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타 보이스 2009 – 코스타 상담실] 신앙, 제자도

코스타 상담실에서는 많은 코스탄들이 궁금해 하는 질문을 가상의 코스탄과 멘토와의 대화를 통해 풀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곳에 실린 의견은 멘토님 개인의 의견이며 코스타와 소식기관의 의견은 아닙니다.

신앙, 제자도

“멘토님, 제가 기독교 신앙에 처음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주위의 괜찮은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지만, 요즘 많은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기독교에 대해서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좋지만, 교회는 싫다고 할까요. 기독교인이라고 말하지만 예수님과 다른 생각이나 행동을 고집하고, 심지어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강요하려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가 비록 초신자이지만, 성숙한 기독교인이 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먼저 형제님이 기독교 신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기독교 신앙에 들어오는 것은 지금까지 경험했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낯설고 어리둥절 하겠지만 차차 익숙해지고 동서남북의 분별이 가능해 질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성숙한 신앙인들을 만나는 것이 가장 빠르고 확실한 길입니다. 하지만 형제/자매님도 지적하셨듯이 주변의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신앙성장에 방해가 되고 거침돌이 될 경우도 많습니다. 안타깝지만 그것이 현실인 것을 부인할 수 없군요. 형제/자매님 주변에 제가 아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소개해 드리고 싶은데, 그 점이 여의치 않으니 형제/자매님에게 도움일 될 만한 길을 제 나름대로 제안해보겠습니다. 

첫째, 형제님이 직접 성경을 열심히 파고 들어야 합니다. 성경은 솔직히 쉬운 책은 아닙니다. 하지만 좋은 참고서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이해하고 깨닫는 일이 힘든 것만은 아닙니다. 도움이 될 참고서로 다음 몇 권을 추천합니다. 1. 성경연구입문 (존 스토트, 성서유니온) 2. 어, 성경이 읽어지네 (이애실, 성경방) 3. 매일성경 (성서유니온) 또는 생명의 삶 (두란노) 4. 한 눈에 보는 성경 (브루스 윌킨슨, 디모데)
 
둘째, 성경 외에 기독교 신앙에 도움이 되는 좋은 신앙서적들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다음의 책들을 추천합니다. 1. 기독교의 기본진리 (존 스토트, 생명의말씀사) 2. 길은 여기에 (미우라 아야꼬, 설우사) 3. 갈보리 언덕 (로이 헤숀, 기독교문서선교회) 4. 신앙생활 가이드 (존 스토트, IVP) 5. 믿음의 싸움 (존 화이트, 생명의말씀사) 6. 사귐의 기도 (김영봉, IVP) 7. 이래서 믿는다 (폴 리틀, 생명의말씀사) 8. 순전한 믿음 (찰스 콜슨, 생명의말씀사)
 
셋째, 주변에 있는 교회들 중 기독교의 정신이 살아있는 교회를 찾아보세요. 초신자에게 좋은 교회를 찾아보라는 권면은 너무 막연한 느낌이 있지만 그래도 다음 몇 가지 점들을 고려하셔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좋은 교회에 다니는 것이야말로 신앙성장에 가장 확실한 길이니까요. 1.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가르치는 교회. 목사님의 설교가 성경본문을 자세히 강해(설명)하는 것인지, 기독교 신앙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것인지 등을 살펴보십시오. 교회의 크기나 유명세로 판단하지 마시고, 진리를 바로 선포하는지의 여부로 판단하십시오. 2. 목사님이나 교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지,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이 있는지를 살펴보십시오. 단지 예의가 바르다거나 교양이 있어보이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그분들의 모습에 진실과 겸손, 사랑과 섬김의 자세가 배어있는지를 보십시오. 자신들을 주장하고 자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품성과는 거리가 먼 모습입니다. 십자가의 정신은 자기를 부인하고 기꺼이 남을 위해 희생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형제님이 일정 기간 한 교회를 출석해보시면 그런 점들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넷째, 반드시 교회는 아닐지라도 선교단체나 주변의 성경공부 모임 등도 알아보실 수 있습니다. 이때도 위의 세 번째 사항의 설명을 참조하십시오.
 
형제님을 옆에서 도와줄 수 있는 신앙의 선배를 만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하나님께 그런 사람이나 단체를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글로만 답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무쪼록 선하신 우리 주님께서 형제님의 신앙여정을 인도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김현회 hkim@clayjars.org)

[코스타 보이스 2009 – 강사 인터뷰] 김기현 목사


김기현 목사 – 월요일 전체집회 강사
http://blog.daum.net/ezrakim

1. 김기현 목사님, 안녕하세요. 코스타에 참석하는 분들을 위해 간단히 자기 소개를 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저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교회를 섬기는 목사, 이웃과의 관계에서는 부산 기윤실을 섬기는 활동가, 저 자신과의 관계에서 저의 은사인 글쓰기를 하는 작가입니다.

2. ‘가롯유다의 딜레마’,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라는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화제가 되고 있는데요, 간단히 소개해주시고, 어떤 의도로 이 책들을 쓰게 되셨는지 설명해주십시오.

‘가룟유다 딜레마’는 유다복음과 가룟 유다가 던지는 만만찮은 질문에 대답하는 책입니다. 과연 가룟 유다의 배신은 예정인가, 자유의지인가? 유다는 자살했으니 지옥 가는가? 등의 골치 아픈 문제를 하나 살피면서도 궁극적으로는 가룟 유다와 싸우기보다는 예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데 초점을 맞추었어요.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는 누구나 겪는 고통의 문제를 신학적으로 성찰해 본 책입니다. 하박국서를 중심으로 하고, 하박국서를 내재적으로 읽고, 그것을 신학과 인문학과 연결시키시고, 그런 다음 제 경험을 섞었어요. 예를 들면, 왜 착하고 의로운 하나님이 모진 고통을 허락하시는가, 원수처럼 미운 사람을 향해 복수하는 마음을 품고, 그렇게 기도해도 되는지, 왜 하나님은 기적적인 응답을 주시 않으시는지 등을 다루었어요.

3. 오늘 특강의 주제와 내용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전반부는 샬롬의 3중구조를 설명하구요, 후반부에서는 야곱이 그의 형 에서를 만나는 대목에서 어떻게 평화를 이루어냈는가를 다룰 것입니다. 특별히 강조할 부분은 평화란 다름 아닌 용서라는 것입니다.

4. 근래에 한국 교회에 대한 비난이 커지고 있는데요,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디서부터 새롭게 시작해야할까요?

