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선]제자삼는 사역이 나를 제자로

이코스타 2004년 4월호

내 자신도 캠퍼스 안에서 소그룹을 섬기고 있기에 매달 나오는 eKOSTA의 유학생사역 섹션은 나의 좋은 길잡이가 되어 왔다. 그랬던 곳에 나의 생각을 글로 옮길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캠퍼스 사역에 자신의 눈물과 시간과 열정을 쏟으시는 선배님들의 노하우에 비하면 내가 깨달은 것은 정말 작고, 부족하지만 내가 소그룹을 시작하면서 적용했던 것들을 소개하려고 한다.



나의 경우는 학교를 옮기고 새로운 환경에서 시작한 소그룹이기에 새로운 곳에서의 유학생 사역, 특히 캠퍼스 사역을 하시려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동기



새로운 곳으로 오기 전, 계속해서 제자 삼으라는 말씀이 한 학기 동안이나 귓가에 맴돌기 시작했다.



‘주님 내 삶에 주인 되시고’라는 찬양을 부르게 되었는데, …주 뜻 이루려고 날 예정하셨네, 오직 주님만 내 일생과 내 영혼의 주되시네 주 말씀 전하라 날 선택하셨네



주의 능력으로 인도하사 크신 이름 이루소서 의지합니다….



이때 정말 주 말씀 전하려 날 선택하셨네라는 꿈을 꾸면서, 뭔지는 잘 모르지만 내가 받고 있던 하나님의 은혜를 말씀으로 전해야 겠다는 소망을 품게 되었다.








그 시점 정들었던 DC에서의 2년간 생활을 뒤로하고, 새로운 학교인 Univ. of North Carolina at Greensboro로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말하는 유학생으로의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1. 한 명을 잡아라



모임을 시작하려면 나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캠퍼스에 대해 같은 비전을 품을 수 있는 동역자를 만난다면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나 싶지만, 이런 귀한 동역자를 찾기는 커녕 스타팅 멤버들도 만나기 힘든 것이 현실인 것 같다.



그래서 첨에 동역자를 생각하면서도 모임을 시작하기 위한 구성원들은 아직 미국에 유학온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을 주된 대상으로 하게 되었다. 보통 유학온지 얼마 되지 않은 학생들은 아직도 그들만의 시간 테이블을 무엇으로 채우려고 구상하는 반면에, 비교적 유학생활에 익숙해져 있는 학생들의 경우는 흔히들 말하는 바쁜 유학생활과 그 지역에 있어서는 어느덧 익숙졌다는 생각때문에, 새로운 모임이나



잘 모르는 누군가를 잘 따르려고 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자기들이 도와주려고 하지 어떤 새로운 질서에 편입되길 꺼려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약간의 어려움 점이 있기 때문에 기존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접근 하기 보다는 새로운 사람들 위주로 모임을 편성하기 휠씬 쉬운 것 같다.



나의 경우도 처음 와서 아직 유학생활에 자리잡지 않고 있는 사람들 대상으로 모임 구성을 했는데, 어떤 친구의 경우는 모임의 뜻은 좋지만, 유학생활에 자리부터 잡고 난 후에 성경공부를 하고 싶다는 애기를 했었다. 그래서 오히려 자리잡았을 때는 자기만의 시간 테이블을 다 채워져 난후라 뭔가를 집어 넣으려면 쉽지 않을꺼라는 전후 사정 애기를 했더니 자신도 그 부분을 이해하며 참여하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한 명씩 한 명씩 만나서 캠퍼스 성경공부 모임을 시작하게 된 인원이 5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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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팀웍을 형성해라 (같이하는 느낌)



시작하기로는 했지만, 이제부터는 누가 인도하느냐 어떻게 하느냐에 대한 문제가 이어졌다. 나의 경우는 전에 캠퍼스 소그룹 모임에서 양육을 받았기에, 그 성경공부의 모델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 모임에서 이렇게 했으니까 그 모임대로 거기서 했던 방식으로 해야 되다는 발언은 친구들에게 오히려 거부감이 들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이건 꼭 ‘내가 어디 캠퍼스 선교단체 출신인데, 우리도 그렇게 해야 돼’ 하는 식의 꼭 점령군 같은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전에 있던 캠퍼스 소그룹에 대한 이야기는 입에도 꺼내지 않았다.



그러면서, 꼭 누가 인도하고 가르치고 전한다는 표현보다는 서로 섬기고 같이 준비하고 나눈다는 어법으로 서로의 이해를 구했다.



그리고, 찬양할 수 있는 친구가 찬양을 준비했고, 그런 과정에서 수요일에 한번 더 모여서 기도모임을 갖기로 하고 온라인 상의 카페도 관리해야 하는 일등이 생겨 각각 한 파트씩 다 맡아서 하게 되었다. 그렇게 서로가 같이 준비해서 나누고 같이 만들어 간다는 느낌이 계속 형성되니까, 그것이 자발성으로 이어졌고 캠퍼스의 다른 지체들도 함께하는 모임으로 발전해 나아갔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28>



3. 지체들에게 동기 심어주기와 인도자의 목적의식 갖기



모임 안에서 정확한 목적의식 갖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고 쉽지 않은 문제인 것 같다.



