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 1, 2004 | 이달의 초점
이코스타 2004년 4월호
“영화 <패션>을 보셨습니까?” 지난 1월 캘리포니아 패사디나에 있는 풀러 신학교에서 존스톤교수가 나를 만나자 마자 건네온 첫마디였다. <영화와 영성> Reel Spirituality라는 책으로 한국에도 알려진 존스톤은 개신교 신학자 가운데는 드물게 영화를 비롯한 현대예술과 기독교를 연구해온 사람이다. 그는 영화가 영적 통찰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하며 영화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또 할리우드가 가까운 관계로 자주 영화계 사람들을 만나고 작업을 같이 하기도 했다. 물론 이 영화도 편집과정에서 볼 수 있었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이 영화에 대해서 “패션” (열정)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가 내게 건넨 큼지막한 포스터를 말아 쥔 채 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전체 120여분 중 100분이 넘게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영화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상세하게 묘사한 것에 대한 찬사가 핵심이었다. “그것 만으로 영화가 될까요?” 그것이 내가 보인 반응이었다.
그 다음 주일 나는 LA 근교의 잘 알려진 대형교회 예배에 참석했다. 거기서도 영화 <패션>에 대한 “광고”를 10여분에 걸쳐서 들었다. 이 교회는 LA 주변의 상당 수 영화관을 빌려 이 영화를 시중 개봉 이전에 성도들에게 보여주는 행사를 주최하는 중이었다. 아마도 그 행사를 한 미국 전역의 교회 중에서도 선봉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목사가 권할 유일한 R등급의 영화일 겁니다.” 목사님은 성도들에게 영화를 강력히 권하면서도 피로 얼룩진 작품임을 거듭 경고했다. 만약 그렇게도 폭력적이고 잔혹한 장면이 내내 계속된다면 정말로 교회가 나서서 성도들에게 권할 만한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2월에 들어 수난절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에 맞춘 개봉을 몇 주 앞두고 영화는 이미 많은 관심과 비판을 불러일으키며 뉴스 거리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가 이 영화가 유태인을 비하하고 예수를 죽인 사람들로 묘사한다는 논란이었다. 한국 사람들에게 “반유태주의”는 그리 절대적인 관심사가 아니므로 그 논쟁에 뛰어들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단지 아쉬웠던 것은 빌라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처형을 놓고 번민하는 모습을 분명히 보여준 것과 달리 가야바를 비롯한 제사장들을 철저한 악당으로 그린 점이었다. 그들은 시종일관 교활하고 주도 면밀한 음모자요 인간성을 완전히 상실한 악마처럼 묘사되었다. 요한복음이 가야바가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을 유익으로 생각했다는 점(11:50)을 밝혀 그 역시 고민이 없지 않았던 것을 보여주는 것과는 차이가 있는 시각이다. 아마도 이런 다소 치우친 관점이 “반유태주의적”이라는 지적을 불러온 것이 아닐까 한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러 갔고 많은 이야기들을 들었다. 본래가 개봉 초기부터 뛰어가 보는 것보다 기다려 평을 참고하여 볼 가치를 결정하는 버릇이 있는 터였지만 일부러 조금 더 시간을 끌었다. 계속되는 평들은 극히 엇갈린 것들이었다. 다른 예술도 그렇지만 영화가 엇갈린 평을 받는 것은 있을 수 있고 실제로 많은 경우 그렇다. 하지만 특히 종교적인 영화가 그렇고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한 경우 거의 그래왔다. 예외가 있다면 50년대의 <왕중왕>이나 <벤허> 정도일 것이다. 마틴 스콜세이지의 <그리스도의 최후의 유혹>은 오랫동안 한국서 상영되지 못할 정도의 반대에 봉착했었다. 영화 <패션>이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극찬과 혹평이 엇갈리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영화는 전세계의 기독교인과 일부이지만 비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제로 토론과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얼마간의 가치를 인정 받아야 할 것이다.
문제는 <패션>이라는 주제이다. 멜 깁슨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사실적으로 그리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피로 얼룩진 최후의 10여 시간에 그토록 가까이 카메라를 현미경 대듯 들이대지 않았을 것이다. 제작의도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보통 의미의 “오락물”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다. 제작비를 많은 부분을 사재를 들였고 각종 논란과 비난 그리고 위험을 감수해야 했던 작업이었다. 영화산업은 돈이 결정권을 가진다는 것이 상식이므로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는 평가도 일리가 있다. 제작 의도가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고 과정도 상당부분 신앙으로 난관을 극복하며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제를 다루는 방식도 극도로 “사실적”이고자 애를 쓴 흔적이 역력하다. 우선 “사실성”을 더하려는 의도에서 인지 언어를 아람어와 라틴어로 했다. 비록 비교적 적은 예산을 들인 영화지만 세트나 의상, 분장도 많은 공을 들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내용면에서도 상상력을 자유롭게 발휘한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유혹>같은 영화와 달리 성경에 성실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주제인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의 묘사는 지금까지 그 어떤 묘사보다 자세한 것이었다. 바로 이 점에서 많은 사람들은 “은혜”나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고 충격을 받기도 한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반면 너무 “사실적”이고자 애쓴 나머지 지나쳤다는 것을 지적하는 사람도 많다. 예를 들어 채찍질 장면이 9분여 계속되는데 많은 의사들은 그런 식의 고통을 건강한 사람도 3분을 넘기지 못할 것으로 이야기 한다는 것이다. 그에 앞서 쇠사슬로 내리치는 등의 가해진 구타까지 더하면 지나침은 도를 넘었다고들 한다. 그 후 처형 장소까지 십자가를 지시고 가야 했던 점을 감안하면 과장에 대한 비판은 옳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가 신적인 능력으로 견디셨다고 단순히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패션>의 주제를 벗어난 것이다. 그의 수난은 철저히 인성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던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찢으시는 처절한 고난과 죽음을 주제로 보여주고자 한 시도 자체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를 비롯한 모든 예술 작품은 작가의 관점에서 주제를 해석하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경우는 그것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그것이 멀티미디어요 특히 시각에 중점을 둔 영상매체인 영화의 본질이다. 특히 이 영화는 언어조차 자막으로 접해야 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보여주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패션>은 고난을 “보여주기” 위해서 극단의 조처를 마다하지 않은 영화이다. 많은 비판가들이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극도의 폭력이 한 시간을 훨씬 넘어서 계속되는 끔직한 영화이다. 평론가 로저 에버트(시카고 선타임즈) 는 “자기가 본 영화 중 가장 폭력적인 영화”라고 했다. 뉴요커의 평론가 데이빗 덴비는 이 점을 강하게 비난하면서 최하위 등급인 별 한 개를 주었다. 상식적인 영화 비판에서 늘 문제가 되는 것이 선정성과 폭력성인 점을 감안할 때 아무리 주제상 또는 특별한 의도가 있더라도 이처럼 생생하고 나아가 과장이 심할 정도로 길게 폭력적인 장면에 초점을 둔 것은 비판거리가 될 수 있다. 물론 나 자신은 폭력의 묘사 자체가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쉰들러스 리스트>는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폭력적이었지만 그것을 비난할 생각이 없다. 문제는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폭력을 묘사하고 “보여주는가”하는 것이다.
영화 <패션>의 의도는 이미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자세히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한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우리는 “보는 것을 믿는” 시대에 살고 있다. 텔레비전과 컴퓨터, 인터넷 등 멀티미디어와 더불어 자라난 세대는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보는 것 역시 명백한 한계를 가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고속도로 변의 목장의 송아지처럼 큰 눈망울을 굴리며 빠르게 지나가는 영상을 하루 종일 보아도 아무런 생각이 없을 수 있다는 한 비평가의 말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특히 사람들이 폭력의 묘사에 익숙해져 어지간해서는 아무런 감동이나 시각적 충격도 줄 수 없다고 생각해서 극단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면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나 자신은 이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수난의 장면부터 오히려 긴장을 잃기 시작했고 도가 지나친 폭력의 묘사에 무감각해지기 시작했었다. 더러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는 것으로 보였지만 나는 그렇질 못했다. 평소에 눈물이 인색하지 않은 자신이 미안할 정도였다. 남들처럼 감동하고 “은혜”를 받지 못한 것을 굳이 변명하자면 바로 “보는 것으로”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잠시 오가는 플래쉬 백으로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영화는 충분히 “보여주지” 못했다. 피가 마리아의 얼굴에 까지 튀기는 장면으로도 고난의 의미는 살아나질 못했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사고나 상상력이 훨씬 월등하여 그것을 살려내며 감동과 “은혜”를 받았을 것으로 믿는다.
