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호] 회복되는 하나님의 나라, 치유되는 자아: 또 다른 전쟁 (엡 6:10-24)

eKOSTA 성경강해


회복되는 하나님의 나라, 치유되는 자아.


또 다른 전쟁 (엡 6:10-24)


최근 미국 갤럽기관에서 조사한 결과 미국인의 68%가 사단의 존재를 믿는다고 대답했다. 사단에 대한 인식여부는 종교적 성향에 대한 객관적 평가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나머지 20%만이 사단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대답했으며, 응답자 중 85.5%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대답했다. 미국 내에서 기독교의 종교적 권위는 많이 상실되었지만 그 영향력은 아직도 남아있음을 보여주었다.  
바울은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6:10,11)고 권면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보이지않는 영적 전쟁터다. 사단의 주요 목적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영적으로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단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개인적 그리고 공동체적인 이중적 성숙이 요구된다. 교회는 연합의 공동체를 유지해야 한다. 연합이 깨어질 때 사단의 모든 공격과 유혹을 견뎌내지 못한다. 이 시대의 교회가 연약한 이유는 개인의 성숙이 더디고, 교회의 연합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사단은 성숙하지 못하도록, 연합을 깨뜨리기 위해 힘을 다한다.
프랑스 국제관계연구소 아시아센터 소장 프랑수아 고드망은 이라크 전쟁에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있다. 사담 후세인은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바그다드 국경 수비대는 다 어디로 갔을까? 새로운 국제 무질서가 도래하는 것일까?” 라는 질문을 했다. 이라크가 허무하게 굴복한 이유도 수비대가 힘없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사단의 존재성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6:12). 사단은 정사와 권세, 세상 주관자로 묘사되고 있다. 세상을 둘러 싼


모든 정치, 경제. 문화, 가치관에 이르기까지 사단의 권세의 지배를 받고 있다. 악의 영들은 악의


본부에서 파송된 대리자들로 그리스도인 들을 실족 시키고 믿음을 무너뜨린다.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케 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고후11:3).


        ‘하나님을 향한 열광이라는 책에서 크리스토퍼 에드워즈는 이단에 빠졌다가 극적으로 벗어난


한 청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1975년 예일 대학을 졸업하고 석사 과정을 위해 버클리 대학에


등록한 후 주말에 한 농장에서 열리는 행사에 초대를 받았다. 참석하고 나서 확인해보니 통일교 문선명이


주관하는 행사였다. 그는 7개월동안 광적인 세뇌교육을 받았고 새로운 메시야 문선명에게 완전히


순종하는 제자로 변화되었다. 문선명의 절대 통치 아래 세계를 회복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까지 바치고자


맹세했다. 그의 아버지는 전문가와 함께 아들을 만나고 거의 1년이 넘는 치료와 상담과 교육 후 광기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사단은 오늘도 비진리와 거짓된 교리, 이단종파의 유혹으로 그리스도인 들을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하게 만든다.


        존 번연은 사단은 두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힌다고 가르쳤다. 하나는 핍박과 환란


통해 고통스럽게 하는 일이고, 또 하나는 유혹하여 범죄 하게 하는 일이라고 했다. 마귀가 그리스도인


들을 집중 공격하여 쓰러뜨리는 기본적인 5가지 영역이 있다.


의심.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께 멀어질 때 갑자기 의심이 반복된다. 자신이 받은 사명과 구원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과 존재에 대해서까지 의심이 멈추지 않는다. 의심을 막을 수는 없다. 다만 믿음으로 모든


의심을 일일이 거절해야 한다. 새가 머리 위로 떠다니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머리 위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


낙심. 낙심한 그리스도인은 쓸모가 없다. 낙심은 영적인 것으로 보일지라도 악의 영이 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낙심을 주시는 일이 없다. 사단의 가장 오래된 무기인 낙심은 가장 정확한 공격능력을


발휘한다. 낙심은 거의 실패율이 없다. 낙심에 빠진 그리스도인 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


바쁜 생활. 바쁜 생활로 인해 우리의 관심을 영적인 것에서 다른 것에 몰두하게 한다. 모임도 많아지고


처리해야 할 일도 많아지며,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자주 발생하면 깨어 경계해야 한다. 너무 바쁜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없다. 바쁜 생활은 마치 닻이 끊어져버린 배와 같아서 조금씩 떠밀려가 버린다.


열등감. “넌 할 수 없어 사단은 우리의 무능의식을 자극한다. 하나님께서 너 같은 사람을 쓰시지


않는다 쉼 없이 우리 안에서 속삭인다. 열등감과 비교의식에 빠진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없다.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 사울은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라는


여인들의 노랫소리에 무너져버렸다. 블레셋 골리앗 장군은 결국 사울을 처형한 결과를 가져왔다.


게으름. 게으름도 사단의 오래된 공격무기 중 하나로 구형무기이지만 강력하다. 성경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1)고 권면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나 시간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그리스도인 들과 교회는 완벽한 무장을 갖추어야 한다. 바울은 두 가지 명령을 하고 있다.


        ꊱ 주안에서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 하라(10절).


        ꊲ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11,13절).


모든 일상생활에서 완전무장을 하고 행동해야 한다. 잠시라도 전신갑주를 벗으면 공격 당하기 쉽다.


완전 무장한 채로 식사하고 잠을 자고, 샤워를 해야 한다.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이 가정에 들어갈 때


전신갑주를 현관 입구에 벗어두기 때문에 가정에 많은 문제들이 일어난다. 전신갑주를 입어야 할 두 가지 목적이 있다.


        11절: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해.


        13절: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구약의 열왕기 역사에서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셨던 왕들은 거의 모두 시작은 좋았지만 끝이 좋지


않았다. 끝까지 변함없는 충성과 헌신으로 주님을 섬기기 위해 모든 신자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만 한다. 6장11-14절에서 대적하라서라는 말이 각각 두 번씩 반복해서 기록되고 있다. 두 번씩


반복해서 권면 하는 것은 영적 전쟁의 중요성 때문이다.


마귀는 공휴일이 없다. 그는 결코 쉬지 않는다. 얻어맞고도 다시 일어난다. 앞으로 들어갈 수 없으면 뒤로


들어간다. 뒤로 들어갈 수 없으면, 지붕이나 바닥에 터널을 뚫고 들어간다. 그는 들어갈 때까지 결코


수고를 멈추지 않는다. 마귀는 교활하며 많은 방법을 사용한다. 하나가 실패하면 또 다른 방법으로 그는


이길 때까지 계속해서 공격한다. 그러므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 들이 되려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한다.


        캠브리지의 시므온은 어디로 이사를 가든지 항상 H. 마틴의 초상화를 제일 먼저 새집에 거는 것


잊지 않았다. 그는 매일 마틴의 초상화를 보면서 이렇게 자신에게 말했다. 진지하라. 결코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많은 사람들의 영혼이 파멸의 구덩이로 몰려가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결코 너의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영적인 깊은 진지함을 유지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주님께 우리 자신을 드릴 수 없다.


 


하나님의 전신갑주


        진리의 허리띠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14절) 허리띠는 갑옷이 아니라 속옷의 가운데를 묶는 끈이다.


속옷은 겉에서 보이지 않는다. 허리 띠는 힘의 상징이다. 허리 띠는 속 사람을 매는 경건의 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곧 주님과의 오랜 교제를 통해 내면의 경건함을 성숙시켜야 한다. 또한 진리의


허리띠는 성령으로 계시된 복음의 교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바울은 이미 그리스도의 비밀에 대해


에베소서에서 간략하게 복음을 다시 설명했다.


        18세기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면서 도덕적 부패가 심했다. 그 당시 런던으로 상경한 한 소년이 있었다. 그는 런던의 뒷골목 전당포에 취지하고, 가게 문을 열 때마다 지난 밤에 일어난 거리의 광란의 현장을 목격했다. 타락한 도시를 바라보며 소년은 절망했다. ‘이 도시에 무슨 희망이 있는가?’ 다른 사람들처럼 비참하게 살고싶지 않았다. 그는 매일 아침마다 성경을 읽으며 기도를 시작했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시5:3).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인생을 사용하셨다. ‘이렇게 비참하게 살고 싶지 않다고 기도했던 소년이 구세군의 창시자 윌리엄 부쓰였다. 매일 아침 주님과의 깊은 교제가 그의 인생의 새로운 허리띠를 매게 해 주셨다.


        의의 흉배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5:8).