우리가 세운 첫번째 기치로는 유쾌한 성경공부가 되자는 것 이였다. 비록 짧은 내 신앙생활의 경험이지만, 성경공부 하면 일단 재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신앙생활 오래한 분들도 성경공부는 재미없는 것쯤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성경공부에 대해서 지루하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모임의 동기를 줄 수 있는 것은 그런 부분을 깨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유쾌한 성경공부가 되도록 유도했고, 때마다 이 동기를 계속 심어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너무 유쾌하다 보니 웃다가 끝난 적도 여러 차례 있어서 반성을 여러 번 했던 적도 많은 것 같다.



그럼 여기서 어떻게 유쾌하게 모임을 유도하냐라는 질문이 생길 것 같다.



누구나 잘 알겠지만, 그것은 우리들의 관심사를 많이 끄집어 내어 말씀으로 연결시키는 것 같다.



특히 많이 했던 것은 청년들의 빅 이슈인 이성문제의 소재를 이용해서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연결 시켰던 부분 이였던 것 같다. 예를 들면 기도에 대한 주제가 나오면, 얼마나 해야 되며 등의 내용이 나오면 바로 이성 교제시 새로운 여자친구 사귀면 얼마나 전화통화 하냐라는 등등의 상황을 나누면서 결국 사랑하면 어떻게 되는가를 연결시키는 일들을 많이 했다.



사실 때로는 무리하게 연결시키다 보니 억지도 가끔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식으로 일단 모임을 편하게 만들기까지는 했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인도자가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오천명에게 이적을 베푸시면서 우리들의 필요를 채우셨지만, 제자들에게 항상 포커스하셨던 제자 삼기 위한 우선순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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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4. 심는자냐? 물을 주는자냐?



 1.0″>내게 소중한 캠퍼스 간사님 2분이 계신다. 지금도 항상 멘토로 형, 누나로 도움을 많이 주시는 분들이 .



신앙생활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을 때 만난 첫 성경공부의 간사님을 생각하면 죄송하지만 무엇을 배웠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기억 나는 것이 있다면 사도행전 배울 때 자기 이름이 성경에 첨으로 나온다고 기뻐하며 했던 말밖에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내가 확실하게 느꼈던 것은 이 간사님이 내가 하나님을 알았으면 하는 간절함 마음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임의 지체들을 모두 사랑했다는 것이다. 어느날 이메일함을 정리하다가 이 간사님이 보낸 메일들이 우리 어머니가 보낸 메일가 비슷하다는 것을 보고 어머니 만큼의 사랑이 날 변화시켰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두 번째 만난 간사님은 어찌나 유머와 말을 잘 하든지 그 때 배운 디모데전후서의 내용은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 작년에 고린도전서에서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 (고린도전서 3:6-7) 라는 말에 나에게 심는 자로서 물을 주는 자로써 도움을 주었던 그 두 분을 생각하고 정말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자라게 하셨구나 느끼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던 적이 있다.



그래서 항상 심는 자로서의 역할이냐 아니면 내가 물을 주는 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하나에 대해서 생각하며 모임을 섬기려 하고 있다.



5. 중립성을 지켜라



 1.0″>캠퍼스안에 학생들을 여러 가지로 분석해 볼 때 크게 교회 다니지 않는 친구들의 이유를 살펴보면 여 러 가지의 해석이 나온다. 특히 내 불신자 였을때의 유용한 경험과 그 부류의 친구들을 볼 때, 교회나 기독교인에 대한 편견이 있거나, 아니면 예수님이라는 분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접해 보지 못한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편견이 있는 친구들의 경우는 성경 공부란 교회에 데리고 가기 위한 교회 2중대쯤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이때 그들이 불편해 할 수 있는 요소들(교회에 나가자, 독선적인 것, 강요)을 보여주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려주는 것이다.



한번은 이런 식으로 전도하며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중요하지 교회가 뭐가 중요하냐, 그러다 교회 안가도 된다는 말까지 했었다. 사실 이것이 오해가 되어서 내 자신이 교회에 나가지 말라는 캠퍼스 사역자로 지역 교회 분들에게 뜨거운 오해를 샀던 적도 있었다.



그리고 모임 안에서도 밖에서도 성경공부만 나오고 교회에 나가지 않는 지체들보고 걱정과 우려를 하는 경향이 있는데, 내 생각에는 하나님도 모르는 친구들이 나와서 하나님 말씀을 입술로 읽고 배우고 있다는 자체가 기적이지 교회에 나가고 안 나가고는 그 이후에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캠퍼스 주변에 교회들이 여럿이기에 자칫, 섬기는 자가 이런 민감한 사안에서 중립성을 갖지 못한다면 잘못된 오해는 가지고 있는 지체들을 품기 어려울 수 있다.



