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상] 세상은 이해 못할 성경적 경제관

이코스타 2007년 11월호


“세상이 이해 못하고 우리를 조롱하여도 ”


2008 KOSTA/USA 컨퍼런스에서 거의 매일 부르다시피 했던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의 찬양 가사 중의 일부이다. 난 집회 기간 내내 이 가사를 묵상하다시피 하며 많은 생각을 했다. ‘과연 우리의 어떤 부분을 세상이 이해 못하고 조롱하고 있을까?’


예상보다 많이 길어진 유학생활을 마치고, 미국의 작은 회사를 다니게 되면서 바뀌게 된 몇가지 중에서 특징적인 한가지는, 사람들을 통해 듣게 되는 관심사의 변화다. 학생 시절에는, 각종 시험에 대한 이야기, 연구에 대한 이야기, 또 진로에 대한 염려가 주된 주제였다면, 졸업 이후에 듣는 이야기들의 대부분은 ‘돈’에 관한 내용이 아닌가 싶다. 최근에는 조금 주춤한다고는 하지만, 한때 미국의 부동산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너나 할 것 없이 ‘집을 사고 파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얼마나 놀랬었는지 모른다. 그들이 교회를 열심히 출석하는 사람들일찌라도 말이다. 지금은 이율이 낮으니까 집을 사기에 좋은 때라는 둥, 이 지역은 투자 가치가 있으니까 지금 사면 좋다는 둥… 아무튼 집을 사고 파는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 나누는 것 자체가 무슨 문제는 아니겠지만, 모인 사람들이 크리스천이든 아니든 모두가 그 부동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내게는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1. 돈은 정말 가치 중립일까?


몇년전 한국 기독교 내에서 청부론-청빈론 논쟁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 논쟁을 지켜보면서 계속 할 수 밖에 없었던 고민이 바로 ‘크리스천이 진정 부자로 살 수 있는가’였고, 그 질문의 기저에는 ‘돈은 정말 가치 중립일까?’라는 좀 더 기본적인 의문이 있었다. 만일 돈 그 자체가 가치 중립이라면 깨끗하게 벌어서 깨끗하게 쓰는 크리스천 부자가 존재하는 것이 당연하겠고, 만일 중립적이지 못하다면 크리스천으로써 부자가 되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 문제가 있을 테니까. 그 이후 성경공부를 통해서, 또 성경적인 경제관에 관한 책들을 통해서 현재까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세상의 제도나 시스템들과 마찬가지로 물질도 원래는 선하게 창조되었다. 하지만, 그 물질은 인간의 타락과 함께 타락했고, 또 그 물질은 구원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결국 재물이라는 것은 하나님 나라 안에서 회복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현재는 본래의 모습을 잃고 타락했을 뿐만 아니라 인격성을 가지고 있어서 인간을 지배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재물에 대해 인격적인 신의 개념을 빌어 말씀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다시 말해, 재물이 그 원래의 속성, 즉 타락하기 전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면 크리스천이 부를 추구하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재물이 철저히 타락했을 뿐 아니라, 인간을 지배할 수 있는 속성까지 포함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 부를 추구하는 것이 타당할까라는 고민을 할 수 밖에 없다.


2. 내가 가진 경제관은 세상의 그것과 무엇이 다른가?


기독교 역사에는 가난을 신앙의 큰 덕목으로 여겼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가난하려고 노력하고 부자가 되는 것에 대해 죄의식마저 느꼈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현대는 어떤가? 현대를 사는 우리 크리스천들, 더욱이 미국이라는 경제대국에서 사는 우리들 가운데 ‘가난’을 미덕으로 삼고 추구하며 사는 크리스천을 찾아보기란 정말이지 너무 어렵지 않은가?


물론 가난하게 산다고 좋은 크리스천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현대의 미국이나 한국의 크리스찬을 향해 ‘왜 크리스천은 물질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나? 크리스천도 부자가 될 수 있다’라고 정당화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발상이 아닐까?


사실, 진정한 문제는 현대 미국과 한국을 살아가는 우리 크리스천이 가진 물질에 대한 생각이 세상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 아닐까? 직장을 구하는 기준이 연봉을 비롯한 조건이다. 어떻게든 집을 사고 집값이 오르면 기뻐하고 집값이 떨어지면 절망한다. 그렇게 버는 것이 일하지 않고 벌어들이는 불로소득이며 그로 인해 세상 누군가는 열심히 일하고도 소득을 얻지 못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고민은 접어둔지 오래다. 투자한 주식으로 돈이 벌리면 기쁘고 떨어지면 절망한다. 근데 그것이 정말 바른 것일까에 대한 고민은 없다. 내 경제의 여유분 중에서 적당한 액수를 교회나 자선단체에 기부한다. 그리고 나중에 세금혜택을 받는다. 그저 남들이 그렇게 하듯이 말이다. 나름대로의 노후대책을 세운다. 그것이 어떤 형태가 되는 말이다.


