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준] “하나님과 더불어 struggle하는 자” (“나는 누구인가?”- 본회퍼)

이코스타 2006년 11월호

OO 자매님께,


자매님이 가지고 계셨던 의문과 고민들에 관하여 지난 번에 나누어주신 이야기들이 그후로도 참 많이 생각이 났었습니다. 어려운 여건들 가운데서도 헌신과 봉사로 섬김의 수고를 다하는 삶의 모습이 애처로우리만큼 감동적이었고, 일면 부끄러운 마음으로 제 자신을 돌아보며 채찍질하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잘못아닌 잘못과 나아지지 않는 상황들로 인하여 힘들어하고 계신 점에는 참 많이 안타까왔습니다. 이토록 주님 앞에서 충성되고 신실하게 살아가고자 애쓰는 자매님인데, 하나님의 뜻은 과연 어디에 계신 것인지 모르겠다는 물음만 스스로 되뇌어보기도 했었습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무력함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고백하는 겸손한 마음이 아름다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혹 주님 앞에서마저도 마음이 계속 상하기만 하는 건 아닐까 공연한 걱정이 앞서기도 했답니다. 자매님이 치열하게 struggle하며 살아가는 것과 병행하여 주님 주시는 평화와 기쁨 또한 그 마음 안에서 나날이 더욱 커져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자매님의 이야기들을 떠올리던 중 문득 본회퍼의 고뇌와 어딘가 모르게 닮아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나치의 유대인 말살정책에 항거하다 체포된 본회퍼는 감옥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예수님을 연상시키듯 따뜻하고 의연한 모습으로 오히려 간수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처형되어 순교하기 얼마 전에 자신을 돌아보는 시를 한 편 지은 것이 사후에 널리 알려졌는데, 그가 주위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격적으로 비추어지고 있었는지, 자신의 내면에 흐르는 연약함과 두려움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고 있었는지, 그리고 전능자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겸허함과 신뢰를 가지고 있었는지가 잘 나타나 있는 글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이 글을 읽을 때마다, 여기까지 믿음으로 달려와 이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주님 앞에 자신을 내어드리고 있는 그의 감회와 눈물을 보는 것같은 느낌을 받곤 합니다. 그의 마음을 헤아려보고픈 마음에 제 나름대로 한 번 번역해본 것으로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  디트리히 본회퍼


나는 누구인가? 그들은 때로 말하기를,
나는 감옥의 갇힌 공간을 나설 때에
침착하고, 활기차며, 담대하다고 한다.
마치 자기 집 문을 나서는 유력자처럼…


나는 누구인가? 그들은 또한 말하기를,
나는 간수들과 이야기할 때에
자유롭고, 친절하며, 분명하다고 한다.
마치 내 자신 지시를 내리는 사람인 것처럼…


나는 누구인가? 그들은 또한 말하기를,
나는 어려운 시간들을 견뎌내는 가운데에도
한결같고, 웃음을 잃지 않으며, 기품이 있다고 한다.
마치 늘 승리하는 자의 모습처럼…


그럼 나는 정말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그런 사람인가?
아니면 단지 내가 알고 있는 나 자신일 뿐인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피곤하고 갈망하며 병들어있는,
마치 누군가가 목을 조르는 듯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아름다운 색들과 꽃들과 새들의 지저귐을 그리워하고 있는,
친절한 말 한마디와 이웃과의 정다운 삶에 목말라하고 있는,
가혹함과 사소한 모멸감에 대한 분노에 어쩔줄 몰라하고 있는,
기적같은 일은 더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체념하고 있는,
머나먼 곳에 떨어져있는 동료들 걱정에 힘없이 떨고 있는,
기도하기에, 생각하기에, 무언가 만들어내기에 지쳐 공허해져 있는,
기진맥진하여 이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버릴 준비가 되어있는, 그런…


나는 누구인가? 이편인가 저편인가?
오늘은 이편이었다 내일이면 저편인 것인가?
동시에 둘 다인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위선자요,
내 스스로는 비겁하고 수심에 찬 나약한 사람인가?
아니면, 아직도 내 안에는 패잔병의 모습이 남아있어서
다 얻은 승리 앞에서조차 뿔뿔이 도망치고 있는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 외로운 질문들이 나를 비웃고 있구나…


내가 누구이든, 그분은 아시리라. 오, 하나님,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1944년 6월, 나치의 수용소 감방 안에서)


“WHO AM I?” (from “The Cost of Discipleship,” pp.19-20)
by Dietrich Bonhoeffer


Who am I? They often tell me
I would step from my cell’s confinement
calmly, cheerfully, firmly,
like a squire from his country-house.


