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 1, 2007 | 이달의 초점
이코스타 2007년 4월호
박사 과정 초반, Qualifying exam 때 있었던 일이다. 전자공학에서 신호처리를 전공하는 내게, 한 교수는 몇가지 시스템에 관한 정의와 예제들을 풀 것을 요구했다. 천만다행으로 그 문제들을 나름대로 잘 풀고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한가지 질문이 더 주어졌다. “이 정의들이 모든 시스템에 적용되나?”라는 문제였고, 나는 조금 생각한 후에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qualifying exam을 보기 좋게 떨어졌고, 2차 시험을 기다려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 문제에 대한 답은 ‘그 정의들은 선형 시스템 (linear system)에만 적용되는 것이지, 비선형 시스템 (nonlinear system)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라는 대단히 기본적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접하고 있는 ‘입력이 A이면 출력이 B이다.’라는 멋진 공식들은 모두 선형(linear) 시스템을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한 댓가를 톡톡히 치루어야만 했던 것이다.
물질주의를 진리로 여기고, 과학 만능 주의가 지배하는 현 시대의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는 구조의 한가지 특징이 바로 ‘직선적 사고’이고, ‘수량화’이다. A라는 입력이 있으면, 반드시 B라는 출력을 기대하는 ‘직선적 사고’는 과학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구석 구석에 배어있다. 또한 어떤 상황이라도 수량화하고 분석하려는 경향이 자신도 모르게 우리에게 있음을 보게된다. 예를 들어 보자. 한 고등학교 선생님이 3학년 담임을 맡게 되었다고 하자. 학생들 한사람 한사람이 소중하므로, 각각을 인격적으로 대우해 주겠다고 마음먹고 새로운 학기를 맞이한다. 하지만, 수십명의 학생 각자의 처지를 돌아보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선생님은, 곧 몇가지 기준으로 학생들을 평가하기 시작한다. ‘공부는 잘하는지, 지각은 하지 않는지, 말썽을 부리지는 않는지…’ 등등. 그리고는, 그 학생이 ‘왜 공부를 열심히 하는지, 아니면 왜 공부를 못하는지. 혹은 어떤 특별한 사정에 의해 지각을 하는지, 아니면 관심을 끌기위해 말썽을 부리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공부 잘하고 지각 않하고 말썽부리지 않으면(A), 좋은 학생이다(B) 라는 직선적 사고를 가지고 학생들을 ‘수량’으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좋은 학생’을 어떻게 정의하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단지 공부 잘하고 지각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좋은 학생’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선생님이지만 어쩔 수 없다. 또한, 공부 못하고 지각하고 말썽 부리는 학생을 대하는 선생님은 그 해결책으로 몇 가지 프로그램을 구성한다. 보충수업을 진행하면서, 성적이 올라갈 것을 기대하고, 체벌을 통해 지각하지 않게 독려하며, 반성문을 쓰게 하여 말썽이 줄어들 것을 기대한다. 물론, 이 선생님도 그런 프로그램들이 눈에 띠는 결과는 내겠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물질주의가 팽배한 세상을 살아가는 크리스찬들이 빠질 수 있는 위험성들 중의 대표적인 것은 ‘기복주의’일 것이다. 물질적 복과 성경적 복을 구분해 내지 못함으로써, 돈을 많이 벌고 외모가 출중하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복으로 착각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물질주의의 위험성을 한가지 더 생각해 본다면 직선적 사고에 의한 ‘프로그램화’와 ‘수량화’가 아닐까 싶다.
현대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학자 중의 한명인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기독교의 미래’라는 저서에서 이런 직선적 사고를 경고한 바 있다. 그는 한 예로, 최근 10년 이상 영국과 미국 교회를 강타했던 Alpha를 예로 들었고, Alpha 코스의 문제점으로 ‘어느 시점에서는 어떠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 이후에 미국교회에서 진행하는 Alpha 코스를 수강했는데, 그 과정의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맥그래스의 지적처럼 직선적 결과를 기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매주 한 과정을 들을 때마다 그에 상응하는 반응을 예측하고 있는 듯 했다.
