아요. (When I look at you, you are making bad faces at me because you think that I would be a bad boy today)” 그러자 저는 “아니 그게 무슨 소리니? 인상을 썼다니? 네가 들어오기 전에 다른 아이들과 이야기하면서 너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다시 W는 말을 이으며,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나하고 눈만 마주 치면 내가 오늘 또 무슨 이상한 행동을 하나 하고 생각해서 그런지 인상부터 쓰셨잖아요.” 처음에 그 얘기를 듣는 순간 기가 막혔고 어떡해 대답해야 할지 몰랐었습니다. 아마도 저는 그 아이만을 빤히 처다 봤을 뿐인데 그 아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거나 무의식적으로 그 아이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정말로 인상을 썼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처음에는 그 아이가 건방지고 버릇없다고 느꼈었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정말 저의 모습이 어떤 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해 주었던 고마운 사건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에 저는 집에 와서 그 아이를 비롯해서 다른 아이들에게 좀 더 많은 미소 (extra smile)를 주기 위해서 거울을 보며 연습을 하던 기억이 납니다.


엄마를 선물로 줄 수 있나요?


아이들에게 협동 심을 길러 주기 위해서 행동 수정 방법 중에 하나로 어떤 목표를 달성하게 되면 아이들로 하여금 영화 감상, 피자, 아이스크림 파티 등등 다양한 reward를 정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정신 지체를 가지고 있는 B라는 학생이 손을 들고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런 것들은 별로 안 좋아해요. 내가 정말 필요한 보상은 엄마에요. 우리 엄마는 알코올 중독자라서 우리 사 남매를 버리고 집을 나갔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엄마를 비롯해서 나도 이렇게 문제가 많은 것 같아요. 우리 아빠가 다시 재혼 하면 나에게도 엄마가 생기는데, 그건 아직 잘 모르는 일이고…” 하고 말을 멈추었다. 저는 그 아이가 그런 이야기를 할 정도로 생각이 있는 아이였는지 몰랐고 얼마나 엄마가 그리울까 하는 마음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맺으며


이 밖에도 재미 있는 에피소드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냥 무심코 지나갈 수는 있지만 이런 에피소드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가르치시는 교훈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 하나님 앞에서 순수함을 잃지 말아야 겠다는 도전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비록 아빠가 도둑이었지만 아무런 거리 낌 없이 이야기 한 W, 자기가 갖고 있는 생각들을 솔직히 표현한 K 와 W (세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 그리고 엄마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한 B라는 아이들 모두 거짓과 꾸밈이 없이 순수한 마음들을 지녔습니다. 신앙을 갖고 산다는 것은 비록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이미 알고 계실 지라고 우리의 솔직한 생각들을 꾸밈 없이 말씀과 기도로 이야기 하고 우리들의 아픔까지도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둘째, 두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인 K 어린이의 강아지에 대한 비유를 통해, 저는 무조건 적인 사랑을 소외되어 있는 이웃들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도전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K가 부족하고 어리 석게 보이며 가끔 강아지에게 관심을 덜 보일 지라도 그의 영원한 친구인 강아지는 그에게 무조건 적인 사랑 (unconditional love)을 보여 주며 끝까지 그의 벗이 되어 주는 것처럼 우리의 하나님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가끔 우리들이 지치고 그를 외면하더라도 그가 우리들을 향한 사랑이 변함 없는 것처럼 우리들 역시 다른 이들에게, 나와 별로 친하지 않는 이웃들에까지도 변함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해야 겠습니다.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 하리라 하시고 그 어린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 하시고 축복 하시니라.” (마가복음 10:14-16)

[차문희] I have a dream

이코스타 2003년 2월호

“I have a dream that one day this nation will rise up and live out the true meaning of its creed: “We hold these truths to be self-evident: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by Martin Luther King Jr


해마다 1월이 되면 저는 학교에서 사회 시간에 Martin Luther King 목사님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1월 달에 그 분을 기념하는 날 즉 1월의 세 번째 월요일이 되기 전 주에는 항상 이 분에 대한 전기문을 읽고 그 분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인권 운동 (Civil rights movement) 과 인종 갈등 (racism)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게 되는데 이 때 장애 (disability)에 대한 이야기들도 함께 나누는 시간들을 갖게 됩니다.