성서와 독서입니다. 우리 자신을 회개케 하고, 시대를 변혁하는 힘이 다름 아닌 성서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성서를 대충 읽어서는 안 됩니다. 정말 열심히 읽어야 합니다. 유교의 선비들은 한 책을 백번이고, 천번이고 읽었습니다. 한국 개신교내에 예컨대, 로마서나 복음서, 등 성서 한 권을 그렇게 읽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성서 이야기가 우리의 살과 피, 혈관 하나 하나에까지 침투해 들도록, 그래서 내가 말하는 것인지, 성서가 내 안에 들어와서 말하고 있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가 되도록 반복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서와 함께 책을 곁에 두어야 합니다. 칼 바르트는 “한 손에는 성서를 다른 한 손에는 신문을”이라고 했어요. 신문도 신문이지만, 무엇보다도 독서가 우선이고, 최고입니다. 성서를 살아낸 사람들과 선배들의 책을 읽으면서 시대를 읽고, 살고, 바꾸는 지혜와 영성을 자연스레 몸에 체득하게 되지요. 그러니 웨슬레의 유명한 기도처럼, “한 권의 사람, 만 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서와 독서로 시작하기 바랍니다.

5.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회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또는 기독교 신앙에 처음 접한 사람들에게 신앙의 선배로서 조언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위의 얘기와 중복됩니다만, 성서를 부지런히 읽어 보기를 권합니다. 성서는 정말 재미있어요. 여기에 세 가지를 덧붙이고 싶네요. 첫째는 한분의 멘토입니다. 둘째는 열 명의 친구입니다. 셋째는 백 권의 책입니다. 청년의 시기, 유학의 시기에 한분의 멘토를 만나고, 같은 꿈을 꾸고, 격려해 주고, 도전해 줄 수 있는 친구를 10명을 만나고, 영혼과 지성과 감성을 튼실하게 할 좋은 책을 백 권 읽을 수 있다면 신앙과 인생에 있어서 정말 행복하고, 의미있을 겁니다.


 

[코스타 보이스 2009 – 코스타 세미나] 이훈 목사


코스타 세미나는 전체 집회 참석자 천여 명 중 아주 제한된 수만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세미나의 중요한 내용이 모든 분께 전달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KOSTA VOICE에서는 코스타 기간에 열리는 세미나 중 다섯 분의 세미나 강사님들을 인터뷰하여 전체의 참석자이 지면을 통해서 평소에 만나기 어려운 만날 분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립니다.

이훈 목사 – 샬롬의 의미, 샬롬을 위한 헌신 (주제 세미나)

1. 이훈 목사님, 반갑습니다. 코스탄들을 위해 간단히 자기 소개를 해주시죠.

안녕하세요, 저는 이훈 목사입니다. 장로회 신학대학원, 서강대학교, Canadian Mennonite Bible College를 졸업하였고, 1987년 부터 1996년까지 온누리교회 부목사로 주로 소외층 사역을 담당하였으며, 1996년에 캐나다로 이주하여 1998년부터 현재까지 메노나이트 공동체 교회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함께 걷는 순례자(두란노서원)가 있습니다. 1남 4녀를 양육하고 있습니다.

2. 대형교회의 부목사직을 사임하시고,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신 것이 특별해 보이는데요, 그런 과정에 대해서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소외층 사역을 하며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에 대해 마음이 있었습니다. 대형교회 안에도 축복이 많이 있지만 서로의 관계는 깊지 않고 본의 아니게 소외도 있게 되는 것이 안타까웠고, 공동체를 좀 더 경험하고 배우기 위해 공동체 영성이 깊다고 소개 받은 Anabaptist/Mennonite 그룹으로부터 배우려고 13년 전에 캐나다로 오게 되었고, 그 이후 계속해서 메노나이트에 소속되어 사역하고 있습니다.

3. 이번 코스타의 주제가 평화, 샬롬인데요, 주제세미나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의 핵심은 무엇인가요?

샬롬은 하나님의 통치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 통치는 개인적인 그리고 내면적인 경험에 머물 수 없고 오히려 관계 속에 이루어지는 것이며 실제적인 삶의 변화가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4. 샬롬의 의미에 관계적인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는 점에서 공동체적인 변화, 이웃과의 관계의 변화에 대해서 강조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평화에 대해 기독교적인 특수한 의미로서의 샬롬이 어떤 것일지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신앙과 종교는 내면적인 필요에서 시작되지만 기독교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회복과 화해입니다. 하나님의 뜻인 샬롬은 인류가 스스로 만든 모든 분열과 장벽을 극복하여 화해와 하나됨에 이르는 것인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중심에 있는 것이겠지요. 기독교의 샬롬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삶, 곧 십자가를 통한 화해와 하나됨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5. 목사님께서 소속되어 있는 공동체, 아나뱁티스트는 기독교 평화주의로 근래에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데요, 기독교 평화주의를 소개해주시죠. Anabaptist/Mennonite 역사, 현재 공동체의 모습도 간단히 소개해주시고, 이런 전통이 한국 기독교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지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간략하게 소개하기가 쉽지는 않은데요, 하지만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 충실한 것으로 소개하고 싶습니다. 갈등과 분쟁이 있는 지구촌에서 그리고 가깝게는 갈등과 분쟁의 현장인 가정과 교회에서 사람들은 흔히 평화를 위해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평화도 힘의 균형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기독교도 힘을 갖고 그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흔적이 많지요. 하지만 그런 생각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삶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평화주의를 실천하는 Anabaptist/Mennonite는 지난 역사 속에서 그리고 현재도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삶에 신실하려고 노력해 왔고, 오해와 박해도 받았었습니다. 평화주의의 입장은 갈등과 분쟁이 많은 세상에서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삼는 것인데, 세상에서 힘을 갖거나 기르려고 하지 않고 보이는 힘으로 갈등과 분쟁을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과 겸손으로 접근할 때 진정한 평화가 다가올 것이라고 믿고 실천하는 것이지요. 진정한 교회는 어떤 모임이어야 하는지, 갈등과 분쟁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세상에서 어떤 부르심을 받고 있는지 등에 아쉬움을 많이 갖고 있는 한국 기독교에 Anabaptist/Mennonite는 건강한 도전과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6. 세상을 향해 용기를 갖는다고 할 때, 샬롬이라는 가치를 공유하고 구현하는 기독교 공동체의 역할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샬롬에 근거한 공동체의 구성은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나요?

또한 어떤 공동체든 조직과 제도가 생겨납니다. 그 조직과 제도는 구성원의 패러다임이 담겨 있습니다. 현실의 기독교 조직과 제도는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주변 사회의 조직과 제도를 본받아 왔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주변 민족을 본받아 왕정제도를 갖게 된 것처럼, 신약 이후의 교회도 왕정시대에는 그 조직과 제도를, 봉건시대에는 그런 조직과 제도를, 민주시대에는 그 조직과 제도를 본받아 왔습니다. 그 모든 조직과 제도는 세상에서의 안전과 번영이라는 목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그리고 사람(개인이나 소수의 리더)에 의해서가 아닌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인 샬롬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대안적 조직과 제도를 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구성원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 살아가려는 진지한 헌신이 필요할 것입니다.  

