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현] 2004 cKOSTA를 기대하며

이코스타 2004년 6월호

이코스타의 독자들이 이 글을 보는 즈음이면 올 해의 화제작, “The Day After Tomorrow”가 이미 개봉을 했겠네요. 지구 온난화로 지구 곳곳이 상상도 못할 기상이변을 겪게 된다는 바로 그 화제의 영화말입니다. 이 영화의 극본을 쓴 사람중의 하나인 제프리 나흐마노프는 “근본적으로 이 영화는 비정상적인 환경을 극복하는 보통 사람들의 드라마”라고 얘기하더군요. 저의 관심을 끌던 한 마디는 바로 “Where will you be?” 라는 부제입니다. 사사기의 마지막 구절(사사기 21:25)의 말씀처럼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이 시대에 과연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모략”, 그리고 “마음의 혁신” 등을 저술한 달라스 윌라드에 의하면 이 시대의 기독교 혹을 기독교인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Consumer Christianity, 혹은 “consumer Christian” 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단어의 뉘앙스에서도 감을 잡을 수 있는 것처럼 주는 것보다는 받는 것에 익숙한, 희생보다는 유익에 관심이 많은, 고난보다는 즐거움에 관심이 많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자신의 모습도 그런 시대의 흐름에 자의반 타의반 몸을 맡기고 구해줄 사람도 없이, 빠져 나오려는 의지도 없이 그저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더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난받는 공동체, 거룩한 공동체”라는 주제로 두번째 칼리지 코스타를 준비하면서 과연 얼마나 많은 이 땅의 대학생들이 ‘고난’과 희생에 대하여 고민하며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려고 몸부림치고 있는가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 봅니다. 부의 복음, 건강의 복음, 기도 응답의 복음 이전에 우리의 왕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복음은 바로 고난의 복음이 그 본질이었음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내 삶의 근본적인 목적에 대하여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여정은 결국 우리를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리스도에게로 우리의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여정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동시에 고난받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 자신은 타인의 고난을 그리스도의 눈으로 바라보며 “그들로 하여금 완벽성과 불멸성의 환상속에서 벗어나 우리는 죽을 수 밖에 없고 깨지기 쉬운 존재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한길 가는 순례자’ 유진 피터슨)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존재임을 생각나게 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고난을 짊어지고 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바라보며 그분을 우리의 주되신 그 분의 삶을 통하여 우리가 당할, 그리고 당해야 할 고난의 영적 지표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자신을 “고난받아야 하는 인자”(막 8:31)로 스스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도 아닌, 엘리야도 아닌 고난 받아야 하는 인자이신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기에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드러내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막 8:32)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된 우리는 예수님처럼 자신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의지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의지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겠다는 노력이 없이는 고난의 제자의 길로 들어서는 것 역시 요원한 일이 될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 의지적인 고백은 구체적인 섬김을 통하여 증명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너무나도 선명하게 각인되도록 보여 주시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고난을 받아야 할 인자로 자리매김하신 것은 곧 “죽임을 당하시게 될 것”(막 8:31)을 의미하며 예수님은 그것을 두려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은 단순히 말의 향연이 아닌 구체적인 희생을 품어야만 그 모습이 온전해지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 그 고난은 십자가에서의 고통이셨으며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하신”(막 10:45) 이 땅에서의 삶의 목적의 성취요 완성이셨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떤 삶의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 군상의 모습들을 ‘유목민’의 삶이라고들 표현합니다. 유목민의 삶이 무엇입니까? 바로 축적이 아닌 “경험”을 선택하는 삶입니다. 축적이 아닌 경험은, 바로 그 고난의 경험은 세상이 아닌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보여 주었어야 할 모습들인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고난받기를 자처하기 보다는 피하려 하는 베드로를 향하여 꾸짖으신 예수님(막 8:32 33—“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 예수께서 돌이키사…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이 어쩌면 오늘의 베드로인 우리를 향하여 또한 동일한 말씀으로 꾸짖고 계신다는 생각을 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막 8:33) 축적(사람의 일)이 아닌 고난의 경험(하나님의 일)을 즐거워 하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그리고 아마도 이 상상은 예수님이 우리를 향하여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가지셨던 상상이었을 것입니다. 이 상상은 바로 기대감입니다. 그리고 그 기대감은 우리에게 책임을 요구합니다. 주저함이 없이 기꺼이 받아들일 그 거룩한 책임 말입니다. 왕되신 주님은 종의 책임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 8:34) 이것이 바로 고난과 함께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의 모습입니다. 세상의 풍요나 풍성함과는 정반대로 “예수의 나라에서는 순종이 곧 풍요함”이라는 진리를 우리 모두는 명심해야 합니다. 그 순종은 바로 고난과 함께해야만 하는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고난받는 그리스도인, 고난받는 공동체 저 너머에 있는 거룩한 영광을 꿈꿔 봅니다. 이 시대가 우리에게 주는 상상력이란 고작해야 집, 자동차, 연봉 정도이겠지만 우리가 꿈꾸는 것은 바로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히 12:1) 가운데 기쁨으로 손흔들며 춤추고 있는 바로 나 그리고 우리들입니다. ‘Where will you be?’ 라는 질문앞에 당당히 우리의 자리를 선포할 수 있는 공동체말입니다.