제가 살고 있는 미국의 남부 지방은 아직도 보수적인 생각들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가 솔직히 믿기는 어렵겠지만 인종 갈등이 아직도 역사의 흔적을 감추지 못 한 채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아이들끼리 노는 모습들을 지켜 보아도 흑인 어린이들은 백인 어린이들과 함께 뛰어 노는 경우가 드물고 수업 시간에 그룹 프로잭트 할 때도 백인 어린이와 흑인 어린이가 함께 파트너가 되는 일 역시 아주 드문 상태입니다. 그리고 저야 동양 사람이고 원래 이 사람 저 사람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보니 여러 동료 교사들과 친하게 지내려고 하지만 흑인 교사들과 백인 교사들이 학교의 일 이외에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내는 경우 또한 찾아 보기 힘들고 심지어 하나님 앞에 우리 모두가 똑 같은 자녀라고 이야기 하는 기독교인들도 예배의 형식이 달라서 그런가 흑인 교회와 백인 교회가 나누어 져 있다는 사실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Martin Luther King목사님은 제가 살고 있는 조지아 주에서 태어나셨고 직접 몸으로 인종 차별의 아픔과 서러움들을 체험, “인간의 평등성” 을 강조 하신 분으로 유명하며 오늘날 흑인 역사의 중요한 인물로 손 꼽히는 분의 한 사람입니다. 이 분이 생존하셨을 때 당시 미국의 상황은 흑인들과 백인들은 분리된 생활을 하였고, 즉 흑인들은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로 많은 차별을 받았으며 사회의 천대와 명시를 받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으로 인하여 상처를 입고 돌아온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정부의 특별한 해택과 배려가 없었다고 합니다. Martin Luther King 목사님의 인권 운동은 인종 갈등해소에만 그치지 않고 베트남 전쟁이나 심지어 한국 전쟁에서 부상을 당한 상이 용사들의 인권 문제,, 즉 전쟁터에서 얻은 장애가 생겨서 돌아온 이들을 위한 사회 복지 문제로 바뀌게 된 것 입니다. 이 사회 복지 문제 중에 하나가 바로 장애인들의 교육과 사회 참여라고 볼 수 있습니다.


1973년 Vocational Rehabilitation Act 라고 하는 법이 미국에 정해 지면서 상이 용사들이나 모든 장애인들도 한 인간으로써 사회에서 보통 사람들과 같이 똑 같은 권리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고 규정하고 1975 Education for all handicapped Act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그들의 장애에 상관없이 그들에게 맞는 공 교육 (public education)을 받을 수 있다고 규정했습니다. 1990년 American Disability Act가 정해 지면서 미국의 공공 장소에 장애인들의 편의 시설을 제공했으며 1997년 Individual with Disability Act를 통해서 특수 교육 프로그햄이 체계화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미국 역시 장애인들에 대한 교육이 발달 된지 그렇게 오래 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올 해도 역시 아이들과 Martin Luther King목사님과 인권 운동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과연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 토론의 시간을 가져 보았습니다. D라는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고 이야기 합니다. “Ms. Cha도 우리와는 다른 피부색을 가졌고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자라 미국에서 공부하고 교사가 되어서 우리들을 가르치는데요, 저는 아직도 미국에 특히 제가 사는 지역에 인종 차별 뿐만 아니라 다른 차별이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다시 질문 했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니? 또 다른 차별이라니?” 그 학생은 다시 이야기 합니다. “우리들에 대한 차별이요, Ms. Cha의 학생들에 대한 일반 교사들과 일반 학생들에게서 받는 따돌림, 그거 알아요?” 순간 저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아니 미국의 특수 교육 프로그램이 잘 되어 있고 장애인들에 대한 인식이 다른 나라들 보다는 좀 나은 것 같았는데, 이게 무슨 말인가? 그는 다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특수 학급에 오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우리를 약간 모자라거나 좀 바보로 알고 있어요. 우리들에 대해서 잘 모르면서 – – — – 그냥 특수 학급에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우리들을 “dummy”라고 하는데요, 뭐, 사실, 그래서 공부 하는 그 자체가 너무 싫어요.”


아이들에게도 선입견, 편견의식은 상처와 좌절을 불러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단지 “흑인”, “히스패닉”, “장애인” 이라고 붙여진 이름 (label) 때문에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인간의 인격과 능력 보다는 그 사람의 피부 색깔, 또 가난하고 힘들었던 과거의 역사와 불행했던 환경 때문에. 몸이 불편하고 학습 적인 능력이 다른 아이들에 비해 떨어 진다는 그릇된 생각들 때문에 아직도 소외된 이웃들은 우리 주위에 많이 있습니다.


