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 1, 2001 | 이달의 초점
이코스타 2001년 8월호
내가 본 한국 교회, 내가 본 코스타
To generalize is to be an idiot. – William Blake
1.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 신병 교육대와 전투지
어떤 분께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 정신에 반하는 커다란 문제가 발생했을때, 그것이 윤리의 문제이든, 문화의 문제이든, 가치의 문제이든, 그 문제에 대해 기독교적인 목소리를 낼수 있는 각 분야의 전문가를 찾기가 너무나 어렵다는(cf. 김연종 ‘흔들리는 한국 교회’). 나는 이것이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반기독교적 흐름을 상대할 기독교적 파워가 없다는 게임의 논리에서도 그렇지만 ‘아군’이라고 분류하는 한국 교회의 정체성 자체에 대해서 의문이 가기 때문이었다.
“한국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잘 모른다” 라고 대답하는 것이 가장 솔직한 대답일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뚜렷한 관측적 사실은 한국 교회의 성장 또는 그 규모와 한국 사회에 대한 교회의 영향력 사이에 별다른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안점식, ‘한국 교회와 기독교 세계관의 문제’). 이러한 현상은 교회 성장주의, 유교적 권위주의, 기복주의(박성호, ‘한국 교회 그렇다면 무엇을 개혁할 것인가?’) 등과 감성적, 개인적 성향에 맞춘 교회의 목회 전략, 사회에 대한 교회의 침묵(권오승, ‘세상으로 복음의 영광을 주목하도록’) 등, 쉽게 관측되는 요인들에 의한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요인들 위에, 혹은 이런 요인들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요인을 덧붙이고 싶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보다 근원적인 문제이며, 위에서 지적된 요인들을 극복하는 교회 개혁으로만은 해결되지 않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현장의 기독교인’의 부재이다. 반문화(counter-culture)를 주요 특징으로 하는 근본주의(fundamentalism)적 경향이 많은 한국 교회 안에 짙게 깔려 있음으로 인해 교회의 안과 밖을 철저히 나누고 교회의 벽을 높이 쌓는 이원론적 경향이 팽배해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 ‘현장의 기독교인’들을 사라지게 만든 근원적인 이유라고 생각한다(cf. 정진호, ‘부흥을 가로막는 장벽들, 이원론의 문제를 진단한다-(2)’). 1920년대 미국에서 세속 문화에 대한 대항으로 일어났던 근본주의운동의 경향이 복음주의권 안에도 깊이 들어와 미국 사회의 여러가지 문제들에 대해 복음주의자들을 침묵하게 만들었다는 지적은 90년대의 미국 복음주의권에서도 넓게 논의되었던 이슈 중 하나였다 (Mark Noll, ‘The Scandal of the Evengelical Mind’).
나는 ‘신병 교육대와 전투지’의 비유가 ‘왜 현장에 그리스도인이 없는가’를 잘 설명해 준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강제 징집이 아닌 사랑과 섬김으로써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이방인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도록 돕는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들의 삶에서 치열하게 시작될 영적 (지적·감성적·의지적)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며 말씀 안에서 성장해 갈 수 있도록 교회는 그들을 ‘신병 훈련’으로 돕는다.
이제 신병 교육대에서 기초 훈련을 마친 그리스도의 전사들은 가끔씩 (한 주에 한 번이든 세 번이든) 후방으로 돌아와 쉼을 얻기도 하고 사기의 재충전을 받기도 하지만, (시간적으로는 복음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그들은 전방, 전투지에서 그들의 대부분의 삶을 보내게 된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기본적인 신병 훈련 외에 실전에서 사용될 전투 훈련을 받은 적이 없이 홀로 전투지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부정과 미움, 하나님의 질서를 반하는 어그러짐으로 물들어 있는 직장, 인간 관계, 사회 구조, 문화 속에서 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현장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공격은 그들의 삶이, 우리의 일이 예배가 되지 못하게 한다.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유지해 가는 것만해도 사실 기적과 같은 일이다. 이들이 배치될 전선의 부대는 어디에 있는가? 이들보다 먼저 전선에 들어와 실전을 통해 전투 능력을 갖추고 있는 각 분야의 그리스도인 전사들은 어디에 있는가? 이들에게 전선의 상황을 알려 주고 공격 목표를 주지해 주며 전술을 가르치고 함께 작전을 펼치는 소대장, 병장들은 어디에 있는가? 나의 제한된 판단으로는 현장에 대한 부르심에 뜨겁게 헌신한 소수의 정예들은 고전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전사들은 혼자서 살아남는 일에 급급하여 숨어 있으며 그나마 뜨거운 열정을 가진 전사들은 도로 신병 교육대로 돌아가 버렸다. 세상 일에는 흥미를 잃은 반면에(김연종 ‘예수 이름으로 가진 병’) 신병을 모으고 교육하는 일이 그래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들의 열정을 채워 줄 수 있으니까. 전선의 병력이 정예 부대여야 하고 다수여야 하는데, 내 눈에는 몸집 큰 신병 교육대만 보인다고 하면 과언일까? 신교대는 커진 몸집을 굴리느라 더 많은 교관을 필요로 하고 그러다 보면 전선으로 나오는 전사들은 당연히 적어진다.
나는 교회가 성장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커지는 만큼 전선에서 활동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신병 교육대만 커진다면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신교대인가? 교회가 커지는데 사회가 그대로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면 그 사회 속의 그 교회가 진정한 교회인가를 되물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만일 교회가 제대로 된 교회이고 각양의 그리스도인들이 각자의 현장에서 주님의 가르침 대로 하나님의 질서 대로 살고 있는데도 아직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아 우리 사회의 모습이 그대로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앞서 가는 우를 범하지 않고 기다려야 하겠지만, 현재의 내 좁은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만은 않는다.
나는 또한 현장의 그리스도인이 없다는 것으로 교회의 교육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목회자의 역할은 목회 전문가로서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도들이 자랄 수 있도록 도우며 교회 공동체와 예배를 통해 끊임 없이 그리스도인들을 복음으로 재충전 시켜주는 일이며 이것은 타락된 창조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전투는 실전 경험을 통해 전선에서 배우는 것이기에 신교대에서 해 줄 수 있는 훈련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 많은 현장의 문제들이 교회에서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투지의 그리스도인들의 전투 경험이 신병교육 훈련의 내용에 보다 많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장의 문제들에 대해 현실적으로 다루고 이에 대해 체계적으로 훈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캠퍼스 선교 단체에서 학부 시절 뜨겁게 헌신하던 리더들이 졸업 이후에는 대형 교회의 대예배 좌석에 숨어 버리는 일도 나는 이러한 맥락에서 비롯되었다고 이해한다. 그룹 성경공부를 인도하고 영혼의 성장을 돕던 리더십이 부정과 악이 팽배한 직장에서 통전적인(wholistic) 그리스도인의 삶을 자동적으로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우리에게는 현장의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하다. 교회는 전사들을 소총으로 무장시켜 개인적으로 전선에 내보내는 무책임함을 넘어서 이들이 현장의 그리스도인들과 연결되도록 구조적으로 도우며 전선의 전력 증가를 위해 신교대에 투자하는 이상의 노력과 자금을 현장에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채플과 교목실을 두는 정도로 구색을 맞추는, 이름 뿐인 기독교 대학이 아니라 학생들이 기독교적으로 사고하는 일을 구체적으로 돕는 커리큘럼을 갖춘 진정한 기독교 대학을 세우는 일, 생명의료 윤리, 개별 대중문화 등, 사회와 문화의 문제들을 사안 별로 연구하고 결과물들을 낳아 교회 교육에 내용을 제공할 수 있는 연구 단체나 프로젝트 등에 지원하는 일 등을 예로 들 수 있겠다. 기독교라는 이름을 걸지 않더라도, 사회 속에서 기독교적 가치와 하나님의 나라 회복을 위한 사역들에 보다 적극적으로 지원할 수도 있다. 교회 내적으로는 교회 봉사의 순번제 같은 제도를 만들 수 있다. 다시 말해, 교회의 상황에 따라 헌신된 성도들 중에서 20~50%는 2-3년을 주기로 주일 학교나 성가대등 교회 봉사를 쉬게 하고, 대신 직업과 현장의 문제에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것이다. 교회 ‘운영’에 지장이 있을 거라는 우려가 있겠지만 이들이 2-3년 후에 다시 교회 섬김으로 돌아올 때는 교회 자체가 새로운 공급을 맛 볼 것이며 또한 끊임없이 현장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보냄으로써 전선은 점진적으로 강화될 것이다. 수요 예배 가지 않는 대신에, 주일 학교 봉사하지 않는 대신에 같은 시간과 노력으로 직장에서의 삶과 신앙이 부딪히는 문제, 청소년을 어떻게 기독교적으로 양육할 것인가의 문제에 매달려 기도하고, 배우고, 연구하고, 나누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목회 전문 목회자가 현장의 전문가들과 함께 팀사역으로 목회를 하는 교회들에 관한 소식을 듣는 일은 매우 고무적이다. 예배당 중심의 신앙 생활(?)이 믿음의 잣대가 되는 교회의 분위기가 바뀌지 않고는 세상은 그리스도 없음의 축복(?)과 축제를 계속 만끽할 것이다.