각 지역교회들 역시, 몇가지 프로그램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직선적 경향을 보인다. 예를 들어, 지역교회 성도들이 전도를 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그들이 ‘왜 전도를 하지 않는가’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기 보다는 ‘새생명 축제’같은 프로그램으로 문제를 쉽게 해결하려고 한다. 또, 성도들의 가정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아버지 학교’ ‘자녀 교육 과정’이니 하는 프로그램으로 문제 해결을 시도한다. 나는 그런 프로그램이 가치가 없다던가 어떤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특정 문제에 대한 근본적 고민없이 프로그램으로 해결하려는 태도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프로그램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그 문제의 근본에 접근하여 차근히 해결해 나가는 것에 비해 보다 수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쉽게 선택한 길은 결국, 물질주의의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도구화’ 혹은 ‘비인간화’의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한다. 즉, 몇가지 프로그램으로 당장은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무릎 꿇고 해결 해야만 하는 ‘다소 복잡하지만 근본적인 과정’을 무시하게 한다. 인격적인 관계는 선형(linear)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질주의에 의한 ‘직선적 사고’의 또 다른 문제점은, 한 개인의 신앙조차 ‘수량화’하려는 경향이다. 내 자신만 살펴보아도 잘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는 나의 믿음은 몇가지 단순한 현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아무리 성경공부를 열심히하고 기도 시간이 길어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본다. 반면, 짧은 기도 속에 하나님께 나 자신을 의지하는 깊은 신뢰의 시간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한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의 신앙을 평가하려는 우리 자신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 사람이 교회를 얼마나 열심히 출석하는지, 봉사를 얼마나 하고 있는지, 십일조는 하고 있는지, 새벽기도를 참석하는지에 대해 나름대로의 점수를 부과하여 그 사람의 신앙을 평가하려고 한다. 지역교회에서는 그런 경향이 더 강하게 나타나곤 한다. 한 지역교회를 참석하여 몇주만 지나면, 그 교회에서 신앙을 평가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지역교회의 경우, 새로온 멤버가 주일예배와 수요예배를 지속적으로 참석하고, 십일조를 내며, 선교기도 모임에 참석하여 선교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면 ‘정말 신앙이 좋다’라고 평가한다. 그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과 어떤 관계 속에 놓여 있는지는 크게 관심을 갖지 못한채 말이다. QT를 하는지,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지, 십일조를 하고 봉사를 하는지의 여부로 신앙을 평가하려는 경향은 분명 근,현대의 물질주의의 결과만은 아닌 것은 확실하다. 인간이 가진 종교성 자체가 어떤 행실로 그 가치를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자신이 율법을 얼마나 잘 지키고 있느냐에 따라 신앙을 평가하고 있었고, 그런 경향은 기독교 역사에 늘 있어왔다. 하지만, 그런 율법주의적 종교성이 현대의 물질주의를 만나 그 이론적 기반을 확립하고 더욱 심화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의 신앙은 몇가지 현상만으로 수량화될 수는 없다. 또한 우리가 지닌 문제들이 몇몇 프로그램으로 해결되지도 않는다. 우리의 신앙은 선형(linear)가 아니라, 인격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런 직선적 사고를 진리로 여기고 있고, 그런 흐름에 역행하면 뒤떨진 사람으로 취급한다. 그래서 이런 흐름에서 돌이켜 진리를 향해 나가는 것은 쉽지 않은 가시밭 길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힘으로는 결코 될 수 없는 일, 그래서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쉽지 않은 좁은 길을 가는 것이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는 것이기에, 그 길을 함께 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
Apr 1, 2007 | 이달의 초점
이코스타 2007년 4월호
로날드 사이더의 책들 (김진태)
예레미야 35장에는 성경 전체를 통털어 딱 한번 등장하기 때문에 성경을 여러번 통독했어도 무심코 지나칠 수 있을 만한 족속인 레갑 족속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약간은 특이하게 전개되는 예레미야 35장의 이야기 가운데에서, 결론적으로 레갑 족속은 하나님의 칭찬을 듣고, 불순종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순종의 모델과 같은 존재로 세움받는다. 레갑 족속이 그렇게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술을 마시지 말라는 요나답의 명령을 순종한 데에 있었다. 당대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권하는 포도주를 거절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텐데도 그들은 자기 조상이었던 요나답의 명령에 신실했다. 성경 어디에도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술을 마시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구절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레갑 족속이나 혹은 세례 요한과 같이 술을 평생 마시지 않으며 더 높은 기준을 세운 사람들은 성경에 종종 등장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사용하셨다. 이것은 비단 술만으로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거룩한 기준을 세우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주님께서 귀하게 보시고 높이신다는 사실은 수많은 믿음의 조상을 통해 확인된 사실이다.
