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정] 커피전문점에 임한 하나님의 임재

지난 3월 말, 정신없이 돌아가는 서울이라는 대도시 속에서
영주권 분실로 귀국 일정이 한 두주 늦춰진 붕뜬 상황에서
사랑하는 교회와 가족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으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한국을 떠난 10년의 세월이 주는 단절감에 어디를 가나 낮선 건물과 도로,
새로운 시설들이 문화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방문 2주째 화요일, 대사관에서 기대했던 출국 일자 답변을 듣지 못해 낙망해 있던
날…
정신없이 바빴던 지난 2주 만에 저녁 약속 전 두 시간 넘는 여유가 있었고
허탈한 제 발걸음은 인근의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향했습니다.
재미있는 영화 제목들이 눈에 띄었으나 다 바람 같았습니다.
 
무엇을 볼까 10여 분간 씨름하다가 표사는 줄에도 섰지만
결국 마음이 내키질 않아
포기하고 바로 옆에 있는 영풍문고로 향했습니다.
이런 저런 책들을 뒤적이다가 아주 작은 책 하나가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로렌스
형제의 “하나님의 인재연습”이라는 고전입니다.


17세기 프랑스, 주방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수 많은 신자들에게 큰 영향을 준
로렌스 형제의 편지 내용입니다.
이 책을 들고 서점 안에 있는 작은 커피전문점 구석에 앉아 읽어 내려갔습니다.
 
요지는 이렇습니다.
보통 삶이 최고조에 있을 때나 최악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만
분주한 집안 일, 지친 사회 활동, 일상의 단조로움 속에서
심지어는 교회 사역이라는 종교적 활동 속에서도
일에
파뭍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로렌스 형제는 수도원 한구석에 있는 허접한 주방일을 십 수년 하면서
바로 그
현장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주변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는 기도 시간이 다른 시간과 다르다는 것은 대단히 잘못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교회나 일상의 모든 행위 속에서 하나님의 깊은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읽어 내려가다 제 마음을 때린 구절을
소개합니다.
 
“우리는 영적 생활을 시작할 때
자기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철저하게 살피고
돌아보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모든 멸시를 받아 마땅하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자격도 없으며
온갖 불행과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당해도 마땅한 존재하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 상황을 겪으면서 우리는 건강을 잃고 내적, 외적으로 몹시
괴롭겠지만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겸손케 하신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차후에 사람들로부터 괴로운 일이나 유혹, 반대

그리고 반박을 당하더라도 이상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한 오히려 순수하게 그 일들을 감수하고 감당해야
한다.” (p. 52,53)
 
허탈감에 정신줄 놓고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선택한 영화관람 발걸음…
한국 오면
영어의 스트레스를 벗어나 편하게 한국 영화 하나 보고 싶었던 작은 바램…
그것 마저 내려놓았을 때 하나님께서 제 영혼에 맺혔던 앙금
하나를 풀어주셨습니다.
 
지난 10여일간 한국 땅의 예배회복을 위해 밤낮으로 뛰어다니면서 드러난 열매들을 보면서

제 안에 의로운 삶, 거룩한 삶에 대한 일종의 영적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이토록 주께 헌신하는 나름 ‘의인’의 간절한 바램을
외면하시고
왜 이런 고통의 시간을 허락하시는지에 대한 자괴감에 빠져 있었는데
로렌스 형제의 이 평범한 문구 하나에 제 마음이 녹아
내렸습니다.
높아졌던 제 마음을 겸손케 하시는 성령의 깊은 터치를 경험했습니다.
로렌스 형제의 추구처럼, 소란스럽고 복잡한 일상의
한 커피전문점 공간이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 채워진 눈물의 은혜를 겸험했습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시는 여러분들의 바쁘고 급한 일정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한 색다른 은혜의 시간을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이유정(한빛지구촌교회 예배목사, CCM 듀엣 좋은씨앗)
 

[최주희] 아들 이야기

나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다. 침례신학대학에서 선교학을 가르치는 남편(이현모 교수)과의
사이에 있는 유일한 자녀이다. 남편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나라도 가난했고 우리들의 가정도 불우했으며 더욱이 신앙도 없는
가정이었기에 ‘행복한 가정’에 대한 느낌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우리 아들은 달랐다. 신앙적으로나 세상적으로 많은 것이 갖추어진
‘행복한 가정’에서 마음껏 즐기고 누리며 큰 아쉬움 없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이었다. 우리는 이 아들에게 굳이 험난한 환경을
일부러 제공해주지는 않았으나 양육하면서 한 가지 강조한 것이 있다. 그것은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섬기는 삶’이었다. 즉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거나 무시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사는 삶이었다. 지금 기억하면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고 부지런히 삶 가운데 사람들을 사랑하는 연습을 하였던 것 같다. 아들이 초등학교 2학년 때 학교
문집에 실렸던 내용이다. 제목은 ‘고아원’이다.

오후에 어머니와 함께 고아원에 갔다. 그 곳의
아이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어렵게 지내고 음식도 나빴다. 그래서 우리가 저녁 식사에 불고기를 만들어 주었더니 모두들 맛있게
먹었다. ‘고아원 아이들은 너무 불쌍하다. 나는 먹고 싶은 것은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데…, 여기서는 반찬이 두세 개 밖에
없다니 얼마나 먹고 싶은 것이 많을까? 그들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보고 싶지 않을까?’ 나는 이제야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깊이
깨달았다. 이제부터는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음식도 주시는 대로 골고루 맛있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어야겠다. 다음에도 맛있는
음식을 가지고 어머니와 이곳에 오고 싶다.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 여름 방학 때, 출석하고 있는 교회(대전 대흥침례교회)에서
장애우들을 모시고 바다로 캠프를 갔다. 그 당시 근육병을 앓고 있는 어느 형제가 평생 바다에 한 번도 가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장애인 위원회 위원장과 사역자들이 그를 위해 바다 구경을 계획하였던 것이다. 그 때 3박4일을 강원도 옥계에서 보냈었고 아들은
섬기는 사람으로 동행하였다. 여름 방학을 마칠 무렵, 아들이 방학 숙제로 글을 썼다고 가져왔다. 제목은 ‘사람의
아름다움’이었다. 내용을 보니 장애우들을 모시고 캠프 갔던 내용이었다.