Who am I? They also tell me
I would talk to my warders
freely and friendly and clearly,
as though it were mine to command.


Who am I? They also tell me
I would bear the days of misfortune
equably, smilingly, proudly,
like one accustomed to win.


Am I then really all that which other men tell of?


Or am I only what I myself know of myself,
restless and longing and sick, like a bird in a cage,
struggling for breath, as though hands were compressing my throat,
yearning for colors, for flowers, for the voices of birds,
thirsting for words of kindness, for neighborliness,
trembling with anger at despotisms and petty humiliation,
tossing in expectation of great events,
powerlessly trembling for friends at an infinite distance,
weary and empty at praying, at thinking, at making,
faint, and ready to say farewell to it all?


Who am I? This or the other?
Am I one person today, and tomorrow another?
Am I both at once? A hypocrite before others,
and before myself a contemptibly woebegone weakling?
Or is something within me still like a beaten army,
fleeing in disorder from victory already achieved?


Who am I? They mock me, these lonely questions of mine.
Whoever I am, thou knowest, O God, I am thine.


(June 1944, in the prison cell of Nazis camp)


저에게도 어려움과 고민으로 채워졌던 시간이 있었는데, 그런 가운데 큰 힘이 되어주었던 한 가지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속이는 자”를 뜻하던 야곱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직접 “이스라엘”이라고 바꾸어 주신 그 드라마틱한 장면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이름들이 종종 한 사람의 일생을 종합적으로 간추려 상징하는 경우가 많은데, 제가 주목한 점은 나중에 하나님의 백성 전체의 이름이 되는 그 이름이 “거룩한 자”나 “복받은 자”와 같은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씨름(struggle)하는 자”의 의미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분과 더불어 씨름(struggle)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정직한 의미에서 우리가 주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연약하고 게으름과 죄에 미혹되기 쉬운 나이기에 그분께서 맡기신 소명을 어떻게든 감당하고자 한다면 그 과정에서 struggle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하여 그 모든 일을 능히 감당하고 이루실 주님이건만, 그분의 도우심 앞에 내 자신을 내어드리기까지는 나의 본성을 거스르는 struggle이 있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랑 없는 마음에 그분의 사랑을 담아 이웃을 사랑하는 자리에 나아가는 과정에서도 감당해야할struggle은 늘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struggle이 그러하였고 본회퍼의 struggle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매님께서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하며” 통과하고 있는 지금의 이 시간들 또한 어쩌면 자매님이 드릴 수 있는 가장 순전한 영광을 그분께 드리고 있는 순간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나님께서는 감당하지 못할 어려움을 허락지 않으신다 하셨으니, 아마도 주님께서는 그 정도의 난관을 감내할 만한 삶의 실력과 성숙함이 자매님에게 이미 있다고 인정하고 계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피할 길을 또한 마련하셔서 능히 감당하도록 도우신다 하셨으니, 말과 경주하여도 능히 이기고 요단강의 창일한 가운데서도 안전할 수 있게 하시는 그분의 손길을 혹 조만간 고백하게 되실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 최선을 다했지만 더 이상 붙잡고 있기가 어렵다고 느껴지는 일이 혹시 있으시다면 때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분 품 안에서 존재 자체의 안식을 경험할 수도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가장 이루고 얻기 원하시는 것은 자매님을 통한 그 어떤 것이기 이전에 자매님 자신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한 찬양곡의 가사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Savior on a hill, dying for my shame, could this be true? … For you so loved the world, you gave your only Son to say “I love you so. Oh, how I love you so…” (Hillsong, “Saviour”)


그 사랑이 자매님을 어디든 쫓아가서 위로하시고 힘주시고 놀라게 하시며 만족케 하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자매님은 귀중한 “하나님의 소유”이시고, 그 사랑이야말로 자매님이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그분 품안에 머물도록 하시는 진정한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
OO 드림

[김재석] 몽골국제대학(MIU)에서의 강의사역을 마치고

이코스타 2005년 8월호

2005년 4월 한달간 몽골국제대학(MIU)에서의 강의 사역을 마치면서, MIU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더불어 강의 사역을 마친 소감을 소개하고자 한다.