그 고난너머의 거룩함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뻐하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가득한 칼리지 코스타를 기대하며 또 기도합니다.




(참고서적)
1.’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 존 스토트.
2. ‘한 길가는 순례자’, 유진 피터슨
3. ‘하나님의 모략’, 달라스 윌라드
4. ‘마음의 혁신’, 달라스 윌라드

[강동인] 코스타 2004를 기대하며

이코스타 2004년 6월호

2003년 코스타 준비가 막바지로 가던 일년 전 이 즈음 코스타 2004 주제를 위한 모임이 있었다. 2003년에는 “세상속의 순결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주제로 하나님 앞에서의 정결함을 촉구했다면, 2004년에는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전세계적으로 흩어져있는 한국인 학생 디아스포라에게 어떤 메세지를 주시기를 원하실까? 미국 전역에 있는 한국인 학생들의 상황과 시대적인 상황을 가지고 뇌폭풍(브레인 스토밍)을 하는 가운데, 몇가지 주제들이 희미하게 드러나고 점점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먼저 “낮아지신 예수, 섬기는 그리스도인(2001)” , “회복되는 하나님 나라, 치유되는 자아(2002)”, “세상속의 순결한 그리스도인(2003)”으로 이어지는 주제들이 한결같이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강조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제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신앙의 바탕 하에 ‘우리’를 돌아보아야한다는 마음을 주셨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테러, 집단적 반목과 살인 등은 세상의 권세잡은 자에 의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군중’으로 세상의 가치를 좇으며 서로 살리기보다는 서로 죽이는 삶으로 끌려다니고 있는 지를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셨을 때에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힘으로 세상을 정복하시기보다 스스로 고난을 지심으로 세상을 이기는 방법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그 고난을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함께 질 것을 명하셨다. 이러한 바탕 가운데서 올해의 주제 “고난받는 공동체, 거룩한 공동체”가 잉태되었다.


