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혜] 내 친구 케이트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니긴 했지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것은 그로부터 

한 참 뒤였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과는 다른 ‘하나님께 속한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했던 나는 한국을 떠나 선교훈련 과정을 거친 후 영국으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몇 년의 시간이 또 흐른 뒤 하나님은 내게 선교의 비전을 발견하게 하셨고, 

선교사를 훈련하는 신학교에 들어가는 길을 열어주셨다. 

이 학교는 기본적인 성경을 비롯해 실질적인 선교의 현장에서 필요한 것들을 

배울 수 있는 좋은 Christian college였다. 특히 기본적으로 타 문화권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에 대해 중점을 두고 있어서 70%의 학생들이 영국인이었지만 다양한 

문화권에서 온 다른 학생들과도 잘 융화하고 서로를 돕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겼던 내 친구 케이트를 소개하고 싶다. 학생들이 

열려있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보다 영국 

사람들을 사귀는 것이 사실 조금 더 어렵다. 영국인들은 모국어가 아닌 제 2외국어로 

공부해야 하는 타국인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었고 무엇보다 

개인적인 성향이 강한 문화적인 차이 때문에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케이트는 조금 다른 친구였다. 케이트는 나와 같은 지도교수님 그룹에 배치

되었는데 우리 그룹은 나와 연세가 좀 있으신 한국인 부부를 제외하고는 전부 

영국인으로 구성된 조금 특이한 그룹이었다. 대부분 그룹을 구성할 때 학교 방침상 

다른 나라에서 온 학생들 함께 배치하도록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첫 학기부터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느꼈고 무엇보다 지도교수랑 잘 맞지 않아서 개인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룹 미팅을 할 때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기 일쑤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주눅이 들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와 화장실로 들어가 물을 내리면서 엉엉 울고 말았다. 섬세하고 배려심이 

많았던 케이트는 아마 나의 모습을 지켜보았던 모양이다. 화장실로 쫒아와서 

내 표정을 살피고, 그 날 오후 은행에 갈 일이 있던 나를 차로 태워다 주겠다고 했다. 

그녀와 함께 동행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케이트는 

나의 어려움에 대해서 이해한다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이건 다른 누구의 

잘못이 아니고, 나 자신의 문제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자 케이트는 

“너의 문제라면 이건 우리 모두의 문제야”라고 말해주어서 지친 나의 마음에 

큰 위로와 감동을 주었다. 

그 이후로 케이트와 더욱 친해지게 되었다. 밝고 활달한 성격, 모든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늘 배려하는 케이트를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다. 

그녀가 품고 있는 지역은 중국이었는데 그래서인지 동양인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간단한 다른 나라 인사말은 열심히 배우고 또 기억하는 열정이 가득한 

친구였다. 원래 외과 의사인 케이트는 어렸을 때부터 꿈이 의사와 선교사, 두 개

였다고 한다. 그래서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중 두 가지를 다 하기로 마음먹고 

일단 의대에 진학, 외과의사로 몇 년을 일하다가 자신이 일하던 모든 좋은 환경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주신 두 번째 비전을 향해 우리 학교에 오게 되었다.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히 공부해야만 따라 잡을 수 있었던 내 방에는 늘 새벽까지 

불이 켜져 있었는데 기숙사 출입구 쪽 2층이어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놀러 다녔던 케이트는 내 방에 불이 켜져있으면 놀러오곤 

했었다. 하루는 그런 그녀에게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왜 너는 다른 사람하고 

다르냐고… 이상한 질문이기도 했지만 이곳에 있는 다른 학생들과 그녀가 정말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의 질문에 활짝 웃으며 케이트는 명쾌하게 

대답했다. 


“Because I want to be a missionary”  


선교사가 되기 위한 길,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 살아가는 길은 어떤 것일까? 

많은 지식을 알고, 수 많은 케이스를 공부하고 익힌다해도 머리로만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이 정말 아는 것이 아니듯,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나는 사람을 향한 

사랑과 영혼에 대한 깊은 애정이 없다면 다른이들에게 영향력을 줄 수 없을 것이다. 

무엇무엇이 되기 위한 것이 목표가 아니라 어디에 있든 삶과 신앙의 일치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자의 삶이 아닐까? 

선교를 향한 비전을 품고, 그 길을 위해 배움과 훈련의 시간을 갖고자 이 학교를 찾은 

다양한 나라에서 온 학생들. 몇 년이 지난 지금, 사실 그 때 교실에서 배웠던 학문보다

이들을 통해 배우고 느꼈던 살아있는 현장이 더 기억에 남는다. 내 친구 케이트, 

밝고 환한 그녀의 웃음과 사랑이 중국 땅 어딘가에서 동일하게, 그 누군가에게 

아름다운 빛으로 비추고 있을 것이다. 오늘따라 유난히 케이트가 보고싶다. 

