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근상] 개인의 예배를 회복해야 한다

이코스타 2005년 9월


가끔은 예배인도를 하면서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서 예배를 드리러 오는가? 혹은 이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면서 어떠한 생각을 하는가? 정말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과 경배가운데 임하시는 가? 단순한 감정으로 드리는 것이 아닌가하는 질문들을 수없이 내 자신에게 하는 경우가 있다. 단순히 나의 믿음이 부족하거나, 혹은 너무나 영적으로 충만한 나머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있는 오류에서 벗어나 이러한 느낌은 특별히 은혜가 많은 코스타같은 집회나 혹은 교회의 부흥회 후에 찾아오는 생각들 중에 하나이다. 어느 교회의 한 청년이 수련회가운데 너무나 큰 은혜를 받고 돌아왔다. 그런데 은혜를 받고 돌아온 후에 시험의 시간들이 계속해서 형제에게 일어났다. 그 형제는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서 별의 별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수련회에서 가졌던 마음들을 회복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 형제는 포기하고 다음의 수련회기간을 기다린다. 이런 스토리는 누구나 한 번은 경험했던 이야기일 것이다.


사 실 우리는 예배나 섬김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밝혀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통해서 내가 인정되어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런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한다. 하지만 종종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기 보다는 우리가 사람들 앞에 드러나고 거기에 가치를 둘 때 우리의 근본 목적들이 상실되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공적인 예배는 사람들 앞에 서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정리하여야 한다. 즉 개인의 예배를 통해서 영혼을 정리해야만 회중들 앞에서 예배하면서 더 깊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어떤 공식처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 수 있다. 때로는 우리가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할 수 있고, 심지어는 죄 가운데 거하다가도 하나님께서 사죄의 은혜를 통해서 예배 안에서 새로워지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도 있다.


하 지만 우리의 영혼을 변화시키는 것은 큰 집회나 어떠한 모임보다는 스스로 하나님 앞에 홀로 설 때 진정으로 우리의 영혼이 변화되는 것이다. 이 말이 큰 집회나 모임이 영향력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모임을 통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갈급함과 변화의 동기를 만들 수는 있지만, 지속성에 있어서는 개인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서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그러한 예를 이야기하는 것이 많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선지자가 갈멜 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과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그는 극심한 슬럼프에 빠졌었다. 그것도 바알의 신을 우상으로 삼는 아합왕의 아내인 이사벨의 단 한마디에 그 전날까지 그렇게 당당했던 하나님의 선지자의 모습은 사라지고 패자의 모습으로 나왔다. 하 지만 그런 엘리야에게 찾아가신 하나님은 결코 웅장하거나, 거대한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으셨다. 아주 작고 세미한 음성으로 엘리야에게 다가가셨다. 작고 세미한 음성은 시끄러운 곳에서는 결단코 들리지 않는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경배와 찬양음악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 앞에 홀로 서야 하는 것이다.


내 개인의 삶에서 역시 마찬가지이다. 최근에는 너무나 많은 일들이 내게 생겨서 기도할 시간조차 없었다. 사역자가 기도할 시간이 없다니, 이 무슨 이야기인가! 사실 나는 새벽기도를 거의 매일 참석하고 각종 중보기도 모임에도 나가고 있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이러한 모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일대 일로 갖는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단순히 내가 죄를 짓고 짓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개인적이 교제의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겠지만 하나님과 나는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 번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놓친 후에는 다시 회복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곤 한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에게 개인 예배의 시간이 있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하루를 묵상으로 시작하고 하나님 앞에 홀로 앉아서 경배와 찬양을 드리고 그 분의 음성을 듣기로 결정한다면 그것으로 훌륭한 예배가 될 수 있다. 그 예배는 어떠한 집회보다도 훌륭한 예배가 될 수 있다. 이렇게 하나님은 홀로 예배드리는 사람을 찾고 계신다.

[차문희] tmKOSTA: 교육 부문: No Child Left Behind Law

이코스타 2005년 9월호


올해 새롭게 달라진 티엠 코스타에 맞추어 교육학을 공부하는 40여명의 코스탄들이 코스타 집회 둘째 날, 한 자리에 모였다. 초등 교육, 중등 및 고등 교육, 특수 교육, 예체능 교육, 교육 공학, 교육 행정 등등 다양한 교육 분야에서 자신의 전문성을 살리시는 분들과 심지어 현재 자녀를 키우고 있는 학부모님들도 몇 분 참가하셔서 주위의 시선을 주목하기도 했다.


약 80여분 동안 진행된 이번 교육 관련 티엠 모임에서는 NCLB(No Child Left Behind) 의 소개와 이 법으로 인해 미국 교육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간단한 보고가 있었다.


