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상] 2008년 1월에 읽은 책들


2008년 첫번째 달. 내공없는 풋내기의 책읽기는 계속된다. 이번 달에도 생각의 지평의 넓혀주는 귀한 책들을 접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 단지, 꼭 읽고 싶었던 책들을 그 두께에 지레 겁먹고 뒤로 미루어 놓은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하나님의 나라, 교회 그리고 세상’, Howard Snyder (박민희), IVP, 2007

사용자 삽입 이미지한사람 한사람이 변하기만 하면 정말 세상도 변할까?

아직 최루탄 냄새가 가시지 않았던 캠퍼스. 나도 대학 새내기 시절에는 선교단체라는 곳에 몸을 담았었다. 그 때에도 지금처럼 리더들에게 이것 저것 따지기 일쑤였는데, 그 당시 내가 따지며 대든 내용 중의 하나는 크리스천의 사회참여였다. 입학 초기 신입생을 위한 한 강의에서, 모 간사님께서는 ‘사람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 데모한다고 세상이 변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고, 난 그분께 ‘탈세를 할 수 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사람이 바뀌었다고 어떻게 탈세를 하지 않을 수 있냐’고 반발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냥 그것이 아닌 것 같아서 마구 질문했었는데, 그리고 그 이후 이 문제는 많이 해결했다고 믿었었는데… 하지만, 크리스천의 사회참여의 정당성 여부는 아직까지도 내겐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있다.

1983년도에 저자의 강연을 정리했다고 하는 이 책을 통해 나는, 하워드 스나이더의 다른 책 – 참으로 해방된 교회, 교회 DNA 등 – 에서의 주장을 조금이나마 더 이해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하워드 스나이더의 키워드 중의 하나인 ‘생태계적 하나님나라’의 개념이 좀 더 명확해졌다던가 하는…

책의 전반부에서 저자는, 하나님나라의 특징들은 이미 구약에서 약속되고 계시되었으며, 그 특징들이 신약에 와서 재해석되고 완성된 것임을 ‘샬롬’, ‘도시’, ‘가난한 자들과 함께함’, ‘안식’, ‘희년’ 등의 분야로 나누어 살핀다. 그리고는 이런 하나님나라가 현재에는 어떻게 구체적으로 성취되야 하는가를 다루고 있다. 책 후반부에서는 그런 하나님나라가 개인을 넘어 교회와 세상까지 영향을 끼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가하는 제안을 한다. 예를 들어 국가의 정책 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던가, 국제 평화를 위해 압력을 행사하는 것 등도 해야한다는 것이다. 즉 개인 복음 전도 뿐 아니라, 사회 정의에 참여하는 것도 하나님나라를 위해 동일하게 귀한 일임을 강조한다.

크리스천이 세상의 일에 무관심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세상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하려는 여러 시도들이 정말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길인지는 의문이 든다. 어쩌면,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기에, 또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바보같아 보이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교회다운 교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더 옳지 않을까? 우리의 싸울 것은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에 대한 것이니까…

“십계명 (The truth about God)”, Stanley Hawerwas, 복있는사람, 2007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람들은 누군가를 평가하기 위해 문장 하나를 사용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은 참 순진해’ 혹은 ‘그 사람은 너무 정치적이야’ 등의 한 문장으로 표현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평가가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고는 하지만, 누군가에 대한 한사람의 평가가 동시에 상반된 두가지 방향으로 나오는 건 아무래도 좀 자연스럽지 못하다.

한권의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성향에 대한 서로 다른 두가지 평가가 나오는 경우 또한 흔치 않다. 그런데, 이번에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십계명’을 보면서 이런 종류의 혼란을 겪었다. 하우어워스는 존 하워드 요더의 이론을 지지하는 윤리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에 이어 한국말로 소개된 그의 두번째 책이다.  이 책에서 그는 “십계명은 세상을 위한 윤리적 지침이나 세상을 향해 선포할 기독교 선언문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이며 누구의 소유인지를 알게 된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이 땅의 세속문화와 그 가치에 대항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하는 삶의 방식이다”라 단언한다. 계명 열가지를 하나씩 짚어가며 그 원래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그 계명들이 단순한 윤리로 취급될 가능성에 대해 경고한다.

“그리스도인이 결혼해야 하는 단 하나의 바람직한 이유라면, 독신일 때보다는 기혼일 때 세례에 따른 소명의 삶을 보다 훌륭하게 살아낼 수 있다는 확신때문이다”라며 결혼을 공동체적인 삶과 연결시키는 다소 급진적인 성향을 보인다. 반면 십일조의 당위성을 지지한다던가 조직교회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부분에서는 지나치게 보수적인 면모 또한 엿볼 수 있다. 도대체 하우어워스는 정확히 어떤 성향의 사람일까? 아직은 공부해야 알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있기는 하지만, 김기현 목사가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의 해설에서 이야기했던 하우어워스에 대한 평가는 조금 도움을 주는 것 같다: ‘나 개인의 판단으로는, 그의 신학이 자유주의 신학의 심장부에서 자라나 재세례파인 존 요더 (John, H. Yoder)의 영향을 받아 평화주의자(pacifist)인 점, 그에 더하여 미국과 자유주의 양자에 대해 전투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 실천적 성향, 거기다 자연신학을 강하게 반발하는 것이 칼 바르트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 보수주의를 닮은 데가 있는지라, 진보/보수 양 진영 모두에게 두루두루 통하는 것이 도리어 약점이 됨으로써 딱히 절대 지지층이라 할 만한 이들이 없는 것이 한 요인이 아닐까 싶다. 모두에게 더 없이 절실하지만, 동시에 삼키기에는 쓰디 쓴 부분이 한 두 군데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도 이미 많이 진보화한 걸까. 그의 보수적인 성향이 적잖이 거슬리는 걸 보면서 나도 놀라고 말았다.  

“주와 함께 달려가리이다”, Eugene Peterson (홍병룡), IVP, 2003

사용자 삽입 이미지우리는 때로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면서도 서로 다른 뜻을 염두에 두고 있어 이해하기 힘든 상황을 겪곤 한다.

몇 주전 토요일 아침 성경공부 모임에서 요한복음 3장을 공부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서 말씀하시면서 사용하신 ‘아노텐’라는 단어가 ‘위로부터’ 혹은 ‘다시’의 두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고, ‘프뉴마’라는 단어도 ‘바람’ 혹은 ‘성령’을 모두 나타낼 수 있다는 내용을 함께 공부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물과 성령’이란 단어를 왜 사용하셨을까를 이야기하면서, 나는 ‘새로운 창조’의 의미를 강조하신 것 같다고 이야기한 반면 다른 몇 멤버는 ‘세례’를 염두에 두신 것 같다고 하면서 토론이 계속되었다. 정말이지 한참을 이야기한 후에 알게 되었는데, 나는 ‘세례’를 ‘성례로서의 세례’로 이해하면서 동의하지 못하고 있었고, 한 자매는 ‘거듭남으로써의 세례’를 이야기하면서 내 주장에 계속 이의를 제기하고 있었다. 같은 이야기를 왜 이렇게 힘들게 했는지, 그건 단어의 정의를 일치시키지 못했었기 때문이었다.

때로는 똑같은 단어가 사용된 하나의 표현이 그 정의가 다를 경우, 정반대의 개념을 나타내기도 한다. 유진피터슨의 ‘주와 함께 달려가리이다’에서 사용된 ‘탁월함’이란 단어가 그 좋은 예가 아닐까 싶다. 흔히들 ‘크리스천은 탁월함을 추구해야 한다’라고 이야기할 때의 ‘탁월함’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의 삶을 추구하며 살아감으로써 가지게 되는 탁월함을 이야기하곤 한다. 반면 유진 피터슨이 말하는 ‘탁월함’은 하나님께 철저하게 순종함으로써 “단조로운 도덕적 습관에서 깨어나고, 그저 하잘것없는 일로 바쁜 일과를 툭툭 털고 과감하게 최상의 삶을 살도록 도전받”는 삶이다. 피터슨은 그런 대표적인 인물로 예례미야를 이야기한다. 예레미야의 삶 가운데 세상에서 흔히들 이야기하는 탁월함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는데도 말이다. 요시야 개혁의 시기에 참 개혁을 외쳤던 선지자, 그리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며 아스돗에 다시 땅을 구입하며 하나님의 회복의 메세지를 전했던 선지자,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과 지도자들에게 늘 미움을 받았던 선지자, 그 예레미야의 탁월함을 우리는 추구해야 한다. 일상속에 묻혀있는 삶을 딛고 일어나는 하나님의 탁월함을 말이다.

