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 1, 2003 | 삶과 신앙/고독의 세상읽기
단호하고 일방적인 한국교회
“옛날 고등학교 때 수학선생님이 그랬다. 이순신도 세종대왕도 또 조선시대에 그밖에 착하게 살았던 사람들도 다 지옥에 갔을 거라구. 왜냐면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말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에 안 믿은 거잖아요?” 그랬더니 그것과 상관없이 안 믿은 사람은 무조건 지옥이니 너희들도 어서 믿는 게 지옥에 안가는 길이라고 했다. 이때부터 난 무조건 기독교인이 무서웠다.” <언론사 홈페이지 독자 게시판에서 발췌한 글>
“‘예수님 믿으면 천국, 불신자는 지옥’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지난달 한 인터넷 사이트에 도장으로 보라색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진 1,000원 권 지폐 사진 두 장이 올려졌다. ‘犬독교의 만’이라는 제목으로 사진을 게시한 네티즌은 “화폐 관리법 위반으로 싹 다 잡아가라. 첫 번째 사진의 문구는 참으로 심오하다. ‘不信者’를 말하는 것인가? ‘佛信者’를 말하는 것인가?”라며 불쾌한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빛과소금 4월호, 확산되는 반 기독교 정서 중, 최경배 기자>
한국교회를 향한 현 사회의 무자비한 왕따에는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는 우리의 자세 못지 않게, 단호하고 일방적인 우리의 표현방식에 또 다른 원인이 있습니다. 곧 소통의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들어주는 것과 말하는 것(or 표현하는 것)에 있어 상호간에 심각한 괴리가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소통상의 문제로 인해 우리는 당하지 않아도 되는 왕따를 당하는 면이 있습니다.
비 기독교인들의 시각에 우리 기독교인(여기서는 한국의 개신교 인만을 의미)들은 매우 무섭고(?) 거친(?) 사람들입니다. 기독교와 관련된 주제에 있어 웬만해서는 유연하게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기보다, 단호하고 공격적으로 표현합니다. 다양한 사고가 존재하는 다원주의 사회의 현실을 무모할 정도로 부정하며, 우리 식의 신앙 관을 비 기독교인들에게 일방적으로 선포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방식의 대표적인 일례를 우리는 지난 1999년도부터 심각하게 불거졌던 ‘단군상 철폐 운동’을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초등학교 구내에 세워진 단군상의 머리를 전자 톱으로 자르는 식의 행동은 후기 현대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상당한 불쾌감을 안겨 주었습니다.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행동은 사회 내에 자신을 제외한 다른 관점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부정하는 일방적이고 공격적인 자세로 비춰진 것입니다.
언론사 홈페이지 등에서 벌어지는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들 간의 논쟁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상호간의 노력으로 진지하고 발전적인 토론이 진행되는 듯 싶다가도 가끔씩 기독교인들의 선포적이고 단언적인 표현방식이 비 기독교인들을 자극해서 토론 자체가 난장판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물론 반대로 일부 비 기독교인들의 무례한 언행과 선입견으로 인해 토론이 엉망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무엇이든 이원론적인 잣대로만 판단하려는 우리의 ‘대결구도적’ 자세가 상호간의 소통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의 ‘대결구도적’ 자세가 지속될수록 그들은 우리를 더욱 배타적이고 반이성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되며, 결국에는 상대하기를 꺼려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비단 이런 현상을 비 기독교인들이 주류를 형성하는 인터넷 사이트에서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주류를 이루는 사이트나 모임에서도 쉽게 목도할 수 있습니다. 간혹 누군가 교회나 성경에 대해 다소 불경한(?), 그러나 개인에게는 심각한 고민거리나 생각을 나누면, 곧 가차없이 선포적이고 단정적인 반응들이 나타납니다. “그런 생각은 사단이 주는 것이다”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다. 일단 믿어야 한다!” “형제님,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등등. 결국 이러한 단언적 표현들이 그 ‘다소 불경한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다시는 자신의 고민을 솔직히 털어놓고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와 같은 우리 귀에 낯익은 전도문구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의 고성방가식 찬양?전도집회, 그리고 일부 대학가 선교단체의 ‘물고 늘어지기식’ 일대일 전도 방식 등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비 기독교인들에게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한국교회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선포적이고 일방적인 표현방식에는 도대체 상호 교환되는 ‘소통의 미’가 고려되지 않습니다. 오직 일방통행 식의 선택강요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전하는 자의 입장이나 관점을 무조건적으로 듣고,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어찌 보면 강압적인 현실만이 존재할 뿐이지, 잘 들어보고 자신의 입장도 밝히면서 서로 소통하는 가운데 선택할 수 있는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후기 현대주의 사회에 익숙한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권이 침해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혹 기독교 신앙을 믿고 받아들이게 되더라도, 후에 기독교적 관점에 자신이 동화된다 할지라도, 이 모든 과정이 스스로의 고민을 통한 자신의 실존적 선택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은 그냥 길거리에서 느닷없이 만난 어떤 낯선 사람과의 짧은 주입식 강의를 통해서가 아닌, 신앙 깊다는 기독교인들의 저돌적이고 확고한 신앙적 표현과 행위를 통해서가 아닌, 인격과 인격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형성된 대화와 만남을 통한 선택인 것입니다. 후기 현대주의를 연구하는 많은 기독교 학자들의 지적처럼, 후기 현대주의의 영향권 아래 있는 사람들은 근대주의 시대처럼 설득 당함으로 믿거나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직접 체험하는 가운데 손수 선택함으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기 원합니다.
선포적이고 단언적인 표현양식의 배경
“이에 다리오 왕이 온 땅에 있는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 하는 자들에게 조서를 내려 가로되 원컨대 많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라. 내 나라 관할 아래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지니 그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변치 않으실 자시며 그 나라는 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개역한글, 다니엘서 6:25-26)
한국교회의 이러한 공격적인 면모의 배경에는 기독교가 그동안 소유해 온 역사적, 교리적 특성과 연관이 있습니다. 특히 기독교는 그 구원관이나 신관, 타 종교관 등에 있어 교리적으로 매우 단호하고 명확한 입장을 고수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으로 인해 기독교는 더욱 선포적이고 단언적인 행동양식을 보일 수밖에 없었으며, 상대적으로 다른 종교에 비해 매우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종교로 비춰지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의 구원관은 죄인 된 우리 인간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그 근간으로 삼습니다. 성경은 예수님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을 우리에게 제시하지 않습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오직 예수로 시작해서 예수로만 귀결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관은 또한 철저한 유일신관을 주장합니다. 그러기에 결코 타종교를 용납해 줄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특히 신, 구약의 여러 이야기(narrative)들은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세상의 허탄하고 거짓된 이방종교의 위협과 영향 속에서도 얼마나 굳건히 하나님 한 분만을 신앙해 왔는지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경 이야기에 익숙해진 우리들은 자연스레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나올 정도”의 단호하고 확고한 표현양식을 자랑스러운 교회의 전통으로 유지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인물들의 순교자적 삶을 뒤따르고자 하는 노력이 다 종교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선포적이고 단언적인 삶으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을 성실하게 고수한다는 것이 곧 소통에 있어서 배타적이고 일방적이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의 인물들이 각자에게 부여된 시대와 환경 속에서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진리를 변화하는 세상에 소통시키고자 계속해서 진지한 고민과 성찰을 해 왔음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항상 일방적이고 공격적인 표현양식만을 통해 그들의 신앙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다변화하는 역사와 사회 가운데서 성경인물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본질적인 진리의 변질을 통한 세력유지가 아닌, 어떻게든지 하나님의 진리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이를 세상에 드러내고자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노력하는 것이었습니다.
북 이스라엘, 남 유다의 멸망과 바벨론 포로생활을 거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만 국한된 하나님’이 아니라 ‘세계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과감하게 바벨론의 문화와 양식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예루살렘 성전을 초토화시킨 원수 나라의 관원으로서 왕을 모시며 살아가길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니엘’,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라는 히브리식 이름까지 내려놓고 ‘벨드사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라는 바벨론식 이름을 가지고 삼 년 동안 배운 갈대아 언어와 문화를 통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 하는 자들의 하나님이심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곧 그들은 다변화하는 국제정세에서 이전 시대의 방식에 갇혀 하나님 전하기를 주저하기보다, 바벨론 사회와 문화를 재빠르게 소화함으로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는 효과적인 소통의 길을 모색했던 것입니다.
분명 우리의 선포적이고 단언적인 자세는 우리의 확고한 믿음과 신앙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통해 명확하게 확신되고 체험되었기에 우리는 단호한 언어와 행동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이러한 가슴 터질 듯한 신앙적 확신과 영혼사랑의 열정이 변화하는 현 시대의 비 기독교인들에게 오히려 역효과로 작용하고 있다면 이러한 방법론은 진지하게 재고되어야 합니다. 신, 구약의 신앙의 선배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시대의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며 이를 세상에 드러냈듯이, 우리 또한 우리 시대에 알맞은 효과적인 소통의 길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의 의도가 우리 딴에는 거룩하고 진지하다 할지라도 후기 현대주의를 살아가는 다수의 비 기독교인들에게 이러한 표현양식이 배타적이고 일방적인 기독교의 횡포로 이해된다면, 우리의 마음을 잘 이해시킬 수 있는 새로운 소통의 언어와 행동양식을 모색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참된 기독교적 관용: ②일방적인 선포에서 정중한 소개로…
“여러분이 가진 희망을 설명하여 주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답변할 수 있게 준비를 해 두십시오. 그러나 온유함과 두려운 마음으로 답변하십시오.” (표준새번역 개정판, 베드로전서 3:15)
후기 현대주의 사회 속에서도 우리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믿는 바를 확고히 하고, 이 믿는 바를 비 기독교인들에게 전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그 누가 반이성적이라고 꼬집어도 우리에게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의 유일한 창조주이시자 통치자이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성경의 계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를 세상에 알리는데 있어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존재로 인식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결국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리의 변화’가 아니라, 이 진리를 담아 전달하는 ‘소통의 변화’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소통의 변화’는 우리가 비 기독교인들의 생각을 진지하게 잘 들어주는 것 못지 않게, 우리의 믿는 바를 그들에게 잘 전달함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소통의 변화’는 ‘선포(proclamation)하는 자세’에서 ‘소개(presentation)하는 자세’로의 전환입니다. 후기 현대주의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선포적인 표현양식보다 소개하는 표현양식이 더 효과적입니다. 단정적이고 일방적으로 비춰질 수 있는 명제적 언어로만 기독교의 진리를 선포하기보다, 자신의 삶과 경험을 명제적 설명에 덧붙여서 정중하게 소개하는 것이 더 지혜롭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그러나 저의 삶 속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다가오셨습니다.” “이것이 제가 믿고 이해하는 하나님입니다.”
