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 2, 2002 | 삶과 신앙/황지성의 순종과 회복
순종과 회복
순종으로 회복되는 위로
지난 9월 19일, 911 참사 일주기를 맞는 시점에서 그의 Opera <Nixon in China> 로 잘 알려진 John Adams는 2002-2003 개막시즌 연주곡으로 뉴욕 필하모니를 통하여 그의 새 작품 <On The Transmigration of Souls>를 선보였다.
이 작품은 911참사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고전적인 쟝르의 음악과는 달리, 희생자들의 이름들이 그들의 유가족들이나 친구들에 의해 읽혀지는 목소리, 도심 속의 여러 잡음들, 실종자들을 찾는 메모들을 가사로 해서 만들어진 합창곡들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을 들으면, 여객기가 타워에 부딪힌 직후 그 충격적인 순간의 혼돈감과 그 빌딩의 깨어진 창문들로부터 흩어져 내리는 수 많은 사람들의 아픔이 숨막히게 다가온다. 그 작품의 제목이 시사하는 이교도적인 냄새는 일단 뒤로 하고, 사람들은 그의 이 작품이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위로가 되어 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많은 말들과 소리들의 원래의 의미가 현대적 매체들의 조작과 이기적인 상황화의 논리들 속에서 왜곡되어지는 이 때에, 그 소리들을 낸 사람들의 본래의 마음들이 그 작품에 그대로 표현되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또한 오랜만에 예술이라는 매체가 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 속에 녹아 있는, 사람들의 진실을 보여주기 위해 쓰여지는 것을 보는 신선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올 연초에, John Adams 가 처음 그 작품의 작곡에 대한 요청을 받았을 때에 그의 심정이 어떠했는가에 대해 빌보드잡지의 기자가 묻는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대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Although I had absolutely no intention of writing such a piece, the day the request came through I knew immediately that I not only wanted to do the piece but that I should do it.” 그리고 작품을 완성한 후에 그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 “… and I have done my best to create a piece that honors those emotions without exploiting them.” 적어도 우리는 그에게서, 자신의 실험정신을 표현하는데에 그 작품을 이용하기보다는 사람들의 고통을 꾸밈없이 표현하려고 하는 노력으로 그 작품을 썼다는 그 “compassion”의 마음을 배워야 한다. 그의 이 “compassion”의 마음은 제쳐 두고라도, 사람들의 소리를 왜곡없이 있는 그대로 표현해 줄 수 있었다는 것 자체로도 많은 사람들이 적지 않은 위로를 받았다는 사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어떠한가? 사실 우리는 자기 자신이 좀 성숙한 믿음을 가졌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고통받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자신감 같은 것을 갖기 시작한다. 그에게 충고와 조언을 해줌으로써 그 사람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에 사로잡히고 마는 성향이 있다. 그런데 막상 사람들이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고통으로 인해 믿음의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의심을 제기할 때에, 정말 같은 마음(compassionate heart)으로 그 고통의 깊이를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상대방의 마음을 찢어놓는 충고와 경망스러운 조언으로 그들의 마음을 아주 닫히게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소위 “유명한” 상담전문가들의 강의를 듣게 되는 경우, 정말 당혹감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개 상담전문가들의 강의에서 많이 들을 수 있는 것이 그들의 상담사례들인데, 심각한 문제들을 갖고 찾아왔던 내담자의 문제들을 소개하는 그의 마음 속에 내담자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깊은 위로의 마음이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순간 당혹감을 넘어서 분노의 감정까지 갖게 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심지어 어떤 “전문가”들은 내담자들의 삶의 부족한 점들을 들추어 내어 강의에 온 사람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려는 것을 목적으로 강의를 진행해 나간다.
