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상] 직선적 사고에 의한 신앙의 위험성 (물질주의)

이코스타 2007년 4월호

박사 과정 초반, Qualifying exam 때 있었던 일이다. 전자공학에서 신호처리를 전공하는 내게, 한 교수는 몇가지 시스템에 관한 정의와 예제들을 풀 것을 요구했다. 천만다행으로 그 문제들을 나름대로 잘 풀고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한가지 질문이 더 주어졌다. “이 정의들이 모든 시스템에 적용되나?”라는 문제였고, 나는 조금 생각한 후에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qualifying exam을 보기 좋게 떨어졌고, 2차 시험을 기다려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 문제에 대한 답은 ‘그 정의들은 선형 시스템 (linear system)에만 적용되는 것이지, 비선형 시스템 (nonlinear system)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라는 대단히 기본적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접하고 있는 ‘입력이 A이면 출력이 B이다.’라는 멋진 공식들은 모두 선형(linear) 시스템을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한 댓가를 톡톡히 치루어야만 했던 것이다.


물질주의를 진리로 여기고, 과학 만능 주의가 지배하는 현 시대의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는 구조의 한가지 특징이 바로 ‘직선적 사고’이고, ‘수량화’이다. A라는 입력이 있으면, 반드시 B라는 출력을 기대하는 ‘직선적 사고’는 과학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구석 구석에 배어있다. 또한 어떤 상황이라도 수량화하고 분석하려는 경향이 자신도 모르게 우리에게 있음을 보게된다. 예를 들어 보자. 한 고등학교 선생님이 3학년 담임을 맡게 되었다고 하자. 학생들 한사람 한사람이 소중하므로, 각각을 인격적으로 대우해 주겠다고 마음먹고 새로운 학기를 맞이한다. 하지만, 수십명의 학생 각자의 처지를 돌아보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선생님은, 곧 몇가지 기준으로 학생들을 평가하기 시작한다. ‘공부는 잘하는지, 지각은 하지 않는지, 말썽을 부리지는 않는지…’ 등등. 그리고는, 그 학생이 ‘왜 공부를 열심히 하는지, 아니면 왜 공부를 못하는지. 혹은 어떤 특별한 사정에 의해 지각을 하는지, 아니면 관심을 끌기위해 말썽을 부리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공부 잘하고 지각 않하고 말썽부리지 않으면(A), 좋은 학생이다(B) 라는 직선적 사고를 가지고 학생들을 ‘수량’으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좋은 학생’을 어떻게 정의하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단지 공부 잘하고 지각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좋은 학생’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선생님이지만 어쩔 수 없다. 또한, 공부 못하고 지각하고 말썽 부리는 학생을 대하는 선생님은 그 해결책으로 몇 가지 프로그램을 구성한다. 보충수업을 진행하면서, 성적이 올라갈 것을 기대하고, 체벌을 통해 지각하지 않게 독려하며, 반성문을 쓰게 하여 말썽이 줄어들 것을 기대한다. 물론, 이 선생님도 그런 프로그램들이 눈에 띠는 결과는 내겠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물질주의가 팽배한 세상을 살아가는 크리스찬들이 빠질 수 있는 위험성들 중의 대표적인 것은 ‘기복주의’일 것이다. 물질적 복과 성경적 복을 구분해 내지 못함으로써, 돈을 많이 벌고 외모가 출중하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복으로 착각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물질주의의 위험성을 한가지 더 생각해 본다면 직선적 사고에 의한 ‘프로그램화’와 ‘수량화’가 아닐까 싶다.


현대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학자 중의 한명인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기독교의 미래’라는 저서에서 이런 직선적 사고를 경고한 바 있다. 그는 한 예로, 최근 10년 이상 영국과 미국 교회를 강타했던 Alpha를 예로 들었고, Alpha 코스의 문제점으로 ‘어느 시점에서는 어떠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 이후에 미국교회에서 진행하는 Alpha 코스를 수강했는데, 그 과정의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맥그래스의 지적처럼 직선적 결과를 기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매주 한 과정을 들을 때마다 그에 상응하는 반응을 예측하고 있는 듯 했다.


각 지역교회들 역시, 몇가지 프로그램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직선적 경향을 보인다. 예를 들어, 지역교회 성도들이 전도를 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그들이 ‘왜 전도를 하지 않는가’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기 보다는 ‘새생명 축제’같은 프로그램으로 문제를 쉽게 해결하려고 한다. 또, 성도들의 가정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아버지 학교’ ‘자녀 교육 과정’이니 하는 프로그램으로 문제 해결을 시도한다. 나는 그런 프로그램이 가치가 없다던가 어떤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특정 문제에 대한 근본적 고민없이 프로그램으로 해결하려는 태도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프로그램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그 문제의 근본에 접근하여 차근히 해결해 나가는 것에 비해 보다 수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쉽게 선택한 길은 결국, 물질주의의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도구화’ 혹은 ‘비인간화’의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한다. 즉, 몇가지 프로그램으로 당장은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무릎 꿇고 해결 해야만 하는 ‘다소 복잡하지만 근본적인 과정’을 무시하게 한다. 인격적인 관계는 선형(linear)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질주의에 의한 ‘직선적 사고’의 또 다른 문제점은, 한 개인의 신앙조차 ‘수량화’하려는 경향이다. 내 자신만 살펴보아도 잘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는 나의 믿음은 몇가지 단순한 현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아무리 성경공부를 열심히하고 기도 시간이 길어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본다. 반면, 짧은 기도 속에 하나님께 나 자신을 의지하는 깊은 신뢰의 시간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한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의 신앙을 평가하려는 우리 자신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 사람이 교회를 얼마나 열심히 출석하는지, 봉사를 얼마나 하고 있는지, 십일조는 하고 있는지, 새벽기도를 참석하는지에 대해 나름대로의 점수를 부과하여 그 사람의 신앙을 평가하려고 한다. 지역교회에서는 그런 경향이 더 강하게 나타나곤 한다. 한 지역교회를 참석하여 몇주만 지나면, 그 교회에서 신앙을 평가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지역교회의 경우, 새로온 멤버가 주일예배와 수요예배를 지속적으로 참석하고, 십일조를 내며, 선교기도 모임에 참석하여 선교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면 ‘정말 신앙이 좋다’라고 평가한다. 그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과 어떤 관계 속에 놓여 있는지는 크게 관심을 갖지 못한채 말이다. QT를 하는지,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지, 십일조를 하고 봉사를 하는지의 여부로 신앙을 평가하려는 경향은 분명 근,현대의 물질주의의 결과만은 아닌 것은 확실하다. 인간이 가진 종교성 자체가 어떤 행실로 그 가치를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자신이 율법을 얼마나 잘 지키고 있느냐에 따라 신앙을 평가하고 있었고, 그런 경향은 기독교 역사에 늘 있어왔다. 하지만, 그런 율법주의적 종교성이 현대의 물질주의를 만나 그 이론적 기반을 확립하고 더욱 심화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의 신앙은 몇가지 현상만으로 수량화될 수는 없다. 또한 우리가 지닌 문제들이 몇몇 프로그램으로 해결되지도 않는다. 우리의 신앙은 선형(linear)가 아니라, 인격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런 직선적 사고를 진리로 여기고 있고, 그런 흐름에 역행하면 뒤떨진 사람으로 취급한다. 그래서 이런 흐름에서 돌이켜 진리를 향해 나가는 것은 쉽지 않은 가시밭 길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힘으로는 결코 될 수 없는 일, 그래서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쉽지 않은 좁은 길을 가는 것이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는 것이기에, 그 길을 함께 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

[이정희, 김진태] 몇 권의 책으로 살펴 본 물질주의의 위협

이코스타 2007년 4월호

로날드 사이더의 책들 (김진태)


예레미야 35장에는 성경 전체를 통털어 딱 한번 등장하기 때문에 성경을 여러번 통독했어도 무심코 지나칠 수 있을 만한 족속인 레갑 족속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약간은 특이하게 전개되는 예레미야 35장의 이야기 가운데에서, 결론적으로 레갑 족속은 하나님의 칭찬을 듣고, 불순종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순종의 모델과 같은 존재로 세움받는다. 레갑 족속이 그렇게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술을 마시지 말라는 요나답의 명령을 순종한 데에 있었다. 당대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권하는 포도주를 거절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텐데도 그들은 자기 조상이었던 요나답의 명령에 신실했다. 성경 어디에도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술을 마시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구절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레갑 족속이나 혹은 세례 요한과 같이 술을 평생 마시지 않으며 더 높은 기준을 세운 사람들은 성경에 종종 등장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사용하셨다. 이것은 비단 술만으로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거룩한 기준을 세우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주님께서 귀하게 보시고 높이신다는 사실은 수많은 믿음의 조상을 통해 확인된 사실이다.


로날드 사이더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심이 많은 저자이다. 진정한 신앙은 삶의 변화를 필연적으로 동반한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그는 야고보서의 신앙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비교적 최근인 2005년에 쓰여진 ‘그리스도인의 양심선언 (The Scandal of the Evangelical Conscience)‘에서 그는 소위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삶과 통계학적으로 유의미한 차이가 없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비록 미국의 통계자료이기는 하지만, 이혼, 인종차별의 문제를 넘어서 가정폭력마저도 차이가 없다는 사실은 한국 그리스도인의 상황이 그리 나을 것 같지 않다는 점에서 더욱 충격적이다. 그는 이와 같은 현상이 교회가 복음을 전적으로 강조하지 않은 채 값싼 은혜만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생겼다고 진단하면서, 그리스도인이 상대주의, 물질주의, 개인주의와 같은 대중문화의 흐름에 동화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교회의 회복, 보다 구체적으로는 예수님의 중심되심을 강조하는 반대중문화적인 공동체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보다 10년 정도 전에 쓰여진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다 (Genuine Christianity)‘에서도 로날드 사이더의 어조는 그다지 다르지 않다. 현대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너져 있음을 드러내고 그에 대한 성경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려는 의도가 강한 ‘그리스도인의 양심선언’에 비해서,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다’는 보다 구체적인 원칙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 책에서 그는 11가지 원칙을 통해 개인, 가정, 교회, 사회 등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 영역에서 어떻게 균형잡힌 신앙을 가질 수 있으며, 그 신앙이 또한 어떻게 드러나야 할지를 고민하며 제시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달라야 함을 강조한 저자는 사실 로날드 사이더 이외에도 많이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비슷한 점을 강조한 또다른 저자들과 로날드 사이더를 다시금 구분지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사회정의를 향한 그의 관심이다.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다’에서도 드러났듯이, 그는 균형잡힌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연스럽게 사회정의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회정의의 여러 가지 측면 중에서 로날드 사이더가 특별히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는 경제적인 정의, 즉 가난의 문제이다.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던 1977년의 저작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 (Rich Christians in an Age of Hunger)‘에서 그는 전세계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훨씬 부유한 서구사회와 그 안의 그리스도인, 가난에 대한 성경적 관점, 그리고 현대 사회에 만연한 경제적 불평등의 구조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물질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거의 하지 않고 있다. 물질주의 세계관에 대한 그의 견해는 ‘그리스도인의 양심선언’에 오히려 더 명확히 드러나 있다.