후기 현대주의는 많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상대성(relativism)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러기에 선포보다는 소개가, 그리고 명제적인 표현보다는 자신의 삶을 이야기(narrative) 함으로서 자신의 믿는 바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물론 우리의 삶을 통해 실제적으로 다가온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여러 종교 중의 하나로 치부해서 소개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척 자존심 상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종교 다원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자신이 믿는 진리만이 옳다고 목청 터지게 외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삶에 찾아와 자신을 변화시키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정중하게 소개하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분명 이러한 방법론은 대규모 전도집회나 주입식 노방전도하고는 거리가 먼 새로운 소통의 길입니다. 한꺼번에 수십, 수백 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집회 중심의 소통이 아니라 영혼 개개인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신뢰와 친밀함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소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항시 이 두 가지 양식 모두를 각 사람에 맞게 적절하게 사용해 왔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우물가의 여인과 뽕나무 위의 삭개오에게는 일대일의 관계로 친밀하게 다가가셨지만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의 역사 가운데서 삼천 명을 회심시켰던 것과 같이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다원주의와 인간 개개인의 선택을 중시하는 후기 현대주의의 흐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명확하게 인식하는 가운데 각 사람의 기질과 경향에 맞춰서 다가가야 합니다. 비록 현 시대가 후기 현대주의의 영향권 안에 점점 진입하고 있지만 아직도 우리 가운데는 근대적인 접근방법이 더 익숙한 비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비 기독교인들에게 접근하기 전에 먼저 상대방의 역사와 관점을 잘 이해하는(들어주는 것)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회적 이슈와 관련된 비 기독교인과의 소통에서도, 우리는 자신의 기독교적 관점을 정중하게 소개해야 합니다. 물론 단호하게 입장을 표명해야 되는 경우라면 신중하게 준비함으로 그렇게 해야겠지만, 무턱대고 감정적이고 대립적인 자세로 접근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간혹 일방적이고 선포적인 폭언을 쏟아 부으며 세상과 소통하시기도 했지만(예: 성전에서 매매하던 자들에게), 대다수의 문제에 있어서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의 진지한 대화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일방적으로 그들과 대화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당시 헬라 문화권의 특징이었던 ‘명예와 수치’ 문화(‘Honor/Shame Culture’)를 통해 정중하게 그러나 날카롭게 소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종교 색이 강한 언어나 행동양식을 굳이 강조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사회, 문화에 아주 정통한 지식을 가지고 계셨기에, 오히려 이스라엘 사람들이 실생활 속에서 쉽게 접하는 것들을 비유로 삼아 소통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대화의 말미에는 그들 스스로가 생각해 보고 답변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곧 개개인의 실존적 선택을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복음서의 저자는 이러한 예수님의 주장에 항상 권세가 실려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선포적이고 단언적인 표현양식을 통한 세상과의 대립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사회, 문화적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고자 하는 열린 마음입니다. 무엇이 이 사회의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소통양식인지를 파악해서 이에 맞춰 우리의 입장을 정중하고 날카롭게 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우리는 비본질적인 사회문제에 힘을 소진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성경 적인 안목을 가지고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사회를 바라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소모적이고 상대적일 수 있는 문제에 매달리기보다 예수님의 공생애처럼,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 좀더 본질적인 사회문제에 집중해야 합니다.
결국 사도 베드로의 권면처럼 우리는 항시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소유한 소망(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비 기독교인들이 궁금해 할 때, 또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문제에 대한 기독교적 입장을 알고 싶어할 때, 우리는 그들에게 답변할 것이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답변은 배타적이고 일방적인 자세가 아닌, 온유하고 두려운 자세로 소개되어야 합니다.
아쉽지만 우리 사회가 후기 현대주의의 영향권 아래 들어갈수록, 우리는 내가 믿고 신념하는 바를 선포하기보다는 소개하는 데에 의의를 두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확신에 찬 목소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가운데 무릎을 꿇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극적인 역사는 자주 일어나지 않더라도, 비 기독교인과 내가 믿는 진리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고, 또 내가 믿고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소개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잔잔히 역사 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소통 가운데 형성된 친밀한 관계 속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온전히 드러낼 때, 하나님은 후기 현대주의 시대 속에서도 다니엘 때와 같이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위대하심을 모든 사람들 가운데 드러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달 주제: 후기 현대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지혜 ③ 기다림 속에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여야 합니다.
Sep 1, 2003 | 삶과 신앙/고독의 세상읽기
왕따를 당할 수밖에 없는 한국교회
“한국교회가 지역사회나 이웃에 기여한 것이 무엇이 있냐? 오직 자신들의 배만을 채우는 것이 기독교인들이다.”
“성경과 예수의 가르침에 역행하는 것이 한국의 기독교다”
“한국사회에서 가장 권위적인 집단이 교회다”
“한국의 기독교는 역사의식이라고는 손끝만큼도 없다.”
<언론사 홈페이지의 독자 게시판에서 부분 발췌한 글들>
10여 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후, 제가 충격적으로 받아들이는 한국의 사회적 현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국의 기독교인(여기서는 개신교인 만을 의미)들이 한국사회로부터 엄청난 왕따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솔직히 어느 정도 이미 예상했던 현실이었지만, 막상 한국 땅에서 직접 경험해 보는 한국사회의 시선은 차갑기 그지없습니다. 정말 왕따라는 단어처럼 한국교회의 현 위치를 명확하게 설명하는 것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왕따’란 알다시피 ‘왕 따돌림’의 준말입니다. 그리고 제가 볼 때, 한국교회는 한국사회로부터 왕 따돌림, 곧 무시를 당하고 있습니다.
물론 일본의 ‘이지메’로 시작된 청소년들 사이의 ‘왕따’처럼, 힘센 한국사회가 힘없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을 일방적으로 괴롭히고 따돌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한국교회는 한국사회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기에는 힘이 세져버린, 무시 못할 영향력을 행사하는 종교 단체가 되었습니다. 다르게 보자면 한국사회내의 불의와 잘못된 흐름을 향해 왕따를 선포하며(?) 이를 기독교적 관점에서 개혁할 수 있는, 그런 영향력을 가진 집단이기도 한 것입니다. 결국 왕따 당하기에는 만만치 않은 위치에 있음에도, 한국사회는 왕따 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습니다. 좀더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체념한 듯한 눈길로 한국교회를 향해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고 있는 듯 합니다.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제가 볼 때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왕따 당할 행동을 너무나 골라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론매체를 통해 접하는 교회 관련 기사나 방송을 보면 한국사회의 이러한 시각을 단면적으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좀 잊혀지겠다 싶으면 여지없이 교회나 기독교 선교단체?학원?재단과 관련된 도덕적, 정치적 문제들이 언론에 등장합니다. 목사, 장로, 집사, 신학생이라는 직위를 가진 사람들의 개인적인 치부 또한 심심지 않게 등장하여 비기독교인들 뿐만 아니라 우리 기독교인들의 낯짝을 붉게 만듭니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언론매체들이 한국의 대다수 기독교 언론들처럼 마냥 친 기독교적인 언어로, 은혜롭고 덕스럽게만 한국교회를 묘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사나 방송이 나간 언론사 홈페이지의 독자의견란을 찾아가면 한국사회 전반에 골고루 퍼져 있는 왕따 문화의 실체를 파악하게 됩니다.
올려져 있는 글들을 보면 거의 대다수가 기독교를 성토하는 시민들의 체념 섞인 글들인데, 문제는 기사화 된 내용과는 별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기독교를 공격하는 글들을 자주 엿보게 된다는 점입니다. 마치 네티즌 개개인이 지난 수년간 한국 기독교로 인해 많은 상처와 실망을 경험한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단군상 철폐 논란이나 교회세습문제 때도, 작년 초 월드컵을 앞두고 한 보수적인 기독교 연합회에서 ‘붉은 악마’를 ‘하얀 천사’나 ‘붉은 호랑이’로 바꾸자며 개명운동을 벌이는 중에도, 올 1월과 3월 두 여중생의 죽음을 추도하는 촛불시위에 반대하는 반공 이데올로기적 집회를 연달아 가지는 가운데서도, 한국교회는 인터넷 상의 각종 게시판에서 엄청난 무시와 수모를 당해야 했습니다.
글들을 읽다보면 얼굴이 후끈후끈 달아오며 내가 믿고 따르는 종교가 이렇게도 한국사회 속에서 신망을 잃었는가 하는 절망감마저 듭니다. 도대체 어쩌다가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에서 이런 평판을 받는 신앙 공동체가 되었는지, 그동안 왜 우리는 이러한 세상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답답한 마음이 들뿐입니다.
물론 이들의 주장이 모두 타당하거나 올바르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개중에는 상당히 주관적인 잣대를 가지고 일방적으로 한국교회를 재단질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들의 비아냥거림이 틀렸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용기는 솔직히 없습니다. 왜냐하면 분명 지난 20-30여 년 간 한국교회가 주변의 이웃들보다는 교회 공동체 안의 자신들에게만, 그리스도인의 내적 성숙보다는 오직 외적인 고속성장에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보다는 축복에만 집중해 왔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구원받느냐?”(“How to be saved?”)에만 지나치게 관심을 두었지, 성경이 구원받은 자에게 변함 없이 강조하는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야 할 것이냐?”(“How to live as a Christian?”) 에는 너무나 무관심했습니다. 그리고 왕따는 결국 이러한 편식된 흐름의 결과물인 것입니다.