일부에서 이 영화가 역시 제작자 멜 깁슨의 카톨릭적 신앙을 반영한다는 지적은 옳다고 보인다. 특히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어머니 마리아의 관계가 부각되는 여러 장면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십자가에서 어머니를 “여인이여”라고 부른 이유를 아들로서보다 메시야로서 대하신 것으로 해석해온 개신교 신학에서는 생소한 모습이 영화 전체에 상당히 있다. 가장 카톨릭적인 면은 주제인 <패션>에 대한 접근이다. 그리스도의 수난의 의미는 우리가 받을 형벌을 대신 하신 것이다. 이는 카톨릭과 개신교 신학이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것을 가능한 비참하고 참혹하게 묘사하는 경향이 카톨릭에 강하다. 중세의 성화들 중 <피에타>라고 불리는 그림이 있다. 거기에는 대개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안고 있는 마리아를 측은히 내려다보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한 구석에 등장한다. 마치 너무도 참혹하게 죽은 성자의 모습이 안쓰러워 인류의 죄를 사하신 듯한 인상을 풍긴다.
멜 깁슨이 수난과 죽음에 집착하는 것은 이런 전통 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지나친 생각일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도 남미나 필리핀 등지에서 간혹 수난절 행사에 실제로 십자가를 지는 재현행사를 포함해 각종의 고행과 고난이 강조되는 이면에는 이런 전통이 흐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신학적 비판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카톨릭의 저력은 부러웠다. 그것은 물론 멜 깁슨이라는 한 사람의 비전과 노력의 결실일 수 있다. 하지만 1920년대 영화와 정면 충돌해서 싸웠던 카톨릭은 바티칸 공의회 II 이후 1960년대에 들어서는 대중문화에 대한 시각을 바꾸어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영화에 대해서는 카톨릭 안에서도 반대와 이견이 없지 않았으나 그러한 배경이 이 영화의 출현과 무관하다 할 수 없다. 대중문화가 일상 환경이 된 오늘날 개신교 역시 대중문화와 특히 영화에 대해서 보다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바로 보고 비판하며 나아가 변혁하려는 비전을 가져야 한다. 이런 영화가 주류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지고 배급되었을 뿐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히 영화사의 한 획을 그은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나아가 이 영화의 성공으로 인해 앞으로도 좋은 “종교영화”가 더 많이 제작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다.
끝으로 이 영화를 과연 볼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 한 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앞서 말한 지나친 폭력적 장면으로 인해서 이 영화는 성인등급인 R을 받았다. 하지만 로저 에버트의 말과 같이 “종교 영화”가 아니었더라면 17세 미만 절대 불가인 NC17을 주었어야만 했다는 말에 나도 동의한다. 따라서 여러 비평가들이 지적한 것처럼 어린아이들을 이 영화에 동반하는 것은 전혀 권할만한 일이 아니다. 다른 것은 접어 두더라도 좋은 약도 지나치면 독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나는 교회에서 모든 교인을 불러 놓고 상영하는 일은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지금 한국서 일부 교회가 불법 DVD를 상영한다고 하는데 이는 제작권 존중은 제쳐놓고라도 과연 상식적으로 타당한 일인지를 물어야 할 일이다.
<패션>외에도 모든 가족이 보아서 좋을 영화는 많다. 특히 신앙인으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실화”들 가운데 많다. 예를 들어 1982년 휴 허드슨이 만든 에릭 리틀이라는 올림픽 달리기 선수의 이야기인 <불의 전차> 같은 것이 그렇다. 이 영화는 좁은 의미의 종교영화는 아니지만 정말 감동적이다. 부디 “종교영화”라는 좁은 장르에만 집착하여 “은혜”를 받으러 영화를 보러 가지 않기를 바래본다. 사실 “은혜”는 눈물만으로 입증되지 않는다. 진정한 “은혜”는 도전을 받아 삶의 변화가 일어날 때 강하게 임한다. 그리스도를 측은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이 우리도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할 때, 아니 조금이나마 그렇게 될 때 진정하게 임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눈물보다 훨씬 진하다. 그것은 스크린을 피 빛으로 물들이는 것보다 훨씬 진하다. 무엇보다 그것은 우리의 심령을 씻어 새롭게 변화시킨 진정한 은혜의 샘터이다.
Mar 1, 2004 | 이달의 초점
이코스타 2004년 3월호
청년사역을 할 때 가장 힘든 것은 고난 받고 있는 학생과의 만남입니다. 왜냐하면 고난 앞에서는 훌륭한 이론도 설득력있는 논리도 아무 가치가 없기 때문 입니다. 고난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마치 거룩함 앞에 서 있는 것과도 같이 엄숙하게 다가 옵니다. 이는 고난의 깊이가 거룩함의 높이와 마치 흡사하게 우리들에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1.고난의 의미와 시작
“고난”은 “고통”을 유발시키는 “상황”이라고 정의할 수 있으며 고통은 고난이 우리의 영혼에 “접수”되는 “아픔”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난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바로 왜 우리 영혼에 이 아픔이 접수되어야 하는 것과 또 그 아픔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첫 고통의 체험은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를 먹은 후 그들이 “벗었음” 을 알고 나뭇잎으로 엮어 옷을 만드는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벗었음이 하나님께 노출되는 상태 입니다. 벗었음의 의미를 여러 가지로 풀이할 수 있겠지만 본질적 관점에서는 창조와 인류의 조화의 파괴를 의미하며, 이에 따라 인류와 창조의 사이에 “겹”이 있어야만 파괴된 상태가 부분적/일시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겹을 우리는 “가죽옷”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뒤 동산을 걷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두려워 숨은 행위는 고통의 극도를 달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파괴로 구멍이 난 상태, 즉 창조의 질서 앞에서 노출되어 버린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즉 창조의 주관 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증폭된 고통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류는 그런 노출의 고통과 더불어 창조질서의 파괴 (distortion), 이에 따른 육신의 파괴로 고통에 휘어 싸임을 받게 됩니다. 땅은 가시덤굴을 낳고 해산의 고통이 있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만 이 세상에서 살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비롯되는 “모든” 결과가 우리들의 영혼을 “아프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고난은 인류의 노출된 상태에서부터 비롯되는 정신적 고통과 물질세계 질서의 distortion에서 비롯되는 육체적 고통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관계없이 결국에는 모든 고난은 한 영혼에게 느껴지는 아픔으로 집중되어 버립니다. 고난이란 어느 정도 객관성의 측도로 설명되어질 수 있지만 한 영혼에게 체험되어지는 아픔의 정도는 지극히 주관적이며 그 깊이를 타인은 헤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매우 흡사한 고난을 경험했다 할지라도 고통의 정도는 각자 다를수가 있습니다. 한 영혼에게 느껴지는 아픔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저주입니다.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대신 세상을 택했기 때문에 오는 죄의 결과입니다. 세상은 피조물이지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고난의 최종은 죽음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그 죽음이란 이 세상에서의 죽음이 아닌 영원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이 땅에 살면서 겪는 고난 가운데는 이 세상에서의 죽음보다 더 아픈 고통들이 있기 때문 입니다. 우리들의 영혼을 파괴하는 고통들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보다 더 아픈 것은 영혼의 완전 파괴를 의미하는 영원한 죽음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영원한 결별입니다. 우리는 죄의 결과로 서로에게 고난을 주고 또 파괴된 창조의 질서로 말미암아 끝없이 고난을 계속 받으며 허무함 속에 살아가고 있다가 영원한 죽음을 맛보게 되는 운명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의 해답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노예로 있을 때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기억하셨다고 출애굽기 2:23-25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담이 죄를 짖는 순간부터 이미 예비해 두셨던 구원의 길을 선포하신 것과 같이 우리에게 향하신 끝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인간이 비록 죄의 길을 선택하여 모든 것을 더럽게 타락시켜 버렸지만 하나님은 결코 포기 하지 않으시고 인간이 남기고 가는 흔적마다 다시 만지어 선으로 변화시키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바로 인간의 영혼을 죽이는 죽음과 고난도 정면 대면하여 생명과 거룩함으로 승화시켜 주심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열쇠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해답은 2가지로 표현 됩니다. 