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상] 2008년 1월에 읽은 책들


2008년 첫번째 달. 내공없는 풋내기의 책읽기는 계속된다. 이번 달에도 생각의 지평의 넓혀주는 귀한 책들을 접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 단지, 꼭 읽고 싶었던 책들을 그 두께에 지레 겁먹고 뒤로 미루어 놓은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하나님의 나라, 교회 그리고 세상’, Howard Snyder (박민희), IVP, 2007

사용자 삽입 이미지한사람 한사람이 변하기만 하면 정말 세상도 변할까?

아직 최루탄 냄새가 가시지 않았던 캠퍼스. 나도 대학 새내기 시절에는 선교단체라는 곳에 몸을 담았었다. 그 때에도 지금처럼 리더들에게 이것 저것 따지기 일쑤였는데, 그 당시 내가 따지며 대든 내용 중의 하나는 크리스천의 사회참여였다. 입학 초기 신입생을 위한 한 강의에서, 모 간사님께서는 ‘사람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 데모한다고 세상이 변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고, 난 그분께 ‘탈세를 할 수 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사람이 바뀌었다고 어떻게 탈세를 하지 않을 수 있냐’고 반발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냥 그것이 아닌 것 같아서 마구 질문했었는데, 그리고 그 이후 이 문제는 많이 해결했다고 믿었었는데… 하지만, 크리스천의 사회참여의 정당성 여부는 아직까지도 내겐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있다.

1983년도에 저자의 강연을 정리했다고 하는 이 책을 통해 나는, 하워드 스나이더의 다른 책 – 참으로 해방된 교회, 교회 DNA 등 – 에서의 주장을 조금이나마 더 이해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하워드 스나이더의 키워드 중의 하나인 ‘생태계적 하나님나라’의 개념이 좀 더 명확해졌다던가 하는…

책의 전반부에서 저자는, 하나님나라의 특징들은 이미 구약에서 약속되고 계시되었으며, 그 특징들이 신약에 와서 재해석되고 완성된 것임을 ‘샬롬’, ‘도시’, ‘가난한 자들과 함께함’, ‘안식’, ‘희년’ 등의 분야로 나누어 살핀다. 그리고는 이런 하나님나라가 현재에는 어떻게 구체적으로 성취되야 하는가를 다루고 있다. 책 후반부에서는 그런 하나님나라가 개인을 넘어 교회와 세상까지 영향을 끼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가하는 제안을 한다. 예를 들어 국가의 정책 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던가, 국제 평화를 위해 압력을 행사하는 것 등도 해야한다는 것이다. 즉 개인 복음 전도 뿐 아니라, 사회 정의에 참여하는 것도 하나님나라를 위해 동일하게 귀한 일임을 강조한다.

크리스천이 세상의 일에 무관심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세상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하려는 여러 시도들이 정말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길인지는 의문이 든다. 어쩌면,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기에, 또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바보같아 보이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교회다운 교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더 옳지 않을까? 우리의 싸울 것은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에 대한 것이니까…

“십계명 (The truth about God)”, Stanley Hawerwas, 복있는사람, 2007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람들은 누군가를 평가하기 위해 문장 하나를 사용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은 참 순진해’ 혹은 ‘그 사람은 너무 정치적이야’ 등의 한 문장으로 표현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평가가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고는 하지만, 누군가에 대한 한사람의 평가가 동시에 상반된 두가지 방향으로 나오는 건 아무래도 좀 자연스럽지 못하다.

한권의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성향에 대한 서로 다른 두가지 평가가 나오는 경우 또한 흔치 않다. 그런데, 이번에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십계명’을 보면서 이런 종류의 혼란을 겪었다. 하우어워스는 존 하워드 요더의 이론을 지지하는 윤리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에 이어 한국말로 소개된 그의 두번째 책이다.  이 책에서 그는 “십계명은 세상을 위한 윤리적 지침이나 세상을 향해 선포할 기독교 선언문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이며 누구의 소유인지를 알게 된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이 땅의 세속문화와 그 가치에 대항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하는 삶의 방식이다”라 단언한다. 계명 열가지를 하나씩 짚어가며 그 원래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그 계명들이 단순한 윤리로 취급될 가능성에 대해 경고한다.

“그리스도인이 결혼해야 하는 단 하나의 바람직한 이유라면, 독신일 때보다는 기혼일 때 세례에 따른 소명의 삶을 보다 훌륭하게 살아낼 수 있다는 확신때문이다”라며 결혼을 공동체적인 삶과 연결시키는 다소 급진적인 성향을 보인다. 반면 십일조의 당위성을 지지한다던가 조직교회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부분에서는 지나치게 보수적인 면모 또한 엿볼 수 있다. 도대체 하우어워스는 정확히 어떤 성향의 사람일까? 아직은 공부해야 알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있기는 하지만, 김기현 목사가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의 해설에서 이야기했던 하우어워스에 대한 평가는 조금 도움을 주는 것 같다: ‘나 개인의 판단으로는, 그의 신학이 자유주의 신학의 심장부에서 자라나 재세례파인 존 요더 (John, H. Yoder)의 영향을 받아 평화주의자(pacifist)인 점, 그에 더하여 미국과 자유주의 양자에 대해 전투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 실천적 성향, 거기다 자연신학을 강하게 반발하는 것이 칼 바르트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 보수주의를 닮은 데가 있는지라, 진보/보수 양 진영 모두에게 두루두루 통하는 것이 도리어 약점이 됨으로써 딱히 절대 지지층이라 할 만한 이들이 없는 것이 한 요인이 아닐까 싶다. 모두에게 더 없이 절실하지만, 동시에 삼키기에는 쓰디 쓴 부분이 한 두 군데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도 이미 많이 진보화한 걸까. 그의 보수적인 성향이 적잖이 거슬리는 걸 보면서 나도 놀라고 말았다.  

