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문희] 특수 사역의 실태와 개선: 장애 사역

과학, 의학 기술의 발달로 오늘날 사회는 점점 복잡해져 가고 있고 사람들의 생활 습관, 살아가는 방법, 그리고 생각하는 방법 또한 현대 문명의 발달에 뒤질세라 급변하고 있다. 사람들과의 인간관계는 더욱 더 복잡해져 가고 수많은 갈등과 대립 속에서 고민과 근심만 하다가 결국은 그것이 일종의 스트레스가 되어 몸과 마음의 병을 일으키게까지 하고 자신이 예측하지 않았던 삶을 창조해 나가면서 평생을 마감하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기가 그지없다. 이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정신과 의사를 만나서 치료와 상담도 받고 자신의 문제를 치유 받으려고 애 쓰는가 하면 교회에 나와 신앙의 힘을 빌려 볼까 하는 경우들도 더러 있다.


그런데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모인 교회 공동체가 과연 이들의 필요를 잘 공급할 수 있을까? 주일 학교를 비롯해서 교회의 다른 여러 부서별로 각 부서의 사역 목표와 계획에 따라 기본적인 프로그램은 어느 정도 갖추어져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어떤 특별한 필요를 요구 하는, 즉 치유 사역, Homeless 사역, 입양아 사역, 가정 사역, 그리고 장애인 사역 등등은 아직까지 모두 포용하기가 어렵다고 볼 수 있다. 이런 특수 사역들은 말 그 자체로 특별한 상황을 지닌 사람들을 섬기는 사역이기 때문에 그 만큼 교회마다 부담이 될 수도 있고 설령 섬기고 싶다 하더라도 무엇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모르는 교회들이 대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 지난 6 년 동안 미국 학교에서 장애 아동들을 섬기면서 특수 사역의 중요성 그리고 앞으로 개선되어야 할 점들을 몸소 느낀 이야기들을 이코스타 독자들과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서 나누고자 한다. 단 저자가 특수 교사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장애 사역의 포커스를 맞추려고 한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장애인 사역에 관심을 갖고 그들을 섬기려 하나 역효과를 보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 그 이유는 첫째, 비 전문화된 사람들이 단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그 자체만을 가지고 섬기려고 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역을 하던지 하나님에 대한 사랑 없이 하는 사역은 없을 것이고 더군다나 교회에서 주관하는 사역이라면 더 할 말이 없을 만큼 하나님/예수님의 사랑을 강조한다. 여기서 말하는 전문화 된 사역이란 “사역의 전문성”(skillfulness in ministry)을 의미 하는데, 장애 사역의 경우에는 장애 (disability)에 대한 올바른 정의와 특성, 섬기는 방법 등에 충분한 지식과 이해를 필요로 하고 있다. 오늘날 현대 의학의 발달로 장애의 이름, 종류가 많이 세분화 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을 섬기는 사람들 역시 다른 장애 영역에 대해 조금씩 알고 업그레이드 할 필요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나의 학부 과정에서 받은 교사 자격증은 특수 교육 ‘정신 지체 (intellectual disability)’였지만 처음 직장을 잡아서 맡은 학급은 Resource classroom으로 통합 교육이 가능한 정서 및 학습 장애 아동들이 함께 공부 하는 학급이었다. 정서 및 학습 장애 라이센스가 없기 때문에 주어진 기간 안에 다시 학교에 가서 그 과목들을 이수하지 않으면 교사로 일할 수가 없고 아무리 특수 교사라 할지라도‘정신 지체’에 대한 자격증을 갖고 있는 교사가 어떻게 정서나 학습 장애 아동들을 효과적으로 지도 할 수 있냐는 학교 측의 지적에 따라 일 시작한지 일 년도 안 되어서 공부를 다시 시작했던 기억이 난다. 또한 올해 맡은 학급은 통합 교육이 불가능한 중복 장애 아이들인데 시각 장애를 갖고 있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보니 시각 장애 라이센스를 취득 하라고 해서 지금 통신 교육으로 이수 하고 있다. 아무리 정신적으로 지능이 낮고 여러 가지 복합적인 장애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점자와 시역에 대한 전문적인 이해를 해야 한다고 특수 교육 관계자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그 만큼 장애가 심해서 정상적인 삶이 불가능한 아이들에게는 특히 전문성이 있는 특수 교사를 임용해서 그들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심어 주도록 교육부의 대책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렇게 학교만큼 교회에서는 전문화 된 사역 일군들을 찾기가 쉽지가 않은 것이 현실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특수 사역 (장애 사역)의 팀 리더는 사역 일군들에게 전문화의 중요성을 강조시킬 필요가 있고 각종 훈련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일군들을 계몽해야 할 것이다. 물론 사역 팀장 역시 자신이 전문화 되지 않았다면 리더의 입장에서 당연히 배워나가야 할 것이다.


둘째, 이렇게 전문적인 지식의 필요를 받아들일 수 있는 질 (highly qualified) 이 높은 일군들을 발굴하는 일이다. 비록 사회에서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을 섬기는 사역이라고 해서 단지‘하나님의 사랑’만 갖고 섬기는 일군들은 섬김의 한계가 있고 효과적인 사역을 하기 보다는 그냥 동정심에서 사역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언젠가 한 졸업식에 참석했는데 오랜 기간 동안 감리교 고아원 (United Methodist Home)을 운영해 온 R이라는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다. “If you would like to be a successful individual for your life, know A. B, C. A stands for attitude, B stands for behavior, and C stands for commitment. You can make your dream come true if you do well in all A, B, C. 아마도 질이 높은 즉 Highly qualified 가 된 일군들이 가져야 할 자세가 아닌 가 싶다. 위의 R 목사님의 말씀처럼 A, B, C를 모두 잘 하는 사람의 생각은 긍정적이고 언제나 열정이 넘친다고 하는데, 특수 사역에 필요한 일군들이 바로 이런 성격들의 소유자이다. 그러다 보면 섬김을 받는 이들 역시 나름대로 도전적인 삶을 살 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기 마련이다.


이렇게 전문적인 훈련을 갖추고 A, B, C를 잘 하는 일군들로 구성된 사역팀장과 팀원들이 모여 있을 때 특수 사역(장애 사역)의 비전과 꿈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제, ‘불쌍하고 사정이 딱해서, 혹은 보기가 마음이 아파서’라는 이런 동정심에서 나오는 사역은 사라져야 한다. 하나님의 복음을 각기 다른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어떻게 전파하고 이들이 교회 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서 비장애인들과 공존하며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는 일들을 도와주는 역할이 바로 특수 사역의 시급한 과제라 할 수 있겠다.


