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희]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삶

2007/6

‘구원이란 무엇인가’, ‘복음이란 무엇인가’, 김세윤, 두란노서원

신약성경은 크게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사도들의 예수님의 삶, 죽음, 부활에 대한 해석으로 그 내용을 나눌 수 있다. 사복음서는 나사렛 예수에 대한 전기로서 예수님의 설교의 주된 내용인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는 반면 서신서들은 예수님과 직접 교류했던 사도들이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고 그것을 해석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두 가지 큰 내용을 설명함으로써 저자는 신약성경의 내용을 충실하게 설명하고 있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이에 근거하여 기독교 신앙으로 독자들을 인도하고 있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자매서로서 두 책은 각각 신앙인들에게 기독교 신앙의 체계를 잡도록 해주고 (복음이란 무엇인가) 비신앙인들에게 기독교 신앙으로 초대하고 있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기독교 신앙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안내서가 될 것이며 신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자 하는 코스탄들에게 좋은 지침서가 될 것이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더 깊은 연구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저자의 ‘바울신학과 새 관점’을 참고할 것을 권한다. T. Wright의 관점과 비교하면서 독해하면 복음주의적 시각의 신앙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리라 생각한다.

‘영성훈련 (Knowing Christ)’, 알리스터 맥그라스, 두란노서원

저자는 자신의 영혼의 자서전을 통해 자신의 신앙의 여정에서 경직된 지적인 추구가 그리스도를 아는데 장애가 되었음을 고백하고 감정적인 면에서 그리스도를 깊이 경험하는 자신의 영적인 훈련의 경험을 나누고 있다. 지적으로 감정적으로 그리고 의지적으로 그리스도께 자신의 삶을 복종시키려는 여러 가지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저자는 감정적인 면을 계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그만큼 그리스도를 지적으로 아는 것을 첫 장과 마지막 장에 할애함으로써 강조하고 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이 책을 통해서 오히려 성경에서 보여주고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정확히 앎으로써 신앙의 균형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서양의 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통해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영성 훈련을 주제로 소그룹에서 함께 공부해나가기에도 좋은 책이다.

‘Praying with Jesus: A Year of Daily Prayer and Reflections on the Words and Actions of Jesus’, Eugene H. Peterson, HarperSanFrancisco, 1993

그러면 그리스도를 어떻게 알 것인가? 당연히 그분의 말씀을 통해서 일 것이다. 이 책은 예수님의 말씀을 365일 묵상할 수 있도록 정리하였고 영성신학자인 저자가 간단히 묵상을 돕는 질문을 붙여 놓았다. 이 책의 형태대로 말씀을 묵상하면서 자신만의 365일 묵상집을 만든다면 그 과정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깊이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정희] 다원주의 세계에서 진리를 선포하는 자는 왜 겸손해야 하는가?

이코스타 2007년 5월호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주인으로 그리고 인생의 모범으로 삼고 사는 사람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고 함께 그리스도인들이 된 형제 자매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깨어진 주위 사람들과 자연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하나님과 말씀과 기도로 교제하고 주위 사람들과 영적인 친교를 나누며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인 답게’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그 동안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깊은 관심과 열정을 가져왔다. 매일의 말씀 묵상은 물론이고 귀납적 성경공부에 연역적 성경 공부까지 아마 이렇게 열심히 성경 공부하는 기독교인들이 한국인들 말고 또 있을까? 기도 생활도 그렇다. 매일 매일의 새벽 기도 모임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 답다’라는 평가 항목에 있어서는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 같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달리 이웃과의 관계에서는 ‘그리스도인 답지’ 않은 행동은 많이 해왔기 때문인 것같다. 다양한 가치와 논리가 공존하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이웃들과 그리스도인답게 대하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 이 책의 기본적인 질문이다.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관련을 맺는 방식에는 성전론, 현실주의, 정전론, 기독교 평화주의라는 크게 네 가지의 방식이 있다. 성전론은 세상의 악한 질서는 파괴해야 하는 대상이라고 대하는 태도이다. 세상의 악한 질서에서 행동하고 있는 주위 사람들은 악의 결과이자 원인자로서 이들은 악으로 대하고 선한 질서인 기독교로 끌어들여야 하는 대상이다. 때로는 적개시하고 때로는 그 의미를 감추고 접근하기도 한다. 현실론은 이 세상의 질서는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앙은 신앙, 그것이 모든 세상사를 지배할 수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성전론과 현실주의는 기본적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아니다. 세상에 내재하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됨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모든 피조물을 지배하는 하나님의 질서도 부인해서는 안되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정전론은 세상 속에 있는 분명한 악한 가치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방식은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며 평화주의는 그러한 악에 대해서도 그리스도가 보여준 무저항과 평화적인 대응만이 허용된다는 견해이다. 두 견해는 분명한 악에 대한 문제이며 그 외의 경우는 그리스도가 보여준 평화적인 태도만이 성서적이라는 데에 견해를 같이 한다.