흉배는 가슴과 등을 보호하는 군사장비다. 사단은 매일 우리 마음에 죄책감과 불안과 염려를 쌓아놓는다.


매일 부지런히 치우지 않는다면, 마당은 쓰레기로 넘쳐 날 수 밖에 없다. 죄책감과 염려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린다.


① 죄책감.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


하리요..(롬8:33-34). 그리스도의 피가 용서하지 못할 죄는 없으며, 한 번 용서를 받은 사람들에게 죄를


고백하면 용서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매일 자신의 죄를 고백함으로 죄책감에서 자유 해야


한다(요일1:9).


② 염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6:33). 염려는 곧 믿음이 실종되었다는 확실한 증거물이다.


캔자스 주립대학 교수 팀은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두 가지 생각이 든다라는 사실에 대해 연구한 결과


뇌는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사람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결정


메커니즘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두 개의 시스템이 동시에 작동한다. 하나는 신중한 시스템이고 하나


는 감성적인 시스템이다. 계산영역의 신중한 시스템은 수학과 합리적 결정을 내리는 반면, 감성적


시스템은 뇌의 원시적 부분에 해당한다고 했다. 그리스도인 들이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두 가지 시스템이


동시에 작동한다. 염려는 뇌의 원시적 부분이다. 염려는 해결방법이 아니다. 해결 능력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도 믿음을 더하여 주소서 기도해야 한다.


③ 질투.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2:3). 의의 흉배가 떨어져나간 그리스도인 들의 가슴이 질투심과 열등감의 늪에 빠진다.


심리학 교수 살로비는 미국에서 일어나는 범죄의 20%가 질투때문이라고 보고했다. 질투의 임상 학


저자 화이트 박사는 이혼하는 부부의 30%도 질투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질투는 열등감에서 출발한다.


자신의 결함을 질투로 바꾸는 사람은 불행하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이 모든 질투심에서


해방되고, 겸손의 갑옷을 입을 수 있으며, 용서와 평화의 사람으로 공동체의 화목을 추구할 수 있다.


 


        복음의 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15절). 신자들에겐 두 가지 신발이 필요하다.


복음을 전하는 신발과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신발을 신어야 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2세는 미국 주도의 이라크전쟁이 세계의 종교적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 인간의


비극이 종교적 재앙이 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발표했다. 이라크 전쟁이 기독교와 이슬람의


광범위한 충돌을 가져올 경우 종교가 분열될 위험성이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미국이 이라크를


점령함으로 기독교 보수주의단체에서는 중동선교의 새로운 역사의 문이 열렸다고 전제하고 더 많은


선교사들을 보내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남 침례교단엔 이미 2만5천 여명의 전도자들이 중동선교를


위해 떠날 준비를 마쳤다.


        주님께서는 “내가 전도하러 세상에 왔노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 들과 교회는 매일


복음의 신발을 신고 세계복음화의 비전을 따라 주님을 섬겨야 한다. 해외선교센터에서 세계기독교인구를


발표했다. 20억7662만 명으로 연평균성장률 1.27%가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해외선교사는 43만4천 여명


이며, 전세계 기독교인들이 매년 1900억 여 시간을 전도에 힘쓰지만 미전도 인구는 0.5% 증가했다.


한 신학생이 선교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품고 필리핀에 있는 선교훈련원에 입학하고 언어훈련을


받았으나 한 학기를 마치고 곧 좌절감을 느끼고 말았다. 그는 훈련을 중단하고, 여름방학 동안 필리핀


여행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학기가 끝나고 거리전도 요청을 받고 필리핀 오지로 거리전도를


다니다가 그는 선교에 대한 확실한 소명을 받게 되었다. 좌절감에 빠져있다가 그는 전도여행을 통해


다시 부르심을 받고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다. 전도는 전하는 자와 듣는 자에게 생명을 더한다.


 


        믿음의 방해.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16절). 로마군인의


방패는 몸 전체를 가리는 방패로 길이가 1.2m 너비가 77cm로 두 겹의 나무판자로 만들었다. 전신을


가리는 방패가 필요했던 이유는 당시 고대전쟁의 가장 무서운 무기는 불화살이었다. 두 겹의 방패는


가운데가 비어있어 불화살을 맞으면 즉시 꺼지도록 만들어졌다. 사단의 모든 불화살의 공격을 믿음의


방패로 막아내야 한다.


        테레사 수녀께서 유명한 변호사 에드워드 윌리엄즈를 면담하기로 했다. 변호사는 AIDS환자


치료수용소 재정후원을 정중하게 거절하는 문구를 조수와 함께 작성한 뒤 테레사 수녀의 요청을 듣고,


이미 준비한대로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수녀께서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 기도한 뒤 다시 후원을


요청했다. 변호사가 거절하자, 수녀께서는 다시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 변호사는 두 번째 기도에서


자신이 이 게임에서 졌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인정해야 했다. 대답하지 않으면 앞으로 한달간이라도


계속 기도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기도가 끝나자 변호사는 즉시 사업후원을 약속했다.


정채봉의 간장 종지 중에 이런 글이 있다.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의 한가지 공통점은 꾸물거린다는


사실이다. 누가 불러도 벌떡 일어나서 달려 나오는 일이 없다. 망설이고 꾸물거리다 끝난다. 마귀 군대는


매일 충격과 공포 작전으로 우리를 공격한다. 믿음으로 사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면, 방패 없이 전쟁터로


나간 군사와 같다. 꾸물거리고 살다간 죽음뿐이다. 비참한 패배를 반복해야 한다. 방패 없는 군인이


생존할 가능성이 있을까?


 


        구원의 투구.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17절). 투구는 머리를 보호하고 계급을 나타내는


장식이 있어 군대 내의 질서 유지와 군인의 생명을 보호했다.


        ① 구원의 투구는 하나님나라를 구하는 가치관을 의미한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모든 일에 하나님나라를 먼저 구하는


철저한 삶의 목표의식을 가져야 한다.


웬디스 햄버거 창업자인 David Thomas는 “나는 10억 배의 축복을 받은 자라는 책에서 그가 성공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나는 원래 사생아 출신으로 학교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일당 6천원을


받던 간이식당 종업원이었으나 근면과 정직과 헌신이라는 삼대정신으로 햄버거 장사를 시작하여


6조원 규모의 기업가가 되었다.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 들은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나라를 먼저 구하는


분명한 삶의 정신을 보여야 한다.


        ② 구원의 투구는 자신에 대한 자아상을 의미한다. 바울은 모든 서신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나 바울 이라는 표현을 즐겨 말했다. 세속적 관점에서의 자기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관점


에서 자신의 가치를 깨달은 사람들이 아름답다.


에이즈로 죽어가던 한 여인을 심방한 목사는 어떤 위로의 말도 거절하는 냉담한 그녀를 바라만 보고


있어야했다. 난 버림받은 영혼입니다. 내 자신의 일생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행복까지 망쳐놓은


사람입니다. 고통스럽지만 전 지옥에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제겐 아무런 희망도 없습니다.. 목사는


그녀의 옷장에 걸려있는 사진을 발견하곤 물었다. 저 귀여운 여자아이 사진은 누구입니까 제 딸입니다.


제겐 소중한 보물입니다. 만일 저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당신은 도울 건가요? 실수해도 여전히


사랑하고 용서할 건가요? 물론이죠. 뭐든지 그 아이를 위해서 라면 할겁니다..그런데 왜 물으시죠?


하나님의 옷장에 당신의 사진이 붙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항상 기억하는 투구를 써야


한다.


        ③ 그리고 구원의 투구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는 또 다른 삶의 기대를 의미한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7-8).


무디는 나는 수년동안 설교할 때마다, 설교가 끝나기 전, 그리스도께서 오실 수 있다고 생각하며


설교했다.고 말했다. 캠벨 몰간은 나는 매일밤, 내일이 마지막 날일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잠이 들었다


고 고백했다. 재림의 진리는 성경의 진리 가운데 가장 귀중한 것이다. 중국 선교사로 평생을 섬겼던


허드슨 테일러도 이렇게 말했다.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소망이 내 사역의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성령의 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17절). 예수께서도 광야에서 시험 받으실 때에 모든 마귀의


시험을 기록하였으되 라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리하셨다. 우리도 매일의 영적 전쟁에서 하나님


말씀으로 모든 마귀의 시험을 이겨내야 한다.