왕따를 당하는 또 다른 이유
“원래 기독교인들과 논쟁하면 싸움밖에 되지 않는 이유가 있죠. 논리 내 세우다 안 되면 결국 하는 말이, “넌 믿음이 없어서 그래”라고 말하죠. 즉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그 어떤 소리도 악마의 소리”
“왜 기독교인들이 말을 잘 하는 줄 아십니까? 기독교인들은 비 기독교인들과의 대화를 서로의 입장과 생각을 나누는 장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꼭 이겨야 되는 말싸움의 장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듣기보다는 으르렁거리며 결사적으로 덤벼들죠.”
<언론사 홈페이지의 독자 게시판에서 부분 발췌한 글들>
하지만 이러한 한국사회의 분위기를 단순히 세상(?) 언론을 통해 전해진, 일부 부조리한 기독교인들의 행실, 곧 ‘삶과 괴리된 신앙’의 탓으로만 돌린다면 그것은 현재의 왕따 문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분명 한국교회는 ‘삶과 괴리된 신앙’으로부터 ‘삶과 함께 하는 신앙’으로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값싼 복음이 아닌 값진 복음으로 만들,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양성해야 하며, 이것이 이 왕따에서 자유해지는 근본적인 접근방법일 것입니다.
그러나 더불어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후기 현대주의적 사회의 특성을 올바르게 파악함으로서 그 특성에 맞게 지혜롭게 대처하는, 방법론적인 접근 또한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 못지 않게 우리가 빛을 내고 맛을 내야될 이 세상을 바로 알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개혁해 나가는 동시에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의 특성과 변화를 깨달아, 이에 맞게 효과적으로 우리의 신앙을 비 기독교인들에게 전달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왜이리 왕따를 하는지 한편으로는 마음이 상하면서도 문제의식을 가지고 게시판에 올려진 냉소적인 글들을 챙겨 읽고, 또 비 기독교인들과 지속적인 대화의 시간을 갖다 보면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외형적으로 그들을 실망시키는 것은 눈에 보이고 드러나는 한국교회의 부조리일지 몰라도, 내면적으로 비 기독교인들이 우리를 향해 참으로 답답해하는 것 중에 하나는 바로 우리의 일방적이고, 들으려고 하지 않는 자세(attitude) 라는 점입니다. 한마디로 기독교인들은 도대체 말이 안 통하는, 꽉 막힌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혀를 차며 우리를 더욱 왕따 하는 것입니다.
비 기독교인들의 시각에 우리 기독교인들은 꽤나 고집 센 대화상대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자신들의 의견이나 주장은 철저하게 챙겨 밝히면서도 상대방이 이야기 할 차례가 되었을 때는 좀처럼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는, 그런 매너 없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마치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철옹성과 같은 자세로 비 기독교인들과 대화합니다. 물론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로서는 비록 “적은 누룩”과도 같은 상대방의 의견이라 할지라도 이를 방치하면 엄청나게 부풀어올라 우리의 신앙을 뒤흔들 수 있기에, 될 수 있는 한 이런 이교도(?)들과는 상종하지(대화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깨어 경계하는(?) 자세로 대화하는 것이 옳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많은 경우에 목회자님들이 우리를 그렇게 교육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계의식 때문에 우리는 그들과 잘 대화하지도 않을 뿐더러, 혹 하더라도 마음의 문을 열고 진지하게 상대방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 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비 기독교인들과 접촉할 기회는 점점 줄어들고, 그러면 그럴수록 한국사회는 우리 기독교인들을 ‘그들만의 리그’속에 정신 없이 빠져 있는, 배타적인 존재들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한국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드러낼 수 있는 우리의 영향력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접촉점이 없는데 어떻게 그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 계심과 역사 하심을,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세상의 영혼들이 구원받기 원하시는 그분의 마음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또 접촉점이 있어도 진지하게 비 기독교인의 입장을 알려고 하지는 않고 무턱대고 “내 말부터 들어 보라”고 하는데 어떻게 그들이 자신의 마음을 열겠습니까?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과 부담 없는 대화를 나눌 때야 염려할 것이 없겠지만, 행여나 상대방이 한국교회 내의 뜨거운 이슈(단군상 철폐, 교회세습, 기복주의, 교회권력, 헌금 등)나 자신이 속한 교회나 선교단체의 문제점들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순식간에 마음의 평정을 잃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상대방에게 틈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들어주기보다는 일방적으로 우리의 주장만을 내세울 때가 많습니다. 행여나 들어줘도 성실하게 들어주지 않습니다. 좀 들어주다가도 아직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느니, 지금 영적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느니 하는, 비 기독교인들이 이해하기에는 힘든 기독교적 용어를 써 가며 상대방의 말을 자릅니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대화를 통해 서로가 유익을 얻기보다는, 이기기 위한 말싸움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상호교환 되는 대화가 아닌 일방통행 식의 대화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세는 궁극적으로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득보다는 더 많은 실을 안겨 주게됩니다. 짧게 보면 그 순간의 ‘억지승리’가 우리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줄지 몰라도, 길게 보면 결국 기독교를 왕따 할 또 한 명의 적대자를 양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한국의 한 출판사에서는 아주 흥미로운 제목의 책이 한 권 나왔습니다. 제목이 “꼴통들과 뚜껑 안 열리고 토론하는 법”(뿌리와이파리, 2003)인데, 이 책의 저자인 독일인 철학자 슐라이허르트는 현 서구사회의 대표적인 꼴통들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을 선택하고 이들과 대화하면서도 이성을 잃지 않고 토론하는 법을 책에 상세하게 기술했습니다. 한마디로 그의 눈에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도대체 대화가 안 통하는 ‘꼴통’들이고, 이들과 대화할 때는 감정 상할 일이 많다는 말입니다.
참된 기독교적 관용: ①열린 마음으로 진실하게 들어주는 것
“이러한 종류(성경말씀에 입각하여 이웃사랑을 실천하는)의 유니테리언주의와 화해할 수 없는 정통 신앙은 정통, 혹은 바른 교리라고 불릴 가치가 없다고 나는 믿는다. 내가 생각하는 참된 관용은, 자기 자신의 신앙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모든 정직한 신앙을 허용하고 참아 주는 것이다” (p, 186) (우찌무라 간조, “우찌무라 간조 회심기” 홍성사)
“4월 하순에 어떤 유물론에 조예가 깊은 친구의 예방을 얻어 연일 논의를 계속 하였다. 우리와 같이 태만하고 편협한 자에게 이처럼 동과 서가 멀고 적과 백이 다른 것처럼 전혀 다른 세계에 호흡하는 친구를 주어, 애씀이 적고 배움이 많은 기회를 주시는 섭리의 은총을 감사하면서 혹은 서로 ○○하며 혹은 서로 냉정에 돌아갔으나 대체로 그는 많이 말하는 편이요, 나는 대부분 듣는 편이었다” (김교신, 성서조선 1934년 6월)
“여러분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십시오. 주께서 가까이 계십니다.” (표준새번역 개정판, 빌립보서 4:5)
한국교회가 급속도로 성장했던 70, 80년대에는 근대주의 사회의 특징처럼 명제적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또 이원론적인 자세로 교회가 사회현상에 접근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습니다. 교회가 애매모호한 모습을 보이기보다는 진리를 명확하게 선포하면서 이 진리를 믿으라고 사람들에게 외치는 것이,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타락한 세상의 모습을 분명하게 질타하며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 그 시대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또한 명확하고 분명한 진리를 듣기 원했습니다. 하지만 해체주의(Deconstruction)와 다원주의(Pluralism)를 그 근간으로 하는 후기 현대주의에서는 개개인간의 인간관계 속에서 형성된 신뢰를 바탕으로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며,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상대방이 옳아도 내가 믿기 싫으면, 내가 상대방을 신뢰하지 못하면 받아들이지 않는, 그런 사회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후기 현대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진리의 내용(text)보다 이 진리를 다양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소개(present)하는 소통(communication)의 지혜입니다. 종교 다원주의적 사회구조 속에서 우리는 어차피 여러 진리(종교)들을 접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진리들 중에서 내가 믿는 기독교적 진리가 참된 진리라는 것을 남들에게 납득시키려면, 진리의 내용 못지 않게 이 진리를 전달하는 방식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어차피 진리의 홍수 속에 있는 이상, 진리끼리의 대결구도를 통한 끝없는 대립과 갈등보다는 이 진리를 소개하는 방식에 사람들은 더 호감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후기 현대주의 사회에서 대결구도는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정의하는 방법이 근대주의처럼 대결구도를 통한 명제적, 논리적 승리를 통해서가 아닌, 개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된 소식을 비 기독교인들에게 잘 전달하기 위해서는 먼저 들어주는(listening) ‘소통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것도 그냥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진지하게(attentive) 들어주는 자세 말입니다. 나중에 자신이 말할 기회를 얻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단 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 상대방과의 대화를 통해 그들이 무엇을 믿고, 왜 그것을 신봉하는지, 어떤 부분에 있어 우리 한국의 기독교에 대해 실망하고 있는지 배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성실하게 들어줘야 합니다. 설혹 우리의 신앙 관으로는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억울한 비판이나 지적이라 할지라도 일단은 진지하게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자세로 나아갈 때, 상대방도 우리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기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무엇인가 배울 수 있겠다는 마음 밭이 그들 안에 조성되는 것입니다. 결국 기독교인은 진지한 대화를 통해 이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고, 반대로 비 기독교인은 진지하게 들어주는 우리의 자세를 통해 복음을 향해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소통의 지혜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관용’이라고 하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상당히 조심스러우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자세(manner)가 요구됩니다.