그리스도인이 비그리스도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그리스도인은 비기독교적인 세계관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분명한 악을 제외하고는 겸손과 부드러움으로 그리고 한편 적극적으로 대화해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예수님의 모범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해하려는 사람들에게도 끝까지 대화를 하셨다. 예수님의 태도가 신앙인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모범이 된다면 그분이 다른 사람들을 대한 태도, 특히 약자와 병자, 가난한 자들에게 다가가시고 진지하게 대화하는 태도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둘째는 기독교 신앙의 보편성에 대한 믿음이다. 종교인과 비종교인은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할 때가 많다. 다른 전제를 갖고 세상을 보기 때문에 대화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그 세계관은 현실적인 경험을 통해서 검증되고 확인되는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일관성과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세계관인 것이다. 그 보편성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찾도록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셋째는 대화가 평화와 화해를 만들어 가는 과정임을 인정하는 태도이다. 갈등과 충돌이 만연한 세상에서 서로를 향한 진심어린 대화는 그리스도가 말한 평화를 만들어가는 한 발자국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설명에 동의할 수 있다면 무례한 기독교는 옳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겸손한 선포자는 세상과의 관계에서 균형잡힌 세계관을 갖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들이고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그것은 바로 겸손한 선포자의 모습일 것이다.

[이정희, 김진태] 몇 권의 책으로 살펴 본 물질주의의 위협

이코스타 2007년 4월호

로날드 사이더의 책들 (김진태)


예레미야 35장에는 성경 전체를 통털어 딱 한번 등장하기 때문에 성경을 여러번 통독했어도 무심코 지나칠 수 있을 만한 족속인 레갑 족속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약간은 특이하게 전개되는 예레미야 35장의 이야기 가운데에서, 결론적으로 레갑 족속은 하나님의 칭찬을 듣고, 불순종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순종의 모델과 같은 존재로 세움받는다. 레갑 족속이 그렇게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술을 마시지 말라는 요나답의 명령을 순종한 데에 있었다. 당대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권하는 포도주를 거절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텐데도 그들은 자기 조상이었던 요나답의 명령에 신실했다. 성경 어디에도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술을 마시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구절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레갑 족속이나 혹은 세례 요한과 같이 술을 평생 마시지 않으며 더 높은 기준을 세운 사람들은 성경에 종종 등장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사용하셨다. 이것은 비단 술만으로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거룩한 기준을 세우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주님께서 귀하게 보시고 높이신다는 사실은 수많은 믿음의 조상을 통해 확인된 사실이다.