‘우리’라는 단어는 한국인들에게 너무나 자연스럽고 친근한 단어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우리’와 한국인이 생각하는 ‘우리’와는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성경에서 말하는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만이 궁극적인 이유요 양보할 수 없는 기준이다. 나머지는 자유하다. 성경에서 말하는 ‘우리’는 ‘우리’ 외의 사람들을 ‘죽이기’ 위함이 아니요 ‘살리기’ 위한 ‘우리’이다. ‘우리’ 외의 사람들을 지배하고 그들과 경쟁해서 이겨야 하는 ‘우리’가 아니라, 섬기고 긍휼히 여겨야 하는 ‘우리’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함께 지도록 격려하고, 희생하며, 섬기는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이다. 하지만 한인 학생 디아스포라는 유학 또는 이민의 상황에서 소수 민족으로서의 ‘우리’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함께 이웃을 품고 동역하고 고난을 지기보다는 ‘우리’ 외에는 무관심하고, ‘우리’ 것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며, 삶의 현장에서 스스로 만든 ‘우리’ 안에 갇혀서 이방인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코스타 2004는 진정한 ‘우리’에 대한 성경적 인식을 제공하고, 함께 ‘고난’을 받기까지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우리’의 모델을 제시할 것이다. 아울러 그러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함께 ‘고난’을 지고갈 동역자들과 믿음의 선후배와의 만남을 제공할 것이다. 코스타 2004 연차 수련회를 통해 우리는 지역적으로 흩어져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만들어내는 지역을 초월한 하나님의 공동체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코스타 2004는 연차 수련회로 마쳐지는 것이 아니다. 코스타 2004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고난’을 받기까지 순종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일년 내내 이루어 나가는 삶으로 드리는 제사의 시작점이 될 것이다. ‘우리’의 섬김과 순종을 통해 지역을 초월한 ‘고난받는 공동체’를 경험하게 할 것이요, 그것으로 인해 ‘우리’의 교회, 캠퍼스, 일터가 하나님께 거룩하게 드려질 것을 꿈꾼다.


해가 더할 수록 코스타 사역을 통해 각 지역에서 영혼들을 섬기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세워지고 있다는 것으로 인해 주께 감사드린다. 오직 그리스도 때문에 자신의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권리와 이득을 주장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영혼들을 섬기기를 기뻐하는 제자들을 보며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기뻐하실까! 그리고 그러한 제자들로 말미암아 또다른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배태되고 움을 틔울 것이다. 전국에 있는 많은 한인 학생들이 이 거룩한 대열에 함께 참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우리’가 되기를 기대하며, 함께 ‘고난’을 받기까지 성숙하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김한준] 말씀 읽기와 묵상 훈련 / “어떻게 책을 읽을 것인가?”

이코스타 2004년 6/7월호


몇해 전, 코스타에서 다시 뵙게 된 한 은사로부터, 학교에서 하고 있는 연구가 성경 공부 및 묵상과의 사이에서 어떻게 서로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는지에 관한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연구에 사용된 방법들은 성경 말씀을 체계적으로 묵상하고 깊이 이해하는 일에 도움을 주었고, 반대로 성경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습득한 방법론들은 논문을 찾아 읽고 분석하며 종합하여 새로운 연구 주제로 연결시키는 일에 그대로 적용이 되었다는 경험적 통찰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며, 그 모습은 다양한 형태로 드러난다. 우리의 믿음은 말이나 생각으로만 그치는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삶과의 분명한 연결고리를 가지는 실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성경 말씀의 ‘원리’가 매일매일의 삶과 만나 ‘적용’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말씀이 온전히 이해되고 우리 안에서 ‘생명’으로 자라나는 일은 어찌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삶의 의미를 분명하게 세워주는 신앙, 그리고 신앙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삶의 상호 역동적인 관계의 열쇠가 말씀 묵상과 기도를 바탕으로 한 주님과의 깊은 교제에 있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떤 사람은 교회 예배나 부흥 집회, 또는 인터넷에서 듣는 설교로부터는 곧잘 은혜를 받지만 매일매일 스스로 말씀 안에서 삶 가운데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는 상대적으로 부족함을 보이기도 하며, 다른 사람은 한 그루의 나무를 살피는 일에는 잘 훈련이 되어있지만 숲 전체를 보는 일을 더러 놓치기도 한다. (사실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나 자신의 일일 때가 많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우리 모두가 일생을 두고 이루어가야 할 신앙 성장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한 순간에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다만,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과정 자체와 방법론에 관한 고찰이 혹 깊은 묵상을 이루는 데에 우선적으로나마 도움을 주는 부분이 있다면 그러한 측면들을 한 번쯤 고려해 보는 일도 의미없지는 않으리라 생각된다.