유진 피터슨의 초창기 작품 중의 하나인 ‘주와 함께 달려가리이다’는 이런 예레미야에 관한 이야기이다. 많지 않은 예레미야에 대한 기록이지만, 역사적 정황과 문맥에 대한 피터슨의 탁월한 묵상이 우리로 하여금 예레미야의 탁월함을 엿보게 한다.

유진피터슨의 책을 읽을 때마다 ‘나도 이런 묵상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이미 여러 책들에서 주장했듯이 시와 소설을 즐길 줄 알아야 할텐데, 나에게 있어 시와 소설은 여전히 멀기만 하니 어찌하겠나…

“바울과 예수”, F.F. Bruce (이길상), 아가페출판사, 1992

fk3.bmp그냥 그렇다고 덮고 넘어가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될 때가 있다. 음…

바울은 왜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많이 언급하지 않았을까? 20세기의 많은 신학자들이 주장하듯이, 바울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토대로 예수를 새롭게 구성했을까? – 그냥 넘어갈 수 있을 주제같기는 한데 말이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주제를 묵상하고 공부하면서 의아한 것 중의 하나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자료가 상당부분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가 하나님나라를 향하고 있고, 예수님의 설명 또한 그렇다. 그렇다면 바울의 서신들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주제가 별로 등장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바울의 가르침 속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상이 깊숙히 녹아 있는 것일까?

이런 궁금증을 안고 보수적 신학자로 알려진 F.F. Bruce의 “바울과 예수”를 손에 들었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전문적인 책은 아니기에 나의 초기 궁금증에 대한 직접적인 답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바울과 예수의 일치점에 대한 보수 진영의 주장을 어렴풋이는 알 수 있었다.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바울과 예수의 차이점의 원인을 하나님 나라의 용어로 풀자면 이렇다. 하나님 나라의 시간적인 긴장성을 잘 나타내는 표현이 ‘Already, but not yet’으로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두 봉우리 사이의 긴장으로 표현하곤 하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명은 이 두 봉우리가 모두 도래하지 않은 상황에서 하신 것이다. 반면, 바울은 그 중에서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의 봉우리는 넘어서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와의 중간에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바울과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는 어느정도의 차이가 존재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이런 설명을 위해 바울이 받은 전승과 계시의 차이점, 예수와 바울의 칭의에 대한 공통적 가르침, 그리고 윤리적인 가르침에 있어서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성경의 증거를 들어가며 차분히 설명한다.

아직 내가 가진 의문에 확답을 찾지는 못했다. 막연한 방향만 알았을 뿐… 이제 관련된 책들로 좀 더 여행해야만 할 것 같다.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Leslie Newbigin (홍병룡), IVP, 2007

사용자 삽입 이미지레슬리 뉴비긴의 책을 읽을 때마다 깜짝 놀라곤 한다. 이해하기 쉽지 않을만큼의 논리로 이야기를 전개해 가지만, 결론은 놀라우리만치 보수적이기 때문이다.

IVP에서 모던클래식 시리즈로 소개한 네번째 책인 레슬리 뉴비긴의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은 이미 다원주의 분야에서는 널리 알려진 그야말로 클래식이다. 이곳에서 더 이상의 요약을 적일 필요가 없을만큼 많이 알려진 다원주의에 대한 변증법적 논리를 담고 있다. 이전의 매끄럽지 못했던 번역도 좋아지고, 편집마저 수려해져서 책을 읽는 재미를 더 해 주었다고 할까. 다원주의에 대한 대항논리로 우리에게 익숙한 ‘사실’과 ‘가치’를 통한 설명 등 전형적이지만 명쾌한 설명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런 다원주의 사회의 대안으로써 진정한 공동체성의 회복을 내세우는 담대함이 돋보인다.

[조한상] 2007년 6,7,8월에 읽은 책


2007/11


코스타 연차 수양회가 있는 여름이 지나간다. 코스타 준비와 마무리에 바쁜 여름, 유난히 책을 읽기에는 쉽지 않은 시기인 것 같다.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그동안 읽은 몇 권을 책을 짧게 나누고자 한다.


“바울의 공동체 사상”, Robert Banks, IVP, 2007
성경에서 말하는 공동체는 어떤 모습일까? 이 질문은 우리가 자주하는 질문이지만, 그만큼 다양한 해석들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적으로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바로 이 책에서 로버트 뱅크스가 그 일을 해 준 것 같다. 로버트 뱅크스는 공동체에 대한 여러 저작으로 알려져 있고, 특히나 가정교회에 대한 저술은 탁월하다. 건강한 공동체에 대한 기본 자료로써 탁월하다 하겠다. 하지만 오래된 책이라 그런지, 딱히 새로운 내용을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아쉬움도 남는다.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옥성호, 부흥과개혁사, IVP, 2007
‘부족한 기독교’를 논하기에는 뭔가 좀 부족한 책인지 싶다. 방향과 의도는 참 좋았지만,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리와 자료면에서 많이 아쉬웠다. 현대 기독교는 저자가 지적하듯이 심리학에 많이 오염되어 있고, 자기 최면을 신앙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지적이 꼭 필요한 시점임도 동의한다. 하지만, 우리가 심리학을 의지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심리학이 과학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다. 심리학이 아무리 훌륭한 과학이라고 할 지라도 우리는 하나님보다 그 어떤 것을 의지해서는 안된다. 저자가 ‘심리학은 과학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펴는 논리 전개는 보기에 안스럽기까지 하다. 현대 학문의 흐름을 전혀 읽어 내지 못했다고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에 대한 평가를 비롯한 여러 건강한 접근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저자가 약속한 두번째 세번째 책을 기대해 본다.


“십자가와 칼”, Gregory A. Boyd, 한언, 2007
“The Myth of a Christian Nation: How the Quest for Political Power Is Destroying the Church (기독교 국가에 대한 공상 – 정치 권력에 대한 추구가 어떻게 교회를 파괴하는가)” – 이 책의 원 제목이다. 제목 만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내용을 설교하면서, 저자의 교회에서는 1000명이 넘는 사람이 교회를 떠났단다. 미국 대선을 통해 들어난 기독교인들의 기독교 국가에 대한 환상을 성경적으로 도전하는 책이다. 저자는 책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 바로 기독교 국가’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힘은 십자가의 섬기는 힘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글 부제에는 ‘위에 서는 힘, 아래에서 섬기는 힘’이라고 되어 있다. 기독교 평화주의의 색깔이 많이 배어 있는 건강한 책이라고 하겠다.
Gregory Boyd는 ‘Letters from skeptic’에서 무신자 아버지와의 편지 교환을 통해서, 그의 신앙을 가볍게 나마 보여준 적이 있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그 책의 논리에 참 많이 동의했었다. 그의 건강한 생각을 다시 접하며, 그의 다른 책을에 대한 호기심이 정말 커진다.