교회는 건물과 행사에 집중하는 상업주의 기독교의 전형이 된 것도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작은 목회는 늘 실패한 것으로 간주왔다. 작은 회사는 늘 실패한 것이듯이…


도대체 세상은 우리의 무엇을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의 어떤 점을 조롱할까?


3. 나는 진정 누구를 의지하나?


최근 사무엘서를 읽으면서, 사울의 이야기가 계속 눈에 들어온다. 전쟁에 임하기 전, 칠일 후에 오겠다던 사무엘을 기다리가 결국 마지막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 자신이 제사를 드렸던 사울. 이 사울은 정말로 하나님을 믿기는 한걸까? 사울 뿐 아니라, 구약에 나타나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은 건 맞나? 사울도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거부한 흔적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그들은 늘 애굽에서 자신들을 불러내 온 야훼 하나님을 믿었다. 또한 그 하나님의 심판을 믿었다. 하지만, 일상생활에 관련한 농사와 자식번성에 대해서는 하나님보다는 바알을 의지했다. 하나님은 그런 일상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고 여기는 듯 하다. 확실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믿었다고 해서, 일상 생활 속의 신을 따로 숭배하는 모습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차라리 성경은 그런 모습을 우상숭배라고 정죄하며, 바람난 아내의 모습으로 비난한다. 분명 하나님이 있다고는 믿는데, 어떤 부분에서는 다른 무언가에 지배당하며 사는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믿는 걸까? 하나님을 세상의 창조자로 인정하며, 또 지금고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왕으로 인정하는데, 나의 미래는 내가 투자한 집과 주식, 그리고 저금통장에 의존하고 있다면 나는 도대체 무엇을 믿는 걸까?


4. 존재한다고 선은 아니다.


대학부 시절 기독교 윤리를 공부하면서 함께했던 형제 자매들과 자주했던 표현이 기억난다. ‘존재한다고 선은 아니다.’ 낙태가 행해지고 있다고 선한 것은 아니며, 전쟁이 존재한다고 선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우리가 착각하기 쉬운 것 중의 한가지가 있다면, 남들이 다 그렇게 하고 있고, 또 그 일이 딱히 위법이 아닌 경우에는 선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남들이 정당하게 돈을 벌어 부자가 되고, 또 그 돈을 집이나 주식에 투자해서 늘려 나가고, 그리고 그렇게 노후를 보장받기 위해 애쓰며 산다고 그것이 쉽게 선으로만 간주될 수 없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을 생각해 보자. 나의 삶을 하나님께만 의존하며, 가난한 자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며, 또한 형제 자매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는 삶. 그래서 그럼 모습을 통해 하나님이 드러나시는 삶. 그래서 세상은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를 조롱하지만, 결코 돌아서지 않은 삶.


아주 솔직히 말하면, 이런 삶이 성경적이라고 깨닫고 나서 덜컥 겁이 났다. 내가 정말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고 조롱하는 그런 삶을 살아 낼 수 있을까? 하지만, 그 보이지 않는 한걸음을 함께 할 믿음의 형제 자매들과 함꼐 그 길을 걸어가고 싶다.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며, 나를 나보다 더 사랑하시는 분을 따라 가면서…

2007 KOSTA/USA 참석자 좌담회 – 문태균, 백정진, 안태상

이코스타 2007년 8월호

1. 먼저 자기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문태균: 안녕하세요, 저는 문태균이고 지금 앤아버 미시간에 있습니다. 박사 과정 학생이고 코스타는 이번 코스타가 네번째였고 조장으로 참석한 것은 세번째입니다. 반갑습니다.
백정진: 안녕하세요, 저는 오하이오 신시내티에 있고 코스타는 첫번째 참석이었고 이번에 조장으로 섬겼습니다.
안태상: 저는 안태상이라고 하고 조원으로 참석했고 두번째 참석이었습니다.


2. 이번 코스타 전체를 평가해보죠. 전체적으로 평가해주시고 가장 좋았던 점과 아쉬웠던 점을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안태상: 은혜 많이 받았고 가장 좋았던 점은 역시 오전에 있었던 주제 강의 말씀이었습니다. 아쉬웠던 것은 다시 말씀 드리겠지만 조별 모임이 좀더 Formal한 형태가 있었으면 좋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문태균: 손희영 목사님 말씀이 굉장히 좋았구요, 조별 모임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는데, 이번에 조별 모임이 쉽지 않았습니다.
백정진: 저도 주제강의 너무 좋았고, 아침에 코스탄들의 간증 시간도 짧았지만 굉장히 좋았던 것 같아요. 보통 간증에 거부감이 생기기도 쉬운데, 짧은 시간에 간결하게 잘 해주셔서 좋았던 것 같습니다.