그러나 지역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특별한 한계 상황이 아닌 이상, 신교대가 신병 교육을 제쳐두고 전투지에 뛰어들 수는 없는 일이다. 참으로 중요한 일은 전투 부대가 세워지는 일이다. 현장의 그리스도인들이 연합해야 한다. 물론 현장에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속단하건대) 현장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은 많은 경우, 또 다시 신병 교육대의 역할만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예배당 중심의 신앙생활을 간과한다는 오해를 받더라도 전투지에 헌신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 우리가 부끄러워 하지 않는 복으므이 능력이 각 현장에서 면면히 드러나도록 세상속의 그리스도인들이 세워져야 한다. 각 현장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답이 내게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각 현장의 상황에 맞게 연합하고 답을 찾아가야 한다는 원론 외에는. 그리고 나 자신도 나의 현장의 문제에서 답을 찾는 묵묵한 노력을 하고 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나는 코스타를 이런 시각으로 본다. 지역 교회가 할 수 없는 일, 신병 교육대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일, 현장의 그리스도인들을 키우는 일, 이것을 코스타가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너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내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하나님의 창조 명령과 통하는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은 ‘제자를 삼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데까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다시 이루는 데까지, 그의 나라가 타락된 온 창조계에서 회복되는 데까지 이르는 것이다(정진호, ‘두 집 내기’).
2. 내가 보는 코스타 (미주 코스타)
최근의 통계를 볼 때, 코스타의 참석자 중 매년 70% 정도가 코스타에 처음 참석하는 사람들이다. 매년 새로운 사람들이 코스타를 접하고 간다는 면에서 코스타를 매우 효과적인 사역으로 볼 수도 있지만 반면에 한 번 온 사람들 중 70%가 다시 코스타에 오지 않는다는 얘기도 되는 셈이다. 이 통계 자료가 말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 다른 평가 자료나 의견(feedback)들을 참조하여 이것을 해석해 보면 코스타는 ‘한 번으로 만족되는 수양회’, 혹은 ‘매 년 똑 같은 수양회’ 라는 얘기로도 볼 수 있다. 한 번으로 만족되는 수양회라는 평가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에 대한 결론을 이 자체만으로는 내릴 수 없다. 당연히 코스타 수양회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묻고 그에 준하여 이 평가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코스타의 목표가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인으로 결단케 하는 것이라면 ‘한 번으로 만족되는 수양회’라는 것이 부정적 평가는 아니다. 그리스도를 두 번 영접해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코스타의 목표가 복음화된 유학생들에게 기독교 세계관과 가치관을 확립하게 하는 것이라면 약 4박5일의 수양회를 통해 기독교 세계관과 가치관이 얼마나 확립될 수 있는가를 평가해 보아야 한다. 코스타의 목표가 유학생들의 기독교적 세계관에 입각한 학문 연구와 신앙 생활을 격려할 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삶의 현장에서 선교적인 활동과 봉사의 삶을 살도록 한다는 것이라면 일주일의 수양회를 통해서 이 목표의 성취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평가해야만 한다. 사실, 위에 언급한 세 가지 모두는 코스타의 사명이자 핵심 정신(core value)이다 (미주코스타, ‘코스타란?’).
독자들 스스로 평가를 내리겠지만, 복음화의 목표를 제외하고는 한 번의 수양회를 통해서 나머지 목표들을 성취한다는 것은 턱도 없다. 일주일 내내 ‘여러분 기독교 세계관과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라고 외쳐대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감성보다는 지성, 설교보다는 강의에 촛점을 두고 교육을 위주로 하는 수양회로 완전 탈바꿈한다고 하더라도 한 번의 수양회로는 달성하기 쉽지 않은 목표이다. 나는 코스타가 복음전도 집회만으로 구성된다고 하더라도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다. 복음을 전하는 일만큼 중요한 일을 말하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복음 전도의 우선성이라는 복음주의의 기본 입장에 어느 정도 동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코스타가 복음전도 집회만을 하는 수양회라면 나는 한 번 이상 가지는 않겠다. 내가 복음을 모르는 영혼들을 섬기겠다는 결정을 하여 섬기는 이로 가지 않는 이상. 나는 수양회에 2번 이상 참석하는 30%의 사람들중에는 이렇게 섬김의 마음으로 와서 헌신하는 많은 분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섬김을 통해서 배우는 제자도는 매우 귀중한 배움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한 번 이상 오지 않는 수양회’가 된 것은 한국 교회의 신병 교육대적인 성격이 최근의 코스타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복음 전도하는 것 이외에는 별 내용이 없는, 교회에서도 들을 수 있는 복음의 진수를 더 효과적으로 그리고 강렬하게 다시 듣는 것 이외에는, 어떤 참석자들의 보다 신랄한 표현을 빌리면, ‘화끈한 영적 샤워’로 끝나 버리는, 혹은 어느 정도 현장의 문제를 담긴 하지만 한 번 수양회 참석으로도 다 소화해 낼 수 있는 내용의 수양회… 코스타의 시작부터 세워졌던 목표들은 좋지만 지금 코스타의 모습은 처음의 그 목표들과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닐까 라는 반성이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은가?
3.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하는 수양회
복음화된 대학원생 유학생들을 돕는 가장 중요한 안건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전공 속에서 혹은 전공을 통하여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 라는 안건이고 둘째는 “캠퍼스와 지역 교회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며 섬길 것일까” 라는 안건이다. 코스타의 모든 프로그램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학생들을 복음화하는 일에 병행하여 이 두 가지 실제적인 안건을 중심으로 짜여져야 한다. 예를 들어 오전은 강의 중심으로 전공과 현장의 문제들을 다루고 저녁은 설교 중심으로 복음과 좁은 의미의 제자도를 다룰 수 있다. 오후의 세미나 트랙의 경우도 ‘구도자의 트랙’, ‘제자도의 트랙’, 그리고 ‘전공과 현장의 트랙’으로 분류 상 세 단계로 나누고 각 트랙에서도 내용의 깊이에 따라 레벨화하는 등 커리큘럼을 체계화할 필요가 있다. 강사에 따라 내용이 바뀌기 보다는 ‘체계화된 내용에 따라 강사를 선정해야’ 한다. ‘신앙과 학문의 통합’이란 말이 나의 전공영역에서는 도대체 무슨 뜻인가에 대해서 학생들이 생각하도록 돕고 답을 찾도록 구체적으로 도와야 한다. 이러한 일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대학원생 사역을 이해하고 유학생들의 상황·현실에 따라 코스타 전체 프로그램 구조와 세미나의 커리큘럼을 짜기 위한 연구 계획을 세우고 이를 위한 연구팀을 구성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렇게 커리큘럼이 체계화된다고 가정하고 단순화된 예를 들어 보면, (편의상의 구분에 대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바란다.) 복음을 모른던 학생이 첫 해에는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받아 들이며, 둘째 해에는 제자로서의 삶에 대해 배우고 익히고, 셋째 해 이후부터는 자기의 전공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서 살 것인가를 목표로 코스타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복음을 받아들인 학생이라면 최소 두 번 이상 참석하여, 한 번은 제자로서의 헌신의 문제를, 그리고 두번째 해부터는 전공과 직업의 문제를 고민하고 돌아갈 수 있다. 또한 보다 헌신된 학생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전공과 현장의 문제들을 목표로 하여 동역자들을 만나고 현장의 삶을 함께 준비하는 코스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지속적으로 복음의 핵심을 들으며,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감격을 되새기면서 말이다.
두번째로, 강사로부터 학생으로 주입되는 일방통행(one-way)의 설교·강의 흐름에서 학생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상호적(interactive)인 흐름으로 바뀌어야 한다. 학부생들과 달리 대학원생들은 강의도 하고 세미나도 발표하고 그룹 토론에도 참여한다. 대학원생이라는 것은 학생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직업이다. 즉, 대학원생의 수준이 높기 때문이라기보다 이들에 맞는 형식을 찾아야 한다는 얘기이다. 이들을 학부생들처럼 일방적으로 앉혀 놓고 듣게 하는 것은 코스타에서 다뤄지는 내용과 참여자들의 질을 떨어뜨릴 수 밖에 없다. 설교를 제외하고 전체 강의를 포함한 모든 강의에서 학생들의 질문과 토의 시간을 10-30분 정도 배정해야 한다. 이런 과정 없이 관중의 열기나 웃음 소리만으로, 혹은 구매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 강의 테잎의 판매량으로 강의의 효과를 평가할 수 없다. 학생들이 그 내용을 되새길 수 있는 다른 방안이 마련되지 않은 채 쉴새 없이 쏟아붓는 것은 교육적 효과면에서 결코 바람직하다고는 할 수 없다.
