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 8, 2009 | 코스타 사역/코스타 보이스
코스타 상담실에서는 많은 코스탄들이 궁금해 하는 질문을 가상의 코스탄과 멘토와의 대화를 통해 풀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곳에 실린 의견은 멘토님 개인의 의견이며 코스타와 소식기관의 의견은 아닙니다.
이성교제
“멘토님, 안녕하세요. 저는 이제 막 이성교제를 시작한 코스탄입니다. 모든 인간관계가 힘들지만, 이성 관계는 더 힘든 것 같습니다. 제가 사귀기 시작한 사람은 저와 성격이 정반대라 서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떻게 의사소통하는 게 좋을까요. 이성 교제 과정에서 꼭 알아봐야할 점이 무엇일까요.어떻게 상대방이 하나님이 인도하신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까요. 혹, 사이가 좋지 않아지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결혼에 대한 부담이 너무 커서 잘못된 결정을 내리지는 않을지 고민됩니다.”
이성교제. 쉬운 일이 아니죠? 사실 막 사랑에 빠진 상태에서는 상대방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다툼은 거의 없죠. 그러나 데이트의 기간이 길어지면서 눈에 콩깍지가 벗어지고, 다른 점이 발견되고 이때부터 다툼이 시작되죠. 이는 종종 이별로 발전하기도 하구요. 우리는 ‘달라서’ 싸운다고 하지요. 하지만 달라서 싸우는 일은 거의 없어요. ‘몰라서’ 싸우는 거지요. 남자와 여자는 원래부터 달라요.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요 의도이죠. 그 하나님의 계획에 초점을 맞추게 될 때 절대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수수께끼가 풀리게 되죠. 그 수수께끼를 푸는 방정식은 첫째,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배워야 하며 둘째, 나와 다른 것은 다를 뿐이지 틀린 것은 아니라는 대명제를 받아들이고 셋째, 나의 방식이 아닌, 상대방의 방식을 배워서 상대방이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을 전달하고 넷째, 상대방과 달리 나에게만 있는 강점으로 상대방을 돕는 것이에요. 그 결과 두 사람은 하나 될 수 있고 이것이 바로 알맞은 짝이 되기 위해 성장해가는 과정이에요. 이렇게 차이들을 조율하는 과정 속에서 사실과 거리가 먼 정보들이 입력되고 이것이 오해로 발전하게 되는 거예요. 왜곡된 생각들을 지워내고 사실이나 진심을 확인해가는 과정이 바로 대화죠. 이 때문에 ‘결혼은 길고 긴 대화의 예술’이라는 말이 있어요. 먼저 남녀대화의 차이를 배워서 상대방의 언어로 말해야 해요. 인격을 다루지 말고 사건을 다루며, 과거를 다루지 말고 현재를 다루고, 상대방의 생각을 듣고 동의한 후에 나의 생각을 말하며, 감정통제가 불가능할 경우는 문제를 다루지 말고 감정을 다루는데 중점을 두고, 정 통제가 되지 않으면 타임아웃을 선언하기로 약속을 하세요. 하지만 결론은 하나에요. “진정성” 진심이 통하지 않는 경우는 없어요. 이성 교제시 알아보아야 할 것이 있냐고 하셨죠? 나이(Age) 물어야죠. 배경(Background) 확인해야죠. 성격(Character) 따져야죠. 학위(Degree) 아무나 안되죠. 경제(Economy) 많으면 좋지요. 그래서 ABCDE…Z(zeal) 그러다 보면 날새겠죠. 하나만 알아보세요. ‘평생 날 사랑해 줄 사람인가?’ 그러면 그것은 어떻게 아냐고요? 고린도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참고….. 바로 거기 답이 있어요. 끝까지 읽어 보세요. 이기적이지는 않은지? 내게 무례한 짓(?)은 안 하는지? 쉽게 성내지는 않는지? 하나님의 인도? 이번에는 내가 물어보죠? 올림픽 경기에 금메달을 놓고 다투는 두 선수가 있었죠. 둘 다 크리스천이었어요. 둘 다 기도해요. 이번에 금메달을 목에 꼭 걸게 해 달라고. 하나님은 누구 기도를 들으셨을까요? 당연하죠. 땀을 많이 흘린 자의 기도를. 그래서 기도는 행동이다는 말이 있어요. 하나님의 뜻, 하늘에서 날벼락 치듯, 로또 복권 당첨되듯 오지 않아요. 그래서 멈춰 서 있는 차의 핸들을 꺾기보다 달리는 차의 핸들을 꺾는 것이 쉽다고 하죠. 움직이세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발견되지요. 가보지도 않는데 표지판이 보이나요. 달려봐야 시속 몇 키로로 달려야 과속이 아닌지 또 몇키로로 남아 있는지 갈림길에는 어김없이 그 표지판이 있을거에요. 헷갈릴 때면 무조건 달리지 말고 멈추어 보면 되죠. 그리고 나면 목적이 표시판이 반드시 있을걸요. 아 참, 이런 이야기 아세요?
남녀 한 쌍이 소개팅으로 만난 다음 근교 신도시 식당 촌으로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이었다. 출발하고 난 후 이내 속도를 내자마자 ‘오토 도어 록’이 찰칵 하고 잠기는 순간, 여자 분이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달리는 차량 안에서 문을 열려고 낑낑대다 꿈쩍도 않자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왜 이러세요?” 남자분도 놀라서인지 말까지 더듬어 가며 도어 록에 대해 설명을 했다. “아, 제 차는 60킬로(속도) 넘으면 안전 때문에 문이 잠겨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여자는 더욱 얼굴을 붉히면서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저 몸무게 60킬로(체중) 안 넘거든요.” 이거 실제 이야기에요. 데이트할 때는 이런 이야기 많이 나누세요. 심각한 사람은 절대 아니에요. 유머가 있는데 사이 나빠질 전혀 없죠.사이가 안 좋아지면 어떻게 하냐고? 걱정도 팔자네요. 사람이나 찾아보고 그런 소리 하세요. 착각 또 있어요. 상담실은 문제 있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고. 그 사람 진짜 문제 있는거 아시죠. 코스타는 강의와 선택식 강좌 기도등의 영성 프로그램과 함께 상담을 통해 참가자들을 전 인격적으로 섬기는 탁월한 집회죠. 인생 선배와 단 둘이 만나는 달콤하고 향기로운 한 시간, 붙잡으세요.
상담디렉터로 섬기는 송길원 김향숙부부 (하이패밀리)
Jul 8, 2009 | 코스타 사역/코스타 보이스
코스타 세미나는 전체 집회 참석자 천여 명 중 아주 제한된 수만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세미나의 중요한 내용이 모든 분께 전달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KOSTA VOICE에서는 코스타 기간에 열리는 세미나 중 다섯 분의 세미나 강사님들을 인터뷰하여 전체의 참석자이 지면을 통해서 평소에 만나기 어려운 만날 분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립니다.
신원하 교수 – 심화 세미나 (샬롬의 방해물: 죽음에 이르는 일곱가지 죄악)
1. 신원하 교수님, 안녕하세요, 미주 코스타에 다시 찾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코스타에 처음 참석하시는 분들을 위해 자기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어린시절 거의 늘 할머니의 기도소리를 새벽마다 들으며 자랐습니다. 남들보다 신앙의 혜택을 많이 받고 자란 셈이지요. 이런 영향 때문인지 어릴 때부터 목사가 되고 싶었고 결국 신학교를 갔습니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고 이후 줄곧 신학교로 부름을 받아 지금까지 16년 동안 기독교 윤리학과 관련과목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7-80년대 대학을 다닌 사람으로 교회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 등에 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이 분야에 나름대로 글도 써 왔고 비중있게 가르쳐 오고 있습니다. 코스타 초청을 받고 이번에 참석하게 되어 기쁘고, 기대가 큽니다.