* MIU 설립 배경


몽골은 13세기경 징기스칸에 의해 세계 곳곳을 정복할 정도로 강대국이였으나, 그 이후 오랜 청나라의 지배와 공산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사람들의 생활은 매우 낙후되어 있다. 특히 14세기경 징기스칸의 손자이자 원나라 시조인 쿠빌라이가 교황청에 100명의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자 라마 불교를 받아 들임으로써, 라마 불교와 샤머니즘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몽골은 위치적으로 중앙아시아 중심에 자리잡고 있어서, 다른 나라로부터 접근이 힘든 러시아 남쪽의 여러 자치 공화국들에 대한 좋은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몽골 국가의 잇점을 고려하여, MIU는 국제화를 지향하면서 기독교적 세계관을 갖춘 몽골 및 주변나라의 지도층 리더들을 육성할 목적으로 2002년 9월 설립되었다. 특히 몽골과 인접 여러 국가들의 유수한 인재들을 유치하여 국제적 수준의 학부 및 대학원 과정을 영어로 교육하면서 재생산이 가능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양육함으로써 이를 성취하고자 한다.


* MIU Vision




  • 몽골 및 중앙아시아 지역 국가들의 우수한 학생들을 유치하여
  • 21세기형 세계적 인재로 육성하기위해 영어로 대학 및 대학원 과정을 교육하고
  • 또한 신앙적인 회심과 영적 성장을 도모하여
  • 해당 국가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갖춘 영향력있는 지도자로 봉사하도록 한다.

* MIU의 학과 구성




  • IM(International Management) 학과
  • IT(Information Technology) 학과
  • BT(Bio-Tech. & food science) 학과
  • TESOL(국제 영어교사 교육) 학과
  • FD(패션 디자인) 학과(2년제)
  • 교양학부

-   한 학년 정원이 총 150명(증원 예정)임

* MIU 특징




  • 글로벌 지도자 양성을 위해 모든 강의는 영어로 강의함
  • 몽골을 비롯하여 러시아(야쿠츠 공화국, 투바 공화국, 부리야트 공화국, 학카스 공화국, 알타이 공화국), 카자흐스탄, 중국, 내몽골 자치국, 한국 등 여러 나라의 학생들이 함께 공부하고 있음
  • 각 학과 우수 입학생에게 장학금을 제공하며, 몽골 외지 및 중앙아시아 국가의 학생에게 기숙사 제공
  • 기독교 세계관에 바탕을 둔 전인적 교육을 제공하며, 5차원 교육법을 적용한 교육 시스템을 갖추고 있음
  • 우수 학생 그룹을 매년 2월 중에 한국 및 미국에 단기 비젼 트립을 보냄으로써, 학생들에게 비젼 심기와 글로벌 리더쉽 교육기회를 제공
  • 한국인 전임교수들 모두 선교 헌신자로서, 우수한 강의 제공과 더불어 학생들의 복음화 및 제자 양육에도 사역자로 헌신하고 있음

* MIU에서의 강의사역 소감


몽골과 중앙아시아의 기독교적 지도자 양성을 돕고자하는 사명감을 갖고 MIU에서 4월 한달간 한학기 분량의 강의를 제공하기 위해 떠나기는 했지만, 막상 도착한 몽골 땅은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4월이건만 녹색 잎은 전혀 보이지 않는 매서운 날씨, 수도 울란바토르의 절반 이상인 게르(몽골 전통식 천막 가옥)에서 피워대는 석탄 연기냄새, 매일 3시간씩 영어로 강의와 면담을 해야하는 강행군으로 인해 며칠간은 코피를 흘려야 했다. 그러나, 막상 수업을 들어가면 의외로 해맑은 표정들과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눈초리들로 인해 새로운 힘을 얻고, 최선으로 이들을 잘 가르쳐야 겠다고 생각하였다.


1-2주 정도 강의가 진행되면서, 몽골 학생들에게는 최신 학문을 전해 주는 일과 더불어 하나님을 통한 새로운 영적 변화와 기독교적 삶의 기본 정신들(진정한 사랑, 남을 배려함, 성실과 최선, 정직 등)을 확실하게 가르쳐야 함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이 학생들은 오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열심을 내는 것이 부족하고, 또한 남을 배려하는 마음들이 부족함을 느끼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MIU가 다른 몽골대학과 달리 기독교적 가치관을 갖춘 지도자 양성에 비젼을 두고 교육을 통한 개인의 변화와 나라의 발전을 도모하는 이유라 생각이 들었다.