그래서 세 번째 기치 중에 하나인 오직 하나님 편에만 서는 성경공부라는 것이 이래서 생겼다.



결국 세가지 기치 유쾌한 성경공부-동기부여, 참 제자되는 성경공부-우선순위 의식고취, 하나님 편에 서는 성경공부-본질을 통한 중립성확보로 이어지도록 하고 있다.



“주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잠언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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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온라인상의 활발함을 이용하여 모임의 활발함을 이끈다.



서로 팀이라는 느낌과 긴밀한 관계가 되지 못하면 그냥 형식적으로 모임에 나오고, 와서도 그냥 나누지 못하고 앉아 있다가 가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활용하고 있는 것이 온라인의 활발함을 유도해서 모임의 활발함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누군가 글을 쓰면 꼭 긴 답장을 달아주기보다 짧게라도 덧글을 달아주고 QT나눔의 경우는 릴레이식으로 하도록 유도하며, 한 주의 활동들을 사진으로 찍어서 자주 올리면 지체들은 어떤 것이 올라왔나 궁금해서라도 들어오고 모임이 있기까지 함께 움직인다는 느낌을 만들어 주게 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100번째 200번째 글을 올리는 사람에게 상품(간사가 식사 한끼 대접등)을 주는 것이라든지, 그 주 했던 성경공부 모임 때의 사진을 찍어서 첫 화면에 올리는 것등이다. 



하지만 1/3 법칙이 있듯이 1/3은 활동하고 1/3은 들어와서 보기만 하고 1/3은 관심 없는 현상이 나타난다.



결과들



제자를 삼으려고 시작한 캠퍼스 사역이 결국 나를 제자로 만들었다.



여기에서 캠퍼스 모임을 통해서 말씀 전하고 예수님 따르기를 결단하는 몇몇 친구들을 나타났고, 그 친구들 중에 하나가 세워져서 지금은 이 모임을 섬기고 있으며 난 다른 캠퍼스에서도 새로운 모임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외형상의 결과 보다는 제자를 삼으려고 했던 것이, 언제가부터 이 캠퍼스에서의 사역을 통해 내가 제자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 이였다.



찬양할 때, 기도할 때에도 성령님의 살아계심을 느끼지만, 무엇보다도 내 입술에서 하나님 말씀이 나갈 때 내 안에 강하게 움직이시는 성령님의 느낄 수 있었고, 그렇게 한 주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며 산다는 것이, 제자 삼는다는 것과 제자 되는 것과 동일한 가치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성화란 끝이 없지만, 내가 직접 제자 삼으려 할 때 내 신앙의 자체도 제대로 살아날 수 있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율법책을 입에서 떠나지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가운데 기록한대로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길이 평탄하게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여호수아 1:8>



 



새소망



캠퍼스 사역을 했던 것이 신앙생활 한지 2 년째 되는 때였다. 그냥 학교 다닐 때부터 서클 만들기 좋아하는 내가 예수님 만난 열정으로 성경공부 모임을 만들면서, 내가 제자 되어 갔던 놀라운 일들을 생각하면, 그 분을 알기에 두려운 마음이,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여주셨던 일들 그리고 보여주실 일들에 대한 기대가 내 마음 속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자신이 그분에게 정결하게 서고 싶다는 새 소망이 생겼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흠이 없고 순결해져서,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것입니다” <빌립보서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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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형]캠퍼스 사역과 교회와의 협력

이코스타 2003년 12월호

그리스도의 몸은 2-3명의 지체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모일 때 형성됩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몸이 표현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구조와 질서를 필요로 합니다. 바로 지역교회나 캠퍼스 미니스트리와 같은 조직들을 그분의 몸의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구조나 사역의 접근방법을 취하든 그리스도의 몸은 성장해야 하고 성장은 제자를 삼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지역교회는 선교의 모든 분야와 모든 대상을 목적으로 지역적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세상에 표현된 예수님의 몸 중 가장 기본적 단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캠퍼스 선교에서 사역하는 지체들이 대부분 지역 교회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역교회는 肩?특수 선교에서 사역하고 있는 사역자들을 포용하고 더 나아가 돌볼 수 있는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각 사역들이 가진 특성들이 오랜 시간 지속되다 보면 서로의 장점에서 배울 수 있는 부분들이 오히려 서로의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지역교회는 갓 태어난 어린아이부터 나이 많은 노인분들까지 돌보며 또 교육과 지역봉사 등등을 감당하며 사회 각계 각층이 모이는 하나의 공동체로 자라가려면 많은 인내와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특히 이민 교회의 경우 한인들간의 친교를 도모하려는 경우가 많아 전도와 제자 삼는 사명에 대한 의식이 희미해져 있습니다. 미국주류사회에 진출하지 못하고 소외된 한인들에게는 교회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사회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런 분들이 중심이 되어 있는 교회는 행사위주이며 권위주의적 체제로 운영되기 쉽습니다.