첫째는 창조질서 안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구원의 손길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지만 그 분리된 상태가 고통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고난은 바로 우리가 비정상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고난이 모든 사람들에게 성화의 도구로, 즉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오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사울 왕이 타락한 후 그 마음이 심히 괴로웠지만 그 고난이 결코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는 지식으로 승화시켜주지 못했으며 그의 마음을 더 강팍하게 하였습니다. 애굽의 바로 왕도 이와 같습니다. 그 반면 다윗과 같은 자는 고난이 그를 의의 길로 지켜주었고 요셉과 다니엘도 고난이 그들을 성화시켜 줄수 있었던 유일한 도구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둘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인류의 죽음과 고난의 핵심에 직접 파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고난과 죽음을 먼저 겪은 후 심판자의 자리에 서게 됐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 2:10). 예수님의 성육신은 자신의 영혼에 고난의 흔적을 충분히 담고 (1)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간이 거쳐야 할 모든 과정을 이수한 온전한 인간으로 죽을수 있었던 것이며 또한 (2) 부활하심으로 영혼에 있던 고난의 흔적을 승화시켜 이제는 고난이 저주가 아니라 축복으로 우리들의 영혼을 살리는 도구가 되게 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구약에 살던 의인들의 성화도 가능케 해 주었습니다. 고난 없는 그리스도는, 만약 그가 다른 쉬운 방법으로 죽음에 도달할수 있었다 할지라도, 참 성육신이 될 수 없습니다. 성육신은 바로 고난이 영혼에 주는 고통을 체험할 때 비로서 참 성육신이 이루어 지기 때문 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참 순종도 바로 고난가운데서 이루어 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히5:7). 즉 순종이 고난을 수반하지 않았다면 순종의 참 의미에 도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죽음까지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비로서 영광의 면류관이 주어졌던 것입니다 (히2:9).
그렇다면 예수님의 고난은 단순히 예수님 스스로의 온전함을 이루시기 위한 고난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창조질서와 구원의 모든 총체적인 연결성 가운데 온전함을 이루시기 위한 고난은 하나의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온전함이 불온전함 가운데 거할 때 생기는 자연 현상이었습니다. 빛을 발할 때 어두움이 이를 묵인할 수 없는 것처럼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묵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를 죽였습니다. 더 나아가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계속 증폭되는 미움과 다툼을 자신의 몸에 지니고 이를 더 이상 타인에게 전달하지 않음으로 증폭시키지 않고 자신안에 품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사53:10-11). 예수님의 고난은 구원 사를 이루시기 위하여 공중의 권세잡은자가 휘두르는 무기였습니다. 바로 그 무기를 제공해 준 자들은 우리 자신들입니다.
3. 우리의 응답
우리들에게 고난은 4가지 방법으로 다가 옵니다. 첫째는 창조질서의 파고로 말미암은 불행 들입니다 (육신의 병, 자연 기후로 말미암은 인명피해등). 둘째는 인간의 죄성에서 비롯되는 제 삼자의 공격 (aggression)입니다 (누명, 험담, 살인, 구타, 강도 등). 셋째는 우리들의 창조질서의 무시에서부터 오는 결과입니다 (영: 말씀 거역으로 말미암는 결과와 육체적 세계의 질서무시로부터 말미암는 결과 등). 네 번째는 처음에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결여에서부터 오는 정신적/심리적 공포이며 모든 고난의 근원입니다. 특히 땅의 저주는 끝없이 우리들을 의식주의 문제로 한 순간도 편히 쉬게 하지 않습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무의미에 대한 공포, 시간허비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무엇보다도 inadequacy of being 등등 이 모든 것이 합쳐져서 존재를 직면할 수 있는 용기를 무력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과 죽음을 정복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고난에 대한 해결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번째의 고난은 자신들에게 의탁된 땅을 제대로 정복함으로 다스리라고 말씀하시며 두번째 종류의 고난은 용서하는 자세(개인적 차원)와 의를 이루려는 자세 (사회적 차원)로 임하시기를 원합니다. 또한 우리들에게 세번째 종류의 고난에서는 이제 성숙을 통하여 자라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무엇보다도 위의 세가지는 이 마지막 네 번째 고난의 극복 없이는 이룰 수 없습니다. 즉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존재의 의미와 존재에 대한 용기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공중의 권세잡은이가 다스리는 육체가운데 거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의 선포 자체가 우리들에게 고난을 순식간에 없애주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선포는 고난을 동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며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어두움은 빛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계시록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나라”와 “고난”의 동역자라고 스스로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계1:9).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고난을 각오하고 적극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감수할 자세를 가지라고 말하고 계십니다 (딤후1:8).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고난이 올 때 이를 담대히 묵묵히 맞이하며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와 죽음의 독이 묻은 침이 우리들을 찌를 때 바로 그 침이 십자가의 능력으로 우리들을 세우고 우리들의 성화의 거름이 되도록 바꾸어 놓으신 하나님 자신을 체험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롬5:3). 무엇보다도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는 고귀한 지식으로 인도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는 그분의 은혜의 깊이만큼 체험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은혜의 깊이는 우리들의 영혼에 새겨지는 고통의 깊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바로 고난의 깊이이며 우리 영혼의 깊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들에게 고난은 성화를 의미합니다. 고난의 이유에 관계없이 또 그 고난의 이유를 우리의 이성으로 절대 설명할수 없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이제 고난은 하나님을 아는 고귀한 지식의 깊이로 들어가게 하는 은혜의 도구 입니다. 그런데 이런 거룩함은 이 세상의 안락함이 있는 성문 안에서는 찾을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고난이 아직도 저주이기 때문 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성문 밖, 세상의 영광과 명예가 없는 지역, 외롭고 버려진 곳에 임할 때만이 얻어질수 있는 거룩함 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히브리서를 통해 우리도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Feb 1, 2004 | 이달의 초점
이코스타 2004년 2월호
1. 목사님의 소개와, 하시고 계신 사역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원래 목사였던 사람은 아니고, Ohio State University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Silicon Valley에 있는 회사에서 1977 85년까지 근무하다가, 41살에 신학교에 가서, 44살에 늦은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93년에 지금의 휴스턴 서울 침례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되었고요. 저는 예수님을 대학원 때 영접했는데, 그 때 성경을 읽어가면서 갖게 된 갈등 중의 하나는 현재의 교회와 성경에 나타난 교회가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약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은 가정 같았는데, 현재의 교회는 왜 그렇지 못할까 하는 고민을 하던 중에, 그 이유가 초대교회는 가정에서 모이는 가정교회라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브루스길라와 아굴라와 같은 사람들의 집에서 모이는 가정 교회였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휴스턴 서울침례교회에 부임하여 23 개의 목장(개별 가정 교회의 명칭)으로 가정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지금은 목장 숫자가 약 130개 됩니다. 분가가 자주 있어서 정확한 숫자는 잘 기억을 못하겠습니다. 자랑스럽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증가가 기신자의 수평 이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불신자 전도에 의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작년도 저희 교회에서 새롭게 예수님을 영접하고 침례를 받은 사람이 영어 장년부와 중고등부를 합쳐서 약 280명입니다. 한 주에 약 5명 꼴로 침례를 받게 되었다는 말이지요. 2000년도 인구 조사 통계에 의하면, 이곳 휴스턴의 한인 인구가 10,300명이라는 데 한국 사람이 가주나 뉴욕처럼 많이 않은 곳에서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은 놀랄만한 일이라고 주위 목회자님들이 말씀해 주십니다.