더구나 현장의 문제를 다룰 때 각 현장의 문제를 어느 정도 겪고 있는 학생들의 생각과 고민은 매우 중요한 원동력이 된다. 이런 고민들이 던져질 때,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원론에서 그치지 않고 현장의 문제들, 각론에 대한 해답을 끌어낼 수 있으며 최소한 학생들로 하여금 보다 현실적인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학생 때부터 생각하고 고민하고, 나누고 함께 찾는 일을 하지 않으면 막상 현장에 나갔을 때, 그 고민이 지속되고 연합이 지속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울러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는 장이 넓어져야 한다. 다양한 현장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전공에 속한, 혹은 전공을 통한 문제들에 대한 고민과 결과물들을 발표하고 나눌 수 있는 장이 마련되어야 한다. 전공과 관련된 한 가지 구체적인 문제를 연구한 논문 혹은 포스터 발표라든가, 전공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는 팀 프로젝트라든가, 예술 작품이라든가, 문화 현상를 기독교적 시각으로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해 보는 보고서라든가, 각 전공에 따라 얼마든지 창조적인 참여가 가능하리라 본다. 기독교적 색깔이 전혀 없더라도, 학문의 논리에 충실한 결과물도 우리가 함께 나눌 수 있으리라 본다. 이런 참여를 격려하는 것이 학생들을 현장의 그리스도인으로 구체적으로 준비 시키는 전투 훈련이 아닐까.
셋째로, 보다 연구하는 코스타가 되어야 한다. “아니 학업에 지친 몸을 좀 쉬러 왔는데 기독교 모임에서까지 왠 골치 아픈 소리요” 라고 한다면 대답할 말이 없다. 그러나 “전공마다 다르겠지만, 대학원생의 삶의 가장 기본은 연구하는 자세인데 왜 무엇보다 중요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문제에 대해서는 연구하지 않는가” 라고 되묻고 싶다. 조용한 방청객으로 남아있기 보다, 밤을 새우는 토론과 나눔으로 현장의 문제를 건드리는 초기의 코스타 분위기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대학원생 모임은 자기 비판을 통한 자정 능력이 뛰어날 수 있다. 그런데 코스타에 대해서는 건설적인 비판의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이 나에게는 무척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뜨거워 할 말을 잊은 것일까? 생각 있는 사람들은 ‘이 운동은 아니다’ 라고 다 떠난 것일까? 나는 각각 자기의 전투지에서 고전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여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코스타가 전도 집회만이 아니고 또한 선교동원 운동만이 아니라면, 그러면 어떻게 유학생들의 다양한 필요를 채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다방면의 연구가 필요하다. 현재 강사와 참여자, 그리고 내용의 폭을 봤을 때 아직 지엽적이라고 평가될 수 있는 코스타가 미국 유학생이란 커다란 사역 대상을 폭 넓게 품기 위해서는, 캠퍼스선교 운동과 선교동원 운동을 넘어서는 도약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것은 수 년에 걸친 체계적인 연구와 모델링을 거치지 않고서는 기대할수 없는 일이다. 미주 내에 캠퍼스와 지역 교회의 사역을 파악하려고 막 시작되고 있는 코스타의 HOC 프로젝트는 이러한 노력의 아주 좋은 예이다. 뿐만 아니라 코스타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를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연구 위원 혹은 연구 간사와 같은 장치도 꼭 필요하리라 본다.
수련회를 평가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진행에 대한 평가도 중요하지만 내용에 대한 평가는 필수적이다. 체계적인 평가자료를 개발하여 참석자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이 자료를 토대로 향후 계획을 세워야 한다. 더불어 이 자료를 공개하여, 코스타라는 이름보다는 코스타에서 담는 내용을 중심으로 수양회 참석을 유도하고 코스타의 현재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4. 맺으며
나는 코스타를 잘 모르면서 편파적인 얘기를 썼는지도 모릅니다. 혹은 다들 아는 얘기를 장황하게 썼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동료 대학원생들과 함께 고민했던 몇 년의 시간을 통해서 주께서 우리들에게 주셨던, 삶과 신앙과 학문의 통합에 대한 외줄타기와 같은 균형에 대해 그저 스스럼 없이 나누었다고 생각합니다. 코스타를 중요하게 보는 한 사람의 대학원생으로서의 관찰과 생각을 나누었습니다. 이러한 나의 관찰과 생각들은 많은 일반화와, 때로는 기도보다 앞서는 운동성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스타가 어떤 ‘Monument’가 아니라 하나의 ‘Movement’라면, 나는 이 운동을 현재의 나의 삶에 주요한 하나님 나라의 운동으로서 받아들이기 때문에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독자들의 날카로운 비판과 가르침을 기대해 봅니다.
Jun 1, 2001 | 이달의 초점
이코스타 2001년 6/7월호
“당신은 이번 미국 코스타 집회를 통해 무엇을 기대하는가?” 이렇게 누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한다.”
“낮아지신 예수, 섬기는 그리스도인,” 작년 가을, 2001년을 위한 첫 번째 간사 모임에서 미국 코스타 간사들이 기도하면서 일구어 낸 주제이다. 당시 조국과 유학생 사회의 정황은 참된 “고지론”의 정신에 대한 오해의 소리와 일부 소수의 기독유 학생들이 알게 모르게 드러내었던 엘리트 의식을 비판하는 소리가 여기 저기서 일던 때였다. 그 때에, 감히,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우리들 유학생들을 이 시대를 위한 중보자들로 그리고 이 세대의 복음을 위한 소리로 다시 한 번 세워 달라고 기도했었다. 그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동일한 감동은, 다시 복음으로, 즉 십자가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주님께서 어떻게 낮아지시고 어떻게 이 죄악이 관영한 세상과 세대들을 섬기셨는가를 다시 한번 선포하라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가 이 세상 가운데에 그리스도의 화목케 하는 십자가로 임하셨는가를 선포하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은혜로 사는 사람들이다. 아무것도 받을 자격이 없는데 소낙비같이 부어 주시는 은혜로 사는 사람들이다. 호흡하는 순간 순간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가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이번 집회에서도 부어 주실 주님의 은혜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번 집회를 통해 덧입기를 원하는 첫 번째 은혜는 “낮아지심의 은혜”이다. 레위기 14장에는 문둥병자가 나음을 입은 그 날에 행해야 할 결례의 의식이 기록되어 있다. 문둥병자의 나음을 확인한 제사장은 살아 있는 두 마리의 정결한 새를 취한다. 한 마리는 정결하게 흐르는 물에 죽여 피를 흘리게 하여 그 피를 그릇에 담는다. 그 후에, 다른 한 마리의 산 새로 그 죽은 새의 피를 찍어 정결케 된 사람의 몸에 뿌린 후에 그 산 새는 하늘에 날려 보내게 된다. 피를 뿌리며 날아 가는 새, 창공에 흩뿌려지는 피의 궤적을 보며 그 정결케 된 자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죽은 새는 희생과 화목의 새이며, 살아서 날아가는 새는 생명과 기쁨의 새이다. 그 두 새들은 십자가에서 생명을 주시고 죽으신 화목 제물, 예수 그리스도와 그 화목의 사랑으로 인해 새 생명을 얻은 우리의 모습을 각각 상징한다. 이번 집회에서 가장 먼저 경험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십자가의 사랑’이다. 우리의 죄악을 위해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짐의 사랑이다. 우리는 거기서부터 다시 일어설 것이다. 우리의 섬김의 모습들이 그 곳에서 시작되었는가 돌아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우리의 섬김의 길을 다시 떠나게 될 것이다.