7. 세상을 향해 용기를 갖는다는 것이 세상을 정복하거나 지배한다는 의미는 아닌 것 같습니다. 기독교 공동체가 세상을 대할 때, 약자일 때뿐 아니라 어느 정도 힘이 있는 공동체일 때에도 어떤 태도를 갖고 대해야 합니까?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겸손일 것입니다. 숫자든 권력이든 물질이든 보이는 힘은 사람들을 움직이는 파워가 있습니다. 기독교 공동체가 보이는 힘을 갖게 될 때 언제나 영적으로는 어두웠던 역사를 기억하고, 적어도 그 힘이 바깥 사람들에게 위협이나 부담이 되거나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셨지만 끝까지 섬김의 길을 가신 예수님의 겸손과 선택이 중요할 것입니다. 

8. 기독교인들이 좀더 성숙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 현재 많은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더 깊은 영성, 지혜와 덕을 보여줘야 할 것 같은데요, 진정한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 깊이 있는 영성을 어떻게 찾을 수 있다고 보십니까?

보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Savior)로는 고백하지만 교회의 존재(Being)와 실천(Doing)에서 진정 주(Lord)와 모범(Example)으로 삼는 이들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히려 교단의 전통을 유지하고 세상에서의 영향력을 확장하는 데에 효율적인 길을 선호하고, 세상에서의 성공적인 리더십 모델이 더 인기를 끄는 경향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에 보다 집중하고, 또 한 특정한 리더에 의존하는 경향을 벗어나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들과 몸인 공동체를 이루고 서로에게 귀를 기울이며 배우는 실험과 노력을 통해 공동체를 통해 우리를 양육하고 세워가시는 주님의 손길을 더욱 풍성하게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코스타 보이스 2009 – 기획기사] 하나님이 주신 ‘평화의 약속’

세상 사람들은 평화를 매우 갈구하고 있다. 세상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은 평화가 교육, 계몽으로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전쟁, 힘으로 달성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인류 역사를 되돌아볼 과연 평화를 달성할 있을 것인가 하는 비관적인 생각도 하고 있다. 기독교의 전통에서 평화를 의미하는 단어-샬롬 (Shalom), 에이레네 (eirene), 팍스 (Pax), 기독교 평화주의(pacifism)- 가지 . 구약성경에서는 샬롬이라는 단어가 쓰였고, 신약성경에서는 에이레네라는 단어가 였다기독교가 말하는예수의 평화 어떤 것인가? 코스타 보이스는 기획기사를 통해예수의 평화 따르는 우리는 어떤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야할지 고민해본다.


 


샬롬 (Shalom)


샬롬은 1차적인 의미로 외적인 만족과 내적인 만족 모두를 포괄하는 완전함, 하나됨, 조화, 번영, 건강함, 충만함(wholeness)이다. 전쟁에서 화해함, 전쟁에서 승리함 (return from war in shalom)이라는 의미로도 쓰였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잘삼, 안녕, welfare, well-being 의미이다.


한편 샬롬은 세상의 혼돈에 대한 하나님의 질서의 회복,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 (blessing of peace) 의미하기도 한다. (시편 29) 샬롬은 관계적 개념으로서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 속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바른 질서가 이루어질 달성된다.( 1:26)


포로기 이후의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차원의 의미가 부각된다. 샬롬은 이스라엘 전체 사회를 이끄는 이념으로서 고통 당하는하나님의 백성 바라보는 미래의 회복된 질서라는 의미이다. (이사야 2:2-4, 미가 4:1-5) 종말론적 비젼(이사야 2:4)으로서의 샬롬은 종말에 야훼가 모든 나라의 심판자가 되어 세상에 이상의 전쟁이 없을 것이고 , 야훼가 다스리는 땅에는 모든 것이 완성되고 야훼의 다스림 안에서 이스라엘은 중심이 것이라는 비젼이다. 그러므로 샬롬은 미래 지향적 기다림이며 평화를 성취할 메시야에 대한 기다림이다. ( 2:2~4, 4:1~3)


 


구약의 샬롬에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기독교의 다는 아니다. 왜냐면, 구약의 샬롬은 다분히 힘에 의한, 폭력에 의한, 이스라엘의 부흥을 통한, 강압을 통한 평화이기 때문이다. 샬롬이 이스라엘의 복수와 신원, 이스라엘의 정복이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샬롬이 목적은 있어도 수단은 없다.


 


예수의 샬롬 (Shalom, Eirene)


구약의 샬롬의 의미에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제시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고, 평화를 전하고 이루시며 사셨다. 구약의 예언을 성취할 아니라 예언의 의미를 분명하게 밝히셨다.


 


평화의 복음


예수님의 복음을 요약하는 여러 가지 개념하나님의 나라’ ‘희년’ ‘복음’ ‘기쁜 소식이런 중에 중요한 가지 개념이 바로평화이다. 예수님의 사역 중에서 병고침과 죄사함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 인간들이 죄의 결과로서 겪게 되는 , 그리고 그보다 근원적인 죄에 대한 용서를 하시며 결과를 평안, 평화라고 말씀하신다. ( 7:48-50; 8:48) 예수님의 메시지의 핵심은 평화이셨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온전하게 다시 정립되는 ,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병고침과 죄사함이 이루어진 상태, 그것을 평화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제자들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할 것을 부탁하실 때도, 자신의 메시지의 핵심이 평화임을 말씀하신다. ( 10:5-6) 그리고, 세상의 거짓된 평화에 속지 말고 자신 안에서 구현되는 진정한 평화를 것을 촉구하는 말씀이다. 말씀은 구약의 예레미아의 거짓된 평화에 대한 비난과 공명한다. ( 12:51)


 


샬롬의 윤리


샬롬의 윤리에 관한 평화에 관한 산상수훈의 말씀이 있다. ( 5:9)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하여 자신의 윤리적 비젼을 제시한다. 산상수훈의 말씀은 예수님이 당시 사람들에게 익숙한 유대교 가르침에 대해서 새로운 윤리적 지표를 제시한 것이라고 있다. 구약의 샬롬은 평화를 말하지만 기본적으로 이스라엘이 강국이 되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인도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의미이다. 메시아가 강한 힘으로 그동안 당했던 고통, 한을 풀어주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산상수훈 전체에서 의미를 찾아볼 화평케 (peacemaking) 의미가 구약의 샬롬의 의미와 같지만 다르다는 것을 있다. 평화가 목적으로서뿐 아니라 자체가 과정으로, 수단으로서도, 그리고 목적으로서 자체로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5:38-42 보복하지 말라는 말씀이 연결되는데요, 이런 점에서 특히 평화를 이뤄나가는 과정, 자체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찾고 평화의 태도를 유지해나갈 것을 강조하고 계시다.


 


샬롬, 용기의 근거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날 것을 말씀하시며, 성령을 약속, 평안할 것을 권면하신다.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이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구절은 초대교회가 겪은 상황, 현재 표면적으로 보이는 고통과 탄압 속에서 궁극적인 승리를 우리가 소유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초대교인들이 겪는 의문에 대한 희망을 주는 말씀이라고 있겠다. 어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최후의 승리는 우리의 것이라는 점을 격려라고 한다. 예수가 누구인가, 실패한 메시아가 아닌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그의 부활과 함께 진정한 메시아이고 메시아의 승리가 고난의 현장 이곳에 이미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의 반복된 인사의 말씀은 단순한 안부를 넘어서 부활의 사건의 의미를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다.