“주와 함께 달려가리이다”, Eugene Peterson (홍병룡), IVP, 2003

사용자 삽입 이미지우리는 때로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면서도 서로 다른 뜻을 염두에 두고 있어 이해하기 힘든 상황을 겪곤 한다.

몇 주전 토요일 아침 성경공부 모임에서 요한복음 3장을 공부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서 말씀하시면서 사용하신 ‘아노텐’라는 단어가 ‘위로부터’ 혹은 ‘다시’의 두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고, ‘프뉴마’라는 단어도 ‘바람’ 혹은 ‘성령’을 모두 나타낼 수 있다는 내용을 함께 공부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물과 성령’이란 단어를 왜 사용하셨을까를 이야기하면서, 나는 ‘새로운 창조’의 의미를 강조하신 것 같다고 이야기한 반면 다른 몇 멤버는 ‘세례’를 염두에 두신 것 같다고 하면서 토론이 계속되었다. 정말이지 한참을 이야기한 후에 알게 되었는데, 나는 ‘세례’를 ‘성례로서의 세례’로 이해하면서 동의하지 못하고 있었고, 한 자매는 ‘거듭남으로써의 세례’를 이야기하면서 내 주장에 계속 이의를 제기하고 있었다. 같은 이야기를 왜 이렇게 힘들게 했는지, 그건 단어의 정의를 일치시키지 못했었기 때문이었다.

때로는 똑같은 단어가 사용된 하나의 표현이 그 정의가 다를 경우, 정반대의 개념을 나타내기도 한다. 유진피터슨의 ‘주와 함께 달려가리이다’에서 사용된 ‘탁월함’이란 단어가 그 좋은 예가 아닐까 싶다. 흔히들 ‘크리스천은 탁월함을 추구해야 한다’라고 이야기할 때의 ‘탁월함’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의 삶을 추구하며 살아감으로써 가지게 되는 탁월함을 이야기하곤 한다. 반면 유진 피터슨이 말하는 ‘탁월함’은 하나님께 철저하게 순종함으로써 “단조로운 도덕적 습관에서 깨어나고, 그저 하잘것없는 일로 바쁜 일과를 툭툭 털고 과감하게 최상의 삶을 살도록 도전받”는 삶이다. 피터슨은 그런 대표적인 인물로 예례미야를 이야기한다. 예레미야의 삶 가운데 세상에서 흔히들 이야기하는 탁월함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는데도 말이다. 요시야 개혁의 시기에 참 개혁을 외쳤던 선지자, 그리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며 아스돗에 다시 땅을 구입하며 하나님의 회복의 메세지를 전했던 선지자,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과 지도자들에게 늘 미움을 받았던 선지자, 그 예레미야의 탁월함을 우리는 추구해야 한다. 일상속에 묻혀있는 삶을 딛고 일어나는 하나님의 탁월함을 말이다.

유진 피터슨의 초창기 작품 중의 하나인 ‘주와 함께 달려가리이다’는 이런 예레미야에 관한 이야기이다. 많지 않은 예레미야에 대한 기록이지만, 역사적 정황과 문맥에 대한 피터슨의 탁월한 묵상이 우리로 하여금 예레미야의 탁월함을 엿보게 한다.

유진피터슨의 책을 읽을 때마다 ‘나도 이런 묵상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이미 여러 책들에서 주장했듯이 시와 소설을 즐길 줄 알아야 할텐데, 나에게 있어 시와 소설은 여전히 멀기만 하니 어찌하겠나…

“바울과 예수”, F.F. Bruce (이길상), 아가페출판사, 1992

fk3.bmp그냥 그렇다고 덮고 넘어가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될 때가 있다. 음…

바울은 왜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많이 언급하지 않았을까? 20세기의 많은 신학자들이 주장하듯이, 바울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토대로 예수를 새롭게 구성했을까? – 그냥 넘어갈 수 있을 주제같기는 한데 말이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주제를 묵상하고 공부하면서 의아한 것 중의 하나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자료가 상당부분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가 하나님나라를 향하고 있고, 예수님의 설명 또한 그렇다. 그렇다면 바울의 서신들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주제가 별로 등장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바울의 가르침 속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상이 깊숙히 녹아 있는 것일까?

이런 궁금증을 안고 보수적 신학자로 알려진 F.F. Bruce의 “바울과 예수”를 손에 들었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전문적인 책은 아니기에 나의 초기 궁금증에 대한 직접적인 답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바울과 예수의 일치점에 대한 보수 진영의 주장을 어렴풋이는 알 수 있었다.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바울과 예수의 차이점의 원인을 하나님 나라의 용어로 풀자면 이렇다. 하나님 나라의 시간적인 긴장성을 잘 나타내는 표현이 ‘Already, but not yet’으로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두 봉우리 사이의 긴장으로 표현하곤 하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명은 이 두 봉우리가 모두 도래하지 않은 상황에서 하신 것이다. 반면, 바울은 그 중에서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의 봉우리는 넘어서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와의 중간에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바울과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는 어느정도의 차이가 존재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이런 설명을 위해 바울이 받은 전승과 계시의 차이점, 예수와 바울의 칭의에 대한 공통적 가르침, 그리고 윤리적인 가르침에 있어서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성경의 증거를 들어가며 차분히 설명한다.