두 번째 사모할 은혜는 “연합하심의 은혜”이다. 우리는 주님이 명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됨을 경험할 것이다. 먼저 그 자리에 모인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 하나됨의 모습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거듭나게 된 하나님의 자녀들의 축제로 표현될 것이다. 그러기에 이 집회 가운데에 참가한 영혼들 중에 주님을 아직도 찾고 있는 구도자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확실하게 보여지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올해에는 특히 구도자들을 위한 순서 및 강의들이 조심스럽고 정성스럽게 준비될 것이다. 구도자들을 위해 마련된 순서들 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그리고 복음의 진수가 소개되어질 것이다. 구도자들이 생애 최대의 선물인 생명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는 그 곳에 믿는 자들만이 하나될 때 경험되는 것보다 더 큰 축제와 감사의 잔치가 열리게 될 것이다. 해마다 코스타 집회에서는 전체 참석자의 약 10% 정도의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하는 역사가 있어 왔다. 우리 안에 주어진 이 확실하고도 귀중한 기회가 우리를 가슴 벅찬 기도로 준비하게 하시길 원한다. 혹 당신이 지금 주님을 만나기 원하는 구도자라면 이번 집회에서 그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주님을 이미 만난 사람이라면 이 생명의 복음을 나누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영적 촉각을 세우고 민감하게 주위를 살피게 될 것이며 그리고 다가가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번 집회부터 진정한 “Contagious Christian”이 될 것이다. 그래서 세상 가운데에 나갔을 때에 이 복음으로 세상을 하나님의 공동체로 만들어 나가는 사람이 되는 준비를 하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로 일하게 되는 준비를 하게 될 것이다. 더욱 강력한 공동체를 이루어 갈 것이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우리는 이 집회 가운데에서 먼저 하나됨의 경험을 해야 한다. 그 경험을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자리들이 바로 ‘조별 모임’과 ‘전공별·관심별 모임’ 이다. 조별 모임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구체적으로 나누기를 원한다. 서로의 아픔과 기쁨을 나누며 한 몸을 이루어 나가기를 원한다. 서로의 소명과 비전을 바라보며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임하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한편, 전공별·관심별 모임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재능과 은사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드릴 수 있을 것이며 학문과 일터의 현장에서 우리는 어떠한 소명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는가를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기도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세 번째로 기대하는 은혜는 하나님의 “보내심의 은혜”이다. 세상 속으로 우리를 보내시는 은혜이다. 우리는 세상 속에 (in the world)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not of the world) 오히려 세상 속으로 보내심을 받은 (into the world) 사람들임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을 향한 우리의 소명을 확인하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게 될 것이다. 그 부르심 속에서 우리 각자는 나에게 주어지는 유일하고 특별한 경험들을 하게 될 것이다. 이 부르심들은 각자에게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열방을 향해 복음을 들고 타문화권으로 나갈 전임 선교사로서, 학문 세계의 정글 속에서 주님의 주 되심을 선포할 기독학자로서, 일터 속에서의 전문가로서 하나님의 성실과 공의를 선포하며 살아갈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캠퍼스에서 말씀과 주님의 사랑을 가지고 사람들을 주님의 제자 삼는 캠퍼스 사역자로서, 그리고 가정과 자녀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영광스럽게 이루어나갈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내와 혹은 남편으로서, 주님께서 주시는 소명으로 각자의 삶에 다시 보내어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은혜는 우리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의 모든 인격적인 부분을 드려 순종할 때에 부어질 은혜이다. 이를 위해서는 수 많은 간증들과 세미나들과 강해 속에서 믿음의 선배들이 이미 주님으로부터 받은 보내심의 살아있는 증거들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삶가운데에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경험들에 강한 도전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되지는 않기를 바란다. 나는 나의 삶의 현장으로 보내실 주님의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구체적으로 듣게 되거나 주님의 “나의 삶”을 향한 뜻을 발견하게 되기를 원한다.
네 번째로 기대하는 은혜는 “치유의 은혜”이다. 이 집회에 임하실 하나님 앞으로 우리는 상처투성이들로 다가가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해야 하는 사람들로 이 집회에 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많은 영역들이 훼파된 것을 안타까와 하며 그래서 많은 날들을 절망과 좌절 속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다. 이 상처와 절망들이 주님의 보혈의 공로로 치유 받기 전까지 우리는 내면의 진정한 자유함과 기쁨을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치유 받아야 한다. 비밀스러운 치유의 은혜를 경험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치유의 은혜가 임할 현장에 쓰임 받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며 준비하고 있다. 그들은 집회 곳곳에서 우리의 갈등과 상처의 소리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듣고 우리를 위해 기도할 상담자들이다. 우리는 우리의 은밀한 문제들도 내려 놓고 함께 주님의 도우심을 구할 것이다. 주님께서 이 상담자들을 쓰실 것이고 그들은 우리의 아픔에 같이 아파할 것이며 우리의 상처에 주님의 치유가 임할 수 있도록 기도와 지혜로 도울 것이다. 이 치유의 은혜는 찬양과 기도의 밤을 통해 더욱 확실하게 확인 되어질 것이다. 이번 집회에서 아름다운 주님, 낮아지신 주님을 마음껏 찬양하고 기도하기를 원한다. 찬양만을 위해 그리고 기도만을 위해 한 번 씩의 특별 순서가 준비되어 있다. 아름답고 경건하며 힘 있는 찬양을 통해 치유하시는 주님의 아름다우신 이름을 높이게 될 것이며 간절한 기도를 통해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만지시고 위로하시는 주님과의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될 것이다.
코스타는 하나님께서 우리 유학생들에게 은혜를 주시려고 친히 부르시는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마음껏 누리자! 집회를 통해 부어 주실 하나님의 은혜를 큰 마음으로 기대하자. 이제는 강사님들의 말씀을 듣고 도전 받기만 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자. 말씀을 증거하시는 분들이 증거하시는 주님, 그들의 삶 속에서 신실하게 역사하신 주님의 은혜를 나도 또한 같이 증거하고 이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같이 이야기하자. 그리고 이제는 어떻게 우리가 세상 속에서 주님을 위해, 복음을 위해 고난받을 것인가를 고민해 보자. 하나님께서 우리와 더불어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 속에서 이루시기 원하는 것처럼 너와 나는 이제 더불어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를 이 세상 속에 함께 이루어 가면서 고난의 흔적을 우리의 삶에 남기며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 속에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자!
Jun 1, 2001 | 이달의 초점
이코스타 2001년 6/7월호
“‘낮아지신 예수, 섬기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번 코스타 주제 너무 좋아요”, “이번 코스타 주제가는 모르는 노래인데…”, “어제 확인해 보니까 드디어 내 이름이 등록자 명단에 올랐어”, “이 번엔 아무개님이 강사님으로 오신대.” 코스타 2001을 보름 남짓 앞 두고 심심치 않게 들리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대와 설레임으로 코스타를 기다린다고 해석해도 무방할 듯 싶다. 이번에 코스타에 처음 참가하는 새내기 코스탄이나, 해 마다 은혜의 잔치를 찾아 나선 선배 코스탄이나, 섬기기로 작정하고 먼 길을 기쁨으로 달려오신 강사님들이나 모두 코스타를 기다리는 마음이야 한 가지이겠지만, 코스타에서 가장 중요한 순서는 저녁 집회도, 세미나도 아닌 조별 모임이라며 성령님이 함께 하셔서 사랑을 나누는 조별 모임을 섬기는 조장님들이야 말로 코스타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중에 하나라고 언젠가 한 강사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그 누구보다 코스타를 손 꼽아 기다리는 사람은 바로 조장님들이 아닌가 싶다. 더더욱이 이번 코스타 주제와 관련하여 ‘섬기는 그리스도인’역에 캐스팅된 코스타의 주연 배우들이 조장님들이라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표현일까?
작년에 코스타에 처음으로 참가해서 받은 은혜를 올해 또 사모하여 참가하는 것에 더하여 조장으로 헌신하신 두 분의 형제님들을 만나 보았다. 코스타 2000이 각각의 형제들에게 다른 모습의 은혜의 자리가 되었지만 일 년을 지내면서 조장으로 헌신하기까지의 간증에는 공통 분모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결론 짓기 전에 두 형제의 이야기를 각각 들어 보기로 하자.
A주 대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인 유학생 최 아무개 군은 아버님이 목사님이신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모태 신앙을 가진 형제이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영접한 것은 2000년 겨 울방학 때 친구 따라 참석한 교회 수련회를 통해서 이다. ‘엄청난 은혜’를 받았다고 표현하는 최 군은 ‘기도로 준비된 모임에서 얼마나 큰 은혜를 받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에 교회 형, 누나들을 통해 알게 된 코스타에 참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많은 분들이 기도로 준비하시고 섬기시고 헌신하시는데 은혜가 충만한 시간, 성령이 충만한 모임이라는 확신이 있었어요”라고 그 때를 회상했다. 하나님의 은혜의 참 맛을 알았던 최 군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은 ‘겸손하라’는 말씀이었단다. “… 새벽 기도회를 통해 중풍병자인 친구를 위해 힘을 합친 4명의 친구들… 믿음으로 병 고침을 얻고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지는 모습을 보면서 항상 제가 드러나기를 원하는 제가 얼마나 교만한지를 깨닫고 회개를 했어요.” 그 이후로 ‘겸손한 자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 제목으로 지난 1년 간을 기도해 오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기도할 것’이라는 최 군은 자신의 교만함을 깨닫게 해 주시고 겸손해지고 싶다고 기도할 수 있게 해 주신 주님께 감사한다며, 또한 지난 코스타를 통해 함께 예배드리고 찬양하던 많은 형제 자매들의 모습에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사는 많은 동역자의 모습을 보았고 이를 통해 많은 힘과 용기를 얻었다고 했다. 받아도, 받아도 계속 받고 싶은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사모하는 최 군이 올해 다시 코스타에 참석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 아닐까?