@다음 달에는 정신 지체인 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생활을 도울 수 있는지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정진호] 제 9 떡 – 천국 지혜 –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1)


가난과 부요에 대한 떡의 논리를 이제 정리해 보자. 그 속에 나타난 청지기의 윤리는 무엇인가?


물질은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요, 악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들에게 물질은 이미 우상이 되었다. 물질에 눈이 어두운 인간들은 물질의 노예가 된지 오래다. 모든 우상이 그러하듯이 이미 주종관계가 바뀌어버린 것이다. 물질 자체가 사람을 조종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에 단순히 가치중립적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물질은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으니 물질을 (많이) 소유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는 말은 다분히 문제가 있다. 이 말 속에는 물질을 향한 끊을 수 없는 인간의 열망과 탐심을 교묘히 감추어 위장하려는 미련이 숨어있다. 부자들을 위한 면죄부를 손쉽게 발급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물질은 이미 영적인 능력을 휘두르는 맘몬 신이 되어 있다. 이미 불의를 품고 있으며, 사악한 인격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브를 유혹했던 뱀의 속삭임이 여전히 우리 귓가를 맴돌고 있다. 그 사악함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아 끝없는 탐심과 교만으로 이끌어가며 사회적 불평등과 가난을 확대 재생산한다. 물질로 인해 발생한 궁핍과 억압 상태는 인간의 역사를 전쟁과 기근과 폭력으로 점철된 불행으로 수놓았다. 하루하루 시시각각 발생하는 부정적인 국내외 뉴스들은 거의 모두가 물질을 서로 갈취하기 위해 벌이는 떡의 전쟁, 그 전쟁터의 전황들이다.


이 전쟁을 피할 수는 없을까? 전쟁터에서 멀리 떨어져 살아간다면? 그러나 우리는 물질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떡은 우리의 존재양식이다. 그래서 물질을 무시할 수도 없다. 더구나 물질을 초월하여 나 혼자 고요한 삶을 살아가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나 가난하다. 그 속에서 쓰러져 굶주려 죽어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처음부터 이 세상을 다스리고 지키도록 명하셨다. 이른바 청지기의 직책을 준 것이다. 우리가 돌보아야할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가난한 이 세상이다. 가난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회 그리고 가난한 생태계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그 명령을 피하는 것은 직무유기가 된다. 따라서 청지기의 윤리의식이 문제시된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주인이 기뻐하는 삶이 될까?



(2)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법은 가난해지는 방법밖에 없다. 가난해지는 길은 자신이 가진 재물을 나누어주는 것이다. 결론은 분명하고 간단하다. 네가 가진 것을 주라(Give!)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가 복음서에서 가르친 재물관이다. 이 가르침은 너무나 명확해서 우리들이 좀처럼 받아들이기가 힘들 정도다. 그래서 이 말은 들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뒷걸음질쳐서 예수에게서 달아났다. 그 가운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먹고 살아가던 종교지도자들도 많았다. 그들은 예수의 그 말을 비웃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이 위험인물에 대해 핍박을 가했다. 이 같은 현상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특히 사회적 복음과 물질관에 대해 특별히 강조하여 가르치고 있는 누가복음에는 부자와 물질적 부요에 대한 수많은 경고들이 등장한다. 의사였던 누가가 예수의 제자가 된 이후 물질에 대해 가장 강경한 태도를 취하게 된 것이 흥미롭다. 오늘날의 의사라면 가장 부유한 계층에 속한 사람들인데, 그가 오히려 공산주의자에 가까운 급진적 분배주의자가 된 것이다.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부자에 대한 수많은 경고, 혁명적 메시지 중에서도 가장 우리를 놀라게 하고 또 난처하게 만드는 내용이 16장에 등장한다. 이른바 <옳지 않은 청지기>의 비유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이다. 참 난해한 이야기가 되어서 역사 속에서 수많은 논쟁거리가 되어왔고 신학자들의 연구 과제로 등장했다. 그토록 곱씹은 이야기를 또다시 거론할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섣불리 건드려서 제대로 된 결론이나 낼 수 있을지……. 하는 염려도 생긴다. 그러나 떡의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 부분을 슬쩍 뛰어넘는 것은 마치 격전지에서 도망치는 비겁한 병사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어차피 부딪혀야 할 전투라면 과감히 돌진하고자 하는 심정으로 칼을 빼 든다.


<부자 주인과 옳지 않은 청지기의 비유>


주인의 소유를 맡았으나 그것을 허비한 청지기……. 그는 자신의 잘못된 일이 주인의 귀에 들려 주인이 곧 들이 닥치고 하던 일을 빼앗기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인과 계수할 날이 다가오자 그가 취한 행동은 자신이 관리하던 채무자들을 불러 그들의 빚을 탕감해주는 일이었다. 주인의 재산을 더욱 감소시키는 일이었지만 그로인해 채무자들에게는 은혜를 베풀어 실직이후의 자신의 위상을 높이겠다는 계산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런데 이 옳지 않은 행동을 한 청지기가 지혜롭다고 주인에게 칭찬을 받는다. 이 같은 행동을 한 청지기를 빗대어 이 세대의 아들이 오히려 자기 세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 보다 더 지혜롭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주인은 자신의 재산이 불법적으로 줄어든 데에는 큰 관심이 없는 통 큰 주인임에 틀림없다. 이 부자 주인은 누구인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모든 부요의 원천이신 하나님이다.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지혜롭다고 칭찬받은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그는 자신의 죄를 신속히 인정하였다. 자신이 주인의 재물을 맡은 청지기로서 제대로 직분을 감당하지 못했음을 알고 그것을 인정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끝없는 자기 합리화와 책임 회피에 빠지는 대다수의 사람들에 비해 그는 확실히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둘째, 그는 주인이 곧 들이닥칠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곧 자신의 행한 일들, 곧 지나간 삶에 대한 계수가 시작되고 자신은 청지기 직에서 쫓겨날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이는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을 직시하는 종말론적 인식이기도 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기 앞에 임박한 최후의 순간을 깨닫지 못한 채 어리석은 삶을 끝없이 경주하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이는 지극히 지혜로운 판단이었다. 셋째, 그는 자기에게 남은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은혜를 베풀었다. 그동안 자신이 아끼던 재물을 사용하여 자신과 관계를 맺던 채무자들, 곧 빚에 허덕이며 살아가던 가난한 자들에게 물질적 혜택을 베풂으로서 자신의 실직 이후를 대비하기 시작했다.