이번 여름방학 때 어머니와
함께 장애인 선교 캠프를 갔다. 그저 봉사하자는 마음으로 갔었는데 중요한 것 한 가지를 깨달았다. 그것은 누구나 한 가지 이상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첫째 날 버스를 타고 갈 때에 내 앞자리에 심**이라는 뇌성마비에 걸린 형을 보게 되었다. 그
형의 눈은 누구도 이길 자 없을 정도로 맑고 아름다웠다…(중략) 이튿날 아침에 새벽예배를 드렸다. 나는 아침 식사 때에
장애인 분들이 식사를 하시도록 음식을 날라다 드렸다. 모두 음식을 받으시는 얼굴에 가벼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중략) 그
중에서도 캠프 시작부터 끝까지 웃음과 미소를 띤 송** 형이 너무나도 귀하고 아름다웠다…(중략) 마지막 날까지 생활하며 나는
많은 이익을 얻었다. 사람이 정말로 귀하고 아름다운 것을 하나씩 이상은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지금은 이 아들이 군대에 갔다. 훈련병 4주째이다. 그가 군대에서 보내 온 몇 통의 편지를 읽으면서 하나님께 참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얼 차례 받고 혼날 때에도 살 빠지고 몸 건강해지겠단 생각으로 기분 좋게 받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 의지하면서 긍정적으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두번째 편지)

살이 쭉쭉 빠지고 얼굴은 시꺼메지고 완전군인
되어가고 있엉ㅋㅋ 근데 여기서 사람들이랑 친해지고 또 말씀 암송 카드 보면서 하루하루 감사히 많은 것을 배우고 있어요. 항상
남들보다 조금 잘났다고 생각하던 나의 오만함과 자만함이 여기선 아빠 말대로 nobody가 되어 더욱 더 낮아지고 깨어지는 내
모습에 감사하고 있어요. 또 하나님이 헌신하는 마음을 계속 주셔서 빨래나 이불정리나 뭐 해야 될 것을 좀 더 빨리 끝내고 미비
된 사람들 도와주고 있어요. 대신 빨래도 해주고 구두도 닦아주고 청소도 해 주고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 나를 위하기보다 남을 위해
사용할 수 있어서 정말 너무 감사하고 그럴 때 마다 마음도 기쁘고 평안해져. 그래서 너무 기쁘고 좋아(3번째 편지)

불침번 말고 경계근무라고 야간에 실제 야외에 있는
초소에 가서 총 들고 망보면서 한 시간 씩 서는 것이 있는데 한 형이 감기몸살로 힘들어 하기에 내가 대신 섰어용. 그런 생각나게
해 주셔서 너무 감사하고 기분도 좋았어요. 날 이해 못하는 애들도 있지만 사람들을 위해 섬기고 헌신할 수 있는 시간 허락해
주셔서 너무 감사해. 그동안 너무 나 중심적이고 나만을 위해 살았던 것 같은데 군대란 시간을 통해 그런 모습을 깰 수 있어서
너무 기뻐요.(4번째 편지) 

어느 누구도 자식의 일에 대해 큰 소리 칠 수 없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자식에 대해서만큼은 늘 조심스럽고
두렵다. 하지만 군대 간 아들의 편지를 읽으면서 ‘So far so good!(지금까지는 좋아!)’이란 마음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면 좋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시고 기대하시는 ‘사랑의 삶’은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고 그리 멀리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있는 곳에서 고개를 한번 들고 주변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곁에 있게 하신 귀한
사람들에게 겸손하게 마음을 여는 것이다. 신기한 것은 그런 마음은 반드시 선한 행동으로 저절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신선묵] 영적 지도자와 하나님과의 친밀함

나는 영적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강의를 하면서 가장 먼저 질문을 하곤 한다. 여러분이 가정에서 배우자와 맺고 있는 관계의 친밀함에 1점에서 10점 사이에 점수를 준다면 몇 점을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두번째는 당신이 신앙인으로써 주님과 당신의 친밀함에 점수를 준다면 몇 점을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왜 그렇게 점수를 줍니까?  하나님과의 친밀함이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영적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과의 친밀함 즉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그와 동행하는 것은 모든 삶과 사역을 가능케 하는 능력의 근원이자 그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이기 때문이다.

 

첫째, 주님과의 친밀함은 우리 삶과 사역의 출발점이자 능력의 근원이다. 지도력이란 영향력인데 일반 지도력과 영적 지도력의 근본적인 차이는 세상 지도력과는 달리 영적 지도력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기반을 지도력이라는 점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하여 이루어지고 하나님께 모든 것이 귀속되는 것이 영적 지도력이다. 그래서 클린톤 교수는 영적 지도자로써 집중된 삶을 살아가는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하나님 자신께 집중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님과 친밀함에 깊이 나갈 때에 영적 지도력을 발휘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은 예수님의 속에서도 수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의 가운데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시간을 갖는 것을 수가 있다.

  

둘째, 주님과의 친밀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가능케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듣고 싶어한다. 그런데 음성을 듣기 위해서 선행되어져야 하는 것이 있는데 관계이다. 우리가 가운데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사람이 말하는 것의 의미를 이해할 있는 것은 서로 친밀한 관계 속에 있을 때이다. 관계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신뢰할 있고 음성을 들을 뿐만 아니라 음성의 내용을 따르기도 하고 때로는 나의 삶을 거는 모험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관계가 두터울 때에 우리는 굳이 입으로 말로하지 않다라도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어서 말이 필요없이 의사소통이 가능할 때도 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는 때로 하나님께 말씀을 하시라고 절박하게 간구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견고하게 있지 않을 때에 하나님은 말씀하실 수도 우리는 들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다는 것은 단지 순간의 일이 아니다. 끊임없이 사소한 일부터 꾸준히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작은 위기와 오해를 거쳐가면서 점차적으로 깊어져 가는 관계이며 그런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더욱 확실하게 들을 있는 것이다. 달라스 월라드는 그의 하나님의 음성에서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말씀을 우리 가운데서의 그분의 임재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 분의 생명의 한 부분으로 보지 않는 한,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은 이해 할 만하고 믿을 만한 인생의 현실이 될 수 없다. 하나님과의 교제만이 하나님과 의사 소통을 할 수 있는 올바른 장을 제공한다.” 