주일날과 수요일 저녁에는 한국 선교사들이 개척한 몽골 현지인 교회들을 많이 돌아보았다. 특히 수요예배에 참석한 어느 몽골인 현지교회는 몽골 대학생들이 엉성한 건물안에서 100여명 정도나 참석하여 뜨겁게 찬양하고 기도하는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다. 마지막주 수요예배 시간에는 선교사님 부탁으로 내가 특강식 설교를 하였는데, 말씀을 들을때에 대부분이 노트를 꺼내서 열심히 받아적는 모습을 보고 이들의 영적 열망이 얼마나 큰지를 알게 되었다. 이러한 몽골 학생들을 재생산이 가능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잘 양육할 수 있도록 서로 협력하는 노력들이 필요한 단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식적으로는 전도를 할 수 없는 상황이였지만, 의외로 다양한 통로들, 특히 교육을 통해 학생들을 개인적으로 만나고, 이들을 교회로 인도하는 것은 많은 가능성이 있음을 보게 되었다. 특히 몽골 학생들에게는 한국이 꼭 가고 싶은 선망의 나라임으로 인해, 이들의 마음을 얻기에는 그리 어렵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러한 선교의 크나 큰 가능성에 비해, MIU에서 강의나 학교 행정으로 섬길 수 있는 교직원 헌신자가 적은 것이 매우 안타까웠다. 연변 과기대가 초창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래도 우리 KOSTA 모임을 통해 많은 헌신자들이 연결되어 지금은 중국땅에서 매우 성공적인 모델의 대학으로 성장하였다. 이제 몽골 땅에 새로운 선교적 차원의 대학이 세워졌는데, 제2의 성공 모델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코스탄들이 이 사역에 동참하는 헌신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한 달간의 짧은 사역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120년전 한국땅에 처음 들어와 연세대학교를 세웠던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씨의 기도문이 떠올랐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그루 시원하게 자라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심으셨습니다. (중략) 보이는 것은 고집스러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사람뿐입니다. (중략)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나라에 과연 이런 때가 있어나 싶은 상황이였지만, 이제 우리나라는 전세계가 놀라워하는 은총의 땅이 되었다. 이제 몽골땅이 영적 징기스칸들을 많이 배출하는 21세기 새로운 은총의 땅이 되길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많은 교직원 헌신자들이 동참하기를 도전하는 바이다.


* 기도 요청 제목




  1. 우수한 학생들을 잘 유치하여 우수한 교육을 제공할 수 있도록
  2. 입학생들을 복음으로 변화시키고 영적지도자로 잘 양육할 수 있도록
  3. 졸업생들의 취업 및 진학등이 잘 연결되고, 장차 사회 지도자로 성장케
  4. 우수한 교수요원들과 행정직원들이 헌신하여 동참하고, 몽골 현지 직원들의 복음화가 이루어지게
  5. 안정적인 재정적인 후원을 위해
  6. 필요한 건물 공간들이 적절히 마련되어 좋은 교육공간이 제공되게
  7. 현재 헌신하고 있는 교직원 및 후원자들이 영적으로 늘 충만하도록

* MIU 후원 동역자가 되어 주십시오


1. 기도 동역자(기도제목 참조)


  • 몽골/중앙아시아 및 MIU 사역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 정기 기도모임에 참석하여 함께 기도해 주십시오. (매달 4번째 수요일 저녁 8시 30분, 서울 목동 제자교회)

2.교수/직원 동역자


  • 전임교수(석사학위 이상 선교 헌신자), 방문교수(1개월 1년), 여름 단기강사(2주-4주, 학사이상 가능)로 강의를 해 주실 분
  • 행정 직원으로 학교 운영을 섬기실 분

3. 재정후원 동역자
1) 학교 운영비 지원 (목표: 3천 구좌)


  • 월 일정구좌 후원을 통해 학교 운영 지원(개인 1구좌:월 1만원, 교회: 월 정액)
2) 장학생 지원(목표: 학생의 30% 지원)

  • 귀하의 이름으로 우수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합니다.
  • 전액장학생 (월 5만원 또는 년 60만원)
  • 반액장학생 (월 3만원 또는 년 35만원)
3) 석좌교수 지원

  • 귀교회/귀하의 이름으로 석좌교수직을 개설하여 우수교수를 초빙합니다.

4) 건축 지원


  • 제2강의동, 기숙사, 채플강당/체육관 건립을 지원시 귀교회/귀하의 이름으로 건물명을 정합니다.
  • 건축비 일부를 부담시 특정 교실 및 건물 기증명패에 기증자 이름을 부착합니다.

– 여러분의 후원이 MIU 비젼 성취의 밑거름이 됩니다.