“공감적 책읽기”, 김기현, SFC 출판부, 2007
좋은 책을 소개해 주는 좋은 사람을 만나는 일, 또 그런 책을 만나는 일은 늘 반갑다. “공격적 책읽기”라는 책이 더 어울리는 듯한 김기현 목사의 ‘책 권하는 책’이라는 “공감적 책읽기”이다. 괴물과 계속 싸우다 보면 스스로 괴물이 되어 있을 수 있다며, 좋은 책을 소개해 주어 고맙다. 하지만, 어쩌랴. 아무 생각없이 책을 읽지 않는 한, 어떤 책이 자신의 마음에 꼭 들 수 있을까. 책을 권하고자 쓰여진 이 책이었지만, 중간 중간 보이는 날카로운 비판들은 나로 하여금 유쾌한 웃음을 지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우리들의 거듭난 결혼 이야기”, 조은숙, IVP, 2006
결혼에 관한 좋은 책을 찾기는 정말 쉽지 않을지 싶다. 결혼이란 것이 워낙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기에 그런 모습을 일일이 다 묘사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그런 결혼 생활의 공통분모만 모아서 이야기하자면 너무 이론적이고 피상적이 되기 쉬우니까 말이다. 결국, 결혼에 대해 말하려면 자신의 생활을 진솔하게 이야기하면서 풀어가야 하는데, 그렇기 위해서는 적잖은 용기가 필요하다. 바로 그런 용기를 가지고 진심 어린 자신의 결혼 이야기를 풀어 놓은 책이 바로 조은숙씨의 “우리들의 거듭난 결혼 이야기”이다.
물론 나와는 사뭇 다르기에 동의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지만, 저자의 진실이 배어 있는 고백들을 그렇게 가볍게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래리 크랩의 ‘결혼 건축가’를 이론서로 함께 보면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내안의 죄 죽이기”, 존 오웬, 브니엘, 2007
17세기 청교도인 존 오웬은 어떻게 ‘내 안에 있는 죄’를 죽일 방법을 보여줄까. 혹시 색다른 방법이 있는 건 아닐까? – 이 책을 손에 들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이다. 하지만, 죄를 죽이는 왕도는 없는 것 같다. 자신 안의 죄에 대해 더 민감하고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신앙의 선배의 모습을 통해, 내 자신이 얼마나 죄의 부분에 대해 스스로 너그러웠었는지 깨닫게 해 주는 귀한 책이었다. 결국 죄에 대해 민감하기 위해서는 성령을 의지하고 깨어있어야 함을.


“교리공부가 즐거운 네가지 이유와 삼단계 방법”, 백금산, 부흥과개혁사, 2007
1000원!! 소책자!!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내가 대학부들 다니던 90년대 초반, 주일 성경공부를 마치고나서 교회 주변의 서점을 찾아 선배들에게 책을 소개받고 읽고 토론하던 일이 하나의 일상이었던 시절, 서점의 한편에는 소책자만을 위한 코너가 마련되어 있었었다. 작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을 담고 있어서 적잖은 영향을 받았던 책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송인규 목사의 ‘죄많은 이세상으로 충분한가’, 마이클 위베의 ‘소그룹을 인도하려면’같은 소중한 소책자들이 있었다. 이 책은, 흔히 생각하듯이 교리가 그저 머리로만 끝나는 지적 유희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기반이 됨을 강조하는데, 일전에 읽었던 맥그래스의 책 ‘기독교 교리 이해’와 비슷한 면이 많은 책이다.


“주기도문 강해”, 김세윤, 두란노, 2000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을 요약해 놓았나?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는 요구는, 그 당시 새로운 흐름이 된 예수님의 운동을 정의해 달라는 요구였고, 그에 대해 예수님은 대단히 간략한 기도문으로 자신의 방향을 정리해 주셨다고 한다. 그래서 이 짧은 기도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이 농축되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청원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구체화되는 것이 매일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청원과 죄 용서의 청원, 그리고 악에서 구해달라는 청원이고 말이다.
주기도문에 관해서 여러 책을 보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 김세윤 박사의 책을 읽고는 주기도문만으로 깊은 기도가 될 수 있었다. 꼭 읽었으면 하는 책.


“바울신학과 새관점”, 김세윤 두란노, 2003
꽤 예전에 사놓았던 책이다. 하지만 읽어야겠다는 동기가 부여되지 않아서인지 책꽂이에만 꽂여 있었던 책이다. 하지만, 이번에 김세윤 박사가 이 책을 통해 반박하는 바울의 새관점 (New Perspective)에 대한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고, 그래서 또 이 책을 읽을 강한 동기가 되어 주었다. 저자에 의하면 최근 신학계에서는 바울의 New Perspective와 제 3 역사 예수 운동이 큰 관심을 받고 있다고 한다. 이 두가지의 주제에 공히 N T Wright가 있는데, 이제 N T Wright의 책들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쉽지 않은 이 책을 읽으면 한가지 의문만 크게 되었다. 정말 유대인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정말이지, 내가 아직까지 배워온 것과는 다른 방법이 있는 걸까? 계속 공부를 하면 알 수는 있게 될까?


“바울의 생애와 선교”, William Barclay, 종로서적
정말이지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들어 읽었다. 대학 3학년 시절 처음으로 맡았던 성경공부가 바울의 생애를 따라 읽는 바울서신이었으니, 그 당시 존 드레인의 ‘바울’이라는 책과 바클레이의 ‘바울의 생애와 선교’는 내게는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다시 읽어 보지만, 역시 바클레이는 역사적 배경과 흐름 속에서 균형잡힌 시각을 제공하는데는 탁월한 듯 하다. 자신이 자서전에서 이야기하듯이 새로운 신학의 흐름을 만들어 내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게르하르트 로핑크, 분도출판사, 1985
“세상 안에 달라진 것이 없는데, 어떻게 메시야가 왔단말이냐?” – 유대교에서 예수님의 메시야성을 부인하며 묻는 질문이란다. 이사야 2장에서 언급된 것과 같은, 메시야가 오신 이후의 징후를 찾아볼 수 없는 현재의 모습에 대해 나온 질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해 게르하르트 로핑크는 교회가 바로 이 세상에 대한 ‘대조 사회’로서 폭력과 전쟁이라는 세상의 방법에 대항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평화를 이루는 공동체로 존재해야 함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런 교회 공동체에 대한 생각은 예수님으로부터 바울, 그리고 고대교회의 교부들에까지 일관되게 나타나는 모습이라고.
이 책은 출판사 (분도출판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천주교에서 나온 책이고, 저자 게르하르트 로핑크는 독일의 신부다. 이책을 알게 된 것은 김기현 목사의 ‘공감적 책읽기’에서였지만, 직접 구입하게 된 동기는 2007 KOSTA/USA에서 김도현 교수의 ‘공동체’ 세미나의 추천도서 목록에서였다. 평소 적잖이 공동체에 대해 관심이 있어서인지, 공동체에 관해 추천되는 책들은 제법 많이 아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마 그건 나의 나이브한 착각이었나 보다. 공동체에 관심이 많다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책을 못볼 수 있단 말인지. 그저 개인주의화된 현대교회에 대해 교회의 공동체성을 강조하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상에 두신 참 의미를 조리있게 설명하고, 그 너머를 고민하게 하는 책이다.
난 천주교회를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천주교의 책에서 평화주의에 대한 내용을 본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지 모르겠다.

[조한상] 2007년 5월에 읽은 책들


2007/6



다양함. 지난 달에는 정말 다양하게 읽었다. 고전과 신간, 개인영성에서 사회참여까지… 그런 가운데 너무도 유익했던 어설픈 책읽는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잊혀진 제자도”, Dallas Willard, IVP, 2007
‘Great omission’이라는 영어 제목이 좀 더 명확한 의미를 전달하는 달라스 윌라드의 새 책. 더구나 신국원, 유진 피터슨, 알리스터 맥그래스, 오스 기니스 등이 추천한 책을 사서 읽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하나님의 모략’, ‘하나님의 음성’, ‘마음의 혁신’ 등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저자 달라스 윌라드의 제자도에 관한 책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잔뜩 기대케했던 이 책은,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윤종석씨의 깔끔한 번역이 더욱 돋보인 이 책에서 저자는, 제자가 되지 않고도 크리스천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복음주의의 흐름을 개탄하며, 제자의 삶을 살기 위한 영성 개발과 영적 성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 중에서도 침묵의 훈련을 특히 강조함으로 저자의 현재의 관심사를 엿볼 수 있었던 책. 꼭 한번 읽어 보길 권하고 싶다.