 

세째, 주님과 맺고 있는 친밀감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뿐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이해하게 되는 통로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일을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감 속에서 그의 마음을 알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사명이란 어디서 뚝 떨어지는 명령이 아니라 친밀한 하나님의 마음을 함께 느끼고 그의 목적과 관심사를 이해하게 될때 생기는 자연스러운 반응인 것이다. 하나님과 친밀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함께 느끼지 않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사명을 받는다는 것은 모순이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는 비전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과의 친밀함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비젼을 이해하지 않고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비젼을 받을 수가 없다. 나 홀로 나의 비젼을 세울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진정한 하나님의 비전은 하나님과의 친밀함 속에서만 주워지는 것이다.      

 

네째, 주님과의 친밀함은 그 자체가 다른 것을 위한 수단인 것이 아니라 우리 삶과 사역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별세 신학으로 알려진 이중표 목사님은 그의 골방 기도에 관한 다음의 글에서 이 점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주님의 골방의 깊은 기도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원하기 때문에 골방을 찾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부흥의 위해, 능력받기 위해 기도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다만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도하는 시간이 필요하고 주님과의 대화가 행복하기에 골방의 기도하는 시간이 필요하고 주님과의 대화가 행복하기에 골방의 기도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헨리 블랙커비는 그의 책 영적 리더십에서 하나님은 리더들에게 당신 대신 큰 꿈을 꾸라거나 당면한 문제를 알아서 해결하라고 하시지 않는다. 다만 당신과 친밀하게 동행할 것을 요구하신다라고 이 점을 강조하였다. 요한복음에 보면 주님께서 자기를 부인하였던 베드로를 찾아와서 회복시키시는 모습이 나온다. 주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주님이 십자가를 지으실 때에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기에 그가 스스로 많이 괴로워하였을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씩이나 (베드로가 부인했던 숫자 만큼) 물으시고 베드로의 긍정적인 대답에 내 양을 치고 먹이라고 사명을 주셨다. 이 성경 구절에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시는데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단 한 가지를 물으시고 사명을 주신다는 것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가?” 우리는 우리 삶 속에서 사명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 사명의 짐으로 인하여 힘들어하고 괴로워 할 때가 있다.  어떻게 이 사명을 감당할 것인가 불안할 때도 있다. 그러나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주님을 정말로 사랑하는 가이다. 내가 주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가 궁극적인 질문이다. 주님과의 친밀함은 사역을 위한 근원이자 수단인 것을 넘어서 그것 자체가 우리의 모든 삶과 사역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풀러신학교의 로버트 클린톤 박사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둘만의 사적이고 개인적인 관계를 말한다. 이 관계 속에서 서로의 애정을 느끼고 관심을 나누고 하나님과의 경험의 축척으로 하나님과 점증하는 친밀한 느낌을 갖게 된다. 이런 관계는 다음과 같은 친밀하게 느껴지는 순간들을 통하여 생겨난다: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는 순간, 진리가 계시되는 순간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보여주시거나 나누실 때, 하나님으로부터의 확인의 시간,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데스티니가 실현되는 순간, 믿음의 순간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에, 위기 가운데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때, 헌신의 시간들, 회개, 갱신 등의 모습들로 나타난다.” 구약에서는 다윗이 그의 시편들을 통하여 볼 때에 하나님과 깊은 친밀감을 누리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으며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물론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누려야할 친밀함의 모습을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또 그 관계 속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신다.

 

친밀함이란 관계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그 끝이라는 것이 없다. 우리가 삶 가운데에서 주님과 동행함으로 더욱 깊은 친밀감으로 나아가기를 소망하고 나아갈 뿐이다. 이런 관점 속에 있을 때에 우리의 삶의 모든 경험들은 우리를 하나님께 더욱 다가서게 만든다.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 갈수록 더욱 깊은 친밀함을 사모하는 것이 영적 친밀함의 모습이다. 마지막으로 짐 파이커의 말이 우리를 도전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여정에서 많은 장애가 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대표적인 장애는 우리 자신의 성장에 안주하고 더 이상 열심히 주님을 구하지 않는 것이다.” 당신은 주님과의 맺고있는 관계의 친밀함에 몇 점을 주겠는가? (lead2serve.tistory.com)

[최주희] 스스로 만든 상처

  하나님이 우리 주변에 있게 하신 사람들을 사랑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상처이다.  상처는 우리가 사람을 이해하고
섬기며 사랑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막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사랑 거부의 행위’를 타당화 시키며 합리화시키기도 한다. 
그런데 먼저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내가 생각하는 그 상처가 상처라고 표현하기에 타당한 상처이냐 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런 질문에 대해 본인이 상처를 받았다고 느꼈으면 다 상처인 것이지, 그것을 굳이 구분할 필요가 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의외로 타인이 상처를 주었다기보다는 스스로 상처를 만든 경우가 더 많다.  이것은 상처가 아니다.

  상처를 스스로 만든 상처와 상처라고 불리기에 타당한 상처로 나눈다면 후자는 십계명에 근거한다.  이것은 어느 누가 보아도 큰
아픔이며 억울함이고 위로받아야 할 상처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의사의 실수로 사랑하는 아들을 잃게 되었거나, 음주
운전자로부터 사고를 당하여 다리를 잃은 사람, 혹은 잘못한 일도 없이 폭행을 당한 사람, 남편의 외도 혹은 아내의 외도, 아껴
모은 돈을 사기 당하거나 보증을 잘못 선 대가로 집을 날리는 경우, 억울하게 모함을 받아 고통을 겪는 사람… 

  이뿐 아니다.  방어능력이 없는 어렸을 때 경험한 부모로 부터의 방임이나 학대도 큰 상처이다.  부모의 무관심으로 반드시 필요한
돌봄이나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평생 한이 맺힌 사람도 있다.  아버지로부터 주먹이나 흉기 등으로 구타를 당하고 어머니로부터
언어폭력이나 정서적 위협을 받는 것도 큰 상처이다.  어렸을 때의 이런 경험은 어른이 된 후에도 그 후유증이 나타나고 많은 일의
걸림돌로 작용하여 삶에 통증을 안겨다 준다.