        한 청년이 한평생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고 살았던 무디의 성경책을 보고싶다고 했다. 무디가


성경책을 보여주자 청년은 놀랬다. 성경 전체가 빽빽하게 색연필로 칠해져 있었고, 성경 곳곳에 T.P


표시가 되어있었다. 무슨 뜻입니까? 묻자 무디는 실험해보고 입증되었다는 뜻이라고 대답했다.


말씀이 곧 그의 삶이었다.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체험은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는 삶이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결론: 세가지 헌신(6:18-24)


바울은 마지막으로 세 가지 헌신을 에베소 교회에 요청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우리는 그


몸의 지체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해 세 가지 헌신으로 연합된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23-24절)들로 구분될 것이다.


        1. 기도의 헌신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18절). 기도는 쉴 수 없는 헌신이다. 무시로 판티 카이로 모든 시간에, 항상, 늘


기도에 힘쓰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세계적인 골프 선수명단엔 항상 게리 플레이어 이름이 남겨있다. 그는 남아프리카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가난과 역경 가운데 성장했다. 8살에 어머니를 사별하고, 탄광 광부인 아버지 손에서


자라났다. 신발을 아끼려 신발을 신기보다 들고 다니는 시간이 더 많았을 정도로 가난했다. 1953년 그는


프로 골퍼로 전향하여, 150여 개 대회를 우승했다. 우승 비결을 묻는 사람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수없이 무릎 꿇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린다. 왜냐하면 골프의 재능은 하나님께서 빌려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재능에 대해 바른 이해를 갖고 있었으며 기도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었다. 기도에 헌신하지 않고 그리스도께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을 풍성하게 받을 수 없다


(23절). 기도는 기도로 배운다. 운동선수가 오랜 연습을 필요로 하듯이 기도도 많은 시간의 기도가


필요하다. 스펄전은 기도는 성령만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실 수 있는 기술이다라고 가르쳤다. 성령께


우리에게 마땅히 기도할 수 있는 힘과 기술을 주신다. 우리는 기도함으로 성령님과 진정한 동반자가


될 수 있다.


 


        2. 동역의 헌신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19-20절).


에베소 교회는 기도로 바울과 동역자가 될 수 있었다. 우리는 기도로 수술실 의사의 동역자가 되고,


오지의 선교사들과 동역자가 될 수 있다. 바울은 쇠사슬에 묶인 그리스도의 사신으로 주를 섬겼다.


복음 전도를 위해 그의 생애 전부를 주님께 쏟아 부었다. 로마의 감옥은 바울에게 그의 설교단과 전도


센터가 되어주었다.


        조지 포먼은 45세의 나이에 권투를 다시 시작했다. 그가 권투를 다시 시작한 이유는 휴스턴에


세운 청소년 회관과 교회 때문이었다. 청년시절, 포악한 삶을 살았던 그는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만난


후 새 사람으로 거듭났다. 포먼은 마약과 범죄에 빠진 청소년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기 돈으로


교회와 회관을 세우고 복음 사업을 추진했다. 재정적 지원이 필요하게 되자 그는 다시 권투 글러브를


끼고 다시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했다.


오늘도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전하게 하소서 기도로 동역하는 진정한 동역자들이 세계 복음화의


범위를 조금씩 넓혀가고 있다. 우리는 세계 부흥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시카고 무디 성경학교에서 매주


토요일 밤 9시에 세계부흥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여러 달 기도한 뒤 한 사람이 물었다. 부흥이


왔습니까? 아직 오지않았습니다. 다만 부흥이 올 때까지 우리는 기도할 것입니다. 복음 전도와 부흥을


위한 기도의 동역이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이끌어낼 수 있다.


 


        3. 교제의 헌신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게 하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저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21-22절).


김명혁 목사께서 인생에 필요한 것은 참된 만남이다.라고 정의하셨다. 복음적인 삶이 되기 위해 만남의


확장이 요구된다. 누군가가 구원 받고, 헌신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도 만남에 있다. 목회도 선교도


만남이다. 김명혁 목사께서도 미국 유학시절 도서관만이 그의 유일한 삶의 전부였으나, 어느날 만남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셨다. 그는 외국 학생들에게 먼저 인사하고, 주말에 학생들을 초청하여 식사와 교제를


가졌으며, 피크닉과 운동회를 열기도 하셨다. 그 모임들이 나중에 한인 회와 한인교회를 세우는 동기가


되었다고 하셨다.


        바울은 마지막까지 알게 하여 서로의 교제를 위한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로마의 감옥도


바울을 가두어 두지 못했다. 바울에겐 언제나 그의 친구들과 동역자들이 함께 있었다.


 


        ‘회복되는 하나님나라, 치유되는 자아 2002년 코스타 주제를 따라 10번에 걸쳐 에베소서 요약


강해를 함께 나누었다. 복음의 비밀을 깨달은 지성인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와 진정한 자아를


회복할 수 있다. 우리에게 계시의 영을 주소서 기도하며, 복음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는 이 시대의


젊은 지성인들이 되었으면 한다. 복음을 깨달은 참된 지식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께 헌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윌리엄 부쓰에게 그의 성공 비결을 물었을 때 부쓰는 잠시 침묵하다가 눈물어린 눈으로


이렇게 말했다. 저보다 훌륭한 두뇌와 기회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지요. 그러나 저는 저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결심했었습니다.


이제 우리 시대는 이미 우리의 손에 달려있다. 바울처럼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고 고백하며 하나님나라를 회복해가는 암흑의 시대를 밝히는 코스탄들이


되기를 바란다.

[조경호] 회복되는 하나님나라 치유되는 자아: 에베소서의 비밀 : 구원의 제2변화

eKOSTA 성경강해


회복되는 하나님나라 치유되는 자아: 에베소서의 비밀
 구원의 제2변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유혈충돌이 멈추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팔레스타인의 자살 테러단원 중엔 10대 청소년들이 죽음으로써 조국과 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있는데, 자살 테러는 또 다른 테러를 가져오고 있다고 경고한다. 폭탄이 터지면서 피해자들의 몸에 박힌 뼛조각에서 치명적인 질병들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이스라엘과 기독교인들은 어떤 관계일까? 아브라함의 혈통적 언약 자손들과 아브라함의 믿음의 언약 자손들은 누구일까?


바울은 에베소서 2장에서 구원이 가져온 새로운 피조물의 자아상을 우리에게 펼쳐 보이고 있다. 구원의 제1변화(2:1-10)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삼중의 연합을 이루었다. 구원의 제2변화(2:11-18)에서 우리는 “유대인과 함께” 삼중의 연합을 이루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유대인과 이방인의 새로운 연합을 성취하셨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아상을 ‘구원의 변화’로 설명하고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되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과거의 자아상과 현재의 자아상을 깊이있게 설명한다. 구원이 가져온 자아의 변화 곧 ‘이전 것’과 ‘새것’의 차이를 이해할 때 우리는 하나님나라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자신을 거룩한 제단에 드릴 수 있다.


자아상의 모형(엡1:20-23)



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르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1:20-23)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를 모델로 재창조 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성령의 권능이 먼저 그리스도를 ‘알케고스’ 구원의 창시자로 만드셨다. 구세주가 되신 단계를 5과정으로 설명한다. 죽음과 부활에서 시작된 구세주의 단계가 최종적으로 “교회의 머리”에서 구원의 완성과 절정이 실현된다. 하나님의 구원의 최종 성취는 교회이셨다.


● 성령하나님의 사역….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의 완성(1:20-23)










그리스도 안에서 진행된 구원의 전체 계획 1:20-23









죽음

부활

승천

만물의 주

교회의 머리

신자 안에서 진행되는 구원의 전체 계획 2:1-22

그리스도께서 “구세주”가 되신 5단계 중 ‘죽음-부활-승천’의 세 단계를 통해 구원의 첫번째 변화가 성취되었다. 이제 남은 ‘만물의 주-교회의 머리’ 두 단계를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을 연합하여 새로운 인류를 창조하신다.


구원의 제 2변화(엡2:11-18)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割禮黨)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은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의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和平)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2:11-18)






구원받기 전….구원받은 후

● 구원받기 전(2:11-12)


구원받기 전 죄인의 실상은 “이방인”과 “무할례당”이라 불리어졌던 사람들이었다. 아브라함의 언약의 관점에서 인류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분류된다. 피부 색깔, 문화, 언어, 민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오직 두 부류의 인류역사가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끌어왔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이방인은 허상의 존재들일 뿐이다. 탈무드에 이런 글이 나온다. 한 랍비에게 유대인이 질문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많은 이방인을 만드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랍비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지옥불에 땔감이 필요해서지….”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12절). 바울은 이방인의 버림받은 실체를 다섯 가지가 없는 자로 묘사했다.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이방인과의 접촉과 교제를 금지했다. 길거리에서 인사만 나누어도, 시체와 문둥병자를 만진 것과 동일한 정결예식을 치러야만 공동체에 받아들여졌다. 이방인들은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었다.


