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희] 고통에는 뜻이 있다
이코스타 2004년 12월호
유학생 사회에 있어 보면 유학생들이 겪는 여러 가지 애환들을 목격할 수 있다. 공부에 대한 중압감, 경제적 어려움, 건강상의 문제들, 딸린 가족들에서 생겨나는 어려움들, 공부를 마치고 난 뒤의 진로 문제 등… 이 와중에 사고라도 당한다든가, 논문통과가 안된다든가, 그 학교에서의 공부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른 학교로 옮겨야 된다든가 하는 일들이 생기면 이러한 어려움들은 더욱 가중된다. 이럴 때마다 우리는 질문하게 된다.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고통을 주시는 것일까?
우리는 극심한 고통가운데 있을 경우에는 이 질문에 대한 객관적인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가 쉽지 않다. 자신의 상태에 대한 절망과 탄식으로 자포자기 하거나 혹은 그것을 다른 누구의 탓으로 전가하기가 쉬운 것이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고통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고통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겸비하게 그것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분명히 아는 한가지 사실은 하나님은 자기를 믿는 사람들에게도 고통을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 분명히 아는 또 한가지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에는 다 뜻이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실까 하는 이유를 찾다 보니, 그 이유가 단 하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6가지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첫 번째 경우는 어떤 사람의 죄를 회개하게 하기 위해 고통을 주시는 경우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 잘못된 행동을 할 때, 그로 하여금 회개하고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게 하기 위해 채찍을 주신다(히12:6).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가려고 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큰 풍랑을 주시고 또 급기야 고기에게 잡아 먹히는 어려움을 당하게 해 주셨다. 바로 그를 회개시키고 다시금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과거 신학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 지금도 잊을 수 없는 한 학생이 있다. 그는 시험시간에 컨닝을 하다가 적발된 학생이었는데,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용서를 구하기에, 한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다. 나는 그에게 ‘먼저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므로 일주일 동안 회개기도하고, 나에게도 잘못했으므로 반성문을 써 보내라 그러면 다른 방도를 찾아 보겠다’고 말했다. 그 뒤 반성문을 보내 왔는데, 그 반성문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내용인즉, 자기도 평소에 컨닝은 절대로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자기 옆에 친구가 책상에 글을 쓰는 것을 보고는 불안한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책상에 몇 자 적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는 보지도 못하고 걸렸고 자기 친구는 보고도 안 걸렸기에 처음에는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제는 자신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고 했다. 왜냐하면 자기 옆의 친구는 그 죄를 회개하지 않고 다음에도 또 똑같은 죄를 지을지도 모르지만, 자신은 바로 이러한 처벌 때문에 회개하고 자신의 잘못을 고칠 수 있게 된 것이 너무도 감사하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 편지를 보고는 이 학생과 마찬가지로 나도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처벌이 참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죄를 짓고도 처벌당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그것을 죄로 알지 못하고 반복하게 된다. 그러나 처벌이 있을 때, 죄를 죄로 알게 되고, 그 죄를 회개할 뿐 아니라 고치려고 하게 된다. 나도 교통신호를 어겨 경찰로부터 딱지를 받은 적이 있는데, 이 처벌을 받기 전에는 무심코 행동을 했다가 딱지를 받으면서 부터 ‘이게 잘못이구나, 조심해야 겠구나’하는 것을 깨달은 적이 있다.
이처럼 처벌은 죄를 죄로 깨닫게 해 준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가 잘못된 길에 들어서면, 그의 죄를 깨닫게 하시려고 어려움과 고통을 주신다. 이런 고통의 순간에 사람들은 고통을 면케 해 달라고 기도하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그러나 회개하기 앞서 먼저 그 고통을 없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 안된다. 먼저 그 죄를 내어 놓고 하나님앞에 토설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죄를 사해 주실 뿐 아니라 그 고통을 치유해 주신다.
두 번째 경우는 죄가 전혀 없는데도 그 사람의 믿음을 시험해 보시기 위해서 고통을 허락하시는 경우이다. 욥이나 아브라함의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라 할 수 있다. 욥은 의인이었고 흠이 없었지만, 그의 믿음을 시험하는 엄청난 시련을 겪었다. 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역시 그의 믿음이 테스트당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고난을 겪어야만 했다.