  위에 기술한 고통과 아픔은 모두 상처라고 불리기에 타당한 상처들이다.  상처받은 사람들은 그들의 상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주님께
토로할 수 있으며, 자비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그 상처를 만지시고 위로해 주실 뿐 아니라 치유해 주신다.  그리고 그 아픈
과거를 재료로 하여 너무나 복된 상황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신다.  마치 상처가 없었으면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일이 생길 수
있었겠는가 의심할 정도로 훌륭한 작품으로 만들어주신다.  이것이 바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고 능력이다.

  그러나 스스로 만든 상처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고에 몰입하여 마치 자신이 희생자인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그것은 대략 세 가지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신의 좁은 마음 때문에 생기는 상처이다.  사람을 이해하고 용납하는 마음의 용량이 부족하여, 별 것 아닌 말 한마디나 작은
실수를 이해하지 못하고 상대방에게 정죄의 화살을 돌리는 경우이다.  사람이란 완전한 존재가 아니어서 실수를 자주하고 미숙한 면이
많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런 연약함을 서로 이해하고 너그럽게 받아야 한다.  마음이 좁아 이런 너그러움이 없는 사람들은 작은
잘못과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못하고 스스로 상처받았다며 상대방을 탓하는 습관이 있다.  반면 자신이 당연히 책임져야 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회피하면서도, 그것을 요구받을 때에는 상대방을 까다롭다거나 혹은 지나치다 비난하며 자기에게 상처 주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두
번째는 낮은 자존감으로 인한 것이다.  자신에 대한 열등감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에 매우 예민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생기는 상처이다.  때론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하거나, 어떤 행동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확대해석 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때는
상대방의 의미 없는 행동이나 작은 실수조차 자기를 겨냥한 것으로 오해하여 스스로 상처를 만든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대해 지나치게 위협을 느끼거나 두려워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열등감이 있는 경우는 의외로 질투심이 많은데,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여러 면으로 비교하여 샘을 내며 자신이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스스로 상처받는다.

  마지막으로 욕심이 많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상대방이 자신이 기대하는 만큼 따라오지 못하면 그들에게 분노하고 정죄하며 싫어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로 인해 자기가 손해 보았다고 생각하여 그들이 자기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단정한다.  상대방에게 지나친 기대를
하거나 비현실적인 기대를 해 놓고 그 기준에 못 미치면 스스로 상처받는 경우이다.

  솔직히 위의 세 가지 상황 모두 기분 좋은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상처라고 표현할 만한 것은 못된다.  이때는 차라리 ‘내가
속이 상하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요즘 상처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남용하는 것을 많이
본다.  그리하여 점점 더 자기중심적인 생각만 키워가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 대해서는
책임회피 하고 있다.

  기독교가 사회적인 책임은 감당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유익만 구하는 이기적인 단체라 비난받고 있는 이 시점, 내가 생각하는 나의
상처가 혹 스스로 만든 상처는 아닌지 심각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그리고 건강한 자아로 욕심을 버리며 사랑의 용량을 키워 나갈
때이다.

2009년 코스타 주제 – 예수의 평화, 세상을 향한 용기







예수의 평화, 세상을 향한 용기


Shalom of Jesus, Courage against the World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복음 16:33, 표준새번역)



끝을 알 수 없는 어두운 길을 걷는 일은 두려운 일이다. 아무리 그 길이 가치 있고 소중한 길이라 할지라도 그 결과가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그 길을 가는 일은 우리를 쉽게 절망에 빠지게 한다. 그러나, 그 길의 끝에 밝은 결과가 있음을 확실히 알고 있다면, 더욱이 그 밝은 미래를 현재의 삶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면, 지금 가는 그 길이 아무리 어둡고 험해도 우리는 그 두려움과 싸울 수 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백성으로 사는 일도 이와 비슷한 것 같다.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고 있는 로마 제국을 무너뜨리기는커녕 바로 그 로마의 손에 잡혀 매 맞고 십자가를 지고 죽는 일, 세상의 가치로 볼 때 당연히 비난받아야 할 세리와 죄인들을 찾아가서 친구가 되는 일, 소외받고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베푸는 일, 한 사람의 가치를 효율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일, 원수에게 마땅한 대가를 치르게 하기보다 그 원수를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일 등은 예수께서 이 땅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삶의 모델이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우리가 선뜻 들어서기에 두렵고 좁은 길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런 두렵고 좁은 길을 당당하게 걸어가셨고, 우리에게도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말씀하시며 당신이 가신 그 길에 담대하게 들어서라고 초청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길 끝에 밝은 미래가 있음을 알고 있기에 그 어둡고 험한 길을 가며 두려움을 이길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그 길이 승리의 길이라는 것, 예수께서 세상을 이기셨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 명백한 증거는 바로 예수의 부활이다.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리고 바로 그 육체를 입고 다시 이 땅에서 부활하셨다. 생명이 사망을 이긴 것이다. 어떤 사람들의 말처럼, 예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만 부활하셔서 영원히 살아 계신 것이 아니라, 그는 실제로 새로운 몸을 입고 부활하시고 우리가 사는 이 땅 위에 사셨다. 동시에, 예수를 왕으로 모신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몸을 입고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아가게 될 것을 약속하셨다. 예수께서 부활할 모든 육체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이다.


그 길의 끝에 있는 밝은 결과, 그때에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이 바로 하나님의 평화(Shalom)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기대하시던, 하나님, 인간, 모든 만물 간에 창조질서가 완성된 모습이다. 평화(Shalom)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완성될 미래에 있지만, 동시에 지금 이곳에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새로운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주어진다.