이것은 예수님의 방법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태도이다. 누가복음 7장18-30절까지의 말씀은 의심에 사로잡힌 한 인간에 대한 우리 주님의 마음이 어떠했는가를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다. 침(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감옥에 갇혀 곧 죽게 될 것을 느끼면서 그는 정말 예수라는 인물이 메시야이신가를 확인하고 싶어졌다. 아마도 그의 이러한 답답한 심정은 자신의 겪고 있는 상황이 과거 수 세기 동안 유대왕국의 역사 속에서 펼쳐졌던, 선지자와 왕의 관계에서 진행된 보편적인 상황과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펼쳐지고 있는 것에 대한 당혹감에 근거했을 가능성이 많다. 헤롯에 대한 정직한 예언의 소리에 정치지도자가 심판받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인 자신이 무기력한 자리로 묶여져 이제 곧 죽음을 앞두게 된 상황에서 이러한 “의심”은 선지자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었던 요한에 있어서도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요한이라는 인물에 대한 주님의 평가는 이러한 그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으신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요한이 보낸 사람들이 돌아간 후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요한이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가를 다시 한번 상기시키셨다. 주님은 고난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극한 상황의 요한이 충분히 그러한 의심을 가질 수 있음을 깊이 이해하셨다. 그리고 그의 고통의 깊이를 같이 느끼셨다. 우리는 마태복음 4장12절부터 기록된 주님의 삶을 보면서 요한의 죽음 이후에 주님께서는 그에 대한 더 깊은 “compassion”을 갖게 되셨음을 느낄 수 있다. 요한의 죽음을 들으신 후, 갈릴리로 가셨다가 자라났던 정든 고향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가서 사시기로 작정하시고 (12-13)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18)…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23)…. 극심한 고난을 받고 죽은 믿음의 동역자이며 형제인 침(세)례 요한에 대한 주님의 깊은 “compassion”으로 인한 감정의 교차가 주님의, 마치 방황하시는 듯한 다니심으로 나타났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이신 주님에게 있어서 이 사랑의 마음은 “compassion”을 넘어서, 인간의 연약한 모습을 그대로 받아주시는, 오히려 관용이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마음을 닮는 “compassion”의 마음은 철저한 자기 부인과, 연약한 사람을 향해서 마땅히 취해야 할 자기 권리를 포기하는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성숙한 믿음의 선배, 사도바울의 노년의 삶에서도 이와같은 위로와 관용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지난 날에 치명적인 잘못을 저지른 형제를 공동체 안에서 다시 세우기 위해 애쓰는 아름다은 삶의 모습을 우리는 그가 옥중에서 쓴 서신, 빌레몬서를 통해 잘 엿볼 수 있다. 성경에 암시된 대로, 아마도 막대한 금전적인 손해를 끼치고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로부터 도망친 오네시모가 믿음의 공동체에게, 특히 그의 옛주인 빌레몬에게 다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하고 있는 바울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에서, 오네시모를 관용으로 받아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종이 아닌 동역자로서 그 옛종 오네시모를 받아줄 것을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 오네시모와 빌레몬의 관계가 회복되어야하는 이유가 오히려 바울 자신의 영혼이 새롭게 되는 큰 위로를 경험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하면, 바울 자신의 영혼이 오네시모와 빌레몬의 깨어진 관계로 인해 그동안 정말 깊은 고통 가운데에 있었다는 고백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위로자는 자기 자신이 위로해야 할 사람을 위로하는 삶을 넘어서서 세상사람들이 서로 위로할 수 있는 자리로 갈 때 그 회복되는 삶의 모습들을 보고 스스로가 위로를 경험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한편 바울은 빌레몬에게 있어서 이 관용과 위로의 과정이 자기 의지를 복종시켜 순종해야 할 과정임을 알고 있기에, 빌레몬을 향해서 다시 한번 순종하라는 권면을 하고 있는 것이다(21절).
4 I thank my God always, making mention of you in my prayers, 5 because I hear of your love and of the faith which you have toward the Lord Jesus and toward all the saints; 6 and I pray that the fellowship of your faith may become effective through the knowledge of every good thing which is in you for Christ’s sake. 7 For I have come to have much joy and comfort in your love, because the hearts of the saints have been refreshed through you, brother. 8 Therefore, though I have enough confidence in Christ to order you to do what is proper, 9 yet for love’s sake I rather appeal to you–since I am such a person as Paul, the aged, and now also a prisoner of Christ Jesus– 10 I appeal to you for my child Onesimus, whom I have begotten in my imprisonment, 11 who formerly was useless to you, but now is useful both to you and to me. 12 I have sent him back to you in person, that is, sending my very heart, 13 whom I wished to keep with me, so that on your behalf he might minister to me in my imprisonment for the gospel; 14 but without your consent I did not want to do anything, so that your goodness would not be, in effect, by compulsion but of your own free will. 15 For perhaps he was for this reason separated from you for a while, that you would have him back forever, 16 no longer as a slave, but more than a slave, a beloved brother, especially to me, but how much more to you, both in the flesh and in the Lord. 17 If then you regard me a partner, accept him as you would me. 18 But if he has wronged you in any way or owes you anything, charge that to my account; 19 I, Paul, am writing this with my own hand, I will repay it (not to mention to you that you owe to me even your own self as well). 20 Yes, brother, let me benefit from you in the Lord; refresh my heart in Christ. 21 Having confidence in your obedience, I write to you, since I know that you will do even more than what I say.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복하면 그 허물을 전혀 기억하시지 않는 분이시며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에 같이 마음 아파하시는 아버지 이시기에 그의 자녀된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따라 서로 위로하는 삶을 살아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또한 세상의 깨어진 관계들을 볼 때에 같이 마음 아파하고 그 관계들이 회복될 때에 기뻐하는 평화의 자녀들로 살아드릴 수 있도록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
작년 이맘 때, 911 사건이 지난 약 1주일 후, 직장 동료로부터 한 이메일이 포워드되어 날아왔다. 날아온 이메일에는 그림 하나가 어태치되어 있었다. 펜실바니아의 Bouwd라는 한 어린이가 그린 그림…. 그 빌딩 안에 있었을 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 안에 있었을 하나님의 아들들과 딸들, 그러나 애타게 바라보기만 해야했던 그들의 가족들, 그들도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했을까? 과연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이런 질문들을 들으며 마음이 착잡한 나에게 이 그림은 진정한 위로자 예수 그리스도의 눈물과 사랑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메시지였다. 그 고통의 현장 가운데에서도 보이지 않는 손길로 함께 하셨던 주님의 위로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메시지였다.