2. 이번 세미나 강의의 주제가 ‘샬롬의 방해물: 죽음에 이르는 일곱가지 죄악 (Vandalism of Shalom: The Seven Deadly Sins)’입니다. 일곱가지 대죄는 복음주의권에서는 좀 생경한 개념인 것같습니다. 설명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일곱가지 죽음에 이르는 죄의 목록-교만(pride), 시기(envy), 분노(anger), 나태(sloth), 탐욕(avarice), 식탐(gluttony), 정욕(lust)-은 4세기 말 사막 수도사들로부터 중세 교회를 거쳐 주로 로마 카톨릭 교회를 통해 전해 내려온 목록이었습니다. 수도사들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마음의 평화를 누리기 위해 끊어버려야 할 큰 악으로 규정한 죄들의 목록이지요. ‘오직 성경’의 구호를 내세운 개신교회는 이것들의 성경적 근거가 확실하지 않다는 이유로 대죄론을 소홀하게 여겨 왔습니다. 그런데 20세기 후반 이후 개신교회들이 부쩍 이 주제에 관심을 고조해 오고 있습니다. 복음주의권의 목사들의 강단에도 환영 받는 설교주제가 되었습니다. 이 주제는 싸우고 버려야 할 죄의 목록이지만 다르게 말하면 갖추고 입어야 할 덕(virtue)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환언하면 이번 강의의 주제는 기독교인이 갖춰야 할 덕, 성품인 것 같습니다. 사실 이제까지 덜 강조되고 경시되어온 측면이 많은 이유가 기독교인의 성화보다 일차적인 구원에 지나친 관심을 가진데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요. 이신칭의를 강조한 개신교회가 덕(virtue)사상을 강조하면서 믿음보다 행위 그리고 성품을 중시하는 이 교리를 그다지 강조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 카톨릭 교회의 핵심교리라는 것에 대한 반감도 또한 작용했으리라 생각합니다.
4. 한편, 어떻게 은혜를 강조하는 관점과 기독교인의 덕을 강조하는 관점이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조화될 수 있을까요?
사실 신구약 성경이 가르치는 핵심 기독교 윤리는 직설법과 명령법의 역동적인 관계입니다. 그것은 구원을 받기 위해 율법을 지키고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값없이 구원받았다는 직설법 때문에 그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 즉 그 명령을 지키고, 선을 행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지요. 이 성경적 프레임이 분명해진다면 덕을 갖추는 삶은 은혜를 강조하는 것과 결코 모순되거나 갈등을 일으키지 않지요. 오히려 은혜로 죄에서 자유로워진 사람들은 자원하여 덕스러운 삶의 길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지요(시 119:32).
5. 한국이나 미국이나 기독교인들이 신앙과 삶의 불일치, 신앙과 사회적 책임의 불일치로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인 것같 습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등에 관련하고 계신데요, 한국기독교 공동체가 사회적 역할을 잘 하기 위해서 어떤 점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기윤실의 접근보다 좀더 급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지적에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한국 기독교인의 신행불일치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 일찍이 한미준(한국기독교회의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의 통계 분석보고서에 따르면 한국교인의 윤리의식과 불신자의 그것은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믿는 사람이 너무 다른 것이 문제가 아니라 너무 같은 것이 문제인 것이지요. 일반 사람들은 신자들에게 자기들과는 다른 뭔가 고상한 삶을 바랐지만, 지금은 아예 기대도 하지 않는 상태인듯합니다. 천주교회는 국민으로부터 점점 신뢰를 받고 교인도 늘어가는데 개신 교회는 그와 정 반대의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교회가 신뢰를 얻으려면 교회다운 모습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권력, 돈, 성공에의 욕망이 교회의 짠 맛을 잃게 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힘없음, 약함은 교회가 추구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신약 초대교회의 예수 운동, 제자운동은 철저히 십자가, 낮아짐, 힘없음을 추구한 운동이었습니다. 현재 한국 교회는 예수를 머리로 따르고 ‘지적인 제자훈련’ 만 위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진지하게 성찰해 봐야 할 때입니다. 현재의 모습에서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사회적 역할은 기대하기 힘들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윤실도 어쩌면 느리게 가는 길인 것이지는 모르지만 다시 교회의 본질회복 운동, 신뢰회복 운동, 정직 운동 등에 다시금 강조를 해 나가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볼 때 이것이 다소 개인적 미시적 접근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이것이 급진적(Radical)인 방법일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사회적인 이슈문제에 대해 여전히 관심을 갖고 여론을 만들어가고 윤리 운동을 전개하는 것도 계속해 가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6. ‘전쟁과 정치’를 흥미있게 읽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가 신앙의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인 목소리를 내는 집단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되고 있습니다. 신학자로서 이런 모습에 대해서 어떤 평가와 대안을 제시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한국 복음주의 교회의 대표적 지성이며 양심이라 할 수 있는 이만열 교수는 현재 한국 복음주의 기독교는 정교분리 모습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정교 일치 때문에 비난을 받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저도 동감합니다. 지난 참여정권 때 복음주의 대형교회 목사들이 부쩍 시청 광장과 장충체육관 등지에서 십자가와 성조기를 펄럭이며 정부를 규탄하는 집회를 많이 해왔습니다. 그리고 현 정권에 들어와서는 정반대로 친정부적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전 군사 독재정권 시절에 너무나 조용했고 정교분리를 주장하면서 데모하는 대학생들을 말리곤 했습니다. 어떤 신학적 근거로 시민 광장에 나와서 교회가 교회이름을 걸고 소리를 발하는 입장으로 전환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특정 정권을 편향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신학적 성찰과 설명이 없는 것이지요. 이런 신학적 성찰 없는 정치적 행동에 많은 의식 있는 목사들과 학자들은 불편해 하고 있습니다. 이면에서 복음주의 교회의 신학자들과 40-50대의 중견 목사님들의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지요. 한국교회개혁연대와 같은 의식 있는 목사님들의 활동들이 좋은 대안적 모델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7.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고민하고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서 고민하는 젊은이들에게 개인적인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사람들은 자기가 자라온 지역, 문화, 환경의 틀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경상도 남자가 서울여자를 만나 깊이 사귀다 보면 한번 자신을 돌아보게 되기 마련입니다. 서울여자에게 호감을 얻기 위해 자신을 살피고 진단해보게 되는 것이지요. 연애의 성공여부를 떠나서 타자의 관점에서 자기를 보게 되면 그만큼 유익이 크지요. 교과서만 줄줄 외우고 문제집만 푸는 공부만 하다가, 대학에 들어간 뒤 시대의 문제를 날카롭게 파헤치며 그것들을 다룬 뛰어난 소설/또는 사회과학 서적을 읽으면서 경험하게 되는 벅찬 희열, 기억하시는 지요? 마치 눈이 열리는 듯하고, 새로운 의식의 세계가 펼쳐지는 듯한 느낌이지요. 이때까지 여러분들이 익숙해져 있는 현실, 가치의 세계, 그리고 추구하는 목표가 진정 가치 있고, 젊음을 바칠만하고, 그리고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인지, 여러분은 알 수 없습니다. 그것과 다른 가치, 세계 그리고 그것의 빛을 통해 비춰볼 때 비로소 그것들을 판단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쟁이를 핍박하는 일에 열심이었던 철저한 유대주의자 사울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난 뒤 그의 삶과 삶의 방향이 완전히 뒤집혀져 예수를 증거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이제 기독교 신앙, 가치, 세계관에 자신을 열고 한번 활짝 자신을 노출해 보기를 권합니다. 이번 코스타 모임에 친구의 권유로 왔든지 아니면 자발적으로 왔든지 이번에 기독교 복음의 세계에 한번 흠뻑 자신을 적셔보는 그런 구도자가 되어 보시기를 진정으로 바랍니다.