가정교회에 관해서 배우고 싶으신 목회자들을 위해서, 화요일부터 주일까지 5박 6일 간의 세미나를 열고 있습니다. 사실, 성경적인 교회의 모습은 공부를 가르쳐서 제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삶을 보여주고 나눔으로써 제자를 만들어 가는 겁니다. 성경공부를 통해 제자를 만드는 일이 2 3년간은 효과적일 수 있지만, 그 이후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죠. 그래서 가정교회에서는, 부부 싸움했던 얘기, 화났던 얘기들을 솔직히 나누고, 그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갔는지는 함께 나누면서 제자가 되어가도록 하고 있습니다. 세미나에서도 보고 배우는 원칙이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세미나에 참석한 사람들은 목자의 집에서 민박을 하면서 보고 배울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또한 처음 예수님을 믿는 분들을 위한 성경 공부인 ‘생명의 삶’을 속성으로 가르쳐 드리고요, 목자들의 간증을 들려드림으로써 이론이 아닌, 살아 있는 현장을 소개하려 하고 있습니다. 가정 교회 사역에 있어서, 예배가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세미나에 참석하시 분들이 주일 예배에 꼭 참석하고 가시도록 하고 있습니다.
2. 가정교회에서 성경공부를 통한 제자 양육이 아닌, 삶을 통한 양육을 지향하신다면, 성경공부 교육은 따로 진행이 되는지요?
그렇습니다. 매주 화요일에 “삶 공부”라고 이름을 붙여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은 분들을 위한 ‘생명의 삶, 다음 과정인 13주‘새로운 삶’, 다음 과정 13주‘경건의 삶’이 같은 날 동시에 제공됩니다. 이 밖에도, ‘부부의 삶’, ‘부모의 삶’, ‘교사의 삶’등 실제적인 삶에 도움이 되는 코스가 제공됩니다. 이 모든 과정들은 가르침의 은사가 있는 평신도에 의해 진행되고 있고요. 그리고 ‘쎌 교회 지침서’를 저술하신 랄프 네이버 목사님이 쓰신 6주 짜리 “매일 영적 성장 가이드’를 우리가 번역해서 사용했었는데 최근에 정식으로 NCD에서 출판했습니다. 이것과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교재로 해서 가정 교회 차원에서 1대 1로 교육시킵니다.
매주 금요일에는 가정 교회 모임인 목장모임이 있고요, 주일에는 목장의 리더인 목자들의 모임인 ‘초원모임’이 있습니다. 초원모임도 원칙적으로는 목장모임과 동일하게 진행되지만, 목장모임이 나눔과 교제가 주제라면, 초원모임은 목양이 주제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삶을 나누고 보이면서 제자를 만들어가는 것이 목장모임의 목표이기 때문에, 12명이 넘으면 반드시 분가하도록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규모가 너무 커져서 진정한 삶을 나눈다는 것이 어려워집니다.
저희 교회에서 목자가 수료해야 할 삶 공부 5 과목을 다 수료하지 못한 사람을 대행 목자라고 불러서 목장을 책임지도록 하는데 이들 중에는, 빠른 경우엔, 예수를 영접한지 7개월 만에 대행목자가 된 경우도 있습니다. 좀 빠르겠다고 생각하시겠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목자는 가르치는 리더가 아니라 섬기는 리더이기 때문에 가능하고요, 또 삶을 보여주면서 양육하는 것이기에, ‘전에 본 대로만 하라’로 권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하지요. 그러다가 힘든 일이 생기면, ‘초원모임’을 통해 묻고 함께 기도할 수 있기에, 7개월이라는 신앙경력이 별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귀납법적인 성경공부는, 주일 예배 설교를 통해 이루어 집니다. 많은 교회들이 교인 전체에게 성경을 가르칠 수 있는 이 시간을 놓치고 있는 것 같아 참으로 아쉽습니다. 주일 예배에서도 새로 믿은 분들이 적응하기 쉽게 배려하려고 하는데, 예를 들면, 성경은 표준 새번역을 사용함으로써 개역성경의 어려움으로 인해 오는 거리감을 없애려고 하고있고요, 찬송도 같은 것을 반복해서 부르려고 하고 있습니다. 또한 새로 오신 분들을 일으켜 세우려고 하지 않고요, 설교도 가능한대로 교회용어가 아닌 평상어를 사용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미 믿는 분이 우리 교회를 방문하면 다른 교회에 가서 섬기시라고 하고 등록을 허락지 않는데요, 이것 또한 새로 오시는 분들이 더 쉽게 적응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3. 왜 현대교회가 이토록 공동체성이 상실되게 되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사실, 교회에 공동체성이 상실되었다고 하기보다는, 교회의 본질이 흐려졌다고 하는 편이 나을 듯 싶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3위 하나님께서 공동체셨고, 그 하나님께서 하나님-아담-하와의 셋이서 하나되는 가정을 공동체로 세우셨고, 그리고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라는 공동체를 세우셨지요.
현대 교회는 너무도 개인 신앙을 강조한 나머지 공동체성에 대한 의식이 상실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문제를 ‘기독교가 불교화 한다’고 하곤 하지요.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가 너무도 중요합니다만, 그것만을 강조함으로써 함께 하는 신앙을 무시하면 문제가 됩니다. 전통적인 교회의 경우에 프로그램이 너무 많아서 공동체성의 상실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현재 가정교회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분들 중에서도, 가정교회를 또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생각해서 실패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기존 교회에서의 구역은 교회 내의 하나의 조직이요, 또 하나의 프로그램일 뿐이지만, 가정교회는 그 자체가 local church이고, 그 가정교회가 모인 것이 휴스턴 서울 침례교회인데 말입니다.
다시 말해, 공동체성이 상실된 교회는 원론적으로 볼 때, 예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은 아닌 것 같습니다.
4. 공동체성이 회복된 ideal한 교회의 모습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세상에 ideal한 교회는 없는 것 같습니다. 신약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도 벌써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어떤 형태의 모습이 이상적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다는 말이지요. 교회의 바른 모습의 기준은 형태라기 보다는 spirit입니다.
첫째는, ‘영혼을 구원해서 제자를 만든다’는 생각을 가지고, 영혼 구원에 집중하여 삶을 통해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만들어 가겠다는 마음가짐입니다. 마태복음 28장의 Great commission이라고 할 수 있는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에서, 실제로 명령형은 ‘제자를 삼아라’뿐 입니다. 다시 말해, 영혼 구원해서 제자를 삼는다는 것이 교회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지요.
둘째는, ‘기쁨’에 대한 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 일이 기쁨이 되어야 하고, 교회에 가는 것이 기쁨이 되어야 한다는 거죠. 저희 교회라고 불만이 있는 사람들이 없겠습니까 만은, 많은 경우에 ‘이 교회에 있어서 참 행복합니다’라는 고백을 들을 수 있어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5. 그렇다면, 그런 spirit을 가진 교회가 되기 위해, 현재 애쓰시고 계신 일들이 있으시면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저희 교회가 지난 10년간 가정교회를 중심으로 지역의 영혼 구원을 위하여 일해왔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10년간은 세계선교를 향해가고, 그 다음 10년은 지역사회 봉사를 위해 가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듭니다. 느낌이라고 말씀 드린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늘 Vision과 leadership이라는 두 가지 문제에 대해 컴플렉스가 있어 왔습니다. 교회의 미래 계획이라던가, 비젼이 뭐냐고 물어오면, 별로 할 말이 없었고, 리더십에 관해서도 내게 특별한 리더십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었거든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목회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비전이 아니라, ‘순종’뿐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들은 음성에 순종하다 보니 가정 교회가 성공적으로 정착이 되었고, 가정 교회를 통하여 지역 사회 영혼 구원에 집중하다보니, 타지역의 구원받지 못한 영혼에도 신경이 쓰여서, 작년에는 12팀이 단기 선교를 다녀왔습니다. 사실 저희 교회에는 장기 기획위원회같은 모임도 없습니다.