“Papa prayer: the prayer you’ve never prayed”, Larry Crabb, Thomas Nelson, 2006
로렌스 크랩. 그는 ‘결혼건축가’의 저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저자이다. ‘결혼건축가’ 이외에도 ‘아담의 침묵’, ‘끊어진 관계 다시 잇기’ 등 인간 내면과 인간 관계에 대한 글들을 주로 저술하는 로렌스 크랩의 기도의 관한 책. 그런 저자의 배경 때문인지, 이 책은 ‘사귀의 기도(김영봉)’, ‘하나님의 음성(달라스윌라드)’의 심리학(?) 버전같은 인상을 받았다. 관계의 기도가 다른 어떤 기도 (예를 들면 간청의 기도)보다 앞서야한다고 역설한다. 같은 내용이 지나치게 반복된다는 아쉬움이 있기는 하지만, 기도에 관한 실질적인 팁이 큰 도움이 된다.


“기독교 교리 이해”, Alister McGrath, 기독교문서선교회, 2005
“너무나 자주 교리는 일상의 삶과는 무관한 비현실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그래스 교수는 교리 없는 기독교는 무의미하다고 지적하면서, 교리가 기독교 진리의 표현이며, 역동적인 기독교 삶을 위한 틀을 제시하고 이단을 방어하기 위한 보호책이 된다고 강조한다.” (책 소개에서)


이미 ‘책읽는 이야기’에서 여러번 소개되었던, 영국 복음주의 차세대 대표학자인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꽤 난해하고 심도있는 책을 주로 저술하기는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쉬운 필체로 독자를 찾아오기도 한다. (참고로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또 다른 쉬운 필체의 책을 살펴보면, ‘예수님을 경험하는 영성 훈련’, ‘하나님 얼굴을 엿보다’, ‘내 평생에 가는 길’ 등이 있다)


실제로 교리가 우리의 삶과 신앙과 여떤 연관이 있는지 설명하면서, 결코 사변적이지만은 않은 교리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창조자의 정신”, Dorothy Sayers, IVP, 2007
이미 익숙하지만 쉽지 않는 개념을, 평소 생각지도 못했던 관점으로 탁월하게 설명하는 것을 들을 때, 그때 접하는 느낌을 무어라 설명할까. 19세기 말에 태어난 도로시 세이어스는 희곡 작가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창조자되신 하나님의 속성과 삼위일체 개념을 멋지게 설명해 낸다. 문학 창작 속에 드러나는 삼위일체의 속성, 그리고 창조과정 속에 선택된 단어와 선택되지 못한 단어의 유비를 통해 설명하는 선악의 이야기 등은 책을 읽는 내내 나를 흥분케 했다.


IVP에서 모던클래식으로 선정하여, 존스토트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이어 두번째로 나온 책. 최근 출판된 모던클래식 세번째 책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도 기대하게 한다.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 Walter Wink, 한국기독교연구소, 2004
평소 접하는 관점과 사뭇 다른 눈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책은 우리의 시야를 넓혀주곤 한다. 복음주의 계열의 독자들에게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월터 윙크의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을 알게 된 것은, 월간 <복음과상황>에 실린 책소개를 통해서였다. (몇월호였는지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한국기독교연구소’라는 출판사의 책이라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분명 사회참여를 좀 더 강조하는 신학을 담고 있다. 사회 정치 체제 자체를 ‘원래 선하지만, 지금은 타락했고, 또 구원 받아야 할’ 대상으로 규정하고 그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비폭력적이지만 적극적으로 대항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 책에서 소개된 꽤나 독특한 산상수훈의 해석정도만 예전에 한완상 교수의 “저 낮은 곳을 향하여”라는 책에서 본적이 있을 뿐, 다른 내용은 생소한 개념만큼이나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내게 새로운 시야를 열어 준 책으로 기억될 것 같다.

[조한상] 2007년 4월에 읽은 책들


2007/5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아’라는 올해의 코스타 주제 때문인지, 지난 달에는 유독 복음주의와 그에 대항하는 사조에 관련된 책을 주로 읽었다. 쉽지 않게 읽었지만 그만큼 도움이 되었던 책들을 간략하게 나누고자 한다.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 Alister McGrath, IVP, 1997
‘미래’에 대해 논한 책을 출판된 지 10년이 지난 후에 읽는 일은 나름대로 묘미가 있다. Alister McGrath가 2005년에 ‘기독교의 미래’라는 비슷한 이름의 책에서 20세기를 넘어 21세기로 들어선 기독교의 미래에 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다루었다면,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에서는 20세기를 지나온 복음주의의 특징들을 정리하고, 이제는 기독교의 주류가 되어버린 복음주의의 매력과 잠재된 어려움 등을 이야기했다.


요즘처럼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10년이란 세월은 한 저자가 사용한 ‘미래’라는 단어가 ‘과거’ 혹은 적어도 ‘현재’가 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아닐까. 저자는 복음주의의 특징을 정리하고 많은 장점들을 이야기한 후에 (이 정의는 이 책 이후에 출판된 많은 책들에서 복음주의의 정의로 많이 사용되고 있었다), 복음주의가 미래에도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부족한 ‘영성’을 개발해야 하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분파주의를 주의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그러고 보면, 최근 10년간 유진 피터슨을 중심으로 복음주의 계열에서 영성을 그토록 강조한 배경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복음주의가 자유주의와 대항하면서 형성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이론화하고 지성화하면서, 기독교의 영적인 부분을 소홀히 했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고, 그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여러 노력들 중의 하나가 영성신학이 아닌가 싶다.


자유주의와 근본주의 사이에서 복음 자체를 지켜내기 위해 애쓰던 복음주의. 그리고 지금은 기독교의 주류가 되어 너나없이 복음주의자를 자처하는 시대를 사는 우리가, 진정 복음주의는 무엇이고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를 알기 위해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진리”, Lesslie Newbigin, IVP, 2005
작년, 10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면서, 열흘남짓 머무는 짧은 기간동안 기를 쓰고 기독서점을 다녀오겠다고 하는 바람에 가족들에게 핀잔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서점에서 눈에 띄어 구입해온 책 중의 하나가 바로 레슬리 뉴비긴의 ‘포스트모던시대의 진리’이다.


‘영국 국교회가 낳은 세계적인 복음주의 지도자’라는 호칭이 늘 붙어 다니는 레슬리 뉴비긴의 책은 현대 다원주의와 기독교에 대한 훌륭한 통찰력을 제공함에도 불구하고 늘 읽기 쉽지 않아 부담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 책은 적은 분량과 김기현 목사의 깔끔한 번역 덕분에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책의 내용을 요약한 역자의 표현이 탁월하여 그냥 빌려본다.


“선교사로서의 현장성과 학자로서의 학문적 분석과 적용이 탁월한, 영국 국교회가 낳은 세계적인 복음주의의 지도자인 레슬리 뉴비긴은 번뜩이고 탄탄한 논리로, 현대와 탈현대 세계에서 기독교의 진리와 권위의 원천을 분석하고 있다. 그는 현대사회가 이성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권위에 관한 모든 주장을 의심하고 있음을 간파한다.
그는 교회가 성경, 전통, 이성, 경험을 신적 권위에 대한 근거로 제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무엇보다 뉴비긴은 이것의 올바른 사용 방법과 서로의 관계를 모색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인이 이야기로서 성경을 말하며 그 이야기의 일부분으로 살아갈 때에야 현대 사회에서 복음의 적실성을 주장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책 뒤 표지에서>


다소 이론적인 글에 이어지는 결론 부분에서 저자는 포스트모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복음을 들고 나아갈 방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말이지 나도 이렇게 하고 싶어졌다.)