Jul 8, 2009 | 코스타 사역/코스타 보이스
1. 정민영 선교사님, 안녕하세요. 코스타에 참석하는 분들을 위해 간단히 자기 소개를 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정민영 선교사입니다. 위클리프 성경번역선교회(www.wycliffe.net) 한국지부(GBT: www.gbt.or.kr) 소속으로 인도네시아의 한 부족말로 신약성경을 번역하는 일에 참여했고, 현재는 국제위클리프 부대표로 비서구 선교운동을 촉진하고 돕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2. 오늘 설교의 주제와 내용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수요일 저녁설교 제목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평안” (빌 4:4-7)입니다. 평안(Shalom)은 구원의 본질입니다.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 결과 이웃(세상)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평안(구원)의 유일한 조건은 그리스도이지 환경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기쁨은 상황적이 아니라 역설적입니다. 마치 아가페의 사랑이 “OO 때문에”(because of)가 아닌 “OO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인 것과 같습니다. 감옥에 갖힌 바울이 밖에 있는 빌립보 교회에게 기뻐하라고 격려하는 역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권합니다. 진정한 ‘가진 자’의 여유인데, “주께서 가까우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3. 이번 코스타 주제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생각하시거나 느끼신 점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복음의 본질과 직결되는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평안은 역설적입니다.상황을 초월한 전천후 평안이야말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세상이 주는 것과 구별되는” 참된 평안입니다. 바울은 “염려”와 “기도”를 대조하면서 상황(역경)에 집착하기보다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권합니다. 처방은 우리 소원의 성취가 아니라,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상황이나 환경을 바꾸기보다 우리의 마음과 태도를 바꾸시는 것이지요: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Hudson Taylor는 말합니다: “진정한 평안은 고통의 부재가 아닌 하나님의 임재이다.” 세상을 이기는 힘은 역설적 기쁨, 전천후 평안에서 나온다는 진리를 설명하는 좋은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4. 근래 한국 기독교에 대해 반성하면서 기존의 선교방식에 대해서 되돌아보는 일들이 많이 있었는데요, 선교사님은 어떤 견해를 갖고 계신가요.
Christianity Today라는 기독교 잡지는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2007년 발생한 세계교계 및 선교계의 제1대 사건으로 꼽았습니다. 한국을 비롯한 비서구 선교운동의 당면현안과 과제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한민족 선교운동이 단순히 열정만 앞세우기보다 비둘기처럼 순결하면서 뱀처럼 지혜로워야 할 필요를 깨우치셨다고 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민족 선교운동의 청지기 시대가 도래하기 바라는 마음입니다.
5. 타문화/타자를 존중하면서 기독교 신앙이 전달되도록 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하는 태도, 성품 등에 대해서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분은 단연 예수님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르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호전적 접근, 즉 십자군의 방법을 경계하시고 친히 십자가를 지시는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전도와 선교가 “영적 전쟁”인 건 사실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역설을 이해하지 못하면 호전적이고 무례한 기독교로 전락하고 맙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영적 전쟁은 십자군이 아닌, 십자가의 도입니다. 빌립보서 2장에서 감옥에 갖힌 바울이 권하는, 겸손하고 온유한 십자가의 도를 묵상하도록 권합니다. 금년 코스타의 주제인 세상을 거스르는 용기 역시 호전성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차별화(거룩)을 의미합니다. 전도와 선교의 동기는 사랑인데,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Jul 8, 2009 | 코스타 사역/코스타 보이스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용기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복음 16:33, 새번역)
그리스도인의 용기는 자신들이 믿는 삶의 방식에 충실하게 살아가겠다는 의지이다. 예수님처럼 소외받고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베푸는 일, 한 사람의 가치를 어떤 것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일, 원수에게 마땅한 대가를 치르게 하기보다 그 원수를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일, 그리고 평화를 만들어가는 일을 해나가겠다는 강한 신념이자 행동이다. 그러나 이런 용기있는 행동에 세상은 흔히 무시되고 만다. 겉으로 보기에 약한 자의 모습을 띄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용기를 소유할 수 있는 근원은 무엇일까?
예수님의 부활 이 세상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그의 메시지를 부인했지만, 하나님은 예수를 부활시킴으로 예수의 복음의 진실성을 변호했고 그를 참된 주로 인정하셨다. 아울러 부활은 새창조의 의미가 있다. 예수님의 부활, 생명이 사망을 이긴 사건은 이 땅에서 그분의 새창조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장엄한 사건이다. 예수는 부활할 모든 육체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이며, 그가 전파한 하나님 나라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창조물임을 선언한 것이다.
부활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삶의 방식이 옳은 것임을 알 수 있고, 그분이 남기신 약속이 성취될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동시에 그 부활로 시작된 새창조의 삶에 믿음으로 동참할 수 있다. 이원론적인 태도를 넘어서 창조질서의 회복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용기를 가질 수 있다.
숨어있는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의 발전이 더디어 보일 때 우리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막 4:26-28) 천국운동의 시작은 조용하고 비밀스럽게 이뤄진다는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천국은 그 시작이 조용하고 비밀스럽기 때문에 아무나 쉽게 알 수 있는 그런 형태가 아니었다. 그러나, 겨자씨 한 알이 밭에 심겨졌다는 것은 이미 천국이 이 땅에 임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내적 성장과정을 거친 천국운동은 마침내 외적으로 크게 드러나게 되는데, 마치 겨자씨가 자라나서 다른 나물보다 크게 되어서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이는 것과 같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 비유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속성을 알려줄 뿐 아니라 그 나라의 발전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질 수 있게 해준다.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 예수님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강조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는 점차 발전하여 이땅에서 완성되어 간다. 종국적으로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된다. 완성될 ‘새 하늘과 새 땅’, ‘새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기대하시던, 하나님, 인간, 모든 만물 간에 창조질서가 완성된 모습이다. 우리가 결국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 때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태초로부터 의도하셨던 완성된 평화’(Shalom)에 거할 것을 믿을 수 있다면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을 거스르는 용기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약한 곳에 거하시는 (Tabernacling) 성령 마르바 던의 설명에 따르면 약함 속에서 강함을 주시는 하나님의 성품이 있다. 하나님은 약함 가운데 거하시고 (dwelling/residing) 그들과 관계를 맺으신다. 그리고 그 약함을 통하여 자신의 현존을 드러내시고, 약한자의 약함을 통해 세상의 권력의 강함, 그리고 그들의 부정의를 부끄럽게 하신다. 하나님의 강함이 우리들의 약함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약하지만, 우리가 하는 일이 비록 드러나지 않지만, 그것을 통해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믿음으로 용기를 가질 수 있다.
Jul 7, 2009 | 코스타 사역/코스타 보이스
코스타 상담실에서는 많은 코스탄들이 궁금해 하는 질문을 가상의 코스탄과 멘토와의 대화를 통해 풀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곳에 실린 의견은 멘토님 개인의 의견이며 코스타와 소식기관의 의견은 아닙니다.
교회 및 캠퍼스 사역
“멘토님, 교회 생활이 힘듭니다. 공동체 내에서 신앙 생활하는 것이 좋은 점도 있지만, 힘든 점도 많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생활에 간섭하는 경우도 많고, 다른 성격의 사람들간이 이유없는 갈등, 심지어 질투와 질시가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소그룹 성경공부만 하면 안 될까요? 신앙생활을 교회에서 꼭 해야할까요? 다른 생각과 다른 나이, 다른 문화를 가진 작은 교회에서 성숙한 신앙 생활을 하려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까요? 소그룹 성경공부에만 나가려난 후배에게 어떻게 조언하면 좋을까요?”