6. 공동체를 이루어 가기 위해, 정말 힘든 문제 혹은 장애물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또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것인가요?
(1) 목회자의 의식구조가 문제입니다. 가정교회 세미나를 들으러 오시는 목사님들을 보면, 가정교회를 교회를 부흥시키는 테크닉정도로 생각하거나, 조직의 일부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대부분 가정교회 사역이 실패하게 됩니다. 가정교회를 도입해서 성공하시는 분들의 경우는 두 가지인데, 첫째는, ‘나도 예전부터 같은 생각을 가져왔는데, 어떻게 해야 할 지 잘 몰라서, 혹은 기회가 없어서 못했다’고 하시는 분들이고, 둘째는, ‘이것 밖에는 길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하고 하시는 분들입니다. 이렇게 의식 구조가, 기존 교회가 가진 틀을 깨야만 진정한 공동체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사실, 진정한 공동체를 향해 가다 보면, 목회자들 스스로가 포기해야 할 부분이 참 많거든요.
(2) 교회 지도자들의 저항입니다. 장로나 안수집사님 같은 분들이, 가정교회를 받아들이다 보면, 다스리는 위치에서 섬기는 자리로 옮겨가야 하는 것이, 받아들이기에 힘드신 경우가 꽤 있습니다.
(3) 성도들 스스로가 변화하는 것을 꺼려 하는 경우입니다. 가정교회를 하다 보면, 삶을 서로 오픈하고 나누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서 자신의 삶이 노출 되는 것을 꺼리는 경우가 있고요, 또 기존의 교회 전통이 편해서 변화하는 것을 원치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4) 기존의 프로그램을 그대로 두고, 가정교회 같은 공동체를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진행하려는 하는 경우입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공동체성은 본질의 문제이지, 프로그램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7. 성경적인 공동체를 가꾸어 가고픈, 유학생을 비롯한 젊은이들에게 꼭 당부하시고 싶은 말씀을 해 주시겠습니까?
소속된 교회에서 목사님만 이해해 주신다면, 청년부는 가정교회로 전환하기에 참 좋은 모임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시는데 주의하실 부분은, 청년들이 지적인 것을 추구하는 성향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지적인 성향때문에 모임이 자꾸만 지성화만 추구하게 되기 쉬운데, 이런 성향을 극복해서, 섬김의 공동체로 전환되어야 하고, 가르쳐서가 아니라 삶으로 보여줌으로써 제자를 만드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젊은이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듣는 것보다는 말하고 싶어하는 성향이 있고, 사고보다는 느낌 중심으로 살며, dogma보다는 관계성 중심으로 산다고 들 하는데, 이것이 나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 성향으로 인해서 젊은이들이 가정교회에 더 잘 맞을 수도 있다는 말이죠. 어른들은 젊은 세대가 commitment가 없다고들 생각하지만, 사실 어른들 기준의 그런 헌신의 모습이 없을 뿐, ‘이거다’싶으면 더 없는 commitment가 나오기 마련이죠. 기존 교회 내에 가정교회의 모임이 없다고 하더라도, 교회의 양해만 있다면, 청년부 내에서 그런 공동체를 시도해 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Feb 1, 2004 | 이달의 초점
이코스타 2004년 2월호
캐나다 위니펙에서 공동체 사역을 하시고 계신 이훈 목사를 통해, 공동체성이 회복된 진정한 교회에 대해 들어보자. 이훈 목사의 공동체에 관한 다른 글들은 www.christiantimes.ca의 ‘함께 걷는 순례자’라는 칼럼을 통해 볼 수 있다.
1. 목사님의 소개와 하시고 계신 사역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10년간 한국 온누리교회에서 사역하다가, 96년에 공동체를 배우기 위해 캐나다로 왔습니다. 현재 캐나다 메노나이트 교회에 소속되어 위니펙과 런던과 밴쿠버에 있는 다민족 공동체 교회가 잘 세워져 가도록 돕고 있고, Multicultural Leadership Education 프로그램을 돕고 있습니다.
2. 교회의 공동체성 회복에 많은 관심을 가지시고 일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특별히 공동체성에 관심을 가지시게 된 이유가 있으신지요?
한국에 있을 때, 소외층을 돕는 사역을 할 때 함께 더불어 살면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편 대형교회에서 사역하며 공동체 회복에 대한 특별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3. 왜 현대교회에 이토록 공동체성이 상실되어 가게 되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무엇보다 비교와 경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 즉 어느 누구 하나도 특별하지도 않으며 초라하지도 않고 모두가 동일하게 소중하다는 것, 그리고 그 나라는 경쟁이 아니라 조화에 의해서 세워지는 것인데, 그것을 모르고 있거나 소홀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4. 공동체성이 회복된 ideal한 교회의 모습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수평적 관계: 그리스도 외에 모든 사람은 서로 형제와 자매로서 수평적인 관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어떤 수직적인 구조를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만이 머리이며 나머지는 모두 그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작은 것의 가치: 작은 것의 소중함을 깊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역보다 관계가 소중하며, 숫적인 성장을 추구하고 만족하기 보다는 상처와 소외와 분열을 피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 시대의 비극은 성공과 발전이라는 그럴듯한 목표 때문에 ‘생명’과 ‘사람’과 ‘관계’라는 더 중요한 가치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나눔의 정신: 물질을 포함하여 가능한 한 많은 것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 정신이 필요합니다. 삶의 기쁨과 아픔을 함께 나누지 못하는 교회는 성경적인 교회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계획과 결정의 모든 과정도 충분한 의견 수렴과 대화라는 나눔의 가치를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섬김의 정신: 그리스도의 몸은 서로 섬기며 또한 세상을 섬길 때, 가장 그리스도를 닮습니다.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이기적이 되기 쉽고 배타적이 되기 쉬움을 기억하고, 스스로를 깨워서 servant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5. 그렇다면, 그런 교회를 위해 현실적으로 어떤 일들이 “우선”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우선 교회의 수직적인 구조와 관계를 수평적으로 바꾸자고 권하고 싶습니다. 더불어 대화와 나눔을 모든 모임에서 장려해야 합니다. 건강한 공동체는 타율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율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자발성을 격려하고 싶습니다.
6. 현재 하시고 계신 사역이, 그런 ideal한 공동체적 교회의 모습에 얼마나 가까이 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또 현재 한걸음 더 나가기 위해, 애쓰시고 계신 일들이 있으시면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보다 이상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실제로 메노나이트 형제 자매들은 위의 가치들을 충분히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는 우리 한인 크리스천들이 그런 정신을 갖도록 격려하고 실험하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목회자직에서 벗어나 한 형제로서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서로 수평적인 관계를 세우기 위해 서로를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을 직분이나 직위가 아니라 형제와 자매로 부르는 선택을 했습니다. 목회자로 사역할 때도 사람들은 저를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그런 작은 선택이 공동체를 향한 작은 한 걸음의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7. 바른 공동체를 이루어 가기 위해, 정말 힘든 문제 혹은 장애물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또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것인가요?
많은 다른 민족들도 그렇지만 단일 민족, 단일 문화권의 사람들이 갖는 약점이 있습니다. 인연이 특별하다는 것과 집단적인 정서가 있다는 것, 그리고 대개 수직적인 문화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각 문화를 형성해 오는 데 도움도 되었지만, 하나님 나라의 문화와 상치되는 것이 많습니다. 그것이 지속적으로 장애물이 됩니다. 혈연, 지연, 학연이라는 인연의 끈을 교회라는 공동체는 반드시 끊어야 합니다. “누가 내 어머니며 누가 내 형제와 자매냐?”말씀하신 예수님의 뜻을 깊이 헤아려야 합니다. 공동체에 어떤 특권도 없습니다. 그리고 각 지체는 개인적으로 홀로 하나님 앞에 머물러야 합니다. 결코 자기 편을 만들려고 하거나 집단적인 파워나 영향력을 가지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홀로 그리고 더불어 살아가려는 마음, 정직하면서도 배려하는 마음, 세상을 본받지 않으면서도 세상을 살리려는 마음이 각 사람에게 있다면, 그리고 희망을 가지고 기도하며 인내한다면, 어떤 장애물이라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8. 성경적인 공동체를 가꾸어 가고픈, 유학생을 비롯한 젊은이들에게 꼭 당부하시고 싶은 말씀을 해 주시겠습니까?
