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 10, 2003 | 책이야기/eKOSTA 서평
얼마전에 들은 이야기다.
Q: 혼자되신 할머니 권사님과 설교를 잘 못하시는
목사님의 공통점은?
A: ‘영감’이 없다.
영
감을 얻기란 쉽지않다. 하지만 좋은 신앙서적은 영감의 원천이라 할 수 있겠다. 이번달에 소개하는 책, “빛, 색깔,
공기”(김동건, 대한기독교서회, 2002)는 우리에게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해 영감을 주는 책이다. 먼저 저자의
말로써 이 책이 어떻게 책으로 나오게 되었는가 살펴보자.
”
나는 원래 이글을 책으로 낼 생각은 아니었다. 아버지께서 암에 걸리셨을때, 만약 우리 가족이 아무런 고통없이 그 모든 어려움을
단숨에 헤쳐나갔다면 이 책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와 우리는 이 사실을 신앙적으로 받아글이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이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다”
이
책은 간암에 걸린 아버지을 바라보는 둘째 아들이 쓴 병상일지라 할 수 있다. 아버지의 마지막 4개월을 지내며 아들와 아버지가
나눈 대서, 그리고 그 병상의 아버지를 바라보는 가족들의 이야기가 이 책의 내용이다. 아버지는 김치영 목사, 둘째아들은
김동건교수(영남신학대학교), 두 신학자가 겪은 삶과 죽음의 이야기이다.
“어떤 시련 앞에서 겪는 고통에는 모두 차이가 없다. 그러나 그 시련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각기 다르다.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차이도 결국 그들이 삶을 어떻게 보며,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달려 있다.” (김동건교수)
이
책은 많은 암투병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극적으로 암을 이기고 건서을 되찾은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한 신앙인과 그의
가족이 마지막 순간까지 삶에 의미를 부여하며 죽음을 받아드린 과정들이 그려져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의 생의 마지막 순간에
여러가지 삶의 문제에 대해 깊은 통찰을 나눈다.
고통에 관해서..
”
고통을 겪는다는 것은 기독교인도 예외가 아니다. 고통을 겪는 다는 사실에는 비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차이는 없지. 그러나 고통에
임해서 기독교인이 가져야할 차이가 있다. 기독교인에게 고통은 육체의 고통으로 끝나야한다. 우리는 고통이 올때, 신음할 수 있다.
고통을 호소 할 수 있고…. 이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불평과 절망이 되고, 그 고통이 허무감으로
연결된다면 이는 불신앙이다.” (김치영목사)
심한 고통 속에서 곧 다가올 죽음을 앞둔 이에게 그의남은 생은 어떤의미를 부여 할 수 있을까? ”
나는 요즘 인간의 삶을 여행에 비유해 생각해 보곤 한다. 인간은 두가지 여행을 한다. 한여행은 육체를 입고 이세상을 사는 것이고
다른 한 여행은 부활체로서 영생을 사는 것이다. 나는 70여년간 살아온 하나의 여행을 마치고 다른 하나의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나는 지금 내가 겪고있는 이고통을 이 세상에서의 여행을 정리하고, 주님께 나아가는 새로운 여행을 향한 고통이라 생각한다.”
(김치영 목사)
죽음의 본질에 대해…
”
십자가 속에 있는 바울에게는 죽음이 무엇인지 환히 보였어. 죽음의 본질이 너무 환히 보여 너의 쏘는 것이 어디있드냐고 조롱 했던
것이다. 바울은 죄의 삯에 의한 죽음을 조롱했다! 오늘 저녁 나에게 바울의 말씀이 그냥 전해지는 구나. 그 쏘는 것이 다 빠진
죽음, 이제는 증오스러운 것이 아니라, 친숙하고 친근하게 맞아진다. 이제 죽음은 그 쪼는 것이 빠져버린, 부활을 향한 하나의
과정 일 뿐이다.” (김치영 목사)
병상에 비친 옅은 햇빛을 보며…
“어때! 빛이다. 그렇지?” (김치영 목사)
달란트에 대하여..
”
나는 달란트는 어떤 재능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삶 자체라고 생각해본다…중략…무엇을 배워서 어떻게 써먹을 지만 생각하면서,
우리 생명을 통해 배우고 깨달을 수 있는 많은 것을 포기하는 자가 바로 달란트를 묻어둔 자이다. 호흡이 남아 있는 동안 좀더
느끼도 배우고, 좀더 웃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며, 좀더 기도하고 봉사하는 것, 그자체가 우리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사용하는
것이리라.” (김동건교수)
문
제없는 인생은 없다. 우리 코스탄에게도 산적한 문제가 있으리라. 지도교수와의 문제, 경제적 문제, 학업문제, 결혼문제…
이러한 문제의 끝, 문제의 최고봉이라 할수 있는 죽음을 예수님께 해방시키셨다. 이제 정말 남은 문제는 앞서 저자의 말처럼,
주어진 상황가운데 내가 얼마나 그리스도인 답게 반응하느냐 일 것이다.
사족1: 고인이 되신 김목사님이 고통의 순간에 붙들었던 탁상시계가 있었단다. 이시계 뒤에는 다음과 같은 성경구절이 있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도[비록 지금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베드로 전서 1장 8절).
Without having seen him you love him: though you do not now see him,
you believe in him and rejoice with unutterable and exalted joy. 그는
숨질때까지 이 구절을 ‘붙들고’ 있었다.
사
족2: 아마도 이책을 골라 읽게 된 계기는 얼마전 10년간 암으로 고생하시다가 결국 백혈병으로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의 영향이
있을 것이다. 요즘도 종종 아버지 생각을 한다. 이미 천국 가신 아버지로 말미암아 나의 삶이 풍요로와 짐을 경험한다. 아버지가
나에게 주신 마지막 선물일 것이다.
Oct 9, 2003 | 삶과 신앙/한국인과 예수인
한
번은 어른 목사님들과 같이 미 동부 필라델피아의 한국 식당을 갔다. 어르신 목사님께서 주문하셨다. “여기 식당에 회 덮밥, 빨리
나오지요?” 말 떨어지자 말자, 기다렸다는 듯이 너도나도 회 덮밥이다. 먼저 와서 멋모르고 다른 것을 시킨 사람들도 슬금슬금 회
덮밥으로 바꾼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었다. 난 그 날 정말 회 덮밥 무드가 아니었다. 아랫배에 살짝 힘을 주며 떨리는 목소리로
냉면 곱빼기! 주문하는 순간, 방안의 체감 온도가 냉랭하게 내려감을 느꼈다. 그 날 냉면은 무척 춥게 먹었다. 미국에서 찍히던
순간이었다.
그
로부터 1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이제는 아무도 음식점에서 어른의 눈치를 보면서 주문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 있으면 고지식하고 주체성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자기 구미 당기는 대로 주문을 해야,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은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다양성의 강요도 또 다른 종류의 획일성일 뿐이다.
미
국에 와서 산 지 20여 년이 되지만 지금도 어색한 것은 미국 식당에서 음식 주문이다. 계란 하나를 주문해도 유정란, 노
콜레스테롤 일반계란, 익히는 것도 반숙, 완숙, 노른자 그대로, 노른자 뒤집기, 스크램블드, 그것으로도 끝나지 않는 수도 있다.