At the same time, a new kind of materialism has taken root. Historic Christianity had been profoundly materialistic. The created world is good. God wants us to create wealth and delight in the bounty of the material world. But historic Christianity also placed firm boundaries on this materialism. Nothing, not even the whole material world, matters as much as one’s relationship with God. The Sabbath reminded people that once every seven days we should forget productive work and focus especially on worship of God. Happiness comes first of all not from material things, but from tight relationships with God and neighbor, and then thirdly from a generous sufficiency of material things. (From p. 88 of ‘The Scandal of the Evangelical Conscience’)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에서 로날드 사이더가 제안하고 있는 서구사회의 그리스도인의 책임 및 실천사항은 이 세계의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중요할 뿐만 아니라 물질주의에 맞서기 위한 좋은 대안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첫번째로 누진 십일조를 제안한다. 소득의 10%를 내는 십일조와는 달리, 소득이 많아질 수록 더욱 많은 부분을 후하게 나누자는 원리이다. 안타깝게도, 서구사회가 더 부유해진 지난 30여년동안 그리스도인이 나눈 소득의 평균은 3%에서 2.5% 정도로 줄어든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안타까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재정적인 나눔은 실천의 첫걸음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로날드 사이더는 개인적인 소위 ‘주머니의 회심’으로부터 더 나아가서, 공동체적으로도 가난한 자들을 향한 재정적 나눔과 자원봉사의 시간을 점차적으로 늘려나가는 동시에 정부 차원에서의 비슷한 프로그램을 늘려나가기 위한 청원을 할 것을 제안한다. 한 단계 더 나아가, 그는 그리스도인이 개인적인 차원과 교회공동체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이 세계를 보다 공평하게 만들 수 있는 사회적인 해결책에도 관심을 갖고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사회적인 관심의 일부는 최근에 그가 함께 편집한 ‘Toward an Evangelical Public Policy‘와 같은 책에 반영되기도 하였다.


다른 세계관에 비해서 물질주의는 한국교회를 이미 더욱 강하게 침투한 것으로 보인다. 70-80년대의 기복주의 신앙은 그 시작에 불과한 듯 하다. 현재에도 사회적/경제적으로 성공한 그리스도인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교회 안에서 더욱 주목받고 심지어 신앙의 모델로서 추켜세워지는 모습을 너무나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 결과로 세상의 성공을 통해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젊은 그리스도인의 모습 역시도 빈번하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성공을 추구하기 이전에 주님을 위해 거룩한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젊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그만큼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면에서 로날드 사이더의 메시지는 우리 각자와 공동체에게 큰 도전을 던져준다. 당신의 삶은 비그리스도인의 삶과 비교하여 어떤 거룩한 차이점이 있는가? 하나님께서 이미 허락하신 부유함을 당신은 얼마나 거룩하게 사용하고 있는가?


Jacque Ellul, “뒤틀려진 기독교, The Subversion of Christianity”, 1986 (이정희)


기독교의 왜곡은 나쁜 의도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그것은 더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모으고 성경에 노출시키고 기독교 종교 의식에 참여하도록 의도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옳은 것이며 바람직한 것인가? 자크 엘룰의 설명에 따르면 그것은 오히려 교회에 해로운 것이었다. 3세기에서부터 시작되어 현재에까지 계속되고 있는 복음의 메시지의 왜곡은 교회 지도자들의 권력, 도덕적 우위, 혼합주의 등에 대한 유혹에 철저하지 못한 태도로 제도 교회에서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것은 신약 성서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었으며 교회에 성공을 위해 그 자신의 중심 메시지를 포기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항상 나쁜 의도로 시작된 것은 아니었지만 성경의 메시지의 뒤틀림은 그 자체로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변화된 복음은 기본적으로 세상 속에 우리 자신을 그대로 두는 것과 똑 같은 것이었다.


교회가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공동체로서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는데서 벗어나 원래의 복음의 메시지에 충실해야한다. 세상의 질서에 거스르는 것은 사람들의 기대에 어긋나는 것이겠지만 그것이 복음이 능력을 갖기 위한 기본적인 전제조건인 것이다.


Tom Wright, “Simply Christian”, 2006 (이정희)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이 자유주의 진영이나 복음주의 진영를 막론하고 기독교 공동체 전체에 커져가고 있다. 한편 하나의 산업이 된 예수를 둘러싼 이야기가 그럴듯한 상품으로 미디어를 타고 진실을 호도하고 있어 신자와 비신자에게 혼란을 야기하고 있고 다른 한편 굳어져 가고 있는 현대의 교회의 갱신은 역시 교회의 기초인 역사적 예수, 나사렛 예수가 제공하기 때문이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복음주의권의 학문적 선봉에 서있는 Tom Wright의 신앙 입문서 Simply Christian은 저자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 성과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다른 책과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2부에서 제시되고 있는 God, Israel, Jesus and the coming of God’s kingdom 등의 주제가 역사적 사실이 최대로 복원된 상태에서 그를 둘러싼 다양한 견해들이 충돌하고 그 의미가 확인되는 상황을 잘 설명하고 있다. 예수가 이스라엘의 역사에 계시된 하나님의 약속을 현재화하여 자신의 삶 자체로 보여주고 있다는 해석을 광범위한 증거로 제시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나라의 기본전제는 자기 부인과 좁은 길로 감이다. 세상의 질서로서 강함과 부유함과 명예로움은 멀리해야하는 가치이다.

복음에의 도전(1) – 개인주의: 좌담회

이코스타 2007년 2월호


1. 간단하게 자신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이정희: 현재 Washington DC에서 행정학 박사 과정에 있습니다. 지역교회와 KBS라는 성경공부를 섬기고 있고요.
정대석: 미시간에서 생물학을 전공하고, 지금은 콜로다도에서 포스트닥 과정에 있습니다. 지역교회를 열심히 섬기고 있고요.
장선희: 얼마 전에 컨사스에서 박사학위를 마쳤습니다. 저도 지역교회를 섬기고 있고요.
김진태: 저는 김진태라고 합니다. 미국에 온지는 4년 되었구요. 일리노이주에서 3년 남짓한 유학생활을 마치고 현재는 시애틀 근교의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개발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2. 최근 한국과 미국의 교회를 보면, 복음 자체가 ‘자아’가 중심이 된 채로 왜곡되어 있는 듯 합니다. ‘자아 중심의 왜곡된 복음’을 어떻게 규명하시고 계신지, 그리고 그에 따른 실례가 있으면 들어 주시겠습니까?


이정희: 근래의 교계의 큰 뉴스거리 중 하나가 한국에서의 개신교인의 숫자가 줄어든 데 비해서 카톨릭 신자는 거의 많게는 두 배 정도까지 성장한 것으로 나타났다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개인의 구원보다 더 강조되는 카톨릭의 공동체성이 현대인들에게 어필했다는 것입니다. 개신교의 분위기가 개인의 문제에 계속 관심을 갖고, 자아의 문제에 초점을 집중하다보니까 오히려 사람들이 가져야 하는 다른 속성인 공동체성, 교회의 모습 등을 통해서 함께 성장해 나가고 서로 격려하고 힘이 되는 측면이 약화되어서 그런 결과가 나온 게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장선희: 복음이 왜 자기중심적으로 나타나는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생활이 풍요로워지고 의식주의 문제로 고민할 필요가 없는 상태에서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면, 복음을 하나님의 은혜라는 측면에서 받아들이기보다는 교양이나 액세서리로서 혹은 내 삶을 풍성하게 해주는 방식으로서 복음을 받아들여서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근본적으로 들어간다면 복음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수단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을까요.


정대석: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 크리스찬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복음 안에서 찾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지만, 그것이 우리를 높인다든지 우리의 행복과 안위를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쁘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거거든요. 그래서 결국은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다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이 되어야 하는데, 그 반대로 내가 주인이 되어버리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자기 중심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나타난 것 같습니다.


결국 그래서 기복주의로 많이 흘러가는 것 같아요. 내가 좀더 행복하고 좀더 잘되고 좀더 좋아지는 모습으로 자꾸 교회의 분위기나 경향이 흘러가는 게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복음, 즉 나를 죽이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모습을 내세우는 교회는 신자들이 줄어들게 되고, 그것이 아니라 복받고 형통하는 것을 강조하는 교회는 신자들이 늘어나는 경향이 있지 않나 합니다. 한국이나 미국 같이 장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그런 흐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김진태: 자아중심주의(egoism)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자기의 유익/이익을 극대화시키는 것이 가장 상위의 목적이 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수단에 대해 별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아중심주의에 의해서 왜곡된 복음은 개인이 불편할 만한 요소가 제거되거나 혹은 다른 것으로 대체된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예로는 흔히들 이야기되는 반쪽짜리 복음을 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음을 강조하지만 인간의 타락은 강조하지 않는다든지, 죄로부터의 자유를 강조하지만 죄의 추악함은 강조하지 않는다든지, 십자가의 승리를 강조하지만 십자가의 고난은 강조하지 않는다든지, 회복과 축복을 강조하지만 변화와 순종을 강조하지 않는 등의 모습이 그런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대석형제님이 언급하신 기복신앙의 흐름에 대해서 동의하면서, 저는 개인적으로 이것을 세련된 기복신앙이라고 부르고 싶은데요. 일례로 예수를 믿음으로써 자아가 회복되고 자신의 잠재력을 찾아낼 수 있다는 생각은 70년대의 예수믿으면 복받는다는 다소 투박했던 기복신앙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인 것 같습니다.


eKOSTA: 그러면 그런 흐름이 역사 속에서 계속 존재했나요, 아니면 20-21세기 들어서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이라고 보시나요?