로날드 사이더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심이 많은 저자이다. 진정한 신앙은 삶의 변화를 필연적으로 동반한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그는 야고보서의 신앙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비교적 최근인 2005년에 쓰여진 ‘그리스도인의 양심선언 (The Scandal of the Evangelical Conscience)‘에서 그는 소위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삶과 통계학적으로 유의미한 차이가 없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비록 미국의 통계자료이기는 하지만, 이혼, 인종차별의 문제를 넘어서 가정폭력마저도 차이가 없다는 사실은 한국 그리스도인의 상황이 그리 나을 것 같지 않다는 점에서 더욱 충격적이다. 그는 이와 같은 현상이 교회가 복음을 전적으로 강조하지 않은 채 값싼 은혜만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생겼다고 진단하면서, 그리스도인이 상대주의, 물질주의, 개인주의와 같은 대중문화의 흐름에 동화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교회의 회복, 보다 구체적으로는 예수님의 중심되심을 강조하는 반대중문화적인 공동체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보다 10년 정도 전에 쓰여진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다 (Genuine Christianity)‘에서도 로날드 사이더의 어조는 그다지 다르지 않다. 현대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너져 있음을 드러내고 그에 대한 성경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려는 의도가 강한 ‘그리스도인의 양심선언’에 비해서,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다’는 보다 구체적인 원칙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 책에서 그는 11가지 원칙을 통해 개인, 가정, 교회, 사회 등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 영역에서 어떻게 균형잡힌 신앙을 가질 수 있으며, 그 신앙이 또한 어떻게 드러나야 할지를 고민하며 제시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달라야 함을 강조한 저자는 사실 로날드 사이더 이외에도 많이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비슷한 점을 강조한 또다른 저자들과 로날드 사이더를 다시금 구분지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사회정의를 향한 그의 관심이다.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다’에서도 드러났듯이, 그는 균형잡힌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연스럽게 사회정의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회정의의 여러 가지 측면 중에서 로날드 사이더가 특별히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는 경제적인 정의, 즉 가난의 문제이다.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던 1977년의 저작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 (Rich Christians in an Age of Hunger)‘에서 그는 전세계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훨씬 부유한 서구사회와 그 안의 그리스도인, 가난에 대한 성경적 관점, 그리고 현대 사회에 만연한 경제적 불평등의 구조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물질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거의 하지 않고 있다. 물질주의 세계관에 대한 그의 견해는 ‘그리스도인의 양심선언’에 오히려 더 명확히 드러나 있다.


At the same time, a new kind of materialism has taken root. Historic Christianity had been profoundly materialistic. The created world is good. God wants us to create wealth and delight in the bounty of the material world. But historic Christianity also placed firm boundaries on this materialism. Nothing, not even the whole material world, matters as much as one’s relationship with God. The Sabbath reminded people that once every seven days we should forget productive work and focus especially on worship of God. Happiness comes first of all not from material things, but from tight relationships with God and neighbor, and then thirdly from a generous sufficiency of material things. (From p. 88 of ‘The Scandal of the Evangelical Conscience’)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에서 로날드 사이더가 제안하고 있는 서구사회의 그리스도인의 책임 및 실천사항은 이 세계의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중요할 뿐만 아니라 물질주의에 맞서기 위한 좋은 대안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첫번째로 누진 십일조를 제안한다. 소득의 10%를 내는 십일조와는 달리, 소득이 많아질 수록 더욱 많은 부분을 후하게 나누자는 원리이다. 안타깝게도, 서구사회가 더 부유해진 지난 30여년동안 그리스도인이 나눈 소득의 평균은 3%에서 2.5% 정도로 줄어든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안타까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재정적인 나눔은 실천의 첫걸음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로날드 사이더는 개인적인 소위 ‘주머니의 회심’으로부터 더 나아가서, 공동체적으로도 가난한 자들을 향한 재정적 나눔과 자원봉사의 시간을 점차적으로 늘려나가는 동시에 정부 차원에서의 비슷한 프로그램을 늘려나가기 위한 청원을 할 것을 제안한다. 한 단계 더 나아가, 그는 그리스도인이 개인적인 차원과 교회공동체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이 세계를 보다 공평하게 만들 수 있는 사회적인 해결책에도 관심을 갖고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사회적인 관심의 일부는 최근에 그가 함께 편집한 ‘Toward an Evangelical Public Policy‘와 같은 책에 반영되기도 하였다.