후추를 넣어, 말아? 치즈 얹어 줘, 그냥 줘? 토스트는 어떻게, 잼은 어떤 잼, 시럽은 무슨 시럽, 감자는 어떻게, 마치
취조관에게 심문 당하듯 진땀을 뻘뻘 흘린다. 영어가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소소한(?) 것까지 선택을 강요받는다는 느낌은 세월이
흘러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어색하고, 때로는 귀찮기까지 하다. 산술적인 선택의 증가가 자유의 확장이 아님을 체득한 셈이다.
만
약 한국 식당에서, 비빔밥 위에 얹어주는 계란을 미국 식당 주문하듯이 각 손님마다 요구한다면 어떻게 될까? 주방장 아줌마에게 뺨
맞고 나오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 식당의 경험이 미국 식당에 뒤진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인의
자유는 주로 식당과 음식의 종류를 선택하는 데 국한된다. 그 이상은 식당의 재량에 맡긴다. 알아서 잘 해 달라는 것이다. 식당과
주방을 믿고 자신의 식탁을 맡기는 것이다. 미국인으로선 대단한 믿음의 결단일 수가 있다.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못 믿을
바에야 왜 식당을 가느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자유의 과실
그래서 한국인은 강요된 선택의 확장만으로 자유를 느끼지 못한다. 선택의 확장까지도, 자유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선택의 자유보다 신뢰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 신뢰가 자유에 선행할 때 자유가 자유스럽게 다가온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자유의 선택을 존중하여 줘야 할 이유는 그런 임의의 자유를 누리게끔 창조부터 설정하여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는 정도가 아니라 환영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과 인격적 교감을 가져야 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창
조의 하나님이 아담에게 준 처음 당부는 동산 안의 각종 실과를 네가 임의로 먹되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만큼은 먹지 말라는
것이었다. 사람에게 준 자유의 선택에서 하나님처럼 되는 자유는 열외로 두셨다. 만들어진 사람의 본성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런
설정을 거부하고 하나님같이 살고자하는 이들이, 오히려 사람답지 못한 모습으로 전락된 모습들이 인간사에 질펀하게 어질러져 있다.
자유가 오염될 때 증가하는 것은 고통의 선택이었다. 한가지 금령은 만가지 자유를 누리기 위한 함축된 경고문이라고나 할까! 사람이
가장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입장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모신 사람의 입장에 설 때라는 것을 최소단위의 금령이 상기시켜 준다. .
Oct 1, 2003 | 삶과 신앙/고독의 세상읽기
단호하고 일방적인 한국교회
“옛날 고등학교 때 수학선생님이 그랬다. 이순신도 세종대왕도 또 조선시대에 그밖에 착하게 살았던 사람들도 다 지옥에 갔을 거라구. 왜냐면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말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에 안 믿은 거잖아요?” 그랬더니 그것과 상관없이 안 믿은 사람은 무조건 지옥이니 너희들도 어서 믿는 게 지옥에 안가는 길이라고 했다. 이때부터 난 무조건 기독교인이 무서웠다.” <언론사 홈페이지 독자 게시판에서 발췌한 글>
“‘예수님 믿으면 천국, 불신자는 지옥’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지난달 한 인터넷 사이트에 도장으로 보라색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진 1,000원 권 지폐 사진 두 장이 올려졌다. ‘犬독교의 만’이라는 제목으로 사진을 게시한 네티즌은 “화폐 관리법 위반으로 싹 다 잡아가라. 첫 번째 사진의 문구는 참으로 심오하다. ‘不信者’를 말하는 것인가? ‘佛信者’를 말하는 것인가?”라며 불쾌한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빛과소금 4월호, 확산되는 반 기독교 정서 중, 최경배 기자>
한국교회를 향한 현 사회의 무자비한 왕따에는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는 우리의 자세 못지 않게, 단호하고 일방적인 우리의 표현방식에 또 다른 원인이 있습니다. 곧 소통의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들어주는 것과 말하는 것(or 표현하는 것)에 있어 상호간에 심각한 괴리가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소통상의 문제로 인해 우리는 당하지 않아도 되는 왕따를 당하는 면이 있습니다.
비 기독교인들의 시각에 우리 기독교인(여기서는 한국의 개신교 인만을 의미)들은 매우 무섭고(?) 거친(?) 사람들입니다. 기독교와 관련된 주제에 있어 웬만해서는 유연하게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기보다, 단호하고 공격적으로 표현합니다. 다양한 사고가 존재하는 다원주의 사회의 현실을 무모할 정도로 부정하며, 우리 식의 신앙 관을 비 기독교인들에게 일방적으로 선포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방식의 대표적인 일례를 우리는 지난 1999년도부터 심각하게 불거졌던 ‘단군상 철폐 운동’을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초등학교 구내에 세워진 단군상의 머리를 전자 톱으로 자르는 식의 행동은 후기 현대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상당한 불쾌감을 안겨 주었습니다.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행동은 사회 내에 자신을 제외한 다른 관점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부정하는 일방적이고 공격적인 자세로 비춰진 것입니다.
언론사 홈페이지 등에서 벌어지는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들 간의 논쟁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상호간의 노력으로 진지하고 발전적인 토론이 진행되는 듯 싶다가도 가끔씩 기독교인들의 선포적이고 단언적인 표현방식이 비 기독교인들을 자극해서 토론 자체가 난장판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물론 반대로 일부 비 기독교인들의 무례한 언행과 선입견으로 인해 토론이 엉망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무엇이든 이원론적인 잣대로만 판단하려는 우리의 ‘대결구도적’ 자세가 상호간의 소통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의 ‘대결구도적’ 자세가 지속될수록 그들은 우리를 더욱 배타적이고 반이성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되며, 결국에는 상대하기를 꺼려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비단 이런 현상을 비 기독교인들이 주류를 형성하는 인터넷 사이트에서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주류를 이루는 사이트나 모임에서도 쉽게 목도할 수 있습니다. 간혹 누군가 교회나 성경에 대해 다소 불경한(?), 그러나 개인에게는 심각한 고민거리나 생각을 나누면, 곧 가차없이 선포적이고 단정적인 반응들이 나타납니다. “그런 생각은 사단이 주는 것이다”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다. 일단 믿어야 한다!” “형제님,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등등. 결국 이러한 단언적 표현들이 그 ‘다소 불경한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다시는 자신의 고민을 솔직히 털어놓고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와 같은 우리 귀에 낯익은 전도문구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의 고성방가식 찬양?전도집회, 그리고 일부 대학가 선교단체의 ‘물고 늘어지기식’ 일대일 전도 방식 등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비 기독교인들에게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한국교회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선포적이고 일방적인 표현방식에는 도대체 상호 교환되는 ‘소통의 미’가 고려되지 않습니다. 오직 일방통행 식의 선택강요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전하는 자의 입장이나 관점을 무조건적으로 듣고,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어찌 보면 강압적인 현실만이 존재할 뿐이지, 잘 들어보고 자신의 입장도 밝히면서 서로 소통하는 가운데 선택할 수 있는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후기 현대주의 사회에 익숙한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권이 침해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혹 기독교 신앙을 믿고 받아들이게 되더라도, 후에 기독교적 관점에 자신이 동화된다 할지라도, 이 모든 과정이 스스로의 고민을 통한 자신의 실존적 선택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은 그냥 길거리에서 느닷없이 만난 어떤 낯선 사람과의 짧은 주입식 강의를 통해서가 아닌, 신앙 깊다는 기독교인들의 저돌적이고 확고한 신앙적 표현과 행위를 통해서가 아닌, 인격과 인격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형성된 대화와 만남을 통한 선택인 것입니다. 후기 현대주의를 연구하는 많은 기독교 학자들의 지적처럼, 후기 현대주의의 영향권 아래 있는 사람들은 근대주의 시대처럼 설득 당함으로 믿거나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직접 체험하는 가운데 손수 선택함으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기 원합니다.