좋은 질문 입니다. 귀한 질문을 대답하기 이전에 저는 먼저 왜 유학을 왔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저는 제가 만나 교제하는 지체들에게 그같은 질문을 자주 하곤 합니다. 그들이 가장 솔직할때 이렇게 대답하는것을 듣습니다. “교수님, 저는 유명한 교수가 되러 미국 왔습니다!” “저는 좋은 직장을 잡기 위해 좋은 대학의 학위를 따러 왔습니다.” “교수님, 저는 시집 잘 가고 싶어 미국 왔습니다!” 이같은 대답 이외 제 관찰에 의하면 놀기 위해 유학온 지체들도 있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너무 좁고 답답해서 미국까지 놀러 온것이지요. 또 나이든 어떤 이들은 직장생활로 인해 너무 지쳐 미국으로 안식하기 위해 유학왔다고 하기도 합니다.
유학의 목적이 학위 획득이나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위한 발판으로 생각하는 이들의 경우, 유학지에서 신앙 생활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는것 같습니다. 그같은 경우 교회에서의 여러 활동, 책임, 섬김 등은 큰 부담으로 느낄 수 있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데 방해적인 요소로 여길 수 있습니다. 이같은 생각을 가진 청년의 경우 성격 및 의견 차의로 인한 갈등이 교회안에서 발행하면 쉽게 교회를 뿌리치고 나오기 쉽고, 자신이 편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도 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만이 모인 소그룹 활동만을 찾는 다던가, 인터넷을 통해 잘 알려진 교회의 목사님 설교로 예배를 대신하기도 합니다. 이런 청년은 또 자신의 소그룹에서 지체들간에 문제가 발생하면 그 소그룹을 떠나게 되고, 인터넷의 설교가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교회의 목사님 설교를 쇼핑하게 됩니다. 이렇게 떠돌다가 결국 하나님 마쳐 떠나 버리는 청년들을 볼때는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어떤 유학생들은 유학을 신앙훈련으로 간주하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들은 학위도 중요하지만, 나의 학문/전공을 통해 지금 내가 서있는 곳과 또 앞으로 보냄 받을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샬롬이 이루어 지기를 소망 합니다. 이런 자세로 살아가려는 청년은 교회에서의 예배를 매우 중요시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며, 더 나아가 더욱 친밀한 관계로 발전시켜 나가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배를 삶의 가장 중심에 두고 살고자 애씁니다. 이같은 청년들은 예배와 신앙생활을 교회를 중심으로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뿐 아니라 일상생활의 여러 영역에서도 삶의 예배를 드리려 애씁니다.
칼빈신학대학의 플랜팅가 교수는 예수님을 사랑하여 그의 명령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사람을 하나님 나라의 훌륭한 시민이라고 하였고, 또 그 명령을 열정적으로 받아 들이는 사람을 그 나라의 일등 시민이라 말한적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이땅에서의 샬롬을 뜨겁게 갈망하는 자들이라고 말하였지요.
이 같은 하나님 나라의 일등시민이 되고자 하는 기독 청년들은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성격 차이의 이유로 다른 사람들과 갈등을 격는 경우 결코 교회를 떠나거나 문제를 피해서 소그룹에 숨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같은 문제를 놓고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싸움도 하고 상처도 받곤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께가져 갈줄 알고, 또 진리의 말씀을 순종하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합니다. 그들은 이같은 갈등과 어려움을 통해 하늘나라의 일등 시민으로 다듬어 가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들은 본인에게 상처를 주는 지체를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사 하늘나라의 일등시민으로 만들기위해 예비해 놓은 유격훈련 조교중 하나 라는 사실로 상황을 받아 드립니다. 이들은 또한 그 어려움을 가져다준 상대에게 자신들이 그들의 귀한 훈련관이 됨을 어렴풋이 나마 깨닫 습니다. 개울가의 돌과 돌들이 오랜동안 서로 부딛치면서 서로가 서로를 매끄러운 돌로 만들 듯, 우리는 관계의 어려움을 통해 일등 시민의 성품으로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물론 이들이 예수님을 머리로 하여 그 몸들이 그렇게 묶였을때 그렇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본질중 빼어 놓을 수 없는것이 관계이고 사귐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 자신 안에서 코이노니아(사귐) 안에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공동체를 향한 의지를 갖고 계신 분일 뿐 아니라 믿음의 공동체를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분 이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의 모습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imago dei)발견하며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시는 주님과 더불어 진리안에서의 사귐은 서로에게 치유, 회복 및 성장을 가져오게 됩니다. 이것이 관계속에서 하나님의 샬롬이 임한다는 것이지요. 위로는 하나님, 좌우 옆으로는 지체들과의 사귐이 있는곳이 교회 입니다. 그래서 교회란 어느 장소의 건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있는 무리 (회중)을 말하는 것이지요.
교회생활이 힘들다고 했습니까? 훈련이 결코 쉬울 수 없습니다. 쉬운 것은 훈련이 아닙니다. 천국의 일등시민은 안일한 훈련으로 그냥 만들어 지지 않기 때문이지요.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활에 간섭한다고 했나요? 그럴땐 훈련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떨어졌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의 훈련이 그렇게 이루어 집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유 없는 갈등, 시기와 질투는 하나님 편에서 결코 거룩치 못한것들이기에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부터 그같은 성품의 찌꺼기들을 제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가져오는 상대와 씨름 하려 마십시오. 대신 그 사람의 그같은 죄성과 본인의 죄성에 대항하여 맞장 뜨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악한자 일지라도 우리는 사람을 미워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그 사람의 잘못된 행위와 그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는 죄성을 미워해야 하고, 또 본인의 죄성과 싸워야 합니다.
소그룹 성경공부만 하면 안되느냐 라는 질문에 John Stott 목사님의 말씀을 인용해 보려 합니다: “무력한 신앙인들은 댓가를 지불하기를 두려워 한다.” 쉽고 편안한 신앙생활로 자신의 안락지대 (comfort zone)에 머물지 마시고, 서로 부딛치고, 상처받고, 부둥켜 안고 울며, 함께 회개하는 도전있는 신앙 생활을 선택하십시오. 즉 성장을 위한 댓가를 지불하며 살라는 권면 입니다. 신앙생활은 꼭 교회에서 해야 되냐는 질문에 오히려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되 묻습니다: “만일 교회가 아니라면 그같이 거룩한 훈련을 어디서 받을 것입니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의 충만함” (엡 1: 23)이 있는 곳입니다. 훈련과 함께 따르는 그 분의 충만함을 체험해 보아야 합니다.
소그룹 성경공부에만 나가려는 후배에게도 지금까지 나눈 우리의 대화를 들려 주십시오. 그리고 함께 히브리서 10장 25절을 읽으십시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추측컨대 그때도 지금처럼 모이기를 싫어하고 혼자 조용히 예배를 드리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나 봅니다.
제한된 지면에 자세한 이야기를 다 할 수 없었지만 제 대답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마22:37)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 라” (마 22:39)고 우리들에게 명하십시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할 때에도, 공부할 때에도, 지체들과 교제할 때에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유학생활중 가장 중요한것은 훌륭한 예배자로 훈련되어져서 세상에 으로 보냄 받을때 우리가 가는곳 마다 하나님의 샬롬이 이루어 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한 댓가를 지불하는 유학생활이 되기를 바랍니다.