아직 내가 가진 의문에 확답을 찾지는 못했다. 막연한 방향만 알았을 뿐… 이제 관련된 책들로 좀 더 여행해야만 할 것 같다.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Leslie Newbigin (홍병룡), IVP, 2007

사용자 삽입 이미지레슬리 뉴비긴의 책을 읽을 때마다 깜짝 놀라곤 한다. 이해하기 쉽지 않을만큼의 논리로 이야기를 전개해 가지만, 결론은 놀라우리만치 보수적이기 때문이다.

IVP에서 모던클래식 시리즈로 소개한 네번째 책인 레슬리 뉴비긴의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은 이미 다원주의 분야에서는 널리 알려진 그야말로 클래식이다. 이곳에서 더 이상의 요약을 적일 필요가 없을만큼 많이 알려진 다원주의에 대한 변증법적 논리를 담고 있다. 이전의 매끄럽지 못했던 번역도 좋아지고, 편집마저 수려해져서 책을 읽는 재미를 더 해 주었다고 할까. 다원주의에 대한 대항논리로 우리에게 익숙한 ‘사실’과 ‘가치’를 통한 설명 등 전형적이지만 명쾌한 설명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런 다원주의 사회의 대안으로써 진정한 공동체성의 회복을 내세우는 담대함이 돋보인다.

[조한상] 세상은 이해 못할 성경적 경제관

이코스타 2007년 11월호


“세상이 이해 못하고 우리를 조롱하여도 ”


2008 KOSTA/USA 컨퍼런스에서 거의 매일 부르다시피 했던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의 찬양 가사 중의 일부이다. 난 집회 기간 내내 이 가사를 묵상하다시피 하며 많은 생각을 했다. ‘과연 우리의 어떤 부분을 세상이 이해 못하고 조롱하고 있을까?’


예상보다 많이 길어진 유학생활을 마치고, 미국의 작은 회사를 다니게 되면서 바뀌게 된 몇가지 중에서 특징적인 한가지는, 사람들을 통해 듣게 되는 관심사의 변화다. 학생 시절에는, 각종 시험에 대한 이야기, 연구에 대한 이야기, 또 진로에 대한 염려가 주된 주제였다면, 졸업 이후에 듣는 이야기들의 대부분은 ‘돈’에 관한 내용이 아닌가 싶다. 최근에는 조금 주춤한다고는 하지만, 한때 미국의 부동산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너나 할 것 없이 ‘집을 사고 파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얼마나 놀랬었는지 모른다. 그들이 교회를 열심히 출석하는 사람들일찌라도 말이다. 지금은 이율이 낮으니까 집을 사기에 좋은 때라는 둥, 이 지역은 투자 가치가 있으니까 지금 사면 좋다는 둥… 아무튼 집을 사고 파는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 나누는 것 자체가 무슨 문제는 아니겠지만, 모인 사람들이 크리스천이든 아니든 모두가 그 부동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내게는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1. 돈은 정말 가치 중립일까?


몇년전 한국 기독교 내에서 청부론-청빈론 논쟁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 논쟁을 지켜보면서 계속 할 수 밖에 없었던 고민이 바로 ‘크리스천이 진정 부자로 살 수 있는가’였고, 그 질문의 기저에는 ‘돈은 정말 가치 중립일까?’라는 좀 더 기본적인 의문이 있었다. 만일 돈 그 자체가 가치 중립이라면 깨끗하게 벌어서 깨끗하게 쓰는 크리스천 부자가 존재하는 것이 당연하겠고, 만일 중립적이지 못하다면 크리스천으로써 부자가 되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 문제가 있을 테니까. 그 이후 성경공부를 통해서, 또 성경적인 경제관에 관한 책들을 통해서 현재까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세상의 제도나 시스템들과 마찬가지로 물질도 원래는 선하게 창조되었다. 하지만, 그 물질은 인간의 타락과 함께 타락했고, 또 그 물질은 구원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결국 재물이라는 것은 하나님 나라 안에서 회복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현재는 본래의 모습을 잃고 타락했을 뿐만 아니라 인격성을 가지고 있어서 인간을 지배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재물에 대해 인격적인 신의 개념을 빌어 말씀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다시 말해, 재물이 그 원래의 속성, 즉 타락하기 전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면 크리스천이 부를 추구하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재물이 철저히 타락했을 뿐 아니라, 인간을 지배할 수 있는 속성까지 포함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 부를 추구하는 것이 타당할까라는 고민을 할 수 밖에 없다.


2. 내가 가진 경제관은 세상의 그것과 무엇이 다른가?


기독교 역사에는 가난을 신앙의 큰 덕목으로 여겼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가난하려고 노력하고 부자가 되는 것에 대해 죄의식마저 느꼈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현대는 어떤가? 현대를 사는 우리 크리스천들, 더욱이 미국이라는 경제대국에서 사는 우리들 가운데 ‘가난’을 미덕으로 삼고 추구하며 사는 크리스천을 찾아보기란 정말이지 너무 어렵지 않은가?


물론 가난하게 산다고 좋은 크리스천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현대의 미국이나 한국의 크리스찬을 향해 ‘왜 크리스천은 물질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나? 크리스천도 부자가 될 수 있다’라고 정당화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발상이 아닐까?


사실, 진정한 문제는 현대 미국과 한국을 살아가는 우리 크리스천이 가진 물질에 대한 생각이 세상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 아닐까? 직장을 구하는 기준이 연봉을 비롯한 조건이다. 어떻게든 집을 사고 집값이 오르면 기뻐하고 집값이 떨어지면 절망한다. 그렇게 버는 것이 일하지 않고 벌어들이는 불로소득이며 그로 인해 세상 누군가는 열심히 일하고도 소득을 얻지 못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고민은 접어둔지 오래다. 투자한 주식으로 돈이 벌리면 기쁘고 떨어지면 절망한다. 근데 그것이 정말 바른 것일까에 대한 고민은 없다. 내 경제의 여유분 중에서 적당한 액수를 교회나 자선단체에 기부한다. 그리고 나중에 세금혜택을 받는다. 그저 남들이 그렇게 하듯이 말이다. 나름대로의 노후대책을 세운다. 그것이 어떤 형태가 되는 말이다.