정대석: 교회 역사나 흐름에 대해서 자세히 생각을 안해봐서 잘은 모르겠지만, 전혀 없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런 현상이 점점 심해지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진태: 세상에서 주목받는 사상과 가르침이 교회에 흘러든 예는 역사적으로 많이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하구요. 개인주의나 자아중심주의가 최근에 인기있는 사상이기 때문에 현대에 교회에 흘러들어왔다고 생각합니다.


eKOSTA: 그렇다면 그 전에는 개인주의적인 현상이 아니었을 수 있다는 말씀인가요? 현대의 사조를 개인주의, 물질주의, 상대주의로 규명해서 개인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전에는 개인주의적인 모습이 덜했는지, 아니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는지 궁금하군요.


이정희: 다른 모습으로 많이 나타났지요. 예를 들어 전체주의가 만연하던 시기에는 전체주의에 대항하는 교회보다는 편승하는 교회도 많이 있었습니다.


eKOSTA: 편승을 하게 되면 복음이 어떤 식으로 왜곡되나요?


이정희: 극단적인 이야기이지만 나치 정권 하에서의 고백교회라든지 본회퍼의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 신앙을 본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도 많이 하구요. 사실 그 고백교회가 당시의 대다수를 차지하지는 않았고, 나치병들을 축복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세속권력과의 관계 속에서 세속권력이 교회를 지배하려고 강하게 들어왔을 때에 저항했던 교회도 있지만 그러지 못했던 경우도 많이 있었지요. 지금과는 반대의 경향이긴 했지만.


eKOSTA: 그런 경우에는 국가에 충성하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는 방식으로 왜곡이 가능한가요?


이정희: 예,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역사적인 예도 존재하구요.


3. 그런 ‘자아 중심의 복음’이 미치는 폐해는 얼마나 되며, 그런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정희: 폐해는 원론적으로 얘기한다면 복음에서 한발짝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의 본연의 모습 그리고 신앙인의 본연의 모습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는 것인 것 같습니다.


장선희: 자아 중심의 복음이 들어온다면,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복음이 왜곡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가장 큰 폐해가 돌아오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알게 하시려는 풍성하신 은혜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부분적으로만 누릴 수 있기 때문이죠. 자신 외의 폐해라면 공동체를 파괴할 수도 있는 폐해도 일어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나 중심이니까 나랑 상관없으면 관여하지 않고, 내게 폐가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어도 순종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공동체를 파괴하는 결과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김진태: 복음을 풍성히 누리지 못한다는 점에서 자기 자신에게 가장 큰 폐해가 돌아온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저는 그런 폐해가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느냐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는데요.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의 전적인 타락의 교리가 상대적으로 충분히 강조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복음에서 이것만큼 개인이 불편해할 만한 요소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개인적으로 이것은 두 가지의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첫번째는 개인적인 경건의 생활이 공허한 행동으로 전락할 수 있는 가능성입니다. 말씀묵상이나 기도는 경건생활의 참 중요한 일부이지만, 그것이 왜 필요한지는 강조되지 않은 채 행동 자체만이 강조되는 것은 그러한 행동이 율법이나 또는 엔터테인먼트로 전락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두번째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 피상적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죄를 고백하며 서로에게 그리스도의 용서를 선포할 수 있을 때에, 그 공동체는 삶의 밑바닥까지 나눌 수 있는 진정한 공동체의 모습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타락이 충분히 강조되지 않을 때에는 교회의 정체성이 상실된 채 피상적인 친목모임 이상의 모습을 기대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정대석: 자아 중심의 복음으로 가다보면, 예수님은 빠지게 되고 자기 편한 방식으로 복음을 해석하거나 적용하는 폐해가 있을 것 같습니다. 공동체의 끈끈한 모습이나 서로를 위하고 아껴주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되는 모습보다는 푸석푸석한 모래 같은 관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eKOSTA: 자아 중심의 왜곡된 복음의 특징으로는 죄성, 즉 하나님의 거룩함을 강조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사랑만을 강조하는 복음의 형태, 그것 때문에 나타나는 기복주의적 현상으로 현재까지 정리가 되었구요. 또한 폐해로서 은혜를 풍성히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 언급되었는데요. 기복주의 신앙이 만연한 상태에서, 극단적으로 예수그리스도가 이땅에 오신 것도 내가 너무나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복음이 선포되고 있는 상황에서, 만약 반쪽 복음만을 믿을 때에 정말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장선희: 우리가 아무리 완벽하게 믿는다고 노력해도, 모두 잘못 믿는 부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복음을 100% 이해하고 삶에 적용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어요. 다 어느 정도는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 혹은 왜곡의 가능성을 조금씩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즉 잘못 믿는 부분이 있어도, 예수님의 구원에 대한 신앙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실 거라 생각합니다.


eKOSTA: 어떻게 하면 이런 현상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장선희: 개인적인 현상들이 나타나는 이유가 복음을 잘못 알기 때문일수 도 있을 것같아요. 교회만 다니고 복음을 잘 못알고 있는, 하나님과 관계를 제대로 잘 못하고 있는 신자들이 많아서 그런것 같기때문에 복음이 제대로 선포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제대로 세워진다면 현상해결이 될것같습니다.


이정희: 말씀에 기초를 한 신앙, 문화나 생활에서 들어온 세속적 세계관에서 비롯된 신앙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바탕으로 하는 복음이 제대로 세워지도록 해야겠습니다.


김진태: 이러한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복음을 균형있게 강조하는 것이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의 구속을 동일하게 강조함으로써, 우리 각자, 그리고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모습을 성경적으로 그릴 수 있어야 합니다.


장선희: 현상들이 나타나는게 복음이 잘못된 건가요? 아니면 복음은 제대로 들어가는데 성령의 열매가 잘 안나타나는 간가요?


eKOSTA: ‘교회사에 나타난 성령의 열매’라는 책에서 하우드 스나이더는, 프랑케, 진센도르프, 웨슬리에 의한 부흥의 특징에 대해서 썼는데요, 결국 복음이 제대로 들어갔다면 올바른 성령의 열매가 맺혀야 한다는 것이지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장선희: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인 사람들은 개인적인 행동을 할수 있지 않나요?


이정희: 웨슬리는 개인적인 성령체험이 신앙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하는데 실제로 그분의 삶을 보면 공동체를 많이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개인의 영성이 증진되는 과정속에서 공동체의 영성이 증진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같습니다. 둘중에 하나가 떨어지면 불완전해지는 것같습니다.


eKOSTA: 복음주의에서 개인회심의 강조. 세례를 받거나 교회를 다니면 구원을 받았으리라고 전제하는 것이 현실이지만 죄에 대한 지적을 강조하는 것이 필요하겠군요.


4. ‘내적 치유’가 기독교에 미친 좋은 영향에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 ‘지나치다’는 비판도 많이 받고 있습니다. ‘내적 치유’류의 ‘복음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이 가지는 장점과 단점 (특히 복음을 왜곡하게 될 위험성)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이정희: 내적치유는 한국에서80말, 90년대초에 나와서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를 제시하고 분석하는데는 성공했지만 해결책으로 복음의 삶, 공동체의 삶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해결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정대석: 예수님이 사역하신 것을 보면 복음을 전하시기 전에 내적뿐만아니라 외적치유의 사역을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심적인 문제들을 고침으로 복음으로 다가갈 수 있는 다리가 되어야 하는데 복음보다는 치유에 중점을 두고 복음까지 연결되지 못하고 멈추어 버리는 그런 상태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현대에 기복주의등과도 연결되는 것같습니다.


장선희: 사람을 통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하나님의 만지심을 통해 사람들의 내적 상처가 치유되는 것이 장점이지만 단점은 많은 경우 치유가 근본적인 치유가 되지 못하고 내적치유가 반복되어지는 모습만 남아있어서 개인의 복음은 치유의 부수적인 것이 되어 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같습니다. 자기위안을 받는 선에서 그쳐 버리는 것 같습니다.


김진태: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가지고 있고 고민하고 아파하는데 예수님이 이해하고 치유해 주시는 것이 위로로 다가선다는 것이 장점이지만 결국은 자기에만 머무르게 되며 치유를 주시는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고 치유를 받는 자신에만 집중이 되어버립니다. 초점이 하나님에게 맞춰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일단 내적 치유가 가지는 장점은 여러 가지 이유로 상처입은 사람들, 더 나아가서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큰 소망이 될 수 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상처입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다는 것이 교회생활을 할수록 더 깊이 깨닫게 되는 점인데요. 이런 분들에게 예수님이 그 아픔을 전적으로 이해하시고 위로해주신다는 사실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소망이 될 것입니다.


내적 치유의 단점이 있다면, 치유 자체, 더 나아가서는 자기 자신에 초점이 머무를 수 있는 위험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Love the giver, not the gift.’라는 말이 있는데요. 치유는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선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초점은 회복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회복을 허락하시는 주님께 있어야 하고, 주님 안에서 아픔이 치료되고 자아가 회복되었다면 비슷한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적지 않은 경우, 특히 치유의 과정이 드라마틱한 경우, 여전히 초점이 지속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머무르고 있다든지, 혹은 치유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치유의 과정이나 방식을 더 의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eKOSTA: 복음을 제대로 받아들인다면 상처 그 자체가 상대적으로 미비한 부분이 될수 있어야 하지 않나요? 나의 죄성과 하나님의 크심 앞에서, 어쩌면 상처가 그대로 회복되어야 하는 것 아닐찌요?