 


사도들이 전하는 예수님의 평화의 복음을 내일부터 계속 살펴본다.

[신선묵] 영적 지도자와 변화를 가져오기 (Change Dynamics)

 


우리가 일을 하면서 어떤 조직 속에서 일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 자신이 그 기관의 책임자일 수도 있고 또 우리가 그 속에서 하나의 일원으로 일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기관이나 조직이 이상적 이지 않고 건강하지 않을 경우가 있다. 사실은 그럴 확율이 더 많다. 그럴 때에 어떻게 해야할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첫째 반응은 그 조직의 변화를 위하여 노력한다. 그런데 그 때에 주로 우리는 지도자가 변화되기를 혹은 지도자를 바꾸기를 원한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건강한 조직 속에서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변화를 위하여 지도자에게 도전하고 변화를 요구하기도 한다. 그러면 지도자는 지도자  나름대로 자신을 방어를 해야하고 그래서 갈등이 발생하고 결국에는 지도자에게 반발을 일으킨 사람은 적절하지 않은 때에 그 조직을 떠나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 조직이나 개인에게 준비되지 않은 지도력 이양(Leadership Transition) 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 조직이나 그 개인에게 별로 긍정적이지 않은 경우이다.


 


둘째 가질 수 있는 태도는 조직에 대하여 기대를 버리고 그저 그 속에서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것을 챙기는 식으로 일을 할 수가 있다. 변화할 수 없는 것을 변화시키려고 무리하게 행동하기보다는 그저 그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일을 하는 것이다. 지도자의 변화를 요구하기보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할 수 있는 만큼 일을 하는 것이다. 사실 조직 속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그 조직에 대한 기대는 없는 것이다. 자신이 지도자라면 변화를 이끌어 볼텐데 자신이 지도자가 아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지도자를 인정하고 머물러 있는 것이다. 아마 그 조직 속에 있지만 기회가 되면 다른 조직으로 가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적극적으로 다른 조직을 찾고 그러는 동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사실 지도자가 아니기 때문에 변화를 할 수 없고 지도자를 바꿀수도 없으니까 어쩔 수 없는 선택처럼 느껴질 것이다.


 


세째는 변화의 대리인(Change Agent)이 되기로 자처하는 것이다. 물론 자신이 지도자가 아닌데 그 조직 속에 변화를 이끌어 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가능하고 조직이나 그 사람 자신을 위해서도 꼭 해야하는 일이다. 내가 지도자가 아니기 때문에 변화를 이끌어 낼 수가 없다면 그 사람은 설사 그 조직의 지도자가 되어도 변화를 이끌어 낼 수가 없을 것이다. 조직에 변화가 필요할 때 지도자를 바꾸는 것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변화의 대리인이 꼭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 개인에게는 중요한 이슈일찌 몰라도 그 조직의 변화에 꼭 필수적이지는 않다. 변화를 가져오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가 지도자이건 아니면 일원 중에 하나이건 그 조직에 대한 바른 비젼을 본는 것이 중요하다. 그 변화의 끝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할찌에 대하여 분명한 그림을 가지고 그것을 향하여 움직여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조직을 향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에 대한 구체적인 비젼과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분명하다면 지도자이건 아니면 조직의 한 일원에 불과하건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고 기회가 될 때마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지혜롭게 그런 조직이 되도록 움직여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이때 변화의 대리인이 변화를 유도해 낼 때에 조심해야 한다. 좋은 의도이지만 그 과정이 잘못되면 그 조직에게 도리어 해가 되고 사람들을 분리 시킬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하고 정말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자신이 인정받기 위한 것이나 자신이 그 결과로 인하여 어떤 상급을 받으려는 욕구가 앞서서는 않되고 그 조직 속에 있는 기존 질서를 잘 인정하고 그 속에서 움직여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꼭 지도자가 아니어도 조직 속에 변화를 이끌러 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건강하지 않은 조직 속에 있을 때에 우리는 조직이나 지도자의 변화를 요구하고 자신의 무책임성에 대하여 혹은 자신의 분노에 대하여 합리화하기 쉽다. 그러나 변화는 외부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태도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분노하고 조직을 쉽게 떠나 버리는 일이나 조직 속에 머물러 있으면서 조직을 사랑하지도 않고 냉소적이고 자신의 것만을 추구하는 것이나 다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조직의 변화를 추구해야 하는데 그것이 외부의 변화를 요구하기 이전에 지도자의 변화나 교체를 요구하기 이전에 나의 태도가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에는 지도자가 안바뀌어도 하나님의 뜻하시는 일은 이루어 질수 있다. 내가 꼭 지도자가 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 질 수가 있다. 우리가 촞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을 향하여 기도하면서 움직여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한번은 어떤 미국 신학교 총장을 역임하셨던 분이 이런 말씀을 하였다. 당신이 더욱 좋은 자리 큰 자리로 움직여 가고 싶습니까? 현재 당신이 있는 자리를 그런 자리로 만들어 버리십시요. 우리는 많은 경우에 우리가 있는 자리에 불만족하면서 불평하고 있다. 그러면서 더 좋은 자리로 가기를 구하면서 현재 있는 조직의 변화의 주체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아마 그 총장님은 우리 자신의 변화를 먼저 요구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이런 태도의 기초 위에 변화의 대리인이 되기 위해서는 첫째, 현실에 대한 바른 직시가 필요하다. 현재 상황을 바로 진단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를 보기를 회피해서도 않되고 그렇다고 문제를 과장해서 보아도 않되고 그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해야 한다. 둘째 변화의 결과에 대한 분명한 그림이 필요하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잘못 되었다는 것은 알지만 그러면 어떤 것이 잘된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대안이 없이 불만만 가지기 쉽다. 변화를 끌어오기 위해서는 변화의 결과에 대한 완벽하고 구체적인 그림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세째 관련된 사람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필요하다. 변화란 사람들을 통해서 오는 것이기때문에 그 조직 속에 있는 사람 혹은 그 조직속에 없지만 변화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바른 인식이 필요하다. 관련된 사람들의 변화에 대한 호응도도 파악해야한다. 네째, 전체 환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조직은 그 조직의 외부 환경과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전체 환경 즉 Macro Context 에 대한 바른 분석과 이해가 필요하다. 다섯째, 변화를 위한 자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우리가 추구하는 변화에 여러가지 로 도움이 될수있는 자원들을 인식하고 확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체적인 행동 계획들이 필요하다.