이는 윤리적으로 보면 반드시 옳은 행동은 아니었다. 주인의 채무를 자신의 장래 이득을 챙기기 위해 임의로 탕감해주는 일은 결코 바른 행동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같은 행동은 타락한 세상, 곧 이 세대에 있어서는 있음직한 일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청지기의 약삭빠른 행동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주인이 지적한 점은 바로 이점이었다. 이 세대의 옳지 못한 청지기도 깨닫는 지혜를 소위 영생을 소유했다고 하는 빛의 아들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음에 대한 질책이기도 하다. 이 옳지 못한 청지기가 깨달았던 세 가지 지혜를 보고 배우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주인은 놀라운 주문을 우리에게 한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이 말씀을 바로 깨닫기 위해 좀 더 세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이 비유에 등장한 옳지 않은 청지기는 과연 누구인가? 이는 단순히 이 세대를 살아가는 윤리적으로 타락한 경영인 또는 부도가 임박한 사업가인가? 우리와는 무관한 사람인가? 크리스천인 우리, 거룩한 빛의 아들로 자처하는 우리들은 옳지 않은 청지기의 비유를 국외자의 신분으로 그저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천만에 말씀이다. 옳지 않은 청지기, 그는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옳지 않은 청지기들이다. 에덴동산에서 위임되었던 청지기 직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위대한 자연(nature)세계를 맡아 그것을 경작(cultivate)하여 아름다운 문화(culture)로 만들어 가도록 하는 것이었다. 다스리며 지키도록 맡겨두신 하나님의 소유물, 물질세계를 우리는 바로 지키지 못하고 사단에게 내어주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에 손길을 내밀었던 그 순간 전 인류가 함께 욕망의 손을 뻗혔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먹어 범죄한 그 순간 우리도 그 현장에 함께 있었다는 어느 신학자의 통찰력은 과연 옳다. 우리는 함께 범죄한 자요 청지기의 권력을 남용한 자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많은 물질들을 지금도 계속해서 허비하고 있다. 그리고 그 보고는 영적인 인테넷 사이트(www.heaven.God/behavior)를 통해 속속 실시간으로 하나님께 들어가고 있으며 행위를 적은 책에 빠짐없이 기록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옳지 않은 청지기가 깨달았던 세 가지 지혜에 대해 더욱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주인의 재물을 끝없이 낭비하는 죄를 짓고 사는 옳지 않은 청지기라는 사실에 대한 자각과 그 사실이 드러날 마지막 순간 임박했다는 종말론적 인식과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처신해야할 것인지에 대한 윤리적 판단이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내 이야기이다.


제자들의 윤리적 판단을 유도하기 위한 주님의 요청,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씀은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취했던 그 행동을 하라는 것이었다. 네가 가진 재물을 나누어서 빚진 자들을 탕감해 주라는 것이다. 타락한 세상에서 어차피 재물은 불의한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의 탐심이 물질을 우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재물에는 이미 불의한 영이 깃들어 있다. 아무리 너희가 깨끗하려고 해도 너희는 물질에 대한 우상 숭배를 멈출 수 없고,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청지기직을 감당할 수는 없다. 끝없이 무질서를 창출하는 열역학 제 2 법칙의 무서운 심연과도 같이, 타락한 이 세상에서는 너는 결코 의로운 청지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네가 영원한 처소로 들어가 큰일을 맡을 때까지는 말이다. 어차피 나는 너에게 작은 것을 기대하고 있다. 네가 맡은 내 소유를 허비하지 않을 수는 없을지라도 비록 불의한 그 재물을 사용하여 내가 원하는 일을 해라. 네 주변의 너보다 더 많은 빚을 지고 허덕이며 살아가는 채무자들에게 그 빚을 탕감해 주도록 하라. 이것이 바로 내가 이 세상에서 너에게 기대하고 있는 청지기로서의 지극히 작은 일이다. 만일 네가 이 작은 명령하나도 충성되게 이행치 못한다면 나중에 천국에서 어떻게 더 큰 일을 맡을 수 있겠는가? 네가 남의 것을 관리하는 것조차 제대로 못해낸다면 어떻게 네 스스로 네 소유를 관리토록 큰일을 맡겠는가? (천국에서의 소유는 청지기 소유가 아니라 자기 소유임을 암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착하고 충성된 종들에게 열 고을 차지할 권세를 주겠다 하는 누가복음 19장의 약속이나 열 달란트 남긴 종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고 하는 마태복음 25장의 비유를 통해 천국에서는 상급과 함께 해야 할 일들이 주어질 것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그러나 그 일은 타락한 인간이 행하는 고통스런 노동(labor)이 아니라 주인의 즐거움에 함께 참예하는 기쁨의 일(creative work)이요 예수와 더불어 왕 노릇 하는 특권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니 이제 너희의 재물에 대한 우상 숭배를 버리고 청지기의 본분으로 돌아가라. 청지기는 주인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네 주인이 누구냐? 재물이냐 아니면 하나님이냐? 하인이 결코 두 주인을 함께 섬기지 못하나니 이제 너는 네 주인을 결정하라.