김진태: 죄라는 개념이 상처나 연약함의 개념으로 대체가 되어서 내적치유를 통한 연약함과 상처의 치유가 죄에 대한 회개에 대한 중요성을 놓쳐버리는 상태가 되는 것이죠.


5. 역사 속에 늘 있었던 문제이기는 하지만, 예수님이 피로 사신 교회 공동체의 공동체성 붕괴 현상은, 현대에 들어 더 두드러져 보입니다. 만일 교회 공동체가 진정한 공동체의 모습을 회복한다면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그것을 위해 우리가 걸어야 할 한걸음은 무엇일까요?


김진태: 교회공동체를 다른 공동체와 구분짓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피값을 치르고 공동체를 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되신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공동체가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구성원 각자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구원을 감사하며, 그것 자체가 개인과 공동체의 유일한 정체성이 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장선희: 교회 공동체의 본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한 몸을 이루는 하나 하나의 지체로 부르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각자가 각 지체로서의 역할을 깨닫고, 그런 지체들의 충실한 역할을 다 해 나간다면, 진정한 공동체성이 회복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대석: 지난 주에 빌립보서 2장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사랑과 긍휼을 주셨고, 또한 한 성령으로 섬기게 해 주셨는데, 그 중에서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가져야 하는 것은 예수님처럼 낮아지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서로를 섬기고 사랑하고 나누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우리의 내면을 잘 살펴본다면, 공동체를 위한다고 하면서도, 내게 유익이 돌아오지 않으면, 헌신하게 되지 않는 경향이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본받고, 다른 사람을 위해 죽기까지 섬길 생각을 한다면, 진정한 공동체성이 회복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eKOSTA: 예전에 이코스타에서 많이 이야기했던 것 중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의 공동체성 회복을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몇가지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 첫째는, 내가 속한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있으면 좋고, 없어도 상관없는 그런 공동체가 아니라, 그 공동체가 없으면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성 자체를 유지할 수 없는 그런 공동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공동체없는 신약시대의 신앙생활은 찾아볼 수 없으니까요. 또 하나는, 공동체가 그저 만나면 서로가 즐겁고 기쁜 관계를 넘어서, 서로의 죄를 고백하고 아파할 수 있는데 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죄를 고백할 수 있다면, 그 가운데서 서로를 진정으로 섬기는 낮은 자리에 까지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대석: 또 한가지를 생각해 본다면, 일의 효율성을 생각하지 않는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현대에는 어떻게 하면 인원을 늘릴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모임을 유지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기 쉽지만, 진정한 공동체를 위해서는 그런 효율성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구성원 한사람 한사람을 바라보면서 섬기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정말 비효율적으로 보이겠지만요.


6. 지역 교회 공동체와 코스타와 같은 더 넓은 범위의 공동체 사이의 갈등과 긴장이 있기 마련인데요, 어떤 방식으로 공동체와 관련을 맺고 계신지요?


정대석: 만일 코스타를 섬기는 일이 지역교회를 섬기는 일과 충돌을 일으킨다면 갈등이 생기게 되겠지요. 특히 코스타를 어떤 형태의 지역교회로 생각하게 되는 경우에 더 갈등이 있을 수 있겠지요. 사실 서로를 견제하고 갈라 가지는 갈등관계가 아니라, 상호 협력관계에 있다는 것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정희: 한국에서는 파라처치와 로컬처치의 갈등이 적잖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보편적 교회의 관점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각자의 다름을 인정하고 협력한다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까하는 생각합니다.


정대석: 동질 문화 가운데 있는 한국 교회는 좀 더 공동체 이기주의에 빠지기 쉬운 것 같습니다. 우리만 좋으면 된다는 집단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서, 다른 모습의 사람들에게 좀 더 마음을 열고 다가서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김진태: 저는 그동안 지역교회를 넘어선 더 넓은 범위의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소속되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한 갈등과 긴장을 느끼지는 못했구요. 현재는 직장 때문에 이사온지 오래 지나지 않은 시기이기 때문에, 교회 예배와 소그룹에 성실하게 참여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8. 가정교회, 셀모임, 속회 등 소그룹 속에서 공동체성을 깊이 느끼신 경험이 있으신지요. 또 부족했던 점이 있었다면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진태: 시애틀로 이사오기 전에 일리노이에서 다녔던 교회에서 공동체성을 깊이 느꼈습니다. 속해있던 소그룹이나 심지어는 같은 교회에 다니는 룸메이트와의 관계에서도 살아있고 역동적인 교제를 느낄 수 있었구요. 삶을 나누고 서로를 위해서 중보할 수 있는 것은 참으로 큰 축복이었습니다. 아쉬웠던 점이라면 역동적이고 강한 교회의 문화가 주님 안에서 훈련받고 동질성을 느끼기에는 더없이 좋았지만, 반대로 새로운 사람들에게는 약간 높은 장벽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하는 점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역동성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의 개방성을 병존하는 문제는 제게 아직도 숙제처럼 남아있는 주제입니다.


장선희: 나와는 다른 사람들에게 오픈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잘 알지만, 그리 쉬운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공동체의 일원끼리는 진정한 한 가족같이 ‘닫혀’ 있지만, 외부 사람들이 들어와서도 편하게 적응할 수 있는 ‘열린’ 공동체가 되기 위해 정말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김인수 장로의 ‘자녀교육’

이코스타 2007년 1월호

이 글은 2001 KOSTA/USA에서, 고 김인수 교수님의 세미나를 녹취한 것입니다. 영원한 코스탄 고 김인수 교수님!! 그 분의 살아있는 자녀 교육에 대한 강의에 귀 기울여 봅니다.


김인수 교수
1938년 일본 동경 생으로 국제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 대학교 경영대학 교수로 일하는 한편 기독교 윤리실천운동본부 실행위원, OMF 이사장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일찍부터 가정 사역에 관심을 보여서 기독교가정사역원을 운영하고 있으며 ‘거시조직이론’, ‘치우침 없는 걸음으로’ 등의 책을 펴냈다.


첫번째, 두번째 시간에는 부부가 어떻게 화목하게 가정생활을 할 것인가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부부가 결혼생활을 하는 것은 두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네 사람이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나와 내 속에 있는 유치한 어린 아이, 내 배우자와 그 속에 있는 유치한 어린 아이, 네 사람이 결혼생활을 합니다.


제가 코스타에 도착해서 지금까지 정신없이 상담을 했습니다. 그 중에는 여러 가지 상담제목이 있지만, 제일 많은 것이 부부간의 갈등의 문제입니다. 제가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두가지 경우 예외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거의 대부분의 경우는 부부가 잘 만났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갈등을 합니다. 왜 그런가요? 우리의 차이가 보완적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나하고 다른 상대방에 대해서 계속해서 인간적으로 요구하고 하니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셨나요? 상대방의 부족한 것을 돕는 배필로 살라고 했죠. 바라는 배필로 사는 한 그 결혼생활은 깨지게 마련입니다. 상대방의 부족한 것을 볼때마다 내가 할 일이 더 많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준비해서 감사하고 기쁨을 누리면 가정은 멋있게 달라집니다. 그렇게 만들어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두 사람을 붙여서 가정을 만들도록 설계하신 데에는 돕는 배필이라는 조건이 붙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상식으로 살면 망가지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삽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짝지어주실 때 실수 안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제 아내를 보면 어쩌면 저런 여자를 만나서 사냐는 생각이 문득 들 때가 있지만, 가장 좋은 여자를 제게 주신 겁니다. 제 아내에게도 가장 좋은 남자를 주신 겁니다. 문제는 누구를 잘못 만나서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를 잘못하기 때문에 우리의 가정생활이 망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상식대로 하면 안됩니다. 사람이 만든 기계도 설명서를 읽어보고 그대로 조립을 하고 작동을 시켜야 제대로 소리가 나는데, 하나님께서 만드신 우리의 삶을 살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설명서를 읽어보고 그대로 작동을 시켜야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상식대로 제멋대로 작동시키면 거기서 깨지는 소리가 나는 겁니다.


두번째 시간에는 부부가 아름답게 살기위한 구체적 방법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여자는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남자에게 의존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남자는 하나님께서 여자를 감성적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평생동안 계속해서 사랑을 확실하게 표현해야 합니다.


어제는 자녀교육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기업입니다. 이것은 부모로서 절대 피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책임입니다. 다른 것은 전부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있지만, 자녀양육은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역보다도 더 중요하고 우선순위가 가는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적인 양육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서적으로 양육을 제대로 해야 한다고 어제 말씀드렸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부모가 실패하는 것이 정서적 양육에서 아이들을 망가뜨리고 그 아이들을 똑같은 방법으로 망가뜨린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정신적인 양육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하는데, 그 전에 정서적인 양육과 관련해서 한가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의 성격을 여러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심리학에서 보면 두 변수를 가지고 사람을 분류하면 백가지가 넘습니다. 외향적/내성적, 적극적/소극적 등등 100가지 넘게 분류할 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A타입 성격/B타입 성격입니다. A타입은 빈틈없고 뭐든지 열심히 하지만 안절부절하는 성격입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기특한 성격입니다. B타입은 반대의 성격입니다. 성격좋다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부모가 다루기 힘든 성격이기도 하지요. 예를 들면 아침에 깨워서 학교 보내기도 힘들고, 방도 잘 치우지 않구요.