911참사를 제쳐 두고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촌 곳곳에서는 911사건과 버금가는 비극들이 일어나고 있다. 매일 설사로 죽어가는 1,4000명의 영아들, 매일 폐렴으로 죽어가는 7,500명의 어린이들, 15억의 무숙자들, 인권탄압으로 갖혀 있는 80만의 사람들, 6천만명의 고아들, 인종청소전쟁으로 어제밤에 학살당한 마을, 이름도 없이 죽어가는 수백만명의 낙태아들…. 이 지구촌의 죄악 속에서 우리 하나님은 매일 울고 계시고 같이 고통받고 계신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가 사는 그 곳에서 고치고 위로하라고.
(필자 주) 한국 선교 정보 원구원 http://www.krim.org 의 자료실에 가시면 지금 지구촌의 많은 사람들이 어떤 고통 가운데에 있는가를 자료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지구촌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같이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Aug 2, 2002 | 삶과 신앙/황지성의 순종과 회복
순종과 회복
순종으로 회복되는 예배
조지 바나 연구소의 보고에 의하면,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태어난 세대, 소위 베이비부머들이 중년의 나이에 들면서 기독교인이 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한 세대가 채 지나기도 전에 이들이 다시 교회를 떠나고 있다고 한다.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내세운 가장 큰 이유는, 교회들이 첨단 문화적 장비를 위해서는 막대한 예산을 투자함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담아져야할 복음의 메시지를 담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복음의 메시지를 듣기 위해 교회에 나왔지만 강단에서는 복음이 선포되지 않고, 삶을 투자할 만한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서 교회에 나왔지만 리더십들은 그것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뼈아픈 지적이었다.
기독교 인구의 이러한 감소는, 비록 양상은 어느 정도 다를 지 몰라도, 이와 거의 비슷한 이유, 즉 강단에서의 복음선포의 약화와 리더십의 질적 저하로 인해 지금의 한국교회 내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이러한 기독교인구의 감소를 뒤늦게나마 깨닫고 한국교회들은 ‘구도자 품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어쩐지 아직도 많은 교회들이 그 해결의 열쇠인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삶의 갱신보다는 전도에 도움이 될 수 있을 만한 문화적인 프로그램을 예배와 접목시켜보려는 피상적인 해결책에 집중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다. 한국교회 안에서는, 이미 미국인들의 주류 교회에서는 사라지기 시작하고 있는, 멀티미디어 사용이나 연극과 같은 문화적 시도들을 도입하는 일을 전도의 기본수단으로 하려는, 소위 ‘열린 예배’ 바람이 뒤늦게 불고 있다. 불신자(혹은 구도자)들과의 문화적 접촉을 시도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의도로 많은 교회들이 앞을 다투어 이 ‘열린 예배’를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 그 ‘열린 예배’는 본래 의도대로 진정한 의미의 성공을 거두어 한국교회들 안에 자리를 잡았다기 보다는 이를 위해 애쓰고 힘쓰고 있는 과정에 있는 것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아직도 성장의 정체 가운데에서 고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교회들은, 우리는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그 성장의 속을 들여다보면 다른 교회교인들이 수평이동을 해 온 경우가 대부분이다. 불신자가 믿게 되어 새 신자로 등록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게 보는 현상이 되어버렸다. 이 ‘열린 예배’가 본래의 목적인 불신자가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이유는 역시, 앞서 미국의 베이비부머들이 지적한 대로, 그 예배 속에 생명력 있는 복음의 메시지가 충실히 표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강단 혹은 예배를 섬기는 자들인 그리스도인들이 전달하는 여러 유형의 메시지 속에 복음의 생명력이 없기 때문이다.
열린 예배를 준비하는 선한 동기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예배의 생명력이 없을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그 생명력을 인간의 열심과 자의적인 열정으로 창출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 생명력은 그리스도인 개인의 경우에는 ‘개인의 인격을 전격적으로 바꾸신 성령님의 능력’으로부터 나온다고 하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적으로는, ‘성령님의 임재와 능력으로 열린 교회’가 되려는 몸부림이 없기 때문이다. ‘열린 교회’가 된다는 것은, 교회가 잃어버린 영혼들을, 그가 어떠한 조건을 가진 사람이든지, 하나님의 사랑으로 받아주고 성장시킬 수 있는 교회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행사와 제도의 껍데기를 벗고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에게 다시 초점을 맞추는 그 회복의 탈바꿈을 의미한다.