어메리칸 드림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꿈을 가지십시오. 그것은 남보다 앞서는 성공하는 삶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살아가며 기꺼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음식이 되는 열매맺는 삶입니다. 빠른 속도와 수많은 선택의 기회가 있는 시대에 인내를 배우기란 어렵습니다. 서두르지 마십시오. 한적한 곳으로 향하는 삶, 반성과 고민과 기도가 있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수용력을 키우십시오. 그리스도를 따르는 영성의 가장 기초는 수용력입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 받아 이기 어려운 사람을 적극적으로 품고 지속적으로 헌신하는 마음을 배웁시다. 무엇보다도 비교하지 말고 자신이 되십시오. 그리고 제한하지 말고 열린 마음과 실험정신으로 사십시오. 한가지 덧붙인다면 지구촌의 아픔을 알고 살리는 인생을 살아갑시다.
Feb 1, 2004 | 이달의 초점
이코스타 2004년 2월호
들어가며
이것은 누구나 경험이 있는 일이 아닐까. 이를테면, 뭔가 새롭게 깨닫고, 그 일을 시작하고 애쓰다가, 문득 멈추어 살펴보니, 사람들이 나를 비웃는 것만 같고, 뭔가 잘못 되 있는 것도 같고, 또 너무도 외로울 때가 있을 때 말이다. 하지만, 조금만 돌아보면, 그 일이 결코 나만의 깨달음도 아니요, 나 혼자 가고 있는 길도 아닐 뿐만 아니라, 수 많은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이 끊임없이 이루기 위해 그토록 애써오던 바로 그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얼마나 위안이 되었었던가. ‘초대교회의 공동체로 돌아가자’는 일은 더욱 그러하다.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님이 임재하신 후 시작되었던 성령 공동체는, 초대교회를 거쳐 속사도 시대에도, 또 기독교가 국교화된 중세에도, 종교개혁 시대에도, 근세에도, 그리고 지금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대에 이르기까지 단 한번도 중단된 일이 없이 이어져 오고 있다.
이번에는, 성령 하나님께서 어떻게 교회의 역사 속에서 자신의 공동체를 위해 일하셨는지를 살펴보고, 그 역사를 통해 지금의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점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하지만, 이 글의 목적이 공동체의 역사를 공부한다기 보다는, 그 역사를 통한 우리에게로의 적용을 생각해 보는 것이기에, 순서를 다소 바꾸어 보고자 한다.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점들을 우선적으로 언급하고, 그 역사의 사건들을 간단하게 짚어 보았으면 한다.
1. 공동체성 회복의 움직임이 시작했던 때의 특징
(1) 조직교회의 부패에 대한 개혁이었다
교회사에서 볼 때, 공동체성의 회복을 위한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예외 없이 볼 수 있는 현상은 당시 조직교회가 부패했다는 것이었다. 정치적인 다툼이 있거나, 도덕적인 타락이 있어, 개혁에 대한 요구가 팽배해 있을 때였다. 모든 개혁이 공동체성을 띠고 이루어 진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많은 부분 공동체성을 포함했었다.
(2) 영성 회복에 대한 움직임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공동체성 회복에 대한 운동은 조직 구성에 관한 문제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그 내면의 동기들을 살펴보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영성에 관한 관심이었슴을 알 수 있다. 급진적으로 세상을 변혁시키려는 사람들이 간혹 있기는 했지만, 주로 공동체성을 추구한 무리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가 되려는 몸부림으로부터 시작했었다.
(3) 기존 질서로부터 배척 받았었다:
초대교회와 같은 공동체성을 찾고자 하는 노력들은, 늘 기존의 세력들로부터 배척을 받았다. 보수세력에게는 너무 진보라고 배척 받았고, 또 자칭 진보라는 세력에게는 보수 세력이라고 외면당했다. 어떤 움직임은 기존의 교회 질서 내에서 공동체성의 회복을 위해 힘썼고, 또 어떤 운동은 조직 교회 밖에서 이루어 졌으나, 양쪽 모두 초기에는 상당한 반대에 직면했던 경우가 허다했다.
(4) 철저했고, 가시적이었다.
공동체성 회복을 위한 움직임의 초기 단계에 나타나는 특징의 또 한가지는, 그들 모두가 철저한 순종과 헌신이 있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공동체로 세상에 드러났다는 점이다. 입으로만 회복과 갱신을 논하는 공허한 외침이 아니라, 삶으로써 그리스도인됨을 보이는 생활 공동체로 드러났었다. 각자의 소유를 공용하고, 시간과 노동으로 서로를 섬기는 가시적인 모임이었다.
2. 각 공동체 모임이 쇠퇴하게 될 때의 특징
(1) 교만해 진다.
공동체성이 강한 모임으로 세상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고, 알려지게 된 모임들이 쇠퇴하게 되는 첫번 째 이유는, ‘우리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라는 교만이다. 하나님 앞에 철저히 낮아지겠다고, 또 완전한 제자의 삶을 살겠다고 시작한 공동체이었지만, 서서히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존경을 받게 되고, 또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열매가 다른 사람들과는 사뭇 다른 상황이 장기화됨에 따라, ‘나는 다르다’라는 영적 교만함을 가지기 쉽다. 이 교만이 다른 모든 문제의 원인이 되기 십상임에도 불구하고, 눈에는 잘 드러나지 않기에 더 무서운 문제가 되곤 한다.
(2) 동기가 율법화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지키고자, 말씀을 연구하고 세분화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그토록 애썼던 바리새인들이, 그 말씀의 본질을 상실한 채, 얼마나 자신이 만든 원칙을 율법화하고 고착화시켰는지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똑같은 현상이, 공동체 운동에도 발생하여, 예수님의 철저한 제자가 되고자 했던 원칙들이 자꾸만 율법화되어 그들을 얽매고, 또 서로를 정죄하는 잣대가 되곤 했다. 물론 그 원칙조차 지키지 않아 문제가 된 경우도 허다하지만 말이다.
(3) 조직화하고 세력화한다.
공동체 회복의 움직임이 어느 정도 정착을 하게 될 때, 그 모임의 규모는 이미 상당히 커져 있기 마련이었다. 그 규모의 모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처음의 의도와 상관없는 조직이 생기게 되었다. 또한, 세상의 존경과 관심을 받으면서, 세상에 대한 영향력이 커지게 되고, 많은 경우엔 세력화해서 스스로 붕괴하고, 또 다른 갱신을 불러 일으키는 경우가 많았다.
(4) 물질이 문제를 일으킨다.
공동체성이 강했던 모임의 쇠락에는 늘 물질이라는 복병이 존재했다. 세상에 몸을 담고 사는 우리들에게 물질은 꼭 필요한 것이지만, 그 물질이 지나치면 패망을 불러오게 마련이다. 무소유 원칙을 세우고 시작했던 수 많은 공동체들이, 이후 자발적인 기증과 유산에 의해 재산문제가 발생하고, 또 그로 인해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죄성을 잘 드러내는 장면이라 하겠다.
3. 공동체 역사를 통해 우리가 배울 점.
(1) 공동체의 형태는 다양했다
때로는 교회의 조직 내에서, 때로는 조직교회 밖에서 이루어 지기도 했다. 혹은 수도원 공동체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고, 또는 가난한 자와 함께하는 도시공동체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기혼자들 중심의 모임이 있는가 하면, 미혼자들만 모이는 공동체도 있었다. 현재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공동체에도 여러가지 모습이 존재한다. 교회 내의 소그룹을 통한 작은 공동체의 실현부터,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고 삶을 나누는 생활 공동체, 더 나아가 형제 자매가 함께 하며 소유까지 나누는 수도원적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어떤 형태를 취하던, 우리는 반드시 내 생명과 같은 공동체 안에 있어야만 한다.