Martin Luther King목사님에 대한 토론을 하면서 아이들은 또 이런 이야기들을 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그 사람의 피부 색이나 어떤 장애에 관계 없이 모두 평등하다고 믿고 있으나 단지 그것은 우리들의 생각 뿐이에요. 하지만 현실은 그와는 반대인 것 같아요. 아직도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편견의식은 변하지 않는 것 같아요. ” 즉 아이들의 눈에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실제로 행동하는 것은 매우 다르다는 지적입니다. 이 말도 틀린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말로는 “더불어 사는 사회 건설”을 위해서 노인, 장애인, 여성 복지, 소수 민족에 대한 적극적인 배려를 부르짖고 있지만 우리의 일상 생활은 아직도 알게 모르게 인종 갈등과 빈부 격차, 그리고 편견의식이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문화란, 각 나라의 생활 습관만을 의미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의 각자가 지니고 있는 다른 생활 문화를 의미 합니다.)


우리들이 각 자 서로가 다른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을 있는 그대로 우리 삶에 받아들이며 그들의 아픔을 우리와 함께 할 때, 또한 소외도어 있는 이웃들 역시 그들의 아픔을 고난의 순간들로 바라보지 말고 오히려 꿈과 희망을 갖고 은혜의 통로로 바라보게 될 때 “더불어 사는 사회” 는 이루어 진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더불어 사는 사회 건설”은 소외되지 않은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어 Martin Luther King 목사님의 말씀에 담겨져 있는 미래에 대한 꿈 (dream)을 꾸며 만들어 가는 밝은 사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차문희] 교직생활 첫해를 돌아보며

이코스타 2003년 1월호



언젠가 이코스타 에 “다양성에 대한 이해”라는 글을 투고 한 적이 있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우리 자신도 모르게 갖는 편견 의식과 이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을 다루었다. 우리 사회에 소외 되는 이웃들이 있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인간의 다양성”에 대한 이해 부족이라고 생각하는데, 특히 한국 사람들의 삶에 뿌리 내린 유교 적인 문화와 전통 때문에 서양 사람들 보다 그 이해가 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미국에 와서 공부하고 있는 한국 유학생들 역시 예외는 아닌 것 같다고 본다. 더군다나 대부분의 유학생들은 가정 형편이 넉넉하고 학업에 열중하다 보니 흔히 소외된 이웃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보이는 일에 게을러 지기가 쉬울 수 있다. 그래서 앞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어려운 환경에서 살고 있는 소외 된 이웃들을 주제로 한 글을 연재하려고 한다.


학교 졸업 후 장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지 어느덧 5 년 째, 아무것도 모르고 단지 교육학에서 배운 내용만을 가지고 현실에 뛰어든 나의 교사 생활 첫 해는 너무나 견디기 힘든 시간들이었다. 공부 하는 동안 여러 가지 교생 실습을 통해서 미국의 공립 학교가 어떠한 곳이고 또 장애 아이들이 있는 특수 학급이 어떤 곳인지 대충은 알고 있었다. 내가 실습을 나가면 언제나 담당 교사가 함께 나와 있었기 때문에 별로 큰 문제는 없었고 모든 학생들이 그렇듯이 나 역시 아무런 생각 없이 졸업 하는 데만 신경을 썼을 뿐이다.


처음 내가 맡은 학급은 주로 4 학년과 5 학년의 학습, 정서, 그리고 정신 지체를 가진 학생들이었다. 서양의 아이들이라서 그런지 비록 4, 5 학년 아이들이지만 키도 나 보다 크고 덩치도 크며 장애가 있는 지라 성격들도 일반 4, 5 학년 아이들에 비해 많이 달랐다. 더군다나 동양인 교사이기 때문에 얼른 아이들과 친해지기는 그렇게 쉽지가 않았던 것 같았다.


아무튼, 이런 아이들을 처음 만나서 수업을 하는데, 세상에! 혼자서 그 아이들을 다루는 데는 내가 너무 부족했다. 첫째,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나로 써는 문화와 관습에서 오는 차이 때문에 대부분의 미국 학생들을 이해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들은 자기 주장이 강했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나이에 상관 없이 이야기 했으며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좋고 나쁜 행동을 해서라도 행동하고 말았다. 예를 들어 우리 한국 어린이들은 아니 요즘은 많이 달라 졌다고는 하지만 내가 자랄 때만 해도 유교적인 사상 때문에 어른 공경이 우선 인지라 자기 주장을 내세우거나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때와 장소를 가렸으며 한 번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줄로 알았는데,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그렇지 못 했다.