3. 그러면 개별 프로그램을 평가해볼까요. 전체 집회에서 설교하거나 강의한 내용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셨습니까? 이번 코스타의 주제가 잘 전달되었는지요.


안태상: 저에게 필요한 말씀을 많이 해주신 것 같아요. 하나님 말씀을 리마이드 해 주고 이런 것들에서 많은 은혜를 받은 것 같습니다.
문태균: 손희영 목사님께서 개인의 경험과 연결시켜주셔서 말씀해주셔서 좋았고 개인적으로 충분히 묵상하신 말씀을 잘 전달해주셔서 감사했고, 주제와도 정확히 부합했던 것 같고요. 약간 아쉬웠던 점은 올해는 시작하는 시간은 약간 느슨했고 끝내는 시간을 맞추려고 노력을 많이 하신 것 같은데 끝맺음할 때 갑작스럽게 해야 해서 약간 무리가 있지 않았다 합니다.
백정진: 유학생들이 삶에서 매우 조급하게 사는 경우가 많은데 손희영 목사님께서 그런 문제에 대해서 잘 말씀해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저녁집회에서 마지막에 약간 시간에 쫓긴 것이 약간 아쉬웠습니다.


4. 오후에는 주로 세미나로 채워졌는데요, 세미나 운영이나 내용에 대해서 평가해주세요.


안태상: 세미나도 운영 면에서는 아주 좋았습니다. 강의실까지 안내해주시고. 내용도 참 좋았습니다. 노숙자 사역하시는 이야기에서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세미나는 내용이 약간 업데이트되어야 할 것도 있었습니다. 정보를 전달하는 차원에서는 예전에는 많이 도움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지만 요즘은 인터넷 같은 데서 많은 정보를 찾을 수 있는 것들이 있으니까요, 정보전달은 좀 지양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문태균: 세미나는 약간 기복이 많은 것 같습니다. 강의를 들어본 느낌에서 강의가 강사님의 삶 속에 완전히 내재되지 못한 것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세미나 내용을 전체를 통제하시긴 힘드시겠지만 약간 노력해주시면 감사 하겠고요, 세미나 CD을 가지고 가서 계속해서 듣는 것이 좋다고 조원들과 나누었습니다.
백정진: 티엠의 경우 조원이 들으셨는데, 토론이 시간이 부족해서 정리가 안 된 것이 아쉬웠고, 세미나의 경우 너무 광대한 내용을 다루면 시간이 부족한 경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전체적으로는 매우 좋았고요. 세미나 취소된 것이 좀 아쉬웠고요. 세미나 소개와 내용이 다른 경우가 있었는데 좀더 자세한 소개가 필요한 것같고요.


5. 일주일 내내 조원들과 함께 보내셨는데, 조활동이 잘 이루어졌나요? 어떤 점이 좋으셨고 어떤 점이 아쉬우셨는지요?


안태상: 조활동을 통해서 본인이 고민했던 것들 나누고 성경에 대해서 토의하고 이런 시간들은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저한테도 도움이 많이 되었고요. 아쉬운 점은 아까 말씀 드린대로 얘기를 하다 보면 다른 주제로 빠지는 경우가 많으니까 좀더 형식을 가지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조장님들이 조모임을 좀더 이끌어가셨으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문태균: 조장입장에서 조장이 균형을 잡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준비하고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겠죠. 작년에 비해 올해 준비를 못해서 어렵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아침 시간에 조장 모임이 많이 있었는데 조별 모임에 약간 방해가 되지 않았나 생각이 드는데요, 조장 모임을 다른 시간에 하면 좋지 않을까 합니다.
백정진: 기혼부부들, 처음 참석하신 분들이었는데, 감사하게 잘 따라주셨습니다. 큰 문제는 없었는데요. 조별 모임 장소를 싸인 업을 했었는데, 그게 조금 안내가 안 되어서 싸인 업 하지 않고 자리를 차지한 경우가 있었는데, 제이제이 코스타 때 안내를 더 잘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멘토님들이 많이 도와주셔서 감사하고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조장들이 멘토님들을 초청 해야 하는데 처음 참석하다 보니까 잘 몰라서 어려운 점이 있었습니다.