“최종적인 요점을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만약 포스트모던 세계에서 우리가 우리의 이야기를 하려면, 다음과 같은 답변을 듣게 될 것이다. “예, 물론입니다. 그건 당신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다른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왜 우리가 그 이야기를 믿어야 합니까?”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분명한 것은, 우이는 복음 이야기를 인증할 수 있는 것에 기초하여 몇가지 더 근본적이고 좀더 신뢰할 만한 진리를 제안하려는 유혹에 저항해야 한다. 분면 우리는 어떻게 성경 이야기가 다른 것으로는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인간의 삶에 의미를 가지는지 보여 주기 위해 노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우리가 그 이야기의 일부분일 때에만 확실해진다. 결국 우리가 그 질문에 대해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나는 내 공로와 무관하게 이 메시지를 전하고, 이 이야기를 말構? 이 초대를 전하도록 부름받고, 위임 받았습니다. 그것은 내 이야기도, 내 초대도 아닙니다. 강요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그것은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위해 자신을 주신 분의 초대입니다.” 그 초대가 만약 구세주의 은혜가 역사하는 공동체로부터 온다면, 매력적으로 다가 올 것이다. 받아들여질 지의 여부는 우리 능력에 달린 문제가 아니다. 그것을 염려하고, 안달하는 것은 믿음 없음의 표시다. 우리가 아니라 오직 초대하는 분에게 통솔권이 있다.”


“복음주의와 기독교적 지성”, Alister McGrath, IVP, 2001
책을 읽고 나서, 관련된 분야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책이 있다. Alister McGrath의 복음주의에 관련된 또 한 권의 책인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지성’이 바로 그런 류의 책이 아닌가 싶다.


– 이 책의 원제이다. 제목으로만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복음주의의 지적인 토대와 정합성, 학문적 타당성을 비판적이면서도 긍정적인 방향에서 고찰함으로써, 복음주의가 전통적으로 학계에서 보였던 부정적, 소극적 태도를 극복하고 주복할 만한 사상적 대안이 될 수 있음을 적극적으로 피력한다’


저자는 복음주의의 신학의 지적 정합성을 다루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성경의 권위를 이야기하고는, 현대에 복음주의와 경쟁 선에 있는 후기자유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종교 다원주의 등을 다룬다. 하지만, 내공이 많이 부족한 나는, 저자가 이야기하는 후기 자유주의에 대한 설명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저자도 ‘지켜보자’고 했지만, 그들의 사상을 왜 후기 자유주의라고까지 불러야 하는 걸까? 그저, 스탠리 하우워어스를 후기 자유주의의 대표적인 학자로 언급한 것에 조금 놀랐을 뿐이다.


개인적으로 눈에 띈 한가지는, ‘계몽주의가 복음주의에 미친 영향’에서, 현재 내가 하고 있을 법한 성경공부를 계몽주의의 영향에 의한 ‘다소 냉랭하고, 초연하며, 합리적으로 성경게 접근하게 만드는 영성관’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성경을 읽으면서 감정을 개입시키거나 인간의 상상력을 사용하는 것을 자제하고, 본문에서 주제를 뽑으려고 노력하는 방법이 상당히 계몽주의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늘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내용은 눈으로 확인한 기쁨을 누렸다고나 할까. 그나 저나, 이런 배경에서 유진 피터슨의 ‘이 책을 먹으라’같은 책들이 나오게 되었지 않을까 싶다.


“축복의 혁명”, 박철수, 뉴스앤조이, 1990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말은 기독교적 축복관을 갖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성경이 말하는 축복,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축복을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이 주시는 복과 다른 것을 구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성경이 말하는 복과는 전혀 다른 축복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중략) 무엇보다도 회개는 복의 내용이 바뀌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바뀌고,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바뀌어야 합니다. 빌립보서 3장 7절에서 사도바울을 지금까지 자신이 자랑으로 여기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모두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진정 회개한 자의 모습입니다.” (본문 중에서)


기독교 서적 사이트에 들러 베스트셀러 순위를 둘러보면 마음이 답답해지는 일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최근 몇년동안 그 현상이 더 두드러지지 않았나 싶다. 성경적인 복과 세상의 복을 구분해 내지 못하는 책들이 지속적으로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현 상황 속에서, 그런 세속주의적 가치관에 대항하는 책들을 발견하면서 느끼는 기쁨도 더 커지는 웃지 못할 일도 경험한다. ‘축복의 혁명’은 꽤 오래 전에 쓰여진 책이다. 하지만 어쩌면 작금의 한국과 미국의 주류 기독교에는 더 필요한 메세지인지도 모르겠다. 물질주의의 물든 기독교, 종교화하여 교회 건물과 목회자를 신성시하는 왜곡된 기독교의 문제점을 대단히 쉬운 필체로 이야기한다. 논조가 다소 강하다고 느낄지 모르겠지만, 한번쯤은 꼭 읽어 보기를 권하고 싶은 책이다.


 

[조한상] 2007년 3월에 읽은 책


2007/4




바쁘게 보냈던 3월. 그래도 5권의 책을 가까스로 읽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비교적 최근 책을 읽을 수 있었는데, 그 이야기들을 가볍게 나누고자 한다.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쟈크 엘룰, 대장간, 1992
작년 규장출판사에서 나온 “존재의 이유”라는 전도서에 관한 책을 통해, 쟈크 엘룰이란 인물이 좀 더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지 않았나 싶다. 그 덕분에, 절판되어 구할 수 없었던 쟈크 엘룰의 책들이 속속 재판되어 구입 가능하게 되었는데, 그 중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과 “하나님이냐 돈이냐”같은 책들이다. 그간 꼭 읽어야 할 책 중에서 구할 수가 없어 늘 아쉬웠던 책 –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이 책을 접했다. “뒤틀려진 기독교”의 서문에서 언급되어 있듯이, 엘룰의 사상은 어렵다. 그래서 그의 사상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고 한다. 사실 그의 사상을 잘 이해하지 못한 채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보여지는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 예를 들어, 쟈크 엘룰의 전반적인 사상에 심하게 반발할 만한 보수적 신학 색깔을 가지신 분들 조차, 주일 예배 시간에 쟈크 엘룰의 말들을 별 생각없이 인용하시는 것만 보아도 쉽게 찾을 수 있겠다.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엘룰의 사상을 내 나름대로의 버전으로 이해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의 사상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기에는 아직 공부도 덜했을 뿐더러, 더 공부한다고 해도 잘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우 리는 세상 속에 있다. 우리는 세상의 죄를 감소시킬 능력이 없지만, 그렇다고 다른 한편으?죄된 현실을 묵인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엘룰은 문제 해결을 위한 방법적이고 윤리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어떤 방법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에 대항함으로 기독교는 늘 혁명적일 수 밖에 없음을, 그래서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는 가치, 즉 ‘무엇이든지 성공하는 것, 효과적인 것, 능률적인 것은 정당하다’는 가치에 대항하여 존재 그 자체의 변화를 요구한다.


“다시 말해서, 정치 경제 등 사회의 문제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실천함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말이다.”


“ 이 현대 문명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는, 직접적 공격이나 거대한 변화를 위한 노력이나, 세계 전체를 재구축하려는 시도는 소용이 없다. 즉 이 전체주의적 사회 속에 살면서, 그것을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심판의 메세지를 삶의 현장 속에서 실천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아”라는 2007 KOSTA/USA의 주제도서로 선정해도 손색이 없지 않을까 한다.


 “Battling Unbelief: Defeating Sin with Superior Pleasure”, John Piper, Multnomah, 2007
Preorder – 아직 출판되지 않은 책을 Amazon.com을 통해 밀 주문해 놓고 받아 보았다. John Piper는 Christian hedonism으로 우리에게 널려 알려진 저자이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인간의 존재이유이며, 믿음이란 ‘하나님인 우리에게 하신 모든 일, 즉 과거 현재 미래의 일에 대해 기뻐하는 것이다.”遮?Christian Hedonism은, 현대의 자아 중심의 왜곡된 복음에 신선한 깨우침을 주지 않았나 싶다. John Piper의 책들은 읽으면서 거의 많은 부분 공감하고 도전 받는다. 딱 한 권의 예외가 있었는데, “하나님의 숨겨진 미소”라는 고통의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책으로, 나는 여전히 John Piper가 설명하는 고통의 이유에 대해 잘 동의가 되지 않는다. 아직 고민해야 할 숙제만을 남겨 주었다고 할까.