반면에 캠퍼스에서 사역하는 자들은 특별한 사명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동참하지 않습니다. 또한 목적의식이 뚜렷하고 말씀에 붙들려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외로운 생활을 오래 해야하기 때문에 외곬수적인 성격을 가지게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전도의 대상도 젊은 사람들이고 지역교회에 비하면 훨씬 더 균일화되어 있어서 빠른 시일 내에 제자훈련도 가능합니다. 자신들의 시간을 쪼개가며 헌신하기 때문에 캠퍼스 사역 이외에 자신들과 같이 제자 삼는 일과 전도에 집중하지 않은 지역교회의 모습에서 회의를 많이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교회 행사들은 하나의 사치스러운 일들로 간주하기 쉽습니다.



이런 분위기 가운데서 지역교회는 캠퍼스 사역자들을 포용하고 돌보기보다는 하나의 얄미운 존재로 간주하기 쉽습니다. 지역교회 운영 자체에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하는데 캠퍼스 사역자들은 이에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하기보다는 오히려 있는 노동력마저 무기력하게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코스타 참석 후 복음의 참된 의미를 깨달은 교회내의 청년들이 그럴 때가 많습니다. 캠퍼스 사역자들에게는 지역교회에서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사역이 본질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이 하는 일을 포기하며 도저히 동참할 수 없는 입장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이 두 사역이 서로 협력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나갈 수 있는 것일까?



첫째, 목적의식의 공유이다. 만약 지역교회나 캠퍼스 사역의 목적이 전도와 제자 삼음에 있지 않으면 서로 협력할 필요가 없고 각각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담당하면 됩니다. 상호간의 협력은 목적 공유가 필수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중심으로 제자 삼는 일이 교회의 가장 핵심 된 목적이 되어야 하고 모두가 이에 동참해야 합니다.



둘째, 서로에 대한 이해이다.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는 한 서로의 접근방법과 대상이 다른 것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캠퍼스 사역자들은 교회가 단기선교나 특별 부흥집회등에 큰 가치를 부여하는 것에 대하여 그 나름대로의 유익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 주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캠퍼스 사역자들이 일주일 내내 자신의 자유시간 없이 선교지에서 수고하고 땀을 흘리는 것을 위로까지는 못해주어도 알아야 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교회사역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마음이 없어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사역의 가장 핵심적인 사역을 이미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서로의 사역에 대한 존중이다. 제자가 삼아지는 한 서로의 사역에 대하여 협력하되 필요이상으로 간섭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오히려 상호간 장점을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교회에서는 쎌 처치의 방법을 캠퍼스 사역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해 오던 소그룹중심의 사역의 경험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반면에 캠퍼스 사역자들은 교회 안에 있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의 신앙관과 생활도 용납하고 기다려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미 나이 드신 분들은 혹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고 있다해도 이를 바꿀 수 없기 때문에 포용해주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서로의 사역에 대하여 존중하게 될 때 자신의 사역에 동참시키기 위해 다른 사역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게 됩니다.



아쉽게도 현실적으로 셋째 단계에까지 이르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래서 지역교회와 캠퍼스 사역간에 많은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현재 미국에 있는 한인 기독인들의 현실입니다.



한가지 좋은 예



워싱턴 디씨에 있는 한 교회는 이런 갈등을 점진적으로 해결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교회는 그 지역 캠퍼스 사역의 근거지 역할로 사용되며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청년층을 포용하려고 노력합니다. 오늘 이런 발전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 교회 담임 목사님과 캠퍼스 간사들의 헌신과 신념입니다. 그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캠퍼스 간사들은 수년동안 조용하게 캠퍼스에서 헌신하며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고 그 담임목사님은 그들을 뒤에서 알게 모르게 도우시며 또 이런 그들의 열매를 보시며 그들이 교회에 들어올 수 있도록 포용하신 것입니다. 그 방법은 그들의 사역을 인정해주고 가끔씩 직접 캠퍼스에 오셔서 말씀도 전해 주시고 그들이 교회에 평안하게 예배드릴 수 있도록 반갑게 늘 맞이해 주신 것입니다.



가장 최근에는 교회에서 주일에 또 하나의 예배를 시작하시면서 그 예배의 모든 운영과 진행을 캠퍼스 간사들이 중심이 된 청년들에게 맡겼습니다. 그 담임 목사님의 신념은 청년들이 전도되어 제자로 자랄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캠퍼스 사역이 교회의 청년사역과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기 시작하고 교회에 청년층이 자랄 수 있는 좋은 바탕을 형성하였습니다. 캠퍼스 간사들은 자신들이 캠퍼스에서 하던 제자 삼는 일을 이제는 교회 안에서도 쎌 처치의 형태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교회에 오는 청년들은 (물론 캠퍼스 사역을 통하여 오는 경우가 대부분 이었지만) 캠퍼스에서든 교회 안의 쎌에서든지 훈련받을 수 있는 선택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이 교회에는 오래 전부터 주일 저녁예배도 없애고 가능한 한 행사를 하지 않습니다. 가족끼리의 시간과 세상에서의 빛으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비 본질적인 것은 제거한 것입니다.