교회는 건물과 행사에 집중하는 상업주의 기독교의 전형이 된 것도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작은 목회는 늘 실패한 것으로 간주왔다. 작은 회사는 늘 실패한 것이듯이…


도대체 세상은 우리의 무엇을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의 어떤 점을 조롱할까?


3. 나는 진정 누구를 의지하나?


최근 사무엘서를 읽으면서, 사울의 이야기가 계속 눈에 들어온다. 전쟁에 임하기 전, 칠일 후에 오겠다던 사무엘을 기다리가 결국 마지막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 자신이 제사를 드렸던 사울. 이 사울은 정말로 하나님을 믿기는 한걸까? 사울 뿐 아니라, 구약에 나타나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은 건 맞나? 사울도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거부한 흔적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그들은 늘 애굽에서 자신들을 불러내 온 야훼 하나님을 믿었다. 또한 그 하나님의 심판을 믿었다. 하지만, 일상생활에 관련한 농사와 자식번성에 대해서는 하나님보다는 바알을 의지했다. 하나님은 그런 일상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고 여기는 듯 하다. 확실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믿었다고 해서, 일상 생활 속의 신을 따로 숭배하는 모습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차라리 성경은 그런 모습을 우상숭배라고 정죄하며, 바람난 아내의 모습으로 비난한다. 분명 하나님이 있다고는 믿는데, 어떤 부분에서는 다른 무언가에 지배당하며 사는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믿는 걸까? 하나님을 세상의 창조자로 인정하며, 또 지금고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왕으로 인정하는데, 나의 미래는 내가 투자한 집과 주식, 그리고 저금통장에 의존하고 있다면 나는 도대체 무엇을 믿는 걸까?


4. 존재한다고 선은 아니다.


대학부 시절 기독교 윤리를 공부하면서 함께했던 형제 자매들과 자주했던 표현이 기억난다. ‘존재한다고 선은 아니다.’ 낙태가 행해지고 있다고 선한 것은 아니며, 전쟁이 존재한다고 선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우리가 착각하기 쉬운 것 중의 한가지가 있다면, 남들이 다 그렇게 하고 있고, 또 그 일이 딱히 위법이 아닌 경우에는 선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남들이 정당하게 돈을 벌어 부자가 되고, 또 그 돈을 집이나 주식에 투자해서 늘려 나가고, 그리고 그렇게 노후를 보장받기 위해 애쓰며 산다고 그것이 쉽게 선으로만 간주될 수 없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을 생각해 보자. 나의 삶을 하나님께만 의존하며, 가난한 자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며, 또한 형제 자매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는 삶. 그래서 그럼 모습을 통해 하나님이 드러나시는 삶. 그래서 세상은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를 조롱하지만, 결코 돌아서지 않은 삶.


아주 솔직히 말하면, 이런 삶이 성경적이라고 깨닫고 나서 덜컥 겁이 났다. 내가 정말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고 조롱하는 그런 삶을 살아 낼 수 있을까? 하지만, 그 보이지 않는 한걸음을 함께 할 믿음의 형제 자매들과 함꼐 그 길을 걸어가고 싶다.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며, 나를 나보다 더 사랑하시는 분을 따라 가면서…

[조한상] 2007년 6,7,8월에 읽은 책


2007/11


코스타 연차 수양회가 있는 여름이 지나간다. 코스타 준비와 마무리에 바쁜 여름, 유난히 책을 읽기에는 쉽지 않은 시기인 것 같다.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그동안 읽은 몇 권을 책을 짧게 나누고자 한다.


“바울의 공동체 사상”, Robert Banks, IVP, 2007
성경에서 말하는 공동체는 어떤 모습일까? 이 질문은 우리가 자주하는 질문이지만, 그만큼 다양한 해석들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적으로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바로 이 책에서 로버트 뱅크스가 그 일을 해 준 것 같다. 로버트 뱅크스는 공동체에 대한 여러 저작으로 알려져 있고, 특히나 가정교회에 대한 저술은 탁월하다. 건강한 공동체에 대한 기본 자료로써 탁월하다 하겠다. 하지만 오래된 책이라 그런지, 딱히 새로운 내용을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아쉬움도 남는다.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옥성호, 부흥과개혁사, IVP, 2007
‘부족한 기독교’를 논하기에는 뭔가 좀 부족한 책인지 싶다. 방향과 의도는 참 좋았지만,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리와 자료면에서 많이 아쉬웠다. 현대 기독교는 저자가 지적하듯이 심리학에 많이 오염되어 있고, 자기 최면을 신앙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지적이 꼭 필요한 시점임도 동의한다. 하지만, 우리가 심리학을 의지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심리학이 과학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다. 심리학이 아무리 훌륭한 과학이라고 할 지라도 우리는 하나님보다 그 어떤 것을 의지해서는 안된다. 저자가 ‘심리학은 과학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펴는 논리 전개는 보기에 안스럽기까지 하다. 현대 학문의 흐름을 전혀 읽어 내지 못했다고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에 대한 평가를 비롯한 여러 건강한 접근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저자가 약속한 두번째 세번째 책을 기대해 본다.