“Batting unbelief”는 저자가 이야기 하듯이, “Future Grace”의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하시는 모든 일을 신뢰하고 기뻐할 수 있다면, 우리가 가진 많은 문제들은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비록 상황이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그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믿고 기뻐한다면 말이다. 다시 말해,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기뻐하지 않는 것이 죄이다.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 죄된 모습의 예로, 걱정, 교만, 낮은 자존감, 조급함, 탐욕, 우울, 정욕 등을 이야기하고, 그것이 왜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 결과로써의 죄인지를 조목 조목 다룬다.


앞 에서도 이야기했지만, John Piper의 책은 읽어서 별 손해 볼 것이 없다. 얼마 간의 시간이 흘러서, Piper의 hedonisim이 인간의 책임을 소홀히 한 극단적 이론이라고 비난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재 기독교의 자아 중심적 모습 속에서, 그의 목소리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여겨진다.


 “기독교의 미래”, 이문장, 앤드류 윌즈 외, 청림출판사, 2006
‘기독교의 미래’라고 하면 사실 Alister McGrath가 떠오른다. 그도 그럴 것이, McGrath의 최근 작 “기독교의 미래”가 있고, 또 약 10년 전의 역작인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가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문장 교수 외 6명의 저자에 의해 쓰여진 이 “기독교의 미래”는 McGrath의 접근과는 사뭇 다르다. McGrath가 그의 책에서, 서구 기독교의 전체적인 흐름과 나아갈 방향에 대해 진단하고 있다면, 이문장 교수의 이 책은 세 삼 세계의 기독교에 대한 전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즉, 기독교의 중심 축이 이제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및 남미로 이동할 수 있다고 진단하고, 그것을 대비하기 위해 아시아, 아프리카 등은 기독교 신앙을 탈서구화하여, 자신들의 문화에 맞게 재구성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신학뿐 아니라, 기독교 문화도 건강한 토착화의 과정을 거쳐야만 함을 역설한다.


나 는 아직, 기독교와 민족이라는 개념을 정리하지 못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과연 어디까지이며,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 걸까? 여기 저기서 들은 이야기로는, 정리되지 않은 무엇인가가 있다. 나의 고민에 또 다른 한 방향을 제시해 준 고마운 책. 얼마 후에는 기독교와 민족이라는 개념이 조금 더 정리될 날을 기대해 본다.


 “속 빈 설교, 꽉찬 설교”, 정용섭, 대한기독교서회, 2006
나이는 나보다 어리지만, 신앙적으로는 나보다 훨씬 성숙해 있어 늘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국의 한 후배와 통화를 했다. 그 후배가 정용섭 목사의 설교비평 사이트에 대해 알려주었고, 인터넷에서 글을 읽은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는, 곧 그 분의 책 “속 빈 설교, 꽉찬 설교”를 구입했다. 임영수, 이재철 목사로 부터, 김진홍 하용조 조용기 목사, 그리고 박옥수 김기동 목사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목사들의 설교를 나름대로의 기준으로 비평한 책이다.


우 선, 이 책이 목사의 설교가 신성화되어 있는 우스운 한국교회의 상황 속에서, 용기있게 대형교회 목사들의 설교에 대한 비평을 했다는 사실 자체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 책을 계기로, 목사의 설교가 신성화되는 오류가 조금이라도 시정되고, 함께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바로 서려고 애쓰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기대해 본다.


저 자의 설교 비평에 많은 부분 공감한다. 특히 임영수, 하용조, 조용기 목사 등의 설교에 대한 비평은 탁월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몇 가지 아쉬운 점들도 있었다. 첫째, 그의 설교 비평에 대한 기준이 좀 더 명확히 설명되었어야 했다. 물론 편집자적 의도에 근거한 성경해석을 선호하고, 교회력에 따른 균형 잡힌 설교에 후한 점수를 주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더 명확한 기준이 제시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둘째, 박영선 김동호 목사의 설교에 대한 비평은, 저자의 연구부족이 눈에 띤다. 예를 들어 박영선 목사의 설교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최근 저작까지 모두 읽고 생각의 변화까지 읽어 내야했는데, 저자는 박 목사의 바뀐 생각까지는 인식하지 못한 채 비평을 한 점이 아쉽다. 또한 김동호 목사의 경우도, 몇 편의 설교로 비평하면서 생긴 많은 오류들이 보인다. 김동호 목사의 설교 비평은 결국 본질을 벗어났다고 밖에 할 수 없지 않을까.


정용섭 목사의 두번째 책도 구입했다. 한국 교회에 불어올 신선한 바람을 기대하면서…


 “교회 DNA”, Howard Snyder, IVP, 2006
하워드 스나이더의 최신작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교회사에 나타난 성령의 표적”, “참으로 해방된 교회” 등의 그의 저작에서 볼 수 있듯이, 하워드 스나이더는 교회 갱신에 관한 전문가이다. 이번 책 “교회 DNA”도 예외는 아니어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분명이 그리스도의 형질, 즉 DNA를 가졌을 것이고, 그 DNA는 과연 어떤 특징들을 가지고 있는지를 다룬다. 하워드 스나이더의 초창기 저작들을 보면, ‘공동체로써의 소그룹’에 대한 강조가 많이 나온다. 교회 갱신의 부분으로 소그룹을 분명한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중기의 저작을 보면, ‘생태학’에 대한 관심이 많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 책에서도 역시 ‘소그룹’과 ‘생태학’에 대한 이야기는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한가지 덧붙여진 것이 있는데, 그것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선포되어야 한다’는 사실로 대표되는 사회참여에 대한 강조이다. 하워드 스나이더는, 예수님의 DNA를 지닌 교회의 모습으로써, 대형교회도 될 수 없고, 초소형교회도 될 수 없다고 전제함으로써, 메노나이트 신학자로써의 정체성을 포기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도 들게 하는 부분도 있어 흥미로웠다. 그의 다음 저작을 무척이나 기다리게 한다.

[조한상] 2007년 1,2월에 읽은 책


2007/3
 


“이 책을 먹으라”, Eugene Peterson, IVP, 2006
2006년도 말, 인터넷 서점의 베스트셀러의 목록을 보면, 유진피터슨의 책이 눈에 띈다. 유진 피터슨의 영성 시리즈의 두 번째 책 “이 책을 먹으라”를 올해의 첫번째 읽을 책으로 선택했다. “Eat this book”이라는 원제가 한국 번역 제목에 그대로 잘 드러난 이 책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내가 현재 다니고 있는 교회의 담임목사 (Dr. Scott Dudley)의 2006년 여름 추천도서 목록에서였다. 아마 Scott Dudley목사도 유진 피터슨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나 싶다, 최근 ‘관상기도’나 ‘영성’에 대한 이야기가 부쩍 많아진 걸 보면 말이다. 유진 피터슨의 영성 시리즈 첫번 째 책인 ‘현실, 하나님의 세계’ 에서 유진은, 영성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사는 것이지, 결코 어떤 신령한 것이 아님을 이야기 했었다. 그리고, 영성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인 “이 책을 먹으라”를 통해 성경을 피상적이 아닌, 몸에 소화될 수 있을 만큼 읽을 수 있는 지에 대해 나눈다.