[오창희] 그리스도인들에게 민족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코스타 2005년 6/7월호

그리스도인들에게 민족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 복음과 민족 1

미국에 이민 온 1.5세나 혹은 2세 그리스도인들이 미국 땅에 살면서 꼭 돌아보게 되는 질문이 있다. 미국유학 후 미국에서 취직할지 아니면 한국에 돌아갈 지를 결정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장기적으로 당면하게 될 질문이 있다. 한국 땅에 살면서, 혹은 외국생활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한국인이라고 느끼는 그리스도인들이 묻게 되는 질문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민족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민족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질문을 제기하면 어떤 사람은 당연한 것을 왜 새삼스럽게 묻느냐고 생각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복음의 보편성을 넘어서 쓸데없는 민족주의를 자극하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많은 분들은 이미 이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의 해답이나 선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이 문제에 대해 어느 하나의 입장을 취하게 되면 반드시 논쟁을 야기할 수 밖에 없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 문제는 오랫동안 내가 고민해 온 주제일 뿐 아니라 또 앞으로 내가 사역하고자 하는 방향과도 관계되기에, 독자들도 기존의 선입관을 내려 놓고 기초부터 함께 생각해 수 있기를 바란다.


성경에는 모든 신자들이 국가와 민족을 초월하여 한 하나님에 속한 자임을 말하는 구절들이 많이 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 3:20).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없이 다 그리스도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롬 10: 12),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갈 3:7). 한 마디로 모든 신자들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하늘에 속한 자라는 것이다.


복음의 진리를 제대로 받아들이는 자라면 이 사실을 결코 의심할 수 없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며, 이 땅에서의 신분이나 모든 것은 일시적인 것일 뿐이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이스라엘이란 한 특정 민족을 예수님을 통하여 모든 민족이 얻게 될 구원의 한 모델로 선택하셨지만, 예수님이 오신 이후 그 특수성은 사라지고 모든 민족에게 동일하게 임할 구원의 복음만이 남게 되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국가와 민족이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국가간의 분쟁이나 이해관계에 있어서 전쟁의 위험을 무릎쓰고 그렇게 매달릴 필요가 있는 것인가? 좀 더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그리스도안에 있다면 한국인이 된다는 것이나 미국인이 된다는 것이나 일본인이 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다 동일한 것이 아닌가?


사실 그리스도인 가운데는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시고 나 역시 한 때는 이런 생각을 가졌었다. 그러나 성경을 가만히 읽다 보면, 미묘한 부분들이 발견된다. 바울은 주안에서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고 말한 바로 그 로마서에서 자신의 민족과 혈육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들을 토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롬 9:2) 그는 얼마나 자신의 동족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었으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들의 구원을 원하고 있다고 자신의 양심을 걸면서 까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 로마서 10:1에서는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나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라고 말한다. 바울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다 복음안에서 한 자손임을 믿었지만, 여전히 자신의 골육과 친척에 대한 우선적 책임감과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당위적 명령이 아니라 바울이 가졌던 애정에 대한 사실적 표현이기 때문에 이 자체가 곧 민족에 대한 우선적 책임을 명령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이 구절들을 가지고 ‘민족주의는 성경적이다’ 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사실(IS)에서 당위(OUGHT)를 추론하는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직접적인 명령은 아니지만, 적어도 사도 바울이 그랬다는 것은 우리 역시 그럴 수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 줄 수는 있다.


그러면 민족에 대한 우선적 책임을 말하는 직접적인 명령은 없는가? 사실 성경, 특히 신약에서 이 부분에 대한 명시적인 구절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민족에 대한 우선적 책임을 시사해 주는 구절을 찾을 수는 있다. 바울은 과부나 나이 든 부모를 봉양할 우선적 책임이 그 가족과 친족에 있음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즉 신자일수록 자기 가족과 친족에 대해 일차적인 책임이 있으며 더 돌아보아야 할 의무가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족과 친족에 대한 의무는 구약에서부터 강조되어 온 것이다.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레 25:25) 즉 형제가 어려운 경제적 상황에 처해 있으면, 그의 친척이 그것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심지어 형의 아내가 과부가 될 경우에는 동생이 그 형수와 그 재산을 책임질 의무까지 부여하고 있다(신 25:5-10). 이러한 친족에 대한 의무는 바울의 말을 통해 신약에 와서도 형태는 다소 변해도 신자의 공동체 내에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 준다.