코스타 8지역 조장 멘토
이영길 (캠퍼스 및 청년사역. 칼빈 신학대 교수)
Jul 7, 2009 | 코스타 사역/코스타 보이스
코스타 세미나는 전체 집회 참석자 천여 명 중 아주 제한된 수만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세미나의 중요한 내용이 모든 분께 전달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KOSTA VOICE에서는 코스타 기간에 열리는 세미나 중 다섯 분의 세미나 강사님들을 인터뷰하여 전체의 참석자이 지면을 통해서 평소에 만나기 어려운 만날 분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립니다.
김범석 목사 – 와우! 북한 탈북자 현장 바로 보기
1. 김범석 목사님, 안녕하세요, 올해 다시 코스타를 찾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코스타에 처음 참석하시는 분들을 위해 자기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코스탄 여러분 안녕하세요.여러분들을 다시 만나 뵙게 되어 너무 반갑습니다. 저는 열매나눔재단의 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사무총장 김범석 목사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청년 목회에 은사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저만 주장하지 하나님과 다른 분들은 아니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저의 자리가 우리 사회의 소외된 이웃인 탈북자와 빈곤 여성들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이번 코스타를 통해 우리 청년들도 하나님이 원하는 자리를 찾아가고 그 귀한 달란트를 발견하길 바랍니다.
2. 기독교 신앙에 대해 고민하고 기독교 세계관을 받아들일지 고민하는 젊은이들에게 개인적인 신앙간증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모든 사람은 그냥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냥 태어나서 그냥 살다 갔다면 너무 허무 하지 않습니까?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보면 결론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無(무) 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인생을 살아 가라고 하면 참 가치 없는 인생 같습니다. 그러면 정말 가치 없게 살고 말 것 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無(무)’가 아닙니다. ‘有(유)’ 입니다. 분명 어떤 목적이 각자에게 주어 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정해집니다.그 정해진 목적 즉 각자의 그릇,달란트를 빨리 발견하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도 예전에 이것을 몰랐습니다. 1997년 IMF 당시 집이 하나님의 은혜로(?) 완전히 부도가 난 적이 있었습니다. 신학교 다니는 중간 이였는데 학비와 차비가 없을 정도로 망했습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과일 장사를 4년간 했습니다. 하나님이 참 원망스러웠습니다. 저는 신학 대학원을 가야 하는데 저는 유학을 가서 신학 교수가 되어야 하는데, 장사를 하게 되니 제 꿈이 완전히 틀어진 줄 알고 하나님에 대해 원망을 참 많이 했습니다. 돈으로 인생이 망했다고 생각한 저는 그 뒤 저의 삶의 목표는 돈이 되었습니다. 즉 저의 삶의 목적은 잘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잘 사는 것이 누구나 쉽게 생각하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후 열심히 죽도록 일했습니다. 시장에서 과일 도매업을 했는데 그때 참 많은 돈을 벌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돈이 생기면 잘사는 줄 알았는데 잘 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제 마음에 돈만 있지 평안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장사를 끝나고 아내에게 적금 이야기를 하는 중에 아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 요즘 돈만 이야기해’‘ 난 당신이 돈만 이야기 하는게 싫어’ 그 한마디는 저의 마음에 비수처럼 꽂히게 되었습니다. 아내와 이야기를 나눈 그 뒤 일주일 만에 저는 모든 사업을 접고 쪽방에 들어갔습니다. 저는 돈이 있었던 시절 보다 쪽방에서 가난한 분들과 함께 어울려 살았던 지난 10년이 더 잘살았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창조주 하나님이 저를 창조한 목적을 발견하였고 그 목적대로 살고 있기 때문에 가장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는 돈은 없지만 지금 참 행복합니다. 돈이 있어 평안이 없던 때 보다 돈은 없지만 평안한 지금이 너무 좋습니다.저는 지금 너무 너무 잘 살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세계관을 받는 것은 바로 세상에서 당신을 가장 가치 있는 삶으로 인도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삶은 참 행복하고 즐거운 삶입니다.평안한 삶입니다. 고난과 고통도 우리의 이 행복은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입니다. 코스탄 여러분 모두가 이번 집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평안과 비젼을 발견하길 기원합니다.
3. 요즘 열매나눔재단이라는 곳에서 일하시고 계신데요, 하시는 일과 재단의 비젼이라든지, 어떻게 이 일을 시작하게 되셨는지를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열매나눔재단의 영문 명칭은 Merry Year Foundation 입니다. Merry Year 라는 뜻은 기쁜 해,즉 희년이란 뜻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희년이란 기독교의 50년제를 기념하여 수고하고
축 적된 부의 재분배를 통한 빈부의 재편,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주는 구제의 관습이었습니다. 열매나눔재단은 이러한 희년의 정신을 계승하여 우리 사회에 희년의 정신을 실천하여 이 시대 속에 잃어버린 기독교 신뢰를 회복하고자 만들어 졌습니다. 빈부의 재편을 통한 희년 정신의 실천하기 위해 설립된 재단은 그 출발부터 우리 사회에 새로운 도전이었습니다. 즉 희년의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선 설립 주최가 된 교회부터 가진 자의 권리를 포기하길 하나님은 원하셨던 것입니다. 한국 사회의 많은 기독교가 선 성장 후 복지 선교를 외치며 가난한 이웃들에게 전도와 선교를 포기 하고 모두가‘보이는 성전 건축’에 수많은 자금을 투입하고 매달렸을 때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은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 하나님은 높은뜻 교회에 진정한 성전의 개념을 알려 주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마음이 가있는 곳 그곳은 먼 예루살렘이 아닌 가까운 우리 이웃들이며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에 있었던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우린 이를‘보이지 않는 성전’이라 칭하여‘보이는 성전 건축’을 포기하고 가난한 이웃을 자활 자립 시키기 위해 재단을 건축하였습니다. 이에 우리 재단의 비전은 잃어버린 한국 교회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을 회복하며 이를 통해 더 가진 자와 덜 가진 자 모두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만나게 하는 것이 우리의 비전이며 목표입니다.
4. 노숙자라든지, 새터민(탈북자)들을 돌보는 일을 계속 해오시고 계시는데요, 이런 활동 속에 기독교 신앙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요.
성경을 보면 두 가지 종이 있습니다. 충성된 종과 게으른 종입니다. 이중 충성된 종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 있습니다. 바로 순종입니다.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달란트를 발견하고
그 주신 말씀대로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어디서 받을까요.기도를 통해서도 받고,자연 계시를 통해서도 받을 수 있습니다.하지만 가장 큰 말씀은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명령이 있습니다. 성경 66권을 다 짜 보니 그게 바로 마 22장 34-40의 ‘사랑’입니다.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겁니다.