[이유정] 비상(飛翔)하라

한 젊은이가 우연히 검독수리 둥지를 발견했다. 심술궂은 그는 검독수리 둥지에서 알을 하나 꺼내 뇌조[footnote]들꿩과(Tetraonidae) 뇌조속(Lagopus)에 속한 뇌조는 날지 못하는 새이다.[/footnote] 둥지로 옮겨 놓았다. 알에서 부화한 뒤 이 독수리는 뇌조 새끼들과 함께 자랐다. 자신을 뇌조로 여기고 행동했다. 뇌조처럼 꼬꼬댁 소리 지르고, 벌레를 찾아 흙속을 뒤적였다. 날개에 비해 몸집이 비대한 뇌조는 몇 미터 이상은 높이 날아오를 수 없는 까닭에 새끼 독수리 역시 그 이상 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어느 덧 힘차고 당당한 몸집으로 성장한 검독수리는 여느 때처럼 뇌조들과 함께 흙더미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그때 한 그림자가 이들 위를 쏜살같이 지나갔다. 모두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창공 위에 검은 형체가 바람을 가르고 미끄러지듯 치솟고 있었다. “아! 정말 멋진 새로구나!” 검독수리가 탄성을 질렀다. “저건 독수리야!” 옆에 이던 뇌조가 알려주었다. “검독수리라고 부르지! 저 새가 바로 하늘의 왕이야! 저 독수리와 겨룰 수 있는 새는 없지.” 뇌조는 고개를 떨구며 한 마디 덧붙였다. “꿈도 꾸지 마, 너는 결코 저런 새가 될 수 없으니까.”
 
이들은 다시 흙더미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 이후 이 검독수리는 두 번 다시 하늘을 치솟는 독수리의 비상을 본 적이 없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 검독수리는 평상시 뇌조가 뛰어오르는 높이 이상 결코 날아보지 못하고 그렇게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footnote]드와이트 에드워드, 내면의 혁명 (서울: 좋은씨앗, 2005), p. 17-18. 아메리칸 인디언들 사이에 전해오는 옛이야기[/footnote]
  
우리는 태어나면서 저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놀라운 계획을 갖고 태어난다. 원래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 그렸던 지위는 ‘왕의 가문’이다. 피조물을 지배하고, 관리하고, 땅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사명을 주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28)
  
그러나 어느 날 사단은 우리를 뱀의 둥지에 옮겨 놓았다. 그리고 우리의 지위를 망각하게 만들었다. 땅에 붙어서 땅의 것들만 꿈꾸도록 길들였다. 옆에 붙어서 평생 우리 귀에 대고 말한다. “꿈도 꾸지 마, 너는 결코 왕의 가문이 될 수 없으니까.”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왕의 자녀의 신분을 모르고 마치 뇌조 나라의 검독수리처럼 그렇게 평생 흙더미만 뒤지며 죽어간다. 자신의 가치를 모르고 영적 거지로 산다. 그래서 인생의 좌표를 잃고 엉뚱한 쓰레기 더미에서 삶을 허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을 쓰레기 더미에서 하나님으로 향할 때 우리의 눈은 하늘의 좌표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원래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였는지 깨닫게 된다. 우리가 얼마나 형편없는 쓰레기 더미에서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고 살았는지 놀라게 된다.
 
검독수리도 자신의 본래의 신분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었다. 그것은 진짜 검독수리가 바람을 가르듯 창공으로 치솟는 모습을 보았을 때이다. 본능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옆의 뇌조들이 단번에 그의 기를 꺾었다. “꿈도 꾸지 마, 너는 결코 저런 새가 될 수 없으니까.”
 
세상은 경쟁사회이다. 높이 오르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짓밟아야 산다. 자신이 못 오르면 다른 사람도 못 오르게 짓밟는다. 이것이 죄로 물든 이기적인 인간관계이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는 경쟁에서 짓밟힌 사람들, 자신을 인생의 낙오자로 여기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실재로 교회는 물론 집회나 세미나, 대학의 현장에서 삶에 지치고, 자신감을 잃은 분들, 미래를 불안해하는 사람들, 비전은커녕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우리의 이웃을 많이 만난다. 가정이 깨지면서 부부 관계가 무너지고, 자녀들의 마음이 찢기고, 피멍든 모습도 흔해졌다. 잘못하다간 저 뇌조 나라 검독수리처럼 지저분한 흙더미만 뒤적거리며 단 한 번도 뇌조 이상을 날 생각도 못하고 그렇게 생을 마무리할 수도 있다.
 
예배는 비상(飛翔)의 현장이다. 과거에 그 어떤 시궁창에 빠져 살았던지 상관없다. 예배는 자신의 본래 모습을 망각한 채 비대한 몸짓으로 벌레나 잡아먹던 우리가 일어나 하늘을 날게 되는 인생역전의 현장이다. 우리가 오직 하나님을 기대하고 바랄 때 하나님은 우리를 독수리처럼 바람을 가르고 창공을 향해 치솟게 하신다. “청소년이라도 피곤하고 지치며 건장한 청년이라도 넘어지고 자빠지나, 오직 여호와를 바라보고 의지하는 자는 새 힘을 얻어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갈 것이요 달려가도 지치지 않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 _사 40:30,31, 현대인의 성경 
  