이 말을 엿듣고 있던 바리새인들은 곧 그 화살이 자신들에게 돌아올 것을 직감했다. 그들은 영적으로 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부자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돈이 많았을 뿐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자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곧바로 자기 방어에 들어갔으며 예수를 비웃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할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더구나 그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재물을 나누어 주라는 예수의 말을 비웃었던 또 다른 근거는 구약에 나타난 선지자들이 대부분 부유한 삶을 살았던 지배계층이었고, 물질적 부가 곧 하나님으로부터 온 축복의 증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그들 나름대로의 지배논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강령을 가르치고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옳게 보이는 행동들을 하고 있었으나 예수는 그들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썩은 무덤과 같은 탐욕과 교만을 지적하며 하나님께서는 그 중심을 이미 알고 계심을 질타한다. 그리고 율법과 선지자의 시대 즉 구약의 가르침으로 하나님 나라가 지탱되어오던 이스라엘의 역사가 세례 요한을 마지막으로 종말을 고하고 이제 새로운 전환기가 도래했음을 천명한다. 이스라엘의 족장과 선지자, 왕과 율법사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끌려오던, 상대적으로 부유한 지배계층에 의한 집단적이고 국가적인 개념의 하나님 나라의 윤리가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철저히 개인적이고 피지배계층의 가난한 자들을 위해 선포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구약의 율법이 폐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수의 복음을 통해 감추어졌던 것이 완전하게 드러나고 완성될 뿐이다. “너희 바리새인들이 율법의 틈새를 만들어 교묘히 범하는 간음죄가 그 실례이다. 너희가 아내와 이혼할 때 이혼증서를 내주라는 율법을 이용하여 음행한 연고도 없는 아내를 버리기 위해 이혼증서를 주어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재혼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너희는 율법을 이용하여 너희 배를 채우고 자신의 악행을 감추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가증이 여기시는 것일 뿐이다.” 바리새인들을 응대하는 예수의 논리에는 빈틈이 없다. 그리고 나서 예수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결정타를 날린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


한 부자가 있다. 날마다 값비싼 옷으로 치장하고 호화로운 음식으로 연회를 베풀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 집 문 앞에 누워 있는 헌데를 앓는 병자 거지 나사로를 그는 매일 오가며 바라본다. 나사로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떡 부스러기로 연명하는 비참한 신세의 사람이다. 심지어는 개들조차 나사로를 위로하여 아픈 곳을 핥아주나 부자는 무관심했다.


마침내 나사로는 죽어 천국에 올라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 (이 대목을 주의하라.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긍지로 삼는 바리새인들을 다분히 의식한 표현이다.) 부자도 죽어서도 화려한 장례식을 치렀다. 그러나 부자는 음부에 들어가 고통을 받게 된다. 음부의 화염과 불꽃 가운데 극심한 갈증으로 신음하던 그는 아브라함과 그 품에 안긴 나사로를 보게 된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간청한다. 나사로를 보내어 자신의 혀끝에 물 한 모금을 적셔달라는 것이다. 여전히 이 부자는 교만하다. 자기 집 문 앞에 누워있던 나사로를 응당 자신을 위해 기꺼이 음부까지 심부름을 할 정도의 하인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대답은 냉정하다. 그 부자가 받는 고통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거지 나사로가 천국에서 받는 위로와 대비된다. 가난한 자에게 들어간 복음으로 인해 천국이 나사로의 소유가 된 것처럼 부자인 너는 너의 교만으로 인해 세상에서 온갖 연락을 즐기면서도 네 문 앞에 누워있던 거지 한 사람에게도 은혜를 베풀 줄 몰랐으니 네가 지금 받는 그 고통을 감수하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제 음부와 천국 사이는 더 이상 서로 건널 수 없는 큰 심연이 가로막혀 있음으로 가고자 해도 갈 방도가 없음을 냉철히 알려준다.


그러자 이 부자는 두 번째 간청을 한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이 고통을 감수할지라도 아직도 죽음 후에 닥칠 음부의 고통을 모르고 나와 똑같이 살아가고 있는 내 다섯 형제들에게 나사로를 보내어 그 사실을 알려달라는 것이다. 이 간청은 부자가 음부에서 겪고 있는 고통의 크기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더욱 실감케 한다. 그러나 이 부탁 역시 아브라함은 거절한다. 왜냐하면 이미 음부의 고통에 대해 부자와 그 형제들은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와 증거하면 그들이 들을 것이라는 부자의 간절한 요청도 거절당하고 만다. 왜냐하면 교만한 자들에게는 죽은 자의 부활로도 그 마음을 꺾을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사건이나 예수의 부활 역시 바리새인들의 교만한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던 것이다.


부자는 이름이 없다. 왜냐하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사람의 이름은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사라질 의미 없는 이름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족보에 올라가고 더러는 화강암 비석위에 새겨지며 혹은 인간의 역사 속에 아무리 화려하게 남아있을지라도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나는 순간 그에게는 그 모든 것이 무의미한 것으로 되고 만다. 음부에는 이름이 없다.


부자는 기회를 상실했다. 그는 자신의 재물로 얼마든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일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은혜를 더하셔서 그에게 그것을 날마다 기억할 수 있도록 그의 대문 앞에 거지 나사로를 배치해 두었다. 부자는 마땅히 나사로에게 선처를 베풀어야만 했다. 그의 고통을 한 인간으로써 함께 아파하고 위로하며 상처를 싸매어줄 수 있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는 선처를 베풀기에 충분한 재물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선한 양심을 우리 모두에게 이미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겨 두셨기 때문이다. 그것이 청지기가 마땅히 행해야할 직분이었다.


부자는 착각했다. 그 소유가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했다. 뿐만 아니라 그 소유가 마치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그렇게 날마다 살았다. 그 속에서 그는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웃에 대해 무관심했고 냉정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음부로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곳은 하나님으로부터 무관심과 냉정함을 받는 곳이다. 아니 하나님의 관심이 사라진 영역이 바로 지옥인 것이다. 바로 부자들이 가야할 종착역인 것이다.


그러나 이 비유를 통해 문득 떠오르는 의문은 마치 우리가 천국으로 가는 것이 가난한 자를 돕는 행위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오해되지나 않을까 하는 점이다. 그렇다. 우리의 포도원 주인은 우리가 행한 바 일의 크기에 의해 우리를 천국에 들여놓지 않는다. 그것은 마태복음 20장의 데나리온의 비유에서 밝히 설명했듯이 오직 전적인 포도원 주인의 주권에서 나오는 은혜의 약속이요 선물이다. 천국의 조건은 오직 예수요 오직 믿음뿐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오히려 구원의 조건에 다른 어떤 행위를 추가하려는 모든 노력들이 이단 사상으로 끝을 맺고 있음에 대해 우리는 각별히 주의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에서는 행위의 문제가 존재 근거를 상실하게 되는가? 기독교에서 윤리적 행위가 설 땅은 어디인가?


우리는 두 가지 방정식을 이해해야만 한다. 첫 번째 방정식은 우리를 미혹하는 가짜 구원의 방정식이다.