“십자가와 칼”, Gregory A. Boyd, 한언, 2007
“The Myth of a Christian Nation: How the Quest for Political Power Is Destroying the Church (기독교 국가에 대한 공상 – 정치 권력에 대한 추구가 어떻게 교회를 파괴하는가)” – 이 책의 원 제목이다. 제목 만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내용을 설교하면서, 저자의 교회에서는 1000명이 넘는 사람이 교회를 떠났단다. 미국 대선을 통해 들어난 기독교인들의 기독교 국가에 대한 환상을 성경적으로 도전하는 책이다. 저자는 책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 바로 기독교 국가’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힘은 십자가의 섬기는 힘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글 부제에는 ‘위에 서는 힘, 아래에서 섬기는 힘’이라고 되어 있다. 기독교 평화주의의 색깔이 많이 배어 있는 건강한 책이라고 하겠다.
Gregory Boyd는 ‘Letters from skeptic’에서 무신자 아버지와의 편지 교환을 통해서, 그의 신앙을 가볍게 나마 보여준 적이 있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그 책의 논리에 참 많이 동의했었다. 그의 건강한 생각을 다시 접하며, 그의 다른 책을에 대한 호기심이 정말 커진다.


“공감적 책읽기”, 김기현, SFC 출판부, 2007
좋은 책을 소개해 주는 좋은 사람을 만나는 일, 또 그런 책을 만나는 일은 늘 반갑다. “공격적 책읽기”라는 책이 더 어울리는 듯한 김기현 목사의 ‘책 권하는 책’이라는 “공감적 책읽기”이다. 괴물과 계속 싸우다 보면 스스로 괴물이 되어 있을 수 있다며, 좋은 책을 소개해 주어 고맙다. 하지만, 어쩌랴. 아무 생각없이 책을 읽지 않는 한, 어떤 책이 자신의 마음에 꼭 들 수 있을까. 책을 권하고자 쓰여진 이 책이었지만, 중간 중간 보이는 날카로운 비판들은 나로 하여금 유쾌한 웃음을 지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우리들의 거듭난 결혼 이야기”, 조은숙, IVP, 2006
결혼에 관한 좋은 책을 찾기는 정말 쉽지 않을지 싶다. 결혼이란 것이 워낙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기에 그런 모습을 일일이 다 묘사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그런 결혼 생활의 공통분모만 모아서 이야기하자면 너무 이론적이고 피상적이 되기 쉬우니까 말이다. 결국, 결혼에 대해 말하려면 자신의 생활을 진솔하게 이야기하면서 풀어가야 하는데, 그렇기 위해서는 적잖은 용기가 필요하다. 바로 그런 용기를 가지고 진심 어린 자신의 결혼 이야기를 풀어 놓은 책이 바로 조은숙씨의 “우리들의 거듭난 결혼 이야기”이다.
물론 나와는 사뭇 다르기에 동의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지만, 저자의 진실이 배어 있는 고백들을 그렇게 가볍게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래리 크랩의 ‘결혼 건축가’를 이론서로 함께 보면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내안의 죄 죽이기”, 존 오웬, 브니엘, 2007
17세기 청교도인 존 오웬은 어떻게 ‘내 안에 있는 죄’를 죽일 방법을 보여줄까. 혹시 색다른 방법이 있는 건 아닐까? – 이 책을 손에 들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이다. 하지만, 죄를 죽이는 왕도는 없는 것 같다. 자신 안의 죄에 대해 더 민감하고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신앙의 선배의 모습을 통해, 내 자신이 얼마나 죄의 부분에 대해 스스로 너그러웠었는지 깨닫게 해 주는 귀한 책이었다. 결국 죄에 대해 민감하기 위해서는 성령을 의지하고 깨어있어야 함을.


“교리공부가 즐거운 네가지 이유와 삼단계 방법”, 백금산, 부흥과개혁사, 2007
1000원!! 소책자!!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내가 대학부들 다니던 90년대 초반, 주일 성경공부를 마치고나서 교회 주변의 서점을 찾아 선배들에게 책을 소개받고 읽고 토론하던 일이 하나의 일상이었던 시절, 서점의 한편에는 소책자만을 위한 코너가 마련되어 있었었다. 작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을 담고 있어서 적잖은 영향을 받았던 책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송인규 목사의 ‘죄많은 이세상으로 충분한가’, 마이클 위베의 ‘소그룹을 인도하려면’같은 소중한 소책자들이 있었다. 이 책은, 흔히 생각하듯이 교리가 그저 머리로만 끝나는 지적 유희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기반이 됨을 강조하는데, 일전에 읽었던 맥그래스의 책 ‘기독교 교리 이해’와 비슷한 면이 많은 책이다.


“주기도문 강해”, 김세윤, 두란노, 2000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을 요약해 놓았나?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는 요구는, 그 당시 새로운 흐름이 된 예수님의 운동을 정의해 달라는 요구였고, 그에 대해 예수님은 대단히 간략한 기도문으로 자신의 방향을 정리해 주셨다고 한다. 그래서 이 짧은 기도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이 농축되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청원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구체화되는 것이 매일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청원과 죄 용서의 청원, 그리고 악에서 구해달라는 청원이고 말이다.
주기도문에 관해서 여러 책을 보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 김세윤 박사의 책을 읽고는 주기도문만으로 깊은 기도가 될 수 있었다. 꼭 읽었으면 하는 책.