사람은 누구나 이런 상황이 되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런 반응이다. 베르디의 오페라 토스카 중에 보면,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남을 해친 일을 한번도 없소, 제단에 꽃을 바쳤소, 그런데 왜 이리도 어려워야 합니까?’ 라는 대목이 있다. ‘이렇게 당신을 위해 많은 것을 했는데 왜 이러한 고통을 주십니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욥처럼 고통중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 또 아브라함처럼 그 고통속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어떤 사람의 믿음은 바로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그 믿음이 진짜인가 아닌가가 드러난다. 이럴 때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다면, 그는 정말 위대한 신앙인이다. 그리고 이 고통을 믿음으로 잘 극복하면, 그는 반드시 욥처럼, 그리고 아브라함처럼 더 큰 축복을 받을 것이다.
세 번째 경우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고통을 허락하시는 경우이다. 하나님의 큰 은혜를 경험하고 큰 능력을 가진 바울이었지만 그에게는 하나의 육체의 가시가 있었고, 이 가시는 늘 바울에게 고통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제거해 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셨다. 바울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12:7)
간혹 어떤 신앙의 가정에 보면 신앙도 좋고, 직장도 좋고, 하는 일도 잘되고, 다 좋은데, 자녀가 문제가 있다든가, 혹은 다른 것은 다 잘 되는데, 어떤 하나가 문제가 되어 고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경우 가운데는 간혹 그 사람을 너무 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러한 문제를 허락하시는 경우가 있다. 사람은 모든 것이 만족스럽고 문제가 없다면, 나태해지기 쉽다. 그 뿐 아니라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의 능력과 힘으로 사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어려움이 있으면 겸손하게 되고 또 기도하게 된다. 이런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내가 너무 교만하지 않도록, 그리고 기도하도록 하기 위해 이러한 어려움을 주시나 보다 하고 감사하면서 나가야 한다.
네 번째 경우는 그 사람을 연단시키기 위해 고통을 허락하시는 경우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40일 정도 걸리는 블레셋 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광야의 길을 40년 동안 가게 하셨다. 신 8장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을 알게 하려고 하신 것’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그들의 믿음을 연단시키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그리고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시기 위해 때로 이러한 고통과 시련을 허락하신다. 욥도 그의 고난 후에 그의 믿음이 더욱 연단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광야에서 연단을 받은 후에 적어도 그들이 살아 있을 동안에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우리 신자들에게도 이처럼 영적인 연단과 승리를 위해서는 고통이 필요하다.
어떤 곤충학자가 나비 애벌레가 고치를 깨고 나오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을 보고는, 그 발버둥치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워 칼로 구멍을 내고 쉽게 나오도록 해 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 나비는 오래 살지 못하고 죽어 버리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그가 새로이 발견한 것은, 고치를 깨고 나오려고 발버둥치는 바로 그것이 그 나비를 생존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을 준다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고통을 지나면서 얻어진 힘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영적 전쟁을 승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능력이 된다.
다섯 번째 경우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고난을 당하는 경우이다. 제자들이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면서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본인의 죄때문 입니까’ 하고 물은 적이 있다. 그때, 예수님은 누구의 죄때문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말씀하셨다.(요9:3) 그리고 실제로 그를 고쳐 주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셨다. 이 소경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해 나면서부터 소경이 되는 고난을 겪은 것이다.