가족이나 친족은 기본적으로 혈연적 관계이다. 이것은 이 땅에서만 유효할 뿐 하늘나라에 가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제도이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결혼제도 자체가 없어지고 모든 사람이 천사와 같은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마 22:30)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족이나 친족에 대한 우선적 책임을 가진다고 말하고 있다.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 땅에서만 유효한 제도라고 하더라도 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조금 더 확장하면 민족과 국가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물론 민족과 국가는 엄밀히 말하면 동일하지 않겠지만 우리나라처럼 단일민족 국가에서는 동일시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족과 친족에 대한 우선적 책임이 있다면, 그 관계가 가족보다는 상대적으로 느슨해 졌을 지라도 민족과 국가도 혈연적 유대로 이루어진 공동체인 한, 국가와 민족에 대해서도 우선적 책임을 가진다. 적어도 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대한민국 땅에 태어나게 하셨고 한국인으로 태어나게 하셨다면, 우리는 이 땅에 있는 동안 좋든 싫든 한국민으로 살아야 하며 동족에 대한 우선적 책임과 의무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여러 사람가운데서 일차적으로 부모를 전도할 책임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동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이것은 성경적인 정신이 부합한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국가와 개인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각 개인들은 국가의 일원으로 태어났다면 국가가 하는 모든 행동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함께 가지는 공동체적 운명을 갖는다. 나는 내가 목회를 하기 전 한 때 철학을 공부하면서, 코넬대에서 박사후 과정으로 집단윤리에 대해 연구한 적이 있다. 집단윤리의 핵심은, 국가와 같은 집단은 단순한 개인들의 집합을 넘어선 어떤 공동체이며, 이 집단의 행동에는 그 구성원들 모두가 함께 윤리적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독일이나 일본이 이웃나라를 침략했다면 그 집단행동에는 그 나라 모든 국민들이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있으며, 따라서 모든 국민들이 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행동에 대한 윤리적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국민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행동에 대해 책임있게 결정해야 하며, 그 결과에 대해서도 함께 책임을 져야 한다. 개인과 그가 속한 집단은 별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리는 성경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국가 전체적으로 범죄할 때는 그 가운데 개인적으로 의로운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 징계의 채찍을 그 국가 전체에 함께 내리셨다. 가데스바네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신앙의 행동을 했을 때, 비록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40년동안 광야의 생활을 해야만 했다. 또 유다왕국의 말기에 예레미야나 에스겔, 다니엘과 같은 선지자들은 그 자신은 비록 의인이었을지 몰라도 국가 전체적으로 범죄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들도 국가에 대한 징계의 현실을 피할 수 없었다. 하나님은 국가 전체의 책임을 묻고 계셨던 것이다. 이것은 개인과 국가의 운명이 별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우리나라가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경제적 위기나 전쟁의 채찍을 맞는다면, 비록 그 가운데 의인이 있고 참 신앙인이 있다 하더라도 어느 사람도 그 운명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비록 하나님 앞에서 개인적 책임은 면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국가적 형벌의 운명은 피할 수 없다. 국가와 개인은 별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국가와 민족에 대해 더더욱 우선적 책임감을 가지고 주의 깊게 살펴 보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그리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더욱 더 기도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신앙인들에게 있어서도 나라와 민족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아니 신앙인이기 때문에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이 나라와 민족을 보면서 안타까와 하며, 울 수 있고, 기도할 수 있는 신앙인들을 찾고 계신다. 예레미야나 다니엘처럼, 나라와 민족의 죄가 자신의 죄인 것처럼 회개하고 금식하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을 찾고 계신다. 우리 모두 이러한 부름에 응할 수 있기를 바란다.