●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을 때 무엇을 의미한 것일까?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피의 구속은 한 사람, 한 사람 개인만을 위한 구원이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놀라운 일이 성취되었음을 보여주셨다.


인류의 역사는 이방인과 유대인 간에 벌어진 오랜 증오와 피의 살육의 역사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가스실에서 살육당한 600만의 유대인 대학살이 그 대표적 사건이었으며, 최근에까지 그 증오와 반목의 역사는 멈추지 않고 있다.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 중심에 이스라엘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9.11 테러 1주년. 희생자 2801명의 이름이 ‘그라운드 제로’에서 호명되었으며, “우리는 결코 잊지 않을 것” 현수막도 건물에 걸려있었다. 퓰리처상을 수상했던 한 언론인은 미국의 테러전쟁을 이렇게 말한다. “테러와의 전쟁은 유령과의 전쟁이다. 그것은 빈곤, 마약과의 끝없는 전쟁과 같다. 끝도 없는 전쟁을 통해 미국은 자국의 우월감을 세계에 보여주려 할 뿐이다.” 현대 평화학 창시자 유럽평화대학 요한 갈퉁 교수는 [평화 심포지움]에서 “지금 자행되는 보복의 악순환의 핵심에 미국의 패권주의가 있다. 미국의 태도변화 없이는 평화는 어렵다. 갈등이 있는 곳에 폭력이 있고 갈등이 해결되면 폭력도 사라진다. 갈등을 푸는 열쇠는 미국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이스라엘과 중동의 갈등, 기독교와 이슬람의 종교전쟁, 문명의 충돌로 묘사되는 테러와 전쟁은 이방인과 유대인이 얼마나 “멀리 있는” 민족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멀리 있던 두 민족을 가깝게 만드셨다. 어떤 평화정책으로도 하나로 연합될 수 없는 증오와 적대감의 민족을 하나로 만드셨다. 복음의 능력은 바로 그 화평에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증거되는 곳마다 화평의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화평이시기 때문이다. 국가와 이념, 갈등을 이겨내는 진정한 평화가 십자가의 피의 능력이다.


● 구원받은 후(2:14-18)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 그 피로 이루신 일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갈라놓았던 ‘중간에 막힌 담,’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 ‘원수된 것’을 “헐어 버리시고,” “폐하시고,” “소멸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드셔서, 새로운 제3의 인류 곧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창조하셨다.





2:14 둘로 하나를 만드사
2:15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2:16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교회는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새롭게 창조하신 새로운 인류다. 초대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은 “은과 납을 녹여 금을 만들어내듯이 이방인과 유대인을 새로운 민족으로 만드셨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언약을 기준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나누었던 인류의 종족 구분은 이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나사렛 예수 안에 있는 자와 나사렛 예수 바깥에 있는 자로 나뉘어졌다.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8절). F.F 브루스는 “한 새 사람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가리킨다고 정의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한 새사람은 기독교 공동체다. 하나님의 새로운 인류, 제3의 종족으로 아버지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백성들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사도행전 2장 오순절 성령강림절 신약교회가 탄생하면서 유대인과 이방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민족 곧 교회공동체로 만들어졌다. 아브라함은 혈통적 언약의 백성과 믿음의 언약 백성 모두의 조상이 되었다.


확장되는 하나님의 나라(2:18-22)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나라의 시민, 하나님의 성전으로 주를 섬기는 사람들이다. 지금도 이 땅엔 하나님의 성전이 계속 지어져가고 있다. 예루살렘 성전의 기초는 12m의 크고 단단한 기초석 위에 세워졌다. 새로운 종족인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기초석이 되셔서 오늘도 계속 건물이 완공을 향해 건축되고 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새 성전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만나시는 보이지 않는 장소다. 전 세계에서 구원받은 인간공동체가 하나님의 새 성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나라의 회복을 위해 우리는 두가지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먼저 복음이 땅끝까지 증거되도록 복음전도의 사명에 전념해야 한다. 릴리전(Religion) 뉴스는 유럽의 집시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전도의 열풍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1100만-3800만으로 추정되는 유럽 전체 집시 가운데 50만-100만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프랑스 내에 210개의 집시교회가 세워졌으며, 1300명이 목회자로 헌신하여 훈련을 받고 있다고 했다. 회심한 집시들은 복음으로 삶이 변화되어 싸움, 음주, 절도를 찾아볼 수 없다고 전한다. 스페인에도 500여개의 집시교회가 있으며 2천여명이 목회자가 사역하고 있다. 유럽의 집시교회들이 하나 하나의 벽돌이 되어 하나님의 새 성전을 짓고 있다.


둘째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해야 한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완전한 그리스도의 몸의 공동체를 이루는 날이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이다. 지금은 이방인의 때라고 불린다. 마지막 때에 유대인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회복의 날이 있을 것이다. 그 날들을 어떤 신학자들은 7년 대환란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7년 대환란의 목적은 이스라엘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구원의 날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중요한 섭리의 과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라보고, 그 날에 완성될 교회의 영광과 위대한 성취를 바라보며, 이방인과 유대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민족으로 이루어 하나님나라를 상속할 날을 기다리며 오직 그리스도만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조각품 중에 예수상이 많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예수상이 월드센의 작품이다. 월드센이 예수상으로 유명해지자 프랑스 르부르 박물관에서 그에게 ‘비너스상’ 조각을 의뢰했다. 조각가에겐 최고의 영광이었으나 월드센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내가 이 손으로 주님의 성상을 조각했는데, 주님께 드린 손으로 어떻게 신상을 조각할 수 있겠는가?” 그가 신상을 조각할 경우 자신에겐 명예로운 일이며, 영원히 기념될 일이었으나, 자신의 유익보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손상이 더 크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진정한 하나님나라를 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비밀, 복음을 깨달은 사람만이 주님을 위해 살 수 있다.

[조경호] 회복되는 하나님나라 치유되는 자아: 에베소서의 비밀 : 구원의 자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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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되는 하나님나라 치유되는 자아: 에베소서의 비밀
구원의 자아상



2002년도 코스타집회의 주제였던 “하나님의 나라”와 “자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이코스타가 기획한 연재물 “회복되는 하나님 나라, 치유되는 자아: 에베소서의 비밀”. 이번호는 그 두번째로 “구원의 자아상”이다. 필자인 조경호목사는 2002년 코스타집회의 새벽설교를 통해 “하나님나라”와 “자아상”이란 주제를 균형있고 심도있게 다루어준 바있다.


닐 앤더슨 목사가 쓴 책 ‘내가 누구인지 이제 알았습니다’에는 한 부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술주정뱅이 남편으로 인해 절망하고 괴로워하던 부인은 마지막 결심을 하게 된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그녀는 자신의 비참한 삶에 대해 좌절하고 있었다. 목사는 그 부인에게 “나는 누구인가” 구원의 말씀이 적힌 종이를 주며 큰 소리로 읽으라고 권면했다. 절반쯤 읽다가 부인이 울음을 터뜨렸다. “저는 제가 그렇게 영광스런 존재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제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를 깨달을 때,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에 대한 거룩한 자각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아낼 때 우리의 삶은 변화될 수 있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아상을 ‘구원의 변화’로 설명하고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되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과거의 자아상과 현재의 자아상을 깊이있게 설명한다. 구원이 가져온 자아의 변화 곧 ‘이전 것’과 ‘새것’의 차이를 이해할 때 우리는 하나님나라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자신을 거룩한 제단에 드릴 수 있다.


자아상의 모형(엡1:20-23)



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르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1:20-23)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를 모형으로 재창조되었다. 성령의 권능이 먼저 그리스도를 ‘알케고스’ 구원의 창시자로 만드셨다. 구세주가 되신 단계를 5과정으로 묘사한다. 죽음과 부활에서 최종적으로 구원의 완성과 절정이 교회의 머리에서 실현된다.