그런 면에서, 책을 읽는 방법론에 관한 고전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는 “어떻게 책을 읽을 것인가? (“How to read a book?” M.J. Adler & C. van Doren 저)”라는 책은 나름대로의 유용성을 제공한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어떻게 정보의 습득에 그치는 것이 아닌 ‘이해를 위한’ 독서를 할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지식의 증가에 그치는 것이 아닌 ‘마음을 자라나게 하는’ 독서를 할 것인지에 대하여 단계별로 책 읽는 방법을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상위 단계가 하위 단계의 측면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이 책에 제시된 네 가지의 분류는 서로 다른 ‘종류’가 아니라 상호 연관성을 갖고 발전하는 ‘단계’를 표현한다:




  1. 기초적 읽기 (Elementary reading)
  2. 관찰적 읽기 (Inspectional reading)
  3. 분석적 읽기 (Analytical reading)
  4. 합적 읽기 (Syntopical reading)

첫 번째 방법인 ‘기초적 읽기’는, 주어진 문장이 무슨 뜻인지, 본문의 이야기와 비유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의미 그 자체를 파악하는 단계이다. 이는 마치 외국어를 번역할 때 원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자 노력하는 과정과 같다.


첫 번째 단계에서 이룬 문장과 단락의 문자적 이해를 바탕으로, 두 번째 단계인 ‘관찰적 읽기’ 에서는 문법과 문맥에 주목하면서, 본문이 가지는 전체 구조를 보다 ‘구조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이 단계에 이르면, 전후 문맥 상에서 현재의 문장 또는 문단과 그 앞뒤를 이어주는 이야기의 흐름에 주목하게 된다. 이러한 ‘관찰’은 어디까지나 글의 이야기 전개 과정을 충실히 따라가며 ‘새겨듣는’ 것인 만큼 저자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독서 방식이라는 점에서 다음 단계인 ‘분석적 읽기’와는 구별된다.


세 번째의 단계인 ‘분석적 읽기’의 경우는, 반대로, 나름대로 생각의 틀을 가진 독자 스스로가 읽기를 주도하는 독서 방식이다. 두 번째의 읽기가 어느 정도 정해진 시간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세 번째의 형태는 많은 시간이 걸리는, 즉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읽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것은, 읽으면서 수시로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본문 안에서 답을 찾아보기도 하며, 이미 알고 있었던 일들과 연계하여 스스로 답을 달아보는 가운데 때로는 비평가의 입장에 서기도 하면서 글을 재구성 해보기까지 하는 적극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책을 읽는 경우에 관한 한 가장 높은 수준의 읽기가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단계인 ‘종합적 읽기’는 세 번째의 단계가 여러 권의 책에 적용되어 비교 분석 및 통합을 이루는 과정이다. 따라서, ‘종합적 읽기’는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이루어졌던 ‘분석적 읽기’의 방법론이 여러 책들에 창조적으로 확대 적용되는 것으로도 (i.e., “How to read two books?”) 이해할 수 있다. 이 단계에 이르러서는 독자가 새로운 관점을 창조적으로 도출해 내기도 하므로 고유성(originality)을 지닌 논문을 쓰는 연구 과정에 비견되는 독서이기도 하다.


이러한 독서 방식들에 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첫 세 방법들에 대해서는 점과 그래프의 관계로 한 번 표현해 보았다(아래). 여기서는 나타내지 않았지만, 네 번째의 읽기는 ‘분석적’인 그래프가 여러 개 겹쳐있어 어떤 경향을 표현하는 것으로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읽기의 단계들과 방법들을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데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


첫 번째 읽기는 우리가 어떤 본문을 처음 읽을 때라면 언제나 해당되는 방법이다. 초보적인 단계이지만, 이후 모든 단계의 기초가 되는 만큼 그 중요성이 낮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한 번 두 번 성경을 반복하여 읽으면서 익숙해짐에 따라 우리는 그 본문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기초적인 읽기’를 무시하는 경향이 생기기 때문에, 묵상은 매너리즘에 빠지고 본문으로부터는 아무런 새로운 것도 얻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익히 알고 있는 본문일지라도 그 말씀들을 다시 대할 때에는 내가 이전에 알고 있던 것들을 다 내려놓고 ‘초심으로’ 돌아가서 ‘기초적 읽기’부터 새로이 시작하는 것이 오늘 주신 말씀 앞에 겸손함을 유지하는 길이기도 하다.