로날드 사이더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심이 많은 저자이다. 진정한 신앙은 삶의 변화를 필연적으로 동반한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그는 야고보서의 신앙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비교적 최근인 2005년에 쓰여진 ‘그리스도인의 양심선언 (The Scandal of the Evangelical Conscience)‘에서 그는 소위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삶과 통계학적으로 유의미한 차이가 없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비록 미국의 통계자료이기는 하지만, 이혼, 인종차별의 문제를 넘어서 가정폭력마저도 차이가 없다는 사실은 한국 그리스도인의 상황이 그리 나을 것 같지 않다는 점에서 더욱 충격적이다. 그는 이와 같은 현상이 교회가 복음을 전적으로 강조하지 않은 채 값싼 은혜만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생겼다고 진단하면서, 그리스도인이 상대주의, 물질주의, 개인주의와 같은 대중문화의 흐름에 동화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교회의 회복, 보다 구체적으로는 예수님의 중심되심을 강조하는 반대중문화적인 공동체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보다 10년 정도 전에 쓰여진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다 (Genuine Christianity)‘에서도 로날드 사이더의 어조는 그다지 다르지 않다. 현대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너져 있음을 드러내고 그에 대한 성경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려는 의도가 강한 ‘그리스도인의 양심선언’에 비해서,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다’는 보다 구체적인 원칙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 책에서 그는 11가지 원칙을 통해 개인, 가정, 교회, 사회 등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 영역에서 어떻게 균형잡힌 신앙을 가질 수 있으며, 그 신앙이 또한 어떻게 드러나야 할지를 고민하며 제시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달라야 함을 강조한 저자는 사실 로날드 사이더 이외에도 많이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비슷한 점을 강조한 또다른 저자들과 로날드 사이더를 다시금 구분지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사회정의를 향한 그의 관심이다.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다’에서도 드러났듯이, 그는 균형잡힌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연스럽게 사회정의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회정의의 여러 가지 측면 중에서 로날드 사이더가 특별히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는 경제적인 정의, 즉 가난의 문제이다.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던 1977년의 저작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 (Rich Christians in an Age of Hunger)‘에서 그는 전세계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훨씬 부유한 서구사회와 그 안의 그리스도인, 가난에 대한 성경적 관점, 그리고 현대 사회에 만연한 경제적 불평등의 구조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물질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거의 하지 않고 있다. 물질주의 세계관에 대한 그의 견해는 ‘그리스도인의 양심선언’에 오히려 더 명확히 드러나 있다.
At the same time, a new kind of materialism has taken root. Historic Christianity had been profoundly materialistic. The created world is good. God wants us to create wealth and delight in the bounty of the material world. But historic Christianity also placed firm boundaries on this materialism. Nothing, not even the whole material world, matters as much as one’s relationship with God. The Sabbath reminded people that once every seven days we should forget productive work and focus especially on worship of God. Happiness comes first of all not from material things, but from tight relationships with God and neighbor, and then thirdly from a generous sufficiency of material things. (From p. 88 of ‘The Scandal of the Evangelical Conscience’)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에서 로날드 사이더가 제안하고 있는 서구사회의 그리스도인의 책임 및 실천사항은 이 세계의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중요할 뿐만 아니라 물질주의에 맞서기 위한 좋은 대안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첫번째로 누진 십일조를 제안한다. 소득의 10%를 내는 십일조와는 달리, 소득이 많아질 수록 더욱 많은 부분을 후하게 나누자는 원리이다. 안타깝게도, 서구사회가 더 부유해진 지난 30여년동안 그리스도인이 나눈 소득의 평균은 3%에서 2.5% 정도로 줄어든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안타까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재정적인 나눔은 실천의 첫걸음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로날드 사이더는 개인적인 소위 ‘주머니의 회심’으로부터 더 나아가서, 공동체적으로도 가난한 자들을 향한 재정적 나눔과 자원봉사의 시간을 점차적으로 늘려나가는 동시에 정부 차원에서의 비슷한 프로그램을 늘려나가기 위한 청원을 할 것을 제안한다. 한 단계 더 나아가, 그는 그리스도인이 개인적인 차원과 교회공동체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이 세계를 보다 공평하게 만들 수 있는 사회적인 해결책에도 관심을 갖고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사회적인 관심의 일부는 최근에 그가 함께 편집한 ‘Toward an Evangelical Public Policy‘와 같은 책에 반영되기도 하였다.
다른 세계관에 비해서 물질주의는 한국교회를 이미 더욱 강하게 침투한 것으로 보인다. 70-80년대의 기복주의 신앙은 그 시작에 불과한 듯 하다. 현재에도 사회적/경제적으로 성공한 그리스도인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교회 안에서 더욱 주목받고 심지어 신앙의 모델로서 추켜세워지는 모습을 너무나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 결과로 세상의 성공을 통해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젊은 그리스도인의 모습 역시도 빈번하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성공을 추구하기 이전에 주님을 위해 거룩한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젊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그만큼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면에서 로날드 사이더의 메시지는 우리 각자와 공동체에게 큰 도전을 던져준다. 당신의 삶은 비그리스도인의 삶과 비교하여 어떤 거룩한 차이점이 있는가? 하나님께서 이미 허락하신 부유함을 당신은 얼마나 거룩하게 사용하고 있는가?
Jacque Ellul, “뒤틀려진 기독교, The Subversion of Christianity”, 1986 (이정희)
기독교의 왜곡은 나쁜 의도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그것은 더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모으고 성경에 노출시키고 기독교 종교 의식에 참여하도록 의도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옳은 것이며 바람직한 것인가? 자크 엘룰의 설명에 따르면 그것은 오히려 교회에 해로운 것이었다. 3세기에서부터 시작되어 현재에까지 계속되고 있는 복음의 메시지의 왜곡은 교회 지도자들의 권력, 도덕적 우위, 혼합주의 등에 대한 유혹에 철저하지 못한 태도로 제도 교회에서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것은 신약 성서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었으며 교회에 성공을 위해 그 자신의 중심 메시지를 포기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항상 나쁜 의도로 시작된 것은 아니었지만 성경의 메시지의 뒤틀림은 그 자체로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변화된 복음은 기본적으로 세상 속에 우리 자신을 그대로 두는 것과 똑 같은 것이었다.