 


내가 소속된 조직은 건강하고 만족스러운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나는 조직의 변화를 위하여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 건강한 변화를 위하여 기도하고 비젼을 가지고 움직여 나가고 있는가? 우리가 지도자가 아니더라도 변화의 대리인이 될 수가 있으며 이런 경험을 통하여 나중에 우리가 지도자의 위치에 서게 되도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지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http://lead2serve.tistory.com/

KOSTA/USA-2009 집회를 기대하며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동민이는 대한민국 남자들이 군대에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니, 그저 군대에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에게 군대 이야기를 처음 해 주었던 동네 아저씨에게서 들은 군대는 사람이 지낼 만한 곳이 아니었다. 죽음의 위협을 느낄만한 고된 훈련, 아주 열악한 생활환경, 끊임없는 구타 등이 군 생활의 일상이었다. 그 허풍쟁이 아저씨가 해준 무용담은, 높은 절벽에서 병사들을 무작위로 떨어뜨려 살아남은 사람만 제대하게 했다든가, 정기적으로 산에 가서 곰이나 호랑이와 같은 야생짐승을 맨손으로 잡은 사람들이 진급하게 된다든가, 맨손으로 독사를 잡아 가죽을 벗기고 날로 먹도록 훈련을 받는 다든가 하는 살벌한 이야기들이었다. 그 아저씨는 큰 악의 없이 8살짜리 꼬마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던 것이었지만, 꽤 나이가 들어서까지 군 복무에 대한 비합리적인 두려움은 동민에게서 사라지지 않았다. 


대공황 이후 최대의 경제위기라는 현재 상황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두려워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지도 모른다. 당장 매우 급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가진 두려움이 그저 8살짜리 꼬마의, 군 복무에 대하여 잘못된 두려움과 같은 것이라고 치부해버리는 것은 잔인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 8살 꼬마의 이야기로부터 우리가 배울 것은 없을까. 그 아이가 가진 두려움이 ‘실체’ 혹은 ‘진실’을 잘못 파악한 데서 기인한다는 것이 우리의 상황과 비슷하지는 않을까. 그리스도인들이 소유한 ‘영적 실체’에 대한 바른 지식이 그들을 두려움으로부터 해방할 근거를 제시하는 것은 아닐까. 


세상에서의 어려움을 만나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진지한 질문들을 우리 자신에게 묻게 된다.


“우리에게 과연 안정(security)을 가져다주는 궁극적 실체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는가?”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을 이길 수 있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칭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이러한 질문들은 비그리스도인들과 얼마나 다를까? 


KOSTA-2009의 주제문의 일부를 다시 한번 읽어보자.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어그러진 질서에 거스르는, 하늘의 가치를 가지고 이 땅을 살아내는 일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에게 밀어닥치는 그릇된 가치가 두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또, 그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좌절하고 넘어지기도 한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안전하다고, 또 많은 물질을 소유하면 평안이 주어질 것이라고 말하는 그릇된 사상에 우리는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또한, 소외된 자들을 무시하며, 효율을 위해 덜 중요해 보이는 사람들을 희생시켜야 한다고 속삭이는 유혹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할 수 있다. 우리는 당당하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세상을 살아낼 수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긍정하고 적극적 사고방식을 가지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승리가 주어졌기에, 그를 통한 ‘평화’(Shalom)가 현실화되었기에 할 수 있다. 


그렇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어려움과 두려움이, 허풍에 속은 8살짜리 꼬마가 가지는 수준의, 가벼운 것은 분명히 아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세상이 갖지 못한 그 무엇이 있지 않은가. 우리 내부에서 찾을 수 없는 소망이 외부로부터 (extra nos) 주어져 있다고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하늘과 땅이 만났던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Shalom)를 주셨고, 그 평화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낼 수 있는 용기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2,000여 년의 교회 역사 속에서 수많은 믿음의 선조가 바로 그 평화와 용기로 세상에 대하여 승리를 선포하지 않았던가. 


이런 맥락에서, 이번 KOSTA/USA-2009 집회를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소망한다. 


첫째, 참된 평화(Shalom)을 만들어낼 근거가 우리 안에 없음을 가슴 시리도록 깨닫게 되기 원한다. 우리 스스로 평화를 만들어 낼 수 없음을, 어떤 이들이 이야기하는 것 같이 우리가 노력해서 세상의 평화를 이루어 낼 수 없음을 발견하기 원한다. 우리 안에 소망의 근거가 없다는 간절한 목마름 속에서, 그 평화의 근본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아오게 되기 원한다. 


둘째, 예수의 평화가 과연 어떠한 것인지 더 깊이 이해하는 일이 있기 원한다. 이 세상이 잃어버렸던, 그러나 예수께서 이루신 일로 인해 우리가 그 안에 거할 수 있게 된 평화가 무엇인지 알게 되기 원한다. 마치 참된 보석 앞에서 모조품이 빛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이, 참된 예수의 평화를 보게 될 때, 우리가 의지하고자 했던 거짓 평안을 더 선명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그 평화의 감격에 흠뻑 적시길 원한다. 세상이 노력해도 이룰 수 없는 평화,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는 평화가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깊이 깨닫고 그 안에서 함께 모여 우리 모든 힘을 다해 함께 주님을 찬양하는 일이 있기 원한다. 그 큰일을 이루신 하나님의 사랑에 눈물 흘리며 감사하길 원한다. 우리가 흘리는 감사의 눈물과 함께, 우리가 기대고자 했던 거짓된 안정에 대한 환상도 함께 씻겨져 나가게 될 것이다. 


넷째, 내 삶, 내 가정, 내 결혼, 내 진로, 내 꿈, 내 소유, 내 직업 등에 매달려 자기중심적 삶을 살고 있던 천박한 모습에서 벗어나, 세상에 주신 예수의 평화라는 거대담론(Meta-Narrative)에 우리 자신을 헌신하게 되길 원한다. 내가 주인공이 되는 삶의 이야기에 생명력이 없음을 발견하고, 이제는 예수의 평화라는 새로운 이야기전개(Storyline) 안에서 나를 발견하게 되길 원한다. 그런 과정을 거칠 때에야 비로소 세상을 향한 참된 용기를 가지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상을 향한 놀라운 용기를 가질 근거가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음을 발견하고 그 용기를 가지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기로 헌신하게 되기 원한다. 우리를 둘러싼 여러 환경 속에서 어떻게 하면 생존할 수 있을까 하는 수준의 삶이 아니라, 세상을 이기는 삶이 어떠한 것인지 깨닫고 그렇게 살기로 결단하는 일들이 있기 원한다. 그리고 세상이 그렇게도 목말라하는 평화와 용기가 바로 예수 안에 있음을, 우리의 삶을 통해 밝히 드러내겠노라고 함께 목청 높여 선언하는 장이 되기를 기대한다. 


지난 24년간 KOSTA/USA를 통해서 일하셨던 주님의 신실하심에 기대어, “예수의 평화, 세상을 향한 용기”가 선포되고 선언될 천국 잔치를 기대해본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복음 16:33, 표준새번역)

[이유정] ‘주의 성소로 가는 길’ 작곡 배경

최근에 어노인팅 대표 박철순 간사가 안식월을 맞아서 저희 집에서 1주일 정도 머물
습니다. 덕분에 한국에 있을 때도 갖지 못한 진한 교제를 10년 만에 누렸습니다.
지난 20년간 예배사역의 현장 밑바닥부터 오직 예배 하나로 달려온 그의 삶이 오늘의
어노인팅을 있게 했음을 깨달았습니다.