자식은 A타입도 있고, B타입도 있을 수 있습니다. 부모가 B타입이고 아이가 B타입인 경우에는 부모가 자식을 야단치면서도 공감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B타입이고 아이가 A타입인 경우에는 어떻게 저런 아이가 태어났느냐면서 감탄할 수도 있습니다. 부모가 A타입이고 자식이 A타입인 경우 역시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A타입이고 자식이 B타입인 경우가 가장 문제인데, 부모가 자식을 견디지 못합니다. 저는 전형적인 A타입인데 우리 아이 중에서도 전형적인 B타입이 있습니다. 제가 얼마나 비틀었는지 모릅니다. 20년을 비튼 후에 제가 내린 결론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보면 얼마나 부러운지 모릅니다. 제가 그 사실을 알았으면 그렇게 비틀지 않았을텐데, 그냥 B타입으로 자랄 수 있게 해주었을텐데 말입니다. 20여년간 시행착오를 겪은 후에 정리한 것입니다. B타입 자녀를 보거든 바꾸지 못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36년간 함께 살아온 아내를 바꿀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A타입이 좋을까요, B타입이 좋을까요? 일견에는 열심이고 자기 일 잘 하는 A타입이 좋아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B타입은 사람을 끌어안는 재주가 있습니다. A타입은 자기만큼 해내지 못하는 사람을 수용하지 못하는 반면에, B타입은 못난 사람도 끌어안을 수 있습니다. A타입이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 수련을 통해 B타입처럼 부드럽게 바뀌지 않는 한 리더가 될 수 없습니다. 여담이지만 A타입은 B타입에 비해서 심장마비에 걸릴 확률도 4배가 높고, 발병 후 치사율도 2배가 더 높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B타입 아이를 마냥 놓아두어야 할 것입니까? 조금은 훈련시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허락하신 은사가 참 많지만, 음악의 은사는 없습니다. 만약 제 부모가 음악가여서 저 역시 음악가로 만드려고 했다면 어땠을까요? 천부적인 소질 없이 절대로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훈련받았더라면 성가대원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비슷한 원리로 어떻게 버릇을 고쳐갈지 이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 막내 아이가 국민학교 다닐 때 이불을 개고 나가는 적이 없었습니다. 훈련은 아버지의 책임이기 때문에, 제가 이불을 개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눈깜짝할새에 도망을 나가버립니다. 그러면 아내가 이불을 개서 올려놓습니다. 타이르다가 안되어서 규칙을 정했습니다. 한번 이불을 개지 않으면 다섯번 이불개고 펴는 것을 반복하도록 하는 규칙이었습니다. 결국은 35번까지 간 일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불 개지 않는 습관을 고쳤습니다. 청소를 잘 못하는 습관도 청소하는 날을 정하고 검사받는 식으로 고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훈련 이외에는 자녀의 천부적 성격을 인정해주고 바꾸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각각의 자녀들은 모두 다른 인격체이기 때문에, 각각의 아이에게 주어진 은사를 인정하고 각각 다르게 키워야 합니다. 첫째 아이에게 적용했던 방법을 둘째, 셋째에게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각각의 아이가 가진 가장 좋은 점을 살려주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성적이 일률적인 기준이 된 것은 참 불행한 일입니다.


정신적인 훈련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조금 전에 중년의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코스타에 처음 오신 분인데 어떻게 젊은 사람들이 그렇게 쉽게 갈라질 수 있느냐면서 깜짝 놀라셨습니다. 조별모임에서도 남녀문제가 심각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오늘날 신세대의 문제는 인내심의 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부모로서 자녀를 강하게 키우라고 권면하고 싶습니다. 언제 자녀가 강해지는가? 고생을 해야 강해집니다. 자녀를 고생시키세요. 저는 가난 때문에 고생하면서 자랐는데, 지금은 그것을 감사합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두렵기보다는 그것을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심할 것이 있다면 고생을 하면서 성격이 굽어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반대로 사랑으로 편하게 키우면, 성격이 곧기는 하지만 힘이 없습니다. 어떻게 이것을 조화시킬 수 있을까요? 고생을 시키되, 사랑을 베푸십시오. 사랑을 많이 주면서 고생을 시키십시오.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고생시키는 것입니다. 나중에 독립된 개체로서 어른의 역할을 할 때에, 가장으로서, 어머니로서 책임질 수 있는 체질을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체격만 좋아졌지, 정신력은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계속 부모에게 의존하는 어린아이 말입니다. 인내심의 부족도 여기에서 기인합니다. 저는 하교 때에 승용차에서 기다리면서 아이들을 데려가는 부모는 정신빠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압구정동에 사는 어머니의 아들이 해병대에 입대했다고 합니다. 진해훈련소에 면회가서 아들이 고생하는 것을 보고 돌아와서 밤새도록 울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본 부모들이 한국 부모를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아십니까? 바로 징병제도가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오늘날 같이 먹고 살기 쉬운 사회에서 자식 고생시키기가 쉽지 않은데, 군대만큼 고생시킬 수 있는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이상의 환경을 만들어줄 수가 없습니다. 자식을 참으로 사랑하거든, 훈련시키십시오.


저도 미국에서 공부한 아들이 있지만, 영어를 잘해도 카투사 갈 생각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일선에서 죽을 고생하되, 죽거나 많이 다치지는 말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제 아이들의 불평이 있다면, 오히려 힘든 일을 겪고 와도 집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빠가 좋아하고 동정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 아들은 눈이 나빠서 보충역 판정을 받았다고 실망하는 부모는 우리 집밖에 없을 거라고 불평했습니다. 결국 그 아이는 보충역 중에서 가장 고생하는 송추 방위부대에 배치되었습니다. 일선의 정규부대가 무너졌을 때 서울을 마지막까지 사수하는 부대입니다. 저는 정말 잘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침 5시반에 일어나서 버스 두번 갈아타고 송추까지 가야 겨우 8시에 들어갑니다. 11시까지 자던 아이에게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첫날 다녀오더니 아빠가 좋아할 일이 생겼다고 이야기해서 무슨 일인가 물어봤더니, 대포에는 트럭이 끄는 대포와 사람이 끄는 대포 두 가지가 있는데, 사람이 끄는 대포 중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자기에게 걸렸다고 했습니다. 매일 매고 산꼭대기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이겨내면 강한 사람이 됩니다. 동시에 격려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이 없이 고생만 시키면 외강내강이 됩니다. 그러나 사랑을 많이 먹으면서 고생하면 외유내강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왜 들어쓰셨을까요? 40년간 궁전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고, 40년동안 광야에서 죽을 고생하면서 밑바닥 인생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좋은 교육과 고생의 의지력을 통해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지도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자식 사랑한다면 일부러 고생 시키십시오. 저는 아이가 서너살만 되면 한겨울의 추운날에 가게 심부름을 보냅니다. 안 나가려고 하면 넌 할 수 있다고 하면서 보내면 어쩔 수 없이 갔다 옵니다. 다녀오면 그때부터 칭찬을 하는 것입니다. 일석이조 아닙니까? 하나는 아이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또하나는 아이에게 고생을 주는 것입니다.


제 이야기를 듣고 어느 학부모께서 제게 긴 편지를 쓰신 일이 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딸의 이야기입니다. 엄마가 공부 이외에는 아무 것도 시키지 않고 모든 것을 대신했습니다. 처음에는 공부할 시간도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했는데, 결국 아이가 모든 일에 온갖 투정을 다 부려서 제게 배운 것을 실험하기 시작했습니다. 공부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고, 대신에 아무것도 안하는 날은 밥을 주지 않겠다고 하면서 설겆이와 청소를 시켰습니다. 아이가 울면서 설겆이와 청소를 했는데, 엄마가 시키니까 하는데 친구들한테는 이런 거 한다는 이야기 하지 말아달라고 하더랍니다. 이 이야기가 엄마를 실망시켰습니다. 아이를 위해서 한 일이 아이가 보기에는 하찮고 창피한 일이라는 사실을 그 때 깨닫게 되었습니다. 더 고생을 시켰습니다. 일주일이 지나자 아이가 학원가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더랍니다. 청소하고 설겆이 끝나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더니, 다 끝내고 학원 버스 타고 학원을 갔다왔습니다. 그리고나서 옛날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자기에게는 공부하는 게 맞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엄마의 고마움을 그때 느끼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이를 위해서 모든 것을 해주는 것은 아이를 망치는 길입니다. 그것은 자기 멋대로 살게 내버려두는 것인데, 직장생활이나 결혼생활에서 자기 멋대로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인내심을 심어주십시오. 그래야만 직장생활이나 결혼생활에서 어려움을 만날 때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바람직한 균형을 잡기 위한 훈련을 해야 합니다. 사이먼이라고 하는 유명한 사회과학자가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느냐 하는 것은 의사결정(decision-making), 즉 선택에 의해서 달라진다고 했습니다. 의사결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프로그램된 (programmed) 의사결정, 또 하나는 프로그램되지 않은 (non-programmed) 의사결정입니다. 프로그램된 의사결정은 너무 자주 해서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나오는 결정입니다. 양치질이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가는 것이라든지, 아이가 아침에 학교가는 것도 프로그램된 결정이어야 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왜 삶에서 신앙이 나타나지 않는가? 말씀이 내 속에 프로그램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말씀이 내 안에 프로그램되면 나도 모르게 하나님의 바람직한 행동을 하게 마련입니다. 간구하는 것보다 말씀이 프로그램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이 프로그램되면 엎어지든 넘어지든 제대로 행동하게 되어있습니다. 반면에 프로그램되지 않은 의사결정은 한번도 안했거나 별로 안해보았기 때문에 프로그램되지 않은 결정입니다. 어느 학교에 갈까, 누구하고 결혼할까, 어떤 직장을 택할까, 또는 코스타에 갈까 말까와 같은 것이 프로그램되지 않은 결정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의사결정이 두 가지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사실(fact)과 가치관(value)이 그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좋은 규범을 넣어주는 방법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아이들에게 좋은 가치관을 넣어주는 것입니다. 어떤 남자가 여자를 선봤다고 합시다. 용모가 준수한 여자, 순하게 생긴 여자, 부유한 장인의 무남독녀, 지성적인 여자, 착하게 생긴 여자. 이것은 여자를 보고 알게 된 사실(fact)입니다. 어떤 여자와 결혼할 것인가는 가치관(value)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제가 왜 코스타에 강사로 왔을까요? 코스타에 이런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사실과 가치 때문입니다. 우리집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원칙 중에 하나가 열심히 일해서 열심히 절약해서 열심히 다른 사람과 나눈다는 것인데, 어려서부터 가치관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규범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많이 읽으면서도 삶이 달라지지 않는가? 가치관이 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내 안에 들어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 말씀의 가치가 나를 지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온갖 능력을 다 한다고 해도 별볼일 없습니다. 빼어난 모습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의 기준이 되는 가치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뜻을 일일이 찾지 않고 어떻게 살더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마련입니다.