“렉티오 디비나 (lectio divina)”


저 자는, 최근 성경읽기의 텍스트가 ‘자아’로 대치되어, 자신의 느낌대로 읽는 현실을 개탄한다. 특히, 이 책을 읽고 나서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하나있다. 다름이 아니라, ‘시장 헬라어’에 관한 이야기이다. 신약성경에 사용된 약 5000개의 단어 중에 500단어는 신약성경에만 고유하게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단어들의 의미를 영해하려는 노력이 꽤나 있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주기도문에 나오는 ‘일용할 양식’의 ‘일용할’이라는 단어는 다른 헬라어 문헌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단어였기에, 오리겐 같은 초대교부는 이 단어를 영해하여, ‘실체를 초월하는 떡’이라고 해석했다고 한다. 하지만, 19세기 말옥시린쿠스의 쓰레기 더미에서 발견된 문서를 분석한 결과, 이 ‘일용할’이라는 단어는, 일상 가운데 서민들이 사용한 헬라어로 문헌에는 남겨져 있지는 않은 저급한 헬라어였다고 한다. 그 의미는 그저 ‘신선한’ 또는 ‘오늘 먹을’의 의미였다고… 이렇게 실생활 속의 단어로 쓰여진 성경을 우리는 무엇인가로 덧입히면서, 왜곡하고 있지는 않은가를 경고한다. 모두들 꼭 한번 읽어 보기를 권하고픈 책이다.


 “우리의 신앙이 분별력과 만나기까지”, 송인규, 부흥과개혁사, 2006
“저희 젊었을 때는 송인규 신드롬이라고 할 만큼, 송인규 목사의 책은 젊은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 2003년 KOSTA/USA에서 ‘크리스천의 책읽기’라는 세미나를 통해, 당시 복음과상황의 편집장이었던 서재석 대표의 표현이다. 내가 지내온 대학 시절은, 송인규 목사의 그런 영향력의 막바지에 있었다고 할까… ‘죄많은 이 세상으로 충분한가’라는 기독교 세계관 입문을 위한 소책자라던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QT관련 책들은, 나의 대학 시절에도 필독 도서로 꼽혔었으니까 말이다. 그 이후에도 ‘세마리 여우 길들이기’라던가, ‘아는 만큼 누리는 예배’ 등의 책으로 청년들에게 꾸준한 도전을 주고 계신 송인규 목사의 최근 도서가 바로 ‘우리의 신앙이 분별력과 만나기까지’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맹목적인 신앙의 모습에 경종을 울리고 성경을 기준으로 바른 분별력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역설한다. 예를 들면, ‘십일조는 꼭 교회에다 내야하는가’, ‘고지 점령론과 낮아짐’과 같은 현실적인 주제부터, ‘가계의 저주’, ‘악의 문제’ 등 기본적인 기독 변증법에 까지 폭넓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무려 40여 가지의 주제를 짧은 책에서 모두 다루다 보니, 깊이가 다소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더구나, ‘분별력’을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넘어 ‘왜 해야하는가’라는 근본적인 고민으로 넘어가지 못한 점도 아쉽다.


 “내려놓음”, 이용규, 규장, 2005
2006년 최고의 베스트셀러. 너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에 읽지 않을 수 없어서 손에 들고 읽기 시작했고, 평이한 간증문이기에 쉽게 마칠 수 있었다. 나도 평탄치만은 않은 유학생활을 한터라 많은 부분 공감할 수 있었던 만큼, 답답한 면도 많았던 책. 그냥 많이 아쉽다.


 

“교회사를 통해 본 성령의 표적”, Howard Snyder, 나단, 1994
이 책의 일차적인 자료는 노르트담 대학에서의 나의 박사학위 논문이며, 출판을 통해 알려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서문에서>


하 워드 스나이더의 책을 좀 더 깊이 이해하려면 이 책부터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몬타나이즘을 시작으로 해서, 각 시대에 성령의 표적이 어떤 형식을 통해 나타났는지를 짚어가면서, 현재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들을 이야기한다. 하워드 스나이더는 스페너와 프랑케의 경건주의 운동, 진센도르프 백작의 모라비안주의, 존 웨슬레의 감리교 운동 등의 시작과 상호 관련성들을 비교적 상세하게 다루어 가면서, 만민제사장직의 중요성과 소그룹의 공동체의 필요성을 강하게 이야기한다. 특히 기존 조직을 인정하는 ‘교회 안의 교회’를 대안으로 제시한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 책을 읽어보면서, 왜 하워드 스나이더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나 ‘참으로 해방된 교회’, 그리고 최근에 읽은 ‘교회 DNA’ 등에서, 교회의 갱신을 기존 조직을 강하게 부인하지 않은 채로 이야기하는 지에 대한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꼭 한번씩은 읽어 보시기를 권한다.


 “생각의 지도”, 리처드 니스벳, 김영사, 2004
우리 둘째 아들과 공부를 하고 있었다. 유치원에 다니고 있던 현서와 함께 보던 책에는 세 종류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서로 관련된 것을 연결하라고 했다. ‘꽃, 엄마, 나무’ 중에서 관련된 것을 고르라는 문제에 대해 현서는 ‘꽃’과 ‘엄마’를 골랐다. 이유는 엄마가 꽃을 좋아하기 때문이란다. 뭐… 딱히 틀린 접근은 아닌데, 문제를 채점한다면 분명 오답이다. 문제에서 요구한 것은 식물이라는 관련성 속에서 ‘꾳과 나무’를 연결하기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왜 이런 문제가 생기는지를, 동양과 서양의 사고차이를 통해 설명한 책이 바로 ‘생각의 지도이다.


오 랜만에 읽은 비기독교 서적. 이 책을 소개받은 것은, 성경공부 모임의 한 형제를 통해서였지만, 결국 책을 구입해 읽게 한 것은 작년 코스타에서 양희송 실장의 ‘기독교 세계관’강의를 듣고 나서였다. ‘원숭이-바나나-사자’ 중에서 관련된 두가지를 고르라고 하면, 동양 사람들은 많은 경우에 ‘원숭이-바나나’를 고르는 반면, 서양사람은 ‘원숭이-사자’를 고른다고 한다. 이유는 동양사람은 ‘관계’ 중심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반면, 서양사람들은 ‘분류’의 차원으로 사물을 인식하기 때문이란다. 또한 서양사람은 세상을 직선 구조로 이해하는 반면, 동양사람은 변화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경향이 있다나.


미 국에 나와 살면서, 경험하는, 동서양 사고의 차이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해 준 책이었다. 한가지 궁금한 점이 있다면, 동서양의 차이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식이 철저하게 서양적이었으니, 동양적 사고를 바로 해석할 수 있었을지는 잘 모르겠다.


 “내 이름은 야곱입니다”, 폴 스티븐스, 죠이출판사, 2005
이 야곱의 이야기는 당신과 내가 하나님께 발견되고 생명으로 가득 차기 위하여, 어떤 다른 장소에 있거나, 다른 가정에서 성장하거나, 다른 특별한 관계를 가지거나, 다른 일터에 있거나, 다른 조직에 있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준다. 영성은 특별한 장소, 특별한 사람, 삶의 어떤 경계선 안으로 제한되?않는다. 영성은 우리의 삶 전체에서, 섦의 어떤 경계선 안에 있는 특정한 구역이 아니라 매일의 삶 한복판에서 우리는 찾으시는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 땅에 뿌리내린 영성을 지닐 때 우리는 종교적인 사람이 되지 않으며 온전한 인가이 된다. 이것은 (우리가 야곱에게서 살펴본 것 처람) 일생에 걸려 일어나는 과정이다’ – 후기에서…


작 년에 폴 스티븐스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복음과 상황에서는 그를 인터뷰해서 기사화했었다. 그 인터뷰 내용 중에 ‘평신도는 왜 설교할 수 없나’는 질문에 대해, 평신도 신학의 대가답게 ‘평신도도 당연히 설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답했던 내용이 기억난다. 그 인터뷰 중에 ‘내 이름은 야곱입니다’라는 책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왜 하필이면 야곱입니까’하고 물었고,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그는 ‘야곱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본다’고 답했다.


폴 스티븐스는 이 책에서, 야곱의 인생을 통해 삶의 각 부분에 – 출생, 결혼, 섹스, 일, 죽음 – 일하시는 하나님을 이야기한다. 구약의 인물을 중심으로 쓴 책에서 흔히 발견되는 실수라면, 그 사람이 했기에 정당화하려는 시도라고 하겠는데, 폴 스티븐스은 야곱의 이야기를 하지만, 그 뒤에서 일하시는 진정한 주인공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고 있다는 점이 놀라왔다.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 책을 읽는 내내, ‘내가 지금 유진피터슨의 책을 읽고 있지’라는 착각을 계속할 만큼 필체의 유사성을 느꼈다. 그 만큼 이전의 폴 스티븐스의 책 (예를 들어, ‘평신도신학’이나 ‘그 분의 말씀 우리의 삶이 되어’)의 필체와는 사뭇다르다고 할까.