선포적이고 단언적인 표현양식의 배경
“이에 다리오 왕이 온 땅에 있는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 하는 자들에게 조서를 내려 가로되 원컨대 많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라. 내 나라 관할 아래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지니 그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변치 않으실 자시며 그 나라는 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개역한글, 다니엘서 6:25-26)
한국교회의 이러한 공격적인 면모의 배경에는 기독교가 그동안 소유해 온 역사적, 교리적 특성과 연관이 있습니다. 특히 기독교는 그 구원관이나 신관, 타 종교관 등에 있어 교리적으로 매우 단호하고 명확한 입장을 고수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으로 인해 기독교는 더욱 선포적이고 단언적인 행동양식을 보일 수밖에 없었으며, 상대적으로 다른 종교에 비해 매우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종교로 비춰지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의 구원관은 죄인 된 우리 인간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그 근간으로 삼습니다. 성경은 예수님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을 우리에게 제시하지 않습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오직 예수로 시작해서 예수로만 귀결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관은 또한 철저한 유일신관을 주장합니다. 그러기에 결코 타종교를 용납해 줄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특히 신, 구약의 여러 이야기(narrative)들은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세상의 허탄하고 거짓된 이방종교의 위협과 영향 속에서도 얼마나 굳건히 하나님 한 분만을 신앙해 왔는지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경 이야기에 익숙해진 우리들은 자연스레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나올 정도”의 단호하고 확고한 표현양식을 자랑스러운 교회의 전통으로 유지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인물들의 순교자적 삶을 뒤따르고자 하는 노력이 다 종교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선포적이고 단언적인 삶으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을 성실하게 고수한다는 것이 곧 소통에 있어서 배타적이고 일방적이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의 인물들이 각자에게 부여된 시대와 환경 속에서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진리를 변화하는 세상에 소통시키고자 계속해서 진지한 고민과 성찰을 해 왔음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항상 일방적이고 공격적인 표현양식만을 통해 그들의 신앙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다변화하는 역사와 사회 가운데서 성경인물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본질적인 진리의 변질을 통한 세력유지가 아닌, 어떻게든지 하나님의 진리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이를 세상에 드러내고자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노력하는 것이었습니다.
북 이스라엘, 남 유다의 멸망과 바벨론 포로생활을 거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만 국한된 하나님’이 아니라 ‘세계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과감하게 바벨론의 문화와 양식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예루살렘 성전을 초토화시킨 원수 나라의 관원으로서 왕을 모시며 살아가길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니엘’,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라는 히브리식 이름까지 내려놓고 ‘벨드사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라는 바벨론식 이름을 가지고 삼 년 동안 배운 갈대아 언어와 문화를 통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 하는 자들의 하나님이심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곧 그들은 다변화하는 국제정세에서 이전 시대의 방식에 갇혀 하나님 전하기를 주저하기보다, 바벨론 사회와 문화를 재빠르게 소화함으로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는 효과적인 소통의 길을 모색했던 것입니다.
분명 우리의 선포적이고 단언적인 자세는 우리의 확고한 믿음과 신앙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통해 명확하게 확신되고 체험되었기에 우리는 단호한 언어와 행동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이러한 가슴 터질 듯한 신앙적 확신과 영혼사랑의 열정이 변화하는 현 시대의 비 기독교인들에게 오히려 역효과로 작용하고 있다면 이러한 방법론은 진지하게 재고되어야 합니다. 신, 구약의 신앙의 선배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시대의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며 이를 세상에 드러냈듯이, 우리 또한 우리 시대에 알맞은 효과적인 소통의 길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의 의도가 우리 딴에는 거룩하고 진지하다 할지라도 후기 현대주의를 살아가는 다수의 비 기독교인들에게 이러한 표현양식이 배타적이고 일방적인 기독교의 횡포로 이해된다면, 우리의 마음을 잘 이해시킬 수 있는 새로운 소통의 언어와 행동양식을 모색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참된 기독교적 관용: ②일방적인 선포에서 정중한 소개로…
“여러분이 가진 희망을 설명하여 주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답변할 수 있게 준비를 해 두십시오. 그러나 온유함과 두려운 마음으로 답변하십시오.” (표준새번역 개정판, 베드로전서 3:15)
후기 현대주의 사회 속에서도 우리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믿는 바를 확고히 하고, 이 믿는 바를 비 기독교인들에게 전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그 누가 반이성적이라고 꼬집어도 우리에게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의 유일한 창조주이시자 통치자이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성경의 계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를 세상에 알리는데 있어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존재로 인식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결국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리의 변화’가 아니라, 이 진리를 담아 전달하는 ‘소통의 변화’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소통의 변화’는 우리가 비 기독교인들의 생각을 진지하게 잘 들어주는 것 못지 않게, 우리의 믿는 바를 그들에게 잘 전달함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소통의 변화’는 ‘선포(proclamation)하는 자세’에서 ‘소개(presentation)하는 자세’로의 전환입니다. 후기 현대주의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선포적인 표현양식보다 소개하는 표현양식이 더 효과적입니다. 단정적이고 일방적으로 비춰질 수 있는 명제적 언어로만 기독교의 진리를 선포하기보다, 자신의 삶과 경험을 명제적 설명에 덧붙여서 정중하게 소개하는 것이 더 지혜롭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그러나 저의 삶 속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다가오셨습니다.” “이것이 제가 믿고 이해하는 하나님입니다.”