그러나 이번에는 ‘조장으로 코스타를 다시 찾는 발걸음’에 이유를 물었다. “음…. 정말로 많은 사랑을 받으니까 나눠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섬김을 받기만 하는 게 아니라 나도 섬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조장으로 섬기는 것은 코스타 기간 일 주일 만이 아니라 벌써 부터 시작했다고 생각해요. 조원들을 위해 많이 기도하고 싶고 코스타 기간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에 눈물을 흘릴 정도로 기도하고 싶어요. 그리고 제가 조원들을 섬길 때 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히 섬기길 원해요.” 실명을 올리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부탁한 최 군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번 코스타에서 무엇을 기대하느냐는 질문에 마치 이번 코스타의 주제가 최 군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말을 했다. “섬기고 싶다는 마음은 있는데… 실천하는 것이 힘들어요. 섬김에 대해 많이 배우고 싶어요. 깨달음을 주시리라 믿쑵~니다.”
B주 대학교 대학원 2학년에 재학중인 이 아무개 군의 경우는 작년 코스타 이전의 본인 스스로를 ‘나일론 신자’라고 표현하며 모태 신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왜 가는지도 몰랐고 부모님 따라 왔다 갔다 이유 없이 교회를 다녔다’고 회고한다. 당시 교회의 선배 형, 누나들을 통해 코스타를 가 보라는 권유로 미리 신청은 했지만 집회 전에 여러 가지 개인적인 어려운 일들을 겪게 되면서 하나님께 섭섭하고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면서 코스타를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가기 전 날 하나님께서 깨워 주시면 가겠다고 기도하고 잠 자리에 들었고, 역시나 이 군을 깨워 주신 하나님 때문에 ‘사람들 따라 가기는 가지만 그 동안 일상적으로 따라 갔었던 수련회를 참석하듯 얻을 게 뭐가 있겠나’라는 반항심에 ‘가서 무엇을 구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을 것이고, 만약 이번에도 느낌이 없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겠다’라는 다짐(?)을 하고 참석을 했다고 하니 협박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다짐’ 덕분(?)인지 첫날 찬양 시간에는 많은 형제 자매들이 손을 들고 주님을 찬양하는 모습에 ‘왜 손을 들고 찬양을 하나…. 그래 어쨌든 난 5일 뒤엔 집에 간다’라는 방관자적 입장으로 일관했고 이어 새벽 기도도 나가지 않을 작정으로 있었던 이 군에게 하나님께서는 이 군이 속한 조의 조장을 룸메이트로 붙여 주셔서 새벽 기도의 자리로, 예배의 자리로, 세미나의 자리로 이 군을 이끄셨고, 둘째 날 세미나 때 ‘복음이란 무엇인가’ 라는 세미나를 통해 마치 이 군 자신의 상황을 정확하게 아시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셨으며, 마침내 저녁 집회를 통해 영접의 자리로 부르시는 은혜를 주셨다. “난생 처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 다시 태어났죠” 라고 말하는 이 군에게 집회의 남은 날들은 은혜의 잔치였고 코스타가 끝날 때에는 많은 아쉬움과 내년에도 꼭 와야겠다는 생각을 남겨 주었다고 한다.
코스타를 통해 예수님을 영접한 후 지난 1년 간 어떻게 그 은혜를 붙잡고 살아 왔는 지가 궁금해졌다. “솔직히 처음 3-4개월 동안은 하나님께 계속 나아가며 잘 살아 왔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닥치는 어려움들 가운데, 그리고 이 전에 내 모습을 아는 친구들이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두려움에, 난 해 낼 수 없다는 생각에 다시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적도 많이 있었고 지금도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어요. 그러나 이전에 비해 가장 궁극적으로 달라진 것은, 내가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사실로, 예전 같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했을 제가 하나님께 ‘그래도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까’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너무나 솔직한 나눔을 들으면서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 하던 (계12:10)’ 쫓겨난 사탄과의 영적 싸움 가운데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9)’는 말씀처럼 이 군을 붙잡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코 끝이 찡해왔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이 군 자신의 이러한 경험을 나누고, 조원들의 영적으로 힘든 상황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면서 ‘헤아리는 마음'(Compassion)을 가지고 도와 주면, 작년에 이 군을 도와 주었던 조장이 그랬듯이, 조원들의 영적인 어려움을 같이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나누고 싶어서 조장으로 섬기기를 자원했다고 한다. “또 언젠가는 리더로서 섬기게 될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훈련을 받아야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 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못 할 것 같기도 하고요. 또 책임감이 있어서 더 많이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볼 수 있을 것 같고…. 그런데 요즘에도 사탄의 시험이 많이 있습니다.” 아, 이래서 우리가 만날 조장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너무도 귀한 두 형제 분의 말씀을 들으면서 나름 대로 찾아 본 공통 분모는 ‘사랑과 은혜를 받고서 생겨나는 섬김에 대한 소망’이었다. “저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 보았으면 그리하라”(벧전 2:3),”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3:16). 개인적인 주님과의 만남이 없이, 그분께서 무조건적으로 부어 주시는 은혜를 맛 보지 않고서 어떻게 사랑의 나눔과 섬김이 있을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이 두 분의 형제님들을 비롯한 모든 조장님들이 이번 코스타에서 조원들을 잘 섬기는데 앞서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폭포수와 같이 넘치게 받으시기를 기도한다. 베드로 전서 4장 11절에 나와 있는 다음과 같은 말씀처럼.
“만일 …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May 1, 2001 | 이달의 초점
이코스타 2001년 5월호
삶을 변화시키는 그룹 성경공부
1. 여는 말
최상의 기쁨과 보람 —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그것을 약속하고 있다. 누군가 구체적인 사례를 원한다면, 주저하지 않고 그룹 성경 공부(GBS)를 들고 싶다. 영광스런 말씀 앞에 ‘겸손하게 무릎 꿇는 이’마다 그 영혼을 채우는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기 때문이다. 그 말씀 앞에 ‘함께’ 설 때, 참 교제의 순수함과 기쁨을 맛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다 함께 달려 갈 푯대도 그 곳에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가 GBS를 인도하기 시작하게 된 때는 1981년 봄이었다. 지금도 그 일을 하고 있으니까 만 20년이 되는 셈이다. 그 동안 적지 않은 시행 착오와 실수를 겪으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우리의 부족함을 넘치게 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꾸준한 열매와 풍성함을 체험하고 있다. 그 동안 우리가 경험하고 깨달은 것들로 형제자매들이 더 많은 열매와 풍성함을 누리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2. 바람직한 그룹 성경공부는 어떤 것인가?
MIT의 Gate Bible Study가 첫 모임을 가지던 저녁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성경 공부 인도를 부탁 받고 밤 잠을 설쳐 가며 열심히 준비했다. 깨알 같이 적혀진 내용을 나누는데, 인도하는 방법을 잘 모르니 설교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자그마치 90여 분 계속된 설교로 멤버들의 온 몸을 뒤틀게 만들었던 사건은 지금도 악몽 같이 생생하다. ‘돌아가며 말하기’의 중요성을 절감한 나머지, 그 뒤부터 문답식 교재를 채택하게 된다. 그러나 이 번에는 답 맞추기 contest 같은 분위기를 자아 낸다. 경건 서적, 주석으로 보강된 지식을 견주고 뽐내는 자리였다. 때로는 사회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거의 방담 수준의 공부를 한 적도 있었다. 한 때지만, 멤버들의 불화와 갈등으로 긴장되고 냉냉했던 적도 있었다. 이런 와 중에서 자리를 뜨신 분은 성령님이셨으며, 옆으로 밀린 것은 성경 본문이었고, 뒷 전으로 처진 것은 속을 턴 나눔과 치유였다.
그 뒤에, 여러 다른 GBS들을 보면서 우리의 실수와 착오가 우리 만의 전유물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다. 아니, 삶을 파고 드는 수준의 GBS가 너무나 소수인 것을 발견하였다. 약점 많던 Gate Bible Study가 오히려 돋 보일 정도였다. 그러면 GBS는 고학력자들의 지적 유희를 위한 모임인가? 아니면, 힘 깨나 있는 사람들이 옷 로비나 하는 고상한 사교장인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GBS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우리 모두의 질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바람직한 GBS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GBS가 바람직한 GBS인지’ 분명하고 확실히 해야 겠다. 앞에서 말한 것을 바탕으로 세 가지를 열거한다.