[김재석] 유학기간: 선교적 사명을 준비하는 기간

이코스타 2005년 4월호

유학기간: 선교적 사명을 준비하는 기간
– 몽골국제대학에서의 강의를 준비하면서

지난번 글에서 나는 유학 기간 동안 타문화에 대한 이해를 증진하는 것이 여러가지 측면에서 중요함을 언급하였고, 특히 이것이 차후 타문화권의 사람들에게 복음과 사랑을 전하게 되는 귀한 준비임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서 문화적, 직업적 사명과 더불어 일생 동안 선교적 사명에 대해 소명을 받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본다. 예수님은 부활후 승천하시기 전에 마태복음 28장 18-20절 말씀을 통해, 바른 소명 인식을 깨달은 주님의 제자들은 온 민족에게 나아가 그들을 새로이 제자 삼는 사역에 동참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다. 선교는 선택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어떤 형태로든 동참해야 하는 또 하나의 소명임을 말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주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한 후, 신앙훈련 과정을 거치면서 선교에 대한 사명을 깊이있게 깨닫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하나님이 나를 선교사로 부르시는 것이 아닌가 하고도 생각하였었다. 그때 우리를 지도하시던 옥한흠 강도사(지금 사랑의 교회 원로목사)께서 “앞으로는 선교사라는 신분보다 평신도로서 자신의 직업을 통해 선교하는 기회가 더 많아지고, 또 선교에 더 효과적인 방안이 될 것이다”라고 조언해 주셨다. 이 조언으로 인해, 나는 평신도 특히 나의 은사로 여기던 가르침의 직업을 통해 이 사회도 섬기고, 또 기회가 되면 선교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과정 속에서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나는 유학 생활을 하는 중에 섬기던 교회에서 선교의 중요성을 역설 함으로서 교회가 해외 선교를 지원하게 하였고, 이때 성경번역 선교회 (위크리프 선교회) 소속 선교사를 한 가정 지원하게 되었다. 지원 선교사와 소식지를 주고 받으며 선교 현장의 어려움과 더불어 오랜 준비의 기간이 필요함을 깨닫게 되었다. 한국에 귀국하여 섬기던 교회에서도 선교의 중요성을 인식한 목사님과 함께 선교사 지원사역(재정적 및 기도의 후원)에 열심히 동참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또한 옛적 직장 동료가 선교사로 나가게 되어 개인 후원자로 자청하여 섬기고도 있다. 그러나, 이전에 가졌던 결심처럼 내 자신이 선교지에서 얼마간이나마 직접 섬길 수 있는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1년전, 학교로 부임한 후 처음 갖는 연구년(안식년)을 준비하면서 이러한 선교적 사명에 동참할 기회를 찾던 중, 한국 교회들이 몽골에 선교적 차원에서 대학을 세우고 여기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교수 요원들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여러가지 상황으로 인해 단기적 기간밖에 되지 않지만, 해당 학교들(몽골 국제대학과 후레 정보통신 대학)에서는 너무나 반기는 상황이다. 이제 4월 한 달 동안 주당 15시간 이상을 영어로 강의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서 학생들에게 비젼을 심어주고, 또한 저녁시간에는 영어 성경 공부반을 통해 몇 명이라도 가난한 심령을 만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유학생들이 차후에 이러한 상황을 위해 준비하는 좋은 기회를 가졌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첫째로, 유학중에 섬기는 미주 대부분의 한인교회들에는 많은 선교사들이 들리게 되는데, 이런 기회를 선교지의 현장 상황을 좀 더 상세히 접하는 기회로 삼아보도록 권하고 싶다. 선교가 단순히 열정과 기도로 준비하는 것 외에 선교지의 다양하고 복잡한 상황들을 충분히 이해하는 기간이 필요하고, 유학기간은 이것을 위한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나도 이 기간 중에 태국 선교사님, 성경번역 선교사님, 인도네시아 선교사님, 아프리카 케냐 선교사님 등 여러 곳의 선교적 상황을 많이 듣고, 실제적 환경에 대한 좋은 이해의 기간이 되었었다. 많은 사람들이 선교에 대해 막연한 형태의 상상적 생각을 하고 있는 경우를 보면서, 실제 사람들의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형태들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싶다.


둘째로, 유학 기간은 나의 직업적 업무를 수행하면서, 영어로 복음도 전할 수 있는 준비 기간이라 생각한다. 사실 내 자신은 이 면에서 부족함이 너무 많다고 느낀다. 유학을 마치고 뉴욕지역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중에, 한국 대학생 CCC 모임에 특강 세미나로 몇번 초청을 받았었다. 그런데, 한국말이 편한 유학생 중심모임에서 신앙 특강을 하면 나름대로 상당한(?) 반응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1.5세 대학생들을 위해 영어로 특강을 해달라고 해서 오래고 힘든 준비과정을 거쳐 전했지만, 전하는 나도 언어적인 제약으로 충분히 표현하지 못함을 느꼈고, 듣는 학생들에게도 별 감흥을 주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들을 겪으면서 이 부분에서 준비가 필요함을 느끼게 되었고, 지난 년도에는 학교가 학부 강의를 영어로 가르치는 것을 적극 장려하는 기회에 용기를 내서 영어 강의를 진행하였다. 이는 이번에 몽골에 가서 영어로 강의해야 하는 좋은 준비의 시간이 된 것이다. 또한 저녁시간에는 영어 성경공부 그룹을 만들어 복음을 위해 준비된 자들을 만나 마음 문을 열어주고자 하는데, 이러한 사역을 위해서는 적극적인 자세로 영어로 전하는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셋째, 유학 생활중에 복음을 모르는 자들에게 복음의 핵심을 조리있게 전하되, 문화적 배경을 고려한 전도 훈련을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주변에 보면, 교회생활을 오래했거나 훈련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도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보면 준비되지 못한 측면으로 인해 오히려 복음에 거부감만 심어주는 경우가 꽤나 많다. 복음은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싸구려 물건 팔듯이 전하는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또한 각 사람의 상황이나 배경을 고려하지 않고 담대함이란 명목하에 거부감만 전달하는 경우도 많이 보게 된다. 마10:16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는 말씀이 있다. 이는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의 핵심을 전하되, 뱀이 하와에게 접근하는 방식처럼 지혜로운 방식으로 접근하라는 것을 말해준다. 즉, 지혜롭고 조리있게 잘 준비하여 증거하여야 함을 말해준다.