후기 현대주의는 많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상대성(relativism)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러기에 선포보다는 소개가, 그리고 명제적인 표현보다는 자신의 삶을 이야기(narrative) 함으로서 자신의 믿는 바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물론 우리의 삶을 통해 실제적으로 다가온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여러 종교 중의 하나로 치부해서 소개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척 자존심 상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종교 다원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자신이 믿는 진리만이 옳다고 목청 터지게 외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삶에 찾아와 자신을 변화시키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정중하게 소개하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분명 이러한 방법론은 대규모 전도집회나 주입식 노방전도하고는 거리가 먼 새로운 소통의 길입니다. 한꺼번에 수십, 수백 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집회 중심의 소통이 아니라 영혼 개개인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신뢰와 친밀함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소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항시 이 두 가지 양식 모두를 각 사람에 맞게 적절하게 사용해 왔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우물가의 여인과 뽕나무 위의 삭개오에게는 일대일의 관계로 친밀하게 다가가셨지만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의 역사 가운데서 삼천 명을 회심시켰던 것과 같이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다원주의와 인간 개개인의 선택을 중시하는 후기 현대주의의 흐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명확하게 인식하는 가운데 각 사람의 기질과 경향에 맞춰서 다가가야 합니다. 비록 현 시대가 후기 현대주의의 영향권 안에 점점 진입하고 있지만 아직도 우리 가운데는 근대적인 접근방법이 더 익숙한 비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비 기독교인들에게 접근하기 전에 먼저 상대방의 역사와 관점을 잘 이해하는(들어주는 것)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회적 이슈와 관련된 비 기독교인과의 소통에서도, 우리는 자신의 기독교적 관점을 정중하게 소개해야 합니다. 물론 단호하게 입장을 표명해야 되는 경우라면 신중하게 준비함으로 그렇게 해야겠지만, 무턱대고 감정적이고 대립적인 자세로 접근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간혹 일방적이고 선포적인 폭언을 쏟아 부으며 세상과 소통하시기도 했지만(예: 성전에서 매매하던 자들에게), 대다수의 문제에 있어서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의 진지한 대화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일방적으로 그들과 대화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당시 헬라 문화권의 특징이었던 ‘명예와 수치’ 문화(‘Honor/Shame Culture’)를 통해 정중하게 그러나 날카롭게 소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종교 색이 강한 언어나 행동양식을 굳이 강조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사회, 문화에 아주 정통한 지식을 가지고 계셨기에, 오히려 이스라엘 사람들이 실생활 속에서 쉽게 접하는 것들을 비유로 삼아 소통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대화의 말미에는 그들 스스로가 생각해 보고 답변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곧 개개인의 실존적 선택을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복음서의 저자는 이러한 예수님의 주장에 항상 권세가 실려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선포적이고 단언적인 표현양식을 통한 세상과의 대립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사회, 문화적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고자 하는 열린 마음입니다. 무엇이 이 사회의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소통양식인지를 파악해서 이에 맞춰 우리의 입장을 정중하고 날카롭게 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우리는 비본질적인 사회문제에 힘을 소진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성경 적인 안목을 가지고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사회를 바라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소모적이고 상대적일 수 있는 문제에 매달리기보다 예수님의 공생애처럼,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 좀더 본질적인 사회문제에 집중해야 합니다.
결국 사도 베드로의 권면처럼 우리는 항시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소유한 소망(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비 기독교인들이 궁금해 할 때, 또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문제에 대한 기독교적 입장을 알고 싶어할 때, 우리는 그들에게 답변할 것이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답변은 배타적이고 일방적인 자세가 아닌, 온유하고 두려운 자세로 소개되어야 합니다.
아쉽지만 우리 사회가 후기 현대주의의 영향권 아래 들어갈수록, 우리는 내가 믿고 신념하는 바를 선포하기보다는 소개하는 데에 의의를 두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확신에 찬 목소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가운데 무릎을 꿇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극적인 역사는 자주 일어나지 않더라도, 비 기독교인과 내가 믿는 진리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고, 또 내가 믿고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소개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잔잔히 역사 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소통 가운데 형성된 친밀한 관계 속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온전히 드러낼 때, 하나님은 후기 현대주의 시대 속에서도 다니엘 때와 같이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위대하심을 모든 사람들 가운데 드러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달 주제: 후기 현대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지혜 ③ 기다림 속에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여야 합니다.
Oct 1, 2003 | 삶과 신앙/정진호의 떡의 전쟁
떡?
떡은 쌀 또는 다른 곡식을 곱게 빻아 반죽하여 굽거나 쪄서 만든 가공식품이다. 한국을 비롯한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관혼상제의 예식이나 명절에 빠지지 않고 상위에 등장해온 주식의 일종이다. 찹쌀떡, 인절미, 절편, 시루떡, 가래떡, 송편, 무지개떡, 쑥떡, 흰떡, 술떡, 개떡, 감떡 등, 떡의 종류도 다양하다. 일상적 주식인 밥보다는 특별한 맛과 품격을 지니고 있기에 잔치와 기쁨을 상징하는 음식이기도 하다. 남주북병(南酒北餠)이라는 말이 있어 옛날 한양 북쪽에는 문관 출신의 고관들이 살아 주로 떡을 많이 먹었고 남산어귀에는 무관들이 살아 술을 많이 마신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떡은 신분이 높은 집안에서 주로 해 먹는 부귀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음식이기도 했다.
얼마 전 추석을 맞이하여 이곳 중국 연변에서도 송편을 빚어먹었다. 고향을 찾아가는 발걸음으로 전국에서 민족대이동이 일어나는 한국과는 달리 중국의 추석은 의외로 단촐하고 형식만 남아있는 느낌이다. 추석 당일도 휴일이 아니어서 학교에서는 정상 근무와 강의를 계속하였다. 중국인들은 추석이면 팥이나 여러 가지 속이 들어있는 월병이라는 둥근 떡을 서로 선물로 주고받으며 먹는다.
성경에는 떡 이야기가 무수히 등장한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떡은 서양인들의 주식인 빵(bread)을 대신하여 쓰였기에 단순히 우리 인간이 반드시 필요로 하는 먹을 양식, 즉 밥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1] 그러나, 더러는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드는 유월절 음식 무교병이나 성막 안의 성소에 올리는 진설병을 생각하면 특별한 목적으로 만든 떡이 밥보다 더 적합한 번역일 수도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떡을 좋아하여 별명이 떡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성경을 읽으면 떡이 먼저 눈에 뜨인다. 성경은 온통 떡 이야기로 가득 찬 책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성경은 한마디로 예수 이야기인데….. 예수가 곧 자신을 떡으로 소개하고 있으니…… 삼단 논법에 의하여 성경은 떡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아무튼 이제 성경에 나타난 떡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성경에 나타난 떡들 중에서 가장 중요해 보이는 12개의 떡을 골라내어 이야기를 풀어가려고 한다.
*
세상은 전쟁터이다.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다.
역사(historia)라는 어원을 만들어낸 희랍의 역사학자 헤로도투스와 투키디네스가 쓴 역사서가 각기 페르샤와 펠레폰네소스의 전쟁사(戰爭史)였다는 사실이 그것을 시사한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 사람은 한번도 전쟁이 없는 세상을 누려보지 못했다. 지금도 세계의 화약고라고 불려지는 이스라엘 땅에는 지난 4,000년 동안 평균 44년마다 한번씩 전쟁이 일어났다고 역사학자들은 진술하고 있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전쟁, 민족과 민족 사이의 전쟁, 국가와 국가 사이의 전쟁, 인간과 자연 사이의 저항할 수 없는 전쟁으로 인해 피흘려 왔다. 인간은 역사의 어느 한 모퉁이 어느 한 순간에도 시대적 모순에서 완전히 벗어나 본 일이 없었다. 전쟁과 기근, 끝없이 지속되는 자연 재해, 그리고 사회적 모순과 폭력, 독재와 압정에 시달리며 역사는 흘러왔다. 결국 세계의 역사란 자신들만의 정치 경제적 이득을 쟁취하기 위하여 이웃을 갈취하고 환경을 파괴하면서 인간들이 연출해 낸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전쟁마당이었던 것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말이다.
창조 직후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표현되었던 피조계…… 최초의 사람 아담과 하와 사이에는 무엇하나 서로 가릴 것이 없는 육적, 영적인 투명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아가 사람과 동물, 사람과 자연 환경 사이에서도 서로 친화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고 묘사된 창세기 2장의 아름다운 모습을 기억해 보라. 그곳은 완벽한 평화의 나라였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강, 즉 샬롬(shalom)으로 통치되는 세계였다. 그 아름다운 에덴 동산이 어째서 파괴되었는가? 그리고 온 세상이 전쟁 상황으로 돌변하게 되었는가?