이렇게 보면 사실, ‘열린 예배’의 성공의 열쇠는 그 예배의 프로그램을 얼마나 세련되게 만드는 가에 달려있다기보다는 먼저, 그 예배를 준비하고 섬기는 교회가 먼저 ‘열린 교회’가 되느냐 되지 못하느냐에 달려있다. 교회가 이렇게 ‘열린 교회’로 거듭나면, 이 ‘열린 교회’의 살아 숨쉬는 복음의 생명력은 교회의 모든 사역 속에서 자연스럽게 넘쳐나, 예배 속에서도 드러나게 되어있다. 이러한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 속에서, 그 예배가 열린 예배이든 “닫힌 예배”이든 연령과 문화적 배경과 인종을 초월하여, 구도자들은 이 복음의 생명력 앞에 회심하게 되어있다. 예배가 복음전도의 수단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건이 되어 그 경배 속에서 높임을 받으시는 분, 하나님의 임재가 심지어 구도자들에게도 강권적인 은혜로 체험되는 사건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동체 예배의 일차적 목표는 먼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이다. 공동체 예배를 준비하며 섬기는 자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며 이를 위해 준비해야 한다. 그 준비는 예배의 프로그램을 세련되게 만들어 가는 데에 그 핵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개개인의 삶이 먼저 복음의 생명력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 그 삶을 주께 드리는 데에 있다. 이 예배로 나아가는 사람들이란 예배에 임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다 포함한다. 말씀을 전하는 자나 예배의 프로그램 속에서 섬기는 자들은 더욱 그러해야 한다. 그 생명력이 넘쳐나 예배의 모든 순서 가운데에 자연스럽게 흘러 넘칠 때 하나님의 임재가 경험되어진다. 그러므로 감격적인, 하나님의 임재가 체험되는 예배가 되느냐 되지 못하느냐의 승부는 이미 예배로 나아가기 이전의 우리의 삶 속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공동체 예배로 나아가는 예배자의 진정한 모습은 다윗의 찬양시, 시편 68편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찬양시는 삶의 충만한 은혜의 경험을 갖고 예배로 나아가는 다윗의 모습을 잘 나타내준다. 이 예배하는 삶, 삶 속에서의 예배의 경험은 다윗의 생애 동안 함께 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혜에 근거한 것이었다. 다윗은 그가 아직 소년 때에, 사울 왕을 폐하시기로 결정하신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를 통해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기름부음을 받은 즉시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왕이 되기까지 적어도 20년을 많은 위험과 환난을 통해 연단을 받았다. 그를 죽이기 위해 맹렬히 추격하던 사울 왕이 죽은 때에 그의 나이는 이미 30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 후에도 약 7년 동안을 사울 왕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우려는 세력과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정해진 때에 그는 그가 기름부음을 받았던 헤브론 산지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또한 정해진 때가 되어, 새 수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하나님의 법궤를 옮기게 되었다. 그 때에 그가 이 때의 기쁨과 감격 가운데 노래하는 것이 바로 본문의 찬양시이다. 다윗의 마음 속에는 그 험난한 세월동안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 대한 감격이 있었다. 처음에 기름부음을 받을 때 그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시기 위해 그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격하면서 예루살렘 성으로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 것은, 예배자로서 올라가는 다윗은 이미 회중(백성) 가운데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찬양하는 사람들과 함께 동행하며 올라가고 있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법궤가 그들과 함께 들어간다는 단순한 고백이 아니었다. 신실하시고 능력 있으신 하나님께서 허물 많았던 다윗 자신과 백성을 지난 20여 년동안 어떻게 인도하시고 존귀케 하셨는가를 감격하는 기쁨이 담겨있는 고백이다.
18 Blessed be the Lord, who daily bears our burden,
The God who is our salvation. Selah.
19 God is to us a God of deliverances;
And to God the Lord belong escapes from death.
24 They have seen Your procession, O God,
The procession of my God, my King, into the sanctuary.
25 The singers went on, the musicians after them,
In the midst of the maidens beating tambourines.
26 Bless God in the congregations,
Even the Lord, you who are of the fountain of Israel
그러므로 다윗과 백성들은 공동체로서 드리는 예배의 처소로 나아가면서 (in His procession) 이미 감격적인 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감격적인 예배가 되느냐 않느냐의 승부는 이미 예배로 나아가기 이전의 우리의 삶 속에서 결정된다고 하는 귀한 간증적인 사건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도 공동체의 예배의 회복은 나 하나의 삶 속에서 내가 붙들고 살았던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감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한다. 이 감격은 성령님의 폭발적인 능력을 삶 속에서 체험하고, 하루 하루, 순간 순간 순종의 예배를 드린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감격이다. 이러한 삶의 경험을 갖고 모이는 공동체의 예배 가운데에는 반드시 성령님의 폭발적인 역사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회복과 치유와 성결의 역사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은혜로 인한 회심이 역사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공동체의 예배갱신을 말하려면 먼저 나의 삶 자체를 돌아보자. 나의 삶이 얼마나 주님을 예배하는 삶인가를 먼저 돌아보자. 감격적인 예배로의 회복은 나의 일상적인 삶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로마서 12장에 있는 명령처럼 나의 몸, 나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드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나는 지금 내가 속한 지역교회, 혹은 공동체의 예배 속에서 감격과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여 안타까워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먼저 나의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체험되는 나의 예배생활이 회복되도록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 드리자. 그리고 주변의 형제들도 같은 예배의 회복을 그 개인의 삶 속에서 경험할 수 있도록 말씀과 기도로 서로 서로를 격려하며 섬기자! 강단의 메신저도 이러한 예배생활의 회복을 그 개인의 삶 가운데에서 체험할 수 있게 되기를 믿음과 인내로서 간구하자!