만일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그 완성된 하나님의 평화(Shalom)를 경험할 수 있다면, 이 세상 속에서 어그러진 질서와 그릇된 세계관에 대항하여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절대 두렵지만은 않을 것이다. 혹시 있을 수 있는 현재의 고통과 어려움이 끝이 아님을 알기에, 또 우리가 결국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 때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태초로부터 의도하셨던 완성된 평화’(Shalom)에 거할 것을 믿기에, 우리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을 거스르는 용기를 가질 수 있다. 또한, 용기를 가지고 세상에 당당하게 맞서는 삶을 사는 가운데, 완성된 평화(Shalom)를 경험해 갈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어그러진 질서에 거스르는, 하늘의 가치를 가지고 이 땅을 살아내는 일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에게 밀어닥치는 그릇된 가치가 두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또, 그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좌절하고 넘어지기도 한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안전하다고, 또 많은 물질을 소유하면 평안이 주어질 것이라고 말하는 그릇된 사상에 우리는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또한, 소외된 자들을 무시하며, 효율을 위해 덜 중요해 보이는 사람들을 희생시켜야 한다고 속삭이는 유혹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할 수 있다. 우리는 당당하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세상을 살아낼 수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긍정하고 적극적 사고방식을 가지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승리가 주어졌기에, 그를 통한 ‘ 평화(Shalom)가 현실화되었기에 할 수 있다.


KOSTA-2009 운동을 통해 우리는 이 세상을 이기신 예수를 알기 원한다. 세상이 비웃는 십자가의 길을 가시고 죽으셨지만, 다시 부활하셔서 이 땅을 사신, 또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원한다. 결국에는 이 땅에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평화(Shalom)를 이루실 것이며, 지금도 성령님을 통해 우리 안에서 그 완성된 삶을 살게 하시는 예수를 경험하기 원한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미 승리하신 예수의 말씀을 따라 살 수 있는 용기를 다시 추스르고자 한다.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는 더 큰 불안으로, 가진 사람에게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욕망과 잃어버릴 것에 대한 또 다른 불안감으로 사람들을 노예 삼는 어그러진 풍조를 향해 진정하고도 유일한 대안을 우리가 삶으로 보여주기 원한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꿈을 잃어버린 세대를 향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Shalom)안에서 우리는 다시 꿈과 이상과 소망을 가질 수 있음을 선포하기 원한다.

[신선묵] “영적 지도자의 저널링”

 

 

기록의 힘은 참 크다. 한번은 학생 한 분이 늦은 시간에 전화를 하였다. 3년전 쯤에 단기 선교를 함께 갔다가 왔는데 그 날짜가 정확히 언제였는지 혹시 아는가 하고 물었다. 내일 학교에 가서 서류를 살펴서 알려 주겠다고 하였더니 내일 아침 이른 시간에 관공서에 그 기록을 가지고 가야한다고 급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어떻게 하나 고민하던 중에 갑자기 나의 소식통이 생각이 났다. 한 달에 한 두번씩 지도력에 관한 글을 적고 나의 삶에서 중요한 사건과 기도 제목을 적어서 사람들에게 이 메일로 보낸 것이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3년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가니까 그때 갔던 단기 선교에 관하여 자세히 기록이 되어 있었다. 이런 기능으로 사용할 것은 꿈에도 생각을 못하였는데 기록해 둔 것이 이렇게 요긴하게 쓰였다.

 

클린톤 교수는 성경 속에서 느혜미아를 관찰하면서 느혜미아서가 하가랴의 아들 느혜미아의 말이라라고 시작되는 데에서 하나의 의미를 부여하였다. 일반적으로 다른 성경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예언자에게 주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라는 식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느혜미아는 선지자도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직접적인 계시를 받은 사람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경험한 일들을 적어놓고 있는데 그것들이 성경 속에서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클린톤 교수는 저널링의 중요성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다. 우리 삶에 발생하는 일들 특히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또 하나님의 관점 속에서 모든 일들을 기록하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클린톤 교수는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저널링의 중요성을 다섯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는 저널링을 날짜를 기록해두면 하나의 벤치 마크가 될 수가 있다. 삶에서의 중요한 성장 혹은 쇠퇴 등을 볼 수 있다. 둘째는 기록을 해두면 우리가 잊어버리기 쉬운 것들을 기억할 수가 있다. 저널을 가끔 되돌아 보는 것도 중요한데 하나님을 새로이 찬양할 수 있게도 하고 그가 이전에 하신 것들을 되돌아서 기억할 수도 있게 해 준다. 세째는 저널링을 하다 보면 우리의 생각을 더욱 명확하게 해주고 우리가 배운 것들을 더욱 확실하게 해준다. 네째는 저널링은 우리로 하여금 갱신하고 회복하게 도움을 준다. 우리 신앙 생활이 점점 더 나태해질 수 있는데 그럴 때에 저널링이 우리를 일 깨운다. 우리가 자라나는 젊은 지도자들에게 좋은 모범이 될수가 있다. 다양한 종류의 저널링은 다른 이들이 성장하는데 도움을 줄 수가 있는 것이다.

 

나도 개인적으로 우연한 기회부터 저널링을 시작하여 지난 5-6년에 걸쳐서 저널링을 하고 있다. 나는 저널링의 여러가지 형태 중에서 주로 개인적인 묵상과 기도 그리고 하나님과의 대화를 적는 편이다. 그리고 작년부터는 운동, 아내와의 관계, 자녀와의 관계, 그 외의 식구들과의 관계, 강의, 멘터링, 행정, 배움, 글쓰기, 그리고 사람들에게 지도력에 관하여 글을 보내는 소식통 등의 저널을 하고 있다. 이런 저널링을 통하여 내가 배운 또 하나의 진리는 저널링을 하면서 관찰력이 생겼다는 것이다. 수영을 배우면서 저널링을 하고 있는데 매일 몇 가지씩 깨달은 점을 적는다. 그런데 저널링을 하면서 그 날의 배운 것을 되돌아보고 복습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고 배울 때에도 지금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개념화 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둘째 하나의 주제에 집중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냥 놓쳐버릴 수 있는 것들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도구가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소식통을 적으면서 지도력이라는 주제에 관하여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그 주제에 대하여 끊임없이 글을 쓰는 습관이 생긴 것이다. 이렇게 모아진 글들이 지도력에 관한 나의 글의 많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이 글도 그런 관찰들이 모아져서 된 글이다.