귀납적 성경 공부나 QT시간에 우리는 본문 말씀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그러나 놓치는 것 없이 받아들이고자 많은 시간을 기울이는데, 바로 이 때가 두 번째 읽기 과정에 해당된다. 여기서는, 문맥과 문법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놓쳤을 수도 있었을 성경의 의미를 건져올리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장 2절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의 문법과 문맥을 자세히 짚어보면, 성경이 말하는 교회란 건물이나 조직, 또는 기관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모임’ 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과 같다.


본문 말씀에 대한 관찰은 곧 읽은 말씀에 대한 해석과 묵상으로 이어지는데, 세 번째 읽기는 바로 이 단계를 의미한다. 이러한 읽기에 충실했을 때, 독자는 저자의 의도를 알게 되며, 이야기 뒤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말씀의 정신’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스스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노력을 기울인다는 점에서, 이러한 독서는 주어진 본문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이 단계에서는 복음서, 서신, 역사서, 예언서, 시편 등 다른 장르의 글들에 대하여 각각에 알맞은 다양한 접근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분석적 읽기’의 한 예를 들면,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만나주신 대목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베드로를 만나신 예수님은 그에게 다른 말씀 없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한 질문만 세 번을 반복하셨다. 겸손하게 대답하는 그에게서 주를 사랑한다는 고백을 받으신 후에는 역시 다른 말씀 없이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는 말씀만 세 번을 반복하여 하신다. (특별히, 공동번역 성경에는 위의 말씀으로 세 번을 동일하게 대답하신 것으로 번역되어 있다.) 따라서, 전후의 정황 및 다른 곳에서 주님께서 하셨던 말씀들을 함께 떠올리고, 여기서의 일들을 나 자신에 대한 적용과 연관지어 묵상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깨닫게 된다. 먼저, 주님께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히 여기시는 것 한 가지를 든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주님을 사랑하는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 대한 삶의 구제적인 표현은 그분의 양들, 즉 ‘영혼들을 잘 돌보는 일’이어야 함을 깨닫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주님의 ‘제자’로서 살기 원하는 나에게도 오늘 동일하게 말씀하고 계시는 그분의 음성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오늘 해야할 일들과 오늘 결정되어야할 사항들은 이 묵상을 염두에 둔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네 번째 읽기에 관련한 말씀 묵상은 개인적인 신학이 수립되는 단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부시대에 삼위일체 교리가 확립되기까지는 아마도 이러한 읽기와 묵상의 결과들이 축적되고 적용되었을 것이다. 삼위일체의 개념은 성경 어디에서도 직접적으로는 언급되지 않지만 곳곳에서 그 의미가 묻어나오는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다른 예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때에 따라 어떻게 역사하셨고 그들은 또 어떻게 반응하였는지를 나 자신의 삶에 나타나는 패턴들과 오버랩시키면서 스스로의 신앙의 현주소를 되물었던 순간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을 두고 구축해가는 이러한 개인의 신앙과 신학은, 마치 오랜 시간동안 바닷가를 다니면서 손수 주워 모으고 닦고 다듬은 하나하나의 조개껍질들을 한데 엮여서 만든 목걸이와도 같다. 이 과정의 읽기와 묵상에 눈을 뜨고 거기에 필요한 시간과 노력을 들일 때 우리의 신앙은 점차로 깊은 뿌리를 더하여갈 것이며, 우리는 주변 상황에 덜 좌우되는 신앙 인격을 연마하게 될 것이다.