여기서 내 이웃은 우리 가족도 포함되지만 더 나아가 우리 사회에 소외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입니다. 우리 사회에 고아와 과부 나그네가 누구일까요? 그분들이 바로 저에게 있어서는 노숙자와
독거노인과 탈북자 들이였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그 명령을 잘 따르는 것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마땅히 기독교인 이라고 하면 그 분의 말씀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기에 그것이 충성된 종의 역할이라 생각하기에 이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5. 이런 활동 중에 인본주의적인 접근보다 기독교적인 통전적인 접근이 필요할 것같습니다. 이런 다양한 활동 가운데 기독교 신앙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경험이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가난한 사람들을 불쌍하게 보고 측은한 마음을 담아 구제하는 사역은 어느 종교도 다 하고 있습니다.아니 사실 우리 기독교 보다 더 잘하는 종교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른 종교와 우리의 사역을 비교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출발이 다르기때문입니다. for(위하여) 과 with(함께) 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10년 동안 가난한 지역에서 노숙자와 쪽방 주민을 섬기다 보니 참 어려운 일을 많이 당했습니다. 수년 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프로포절을 넣어 설날에 쪽방 주님들에게 모두
5만원권 상품권을 나누어 준 적이 있습니다. 사전에 쪽방 주민을 조사하여 총 2천 700장을 받아 2,700명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설날이 끝나고 상품권 사업을 종결할 시점에 상품권을 받지 못한 몇 사람들이 찾아와서 상품권 달라고 횡포를 부리며 저희 센터의 유리 창을 깨고 석유를 붓고 불을 지른 적이 있습니다.그 때 참 죽을 뻔 하다 살아 났습니다. 또 한 번은 상품권을 주지 않는다고 제가 퇴근할 때 골목에서 각목으로 저의 머리를 쳐서 머리가 깨진 적이 있습니다.그 때도 이제 죽는 구나 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너무 화가 났고 가난한 분들이 너무 증오스러웠습니다. 나는 자기들을 돕기 위하여(for) 왔는데 .. 나는 지들을 살리기 위하여(for) 왔는데… 라며 원망하고 쪽방 사역을 그만두고 싶어 몇 번을 고민한적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왜냐하면 그 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인 저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는데.. 예수님은 죄인된 저를 위하여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함께(with) 하기 위해 오셨는데…. 십자가를 생각하며 무섭고 떨리지만 사역을 했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주신 우리의 사역이며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버티니 그 무섭고 힘들게 했던 그분들이 지금은 나의 친구 나의 형제가 되었습니다. 저를 통해 쪽방에 들어온 숭의교회 청년들은 쪽방 사역을 누구 누구를 위하여 봉사하지 않습니다. 우린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 분들과 함께 사랑을 나누고자 이 일을 합니다. 이와 같이 불쌍해서 봉사하는 다른 종교와 그 근본이 틀린 출발점(With)을 우리 기독교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건 바로 하나님의 마음.우리와 함께 하셨던 그분의 마음. 그것이 다른 출발점입니다.
6. 한국이나 미국이나 기독교인들이 신앙과 삶의 불일치, 신앙과 사회적 책임의 불일치로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인 것같습니다. 기독교 공동체가 사회적 책임을 좀더 하기 위해서 어떤 점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회개 입니다. 구원의 완성을 위해 끊임없는 개인적 회개가 필요 하듯이 우리 기독교도 사회에 침묵하고 무관심한 일에 대하여 회개해야 합니다. 여기서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이란 틀에서 사회 정치적 이슈에 관심을 가지고 달려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 책임은 사회 전반에 책임적 존재로서 기독교가 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즉 소외된 이웃들을 돌아보고 함께 하는 것은 기독교의 책임적 사명이였습니다. 우린 선 성장 후 선교 논리에 매달려 그 들을 외면했습니다. 경제적 논리 속에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묵인 되었습니다. 기업의 이윤을 위해 이웃들에게 희생을 강요한 것에 대하여 기독교는 침묵하였습니다.
이제 이런 것들을 기독교 공동체는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그 마음으로 이웃을 돌아 보아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개인과 사회적 책임에 대한 회개 없이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없다고 봅니다. 각 공동체의 깊이 있는 회개만이 우리를 온전한 기독교인으로 만들어 갈 것입니다.
7. 진로를 계획하고 고민하는 코스탄들이 많습니다. 사회적 선교를 담당하는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실에서 젊은이들에게 강한 도전 한번 해주시죠.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세상을 변화 시킬 한 사람을 찾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전체 속에 모든 사람들이 다 그 한사람이 될 순 없습니다만 부분으로는 각자 역할에서 충분히 그 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자동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엔진입니다. 그러나 엔진만 있다고 자동차가 가진 않습니다. 엔진을 받쳐 주는 수천 가지 . 부속의 결합이 있어야 그 엔진의 역할이 엔진다워 집니다. 성경을 보니 금그릇, 은그릇, 질그릇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은 금 그릇의 달란트 어떤 사람은 은 그릇의 달란트 어떤 사람은 질 그릇의 달란트를 가집니다. 우리 기준으로 보면 금 그릇이 좋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금 그릇이 최고다 라는 잘못된 선입관을 가지고 모두가 다 금 그릇이 되려고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안에선 그 각자의 역할이 틀린 것이지 모두 한 그릇으로 소중한 그릇입니다. 우리 코스탄들이 내가 있는 그곳에서 하나님이 원하는 그릇의 역할을 다 한다면 그게 바로 그 세계 속에 하나님이 찾는 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회선교를 너무 크게 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모두가 잘하는 공부 접어 두고 투쟁가나 선교사가가 되면 세상은 참 힘든 세상이 될 것입니다. 저는 개인 적으로 코스탄 여러분들이 현재 있는 각자의 위치에서 소외된 우리 이웃들을 돌보고.세상의 거짓에 대해 아닌 것은 당당하게 아니라고 이야기 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그것이 바로 사회선교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두가 다 금 그릇은 될 수 없지만 모두 사회 선교사는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진로를 결정할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진로의 결정에 있어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는 금 그릇과 질 그릇 모두다 소중한 그릇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각자의 위치에서 그 역할을 잘 감당하면 하나님 앞에선 그게 바로 금 그릇이며 또 그게 바로 사회선교사 입니다. 세상 속에 모두가 다 하나님 나라를 이룩하는 사회선교사가 되길 기원합니다.
Jul 7, 2009 | 코스타 사역/코스타 보이스
1. 유진소 목사님, 안녕하세요. 코스타에 참석하는 분들을 위해 간단히 자기 소개를 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어떻게 신앙을 갖게 되셨는지요.
저는 초등학교 1학년 때 교회 마당에서 놀다가 예배에 참석하게 되면서 신앙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그 후에 일단 교회를 떠나지 않고 교회에서 성장했고,개인적으로 주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한 것은 고등학교3학년 때였습니다. 친구의 하숙방에서 인생과 진로, 그리고 신앙에 대하여 이야기 하다가 새벽에 성령의 임재와 함께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신학교를 가고 싶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그럴 수 없어서 재수를 했고, 그 후 먼저 세상 학문을 알 필요가 있다는 멘토 목사님의 조언에 따라 연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해서 공부했습니다. 이후 신학대학원에 갔고, 온누리 교회 부목사를 거쳐 13년전에 LA에 현재 ANC 온누리 교회를 개척해서 담임하고 있습니다.
2. 오늘 설교의 주제와 내용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세상 가운데 믿음의 삶이 자신을 지키고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세상과 대결을 해야하고, 그 대결에서 반드시 이겨야하는 것을 다니엘의 세 친구를 통하여 배우고 묵상하기 원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다니엘의 세 친구가 대결에서 승리한 비결, 즉 영적인 통찰과 하나님께 대한 확실한 신앙고백을 통해, 우리 역시도 세상과의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을 배울 수 있으면 하는 소망으로 말씀을 준비하였습니다.
3. 이번 코스타의 주제와 관련해서 개인적으로 느끼시거나 생각하신 점에 대하여 한 말씀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주 중요한 주제를 잡았다고 생각합니다. 시대적으로 너무나 중요하고, 그러면서 그 주제 속에 문제 제기만이 아니라 대답까지 제시해 주는 좋은 주제입니다. 세상속에서 세상을 향하여 살아가는 신앙인이 꼭 생각해야 할 주제입니다. 평화가 용기가 되고 도전이 되고 싸움이 되고 승리가 되는 그런 비밀들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해주시고, 성숙한 신앙을 갖고자 고민하는 코스탄들에게도 조언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신앙의 선명함이 우리의 신앙의 고민과 갈등을 이길 수 있는 대답입니다. 고민이 있다는 것은 많은 경우 세상적인 부분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을 아직 포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지요. 세상의 가치관과 신앙의 가치관이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에는 삶의 무게중심을 확실하게 주님께 옮기는 계기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인정하고 선포하며, 삶 속에서 하나님께 최우선순위를 두고, 그 헌신을 매순간 확실히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코스타는 말씀을 통해, 그리고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형제자매들과 이미 그 고민을 경험한 선배 및 멘토를 통해 고민의 해답을 얻어갈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시기를 권면하고 싶습니다.