Therefore, I urge you brethren, by the mercies of God, to present your bodies a living and holy sacrifice, acceptable to God, which is your spiritual worship. (Rom12:1)
Jun 2, 2002 | 삶과 신앙/황지성의 순종과 회복
순종과 회복
순종으로 회복되는 사랑
‘사랑’이라는 말처럼 남용되고 오용되는 말이 없다. 그 혼란스러운 사용의 결과로, 현대인들은 모두가 다 사랑에 대한 각자의 개념을 갖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숭고한 사랑을 이야기 할 때에도 사람들은 각자 다른 그림들을 머리에 그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사랑처럼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중요한 것이 없기에 그 옛날 사색하기를 좋아하는 희랍인들은 현대인들이 그저 뭉뚱그려 말하는 그 사랑이라는 개념을 굳이 여러 가지로 구별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동물들의 본능적인 행위에서도 볼 수 있는, 부모의 자식이나 가족에 대한 애정을 표현할 때 쓰는 동사, stergo(성경에 쓰이지 않음), 남녀간의 주로 이기적이고도 육체적인 감정을 말하는 erao (성경에 쓰이지 않음), 지식에 대한 열망이나 친구간의 우정, 형제간의 친밀감을 말하는 phileo (성경에 24번 등장), 그리고 흔히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할 때 쓰이는, 자기 희생적이며 책임감을 동반하는 agapao (성경에 125번 등장), 이렇게 희랍인들은 다른 종류의 사랑들을 분명히 구별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유명한,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눈 높이 사랑’을 이야기 할 때 자주 예로 등장하는 본문, 요한 복음 21장에서 이 두 가지 다른 동사, agapao와 phileo의 개념 차이를 더 확실히 볼 수 있다. 부활하신 주님이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실 때에 첫 두 번은 agapao로 물으셨고 베드로가 계속 수준 낮은 사랑, phileo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두 번 대답했을 때에 세 번째 질문에서 주님께서는 agapao대신 phileo의 동사를 써서 다시 물으신 사건이다.
그런데 사실 현대인들은 이 사랑의 다른 모습들을 굳이 구별하려 하지 않는다. 아니, 굳이 구별하는 것을 싫어한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자기 희생적이거나 책임감을 동반하는 사랑은 이미 현대인들의 삶과는 무관한 추상적인 사랑의 개념이 되어버렸다. 세상은 온통 말초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이야기나 노래 따위들로 범람하고 있다. 심지어 아이들이 읽는 동화책을 보면 동물의 원초적인 보호본능들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그 이야기들을 감동으로 채색해버린 이야기들이 수도 없이 많이 있다. 어린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친 개의 이야기라든지, 가난한 주인을 위해 금조각들을 날라주다가 지쳐서 죽어버린 제비라든지… 사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서로 미워하고 죽이는 이 험한 인간세상에서 사랑을 찾기보다는 차라리 동물들의 원초적인 본능에서 그 사랑을 보는 것이 희망적이라고 하는 인간 스스로의 절망적인 절규일 지도 모른다. 이러한 사랑에 대한 혼돈스러운 인식은 비단 세상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현대의 그리스도인가운데에서도 만연되어있다. 우리가 흔히 아가페의 사랑을 산다고 생각하고, 조금 선하게 그리고 자기만족의 감동을 느끼면서 하나님께서 부으시는 아가페의 사랑을 사노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예수께서 말씀해주시는 세 가지 비유가 나온다. 첫 번째 비유는 ‘잃은 양의 비유’이다. 한 목자가 백 마리의 양을 넓은 들판에서 먹이다가 해질녘에 자기 양들의 숫자를 세어보다가 매우 당황하게 된다. 자기가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새끼 양 한 마리가 안 보이는 것이다. 자식같이 애지중지하던 정말 소중한 새끼 양 하나가 사라졌다! 너무나도 자식같이 소중한 양이기에 앞이 캄캄해지면서 제정신이 아니다. 그리고 그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그냥 들에 팽개쳐두고 그 잃어버린 양을 찾아 험한 계곡이나 산지를 뛰어다닌다. 사랑하는 새끼 양에 대한 거대한 상실감은 그 목자가 다른 아홉 마리의, 역시 소중한 양들을 그냥 팽개쳐버리는 그 비합리적인 행동에 너무나 잘 표현되어있다.