다른 세계관에 비해서 물질주의는 한국교회를 이미 더욱 강하게 침투한 것으로 보인다. 70-80년대의 기복주의 신앙은 그 시작에 불과한 듯 하다. 현재에도 사회적/경제적으로 성공한 그리스도인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교회 안에서 더욱 주목받고 심지어 신앙의 모델로서 추켜세워지는 모습을 너무나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 결과로 세상의 성공을 통해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젊은 그리스도인의 모습 역시도 빈번하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성공을 추구하기 이전에 주님을 위해 거룩한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젊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그만큼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면에서 로날드 사이더의 메시지는 우리 각자와 공동체에게 큰 도전을 던져준다. 당신의 삶은 비그리스도인의 삶과 비교하여 어떤 거룩한 차이점이 있는가? 하나님께서 이미 허락하신 부유함을 당신은 얼마나 거룩하게 사용하고 있는가?


Jacque Ellul, “뒤틀려진 기독교, The Subversion of Christianity”, 1986 (이정희)


기독교의 왜곡은 나쁜 의도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그것은 더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모으고 성경에 노출시키고 기독교 종교 의식에 참여하도록 의도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옳은 것이며 바람직한 것인가? 자크 엘룰의 설명에 따르면 그것은 오히려 교회에 해로운 것이었다. 3세기에서부터 시작되어 현재에까지 계속되고 있는 복음의 메시지의 왜곡은 교회 지도자들의 권력, 도덕적 우위, 혼합주의 등에 대한 유혹에 철저하지 못한 태도로 제도 교회에서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것은 신약 성서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었으며 교회에 성공을 위해 그 자신의 중심 메시지를 포기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항상 나쁜 의도로 시작된 것은 아니었지만 성경의 메시지의 뒤틀림은 그 자체로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변화된 복음은 기본적으로 세상 속에 우리 자신을 그대로 두는 것과 똑 같은 것이었다.


교회가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공동체로서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는데서 벗어나 원래의 복음의 메시지에 충실해야한다. 세상의 질서에 거스르는 것은 사람들의 기대에 어긋나는 것이겠지만 그것이 복음이 능력을 갖기 위한 기본적인 전제조건인 것이다.


Tom Wright, “Simply Christian”, 2006 (이정희)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이 자유주의 진영이나 복음주의 진영를 막론하고 기독교 공동체 전체에 커져가고 있다. 한편 하나의 산업이 된 예수를 둘러싼 이야기가 그럴듯한 상품으로 미디어를 타고 진실을 호도하고 있어 신자와 비신자에게 혼란을 야기하고 있고 다른 한편 굳어져 가고 있는 현대의 교회의 갱신은 역시 교회의 기초인 역사적 예수, 나사렛 예수가 제공하기 때문이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복음주의권의 학문적 선봉에 서있는 Tom Wright의 신앙 입문서 Simply Christian은 저자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 성과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다른 책과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2부에서 제시되고 있는 God, Israel, Jesus and the coming of God’s kingdom 등의 주제가 역사적 사실이 최대로 복원된 상태에서 그를 둘러싼 다양한 견해들이 충돌하고 그 의미가 확인되는 상황을 잘 설명하고 있다. 예수가 이스라엘의 역사에 계시된 하나님의 약속을 현재화하여 자신의 삶 자체로 보여주고 있다는 해석을 광범위한 증거로 제시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나라의 기본전제는 자기 부인과 좁은 길로 감이다. 세상의 질서로서 강함과 부유함과 명예로움은 멀리해야하는 가치이다.

[이정희] 유학생 선교사 가상 인터뷰

이코스타 2005년 5월호

그리스도인으로서 유학생 선교사로 살아야 함을 권면하는 가상인터뷰입니다. 스티븐 고크로저, 신세대를 위한 선교 길라잡이, 박광철, 이렇게 선교하자, 김영동, 교회를 살리는 선교학을 참조하였습니다


(ekosta) 요즘 신속하게 변하는 세계의 모습을 먼저 생각해보았으면 하는데요,


예, 잘 아시겠지만 세계화 등의 영향으로 이전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전세계적으로 이동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문화적으로 다양화되었고 한편 물질주의가 가속화되기도 했죠.