종교 다원주의적 사회 구조 속에서 그동안 한국교회는 세상을 향해 벽을 쌓으면서 대결만 하는, 비관용적인 자세로 일관해 왔습니다. 다른 비 기독교인들이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우리 식의 신앙적 잣대를 고수하며, 그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 잣대로 세상에 반응해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상대방의 의견이나 관점을 존중해 주지 않게 되었고, 또 목소리를 내더라도 사회 분위기와는 동떨어진 주장만을 일삼으며 결국 왕따의 또 다른 원인을 제공했던 것입니다.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자신이 믿는 바를 확고히 하고 이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소유해 나가는 것은 분명 중요하고도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신앙을 확고히 지켜 나간다는 것이 곧 비 기독교인의 의견이나 입장을 일체 들어주지 않는, 인정해야 할 것도 인정해 주지 않는, 그런 편파적이고 일방적인 신앙자세를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참된 기독교적 관용이란 “자기 자신의 신앙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입장과 관점을 허용해 주고 참아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용은 먼저 나와 다른 종교관?인생관을 가진 사람들의 의견을 열린 마음으로 진지하게(attentive) 들어주는(Listening)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다음 달 주제: 후기 현대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지혜
②자신의 신앙을 정중하게 소개해야 합니다
Oct 2, 2002 | 삶과 신앙/고독의 세상읽기
고독의 세상 읽기
외모 지상주의 (Lookism) (2)
우리 안에 이 ‘외모 지상주의'(lookism)- 모든 평가의 기준을 외모에 두는 것 -처럼 가장 널리 퍼져 있으면서도 쉽게 인식되지 못하는 사회적 우상이 또 있을까? 사실 한국사회의 물질만능주의나 지역이기주의, 학력/학벌 중심적인 사회구도에 대해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문제의식을 갖고 성토하는가? 이에 비해 외모 지상주의는 많은 사람들의 인식 속에 어찌할 수 없는 인간사의 한 본능적 차별형태로 자리잡아 버린 것 같다. 얼마 전 타계한 한국 코메디계의 대부 이주일씨도 그 옛날 80년대 초에 이미 “못생겨서 죄송합니다”는 말로 많은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내지 않았던가? 못생긴 것이 죄송하고 웃길 정도로 우리사회는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풍토로 인해, 외모를 노골적으로 중시하는 한국사회의 경향을 그 어떤 ‘지상주의’보다 더 경계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세상의 흐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우리의 사회 안에 은근히, 그러나 당연하게 침투해 있는 이 외모 지상주의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떠한 삶을 요구하시는가?
먼저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인 나에게 외모란 과연 어떤 것인가? 혹 나는 획일화된 외모로 내 스스로와 이웃을 평가하는데 익숙지는 않은가? 나는 외모에 대해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가? 그리고 내가 신경을 쓰는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런 질문들에 대해 진지한 평가를 내린 후,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내 안에 자리잡고 있는 관점과 성경적 세계관을 비교하면서 나의 사고를 반성하고, 개혁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성경은 우리에게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행동강령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성경에 변함없이 흐르고 있는 가치관과 세계관을 찾아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현실적 대안을 제시하고자 고민하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몫이 아닐까?
1. 성경이 이야기하는 외모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외모로]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 (새번역성경 야고보서 2:1)
성경은 우리가 ‘외모(appearance)’로 사람들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데에 아주 익숙한 존재라고 증거 한다. 심지어는 하나님과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구별되는 이유 중의 하나로,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시는 분’이라고까지 표현한다.(신 10:17, 삼하 16:7, 벧전 1:17) 그만큼 우리는 외모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려는 연약함을 가진 존재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말씀들이 곧 우리 사회의 외모 지상주의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외모로 사람 평가하기를 좋아하는 우리에게 성경이 강력하게 경고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외모(appearance)로 사람을 차별(favoritism or partiality)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외모 지상주의의 대한 성경의 명확한 배척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바로 외모에 대한 각 사람의 반응과 평가, 그리고 이로 인한 의식적, 무의식적 차별대우로 인해 외모 지상주의가 우리 안에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성경에서 말하는 외모(appearance)가,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미적(美的)인 외모만을 항상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신·구약에서 사용된 외모는 주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서 외적으로만 그럴듯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이는 자들이나, 아니면 가진 자나 권력 있는 자들을 그렇지 못한 자들과 차별대우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욥 34:19, 요 7:24, 벧전 1:17, 골 3:25, 약 2:1-10 등등).
성경에서 외모가 순수한 미적 의미로 우리를 교훈 하는데 사용된 경우는, 사무엘상 16장 6절에서 13절의 ‘선지자 사무엘 이야기’와 베드로전서 3장 1절에서 6절의 ‘베드로의 권면’ 등에서 볼 수 있다(이 외에도 미적인 의미로 외모가 사용된 경우가 있긴 하나, 이는 주로 사물이나 성경인물의 외관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성서 해석학에 충실하게 이 두 구절의 말씀에만 집중해서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성경의 입장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제시함에 있어 앞서 주장한 외모 지상주의 형성의 직접적 원인이 되는 우리의 ‘보아주고’, ‘보여주는’ 자세의 변혁을 촉구한다. 곧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람들을 보아주고, 또한 자신을 보여주는 삶을 통해 외모 지상주의에 역류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주장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이 글이 단순하게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추상적인 넋두리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삶의 실천으로 옮겨지기를 소망하는 필자의 바램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나의 제안들이 독자들에게 그리 특별하거나 신선하게 다가가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별 특별한 이야기 없이 당연한 말들을 늘어놓는 넋두리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사실 언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남을 어떻게 보아주고 또한 스스로를 어떻게 보여주어야 할지 몰라서 문제였던가? 세상의 흐름에 생각 없이 파묻히는 우리의 무심한 자세가 문제이지.…
2. 하나님의 백성답게 보아주고, 보여주는 삶
(1)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보아주라’고 말씀하신다. (사무엘상 16:6-13)
그러나 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셨다. “너는 그의 준수한 겉모습과 큰 키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는 내가 세운 사람이 아니다. 나는 사람이 판단하는 것처럼 그렇게 판단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 주는 중심을 본다.” (새번역성경, 사무엘상 16:7)
하나님의 마음이 이미 떠난 사울 왕의 후계자를 위해 베들레헴의 이새를 찾아온 선지자 사무엘은, 그의 아들 중 유난히 키가 크고 용모가 준수한 엘리압을 보고, 그가 바로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시기를 원하는 자로 판단한다. 사실 우리는 여기서 왜 선지자 사무엘이 그렇게 중요한 일을 분별하는데 있어 외모를 그 기준으로 삼았는지 사뭇 이해가 안 된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무엘이 나름대로는 하나님의 뜻을 고려하여 이런 판단을 내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베냐민 지파의 사울을 처음으로 만나게 했던 때를 기억했을 것이다.(삼상 9, 10장) 용모가 매우 준수하며 또한 큰 키의 소유자였던 사울을 기름 부으며, 그는 마치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왕으로 세우고자 하는 자들은 다들 그 용모와 키에 있어 어떤 “수준”의 사람들이여야 한다는 고정화(conventional)된 생각을 가졌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고정화된 생각으로 인해 그는 엘리압을 보자마자 그가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외모를 소유했다는 생각에 그만 하나님의 뜻을 그릇되게 판단한 것이다.
사실 우리 또한 성경을 읽다 보면, 성경인물들의 외모에 있어 비교적 고정된 성경의 관점을 보게 된다. 그것은 바로 성경의 인물 중에 웬만해서는 못생긴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물론 가끔씩 엘리사나 사도 바울처럼 썩 출중하지 못한 외모를 소유한 사람들도 등장하지만, 전반적으로 성경의 인물들은 거의 다 잘 생겼다. 사라를 필두로 해서 리브가, 라헬에 이르기까지 웬만한 창세기의 여성들은 다 한 미모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던가. 거기다가 다윗의 부인 중 한 명이었던 아비가일, 페르시아 제국의 왕비 에스더 등, 꽤나 많은 성경의 여인들이 미모를 갖춘 자들이었다. 남자들은 또 어떠한가? 자신의 멋있는 ‘외모’로 인해 유혹까지 받아야 했던 요셉으로부터 갓 태어났을 때 꽤나 준수했다던 모세, 키가 크고 용모가 출중했던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 부자(父子)지간이 다 한 외모 했다던 다윗과 압살롬에 이르기까지, 남성들 또한 멋있는 자들이 꽤나 등장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고정화된 성경의 인물론을 뒤집어엎으시는 권면을 사무엘에게 하시는 것이다.
그럼, 그분 말씀의 요지는 무엇인가? 간단하게 말해 사람을 볼 때, 외모에 집중하지 말고 중심을 보아주라는 것이다. 사무엘은 엘리압의 큰 키와 준수한 용모만을 보고 그를 평가했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향해서도 이러한 시각을 가지라고 권고하신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말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실생활 속에서 사람의 외모에 지나치게 연연하고, 또한 끌려 다닌다. 한마디로 외모로 인해 우리의 판단이 흐려질 때가 많다. 그래서 ‘외모가 능력이다’ ‘예쁘고, 잘 생기기만 하면 된다’ ‘딴 건 몰라도 못 생긴 것은 용납이 안 된다’는 등의 우스운 말들이 우리의 생각을 은연중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왜 하나님의 이 말씀에 쉽게 순종하지 못하는가?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무슨 이유로 인해 우리는 마땅히 보아주어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세월이 지나면 사라질 허탄한 것에 큰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며 이에 연연해하는 것일까?