5. 교회라는 것이 어떤 공동체인가 라고 질문한다면 어떻게 대답하실지, 섬기고 계신 지역교회의 비젼과 함께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교회는 부름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면서 동시에 주님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잘 하기 위한 수단이면서 동시에 그 신앙생활의 목적이 됩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이 된다는 측면에서 교회는 주님을 향한 예배를 통하여 이 일을 감당하는 예배 공동체여야하고, 또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회복과 선교 사역을 통하여 이 일을 해 나가는 그런 공동체여야 합니다.
Jul 7, 2009 | 코스타 사역/코스타 보이스
1.손희영 목사님, 안녕하세요. 오전 주제 강의를 다시 맡아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처음 코스타에 참석하는 분들을 위해 간단히 자기 소개를 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저는 손희영 목사이고 1949년 생입니다. 연세대 의대와 대학원을 졸업하였고 모교와 세브란스 병원에서 내과학 교수를 지냈습니다. 1987-1989년 사이 택사스 휴스턴 소재 M.D. Anderson Cancer Center에서 폐암 연구분야의 선임연구원을 지냈습니다. 그후 대학을 사직하고 1990-1995년에 켈리포니아 파사디나에 있는 풀러 신학교에서 선교학과 목회학 석사를 마쳤습니다. 1995년부터 지금까지 플로리다 게인스빌 소재 게인스빌 한인교회를 담임하고 있습니다. 교회 밖 활동으로는 한국 인터서브 선교회 해외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아내(고은희)와 두 아들(수민 수빈)이 있습니다.
2. 이번 코스타의 주제인 “예수의 평화, 세상을 향한 용기”에 대한 주제 강의를 맡아주셨는데요, 현재 상황에서 이 주제의 의의 또는 중요성에 대해서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시대는 국제적으로든, 조국 사회의 현실로 보든 앞이 안보이는 혼란과 갈등의 짙은 안개속과 같습니다. 그 원인은 사회학적으로나 경제학적으로 혹은 국제정치적으로 여러가지 해석을 할수있겠지만 성경적으로 볼때는 하나님의 ‘샬롬’이 깨어지고 실종된 때문이라고 봅니다. 샬롬의 실종은 타락이후 인류역사에 늘 있어왔지만 오늘날과 같이 물질문명이 발달하고 인간성의 황폐화와 이념의 대립이 첨예(살벌)하게 드러나 있는 상황은 드물다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은 진정한 샬롬 없이는 결코 인간답게 살수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샬롬은 하나님 만이 주실수있는 선물입니다. 생명의 선물입니다. 코스탄들이 나아가고 있는 미래의 날들은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습니다. 나라 안팎으로 넘어야할 장벽과 해결해야 할 난제들이 산재해있으며 취업, 자녀교육, 사회참여, 교회 생활의 여러 영역에서 정말이지 새롭고 확실한 복음에 대한 이해, 복음안에 약속된 하나님의 능력을 간구하지 않을수없습니다. 진정하고 충만한 샬롬은 미래에 약속된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의 삶입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그 샬롬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 세대 안에서도 첫열매로 나마 맛보며 살수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에게 상당한 댓가 지불을 필요로 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께 대한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 그리고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샬롬이 파괴된 이 세상이 겪는 고통과 고난에 동참하고자 하는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여러가지의 용기가 있겠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용기란 샬롬을 파괴하는 세상의 악과 죽음의 권세의 정체를 꿰뚫어 보고, 그 어머어마한 세력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해체되었음을 알고 믿으며 다가올 미래의 하나님의 나라의 샬롬을 이 땅에서 ‘미리’ ‘앞당겨’ 실현하며 동참하기 위해 악과 싸울수있는 용기인 것입니다.
3. 주제 강의의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여 미리 맛보기를 해주시면 코스탄들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겠습니다.
말씀의 요점은 이러합니다.
1. 하나님은 영생과 샬롬으로 충만한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의의 관계를 지속하고 있음으로 유지된다.
2. 하나님을 등지고 타락해 버린 인간은(불의하게 됨) 생명을 잃어버리고 당연히 샬롬도 상실하였다.
3. 이것은 성경안에서 하나님의 저주로 표현되며 그 결과는 ‘악’ 이다. 악이란 단순히 인간의 도덕적 붕괴로 인한 부정적인 결과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적인 사단의 사주, 인간의 통제를 떠난 자연계의 파괴, 그리고 거미줄 처럼 시간과 공간을 종횡하며 얽혀진 개인과 집단의 악들이 합쳐지고 중복되고 확대재생산된 어마어마한 세력이다. 이것은 반창조의 현상이며 반생명의 현상이며..그래서 그것을 궁극적으로 죽음의 증상이라고 해도 된다.
4. 이 세상에서 인간이 겪고 있는 모든 종류의 개인과 집단의 고통들과 천재지변들은 바로 ‘악'(evil)이며 죽음의 그림자들이다. 세상을 지배하고 인간을 죄와 죽음으로 몰아놓는 이 악의 결과로 인간이 겪어 왔고 겪고 있으며 겪게 될 비극들을 조금만이라도 돌아보라.
5.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속하셨다는 말, 죽음을 정복하셨다는 말은 그분의 십자가 상에서 인간과 세상의 모든 악들을 그 존재위에 수렴하여 짊어지셨고 그것을 감당하면서 마침내 그 악의 세력을 ‘소진’시키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진정한 의미이다.
6. 부활로 말미암아 여신 새하늘과 새땅과 새 육체의 시대-완성된 햐나님의 나라는 언젠가 우리가 소유하게 될 것인데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나라의 삶-샬롬이 지금 여기 우리의 삶속에서도 부분적이나마 누리게 된다. 단,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만 그 혜택이 주어진다.
7. 예수안에서 샬롬을 누리는 자들은, 혹은 그것을 누리려면, 우리는 자신의 샬롬안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죄와 그 결과인 악으로 고통하는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고 우리의 존재를 열어 그 고통을 이해하고 수용하고 나누면서 악의 실재를 최소화하며 샬롬의 힘을 확장하고 나누는일에 우리를 드려야 한다. 그것은 성경 진리에 대한 이해와 역사의식과 더불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용기는 우리가 행하는 삶의 어떤 미덕보다 더 완전하고 확실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런 말씀을 준비하는 과정이 저 자신의 성경적 세계관 정립을 위해서, 저 자신의 샬롬을 위해서 주제강의가 필요한 일이었지 않았나 합니다.
5. 코스탄들에게 평소 바라시던 점이 있으시면 신앙의 선배로서 한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1990년 서부 코스타에 세미나 강사로 한번 갔고 2007년에 다시 참석하게 되기까지 너무 오랜 gap이 있었고 세대차(?)도 있고 해서 적실한 말씀을 드릴수있을까 의문이 생깁니다.