교회가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공동체로서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는데서 벗어나 원래의 복음의 메시지에 충실해야한다. 세상의 질서에 거스르는 것은 사람들의 기대에 어긋나는 것이겠지만 그것이 복음이 능력을 갖기 위한 기본적인 전제조건인 것이다.
Tom Wright, “Simply Christian”, 2006 (이정희)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이 자유주의 진영이나 복음주의 진영를 막론하고 기독교 공동체 전체에 커져가고 있다. 한편 하나의 산업이 된 예수를 둘러싼 이야기가 그럴듯한 상품으로 미디어를 타고 진실을 호도하고 있어 신자와 비신자에게 혼란을 야기하고 있고 다른 한편 굳어져 가고 있는 현대의 교회의 갱신은 역시 교회의 기초인 역사적 예수, 나사렛 예수가 제공하기 때문이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복음주의권의 학문적 선봉에 서있는 Tom Wright의 신앙 입문서 Simply Christian은 저자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 성과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다른 책과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2부에서 제시되고 있는 God, Israel, Jesus and the coming of God’s kingdom 등의 주제가 역사적 사실이 최대로 복원된 상태에서 그를 둘러싼 다양한 견해들이 충돌하고 그 의미가 확인되는 상황을 잘 설명하고 있다. 예수가 이스라엘의 역사에 계시된 하나님의 약속을 현재화하여 자신의 삶 자체로 보여주고 있다는 해석을 광범위한 증거로 제시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나라의 기본전제는 자기 부인과 좁은 길로 감이다. 세상의 질서로서 강함과 부유함과 명예로움은 멀리해야하는 가치이다.
Apr 1, 2007 | 찬양과 예배/이유정의 예배를 이야기하자
이코스타 2007년 4월
2월 10일 토요일 5시 반, 남부 플로리다 제일감리교회 예배세미나 및 찬양 집회 차 마이애미 지역에 도착. 비행기 연착으로 8시간이나 걸려서 도착한 남부 플로리다… 비행장 밖으로 나오자마자 훅 하고 느껴지는 열대아 열기에 이곳이 바로 그 유명한 마이애미 근교라는 것이 피부로 와 닿았다. 마중 나오신 집사님이 1년 내내 관광지인 이곳에 있는 8천 명 정도의 교민들이 대부분 관광업에 종사하고 있음을 말해주었다. 이곳저곳 반팔에 반바지 차림의 현지인, 관광객들에 비해 추위에 찌들어 중무장했던 우리 옷차림이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저 녁식사를 간단하게 하고, 기다리던 10여명의 찬양팀과 바로 세미나 시작. 주제는 “20분짜리 찬양 디자인 실재”. 처음 이런 세미나를 접하는 이들의 눈빛이 유난히도 초롱초롱 빛났다. 세미나 끝나고 바로 연주팀과 보컬팀으로 나누어 미리 준비한 주일찬양 연습시작. 나름대로 쉽게 디자인한 프로그램이 이들에게는 생소해보였다. 기존에 뛰어난 실력을 가졌던 키보디스트가 타주로 가면서 새롭게 조인한 키보드주자는 팝 스타일 코드연주에 익숙하지 않아 잔뜩 위축되어 있었고, 드럼이나 신디사이저 등 그 외의 연주자들도 기초가 약한 상황이었다. 그 마음 그대로 하나님께서 받으신다고 격려하고, 기도하면서 연주하자고 했다. 모두들 이런 시간이 너무 귀해서 더 하기를 원해 11시 가까이 끝났다.
지 친 몸을 이끌고 호텔로 돌아왔다. 아들 예훈이는 샤워하자마자 혼자 침대에 누워 잠에 빠졌다. 와이프도 무리한 여독에 지쳐 보였다. 나도 피곤했지만 주일에 있을 아침 예배 찬양과 오후 세미나, 그리고 저녁 찬양집회에 필요한 이런 저런 준비를 끝내고 나니 새벽 1시 반… 하나님께 약간의 불평어린 기도가 흘러나왔다. ‘하나님 왜 이렇게 벅찬 일정을 허락하셨나요. 일단 순종하고 가지만… 저희에겐 이번 일정을 온전히 감당할 힘이 없습니다.’잠들기 전, 이용규 선교사님의 ‘내려놓음’을 읽으면서 몽골 베르흐 지역 예배처소의 벌러르 자매 이야기가 눈에 들어왔다. 잃어버린 소를 찾다가 예배에 늦을까봐 그냥 교회로 뛰어온 자매이야기이다. 내려놓았을 때 하나님께서 소를 다시 찾게 해준 실재 사건이다. 남부 플로리다 연합감리교회를 위해 불평까지 내려놓기로 했다.