마지막으로, 선교의 가장 중요한 동기가 주님의 십자가 사랑에 감격함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경우, 선교를 그리스도인의 책임이나 사명으로 여기는데, 이것만으로 선교를 하기보다 주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사랑이 나를 선교의 현장으로 이끌어 가야 지속적이고 쇠하지 않는 선교의 열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주가 마침 고난 주간이라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다시 새겨보는 귀한 기회인데, 내 마음도 이전 같지 못함이 부끄러워진다. 유학의 바쁜 일정 속에서도 우리가 경험했던 주님과의 첫 사랑의 감격을 다시 회복하고, 이 감격이 선교의 터를 준비하는데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오창희] January와 Jesuary

이코스타 2005년 2월호

희랍신화에 보면 야누스란 신이 나온다. 이 신은 앞과 뒤에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으며, 이러한 신체적 특성에 맞게 도시나 집의 출입구 등 문을 지키는 수문장 신이 되었다. 그런데 문은 일반적으로 시작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 야누스 신은 또한 출발점의 신이라 생각되었고, 신들 가운데 최고의 지위가 주어졌다. 모든 시작은 언제나 그와 더불어 시작되는 것으로 여겨져서 12개월 가운데 1월은 ‘야누스의 달’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그래서 1월은 야누스의 달이라는 의미에서 라틴어로 ‘Januarius’라 불렸고, 여기에서 1월을 의미하는 영어 ‘January’가 나오게 된 것이다.


영어 January처럼,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나 상표 가운데 많은 것들은 희랍신화에 그 기원을 가진 것들이 많다. 예를 들면 카시오페아, 안드로메다, 오리온 성운 등 모든 별자리 이름들은 희랍신화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희야신스 등 상당수 꽃이름들도 또한 희랍신화에 그 기원을 가지고 있다. 또 우리나라의 제품이름들도 상당수가 희랍신화에 기원을 두고 있다. 예를들면, 박카스는 로마신화의 술의 신 박카스(희랍신화에서는 디오니소스)에서, 무기 가운데 발칸포는 로마신화의 대장장이 신 불카누스(희랍신화에서는 헤파이스토스)에서, 타이탄 트럭은 희랍신화의 힘센 거인족 티탄에서 따온 것이다. 이 외에도 많은 문학작품과 예술작품들이 이 희랍신화에서 그 소재를 빌어오고 있다.


오늘날 희랍과 로마의 신들은 더 이상 추종자들을 가지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을 포함한 현대인들은 희랍신화에 대해 그다지 경계심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신약성경이 기록될 당시만 해도 이 종교는 많은 추종자들을 가지고 있었고, 복음전파에 큰 지장을 주었다. 행 19장에서는 아데미 여신(아르테미스)을 섬기는 에베소 지역에서 은장색 데메드리오란 사람이 자신들의 신을 경홀히 한다하여 바울을 핍박한 적이 있었다. 또 루스드라에서는 바울과 바나바를 쓰스(제우스 신)와 허메(헤르메스 신)라 하여 섬기고자 한 적도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인들이 이 희랍신화에 대해 완전히 경계를 풀 일은 아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러한 문화를 기독교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지는 않을까? 1월은 야누스의 달이라 January란 말을 쓰고 있는데, 이것을 성경적으로 바꿀 수는 없을까?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님이 바로 알파요 오메가며 처음과 나중이라고(21:6)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성경적으로 생각하면 야누스가 아니라 예수님이 바로 시작의 신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1월은 야누스의 달이 아니라 예수님의 달이 되어야 한다. 즉 January가 아니라 Jesuary가 되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물론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기 때문에 우리만 그 언어를 이렇게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의미적으로는 그렇게 되게 할 수 있다. 예수님과 더불어 시작하는 달이 된다면 1월은 곧 Jesuary, 즉 예수님의 달이 되는 것이다. 1년 가운데 첫 달인 1월을 맞으면서 이 달이 예수님의 달이 되도록 해보자. 예수님과 함께 시작하고 예수님을 위해서 시작하며, 예수님의 주신 힘으로 시작해보자.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1월은 내용적으로 예수님의 달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 1년을 예수님의 달로 시작하여 예수님의 달로 마칠 수 있도록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