첫째, 나는 그 이유가 미적 외모에 눈이 어두워 사람의 ‘중심’을 봐줄 줄 모르는 우리의 조급한 마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나름대로 사람의 중심을 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중심은 어떤 존재의 ‘진심’이나 ‘참된 실체’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를 밝히 보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아닌 이상, 우리는 사람의 중심을 보는데 있어 신중하고 차분해야 한다. 단순히 외모만 보고 그의 실체(중심)를 온전히 알 수는 없다. 외모가 사람의 실체를 이해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외모만을 가지고 사람을 제대로 ‘보아준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의 중심을 보려면 그 사람의 삶을 바라봐야 한다. 마치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보시며 우리의 중심을 판단하시듯, 우리 또한 미적 외모에 바탕을 둔 값싼 평가와 차별은 던져버리고, 서로의 삶을 지켜보며 중심을 알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개중에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성을 처음 소개 받은 자리에서, 사귀자 거나 결혼하자는 말을 한다는데,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이것 또한 상당히 자의적인 해석일 수 있지만)가 아니고서야, 이는 상당히 즉흥적이고 사람을 인내하며 바라볼 줄 모르는 조급한 자세라 생각한다. 이는 마치 TV나 영화, 아니면 여러 사람들과 마주치는 길가에서, 멋진 얼굴과 몸매를 자랑하는 남녀들을 은근슬쩍 바라보며 그들의 중심까지 순식간에 과대포장해 버리는, 우리의 미련하고 가벼운(shallow) 모습과 무엇이 다른가?
두 번째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습관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을 바라볼 때 항상 얼굴, 몸매, 화장법, 옷맵시 등을 보고 평가하는데 익숙해진 나의 눈이 막상 이런 말씀 한 구절 읽고 묵상한다고 해서 그리 쉽게 바뀔 리가 없다. 이미 우리 안에 익숙해진 시선은 성경에서 아무리 이러쿵저러쿵 말한다 치더라도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절제되고 훈련되지 않는 한 쉽사리 습관화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선지자 사무엘이 사울 왕 때의 경험으로 인해 하나님의 계획을 잘못 분별한 경우를 보았다. 이처럼 일단 우리 안에 습관화되고 고정화된 시선은 쉽게 우리를 떠나지 않고,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사고를 주장하는 것이다.
2)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보여주라”고 말씀하신다. (베드로전서 3:1-6)
“Don’t be concerned about the outward beauty that depends on fancy hairstyles, expensive jewelry, or beautiful clothes. You should be known for the beauty that comes from within, the unfading beauty of a gentle and quiet spirit, which is so precious to God” (NLT, 베드로전서 3:4, 5)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서에 의하면, 패션의류나 명품시장을 제외한 ‘순수 미용’ 분야의 연간 시장규모가 미용성형 5천억원, 다이어트 1조원, 화장품 5조 5천억원 등 무려 7조원에 이른다고 한다. 이제는 외모가 자본이 되는 세상을 넘어 자본이 외모를 만드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자신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보여주느냐는 문제에 매우 민감하다. 단순히 이왕 자신을 보여줄 거 깨끗하고 단정하게 보여주자는 선을 뛰어넘어, 이제는 자신의 존재가치와 성공을 위해 필사적으로 외모를 가꾸고 꾸미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근데 이러한 세상물정도 모르고 사도 베드로는 시대에 뒤떨어지는 권면(벧전 3:4, 5)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지고 있다.
우리가 베드로전서 3장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본 서신서의 전체적인 배경과 그 주제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위의 말씀은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경고의 목적으로 쓰여진 말씀이기 이전에, 타지에서 핍박과 환난을 당하고 있었던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들을 격려하기 위해 쓰여진 사도 베드로의 편지이기 때문이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꿋꿋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어떻게 자신의 신앙을 지키며, 그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지에 대한 실제적 권면을 그 핵심주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우리 믿는 자들의 삶이 나그네 인생이라는 점을 강조하며(1:1, 17, 2:11), 그리스도인 노예로서(2:18-25), 그리스도인 아내로서(3:1-6), 또 그리스도인 남편(3:7)으로서 각자 자신의 처소에서 어떻게 믿는 성도답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예수 믿기가 어렵고 힘든 시대이니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자는 논조가 아니라, 오히려 핍박과 고난의 시대일 수록 자신의 그리스도인 됨을 온전히 드러내자는 존재론적(ontological)인 가르침을 편지에 담고 있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위의 말씀(3:1-6)을 통해, 결혼한 여성 그리스도인이 불신자 남편에게 자신의 그리스도인 됨(정체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방법은, ‘외면의 미'(outward beauty)를 통해서가 아닌, 순종을 바탕으로 하는 ‘내면의 미'(inward beauty)를 통해서라고 말한다. 한 마디로 여성 그리스도인이 가장 지혜롭게 자신의 존재가치를 보여주는 방법은 이 시대와 같은 외모 지상주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귀하고 값진(precious) ‘내면의 영성'(inner spirituality)을 통해서라는 말이다. 영적인 시련과 핍박이 많은 세상에서 아름다운 헤어스타일과 옷, 액세서리를 통해 자신의 가치와 능력을 포장하지 말고, 오히려 믿는 성도답게 경건하고 순결한 그리스도인의 행실을 말없이 보여주자는 것이다.(3:1, 2)
사도 베드로가 결혼한 여성 그리스도인들에게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행동하는 신앙을 보여주라고 촉구하면서, 가꾸고 꾸미는 미적 외모를 이에 반대하는 예(counterexample)로 삼은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마치 베드로는 현 시대의 외모 지상주의를 빗대어 말하듯 우리에게 이렇게 도전하는 것 같다. 참된 능력이 없는 허탄한 것에 집중하지 말고, 먼저 그리스도인으로서 보여줄 것을 보여주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행동하는 경건하고 순결한 속 사람을 통해, 세월이 지나면 사라질 외모와는 수준이 다른, 신앙인의 ‘불변하는 미'(unfading beauty)를 보여주라고 말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부스스한 머리모양과 꾀죄죄한 옷차림을 보여줄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7조원에 이르는 ‘순수 미용’ 분야에는 빠짐없이 소비자의 한 몫을 감당하면서, 하나님 보시기에 참되고 값진 내면의 훈련을 소홀히 여기는 것은 분명 그리스도인의 우선순위상 문제가 있는 처사다. 스스로를 아름답고 멋있게 가꾸기 위해서는 철저한 다이어트와 피부관리, 세련된 헤어스타일과 옷, 액세서리, 화장품 등에 신경을 쓰는 사람들이 정작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그리스도인의 멋과 빛깔을 내지 않는다면 이거야말로 외모 지상주의가 아닌가?
우리가 우선적으로 보여주어야 할 것은 외모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확고한 정체성이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예쁘고 멋진 얼굴과 늘씬하고 우람한 몸매, 세련된 옷과 액세서리를 통해 자신의 가치와 존재를 드러낼지 몰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히 변치 않는 내면의 미(inner beauty)를 통해, 자신이 누구의 백성인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글을 마치며…
앞에서도 주장했지만, 우리는 많은 경우에 외모 지상주의가 자신과는 별 상관이 없는, 다른 사람들만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는 외모를 가지고 사람들을 평가하는 면에 있어서는 자신도 남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어도, 최소한 외모로 인해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누이 이야기 하지만 외모 지상주의는 보아주는 사람과 보여주는 사람들의 상호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우리의 습관화된 외모 중심적인 시선과 평가가 -의도를 했든 안 했든- 다른 사람들이 외모 지상주의에 집착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단순하게 친구들끼리 모여 앉아 타인의 외모에 대해 평하고, 외모에 자신감이 없는 지체나 장애우들을 어색한 눈빛이나 행동으로 대하는 우리의 모습 그 자체가, 곧 변형된 외모 지상주의인 것이다. 거기다가 그리스도인다운 정체성은 보여주지 않으면서 지나치게 자신의 외모만을 가꾸는 것 또한 외모 지상주의에 동참하는 행동일 수 있다. 나의 무분별한 과시(showing off)와 드러냄을 통해 외모 지상주의의 여파가 이 땅에서 계속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바라볼 때, 그들의 외모보다 먼저 중심을 바라보고자 노력해야한다. 은연중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고 차별하고자 하는 유혹을 뿌리치고자 지속적인 세안(洗眼)작업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외면의 미를 통해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받기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속마음의 참 주인 되심을 지속적으로 가꿈으로 행동하는 신앙인의 정체성을 보여주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미적인 외모, 그 자체를 아름다움 안에 가두는(?) 훈련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아름다운 외모가 사람의 중심과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지 않게, 나의 존재가치를 흐리게 하는 우상이 되지 않게, 아름다운 외모는 그냥 ‘아름답다’는 표현 그 자체에 머물게 해야 한다.
Sep 2, 2002 | 삶과 신앙/고독의 세상읽기
고독의 세상 읽기
외모 지상주의 (Lookism)
돌아가는 세상 이야기
1. “외모가 얼마나 중요한데요!”
한국교회나 이민교회나 7, 8월은 교회의 여름행사들로 정신이 없는 것 같다. 군대가려고 온 모국에서도 하나님의 그 어떤 섭리가 있으셨는지 계획했던 군 입대는 연기되고, 현재 나는 모(母)교회의 중·고등부 전도사로 섬기고 있다. 그리고 이런 연유로 인해 지난 7, 8월은 여러 수련회들로 정신이 없었다. 특히 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하자마자 갖게 된 중·고등부 여름 수련회는 정말이지 신경이 많이 쓰였다. 모든 사역이 그렇겠지만, 아이들과의 친밀감이 너무나 중요한 것이 바로 중·고등부 사역이 아닌가? 그래서 이번 중·고등부 수련회는 나에게 학생들의 신앙수련 못지 않게 아이들과 잘 놀아야(?) 하는 중대한 사명을 지닌 수련회였다.
수련회 기간 중, 시간이 날 때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아이들과의 거리감을 서서히 좁혀 가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중·고등부 안에 끼리끼리 뭉치는 소그룹들이 있음을 감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특히 다른 아이들과 잘 섞이지 못하는 중학교 2학년 여자아이들은 자연스레 나의 주 목표대상이 되었다. 쫄래쫄래 중2 여자아이들을 따라 다니며, 이런 저런 추파(?)를 던지기도 하며 접근을 시도해 보았지만, 아이들의 멋쩍어 하는 분위기에 나는 차일피일 다음 기회를 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그들과 나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좋은 이야기 거리를 찾게 되었으니 이는 바로 ‘외모’였다.