우리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결국 우리는 대화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선악과의 이야기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아니 또 그 지겨운 선악과 이야기? 하고 고개를 내저을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아무리 싫더라도 할 수 없다. 당신의 인내심을 잠시만 빌려달라. 선악과 문제를 다시 복습할 수 있도록…… 만일 전쟁의 원인을 파악하고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한다면 선악과의 현장에 당신은 다시 서야만 한다. 선악과는 모든 문제의 시작점이요 이 전쟁 상황을 일으킨 발원지이기 때문이다.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예수가 마침내 십자가의 길에 들어서기 위해 공생애를 시작하는 첫 부분에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서 사십 일간 금식하며 마귀에게 시험(temptation)받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그가 받았던 첫 번째 시험이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것이었다. 어째서 마귀는 이 문제를 던졌을까?
굶주림…
그것은 나에게 조금은 생소한 개념이다.
배가 고파서 눈물 흘렸던 기억이 없는 세대들에게는 추상적인 단어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날마다 세끼의 식탁을 마주하며 필요 이상의 음식으로 배를 채우는 그 행위를 덧없이 반복하고 살아가는 동안 인간은 떡을 소외시키고 단순히 소유해버린다. 그러나 생존을 위해 먹을 것을 찾아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지구상에 무수히 존재하며 더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또한 알고 있다. 비록 추상적일지라도 그들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바로 내 사랑하는 아들이 그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가정해보면 곧 깨닫게 된다. 그들에게는 떡 자체가 존재양식(存在樣式)이 될 수밖에 없다.
인간에게는 반드시 먹을 양식이 필요하다. 그것은 존재의 법칙이다. 설사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일지라도 이 사실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다. 먹는 존재로서의 인간…… 그 설정 자체가 인간을 자기 충족적인 존재가 아니라, 의존적 존재로서 인식하도록 만들어 놓은 하나님의 의도된 계획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억압을 위한 것이 아니라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존재를 꺠닫게 하는 은혜와 자비의 계획이다. (실상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없으면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존재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에덴 동산을 통해 먹을 양식을 충분히 공급해 주었다고 확인하고 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계에는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물질이 넘치도록 충분히 많았다는 것이다. [2] 따라서 처음에는 물질이 소유 가치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문화 창조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가치를 나타내기 위한 도구로써 주어진 것이었다. 그 시기에는 모든 피조물이 존재 자체의 의미를 생동감 있게 지니고 있었다. 물질이 소유 가치의 대상으로 전락한 것은 인간의 타락 이후에 발생한 퇴보(degradation)일 뿐이다. 따라서, 가난한 자가 떡을 부분적이나마 존재 가치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들이 더 에덴에, 아니 천국에 가깝다는 말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하나님은 타락 이전의 인간에게 모든 나무의 실과를 따먹을 수 있도록 풍성한 자유도 함께 주었다. 문제는 그곳에 금단의 열매, 선악과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오직 선악과만이 인간에게 먹을 수 없도록 금지된 과일이었다. 따라서 선악과의 문제는 결코 육신의 양식의 필요에서 비롯된 배고픔의 문제는 아니었다. 오히려 선악과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설정하는 존재의 법칙을 나타내는 시금석이었다. 아담과 하와는 육신의 배고픔으로 굶주린 탓에 선악과를 탐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육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영적인 문제요, 경제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인 문제에 더 가깝다.
이 대목에서 사탄이 등장한다. 사탄은 피조물로서 최초로 하나님이 정하신 존재의 법칙을 깨뜨리고 튀어나간 타락한 천사였다. 사탄의 존재는 하나님의 위치를 탐하고자하는 데에서 그 속성이 드러난다. 그것이 바로 사탄의 모든 관심사의 초점이다. 따라서 사탄은 어떻게든지 하나님의 위치를 빼앗고자 총력전을 기울이게 마련이다. 아담과 하와에게 있어서 선악과는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존재 법칙을 정해놓은 삶의 이정표였다. 마땅히 인정해야할 하나님의 위치를 깨닫고 시인하는 표지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것은 사탄에게는 도무지 참을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사탄은 최초의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접근한다. 사탄은 지혜롭다. 그러나 사탄의 지혜는 악하다. 그 의미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지혜를 악하게 사용했다는 뜻이다.
사탄이 처음 시도한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유지되고 있는 깊은 신뢰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었다. 사탄은 아름다운(?) 뱀의 모습으로 다가선다. 뱀이 아름답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사탄이 본색을 드러내기 전에는 뱀은 징그러운 것이 아니라 아름답게 치장하고 나타난다. 그리고 첫 미끼를 던진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이 질문은 공교하게 계산된 절묘한 질문이었다. 마치 하나님이 불합리하고 인간에게 억압적인 존재로 비추어질 수 있도록 살짝 그 느낌을 뿌리는 것이다. 최음제처럼…… 사실은 정반대다. 하나님은 대단히 합리적일 뿐 아니라 인간에게 너그럽고 풍요로운 분이셨다. 그는 자신이 창조한 피조세계를 모두 인간에게 맡기며 마음껏 그것을 취하고 가꾸고 다스리도록 백지 수표를 끊어주신 분이다. 그것은 인간을 향한 절대적 신뢰와 사랑의 표현이었다.
안타깝게도 인간은 사탄의 그 술수에 넘어가고 만다. 미끼에 걸려든 것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이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살짝 왜곡시킨다.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이 말은 표면적으로는 맞는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유 대신 사탄이 집어넣은 불신앙이 들어가 뒤틀린 말이다.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임의로 먹되 선악과만을 금하고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했던 하나님의 말이 순서와 내용이 바뀌어있다. 풍요롭게 주어졌던 자유는 제한적으로 표현되었고, 반드시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확언은 약화되었다. 그 과일을 먹을 경우 혹시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확실한 설정으로 변화되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았던 내용이 삽입되었다는 사실이다. 만지지도 말라…… 이 말은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선악과를 따고 싶어하는 여자의 의중을 드러낸 첨언이었다. 이미 여자의 마음은 선악과에 빼앗겨 그 손이 절반 이상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와가 미끼에 걸려든 것을 확인한 사탄은 회심의 미소를 감추며 마침내 본색을 드러낸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제는 정면으로 하나님을 대적하여 거짓말을 하고 나선다. 그럴듯한 거짓말로 마지막 미끼를 던진다.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 이것이 사탄의 마지막 문장이다. 피조물인 인간을 하나님의 위치로 끌어올리려는 시도……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나도록 하는 것이다.
그녀가 바라보았던 선악과는 먹음직하였고, 보암직하였으며 정말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워 보이기도 하였다. 결국 하와는 선악과에 손을 대고 만다. 선악과 앞에서 하와가 느꼈던 이 세 가지 유혹이 결국 모든 인간에게 끊임없이 미치고 있는 본질적인 유혹이요 시험이 되고 만 것이다. 이 원죄의 문제에 대하여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증언한다. 우리가 못난 조상 아담과 하와 탓에 문제 덩어리를 안고 살아가게 된 것이 아니라, 에덴 동산 그 범죄의 현장에 우리가 함께 있었으며 하와가 손을 뻗어 선악과를 따는 그 순간 우리도 함께 죄를 범했다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마침내 불순종의 길에 들어서게 된 그 행위 이면에는 사탄으로부터 비롯된 불신앙과 교만과 탐심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결국 완벽했던 평화는 깨지고 전쟁이 시작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미 예고된 죽음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깨어진 평화…… 그것은 기다란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네 가지 측면의 분리(Separation) 현상으로 나타난다. 하나님과의 분리에서 시작된 깨어진 관계는 곧바로 자기 내면과의 분리를 일으켰으며, 사람들 사이의 분리, 그리고 자연과의 분리로 확장되었다.