학부 과정에서 특수 교육의 정신 지체를 공부한 나는 학습 및 정서 장애에 대한 기본 적인 지식 외에 전문 지식이 부족 했기 때문에 그들을 지도할 때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다. 특히 그들이 갖고 있는 장애에 대한 이해와 교육 방법이 부족했기 때문에 효과적인 수업이나 부모님들과의 상담이 이루어 질 수 없었다. 예를 들어 정신 지체 학생들에게 맞는 교육 방법이 학습 장애나 정서 장애를 갖고 있는 학생들에게 적용 했을 때 아무리 특수 교육의 일부라도 효과적이지 못 할 때가 많이 있었다. 자기의 능력에 맞게 효과적인 교육 효과를 보지 못 한 아이들은 학습 능률이 오르지 않았고 집중력이 약해서 딴 짓만 했으며 다른 친구들과 장난을 치고 심지어는 수업 까지 방해를 놓을 정도 일 때도 있었다. 하고자 하는 의욕 보다는 쉽게 낙심하고 포기하기를 좋아했으며 노력 보다는 공짜로 무언가를 얻기를 바라곤 했다. 그래서 학습 장애와 정서 장에에 대한 공부를 해서 다시 라이센스를 받았다. (참고: 조지아에서 교사 자격증 취득 시 자기가 전공하지 않는 분야를 가르치게 될 경우 3년 안에 그 분야에 대한 공부를 하고 다시 라이센스를 받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의 장애가 다르듯이 그들의 학부모님들 역시 한국 부모님들에 비해 많은 차이가 있었다. 한국에서 한 번도 가정 문제나 불화를 겪어 보지 않고 자란 나로 써는 나의 학생들의 부모님들과 그들의 가정을 이해하는데 너무나 힘들었다.. 그래서 현대 사회에 극심해 져가는 미국의 가정 문제들을 배우고자 Family service (family therapy)을 공부하게 된 것이다. 이 학문을 공부하면서 인간의 성장 및 발달 과정을 비롯해서 현대 가정이 갖고 있는 문제점과 해결책, 그리고 다양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다양한 사람들과의 대인 관계에 대해서 배우게 되었다.


무조건 공부만 마치면 내가 일 하고 있는 분야에서 잘 할 것이라고 착각에만 빠져서 헤 메이고 있던 나에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나의 학생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보여 주셨고 그 현실의 문제점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해결책까지 가르쳐 주셨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심리적, 정서적으로나 힘든 순간들이 많았던 쳣 해는 그렇게 지나갔고 해가 갈수록 일은 수월해 졌고 요령도 생겼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직업에 대한 소명 의식이 생겼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침으로 특히 소외된 이웃들을 섬긴다는 사실에 마음 한 구석에 기쁨과 평안을 얻게 되었다. 비록 부족한 아이들이지만 그 부족함과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면서 내 자신이 더욱 더 삶에 대한 꿈과 희망을 얻고 결국 소외된 이웃들을 섬긴다는 그 자체가 내 삶에 긍정적인 영행을 미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셈이다.

[차문희] 다양성에 대한 이해(Understanding of Diversity)

이코스타 2002년 10월호

내가 일을 하고 있는 학교는 공립 학교이기 때문에 참으로 다양한 아이들을 만나게 된다. 흑인, 백인, 히스패닉, 그리고 동양인 아이들, 가정 형편이 좋은 아이들 또 그렇지 못한 아이들, 부모님과 함께 사는 아이들 아니면 편부, 편모와 함께 사는 아이들, 장애를 가진 아이들, 종교가 다른 아이들… 이 아이들을 통해 참으로 다양한 환경과 문화를 접하게 된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같이 일하는 교직원들도 마찬가지인데, 동양인인 나를 비롯해서 다양한 인종의 교사들은, 다양한 교육 방식과 교육 철학을 가지고 이런 다양한 아이들을 가르친다. 그러다 보니 나름대로 편견이 생기기가 쉬운데, 예를 들어 흑인 아이가 편모와 살고 있다고 하면 그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는 알아보지 않은 채 “에휴, 가정 환경이 안 좋다 보니 좀 불량한 학생이겠군, 거기에다가 유색 인종이니”라는 선입견을 쉽게 갖고 그 학생을 대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그 학생과 가까워지기 어렵고 학습 능률 또한 오르지 않게 된다.