때로 우리들에게도 우리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고난을 주시기도 한다. 최근에 <지선아 사랑해>라는 책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준 이지선 자매의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 자매는 꽃다운 나이에 교통사고로 심한 화상을 입어 전신이 이지러지는 아픔을 겪었다. 어떤 여자분은 쌍꺼풀 수술이 잘못되었다고 자살하기도 하는데, 젊은 여자가 얼굴 뿐 아니라 온 전신이 완전히 이지러졌으니 얼마나 큰 고난이었겠는가? 그러나 이 자매님은 그러한 고난 가운데서도 그것을 비관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림으로써, 어떤 목사의 설교보다도 사람들에게 더 큰 감명을 주었다. 이 자매로 인해 고난받는 많은 사람들이 큰 위로를 얻었고, 또 모르기는 해도 많은 사람들이 복음에 관심을 갖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 고통은 자매에게는 너무도 큰 아픔이었지만, 오히려 그 고난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당신의 일을 이루셨다. 우리도 이런 고난을 당한다면 나의 이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것을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 여섯 번째 경우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당하는 고난이다. 옛날 선지자들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의 믿음 때문에 많은 고난과 죽임을 당했다. 기독교 역사에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전 재산을 몰수 당하기도 하고, 감옥을 가기도 하고, 급기야는 죽임까지 당한 수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있다. 그야말로 복음과 함께 당하는 고난이다.
우리도 내용과 정도는 다르지만, 믿음생활을 제대로 하려고 하다 보면 이런 저런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 직장에서 왕따당하기도 하고, 재정적 손실을 보기도 하고, 승진에 손해를 보기도 하고, 때로는 직장에서 쫒겨나기도 하고, 집안에서 학대받기도 하고….
이처럼 믿음을 지키려다 고난을 당하는 경우에는 예수님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상이 그 만큼 크기 때문이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1-12)
믿음생활을 제대로 하려다가 손해를 보고 힘든 고난을 당할 때는, 우리 앞에 놓인 상을 바라 보자, 그러면 고통을 참을 수 있다. 예수님도 장차 다가올 영광을 보고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셨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처럼 우리가 고난을 당하는 것에는 한가지 만의 상황이 아니라 적어도 여섯가지 경우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각각의 상황에 대해 각기 다르게 대응해야 한다. 예를 들어 욥처럼 그의 믿음을 테스트하기 위해 고난을 당하는 사람에게 죄를 회개하라고 질책한다면 이는 잘못된 것일 것이다. 반대로 죄를 지어 책망을 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욥의 고난을 이야기하면서 위로 한다든가, 믿음 때문에 고난당하는 것처럼 하늘의 복을 운운한다면 이것도 올바른 대응이 아니다. 각각의 상황에 따른 적절한 대응이 있어야 한다.
물론 성경속에는 내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또 다른 이유가 더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여섯가지 가운데 두 세가지가 한꺼번에 올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욥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했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믿음이 더욱 연단되는 결과를 얻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동안 광야를 방황하게 된 까닭은, 그들이 가데스바네아에서 범죄한 것에 대한 책망이기도 하면서, 또한 그들을 겸비하게 하고 연단하는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고난을 받을 때는 반드시 기도하면서 믿음으로 극복해야 한다. “너희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약 5:13)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하여 우리가 겸손하게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원하신다.
내가 당하는 고통이 이 경우들 가운데 어떤 것인지가 불확실하다면, 먼저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고난을 허락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잘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믿음생활이 나태하고 범죄하고 있는데도 그것에서부터 벗어날 수 없다면, 차라리 고난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낫다. 아무런 고난없이 믿음이 나태해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 보다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더 큰 축복이기 때문이다.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 71)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나아갑니다’(찬 503장)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이 한가지를 명심하자. 모든 고난에는 뜻이 있다! 그리고 그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마침내는 복을 얻게 해 주는 축복의 통로다!
[김재석] 유학 생활: 재정적 신뢰 형성 기간
이코스타 2004년 12월호
유학 생활에서 가장 힘든 문제 중 하나는 아마도 재정적인 어려움이 아닐까 싶다. 지금은 어느 정도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유학생들도 많아졌지만, 그래도 재정적으로 압박을 받는 유학생들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한국에서는 나름대로 편안하고 풍족할 수 있었으나, 유학으로 인해 궁핍함으로 처지가 바뀐 경우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유학의 특수한 상황을 통해, 우리는 일생의 중요한 시기에, 재정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좋은 훈련을 받게 된다고 생각한다. 내 자신이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재정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좋은 경험을 가졌었다.