주님과 함께하는 영적 세계로의 여정은 그 깊이가 끝이 없는 과정이라고들 많은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그런 깊은 세계에 대하여, 부족한 영성과 경험을 가지고서 방법론을 표현해보고자 하다보니 매우 어설픈 글이 되어버린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가 말씀을 이해하게 되는 일은 궁극적으로는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문을 열 때에 문 밖에 서서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께서 비로소 우리 안에 들어와 함께 잡수시는 것을(계 3:20) 생각할 때, 말씀을 받고 이해하는 자리로 나아가고자 노력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우리 자신의 몫일 수 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올바른 방법과 단계적인 접근을 염두에 두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매일매일 우리에게 다가오는 삶의 현장에서의 문제들이 비록 어제까지는 희미하게 보였을지라도 오늘 삶의 한 영역에서 만큼은 주님과 얼굴을 마주하는 것 같이 온전히 깨달아 가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매일 임하기를 소망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야고보서 1:5)





[정정합니다] “바하의 ‘마태수난곡’을 통하여 묵상하는 예수님의 고난” 글의 각주 8) 번에서, 해슬러(Hassler)의 원곡은 요한수난곡에서 ‘도입 합창’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중간 삽입곡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차문희] 특수 사역의 실태와 개선: 장애 사역

과학, 의학 기술의 발달로 오늘날 사회는 점점 복잡해져 가고 있고 사람들의 생활 습관, 살아가는 방법, 그리고 생각하는 방법 또한 현대 문명의 발달에 뒤질세라 급변하고 있다. 사람들과의 인간관계는 더욱 더 복잡해져 가고 수많은 갈등과 대립 속에서 고민과 근심만 하다가 결국은 그것이 일종의 스트레스가 되어 몸과 마음의 병을 일으키게까지 하고 자신이 예측하지 않았던 삶을 창조해 나가면서 평생을 마감하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기가 그지없다. 이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정신과 의사를 만나서 치료와 상담도 받고 자신의 문제를 치유 받으려고 애 쓰는가 하면 교회에 나와 신앙의 힘을 빌려 볼까 하는 경우들도 더러 있다.