6. 찬양이나 금식 기도회, 엑스포, 그리고 상담 등은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안태상: 개인상담을 하지 않았는데 저희 조에 목사님이 오셔서 말씀해주셨는데 참 좋았던 것같애요. 질문도 하고 대화도 하고 참 유익했던 것 같습니다. 찬양도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따라 부르기 어려웠던 것도 전혀 없었고요.
문태균: 찬양이 참 좋았습니다. 너무 길거나 짧지 않고 예배 전에 준비할 수 있는 시간으로 적당했고, 금식 기도회도 좋았습니다.
백정진: 찬양이 참 좋았고요. 평양 과기대에 대한 정보를 갖고 같이 기도했던 것도 좋았고. 조원 중에 상담하신 분 중에 다른 말씀을 하신 경우가 있었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7. 이외에 운영에 관해서 코스탄들이 바라는 점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안태상: 세미나의 경우 매년 같은 내용으로 하신 경우가 있었습니다. 중요하기 때문에 반복하시겠지만 제목이라든지 내용을 확실하게 소개해서 동일한 것을 또 듣지 않도록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운영 중에 가장 힘든 점이 식사 통제하는 것일텐데 올해 더 복잡한 것 같았습니다. 잘 모르겠지만 고민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웹사이트에 좀더 많은 정보가 올라왔으면 합니다. 예를 들어 휘튼 칼리지 지도라든지 디렉션이라든지 코스타 내용에 대해서 좀더 자세한 내용들을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문태균: 식당에 인원을 더 배치해서 줄을 잘 설 수 있도록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식사 시간이 모자라진 않았지만 상당히 빡빡했거든요. 그래서 그 부분을 좀더 신경 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백정진: 저의 조는 공대생들이 많았는데 그런 분들은 미디어에서 파워포인트라든지 이런 것에 신경을 많이 쓰시더라구요. 실수가 좀 많지 않았나 하고요. 그리고 코스타 보이스가 많이 도움이 되었고요. 처음으로 조장을 하는데 정보를 제공해주니까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미나가 어떤 강사님의 경우 너무 많은 내용을 한번에 하려고 하니까 무리가 있는 경우가 있었고요. 그런데 어떤 세미나 강사님들은 이메일을 제출하도록 해서 계속 연락을 취하도록 해주셔서 좋았습니다. 그런데 아직 연락이 없네요. (웃음)


오랜 시간 말씀해주셔서 감사 드리고, 코스타 사역에 계속 관심 가져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권오승] KOSTA/USA-2007 연차 수양회를 기대하며

2007년 6/7월호

KOSTA를 섬기다 보면, “KOSTA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참 많이 받는다. KOSTA를 만난지 12년째가 되는 필자로서도 어떤 의미에서 매우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KOSTA란 무엇일까, 무엇이 KOSTA를 KOSTA 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답을 하기위해 딱딱한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넘기며 설명을 할 수 있지만, 여러가지 내용을 정리해보았을때 사람들이 흔히 KOSTA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선입관과 매우 다른 KOSTA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KOSTA는 집회가 아니다” 라는 것이다.


집회가 아닌 운동으로서의 KOSTA


많은 사람들이 KOSTA를 여름에 인디애나폴리스와 시카고에서 여는 집회로 생각하지만, 사실 그것은 KOSTA가 원래 추구하고 있는 것과 다소 차이가 있다. 물론 KOSTA는 집회를 포함한다. 그러나 KOSTA는 집회라기 보다는 KOSTA의 핵심가치(core value)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만드는 운동(movement)이다. KOSTA가 집회가 아닌 운동으로 규정(describe)하는 것은 KOSTA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신다고 우리가 믿는 소망의 내용때문이다. 만일 KOSTA가 많은 사람들을 한곳에 모아 일회적인 집회를 통해 소부흥(mini-revival)을 경험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KOSTA는 집회로 규정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KOSTA가 꿈꾸는 것은 KOSTA에 참여한 청년-학생들이, (1) KOSTA가 추구하는 핵심 가치에 동의하게 되어 (2) 그 핵심 가치를 가지고 각자의 삶에 살 뿐 아니라 (3) 그 가치에 동의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4) 그러한 일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주인되심을 인정하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더 많이 만들어 내고 (5) 그들이 몸을 담고 속해 살고 있는 피조세계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이 선포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 일을 가능하게 하는데 여름에모여서 함께 하는 집회가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이 KOSTA의 모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집회가 아닌 KOSTA, 2007년에는