미국의 공교육 (Public education) 의 질(quality)을 높이기 위해 2002년도 부시 대통령이 통과시킨NCLB Law는 학부모와 학교와의 관계, 학교 당국과 교육 행정직의 책임과 임무, 독해력 (Reading)과 주(state)마다 해마다 실시하고 있는 실력 평가의 수준 향상, 그리고 특수 학생들의 교육 환경과 통합 교육의 중요성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학부모는 아이가 다니는 학교의 교육 수준과 실력 평가 결과 그리고 교사의 자격 즉 teaching credential에 대해 알아야 할 권리가 있고 실력이 다른 학교에 비해 뒤떨어진다면 그 지역 내에 다른 학교로 전학시킬 권리가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에 학교 행정직의 책임과 임무로는 일반 및 특수 학생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특히 학교 전체 평균이 주 정부에서 요구하는 수준에 도달했는지 (adequate yearly progress)를 지역 및 교육 위원회에 보고해야 하고 우수한 교사 및 교직원들을 임용해야 한다. 독해력(Reading) 향상의 일부로 아이가 3학년이 될 때까지 글 읽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하고 학계에 알려진 특수한 독해 교육 방법을 도입해서 학생들을 평가하고 가르쳐야 한다. 모든 학생들은 2013-2014년까지 영어, 수학, 과학 부문의 실력 평가에서 주 교육 위원회가 요구하는 이상 수준의 성적을 얻어야 하고 학교는 이 실력 평가의 평균 성적을 보고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특수 교육 분야에서는 보통 아이들과 똑같은 교육의 권리를 갖고 가능한 한 통합 교육을 많이 받을 수 있도록 강조했다.


결국 NCLB의 요지는, 올바른 교육의 효과는 공교육을 통해서 이루어 지는데 공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학생듫의 학문적인 실력을 향상시키고 그 학문적인 실력은 교사의 지도력에 따라 달라지며 이에 대한 평가는 해 마다 치루는 실력 평가에 따라 결정된다는 데에 있다.


어떻게 보면 정말 교육의 질을 높이는데 이 법이 큰 효력을 발휘할 것 같지만, 이에 비해 현재 교육 행정 종사자들과 교사들의 불만도 무시할 수는 없다. 예를 들면, 첫째가 바로 실력평가 점수만 보고 그 학교의 우수성을 평가한다는 점인데 이 평가에는 특수 아동들의 성적도 반영이 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특수 아동들은 mild or moderate disability를 가진 아동들만을 의미한다.) 이럴 경우 특수 아동이 많은 학교는 당연히 전체 평균이 내려 가고 그러다 보면 학교 당국은 평상시에 문제가 많고 성적이 안 좋은 학생들을 학교의 이미지 개선을 위해 특수 학교로 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쓸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교사들은 이런 실력 평가 점수 올리기에 집중하다 보면 창의적인 교육 보다는 주입식으로 점수 위주의 교육이 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서로의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이 법이 옮고 그름은 판단하기가 어렵다고 티엠 참가자들은 입을 모았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꼭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도대채 왜 이런 법이 나오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다. 미국의 공교육이 신뢰성을 잃은 이유는 바로 신앙에서 멀어진 가정이 무너졌기 때문에, 갈 곳을 잃은 아이들은 방황하며 학교로부터 멀어진 것이다. 이런 공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하나님 중심의 가정이 사회에 뿌리를 내려야 하고 성경적 중심의 가정 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어야 한다.


현재 교육계에 hot issue가 되고 있는 NCLB를 40여명의 학생들이 80분 동안 토론하기에는 시간이 너무나 부족했다. 하지만 많은 코스탄들은 자신과 비슷한 학문을 공부하는 학생들의 만남을 통해 고민하며 각자의 삶 속에서 우리 스스로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되새겨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윤여재] tm KOSTA, 그 목적과 취지 그리고 지금까지의 변화상 그리고 앞으로의 방향성

이코스타 2005년 9월호

tm KOSTA의 목적과 취지
tm KOSTA는 복음, 민족, 신앙과 학문의 통합이라는 KOSTA의 3가지 Core Value 중에서, 특별히 “신앙과 학문의 통합”이라는 세번째 Core Value를 바탕으로 둔 코스타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tm이라는 것은 task major를 의미하는 것으로 자신의 전공분야 혹은 직업의 소명을 받은 분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그래서 tm KOSTA는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하여 신앙과 학문의 통합된 삶을 살아가려는 그리스도인을 지원하려는 사역입니다.