첫째, 바람직한 GBS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함께 붙들고 그 분의 말씀에 조건 없이 순종하려는 자세가 확실한 모임이다. 소위 영성에 관한 것이다. 여러분이 어떤 GBS에 갔더니 조용한 가운데도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것을 느낀 적이 있다면, 그 GBS가 바로 이런 모임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둘째는, 바람직한 GBS는 성경 본문이 말하는 것에 대해 성실하게 귀 기울이는 모임이다. 끈기와 집념을 가지고 본문을 파고 드는 모임이다. ‘성경에 관한 의견’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것’을 알고자 하는 것을 뜻한다. 물론 문맥 안에서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아마 책 별 성경 공부가 주제 별 성경 공부보다 유리한 것이 이런 면일 것이다. 반대 편 방향은, 본문과는 별로 관계 없는(신앙적으로는 문제가 없더라도) 부분을 다루거나, 심하면 세상적인 이야기로 일관하는 경우가 된다.
셋째, 바람직한 GBS는 인도자가 설교하기 보다, 모두가 마음을 열고 자신을 드러 낼 수 있는 모임이다. 본문의 관찰과 해석에 관해서 뿐 아니라, 삶에의 적용에 관해서 너도 나도 편하게 참여하는 모임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가르치고 배우며 사역하는 모임이다. 전혀 엉뚱한 질문이나 의견도 마음 놓고 내어 놓을 수 있고, 이성을 보고 흑심을 품었던 실수도 솔직히 드러낼 수 있는 모임이다. 이런 모임에서 우리는 진정한 코이노니아와 영적인 치유를 체험하게된다.
3. 바람직한 그룹 성경공부는 어떻게 이룰 것인가?
위의 세 가지를 갖춘 바람직한 GBS을 이루기 위해서는 조원들 모두의 합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일차적인 책임은 지도자에게 있게 된다. 왜냐면 조원의 합심과 노력마저도 지도자의 리더십에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지도자에게 두 가지 면이 요구되는데, 첫째는 내적인 자세이고 둘째는 기술적인 준비이다. 각각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내면적인 자세
바람직한 GBS를 이루고 싶어할 때, 흔히들 기술적인 면에 더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참으로 중요한 것은 내적인 자세라고 생각한다.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내적인 자세는, 이른바 영적 지도력(spiritual leadership)에 관한 많은 책들에서 취급된다. 여기서는 ‘GBS 인도자로서’ 중요한 세 가지를 들겠다.
첫째는 인도자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분 앞에 정직하게 서고자 하는 자세이다. 직장이나 가정에서 제 멋대로 살다가, 자동차의 기어를 바꾸듯이 다른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이 인도자의 위치다. 하나님과 일 주일을 어떻게 보냈는 지가 속 사람을 결정하고, 속 사람의 강함이 메시지의 무게를 결정한다. 평소의 QT 없는 GBS 인도는 만용에 가깝다. 그 주의 공부할 내용을 미리 실천하고, GBS에 와서 체험담을 나눈다면 얼마나 생생한 공부가 되겠는가?
둘째는 ‘섬기는 leadership’에 충실한 자세다. 주위에서 듣기에는 흔하지만 보기에는 힘든 것이 ‘섬김의 자세’다. 그러나 섬김 없는 영적인 영향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섬김은 기도로, 시간, 노력, 물질로 나타난다. 때로는 자존심의 포기로 나타난다. 예컨대, 한 주 한 번의 중보 기도 없이 조원들이 성장하기를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중보 기도 하려면 그들의 필요를 알아야 하는데, 당연히 전화하고 만나는 시간과 노력이 요구된다. 사랑을 말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조원에게 물질을 아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도자의 섬김이 있을 때 GBS는 참된 영성을 갖추게 된다.
셋째는 자신의 약함을 숨기지 않는 자세다. 리더에 대한 허상을 버리고 조원들이 예수님만 바라볼 수 있도록 배려하는 정직함과 순결함의 발로다. 그래서 자존심의 포기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 리더가 열지(open) 않으면 조원들도 열기 힘들다. 주인이 윗도리를 벗어야 손님들이 편하게 벗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리더가 이 세 가지 자세를 가질 때, 그 자세는 조원들에게 전파되어 GBS의 성격과 분위기를 결정하고, GBS의 주된 활동 (성경 공부, 예배, 교제, 전도)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다고 믿는다. 영광의 보좌 앞에 다 함께 둘러 앉아 가식 없이 주님을 즐기고 나누는 것이 가능해진다.
기술적인 준비
바람직한 GBS를 이루기 위해서, 내면적인 자세와 함께 적절한 기술적 준비가 필요하다. 기술적인 준비는 대체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성경 본문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능력’이고, 또 하나는 그것을 ‘질문으로 바꾸어 대화로 이끄는 능력’이다. GBS의 깊이가 인도자의 본문 이해 수준에 달린 것을 고려하면 전자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본문을 잘 이해하고 적용하더라도, 후자가 없으면 일방적인 설교로 끝나기 십상이다. 이 두 가지를 각각 어떻게 갖출 수 있는지 간단히 살펴보자.
첫째, 본문의 이해는 그 문맥 안에서 저자가 제안하는 주제(main ideas)를 찾아서 그 의미를 분명히 하면 된다. 이 간단한 것이 그렇게 힘든 까닭은 무엇일까? 본문이 심오해서 힘든 것도 있지만, 그 보다 번역(특히 개역 성경)이 난해하고 독해력이 빈약해서 힘든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이 그간의 관찰과 경험이다. 현대어로 씌어진 번역을 택하기 바라고, 영어가 편하면 NIV 등을 권하고 싶다. 독해력은 주어진 본문 전체를 의미 있는 단락으로 나누어 요약하고, 각 단락의 주제들(main ideas)을 찾아서 그 의미를 분명히 하여 메시지를 붙잡는 능력이다. 지면상 자세한 방법을 소개하기보다는, M.J. Adler와 C.V. Doren의 ‘How to Read a Book’을 추천한다. 본문이 이해되면, 먼저 주제들(main ideas)을 중심으로 적용한다. 자신을 본문의 거울에 비추어 보고, 잘못하는 것은 회개와 함께 원인을 분석하고, 순종의 결단과 함께 실천의 방법을 찾고 기도로 구한다.
둘째로, 본문을 이해하고 적용한 것을 토대로 질문을 준비한다. 잘 준비된 질문은 조원들을 본문 앞에 서게 하고, 스스로 이해하고 적용하게 돕는다. 좋은 질문은 활발한 대화를 가져온다. 초점이 잘 맞춰진 대화는 다양하고 균형 잡힌 시각을 선사할 뿐 아니라, 조원들의 체험을 모아서 각자가 공유하게 만든다.
어떻게 이런 질문을 만드는가? 간단히 말하면, 인도자 자신이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들을 다듬어서 만든다. 즉, 주제를 이해하도록 유도하는 질문과 적용으로 유도하는 질문을 만들면 된다. 이미 있는 교재를 선택해서, 그 그룹의 상황에 맞도록 수정하여 활용하는 방법도 좋을 것이다. 이 경우 교재를 선별하는 안목이 필요한데, 그 안목은 질문 만드는 방법을 이해할 때 얻어진다. 교재를 제대로 수정하는 것도 질문 만드는 방법을 알 때 가능하다. 질문 만드는 방법이 잘 소개된 소책자로서 IVP에서 발간된 ‘효과적인 성경 공부’와 ‘Leading Bible Discussions’를 권한다.
대화를 이끌 때, 한 조원의 대답에 다른 조원의 의견을 물으면서, 조원들 사이의 대화를 활성화시킨다. 인도자는 교통을 정리하는 중재자(moderator)가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조원의 대답이 좀 부족하다 싶어도, 좋은 면을 찾아주는 자세를 가질 때, 조원들도 본 받게 되고 서로가 편하게 자기 의견을 내놓게 된다.
4. 맺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어떤 것이 바람직한 GBS인지, 그리고 어떻게 그것을 이루는지 살펴 봤다. 지면의 제약도 있지만, 우리가 직접 경험하며 그 열매가 뚜렷했던 것 위주로 정리하였다. 바람직한 GBS를 이루는 내면적인 자세와 기술적인 준비는 인도자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인도자의 일차적인 책임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인도자가 지칠 때, 힘이 되어주는 것은 헌신된 조원들이다. 더구나 조원들이 인도자와 함께 내적인 자세를 갖추고 기술적인 면까지 이해할 때, 그 GBS에 끼치는 영향은 자명하다. 바람직한 GBS를 이루는 데 있어 조원들이 기여할 몫이다. 소위 함께 공유하는 지도력(shared leadership)이 이런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GBS 인도자로서 누린 영적 축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그 중에 몇 가지만 소개한다. 인도자의 내면적인 자세 — 하나님과 사람을 진실 되게 섬기는 자세 –는 인도자가 아니면 필요 없는 자세인가? 물론 아니다. 어차피 그렇게 살아야할 것이다. 인도자인 만큼 더 마음을 가다듬고 살아온 것, 놀라운 축복이다. 또, GBS를 통해서 사람들이 변화되는 것, 우리에게는 보상이며 기쁨이었다. 변화될 것 같지 않던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하는 것, 최상의 특권이었다. 오늘도 인도자로 수고하는 손길들을 위로하시고 축복하셔서 사람을 변화시키는 모임들이 곳곳에 생겨나기를 기도한다.