집회를 앞두고 왜 갑자기 집회가 아님을 강조하고자 하는가. 그것은 금년 주제가 갖는 특수성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을 금년 KOSTA/USA의 주제는 “이 세대롤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아” 이다. ‘변화(transformation)’가 금년의 키워드이다.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변화는 우리가 알다시피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시작되는 성령의 일하심으로서만 가능하다. 그리스도인들을 조차도 대량생산하고 싶어하는, 효율성을 중시하는 풍조가 덕(virtue)로 여겨지는 시대에 이 집회를 통해서 효율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아 완전한(complete) 변화를 경험할 수 있으면 참 감사한 일이겠으나,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변화해 가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 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번 집회를 통해서, 코스탄들이 진정한 변화가 얼마나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가 하는 것을 깊이 인식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진정한 변화가 어떤 이들에게는 시작되는, 어떤 이들에게는 한단계 큰 도약을 하는, 어떤 이들에게는 새롭게 갱신(renew)되는 일들이 있기를 기도한다.


건강한 혼란과 무질서를 기대하자


집회를 전후하여 이번 인디애나폴리스와 시카고의 집회에 참석하는 코스탄들에게는, 결단의 기도 이전에, 뜨거운 찬양 이전에, 감격이 있는 말씀 이전에 올해의 주제를 붙들고 고민하는 일들이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고민의 시작은 바로 혼란과 시작되어야 한다. 혼란은 무질서이다. 혼란은 불확실성이다. 혼란은 미확정이다. 혼란의 상태에서는 아무런것도 기대할 수 없다. 오히려 혼란은 좌절하게 한다. 그런데 우리 자신들에게, 우리의 마음과 심령에 그런 혼란이 필요하다. 이런 혼란의 상태는 이 세대에서 벗어나기 위한 우리들 자신의 몸부림이 되어야 한다. 이런 혼란은 마음을 새롭게 하기 위한 첫 삽이 되어야 한다. 이런 혼란은 변화의 열매를 맺기 위한 씨앗이 되어야 한다. 유진 피터슨의 말처럼, 창세기 1: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니)의 혼란이 있어야 1:3 이후의 창조의 열매가 있는 것이다. 혼란으로 시작하여 열매와 결단으로 연결되는 집회가 되었으면 한다. 혼란으로 시작하여 새로운 마음과 창조와 질서로 끝맺음을 하는 코스탄들이 되기를 기도한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을 넘어서는 집회


그러나, 위에서 이야기한 여러가지 내용들이 그대로 이루어 진다 하더라도 그저 우리가 준비한 모든 것들이 순서대로 진행되어 우리가 예상한 것들만이 일어나는 집회라면 그것은 진정 우리가 바라는 집회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심지어는 위에서 이야기한 것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아도, 우리의 예측과 생각이 모두 잘못된 것으로 드러난다고 해도, 그것을 너머서 더 크게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에대한 기대감을 우리가 포기한다면 이 집회의 주인공에 하나님이 아닌 우리 자신을 놓는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일 것이다. 진정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기를 갈망하고, 그러한 변화에의 길에 들어서서, 다른 이들과 전 피조세계를 그 변화로 이끌어내는 KOSTA/USA-2007를 향한 하나님의 바람이, 이번 집회를 통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일어나길 기도한다.

[유남호] 우리 신앙에 미치는 상대주의의 영향

이코스타 2007년 5월호

상대주의는 다양한 이론들로 구성되어 있다. 경험 혹은 문화적인 특징과 각 요소들은 상대적이라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어떤 상대주의자들은 인간은 신념과 행동 규범들을 오직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배경하에서만 이해하고 평가할수 있다고 주장한다. 상대주의는 종종 진리 상대주의, 즉 절대진리란 없다는 원칙, 를 의미하곤 하는데, 다시 말해서 진리란 언어 혹은 문화 등과 같은 참조의 틀에 항상 상대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상대주의는 최근에 생겨난 신종 용어가 아니고 고대로 부터 중세, 근세, 현대에 이르는 긴 역사 속에서 많은 사상에 담겨져 있다.(1) 일례로, 현대의 기독교 철학 사상중에도 많은 움직임들이 윤리적인 측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극단적인 경우만를 위주로 열거해 본다면, 정서주의(emotivism), 주관주의(subjectivism), 상황주의(situationism)(2) 이라고 할수 있다.


좀더 풀어서 말한다면, 정서주의에서는 모든 윤리적 진술들을 정서적이라고 주장한다.


다시말해, 도덕적인 발언은 단순한 우리의 감정의 토로이지, 도덕적인 의무에 대한 신의 명령이 아니다 라는 견해로서 극단적인 상대주의다. 주관주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로서 인생을 위한 객관적인 의미나 가치가 없다고 믿는 실제적인 도덕률폐기론(3)이다. 상황주의는 모든 상황에 상대적이라는 견해인데, 예를 들어 사랑의 결정은 인식적으로가 아니라 상황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이와 함께, 역사적 상대주의에 빠져서 근본적으로 과거의 시대의 인간과 이 시대의 인간이 다르다고 이해하는 데서 오는 오해도 있다.