이런 결정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담임목사님으로서는 자신의 영향력을 스스로 제한시키는 것이며 불확실성에 사역의 일부를 내어놓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내에 또 청년사역을 탐하는 많은 사역자들을 물리쳐야 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들을 설득시켜야 하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없거나 자신의 유익보다 그리스도의 유익이 앞서지 않으면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자신 (혹은 우리)만이 할 수 있다는 교만이 없어지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성장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캠퍼스 사역자들이나 캠퍼스에서 훈련받은 자들이 40-50대까지 캠퍼스에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시간이 되면 그 누구보다도 더 잘 훈련된 교인의 한 명으로 그 교회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하나님의 일군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일형]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생명을 줍니까?

캠퍼스 사역 Q&A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생명을 줍니까?


신명기8:3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을 낮추시고 굶주리게 한 후 만나를 먹게 하신 이유를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을 가르치게 하시기 위해서였다고 기록합니다.


우리를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보기 위해서 중요한 필요 조건인 것 같습니다. 낮아지고 굶주릴 때 자신의 생존을 위한 기본조건이 결여되기 때문에 그때 비로소 전혀 의식하지 못하던 이 세상의 본질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당연시 여기던 일들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이 세상이 보이는 것으로 말미암아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창조되었음을 알게(믿게) 됩니다.


먼저 생명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생명은 피조물에게 있어서는 창조의 틀(framework) 안에서만이 설명될 수 있는 개념 입니다. 우리가 현존하고 있는 창조의 틀 안에서 원래 창조될 때 define된 기능을 발휘할 때 “생명이 있다” 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생명은 원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원인/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바로 그 원인이 하나님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창1:30; 2:7).


모든 생명체는 미리 규정된 범위 안에서 활동을 합니다. 사자는 하늘을 날수 없고 참새는 얼룩말을 잡아 먹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바로 하나님께서 식물과 동물들을 각각 그 종류대로 창조(define) 하셨다고 설명하심으로 각각 창조 안에서의 주어진 활동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창1장).


생명이 창조의 틀 안에서 설명될 수 있듯이 생명의 유지도 창조의 틀에 의존할 때만이 가능합니다. 모든 생명체는 창조 안에서 음식을 섭취하고 신진대사를 함으로 생명을 유지합니다. 창조의 틀에서부터 자신에게 필요한 물질을 섭취하며 생존합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창조과정을 설명하면서 바로 하나님께서 창조의 질서를 만드시고, 기본 틀을 잡으시고 (이사야48:13) 마지막으로 그 틀 안에서 생명체들을 만드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1장). 이는 생명체가 창조 안에서만 존재하는 피조물의 제한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욥 38장).


창조의 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생각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것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또 같은 말씀이 모든 생명체의 생명을 공급하는 근원입니다 (요1:3-4). 그러므로 창조의 틀은 바로 하나님의 생각의 표현이자 곧 말씀의 작품입니다. 창조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즉 의지의 표현으로 지금도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1:3). 그러므로 모든 생명체는 바로 하나님의 뜻의 계속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호흡하고 의식이 있다는 자체로 생명이 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사람의 창조의 틀에서의 그 창조의 목적에 합당한 역할을 이행할 때 비로소 그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육신의 세계 안에서 단순하게 호흡하고 의식이 있어도 생명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때에 생명이 의미하는 것은 원래의 생명의 뜻이 아니라 육신의 세계 안에서 국한된 생명의 개념입니다.


인간은 단순히 육신의 세계 안에서 만의 생활을 위하여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세계는 창조의 틀의 subset 입니다. 그러므로 원래 창조의 틀에 맞게 규정된 인간이 subset에 국한되어 생활할 경우 창조의 틀의 생명이 있을 수 없습니다. 육신의 세계 안에 국한된 의식이 창조의 틀 안으로 팽창하고 그 창조의 틀에 의해 규정된 생활을 하게될 경우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 창조의 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히11:1).


창조의 틀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고 있을 때 참 생명이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세계는 잠시 있다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육신의 세계에 육신이 제한을 받고 살고 있지만 참 생명을 얻은 사람은 육신의 세계가 없어질 때 같이 없어지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전달되고 우리의 뜻이 하나님께 전달되는 것입니다. 서로의 교통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뜻이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까지 전달되는 것입니다.