교회적으로는 복합문화교회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를 형성하는 것이죠. 선교도 멀리 떨어진 낯선 곳에서의 복음전파와 교회개척에서 국제도시에 모인 다양한 문화의 사람들에게 다양한 형태로 복음을 전해야 하는 단계로 변화되었습니다. 새로운 선교지는 대도시, 그리고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 대규모 캠퍼스 도시가 된 것입니다.


(ekosta) 이런 현장의 변화와 캠퍼스의 상황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캠퍼스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좋겠는데요, 전통적인 선교사 신분 소지자를 꺼리는 나라가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유학생에 대한 선교 활동을 그 의미가 더욱 큽니다. 현재 미국 각지의 캠퍼스에는 수많은 이슬람 유학생들이 언제나 복음에 접촉이 가능한 상태에 있습니다. 이들 유학생들을 목표로 한 전도는 매우 효과적일 것입니다.


(ekosta) 이들에 대해서 어떤 시각으로 접근해야할까요?


첫째로 당연한 것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셨지만 권력, 성공, 영향력을 벗어 버리시고 희생적인 죽음을 향해 나아가신 분이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에 무지한, 선진국에 와 공부하고 있는 제3세계 학생들에게 나아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둘째로 인터네셔널 학생들에 대한 선교 또한 전인적 사역이어야 합니다. 흔히 전도와 사회봉사의 양면을 모두 추구해야한다는 뜻에서 통전적 접근(the holistic approach)를 이야기하곤 하는데요, 유학생들은 복음을 필요로 하고 신앙을 가져야하는 사람들이면서 문화적으로 새로운 환경에서 경제적으로 일시적인 빈곤을 경험하는,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정착 때부터 공부를 마무리하는 때까지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도움을 주면서 신앙 생활을 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겠습니다.


셋째, 그들에 대한 비젼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들에게 뿌려진 신앙의 씨앗은 그들이 돌아갈 때 타문화권 선교사로 준비할 수 있는 독특한 상황입니다. 우리 모두 다양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선교에 관련된 사람들인데요, 그들을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훈련시킨다면 사회적 파급효과가 매울 클 것입니다.


(ekosta) 다양한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모이면 장점이 있는 반면 단점도 있을 것같습니다. 인터네셔널 사역의 장점, 단점을 나눠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문화는 다양합니다. 태국에서 전도하려면 불교라는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효과적인 전도를 위해서는 문화를 이해하고 접근하는 것이 중요한 전제 조건이겠죠. 다양한 종교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해야 하는 과제가 있습니다.


문화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공동체를 형성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문화는 생각의 틀이기 때문에 그 틀이 다른 사람들이 모이면 불필요한 오해를 낫는 경우가 많죠. 지체라는 측면에서 다양성과 통일성을 적절하게 유지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일텐데요, 쉽지 않은 과제인 것은 분명합니다. 의도적으로 의사교환을 가능한 한 많이 하는 수 밖에 없는 것같습니다.


(ekosta) 문화와 복음이라는 문제가 자연스럽게 제기될 것같은데요.


복음과 문화의 문제에 대한 접근으로 리처드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가 있습니다. 니버는 그리스도와 문화의 다섯 가지 유형을 제시합니다. 복음과 문화의 적대 관계, 즉 문화를 배척하는 태도, 복음과 문화를 동일시하는 태도, 복임이 문화 위에 있다고 보는 태도, 복음과 문화의 역설적인 관계, 복음이 문화를 변혁하는 관계가 그것입니다. 복음과 타문화, 기독교 이외의 문화의 문제인데요, 먼저 자신의 문화를 복음과 동등하게 대하는 점이 문제입니다. 복음과 문화를 혼동하는 것입니다. 한편 모든 문화에는 고쳐야 할 부분이 존재하죠.