(2) 때로는 비난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공동체성 회복을 위한 운동은 진보, 보수 양쪽으로부터 비난을 받기 일쑤였다. 만일 우리가 건강한 공동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애쓰다 보면, 때로는 오해도 받고 비난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공동체성의 상실이 심각한 현대 조직 교회 내에서 아무런 갈등없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그것이 더 문제가 아닐런지 모르겠다.
(3) 물질까지 나누는 가시적인 형태여야 한다.
공동체는 이론이 아니라, 생활이다. 내 집, 내 가정, 내 지갑을 열 각오없는 공동체는 존재할 수 없다. 선조들이 그러했듯이, 철저한 순종과 눈으로 볼 수 있는 공동체만이 건강하다고 하겠다. 초대교회 사람들에게 개인 소유가 있었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확실한 것은 그들이 자신의 소유를 자기의 것이라 하지않았고, 그들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4) 공동체 모임의 쇠퇴기를 기억해야 한다.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고 애쓰고 나서, 우리는 늘 바리새인을 기억해야 한다. 나만 특별하다는 교만한 마음을 조심해야 하고,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모임이 조직화 되는 것을 우려해야 한다. 역사에서 보듯이, 한 개혁은 시간이 흘러 또 다른 개혁을 불러오곤 했다. 우리 스스로가 늘 개혁의 자세로 산다면, 건강한 공동체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5) 바로 지금 이곳에서 시작해야 한다.
역사를 보면, 공동체성을 이룩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머뭇거리지 않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순종, 하지만 철저한 순종을 시작한 것이 커다란 결과를 이루게 되었다. 특히 유학생들이 빠지기 쉬운 오류 중의 하나는, 졸업한 이후로 모든 일을 미루는 버릇이다. 하지만, 적어도 공동체를 이루는 일은 졸업 후로 미룰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아직 학생이므로, 예수님에 대한 순종을 미룰 수는 없다는 말이다. 지금 내가 있는 바로 이곳에서 시작해야 한다. 철저하고 가시적이며, 또 갱신 지향적인 공동체가 이곳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4. 역사에서 살펴본 공동체들
(1)고대사에 나타난 공동체들
기독교는 국교화되면서, 상당 부분 세속화하게 되었다. 이에 대항하여 대대적으로 수도원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국교화로 인해 대중은 교회로 들어오는데, 수사들(Monks)은 자신의 영성을 지키기 위해 광야로 빠져나가는 아이러니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수도원 주의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안토니우스와 파울 등은 은둔 생활을 하는 은수자였던 반면, 파코미우스같은 수사에 의해 공동생활을 하는 수도원이 생겨나게 되었다. 4세기경에는 이집트에 활발하게 진행되던 수도원 운동도 눈에 띤다.
(2) 중세사에 나타난 공동체들
480년에 태어난 성 베네딕투스는 서방에서 수도원을 개혁한 인물로 꼽힌다. 처음에 은수자였던 그는 수도원 규율집을 만들어 더 유명해 졌는데, 그 규율은 ‘영구거주’와 ‘철저한 순종’을 기초로 하였다.
그 후, 8세기 초 교황청은 추문으로 얼룩지고 있었고, 수도원 생활 역시 지상 최고의 이상으로 예찬되며 세속화하고 있던 시기가 있었다. 그 무렵, 한 수도원에서 대대적인 개혁 운동이 시작되고 있었는데, 그것이 끌루니(Cluny)회였다. 베네딕트의 규율을 준수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시작했던 이 수도회는, 후에는 기독교 이상을 사회로 스며들게 하여 변화를 추구하기까지 이르렀다. 베네틱트 수도원과는 달리, 토지에 토지 경작자들까지 함께 증여받은 그들은, 노동의 시간이 줄어들고 남은 시간을 끊임없이 중보기도에 할애했다. 하지만, 후에 수많은 선물과 유산으로 수도원이 많은 재물을 소유하게 되었고, 이 개혁운동은 실패하게 된다.
12세기에는, 끌루니회가 너무 세속적 관습을 좇아 생활하며, 자신의 영성을 위한 기도에는 힘쓰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고 있었다. 그런 수도원의 세속화를 개혁하기 위해, 시토회(Cistercians)가 생겨났다. 그들은 노동을 다시 강조하였고, 후에는 교황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까지 이르렀다.
수도원들의 수사들이 귀족 출신으로 구성되어, 더 이상 수도원들이 시대의 물결을 막을 수 없게 되자, 프란체스코와 도미니쿠스 같은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흐름이 전개되게 되었다. 물질 소유를 하나님과의 일치의 장애물로 보고, 자발적으로 가난해 지는 것을 택했던 그들은, 후에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희망이요, 선교 기구였다. 하지만, 프란체스코의 탁발공동체 역시, 조직화와 물질의 문제에 연루되면서, 대체로 기존의 수도회들이 걸었던 길을 걷게 되었다.
프란체스코와 동시대를 살았던 발도(Waldo)에 의해 생겨난 발도파는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직자, 수도사들을 넘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청빈과 순종의 도전을 제공하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성프란시스코가 교회의 울타리 내에서 교회를 갱신하려고 했다면, 발도파의 경우는 비제도권의 평신도 갱신 공동체였다. 비록 이로 인해, 지금도 많은 교회사에서는 이들을 ‘이단’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말이다.
(3)종교개혁 시대의 공동체
공동생활로 대표되는 수도원이 개혁의 주 대상이었던 종교개혁은, 공동체라는 관점을 강조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당시 로마 카톨릭과 종교개혁자들 양쪽으로부터 박해를 받았던 재세례파에 대해서는 재조명을 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시 재세례파는 종교개혁의 내용에 대해서는 대부분 동의하였으나, 기존 정치권을 안고 개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려는 의도에 대해서는 반대하였다. 그들은 형식적인 세례를 받음으로써 구원을 보장 받는다는 당시의 관행을 반대하고, 진정한 의미의 세례를 다시 받을 것을 요구하였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했다.
산상수훈이 삶의 기초가 되었다.
유아세례를 거부했다.
성직자, 공직자에게 높은 도덕성을 요구했다.
비폭력이어야 했다.
당시 재세례파는 철저한 공동체적인 삶, 즉 서로 물질을 나누며 그리스도의 형제애적인 사랑을 실제 그들의 삶 속에 실천하는 삶으로 기존의 교회에게 많은 영향도 주었고, 또 박해도 받았다. 이런 원칙을 기초로 살았던 그들의 삶은, 지금도 후터파와 메노파의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입으로만 고백하는 믿음이 아닌, 삶으로 드러나는 믿음을 추구했던 그들의 삶은 우리에게 많은 도전을 준다.
(3) 근세사에 나타난 공동체
지역 교회 내에서, 진정으로 헌신된 자들에 의한 작은 모임인 ‘경건한 모임’을 통해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이루어 보려 애썼던 야곱 스페너
교육체제의 철저한 변화로 독일 사회를 변화 시키고자 했던 프랑케의 교육공동체
진센도르프에 의해 ‘조’ 혹은 ‘속회’의 작은 모임으로 진정한 하나님의 가족의 모습을 이루기 위해 힘썼던 헤르후트 공동체.
준 수도회의 성격을 띠었던 존 웨슬리의 순회 평신도 설교단.
18 19세기의 공동체인 필거휘트 공동체, 에프라타 공동체, 처치 아미, 구세군 등에 의해 영성을 회복하고, 세상의 빛으로의 삶을 살고자 하는 공동체적 움직임은 계속되었다.
(4) 현대의 공동체들
지금도 세계의 각 곳에서는, 조직교회가 가지고 있는 한계성을 극복하고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진정한 공동체성의 회복을 위한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다.
브루더호프(Bruderhof) 공동체: 재세례파의 후예로 초대교회의 원형대로 살고 있는 영국의 공동체
떼제공동체(Ecumenical Community of Taize): 20세기 초 전쟁으로 갈라지고 상처 입은 유럽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설립되어 하나됨의 참 의미를 보여주고 있는 프랑스의 공동체
베다니 공동체(Bethany Fellowship): 초대교회의 모델대로 공동체를 이루고 살면서, 그런 공동체가 세계선교를 위해 얼마나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미국의 공동체.