“바울신학과 새관점”, 김세윤 두란노, 2003
꽤 예전에 사놓았던 책이다. 하지만 읽어야겠다는 동기가 부여되지 않아서인지 책꽂이에만 꽂여 있었던 책이다. 하지만, 이번에 김세윤 박사가 이 책을 통해 반박하는 바울의 새관점 (New Perspective)에 대한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고, 그래서 또 이 책을 읽을 강한 동기가 되어 주었다. 저자에 의하면 최근 신학계에서는 바울의 New Perspective와 제 3 역사 예수 운동이 큰 관심을 받고 있다고 한다. 이 두가지의 주제에 공히 N T Wright가 있는데, 이제 N T Wright의 책들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쉽지 않은 이 책을 읽으면 한가지 의문만 크게 되었다. 정말 유대인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정말이지, 내가 아직까지 배워온 것과는 다른 방법이 있는 걸까? 계속 공부를 하면 알 수는 있게 될까?


“바울의 생애와 선교”, William Barclay, 종로서적
정말이지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들어 읽었다. 대학 3학년 시절 처음으로 맡았던 성경공부가 바울의 생애를 따라 읽는 바울서신이었으니, 그 당시 존 드레인의 ‘바울’이라는 책과 바클레이의 ‘바울의 생애와 선교’는 내게는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다시 읽어 보지만, 역시 바클레이는 역사적 배경과 흐름 속에서 균형잡힌 시각을 제공하는데는 탁월한 듯 하다. 자신이 자서전에서 이야기하듯이 새로운 신학의 흐름을 만들어 내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게르하르트 로핑크, 분도출판사, 1985
“세상 안에 달라진 것이 없는데, 어떻게 메시야가 왔단말이냐?” – 유대교에서 예수님의 메시야성을 부인하며 묻는 질문이란다. 이사야 2장에서 언급된 것과 같은, 메시야가 오신 이후의 징후를 찾아볼 수 없는 현재의 모습에 대해 나온 질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해 게르하르트 로핑크는 교회가 바로 이 세상에 대한 ‘대조 사회’로서 폭력과 전쟁이라는 세상의 방법에 대항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평화를 이루는 공동체로 존재해야 함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런 교회 공동체에 대한 생각은 예수님으로부터 바울, 그리고 고대교회의 교부들에까지 일관되게 나타나는 모습이라고.
이 책은 출판사 (분도출판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천주교에서 나온 책이고, 저자 게르하르트 로핑크는 독일의 신부다. 이책을 알게 된 것은 김기현 목사의 ‘공감적 책읽기’에서였지만, 직접 구입하게 된 동기는 2007 KOSTA/USA에서 김도현 교수의 ‘공동체’ 세미나의 추천도서 목록에서였다. 평소 적잖이 공동체에 대해 관심이 있어서인지, 공동체에 관해 추천되는 책들은 제법 많이 아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마 그건 나의 나이브한 착각이었나 보다. 공동체에 관심이 많다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책을 못볼 수 있단 말인지. 그저 개인주의화된 현대교회에 대해 교회의 공동체성을 강조하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상에 두신 참 의미를 조리있게 설명하고, 그 너머를 고민하게 하는 책이다.
난 천주교회를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천주교의 책에서 평화주의에 대한 내용을 본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지 모르겠다.

[조한상] 2007년 5월에 읽은 책들


2007/6



다양함. 지난 달에는 정말 다양하게 읽었다. 고전과 신간, 개인영성에서 사회참여까지… 그런 가운데 너무도 유익했던 어설픈 책읽는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잊혀진 제자도”, Dallas Willard, IVP, 2007
‘Great omission’이라는 영어 제목이 좀 더 명확한 의미를 전달하는 달라스 윌라드의 새 책. 더구나 신국원, 유진 피터슨, 알리스터 맥그래스, 오스 기니스 등이 추천한 책을 사서 읽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하나님의 모략’, ‘하나님의 음성’, ‘마음의 혁신’ 등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저자 달라스 윌라드의 제자도에 관한 책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잔뜩 기대케했던 이 책은,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윤종석씨의 깔끔한 번역이 더욱 돋보인 이 책에서 저자는, 제자가 되지 않고도 크리스천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복음주의의 흐름을 개탄하며, 제자의 삶을 살기 위한 영성 개발과 영적 성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 중에서도 침묵의 훈련을 특히 강조함으로 저자의 현재의 관심사를 엿볼 수 있었던 책. 꼭 한번 읽어 보길 권하고 싶다.


“Papa prayer: the prayer you’ve never prayed”, Larry Crabb, Thomas Nelson, 2006
로렌스 크랩. 그는 ‘결혼건축가’의 저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저자이다. ‘결혼건축가’ 이외에도 ‘아담의 침묵’, ‘끊어진 관계 다시 잇기’ 등 인간 내면과 인간 관계에 대한 글들을 주로 저술하는 로렌스 크랩의 기도의 관한 책. 그런 저자의 배경 때문인지, 이 책은 ‘사귀의 기도(김영봉)’, ‘하나님의 음성(달라스윌라드)’의 심리학(?) 버전같은 인상을 받았다. 관계의 기도가 다른 어떤 기도 (예를 들면 간청의 기도)보다 앞서야한다고 역설한다. 같은 내용이 지나치게 반복된다는 아쉬움이 있기는 하지만, 기도에 관한 실질적인 팁이 큰 도움이 된다.