믿음(faith) + 행위(work) → 구원(salvation)


이와 같이 주장하고 말하는 모든 종교나 사상은 기독교와 무관한 이단 사상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도 반드시 크리스천의 선한 행위와 윤리적 삶에 대해 가르친다. 아니 그 어떤 종교보다도 윤리적 실천성이 강한 종교가 기독교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가난한 자들을 위해 자기 몸을 던져 세상의 빛으로 소금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며 사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행위는 어디서 나타나는가? 그것을 바른 방정식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믿음(faith) → 구원(salvation) + 행위(work)


만일 온전한 크리스천이 예수를 믿는 바른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렀다면 그는 반드시 선한 행위로 자신을 던져 이웃을 위해 살아가게 되어있다. 그렇지 못한 크리스천이 있다면 어쩌면 그의 믿음을 의심해야 한다. 그가 지닌 믿음은 예수를 주로 믿고 시인하며 고백하는 순전한 믿음이 아니라 회칠한 무덤처럼 외식하며 살아가던 바리새인의 가짜 믿음, 강도만난 이웃의 고통을 보면서도 외면하고 지나가는 레위인과 제사장의 자기를 위한 종교적 행위에 불과할지 모른다. 거지 나사로를 외면했던 이 부자가 음부에 들어가야 했던 것은 그의 믿음이 가짜였기 때문이다.

(3)


우리 시대의 거지 나사로는 누구인가? 내 대문 앞에 누워 있는 거지. 바로 우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고통 받는 이웃. 굶주림과 상처에 신음하는 북한에 있는 내 형제들이 아니고 누구겠는가?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나사로를 도울 수 있는 충분한 기회와 시간을 주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그를 도울만한 충분한 물질적 축복을 주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물질로 날마다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호화스런 음식으로 내 배를 채우면서도 그들을 돕는 데는 인색하다. 그 인색함은 믿지 않는 자들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믿는 크리스천들의 인색함이 더 완고하다. 그들은 그 무명의 부자처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스스로 믿고 행동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예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외면하고 비웃었던 바리새인과 같은 자들이다.


가난한 사회를 회생시키기 위해 가장 효과적이고 빠른 길은 교육의 길이다. 우리 스스로가 개화기에 그와 같은 혜택과 은혜를 입었던 사람들이다. 수많은 외국 선교사들의 헌신을 통해 연세대학, 이화대학, 숭실대학과 같은 교육 기관이 세워져서 지난 세기 얼마나 많은 인재들을 배양했는가? 아무 희망 없이 완고히 닫혀있던 조선 반도가 마침내 문이 열리고 새로운 지식과 문물을 받아들이고 교육의 열기가 일어나며, 그 저력을 바탕으로 경제성장의 기틀을 마련하여 결국 오늘의 풍요로운 물질을 누리게 된 것도 모두 그 은혜를 입은 결과들이다. 자신들이 가진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기 위해 머나먼 태평양을 건너 우리를 찾아왔던 그들처럼, 이제 우리가 누리는 물질적 부요를 나누어야 한다.


평양과기대를 통해 청년들을 가르침으로 북한의 형제들이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경제적 회생의 길을 주고자 하는데 그것을 위해 믿는 자들의 마음을 호소하는 일이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다. 얼마 전 평양과기대 프로젝트를 설명하기 위해 한국으로 출장을 다니며 여러 교회를 순방했다. 같은 메시지를 전하는 데도 작고 가난한 교회들은 큰 감동을 받으며 어떻게든 돕고자 하는데, 오히려 마음이 부요한 대형 교회는 그렇지 않다. 서울의 한 대형 교회의 당회에서 수십 명의 장로들 앞에서 평양과기대 프로젝트를 설명하다가 채 말도 꺼내기 전에 큰 반발과 비웃음을 받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북한은 우리의 주적인데, 왜 그들을 도와야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보수적 질문 앞에서 애써 답변을 하다가 마치 예수님이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받아야했던 비웃음과 핍박이 떠올랐다.


역사는 반복된다. 우리에게는 이미 충분한 가르침이 있다. 율법과 선지자가 있을 뿐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위해 우리를 찾아와서 모든 것을 가르치신 예수의 복음이 있다. <옳지 않은 청지기의 비유>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 이미 우리의 행할 바를 명확하게 가르치신 예수의 말씀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것을 통하여 귀 있는 자들은 천국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모두 옳지 않은 청지기이며 한편 부자이기도 하다. 우리가 나누어야 할 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떡들이다. 그것을 사용하여 적극적으로 친구를 사귀라는 것이다. 천국이 임박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네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눅 16:9)”


그러나 더러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않는 무리들도 있으리라. 이 또한 주의 말씀이요, 부자들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반영운] 뒷산 지키기

이코스타 2004년 6월


요 즘은 아침에 일어나 아파트 뒤에 있는 야산을 오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서울에 있는 집뿐만 아니라 주중에 머무는 부모님 댁 뒤에도 다행히 야트막한 산이 있어서 아침운동을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그런데 더 더욱 좋은 것은 두 곳 모두 다 약수터가 있어서 운동 하기 전과 후에 신선한 물을 마실 수 있다는 것이다.

주 말에는 태어난 아기와 시간을 보내느라 뒷산을 가지 못하고 있다가 오늘은 벼르고 별러서 아내와 아침 산책 겸 운동을 다녀왔다. 아내와 함께 하는 아침 산책 길이 어찌나 행복하고 달콤하던지. 손을 잡고 걸으면서 아직 조금 남아 있는 아카시아 향기를 맡기도 하고 푸르름이 짙어가는 나뭇잎 내음도 맡으며 사는 얘기를 가만가만 하기도 했다. 비가 많이 오지 않는 주 중에는 거의 매일 들러서 상쾌한 공기와 물을 마시고 체력도 단련하고 걸으면서 기도와 묵상도 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고 있다.

그 런데 한국에 돌아와서 느낀 것은 그간 도시화가 빠르고 폭 넓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가령 예를 들면, 20여년 전 필자의 고등학교 시절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필자가 일하고 있는 곳인 청주는 도시면적이나 인구의 면에서 거의 네 배나 늘어났다고 할 수 있다. 인구증가 측면에서 보면 도시인의 자연증가보다는 농촌인구의 유입이 주된 도시화의 요인으로 분석되고 있다. 그리고 도시면적의 증가는 이론의 여지 없이 산과 논 개발을 통해 일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랜만에 가 본 고향은 도심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곳이 새로 개발된 곳들이라서 아주 생소하게 느껴졌다. 현재 주중에 필자가 거처하고 있는 부모님 댁도 예전에는 야산이고 들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시멘트로 지어진 아파트와 잘 계획된 아스팔트 도로로 변해있다.