교직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직장에서도 우리는 다양한 성격과 환경을 지닌 사람들과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일을 하는데, 그때마다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서로 다르다’ 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묘한 갈등을 가져온다. 많은 사람들이 “가방 끈이 짧은데 과연 그 일을 해낼 수 있을까?”라는 식의 생각으로 사람이 가진 내면의 능력보다 이력서에 적힌 외적인 학벌로 사람을 판단해 버린다. 부유한데다가 학벌이 좋고 외모도 출중하여 부러울 게 없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또한 완벽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마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문제나 어떤 보이지 않는 장애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또 그들 역시 그들만이 갖고 있는 외적인 좋은 조건으로 인해 다른 이들로부터 소외를 당할 수도 있다. 그래서 세상에는 나와 비슷한 사람은 있어도 똑같은 사람은 없는가 보다. 만일 모든 이들이 똑같은 생각과 가치관을 갖고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재미도 없을 뿐더러,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서로를 이해하며 더불어 사는 사회 건설을 위해서는 “인간의 다양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학문적인 관점에서의 “인간의 다양성” 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국 사회나 미국 사회를 막론하고 어느 사회이건 그 사회만이 지니고 있는 보편적인 생각(standardized norm)이 있는데, 이는 그 사회의 문화와 관습을 통해 만들어지며 그 사회에 속한 사람들의 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고 사회학자들은 말한다. 다른 가정에서 자라고, 다른 교육을 받아 다른 성격을 지니게 된 사람들이 모여 크고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데 있어, 개개인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고 그들이 갖고 있는 개성을 존중해 주는 것이 바로 “다양성”(diversity)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아닌가 싶다.


현대 가족요법 치료사(Modern Family therapist)인 Marie Bowen은 ‘대인 관계는 너무나 복잡하고 까다로우며 우리는 깊이 생각하기 전에 감정에 따라 평가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올바른 인간 관계를 맺고자 한다면 먼저 내 자신이 확고한 주관을 갖고 생각하고 평가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했다. 즉 감정에 따라 무심코 내뱉는 말이나 행동으로 편견이 형성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이혼의 상처를 갖고 있는 한 자매가 아픈 마음을 위로 받고자 교회를 찾았다고 하자. 그녀는 예배나 성경 공부를 통해서 자신의 아픔을 치유 받으려고 애를 쓸 것이다. 그리고 혹 치유가 되어 자신의 삶을 다시 하나님께 드리기로 작정했다고 하자. 하지만 교회 안에는 그 자매의 사정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참 이혼한 주제에, 자기 사생활이나 똑바로 하지, 뭐 그렇게 교회 나와서 봉사를 한다고….” 라고 하며 따가운 시선을 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그분의 형상대로 만들어 졌으며, 우리의 죄로 인해 분리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예수님의 희생으로 인해 다시 회복되었다고 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어느 일부의 사람들만을 구원하러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천국의 소망을 주러 오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다양성을 이해하시고 사랑하신 그분의 모습을 엿보게 한다. 그럼으로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천들은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를 사랑으로 대하신 것처럼 각자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요한 1서 4장).


야고보서 2장은 우리에게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전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사람을 외모나 그 배경으로 판단하는 것을 금하신다는 것이다. 곧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적인 모습보다는 중심을 보신다는 뜻을 의미한다. 에베소서 4장에서도 성경은 “인간의 다양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당시 에베소교회는 헬라파와 유대파 그리스도인들로 나누어져 분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배경(background)이 다른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을 이해하라고, 너희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고 선언한다.


우리들은 우리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눈에 보이는 외적인 모습만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심지어는 교회 내에서조차 쉽게 편견의식을 버리지 못해 갈등과 파벌을 일으킬 때가 있다. 말로는 그들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행동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을 때가 많다. 야고보서 2장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말한다. 결국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 외적인 부분으로 사람을 판단하며 이로 인해 공동체에서 누군가를 소외시킨다면 이것은 믿는 자의 삶의 모습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개개인의 다양한 모습들, 그 자체를 이해하고 존중해 주며,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 다양성(diversity)에 대한 올바른 성경의 이해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다양성을 인정하고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될 때, 결국에는 이러한 다양한 모습, 그리고 다양한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