“기독교 교리 이해”, Alister McGrath, 기독교문서선교회, 2005
“너무나 자주 교리는 일상의 삶과는 무관한 비현실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그래스 교수는 교리 없는 기독교는 무의미하다고 지적하면서, 교리가 기독교 진리의 표현이며, 역동적인 기독교 삶을 위한 틀을 제시하고 이단을 방어하기 위한 보호책이 된다고 강조한다.” (책 소개에서)


이미 ‘책읽는 이야기’에서 여러번 소개되었던, 영국 복음주의 차세대 대표학자인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꽤 난해하고 심도있는 책을 주로 저술하기는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쉬운 필체로 독자를 찾아오기도 한다. (참고로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또 다른 쉬운 필체의 책을 살펴보면, ‘예수님을 경험하는 영성 훈련’, ‘하나님 얼굴을 엿보다’, ‘내 평생에 가는 길’ 등이 있다)


실제로 교리가 우리의 삶과 신앙과 여떤 연관이 있는지 설명하면서, 결코 사변적이지만은 않은 교리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창조자의 정신”, Dorothy Sayers, IVP, 2007
이미 익숙하지만 쉽지 않는 개념을, 평소 생각지도 못했던 관점으로 탁월하게 설명하는 것을 들을 때, 그때 접하는 느낌을 무어라 설명할까. 19세기 말에 태어난 도로시 세이어스는 희곡 작가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창조자되신 하나님의 속성과 삼위일체 개념을 멋지게 설명해 낸다. 문학 창작 속에 드러나는 삼위일체의 속성, 그리고 창조과정 속에 선택된 단어와 선택되지 못한 단어의 유비를 통해 설명하는 선악의 이야기 등은 책을 읽는 내내 나를 흥분케 했다.


IVP에서 모던클래식으로 선정하여, 존스토트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이어 두번째로 나온 책. 최근 출판된 모던클래식 세번째 책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도 기대하게 한다.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 Walter Wink, 한국기독교연구소, 2004
평소 접하는 관점과 사뭇 다른 눈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책은 우리의 시야를 넓혀주곤 한다. 복음주의 계열의 독자들에게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월터 윙크의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을 알게 된 것은, 월간 <복음과상황>에 실린 책소개를 통해서였다. (몇월호였는지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한국기독교연구소’라는 출판사의 책이라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분명 사회참여를 좀 더 강조하는 신학을 담고 있다. 사회 정치 체제 자체를 ‘원래 선하지만, 지금은 타락했고, 또 구원 받아야 할’ 대상으로 규정하고 그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비폭력적이지만 적극적으로 대항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 책에서 소개된 꽤나 독특한 산상수훈의 해석정도만 예전에 한완상 교수의 “저 낮은 곳을 향하여”라는 책에서 본적이 있을 뿐, 다른 내용은 생소한 개념만큼이나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내게 새로운 시야를 열어 준 책으로 기억될 것 같다.

[조한상] 2007년 4월에 읽은 책들


2007/5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아’라는 올해의 코스타 주제 때문인지, 지난 달에는 유독 복음주의와 그에 대항하는 사조에 관련된 책을 주로 읽었다. 쉽지 않게 읽었지만 그만큼 도움이 되었던 책들을 간략하게 나누고자 한다.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 Alister McGrath, IVP, 1997
‘미래’에 대해 논한 책을 출판된 지 10년이 지난 후에 읽는 일은 나름대로 묘미가 있다. Alister McGrath가 2005년에 ‘기독교의 미래’라는 비슷한 이름의 책에서 20세기를 넘어 21세기로 들어선 기독교의 미래에 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다루었다면,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에서는 20세기를 지나온 복음주의의 특징들을 정리하고, 이제는 기독교의 주류가 되어버린 복음주의의 매력과 잠재된 어려움 등을 이야기했다.


요즘처럼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10년이란 세월은 한 저자가 사용한 ‘미래’라는 단어가 ‘과거’ 혹은 적어도 ‘현재’가 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아닐까. 저자는 복음주의의 특징을 정리하고 많은 장점들을 이야기한 후에 (이 정의는 이 책 이후에 출판된 많은 책들에서 복음주의의 정의로 많이 사용되고 있었다), 복음주의가 미래에도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부족한 ‘영성’을 개발해야 하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분파주의를 주의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그러고 보면, 최근 10년간 유진 피터슨을 중심으로 복음주의 계열에서 영성을 그토록 강조한 배경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복음주의가 자유주의와 대항하면서 형성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이론화하고 지성화하면서, 기독교의 영적인 부분을 소홀히 했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고, 그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여러 노력들 중의 하나가 영성신학이 아닌가 싶다.


자유주의와 근본주의 사이에서 복음 자체를 지켜내기 위해 애쓰던 복음주의. 그리고 지금은 기독교의 주류가 되어 너나없이 복음주의자를 자처하는 시대를 사는 우리가, 진정 복음주의는 무엇이고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를 알기 위해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진리”, Lesslie Newbigin, IVP, 2005
작년, 10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면서, 열흘남짓 머무는 짧은 기간동안 기를 쓰고 기독서점을 다녀오겠다고 하는 바람에 가족들에게 핀잔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서점에서 눈에 띄어 구입해온 책 중의 하나가 바로 레슬리 뉴비긴의 ‘포스트모던시대의 진리’이다.


‘영국 국교회가 낳은 세계적인 복음주의 지도자’라는 호칭이 늘 붙어 다니는 레슬리 뉴비긴의 책은 현대 다원주의와 기독교에 대한 훌륭한 통찰력을 제공함에도 불구하고 늘 읽기 쉽지 않아 부담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 책은 적은 분량과 김기현 목사의 깔끔한 번역 덕분에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책의 내용을 요약한 역자의 표현이 탁월하여 그냥 빌려본다.