내가 유학하던 80년대 중반에는 대부분의 결혼한 유학생들이 1500$-3000$ 정도의 6-8년 정도된 중고차를 구입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내 자신도 대학원을 마치고 직장생활을 5년 정도 했기에 어느 정도 편안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중에 유학의 길을 떠나면서 퇴직금과 부모님이 마련해주신 것을 합쳐 총 1만$정도(당시 850만원)만 갖고 유학의 길에 올랐었다. 이 금액은 오직 1학기만의 등록금과 생활비에 해당했고, 1학기 후에는 장학금을 받든지, 아니면 다시 돌아오든지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장학금을 주겠다는 학교를 마다하고 내가 꼭 전공하고 싶은 교수를 찾아 학교를 선정했고, 재정적인 긴축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둘째 아이(당시 2살)는 장모님께 맡기고 떠나는 가슴 아픈 처지였다.
첫 학기에 최소한의 등록금을 내고, 차도 1700$의 중고차를 구입하고, 추운 겨울에 창문과 문틈을 비닐로 여러 겹 밀봉해야 하는 제일 값싼 기혼자 아파트(월세 230$)에서 3명이 월 생활비 800$정도의 최소한의 생활로 유학생활을 시작하였다. 기도 중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겠지 믿으면서도, 어떤 밤이면 내 마음은 짓눌리는 고통과 악몽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든 다음 학기에 장학금을 받기 위해서 내가 전공하고 싶은 분야의 교수를 뻔질나게(?) 찾아갔다. 지도교수가 나의 발길에 감동했는지, 박사자격시험(QE) 합격까지 기다리지 않고 한 학기가 지나고 나서 나의 성적과 행동을 보고 결정하겠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나는 매일 연구실에 출근하여 연구실의 내용을 열심히 익혔고,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 결과, 다음 학기부터 장학금을 받게 되어 등록금과 최소한의 생활비는 걱정을 덜게 되었다. 떨어져 있던 둘째 아이도 미국으로 와 가족이 함께 생활할 수 있게 되어서 너무 감사했다.
그러나, 장학금만으로는 최소한의 생활비에서 십일조를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부모님께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이 모자람을 채워주시도록 기도하는 중에 교회에서 청소하는 일거리를 얻게 되었다. 토요일 오후에 2-3시간 잔디를 깎고, 주일 예배를 마친 후에는 2시간 정도 교회 청소를 하는 것으로 100$(추후 150$)을 받게 되었고, 나는 이것으로 십일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아이들이 먹고 싶어하는 맥도날드 햄버거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청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사주는 상황이었다. 그러면서도 4명의 식구가 음료수 한 컵만 주문해서 먹는 처지였다. 이듬해 지도교수가 여름방학 2달 동안은 등록금 비용대신 생활비를 좀 더 주는 덕분에 여름 방학 중 단거리 여행도 다녀올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내가 유학을 마친 34살의 나이에, 내 수중에는 일전의 돈도 남아있지 않은 빈털터리였지만, 그 동안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모자람이 없었던 것에 대한 감사와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쁨이 넘쳐있었다.
나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중요한 내용을 배웠고, 이것은 지금까지의 내 삶에서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고 본다.
첫째, 나는 재정적으로 궁핍함에 있을 수 있으나, 하나님은 모자람이 없게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바울이 궁핍함에나 풍족함에 처하는 것을 배웠다고 고백한 것처럼, 나도 어떠한 환경에 처하든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지혜를 주셔서 모자람을 해결할 수 있는 적절한 방안과 환경을 주심도 배웠다. 유학시절은 이러한 배움과 훈련을 위한 좋은 기간이라 생각한다. 유학생들은 본인의 선택에 의해 궁핍함의 환경에 처해졌지만, 이러한 믿음과 희망이 있을 때 그 상황을 이겨냄으로 차후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게 될 것이다. 둘째, 욕심이 아닌 재정의 필요가 있을 때 하나님께 간구하면, 하나님이 채우신다는 단순한 성경적 진리를 체험함이 중요하다. 공부하는 유학생에게는 공부에 필요한 재정, 일상생활에 필요한 어느 정도의 기본 생활비, 그리고 어떤 목적을 위한 일에 재정이 필요하다면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 성경적이고, 하나님은 이를 통해 하나님을 체험하는 기회를 주시고자 한다. 내 삶의 중요한 순간순간 하나님을 체험하는 경험은 우리의 신앙을 더 성숙하고 깊이 있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라 생각한다.