잭 헤이포드의 말처럼 예배는 하나님의 왕국과 능력이 교회 전체에 임하고 교회를 통해서 세상으로 확장되는 것이다.[footnote]잭 헤이포드, 경배 (서울: 조이선교회 출판부, 2002), p. 32[/footnote] 예배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회복은 인간의 상식을 뒤엎는다. 그 힘은 하나님 왕국의 권위에서 흘러나온다. 그 회복은 생물학적 나이나 육체적 힘으로 비교할 수 없다. 인간의 차원과 시야를 초월한다. 하늘로 비상할 때 이 땅에서 경험한 모든 수준을 일시에 뒤엎는다. 뇌조의 고정관념을 타파한다. 전혀 새로운 시야, 그러나 태초에 이미 우리 안에 있었던 관점을 회복한다. 하늘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왕의 시각으로 생각하며 하나님의 지혜로 행동한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벧전 2:9 상반절)
  
그래서 우리는 예배 때마다 흘러넘치는 왕국의 권위로 왕 같은 제사장의 정체성을 회복한다. 왕의 지위를 되찾고 ‘거룩한 나라’를 꿈꾼다. 제사장의 신분을 되찾아 ‘하나님께 소유된 백성’을 섬기고 다스릴 사랑을 충만케 채운다.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계 5:10)
  
이제 예배의 자리에서 회복된 왕국의 권위를 갖고 뇌조 나라의 잃어버린 제왕들을 향해 파송된다. 그 나라를 다스리되 세상의 힘, 폭력과 돈, 권력이 아닌 천국의 사랑, 섬김, 비폭력과 평화라는 새로운 권위로 다스린다. 자신이 죽고 남을 살리는 제사장의 권위로 다스린다. 그곳에서 만난 잃어버린 영혼들을 다시 예배의 자리로 초대한다. 저들이 또 다른 왕의 가문에 참예할 수 있도록. 
이유정 / 한빛지구촌교회 예배디렉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오직 주 만이’ 작곡자
 
  

[최주희] 사랑에 대한 오해와 진실

인간의 사랑 특별히 연인들의 사랑이나 부부의 사랑에 대해 논할 때, 사람들은 사랑의 속성에 대한 잘못된 정의를 내리는 것을 종종 본다. 너무나 당연하게 “사랑은 이런 것이야”라고 정의 내리고 그냥 그 정의를 믿어버린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많은 관계들을 오해나 곤경에 빠지게 하는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중요한 몇 가지만 살펴보자.

첫째, 사랑은 통제할 수 없는 열정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은 내 의지로 컨트롤되지 않는 그 어떤 것으로 감정에 바탕을 둔 로맨스라는 것이다. 즉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이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마구 솟아오르는데 나도 그 마음을 어떻게 조절할 수 없을 정도로 커 그냥 그 감정을 따라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영화나 TV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많은 젊은이들이 감정적인 열정으로 사랑에 빠진 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사랑의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며 무책임하게 뒤돌아서버린다. 그간의 행동에 대해서는 “그때는 사랑했으나, 지금은 사랑의 감정이 생기지 않으므로 어쩔 수 없다”라는 답만 돌아올 뿐이다. 심지어 육체적인 관계를 가졌음에도 사랑의 감정이 생기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고 돌아선다. 이것은 사랑에 대한 잘못된 정의다. 통제할 수 없는 열정이라고 사랑을 정의내리는 것은 자신의 감정적이고 현명하지 않은 처신을 합리화 하는 것으로 책임 없이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부추기는 격이 된다.

하지만 사랑은 통제 가능한 것이고 책임이 따른다. 즉 사랑은 절제와 책임을 포함한다. 절제와 책임이 따르는 사랑은 자신에게나 상대방에게 상처를 남기지 않으며, 오히려 성숙하고 생산적인 관계를 위한 디딤돌이 된다.

둘째, 사랑하면 서로의 생각이나 감정 심지어 욕구까지 무엇인지 다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상대방이 내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엉뚱하게 행동하거나, 혹은 내 욕구가 무엇인지 몰라 눈치보고 있다면 우리는 쉽게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단정 짓는다. 그리고 화를 낸다.

하지만 아무리 사랑한다하여도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상대방에게 표현하지 않으면 알기 어렵다. 특별히 여자들의 경우 굳이 말로 그것을 표현해야 하느냐며 스스로 자기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것에 대해 자존심 상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비현실적이고도 잘못된 기대이다. 가정상담 전문가들은 부부가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알게 되는데는 대략 27년 정도 걸린다고 한다. 물론 투명하고 성숙한 의사소통을 하는 부부라면 시간이 좀 더 단축되겠지만, 그만큼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표현하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과 감정까지 알 수 있는 친밀감을 만들기 위해서는 “하나로 연합하기 위한 노력에 헌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사랑한다는 것은 이런 노력을 하는데 헌신하겠다는 결단을 포함한다.