 

내가 하는 저널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저널링이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쌓아 나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구별된 시간을 드린다는 것과 저널링을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친밀감이 하나님께 드린 구별된 시간 만큼 쌓인다면 동시에 기록해 둔만큼 쌓이기도 한다. 그리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 같은 경우는 글로 적으면서 생각이 많이 정리되는 스타일이다. 기도하다가도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못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구별할 수 없을 때에도 글로 나의 마음을 쏟아내다 보면은 어느샌가 하나님의 임재가 분명하게 느껴지고 또 하나님의 뜻이 하나씩 실타래 플리듯 구별되는 경험을 하고는 한다. 또 어떤 때에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도 나의 확신이 흔들릴 때가 많이 있는데 물론 내가 하나님의 뜻을 잘못 분별하였으면 얼른 바꾸어야겠지만 그렇지 않고 나의 내면의 불안함과 두려움 때문에 확신을 흔들릴 때에는 이전에 기록한 기도를 보면서 재확신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아마 나에게 있어서 영적 훈련 중에서 가장 중요한 틀 중에 하나는 저널링이 아닌가 싶다. 저널링을 통하여 나는 더욱 나 자신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지난 학기에 학생들에게 교수법을 가르키면서 이론적으로 공부한 뒤에 학습 토론을 위하여 “Freedom Writor” 라는 영화를 함께 보았다. 한 백인 젊은 교사가 위험하기 짝이 없는 Inner city 에 있는 학교에 부임하여 아이들을 교육하는 이야기이다. 폭력과 인종간의 갈등으로 물들고 교육가들조차 포기해 보린 아이들 속에서 학생 자신들의 이야기를 찾게해주고 서로의 이야기를 말하게 하고 듣게 해줌으로써 소망이 없던 아이들에게 그들의 버려진 삶을 회복하고 서로간에 참을성을 배우고 세상을 변화해 가는 이야기이다. 이 영화 속에서 교사 Erin Gruwell은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목소리를 찾게 해주기 위한 수단으로 저널을 쓰게 한다. 교사가 읽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아무런 부담없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써 나아가면서 그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고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우리의 영성 생활 속에서도 때로는 우리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리기 쉬운 때가 많다. 그러나 저널링을 통하여 나 자신의 참 소리, 갈등, 내면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음성을 듣는 경험을 하면서 하나님과 나와의 개인적인 친밀감이 깊어지는 경험을 한다. http://lead2serve.tistory.com/

[최주희] 성 내 과

  나는 사람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리고 어떤 직업 혹은 어떤 위치의 사람이건 별로 어려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수년 전만 해도 어려운 사람 두 부류가 있었다.  한 부류는 택시 기사 분들이고 다른 부류는 의사선생님이었다. 

  택시 기사 분들이 어려운 이유는 교통법규와 상관없이 속력을 내거나 빨간 불에도 마구 지나가는 담대함 때문이었다.  놀란 가슴으로
소리를 지르고 싶어도, 백미러로 보이는 기사님의 무섭고 짜증나는 눈빛이 나의 입을 막고 숨을 죽이게 했다.  물론 그렇지 않은
분들도 많이 계시다.  의사선생님들도 어려웠다.  흰 가운을 입은 최고의 전문가를 코앞에서 일대일 대면하는 것만으로도 주눅
들었다.  또한 과묵한 얼굴과 많은 사람들을 대하느라 지쳐있는 표정을 보는 것은 마치 질병을 가진 내가 죄인인 것처럼 느끼게
만들기도 했다.  게다가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싶어도, 그것이 무식한 질문이 되어 의사선생님의 피곤을 가중시키는 것은 아닌지
머뭇거리며 눈치 봐야 했다.  물론 의사선생님들 역시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작은 병원이라도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경영마인드와 서비스 정신이 필수이고, 행여 병원에 대한 입소문이 부정적으로 나기라도 한다면 하루아침에 환자가 급격히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세월이 지난 지금은 택시 기사 분들도 의사선생님들도 어렵지는 않다.  오히려 의사선생님에 대해 깊은 감사와 감동을 느끼게 되는데,
거기에 영향을 미친 병원이 바로 성 내과이다.  성 내과는 내가 살고 있는 대전 유성구에 위치하고 있다.  성 내과에서 진료
받기 위해서는 최소한 한 두 시간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대기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매우 지루하다.  하지만 진료를
받고 나올 때는 기다림의 불편함은 간곳없고 만족과 감사의 표정이 사람들 얼굴에 역력하다.  바쁜 일상에서 한 두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이 병원으로 굳이 사람들이 오는 대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자그마한 체구에 겸손과 따뜻함이 배어 있는 여의사 성원장님에 대한 표현을 들어보면 이해가 간다.  ‘늘 환자를 환한 웃음으로
맞는다.’  ‘진료하시는 동안 환자들은 자신이 세상에 둘도 없는 귀한 사람으로 대접받고 있음을 느끼며 감격한다.’  ‘한 사람을
진료하는 시간이 길다.  그리고 절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진료하신다.’  ‘궁금한 것 마음 편히 물어봐도 되고, 의사선생님은
그림까지 그려가며 자상하게 설명하신다.’  ‘질병에 대한 다방면의 질문과 접근으로 큰 병을 미리 예방케 하는 명의(名醫)
이시다.’  ‘환자로 하여금 염려보다는 소망을 가지게 한다.’…

  성
원장님은 특별히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시간을 들이며 따뜻하게 대하신다.  연세 드신 할머니 할아버지는 물론,
근처 과기대(KAIST)에 다니는 외국인 학생 가족, 외국인 근로자, 선교사, 그리고 재정이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의지할
바위이기도 하다.  그들을 진료하시는 동안 시간을 많이 할애하기 때문에 대기실에 앉은 사람들 마음에 조바심이 생기기도 하지만,
마음 한편에서 느껴지는 훈훈함은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기에 충분하다.