참 생명은 말씀을 통하여 유지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을 말씀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을 거절했음으로 육신의 세계에 국한되어 버린 인간의 의식수준에 하나님의 뜻이 표현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이 세상에 없어지고 사단이 제시해 주는 세상의 형상이 인간의 의식을 점령해 버렸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육신이 되셔서 인간의 육신의 세계 안에 표현되셨습니다 (요1:14). 그리고 자신이 바로 하나님께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길” 이리고 말씀하셨습니다. 길을 가르쳐 주는 분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진리”, 즉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붙어 있는 사람들은 말씀을 공급받게 됩니다. 그리고 말씀 안에서 자신을 다시 찾게 되는 것입니다 (빌3:9). 즉 육신의 세계 안에서 자신의 identity를 이해하고 있다가 그리스도 안에서는 창조의 틀 안에서 자신의 참된 identity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육신의 세계 안에 거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육신의 음식을 계속 섭취함으로 우리의 육신을 계속 유지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제 원래의 창조의 틀 안에 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whole being이 음식을 섭취해야 합니다. 바로 창조의 틀의 음식은 창조의 틀을 유지하는 근원이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한 번 진리를 받아들임으로 창조의 틀에서의 생활이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진리의 놀라운 보화를 질그릇에 받았기 때문입니다 (고후4:7).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따라 주시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함으로 매일 나아가야 합니다 (히4:16).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의식 안에 들어와 우리의 삶의 영역이 눈에 보이는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틀에 의하여 지배될 때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까지도 온전히 지배하여 온전하게 표현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생명이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이일형] 십일조는 꼭 지역 교회에 바쳐야 합니까?

캠퍼스 사역 Q&A


십일조는 꼭 지역 교회에 바쳐야 합니까?


모세의 율법 이전에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왕에게 자신이 전쟁에서 탈취한 재물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으로 성경 안에서의 십일조의 역사는 시작됩니다(창14:18-24). 야곱도 역시 벧엘에서 돌단을 쌓으면서 십일조를 바치겠다고 언약하는 장면을 창세기에서 볼수 있습니다(창28:20).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고대 문명에서 십일조를 바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었음을 이런 믿음의 조상들의 행동을 통해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십일조에 관한 유래나 특히 제사와의 관계에 관한 측면에 대하여는 정경 외의 전문 지식이 없으므로 이곳에서는 성경에 나와 있는 십일조에 관한 내용 가운데 핵심적인 부문 몇 가지만 살펴 보겠습니다.


우리는 모세의 율법에서야 비로소 십일조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매년 십일조를 바치고, 그 바친 십일조를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장소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 가운데 기쁨으로 먹으라고 하십니다 – 희생 제사 식사(신14:22-27). 동시에 함께 유하는 레위인들, 곧 기업을 따로 받지 못한 사람들을 잊지 말라고 하는데, 이런 행위는 하나님 경외함을 배우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또한 매 3년마다 각 성에 십일조를 쌓아 두어 레위인이나 고아와 과부들과 같은, 자기 몫을 생산할 수 없는 사람들이 충만히 먹을 수 있도록 하라고 하십니다(신14:28-29). 그러면서 레위인들에게는 하나님이 그들의 기업이 되기 때문에 앞에서 언급한 대로 나머지 11개 지파가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를 가지고 살라고 하십니다(민18:20-29) . 그것은 그들의 노동, 곧 하나님의 제사를 수행하는 일에 대한 대가입니다. 특히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에는 매 3년마다 바쳐야 하는 십일조에 대하여만 언급하고 있습니다(신26:12-15). 그런 후 이스라엘 백성이 타락하여 하나님을 멀리함과 동시에 십일조에 대한 언급이 없다가 히스기아왕 때에 잠시나마 다시 부활됩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총 유동적 재산의 십일조를 드린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대하31:2-8).