“선교사로서의 현장성과 학자로서의 학문적 분석과 적용이 탁월한, 영국 국교회가 낳은 세계적인 복음주의의 지도자인 레슬리 뉴비긴은 번뜩이고 탄탄한 논리로, 현대와 탈현대 세계에서 기독교의 진리와 권위의 원천을 분석하고 있다. 그는 현대사회가 이성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권위에 관한 모든 주장을 의심하고 있음을 간파한다.
그는 교회가 성경, 전통, 이성, 경험을 신적 권위에 대한 근거로 제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무엇보다 뉴비긴은 이것의 올바른 사용 방법과 서로의 관계를 모색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인이 이야기로서 성경을 말하며 그 이야기의 일부분으로 살아갈 때에야 현대 사회에서 복음의 적실성을 주장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책 뒤 표지에서>


다소 이론적인 글에 이어지는 결론 부분에서 저자는 포스트모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복음을 들고 나아갈 방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말이지 나도 이렇게 하고 싶어졌다.)


“최종적인 요점을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만약 포스트모던 세계에서 우리가 우리의 이야기를 하려면, 다음과 같은 답변을 듣게 될 것이다. “예, 물론입니다. 그건 당신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다른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왜 우리가 그 이야기를 믿어야 합니까?”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분명한 것은, 우이는 복음 이야기를 인증할 수 있는 것에 기초하여 몇가지 더 근본적이고 좀더 신뢰할 만한 진리를 제안하려는 유혹에 저항해야 한다. 분면 우리는 어떻게 성경 이야기가 다른 것으로는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인간의 삶에 의미를 가지는지 보여 주기 위해 노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우리가 그 이야기의 일부분일 때에만 확실해진다. 결국 우리가 그 질문에 대해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나는 내 공로와 무관하게 이 메시지를 전하고, 이 이야기를 말構? 이 초대를 전하도록 부름받고, 위임 받았습니다. 그것은 내 이야기도, 내 초대도 아닙니다. 강요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그것은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위해 자신을 주신 분의 초대입니다.” 그 초대가 만약 구세주의 은혜가 역사하는 공동체로부터 온다면, 매력적으로 다가 올 것이다. 받아들여질 지의 여부는 우리 능력에 달린 문제가 아니다. 그것을 염려하고, 안달하는 것은 믿음 없음의 표시다. 우리가 아니라 오직 초대하는 분에게 통솔권이 있다.”


“복음주의와 기독교적 지성”, Alister McGrath, IVP, 2001
책을 읽고 나서, 관련된 분야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책이 있다. Alister McGrath의 복음주의에 관련된 또 한 권의 책인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지성’이 바로 그런 류의 책이 아닌가 싶다.


– 이 책의 원제이다. 제목으로만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복음주의의 지적인 토대와 정합성, 학문적 타당성을 비판적이면서도 긍정적인 방향에서 고찰함으로써, 복음주의가 전통적으로 학계에서 보였던 부정적, 소극적 태도를 극복하고 주복할 만한 사상적 대안이 될 수 있음을 적극적으로 피력한다’


저자는 복음주의의 신학의 지적 정합성을 다루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성경의 권위를 이야기하고는, 현대에 복음주의와 경쟁 선에 있는 후기자유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종교 다원주의 등을 다룬다. 하지만, 내공이 많이 부족한 나는, 저자가 이야기하는 후기 자유주의에 대한 설명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저자도 ‘지켜보자’고 했지만, 그들의 사상을 왜 후기 자유주의라고까지 불러야 하는 걸까? 그저, 스탠리 하우워어스를 후기 자유주의의 대표적인 학자로 언급한 것에 조금 놀랐을 뿐이다.


개인적으로 눈에 띈 한가지는, ‘계몽주의가 복음주의에 미친 영향’에서, 현재 내가 하고 있을 법한 성경공부를 계몽주의의 영향에 의한 ‘다소 냉랭하고, 초연하며, 합리적으로 성경게 접근하게 만드는 영성관’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성경을 읽으면서 감정을 개입시키거나 인간의 상상력을 사용하는 것을 자제하고, 본문에서 주제를 뽑으려고 노력하는 방법이 상당히 계몽주의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늘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내용은 눈으로 확인한 기쁨을 누렸다고나 할까. 그나 저나, 이런 배경에서 유진 피터슨의 ‘이 책을 먹으라’같은 책들이 나오게 되었지 않을까 싶다.


“축복의 혁명”, 박철수, 뉴스앤조이, 1990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말은 기독교적 축복관을 갖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성경이 말하는 축복,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축복을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이 주시는 복과 다른 것을 구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성경이 말하는 복과는 전혀 다른 축복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중략) 무엇보다도 회개는 복의 내용이 바뀌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바뀌고,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바뀌어야 합니다. 빌립보서 3장 7절에서 사도바울을 지금까지 자신이 자랑으로 여기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모두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진정 회개한 자의 모습입니다.” (본문 중에서)


기독교 서적 사이트에 들러 베스트셀러 순위를 둘러보면 마음이 답답해지는 일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최근 몇년동안 그 현상이 더 두드러지지 않았나 싶다. 성경적인 복과 세상의 복을 구분해 내지 못하는 책들이 지속적으로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현 상황 속에서, 그런 세속주의적 가치관에 대항하는 책들을 발견하면서 느끼는 기쁨도 더 커지는 웃지 못할 일도 경험한다. ‘축복의 혁명’은 꽤 오래 전에 쓰여진 책이다. 하지만 어쩌면 작금의 한국과 미국의 주류 기독교에는 더 필요한 메세지인지도 모르겠다. 물질주의의 물든 기독교, 종교화하여 교회 건물과 목회자를 신성시하는 왜곡된 기독교의 문제점을 대단히 쉬운 필체로 이야기한다. 논조가 다소 강하다고 느낄지 모르겠지만, 한번쯤은 꼭 읽어 보기를 권하고 싶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