정리하면 복음은 사람들이 듣고 믿게 될 때 문화적 형태 안에서 성육신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상황화가 필요한 것인데요, 문화는 복음 전달을 위한 적절한 도구로 사용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모든 문화를 받아들이라는 것은 아니고요, 문화의 부정적인 측면은 도전하고 개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복음은 문화와 구별되면서 문화의 옷을 입고 문화를 변혁하는 진리라고 할까요?


(ekosta) 이러한 지식이 인터네셔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캠퍼스 사역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요?


캠퍼스 사역에 대해서 사도 바울의 모델을 한번 살펴볼까요? 그는 주요 도시에 거주했으며 듣는 사람들의 상황에 적합한 메세지를 전하였습니다. 그는 곳곳에 공동체를 설립하였으며 팀 사역을 하였습니다. 캠퍼스는 주요한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설교함은 바울의 예지를 본받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또 바울은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되고 율법 아래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율법 아래 있지 않은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유학생들 중 불교의 배경을 가진 사람에게는 불교 승려의 옷을 입고 전도할 수 있고, 힌두교의 배경을 가진 사람에게는 머리를 둘러싸고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ekosta) 이번 코스타의 주제가 한인 학생 디아스포라입니다. 많은 한국 유학생들이 세계에 흩어져 신앙을 지키며 또 전하고 있는데요, 유학생들이 어떤 모습이 되면 좋을까요?


선교사를 분류하는 방법으로 성직 선교사와 평신도 선교사로 나누는 방법이 있습니다. 유학생도 평신도 선교사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평신도 선교사는 특정한 직업에 종사하지만 일과 시간 이외에 전도 활동을 하는 선교사입니다. 물론 유학생들은 경제활동에 전념하지 않기 때문에 자비량 선교라고 볼 수는 없겠지죠.


유학생 선교사라는 개념을 말하고 싶은데요, 유학생들은 훌륭한 평신도 선교사로 사역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성숙 단계로 나가는 그리스도인 유학생들은 자신의 독특한 위치를 생각해야합니다.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에게 복음을 전달할 수 있는 위치말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자신의 삶에 대해서 고민해야만 할 것입니다. 또 유학생들은 학업을 마친 후 교수나 직장인으로 일할 수 있는데요, 하나님의 선교 비젼을 어떻게 자신의 삶에 이어갈 것인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합니다.


(ekosta) 한국 유학생들이 인터네셔널 사역 혹은 선교를 하는데, 문화적 장벽을 넘어서야하는 측면에서 장단점이 있을 것같습니다. 한국 유학생들은 외국 문화를 접하지 않아서 타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평을 많이 받곤 하는데요, 이런 단점을 극복하고 유학생 선교사로 살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요?


한국인은 단일 문화 상황에서 살기 때문에 타문화나 복수 문화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부족합니다. 타 문화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자기 문화를 삼기 때문에 타문화에 대한 존경심이 적은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문화에는 좋은 면과 나쁜 면이 있으며 하나님 앞에 완전한 것이 없음을 시인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첫째는 폭을 넓히라는 것입니다.
한국 학생들은 의사소통 능력이 많이 향상되었지만 아직 많이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을 만나는데 어색하고 그것을 피하기도 합니다. 언어적으로 문화적으로 열린 자세로 적극적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두번째는 성숙한 신앙인으로서 선교적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신앙의 성숙을 추구하는 것이 요구됩니다. 자신이 남을 도우는데 진정한 관심이 있는가, 책임감과 신뢰성이 있는가, 솔선수범하는 지도력이 있는가, 자기를 낮추려는 겸손이 있는가, 마음 속에서 자신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가 이런 점을 먼저 돌아보아야 합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하나님께 복종하고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는 삶, 하나님이 모든 필요를 채우신다는 신뢰, 낮은 자리를 기꺼이 택하려는 자세, 사역에 대한 열심과 낙심되는 상황 속에서의 꾸준함, 하나님과 교통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즐겨 연구함 등이 선교사에게 요구된다고 했는데요, 사실 이런 자질들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성령의 열매이기도 합니다. 성숙한 신앙을 추구하면 주위를 돌아보게되며 열매맺는 신앙을 추구하면 유학생의 삶 속에서 자연스레 선교사적 삶을 영유하게 될 것입니다.