셋째, 수입이 적을 때나 많을 때나 수입 중 일정비율을 구분하여 헌금과 사역에 드리는 것이 축복의 통로라는 것이다. 헌금의 비율을 정하고자 할 때, 수입이 적으면 적은 대로 힘들고 수입이 많으면 많은 대로 힘들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수입이 가능케 하신 주님께 기쁨으로 드릴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내가 아는 어떤 초신자는 말라기서의 실입조에 관한 말씀을 읽고, 세상의 어떤 투자보다 가장 확실한 return이 있는 약속이라고 믿는다는 말을 하였다. 살아계시고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 약속을 하셨다면, 이만큼 확실한 투자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이것도 잘못된 내용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기쁨으로 드린 우리의 헌금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고, 약속의 말씀을 따라 나에게도 다양한 축복이 주어지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여러분들이 유학 시절을 통해 부딪치는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 가운데에서 공급해주시는 주님의 신실하심을 체험하길 바란다.
[조근상]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찬양 – 우리의 고백
이코스타 2004년 12월
진정한 찬양이란 무엇인가? 이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열쇠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찬양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실상은 우리가 부르는 찬양을 아무런 의미가 없이 흥얼거리면서 부르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성경이 찬양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찬양을 드리는 대상보다 찬양을 받는 대상이신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 즉, 찬양을 드리는 우리의 문제가 아닌 하나님에 더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 것이다. 성 경에서 찬양이 어디서부터 시작하였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언제부터 시작하였는지는 욥기서를 보면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온 땅의 기초를 세울 그 때,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욥기서 38:7) 하였다고 이야기한다. 시편 136편에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감사의 찬양이 적혀져 있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과 함께 한다. 그들이 찬양하고 예배를 드릴 때는 전쟁에 이길 수 있었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지 않을 때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의 포로가 되거나, 영적인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찬양을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포로가 되었다는 구절이 거론된 적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지 않을 때 그들은 교만해져 갔다. 이스라엘 백성 스스로가 찬양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메트 레드맨이 “하나님 앞에 선 예배자”라는 책에서, 찬양의 반대는 찬양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교만이라고 이야기했다. ‘교만은 자신을 보라’고 하지만 찬양은 하나님을 보게 하는 것이라는 표현은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이 사야 43장 21절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 역시, 그 분께 찬송을 부르게 하시려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찬양을 드리는 이유가 이렇게 명확한 말씀으로 있기 때문에 찬양을 드린다면, 그것은 참으로 딱딱한 모습이 될 수 밖에는 없다. 반대로,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크나큰 잘못을 범하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함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갈망과 열정은 찬양을 온전하게 이끌어 가는 자세이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경우에 하나님께 상한 심령을 가지고 나가는가? 항상 무의미하고 건조한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 하나님은 싫증이 나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국에 있는 동안 ‘피정의 집’이라는 곳에서 침묵 기도의 훈련을 받은 적이 있었다. 3일동안 침묵하면서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는 훈련을 하는 곳이었다. 이 기간 동안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만을 묵상하고 생각하면서 그분의 임재하심을 느낀다는 것은 나에게 참으로 큰 특권이었다. 나같은 성격의 타입은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이라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너무나도 좋은 시간을 보내고 왔다. 저녁 강의 시간에 수녀님이 말씀하셨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기도’란 주님이 저를 바라보시고 저도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정의해 주셨는데, 결국 기도를 통해서 내면 세계의 질서가 올바르게 서 가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곳을 나오면서 느끼게 된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란 우리의 올바른 고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부르신 이유이자 목적인, 우리의 존재됨을 근본적으로 인식함으로 행하는 당연한 현상이 찬양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머무르는 삶을 살면서, 그 분을 경배함으로 그 분의 형상을 닮아가는 삶을 모든 사람에게 알릴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찬양인 것이다.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찬양은 우리 삶의 고백을 말하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나 자신에게도 놀라운 변화들이 일어났다. 현 대의 멀티미디어 시스템은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특히나 할리우드의 영화들을 보게 된다면, 이제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안 되는 것이 없을 정도이다. 이제는 우리가 하고 싶은 것들을 대리 만족으로 느끼는 경우도 많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만든 경험들은 우리의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특히 우리가 듣는 앨범들이나 좋은 영상들을 보면서 그것들로 하나님께 드려야 할 찬양으로 대처하는 것은 좋지 않다. 오히려 직접적으로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모습으로 참여하라. 삶의 고백을 나누고, 같이 있는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에 대한 여러분이 받은 사랑을 나누기 시작하라. 하나님은 여러분의 고운 소리와 여러분이 연주를 잘 하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으신다. 하지만 칭얼거리며 여러분의 속 마음이 담긴 한 마디에 하나님은 귀를 기울이신다. 삶의 고백이 있는 찬양을 늘 생활 가운데서 만들기 시작하라. 여러분의 찬양은 하늘에 울려 퍼지는 산 제사가 될 것이다.