◆ 전쟁(The War)
= Broken Peace (with God → with Self → with people → with nature)
이 모든 전쟁의 이면에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죄가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 죄 (Sin) : 불신앙 → 교만 → 탐심 → 불순종 → 전쟁
▼ 치유(Healing) : 믿음 → 회개 → 자유함 → 순종 → 평화
따라서 이 전쟁은 인간의 행위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 근본 뿌리의 출발점인 불신앙의 문제가 믿음으로 다시 회복되기 전에는 결코 치유될 수 없는 악성 질환인 것이다. 결국 우리가 왜 십자가의 믿음을 필요로 하는가? 어째서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의 해답이 여기에 있다. 십자가는 불신앙의 늪으로 떨어진 인간을 구원키 위해 하나님이 다시 한번 설정해 놓은 제 2의 선악과 문제인 것이다. 그 십자가를 붙들 때에 비로소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했던 교만으로부터 다시 내려올 수 있으며 먹음직하고 보암직하며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 느껴졌던 그 탐심의 우상 숭배로부터 해방되어 자유함을 얻게 되어 마침내 하나님이 처음부터 원하셨던 순종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선악과에서 나타났던 세 가지 유혹이 있다. (창세기 3장 6절)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운…
이 세 가지 유혹이야말로 이제 모든 인간들에게 던져진 피할 수 없는 유혹이 되고 말았다.
우리가 덫에 빠져드는 순간 사탄은 항상 이 세 가지 무기를 들고 우리 앞에 나타난다. 예수가 광야에서 받았던 세 가지 시험 또한 같은 내용이었다.(마태복음 4장 1-11절)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라.
나에게 엎드려 절하라. 내가 천하 만국의 영광을 주마.
이 세가지 유혹을 가리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다시 요약하고 있다. (요한 1서 2장 16절)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잘 알려진 영성 신학자 리차드 포스터는 이 주제를 (돈, 섹스, 권력)의 문제로 다루고 있다. [3] 더러는 육신의 정욕은 식욕 또는 성욕을 포함한 원초적 본능적 물질욕을 의미하고, 안목의 정욕은 남의 눈에 더 좋게 보이고자 하는 지위, 학위 같은 명예욕을 의미하며, 이생의 자랑은 최종적으로 세상의 영광을 차지하고자 하는 권력욕을 뜻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아무튼 (돈, 성, 명예, 권력) 어느 하나 인간에게 뿌리치기 쉬운 만만한 상대는 없다. 한번 그것을 차지하고자 하는 탐심에 마음을 빼앗기고 나면 그것은 우리를 얽어매는 철저한 우상으로 바뀌고 만다. 그 유혹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러나 이 모든 유혹이 그 첫 출발점을 자세히 살펴보면 결국은 돌을 떡으로 바꾸라는 그 말 한마디에 압축되어 있다. 다름 아닌 존재의 문제를 소유의 문제로 환원시키려는 사단의 간교한 계략에서 시작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법칙을 나타내는 선악과를 교묘히 소유의 대상으로 환원해버린 사단은 동일한 수법으로 예수께 다가와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어라.”
에덴의 풍요로움 속에 있었던 아담과 하와보다도 예수는 훨씬 열악한 환경 속에 놓여있었다. 40일 간의 금식 가운데 찾아온 굶주림의 고통…,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처한 전쟁터의 비극적 상황이다. 그 속에서 돌을 떡으로 바꾸라는 유혹은 대단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더구나 만일 예수처럼 우리가 돌을 떡으로 바꿀 수 있을만한 능력과 위치에 놓여 있다면…… 그 유혹에서 벗어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크리스천의 부정 행위, 청탁, 업무 사기, 배임, 뇌물 수수, 비자금, 횡령, 불의와 착취, 자원 남용, 생태계 파괴 등의 사건이 끊이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하신 존재의 법칙은 절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돌은 돌이고 떡은 떡이다. 원숭이가 사람이 될 수 없듯이 돌이 떡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돌을 떡으로 바꾸는 행위는 하나님이 정하신 존재의 법칙을 깨고 그것을 자신의 소유물로 만들겠다는 대단한 월권 행위다. 금지된 것을 행함으로 정면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이다. 결국 하나님 위에 자신을 두고 인생의 의사 결정권을 스스로 취하겠다는 말이다. 자신이 왕으로, 주인으로 등극한 것이다. 하나님 위에 다른 어떤 것도 두지 말라는 제 1 계명을 어긴 것이다.
제 1 계명을 어기고 나면 곧바로 인간은 우상을 만들기 시작한다. 제 2 계명을 범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이 사라지고 난 후에는 반드시 섬겨야할 다른 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여러 가지 모양으로 형상화해서 나타난 것들이 바로 물신(物神)이다. 자신의 손으로 만든 우상을 모셔놓고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자신의 풍요와 안녕을 빈다. 주식 시세 앞에서 기원하며 예배를 드리는 현대인들과 금송아지 앞에서 절하는 고대인들이 무슨 차이가 있는가? 물신을 섬기기 시작한 인간들은 이제 거침없이 다른 계명들을 어기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든지 안식일을 범하든지 떡을 더 쥐기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다. 결국 돈 때문에 부모를 무자비하게 대하고 더러는 살해까지 하고, 돈으로 성을 사고 팔며 간음을 자행한다. 남의 재물을 보이지 않게 횡령하며 그것을 감추기 위해 거짓 증거를 댄다. 그의 눈에는 탐심으로 가득하여 이웃의 재물이 모두 이제 자기 소유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떡의 문제가 단순한 경제적 문제가 아닌 영적인 문제인 까닭은 바로 십계명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락한 인간들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십계명의 율법을 주어야만 했던 당위성을 거꾸로 유추할 수 있다.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 풍성한 에덴을 허락하셨던 하나님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핍박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 따라서 비록 타락한 인간 사회이지만, 가난한 자들을 먹이고 그들을 돌보기를 요청한다. 그러나 인간의 탐심과 이기심은 끊임없이 빈부의 격차를 벌려놓으며 가난을 확대 재생산한다. 자신의 배만 불리는 탐욕에 사로잡힌 사회에서는 가난하고 헐벗은 이웃을 벼랑 끝으로 내몰아 자살로 인생을 마감케 한다. 빈곤에 의한 자살은 어떤 의미에서 사회적 살인이다. 존재를 소유로 바꾸고 나면 그 소유가 존재를 소멸시키고 만다.
타락… 실락원의 순간, 인간은 에덴의 풍요를 상실하고 가난하게 되었다. 존재보다 소유를 선택하였지만 그 결과는 반대가 되고 만 것이다. 인간이 직면하게 된 가난은 단순한 육체적 물질적 가난 뿐만이 아니었다. 하나님과의 대화의 단절에서 비롯된 영적 가난, 그리고 인간 사회의 소외 현상에서 비롯된 억압과 핍박의 사회적 가난, 자연과의 불화에서 자초한 생태학적 가난으로까지 이어졌다. 총체적 가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가난하게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를 다시 천국으로 부르신다. 예수를 통한 복음, 곧 천국으로의 초대는 세상의 모든 가난한 자들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부요와 풍성함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먼저 누린 우리들에게도 그 일을 위한 동역자로 함께 일하도록 사명을 맡기시는 것이다.