중2 여자아이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영주라는 아이는 자칭 ‘폭탄파’라고 불리는 중2 조직의 보스(?)다. 별명이 ‘핵폭탄’인 영주의 왼팔과 오른팔은 ‘다이너마이트’와 ‘지뢰’라 불리는 혜수와 정원이. 그리고 이 세 아이들을 중심으로 똘똘 뭉치는 중2 여자아이들은 쉽게 말해 이 ‘폭탄파’의 조직원들인 셈이다. 여하튼 이러한 중2 아이들의 재미있는(?) 조직 분위기를 힐끔힐끔 관찰하고 있던 나는, 아이들과 일단 친해지고 봐야겠다는 간절한 소명의식 속에, 결국 이렇게 접근하게 되었다.
“야 내가 이 폭탄파 고문을 맡으면 안 되겠냐?” ^^;
충격스럽게도 아이들은 그 흔한 오디션이나 인터뷰도 생략한 채 너무나 당연한 듯이 나의 고문직을 수락해 주었다. 뭐, 나이에 안 어울리는 나의 여드름과 촘촘하지 못한 머리카락 분위기를 볼 때, 고문할 자격이 충분히 있다나? 여하튼 고문이 된 기념(?)으로 나는 7명의 자칭 폭탄파 멤버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나 던졌다.
“나중에 돈 생기면 성형수술하고 싶은 사람?”
“저요~~~!”
“저요~”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다들 손을 들었다.
“야 이유가 뭐냐? 내가 보기에는 너희들 다 이뻐 보이는데…” ^^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이들은 다양한 제스처 – 멀쩡한 머릿결을 한번 쓰다듬거나, 예쁜 표정을 지으며 -와 함께 모두 공주가 되었다.
“저도 알아요~”
“당연하죠~”
“전도사님이 사람 볼 줄 아시네요. 제가 한 미모 하죠!” ^^;
그리고 나서 몇몇 아이들은 14살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의 답변들을 늘어놓았다.
“전도사님이 뭘 모르시네. 외모가 얼마나 중요한데요!”
“여자는 얼굴이 예뻐야 능력이 있는 거예요~”
“나중에 취직할 때도 미모가 돼야 취직이 된다니까요~”
“일단 수술을 해서라도 이쁜게 중요해요”
글쎄… 그날 아이들과의 즐거운 대화를 마친 후, 아이들과 손쉽게 친해졌다는 성취감 뒤에 왠지 모를 허(?)한 기분과 찜찜함이 느껴진 것은 왜일까? 과연 외모가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나도 얼굴 예쁜 여자를 보면 솔직히 눈길이 가고 보기 좋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성형수술까지 해야되나? 과연 14살의 어린 중학생들이 벌써부터 이렇게 난리를 칠 정도로 ‘외모’란 대단한 것인가?
2. 외모가 인생의 성패를 좌우한다???
광고대행사 제일기획은 지난 8월 11일, 13-40세의 우리나라 여성 2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심층 전화면접 결과를 언론에 공개했다.
간단하게 조사결과부터 이야기를 하자면, 우리 사회의 13-43세 여성 68%가 외모가 인생의 성패에 크게 영향을 끼치며, 78%는 외모 가꾸기가 멋이 아니라 생활의 필수 요소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 외모 가꾸기에 하루 평균 53분을 투자하며, 거울은 평균 8.3회를 본다고 한다.
조사자 중 69%는 외모에 신경을 쓰고 외출하면 타인이 더 친절하게 대한다고 생각했으며, 56%는 또래의 여성을 보면 외모부터 비교하게 된다고 답해 외모에 대한 타인의 평가에 중압감을 느끼는 것으로 분석됐다.
그럼에도 일반 국민정서에 반하는 이러한 시티은행의 대출정책은 학력, 학벌 중심적인 한국사회의 병폐를 더욱 노골적으로 가시화 함으로써 오히려 잘못된 흐름을 부채질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논란이, 네티즌 사이에서 일어났다. 실제로 이번 대출 관련기사(하나리포터)에 실린 네티즌들의 반응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연령층별로는 13-18세의 경우 친구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외모에 신경을 쓰며 용모보다는 운동화, 가방, 장신구 등에 치중하는 것으로 조사됐고, 19-24세는 다른 세대에 비해 자신에게 맞는 스타일을 추구하며 정체성에 관심을 갖는 것으로 나타났다.
25-34세의 여성들은 외모가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수단이라고 여겨 헬스, 피부관리, 성형수술, 다이어트 등을 통한 외모 관리에 가장 적극적이었고, 35-43세의 중년여성들은 외모를 부의 상징, 사회적 지위를 평가하는 기준 가운데 하나로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제일기획은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우리 사회의 외모에 대한 높은 관심이 미국사회의 ‘루키즘'(Lookism:외모 지상주의)을 능가하는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출처: 연합뉴스 8월 11일자 기사 )
고독의 세상 바라보기
먼저 ‘외모 지상주의'(lookism)에 대한 나의 넋두리를 시작하면서 몇 가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첫째, 나는 외모가 갖는 개인적 가치와 아름다움, 그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 않는 사람이다. 아니 심지어는 아름다움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끼리 서로 특정한 이해관계에 의해 자본을 창출하는 것까지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넉넉함(?)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내가 논하고자 하는 것은 외모 지상주의다. 마치 외모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하고 절대적인 가치기준인 것처럼 은근히 우리 안에 권력화 – 성공과 차별의 수단으로 – 되고 보편화되는 작금의 현실을 그리스도인의 관점으로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보고 싶다.
외모가 출중한 남녀를 바라보며 왠지 모르게 가슴 설레고, 또 그들의 그 아름다움에 ‘멋있다’ ‘야~ 예쁘다!’ 라고 평하는 그 자체에 무슨 문제가 있으랴? 그리고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자신의 내면을 가꾸려고 노력하듯, 나름대로 자신의 외모를 멋있게 가꾸고 챙기는 일 또한 문제 될 것은 없다. 그러나 외모 지상주의는 하나님이 아닌 외모를 우상화하고 숭배하며, 또한 획일화된 외모로 하나님이 창조한 다양한 사람들을 일괄적으로 평가하고 차별하는 사회현상이다. 이는 분명 잘못된 것이 아닌가? 성형수술을 패키지(package)로 하거나, 친구들을 3명 이상 소개해서 데려오면 수술비를 싸게 해 주는 곳이 바로 한국이다. 외모가 안 따라온다고 직장면접에서 노골적인 거부를 당했다는 가까운 친구의 이야기도 들었다. (그것도 외모와 전혀 상관이 없는 영어학원 면접에서 말이다) 요즘에는 외모를 비관해서 자살하는 경우는 뉴스거리도 안 된다는 기가 막힌 이야기를 한 방송작가 선생님을 통해 들은 적도 있다. 이건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다.
어쩌면 더 가슴아픈 일은 바로 이러한 사회, 문화적 흐름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전염된 사람들이, 결국에는 자신 스스로와 남들까지도 이런 기준에 의해 평가하며, 차별하게 되는 현실이다. 외모로 인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더 당당하다고 생각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부족하다고 믿게 하는 것. 내면의 아름다움과 그 깊이를 알고자 노력하기보다는 그냥 자신의 눈에 비춰지는 상대방의 아름다운 외모에 마음이 끌린 나머지, 눈에 불똥을 튀기며 ‘외모의 우상’을 쫓아다니는 남자, 여자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외모 지상주의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병폐가 아닐까? 나는 바로 이러한 사회현상에 관해서, 그리스도인의 한 사람으로서 고민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둘째, 현대사회의 외모 지상주의는 결코 여성이라는 어느 한 특정한 성이나, 아니면 특별한 소수의 사람들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비록 위에 소개된 ‘세상 돌아가기’의 이야기들이 다 여성들을 그 주체로 삼고 있고, 또 일반적으로 외모는 남성들보다 여성들의 주된 관심거리라는 편견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결국 외모 지상주의라는 것은 ‘보아주는 사람’들과 ‘보여주는 사람’들 사이의 상호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닌가? 어떤 한 남성의 외모에 같은 남성이나 여성이 호감이나 반감을 표하고, 또 반대로 어떤 한 여성의 외모에 동성이나 이성이 반응을 보이면서, 평가되고 가치화하는 것이 바로 외모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내가 아무리 외모라는 것에 별다른 관심과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내가 주변사람들의 외모를 평상시 어떤 자세와 관점으로 보는지, 또 스스로의 외모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는(present)데 있어 어떠한 자세를 취하는지가 모여져서 현시대의 ‘외모관’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외모 지상주의는 단순히 여성들이라는 특정한 성의 문제이거나, 아니면 외모에 아주 관심이 많다고 여기는 소수 사람들만의 문제일 수 없다. 이는 사회를 구성하는 우리 모두의 외모에 대한 획일화된 반응과 평가 속에서 형성된 우리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손쉽게 한국의 길거리에서 엿볼 수 있다. 아리따운 용모와 늘씬한 몸매를 가진 여성들이 지나갈 때 이들을 뚫어지게(사람에 따라 그 정도는 다르겠지만) 쳐다보는 것이 단순히 우리네 중년 아저씨들과 젊은 청년들뿐이던가? 여성들도 남성들 못지 않게 지나가는 미모의 여성들을 쳐다보며 그들의 화장법, 옷차림 등을 살펴본다. 한마디로 ‘보아주고’, ‘보여주는’ 역할에 있어 성별이나 사람에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보아주는’ 쪽과 ‘보여주는’ 쪽의 상호작용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 바로 외모 지상주의이다. 그러므로 성별이나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외모 지상주의의 문제나 책임을 일방적으로 전가하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자세이다. 게다가 이제는 여성들 못지 않게 적지 않은 수의 남성들이 자신들의 외모를 위해 시간과 돈을 투자하고 있지 않는가?