May 1, 2001 | 이달의 초점
이코스타 2001년 5월호
답달기 성경 공부는 이제 그만
– 균형 잡힌 성경 공부 모임을 찾아서 –
요즘 우리는 (아마도 40대 이하의)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이 “해야 할” 필수적인 요건으로 흔히 성경 공부와 QT를 꼽는다. 사실 이 두 가지는 “해야 할”(doing) 어떤 요소가 아니라 “되어져야 할”(being) 요소임에 틀림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경 공부나 QT를 믿음이 성숙한 사람들이 반드시 “해야 만” 하는 어떤 필수 사항으로 꼽곤 한다. 이같은 우리의 인식은 늘 강조하는 대로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깊이 배어 있는 ‘업적 중심’의 신앙이 차지하고 있는 영향력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 듯 하다. “이번 주도 나는 성경 공부를 갔다” “QT를 오늘도 어김 없이 했다”는 표현이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오늘도 어디엔가 “가서” 무엇을 “해야만” 만족할 수 있는 업적 중심의 신앙이 잘 드러나는 본보기라 할 수 있다.
1970년대 들어 각종 선교 단체, 대학부, 청년부, 제자 훈련팀을 통해서 심령 대부흥회와 철야 기도회에 익숙해져 있던 한국 교회 성도들에게 서서히 새로운 영적 방향의 흐름을 인도해 나갔던 성경공부 모임. 이제 30여 년이 지난 현재, 부흥회와 기도회에서 성경 공부와 제자 훈련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감으로써 한국 기독교인들의 믿음의 성숙과 공동체 안에서의 나눔, 그리고 공유된 리더십의 필요성을 잔잔히 일깨웠던 성경 공부 모임과 교재들의 현 모습을 지켜보기로 하자.
먼저 우리는 CCC의 ‘십 단계 성경공부’나 네비게이토 선교회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 또 ‘그리스도인의 생활 연구’ 등, 선교 단체에서 발행한 성경 공부 시리즈가 한국 교회에 끼쳤던 신선한 영향력을 기억할 수 있다. 교단에서 발행하는 구역 예배나 속회 등을 위한 – 주일학교 공과교육의 연장선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 ‘공과’ 수준의 성경 공부 교재에서, 이제는 치밀하고 섬세하게 단계 별로 개인의 영적 성숙도를 점검해 나가면서 또 꼼꼼한 말씀 암송을 겸비한 짜임새 있는 교재들이 등장했을 때 젊은 지성인들은 놀라운 속도로 반응했다. 이제는 어느 덧 중년이 되어 버린 당시 젊은 대학 청년들은 어렴풋한 기억 속에 그와 같은 교재들로 주님을 만나고 복음의 진리를 깨달아 갔던 추억을 되살릴 수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기존의 교재들 대부분이 ‘질문하고 성경에서 답 찾아 달기’ (Fill in the blank)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여 안타깝게도 성경 공부 모임에 참여한 개인의 구체적인 삶의 변화를 이끌어 내지 못하고 머리만 커진 교인을 만들어 냈던 아쉬움이 있었다. 반면에 80년대 들어 제자 훈련이 물꼬를 트기 시작하고 귀납법적 성경 연구가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하면서 성경 공부 교재에 새로운 전환이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할 수 있다. 특별히 IVP에서 간행되었던 ‘말씀과 삶 성경공부 시리즈’ ‘IVP 기초 성경 공부 시리즈’ 등의 교재 등이 80년대 후반 이래로 청년 대학부와 캠퍼스 모임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기존의 계단식 교육 과정을 띤 시리즈 성경 공부 교재가 단계 별로 체계적으로 빈틈 없이 필요한 요소들을 가르칠 수 있었음에도 ‘답 달기’의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이러한 성경 공부 교재들은 그러한 단점들을 보완하면서도 성경 연구의 귀납법적 접근을 통해 개인적인 적용을 요구하고 나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역시 IVP 성경공부 교재의 경우 ‘지성 사회의 복음화’라는 단체의 모토에 맞게 상대적으로 높은 문제의 난이도로 인하여 지나친 지적 접근을 꺼리는 많은 층에게 거부감을 심어준 것도 사실이다. 한국 교회의 일부 중장년층 교인들은 지금도 성경 공부 하면, 넥타이 맨 목사님이 앞에 서서 공과 공부 교재에 딸린 빈 칸에 답을 메꾸어 주시는 모습을 상상한다. 이들에게는 아직도 예닐곱 둘러 앉아 마음 속 깊은 고민을 나누며 정답도 보이지 않는 질문에 대해 이런 저런 논리적이고 학구적인 방법으로 성경책을 뒤지며 답을 찾는 성경 공부는 부담으로 느껴진다.
이렇게 균형 잡힌 성경 공부의 어려움을 인식하면서 최근에는 한국 교회에도 미국에서 시작된 ‘세렌디피티(Serendipity) 성경 공부’라든지 ‘윌로우 크릭(Willow Creek) 성경 공부 시리즈’ 혹은 ‘프리셉트(Precept) 귀납적 성경 연구 시리즈’등이 90년대 들어 소개되면서 성경 공부 교재의 다양화를 가져 왔다. 이러한 대안적(alternative) 교재들이 적용 중심의 귀납적 성경 연구를 크게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경 공부를 통해 단계 별로 성숙된 그리스도인이 양육되어야 하는 사명을 되돌아 볼 때 우리에겐 여전한 걱정 거리가 남는다. 어떤 교재들은 지나친 나눔(sharing) 위주의 진행으로 우리가 정말로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나누면서 성숙해 가고 있는 건지, 아니면 오늘도 조원들과의 깊은 나눔을 – 나쁘게 말하면 정처 없이 흘러만 가는 돛단배같은 성경 공부를 – 통해 한 주일 동안 막혔던 한을 풀어주는 도구가 되고 있지는 않은지 의심이 들게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균형 잡인 소그룹 성경 공부와 교과 과정을 세워야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무엇이 될 것인가? 결코 쉽게 답변할 수 없는 질문이지만, 우리는 먼저 성경 공부의 목적은 그리스도인 혹은 비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신자의 삶 속에 합당한 단계로까지 성숙해 나가며 열매를 맺는 이들을 보기 위한 것임을 확인해야 하겠다. 성경 공부 모임에는 기본적으로 공부(study)가 될 수 밖에 없는 요소가 존재하지만, 이와 아울러 함께 자리한 이들과의 깊은 나눔과 교제를 통해 따뜻한 믿음의 공동체를 만들어 나감으로써 천국의 작은 대리점(branch)을 맛보게 하는 다른 요소가 함께 자리 잡고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가 처한 각자의 공동체 속에서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살아서 숨 쉬며 삶을 찔러 쪼개기까지 하는 능력이 있음을 함께 경험하고 맛 보아야 할 것이다. 공허한 답 달기는 이제 그만 두자. 주제 없는 만담 같기만 한 나눔 시간도 이제는 접어 보자.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찔러 쪼개려고 칼을 갈며 기다리고 있기에.
May 1, 2001 | 이달의 초점
이코스타 2001년 5월호
유학온 지 5개월 된 박정은양, 오늘 룸메이트로부터 사소한 일이었지만 섭섭한 소리를 듣고 분을 삭이지 못하다가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수연 언니를 찾아갔다. “수연 언니, 글쎄 오늘 룸메이트가요 ….” 감정이 섞였는지 전후 과정 설명에 과장이 섞이더니 룸메이트의 험담이 더해진다. 사건의 전후 사정을 따져서 잘잘못을 가려주기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고 단지 위로의 말, 이해와 수긍의 반응을 얻고자 찾아 갔던 것이다. 그러나 믿었던 수연 언니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정은아, 전후 사정을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룸메이트 없는데 그렇게 얘기하면 안 되지, 내가 듣기엔 룸메이트가 정은이한테 평소에 좀 섭섭했던 점이 있었던 것 같은데?”