그런데 (위에서 보았듯이) 십일조에 관하여는 두 가지 불확실한 부분이 있습니다. 첫째 십일조를 매년 드리는 것인지, 매 3년마다 드리는 것인지에 대한 문제입니다. 특히 히스기아왕 이후 바벨론에서 돌아왔을 때 느혜미야는 십일조를 매년 바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봅니다(느10:35-39). 반면 아모스는 3년에 한 번 드리는 십일조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습니다(암4:4). 둘째는 십일조의 용도에 관한 문제입니다. 십일조는 확실하게 하나님께 바친 이후 레위인, 과부, 고아 및 체류인들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음을 성경은 말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십일조를 바친 사람까지도 자신의 십일조를 하나님 앞에서 함께 즐기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여러 그룹들 간의 분배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특히 사무엘상에 보면 이스라엘 왕을 세울 경우 십일조가 왕에게 바쳐지게 될 것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습니다(삼상 8:15-2). 오늘날과 비교하면 이는 국가를 운영하기 위한 세금과 비슷한 개념입니다. 레위인들에게 주게 되어 있던 십일조의 일부도 그들의 수고에 대한 대가, 즉 왕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대한 대가이었음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과도 동일한 개념입니다(고전 9:3-5). 십일조는 또한 생활의 부족함이 있는 자들을 위함임도 분명합니다. 단, 이때의 부족함이란 자신의 게으름이나 잘못으로 인한 부족함이 아닌 경우에만 해당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신약으로 오면서 십일조의 참된 개념이 점진적으로 형성되어지는데, 이는 곧 청지기의 개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타락한 유대교의 십일조에 대한 관행을 모델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지도층은, 그것이 종교이든 정치이든 관계 없이, 모든 것을 자신들의 유익을 위하여 해석하고 집행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일조의 중요성 그 자체를 강조하기 보다는 율법의 참된 의미에 대한 이해와 그 실천을 강조하시며 십일조를 그런 테두리 안에서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마23:23-24). 이는 말라기에서 말하는 온전한 십일조를 더욱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말3:8-12). 십일조는 단순한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올바로 관리해야 하는 “책임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그 물질의 “주인”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에게 맡겨지는 물질을 잘 관리하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십분의 일을 구분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행위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가장 기본적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십분의 일을 바치는 단계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참된 청지기는 자기에게 주어지는 것이 많든 적든 자신이 진정으로 필요한 것만 쓰고 나머지는 주인의 것으로 계속 간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지는 부를 율법적으로 십일조를 제외한 후 다 자신을 위하여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이는 율법의 참된 의미를 상실한, 마치 타락한 유대교의 관례와 같은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를 제외한 나머지도 다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쓰여져야 합니다. “하나님께 바친다”는 뜻과 “하나님을 위하여 쓴다”는 의미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바친다”는 뜻은 또한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과 “이웃을 위하여” 사용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십분의 일을 의미하기보다는 수익의 십분의 일 “이상”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십일조가 매년 혹은 매 3년마다 바쳐져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이제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은 복음이 전파되어 제자들이 양육되는 일입니다. 이를 통하여 정의가 실현되고 진실이 인정 받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사회 안에서도 구체화될 수 있습니다. 이웃을 위하여 십일조를 사용한다는 뜻은 구약에서 수 차례 언급된 것처럼 자신의 능력의 부족으로 생활이 되지 않는 사람들(예를 들어 고아와 과부들)과 또 세상적으로 금전적 보수가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만 전념하는 사람들(목회자, 선교사, 선교단체의 간사 등)을 위하여 사용하라는 뜻 입니다.


지역 교회가 참된 교회의 역할을 수행한다면 십일조를 교회에 내야 하는 것이 우리에게 마땅한 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성”으로 인해,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결국 십일조를 사용할 가능성이 항상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역 교회가 참된 교회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지역 교회가 참된 교회의 역할을 하지 못할 경우에는 십일조를 자신이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바쳐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개인적으로 아는 선교사를 지원한다든지, 캠퍼스 간사나 주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한다든지, 아니면 자신의 선교 사업에 사용하는 것도 다 합당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자신이 속해 있는 지역 교회의 유지를 위하여도 기본적인 물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만약 기본적 유지도 힘든 경우라면 우선적으로 지역 교회에 십일조를 바치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역 교회는 우리가 이 땅에서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기본이 되는 체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지역 교회에 십일조를 드리고 그 지역 교회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든지 관계하지 않는다면 이는 무책임한 신앙관입니다. 교회는 바로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교회의 지체 입니다. 예수님께서 “머리”이시고 우리가 각 “마디 마디”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바로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일형] 교회 봉사는 꼭 해야 합니까?

캠퍼스 사역 Q&A


교회 봉사는 꼭 해야 합니까?


교회 봉사를 해야 하느냐의 질문을 다루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 봉사의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의 목적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요점만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복음서에서 교회라는 단어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곳에서 처음 언급됩니다(마16:18). 여기서 사용되는 헬라어는 ekklesia로서 ek(a primary preposition denoting origin, i.e., the point whence action or motion proceeds)와 kaleo(to “call”, i.e., properly, aloud, but used in a variety of applications, dir. or otherwise)의 복합어인데, 이 단어는 a calling out, i.e. a popular meeting, especially a religious congregation(Jewish synagogue, or Christian community of members on earth or saints in heaven or both)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Source: Biblesoft’s New Exhaustive Strong’s Numbers and Concordance with Expanded Greek-Hebrew Dictionary. Copyright (c) 1994, Biblesoft and International Bible Translators, Inc.).


성경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엡1:20; 3:10-21; 5:23-32).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붙어있는 모든 자들의 집합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신약에서 교회에 대한 언급은 많이 나오고 있으며 특히 사도행전에는 지역 교회를 칭하는 경우가 많은데, 지역 교회는 이런 그리스도의 몸이 구체적으로 이 세상에 표현된 하나의 subset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온전한 교회는 예수님의 재림 이후에 세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동안은 교회는 그 머리이신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으며 또한 지킬 때만 그 머리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명령은 말씀을 묵상하지 않는 자에게는 불가능한 일 입니다.