사실은 어떤 역할을 합니까? 이기적인 합리주의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내가 잘못하면 더 당하기 때문에, 더 당하지 않기 위해 합리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교통규칙을 어기거나 음주운전을 하다가 잡히면 감옥에 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통규칙을 지키고 마시고 싶은 술도 안 마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바람직한 행동을 하면 칭찬해 주고, 잘못을 하면 댓가를 치르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그 처벌이 무서워서 잘못된 행동을 피하다 보면, 그것이 버릇이 되고, 성품을 형성시킵니다. 프로그램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거짓말하면 안 된다는 것이 집의 원칙이라면, 아이가 거짓말을 할 때, 그에 대한 처벌을 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현대의 부모들은 그런 체벌을 가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제멋대로 행동하게 되었지요. 사실 이렇게까지 아이들을 내버려 두게 된 것은 최근이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희 세대만 해도 부모님께 많이 야단 맞고 지냈으니까요.


사실 생각해 보면, 우리도 얼마나 악동으로 놀았었나요. 그것이 악한 줄도 모르고 잘못을 했으니까요. 그런 것을 부모가 바로 잡아 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바로 잡아줄 수 있을까요?


첫째, 잔소리는 훈계가 아닙니다. 왜 부모들이 잔소리를 할까요? 자신이 자랄 때 부모들이 자기에게 잔소리를 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잔소리를 하는 부모를 보면, 아이는 가만히 있는데 부모는 계속해서 잔소리를 해 댑니다. 프로그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지요. 잔소리는 훈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잔소리는 훈육성이 없는 충동적인 행동이면,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부모의 판단과 생각이 중심이 된 것이지, 그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잔소리는 아픔이 없습니다. 부모가 고민해 보지 않았으니까요. 잔소리는 희생이 없습니다. 부모가 인내심을 가지고 그 문제를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고민해 보지 않았으니까요. 잔소리는 소망이 없습니다. 아이를 좌절하게만 만드니까요. 잔소리는 희망이 없어요. 아이에게 길을 제시해 주지 않으니까요. 잔소리는 평안을 빼앗아 갑니다. 아이를 불안하게 만드니까요. 잔소리는 훈계가 아니라, 아이들의 열등감만 늘어가게 합니다. 디모데전서 1장 5절을 보면,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아이가 도둑질을 했다고 합시다. 그래서 야단을 치면, 아이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왜 재수없게 걸렸지? 다음에는 더 교묘하게 해야지’라고 생각한다면 그 훈육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훈계의 목적은 ‘선한 양심’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아이를 충동적으로 야단을 치게 되어서 고함을 지르거나 주먹이 먼저 나가게 되면, 선한 양심을 가지게 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훈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행동해야만 합니다.


훈육에 대한 제 이야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충동적으로 야단을 친 경우가 아주 없는 것이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이렇게 훈계를 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잘못을 한 경우에는 제 아내나 할머니 할아버지가 직접 야단치지 않고, 메모를 해 놓고 제게 알려 주었습니다. 저는 집에 들어와서 잘못한 아이에게 ‘애야 안방으로 들어와’합니다. 야단은 반드시 단 둘이 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의 자존심이 많이 상하게 되니까요. 안방에 들어오게 하고는 묻습니다. ‘네가 이렇게 잘못했니?’라고 묻습니다. ‘네’라고 대답하면, ‘그것은 이런 이유 때문에 잘못되었고, 그것이 이렇게 큰 잘못이란다’라고 가르칩니다. 그렇게 가르치는 기준은, 우리 집의 원칙에 근거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잘 타이르고 보냅니다. 그렇다고, 그 아이가 그 잘못을 다시는 저지르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에게 프로그램이 되어 있지 않으니까요. 또 다시 잘못을 하게 되면, 다시 안방으로 불러 잘못을 지적하고 타일러 돌려 보냅니다. 세번째 잘못을 저지를 때도 말로 타일러 보내는데, 그 때는 새로운 약속을 하나 합니다. ‘네가 세번째 똑같은 잘못을 했다. 너는 말로 해서는 못 알아 듣는 것 같으니, 다음에 또 잘못을 하면 회초리는 세대 맞는 것으로 하자. 괜찮겠니?’. 그래도 그 아이는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게 되지요. 이제는 다시 방으로 불러서 ‘네가 지난 번에 다시 잘못하면 매를 맞겠다고 약속했지?’라고 하고 회초리를 때립니다. 그리고는 꼭 안아주고는 ‘네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 주신 너를 잘 양육해야 할 필요가 있단다. 그래서 때리는 거야. 너도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도록 하렴’하면서 달랩니다. 그렇게 하면, 아이가 진심으로 기도하게 되고, 그 이후에도 아이를 꼭 안고는 그 아이의 얼굴이 완전히 밝아질 때까지 사랑을 확인시켜 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렇게 아이를 때리려면, 평소에 아버지가 아이에게 충분히 사랑을 확인 시켜주었어야만 합니다. 평소에 시간적으로 아이와 함께 있으면서 사랑을 확인시키지 못한 부모는 아이를 때리지 말아야 합니다. 아이는 가능하면 때리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큰 아이는 별로 때리지 않았지만, 막내는 조금 때렸던 것 같습니다. 대신 막내에게 얼마나 사랑을 확인 시켜 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사랑을 확인 시켜 주기 위해, 아이들에게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저의 예를 들어보면, 제가 유학할 때 – 정말 바쁜 시기였는데 – 저녁 때면 아이들과 야구나 축구를 함께 하고 아이스크림 하나를 먹으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매일같이 반복했습니다. 그리고는 7시면 잠자리에 들게 했죠. 여름 같은 경우는 7시면 아직 밖이 환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자기 힘든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그것을 원칙으로 지켜왔습니다. 엄마 아빠가 바쁜 중에도 아이들과 함께 했던 그 시간들. 아직도 우리 아이들은 그 때를 이야기합니다. 아이들과 오래 있는 것도 좋지만, 있는 동안에 무엇을 함께 해 줄 것인가도 무척 중요합니다.


또 한가지 이야기를 해 보죠. 제가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입니다. 막내 아이가 3학년 때었던 것 같습니다. 한창 일을 하고 있었는데, 막내가 갑자기 ‘아빠 공기 해’ 그러더라고요. 한참 논문을 쓰고 있는데 갑자기 공기 놀이라니요. 하지만, 그 10 20분이 그 아이에게는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잠깐만 기다려. 컴퓨터 세이브해 놓고’라고 하고는 아이와 공기놀이를 해 주었습니다. 그러더니, 조금 지나서는 ‘아빠 공기 재미없다. 고무줄 놀이하자’ 하더라고요. 고무줄을 한쪽 끝은 책상에 묶고, 한쪽 끝은 내 발에 묶고 껑충 껑충 뛰더니만, ‘아빠 밖에 나가서 하자’ 그러더라고요. 낮에 집에서 일하는 것도 이상하게 보는 판에 밖에서 아이와 고무줄 놀이하는 아빠라니요. 그래도 밖에 나가서 열심히 함께 뛰어 놀았지요. 그리고 나서 얼마 후에 막내에게 편지를 받았습니다. ‘아빠 고마와요. 공기 놀이 해 주고, 고무줄 놀이 해주고…’. 그런 추억은 평생 갑니다. 이렇게 평소에 아이에게 사랑한 사람만이 아이를 야단칠 수 있습니다. 그저 잔소리만하고 고함만 치는 것은 너무 좋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간디가 쓴 우리를 파괴하는 7가지 죄라는 글이 있습니다. 간디가 쓴 인간이 저지르는 아주 잘못된 죄의 목록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1. 일하지 않고 얻는 재산
  2. 양심이 결여된 쾌락
  3. 성품이 결여된 지식
  4. 도덕이 결여된 사업
  5. 인간성이 결여된 과학
  6. 희생이 없는 종교
  7. 원칙이 없는 정치

왜 이 말씀을 드리냐 하면, 여러분이 아이들을 양육하실 때, 자녀가 어디를 가더라도 이 원칙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참석자 질문: 형제들이 자주 싸웁니다. 어떻게 다루어야 하나요?
김인수 답변: 형제 간에 싸웠다는 것 만으로 양쪽을 모두 야단치는 것이 좋습니다. 한쪽이 분명히 잘못한 경우에라도, 형제 간에 싸웠다는 것만으로 야단을 치고, 그 이후에 억울한 아이를 따로 불러 ‘내가 억울한 것을 안다’고 설명해 주는 편이 좋습니다.


참석자 질문: 아이들에게 경제적으로 언제까지 도와주는 것이 좋을까요?
김인수 답변: 아이들에게 너무 늦게까지 경제적으로 지원해 주는 것은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아이들이 빨리 경제적으로 도와 줄 필요가 있지요. 만일 커서도 아이들이 경제적 도움이 필요하다면, 받을 생각하지 말고, 돈을 꾸어주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어째든 갚아야 할 돈이라고 생각할테니까요.


참석자 질문: 아이가 두세 살이라서 아직 어립니다. 이런 경우에 아이들은 훈계는 어떻게 하나요?
김인수 답변: 어리더라도 원칙에 따라서 훈계를 시작해야 합니다. 시간이 지나 버리면, 그 패턴을 바꾸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예들 들어, 아이가 높은 곳에 올라가서 다른 아이를 부르고 할 경우,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 줄을 알려주기 위해서라도 회초리를 들 필요가 있겠지요.


참석자 질문: 아이가 잘못은 했을 경우, 그 자리에서 야단을 치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야단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나중에 야단을 쳐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김인수 답변: 야단을 치는 경우는, 잘못을 한 상황과 가능한 한 짧은 시간 내에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아이가 잘못한 일과 야단 맞는 것의 연결을 잘 못하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참석자 질문: 아이들이 서로 싸웠을 때, 원인을 알기 위해 다른 집 아이에게 ‘왜 싸웠느냐’고 물었더니, 그 집 부모가 당혹해 하더라고요. 그런 경우에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김인수 답변: 아이들에게 왜 싸웠는지 이유를 묻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아이들은 그에 대한 답변을 이미 다 준비하고 있으니까요. 왜 싸웠는지를 다그치는 것은 아이에게 거짓말을 강요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싸운 이유를 묻기 보다는 싸웠다는 것 자체로 야단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참석자 질문: 낮에 엄마하고 있을 때 잘못한 일을, 저녁에 아빠에게 이야기 해야 하나요? 때로는 아이가 ‘엄마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할께요. 아빠에게 말씀하지 마세요’라고 그럴 때가 있거든요.
김인수 답변: 아이에게 ‘엄마와 아빠는 너에 관해서는 숨기는 것이 없어야 한다’라고 분명하게 설명해야 합니다. 엄마가 아빠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고자질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 아빠 모두가 너에 대해 다 알고 더 사랑하기 위한 것임을 잘 설명해 주면 됩니다.