이러한 상대주의적 개념들은 철학 교과서에서만 찾아 볼수 있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우리 젊은이의 일상속에 깊이 파고들어 와 있는 것을 경험하곤 한다. 주일 예배 시간에 말씀을 들을때, 필(Feel)을 받아야 소위 은혜를 받았다고 여기는 경향이라든지, 개인 큐티 시간에 마음에 평소에 와 닿았다고 느끼는 말씀을 편식하고 나의 상황에 쉽게 적용할 것은 뭐 없나를 먼저 찾는 경향등에서도 그 영향을 의심해 볼수 있다.


소그룹 나눔 시간에 객관적인 진리의 말씀 탐구의 열정은 식어가지만, 방향성 없는 말들만 무성하게 나눈 후 모임을 마무리 하고 친교 시간만 계속 늘어나는 경향도 염려해 볼수 있으며, 성경공부 시간에 나눈 말씀에 바탕하지 않는 주관적인 걱정만이 담긴 상황적인 기도제목을 반복해서 들을 때면 그런 생각이 더욱 간절하게 들곤한다. 더 나아가서 성경말씀을 구시대적인 글의 묶음으로 오해하여 절대적 진리를 상대적인 상황화의 논리에 전복시켜서 신구약 시대에 활동하시는 하나님과 인간, 오늘날 시대에 활동하는 하나님과 인간을 동일하게 보지 못하는 경우에서도 이런 경향을 엿 볼수 있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포스트모던의 상대주의에 빠져있기는 하지만, 그 상대주의적인 가치관이 궁극적인 만족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또다시 만족을 줄수 있을 것 같은 어떤 것을 찾아 신비주의를 추구하기도 하고, 종교적인 봉사에 몰입하기도 하며, 세속주의적인 가치관을 그대로 받아들여 우상시 하면서 신앙적으로 포장하여 합리화 하기도 한다.


세속화되고 다원화된 사회(4)에서 우리 젊은 청년들의 당면한 중대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이러한 상대주의를 극복하고 의미 있는 삶의 규범과 가치를 회복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세상속에서 열린 겸손한 신앙을 유지하면서 열리기는 열렸으되 범람하는 세속주의와 상대주의의 물결에 떠내려가지 않고 상대적인 것을 매개로 하여 오히려 절대적 가치를 더욱 갈망할 수 있는 신앙과 삶의 본질적인 면을 회복되는 변화가 필요하다.


이런 젊은이들에게 해답이 될 수 있는 것은 결국 절대적인 성경의 해답이다. 허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주어진 문제에 단답식 으로 피상적인 답을 달아가는 top-down approach식으로 해결되기 보다는, 오히려, 소그룹 운동을 통해 bottom-up approach 식으로 성경을 붙잡고 함께 씨름하며 진실된 관계적 만남을 통해 마음과 생각을 열고 각 속사람을 계속 변화시켜 주시길 원하시는 성령님께 더욱 의지하는 길이라 생각한다.


정리하면서 “이 세상에 절대 가치라는 것은 없다. 절대 기준이라는 것도 없다. 타자(他者)에 대한 개인의 평가나 감상은 그야말로 개인적이고 상대적인 평가일 뿐, 그 이상의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식의 귀로 들을 수 있는 말들을 젊은 이들의 공동체에서 얼마든지 찾아볼수 있다. 사실, 그 보다 더욱 간과하기 쉬운 것은 귀로는 들을 수 없지만 심혈을 기우린 마음으로만 들을 수 있는 젊은 영혼들의 존재적인 신음이다. 마음을 열고 듣고 예수의 마음을 품고 함께 고민하며 말씀과 기도에 사로잡혀 사랑으로 가까이 다가갈 때다. 이럴때에야 비로소 예수님안에서 만 찾을 수 있는 행복의 기준, 삶의 의미과 영원한 대답을 제시하여 줄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1) Geisler, N. L., Introduction to Philosophy
(2) Geisler, N. L., Ethics : Alternatives and Issues
(3) Lewis, C. S., The Abolition of Man, appendix
(4) Newbigin, Lesslie, The Gospel in a Pluralist Society

[이정희] 다원주의 세계에서 진리를 선포하는 자는 왜 겸손해야 하는가?