세 계화의 위력이 우리의 농촌과 도시의 모습을 이렇게까지 변하게 했구나 하는 감상에 젖기도 하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새로 생겨난 도시에 녹지 공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도시 크기로 가히 세계적인 수준에 올라 있는 서울도 여기에서 예외라고 할 수 없으며, 필자가 일하고 있는 청주도 여전히 녹지 공간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녹지가 차지하는 비율이 낮고 아스팔트와 시멘트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으면 보존된 녹지에서만 얻을 수 있는 보온, 보습, 방한, 방풍, 공기정화 등의 혜택을 얻지 못하게 된다. 서울의 도심과 부도심이 그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서울의 거리를 지나다 보면 숨을 쉬기 힘들만큼 공기가 오염되어 있고 여름에는 훨씬 무덥고 겨울에는 훨씬 춥다. 잘 알려진 외국의 예로서 남미의 아마죤 원시림은 하루에 축구장만한 넓이로 무참히 베어지고 있어 전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 이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지구 온난화와 전 지구적인 산소 공급량 감소를 우려하기도 한다. 이러한 염려들은 지나치게 환경적인 측면만 고려한 것이고 아마죤과 관련된 사람들과 아마죤 자체가 가지고 있는 셀 수 없는 가치들 (원주민의 문화, 약품제조에 쓰이는 재료들, 희귀 동식물, 홍수 조절 능력, 생태계, 등)은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나마 부모님 댁이 있는 곳과 서울에 있는 필자의 거처는 다른 곳과는 달리 조금의 녹지 공간이 남아 있어 다행스럽게 생각된다. 아마도 두 곳 다 외곽지역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는 그나마 땅값이 상대적으로 싸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간에 도시화의 문제를 지적해 온 학자들과 시민들의 노력이 만들어 낸 귀한 산물이라고도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건설된 일명 신도시들을 살펴 보면 난 개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곳도 있지만 몇 곳은 녹지를 많이 확보하여 좋은 생활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고 보고 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도시들도 자연적인 녹지를 그대로 살렸다기보다는 오히려 인공적으로 호수를 만들고 나무를 심어 가꾸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도시화의 단점 중의 하나인 녹지 공간 부족을 해소하려는 점만을 보면 이러한 시도가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아예 아무 것도 없는 곳이라면 모르겠지만 오랜 기간 동안 유지되어 오던 해당지역의 고유한 생태계와 문화와 역사를 고스란히 없애고 많은 돈을 들여 인공의 녹지와 휴식공간을 제공한다는 것은 왜 그런지 인간의 오만함이나 무지가 드러나는 것 같아 못내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뒷 산 지키기로 대표되는 도시의 녹지 공간 확보 및 녹지 축 보존은 장차 우리 후세들이 이 땅에서 살아갈 마지막 희망을 담보하는 일이기에 중요하다. 이제껏 의식 무의식적으로 인간이 자연과 동료 사람에게 행해 온 오만에 대한 생태계의 준엄한 심판을 조금이라도 피해가려면 최소한의 녹지 공간을 확보해야만 한다. 이 것은 어쩌면 자연을 위한다기보다는 사람이 살기 위한 마지막 보루로서 인식하고 사회전체의 합의를 이끌어내야 하는 소중한 일이다.

최 근에 서울에서는 Green Trust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이 운동을 통해 2006년까지 마을공원, 근린공원 같은 생활권 녹지 100만평을 확충하려고 한다. 영국의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을 모방한 ‘그린 트러스트’는 시민과의 파트너십을 통해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녹지 확대사업을 펼쳐가는 도시녹화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동네별로 휴식과 운동을 겸할 수 있는 마을공원이 우선적으로 조성되며, 근린공원도 17개소 정도 건설될 예정이다. 그리고 학교의 담을 허물고 공원화해 인근주민이 이용하도록 하는 학교 공원화 사업과 개발제한구역 내(그린벨트)에 숲을 회복시키고 수목원, 생태탐방로, 농촌체험시설을 갖춘 소풍공원 등도 조성한다고 한다. 시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건물옥상에도 녹지공간이 생겨난다고 한다. 시민들이 집에서 5분 거리에 공원을 접할 수 있는 공원녹지를 제공하며, 공원과 공원을 녹지로 연결하는 생태통로를 만들어서 도시 전체가 생태적인 조화를 이루어 가도록 한다는 계획이다 (문화일보 2004년 1월 12일). 시민들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는 영국 및 미국의 경우와 같지는 않지만 사단법인 서울그린트러스트가 결성돼서 민간이 주도적으로 이 사업을 이끌어 가고 서울시가 적극적으로 행정적인 뒷받침을 하겠다고 한다. 늦은 감이 다소 없지 않지만 이왕 시작되었으니 서울시는 지나친 간섭을 피하고 민간 단체는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여 명실상부한 시민주도의 숲 가꾸기 운동이 되기 바란다.

녹 지가 없는 도시 지역에는 인공적으로라도 녹지를 확보하도록 시민 전체가 의지를 모아야 한다. 그리고 이미 녹지가 있는 곳에서는 그곳 자체의 미와 전통과 이야기가 살아나도록 보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내셔널 트러스트처럼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없어질 위기에 놓은 녹지와 문화유산을 사서 더 이상 개발되지 못하도록 영구히 보존하려는 노력이 각 마을마다 생겨나면 좋겠다. 최소한 남아 있는 마을 뒷산이라도 더 이상 사라지지 못하도록 마을 전체의 의견을 모아 트러스트를 구성하고 영구히 보존하면 어떨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러한 운동을 통하여 사라져 가는 공동체 의식도 다시 회복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웃 마을과 나라 전체에 이러한 운동이 펼쳐지도록 관심을 기울이면서 자그마한 정성이라도 함께 보태보면 어떨까?