주 일 오전, 다시 한 번 기도… ‘주님, 힘주세요. 왜 이 교회로 부르셨는지 깨닫게 해주세요.’ 아침 식사 할 시간도 없이 교회로 향했다. 어제 연습 때와는 사뭇 다른 정돈된 연주팀, 보컬팀의 모습에 놀랐다. 예배시간 10분전, 찬양팀 기도 시간에 성령께서 강하게 임하셨다. “내려놓을 때 하나님께서 채우신다, 우리가 예배 나아가기 전에 우리 안에 높아있는 것들.. 다 내려놓자.” 모두들 뜨겁게 기도했다. 그 순간 성령께서 새 힘을 주심을 느꼈다. 지쳐 있었던 몸에 새로운 힘이 솟아났다.
주 일 예배 때 전 성도들이 찬양팀과 하나가 되어 뜨겁게 찬양했다. 눈앞에 성가대원들이 누구보다 뜨겁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전통과 현대가 무리 없이 조화된 예배, 예배 전체가 물 흐르듯 은혜가 충만했다. 1시간 30분간의 예배에 온 성도가 푸욱 빠진 느낌이었다.예배 후 1시 40분, 와이프는 “찬양팀 운영의 실재” 세미나, 나는 “성가대 사역, 전통적인 관점 바꾸기” 세미나를 시작했다. 와이프는 지역교회 찬양팀 운영의 원리와 구체적인 노하우를 다루었다. 성가대 세미나의 포커스는 2가지… 성가대와 찬양팀이 지역교회에서 서로가 동역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과 연주에 집중하는 전통적 성가대의 역할이 회중을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인도하는 예배인도의 역할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 무엇보다 중요한 강조점은 하나의 봉사 차원을 뛰어 넘어 사역이라는 관점의 변화를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초롱초롱 빛나는 성가대원들의 눈빛을 보며 이 교회의 예배사역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았다. 아내의 세미나는 오후 4시 반이 넘도록 끝나지 않았다. 알고 보니 보너스로 보컬팀은 물론 연주팀까지 한명 한명의 소리 만들기와 블렌딩 노하우도 터치했단다. Oh my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한 이들의 열정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저 녁 식사 후 집회를 위해 7시에 다시 교회로 도착, 아내나 나나 많이 지쳐있는 상황에서 겨우 힘을 내어 집회준비에 들어갔다. 몇 곡 돕기로 한 찬양팀들도 많이 지쳐 있었고, 한 자매는 도저히 설 힘이 없어서 회중석에 남기로 했다. 키보드로 섬기는 자매 한 명은 서로 약속 시간이 빗나가 교회 밖에서 1시간 넘게 기다렸다고 한다. 서너 곡 연습하려고 리허설을 했지만 무리였다. 무리하지 않고 쉽게 가기로 했다. 모든 것을 다시 한 번 내려놓고, 찬양팀과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가운데 또 한 번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셔서 새로운 힘을 주셨다.
집 회 중반을 넘어 후반으로 가면서 예수님께 모든 포커스를 두고 찬양과 간증을 진행했다.아내는 특유의 입담으로 7년 만에 새 앨범을 제작하게 된 동기와 과정을 간증했다. 아내의 “아침안개 눈앞 가리듯”에서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고, 회복되었다. 내 간증에서는 언투유에서 경험한 Simple Life, Simple Ministry의 포커스는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과 그 사랑으로 양을 먹이는 것임을 말하며 “아버지 내 삶의 모든 것 되신 주”의 아버지 대신 예수님으로 바꾸어 찬양했다. 그리고 아직도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분들을 위해 복음을 전했다. “당신을 향한 노래”를 부르며 예수의 사랑으로 서로를 축복하는데, 순간 억제할 수 없는 예수님의 사랑이 내 온 마음과 전신을 적셨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로 더 이상 멘트도 노래도 할 수 없었다. 이런 일은 개인적으로 처음이었다. 회중들에게도 주님의 사랑이 임했지만, 바로 눈앞에 있던 반주자가 계속 눈에 들어왔다. 집회 초반부터 계속 눈물이 보였는데,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확신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사랑이 충만하게 역사했다는 것이다.
그 때 주님께서 이런 마음도 주셨다. 사실 그 지역의 개 교회 관계들이 초창기에는 좋았는데 어느 순간인가부터 깨어졌다고 들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교회에 가득 부어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통해 남부 플로리다 지역의 한인교회들이 하나 되고, 부흥하는 초석이 되기를 회중에게 부탁했다. 최근 동부지역에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부흥의 조짐들을 담대하게 나누었고 이 교회가 또 하나의 부흥의 불씨가 되기를 도전했다. 뜨거운 기도와 찬양으로 집회를 마쳤다. 집회를 마치고 많은 교우들이 찾아와 기쁨을 나누었다. 처음 집회 시작할 때와는 너무나도 달라진 교우들의 밝은 얼굴모습에 담임이신 장찬영 목사님도 기뻐하셨다. 조금씩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힘든 일정으로 부르셨는지 알 것 같았다. 우리의 약함을 들어서 강하게 사용하시는 하나님… 그런데 더 세미하신 하나님의 사역은 다음 날에 이어졌다.