셋째, 사랑하면 서로의 생각이 늘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각이 같으면 서로 사랑하는 것이지만 생각이 다르면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오해하고 갈등한다. 그렇지 않다. 사랑해도 생각이 충분히 다를 수 있다. MBTI 성격검사에 의하면 16가지의 성격유형이 나온다. 이는 내 성격은 단지 1/16에 불과하며, 나와 다른 성격의 유형이 15가지나 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만약 상대방이 모든 일에 늘 나와 생각이 같기를 기대한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사회부적응이다. 그런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간다면 평생 불만족과 불평, 그리고 갈등과 분노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사랑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 주고 서로에게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나아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당신이 더욱 필요함을 고백하게 된다. 나와 남편은 서로 반대되는 성격이다. 나는 예민한 편이고 남편은 둔한 편이다. 나는 남편 덕분에 안정감과 여유를 배우게 되고 남편은 나로 인해 섬세함과 배려를 배운다. 나는 곱창전골과 돼지족발과 도가니를 좋아하지만 남편은 순 살코기를 좋아한다. 남편은 나에게 “무슨 여자가 술안주 감을 좋아하느냐?” 비난할 수 있고, 나는 “무슨 남자가 음식을 여자처럼 가리냐?”고 불평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닭 한 마리 사면 남는 것이 없다. 나는 닭의 날개와 연골을 먹고 남편은 퍽퍽한 흰살을 먹는다. 매우 경제적이다. 서로의 다름이 복으로 인정되는 순간이 많이 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사랑은 영원히 지속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다. 하지만 인간의 사랑은 결코 그렇지 않다. 한계가 있다. 아무리 서로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고백하였다할지라도,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는 일관된 사랑의 감정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영원한 사랑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의 능력을 공급받을 수 있다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특권일 뿐이다. 우리 부부도 마찬가지다. 지난 24년의 결혼생활을 뒤돌아보면 큰 갈등이나 다툼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늘 사랑했던 것은 아니다. 성격이나 관점의 차이로 서로 답답하기도 했고, 사랑하는 방식이 서로 달라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한때 중년 권태기로 무미건조한 시간을 보낸 기억도 있다. 하지만 그때 마다 우리는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엎드려 사랑을 구했고 그분은 풍성한 사랑을 늘 공급해 주셨다. 중요한 것은 내 안에 사랑이 없을 때 곧바로 영원한 사랑의 공급자 되시는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사랑의 능력을 공급받는다.

사랑에 대한 잘못된 오해는 사랑의 관계를 해친다. 그러므로 사랑 가운데 있거나 사랑을 시작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사랑에 대한 정의가 올바른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 건강한 것인지 건강하지 않은 것인지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아름답고 성숙한 사랑의 관계를 위하여!

[이인엽] (1) 가나안 정복과 이집트 심판에 대한 오해

    안녕하세요. 저는 조지아주에서 아내와 함께 살면서, 국제정치학을 공부하고 있는 이인엽이라고 합니다. 2009년 코스타에 처음으로 참석했었는데, TM 코스타에서 강의를 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했었습니다. 그때 국가주의와 그리스도인: 평화를 위한 우리의 역할이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했었고, 강의안을 정리해서 올리기로 eKOSTA에 약속드렸었는데, 분량이 너무 길어져서 마무리를 못하던 중, 이번에 블로거로 초대해 주셔서, 앞으로 정기적으로 글을 올려보려고 합니다. 지난번 강의안으로 부터 시작해서, 성경을 읽으며 전공인 국제정치를 공부하면서 고민 했던 것을 정리해 올리는 글이 될것 같네요. 제가 신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전공분야에서도 아직 기초를 다지는 중이라, 이렇게 글을 올려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신앙과 세상을 함께 고민하는 하나의 시도로 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소 딱딱하거나, 정치적인 견해차이가 있을 수도 있는 점 또한, 다양성 차원에서 이해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들어가며>  


 


    이런 류의 강의를 할때 제가 주로 시작하는 도입 질문중의 하나가, ‘이라크 전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며, 당신이 당시 대한민국의 정책 결정권자라면 (파병 여부에 대해)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입니다. 이 질문에는 국가의 이익과, 윤리라는 두 가지 변수가 중요할 텐데, 국가 이익이 있다고 가정할 경우, 크게 세가지 정도의 답변을 들을 수 있습니다. 1. 파병을 통한 국익도 있고 이라크 전쟁이 윤리적으로도 정당하기에 찬성한다. 2.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국익을 생각해서 찬성한다 3. 국익이 있더라도 윤리적으로 옳지 않기에 반대한다.