코이노니아 동역회(Koinonia Partners): 농촌에서 이루어져, 소외 받고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사역하는 공동체의 본을 보여주는 모임.
라브리공동체(L’Abri Fellowship): 성경의 진리를 추구하는 공동체로, 지식을 통한 복음주의 전통과 삶의 조화를 보여주는 프란시스 쉐퍼에 의해 설립된 공동체
레바 플레이스 교회(Reba Place Church): 기성교회 내에서 부분적인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도시공동체의 지역사회에 대한 역할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는 공동체.
구세주의 교회(The Church of the Savior): 규모가 다소 커지면, 바로 분교회를 하면서 도시 내에서 소외된 자들을 위해 일하는 일반 교회의 공동체성의 본을 보여주는 교회.
이와 같이 현재 세계 도처에서 성경적인 공동체성 회복을 위한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다. 물론 형태는 초대교회 형태의 공동생활로부터 작은 소교회 형태의 도시공동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존재한다. 이외에도,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소그룹의 형태로 진정한 의미의 ‘교회’ 갱신을 위해 애쓰고 있는 수많은 형제 자매들이 우리에게 희망의 소식을 전하고 있다.
맺는말
계속 언급하지만, 예수님께 철저하게 순종하고, 또 가시적인 나눔을 동반한 성령공동체는,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의 사항이 아니다. 비록 형태는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지만, 성도간의 죄의 고백과 나눔, 그리고 삶의 섬김이 있는 공동체는, 성령님께서 예수님의 몸 된 교회를 이끌어 오시는 방법이요,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헌신의 순간 결코 주저하지 않았고, 또 어려움이 있어도 그 일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믿기에 좌절하지 않았던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처럼, 지금 우리가 있는 바로 이곳에 작은 공동체를 위해 무릎 꿇고, 내 자신의 시간과 물질까지 내어놓을 순종의 자세로 작은 헌신을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역사를 이끌어 오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내게도 변함없이 역사하시는 모습을 보아야 하지 않을까.
Jan 1, 2004 | 이달의 초점
이코스타 2004년 1월호
공동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공부해 보고자 하신 분들께 도움이 될만한 책들을 추천해 본다. 책소개도 서평이 아닌 간랸한 소개로 대신했다. 어느 분야도 다 그렇지만, 공동체에 관한 책들도 생각 이상으로 많이 출판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책들은 한정되어 있고, 또한 어떤 책들은 너무도 빨리 절판되어 버려 아쉽다. 여기에 소개된 책들 이외에 소개하고픈 좋은 책들이 있으면 함께 나누었으면 한다.
‘신도의 공동생활’
디트리히 본회퍼 저, 문익환 역,
대한기독교서회,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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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에 관한 책으로 이제는 고전이 되어 버린 책이다. 본회퍼가 2차세계 대전 당시, 지하 교회를 통한 공동체를 경험하면서 쓴 생생한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이다. 공동체에 대한 간단한 이론부터, 혼자있는 삶이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 또한 함께 하는 삶이 중요한 이유, 섬김을 통한 적극적인 공동생활에 대해 이야기하고, 더 나아가 죄를 서로 고백할 수 있는 공동체에 대해서 방향을 제시해 준다. 당시의 상황과 지금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은 다소 있지만, 그래도 성경적으로 건강한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는 훌륭한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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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길버트 빌지키언 저, 두란노,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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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 101’이라는 윌로우크릭 교회에서 발행한 공동체에 관한 입문서이다. 빌 하이벨스 목사의 멘토로 더 알려진 길버트 빌지키언 교수의 글로, 공동체에 관한 이론 정리 부분이 특히 눈에 띄는 책이기도 하다. 구체적인 공동체의 실천 방안이 제시된 책은 아니지만, 공동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쉬운 신학적 이론을 제시하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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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신학’
김현진 저, 예영 커뮤니케이션, 1998 |
공동체 교회론, 공동체 교회사, 공동체 성령론, 공동체 사회론, 공동체적 기독교 교육, 공동체적 실천사학등 6개 분야에 걸쳐, 공동체에 관한 이론을 조직신학적으로 정리한 책이다. 한국 목사가 지은 책으로, 한국 교회의 공동체성의 회복과 실천을 위한 좋은 지침서이다. 이상으로 그치는 공동체성이 아니라, 제자도로서 실천적인 공동체성과 초대교회의 공동체를 교회사를 통해 실제로 이끌어 오신 성령님의 역사, 그리고 공동체 교육의 필요성까지 폭넓은 주제를 다루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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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공동체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가’
송인규 저, IVP,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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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에 관한 여러 좋은 책을 소개한 송인규 목사가 공동체에서 대한 이론을 정리하신 짧은 논문 형식의 글이다. 일반공동체로서 완전한 공동체였던 아담공동체가 무너진 후, 하나님께서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를 통해 어떻게 그의 공동체적 이상을 이끌어 오시는가를 살펴본다. 이스라엘 공동체와 교회 공동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통해 성경적 공동체의 모습을 찾아본다. 그리고 구약의 이스라엘 공동체와 신약의 교회 공동체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들, 즉 합일성(하나됨의 표출), 친밀성(소외된 자까지 모두 형제로 받아들임),상보성(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받음)을 설명한다. 하지만, 이스라엘 공동체는 하나님을 떠났지만, 교회 공동체는 결국 하나님과의 영원한 공동체를 이룰 것을 차이점으로 밝힌다. 책의 반 정도가 주석과 참고 도서로 되어 있는 이론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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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송인규 저, IVP,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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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주 나의 하나님 2권’이라고 밝힌 이 책은, 공동체에 대한 구체적인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해 가기 위해, 그룹 공부의 형식을 취했다. 공동체에서 겪는 갈등들 – 판단, 비판, 권고, 징계, 용서 – 의 문제까지 다루고 있고, 소그룹 운영과 성경공부에 관한 이야기까지 포함한다. 현재의 조직교회에 속한 소그룹에는 꽤 도움이 될만한 책이다. 단지, 이상적인 공동체에서는 거리가 다소 있는 눈높이를 했다는 점이 무척이나 아쉽게 남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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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짜기에서 외치는 소리’ & ‘우리와 하나님’
대천덕 저, 기독양서/예수원 |
한국의 공동체를 끌어오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대천덕 신부님의 책들이다. ‘우리와 하나님’은 공동체의 성경적 원리를 잘 다루었다면, ‘산골짜기에서 외치는 소리’는 공동체 속에서의 성령님의 역사에 대해 말하고 있다. 공동체에 관한 책들이 쉽게 절판되 버리는 실정이지만, 이 두권 모두 절판된 것은 무척이나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주위에 있는 어른들께 여쭈어 보면 한권쯤은 가지고 계실 가능성이 높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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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와 신학’ 89년 9월호 특집 |
두란노에서 발행한 ‘목회와 신학’은 초창기에 더 좋은 글들이 실렸었다. 그 중의 하나가 공동체에 관한 특집기사이다. 대천덕, 방선기, 정태일 등의 저자가 ‘현대교회와 성경적 공동체’, ‘신인공동체를 바라보며’같은 이론적인 글들을 비롯해서, 한국과 미국의 공동체의 모습, 또 도시 속의 공동체의 실체 등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글들이 7편 실려있다. 지금은 두란노에서 CD로 구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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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version of Christianity’
Jacque Ellul 저, Geoffrey Bromiley 역,
Eerdmans, William B. Publishing Company |
공동체적 시각에서 새롭게 쓰여진 교회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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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디스 쉐퍼의 라브리 이야기’
이디스 쉐퍼 저, 양혜원 역, 홍성사 |
스위스 라브리공동체의 설립정신,생활과 사역에 관해 쓴 책이다. 현대 공동체를 이루어 가고 있는 모범적인 모임에 관한 글들이 거의 절판되어 있어 아쉬움을 남기는 반면, 라브리에 관한 글은 새로 증보판이 발행되었다. 공동체에 관한 이론서는 아니지만,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엿봄으로서, 간접 경험을 할 수 있는 좋은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