한국의 예배찬양 운동이 지역교회 현장보다는 패러 처치 중심인 것에 대한 아쉬움이 늘 있었니다. 예배신학은 지역교회 예배의 특징을 공동체적 영성으로 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예세미나, 컨퍼런스 주제들이 예배자의 개인적인 삶이나 예배의 본질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7년간 언투유 예배사역은 공동체적 영성과 사역의 체질을 회복하는데 주력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번 박철순 간사와의 만남을 통해 개인, 공동체를 포괄하는 ‘하나님과의 사귐’이라는 예배 언어에 눈을 떴습니다. 그 이후 제가 쓴 예배 곡의 가사들은 예배의 본질에 다가선 언어들로 채워져 가고 있습니다. 그중에 한 곡이 오늘 소개하는 ‘주의 성로 가는 길’입니다.
 
최근 우연히 2005년 1월에 쓴 ‘기쁨’이라는 시를 찾았습니다. 주일 찬양 프로그램 디자인을 하면서 쓴 시였습니다.
 
“주의 성소로 가는 길, 주께 예배하는 시간, 주께 다가가는 시간, 주의 말씀 듣는 시간,
주를 묵상하는 시간, 주가 베푸신 잔치에 참여하는 시간, 그 날개 그늘아래 거하는 시간…
(중략) 이 모두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저의 기쁨입니다.”
 
지나간 시를 묵상하며 문득 지난 10여 예배사역의 현장에서 경험한 예배의 기쁨들이 하나 피어올랐습니다. 보통 곡을 쓸 때 제 영혼을 뒤흔든 말씀 또는 경험에 의해 영감이 떠오릅니다. 이번에는 시의 첫 줄인 ‘주의 성소로 가는 길’ 한 문장이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하는 기쁨이 새로운 예배언어로 물 흐르듯 흘러 나왔습니다.
 

최근 미국 경기침체가 갈수록 심화되면서, 한인들의 재정적 압박감은 어느 때보다 무거워졌습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실물경제는 교우들의 삶의 현장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 교회도 함께 힘겨운 터널을 지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환경이 주는 무거운 짐과 개인적인 고뇌의 마음을 모두 모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곡이 이틀 만에 탄생니다.
 
여러분 개인의 삶이나 사역 현장에서 예배 가운데 하나님과의 사귐이 지속적으로 일어나예배 언어들이 풍성하게 개발되기를 기도합니다.
 

이유정

[최주희] 진실을 보려는 눈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하나님이 그들을 창조하셨고 생명주시기
까지 사랑하시는 대상임을 기억하며, 이웃을 귀하게 대하는 것은 사랑의 출발점 일 것이다. 또한 그들의 필요와 기대를 채우고
만족시켜주는 것도 중요한 사랑의 표현이다. 때로는 생각과 의견이 나와 다르더라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 역시
사랑이다. 뿐만 아니라 나의 마음 깊은 곳에 상처를 준 사람이라 할 찌라도 주님의 사랑과 능력으로 용서한다면 어쩌면 사랑의
극치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는데, 바로 사람들의 마음에 담겨져 있는 ‘진실을 보려는
눈’도 사람들을 서로 사랑하게 하는 중요한 연결고리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사람들과 부딪히며 일어나는 사건이나 상황을 부정적으로 혹은
자기에게 피해가 되는 방법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캠퍼스를 걸어가는데 멀리서 아는 자매가 오고 있다고 하자.
반갑게 손을 흔들며 아는 척을 했는데 그냥 지나가 버렸다. 순간 “어? 왜 나를 못 본 척 하지? 나에게 불편한 일이 있나?
나를 무시하나?” 여러 생각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 친구가 나를 못 보았을 수도 있고 바쁜 일이 있어 급하게 지나칠 수도
있는데, 그런 가능성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하지 않고 단지 부정적으로 해석할 뿐이다. 또 다른 예로 자신을 동생처럼 가깝게
생각하여 반말을 하는 형제에게 무례하다고 느끼기도 한다. 이런 해석들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습관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긍정적인
인간관계 맺는 것을 방해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와 반대로 가능하면 주변 사람들의 행동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해석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은 참으로 넉넉하고 풍요로운 관계를 즐긴다.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하는 이웃들도 편안하다. 그런데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때로 누군가가 명백하게 부정적인 행동을 하였다 할지라도 그 내면에 있는 진실을 보려고 노력한다면, 무지해서 혹은 연약해서
저지르는 실수까지 받아주고 품어주는 큰 그릇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 있어서 내가 스승으로 삼고 있는 제자가 있다. 그는 내가 특수학교 교사로 있을
때 가르치던 우리 반 학생 재복이다. 어느 월요일 아침 조회를 하기 위해 교실에 들어서는데,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책상을 치고
웃고 있었다. 어떤 아이는 재복이를 향하여 “네가 어떻게 보였기에 거지인줄 알고 그러냐?”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궁금하여 나도
함께 웃자며 자초지종을 물었다. 내용인즉 전날 주일에 휠체어를 사용하는 재복이가 교회 정문 앞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오시더니 재복이에게 “저런 쯧쯧… 얼마나 힘드냐?”하시면서 천 원짜리 지폐를 주시더란다.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도 당황하여 어떻게 재복이 마음을 위로해야 할 지 몰라 “세상에… 재복아! 너무 기분 나쁘고 속상했겠다. 그 아주머니
참 이상한 사람이네…”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재복이의 대답은 나의 수준을 넘어선 놀라운 것이었다. “선생님, 그분이 몰라서
그랬을 거예요. 아마 제가 몸이 불편하다고 돈도 없는 줄 알았나 봐요. 하지만 알고 보면 그런 분들의 마음은 따뜻해요. 몰라서
그렇지 남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저에게 그렇게 하셨을 거예요.” 장애를 가진 중학교 1학년 재복이의 이 말은
두고두고 내 평생 교훈이 되었다. 만약 내가 그런 일을 당했다면 어떻게 반응하였을까? “도대체 저를 어떻게 보시는 거예요?
장애를 가졌다고 나를 무시하는 겁니까? 저는 거지가 아니라고요! 아줌마도 평생 장애를 입지 않으리라는 보장 못하실 걸요? 그러면
아줌마도 거지가 되나요?”라며 분노와 협박 아닌 협박으로 소리 질렀을 것이다. 하지만 재복이는 달랐다. 겉으로 표현되는 부정적인
행동보다 그 안에 숨겨진 진실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이런 눈을 가지고 가족과 공동체와 이웃을 대한다면 세상살이가 얼마나 평화롭고 여유 있을 것인가!