     이 질문을 할 때마다 놀라는 것은 비기독인은 물론이고, 상당히 많은 기독인들이 두번째, 즉 현실주의적 선택을 내린다는 것입니다.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더라도, 결국 국익이 최종 선택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보수나, 진보보다도 강력한 담론은, 현실주의 혹은 국익 우선주의가 아닌가 생각 해 봅니다. 실제로 노무현 정부하에서의 이라크 전쟁 파병 결정, 한미 FTA 체결과, ‘경제 살리기를 내세웠던 이명박 정부의 집권과 정책들 뒤에는, 공통적으로 이러한 국가이익(경제와 안보에 있어서의 물질적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현실주의적 논리가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쉽게 말해서, ‘올바로, 정의롭게, 평화롭게 살아보세보다는 잘먹고 잘 살아보세가 아직도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또한 이는 국내적으로는 애국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 그리고 국제적으로는 자국 중심주의, 일방주의, 패권주의와도도 연결된다고 봅니다. 크게 보자면, 미국의 일방주의 외교정책, 남북한과 중국, 일본 등에서 나타나는 민족주의적 경향, 그리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책 등도 이러한 논리로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접하는 많은 사회문제의 기저에는, 그리스도인이 국가를 어떻게 볼 것인가, 국가이익이라는 강력한 이슈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자리잡고 있는데, 특히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안에이러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고민이나 논의가 별로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로 신앙을 개인의 차원으로 국한하는 이원론적 관점이나,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국가에 대한 충성이 언제나 일치한 다는 관점, 혹은 하나님 잘 믿으면 우리 나라가 잘 된다는 축복론적 입장 등이 암묵적으로 우리의 사고를 지배해 온것이 아닌가 싶은데, 과연 이런 관점이 성경적인가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 살면서 미국 그리스도인들의 사고와 정치적 역할의 문제점들을 살펴봤을 때도, 역시 이 문제가 가장 근본적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앞으로 몇 회에 걸쳐, 이에 대한 논의와 고민들을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주제는 대략 아래와 같고, 인용한 성경은 표준새번역을 썼습니다.


 


(1) 가나안 정복과 이집트 심판에 대한 오해


(2) 혈연 공동체 vs. 언약 공동체


(3) 율법의 정신을 대표하는 희년 제도


(4) 하나님이 제시하신 구약의 윤리와 선지자들의 비판 전통


(5) 신학의 문제: 이원론과 콘스탄틴 주의


(6) 국가의 기원과 그 속성. 권력의 악마성과 그 대안. 


(7) 정치적 권위에 대한 두 가지 왜곡된 생각 


(8) 국제관계에서의 정의: 제국의 정신과의 충돌


(9) 예수님의 삶, 십자가의 영적 의미와 정치적 의미


(10) 성령의 역사와 해방적 함의


(11) 뒤틀려진 기독교


(12)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요한계시록


 


(1) 가나안 정복과 이집트 심판에 대한 오해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는 구분되는 개념이지만 많은 경우 연결되어 나타납니다. 국가주의가 정치 조직과 구조에 기초한다면, 민족주의는 인종과 문화에 기반한다고 하겠죠. 한국처럼 비교적 인종적으로 단일한 국가라면(이 부분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고 최근에는 외국인 노동자 유입을 비롯해 많은 변화가 있습니다만), 두 개념이 중첩되고 서로 강화하는 형태를 띌 것이고, 미국처럼 다인종 사회 같은 경우, 인종보다는 문화와 정치조직이 더 중요시 될 것입니다. 하지만, 두가지의 공통점은, 자기 집단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자기애와 자기 중심성의 확장이라고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것이 왜 나쁘냐고 물을 수 있겠으나, 문제는 그것이 애국 애족을 넘어, 우리를 ‘선’으로 타자를 ‘악’으로 규정하는 차별과 폭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언제나 존재하고, 또한 내부적으로는, 전체의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약자의 희생을 정당화하고, 내부의 비판세력을 억압하며, 집단의 비민주성을 합리화 하는데 악용될 소지가 언제나 있다는 점입니다.


     먼저, 이러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라는 부분을 성경의 관점에서 한번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구약의 역사 중, 출애굽기와 여호수아서에서 나타난 이집트 심판과 가나안 정복은 많은 경우 이스라엘에 대한 민족주의적, 인종주의적 관점으로 읽혀져 왔습니다. 실제로 유럽의 기독교인들과, 흑인노예제 및 흑백차별제도하의 미국 남부 기독인들은, 노아의 세 아들 중 함이 저주받은 일화를 이용해 인종차별을 합리화 하기도 했고, 미국 역사 초기에 일어난 엄청난 숫자의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들의 학살에 대해서도, 당시 미국의 기독인들은 가나안 정복이야기를 통해 합리화 했습니다. 최근에도 미국의 보수적인 목사들 중에는, 이라크 전쟁이나 대 테러 전쟁을 ‘이스마엘의 후손 대 이삭의 후손’의 전쟁이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것이 과연 위의 인종주의적 오류들과 얼마나 다른가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 민족, 혹은 국가의 수호신으로 왜곡하고, 이를 넘어서 폭력이나 학살을 합리화하는 데까지 성경의 가르침이 악용 될 수 있다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한편, 사랑의 하나님이 이집트의 모든 장자를 일순간에 쳐서 죽인이야기나, 어린아이와 가축까지 모조리 없애라고 하신 가나안 정복의 이야기는 현대를 사는 기독인의 관점에서 이해하기 상당히 힘든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이유로 많은 기독인들은, 구약은 신약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자라고 하거나, 이를 영적인 싸움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하거나, 아니면 위에서 언급했던 역사적 오류들처럼, 이를 민족주의나 패권주의 적으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저도 이 부분에 대해 고민을 하면서 성경과 신앙서적들을 살펴보았는데, 나름대로 아래와 같이 정리를 해 보았습니다.