정진호 교수와의 만남
이코스타 2004년 12월호
eKOSTA: 인터뷰에 참여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먼저 개인적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교수님은 어떻게 신앙을 가지게 되셨고 현재까지 이렇게 헌신하게 되셨는지요?
정진호: 아이구… 또 옛날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하는군요. 코스탄 중에 이미 여러번 들은 분들이 있으리라 생각해서 간략히 말씀드리면… 전 대학 시절에는 완전 앤티로 술마시고 허랑방탕하게 지내던 대표 선수였구요…간접적으로 그 시절에 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하시면… 그에 대한 묘사가. 홍성사에서 출간한 <아바>라는 책 속에 나타나 있습니다. 아마 읽으시면 놀라시겠죠. 그 시절엔 성경보단 도덕경이나 인도철학 쪽이 더 흥미가 있었습니다. 예수믿는 아내 만나 결혼 하고도 정신 못차리고 3년간 교회 안나가고 버티다가 미국에 포닥으로 와서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던 후배의 강권적인 안내로 뜻밖의 교회 생활 시작했구요… 보스톤 지역의 Gate bible study Group에서 성경말씀을 깊이 있게 묵상하면서 점차 신앙에 깊이 들어가게 되었어요.
eKOSTA: 코스타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으셨는지요?
정진호: 89년 코스타에 같이 가자는 후배의 권유를 뿌리치고 캐나다로 놀러갔었는데… 1년 사이에 제 믿음이 굳어지면서 90년 코스타에는 자원해서 오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중국과 북한에 대한 부르심을 받게된 것 같아요. 그해 주제가 “이 시대를 새롭게” 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유달리 민족과 시대에 대한 메세지가 많았어요. 김진홍 목사님도 오셨고… 송인규 목사님을 통해선 학문과 신앙이 어떻게 통합되어 선교적 사명에 쓰임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학문적 근거를 제시받았다면… 김진경 총장님을 통해 구체적인 부르심을 받은 셈이죠. 폐회 예배 때 홍정길 목사님께서 <영적으로 3국통일을 준비하라>는 메세지도 강하게 들렸고요. 제 개인적으로는 <복음, 통일, 중국>이라는 인생의 화두를 안게 된 매우 중요한 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3년간의 포항 생활을 통해 준비를 하였고 94년에 중국 연변과기대에서 들어가서 사역 하던 중, 96년 초 어느 새벽인가요… 강동인 간사님이 전화를 하셔서 강사로 초청해 주셨어요. 그 때 부터 거의 빠지지 않고 코스탄 후배들을 위해 매년 달려오고 있죠. 이것이 저의 지금까지 코스탄 라이프입니다.
eKOSTA: 이코스타에 글을 연재하시면서 다양한 소재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증거해주셨는데요,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가장 기억에 남으시는 글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정진호: 글쎄요. 제 전공인 재료공학을 통한 성경적 조망으로 다니엘의 환상을 문명사적으로 해석한 글이 학문과 신앙의 통합이라는 관점에서 가장 의미있는 글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영성적인 관점에서는 <루카스 이야기>가 제일 기억에 남고요. 제 자신도 깊이 은혜를 체험했으니까요. 아무튼 어렵게 어렵게 이코스타를 통해 매달 글을 연재하는 바람에… 제가 미처 예기치 않았던 책을 두권이나 출간하게 되어서 저로서도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이코스타 원고를 묶어서 출간한 책이 <예수는 평신도였다>와 <치유의 꿈, 루카스 이야기>가 된 거죠.
eKOSTA: 여러가지 사역 중에서도 이코스타에 빠짐없이 글을 보내주심을 감사드리는데요, 평소에 많은 사역을 감당하시는 자기 관리의 비법이랄 것이 있으신지요?