● 성령하나님의 사역….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의 완성(1:20-23)










그리스도 안에서 진행된 구원의 전체 계획 1:20-23









죽음

부활

승천

만물의 주

교회의 머리

신자 안에서 진행되는 구원의 전체 계획 2:1-22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과 실현은 교회였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1:23).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이 땅에 세우고자 하셨던 하나님나라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몸의 유기적 공동체이셨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권능으로 그리스도께서 구세주가 되신 5단계를 따라 그리스도인들을 재창조하셨다. 요즘 세계적으로 윤리문제가 되고 있는 ‘복제인간’의 시초는 하나님나라였다. 에베소서 2장을 통해 그리스도의 5단계가 어떻게 재창조의 과정이 되는가를 살펴보자. 2장의 핵심단어는 “만드시고”(10,14절)이다. ‘포이에마’ 하나님의 위대한 걸작품, 손으로 만든 예술품이란 뜻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복제한 위대한 창조물로서의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하나님께서는 재창조하신 과정을 세밀하게 말씀으로 보이셨다.


구원의 제 1변화(엡2:1-10)



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2:1-10)






구원받기 전….구원받은 후

● 자아의 본질: 구원받기 전 자아의 본질을 바울은 3가지로 정의한다.


(1) 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2:2 그 때에 너희가 …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2:3 전에는 우리도 다 …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죄-죽음-불순종-진노’는 인간 타락의 원인, 과정, 결과를 보여준다. 죄의 시작은 불순종이었으며, 죄의 결과는 하나님의 진노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믿기 전 우리는 모두 ‘3중의 타락의 본질성’으로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 자아의 본성: 죽음의 세계는 3중의 노예적 세계다. 인간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시체가 되기 전까지 탈출할 수 없다. 로버트 벨라는 현대인의 삶을 정의하기를 “개인주의의 전성시대, 자기 왕국에 영광 돌리는 시대, 얻는 것에 매달리는 시대”라고 표현했다. 죄인의 왕국에서 사람들은 어떤 죄의 본성으로 살게 되는지 ‘죄’가 만들고 지배하는 세상 안으로 들어가 보자.


(1) 첫번째 본성: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엡2:2)


세상 유행을 따라 사는 삶이 죄의 본성이다. 현대사회는 유행을 따라 사는 것이 유행이 된 시대라고 정의했다. 죄는 거짓말, 술, 사기 등 기초 윤리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도덕성을 무너뜨리는 더 깊은 원인은 ‘유행 따라 사는 삶’의 구조에 숨겨있다.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은 한국 사회의 병리현상을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젊은 여성들의 미국원정출산 러시. 한국 성인 10명중 1명이 성형하는 성형중독 증상. ‘뇌물’은 정치 뿐 아니라 마케팅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한국 연예계비리. 아시아 중에서 가장 섹스비율이 높은 나라로 한국을 지목하고, 한국의 인터걸의 실태를 보도함으로써, 한국의 이미지를 크게 손상시키고 있다. 한국 사회는 수많은 유행들이 사람들의 삶을 무차별적으로 정복하고 인간성과 삶의 가치관을 잔인하게 지배하고 있다. 지금 자신을 한번 둘러 보라. 세상 유행의 어떤 흔적들이 남아 있는지를 하나씩 점검해 보면 유쾌한 기분이 사라질 것이다.


(2) 두번째 본성: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2:2)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사단의 세계는 ‘외모, 학벌, 계급’으로 지배되는 세상을 의미한다. 인간을 지배하는 사단의 거대한 조직은 외모주의, 학벌주의의 세계로 외모의 가치관을 따라 사는 것이 죄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약2:1).


한국의 제일기획에서 2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여성의 70%가 “외모가 인생을 좌우한다”고 대답해 충격을 주었다. 여성들은 외모에 신경 쓰고 외출하면, 사람들이 친절하고 정중하게 대해준다고 대답했다. 같은 또래의 여자를 만나면 먼저 외모부터 비교하고, 피부나 몸매를 보면 그 여자의 생활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외모 가꾸기를 위해 하루에 53분을 투자하고, 거울은 8.3회 본다. 여자들은 흰 피부, 잘 뻗은 종아리, 늘씬한 팔다리, 탄력있는 몸매, 작고 예쁜 두상을 갖고 싶다고 대답했다. 학벌에 대한 콤플렉스가 사회 전반에 안개처럼 깔려있다.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8월 한달 동안 두번에 걸쳐 총리임명이 부결되었다. 학벌 위조와 부동산투기, 재산증식 의혹, 자녀들에 대한 위법이 동일하게 청문회 내내 긴 공방전을 가져왔다.


우리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 아직도 죄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따라 산다면 그의 구원은 거짓이다. 허상의 종교를 추구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믿고 아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 모두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랑의 대상임을 알기 때문이다.


(3) 세번째 본성: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3)


베이컨은 “인간에겐 세 가지 유혹이 있다. 거친 육체의 욕심. 저 잘났다고 거들먹거리는 교만. 졸렬하고 불손한 이기심. 이 세 가지로 인해 모든 인간의 불행이 과거에서 미래까지 인류의 무거운 짐이 되었다. 이 세상에서 욕심과 교만과 이기심이 없었다면 완전한 질서가 인간을 지배했을 것이다.” 육체와 마음의 욕심은 악의 본래의 얼굴이다. 세상은 거대한 섹스시장이 되어가고, 섹스가 인간을 지배하는 인류의 신이 되었다.


인류학자 언윈은 “인류가 걸어온 88개 문명의 흥망사의 공통점은, 어느 문명이나 성도덕이 건전할 때 문명이 일어나고, 성도덕이 문란할 때 문명이 쇠망했다”고 역사를 해석했다. 미국아동의 10%가 13세에 섹스를 경험하고, 혼외정사를 부도덕하지 않다고 여기는 성의식의 세상에서 문명의 존폐위기가 경계선에 서있다. 구약시대의 모든 우상숭배는 거대한 섹스파티가 동반된 타락한 성의 역사였으며, 우상숭배는 오늘도 바뀌지 않았다.


● 구원의 자아상: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엡2:4-5)


하나님의 구원은 완전하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을 때 과거의 세계와 완전한 단절이 이루어졌다. 옛 세상에서 새로운 세계로 옮겨졌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1:13)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전혀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재창조하셨다. 과거의 삶의 구조와 가치관에서 해방되고, 구원받은 새로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의 구원에 나타난 기본적인 사실들은 아래와 같다.















(1) 구원의 세요소 긍휼. 사랑. 은혜
(2) 구원의 세단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미국 남침레교에서 발행하는 ‘BP뉴스’는 전 세계에서 영화 “예수”를 관람한 사람이 지난 7월1일 현재 51억6483만6643명이라고 발표했다. 전 세계에 743개 언어로 번역되어, 236개 나라에서 상영되었으며, 2초에 한사람씩 예수 영화를 통해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 1978년 600만 달러의 제작비로 만든 이 영화는 개봉 전부터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구원했다. 워너브러더스 제작자 중 한 중역도 개봉전략회의에서 영화를 보고 중생하는 체험을 하기도 했다.


구원은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는 삼중의 자아실현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신분은 영원하며, 구원의 자아상은 새로운 세계를 우리에게 펼쳐 보이고 있다. 구원은 얼마나 놀라운 경험인가?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는 상상을 초월한다. 다음달에 계속 에베소서 2장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디자인하신 구원의 자아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지금까지 연재된 글들

[장평훈]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능력

eKOSTA 성경강해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능력
빌립보서 1:12-26



편집 주
이번 호부터 3회에 걸쳐 빌립보서를 가지고 이코스타의 독자 여러분과 함께 큰 은혜를 나누었으면 한다. 성경 본문을 가지고 특강을 한다고 하면 딱딱한 음식을 대하는 듯한 느낌을 갖기가 쉬울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조금만 집중해서 말씀을 대한다면 그만큼 풍성한 것을 맛볼 수 있고 우리 자신이 변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성경강해는 지난 KOSTA/USA-2001의 주제 성경강해를 재 구성한 것이다.