     먼저 위에서 열거한 민족주의적 성경해석의 오류를 풀어주는 성경구절들을 몇가지 소개해 보겠습니다.


 


[ 15: 13-16]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똑똑히 알고 있거라. 너의 자손이 다른 나라에서 나그네살이를 하다가, 마침내 종이 되어서, 사백 년 동안 괴로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의 자손을 종살이하게 한 그 나라를, 내가 반드시 벌할 것이며, 그 다음에, 너의 자손이 재물을 많이 가지고 나올 것이다. 그러나 너는 오래오래 살다가, 고이 잠들어 묻힐 것이다. 너의 자손은, 사 대째가 되어서야 이 땅으로 돌아올 것이다. 아모리 사람들의 죄가 아직 벌을 받을 만큼 이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 18:24-29] 위에서 말한 것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저지르면, 이것은 너희가 스스로를 더럽히는 일이니, 그런 일이 없도록 하여라.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낼 민족들이, 바로 그런 짓들을 하다가 스스로 자신을 더럽혔다. 따라서 그들이 사는 땅까지 더럽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 악한 땅을 벌하였고, 그 땅은 그 거주자들을 토해 내게 되었다너희는 모두 내가 세운 규례와 내가 명한 법도를 잘 지켜서, 온갖 역겨운 짓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범하지 않도록 하여라. 본토 사람이나 너희와 함께 사는 외국 사람이나 다 마찬가지이다. 너희보다 앞서 그 땅에서 살던 사람들은, 이 역겨운 모든 짓을 하여, 그 땅을 더럽히고 말았다. 너희가 그 땅을 더럽히면, 마치, 너희보다 앞서 그 땅에 살던 민족을 그 땅이 토해 냈듯이, 너희를 토해 낼 것이다. 누구든지 위에서 말한 역겨운 짓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범하면, 백성은 그런 짓을 한 그 사람과는 관계를 끊어야 한다.


 


    먼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창세기 말씀은, 하나님이 가나안 주민들에 대해 이스라엘의 수호자가 아니라, 공정한 열방의 심판자로서 접근하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 하나님이 아브라함 때에 그 땅을 줄 수도 있었지만, 사대를 걸쳐 기다려야 했는데, 그것은, 가나안 원주민들의 죄가 그 땅에서 쫓겨나거나 멸망 당할 만큼 차고 넘치지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여호수아 정복 시기에는 그들의 죄가 관영했음을 알 수 있는데 심지어 수간이나 인신제사 같은 극악한 죄악이 만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8:1-23) 결국, 하나님의 심판은, 단순히 그들이 민족적으로 이방민족이거나, 하나님을 안믿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의 기준에서 그들의 악이 멸망과 땅에서 토함을 받을 정도에 이르렀기에 심판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군시기나 제국주의 시기에 주장된 것처럼, 단순히 원주민들이 이교도들이기 때문에 죽여도 된다는 논리는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이지요. 만약 그런 논리가 맞다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외에 모든 민족을 멸망시켜야 하셨어야 할텐데, 성경은 오히려 이스라엘을 통해 만민이 구원을 경험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선민사상에 어두워 그 소명을 감당하지 못한것 뿐이지요. 그러므로 가나안 주민들은 단지 이스라엘에게 땅을 내주기 위해 없어져야 했던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죄 때문에 멸망당한 것이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서 그 심판을 수행했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 하나님께서는 너희도 같은 죄를 범하면 멸망당한 가나안 원주민들과 동일하게 땅에서 토함을 당할 것이라고 이스라엘에게 경고하고 계시는 점입니다. 이 경고는,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이루어져서, 가나안 못지않은 죄를 범한 이스라엘은 처절한 심판과 포로됨을 경험하게 됩니다. 결국 그 땅은 이스라엘에게 무조건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거주민이 하나님의 뜻과 언약에 따라 ‘살아갈 때’, 거주할 권리를 갖게 되는, ‘언약의 땅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민족적, 인종적으로 이스라엘만을 편애하시고, 가나안 족속을 무고하게 멸망시키시고, 이집트백성들을 죄 없이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거주하던 시기, 그는 가나안족속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었고(창23장), 야곱과 요셉 시기에도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우호적인 관계를 가졌습니다(창47:1-12). 그들이 인종적으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고 볼 근거가 없다는 것이지요.
    
모세의 인도 하에 출애굽 할 때 일어난 이집트에 대한 심판을 살펴보면, 이집트에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면서 그들이 당시 약자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며, 강제노동과 영아살해와 같은 극악한 범죄를 저질렀고, 그들을 보내라는 하나님께 명령에 불순종했다는 점을 주목해 봐야 합니다. 전 이집트의 장자들이 하루아침에 죽임을 당하기 이전에, 이미 이스라엘의 남아들은 태어나는 족족 죽임을 당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은 ‘압박자와 피압박자’, ‘가해자와 피해자’, ‘강자와 약자’사이에서 일어난 것이지, 인종적 차이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고로 이사야서 19장의 이집트에 대한 심판의 경고는 다음과 같은 회복과 구원의 예언으로 끝납니다.