tm KOSTA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헌신이, 소명 받은 전공분야 및 관심분야에 구체적으로 삶의 현장에서 나타날 수 있도록 지금까지 두 가지 영역에서 지원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지원사역은 전공과 관심자별로 기독 학생, 기독 학자, 전문사역자 간의 연락망(Network)을 구축하는 것을 돕는 것입니다. 여기에 매년 KOSTA 수련회를 통하여 직접적으로 전공자와 관심자들이 만나서 긴밀하게 연락 및 토의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것과 tm KOSTA 홈페이지(http://tm.kostausa.org/group.html)를 통하여 Network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두번째로 tm KOSTA가 지원하는 사역은 전공별 및 관심자별 resource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Resource를 제공하는 방법에는 Networking을 형성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련회장에서 직접 tm KOSTA 세미나에 참가함을 통하여 전문가로부터 resource를 제공받고 그들의 앞선 고민과 과제 및 방향들을 듣는 기회를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한 전공별 및 관심자별 resource를 홈페이지 (http://tm.kostausa.org/resources.html)를 통하여 언제든지 찾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tm KOSTA의 변화상
매년 20여가지 전공별/관심자별 이슈들을 코스타 수련회 마지막 날에 전체 코스타 참석자들에게 참석할 수 있도록 하였지만 이에 대한 참석자들의 반응이 너무나 다양하여서 올해부터는 수련회 첫번째 세미나 시간에 기초 신앙에 관심을 갖는 분들과 함께 tm KOSTA를 진행함으로써 영적인 충족을 바라는 분들에게는 기초 신앙 세미나를 들을 수 있도록 하고, 특별히 tm에 관심을 갖고 있는 참석자들에게 tm 세미나를 진행하는 양극화를 통하여 더욱 효율성 있는 세미나를 이루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수련회장에서의 논의는 지극히 제한적이고 지협적일 수 있기 때문에, 이상에서 언급해드렸던 Networking과 Resource를 병행한 지원사역이 계속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아래는 올해 진행되었던 전공별/관심자별 주요 이슈들입니다.


-  미국 교육계의 “No Child Left Behind” 법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
-  교회지도자(목회자)와 정치참여
-  Computer Science 전공자로서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일들
-  기독 의료인들에게 요구되는 영성과 전문성을 갖춘 섬김: (Compassionate Heart and Touch)
-  Widening the Spectrum of Music for the Church Year
-  그리스도인과 직장생활
-  기독교 세계관으로 바라보는 과학기술
-  인문학 속의 크리스찬들
-  한국교회 예배와 찬양 운동 – 그 현주소와 나아갈 방향
-  통일의 꿈, 평양 과기대
-  현대 미술과 기독교
-  캠퍼스 미니스트리
-  오늘의 대중문화 현상


tm KOSTA의 방향성
tm KOSTA의 앞으로의 방향성을 생각하면,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떠오릅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마9:37 38). 예수님께서 무리들을 보시고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것을 보시고 민망히 여겨,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고 있는 말씀이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특별히 학문하는 영역 가운데서 기독 영성을 갖춘 전문 기독인을 부르시고 있지 않는가 싶습니다. 그러한 부르심의 영역들이 학문의 이곳 저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듯합니다.


예를 들어, 얼마 전 부시 대통령이 일반 공교육에서도 진화론과 더불어 지적설계(Intelligent Design)이론을 가르쳐야 한다고 이야기함으로써 다시 한 번 더 진화론과 창조론, 진화론과 지적설계, 창조론과 지적설계이론이 다시 뜨거운 논쟁의 쟁점이 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지적설계 이론은 이전의 진화론과 창조론의 서로 다가설 수 없었던 거리를 더욱 좁혀서, 과학적인 언어와 논리로 생명체의 정보와 복잡성을 우연의 법칙이 아닌 어떤 무엇인가에 의한 의도적인 계획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적설계 이론이 이제 십여년의 연구활동으로 인하여 이론의 미비점이 많지만, 적어도 과학적인 언어로 진화론자와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는 점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하여1987년 미 법원에서 창조론이 종교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이유로 공교육에서 제외되었던 이후에 지금 미국에서 몇 개의 주와 카운티에서 진화론과 함께 지적설계 이론을 함께 교육함으로 학생들에게 두 이론을 동시에 비교하며 논쟁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이 지적설계에 대표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 필립 쟌슨, 마이클 베어, 윌리엄 뎀스키를 들 수 있습니다. 특별히 윌리엄 뎀스키는 한국의 지적설계 이론 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 같고, 최근에 윌리엄 뎀스키의 “지적설계”책이 서울대 창조과학회에서 번역하여 IVP를 통하여 출판되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지적설계의 운동은 미국에서 지적설계 운동과는 조금은 다른 양상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우리의 각 전문영역 가운데서, 믿지 않는 세상의 언어로 함께 의사소통을 함으로써 그 가운데 창조주의 뜻을 찾으려고 노력하며 궁극적으로 모든 만물 가운데 영광받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롬8:22) 이야기했던 것처럼, 고통과 탄식 가운데 있던 모든 피조 영역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8:21) 이야기 한 것과 같이 해방되어, 태초에 “보기 좋았더라”의 원위치로 회복하도록 돕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길이 tm KOST가 걸어 나가야 하는 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