  얼마 전에 들었던 일화이다.  미국에서 박사 후 과정을 마친 김 집사는 직장 일로 인해 아내와 어린 자녀보다 조금 일찍 한국에
귀국하였다.  아내는 집과 여러 짐 정리를 하고 귀국하려 하였는데, 그 사이 갑자기 어린 자녀가 많이 아팠다고 한다.  한국에
있던 김 집사는 놀란 가슴으로 성 내과에 가서 상담을 하였는데, 의사 선생님께서 그 증상에 대해 자상하게 설명해 주시며 처방한
약을 먹이면 괜찮을 것이라 안심시켜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적어주며 혹시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시간에 상관없이 전화 걸라고 하셨다고 했다.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람도 아닌데 안절부절 못하는 부모 마음 헤아려 주시고
함께 염려해 주시는 의사선생님께 너무나 감사하고 감격했다며 김 집사가 자랑하였다.  성원장님은 이렇게 누구에게나 사랑과 섬김을
다 하신다.  희귀병을 앓는 어린 아이 위해 좋은 약을 찾아 먼 나라 마다 않고 친히 방문하시기도 한다.  그래서 성 내과를
찾는 사람들은 그분을 ‘유성의 슈바이처’라 부른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으로 섬기는 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닌 듯하다.  그것은 평범한 하루 가운데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베풀 수 있는 일상생활이다.  이것이 어쩌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가장 쉬운 ‘하나님 사랑하는 방법’이 아닐까? 

[신선묵] 지도자의 선택과 양육

내가 섬기는 우리 월드미션대학교는 영적 지도자의 양성의 비젼을 가지고 1989년에 시작한 학교이다. 아직은 미약하지만 그래도 이민 교회 지도자들이 지도자들을 양성하기 위하여 정식 신학교를 세울 마음을 가지셨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비젼이었다. 그 이후로 우리 월드미션 대학교가 꾸준히 발전해 오고 있다. 풀러 신학교의 클린톤 교수에 의하여 효과적인 지도력을 산 지도자들을 살펴보면 그들의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가 미래의 지도자를 선택하고 훈련시킨다는 것이다. 진정한 지도자는 자기 자신만 영향력있는 삶을 사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음 세대의 지도자들을 배출하는데 관심을 쏟는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을 세우는 것이 그 다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일이다. 우리가 다음 세대의 기독교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다음 세대를 위한 영적인 지도자들을 세우는 일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께서도 그의 사역 가운데 많은 일들을 하셨지만 그 중에 세상 죄를 담당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을 제외하고 가장 중요한 사역은 아마도 지도자들을 선택하여 그들을 훈련 시키시는 것이었다. 지도자를 선택하시기 위하여 미리 기도로 준비하시고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서 훈련시키시고 일을 맡기시고 그들을 통하여 교회를 세우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을 떠나면서 가서 제자를 삼으라고 부탁하셨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선교 대사명으로 알려진 마태복음 28:19-20절 말씀은 교육 대사명이기도 하다. 사람들을 제자를 삼아서 가르치라고 주님께서 마지막 명령을 하고 계신 것이다.

사도 바울도 열심히 여러가지 사역을 하셨지만 그가 중요시 여긴 것은 사람을 키우는 일이었다. 디모데나 실라 그리고 디도를 함께 데리고 다니면서 사역을 하고 훈련을 시키신 것을 볼 수가 있다. 또한 그가 삶의 마지막에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말하였다. 이 성경 구절 안에는 한 구절이지만 네 세대가 들어 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가르친 것을 충성된 사람들에게 가르쳐라. 그러면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칠 것이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긴 안목을 가지고 복음의 말씀이 앞으로 몇 세대에도 지속되게 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교육이란 중요한 것이다. 우리 교회는 지도자들을 선택하고 배출하는 일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교회나 사역의 현장 속에서 우리는 준비된 사람을 찾아서 사용하려고만 하지 사람들을 키우려는 마음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필요한 사람을 찾는데 일꾼이 부족하다고 한탄 한다. 그리고 준비되지 못한 사람들을 사용하다가 힘든 일을 당한다. 그러나 사람을 사용하려고 찾기 이전에 사람을 찾아서 양육시키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과제이다. 특별히 지도자는 이런 일에 미리 관심을 갖고 전략적으로 시간과 정성을 투자 해야한다. 사람을 사용할 소모폼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개발시켜 줄 대상으로 대하는 것이다. 사람을 사용하기만 하려고 하는 조직은 당장에는 효과적일지 몰라도 결국에는 인재가 고갈되고 조직은 망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사람에게 투자하는 조직은 결국은 그 사람들을 통하여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된다.

요사이 많은 교회들이 교회 안밖으로 지도자들을 세워 나가는 일에 열심인 것을 보게 된다. 구체적으로 미래의 지도자들을 세워가는데 어떤 일들에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해 나아가야 할까? 

첫째, 우리는 앞으로 기독교적인 신앙과 세계관을 가지고 세상 속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미래의 일꾼들을 선택하고 양육하는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 신앙과 전문성을 갖춘 다음 세대의 젊은 이들을 일으켜 그들로 하여금 교회가 세상 속에서 건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양육해야 한다. 이 일을 위하여 좋은 기독교 대학을 세우고 우리 자녀들이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장학금을 주고 또 개별적으로 전문인들이 멘터를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로, 교회의 미래의 지도자들을 배출하기 위하여 신학을 지망하는 사람들을 양육하는데 많은 투자를 해야한다. 앞으로 교회의 미래는 우리 자녀들의 손에 달려있다. 우리가 다음 세대의 교회 지도자들을 어떻게 세우는가에 따라서 앞으로 우리 교회가 강해지고 약해질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좋은 교회 시설을 갖추는 것도 좋지만 또 좋은 프로그램들을 개발하는 것도 좋지만 다음 세대를 생각하고 지도자들을 선택하여 양육시키는 일을 게을리 하면 안된다. 모든 신앙인이 전문 기독교 사역자가 될 필요는 없지만  좋은 자질과 가능성을 가진 많은 젊은이들을 도전하여 기독교 전문 사역에 헌신하게하고 훈련시켜야 앞으로 교회를 더욱 건강하게 이끌어 갈 수가 있는 것이다.