그런데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모인 교회 공동체가 과연 이들의 필요를 잘 공급할 수 있을까? 주일 학교를 비롯해서 교회의 다른 여러 부서별로 각 부서의 사역 목표와 계획에 따라 기본적인 프로그램은 어느 정도 갖추어져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어떤 특별한 필요를 요구 하는, 즉 치유 사역, Homeless 사역, 입양아 사역, 가정 사역, 그리고 장애인 사역 등등은 아직까지 모두 포용하기가 어렵다고 볼 수 있다. 이런 특수 사역들은 말 그 자체로 특별한 상황을 지닌 사람들을 섬기는 사역이기 때문에 그 만큼 교회마다 부담이 될 수도 있고 설령 섬기고 싶다 하더라도 무엇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모르는 교회들이 대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 지난 6 년 동안 미국 학교에서 장애 아동들을 섬기면서 특수 사역의 중요성 그리고 앞으로 개선되어야 할 점들을 몸소 느낀 이야기들을 이코스타 독자들과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서 나누고자 한다. 단 저자가 특수 교사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장애 사역의 포커스를 맞추려고 한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장애인 사역에 관심을 갖고 그들을 섬기려 하나 역효과를 보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 그 이유는 첫째, 비 전문화된 사람들이 단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그 자체만을 가지고 섬기려고 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역을 하던지 하나님에 대한 사랑 없이 하는 사역은 없을 것이고 더군다나 교회에서 주관하는 사역이라면 더 할 말이 없을 만큼 하나님/예수님의 사랑을 강조한다. 여기서 말하는 전문화 된 사역이란 “사역의 전문성”(skillfulness in ministry)을 의미 하는데, 장애 사역의 경우에는 장애 (disability)에 대한 올바른 정의와 특성, 섬기는 방법 등에 충분한 지식과 이해를 필요로 하고 있다. 오늘날 현대 의학의 발달로 장애의 이름, 종류가 많이 세분화 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을 섬기는 사람들 역시 다른 장애 영역에 대해 조금씩 알고 업그레이드 할 필요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나의 학부 과정에서 받은 교사 자격증은 특수 교육 ‘정신 지체 (intellectual disability)’였지만 처음 직장을 잡아서 맡은 학급은 Resource classroom으로 통합 교육이 가능한 정서 및 학습 장애 아동들이 함께 공부 하는 학급이었다. 정서 및 학습 장애 라이센스가 없기 때문에 주어진 기간 안에 다시 학교에 가서 그 과목들을 이수하지 않으면 교사로 일할 수가 없고 아무리 특수 교사라 할지라도‘정신 지체’에 대한 자격증을 갖고 있는 교사가 어떻게 정서나 학습 장애 아동들을 효과적으로 지도 할 수 있냐는 학교 측의 지적에 따라 일 시작한지 일 년도 안 되어서 공부를 다시 시작했던 기억이 난다. 또한 올해 맡은 학급은 통합 교육이 불가능한 중복 장애 아이들인데 시각 장애를 갖고 있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보니 시각 장애 라이센스를 취득 하라고 해서 지금 통신 교육으로 이수 하고 있다. 아무리 정신적으로 지능이 낮고 여러 가지 복합적인 장애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점자와 시역에 대한 전문적인 이해를 해야 한다고 특수 교육 관계자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그 만큼 장애가 심해서 정상적인 삶이 불가능한 아이들에게는 특히 전문성이 있는 특수 교사를 임용해서 그들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심어 주도록 교육부의 대책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렇게 학교만큼 교회에서는 전문화 된 사역 일군들을 찾기가 쉽지가 않은 것이 현실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특수 사역 (장애 사역)의 팀 리더는 사역 일군들에게 전문화의 중요성을 강조시킬 필요가 있고 각종 훈련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일군들을 계몽해야 할 것이다. 물론 사역 팀장 역시 자신이 전문화 되지 않았다면 리더의 입장에서 당연히 배워나가야 할 것이다.


둘째, 이렇게 전문적인 지식의 필요를 받아들일 수 있는 질 (highly qualified) 이 높은 일군들을 발굴하는 일이다. 비록 사회에서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을 섬기는 사역이라고 해서 단지‘하나님의 사랑’만 갖고 섬기는 일군들은 섬김의 한계가 있고 효과적인 사역을 하기 보다는 그냥 동정심에서 사역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언젠가 한 졸업식에 참석했는데 오랜 기간 동안 감리교 고아원 (United Methodist Home)을 운영해 온 R이라는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다. “If you would like to be a successful individual for your life, know A. B, C. A stands for attitude, B stands for behavior, and C stands for commitment. You can make your dream come true if you do well in all A, B, C. 아마도 질이 높은 즉 Highly qualified 가 된 일군들이 가져야 할 자세가 아닌 가 싶다. 위의 R 목사님의 말씀처럼 A, B, C를 모두 잘 하는 사람의 생각은 긍정적이고 언제나 열정이 넘친다고 하는데, 특수 사역에 필요한 일군들이 바로 이런 성격들의 소유자이다. 그러다 보면 섬김을 받는 이들 역시 나름대로 도전적인 삶을 살 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기 마련이다.


이렇게 전문적인 훈련을 갖추고 A, B, C를 잘 하는 일군들로 구성된 사역팀장과 팀원들이 모여 있을 때 특수 사역(장애 사역)의 비전과 꿈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제, ‘불쌍하고 사정이 딱해서, 혹은 보기가 마음이 아파서’라는 이런 동정심에서 나오는 사역은 사라져야 한다. 하나님의 복음을 각기 다른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어떻게 전파하고 이들이 교회 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서 비장애인들과 공존하며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는 일들을 도와주는 역할이 바로 특수 사역의 시급한 과제라 할 수 있겠다.


@다음 달에는 정신 지체인 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생활을 도울 수 있는지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