(ekosta) 이코스타 독자들에게 권면의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경건한 신앙 생활을 건실하게 추구하는 것이 가장 구체적인 방법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제자도 훈련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타문화를 연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분을 모델로 살면 자신의 삶을 자연스레 타문화로 낮추게 될 것입니다. 그분께 더 나아가면 더 낮아질 것이고 더 자신을 선교지로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유학생 선교사, 그리스도를 닮는 유학생이 유학생 선교사입니다.

[이정희] Simply Life, 나의 유학일기 – 2004. 10 어느날

이코스타 2004년 10월호

종합시험, 종합시험, 종합시험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  윤동주, 쉽게 씌어지는 시 중


오늘은 비도 주적주적 오는 것이 육첩방은 남의 나라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는다. 식스 스퀘어 방은 남의 나라, 아니 지금 있는 곳은 식스 스퀘어는 더 되는 것같다. 그러나 그렇다 한들 무슨 차이가 있으랴. 남의 나라인걸. 혼자 좁은 공간에 고립되어 있다고 느껴질 때, 괜히 나를 감옥에 있었던 다른 사람으로 등치시켜보곤 한다. 사도 바울이 그랬지. 김교신이 그랬지. 그리고 윤동주가 그랬었지 하면서.
유학생활한지 수 년, 이때까지 온 내가 한편으로는 대견하고 이것밖에 아닌 내가 한편으로는 한심하다.


오늘은 문득 공부를 한다는 것이 장난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들어온 미국 동기들은 벌써 패쓰한 종합시험을 한 학기나 미루고 아직고 머리 싸매고 고민하고 있는 스스로가 한심해보인다.
대학교 다닐 때는 앞으로 어떻게 할까라는 걱정이 가장 힘들고, 유학을 준비할 때는 준비과정에 제일 힘든 줄 알았더니 코스워크 과정에서는 그런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것만 지나가면 낫겠지 했더니 종합시험 스트레스는 앞의 것들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참 하면 끝이 없이 벌어지는 난관에 인생은 고역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하긴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언어의 장벽을 실감하고 당황해하던 때를 생각하면 이 정도 하는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긴 하다. 과제와 에세이 준비하면서 끙끙대던 기억들, 좋지 않은 성적과 컴멘트로 속상해하던 일, 프레젠테이션하면서 긴장하던 일들 겨우겨우 넘어서 코스워크까지는 무사히 마쳤으니 이제 새로운 지경으로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영어는 왜 이리 안 느는지, 글을 읽다보면 걸리는게 너무 많아서 다시 예전에 공부하던 단어장이나 한번 훑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논문을 쓰기는커녕 남의 논문 이해하는데도 이렇게 장애가 많으니 언제나 그들을 따라가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식인, 잉여인간, 고민