다 음날인 월요일은 사실 가족과 함께 쉬기 위해 추가로 잡은 일정이었다. 교회 측에서는 한 번이라도 더 세미나를 했으면 하는 눈치였지만 우리 가족도 오랜만의 쉼이 그리운 상황이었다. 잘 설득해서 월요일 하루를 쉬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지만 상황은 ‘꿈 깨’였다. 일단 그렇게 화창했던 날씨가 주말부터 갑자기 비구름이 끼면서 월요일은 세찬 비바람까지 동반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예배사역 책임자이신 양 권사님 내외분과 찬양팀 리더와 함께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찬양팀 상황을 듣게 되었다. 풀어야 할 숙제들이 보였다.
아 침에 권사님께 전화 한통이 왔다고 했다. 바로 어젯밤 그토록 눈물을 흘리던 반주자였다. 어제 집회 때 남편이 큰 은혜를 받고 눈물을 흘리며 와이프에게 사과했다고 한다. 그동안 아내의 반주사역을 이해 못하고 핍박만 하던 남편이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아내를 이해하게 되었고, 전적으로 지원해주겠다고 했단다. 반주자가 흘렸던 어제 눈물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찬양팀 적응도 쉽지 않았지만, 가정에서도 고통의 시간이 있었던 것이다. 그 어려움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려는 그녀의 중심을 하나님께서는 그날 축복해 주셨다.
마 침 찬양사역에 관여하고 계신 전도사님 부부와 오후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교제했다. 오후엔 플로리다 지역에서 가장 크고 젊은 교회인 갈보리 채플과 전도폭발의 창시자인 제임스 케네디 목사로 유명한 코랄릿지 장로교회를 방문했다. 만 오천 명 교인인 갈보리 채플의 예배사역 자원봉사자 규모가 우리교회보다 작은 것을 보고 의아해 했지만 전문적인 미디어 사역과 찬양사역, 방대한 건물과 교육시스템의 규모에 놀랐다. 코랄릿지 장로교회는 전형적인 백인교회인데 전통예전을 고수함으로 성도 대부분이 장년층과 노년층이다. 미국교회의 전형적인 구세대와 신세대 교회문화가 교차하는 재미있는 지역이었다.
저 녁 때 찬양팀과 식사를 함께 나누고 교회 강대상 카펫에 둘러앉아 나누는 자유토론 시간을 가졌다. 시작 전까지 육신적으로 지치고, 마음도 잡히지 않아 막막했는데 막상 발제를 시작하면서 나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내용이 ‘관계’ 이슈였다. 어떤 부분은 아주 깊게, 매주 구체적인 사례로, 때로는 터져 나오는 폭소로 진지하면서도 재미있는 토론이 2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드러나는 문제들의 대부분이 결국 팀워크와 리더십의 이슈들이었고, 경배와 찬양 사역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일어나는 혼란들이었다. 지난 4년 동안 언투유 예배사역의 핵심원리가 팀 사역이었고, 그동안 사역과 관계에 대한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아온 터라 이 찬양팀의 상황 하나하나가 더더욱 피부로 다가왔다. 모든 문제를 주님께 올려드리고 통성으로 눈물로 기도하며 향후 이 교회의 예배사역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시간을 가졌다.
세 미나를 마무리하면서 찬양 팀원들의 한결같은 반응을 보았다. 그냥 집회만 하고 떠나지 않고 이렇게 마지막 날까지 자기들과 삶을 나누고, 사역을 나누며, 문제를 들어준 것이 너무나 힘이 되고, 구체적인 회복과 도전이 되었단다. 우리 부부에게도 지역교회 예배사역을 어떻게 컨설팅하고, 회복하며, 섬겨야 하는지 정리할 수 있었던 참으로 소중한 2박 3일이었다.
모 든 순서를 마치고 호텔 로비까지 따라온 드러머 형제를 잊을 수가 없다. 그는 이번 주말에 자기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결혼 승낙을 위한 중요한 미팅 때문에 뉴욕으로 가야 했었단다. 그런데 왠지 성령께서 그것을 포기하고 이곳에 남도록 하셨는데, 이번 2박 3일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의 모델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보여주셨다며 예배사역에 재 헌신한 마음을 구구절절 나누었다. 비전을 품고 자신을 헌신한 새벽별과 같은 젊은이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지 흥분이 되었다. 두 손을 잡고 이 젊은 청년의 앞날을 마음껏 축복해주었다.
남 부 플로리다 제일감리교회의 필요에 대한 성령의 세밀한 음성을 듣지 못하고, 쉴 생각만 했던 아직도 부족한 우리 부부의 인간적인 성향들을 날씨까지 움직여 막으시고, 예배 팀 회복에 올인 할 수 있도록 하신 세밀하신 하나님의 역사에 전율이 느껴졌다.