 “부흥”, 마틴로이드 존스, 복있는사람, 2006
“다른 모든 책은 덮어두고 이 책부터 읽으라!” – 책의 표지에 적혀 있는, 조금은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이 문구가,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는 나 자신의 표현이 되어 버렸다. 정말이지, ‘다른 모든 책을 덮어두고 이 책부터 읽’었으면 한다.


나 는 이상하리만큼 마틴로이드 존스의 책을 별로 읽은 것이 없다. 이유야 여럿있겠지만, 우선 로이드존스 목사의 책은 양이 많다. 강해 설교를 묶은 것이니 당연하겠지만, 한 두 문장으로도 표현될 주제를 한편의 설교로 풀어 놓았으니 분량이 방대해 질 수 밖에… 하지만, 나의 신앙 성향을 잘아는 형제 한명이 내게 마틴로이드 존스 목사의 책을 권해주었다. 내가 가진 구원관 등이 마틴로이드 존스 목사의 주장과 비슷하다나.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의 책을 읽어보기로 마음먹고, 인터넷을 뒤져보니, 가장 눈에 띄는 책이 바로 ‘부흥’이라는 책이었다. 평양부흥 100주년인 2007년을 맞아, 모두들 ‘부흥, 부흥’하는 시점에 ‘부흥’이라는 책을 선택한다는 것이 무척 맘에 걸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부흥’이라는 관점을 바로 안다면, 내가 가진 ‘부흥’에 대한 선입견들이 사라지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가지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역 시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물론 ‘부흥’을 어떻게 정의하냐에 따라 다른 접근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로이드 존스 목사가 정의한 ‘부흥’ – 하나님의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장소에 공동체적으로 임하는 성령의 기름부으심’- 에 동의한다. 그리고 이런 부흥이 개인적으로는 얼마든지 임할 수 있다는 사실에도 동의한다. 결국, 부흥의 주도권은 철저하게 하나님께 있고, 우리는 그 부흥을 기대하며, 회개하고 경직된 교리에서 자유로와져야 하며, 부흥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 만을 위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절차를 거치면 부흥을 올 것이라는 기대는 잘못된 것이라는 로이드존스 목사의 목소리는 귀기울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철저하게 우리의 생각과 이성을 넘어 일하시는 하나님이 결여된다면, 우리의 신앙은 정말로 메마른 무엇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저 하나님 앞에서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기대하며 엎드리련다.


 “코리아 다시 생존의 기로에 서다”, 배기찬, 위즈덤하우스, 2005
작년 어느날, 높은 뜻 숭의교회 웹 사이트에서 문희곤 목사의 설교를 듣고 있었다. 설교를 마친 문희곤 목사는 뜻 밖의 책을 한권 소개했는데, 바로 ‘코리아 다시 생존의 기로에 서다’였다. 담임 목사인 김동호 목사가 강력 추천하는 책이라고 하면서, 출판사와 계약해서 조금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기로 했다고 까지 광고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 책은 결국 2006 성서한국 추천도서 목록에 조금은 생뚱맞게 올라가 있었다. 도대체 무슨 책일까?


책 의 뒷면에 큼지막하게 나와있는 추천인 이름 ‘노무현 대통령’이라는 말에서, 일단 현 정부의 통일 정책과 어느정도 일치하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성경공부 모임의 한 형제에게 빌려서 읽었는데, 컴퓨터를 전공하는 그 형제가 말하기를 ‘한국 근대사를 잘 몰라서, 책을 읽는데 상당히 어려웠어요’했다. 결국 이 책을 읽다보니, 그 형제의 말이 무슨 뜻인지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렇게 한국 역사에 대해 무식했었던가. 한국 역사를 이스라엘 역사만큼만이라도 알고 있었으면 훨씬 더 수월하게 읽을 수 있었을텐데… 어떤 책을 읽어도 자신이 가진 선지식으로부터 자유롭게 읽을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는 선지식의 부재에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한국 역사에 대한 각 평가들을 평가할 어떤 명확한 기준도 가지고 있지 못한 내 모습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이런 평가가 옳은 것일까, 아닐까… 답답함을 꾹참고 끝까지 읽어 내려갔다. 그만큼 시간도 많이 걸렸고…


내 용에 대한 언급은 자제하려고 한다.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한국은 그냥 놔두면 대륙세력인 중국으로 기울기 쉬우니, 의도적으로 해양세력인 미국과 일본 쪽과의 균형을 잡아 나가야 하며, 그런 과정을 통해 아시아의 중립국의 형태로 나가면 어떨까 하는 제안을 한다. 북한과의 문제에서도, 북한을 고립시키기 보다는 밖으로 나오게 하여 진화시키는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민족’의 개념을 아직 잘 정립하지 못한 나였기에, 이 책의 주장은 여전히 혼란스럽기만 하다. 정말이지, 하나님은 ‘한민족’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실까?


 “네가지 사랑”, C.S. Lewis, 홍성사, 2005
C.S. 루이스의 또 다른 책 ‘네가지 사랑’. 작년에 ‘인간폐지’를 읽고 오랜만에 C.S. 루이스의 책을 접했다. 그냥 제목만 봐도 추측할 수 있듯이, ‘사랑’에 대한 네가지 정의를 설명한 책이다.


선 물의 사랑이란 자신이 희생하면서 댓가없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고, 필요의 사랑이란 자신의 필요에 의해 무언가를 원하는 것이다. 흔히 생각할 수 있듯이, 선물의 사랑은 고귀하고, 필요의 사람은 저급하다고 여기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의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필요의 사랑이 어찌 저급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 한가지 사랑의 형태를 덧붙일 수 있는데, 그것은 감상의 사랑 (appreciative love)라는 것으로, “대상을 좋다고 판단하고, 일종의 의무감으로 그것에 주목하며, 설령 즐길 수 없다 해도 그것이 그대로 존속되기를 바라는 마음 등은, 단순히 사물에 대해서 뿐 아니라 사람에 대해서도 가질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하나님께 향하면 예배가 되는 것이다. 사랑의 첫번째 종류는 ‘애정’인데, 이는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 아이의 동네 아저씨에 대한 사랑 등에서 나타난다. 애정은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으며’, 결점을 눈 감아 주며, 다툼 후에도 쉽게 되살아난다. 그런 면에서 자비와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기는 하지만, 애정은 때로는 선물의 사랑을 위장해서 왜곡되기도 한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존재임을 확인시키기 위해 애정이 사용되기도 한다는 말이다. 상대방은 그런 애정을 부담스러워 하고 있는데도, 자신의 필요를 위해 ‘선물의 사랑’으로 포장하기도 하니까. 사랑의 두번째 종류는 ‘우정’으로, ‘뭐! 너도?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라고 말하는 순간부터 시작하는 사랑이다. 주로 공통의 관심사와 목표를 가질 때 생겨나게 된다. 서로의 사적인 문제보다는, 공통점 자체가 중요하게 여겨지기에, 좀 더 영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정은 한 사람에게 집착하지 않고, 다른 사람으로 연결되는 것을 기뻐한다. 하지만, 그 소속 자체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배척하는 독선으로 나타날 위험성이 많다는 내용은 무척 와 닿았다. 다른 모든 사람의 의견보다는, 그 모임의 친구 한명의 의견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니까. 그리고는 ‘에로스’의 사랑과 ‘아가페’의 사랑에 대한 설명으로 마무리하는 ‘네가지 사랑’은, “역시 C.S. 루이스!!”라는 감탄을 이끌어 내기에 충분한 책이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사랑에 대한 오해와 위험성을 바로 알 수 있게 해 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