이런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Every day we are given stones.
But what do we build? Is it a wall or is it a bridge?” 우리는 매일 돌 맞는다.
억울한 돌, 부당한 돌, 거부의 돌… 그런데 이 돌들로 무엇을 만들까? ‘인간은 이기적이고 악하고 무서운 존재야! 좋은
관계란 있을 수 없어! 사랑은 결코 다다를 수 없는 이상에 불과 해! 결국 인간은 혼자야!’라고 결론을 내리고 그 돌들로 아성을
쌓을까? 아니면 그 돌들로 사람들을 이해하는 다리를 만들고 그들에게 다가갈까?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

나이가 들고 인생을 겪어가면서 어떤 때는 나 자신이 바다 같이 넓은 마음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어떤 때는 너무나 속이 좁은 사람처럼 여겨져 스스로 실망스러울 때도 많다. 그때마다 재복이를 기억한다. 그리고 나도
재복이처럼 사람들을 이해하는 넓은 마음과 숨겨진 진실을 볼 줄 아는 눈을 달라고 주님 앞에 엎드려 간구한다.

[최주희] 집사님, 축하해요…

덕용 집사님은 류마치스 관절염으로 고생을 참 많이 하신 분이다. 고등학교 때 발병한 이후
몸은 계속 쇠약해져 갔고 골격은 이상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결국 거동이 불편하여 직업을 가질 형편은 되지 못하였으나
장애인 복지 기관에서 자원 봉사자로 섬기며 지냈다.

덕용 집사님을 알게 된 것은 교회에서였다. 내가 출석하고 있는 대전 대흥 침례교회는
일찍부터 몸이 불편하신 분들에 대해 문을 활짝 열어 놓고 그분들을 섬기는데 앞장 서 왔다. 교회 시설이 행여 그분들에게 불편하지
않은지 끊임없이 정비하며, 수화 통역과 지적 장애아동을 위한 사랑부 예배도 준비하였다. 더욱이 교회 안에 마련된 장애우들을 위한
쉼터는 넓고 최신 시설로 만들어져 말 그대로 쉼과 회복을 제공하고 있다. 덕분에 장애를 가지신 분들이 우리 교회에 많이 오시는데
그곳에서 덕용 집사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휠체어가 커 보일 만큼의 자그마한 덩치에, 뽀얀 얼굴과 잔잔한 미소는 사람들 눈에 금방
띄지는 않는다. 하지만 덕용 집사님은 따뜻한 마음과 열린 귀를 가지신 분이셨다. ‘내가 몸이 불편하고 도움이 필요하므로 사람들이
나를 섬겨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가진 것으로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셨던 분이다. 육신적인 고통과 마음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주변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전화로 심방한다. 인내와 온유로 그들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고 함께 마음 아파하며
위로의 말을 전한다. 교회에 처음 나오는 장애우에게도 먼저 손 내밀고 관심 가진다. 목소리도 작고 말도 그리 많지 않은데, 주일
날 멀리서 보면 그분 주변에 사람들이 몰린다. 불편한 손과 발임에도 가까운 거리 먼 거리 상관없이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운전으로 봉사한다.

그런 덕용 집사님이 갑자기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긴 기간 동안 복용한 약으로 인해
합병증이 생기기 시작했고 이것은 연약한 그의 몸을 내려앉게 했다. 재정적으로 어려운 그는 종합병원에서 검진 받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강권으로 겨우 검사를 받게 되었다. 처음에는 의사선생님께서 치료가 가능하다고 말씀하셨기에 모두
힘을 얻고 기쁜 마음으로 돈과 여러 힘을 모았다. 하지만 얼마 후 의사선생님께서 덕용 집사님의 경우는 워낙 체력이 약해 치료가
어려울 것이라고 안타까운 소식을 전하셨다.

그 후 집사님은 그의 좁은 방 작은 침대에 누워 계셔야만 했다. 이전에는 덕용 집사님이
사람들을 많이 섬기셨는데 이후로는 누워 계신 집사님을 사람들이 섬기기 시작했다. 전도사님과 집사님들 그리고 여러 형제자매들…
부지런히 덕용 집사님을 방문하며 함께 마음과 사랑을 나누었다. 하지만 그의 건강은 좀처럼 회복될 기미 없이 오히려 더 나빠져
갔다.

어느 날 덕용 집사님을 뵈었을 때, 그의 얼굴은 온 몸의 기운이 다 빠진 듯 한 없이
창백해 보였다.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집사님… 천지를 지으신 능력의 하나님은 집사님을 온전히 회복시킬 수 있는
분이시랍니다. 우리 그 능력을 구해요. 하지만… 어쩌면 지금 이 고통의 기간이 길어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우리 하나님께
견딜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해요. 그리고… 어쩌면… 하나님이 집사님을 천국에 데리고 가실 수도 있어요.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 만날 준비도 하면 좋겠어요. 천국은 참 좋은 곳이거든요. 저도 할 수만 있다면 빨리 가고 싶은 곳 이구요…”
진심이었다. 천국은 나를 사랑하사 친히 자신의 생명을 버리신 예수님의 얼굴을 직접 뵈올 수 있는 곳이고, 죄와 불의가 없는
하나님의 영광만이 가득한 곳이다. 천국은 정말 좋은 곳이고 사모할 만하며 기대해도 좋은 곳이다. 덕용 집사님이 나지막하지만
단호하고 힘 있는 소리로 말씀하셨다. “네, 사모님… 저 사모님이 무슨 말씀하시는지 다 알아요. 저 주님 만날 준비 다
되었어요. 얼른 가고 싶어요…”

그리고 얼마 후 덕용 집사님의 소천 소식을 들었다. 장례식장에서 집사님의 영정 사진을
바라보았다. 나도 모르게 기쁨의 미소가 지어졌다. “집사님, 축하해요… 천국 좋지요?” 이 세상에서 육신의 고통과 질병
가운데 48년 인생을 살면서도 결코 불평하지 않은 덕용 집사님. 오히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 다하여 사람들을 넉넉하게
품고 섬기며 사신 분. 그가 가진 가장 강력한 사랑의 무기는 ‘따뜻하고 겸손한 마음’이셨던 우리의 친구. 이 땅에서 그렇게
겸손하고 아름답게 사셨던 덕용 집사님을 위해 하나님이 준비하신 사랑의 선물은 바로 ‘천국’이었다.

천국은 이 땅에서 좁은 길을 통과한 사람들에게 준비된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이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을 찾고 욕심을 채우기 위해 기복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희생은 아끼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천국’이 주어지지 않는다.(마25장) 하지만 이 땅에서 비록 낮은 자의 모습으로 고난 가운데 살더라도,
주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그분의 명령대로 이웃을 따뜻한 마음으로 섬긴 자에게 천국은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큰 사랑의
선물’이다. 이 선물을 받는 사람은 당연히 축하 받을 만하다.