(진짜 후기)
버지니아에 돌아온 뒤, 한통의 전화가 왔다. 찬양팀 부장이신 양 권사님이셨다. 우리가 떠나자 마자 화창한 날씨가 회복되었단다. 플로리다 년중 놀기에 가장 좋은 날씨로…?&%
1 주일 후, 또 한통의 전화가 왔다. 제일감리교회 담임이신 장찬영 목사님이셨다. 내년도에 언투유 예배컨퍼런스를 그 지역에서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이 예배 컨퍼런스를 통해서 플로리다 지역을 위해 교회를 오픈하고, 관계 회복을 위한 계기로 삼고 싶다는 고백을 하셨다. 놀라웠다. 주일저녁 집회 때 주님께서 주신 마음을 나눈 것이 실재로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성령님께 자신을 내려놓고 순종할 때 역사하시고 열매를 맺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 (끝)
Apr 1, 2007 | 책이야기/책읽는 이야기
2007/4
바쁘게 보냈던 3월. 그래도 5권의 책을 가까스로 읽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비교적 최근 책을 읽을 수 있었는데, 그 이야기들을 가볍게 나누고자 한다.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쟈크 엘룰, 대장간, 1992
작년 규장출판사에서 나온 “존재의 이유”라는 전도서에 관한 책을 통해, 쟈크 엘룰이란 인물이 좀 더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지 않았나 싶다. 그 덕분에, 절판되어 구할 수 없었던 쟈크 엘룰의 책들이 속속 재판되어 구입 가능하게 되었는데, 그 중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과 “하나님이냐 돈이냐”같은 책들이다. 그간 꼭 읽어야 할 책 중에서 구할 수가 없어 늘 아쉬웠던 책 –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이 책을 접했다. “뒤틀려진 기독교”의 서문에서 언급되어 있듯이, 엘룰의 사상은 어렵다. 그래서 그의 사상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고 한다. 사실 그의 사상을 잘 이해하지 못한 채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보여지는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 예를 들어, 쟈크 엘룰의 전반적인 사상에 심하게 반발할 만한 보수적 신학 색깔을 가지신 분들 조차, 주일 예배 시간에 쟈크 엘룰의 말들을 별 생각없이 인용하시는 것만 보아도 쉽게 찾을 수 있겠다.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엘룰의 사상을 내 나름대로의 버전으로 이해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의 사상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기에는 아직 공부도 덜했을 뿐더러, 더 공부한다고 해도 잘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우 리는 세상 속에 있다. 우리는 세상의 죄를 감소시킬 능력이 없지만, 그렇다고 다른 한편으?죄된 현실을 묵인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엘룰은 문제 해결을 위한 방법적이고 윤리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어떤 방법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에 대항함으로 기독교는 늘 혁명적일 수 밖에 없음을, 그래서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는 가치, 즉 ‘무엇이든지 성공하는 것, 효과적인 것, 능률적인 것은 정당하다’는 가치에 대항하여 존재 그 자체의 변화를 요구한다.
“다시 말해서, 정치 경제 등 사회의 문제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실천함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말이다.”
“ 이 현대 문명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는, 직접적 공격이나 거대한 변화를 위한 노력이나, 세계 전체를 재구축하려는 시도는 소용이 없다. 즉 이 전체주의적 사회 속에 살면서, 그것을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심판의 메세지를 삶의 현장 속에서 실천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아”라는 2007 KOSTA/USA의 주제도서로 선정해도 손색이 없지 않을까 한다.
“Battling Unbelief: Defeating Sin with Superior Pleasure”, John Piper, Multnomah, 2007
Preorder – 아직 출판되지 않은 책을 Amazon.com을 통해 밀 주문해 놓고 받아 보았다. John Piper는 Christian hedonism으로 우리에게 널려 알려진 저자이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인간의 존재이유이며, 믿음이란 ‘하나님인 우리에게 하신 모든 일, 즉 과거 현재 미래의 일에 대해 기뻐하는 것이다.”遮?Christian Hedonism은, 현대의 자아 중심의 왜곡된 복음에 신선한 깨우침을 주지 않았나 싶다. John Piper의 책들은 읽으면서 거의 많은 부분 공감하고 도전 받는다. 딱 한 권의 예외가 있었는데, “하나님의 숨겨진 미소”라는 고통의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책으로, 나는 여전히 John Piper가 설명하는 고통의 이유에 대해 잘 동의가 되지 않는다. 아직 고민해야 할 숙제만을 남겨 주었다고 할까.
“Batting unbelief”는 저자가 이야기 하듯이, “Future Grace”의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하시는 모든 일을 신뢰하고 기뻐할 수 있다면, 우리가 가진 많은 문제들은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비록 상황이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그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믿고 기뻐한다면 말이다. 다시 말해,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기뻐하지 않는 것이 죄이다.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 죄된 모습의 예로, 걱정, 교만, 낮은 자존감, 조급함, 탐욕, 우울, 정욕 등을 이야기하고, 그것이 왜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 결과로써의 죄인지를 조목 조목 다룬다.
앞 에서도 이야기했지만, John Piper의 책은 읽어서 별 손해 볼 것이 없다. 얼마 간의 시간이 흘러서, Piper의 hedonisim이 인간의 책임을 소홀히 한 극단적 이론이라고 비난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재 기독교의 자아 중심적 모습 속에서, 그의 목소리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여겨진다.