나는 이 말씀을 읽으며 감동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소중한 사람들, 특히 나에게 주신 육신의 자식들이나 혹은 말씀으로 섬길 수 있는 영적인 “자녀”들을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셔서, 비록 때로는 어렵고 힘든 순간에도 내가 이들을 잘 돌보고 사랑할 수 있는 나의 이 마음에 스스로 감동하고 이런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주님의 마음을 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기도를 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수년 전, 나는 내 아들이 한 다섯 살쯤 되었을 때, 어느 밤길에서 이 아이를 잃어버린 경험을 한 후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날 밤, 나와 내 아내는 정신없이 헤매며 잃어버린 아이를 찾아다녔다. 우리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둘째 아이를 마치 팽개치는 심정으로 어느 누구에게 맡기고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온 마을을 헤매며 다녔다. 그리고는 극적으로 아이를 다시 찾았다! 이 잃은 양의 비유를 떠올리며,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는 목자,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며칠 후 이 본문말씀을 다시 읽으면서 한 구절의 말씀이 내 마음을 찌르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What man among you, if he has a hundred sheep and lost one of them, does not leave the ninety-nine in the open pasture and go after the one which is lost until he finds it? (15: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그렇다! 그토록 사랑하는 자식을 잃었을 때에 그 자식을 찾아 헤매는 것은 바리세인과 서기관들과 같이, 얼어붙은 가슴을 가진 사람들도 할 수 있는 사랑이다. 아니, 가슴에 주님의 사랑이 없는 나도 그렇게 할 수는 지극히 본능적인 사랑의 표현이었다. 나는 분명히 아가페의 사랑이 없는 사람임을 말씀 속에서 깨달았다. 그 수많은, 자식을 잃어버리고, 그 상실감으로 울부짖는 부모들을 향해 무관심하게 살아왔지만 내 사랑하는 자식을 잃었을 때에는 정신을 잃고 헤매는 나의 이기적인 사랑…
두 번째 비유에서 주님은 계속 말씀하신다. 비록 자식과 같이, 목숨같이 소중한 새끼 양은 아닐지라도 여인의 생명을 건 명예와도 같은, 정말 소중한 열 드라크마중의 하나를 찾는 여인의 심정을 말씀하신다. 온 집안을 쓸고 닦은 후에, 혼신의 노력 후에 찾아진, 그 소중한 한 드라크마를 들고는 기뻐 뛰며 즐거워하는 여인의 심정을 말씀하신다.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잃고 그것을 다시 찾는 것은 매우 기쁜 일이다. 주님은 분명 우리가 이 기쁨을 맛보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잃어버린 영혼 하나를 찾는 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며 이 일이야말로 우리의 삶 전체를 바쳐도 후회하지 않을 정말 귀중한 일이다.
그러나 세 번 째 비유, 소위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는 주님의 마음에서 우리는 앞의 두 비유에서 느낄 수 없는 슬픔 같은 것을 먼저 느끼게 된다. 이 이야기는, 아버지의 기쁨이며 자랑인 두 아들 중 둘째가 그 아버지를 마음속으로 살인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어느 날, 자기 재산의 분배를 찾기 위해 찾아온 아들의 마음속에 있는 그 아비는 그 아들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죽어있는 존재였다. 그 아들은 마음속으로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 내 재산을 좀 빨리 갖고 싶은데 당신은 왜 이 나이가 들도록 아직까지 살아있는 지 모르겠어…” 이 둘째 아들의 요청을 듣고는, 아버지는 그가 가진 모든 재산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준다. 그리고, 재산을 받은 그 둘째는 재빨리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로 떠나버린다. 사실 인간이란 본래 이렇게, 나를 창조하시고 나와 함께 있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마음속으로 죽이고 내 자신만을 위한 욕심으로 인생의 길을 스스로 가는 사람이 아닌가… 이 인간의 실존이란 이런 면에서 하나님의 배반자이며 그러므로 소중히 여김을 받을 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이 비유는 계속, 파멸의 길로 들어서서 추락해 가는 아들과 그 배반자이며 살인자인 아들이 그래도 다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셨다가 그 돌아온 아들을 다시 기쁘게 받아주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그려내고 있다. 이것이 바로 죄인과 세리들, 그리고 바로 나를 향한 주님의, 아가페의 사랑이었다.