정은양은 유학와서짧은 기간이지만 매주 성경공부를 통해 말씀을 배우고 삶을 나눠왔기에 무척이나 친했다고 생각했던 수연언니의 예기치 못한 반응에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정은이 지난주에 성경공부하면서 ‘평소 매일매일 삶에서 죄짓는 것에 대해 잘 못느끼겠다’고 했지? 그래서 앞으로 죄에 민감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잖아. 하나님께서 이번일을 통해 정은이가 그동안 룸메이트한테 좀 섭섭하게 했거나 잘못한거 되돌아 보라고 하시는건지도 모르겠네.”
혹떼러 왔다가 혹붙이는 기분이라고 표현을 해야하나? 정은양은 잠시 멍한 기분이 들었다. ‘지난주 성경공부? 맞아.. 내가 그렇게 말했던 것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게 이일이랑 무슨 상관이 있지? 그건 성경공부고 이건 그냥 내 일상 생활인데 그렇게 연결을 시키다니…’
교회를 다닌지 11년, 그러나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의 깊이가 지극히 얕았던 정은양은 유학와서 우연히 한국에서 같은 교회를 다녔다는 수연언니를 알게되었고 성경공부를 함께하자는 제의에 썩 내키지는 않지만 호기심으로 첫발을 내딛었다. 그후 말씀을 배우는 재미와 힘든 유학생활을 나누는 즐거움에 계속 성경공부를 나가게 되었고 ‘배운 말씀의 삶으로의 적용’에 대한 지속적인 도전을 받으면서 수연언니와 다른 조원들의 도움으로 결국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되었고 말씀을 깨닫는것이, 기도의 응답을 받는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이이야기는 1997년 가을 미시간 앤아버에서 생겼던 토요성경공부(이하 SBS:Saturday Bible Study)의 일원었던 박정은양의 예화이다. SBS는 개인적으로 적합한 성경공부 모임을 찾을 수가 없어서 제대로 성경공부를 하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유학 생활을 유지해 나갈 때 영적으로 많은 갈급함이 있었던, 그래서 이런 영적 상태를 채워줄 수 있는 성경공부를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해오던 몇몇 유학생들의 기도의 응답으로 생겨난 모임이다. 우연히 유학오기전 한국에서 같은 교회에 다니던 몇몇 학생들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그냥 사사로이 교제하던 중 우연히 다들 영적으로 힘든 상태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어서 마음을 모아 성경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6명이 모여서 인도자 없이 서로의 묵상을 나누며 진행되었으나 차츰 더 많은 사람이 모이고, 또 처음 같이 시작했던 연장자들이 졸업 혹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가면서 자연스럽게 인도자의 역할을 하게된 김수연. 김요섭 부부(현재 북방 A국 선교사)를 만나보았다. 앞서 언급한 박정은 양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조원들이 SBS를 통해 예수님을 영접했거나, 하나님과의 만남을 개인적 차원으로 발전시켰으며 동시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러한 열매들이 맺어질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원인중 하나가 김 선교사 부부의 사랑의 섬김과 헌신이라는 것에는 거의 대부분의 조원들이 동의하는데 대해, 정작 본인들은 그들이 성경공부를 인도한 것이 아니었다고 하면서, 한국에 있을 때 교회에서 리더를 한 경험이 있었고, 또 부부라는 특별한 상황이 있었기에 싱글로 와 있는 사람들을 조금이나마 섬길 수 있는 여유 혹은 기회가 주어졌던 것 같다며 인도자가 아닌 도우미로서 인터뷰에 응하겠다고 했다. 과연 그들이 무엇을 가장 우선순위로 두고 성경공부를 인도했는지를 물었다.
“가장 우선 순위에 두었던 것은 각 사람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삶 가운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모습을 나타내어서 힘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점 이었습니다. 즉, 성경 공부 하는 것과 삶이 분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1주일에 한 번 모이는 모임이지만 각자 개인의 생활을 해 나아갈 때에도 영향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또한 타국 땅에서 공부하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 하나님께서 각자를 향해 가지고 계신 계획 가운데 있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모든 지식과 경험을 하나님 뜻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내어 드려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타국 땅에서 생활하는 특수 상황이 성경에서 나오는 인물들이 겪었던 ‘광야’ 생활 같은 기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러기에 하나님과 더 가까와 질 수 있는 좋은 기회이고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기반으로 실제적인 차원에서, 성경공부는 반드시 주중에 시간을 내어서 미리 해 가지고 오고, 모여서 나눌 때에는 삶에서의 적용이 가능할 수 있도록 진솔하고 또 열린 마음을 가지고 각자의 경험이나 상황을 나누었으며, 또 같이 모이는 사람들을 위해서 요일별로 기도해야 할 사람들을 정해놓고 중보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비단 매주 모이는 시간뿐 만이 아니라 살아 가면서 문제가 생겼을 때에는 함께 공부한 내용에 있는 원리들을 적용시켜서 생각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했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무엇보다도 어느 한 사람이 특별히 인도자라고 하지 않고 모두가 함께 만들어 나간 성경 공부였고 때마다 하나님의 뜻과 도우심을 함께 구하고자 했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의 이끄심에 따라 운영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성령님께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시는 성경공부, 그리고 삶으로의 적용을 위한 노력이 있었기에 SBS를 통해 맺어진 많은 열매들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바쁜 유학생활중에 조원들을 향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섬김는 것이 쉬운일은 결코 아니었으리라 짐작하며, 성경공부를 도우면서 힘들었던 점에 대해서 물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 사람의 인도 보다는 모두가 참여하는 성경 공부 모임 이었기 때문에 도우미로서 역할을 하기에 크게 힘들었던 점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중에도 가장 아쉬웠던 것은 처음에는 6명으로 시작 되었던 성경공부 모임이 10명이 넘게 모이는 모임으로 되어지면서 각 구성원의 필요도 더 다양해 졌고 구성원 중에는 정기적인 성경 공부 외에 신앙의 기초부터 함께 1대 1 양육이 필요한 경우도 있었는데 나 자신도 유학생이어서 시간을 내기 부족하다는 생각에 계속적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 음성에 순종하지 못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 때 나 자신을 먼저 생각하기 보다는 하나님께 더 순종했어야 했는데 라는 많은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또 구성원이 바뀔 때 유동적으로 대처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아쉬움도 많이 있습니다.”
실제로 6명남짓한 모임안에서 김선교사 부부외에 모임을 섬기던 연장자들이 다른 지역으로 옮겨간 후 새로 모임에 동참한 대부분의 조원들이 기초적인 양육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김선교사 부부에대한 섬김의 요구는 증가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개인적인 영적 성장이 지역교회이 성장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김선교사 부부는 그동안 SBS를 통해 양육받은 형제, 자매들에게 지역교회로 파송(?)되어 그곳에서 섬기는 것을 권유하였고 현재 Ann Arbor내의 여러 교회들 뿐 아니라 D.C., California, 한국등으로 이동한 조원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섬기는 이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한 두사람의 헌신을 통해 60배, 100배로 열매 맺으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를 실감하게 되었다. 1999년 김선교사 부부가 북방 A국으로 파송됨을 계기로, 조원들은 각 지역교회로 흩어져 청년부등을 통해 섬기고 양육받고 있으며 SBS라는 이름으로의 모임은 중단되게 되었다. 이를 인도자의 부재로 인한 모임의 와해가 아닌, 적정기간동안 훈련시키시고, 때가차매 흩으셔서 또다른 양육을 시작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보는 편이 옳을 것 같다.
인도자로서, 자신 또한 공급 받고 양육되어져야 하는 영적 요구를 어떻게 충족시켰는지가 궁금했다.
” 우선은 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 기본이 되었고, 두번째로는 우리 성경공부는 인도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인도자요, 모두가 적극적인 참가자 였기 때문에 서로 나누고 기도하고 응답 받고 변화 하는 과정에서 우리 속에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었던 것이 많은 도전과 힘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세번째로는 가끔 있는 KOSTA, 교회 부흥회 등도 때때에 맞게 적절한 공급이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SBS를 하면서 얻은 경험은 너무나 값진 보배와 같습니다. 이런 경험을 갖게 된 것은 노하우나 이전의 경험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축복이며 저도 이 소그룹 모임을 통해서 많이 하나님을 경험하고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시종일관 하나님의 은혜로 일하였고 열매맺었음을 강조하는 모습에 많은 도전을 받았다. 지금 이시각에도 북방 A국에서 함께하는 영혼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복음을 전하고, ‘힘있는 그리스도인’을 양육하고 있을 김선교사 부부를 떠올리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헌신을 얼마나 기쁘게 보고 계실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고 지금도 헌신된 한 명의 인도자를 찾고 계실 하나님을 생각하니, 김수연 선교사의 귀한 조언이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 성경공부를 인도하거나 섬기는 이로서 한 가지 꼭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늘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께 촛점을 맞출 수 있는 눈과 동시에 나와 함께 공부를 하는 사람들을 향한 관심과 사랑이 함께 있어야 하며 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