세째, 교회 안에서도 평신도들을 더 이상 수동적인 사역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사역하는 지도자들로 만들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교회는 전문인 사역자 한 두 사람의 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구성원 전체에 달려있는 것이다. 평신도들을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그들의 은사를 개발하여주고 사역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개발과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지도자가 평신도들과 사역을 함께 나누는 이런 비젼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 한 민족과 한국 교회는 그 누구보다도 지도자들을 선택하고 양육하는데 많은 관심을 가져왔다. 그래서 아무런 자연 자원이 없는 한국이 빨리 성장하고 또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독교가 많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우리가 앞으로도 더욱 이런 귀한 일에 기도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lead2serve.tistory.com

[최주희] ‘사랑의 사람’을 찾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만 사랑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는 사람마다  강조점이 다르므로 통일된 답을 구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사랑이  ‘함께하는 삶’이라고 정의하고 싶은데, 이런 생각을 하도록  결정적인 영향을 주신 분이 계시다.

  김효신 선생님은 내가  특수학교 교사로 있을 때 양호선생님으로 계셨던 분이다.  그 당시에는 정서장애를 가진 아동이 교육받을 곳이
마땅치 않아, 우리 학교가 지체부자유 특수학교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서장애를 가진 아동이 한둘 있었다.  승환(가명)이는 그중
한명으로 자폐 아동이었는데, 대학병원 정신과 간호사 경험이 있는 양호선생님이 특별히 돌보아 주셨다.  그분은 여러 아이디어와
정성어린 준비로 최선을 다하여 승환이를 돌보셨는데 특수교사인 나에게 큰 도전이 되었다.

  한
번은  모교 특수교육과에서 후배들을 위해 선배 초청 강의를 듣는 시간을 계획하였다며, 분에 넘치게도 나에게 연락이 왔다. 
직장인 학교 측에서 허락하여 주셨음으로, 그날 아침에는 직접 모교 대학으로 출근했다.  신촌의 거리는 여전히 생동감 있고
화려했다.  밝은 웃음과 자신감에 넘치는 듯 한 후배들을 바라보다 우연히 쇼윈도에 비치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어찌나
촌스럽고 초라해보이던지…   강의를 마친 후 주눅들은 모습으로 광명시 학교로 가는 버스를 탔다.  ‘특수학교는 왜 이리 먼
시골에나 있지?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그들에게 큰 변화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설령 아이들이
공부를 잘 한다고 해도 사회에 나가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좌절감만 생길텐데…  내 모습이 초라하게 변한 것 같아. 
변두리 지역 학교에서 아이들하고만 있어서 그런가?  젊음을 마음껏 누리고 즐기며 살아야 하는데 내가 너무 찌든 것은
아닌지…’  

  우울한 마음으로 버스를 내려 흙길을 밟으며 학교로 향하는데 양호선생님과 승환이가 정신없이 뛰어 오고 있었다.  “양호선생님! 어디
가세요?”  “저도 몰라요.  승환이가 오늘은 특별히 더 못 견뎌 하는 것 같아 무조건 뛰는 거예요.  그러면 기분이 좀
나아질까 해서요.”  그리고 계속 승환이와 함께 뛰어가셨다.  갑자기 초라해진 마음에 큰 깨달음이 오는 것 같았다.  “맞아! 
바로 이거야!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지만 그저 함께 하는 거야!  그것이 사랑이야!  저기 내
사랑하는 아이들이 많이 있어.  빨리 가자.”   새로운 힘이 솟으며 흥분된 마음으로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저기 교실에서
아이들이 창밖을 내다보며 소리친다.  “선생님!  빨리 오세요!  보고 싶었단 말이에요!”
 

  또
다른 이야기가 기억난다. 지난 봄, 정 집사님이 수년 만에 전화를 거시며 무조건 지금 우리 집으로 오겠다고 하셨다.  사실
병원에서 수술을 앞두신 어느 할아버지를 방문하기 위해 나서던 차여서 다음 기회를 약속하고 싶었지만 음성이 매우 다급해 보였다. 
일단 오시라고 하였다.  무척 수척해지신 얼굴에 안절부절 못하시며 요즘 우울증으로 너무 힘든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셨다. 
잠깐의 대화를 마치고 다음에 다시 연락을 드리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큰 부담이 되었다.  강의와 상담과 성경
공부 등으로 나에게는 여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울증은 한두 번의 만남으로 회복되는 것이 결코 아님을 알기에 어려움
가운데 계신 정 집사님께 쉽게 손을 내밀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며칠 후 모처럼 화창한 봄날이 되자 새로운 부담이 느껴졌다. 정 집사님의 회복을 위해 시간을 헌신적으로 나누기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만드신 이 아름다운 봄날의 꽃을 잠시라도 함께 즐기고 싶었다.  정 집사님을 모시고 벚꽃으로
유명한 계룡산에 갔다.  아쉽게도 계룡산의 벚꽃은 아직 꽃봉오리 상태였다.  하지만 산과 들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좋은
레스토랑에서 긴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자기 구역장이 매일 아침마다 함께 병원에 가 준다는 이야기, 자신이 섬기던 동네 장애인
복지 기관 목사님께서 이런 때일수록 혼자 있으면 안 된다며 복지관에 와서 점심을 함께 먹자고 권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
속 깊이 사랑을 다시금 깨닫는다.  작은 도움들이지만 어쩌면 이리도 아름다운 사랑의 사람들이 많을까?

  소리를 내어 광고하지 않을지라도 세상 곳곳에는 ‘사랑의 사람들’이 숨겨져 있는 것 같다.  특별한 전문 지식은 없어도 또한 어떻게
도와야 할지 묘안이 없어도, 그저 함께하며 묵묵히 동행하는 사랑의 사람들!  경제가 어렵고 세상이 각박할수록 이런 ‘사랑의
사람’이 너무나 필요하다.  혹시, 당신은 ‘사랑의 사람’이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