교회가 맡고 있는 책임은 바로 제자 삼는 일 입니다. 마태복음 28장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모아 놓고 (여기서 제자들의 모임은 교회입니다) 하신 명령은 바로 제자 삼으라는 것입니다. 명령을 이해하는 과정 가운데 각 지체의 회복으로 말미암은 참된 교제와 나눔이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런 나눔 가운데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주는 일과 교회 밖의 사회에서의 빛과 소금의 역할도 감당하게 됩니다. 이런 교회의 역할은 각 지체들이 말씀 가운데 설 때 이루어지는 자연적 결과들입니다. 물론 각 지체의 불완전함(죄성) 때문에 많은 갈등이 있을 수 있으나 이는 교회의 성장의 자연적인 부분입니다. 각 지체의 성화는 곧 교회의 성화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교회의 팽창은 지체들이 증가할 때, 즉 제자의 수가 더할 때, 이루어집니다.


육신의 세계 안에서 현존하고 있는 한 현재 지역 교회와 para-church의 체제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현재 지역 교회는 지역 중심으로 몇 사람들이 모여 신앙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전도하고 제자 삼는 일을 함으로 그 지역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하나의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그 지역이 있는 사회와 문화 등등 많은 요소들에 의하여 지역 교회의 특성들이 형성될 것입니다. 또한 이런 지역 교회 간의 협력을 통해 국가적 차원의 중요한 일에도 한 목소리를 냄으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 또한 교회는 일반 지역에 국한된 전도보다는 특수 지역, 혹은 특별한 목표를 가지고 형성된 신앙의 공동체인 para-church도 포함 합니다. 캠퍼스 미니스트리나 선교 단체들이 모두 이런 para-church에 속합니다.


교회(지역 교회 및 para-church)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질서가 필요합니다. 이런 질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각 지체들의 역할들을 규명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기본적 질서는 규모가 작을 때는 informal한 이해 관계에 의존할 수 있지만 규모가 커지면 질서를 체계화시킬 필요가 생깁니다. 즉 하나의 체제(institution)를 형성하는 것을 말하며 이는 효율성을 위함입니다. 예를 들어 일요일에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가 필요하고, 성가를 부르는 성가대원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예배의 형식에 따라 또 그 신앙의 공동체의 목적에 따라 각기 다른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이런 기능을 수행하기 위하여 각 지체들이 의견을 조율하여 하나의 체제를 만들 필요는 있습니다.


교회 봉사는 교회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각자가 맡은 책임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봉사(service)라는 단어에는 보수(return)가 없는 노동(labor)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헌신의 요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 봉사는 헌신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일 부분 입니다. 교회 봉사는 궁극적으로 제자 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받은 은사가 다른 만큼 맡은 직책이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받은 은사에 따라 자신이 직책을 찾아야 합니다. 물론 신앙의 선배 분들의 의견을 참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직책은 지역 교회 안에 국한된 일일 수도 있고 para-church를 통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봉사는 궁극적으로 제자 삼는 일이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하는 일 입니다.


올바른 교회 봉사를 하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에 굳게 서서 성령님의 음성에 민감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직접적 지시를 받아야 합니다. 지시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외에는 없습니다. 물론 신앙이 어릴 때는 선배 분들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만 결국에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홀로 서서 지시를 받아야 합니다. 이제는 구약시대처럼 우리들에게 우리와 같은 인간이 중계자 역할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봉사를 할 때 교회의 질서를 존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무질서한 행위는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질서는 인간 사회의 가치관에 의한 위계 질서가 아닙니다. 자신의 직책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함께 동역하는 자들과의 화목과 협동, 그리고 서로 섬김으로 말미암아 형성되는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의 질서입니다.


말씀의 묵상과 성령님에 대한 민감성이 없이는 참된 봉사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죄성 때문에 자연적으로 보다 구체적인 체제를 형성하려는 성향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각 지체들의 타락된 마음의 성향이 반영되어 사랑과 섬김의 체제보다는 명예와 다스림의 체제를 이루어 갑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보다는 인간의 정치적 감각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는 경우가 많고 참된 제자 삼는 목적보다는 종교 집단을 만들려 하는 강한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성향을 대적할 수 있는 방법은 각자가 말씀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이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과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교회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우리에게 봉사가 강요될 때 사랑으로 이겨야 합니다. 특히 교회의 각 지체들이 아직은 모두 불완전한 상태에 있습니다. 또한 참된 제자의 삶을 살 수 있는 인식도 없는 상태이며 교회의 참된 목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일부는 교회 운영을 ‘멋있게’ 하여 많은 사람들이 나오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고, 또한 활동을 많이 하여 지역 교회의 일에 시간을 많이 투자하게 하는 것이 교회 봉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섬김과 겸손에 근거한 질서가 아닌 인간의 권력 중심의 위계 질서로 사람들을 괴롭히고 잘못된 가르침으로 자신들을 대항하는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통하여 순종하게 합니다. 또한 본질적으로 가치가 없는활동을 다수의 의견들을 모아 한 사람들에게 무언중 강요합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처한 참된 제자는 이런 자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받아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을 받아 주는 것이 그들의 잘못된 의견에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기다려 주시는 것처럼 인내하며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해야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핍박을 받더라도 끝까지 사랑하며 우리가 해야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