 


[이사야 19:21-25] 주께서는 이렇게 자신을 이집트 사람에게 알리실 것이며, 그 날로 이집트 사람은 주님을 올바로 알고, 희생제물과 번제를 드려서, 주께 예배하고, 또 주께 서원하고 그대로 실천할 것이다. 주께서 이집트를 치시겠으나, 치시고 나서는 곧바로 어루만져, 낫게 하실 것이므로, 그들이 주께로 돌아오고, 주께서는 그들의 간구를 들으시고, 그들을 고쳐 주실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이집트에서 앗시리아로 통하는 큰길이 생겨, 앗시리아 사람은 이집트로 가고 이집트 사람은 앗시리아로 갈 것이며, 이집트 사람이 앗시리아 사람과 함께 주님을 경배할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이스라엘과 이집트와 앗시리아, 이 세 나라가 이 세상 모든 나라에 복을 주게 될 것이다. 만군의 주께서 이 세 나라에 복을 주며 이르시기를나의 백성 이집트야, 나의 손으로 지은 앗시리아야, 나의 소유 이스라엘아, 복을 받아라하실 것이다.


 


     결국,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의 역사는, 열방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정의의 차원으로 해석되어야 하지, 민족적, 인종적인 차원에서의 폭력과 학살을 합리화할 근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스라엘이 심판 받은 역사에서 나타나듯이 하나님은 말씀을 모르고 범죄하는 이방인과 싸우시지만, 말씀을 알고도 지키지 않는 이스라엘과도 처절하게 싸우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많은 신학자들이 말했듯이, 하나님의 칼은 양날의 칼이요, 하나님의 전쟁은 이방과 이스라엘 모두를 향한 정의의 전쟁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 타락하고 나서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에 점령당하고 포로되는 장면을 보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그리도 잔인하실 수 있는가를 묻지만, 그 전까지 이스라엘 사회에서 나타난 총체적 타락상 성적타락과 부정직이 만연하고, 희년을 지키지 않고, 가난한 자를 압제하고 노예로 부리고 팔아버리며, 뇌물을 받고 불공정한 재판을 하고, 하나님이 아닌 군사력과 강대국을 의지하고, 이방종교와 우상을 섬기는 을 살펴보면, 심판받을 당시의 이집트나 가나안 원주민이 보여준 타락과 포악의 정도에 뒤지지 않음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심판이 공정할 뿐더러, 오히려 그때까지 참고 기다리신 하나님의 오래참으심이 놀랍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결코 한 민족의 수호신이 될 수 없으며, 기독교의 사상은 왜곡된 민족주의, 인종주의, 파시즘, 제국주의, 패권주의, 일방주의와 근본적으로 충돌합니다. 과거 많은 정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표와 이익을 위해 불의한 인종차별과 학살, 전쟁등을 합리화 하고자 했고, 이에 발맞춰 일부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는 악을 저질러 왔습니다. 자신들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관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장하고, 성경을 그에 맞춰 왜곡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과 그분의 정의를 더럽히는 심각한 죄일 뿐더러, 정의와 공평을 기대했던 많은 이들을 교회와 복음으로 부터 멀어지게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 다음 글에는 구약의 이스라엘을 보는 두가지 관점 (혈연적 공동체 vs. 언약적 공동체)을 소개하고 비교해 볼 예정입니다.  

[이유정] 인스턴트에서 깊이로

인스턴트에서 깊이로
 

현대인은 편리함이 편안함보다 우선하는 문화에 젖어 산다. 그 중의 하나가 인스턴트 문화이다. 리처드 포스터는 현대 사회의 가장 큰 세 가지 적을 소음, 성급함 그리고 번잡함으로 보았다. 정신의학자 칼 융 (Carl Gustav Jung)은 바쁜 것은 사단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사단 바로 그 자체라고 강조했다. 이처럼 현대인의 내면세계를 공격하는 바쁜 도시생활은 생각보다 훨씬 악질이다.

이런 초고속 사회에 적응해야 하는 도시인에게는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보다 빠르고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인스턴트 음식이 그만이다. 그뿐인가? 사람들은 편지보다 이메일을 선호한다. 미국은 해마다 줄어드는 우편물 때문에 수백 년 역사의 우체국이 위기를 맞고 있다. 사람들과의 의사소통도 사이월드나 페이스북, 트위터 같은 온라인을 통한 인스턴트 대화로 변하고 있다.