숲 은 과거 우리의 선조들이 노동하고, 휴식하고, 명상하고, 먹을 것을 구하던 생명의 보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시민들에게 깊은 숲은 없을지 몰라도 야트막한 뒷산이라도 있다면 아침마다 또는 지치고 힘들 때 찾아서 새롭게 하루를 시작도 하고, 남몰래 한숨도 지으며 위로도 얻을 수 있고, 나태해진 몸과 마음을 가다듬을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침마다 뒷산을 찾아서 기도도 하고, 명상도 하며, 새소리, 바람소리, 풀벌레 소리를 통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루를 시작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한 이득이 어디 있을까? 우리 주 예수께서 새벽 미명에 산에 올라 기도하시던 것을 생각하며…

우 리 그리스도인은 사회를 구성하는 중요한 존재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더 더욱 점점 이기적으로 변해가는 현대 사회에서 닫혀진 집 문을 열어 젖히고 이웃을 초대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겸손히 보여줄 수 있는 시발점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마을 단위의 중요한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모범을 보이며 공동의 관심사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는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특히 자발적으로 이러한 뒷산 지키기 같은 마을 중대사를 제안하고, 의견을 모아가며 행정관청과 연결하여 가능성을 찾아가는 일도 주께서 명령하신 이웃 사랑의 한 부분이 아닐까?


[조근상] 찬양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서

이코스타 2004년 6월


지난 주에 새들백 교회를 갔었다. 나중에 알은 사실이지만 우리 집에서 불과 1마일 밖에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거리였는데, 불행히도 캘리포니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지리에 익숙지 않은 지라 몇 번이나 간다고 했었지만 가지 못하고 이번에 토요일 찬양 팀 연습을 마치고 갈 수 있었다.


좋은 예배를 드리고 나면 정말로 나의 영이 새로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특히 내 자신이 예배의 감격 안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신학적인 논의를 떠나서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생각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듣고, 그리고 나의 반응으로 하나님께 찬양하는 그러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잘 갖추어져 있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부자동네에 돈 많은 사람들이 투자를 잘 해서 그렇게 된 것일까?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하기 전에 내 눈은 자연스럽게 새들백 교회의 예배인도자인 릭 무쵸를 보면서 그가 인도하는 찬양을 보면서 도전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사십이 넘어서 예배와 찬양인도를 한다는 것은 한국적인 사고방식에는 이제 예배와 찬양인도는 그만 두고,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그 자리에 아직도 기타 통을 매면서 찬양을 인도하는 모습은 나에게는 도전이었다. 예배와 찬양인도를 잘 한다고 하는 것 보다 “릭 무쵸”는 찬양인도를 할 대상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회중을 위한 배려와 그리고 회중 역시 인도자에 대한 신뢰가 느껴졌다. 물론 한 번 가 본 사람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릭 무쵸”의 새로운 앨범이 나온 것을 광고할 때, 소개해주시는 목사님이나 회중이 정말 축하해 주는 것을 보고 처음이지만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많은 목사님들이 내게 조언을 해 주는 말씀이 있다. 기타 통은 30대까지 메고(예배와 찬양인도하는 것을 소위 딴따라식으로 표현해서), 그 이후에는 말씀을 선포해야 장래가 확실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뒤 돌아서 보게 되면 그렇게 말씀하신 그 교회에서는 정말 예배와 찬양인도자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대 부분의 교회의 예배와 찬양인도자의 기준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영성이 있어야 한다. 두 번째는 실력이 있어야 한다. 실력이라고 말한다면 물론 노래를 잘 하는 것과 요즘은 밴드를 이끌 수 있는 음악적인 능력을 이야기 할 것이다. 이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자주 우선권이 바뀌지만 하여간 예배와 찬양을 인도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필수 요소이다. 결국 자연스럽게 세 번 째는 그에 따른 결과로서 모든 사람들이 만족할 만한 예배와 찬양인도를 해야 한다. 남녀 노소에 관계없이, 어느 상황에서든 예배와 찬양인도를 해도 기름부으심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사실 그런 사람이 정말 몇 명이나 있을 까 생각한다. 그런 기준으로 예배와 찬양인도자를 뽑는다면 나는 아마 첫 번 째로 짤리지 않을 까 생각된다.


너무 인도자 쪽으로 치우쳐서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사실 찬양은 인도하는 사람에 따라서 많이 좌지 우지 되어 진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용하셔서 사역하시기 때문에 예배와 찬양인 도자는 찬양을 올바르게 소개하는 중요한 포인트 중에 하나이다. 기름부으심은 예배와 찬양 인도자에 따라 달라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 곡을 해석하는 능력과 개인의 영성이 노래를 통해서 흘러나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찬양은 상한 심령을 회복시키고 사람들에게 새로운 소망을 주며 하나님 아버지앞으로 인도하는 지름길이 된다. 찬양이 일반음악과 다른 것은 이 부분이다. 혹시 여러분 중에 음악회나 좋은 콘서트에 가서 여러분의 상한 심령이 치유받은 적이 있는가? 아니면 회개하면서 자기의 삶을 돌아볼만한 음악회에 참석한 적이 있는가? 좋은 음악은 우리의 기분을 좋게 하고 감정을 풍요롭게 하지만, 진정한 찬양은 이보다 더 높은 수준의 역할을 한다. 작년에 칼리지 코스타에서 예배드릴 때 “내 이름 아시죠-He Knows my name-Tommy Walker지음-천관웅역)라는 찬양을 할 때, 한번도 가르치지 않고 처음 연주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회중들을 치유하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좋은 악기를 소유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악기를 연주한 사람을 통해서 흘러가는 영적인 요소이다. 다윗이 하프를 연주할 때 악신이 떠났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찬양을 인도하는 자는 찬양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고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서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참 쓸데없는 데 관심이 많다. 찬양을 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찬양을 하는 대상이다. 허나, 우리는 찬양을 할 대상보다는 우리 자신에게, 아니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우리가 가지는 근심걱정을 더 경배한다. 시편을 자세히 읽어 보게 되면 사실 시편기자도 많은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께 하소연을 하지만 결국은 찬양과 하나님에 대한 경배로 맞추고 끝을 맺는다. 이번 코스타 기간도 그러한 진정한 배와 찬양이 드려졌으면 한다. 미국 각지에서 모인 훌륭한 연주팀이 연주를 해서 찬양이 훌륭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제 거품을 좀 빼자. 단지 찬양팀만 기도해서는 부족한다고 생각한다. 코스타에 참석하는 모든 코스탄이 하나님이 들으시기에 합당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예배한다면 이번 코스타기간은 어느 때보다 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기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번에 찬양과 중보기도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을 때, 나에게 한 분이 보내 준 메일을 소개하고 이번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Worship Intercessor(예배 중보자)
“그 입에는 하나님의 존영이요
그 수중에는 두 날 가진 칼이로다” 시편 149:6