참석자 질문: 아이들이 공공장소에서 떠들고 말썽을 부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냥 야단을 치자니, 아이들의 기가 죽을 것 같은데요.
김인수 답변: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함께 사는 법을 가르쳐 주고, 원칙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기 죽을까 봐 중요한 것을 놓친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고태형 목사의 ‘자녀교육’

이코스타 2007년 1월호

이 글은 2006년도 KOSTA/USA에서 고태형 목사의 ‘자녀교육’ 세미나를 녹취한 것입니다.


고태형 목사는 연세대학교 정외과를 졸업한 후, 장로회 신학대학원, Drew University에서 신학석사를 Union-PSCE에서 교육학 박사를 취득하였다. 현재, 미국 LA소재 선한목자 장로교회 담임목사이며 “말씀과 함께”라는 미국장로교회 성경공부 시리즈 이사야서, 출애굽기, 및 빌립보서, 골로새서의 저자이다.





요람속의 고향이라는 이야기에서 시사하는 바는 자녀양육에 신경쓰지 않으면 어느새 자녀들은 다 자라서 여러분 곁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월이 너무나 빨리 갑니다. 아이들이 자랄 때에는 아이들이 떨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금방 아이들은 부모의 곁을 떠나갑니다. 저희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아들을 대학에 내려놓고 와서 슬퍼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졸업을 해서 집근처에서 직장을 잡아 와 있습니다.

많은 부모들의 자녀를 향한 여러 꿈중에 하나는 자녀들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아이들을 키우는 것에 정신없이 지내다 보면 아이들에 대해서 꿈을 가질만한 여유조차도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McDonald에 가면 Happy meal을 많이 사는데 그것이 맥도널드 매상의 40%정도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이 통계는 아이들을 이겨낼 부모들이 많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Happy Meal을 먹으며 행복해 하는 광고를 보면서 그냥 자녀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 제일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냥 자녀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자녀양육의 목표로 하는 것을McDonald식 자녀교육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땅에 살아가면서 고통이 있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부모들이 아이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다 대신 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이 부모의 슬하에 있을 때에 고통과 아픔을 경험하고 대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녀양육할 때 어떤 꿈을 가지고 계실까 성경말씀 로마서 8:29을 함께 읽어보며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닮아가길 원하시는 것처럼 우리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기를 꿈꾸고 계십니다. 우리 자녀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화하는 것은 자녀가 행복하기는 바라는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 자녀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양육의 목표가 된다면 자녀들을 향해 하는 모든 일들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많은 부모들이 우선순위에서 잘못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사기 2:7 말씀을 보면 광야에서 여호수아와 함께 어려운 시간을 거쳤을 때에는 신앙생활을 잘했다고 써있습니다. 마치 미국 1세대가 이민초기에 고생고생을 하면서도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10절에 보면 그 후에 일어난 세대들은 하나님을 몰랐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 세대에게 신앙의 전수가 안된 것입니다. 여호와를 모르것 뿐만 아니라 1절을 보면 바알, 풍요의 신을 섬겼습니다. 요새 이민교회들을 보면2세들이 고등학교까지는 교회에 잘 나오지만 대학교 가면서 교회에서 멀어집니다. 그리고 풍요의 신을 쫓아 갑니다. 신앙교육이 잘 못되면 자녀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왔다고 했습니다. 부모님들 어느 누구도 자녀들이 재앙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녀들의 신앙교육에 소홀하다 보면 자녀들 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습니다. 자녀의 activity를 우선하게 되니까 교회에서 봉사, 헌신들이 뒤로 갑니다. 특히 주일날 오전에 많이 activity가 많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부모님들이 부추기는 때가 많습니다. 코스탄들은 우선순위를 제대로 세우셨으면 좋겠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에서 무엇이 성공적인 삶이라 생각하십니까라는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95%가 좋은 부모가 되는것, 90%가 행복한 결혼생활, 12%가 부자가 되는 것, 8% 명예를 얻는것 순서였습니다. 다음에 당신은 무엇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냅니까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95% 돈버는 것, 90% 명예를 얻는 것, 20% 행복한 결혼생활, 7%만을 좋은 부모가 되는 것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합니다.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시간이 행복한 자녀교육이라는 강의인데 사실은 좋은 부모되기 시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행복한 부부생활을 하여야 하고 그래야 좋은 부모가 되어서 좋은 자녀양육을 할 수 있습니다. Mrs. Doughtfire라는 영화를 보면 부부생활과 자녀양육에 대한 좋은 insight를 가질 수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와 아이를 셋낳고 양육하다가 별거를 해서nanny로 가장해서 들어가는데 아내와 대화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왜 혼자 살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처음에는 wonderfully different였는데 terribly different로 됬답니다. 이런 내용을 이전에 남편과 이야기해 본적이 있냐고 물었더니 혼자 울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현대사회에서 부부간에 대화가 없다고 합니다. 서로의 차이에 대해서 대화가운데 이해하고 용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제 부모로서의 역할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깊은 유대감을 형성해야 합니다. 관계의 법칙은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가 깊어 질수록 자녀는 부모의 신앙과 가치관을 더 많이 받아들입니다. 관계가 소원해 질수록 가치관을 전수하려 해도 자녀들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는 비결 여덟가지.




  1. 조건없는 사랑. 착하게 하면 이뻐하고 말안들으면 미워할거야라는 말은 좋지 않은 말입니다. 어떤 조건에서도 부모님이 사랑한다는 것을 느끼도록 해야 합니다.
  2. 계획된 시간을 자녀와 가져야 합니다. 가족과의 시간을 일정표에 넣어야 합니다. 아이들과의 약속도 지도교수와의 약속보다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아이들이나 가족이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되면 안됩니다. 아이 여럿이 있을 경우에 각자와 일대일의 시간을 가지는 것도 관계를 좋게 만드는 좋은 방법입니다.
  3. 집중된 관심. 아이가 필요한 이야기하고 요구할 때에는 다른 일을 중단하고 눈마추면서 아이들에게 집중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반대로 부모님께서 아이들에게 필요한것을 요구할 때에도, 심각성을 알려주어야 할 때에도 눈을 마주치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4. 지속적인 의사소통. 아이들에게 세계중심이 너희가 아니고 다른 것이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알려 주어야 합니다.
  5. 육체적인 접촉. 연구에 의하면 어린 딸이 아버지의 적절한 관심을 받지 못하면 다른 남자에서 관심을 찾으려고 한다고 합니다.
  6. 함께 즐기기. Monopoly, jenga등등 게임을 하면서 부모와 함께 하는 시간들을 가져야 합니다.
  7. 놀이뿐만 아니라 함께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플 때에 하나님께 기도해주고 하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집니다. 그러면 부모님이 아플 적에도 아이들이 기도하게 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에 함께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잘때 축복하고 기도해주는 것이 참 좋습니다.
  8.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가르치는것뿐만 아니라 보고 듣고 배우게 되있습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녀들은 부모를 닮게 되어 있습니다. 아이가 알면 부끄러운 것은 숨기지 말고 하나님앞에 내려놓고 고쳐 가도록 기도하셔야 합니다.

가장 소중한 직업이라는 기도문이 있습니다. 하나님 자녀교육하는 것을 기쁘게 감당하도록 해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시간은 금방 흐르고 자녀양육을 잘 하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하게 됩니다.


부모는 자녀들의Multiple intelligence을 고려해야 합니다. 학교교육은 논리수학적인 지능에만 포커스를 하지만 과연 자녀가 어느 능력이 있는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어느 사람은 Word smart, 언어능력이 뛰어나고 다른 사람은 Space smart, 공간능력이 뛰어납니다. 디자이너는 원단으로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다른사람은 Body smart, 운동능력이 뛰어납니다. 어떤사람은 Music smart, 음악능력이 뛰어납니다. People smart, 타인의 관점을 잘 이해하는 사람으로 분쟁을 조정하고 해결을 잘 하는 사람입니다. Self smart, 생각의 정리를 잘하고 직관력이 있는 사람으로 조언을 잘 해 줍니다. Nature smart, 자연물을 보고서 좋아하는 사람으로 연구를 하면 좋습니다. 부모는 자녀가 어떤 것에 뛰어난지 관찰을 하고 격려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중문화권에서 사는데 어떻게 교육해야 하나 생각하실 텐데 자녀들의 언어교육면에서 생각해 보면 아이들에게는 bilingual 이 built-in되면 좋습니다. 그렇게 되면 부모와의 대화단절이 되지 않습니다. 한가지 혼돈하기 쉬운 것은 미국문화가 모두 성경적 문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하는 것, 아이들이 하는 것이라고 그냥 그대로 다 따라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잘 분별할 줄 알아야 하고 잘 모르면 신실한 미국인 기독교인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미국의 문화에 대해서 잘 알고 guide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미국학교에서 volunteer할 때에 영어가 서투르다고 겁먹지 말고 자율적으로 참여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가질수 있도록 문화적으로 설명하고 가르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체벌에 관해서 살펴보면 어떤 부모는 상처때문에 사랑을 전혀 베풀지 않는 분이 있고 훈육은 없고 사랑만 있는 분이 있습니다. 훈육을 전혀 하지 않는 부모도 있고 독재적인 훈육을 하는 분이 있습니다. 사랑은 없이 훈육으로 교육하는 sound of Music의 폰트랩 대령처럼. 약물중독된 부모의 경우처럼 무관심한 부모도 있습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훈육이 있으면서도 사랑이 있는 부모입니다. Correta Henderson라는14살짜리 딸의 엄마가 딸이 매일 지각하고 만안들어서 행동을 바꾸지 않으면 activity를 시키지 않겠다고 하고 큰길거리에 board를 들고 함께 서있기로 했다는데 나중에 완전히 바뀌었다고 합니다. 체벌은 목적이 무엇인가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체벌은 목표가 파멸을 방지하기 위해서이고 미래를 위해서입니다. 징계에 대한 성경말씀은 잠언 10:17을 보시면 됩니다. 징계때에는 명확한 경계선을 그어주어야 합니다. 징계때에 말을 하셨으면 지키셔야 합니다. 마음이 아프다고 그냥 넘어가면 징계의 효과가 없어지게 됩니다. 징계의 결과는 단기적 아픔보다도 장기적 유익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김고운] “폭풍” 속의 “평안”

이코스타 2006년 11월호


2006년 8월 25일. 일기.