소유냐 존재냐? 라는 책으로 인생 후반기 자신의 사상을 종합한 에리히 프롬이란 유태인 사회 심리학자가 있다. 그는 소유의 문제보다는 존재의 문제가 더 본질적이며 중요하다는 결론에는 이르렀던 사람이다. 그러나 소유의 문제를 해결하고 존재의 문제로 돌아가기 위한 방법론을 제시하는 데에서는 여전히 실패하고 있다. <소유의 나라>도 <신의 나라>도 아닌 <존재의 나라>로 스스로 돌아갈 것을 철저한 인본주의적 사고를 통해 권면하는 그는 놀랍게도 사탄이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할 때 사용했던 그 말을 다시 한번 반복하고 있다.
“너희가 하나님 같이 되리라.”
결국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도달하는 최종 목적지는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돌과 떡을 내세운 소유의 문제로 도전하는 사탄을 일성(一聲)으로 물리치며 예수가 맞받아친 말은 전혀 다르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 : 4)”
예수에게는 생명의 떡인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그 해답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존재의 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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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tnotes :
[1] 히브리인의 떡은 우리의 밥, 서구인의 빵과 마찬가지의 주식을 의미한다. 떡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레헴](lechem)은, [양식], [식물], [음식]등으로도 많이 사용된 말이고, 그리스어 [아르토스](artos)는 [양식]으로 많이 번역된 말이다.
[2] 이 사실은 60억이 넘는 인구로 늘어난 현재의 지구상황에서도 마찬가지로 성립한다. 굶주림과 기아의 문제는 절대 양식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물질의 분배가 잘못된 데에서 비롯된 사회구조적 문제이다.
[3] Money, Sex & Power, R. Foster, Edward England Books, 19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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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 1, 2003 | 삶과 신앙/김한준의 묵상일기
이코스타 2003년 10월
1.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하였다. (사사기 21:25)
사 람이 사람으로부터 존 귀히 여겨지지 않고 오히려 버려지는 모습은 어느덧 우리 주변에서 드물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더욱이,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장소는 이미 삶의 전 영역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는 느낌이다. 가정이라고 해서 더 이상 예외가 아니며, 교회라고 예외가 아니다.
통 계청의 발표에 의하면, 2002년 한 해 동안 한국에서 남녀 30만 6573 쌍이 결혼하고 14만 5324 쌍이 이혼 해 결혼대비 이혼 건수는 47%에 달하였다고 한다. 유명인사들의 무분별하고 잦은 만남과 헤어짐 같은 일들을 굳이 거론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보통 남녀 두 쌍이 결혼하는 동안에 한 쌍은 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오늘날의 많은 자녀들은 안정된 가정의 울타리를 잃은 채 정서적으로 불안하고 상처받기 쉬운 환경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사회는 어떠한가? 친구가 근무했던 비교적 잘 알려진 한 회사에서는 호황을 맞아 투자가 늘어나는 가운데 고용 인원을 크게 늘렸다가 불경기를 맞아 다시 인원을 감축했는데, 그 부서의 근로자 수가 처음의 100 명에서 200 명의 단계를 지나 다시 100 명으로 되돌아온 데 걸린 시간은 고작 2 년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사회 안에서 한 개인은 필요에 따라 언제라도 취해지기도 하고 버려지기도 하는 소모품과 거의 다를 바가 없다. 과거에는 가정 다음으로 인격적인 만남의 장이 되어주곤 하였던 학교에서도, 이제는 스승과 제자 및 동료 간의 사이가 치열한 경쟁 가운데 언제든지 이익을 좇아 떠나거나 버릴 수 있는 모습으로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사랑 가운데 주님의 각 지체를 형성하여야 할 교회 공동체에 있어서 조차도, 때로 서로 미워하며 분열하는 모습은 어지러운 세상의 축소판에 다름 아닌 것으로 비추어지기도 한다.
2. 우리는 모두 한 아버지를 모시고 있지 않느냐? 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지 않았느냐?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가 서로 배신하느냐? … (말라기 2:10)
신 실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기 원하는 우리들의 삶은 아마도 이러한 안타까운 모습들과는 무언가 다른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비록 외면적인 모습이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았다손 치더라도 본질적인 측면에 있어서라면 우리라고 과연 얼마나 안심할 수 있을까?
예 를 들어, 혹 미래의 배우자를 놓고 진지하게 기도하며 준비는 하고 있지만, 그 사람의 영혼 자체보다 더 중요한 현실적인 가치를 양보할 수 없는 마음이 또한 내 마음 안에 함께 존재하고 있다면… 만일 외모, 돈, 명예 등의 어떤 현실적인 가치가 그 사람의 존재를 존귀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면, 그 가치가 사라지는 때에는 그 사람 자체의 가치 또한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또, 외형적으로 안정적인 결혼생활의 모양새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더 이상 서로에게 순종하지도 않고 희생하지도 않으면서 사랑 없이 살아가고 있다면… 그 경우에, ‘네가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로다’ 하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질책을 우리의 가정은 피해갈 수 있을까? 교회 공동체 안에서 생활은 하고 있지만, 목회자나 리더가 단지 내 뜻대로 나를 기쁘게 해주지 않고 있다고 해서 마음 속으로 끊임없이 그를 버리고 떠날 기회만을 찾고 있다면… 반대로, 목자로서 주님의 양을 돌보는 일을 하고는 있지만, 그가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만큼 나의 제자가 되지는 않고 있다는 이유로 마음 속으로 그 사람의 존재 의미 자체를 부인해 버리고 있다면… 이런 가운데에서라면, 나 스스로의 영광 받음을 위하여 사역하고 있다는 생각으로부터 어찌 자유로울 수 있을까? 또, 지금 이 순간 누군가와 동역 자로서 함께 일은 하고 있지만, 그 만남 자체에 긷든 주님의 섭리와 그 영혼의 존귀함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기보다는 그가 수고하고 성취한 정도에 따라서 마음 속으로 끊임없이 상대방을 재평가하고 있다면… 나의 유익과 목적을 위하여 다른 사람들을 취하고 버리는 세상 사람들보다 우리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어 떤 사람이 나의 뜻과 달리하는 때에, 나의 감정상 어떤 이를 용납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때에, 또는 어떤 사람과 함께 하는 일이 나의 유익과 목표를 실현하는 일에 상충한다고 느껴질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나의 뜻과 감정과 유익 때문에 이번만은 상황 상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을 버리고 갈 수밖에 없다 는 생각이 우리 마음 안에서 때때로 정당화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이 모든 안타까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근본 원인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이유 있는 사유들이 하나하나 모아져서, 때로 우리 자신들은 희생자가 되기도 하고 가해자가 되기도 하는 가운데 오늘 우리가 보고있는 것과 같은 세상의 거시적인 모습들을 함께 만들어 오고 있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3. “너희 중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요 8:7) /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 5:7)
인 간은 다 죄인이다. 나도 죄인이다. 우리 중 그 누구 하나 예외 없이 우리 모두는 다 죄인이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통하여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구원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다. 그러므로, 누가 사람에게 이르기를 너는 틀렸고, 용납될 수 없으며, 가망이 없다 고 말할 수 있을까? 다윗의 범죄 함과 베드로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와 “교회의 반석”으로 세워주신 주님이시기에, 연약하여 넘어지기 쉽고 어리석어 그르치기 쉬운 나 같은 사람과 객관적인 실패와 실수를 입증 받은 저 사람에 있어서도 우리는 그분 안에서의 한 가능성을 보게 된다. 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지으셨고 우리 모두를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생각할 때, 이러한 회복과 역전의 소망은 나의 것이며 동시에 우리 모두가 공유해야 하는 것임을 믿게 된다.