나는 무엇이 힘든가. 육체적으로? 혹은 혼자 사는 삶의 외로움으로? 평소에 공부를 잠을 못자면서까지 하지는 않으므로 몸이 힘든 것은 아닐 것이고, 혼자 사는 외로움이야 삼십년을 따라오던 것이므로 지금 유달리 힘을 발휘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내가 갖는 심적인 어려움은 가끔은 내가 잉여인간적인 삶을 살고 있지 않나하는 회의 때문일 것이다. 지식인이라는 말이 아직 가당하지 않겠지만 뚜렷한 성과물이 없이 사회에 생산적인 기여를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가치물을 소비만 하고 있다는 자괴감이 몰려오는 것이다. 대학을 같이 다녔던 친구들은 벌써 사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가정도 갖고 안정도 되어 있는데 나는 아직도 사전 뒤적이고 있는 것이 슬며시 부끄러운 것이다.
나는 지식인인가 아니면 잉여인간인가? 이제 지식인도 앞에 신(新)자를 붙여서 보이는 무언가를 생산해내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가치있는 지식을 도출해내지 못하면 비난받아야 하는 시대에 내가 지금 들여다 보고 있는 이 종이 자락에서 무언가를 건져낼 수 있을까? 아니 이 정도의 글이라도 써낼 수 있을 것인가? 다른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지식을 생산해낼 수 있을까? 그저 백면 서생(百面書生)으로 남아 남들이 만들어놓은 가치에 얽어 붙어 살아가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런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감상(感傷)이나 연민으로 세상을 향하기에는 삶이 너무 무겁다. 사랑과 땀이 고이 담긴 학비 봉투는 무표정한 나의 얼굴을 비장하게 만든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다른 걱정없이 미국에 와서 공부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는 특수한 시간을 감정의 소회로 보낼 수는 없다.
태어나서 지금처럼 많은 돈을 써본 때는 없다. 또 태어나서 지금처럼 많은 돈을 벌어본 적도 없다. 그리고 공부를 시작한 이후 지금처럼 아끼면서 산 적도 없다. 복사 종이 한장도 돈으로 환산되고 커피 한잔도 절약의 방도를 찾아보게 된다. 집에서 타먹으면 일불이라도 절약할 수 있겠지.
일상의 외관은 철저히 현실주의자가 되어 다른 것을 잊고 전진해야함을 상기시켜준다.


사는데 가난한 것이 마음의 가난함을 불러일으키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누리고 있는 것들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갖게 한다는 것은 틀림이 없다. 물 속에 잠수해있을 때 느끼는 숨막힘이 공기의 소중함을 깨우쳐 주는 것처럼 말이다.


기독교인의 삶, 쉽게 씌어지지 않는 시


로렌스 형제가 터득한 하나님과 대화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단순히 자신의 평범한 일상사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는 맡겨진 일과를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순종의 마음으로 감당했으며, 늘 자신의 그 사랑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순결한 것이 되게 하고자 했다.
–하나님의 임재 연습 중


우리의 성화는 우리가 추구하는 생활을 이것에서 저것으로 바꾸는 데 달려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일상의 활동들을 자기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는 뜻인 것같다.
신앙과 학문의 조화, 삶과 신앙의 일치는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삶의 태도를 우리에게 요구한다고 노상 들었는데, 요즘 생각해보면 유학생활은 특수하면서도 어느 곳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동일하게 보이는 재물을 위해 살 것인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 것인가의 선택의 장인 것같다.
나의 유학생활에서의 성화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합당한 목표와 그에 걸맞는 성실함과 자기 절제로 우리의 삶에 적용될 수 있을까?
헨리 나우엔이 적기를 우리가 지식을 쌓는 이유는 우리의 지식을 자유로이 나누기 위함이고 우리가 절제하는 이유는 주님에게 성실하기 위함이다. 오직 관대하게 우리의 가진 지식을 나누어 줌으로써만 우리는 그 지식이 얼마나 심오한지를 알 수 있다고 했군. (It is only by giving generously from the well of our knowledge that we discover how deep that well is. –Henry Nouwen, Bread for the Journey)
이것이 나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까? 영어 공부가 되었건, 종합시험이 되었건, 학위 논문이 되었건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절제하는 것이 신앙의 아름다움의 실체이겠지.
그리스도인에게 Simple Life는 의미없는 단순한 하루가 아니라 절제하는 소박한 삶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좇는 우리에게는 오늘 하루의 책상머리맡은 하나님나라에 하나의 벽돌을 얺는 신성한 삶의 자리인 것이다. 나에게 오늘 하루는 더 이상 그저그런 일상이 아니라 일일 일생(一日一生)으로 의미가 바뀐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완결성은 아직 먼 일이지만 오늘 하루가 달라지만 일생이 달라지리라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의식적으로 희망을 주어본다.


학교의 해거름 생량(生凉)한 찬 공기가 정신을 맑게 해준다. 혼자 내 속으로 침전하기 전에 주위를 돌아본다. 삶이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좀더 치열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고 교정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