요즘 한국의 1318세대[footnote]대흥기획이 만들어 낸 용어로써 13~18세에 해당하는 세대를 지칭한다. 대홍기획에서는 1318세대를 WANT(Wide Active New Teenager)세대로 명명했다. 1993년 이후 출생자로 현재 13∼18세의 중·고등학생이 여기에 해당한다. WANT세대란 명칭은 이들 1318세대가 다수 대 다수의 커뮤니케이션을 주도하고(Wide),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거침없이 넘나들며 자유롭게, 열정적으로 행동하며(Active), 새로움과 다양함을 열망하는 새로운 십대(New Teenager)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일각에서는 한 광고기획사에서 1318세대, 1924세대 같은 조어를 만드는 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모습도 보인다. 경향.com 기사 ‘문자에 살고 메신저에 죽는다.(2006. 5. 23자) 참조.[/footnote]는 ‘문자’에 살고 ‘메신저’에 죽는다. 한 통계[footnote]대홍기획이 2005년 10월부터 2006년 3월까지 6개월간 서울에 거주하는 13~29세의 남녀 600명을 대상으로 개별 면접 조사한 결과이다.[/footnote]에 의하면 이들은 단 1초의 기다림도 지겨워하고 즉각적인 반응을 기대한다. 조사 결과 청소년의 평균 텍스팅(texting) 시간이 하루 네다섯 시간이 넘는다. 인터뷰한 중학생은 “하루 종일 문자 안 보내고 수다 안 떨고 메시지 안 보내는 시간은 2시간도 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단다.

오늘의 대중문화는 깊이보다 인스턴트에 열광한다. 데이비드 웰스의 언급처럼 현대의 신기술이 기존의 기술을 점차 빠른 속도로 대체하면서 제품 수명의 주기가 급속히 짧아졌을 뿐 아니라 삶 속에서 영원함의 자취도 대부분 사라졌다.[footnote]데이비드 웰스, 윤리실종 (부흥과개혁사, 2007) p. 47.[/footnote] 이제 빨리빨리 문화를 한국병으로만 치부하기[footnote]민경배 교수는 “빨리빨리 문화는 한국인의 공통된 특성이지만 기성세대가 성과에 집착한 ‘빨리빨리’라면 10대들의 성향은 반응을 빨리한다는 의미에 가깝다고 했다. 경향.com 기사 참조[/footnote]에는 세상이 너무 많이 바뀌었다.

이러한 시대정신은 사물의 일부가 아닌 전체를 파악하고 존재를 지엽적이 아닌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의 기본 능력을 무너뜨렸다. 리처드 포스터는 이를 피상성의 수치라고 통렬하게 지적했다. 즉각적인 만족을 누리고자 하는 사상은 근본적인 영적 문제이다. 그래서 오늘날 절실히 요청되는 사람은 지능이 높거나 혹은 재능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깊이가 있는 사람이다.”[footnote]피처드 포스터, 영적훈련과 성장 (생명의 말씀사, 1986) p. 13.[/footnote]

세상은 감각을 터치해줄 사람을 찾지만 오늘 우리는 깊이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 요즘 기독교 출판도 깊이 보다는 감성터치 작가가 인기이다. 목회자의 설교도 깊은 복음의 진수보다는 감성을 터치해야 인기가 있다. 신앙도 인스턴트 신앙을 추구한다. 영적 성숙도 3개월 숙성반처럼 단기에 드러나는 실적이 나와야 한다. 교회도 초고속 성장이라야 세간의 주목을 받는다. 기독교가 거꾸로 가고 있다.

거꾸로 가도 근성이 필요하다. 한번은 연어 떼의 일생을 다큐멘터리 채널에서 본 일이 있다. 수천, 수만 킬로미터의 바다 여행 끝에 세차게 흘러내리는 민물계곡을 거슬러 올라가 알을 낳고 죽는 거대한 연어 떼의 본능을 보면서 비록 동물이지만 그 근성 만큼은 인간보다 위대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 연어들처럼 오늘 우리 시대는 거친 세파를 거슬러 올라가는 근성과 다음 세대를 위해 수만 킬로를 준비하는 깊이를 지닌 사람이 필요하다.

영적성숙의 동의어는 깊은 영성이다. 성숙은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인생 전체의 여정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인스턴트 성숙이란 있을 수 없다. 오늘의 예배 문화도 인스턴트에 절어 있다. 단 한 번의 예배로 최고의 예배자가 탄생해야 할 것처럼 몰아간다. 물론 한 번의 예배가 중요하다. 사울은 한 번의 예배 실패로 하나님의 축복의 대열에서 낙오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한 번의 예배로 신앙의 전체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존 번연의 《천로역정》은 장차 망하게 될 죄악의 도성을 떠나 천성을 향하여 떠나는 한 순례자의 여로를 장엄한 서사시처럼 그려낸다. 한 사람의 크리스천이 그의 인생 마지막까지 가는 길목마다 고뇌, 회심, 전도, 박해 등 다양한 국면을 경험한다. 이것이 신앙의 여정이다. 예배는 이러한 인생여정의 가장 중요한 동반자일 뿐이다.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으로 삶의 깊이와 여백을 누리며, 예배를 축으로 인생 전체를 관망할 줄 아는 깊이 있는 기독교인, 깊이 있는 목회자, 깊이 있는 예배인도자가 필요한 시대이다.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 (잠 20:27)

이유정 목사 / 한빛지구촌교회 예배디렉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오직 주 만이’ 작곡자