마지막 셋째, 다른 많은 사회, 문화적 현상들과 마찬가지로 외모 지상주의 또한 우리가 속한 지역, 사회, 문화권에 따라 각각 다른 경향과 입장을 보인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외모 지상주의는 철저히 자본주의적이면서도, 더불어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상당히 경계하는 사회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한국의 외모 지상주의는 이에 비해 ‘상호비교’에 의한 차별적 양상을 지나치게 띠고 있는 것 같다.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보여주기 위한 ‘과시적 경향’과 이를 통한 ‘평가’에 지나치게 민감한 것 같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들로 인해 외모에 대한 관점이 미국보다 더 공개적(or 노골적)이고, 또 차별의 기준으로 오용되기가 쉬운 사회구조라 보여진다.
필자는 유학생활 중에서도 방학을 맞아 한국만 방문하면 외모와 관련된 수많은 평가를 들어야 했다. ‘살이 많이 빠졌다’, ‘피부가 안 좋아졌다’는 등의 평을 들으면서 확실히 한국과 미국사회가 외모에 대해 상당히 다른 관점을 갖고 있음을 경험하게 되었다. 적절한 예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매 해 여름방학을 맞아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동료 유학생들의 옷차림과 외모를 통해서도 이러한 인식의 차이(difference)를 확인하게 된다. 학기 중에는 간편한 옷차림에 헤어스타일이고 뭐고 외모에 별 관심 없이 공부에 찌들려(?) 살아가던 사람들이, 새 학기를 맞아 오랜만에 학교에서 보게 되면 왜 이리 다른 사람들로 변신해서 나타나는지… 이는 아마도 미국사회의 실제적(practical) 생활관의 영향으로 외모에 대해 별 신경을 쓰지 않았던 사람들이 한국사회의 공개적이고 상호 비교적인 외모관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고 돌아온 탓이리라. 하긴 때때로 방학을 마치고 돌아온 자매들이 ‘왜 이리 한국 여자 애들은 날씬한지 모르겠다’라고 투덜(?)대던 대학 때의 기억을 되새겨 보아도 한국에 있는 동안 그들이 받았을 ‘상호비교’의 스트레스를 이해할 수 있으리…
아무튼 이러한 지정학적, 세계관적 차이로 인해 이번 ‘고독의 세상 읽기’는 미국사회보다는 한국사회의 외모 지상주의를 주 논의대상으로 삼고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행여나 이 글을 읽으며 내가 사는 미국동네는 안 그런데 하는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어차피 현재 한국에 머물고 있는 고·독·의 ‘세상 읽기’가 아니던가? ^^;
자, 그럼 이 정도로 ‘세상 바라보기’는 이만 필하고, 그리스도인 고독의 ‘세상 읽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자.
Aug 2, 2002 | 삶과 신앙/고독의 세상읽기
고독의 세상 읽기
학력과 학벌
글을 시작하며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알아야 이 세상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사고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영적인 세계에만 국한된 하나님이시라면, 우리는 굳이 이 세상을 알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또 우리에게 이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고 보전하라고 명령하셨기에 우리는 결코 방관자가 될 수 없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영적인 세계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존재하는 모든 순간과 공간 속의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가정과 일터, 그리고 우리가 함께 하는 모든 사람들의 삶 속에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셔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크고, 작은 일들을 그냥 소홀히 지나칠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또 어떻게 이 세상과 관계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곧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신앙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돌아가는 세상 이야기
1. “서울대생은 단결하자!”
얼마전 한 네티즌이 서울대 생활정보사이트(www.snulife.com)의 구인/구직게시판에 ‘서울대생은 단결하자!’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가 해당 사이트가 폐쇄되는 소동이 일어났다. 문제의 글에서 자신을 서울대 재학생(실제 서울대 대학원생)으로 밝힌 이 학생은 “물가는 계속 오르는데 과외비는 10년 전보다 낮아진다”며 “일주일 2번 2시간에 40 이하라면 하지 맙시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또 “혹시 중.고생이 이 글을 본다면, 더 싼 가격에 배우고 싶으면 차라리 학원에 다니는 게 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7월 2일 올려진 이 글은 12일 오후까지는 15개 정도의 건설적인 비판글들이 게재되며 좋은 방향으로 토론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갑자기 12일 저녁부터 13일 오후 사이에 5284개의 답글과 코멘트(comment)가 폭주하면서 글의 조회수만 2만 7천번에 이르는 등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키며 결국 서버의 과다접속으로 사이트가 잠정 폐쇄된 것이다.
거세게 분노한 다수 네티즌들의 주장들을 요약 나열하자면, 아이들이 돈으로 보이냐, 극빈 계층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돈타령이냐, 서울대생의 특권적 지위를 이용해 돈을 벌겠다는 건 학력차별사회를 조장하는 것이다, 학생의 입에서 대기업 같은 담합주장이 나온 것이 경악스럽다, 우리는 서울대생의 우월감에 반감을 가진다, 사교육비 과다지출이 사회 문제화된 마당에 서울대생의 의식수준이 고작 이 정도냐… 등등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소수의 반론적인 의견 또한 있었다. 일부 네티즌들은 왜 가난한 사람들과[만] 비교하느냐, 이 동료학생의 주장을 일반인이 이해하긴 힘들겠지만 우리[서울대생]에겐 충분히 토론할 가치가 있다, 40만원이 고액과외는 아니지 않느냐, 능력에 따라 대우받자는데 왜 난리냐 등등의 의견을 표했다.
이 사건을 기사화한 하니리포터(www.hanireporter.hani.co.kr)의 지용민 기자는 “하나의 해프닝으로 치부하기에는 밤을 새며 글을 남겼던 수천 네티즌들의 열기가 대단했다”고 말하며, 이는 “우리 사회의 자본에 대한 종속성과 원죄처럼 극복하기 어려운 학벌중심주의를 여실히 보여준 한 현상으로 이해되기에 충분하다”고 평가했다. 또한 몇몇 서울대생들은 한 학생의 원색적인 주장이 결코 서울대생 전체의 의견을 대변할 수 없음을 주장하며, 인터넷 공간의 파괴적이고 진지하지 못한 토론문화를 비판했다.
2. 시티은행의 학력차별 이율
서울대생의 과외비 담합 기사가 논란이 된지 얼마 안 되어서 이번에는 은행대출과 관련된 기사가 나의 관심을 끌었다.
기사의 요지는 한국 시티은행이 무담보 신용대출에 있어 ‘학력차별 이율’을 적용한다는 것이었다. 경제신문인 ‘서울경제’의 7월 21일자 기사를 보면, 시티은행이 직장인 신용대출을 주는데 있어 서울지역의 고려대, 서강대, 서울대, 성균관대, 연세대, 외국어대, 중앙대, 한양대와 지방의 부산대 등 9개 대학 졸업자들에게만 0.5%포인트의 금리 할인 혜택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일반 무담보 대출 이율은 9%이지만 위 대학의 출신들이라면 특별히 0.5%의 이율을 면제받아 8.5%에 대출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시티은행의 이러한 대출정책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비교적 조용했다. 이는 무엇보다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사금융기관의 특성 상, 신용평가를 위한 그들만의 기준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찌 보면 당연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시티은행의 관계자는 이 기사와 관련해서 “한국의 특수상황으로 인해 학력이 개인의 능력을 가늠하는 평가기준이 될 수 있다”면서 “담보가 없는 신용대출에서 개인의 신용도를 평가하는 하나의 기준으로 사용했다”고 말했다. 곧 한국의 그 ‘특수상황’이란, 학력이 사람의 신용을 평가할 만큼 중요한 요소가 되는 한국의 사회현실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일반 국민정서에 반하는 이러한 시티은행의 대출정책은 학력, 학벌 중심적인 한국사회의 병폐를 더욱 노골적으로 가시화 함으로써 오히려 잘못된 흐름을 부채질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논란이, 네티즌 사이에서 일어났다. 실제로 이번 대출 관련기사(하나리포터)에 실린 네티즌들의 반응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시티은행이 그런 평가기준을 내린 게 한국의 특수상황 때문이라면 또 다른 한편으로는 외국계은행이 그런 상황을 더욱더 부채질하는데 한 몫 한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아들아 명문대 또는 이름 있는 학교에 가야 한다. 적성은 필요 없어. 무조건 가야 해. 왜냐하면 말이지 나중에 돈 빌려 쓸 때도 이자가 적게 붙거든.” – 언론고시 게시판에 올라온 글
“학벌에 따라 이자가 다르네요. 국내의 아홉 개 대학에만 이자감면 혜택을 준대나. 그런데 그 아홉개 학교 중에 우리 학교가 들어가네요. 어이없는 학력차별이라고 분개해야 할까. 우리 학교도 잘 나간다고 기뻐해야 할까?” – 9개 대학 중 한 대학 게시판에 올라온 글
“중요한 건 이대가 빠진 게 아니라 외국인의 시각이 우리 사회에 학벌주의가 만연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그리고 그것을 인정해야 하는 이 사회 분위기가 정말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이대가 빠진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지요.” – 언론고시 게시판에 올라온 글
고독의 세상 바라보기
위의 두 기사를 통해 우리가 엿볼 수 있는 이 시대(특히 한국사회)의 조류는 무엇인가? 먼저는 바로 학력(교육을 통하여 획득한 능력)과 학벌(같은 학교 출신)이, 우리가 속해 있는 한국사회에서는 쉽게 무시될 수 없는 중요한 필요조건(necessary or demanding condition)적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곧 ‘나’라는 존재의 가치와 능력(자본주의적 관점에서는 신용)이 ‘내가’ 어느 학교에서, 어느 정도를 공부했나에 따라 평가되는, 그런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은 새삼스럽지 않을 만큼, 이미 우리 안에 자연스럽게 인식되고 있는 한국사회의 고질적 흐름이다. 우리 모두는 자의든 타의든, 이러한 학력, 학벌 중심적 구조에 의해 이익과 편리를 누렸거나, 아니면 피해와 손해를 경험했고, 또한 앞으로도 계속 이러한 상황들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가 속해 있는 한국사회는 어떠한 세계관(worldview)의 주도적 지배를 받기에, 학력과 학벌이 우리의 가치와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는가? 먼저 위의 서울대생과 시티은행 기사가 공통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인식의 틀'(perceptual frameworks)은 “인간은 자신이 획득한 학력과 학벌에 맞는 합당한 물질적(material) 대우와 형편을 요구하고, 또한 요구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곧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가치와 능력을 가늠하는데 절대적 기준으로 사용되는 부(wealth)를 획득함에 있어, 학력과 학벌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는 말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13세기 영국의 철학자 베이컨의 말이 요즘 시대에는 ‘아는 것이 곧 돈이다’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이해된다. 그러기에 “공부해서 남 주냐?”는 말이 우리 사회 안에서는 전혀 낯설거나 이상한 말이 아니다. 중. 고등학교 때부터 우리 나라의 수많은 학생들이 이러한 부모님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대학입학에 모든 것을 내걸고 필사적으로 공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인 배금주의가 학문의 궁극적인 목적 안에까지 스며들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좋은 학교에 가서 열심히 공부하고자 하는 이유가 단순히 나의 가치와 능력을 높임으로 더 좋은 물질적 대우를 받으려는 이기적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배금주의적 자본주의와 대가 지향적 학문관의 만남으로 인해 아래와 같은 공식이 성립될 수 있다.