정진호: 한동안 이코스타에 지각하지 않고 원고를 보낸다고 칭찬도 많이 해 주셨는데… 최근에 계속 지각 원고를 보내드려서 죄송합니다. 자기 관리 비법이 특별이 있는 건 아니고요… 무슨 일이든 사명감이 원동력이 되어야 하는 것 같아요. 흔히 저희 대학에 와 계신 교수님들을 농담으로 사역자(a man of 4 roles)라고 하는데… 가르치고 행정하고 좁은 의미의 사역(학생)하고 또 연구까지 하는 거의 초인적으로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어느 순간 부터(아마 제 글을 읽고 변화받는 분들이 계시다는 걸 깨달았던 때였던 것 같습니다.) 글 쓰는 일이 하나님이 제게 주신 달란트 중 하나요… 사명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은 평양과기대 일을 맡고 나서 너무 많은 일들이 폭주하다 보니 제 시간 관리 측면에서도 아쉽지만 이코스타를 당분간 쉬어야 겠다는 판단을 하게 된 겁니다.
eKOSTA: 현재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코스탄들은 한편으로는 부유하면서 한편으로는 학업과 일로 어렵게 생활하고 있는데요, 교수님의 떡의 전쟁이라는 복음과 고난의 메세지를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정진호: 미국의 물리적 환경만을 보면 물론 부유함이 넘치죠. 그러나 유학생들의 경우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와 인생의 사명에 접목되어 있지 않은 경우는 항상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공허감 속에서 지낼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특별히 믿는 학생들의 경우는 더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이 섬기는 신이 <바알신>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만, 믿는 학생들은 <여호와>와 <바알> 사이에서 항상 갈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냐 바알이냐?>라는 이 질문 앞에서 갈팡질팡하는 거죠. 사실은 둘 다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하게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씀하시니 그게 문제입니다.
내가 공부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학업에 대한 분명한 목적의식을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크리스천의 삶이 일상 생활에서의 의미로 나타나고 산제사로 드려지기 위해서는 <종>에 대한 개념, 즉 청지기 의식이 분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이웃을 섬기는 종으로서의 목표 의식을 가지고 학업에 임하면 그속에는 반드시 십자가가 나타납니다. 크리스천의 예배의식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내려와서 나를 거쳐 다시 믿음으로 하나님께 경배하며 올라가는U턴이라고 흔히 생각하지만 단순한 U 턴에서 그치면 결국은 선데이 크리스천이 되고 맙니다. 교회 안의 신자와 세상 속의 불신자로 함께 살아가는 이원론에 빠지고 만다는 거죠.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산제사의 삶, 즉 이웃의 가난에 동참하며 그들을 섬기기 위해 내 자신을 비우는 삶은 U턴이 아니라 P턴입니다. 즉 하나님께 믿음으로 올라갔던 내가 다시 내려와 이웃을 향해 옆으로 달려가는 것, 그 가운데 비로소 십자가가 나타납니다. 한국의 기독교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 혹은 취약성은 교회 안에서 U턴만 잘하는 그래서 결국 세상 속에서는 십자가를 지지 못하는 나약한 크리스천만 양산했다는 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세상 속의 가난한 이웃에게 내려가 그 떡을 던질 수 없는 사람은 결국 십자가를 지는 고난의 의미를 체득하지 못하고 맙니다. 진정한 예수의 제자란 그의 일상적 삶에서 십자가가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서 가려지리라 생각됩니다.