빌립보서 1장 읽기


여는 말


대전에 가면 서대전 사거리라는 곳에 새서울 내과라는 병원이 있다. 그곳에는 주로 대덕 연구 단지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고는 한다. 특별히 연구 단지로 새로 부임한 사람들이 많고 그 중에는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상당수로, 찾아오는 사람마다 증세가 거의 똑같다고 한다. 속이 더부룩하면서 소화가 안되고, 약간의 통증이 있는 그런 증세인데, 상황이 그러하다보니 처방해 주는 알약이 누구에게나 같다. 빨간색 한 알, 초록색 두 알, 흰색 세 알. 이 병의 이름은 신경성 위염, 흔히 속병이라고 하는 것으로서, 주로 심적인 압박(pressure)을 많이 받고 신경을 많이 쓸 때 발생하는 병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심리적인 압박감은 왜 느끼게 될까? ‘환경적인 어려움’, ‘인간 관계의 어려움’, 그리고 ‘장래에 대한 불안감’, 대충 이렇게 세 가지 정도로 그 원인을 진단할 수 있겠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지 않은가? 이러한 어려움은 지금 이 시간 바로 여러분들이 겪고 있는 아픔이 아닌가?


먼저 환경적인 어려움을 보자. 환율도, 학비도, 아파트세(rent)도 모두 오르는데 딱 하나, 생활비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결혼한 자매들을 보면, 아이들은 지겹게 달려드는데 남편은 그야말로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연구실에 박혀 있는 학생들은 또 어떤가. 해도 해도 안 나오는 것이 연구(research) 결과요, 그나마 열심히 해서 학술 잡지(journal)에 보낸 논문은 실격(reject)이 되어 돌아 오곤 한다. 인간 관계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교회 밖에서나 교회 안에서나 자꾸 천적(天敵)들만 늘어가는 것 같다. 장래에 대한 불안도 만만치 않다. 이렇게 고생해 봐야 졸업하고 나서 과연 백수나 면할 수 있을까? 미혼 남학생들은 이렇게 결혼이 늦어지다 연로해져서 결국 장가도 못 가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까지. 그래도 교회 안에서는 성경 공부다 기도 모임이다 찬양 모임이다 하여 열심을 내 보기도 하지만, 교회 밖에서는 안 믿는 사람과 똑같이 걱정하다 비참해지고, 그러다 성질까지 내고 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의 믿음과 교회 밖의 행동은 과연 무관한 것인가? 어떻게 하면 어려운 환경 속에서, 기쁨과 감격을 느끼며 역동적인 믿음을 가질 수 있는가?


이제 성경의 한 인물을 클로즈업(close-up) 해 보자. 그도 우리와 같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정도는 훨씬 심했던 것 같다. 그는 바로, 빌립보서에 나타난 사도 바울이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빌립보서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곧 서신서이다. 빌립보 교회는 유럽에서 처음 세워진 교회로 사도행전 16장에 그 탄생이 잘 나타나 있다 – 바울이 환상을 본다. 마케도니아 사람이 나타나서 도와 달라고 말하는 환상을 보고 바울은 빌립보로 간다. 이후, 염색업을 하는 루디아와 그 가족이 주님께 돌아오고 지하 감옥을 지키던 간수장과 그 가족들도 주님께 돌아온다. 그렇게 해서 탄생된 것이 빌립보 교회인 것이다. 출발부터 그래서였는지,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특별히 사랑하고 아꼈던 교회처럼 보인다. 글에도 ‘표정’이 있다는 사실을 독자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흔히 어조(tone)라고 말한다. 나는 빌립보서를 읽을 때마다, 마치 친정 어머니가 출가해서 반듯하게 살고 있는 딸을 사랑스러워하고 또 그리워하는 표정을 분명히 볼 수 있다. 이제는 친구 같아진 딸을 대견스워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1장 3-11절).


마찬가지로 빌립보 교회도 바울을 아낌 없이, 꾸준히 돕던 교회였다. 이번에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고생하고 있는 것을 보고, 에바브로디도라는 신실한 형제 편으로 선교 헌금을 보냈을 뿐 아니라 노약한 바울을 그에게 직접 시중들게 하였다. 아마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를 에바브로디도로부터 들어 잘 알게 된 것 같다. 나중에,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로 돌려보내면서 함께 편지를 보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빌립보서이다. 그 편지에다, 걱정하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자기는 괜찮다고 말하는 안부를 전하고, 보내 준 도움에 대한 감사를 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참에, 그 교회의 문제점을 두고 호소하고 촉구하는 권면의 말까지 전하려 하는 것이다.


빌립보서 1장의 본문은 바울이 자기의 안부를 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성도들에게 무언가를 촉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일어난 일들을 담담하게 전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내면의 비밀이 적나라하게 노출되고 있으며 사물을 보는 그의 시각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평범한 이야기들이 직접적으로 권면하는 것 못지 않은 호소력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다.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세 가지 어려움을 바울도 똑같이 당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환경:
형제 자매 여러분, 내가 당하는 일이 도리어 복음을 전파하는 데 도움이 된 사실을 여러 분이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곧 내가 감옥에 갇힌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 이, 온 친위대와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므로, 주님 안에 있는 형제 자매 가운데 서 많은 사람이 내가 갇혀 있음으로 말미암아 더 확신을 얻어 말씀을 겁없이 더욱 담대하 게 전하게 되었습니다. (1장 12절-14절)




  • 인간 관계:
그리스도를 전파하면서도 어떤 사람들은 시기하거나 다투는 마음으로 하고, 어떤 사 람들은 좋은 뜻으로 합니다. 좋은 뜻으로 하는 사람들은 내가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 세우 심을 받은 줄을 알고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지만, 시기하거나 다투는 마음으로 하는 사람들은 나의 감옥 생활에 괴로움을 더하게 하려는 생각을 품고 다투는 마음으로 순수하 지 못한 동기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참으로 하든지 거짓으로 하든지, 무슨 방법으로 하든지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있으니, 나는 그 일로 기뻐합니다. 그 렇습니다. 나는 앞으로도 기뻐할 것입니다. (15절-18절)




  • 삶과 죽음:
나는 여러분이 기도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도와 주셔서 내가 풀려나리라 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간절히 기대하며 바라는 것은 내가 어떤 일에나 부끄러워 하지 않고 전과 같이 지금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나의 몸으로 말미암아 그리 스도께서 존귀하게 되시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 합니다. 그러나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 보람된 일이라면 내가 어느 쪽을 택해 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 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훨씬 더 나으나, 내가 육신으로 남아 있는 것 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할 것입니다. 이렇게 확신하므로, 나는 여러분의 발전과 믿음의 기쁨을 더하게 하기 위하여, 여러분 모두의 곁에 머물러 있어야 할 것으로 압니다. 그것은 내가 다시 여러분에게로 감으로써 여러분이 나를 대면하는 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 러분의 자랑거리가 많아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19절-26절).

내가 바라기는, 이러한 어려움들을 바울은 어떤 태도로 극복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능력의 비결이 무엇인지를 이 본문을 통해서 함께 보고, 그것을 우리 것으로 하는 은혜를 누렸으면 한다.


환경의 어려움


먼저 환경의 어려움에 대한 바울의 자세를 보자. 13절에 ‘나의 감옥에 갇힌 것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바울이 감방에 있다는 말이다. 감방이란 어떤 환경인가? 한 번 가정을 해 보자. 직장에서 정리해고 당하고 퇴직금으로 사업을 하다가 실패해서 빚 잔치를 하게 된다. 집 팔고, 사글세를 들게 되고, 하는 일마다 안 되어서 전락을 거듭하던 끝에, 맨 마지막에 다다른 곳이 바로 달동네의 단칸방이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밑바닥 인생이 바로 감옥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정죄되고 격리된 사람이 모인 곳이기 때문이다. 호적 등본에 빨간 줄 가고 나면, 자기를 포기하게 되고, 속된 말로 막 가게 된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아귀다툼하는 곳이 바로 감방이다. 그래서 감방에 한 번 있어 봤던 사람들은 다시는 안 가려고 기를 쓴다고 한다.


사도 바울은 어떤가? 그냥 투옥만 된 것이 아니라, 24시간 4교대로 붙여지는 감시병과 함께 사슬에 묶인 채로 있어야 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바울은 어려움을 호소하거나, 신세 타령을 하지 않고 있다. 그저 ‘내가 당하는 일’, ‘감옥에 갇힌 일’ 정도로 간단히 말하고 넘어간다. 그는 오히려 다른 일로 신이 나 있고 흥분되어 있었던 것이다. 무엇에 그토록 흥분했던 것일까? 그는 12절에서 자기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이 전파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며 기뻐한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도움이 되었는지는 이어지는 13절(믿지 않는 사람에게 준 영향)과 14절(믿는 사람에게 준 영향)에 나타난다.