[신선묵] “평신도 사역의 진정한 의미”

              요사이 우리 기독교 교회에서 많이 쓰는 말 중에 하나가 평신도 라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평신도라는 주로 전문 기독교 사역자에 반하여 종교를 직업으로 갖지 않은 신앙인들을 지칭할 때에 쓰는 말인것 같다.  현대 교회에서 이들 평신도들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재평가 하는 일과 더불어서 평신도들이 교회 사역에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하는 많은 움직임이 있다. 그런데 평신도들에 대한 재평가와 그들을 적극적으로 사역에 관여하게 하고 또 교회 안에서의 지도력의 위치에 설 수 있게 하는 경향에 대하여 한편으로는 적극 환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평신도들의 삶과 사역 그리고 지도력에 대하여 좀 더 깊은 본질적인 의미의 재평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이 되어 이 글을 적어본다. 결론부터 말하면 평신도들의 참다운 가치는 소위 말해서 교회 안과 종교적인 일들 속에서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비종교적인 일 속에서 그 참다운 가치가 인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번은 김진홍 목사님 설교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식당을 운영하는 성도님을 심방하러 가셨다고 한다. 그런데 큰 식당을 잘 운영하시는 분이신데 목사님의 심방을 받으면서 목사님의 손을 꼭잡고 하는 말이 목사님, 죄송합니다. 제가 한 일이년만 더 식당하고 그 다음에는 다 접고 주님의 일을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까? 지금 하고 계시는 이 식당 일, 이 일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건강한 음식을 먹여 주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라고 반문 하였다고 한다. 웃기는 이야기 같지만 사실상 우리 기독교인들의 생각과 언어 중에 바로 이 성도와 같은 것을 많이 발견할 수가 있다. 종교적인 일이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한 선교 단체의 사역자들에게 강의를 한 적이 있다. 그 분들은 한국의 유수한 대학교를 졸업하고 각 분야에서 탁월한 학자, 교수, 그리고 전문가들이었다. 그 분들이 그런 일을 하면서도 동시에 사람들을 모아서 성경 공부를 시키고 제자들을 양성하는 정말로 이중으로 탁월한 분들이셨다. 그런데 수업 중에 그 분들에게 자신들의 사명과 사역과 은사를 정리하게 하는 숙제를 드렸는데 그 분들이 (엄격하게 말하면 사이드로 하는) 종교 사역만을 쓰고는 자신들의 직업 분야에 관하여서는 별로 영적인 사명의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이 은사가 탁월한 분야이고 그들의 대부분의 시간과 열정을 쓰는 분야이고 상당히 가치가 있는 일들이지만 그 일들 속에서 영적인 사명 의식을 표현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종교적인 사역자가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모습이 있는데 반드시 건강하다고만 생각되지는 않았다. 물론 세상 속에서 자기 분야에서 탁월하던 사람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전문 종교인도 될 수가 있지만 그것이 신학적 선교학적으로 세상 속에서 하는 일 (종교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일)자체에 영적이고 선교적인 의미를 충분히 부여하지 못해서 오는 것이라면 건강하지 않은 것이다. 종교적인 일만이 영적인 가치가 있고 비종교적인 일 속에서는 종교적인 일과 상응하는 영적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다.

 

             평신도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그들을 사역으로 이끌려는 많은 노력들이 현대 교회에 있다. 그런데 그 경향을 대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 주로 종교 전문인들이 교회 사역을 독점하던 것에서 평신도들도 교회 안에서 지도력을 실행해야 한다는 의미로 사옹되는 것 같다. 주로 평신도들이 종교 전문 사역자의 보조 역할을 담당하는 것을 의미하고 때로는 자신의 전문 분야와 관련이 있는 일들로 봉사하는데 이런 평신도 사역은 평신도들의 인력을 세상으로부터 교회 안으로 더욱 끌어들리는 효과가 있다. 이것은 평신도들을 적극적으로 종교 활동에 끌여 들인다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지만 평신도들이 세상 속에서 선교적인 사명을 감당하기 보다는 도리어 그들을 세상으로부터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기만 하는 부정적인 영향도 있는 것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에 세상 속에서 그들의 삶의 대부분을 쓰는 그들의 직업 (비종교적인 일)은 교회와 종교적인 일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이런 평신도의 회복은 교회성장을 위한 인적 자원 동원이라는 점에서는 가치가 있지만 온전한 평신도들의 진정한 가치 회복이라고 볼 수 는 없다.

 

            둘째로 좀 더 열려진 자세로는 평신도 사역이라고 했을 때에 평신도들로 하여금 세상 속에 나아가서 역할을 하도록 가르친다. 즉 선교적인 삶을 살 것을 도전한다. 그런데 세상 속에서 가능하면 종교적인 일들을 하도록 훈련시키고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앞의 것보다는 좀 더 적극적인 의미의 평신도 사역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사업체를 하지만 그 속에서 손님들에게 전도지를 나누어 주어야 영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직장 속에서 예배를 보고 신우회를 만들고 교회가 아닌 세상, 즉 직장 속에서 종교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동료들에게 전도한다. 앞에 것보다는 좀더 적극적인 의미의 평신도 사역인 것이다.

 

             위의 두 가지 태도는 평신도를 새로이 평가하고 또 그들에게 적극적인 역할을 부여하지만 아직도 그들의 세상 속에서의 삶, 그 자체를 종교적인 활동과 동일한 선상 위에서 보지 않고 있다.  이런 태도에 비하여 나는 평신도들의 세상 속에서의 삶과 일, 그 자체가 교회 안에서 혹은 밖에서 하는 종교적인 일과 동일한 영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평신도들을 종교적인 역할과 활동에 더 많이 끌여들이는 것보다는 도리어 세상 속으로 더 많이 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평신도들이 세상 속에서 감당해야 하는 일은 종교적인 일이 아니라 그들이 세상 속에서 담당한 역할 자체에 충실한 것이 선교적인 삶이라는 의식을 갖게 해야 한다. 오해 말 것은 앞의 두 가지 의미에서의 평신도 사역을 가치가없다거나 부인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것도 가치가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평신도들의 중요한 가치는 가치는 그들의 세상 속에서의 삶 속에서 주워져야 하는 것이다. 선교란 종교적인 일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비종교적인 일들을 바른 영적인 자세를 가지고 감당할 때에 선교적인 삶이 되는 것이다. 기독인들이 세상 속에서 종교 활동을 하는 것이 통해서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그들이 맡은 역할들을 진실되게 감당할 때에 그들이 도리어 기독교의 진리에 매료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인이 세상 속에서 얼마나 많은 종교적인 일을 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영적으로 세상 속에서 기능하는가가 중요한 선교적인 이슈인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속에서 하는 일 자체가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명 의식을 갖게 하고 세상 속에서 하는 일도 먹고 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의 삶을 드린 결과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라는 의식으로 하게 하는 것이다. 평신도의 삶과 일에 대하여 이런 의미를 부여할 때에 평신도는 더 이상 덜 헌신된 그리고 앞으로 진짜 헌신해야 할 (다시 말해서 전문 종교인이 되어야 할) 이등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아니라 전문 종교인과 동등한 하나님 앞에서의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전문 기독교 사역자와 평신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역할과 기능의 차이이지 가치의 차이가 아닌 것이다. 평신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가치를 인정받기 위하여 꼭 종교적인 활동을 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세상 속에서 하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영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다.

 

             우리 평신도들이 교회 공동체의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고 또 힘을 얻지만 교회 속에만 머물러있는 나약한 신앙인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신앙인이 되어야겠고 세상 속에서도 종겨적인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분야와 일터에서 소명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세상 속에 빛과 소금이 되기를 바라면서 글을 적어본다. (lead2serve.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