다만 한가지 느꼈던 점을 굳이 말하자면, 코스탄들이 교회생활의 연조들이 차이가 많아서 많은 분들이 아직은 불신자인 상태로 참석하고(매우 좋은 일입니다) 어떤 분들은 상당히 훈련된, 그래서 신앙의 삶의 적용 문제를 깊이 연구하고 싶은 분까지 너무 다양해서 주제강의나 저녁 설교 등을 준비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좀 쓴 소리를 하자면 참석자들 중에 매우 많은 분들이 신앙적 언어, 성경에 대한 기초적인 개념등이 아직은 부족하지 않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제안을 해 봅니다. 가급적이면 코스타는 적어도 3년 정도 씩은 연속적으로 참석하도록 독려하고, 2-3년 정도는 복음의 기초를 확실하게 배울수있는 주제강의를 갖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종종 느꼈지만 코스타라는 집회의 명성 때문에 참석자들의 실력(이렇게 표현할수있을지)과는 동떨어지게 너무 멋지고 수사적이고 주제를 내거는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아무튼, 코스타 라는 좀처럼 갖기 힘든 기회를 통해 한국의 젊은 지성인들이 성경계시와 역사의식과 현실참여적 열정이 골고루 균형을 갖춘 멋있는 그리스도인들로 훈련되기를 바랍니다.
Jul 7, 2009 | 코스타 사역/코스타 보이스
예수, 우리의 평화
신약성경은 예수님과 관련된 다양한 평화의 의미를 기록하고 있다. (1) 누가복음 초반부의 평화라는 단어는 예수님의 메시아임과 메시아의 승리를 설명하고 있다. (2) 예수님의 공생애를 기술한 복음서는 평화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회심자에게 주는 구원과 평안로 설명한다. (3) 예수님은 평화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초대하는 것을 강조한다. (4)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평화의 왕이라는 찬송은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상징한다. (5) 예수님의 반복된 평화의 인사은 단순한 안부를 넘어서 부활의 사건의 의미를 계속해서 강조한다.
신약성경저자들은 예수님의 평화의 메시지를 좀더 발전시킨다. 바울 사도의 말로 정리하면 (1) 평화는 예수님과 하나가 됨으로써 얻는다. (요 16:33,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 그분의 고난과 부활, 그리고 그리스도가 이 세상을 이겼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의 결과이다. (2) 이 평화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롬 15:13, 살후 3:16) (3) 샬롬의 삶은 내면적으로 충만하게 누릴 수 있는 만족감인 동시에 인류 공동체, 피조세계 전체와 함께 누리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골 1:15-20) (4) 교회 공동체가 분열이 생길 때 바울 사도는 반복해서 평화의 하나님(God of Eirene)을 강조한다.
예수, 우리의 평화 (엡 2:14) 평화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음으로써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 곧 화해의 관계가 맺어지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 평화는 구약 시대에 약속된 ‘화평의 언약’의 성취이며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아의 평화의 실현이다. (사:54:10; 겔 37:26; 슥 9:9-10) 메시아는 거짓 샬롬 (false shalom)이 아닌 진정한 회복의 질서로서의 화해를 선포한다. (마 10:34; 눅12:51)
하나님과의 평화는 인간이 필요한 것을 하나님이 먼저 시작하신 사역이었다. (롬 5:10, 고후 5:19; 골 1:22) 인간의 상태는 약하고, 경건하지 않고 죄로 가득한 모습이었는데,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화해를 이루셨다. (롬 5:6-8)
이 평화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롬 15:13, 살후 3:16) 예수님을 주로 받아들일 때 즉각적으로 누릴 수 있는 영생의 축복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많은 영적인 축복들과 함께 신자들은 자신의 삶 속에서 평화를 깊이 누릴 수 있다. (롬 14:17; 빌 1:2; 갈 5:22; 갈 6:16; 롬 8:6)
회복된 창조질서에 대한 비젼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의 즉각적인 효과는 하나님과의 화해, 하나님과의 평화이며 (롬 5:1; 엡 2:14)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피조물로의 자격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고후 5:17) 동시에 이 효과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선 구원의 사역이다. (고후 5:19; 롬 11:15) 샬롬의 삶은 내면적으로 충만하게 누릴 수 있는 만족감인 동시에 인류 공동체, 피조세계 전체와 함께 누리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예수님은 평화 그 자체이며, 십자가로 원수된 것을 소멸하심으로써 인간과 모든 만물과 하나님 사이에, 또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화해와 평화를 이룩하셨다. (엡 2:14-18; 골 1:15-20) 예수님은 그 분 안에서 모든 피조물이 통일되는 우주적인 평화의 중재자이시다. (골 1:15-20) 본문을 통해 바울 사도는 골로새서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루신 화해의 사역이 우주적인 효력이 있음을, 에베소서에서는 인류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장벽을 제거하는 능력이 있음을 강조한다. 로마가 가져다 준 세상의 평화에 대비된 하나님이 보여주신 진정한 차원의 평화를 보여준다.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평화의 복음 평화의 원리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교회와 공동체의 운영에 실제적인 의미를 갖는다. 신약성서의 강조점은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 한 분을 통해 화해를 이룬 공동체이다. (Reconciled in one person)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이미지, 하나의 집이라는 이미지를 갖는다. 어딘가에 속한다는 이미지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떤 조건에 얽매임없이 그리스도 한 분 삶, 죽음과 부활을 통해 받아들여지며 (엡 2:13-8), 교회 공동체가 분열이 생길 때 평화의 하나님(God of Eirene)을 기억해야한다.
Jul 6, 2009 | 코스타 사역/코스타 보이스
존 스토트, 기독교의 기본진리, 나는 왜 기독교인이 되었는가?
복음주의권의 거장인 존 스토트 목사의 신앙 입문서. 종교에 대해 배척하는 합리주의적인 태도에 대해서 진지한 질문과 해답을 주는 기독교 입문서이다. 자신의 경험을 설명하며 기독교 신앙을 가질 수 있는 여러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그중 중요한 것은 그것을 느끼거나 믿기 이전에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기독교 신앙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안내서가 될 것이며 신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자 하는 코스탄들에게 좋은 지침서가 될 것이다.
김세윤, 구원이란 무엇인가
신약성경은 크게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사도들의 예수님의 삶, 죽음, 부활에 대한 해석으로 그 내용을 나눌 수 있다. 사복음서는 나사렛 예수에 대한 전기로서 예수님의 설교의 주된 내용인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는 반면 서신서들은 예수님과 직접 교류했던 사도들이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고 그것을 해석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두 가지 큰 내용을 설명함으로써 저자는 신약성경의 내용을 충실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에 근거하여 기독교 신앙으로 독자들을 인도하고 있다.
톰 라이트, 톰 라이트와 함께하는 기독교 여행
역사적 예수에 대한 복음주의권의 학문적 선봉에 서있는 Tom Wright의 신앙 입문서 톰 라이트와 함께하는 기독교 여행(Simply Christian)은 저자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 성과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다른 책과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2부에서 제시되고 있는 God, Israel, Jesus and the coming of God’s kingdom 등의 주제가 잘 설명되고 있다. 예수가 이스라엘의 역사에 계시된 하나님의 약속을 현재화하여 자신의 삶 자체로 보여주고 있다는 해석을 광범위한 증거로 제시한다.
로이드 존스, 복음의 핵심
최고의 명설교가의 명쾌한 복음 설명이자 기독교 변증의 고전. 기독교 교리에 충실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성경해석을 한 가감없는 복음설명이다. 참된 안식인 그리스도의 멍에에 대하여 성경에 충실한 해석으로 독자들에게 도전한다.
필립 얀시,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
기독교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일 것이다. 그의 삶, 생각, 죽음, 그리고 부활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종교적인 겉치레에 치우칠 때 무의미한 종교활동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이책은 예수님의 삶, 죽음과 부활, 승천에 대한 그의 이야기의 의미를 재검토하여 이 땅에 발딛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삶과 자신의 삶과 직접적인 관계를 엮어낼 것을 권유하고 있다. 기독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과, 기독교의 핵심에 다시 다가가고 싶은 신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좋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