13절을 좀더 자세히 보면, 바울은 ‘자기가 감옥에 갇힌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을 저들이 알게 되었다’고 말하며, 믿지 않는 ‘친위대와 그 밖의 사람들’에게 자기가 끼친 영향을 이야기한다. 감시병들과 24시간 함께 묶여 있다 보니 바울의 생활이 완전히 노출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감시병들은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인격을 가진 사람이 어쩌다가 이런 곳에 오게 되었을까? 그리고는 바로 나사렛 예수를 전하다가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됐을 것이고, 그러면서 ‘도대체 예수가 누구 길래, 이런 사람이 그 인생을 송두리째 던졌을까?’ 궁금해졌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그분에 대해서 알고들 싶어하게 되자, 그것을 보고 흥분하고 있는 바울의 모습이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믿는 사람들에게 준 영향’이 어떤 것인지는 14절에서 볼 수 있다. 바울이 갇힌 것 때문에 믿는 자들이 더 담대히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우리도 주기철, 손양원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면, 피가 끓지 않는가? 우리도 몸을 아끼지 않고 복음을 전하겠다는 각오를 하게 되지 않는가? 바로 이런 영향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믿는 사람들의 변화를 보고 흥분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사랑하는 분이 전해진다는 사실에 오히려 신이 나 있는 모습을 본다. 거기에 비하면 현재의 고통은 아예 말할 가치 조차 없다는 듯, ‘내가 당하는 일’, ‘감옥에 갇힌 일’로 간단히 표현하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환경의 어려움을 완전히 극복하는 통쾌한 KO승을 거두고 있다.


환경의 어려움 앞에서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내가 유학 생활을 하던 시절, 경제적으로 유난히 힘든 상황이어서 늘 돈이 없다보니 은행 잔고는 항상 한 자리 수와 마이너스(minus) 사이에서 왔다 갔다 했다. 당시 12년 된 스테이션 왜건(Station wagon)을 몰았는데, 차 천장의 비닐이 벗겨지면서 드러난 솜 같은 단열재가 눈송이 같이 내리던 차였다.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려면, 창피하다고 학교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내려 달라며 사정하곤 했다. 한 번은 한국에서 온 손님에게 라이드(ride)를 드릴 기회가 있었는데, 약간은 창피스럽기도 하고 또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그날 따라, 뒷자리에 둔 (야외요리용) 숯(charcoal)이 흘러 나와서 볼썽 사납게 바닥에 널려 있는 게 아닌가. 몇 달 뒤에 한국에서부터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물론 농담도 섞여 있었지만) 우리가 몰고 다니는 차가 석탄차라는…. 학교 생활도 참 힘들었다. 숙제 때문에 잠을 설치기 일쑤였고, (박사자격) 종합시험(General Exam)도 어려웠고, 연구에 대한 부담(pressure)도 대단했다. 왜 심적인 부담을 많이 받으면 체질이 산성이 되어 딸을 많이 낳는다는 학설이 있지 않은가. 그 당시 한국인 부부들이 19명의 자녀를 출산했는데 그 중에 딸이 17명, 아들이 2명으로, 그 학설이 잘 맞는다고 모두가 ‘호!’, ‘하!’ 하고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이런 어려운 시기를 그리스도 없이 지날 때, 사람이 망가지는 것을 나는 똑똑히 보았다. 처음 보스톤(Boston)에 도착해서 먼저 왔던 선배에게 인사를 하러 기숙사로 찾아 갔는데, 나는 사람이 바뀐 줄로만 알았다. 선배는 살벌한 표정에 흉칙한 얼굴로 변해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로는, 주 중에 스트레스(stress)를 엄청 받고 나면 금요일 저녁 차이나 타운(China Town)으로 달려가 쿵푸(Kung-Fu) 영화 보고, 거나하게 취해서 있는 대로 지도 교수 욕하고, 기숙사에 돌아와서는 밤새 카드로 지새우곤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주일에 연구실로 나가고…. 이런 생활을 반복하면서 사람이 완전히 황폐해져 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런 시절을 예수님과 함께 보낸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 MIT 학생들이 중심이 된 Gate Bible Study(GBS)라는 모임이 있다. 금요일 저녁, 믿지 않는 학생들이 차이나 타운으로 달려갈 때, 우리들은 GBS에서 함께 모여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었다. 그리고 GBS를 통해 주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고자 노력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면서 얼굴들이 모두 그렇게 환할 수가 없었다. 남자들은 신수가 훤해지고, 아줌마들은 (원래 약간 젊기도 했었지만) 피부가 고와지고 얼굴이 달덩이같이 환해지는 것이었다.


모두에게나 다 똑같은 어려움이 있다. 그 어려움을 누가 어떻게 해결하느냐의 차이인 것이다. 여러분, 지금 처한 형편이 정말 견디기 힘들다고 느껴질 때, 그때,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셨던 예수님의 사랑을 묵상해 보자.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은 열정이 나를 사로잡도록 하자. 그러면, 환경이 더 이상 나를 비참하게 못하리라는 것을 나는 확신한다.


인간 관계의 어려움


인간 관계에서 겪는 어려움은 때로는 그 어떤 어려움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 같다. 아니, 적어도 바울에게는 그랬던 것처럼 보인다. 본문을 보도록 하자.



“그리스도를 전파하면서도 어떤 사람들은 시기하거나 다투는 마음으로 하고, 어떤 사람들은 좋은 뜻으로 합니다. 좋은 뜻으로 하는 사람들은 내가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 세우심을 받은 줄을 알고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지만, 시기하거나 다투는 마음으로 하는 사람들은 나의 감옥 생활에 괴로움을 더하게 하려는 생각을 품고 다투는 마음으로 순수하지 못한 동기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참으로 하든지 거짓으로 하든지, 무슨 방법으로 하든지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있으니, 나는 그 일로 기뻐합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앞으로도 기뻐할 것입니다.”(빌1:15-18)


본문의 뉘앙스를 보면, 다른 사람들로 인한 어려움이 투옥의 어려움 보다 더 컸던 것 같다. 감옥의 어려움은 간단히 언급하는 정도로 넘어간 것에 비해 인간 관계의 어려움은 15절과 17절에 걸쳐 두 번씩 이야기하고 있다. 하물며 ‘시기’와 ‘다투는 마음'(15절)을 언급하며 갈등의 동기까지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나오는 사람들은 아마도 다투는 마음(경쟁심)과 시기심으로, 순전치 못한 마음으로(17절) 전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더 고약한 것은 17절에 ‘나의 감옥 생활에 괴로움을 더하게 하려는 생각을 품고’ 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그리스도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바울에게 고의적으로 고통을 가하려고 했다는 말이다. “바울은 별 것 아니다”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말을 흘리고, 자기들의 추종자를 만들어서 그런 평판을 퍼뜨리도록 한 것이 아닌가 싶다. 마치 뜨거운 것에 데어 진물이 흐르는 부위에다 고춧가루를 뿌리는 것과 같은 잔인한 짓이지 않은가. 이런 사람들은 겉으로는 열심이 있어 보이고 영적으로 보일지는 모르나, 실제로는 정말 야비하고 악질적이며 가장 비성서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많은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상처나 시험받는 부분은 밖에서 오는 박해나 불이익보다는 믿는 사람들의 악의적 수근거림인 경우가 많다. 기도 제목 낸다고 하면서, 심지어는 설교를 통해서 다른 사람의 아픈 부분을 공공연히 건드리는 예가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가.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탓하기 전에 바로 내 안에 그런 성향을 너무 강하게 가지고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자. 높아지고 싶어하고 남 잘되는 것을 시기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는 인간의 DNA 안에 이런 본성이 자리잡고 있다고 믿는다. 이 세상 어느 문화에 가도 우리는 그런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문화적인 정서는 이런 경향이 좀 더 심한 것 같다. 유난히 비교 의식이 강하고, 오기가 많은 한국 문화를 흔히들 ‘게’ 문화라고 한다. 장독 안에 게들을 넣어 놓으면, 혼자 힘으로 너끈히 기어 나올 수 있는데도 나오지를 못 한다. 나오려고 하면, 다른 게들이 밑으로 끌어 내리기 때문이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옛날 속담처럼, 남 잘하는 것은 될 수 있으면 인정 안 하고, 조금만 잘못하면 ‘거 보라고, 그럴 줄 알았다’고 고소해한다.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렇게 상처를 받고 나면, 상대방을 야속하게 생각하고, 원망하고, 미워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바울의 반응은 어떠한가? “그렇지만 어떠냐?”고, “그게 무슨 문제냐?”(What does it matter?)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나의 쓰라림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말 중요한 것은(The important thing is) 저들이 시기심으로라도 전도해서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증거되는 것이라”며 기뻐하고 있다.’그리스도께서 전파되고 증거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로 그냥 끝내지 않고, “기뻐하고 또한 기뻐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지적으로 뿐만 아니라, 의지적·감정적으로 그것을 기뻐한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참으로 힘든 문제인 인간 관계의 문제를 극복하는 순간이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주위 사람들을 진심으로 섬기는 자매가 하나 있다. 그런데 가끔 견디기 힘든 모욕을 당하거나, 왜곡된 소문(rumor)에 시달리고는 한다. 주로 주위의 시기심과 경쟁 의식의 결과이다. 그런데도 며칠만 지나면 다시 밝은 얼굴로, 그 아픔을 줬던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을 보게 된다. 속이 없는 여자같이 보인다. 그 비결을 물어 봤더니, 자기는 견디기 힘들 때는 혼자 방에 들어 앉아 몇 시간이고 생각을 한다는 대답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셨던 구속의 사랑이 얼마나 컸던가를 되씹고 되씹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감격이 가슴을 가득 채워서, 이런 고백이 나온단다. “나의 자존심과 긍지, 정말 중요해. 그러나 더 중요한 것 있어. 주님이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주셨어. 주님이 그 사람을 사랑하라고 하셨으니까 그렇게 해야지.” 바로 이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 관계의 문제는 다음 9월호에서 좀 더 깊이 살펴 보도록 하겠다.