소중함의 여김을 받지 못할 것을 사랑하는 사랑,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부으신 아가페의 사랑, 우리는 얼마나 많이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듣고 그리고 나도 이 사랑의 사람의 되려고 몸부림치며 살고있는가? 십자가에서 아직도 주님을 저주하고 모욕하는, 사랑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시며 그 몸을 아낌없이 내 주시고 고난 당하신 그 사랑을 생각하면 나도 그 사랑으로 살고 싶은 열망이 생기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 열망이 강하면 강해질수록 내 꿈틀거리는 자아의 자존심과 이기적인 모습에 날마다 좌절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의 사랑을 생각해야 쓰러지지 않는다. 날마다 십자가의 사랑을 이야기해야 살 수 있다. 내가 삶 속에서 사랑을 보여줄 기회가 주어질 때,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은 나의 본능적이며 감상적인 사랑과 얼마나 다른가를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하자! 나의 마음을 찢는, 원수와 같은 사람에게 감동적인 사랑을 부을 수 있는 자리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반드시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더 명확하게 드러내자! 나의 사랑을 통하여 주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자아가 죽음으로써 주님의 사랑이 온전하게 드러날 수 있음을 고백하자!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나의 자아를 죽이는 순종을 통하여 온전히 회복될 수 있음을 고백하며 살아가자! 전도자는 삶을 섬기는 사랑으로 살아야 하지만 자신의 섬기는 사랑으로 세상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지 않도록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십자가 뒤에 숨어야 한다. 주님의 그 사랑만이 온전히 드러나기 위해서…
May 2, 2002 | 삶과 신앙/황지성의 순종과 회복
순종과 회복
순종으로 회복되는 기쁨
Holocaust를 주제로 한 영화가운데 <Sophie’s Choice> 라는 영화가 있다. 두 아이를 가진 유대인 엄마, Sophie가 포로수용소로 가족과 함께 실려가던 중 나찌의 무자비한 총구 앞에서 두 아이 중 한 아이만을 계속 데리고 갈 수 있으며 다른 아이는 사살당할 것이라는 위협을 받는다. 그 엄마는 가슴을 찢는 고통과 숨막히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그 중 한 아이, 아들을 택해야만 했다. 그 영화는 엄마의 고통스런 절규를 화면 가득히 채운다.
선택이란 삶의 순간마다 주어지는 부담이며 많은 경우에 그것은 마음의 갈등과 고통을 수반한다. 특별히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이 말할 수 없는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우리의 인생이란 날마다 순간마다 선택이라고 하는 두 갈래 길에서 한 길을 선택하며 살아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선택은 대단한 용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겨우 용기를 내어 한 길을 선택한 순간, 우리는 많은 경우에 마음에 큰물처럼 밀려오는 불안감을 느끼지 않는가? 그 불안감은, 그 두 갈래 길에서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다른 한 길이 만일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길이었다면 나의 인생의 발걸음은 이제 실패로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다. 이 순간에 우리는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나의 믿음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것을 느끼지 않는가?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불안한 갈등과 고민 속에서도 확실히 붙잡을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며 살기를 원하시며 아버지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우리의 삶이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원하신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고 나면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두 가지의 의문이 즉각적으로 제기된다. 첫째는 어떤 어려운 결정의 순간에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확실히 분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며 둘째는 나의 의지를 ‘고통스럽게’ 쳐서 복종시키는 이 순종하는 삶이 도대체 어떻게 기쁨이 충만한 삶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먼저 이 물음들에 답하기 전에 이 물음들 앞에 서 있는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의 참다운 실존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내가 이전의 존재가 아닌 전혀 새로운 피조물로 완전히 변화된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산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라(according to)’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기 이전에 아버지의 자녀’로서(as)’의 삶을 사는 것을 먼저 의미한다. 이 그리스도인의 참다운 실존을 바로 이해하는 순간, 앞서 제기된 난해한 질문들이 비로소 풀리기 시작한다. 그 구체적인 해답이 로마서 11장 이후에 나와있다. 로마서 11장까지에서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가 하나님의 심판(condemnation), 칭의(justification), 성화(sanctification), 그리고 선택하심(sovereign choice)을 통해 우리에게 어떠한 은혜로 보여졌는가가 조목조목 설명된 후 이제 성경은 이 은혜로 말미암아 변화된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를 말씀하기 시작한다. 로마서 12장의 서두, 1절과 2절을 주의 깊게 살펴보자. “Therefore I urge you, brethren, by the mercies of God, to present your bodies a living and holy sacrifice, acceptable to God, which is your spiritual service of worship. And do not be conformed to this world, but be transformed by renewing of your mind, so that you may prove what the will of God is, that which is good and acceptable and perfect.” 