eKOSTA: 교수님의 글 중 <선악과와 무감독시험>이라는 글을 개인적으로 매우 인상깊게 읽었는데요, 현재 연변에서 일하시면서 한편 평양 과기대 사업으로 분주하시리라 생각이 듭니다. 동북아교육문화협력재단과 평양과기대 설립 사업에 대해서 소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진호: 예, 정말 기도하면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고 있습니다. 정말 그 대학이 세워져서 북한 청년들을 가르칠 수 있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정말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기에 그래서 더욱 exciting 한 일인 것 같습니다. 평양에 그것도 최초의 순교자 토막스 선교사의 기념 교회 터 위에 세워지는 이 대학을 그래서 저희는 <스룹바벨 프로젝트>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정말 2007년 평양 대부흥 100주기를 맞이하는 의미있는 시기에 맞추어 이 대학이 우리 민족 화합과 화해 회복 그리고 통일과 번영의 기초를 쌓는 초석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현재 학사동 건물이 5층까지 골조가 올라갔고… 식당, 기숙사의 기초가 된 상태에서 잠시 겨울이 되어 공사를 중단하고 있지만 내년에는 어떻게든 6개동의 기본 시설을 갖추어서 늦어도 2006년 봄에는 1단계 개교를 할 예정입니다. 많은 물질과 또 헌신자가 필요합니다.
동북아교육문화협력재단은 연변과기대를 지난 12년간 후원한 단체이기도 하며(www.neafound.org , 86-2-561-2445) 현재 평양과기대 설립을 위하여 북한 교육성과 계약을 맺은 우리측 대표기관입니다. 그 곳에서 평양과기대 건립위원회를 발족했고 위원회의 위촉을 받아 현재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마침 제가 평양과기대에 대한 생각과 묵상을 위해 컬럼을 올리고 있는 제 3시라는 싸이트( www.3-rd.net )에 올라 있습니다. <평양과기대 설립의의 및 진행 상황>이라는 글입니다. 그 싸이트에 요즘 <떡의 전쟁>도 시리즈로 나누어서 올리고 있고요….(제 3시-> 잔꽃송이 -> 루카스 막힌 담을 허시고로 찾아들어가시면 됩니다.) 사실은 떡의 전쟁은 제 마음 속에 통일과 평양과기대를 생각하며 지속적으로 묵상한 글 모음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코스탄들도 그 싸이트에서 평양과기대를 위해 함께 묵상하며 기도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떡의 전쟁-에필로그> 마지막 부분을 아직 미처 못썼는데… 그 싸이트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번호에는 인터뷰로 대신하고요.
그리고 평양과기대를 위한 미국 쪽의 공식 웹 싸이트는 www.pust.net가 있습니다. 그리고 평양과기대에 대한 더 구체적인 사진 자료나 최근 동영상을 보시려면 www.webhard.co.kr 로 들어가셔서 id:rthomas, p/w:pust 로 들어가시면 guest folder 에서 많은 자료들을 얻으실 수 있습니다. 계속 업데이트도 될 것이구요.
eKOSTA: 교수님의 앞으로의 계획도 말씀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아울러 기도제목을 주시면 함께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정진호: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우리 민족의 통일에 쓰임받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행보가 평양과기대입니다. 물론 통일 이후에는 중국으로 다시 나올 것입니다. 기도제목은…
그리고 저희 가정의 행보를 주님께서 인도해 주시도록. 제 가족, 제 아내와 아들들, 부모형제들이 함께 이해하고 부르심을 받을 수 있도록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요…. 제 아내가 지금 무척 두려워하고 있거든요. 특별 기도 후원이 필요합니다.
평양과기대가 반드시 세워질 수 있도록, 많은 물질 후원자와 교수헌신자들이 나타나도록. 코스탄들이 각자 있는 자리에서 평양과기대를 위한 홍보요원들이 되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물론 연변과기대가 더욱 든든하게 세워져 가도록 위해서도 계속 기도해 주세요.
eKOSTA: 이코스타 독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으신 말씀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정진호:항상 건강하시고 비전의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또 기회가 되면 이코스타에 컴백하여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당분간은 제 3시 싸이트에서 뵙죠. 짜이찌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