죽음의 문제


앞에서 말한 환경의 문제나 인간 관계의 어려움보다 좀 더 근원적인 문제가 아마도 죽음의 문제일 것이다. 빌립보서 1장 19절-26절에서 그 문제가 다루어지기 시작한다.



“나는 여러분이 기도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도와 주셔서 내가 풀려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간절히 기대하며 바라는 것은 내가 어떤 일에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전과 같이 지금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나의 몸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시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그러나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 보람된 일이라면 내가 어느 쪽을 택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훨씬 더 나으나, 내가 육신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할 것입니다. 이렇게 확신하므로, 나는 여러분의 발전과 믿음의 기쁨을 더하게 하기 위하여, 여러분 모두의 곁에 머물러 있어야 할 것으로 압니다. 그것은 내가 다시 여러분에게로 감으로써 여러분이 나를 대면하는 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자랑거리가 많아지게 하려는 것입니다.”(빌1:19-26)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기도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갇힌 것에서 결국 풀려 나는데(19절), 그의 간절한 기대와 바램은 “내 몸을 통해서, 살아있을 때도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드러나고 죽음을 통해서도 그리스도가 높아지는 것”이라고 말한다(20절). 바울은 여기서부터 삶과 죽음의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해서 26절까지 그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이 부분에서 그의 평소 속 마음이 잘 드러난다. 그가 죽음에 대해서 가졌던 생각이나, 그가 살았던 이유들이 선명하고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사도 바울은 죽음이 멀지 않았음을 이미 예감했는지도 모르겠다.


죽음이 아직도 나와는 멀다고 생각되는가? 실감이 나지를 않는가? 그러나 죽음은 정말 멀지 않았다. 초등학교의 1년과 요즘의 1년은 다르다. 점점 가속이 붙어서는, 사십대 말의 1년은 정말 바람이 지나가듯 간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물론 육십대의 어른들은 그냥 웃으시곤 한다. 얼마 전 정년 퇴임한 교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요즈음은 죽음의 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보이고 그 벽을 향해서, 마치 열차가 봉우리에서 내리막길을 내려가듯 무섭게 질주하는 것 같다고. 전에는 봉우리 반대편에 있어서 그것이 안 보였던 것 뿐이라고.


혹시 자다가 가위에 눌린 경험이 있는가? 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면 영원히 잠들어 버릴 것 같아서 기를 쓰고 깨려고 하는 것. 바로 우리가 무의식중에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그 두려움이 당장 우리 삶에 엄청난 영향을 주게 된다. TV의 건강프로가 점점 늘어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사람들이 실직을 두려워하는 궁극적인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우리가 가진 이런 두려움을 히브리서 2장 15절이 잘 말해 주고 있다 –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어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라”(히2:15). 한 마디로 죽지 못해 사는 삶을, 죽기 싫어서 질질 끌려 사는 삶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죽음에 대해 확실한 입장을 정리하지 않고는 끌려서 살아가는 삶을 결코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삶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이삼십대에 이 문제의 해답을 얻은 사람은 대단히 현명한 사람이요, 더 나아가서 이 해답에 부합되게 사는 사람이야말로 축복받은 사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가? –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21절). 말이 좀 어렵다. 그러나 이 구절을 문맥 가운데서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죽는 것이 어떻게 유익이 될 수 있는가? –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훨씬 더 나으나”(23절). 바로 예수님과 함께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훨씬 유익하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에게 죽음은 이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기다림’의 대상이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망의 공포가 간단히 해결되고 있는 것을 본다. 인간의 가장 큰 문제인 죽음의 문제가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Powerful’하게 극복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분을 만나고 싶어서 죽음이 기다려진다는 말이다.


이제 바울에게 죽음에 대한 입장이 분명한 만큼, 그의 삶의 이유도 분명해졌다 – “내가 육신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할 것입니다. 이렇게 확신하므로, 나는 여러분의 발전과 믿음의 기쁨을 더하게 하기 위하여, 여러분 모두의 곁에 머물러 있어야 할 것으로 압니다”(1:24-25). 바울은 자기가 사는 것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필요하기 때문에(24절), 그들이 역동적인 신앙생활을 하도록 돕기 위해서 산다고(25-26절) 말한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져서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사람이 너무 보고 싶어서 빨리 귀국하고 싶지만, 그 사람이 바라는 것은 여러분이 충분히 공부를 해서 학위를 마치고 돌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해 보자. 바울이 사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사는 것이 힘들어서 죽고 싶지만, 막상 죽자니 겁이 나서 할 수 없이 사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분 때문에 죽는 것이 훨씬 기다려지지만, 그분이 맏긴 소명 때문에 살아간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자세로 하루를 살 때 그 삶이 얼마나 달라지겠는가?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정말 못할 일이 없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 맡기신 일을 마치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앞의 두 가지 어려운 문제들을 이기게 한 능력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감옥의 문제였을 때는 “지금 힘들지만, 곧 주님을 볼 거야. 그때까지 그분을 열심히 전하자” 라며, 그것이 인간 관계의 문제였을 때는 “힘들지만, 이까짓 것 뭐 중요해. 그분 맡기신 사명을 마치고 주님을 만나 뵙자” 라며 그는 어려움을 기쁨으로 이겨내었다.


그리스도와의 사랑. 이것이야말로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완벽한 해답인 것이다.


맺는 말


이번 호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안부의 글을 통해 그의 삶의 모습(lifestyle)과 비결을 읽을 수 있었다. 그가 처해 있던 어려움은 정말 힘든 것들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환경의 문제를 능히 극복하게 만들었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인간 관계의 아픔을 전혀 문제도 안 되는 것으로 이겨내게 만들었다.


여러분들 가운데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또 교회는 나가지만 예수님을 오늘 본문과 같은 수준에서 만난 적이 없는 분도 있을 것이다. 기독교는 교리 체계가 아니며, 교회 생활이 곧 기독교도 아니다. 기독교란 바로 한 분과의 사랑의 관계이며, 그분의 사랑에 감동되어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 생활인 것이다. 주저하지 말고 이 분을 만나서 사랑의 관계가 얼마나 큰 감격인지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믿는다고 하는 분들도 함께 다짐했으면 한다.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먼저 죽음의 문제를 다시 한번 정리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삶의 새로운 이유와 동기를 자신의 것으로 확실히 하기를 바란다. 그때 우리는 가정과 교회와 학교 생활에서 환경의 문제와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능히 이길 것을 확신한다. 세상이 감당하기 어려운 확신과 능력의 삶이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번 호에서 우리는 복음의 능력을 다시 확인하였다(1장). 앞으로 9월호를 통해서는 복음 안에서 서로 섬기고 하나되는 것을 우리가 회복했으면 한다(2장). 10월호에서는 그런 맥락에서 신앙 인격의 성장에 대해서 방향성을 분명히 해야할 것이다(3장). 그럴 때 우리는 다시 이 사회를 향해서 소금과 빛의 직분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