인간의 가치와 능력 = 물질(돈) = 학력과 학벌
그리고 이러한 세계관이 자신의 삶 속에 보편화된 사람들은, 출신학교의 명성이 바로 자신의 가치와 능력을 상징해 준다는 학벌주의적 망상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명문대 출신이면 명문대 출신 대로, 소위 이름 없는 학교에서 공부한 사람은 그런 사람 대로, 각자의 편협한 관점에서 서로를 일방적으로 평가하고 판단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가치와 능력을 그 사람의 됨됨이와 삶의 내용이 아닌 학력과 학벌로 평가한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러한 기준에 의해 상대방을 인정하거나 홀대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위의 두 기사를 통해서도, 단순히 인간의 가치와 능력이 학력과 학벌에 의해 평가되고 있다는 사회현실 못지 않게 한국사회 안에는 학벌주의에 의거한 파벌들이 조장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고독의 세상 읽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세상의 흐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이러한 세상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떠한 삶을 요구하시는가? 세상과 벽을 쌓아서는 안되지만 세상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세상의 조류에 어떻게 역류해야 하는가? 어떻게 우리는 구별된 기독교 세계관(worldview)을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을 신앙하는 백성임을 이 세상에 선포할까?
먼저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인간의 가치와 능력을 무엇으로 평가하는가?” – 나는 학력과 학벌에 의해 스스로의 가치와 능력을 평가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지는 않는가? 이러한 가치관으로 나는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 앞에서는 스스로를 더 당당하게 생각하거나, 아니면 창피하게 여기지는 않는가?
“나는 지금 왜 공부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내 학업의 궁극적인 목적(학업 이후의 삶)은 무엇인가?” – 나는 졸업 후, 어떤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는가? 혹시 나는 대가지향적인 학문관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지금까지 내가 누린 학문의 정도가(또는 능력이) 어떻게 해서 나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하는가?”
이런 질문들에 진지한 고민과 답변을 한 후,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내 안에 현재 자리잡혀 있는 관점과 성경적 세계관을 비교해 보면서 나의 사고를 반성, 조정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성경적 세계관에 입각해서, 인간의 가치와 능력을 평가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이야기로 돌아가야 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이 왜, 어떻게 창조되었는지를 알고, 또 하나님의 아들이 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와 우리를 위해 친히 죽으셨는지를 아는 것처럼 더 명확하게, 우리의 가치와 능력을 설명해주는 성경 상의 이야기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를 통해 성경적 관점을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좀더 실제적이고 적극적으로 한국사회의 학력, 학벌 중심적 흐름에 역류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이 글에서는 창조 이야기만을 통해 성경적 관점을 제시하겠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세기 1:31)
제품은 제조자의 의도와 목적에 맞게 사용될 때, 그 가치와 능력을 다하는 것이다. 아무리 보기에는 멋지고 잘 나가는(?) 최신기종의 휴대폰이라 하더라도, 제조자의 기본적 제조목적인 통화기능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면, 그 휴대폰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무용지물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피조물인 우리도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에 맞게 사는 것이 가장 가치 있게 사는 방법이다. 아무리 명문대에, 경쟁률 높은 학과에서 공부를 했다 하더라도,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도 모르는 체 살아가는 인생은 삶을 헛되이 보내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사람들이 들어보지도 못하고, 알아주지도 않는 학교에서 소정의 학문을 이수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왜 이 땅에 보내셨고, 또 나를 어떤 일을 위해 구체적으로 사용하기 원하시는지, 그 소명의식이 분명한 인생은 그 자체로 이미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창조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인간의 창조 목적은 과연 무엇인가? 두 개의 창조 이야기(창1:1-2:3과 2:4-2:25)로 구성되어 있는 성경에서, 특히 우리가 관심을 가질 부분은 첫번째 이야기이다. 두번째 창조 이야기가 하나님의 창조 중에서도 인간창조와 에덴동산에 대한 구체적인 서술에 집약된 것에 비해, 첫번째 이야기는 거시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이야기하며 창조사역의 전반적인 배경과 목적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인간의 창조목적, 곧 인간의 가치평가기준(존재목적)을 이야기하며 주로 창세기 1장 26절에서 29절의 말씀에 집중한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26절에서 28절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다스리라’는 말씀은 인간의 존재목적보다는, 존재목적을 위한 삶의 일반적 방식과 방향을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나는 좀더 원론적이고, 근본적인 인간창조의 목적을 1장 31절의 말씀에서 찾게 된다.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표현은 사실 첫번째 창조 이야기에서 거듭 강조되는 핵심어이다. 총 7번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을 통해 우리는 모든 창조의 배경에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목적이 존재함을 보게 된다. 곧 우리의 존재가치와 능력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시각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 ‘하나님이 보시고 기뻐하실 삶’을 사느냐에 따라 우리의 가치와 능력이 평가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존재목적을 구약의 스바냐 선지자의 고백과 예수님의 세례(공생애의 시작)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스바냐 3:17)
“And a voice from heaven said, “This is my beloved Son, and I am fully pleased with him” (마태복음 3:17, NLT)
그럼,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을 말하는가? 역설적이지만 나는 여기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이고 규정적인(prescriptive) 성경해석을 거부한다. 오히려 단순 명료하면서도 무한한 의미를 가진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서술적(descriptive) 표현 그 자체에 집중하기 원한다. 명제적이고 획일적인 방법론이 아닌 피조물의 창조적인 삶을 통해 다변화하는 세상에서 다양한 직업과 방법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한다는 말이다. 마치 이성상대와 배우자를 기쁘게 하기 위해 우리가 여러 가지 창조적이고 기발한 아이디어들을 개발, 행동에 옮기듯,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삶이어야 한다.
내가 규정적 성경해석을 경계하는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많은 경우에 한국교회가 성경이 쓰여진 그 시대만의 문화적, 사회적 특징을 현대상황에 맞게 재해석, 적용하지 않고 그대로 일괄 적용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첫번째 이유와는 반대로) 현대상황에만 지나치게 민감한 나머지 성경을 세상적 사고로 재해석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구약시대에 하나님이 주로 사용하시고 또한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던 자들은 왕(영적 지도자의 개념), 총리, 사사, 선지자 등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현대교회에서도 목회자가 되거나 아니면 교회문화와 관련된 헌신을 하는 자, 그리고 세상에서 소위 성공했다는 위치에 있는 자들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고, 또한 하나님의 종(?)으로서 가치 있게 쓰임 받는다는 식의 무리한 해석들을 남발하고 있다.
가치와 능력 =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 = 목회자 및 소위 성공한 사람들
하나님은 가난한 자나 부한 자, 약한 자나 강한 자, 학문이 뛰어난 자나 문외한 자나, 모든 부류의 인생들을 통해 다양한 방법으로 “보기에 심히 좋다”는 기쁨을 누리기 원하신다. 우리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사람의 용모나 외모가 아니다(사무엘상 16:7). 그분은 우리 마음의 중심, 곧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을 보신다. 그런데 우리가 위와 같이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직업에 국한된 성경해석을 시도한다면, 결국 우리는 자본주의사회의 학력, 학벌과 같은 또 다른 종류의 파벌주의적 집단을 신앙 공동체 안에 들여오는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통해 꾸준히 드려져야 하는 존재론적인 것이기에 정의되거나 규정화 되어서는 안 된다. 단 한번의 명문대 입학과 영광의 졸업장이 우리의 가치와 능력을 평가해서는 안 되듯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 또한 일시적인 그 어떤 행위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첫번째 창조이야기에서,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그대로 창조되었을 때, 그 자체(being)가 하나님 보시기에 마냥 좋았던 것처럼, 우리의 존재(또는 삶) 자체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립보서 2:13)
결국 위의 설명을 종합하면 참된 그리스도인들이란, 자신을 창조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는 삶이 곧 진정으로 가치 있고 능력 있는 삶임을 믿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자신들의 존재목적으로 확신한다. 그리고 이 확신은 그들의 다양한 직업을 통해 창조적으로 드려진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마치 그냥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을 기쁘게 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동원하듯 그렇게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기쁨’은 일회성적인 헌신이 아닌 매일 매일의 삶을 통해 꾸준히 추구되어야 하는 존재론적인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열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신앙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 개개인 안에 당신의 기쁘신 뜻을 보여주시고 또한 이를 소명으로 믿고 행하게 인도하신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창세기 1장의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그 말씀 그대로의 목적을 위해 우리의 삶을 가치 있고 능력 있게 채워가기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