이코스타 2007년 5월호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주인으로 그리고 인생의 모범으로 삼고 사는 사람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고 함께 그리스도인들이 된 형제 자매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깨어진 주위 사람들과 자연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하나님과 말씀과 기도로 교제하고 주위 사람들과 영적인 친교를 나누며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인 답게’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그 동안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깊은 관심과 열정을 가져왔다. 매일의 말씀 묵상은 물론이고 귀납적 성경공부에 연역적 성경 공부까지 아마 이렇게 열심히 성경 공부하는 기독교인들이 한국인들 말고 또 있을까? 기도 생활도 그렇다. 매일 매일의 새벽 기도 모임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 답다’라는 평가 항목에 있어서는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 같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달리 이웃과의 관계에서는 ‘그리스도인 답지’ 않은 행동은 많이 해왔기 때문인 것같다. 다양한 가치와 논리가 공존하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이웃들과 그리스도인답게 대하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 이 책의 기본적인 질문이다.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관련을 맺는 방식에는 성전론, 현실주의, 정전론, 기독교 평화주의라는 크게 네 가지의 방식이 있다. 성전론은 세상의 악한 질서는 파괴해야 하는 대상이라고 대하는 태도이다. 세상의 악한 질서에서 행동하고 있는 주위 사람들은 악의 결과이자 원인자로서 이들은 악으로 대하고 선한 질서인 기독교로 끌어들여야 하는 대상이다. 때로는 적개시하고 때로는 그 의미를 감추고 접근하기도 한다. 현실론은 이 세상의 질서는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앙은 신앙, 그것이 모든 세상사를 지배할 수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성전론과 현실주의는 기본적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아니다. 세상에 내재하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됨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모든 피조물을 지배하는 하나님의 질서도 부인해서는 안되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정전론은 세상 속에 있는 분명한 악한 가치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방식은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며 평화주의는 그러한 악에 대해서도 그리스도가 보여준 무저항과 평화적인 대응만이 허용된다는 견해이다. 두 견해는 분명한 악에 대한 문제이며 그 외의 경우는 그리스도가 보여준 평화적인 태도만이 성서적이라는 데에 견해를 같이 한다.


그리스도인이 비그리스도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그리스도인은 비기독교적인 세계관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분명한 악을 제외하고는 겸손과 부드러움으로 그리고 한편 적극적으로 대화해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예수님의 모범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해하려는 사람들에게도 끝까지 대화를 하셨다. 예수님의 태도가 신앙인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모범이 된다면 그분이 다른 사람들을 대한 태도, 특히 약자와 병자, 가난한 자들에게 다가가시고 진지하게 대화하는 태도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둘째는 기독교 신앙의 보편성에 대한 믿음이다. 종교인과 비종교인은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할 때가 많다. 다른 전제를 갖고 세상을 보기 때문에 대화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그 세계관은 현실적인 경험을 통해서 검증되고 확인되는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일관성과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세계관인 것이다. 그 보편성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찾도록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셋째는 대화가 평화와 화해를 만들어 가는 과정임을 인정하는 태도이다. 갈등과 충돌이 만연한 세상에서 서로를 향한 진심어린 대화는 그리스도가 말한 평화를 만들어가는 한 발자국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설명에 동의할 수 있다면 무례한 기독교는 옳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겸손한 선포자는 세상과의 관계에서 균형잡힌 세계관을 갖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들이고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그것은 바로 겸손한 선포자의 모습일 것이다.

[김동민] 나도 김중배가 되고 싶은가? (물질주의)

이코스타 2007년 5월호


며칠 전 인터넷 기사를 보다가 어떤 나라에서 일어난 씁쓸한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내용은 이렇다. 30명이 모이는 어떤 교회의 현지인 목회자가 한국교회의 후원으로 1,000명을 수용하는 교회를 짓게 되었다. 건물뿐만 아니라, 교회에 필요한 물품까지 제공했다고 한다. 그러나 5년이 지나도 교인 수는 변하지 않았고 교회 건물이 들어선 곳이 그 나라에서 가장 큰 회교사원 근처인데다가, 지역적인 문제들을 일으켜 소송에까지 휘말리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기자는 이를 교회의 물질주의와 연관을 시켜 이렇게 꼬집는다.


“한국 교회가 여전히 이런 식으로 교회 건물을 지어주려는 근본적인 마음 자세는 바로 이 땅에 커다란 교회 건물이 있으면 교인 수는 자연스럽게 증가한다는 한국적 세속주의 교회 성장론에 근거한다.”(1)


사실 이런 문제는 중국교회 안에서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 것과 매우 흡사하다. 요즘 한참 열기가 오르고 있는 Back to Jerusalem운동(2)을 비롯해서, 윈 형제가 쓴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는 책이 엄청난 화제가 된 이후로 중국교회에 대한 많은 관심과 기대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와 관련된 설교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요지는 이렇다. 이제 세계 선교의 완성은 중국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고, 그리고 한국교회가 잠자는 중국을 깨우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지금 일부 중국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들을 보면 물질주의로 오염된 한국교회의 빗나간 열정이 초래한 부작용들로 인해 목회자들이 타락하고, 순수했던 중국교회들이 무너지고 있다는 소식이다. 참으로 안타깝기 짝이 없다. 실제로 일부 중국교회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외국의 대형교회의 영향력 안에 들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소위, 잘만 잡으면 교회 건축은 물론, 평생 사역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란다.