예배 중보자는 그들이 부르는 찬양과 노래 자체가 중보기도이다
예배 중보자는 한절의 노래를 계속해도 지루해 하지 않는다
때로는 같은 노래지만 가사를 조금 바꿔서 할 수도 있다
같은 노래를 반복할 때 그 가사가 실제로 사람들의 삶 속에 역사 한다


원수의 척추를 끊을 수도 있는 파워가 있다
이 예배 중보는 치유와 축사와 하나님의 임재를 가져온다
단순히 화음을 만들어내는 성가대식이 아니라 군대의 강력한 노래를 만들어내어서 어둠의 영을 물려내고 치유를 가져오게 한다. 악한 영에 대한 제사를 하나님에 대한 예배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안상현] 2004 cKOSTA를 기대하며

이코스타 2004년 6월호

이코스타의 독자들이 이 글을 보는 즈음이면 올 해의 화제작, “The Day After Tomorrow”가 이미 개봉을 했겠네요. 지구 온난화로 지구 곳곳이 상상도 못할 기상이변을 겪게 된다는 바로 그 화제의 영화말입니다. 이 영화의 극본을 쓴 사람중의 하나인 제프리 나흐마노프는 “근본적으로 이 영화는 비정상적인 환경을 극복하는 보통 사람들의 드라마”라고 얘기하더군요. 저의 관심을 끌던 한 마디는 바로 “Where will you be?” 라는 부제입니다. 사사기의 마지막 구절(사사기 21:25)의 말씀처럼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이 시대에 과연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모략”, 그리고 “마음의 혁신” 등을 저술한 달라스 윌라드에 의하면 이 시대의 기독교 혹을 기독교인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Consumer Christianity, 혹은 “consumer Christian” 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단어의 뉘앙스에서도 감을 잡을 수 있는 것처럼 주는 것보다는 받는 것에 익숙한, 희생보다는 유익에 관심이 많은, 고난보다는 즐거움에 관심이 많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자신의 모습도 그런 시대의 흐름에 자의반 타의반 몸을 맡기고 구해줄 사람도 없이, 빠져 나오려는 의지도 없이 그저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더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난받는 공동체, 거룩한 공동체”라는 주제로 두번째 칼리지 코스타를 준비하면서 과연 얼마나 많은 이 땅의 대학생들이 ‘고난’과 희생에 대하여 고민하며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려고 몸부림치고 있는가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 봅니다. 부의 복음, 건강의 복음, 기도 응답의 복음 이전에 우리의 왕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복음은 바로 고난의 복음이 그 본질이었음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내 삶의 근본적인 목적에 대하여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여정은 결국 우리를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리스도에게로 우리의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여정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동시에 고난받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 자신은 타인의 고난을 그리스도의 눈으로 바라보며 “그들로 하여금 완벽성과 불멸성의 환상속에서 벗어나 우리는 죽을 수 밖에 없고 깨지기 쉬운 존재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한길 가는 순례자’ 유진 피터슨)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존재임을 생각나게 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고난을 짊어지고 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바라보며 그분을 우리의 주되신 그 분의 삶을 통하여 우리가 당할, 그리고 당해야 할 고난의 영적 지표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자신을 “고난받아야 하는 인자”(막 8:31)로 스스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도 아닌, 엘리야도 아닌 고난 받아야 하는 인자이신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기에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드러내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막 8:32)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된 우리는 예수님처럼 자신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의지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의지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겠다는 노력이 없이는 고난의 제자의 길로 들어서는 것 역시 요원한 일이 될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 의지적인 고백은 구체적인 섬김을 통하여 증명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너무나도 선명하게 각인되도록 보여 주시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고난을 받아야 할 인자로 자리매김하신 것은 곧 “죽임을 당하시게 될 것”(막 8:31)을 의미하며 예수님은 그것을 두려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은 단순히 말의 향연이 아닌 구체적인 희생을 품어야만 그 모습이 온전해지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 그 고난은 십자가에서의 고통이셨으며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하신”(막 10:45) 이 땅에서의 삶의 목적의 성취요 완성이셨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떤 삶의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 군상의 모습들을 ‘유목민’의 삶이라고들 표현합니다. 유목민의 삶이 무엇입니까? 바로 축적이 아닌 “경험”을 선택하는 삶입니다. 축적이 아닌 경험은, 바로 그 고난의 경험은 세상이 아닌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보여 주었어야 할 모습들인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고난받기를 자처하기 보다는 피하려 하는 베드로를 향하여 꾸짖으신 예수님(막 8:32 33—“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 예수께서 돌이키사…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이 어쩌면 오늘의 베드로인 우리를 향하여 또한 동일한 말씀으로 꾸짖고 계신다는 생각을 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막 8:33) 축적(사람의 일)이 아닌 고난의 경험(하나님의 일)을 즐거워 하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그리고 아마도 이 상상은 예수님이 우리를 향하여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가지셨던 상상이었을 것입니다. 이 상상은 바로 기대감입니다. 그리고 그 기대감은 우리에게 책임을 요구합니다. 주저함이 없이 기꺼이 받아들일 그 거룩한 책임 말입니다. 왕되신 주님은 종의 책임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 8:34) 이것이 바로 고난과 함께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의 모습입니다. 세상의 풍요나 풍성함과는 정반대로 “예수의 나라에서는 순종이 곧 풍요함”이라는 진리를 우리 모두는 명심해야 합니다. 그 순종은 바로 고난과 함께해야만 하는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고난받는 그리스도인, 고난받는 공동체 저 너머에 있는 거룩한 영광을 꿈꿔 봅니다. 이 시대가 우리에게 주는 상상력이란 고작해야 집, 자동차, 연봉 정도이겠지만 우리가 꿈꾸는 것은 바로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히 12:1) 가운데 기쁨으로 손흔들며 춤추고 있는 바로 나 그리고 우리들입니다. ‘Where will you be?’ 라는 질문앞에 당당히 우리의 자리를 선포할 수 있는 공동체말입니다.


그 고난너머의 거룩함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뻐하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가득한 칼리지 코스타를 기대하며 또 기도합니다.




(참고서적)
1.’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 존 스토트.
2. ‘한 길가는 순례자’, 유진 피터슨
3. ‘하나님의 모략’, 달라스 윌라드
4. ‘마음의 혁신’, 달라스 윌라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