여기서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할 성경의 중요한 약속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려질 때, 즉 그 삶이 이 세대를 본받는 것이 아닌, 새롭게 태어나 계속적으로 변화되는 (transform, metamorphsis) 삶이라면 하나님의 뜻 즉 하나님의 의가 그 삶 속에서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좀 더 명확하게 말해서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 속에서 ‘prove by testing (dokimazein)’ 즉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있다는 약속이다. 이 선언은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없는 애매한 상황이 너무나 많다고 불평하는, 아직도 변화되지 못한 우리의 삶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도전의 말씀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말씀은 우리를 얼마나 자유케 하는 은혜의 말씀인가? 아버지의 의로운 뜻이 순종하는 자녀들의 삶을 통해 내가 경험할 수 있도록 드러나게 된다는 이 말씀은, 아버지께서 자녀된 우리들이 선택하고 살아가는 삶의 순간 순간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기쁨을 주신다는 은혜의 약속의 말씀이 아닌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나의 삶 속에서 나타나기 위한 열쇠는 먼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나의 삶을 명도하는 순종함의 믿음에 있다. 바로 나의 영혼이 얼마나 하나님의 영의 임재로 충만한가 하는 데에 있다. 나의 가슴이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넘치는가 하는 데에 있다. 나의 마음이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열망으로 얼마나 가득 차 있는가 하는 데에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로, 위대한 전도자 Moody선생이 그의 생전에 쓰시던 성경책에는 “T, P” 라는 두 글자가 깨알같이 적혀있었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거듭난 그가,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try” 하였더니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그대로 자신의 삶을 통해 “prove” 되었다고 하는 유명한 간증이다. 하나님의 뜻이란 우리의 순종을 요구하기 위해 먼저 드러나기보다는 오히려 순종하는 하며 사는 사람들의 삶 가운데 드러날 수 있다고 하는 놀라운 간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나의 삶의 선택과 결정 속에서 발견되어지고 이루어지는 삶의 진정한 기쁨은, 나의 노련한 판단과 재빠른 기회포착으로 이루어지기보다는, 어떤 결정으로 인한 결과에서도 하나님의 인도를 기대하는 믿음과 그 인도하심이 보일 때에 그 인도하심에 순종하려는 결단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도행전 16장에 있는 사도 바울과 그의 일행의 경험에서 이 교훈을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다. 제 2차 전도여행을 떠나면서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는 시리아의 안디옥을 떠나 육로로 에베소가 있는 서쪽 아시아 지역으로 가려고 길을 떠났으나 하나님께서 그 길을 막으신다. 결국 그들은 북쪽에 있는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거기서 그들은 다시 갈라디아의 북쪽에 위치한 비두니아 땅으로 가려고 했으나 하나님께서 그 길을 다시 막으신다. 할 수 없이 방향을 틀어 북서쪽, 에게해의 동편에 위치한 드로아 항구로 가게 된다. 결국 그 곳에서 그들은 마게도니아의 한 사람이 배를 타고 에게해를 건너와 우리를 구해달라고 청하는 환상을 보게된다. 마침내 그들은 빌립보, 데살로니가, 고린도, 에베소로 건너가 그 곳의 많은 영혼들을 구하는 사역을 이루게 된다. 그들은 주님의 복음을 전하려는 분명한 목적과 주님을 사랑하는 열정으로 순간순간 자신들의 마음의 확신이 주는 선택으로 방향을 결정하고 행동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순종에 대한 의지와 주님을 사랑하는 열정을 보시고 그들을 최적의 목적지로 인도하시기로 결심하신 주님께서는 적절한 순간마다 그들이 결정하고 가는 길의 다른 방향들을 막으시고 가야할 방향은 열어놓으시면서 결국은 그 최적의 목적지까지 인도하신 것이다.
주님을 사랑함으로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도 사도들에게 나타났던 동일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나타남을 잊지 말자! 먼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길을 떠나야한다. 주님께서는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목적지로 기꺼이 가고자하는,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 길을 떠나자! 그리고 지금은 비록 확실히 보이지 않는 그 목적지라 할 지라도 그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 주님께서 인도하시리라는 믿음에 흔들리지 말자! 때로는 우리가 그 가는 길에서 크고 작은 결정들을 내려야 한다. 그러나 이제는, 마치 두 갈래 길들로 계속 전개되는 것 같이 느껴졌던 우리의 인생이 고통스러운 선택의 연속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나의 삶 속에서 하나하나 체험해나가는 신나는 ‘wonderpath’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내리는 우리들의 결정들 앞에서 우리는 자유하자! 왜냐하면 성경에 있는 약속의 말씀이 증거 하듯이, 우리의 중심에 진정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열망이 있었다면,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결정들을 내렸다면 그 결정들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가 예측하지 못하는 방법으로라도 하나님의 의를 반드시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예정하신 뜻이 우리의 순종으로 우리의 삶 가운데에 이루어지는 것을 보는 일이야말로 인생의 흥분되는 기쁜 경험이 아니겠는가? 지금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심각한 인생의 결정을 놓고 방황하며 절망하고 있다면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과 임재가 회복되도록 기도하자.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수 있는 마음이 되도록 기도하자. 그러면 주님께서 주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보이시고 이루시기 위해, 혹 우리의 연약함으로 내린 결정으로 초래될 지 모르는 위험한 길과 굽은 길을 막으시고, 가장 선하신 길로 인도하실 것을 믿고 기뻐하자. 먼 광야와 같은, 미래가 아득하고 잡히지 않는 우리들 유학생의 때야말로 이 순종의 믿음이 절실히 필요한 시기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