선교가 되었건 목회가 되었건 어떠한 활동을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열정을 이끄는 힘이 어떠한 세계관 위에 세워져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성경에 기반을 두지 않아 물질주의, 성공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에 오염이 되었다면 그 열정이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오히려 복음은 더 가려지고 더 많은 사람이 화를 당하게 되는 법이다.(3) 그렇기에 아무리 큰 성과를 거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인간적인 정욕과 자랑에 근거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요일 2:15 16).


오늘날 교회 안팎에서 사람들에 대한 평가 기준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에만 목숨을 걸고 투자한다. 그렇기에 더 많이 가진 사람을 더 가치 있는 사람으로 인정한다. 헨리 나우엔이 소개했던 장애우 아담처럼 하나님이 지으신 인격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고지순한 절대적 가치는 이미 물질주의의 희생이 된지 오래다. 이런 불균형의 시초는 인류가 범했던 첫 번째 실패의 시점에서부터 출발한다. 이후 인간들은 아담과 하와가 범했었던 그 열매를 추구하는 일에 최고의 우선순위를 두게 되었고, 이를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물론 성경의 권위까지도 말이다.


교회 내의 물질주의는 창세기 1장 22절에 나오는 말씀을 이론적 기반으로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려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데, 이 말씀을 가리키며 열매의 당위성만을 주장한다. 결국 이 말씀에 기초(?)하여 어떤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그 수단은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도 된다는 성공주의로 번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미 그 폐해들의 증거는 세계 역사를 통해 증명되었고, 특히 오늘날의 유럽 교회가 말하고 있다. 복음의 근원지였던 유럽의 수많은 교회들은 이미 관광지와 술집으로 전락해 버린 지 오래다. 미국 역시 유럽과 마찬가지로 물질이 지배하는 가치관이 용인하는 편안함과 안락함으로 타고 복음은 점점 그 힘을 잃어가고 있다. 그 위기는 한국 최초의 선교사였던 언더우드 선교사의 손자인, 한 장로님의 고백을 통해서 절실히 느껴진다. 그 장로님은 미국의 한 유학생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며 이제는 한국이 복음으로 미국을 다시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 이야기가 어찌 한 사람의 안타까움에서 나온 고백에 불과하다고 하겠는가? 우리는 어떠한가? 영원을 지켜낼 사명을 가진 우리들이 이 세대를 지배하는 풍조 안에서 허물어지고 있는 기초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을 것인가?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을 오염시키는 물질주의의 부조리와 그 현상들을 고발하고 성경적인 해법을 찾기 위해 많은 것들을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물질주의에 대한 본질적인 접근, 즉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증명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관한 바른 이해이다. 우리가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분이 성취하신 승리에 도취되어 그 권리만을 주장하며, 나아가 우리에게 마땅히 속한 것을 넘겨받는 것에만 그쳐서는 안된다. 이미 보장된 열매를 보되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감당하신,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신 십자가를 지고 고난에 동참하는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4)는 마우의 이야기에 절대로 공감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4:12-13)


경성 최고의 갑부를 따라갔던 심순애를 나무랄 사람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 중에는 얼마나 될까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오히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 2의, 제 3의 김중배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 아닐까? 그런데 이런 심파극에서조차, 독기를 품고 사채업자가 된 이수일도, 사랑을 뒤로하고 돈을 따른 심순애도 결국 자살한다고 마는 비극을 우리에게 교훈하는데… 오늘 우리의 현실을 보면 아직 답답하다.


자신이 누릴 수 있었던 모든 권리를 포기했던 사도 바울의 삶을 생각해 본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들의 허점을 깨닫고 결코 소유할 수 없는 것임을 알았던 바울처럼, 우리의 생명이 마치고 하나님을 대면할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영원하신 말씀들로 건져 올려진 삶(5)이어야하지 않을까?




(1) 뉴스앤조이
(2) http://www.backtojerusalem.com/
(3) 물에 빠져 죽은 오리, 양승훈
(4) 무례한 기독교, 리차드 마우
(5) 참으로 신실하게, 이재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