아침에 눈을 뜨며…
부지불식간에, 꿈 속에서도 찬양을 계속 흥얼거리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찬양.




  •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내앞에 어려운 일 보네
    주님앞에 이 몸을 맡길 때 슬픔없네 두려움없네
    주님의 자비하신 손길 항상 좋은 것 주시도다
    사랑스레 아픔과 기쁨을 수고와 평화와 안식을
  • 날마다 주님 내 곁에 계셔 자비로 날 감싸주시네
    주님앞에 이 몸을 맡길 때 힘 주시네 위로함주네
    어린 나를 품에 안으시사 항상 평안함 주시도다
    내가 살아 숨쉬는 동안 살피신다 약속하셨네
  • 인생의 어려운 순간마다 주의 약속 생각해보네
    내맘속에 믿음 잃지 않고 말씀 속에 위로를 얻네
    주님의 도우심 바라보며 모든 어려움 이기도다
    흘러가는 순간 순간마다 주님 약속 새겨봅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폭풍 가운데도… 제가 탄 배에 주님이 타고 계시니
내가 참 평안합니다.


이 평안이 너무 좋은걸요.


세상이 알 수 없는 평안… 주님 주신 평안에 참 감사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




제게 있어서 2006년 8월은…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아니 기억하고 감사해야하는 한 달이 되었습니다. 박사자격시험(Qualifying Examination)에서 실패한 후, 하루에도 수도없이 마음이 부서졌다 모아졌다… 약해졌다 강해졌다를 반복했지만, 그래도 웃을 수 있고, 그래도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유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변화무쌍한 상황과, 연약하여 흔들리기 쉬운 나자신을 본다면 결코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언제나 신실하신 하나님… 그 분을 신뢰함이 폭풍 가운데 평안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였습니다.


8월 3일, 구술고사를 보던 날 아침에 묵상했던 말씀은 누가복음 6장 37절 – 42절, 용서와 베품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 비판치 말라.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 정죄하지 말라.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 용서하라. 용서를 받을 것이요.
  • 주라. 줄 것이니.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안겨 주리라.)
  •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그 날 아침, 주님께서 나에게 왜 이런 말씀을 주시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 때에는 시험을 자연스레 패스할 것이라고 여겼기에, 이 말씀이 제 생활에 어떻게 살아나게 될 지, 어떤 예상도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시험결과를 듣고 나서, 눈 앞이 깜깜했습니다.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눈물부터 왈칵 쏟아지는데, 그 순간 공교롭게도 제 마음 속에 떠오른 것은 아침에 묵상했던 말씀이었습니다. 이 결과에 대해 어떤 누구도 비판치 말고, 정죄하지 말고, 용서하고, 주고, 내 눈 속의 들보를 먼저 빼는 것이 그 때의 제가 해야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쉽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박사과정에 들어와서 치르게 된 첫 퀄리시험이니, 그렇다면 두번째 기회는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했는데… 엄격한 학과 룰은 “두번째 기회는 없다” 라는 것이었고, 지금까지 어느 학생에게도 예외없이 한번의 기회만 주었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는 정말이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유학 3년차.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하는지, 아니면 다른 학교로 옮겨 공부를 계속 해야하는지, 혹은 다른 길을 찾아보아야하는 것인지 예상치 못한 상황 앞에서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갈바를 알지 못했지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던 것처럼…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상황 가운데 믿음의 발걸음을 떼라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무얼 어떻게 해야하는건지도 잘 몰랐지만, 그 와중에 제가 붙잡을 수 있었던 것은 딱 한 가지, “하나님”의 “신실하심” 이었고, 주님은 어떠한 순간에도 나를 집중력있게 붙들고 계신다는 믿음이 그 때의 저를 지탱할 수 있게 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어려운 마음 가운데도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시험을 준비하면서 제가 하나님께 드렸던 “고백”들이 시험결과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것은 분명 아님을 발견했고, 어쩌면 그 상황 안에서 주님을 향한 나의 믿음을, 또 사랑을 좀 더 분명하게 보여드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난하고 가난해진 마음으로 고백했습니다.


“그리 아니하셨지만 감사합니다.”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합니다.”


“이 일을 통해 새 일을 행하실 하나님을 기대합니다.”


그 때, 그렇게 쉼 없이 쏟아낼 수 있었던 고백과 기도.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 날 후로 참 귀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새벽마다 함께 기도무릎을 꿇어준 캠퍼스 동역자들과의 “말씀묵상과 기도” 시간은 날마다 간증의 연속! 함께 묵상했던 말씀이 매일의 삶으로 생생하게 나타나는 것을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도 익히 알던 말씀들이, 새벽마다 하나님께서 갓 써주셔서 내려주신 것처럼, 생생하게 마음판에 아로 새겨지고, 삶 가운데 살아나는데 어찌나 신기하고 감사하던지요.


말씀은 실로 살아 움직였습니다!


상황이 다급하기도 했지만, 우선은 제 마음이 주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으니 어느 말씀하나 가벼히 듣지 않게 되었고, 중심을 계속 체크하며, 순간순간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었던 것이 말씀을 삶으로 경험하는 토대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더불어, 동역자들과 멘토님들이 해주시던 진심어린 기도와 다독임은 힘겹던 시간을 참 따뜻하게 견딜 수 있게해준 힘이 되었습니다.


폭풍 속에서 항해하는 것 같던 그 시간.


한 달여의 기간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크고 작은 소소한 사건들을 모두 다 나열할 순 없지만… 하나님께서 문을 하나, 둘, 셋… 다 닫으시는걸 보며, 처음에는 마음이 참 힘겹기도 했으나 점차 두번째, 세번째쯤 되어서는 순종의 속도가 빨라지고, 즉각 순종하게 되고, 나중에는 닫으시는 문 너머에 열어주실 문까지도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주님께 기도드렸습니다.


“때를 따라 돕는 하나님의 은혜” 를 경험하게 해 달라고. 그리고, 주님께서 뜻하신 바가 있으셔서 이렇게 상황을 몰아가시는 거라면, 제가 바라고 원하는 것이 있을 지라도, 주님 원하시는 곳에 제가 설 수 있도록… 문을 계속 닫아주시라고 기도했습니다.


주일 설교 때 목사님께서 주신 말씀을 또한 마음에 새겼습니다.



아무리 아픈 시간도 다 지나가기 마련이며
아무리 즐거운 시간도 다 지나가기 마련이다.
“이것도 지나가리라.”

8월이 끝나가던 마지막 주, 저는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끊어놓고 서둘러 이사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감사히도, 그 때의 마음은 속상하거나 아쉬운 마음이기 보다는, 한 달여 하나님의 깊고도 큰 은혜를 체험하고 나서, 감사와 평안으로, 또 기대함으로 떠남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국행을 일주일도 채 남겨놓지않은 8월 30일. 전 해에 어드미션을 받았던 학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원한다면, 바로 다음주에 개강인 가을학기부터 트렌스퍼해서 공부하라고 말입니다.


그 순간, 전에 드렸던 기도가 생각났습니다. 주님이 뜻하신 바가 있어서 어떤 곳으로 인도하시는 것이라면 그 길을 즐거이 따라가겠다는 고백과 함께, 혹 주님께서 무얼하고 싶냐고 물어보시면… “제 소망이 주님 뜻안에 있는 것이라면, 공부하고 싶어요.” 하고 기도한 것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아, 어찌나 놀랐던지요….


폭풍 속에 있었다 할 지라도, “하나님이 나의 상급” 되심이… 모든 것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제 마음의 소망까지도 세세히 감찰하고 계셨으니 말입니다.


그 다음 날 아침, 새벽기도를 드리러 나갔는데 마침 말씀 본문은 욥기 마지막 장이었습니다. 욥의 고난이 끝난 후, 그가 할 수 있었던 고백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니다” 를 저도 고백하며, 또 회개하며, 관계가 어려웠던 지도교수님을 위해 중보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교수님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게 되시길 간절히 간구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강력한 인도하심을 따라 뉴저지에 와서 하고 싶었던 공부를 계속 하고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전에는 하나님께서 문을 하나, 둘, 셋… 닫으시더니, 이 곳으로 옮겨오고는 문을 하나, 둘, 셋… 열기 시작하시는데, 지켜보던 주위 분들까지도 놀랄만큼 앞 길을 예비하시고 인도하셨다는 것이 보이고 있습니다.


폭풍 가운데도 평안할 수 있게 해주셨던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이해할 수 없을 때에도 믿고, 순종하고, 감사하는 법을 배울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억하라 하셨던 “은혜의 때” 를 마음 깊이 새기며, 항상 기도하며 깨어있어야 겠다고 다짐합니다.


한창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저를 위해 기도해주던 선배가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고난 받을 때 낙망하지 말고,
축복 받을 때 교만해서는 안된다.”


참… 힘이 되는 말이었습니다.


부족한 저의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리며, 지금 어떤 상황 가운데 계시는 지는 알 수 없으나, 고난 가운데 계시다면 낙망하지 마시고, 축복 속에 계시다면 교만하지 마시기를 기도합니다. 저 또한 이 말을 마음 속에 계속 새기려 합니다. “고난 받을 때 낙망하지 말고, 축복 받을 때 교만해서는 안된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만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