하 나님의 능력과 사랑 안에서 회복과 역전의 소망을 가지고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은 그들의 아픔을 내 것처럼 이해하고자 하는 긍휼어린 마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이 늘 그렇듯 말처럼 쉬운 일일 수 있었다면, 그 누구도 관계와 인간성의 파국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다른 한편으로는, 놓아서는 안 되는 것을 놓지 않는 과정에서 감당해야만 하는 만만치 않은 고뇌와 눈물을 의미하기도 한다. 결혼 생활에서 파경을 겪은 부부의 대부분은, 많이 인내하였고 관계와 상황을 개선해 보고자 최선을 다하였지만 결국 소용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이혼하게 되었노라고 고백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교회가 분열될 때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대방이 주는 모진 언사와 불합리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힘겨워하는 가운데 갈등하며 기도하고 신음하다가 그 지경에까지 갔겠는가? 따라서, 나에게 주어진 상황적인 한계와 감정상의 한계를 껴안은 가운데 놓치지 말아야할 것들을 놓치지 않고 붙잡는다는 일은, 끝이 안 보이는 듯한 막연한 느낌을 안고 기도하는 가운데 눈물로써 몸부림(struggle)쳐야 함을 의미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하 나님은 야곱을 불러 하나님 백성의 조상으로 삼으시는 언약을 세우시면서 야곱에게 새 이름, 즉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셨다. 그런데, 하나님 스스로가 칭하신 하나님의 백성의 이름이 축복 받은 자도 아니고 권능 있는 자나 거룩한 자도 아닌 씨름하는 자 (이스라엘: 하나님과 더불어 씨름/struggle하는 자) 이었음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되어져야 할 우리의 모습과 현재의 우리의 모습 사이에서 메울 수 없는 간격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몸부림치는 과정을 겪게 되는데, 바로 이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의 정체성으로 여겨주고 있으신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맥 안에서 바라볼 때, 각양각색의 어려움 가운데서 주님의 뜻과 말씀대로 살고자 씨름하는 우리의 삶의 모습들은 어쩌면 불완전한 우리가 진실한 의미에서 주님 앞에 드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삶의 제사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다른 사람을 버릴 수밖에 없을 것만 같은 삶의 위기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순간들 역시 우리에게는, 우리 앞에 예비되어 있는 고뇌와 눈물 가운데에서 영적인 이스라엘로서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우리 스스로의 영적 진보를 이루는 기회이기도 한 셈이다.
4.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한1서 4:11)
때 때로 세상 가운데서 버려지기도 하는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주님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서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신다고 말하곤 하는데, 과연 정말로 그러한가? 만약 이 땅 위의 다른 모든 사람들은 다 구원을 받았는데 나만 홀로 죄 가운데서 구원받지 못하고 있었다면 예수님께서는 그 때에도 마찬가지로 나 하나를 위해서 그 희생과 고난의 길을 스스로 감당하러 오셨을까? 성경에는 이와 관련하여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대답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마 18:12) 그렇다! 주님은 설혹 나 하나만이 구원받지 못하고 남겨졌다 하더라도, 말씀하신 것처럼 다른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뒤로 두신 채 이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으러 오셨을 것이 분명하다. 이 세상을 직접 지으신, 그러므로 지어진 이 세상 그 자체보다 더 귀하신 예수님께서, 단지 내 한 영혼을 건지시고자 자신을 죽음 가운데로 내몰아 가셔야 할 이곳으로 말이다. 이렇듯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의 마음은, 때로 버림받은 모습이 되어 눈물짓고 있는 나를 향하여 말할 수 없는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고 계시는 마음이고, 사람을 버리는 자가 되지 않고자 눈물 가운데 고뇌하고 있는 나에게 오셔서 힘과 용기를 주시는 그 마음이며, 때로는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임에도 다른 이를 더는 사랑하지 못하고 이제 버릴 수밖에 없는 나를 향하여 안타까움으로 눈물 흘리고 계시는 마음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우리의 존재로써만은 충분히 환영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쓸모 있음을 인정받는 일에 사활을 걸어왔다. 너무도 치열하고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는 현실이었기 때문에, 영혼 이전에 유익과 성과를 구하였고, 내가 바라보고 이해하는 방식으로의 일이나 사역에 상대방도 동참하기를 구하였으며, 경제성이나 기여도, 수고함 등의 외면적이고 가시적인 가치에 시선을 두었다. 그리고, 나 또한 세상에서 같은 모양으로 다가오는 냉정한 시선들에 그대로 노출된 채, 무리를 해서라도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를 원하고, 때로는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먼저 다른 사람을 짓밟고 올라서라는 현실의 유혹에 나도 모르게 따라가고 있기도 하였다. 이토록 이 세상의 가치 체계에 익숙해져 버린 우리이기에, 이제는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 앞에서조차도 우리가 하고 있는 일 자체의 의미나 내 입장의 당위성으로 승부하려 하며, 신앙 인으로서의 섬김의 순간들 가운데에서조차도 나를 중심으로 하려들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 러나, 이제는 우리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시선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다시금 되새기는 가운데, 같은 시선으로써 또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기 원한다. 그리고,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듯, 사람이 또한 사람을 버리지 않는 세상을 꿈꾸어본다. 천국은 아마도 이미 그러하리라.
부모가 ‘내 뜻대로 가지 않는다’ 하여 그 자식을 버리지 않는…
자식이 ‘부담이 되고 힘이 든다’ 하여 그 부모를 버리지 않는…
친구가 ‘나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다’ 하여 친구를 버리지 않는…
남녀가 ‘이젠 내 감정이 다하였다’ 하여 서로를 버리지 않는…
동역자가 ‘실수하였다, 잘못하였다’ 하여 동역자를 버리지 않는…
목양자가 ‘나를 높여주지 않는다’ 하여 주님의 양을 버리지 않는…
성도가 ‘인간적인 부족함이 많다’ 하여 목양자를 버리지 않는…
스승이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여 제자를 버리지 않는…
제자가 ‘더 이상 필요치 않다’ 하여 스승을 버리지 않는…
사람이 업적이 적다, 재주가 적다, 가진 것이 적다, 성품이 부족하다 하여 그 사람의 “존재의 가치”를 마음에서 끊어버리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사람 앞에서 “의리”를 목숨처럼 중히 여길 수 있는…
배신의 쓴 기억 때문에 사람을 믿어주기에 인색하기보다는, 주님 안에서의 모든 가능성을 보면서 실망되어도 또 믿어주고 배신해도 또 속아주어 마침내는 하나님 앞에서 정금처럼 “함께” 서는…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일들 가운데서, 내 마음 안에 한 번 모신 주님께의 관계 또한 영원히 끊어지지 않는…
“예수께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