“기독교의 미래”, 이문장, 앤드류 윌즈 외, 청림출판사, 2006
‘기독교의 미래’라고 하면 사실 Alister McGrath가 떠오른다. 그도 그럴 것이, McGrath의 최근 작 “기독교의 미래”가 있고, 또 약 10년 전의 역작인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가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문장 교수 외 6명의 저자에 의해 쓰여진 이 “기독교의 미래”는 McGrath의 접근과는 사뭇 다르다. McGrath가 그의 책에서, 서구 기독교의 전체적인 흐름과 나아갈 방향에 대해 진단하고 있다면, 이문장 교수의 이 책은 세 삼 세계의 기독교에 대한 전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즉, 기독교의 중심 축이 이제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및 남미로 이동할 수 있다고 진단하고, 그것을 대비하기 위해 아시아, 아프리카 등은 기독교 신앙을 탈서구화하여, 자신들의 문화에 맞게 재구성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신학뿐 아니라, 기독교 문화도 건강한 토착화의 과정을 거쳐야만 함을 역설한다.
나 는 아직, 기독교와 민족이라는 개념을 정리하지 못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과연 어디까지이며,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 걸까? 여기 저기서 들은 이야기로는, 정리되지 않은 무엇인가가 있다. 나의 고민에 또 다른 한 방향을 제시해 준 고마운 책. 얼마 후에는 기독교와 민족이라는 개념이 조금 더 정리될 날을 기대해 본다.
“속 빈 설교, 꽉찬 설교”, 정용섭, 대한기독교서회, 2006
나이는 나보다 어리지만, 신앙적으로는 나보다 훨씬 성숙해 있어 늘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국의 한 후배와 통화를 했다. 그 후배가 정용섭 목사의 설교비평 사이트에 대해 알려주었고, 인터넷에서 글을 읽은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는, 곧 그 분의 책 “속 빈 설교, 꽉찬 설교”를 구입했다. 임영수, 이재철 목사로 부터, 김진홍 하용조 조용기 목사, 그리고 박옥수 김기동 목사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목사들의 설교를 나름대로의 기준으로 비평한 책이다.
우 선, 이 책이 목사의 설교가 신성화되어 있는 우스운 한국교회의 상황 속에서, 용기있게 대형교회 목사들의 설교에 대한 비평을 했다는 사실 자체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 책을 계기로, 목사의 설교가 신성화되는 오류가 조금이라도 시정되고, 함께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바로 서려고 애쓰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기대해 본다.
저 자의 설교 비평에 많은 부분 공감한다. 특히 임영수, 하용조, 조용기 목사 등의 설교에 대한 비평은 탁월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몇 가지 아쉬운 점들도 있었다. 첫째, 그의 설교 비평에 대한 기준이 좀 더 명확히 설명되었어야 했다. 물론 편집자적 의도에 근거한 성경해석을 선호하고, 교회력에 따른 균형 잡힌 설교에 후한 점수를 주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더 명확한 기준이 제시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둘째, 박영선 김동호 목사의 설교에 대한 비평은, 저자의 연구부족이 눈에 띤다. 예를 들어 박영선 목사의 설교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최근 저작까지 모두 읽고 생각의 변화까지 읽어 내야했는데, 저자는 박 목사의 바뀐 생각까지는 인식하지 못한 채 비평을 한 점이 아쉽다. 또한 김동호 목사의 경우도, 몇 편의 설교로 비평하면서 생긴 많은 오류들이 보인다. 김동호 목사의 설교 비평은 결국 본질을 벗어났다고 밖에 할 수 없지 않을까.
정용섭 목사의 두번째 책도 구입했다. 한국 교회에 불어올 신선한 바람을 기대하면서…
“교회 DNA”, Howard Snyder, IVP, 2006
하워드 스나이더의 최신작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교회사에 나타난 성령의 표적”, “참으로 해방된 교회” 등의 그의 저작에서 볼 수 있듯이, 하워드 스나이더는 교회 갱신에 관한 전문가이다. 이번 책 “교회 DNA”도 예외는 아니어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분명이 그리스도의 형질, 즉 DNA를 가졌을 것이고, 그 DNA는 과연 어떤 특징들을 가지고 있는지를 다룬다. 하워드 스나이더의 초창기 저작들을 보면, ‘공동체로써의 소그룹’에 대한 강조가 많이 나온다. 교회 갱신의 부분으로 소그룹을 분명한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중기의 저작을 보면, ‘생태학’에 대한 관심이 많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 책에서도 역시 ‘소그룹’과 ‘생태학’에 대한 이야기는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한가지 덧붙여진 것이 있는데, 그것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선포되어야 한다’는 사실로 대표되는 사회참여에 대한 강조이다. 하워드 스나이더는, 예수님의 DNA를 지닌 교회의 모습으로써, 대형교회도 될 수 없고, 초소형교회도 될 수 없다고 전제함으로써, 메노나이트 신학자로써의 정체성을 포기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도 들게 하는 부분도 있어 흥미로웠다. 그의 다음 저작을 무척이나 기다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